허재 은퇴 공식선언
“몇점을 넣었는지는 이제 관심이 없습니다.당신이 뛰는 모습만 봐도 절로 힘이 솟습니다.‘이태백’ ‘삼팔선’ ‘오륙도’가 넘쳐나는 힘든 세상,당신은 희망이었습니다.”
‘농구 대통령’ 허재(39·TG삼보)가 권좌에서 명예롭게 내려왔다.서울 상명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잡은 이후 30년 가까이 투혼을 불사른 허재는 8일 서울 논현동 KBL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팬들의 사랑을 가득 품은 채 코트를 떠난다.”고 밝혔다.
허재는 이날 은퇴를 선언했지만 TG가 정규리그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함에 따라 챔피언결정전 2연속 제패를 위해 이번 플레이오프까지는 뛸 계획이다.이후 5월쯤 2년간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난다.TG는 그의 등번호 ‘9’를 영구결번으로 공시할 예정이다.
●챔프전 끝으로 5월 美지도자 연수
한국농구의 ‘고봉’인 김영일-신동파-이충희의 뒤를 이은 허재는 70년대에는 ‘농구신동’으로,80년대에는 학원스포츠의 우상으로,90년대에는 농구대잔치 간판스타로,2000년대 들어서는 30∼40대의 희망으로 늘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물론 한국농구가 낳은 ‘지존’이라는 데 토를 달 이는 별로 없다.
허재는 97년 KBL이 출범하자 33세의 늦깎이로 프로에 뛰어들었지만 열살 아래의 후배들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원년시즌 소속팀 기아를 정규리그 및 챔피언결정전 통합챔피언에 올려놓았고,97∼98시즌에는 기아가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에 그쳤지만 ‘붕대 투혼’으로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02∼03시즌에는 TG 플레잉코치로 변신,후배들을 다독이며 다시 한 번 챔피언트로피를 품었으며,값진 모범선수상을 받기도 했다.
허재의 전성기는 역시 아마추어 시절이었다.78년 용산중학교에 입학해 그해 4개 전국대회를 휩쓴 것을 시작으로 중앙대 졸업 때까지 그는 ‘우승 인증서’로 통했다.86년 가을철대학연맹전 단국대전에서는 혼자 75점을 넣는 진기록을 세웠다.88년 기아에 입단한 뒤에는 8차례의 농구대잔치 가운데 7차례 우승을 이끌며,세 차례나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이기겠다고 마음먹은 경기에서는 진 적이 없다는 ‘불패신화’의 주인공이었다.
●대학연맹전서 75득점 진기록·MVP 3회
용산고 3학년 시절,대학들은 ‘농구 천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됐다.허재가 어느 인터뷰에서 “중앙대도 가고 싶고,고려대도 가고 싶다.”고 하자 양교는 사활을 건 총력전을 펼쳤다.당시 중앙대 감독이던 정봉섭 현 중앙대 체육부장은 낚시에 전혀 취미가 없었음에도 낚시광인 허재의 아버지 허준씨를 밤낮없이 쫓아다녀 결국 데려왔다.
30년 농구인생 가운데 가장 뼈아픈 기억은 97아시아선수권(ABC).당시 허재는 음주운전으로 입건돼 대표팀에서 제외됐다.공교롭게도 최강 중국은 최약체 팀을 파견했고,한국은 우승했다.허재로서는 15년 대표선수 생활에서 유일하게 우승이란 두 글자를 새길 기회를 날려버렸다.허재는 “내 주량이 얼마인지 나도 모른다.”는 애주가이자 시합전에도 담배를 태우는 자유분방한 선수였다.그러나 이 모든 것도,서른이 넘어서도 밤 새워 슛을 던지고 승리를 위해 쥐가 난 다리를 스스로 옷핀으로 찌르면서까지 출전을 강행하는 승부사의 진면목을 덮지는 못한다.팬들은 이제 ‘천재 지도자’ 허재를 기다리고 있다.
이창구기자 window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