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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부터 모자·마스크 쓰면 ATM 등서 큰돈 못 찾는다

    이르면 10월부터 모자나 선글라스, 마스크 착용으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면 현금자동입출금기(CD·ATM)에서 큰돈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송금·이체 시 30분을 기다려야 찾을 수 있는 ‘지연 인출’ 기준은 300만원 이상에서 다음달부터 100만원 이상으로 낮아진다. 금융 사기에 한 번이라도 이용된 전화번호는 다시 쓸 수 없게 된다. 금융감독원은 17일 금융 사기를 예방하기 위해 예고한 대로 이런 대책을 단계적으로 시행한다고 밝혔다. ATM 등에서 일정 금액 이상을 찾으려면 자동화 기기가 반드시 인출자의 얼굴을 자동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마스크나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리면 거래가 진행되지 않는다. 이르면 10월, 늦어도 11월 중에는 시행할 계획이다. 금액 기준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감독 당국은 내부적으로 ‘100만원’을 검토하고 있다. 성형수술 환자나 안면기형 환자 등이 선의의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완 대책도 강구할 방침이다. ‘30분 지연 인출제’ 적용 기준은 다음달부터 100만원 이상으로 대폭 낮아진다. 이렇게 해도 보이스피싱 등 사기 피해 방지 효과가 미흡하면 지연 시간을 30분에서 1시간으로 더 늘리는 방안도 검토할 방침이다. 금융 사기범들이 대포통장 등 범행 도구를 쉽게 확보할 수 없도록 금융 사기에 한 번이라도 사용된 전화번호는 즉각 중지시키기로 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소액 계좌에 대한 거래 중지나 해지 절차도 간소화한다. 통신 서비스를 활용한 조기경보 체계도 마련한다. 새로운 금융 사기가 등장하거나 많은 피해가 예상되면 이동통신 가입자들에게 경고 메시지가 나간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티모넷, 모바일 교통 결제 솔루션 유럽 공략 박차

    티모넷, 모바일 교통 결제 솔루션 유럽 공략 박차

    모바일 교통카드 결제(Mobile Payment)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모바일 결제 솔루션 전문기업 ㈜티모넷(대표이사 박진우, www.t-monet.co.kr)은 ‘국제 개방형 교통시스템 표준협회(OSPT(the Open Standard Public Transportation Alliance))’에 가입했다고 17일 밝혔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 개방형 교통시스템 표준협회’는 전세계 주요 교통시스템의 개방형 표준 규격을 정의하고 안전한 대중교통 요금 징수 솔루션 표준을 제공하는 국제 공인협회로 응용 프로그램과 서비스의 개발 및 채택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으로는 현재 삼성전자가 가입돼 있다. 티모넷은 이 협회 가입을 계기로 현재 국내에서 제공하고 있는 모바일 교통카드 충전·결제 솔루션, 인앱 결제 솔루션, NFC(근거리 무선통신) 충전·결제 서비스에 대한 해외시장 공략에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이미 국내시장에서 다년간의 서비스를 통해 기술의 우수성과 안정성을 검증 받은 티모넷이 협회 가입을 통해 국제 표준규격으로 인정받으면 현재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모바일 교통 결제 시장 진출에 한층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업계에서는 전망하고 있다. 티모넷은 이미 지난 2011년에 뉴질랜드 웰링턴과 오클랜드의 모바일 교통카드 시스템을 (주)한국스마트카드와 함께 구축한 바 있다. 현재 몽골, 말레이시아, 콜롬비아 등도 한국의 교통카드 결제 솔루션을 이용하고 있다. 티모넷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모바일 결제 솔루션인 모바일 티머니는 현재 교통 결제수단을 넘어 현금입출금기(ATM)를 활용한 이체 출금 서비스와 티머니 가맹점에서의 결제 서비스, 더 나아가 NFC를 이용한 현관의 도어락 키로 사용되는 등 여러 서비스 분야로 활용 영역을 넓히고 있으며, 티모넷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핀테크 시장의 핵심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티모넷 박진우 대표는 “이번 국제 개방형 교통시스템 표준협회 가입을 기회로 모바일 교통 결제 서비스의 표준으로 자리잡아 세계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FIFA 의료책임자, 무리뉴에 경고 “팀 닥터 내칠 권한 없다”

    FIFA 의료책임자, 무리뉴에 경고 “팀 닥터 내칠 권한 없다”

    조세 무리뉴 첼시 감독과 팀 닥터 에바 카네이로 사이의 갈등에 FIFA가 나섰다. 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지난 9일(한국시각) 2015-2016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완지 시티와 개막전에서 발생했다. 경기를 앞서가던 첼시는 티보 쿠르투아 골키퍼의 퇴장으로 한 명이 부족한 상태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경기 막바지에 다다르자 에당 아자르가 체력 부족으로 쓰러졌고 아바 카네이로 주치의는 이를 보고 곧바로 경기장으로 들어가 아자르를 치료했다. 그러나 치료를 위해 경기장 밖으로 아자르와 나오게 되면(경기 도중 선수의 치료를 위해선 의료진과 함께 경기장 밖으로 나와야 하고 의료진과 대기심의 OK 사인이 있어야만 다시 경기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 필드 플레이어 8명 만이 스완지 선수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역습 허용으로도 팀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게 된다. 단순한 체력 저하인데도 의료진이 이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무리뉴 감독은 경기 후 기자 회견에서 의료진을 비판했다. 무리뉴 감독의 비판 주요 내용은 아무리 의료진이라도 경기 흐름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FIFA는 이 상황을 두고 감독은 의료진이 선수를 치료하기 위해 경기장을 들어갈지 말지 제지할 권한은 없다고 말했다. FIFA 의료 총괄 책임자인 지리 드보르자크 교수는 스카이 스포츠와 인터뷰에서 “선수를 치료하는 의료적인 측면에서 감독은 가타부타 말할 권한이 없다. 이는 우리의 프로 영역이자 의사로서 윤리적인 의무에 따라 선수를 돌봐야 한다” 며 “이런 상황은 말이 안 된다. 우리는 의사의 지위를 대변해야 하며 모두 의사가 가진 책무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드보르자크 교수는 의사가 어떤 상황인지 경기를 관찰할 수 있게 벤치에 꼭 있어야 하며 선수가 위험한 상황(심장 발작, 뇌진탕 등)에 빠지면 주심의 허락 없이도 경기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정확히 설명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FIFA의 모든 구성원은 언제나 이와 같은 의료진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말하며 에바 카네이로가 처한 상황을 FIFA 의료진의 대표로서 응원했다. 이 밖에도 동료 의료진들의 지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의료진 조합이 이번 주 공식 성명을 냈고 의료진을 벤치에서 내쫓는 결정은 ‘매우 부당한 처사’라고 말하며 무리뉴 감독을 강하게 비판했다. 과연 무리뉴 감독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해외여행 | Samoa 사모아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유죄

    해외여행 | Samoa 사모아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유죄

    땅 위의 모든 것이 아름다운 남태평양의 섬나라 사모아. 이곳은 ‘낙원’의 기원이다. 세계 각지의 많은 곳을 ‘낙원’ 이라고 부를 때, 어쩌면 그 안에는 ‘사모아와 비슷하다’는 함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모아에 다녀왔다. ‘그곳이 얼마나 좋으냐면’이라고 글을 쓰는 일은 기분 좋은 꿈에서 깨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달고도 아름답다. 사모아는 미지의 세계다. 잘 모른다. 낯설다. 수많은 여행지를 다니면서 여기만큼 이국적인 정취를 느낀 곳도 없었다. 이국적이고 낯설지만 오롯이 동화되고 싶은 마음은 열렬했다. ‘대체 이 알 수 없는 오묘한 매력은 뭐지?’ 싶었다. ‘남태평양 어디쯤에 사모아라는 나라가 있다더라’는 정보만 알고 있던 나는 사모아를 그리워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관계로 치자면, 밀당의 고수에게 낚여 넋이 나간 꼴이다. 사모아의 사바이섬과 우폴루섬을 돌아본 일주일은 다른 차원의 시간 혹은 비현실 같았다. 일정을 마친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와 동행한 가장 친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마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아.” SAMOA 무엇이 매력이냐 물으신다면 감동적이고 경이로운 자연경관과 이를 배경으로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관광지에 대한 설명은 일단 뒤로 미루자.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모아의 매력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곳곳에서 발견된다. 수도 아피아를 제외한 우폴루Upolu섬의 곳곳과 사바이Savaii섬 전체를 둘러보는 것은 목가적인 풍경을 정성껏 스케치하고 예쁘게 채색한, 내용까지 감동적인 그림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사모아는 전 국민의 취미가 정원 가꾸기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모든 집의 마당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너른 마당 위에선 개와 고양이, 닭이 아이들과 함께 뛰논다. 더불어 어미 돼지가 새끼 돼지 여덟 마리와 일렬로 행진하거나 소와 말이 풀을 뜯는 모습도 일상의 풍경이다. 땅 위의 모든 동물과 식물은 사람들로부터 존중받는 느낌이다. 엄마는 꽃을 심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나뭇잎을 쓸어 모은다. 집 앞에는 먼저 떠난 가족의 무덤을 둔다. 무덤 위에는 꽃을 놓거나 그 위에서 빨래를 말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란히 묻힌 무덤의 비석 위로 손자들이 올라타고 뛰어내리기를 반복하며 까르르 신이 났다. 사모아에서는 죽음이 이별이 아닌 것만 같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아름다운 집들이 모인 마을은 대부분 집성촌이다. 옆집은 고모네, 뒷집은 삼촌네, 안집은 할머니네 대략 이런 식이다. 마을 곳곳에는 사모아 전통가옥 양식인 팔레fale가 있다.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으면 완공되는 신기한 건물이다. 지붕이 있는 거대한 평상이라고 상상하면 얼추 비슷할 것 같다. 팔레 안에는 침대도 두고, 식탁도 둔다. 비 오는 날에는 이 집 저 집의 빨래를 한데 모아 널기도 한다. 오며 가며 뻥 뚫린 기둥 사이로 안부를 전하고 옹기종기 모여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식사 때가 되면 마을 곳곳에선 연기가 피어오른다. 연기가 나는 곳은 어김없이 시끌벅적하다. 사모아 전통 조리법인 ‘우무(땅을 파고 나무와 코코넛 껍질로 불을 지피고 그 위에 돌을 달군다. 달군 돌 위에 해산물, 고기, 타로, 빵 등의 식재료를 올리고 바나나 잎을 덮어 훈제하는 조리방법)’로 만들어낸 요리들의 맛있는 냄새와, 대가족인 모인 식사시간의 즐거운 소리들이 공기 중 가득하다. 일요일이면 가장 좋은 옷을 챙겨 입고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간다. 일요일에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다. 사모아 국민의 반은 기독교도, 20%는 가톨릭신자다. 신앙도 깊다. 국가의 주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로 시작할 정도다. 낯선 동양인과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은 어제 만난 친구를 오늘 다시 만난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건 자존감 높은 사람들 특유의 쿨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달뜨고 설레는 여정 동안 사모아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바쁜 도시 생활자인 내가 놓치고 사는 중요한 게 무엇일까. 이곳은 삶을 살아가는 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스스로 움켜쥔 많은 세속적 가치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게 되는 구도의 땅인지도 모른다. 이토록 아름다운 화산섬, SAVAII 사바이섬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우폴루섬 서쪽에 위치한 물리파누아Mulifanua 항구에서 뱃길로 한 시간을 달리면 사바이의 살레렐로가 항구Salelologa Wharf에 닿는다. 사모아 전체 인구의 25%가 살아가는 아름다운 화산섬인 사바이는 폴리네시안 섬들 중 타히티, 하와이에 이어 크기가 세 번째로 큰 섬으로 우폴루섬에 비해 조금 더 목가적이다. 섬 중앙에는 열대 우림이 빼곡한 산이 있고 산자락과 해안선이 맞닿는 지점에 사람들이 터전을 이루고 살아간다. 해안을 따라 난 왕복 2차선의 해안도로가 마을과 마을을 잇는 유일한 길이며 섬을 관통하는 길은 없다. 사모아관광청의 훈남 앨비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남태평양의 바람을 가르며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사바이섬에서 가장 매력적인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알로파아가 블로우홀Alofa’aga Blowholes이다. 사바이 남동쪽의 타가Taga 마을에 들어서자 파도 소리가 거세진다. 파도가 세게 몰아치는 이 마을의 해안 곳곳에는 바위 구멍이 있는데 이를 통해 바닷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분수공을 통해 솟아오르는 물기둥의 높이는 엄청나다. 웬만하면 10m 이상이고 아주 높을 때는 50m까지도 치솟는다. 믿거나 말거나 100m가 넘는 높이로 솟아오른 적도 있단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귀를 자극하는 소리다. 파도가 모여 구멍으로 솟아나기 전의 거대한 울림. ‘부욱부욱’ 하는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자연의 소리인데다가 물기둥이 얼마나 클지 귀띔하는 듯해 긴장과 설렘이 배가된다. 타가 마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을 위해 작은 이벤트를 선보인다. 바로 분수공 아래로 코코넛 던지기다. 어린 시절부터 쭉 봐 왔던 광경이라 마을의 어른들은 어느 구멍에서 가장 거센 분수가 솟구칠지 직감적으로 안다. 선택한 분수공에 코코넛을 던지면 어김없이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오르며 코코넛이 산산조각 나는 진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관광객은 이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마을 어른들은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얼굴을 하고 깔깔 웃으며 또 다른 코코넛을 가지러 달려간다. 알로파아가 블로우홀에서 약 2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아푸 아아우Afu Aau’ 폭포다. 발음이 어려운 사모아의 지역 이름 중 유일하게 단번에 외운 이름이기도 하다. 소 주변의 수심은 얕은 편이라 수영을 못해도 물놀이는 즐길 수 있지만 소 중심으로 갈수록 수심이 깊어져 자칫하면 ‘아푸 아아우’ 할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광이 마치 우리나라의 비둘기낭이나 삼부연 폭포를 연상케 한다. 열대 우림에 둘러싸인 바다 근처의 이 폭포는 사바이섬을 찾는 사람들의 피크닉 장소로 명성이 자자하다. 음식물 반입은 가능하지만 주류 반입은 불가능하다. 사바이섬은 화산섬이다. 1905년부터 1911년까지 섬 북서쪽의 마타바누Matavanu산에서 화산 활동이 있었고 융기했는데 이런 지질학적 특성을 온전히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라바필즈다. 제주 곶자왈의 열대우림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쉽겠다. 섬의 북서쪽, 살레아울라Saleaula 마을에 위치한 이곳은 1900년대 세워진 교회와 화산폭발 몇해 전 만들어진 무덤이 유명하다. 교회는 마그마로 덮여 폐허가 되었는데 그 자체로 경이로운 모습이다. 무덤은 성지로 여겨진다. 화산이 폭발한 후 용암이 무덤 주변을 피해 흘렀기 때문이라고. 신성한 기운 때문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산활동 이전의 식물군이 그대로 남아 있는 풍경은 신비롭다. 작열하는 남태평양의 땡볕을 현무암이 고스란히 받아 머금고 있는 만큼 라바필즈의 열기는 대단하다. 선크림과 모자는 꼭 챙겨 가는 게 좋겠다. 라바필즈에서의 뜨거움은 인근 사토아라파이Satoalepai 마을에서 시원하게 식힐 수 있다. 이곳에는 거북이와 함께 교감하며 수영을 즐길 수 있는 풀이 있다. 스무 마리의 거북이를 맛있는 망고로 유인한 후 물에 들어가 함께 물살을 가르는 진귀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꼭 들를 것. 참고로 가장 나이가 많은 거북이는 무려 75살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SAMOA 일상을 엿보다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바로 재래시장 둘러보기다. 우폴루섬 북쪽의 수도 아피아Apia에는 두 개의 재래시장이 있다. 먼저 사바랄로 플리마켓Savalalo Flea Market은 특산품과 수공예로 만든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파는 사모아의 쇼핑 메카다. 라바라바Lavalava라고 불리는 사모아 전통 살롱과 꽃핀, 액세서리, 나무줄기를 엮어 만든 가방이나 모자 등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사모아 스타일의 기념품을 구입해야 한다면 꼭 들러야 할 곳! 더불어 이곳은 메인 버스 정류장과 연결돼 있어 빈티지한 매력이 돋보이는 사모아 버스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열대 과일을 마음껏 먹어 보고 싶다면 거대한 팔레 안에 수십 개의 상점이 모여 있는 푸갈레이 마켓Fugalei Market으로 가면 된다. 바나나, 코코넛 등의 신선한 과일과 각종 야채, 꽃을 파는 청과 전문시장이지만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곳곳에 있다. 사모아 전통 음료 재료인 코코사모아는 100% 카카오 덩어리로 조리법은 간단하다. 따뜻한 물에 으깬 코코아 열매와 설탕을 듬뿍 넣고 호로록호로록 마신다. 기존의 가공품보다 훨씬 깊고 그윽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시장 인근의 사모아 컬처럴 빌리지Samoa Cultural Village도 추천한다. 사모아 전통공예와 문화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웰컴 드링크를 선사하는 아바 세리머니, 전통 조리법인 우무, 타투의 기원인 사모안 타타우, 시아포라고 불리는 타파 프린팅과 사모아 전통 목공예, 바나나 잎으로 머리 띠와 바구니 등을 엮는 위빙 체험 등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 사모안 시바Samoan Siva라고 불리는 전통 춤 공연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힘껏 손뼉을 치며 절도 있는 동작을 이어 나가는 춤인데, 빠르게 이어지는 안무 하나하나를 따라가느라 눈 돌릴 틈이 없다. 따라 하고 싶다면 홀로 있을 때 조용히 할 것! 자칫 개그 프로그램의 마빡이처럼 보일 수 있다. 낙원의 풍경, UPOLU 사모아의 본섬인 우폴루는 1953년 제작된 영화 <리턴 투 파라다이스Return to Paradise>의 배경이 된 곳이다. 더불어 <지킬 앤 하이드Jekyll and Hyde>와 <보물섬>을 집필한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선택한 곳이기도 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깊고 고요한 열대우림과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의 풍경을 번갈아 마주하다 보면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며 온전한 안식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우폴루섬 남쪽 해안의 로토팡아Lotofaga 마을의 토수아 트렌치 앞에 서면 그 마음은 극에 달한다. ‘물이 있는 구멍’이라는 뜻의 토수아 오션 트렌치는 바닷물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수영을 즐길 수 있는 거대한 해구다. 사모아 최고의 자연경관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발 디딘 지점에서 30m 아래로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깃든 거대하고 고요한 해구의 풍경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다. 있는 힘껏 사다리를 잡고 내려가 나무 데크에서 점프!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라는 혼잣말을 자주 하는데,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라 수심과 유속이 달라지지만, 수영에 능하지 않아도 걱정은 없다. 데크에 연결된 밧줄을 잡고 동동 떠서 아늑하게 일렁이는 물결을 만끽할 수 있으니. 사모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우폴루섬 중북부 바일리마Vailima 지역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뮤지엄이다. 병약하게 태어나 평생 동안 요양과 여행을 반복하며 안식처를 찾던 그가 아내와 정착해 살던 지역 이름과 동명의 집 ‘바일리마’를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했다. 스티븐슨은 이곳에 1888년 정착해 눈을 감은 1894년까지 5년밖에 살지 못했지만 사모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뮤지엄 안쪽으로 난 트레킹 코스를 따라 한 시간을 오르면 산 정상에 그의 무덤이 있다. ▶travel info SAMOA 사모아는 열대우림기후의 화산 군도로 연중 덥고 습한 편이다. 11월부터 4월까지는 우기, 여행은 건기인 5월부터 3월까지가 적합하다. 동쪽으로 미국령인 아메리칸사모아가 있다. 언어는 사모아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나라로 한국보다 5시간 빠르다. 화폐는 탈라tala. 1탈라는 한화로 약 450원이다. Airline 한국에서 사모아까지 가는 직항은 없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이웃 섬나라인 피지의 난디공항까지 대한항공 직항을 이용한 후 피지 에어웨이즈를 타고 사모아의 수도 아피아까지 가는 것이다. 난디에서 아피아까지는 1시간 40분 거리다. Food 전통 조리방법인 우무umu로 만든 구이 요리들과 오카okq가 유명하다. 오카는 참치회를 코코넛 크림, 라임즙, 향신료, 각종 야채와 버무린 후 약간의 숙성과정을 거친 요리로 신선한 생선 러드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맥주도 맛있는데 유명한 현지 맥주로는 라거인 바일리마vailima와 타울라taula가 있다. hotel 코코넛비치클럽Coconut Beach Club 하와이의 유명한 세프였던 미카Mika가 리조트가 있는 해변에 반해 이곳에 바를 연 것이 리조트의 시작이다. 자연친화적이지만 고급스러움을 놓치지 않은 아름다운 리조트다. 사모아에서 유일하게 수상 방갈로를 보유하고 있다. 세프가 문을 연 리조트다 보니 음식 맛있기로 꽤 유명하다. 최근 CNN은 코코넛비치클럽의 레스토랑을 가장 예약하기 어려운 인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www.cbcsamoa.com 스티븐슨@마나세 리조트Stevenson Manase Resort 고급 휴양지를 꿈꾸고 떠났다면 다소 불편할 스탠더드 등급이다. 객실 상태, 레스토랑의 퀄리티 등이 많이 아쉽다. 그럼에도 이곳을 추천하는 이유는 사바이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을 소유한 리조트이기 때문이다. 사모아의 ‘팔레’ 형태로 만들어진 방도 있어 숙박이 가능하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인근의 마을 투어와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www.stevensonsatmanase.com 에디터 손고은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문유선 취재협조 사모아관광청 한국사무소 www.samoatravel.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한줄영상] 드론에 찍힌 서퍼들 옆 거대 상어

    [한줄영상] 드론에 찍힌 서퍼들 옆 거대 상어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 피스모 비치(Pismo beach)에서 서퍼들 사이로 헤엄치는 3m짜리 상어의 모습이 드론에 찍혀 화제네요. 드론은 투명한 바다 위를 비행하며 시원하게 서핑을 즐기는 서퍼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잠시 후, 서퍼들 사이 물속에서 검은 형체의 거대한 상어 모습이 포착됩니다. 3m 크기의 거대 상어의 출현도 모른 채 서퍼들은 파도를 가르며 서핑을 즐깁니다. 과연 서퍼들은 안전할까요? 사진·영상= dustmeoff12 youtube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북한 목함지뢰, ‘폭약+기폭장치..열거나 밟으면 폭발’ 무시무시해

    북한 목함지뢰, ‘폭약+기폭장치..열거나 밟으면 폭발’ 무시무시해

    ‘북한 목함지뢰’ 지난 4일 경기도 파주 인근 비무장지대(DMZ)에서 폭발물이 터져 부사관 2명이 크게 다친 사고 원인은 북한이 살상 의도로 매설한 ‘목함지뢰‘ 때문으로 드러났다. 이는 정전협정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의 호전적인 도발 행위에 대한 안팎의 비판이 거세질 전망이다. 북한이 비무장지대(DMZ)에 매설한 목함지뢰는 소나무로 만든 상자에 폭약과 기폭장치를 넣어 만든 일종의 대인지뢰다. 북한군이 ‘목함 반보병지뢰’(PMD-57)로 부르는 목함지뢰는 옛 소련에서 2차 세계대전 때 개발한 간단한 나무상자 형태이다. 전체 무게는 420g으로 길이 22cm, 높이 4.5cm, 폭 9cm이다. 상자 안에는 TNT 220g의 폭약과 기폭장치인 MUV 퓨즈, 안전핀이 들어 있다. 살상반경은 최대 2m에 이른다. 1m 이내에서 터지면 사람의 폐가 손상되고 3.5m 이내이면 고막이 파열된다고 한다. 폭발지점으로부터 13~15m에 이르는 창문을 파손할 정도로 위력이 세다. 목함지뢰는 상단에 1~10㎏의 압력이 가해지면 덮개가 퓨즈를 누르고 안전핀이 빠지면서 공이 발사되어 터지도록 고안되어 있다. 사람이 상자 덮개를 열고자 압력을 가하거나 밟으면 터지게 되어 있다. 나무 상자로 만들어져 금속 지뢰탐지기에 잘 탐지되지 않는다. 나무 대신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것도 있다. 물에 잘 뜨기 때문에 임진강·한탄강 수계와 강화군 일대 등 섬지역에서 다수가 발견된 적이 있다. 민간인들이 호기심으로 만져 죽거나 다치는 사례도 있었다. 군은 지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260여발의 목함지뢰를 탐색 및 수거한 바 있다. 북한은 해·강안지역과 DMZ 인근 하천 주변 등에 목함지뢰를 대거 살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4일 터져 우리 군 부사관 2명을 다치게 한 목함지뢰는 목함에서 강한 송진 냄새가 아고 상자 안의 철재 잔해물이 녹슬거나 부식되지 않아 최근에 매설된 것이라고 군은 설명했다. 군은 지난 6~7일 현장 조사에서 터진 잔해물 5종 43개를 수거해 지난 2010년 DMZ를 관통하는 한 지천에서 발견한 목함지뢰 부품과 비교한 결과 동일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당시에 수거된 목함지뢰에서는 아직도 송진 냄새가 난다고 군 관계자는 전했다. 북한이 DMZ 지역에 매설한 대인지뢰는 목함지뢰와 수지재(PMN)지뢰, 강구(BBM-82)지뢰 등 세종류다. 대전차 지뢰는 ATM-72, ALM-82 등 다섯가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목함지뢰, 북한 목함지뢰, 북한 목함지뢰, 북한 목함지뢰, 북한 목함지뢰 사진 = 방송 캡처 (북한 목함지뢰)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캐러거 “리버풀의 개막전 승리 매우 중요해”

    캐러거 “리버풀의 개막전 승리 매우 중요해”

    리버풀의 레전드 제이미 캐러거가 리버풀의 개막전 승리는 매우 중요했다고 밝혔다. 지금으로부터 77일 전 리버풀은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스토크 시티를 상대로 6-1 대패를 기록했다. 그리고 리버풀은 10일(한국 시각) 영국 스토크 브리타니아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2016시즌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1라운드 스토크와의 경기에서 1-0으로 신승을 거뒀다. 리버풀의 에이스 필리페 쿠티뉴가 중거리 슛을 득점으로 연결하지 못했다면 브랜든 로저스 감독은 정말 힘겨운 시즌의 시작이 될 뻔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번 시즌 리버풀의 초반 원정 7경기의 상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앞으로 리버풀의 초반 원정 상대가 아스널, 맨유, 에버튼, 토트넘, 첼시 그리고 맨시티까지 모두 다 까다로운 상대들이기에 캐러거는 개막전 승리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피력했다. 캐러거는 스카이 스포츠에 출연해 “매우 중요한 결과였다. 앞으로 펼쳐질 리버풀의 일정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리버풀이 좋은 경기력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저런 원정 경기에서 많은 승점을 획득하기란 어렵다" 면서 "리버풀은 빅 라이벌과 경기를 펼치게 되며 그 가운데 더비 매치도 포함돼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경기에선 승점 1점만 따도 기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개막전에서 승점 3점 획득은 기뻐할 일이다. 리버풀이 오늘 졌다면 이는 아스널전에 더 많은 부담을 주게 된다" 면서 "만약 리버풀이 아스널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다면 2번의 원정에서 4점이나 획득하게 된다. 시즌 초반을 보내는 데 있어 환상적인 출발이 될 것”이라며 초반 원정 7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여름 리버풀은 TOP 4 재입성을 위한 팀 전력 강화에 많은 투자를 했다. 게다가 이번 개막전 승리로 좋은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이런 분위기를 이어간다면 1라운드에서 예상 밖의 참패를 경험한 아스널(원정 2번째 상대)을 상대하는데 큰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아스널, 벤제마 영입에 ‘그린 라이트’ 켜졌다

    아스널, 벤제마 영입에 ‘그린 라이트’ 켜졌다

    아스널의 수뇌부는 드디어 아르센 벵거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수 카림 벤제마(27)를 영입할 자금을 마련했다. 영국 현지 언론 데일리 메일은 아르센 벵거 감독이 벤제마 영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구단 역대 최고 이적료를 지불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현재까지 아스널 구단 역대 최고 이적료 4250만 파운드(766억원)를 기록하고 데려온 선수는 2013년 여름에 영입한 메수트 외질이다. 이제 벵거 감독은 이번 여름 아스널의 최우선 영입 대상인 벤제마를 데려오기 위해 외질의 이적료를 웃도는 4500만 파운드(812억원)의 거금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시즌부터 아스널은 계속해서 대형 공격수의 부재를 지적받아 왔다. 이에 벵거 감독은 이번 여름 벤제마의 영입을 간절히 바랐다. 벵거 감독은 이제 벤제마의 영입만 성사되면 이번 시즌 아스널이 진정한 우승 경쟁자가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한편 아스널은 이번 여름 초에도 레알에 벤제마의 영입을 문의했지만, 레알은 이를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나 이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영입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물론 레알이 최고의 공격수 벤제마를 파는 것을 상당히 꺼리고 있지만, 아스널은 최상의 가격을 제시하면 벤제마를 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벤제마의 영입이 성사하려면 레알이 그의 대체자의 찾아야만 한다. 물론 레알은 오래전부터 맨시티의 공격수 세르히오 아구레오의 영입을 원해왔다. 만약 레알이 아구에로를 데려온다면 아스널은 원하던 뜻대로 벤자마를 영입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맨시티는 레알에 팀의 에이스를 팔 생각이 전혀 없다. 현재 이 점이 벤제마를 영입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로 지적되고 있다. 과연 아스널이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벤제마를 영입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14일 은행·보험·증권사도 쉰다

    오는 14일 광복 70주년 기념 임시공휴일을 맞아 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대부분의 금융회사들도 쉰다. 대출 상환이나 예금 만기, 각종 결제는 17일로 자동 연기된다. 7일 금융위원회는 임시공휴일 지정으로 소비자들에게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 사항을 안내했다. Q. 14일 대출 만기일인 경우 대출금을 언제 상환해야 하나. A. 금융사(은행, 보험, 저축은행, 카드 등) 대출과 주식 신용거래 금액은 만기가 17일로 자동 연장돼 이날 연체 이자 부담 없이 상환할 수 있다. 고객이 원하면 13일에 조기 상환 수수료 없이 미리 갚을 수도 있다. 이자 납입도 마찬가지다. Q. 14일 만기인 예금은 언제 찾을 수 있나. A. 17일에 14~16일 이자까지 포함해 찾을 수 있다. 13일에도 인출할 수 있다. Q. 카드 결제 대금 자동 납부일이 14일인데 이날 출금되나. A. 17일에 연체 이자 없이 출금된다. 13일 선결제도 가능하다. Q. 어음이나 수표, 전자결제수단이 만기일이면 언제 현금화할 수 있나. A. 17일 가능하다. 14일에는 당사자 간 대면 거래인 종이 어음, 당좌수표의 발행이나 배서(어음 소지인이 일정 사항을 증권 뒷면에 기재해 양도하는 것)는 가능하지만 전자어음이나 기업 간 전자결제수단 거래는 안 된다. 영업점이 문을 닫기 때문에 자기앞수표 발행도 할 수 없다. Q. 부동산거래나 회사 간 대규모 자금 결제, 외화 송금이 필요한 경우에는. A. 14일에는 영업점을 통한 거래가 어렵기 때문에 인터넷뱅킹이나 폰뱅킹, 자동화기기(CD·ATM)를 이용해야 한다. 미리 금융사에 문의해 인터넷뱅킹 이체 한도 등을 높여 놓는 것이 좋다. 송금도 미리 해 둬야 한다. Q. 펀드 환매 대금은 받을 수 있나. A. 펀드 약관상 임시공휴일은 영업일이 아니기 때문에 14일에는 환매 대금을 받을 수 없다. 14일 전후로 환매 대금을 인출할 계획이라면 판매 회사에 문의하거나 투자설명서 등을 통해 환매 일정을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투자설명서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fss.or.kr)에서 볼 수 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14일 은행·보험·증권사도 쉰다

    오는 14일 광복 70주년 기념 임시공휴일을 맞아 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대부분의 금융회사들도 쉰다. 대출 상환이나 예금 만기, 각종 결제는 17일로 자동 연기된다. 7일 금융위원회는 임시공휴일 지정으로 소비자들에게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 사항을 안내했다. Q. 14일 대출 만기일인 경우 대출금을 언제 상환해야 하나. A. 금융사(은행, 보험, 저축은행, 카드 등) 대출과 주식 신용거래 금액은 만기가 17일로 자동 연장돼 이날 연체 이자 부담 없이 상환할 수 있다. 고객이 원하면 13일에 조기 상환 수수료 없이 미리 갚을 수도 있다. 이자 납입도 마찬가지다. Q. 14일 만기인 예금은 언제 찾을 수 있나. A. 17일에 14~16일 이자까지 포함해 찾을 수 있다. 13일에도 인출할 수 있다. Q. 카드 결제 대금 자동 납부일이 14일인데 이날 출금되나. A. 17일에 연체 이자 없이 출금된다. 13일 선결제도 가능하다. Q. 어음이나 수표, 전자결제수단이 만기일이면 언제 현금화할 수 있나. A. 17일 가능하다. 14일에는 당사자 간 대면 거래인 종이 어음, 당좌수표의 발행이나 배서(어음 소지인이 일정 사항을 증권 뒷면에 기재해 양도하는 것)는 가능하지만 전자어음이나 기업 간 전자결제수단 거래는 안 된다. 영업점이 문을 닫기 때문에 자기앞수표 발행도 할 수 없다. Q. 부동산거래나 회사 간 대규모 자금 결제, 외화 송금이 필요한 경우에는. A. 14일에는 영업점을 통한 거래가 어렵기 때문에 인터넷뱅킹이나 폰뱅킹, 자동화기기(CD·ATM)를 이용해야 한다. 미리 금융사에 문의해 인터넷뱅킹 이체 한도 등을 높여 놓는 것이 좋다. 송금도 미리 해 둬야 한다. Q. 펀드 환매 대금은 받을 수 있나. A. 펀드 약관상 임시공휴일은 영업일이 아니기 때문에 14일에는 환매 대금을 받을 수 없다. 14일 전후로 환매 대금을 인출할 계획이라면 판매 회사에 문의하거나 투자설명서 등을 통해 환매 일정을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투자설명서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fss.or.kr)에서 볼 수 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리버풀을 응원하는 ‘할리우드 유명인사’는 누가 있나?

    리버풀을 응원하는 ‘할리우드 유명인사’는 누가 있나?

    1892년 창단된 리버풀 구단은 그 오랜 역사와 18번의 리그 우승과 5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을 자랑하는 명문 구단답게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팬 중에는 특히 많은 할리우드 유명인사들이 리버풀을 응원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럼 리버풀을 응원하는 할리우드 유명인사에는 누가 있을까. -다니엘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다니엘 크레이그는 리버풀의 열광적인 팬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지난여름 미국 투어를 떠난 리버풀을 응원하기 위해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을 방문했으며 리버풀의 전 주장 제라드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사무엘 L 잭슨어벤저스의 닉 퓨리 쉴드 국장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사무엘 L 잭슨. 2000년 당시 사무엘은 51번째 주라는 영화를 찍기 위해서 리버풀을 방문했고 이후 그는 이 도시와 리버풀의 팬이 됐다. 지난해 사무엘은 아스널을 방문했지만, 여전히 리버풀 팬임을 말하며 팀을 향한 변치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데미안 루이스다니엘 크레이그의 뒤를 이어 차세대 제임스 본드로 주목받고 있는 데미안 루이스. 한국의 팬들에겐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2005년 이스탄불의 기적을 그린 영화 ‘Will’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졌다. 또한, 인기 미국 드라마 ‘홈랜드’의 주인공으로 활약했으며 2014년 4월 안필드를 직접 방문해 제라드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리암 니슨 영화 테이큰의 주인공이자 할리우드 최고의 액션 배우 리암 니슨은 리버풀의 오랜 팬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리버풀의 홈 구장 안필드을 자주 방문했다. 또한, 2009년에는 풀럼 원정 경기에 직접 방문해 리버풀의 승리를 가족과 함께 자축했다. -브래드 피트브래드 피트와 리버풀의 인연은 남다르다. 그는 2011년 영화 ‘머니볼’의 주인공 빌리 빈으로 출연했고 영화 작품을 위해 리버풀과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 존 헨리를 만나면서 더욱 리버풀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그는 2014년 인터뷰에서 “나에겐 리버풀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좀 있다. 만약 내가 다른 팀을 응원한다면, 나는 그들과 의절해야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해 리버풀을 사랑하는 남다른 마음 표현했다. -앤젤리나 졸리앤젤리나 졸리 역시 남편 브래드 피트와 함께 리버풀 광팬으로 유명하다. 그의 전남편 빌리 밥 손턴도 리버풀의 엄청난 팬이었고 그녀의 아들 매덕스도 리버풀 팬이기에 졸리가 리버풀을 응원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이크 마이어스 오스틴 파워와 슈렉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이크 마이어스는 부모님의 대를 이어 리버풀을 응원하는 팬이다. 그는 지난 2013년 11월 안필드로 성지 순례를 왔고 리버풀은 풀럼을 상대로 4-0 승리를 거뒀다. 그는 안필드를 방문한 소감으로 “안필드에 오게 돼 너무나 기쁘다. 정말 믿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제이슨 아이삭스제이슨 아이삭스의 이름은 다소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러나 영화 ‘해리포터’에서 ‘루키우스 말포이’를 연상하면 “아 그 배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리버풀의 엄청난 팬으로 리버풀의 레전드 이안 캘러한, 에믈린 휴즈, 스티브 하이웨이와 함께 안필드에서 시축을 거행하기도 했다. -킴 캐트럴 여성 팬들에게 너무나도 인기 있었던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주인공 사만다 존스를 기억하는가? 사만다로 열연한 여배우 킴 캐트럴 역시 리버풀의 열정적인 팬이다. 킴이 태어난 곳 역시 리버풀이어서 그녀가 리버풀을 응원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평소 리버풀 유니폼을 이용해 코디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시간이 허락되는 한 언제나 경기를 직접보기 위해 안필드를 방문하고 있다.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챔스 플레이오프 상대’ 누가 될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챔스 플레이오프 상대’ 누가 될까?

    2015-16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잠재적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상대 팀이 공식 확인됐다. 루이스 반 할 감독이 이끄는 맨유는 지난 시즌 리그 4위를 기록하며 가까스로 챔스 진출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챔스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있다. 그것은 바로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통과다. 맨유가 챔스 플레이오프에서 맞서게 될 잠재적 상대로는 CKSA 모스크바, 라치오, 클럽 브뤼헤, 모나코 그리고 SK 라피트 빈 5팀이다. 맨유가 비교적 쉬운 상대를 만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 다섯 팀 중 가장 피하고 싶은 팀은 지난 시즌 맹활약을 펼치며 챔스 8강에 진출한 저력이 있는 모나코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맨유는 지난 5일(현지 시각) 조 추첨을 통해 껄끄러운 상대인 발렌시아, 레버쿠젠, 스포르팅 리스본 그리고 샤흐타르 도네츠크와 같이 시드를 배정받아 이들을 피할 수 있어 부담을 한 층 덜었다. 맨유의 플레이오프 1차전 경기는 오는 18일과 19일에 있을 예정이며 2차전 경기는 25일과 26일 중 한 날이 될 것으로 보인다. 프리미어리그 개막 하루 전인 7일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추첨식을 통해 맨유의 최종 상대와 일정을 알 수 있다. *2015-16 UEFA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방식 2015-16시즌 플레이오프 방식은 챔피언스 루트(각 리그 우승 10팀)와 리그 루트(각 리그 비 우승 10팀) 이렇게 2개의 조로 나뉜다. 조추첨을 통해 같은 조에 속한 시드 1팀과 비시드 1팀이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의 플레이오프를 가지며 승리한 최종 10팀이 챔스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한 컷 en] 소녀시대 윤아, 화보 및 메이킹 영상 공개

    [한 컷 en] 소녀시대 윤아, 화보 및 메이킹 영상 공개

    우아한 매력이 돋보이는 소녀시대 윤아의 최신 화보가 공개됐다. 5일 온라인 웹진 ‘하이컷’(HIGH CUT)을 통해 공개된 이번 화보 속 윤아는 시스루 블라우스와 앞트임 스커트로 과감한 스타일을 선보이며 관능미를 발산하는 한편 파격적인 금발머리로 세련되면서도 도회적인 매력을 뽐냈다. 이와 함께 공개된 화보 메이킹 영상도 눈길을 끈다. 영상 속 윤아는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드리운 방에서 사랑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매력으로 시선을 압도했다. 한편 윤아가 소속된 그룹 소녀시대는 지난 7월 초 신곡 ‘파티’(PARTY)를 발표, 각종 음악프로그램에서 1위를 휩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 오다가 지난달 27일 울산에서 진행된 MBC ‘쇼! 음악중심’ 녹화를 끝으로 활동을 마무리 했다. 소녀시대는 8월 중으로 새 앨범을 들고 다시 팬들을 찾을 예정이다. 사진=하이컷(HIGH CUT), 영상=HIGHCUTmagazine(HIGH CUT ‘금발 뮤즈’ 윤아의 황금빛 오후)/유튜브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잉글랜드 ‘역대 최강의 홈 승률 팀’은 어디? [스카이 스포츠 선정]

    잉글랜드 ‘역대 최강의 홈 승률 팀’은 어디? [스카이 스포츠 선정]

    최근 영국 스포츠 전문 미디어 ‘스카이 스포츠’가 지금으로부터 127년 전 시작된 잉글랜드 축구 리그의 190,096번의 프로 경기를 분석해 총 92팀(4부리그 포함)의 홈 경기 승률 순위를 매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버풀이 역대 최강의 홈 경기 승률 팀으로 선정됐다. 리버풀은 1893-94시즌 이래로 총 2,207번의 홈 경기에서 무려 61.58%의 승률을 보였고 단 16.09%의 패배율을 기록했다. 그다음으로 1부 리그 우승 20번의 빛내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역대 두 번째 높은 홈 승률을 보였다. 맨유는 1892-93시즌 이후로 총 2,222경기에서 61.43%의 승률을 보였고 아스널이 59.27%의 홈 승률로 역대 3위를 차지했다. 이외에 눈여겨볼 만한 팀은 과거 설기현이 몸담았던 레딩이 있다. 레딩은 놀랍게도 56.18%의 홈 승률을 보이며 56.42%를 기록한 맨시티 다음으로 역대 6위를 차지했다.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인 첼시는 선덜랜드의 54%보다 낮은 53.47%의 승률을 보이며 역대 14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2014/15시즌만 놓고 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조세 무리뉴 감독이 이끄는 첼시는 지난 시즌 홈 구장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무려 78.95%의 승률을 보였다. 또한, 홈에서 총 19경기 중 15번 승리했고 단 한 번도 패배를 기록하지 않았다. 반면 리버풀은 지난 121년간 최고의 홈 승률을 자랑하고 있지만, 지난 시즌 홈 승률 52.63%를 보여 역대 1위의 홈 승률 성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사진·자료=스카이 스포츠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ATM 30분 지연 인출’ 100만원 이상으로

    다음달부터 계좌에 입금된 돈을 자동화기기(CD·ATM)에서 찾을 때 입금 이후 3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제도가 보다 강화된다. 자동화기기를 통해 이체할 때도 ‘30분 지연 이체’가 처음 적용된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연합회를 비롯한 금융업권별 협회는 금융사기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용되던 30분 지연 인출제도를 300만원 이상에서 100만원 이상으로 확대 시행하기로 했다. 지연 인출 시간 30분은 그대로 유지된다. 다음달 2일 은행권부터 시작해 점차 제2금융권으로 늘려 갈 계획이다. 영업 창구에서는 지금처럼 바로 인출할 수 있다. 자동화기기를 이용한 이체에 대해서도 같은 지연 제도가 적용된다. 즉 100만원 이상 입금된 계좌의 돈을 자동화기기를 통해 다른 계좌로 보내려면 입금 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지연인출제는 2012년 6월 300만원 이상에 대해 10분 지연 인출로 처음 도입됐다. 지난 5월 말 지연 시간을 30분으로 늘렸다. 금융사기범이 인출 금액을 300만원 미만으로 잘게 쪼개 인출하는 수법으로 법망을 피해 나가자 금액 기준도 강화한 것이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시즌 시작도 전...경질 위기에 놓인 ‘프리미어리그 감독 3인방’

    시즌 시작도 전...경질 위기에 놓인 ‘프리미어리그 감독 3인방’

    모든 축구 감독이 그러하듯 항상 경질의 위기 속에서 구단 수뇌부와 줄다리기를 한다. 그러나 특히 프리미어리그 감독들은 경질의 압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지난 시즌을 살펴보면 무려 8명의 프리미어리그 감독들이 구단과 상호 계약해지 또는 해임 통보를 받았다. 게다가 1992년 이후로 감독의 평균 임기가 1.23년으로 역대 최단 재임 기간을 기록했다. 이를 통해 프리미어리그 감독직이 얼마나 임기 보장이 되지 않는 험난한 직업인지 알 수 있다. 아직 프리미어리그 시즌이 시작하지 않았지만, 벌써 경질이 유력해 보이는 감독들이 몇몇 눈에 뛴다. 경질이 가장 유력해보이는 프리미어리그 3명의 감독을 정리해봤다. -브랜든 로저스 감독, 리버풀 브랜든 로저스 감독은 도박사 대부분이 뽑는 이번 시즌 경질 1순위의 감독이기도 하다. 2013-14시즌 수아레스를 앞세워 리버풀을 리그 2위와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이끌었지만, 에이스 수아레스가 팀을 떠나면서 리버풀의 순위는 6위로 곤두박질쳤고 챔피언스리그도 일찌감치 조별 예선 탈락을 경험했다. 리버풀은 지난 시즌 수아레스를 바르사에 팔고 무려 1억 1,700만 파운드(2,125억 원)라는 역대 최고의 영입자금을 사용해 9명의 새로운 선수를 데려왔지만, 성과가 전혀 없었다. 지난 시즌 최대의 경질 위기를 경험한 로저스 감독은 구단주 존 헨리의 재신임을 얻으며 밀너, 피르미누, 벤테케같이 양질의 선수들을 데려왔다. 그러나 수아레스에 이어 또다시 팀 내 최고의 선수인 스털링을 상대 팀에 팔아 ‘셀링 클럽’이라는 오명도 함께 얻게 됐다. 또한, 브랜든 로저스 감독은 리버풀 감독으로 3년을 지내며 단 한 번도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한 감독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이번 시즌이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이며 이제는 무언가 확실한 모습을 보여줘만 한다. 만약 로저스 감독이 시즌 초반부터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시즌 도중 경질돼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 맨체스터 시티 만약 맨시티가 마누엘 폐예그리니 감독과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다면,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 또한, 모두가 알고 있듯이 펩 과르디올라 바이에른 뮌헨 감독의 계약 기간도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다. 물론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맨시티는 매 시즌 리그 우승 경쟁에 뛰어들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16강 이상의 성적을 내길 원하는 야심많은 구단이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좋은 선수와 감독을 데려올 준비가 된 구단이다. 물론 폐예그리니 감독이 2013-14시즌 리버풀을 제치고 리그 우승을 한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이다. 하지만 앞으로 더 나은 성적을 내기엔 그의 역량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지난 시즌 맨시티의 아킬레스건이었던 빈센티 콤파니의 폼 저하 그리고 수비진의 부진이 팀의 경기력 저하로 이어졌다. 그러나 수비진 보강보다는 홈 그로운 선수(스털링, 델프) 보강에 초점을 맞추는 이적 정책을 펼치고 있어 우승 경쟁이 다소 어려워 보인다. 만약 맨시티가 현재보다는 미래에 맞춰진 영입 정책(홈 그로운 선수 영입을 통한 구단의 안정화를 우선하는)을 펼치고 있다면 페예그리니 감독은 팀의 계획에 이미 제외됐을 수도 있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그는 펩 과르디올라 감독과 바통을 교체할지도 모른다. -스티브 매클라렌 감독, 뉴캐슬 유나이티드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됐다. 전임 감독인 존 카버와는 감독 경력에서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매클라렌 감독은 전 맨유의 수석 코치이자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맡은 경험이 매우 다양한 감독이다. 그렇지만, 네덜란드 리그에서 트벤터를 우승시킨 2010년 이후로 이렇다 할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 극성스런 뉴캐슬 유나이티드 팬들은 그런 매클라렌 감독의 경력에 벌써부터 의구심이 들고 있다. 또한, 현재 3,500만 파운드(636억 원)를 거금을 들여 데려온 공격형 미드필더 죠르지뇨 훼이날덤, 공격수 알렉산더 미트로비치와 수비수 찬셀 음벰바 또한 현재 팀 구성원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우선 매클라렌 감독은 뉴캐슬과 3년 계약을 체결했고 앞으로 좋은 성적이 꾸준히 나온다면 8년 연장이라는 옵션을 추가했다. 그렇지만, 이는 말 그대로 계약상의 얘기이다. 뉴캐슬에 필요한 것은 더는 리그 강등권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지금 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상위권으로 도약할 수 있는 꾸준한 경기력이다. 매클라렌 감독이 이런 꾸준함을 팀에 불어넣을 수 없다면, 뉴캐슬 팬들은 또다시 보이콧과 피켓을 들 테고 그는 곧 팀을 떠나고 말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ESPN FC 선정] 한 문장으로 정리한 프리미어리그 팀의 운명

    [ESPN FC 선정] 한 문장으로 정리한 프리미어리그 팀의 운명

    이제 6일 뒤면 대망의 프리미어리그가 시작한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리그라 불리는 프리미어리그. 숨 막히는 TOP 4경쟁과 함께 강등권 싸움 또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만큼 정말 예측이 쉽지 않은 리그다. 이에 미국 축구 전문 사이트 ESPN FC가 2015-16시즌 프리미어리그 모든 팀의 운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봤다. 아스널- 이제 아르센 벵거 감독은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 둘 중 하나(우승)가 필요하다. 아스톤 빌라- 아스톤 빌라의 강등권 싸움은 이제 지겨울법도 하다. 셔우드 감독은 이제 강등권 싸움에서 벗어날 때다. AFC 본머스- 에디 하우는 명석한 감독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머스의 끝이 어떨지 다 알고 있다. 첼시- 챔피언스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조세 무리뉴 감독에게 있어 가장 큰 과제다. 크리스털 팰리스-에이스 요한 카바예가 팰리스를 상위 10권 진입과 컵 대회 우승 경쟁으로 이끌 것이다. 에버튼- 이번 시즌은 확실히 로베르토 마르티네스 감독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시즌이 될 것이다. 레스터 시티- 라니에리 감독의 형편없는 감독 경력은 레스터 시티를 위험에 빠트릴 것이다. 리버풀- 브랜든 로저스 감독의 시즌 초반 7번의 원 졍기가 TOP 4 상위권 도약을 결정할 것이다. 맨체스터 시티- 펩 과르디올라 바이에른 뮌헨 감독의 계약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만료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새로운 선수에 3억 파운드를 쓰고도 리그 우승을 하지 못 한다면 이는 실패들 뜻한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뉴캐슬에 있어 지난 시즌은 정말 애처로웠다. 맥클라렌 감독은 뉴캐슬에 열정과 자부심을 무조건 가져와야만 한다. 노리치 시티- 노리치는 더이상 루이스 수아레스(노리치를 상대로 6경기에서 12골을 기록)를 상대할 일이 없다. 사우샘프턴- 유로파 리그 참가는 사우샘프턴에 있어 리그 성적에 핑곗거리가 될 수 있다. 스토크 시티- 이번 시즌 공격진의 강화는 스토크 시티에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 선덜랜드- 선덜랜드에는 또 다른 성촉절이 될 것이다. *성촉절은 미국에서 마멋(woodchuck)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날을 뜻한다. 참고로 선덜랜드는 후반기에 항상 성적이 좋았다. 스완지 시티- 게리 몽크가 이끄는 스완지 시티는 새롭게 영입한 안드레 아예우의 힘으로 상위 10위권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토트넘 홋스퍼- 만약 해리 케인이 이번 시즌 30골 이상을 넣는다면 그의 가치는 5,000만 파운드가 될 것이다. 왓포드- 2번의 프리미어리그 시즌 중 2번 강등됐다. 이번이 3번째가 될 것이다.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 강등에서 살아나고 싶다면 토니 퓨리스 감독은 선임해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상위 10위권 진입은 웨스트햄에 있어 좋은 시즌 마무리가 될 것이다.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2015 커뮤니티 실드 ‘첼시 vs 아스널’ 경기 전 주목할 기록들

    2015 커뮤니티 실드 ‘첼시 vs 아스널’ 경기 전 주목할 기록들

    2015-16시즌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이 어느덧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해 보다 다소 빠르게 시즌이 시작 되지만 하루라도 빨리 프리미어리그를 보고 싶은 팬들에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또 다른 기쁜 소식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프리미어리그 개막의 전초전을 알리는 커뮤니티 실드가 오늘 밤(2일) 11시(한국시간)에 열린다. 커뮤니티 실드는 보통 리그 개막 1주일을 남겨두고 지난 시즌 리그 챔피언과 FA 컵 우승팀이 자웅을 겨루는 단판 승부다. 이번 커뮤니티 실드는 리그 챔피언 첼시와 2년 연속 FA 우승팀 아스널이 멋진 승부를 펼치게 된다. 양 팀 모두 이번 시즌 강력한 리그 우승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데 특히 무리뉴와 벵거 감독의 경기장 안팎 설전으로 이번 경기에 팬들의 많은 시선이 모이고 있다. 이번 커뮤니티 실드 경기 시청을 앞두고 팬들이 꼭 알아둬야 할 기록은 무엇인지 정리해봤다. 우선 아스널은 커뮤니티 실드가 개최된 지난 23년간 총 8번 출전해 5번 승리했다. 반면에 첼시는 총 8번 출전해 3번 승리했다. 최근 5번의 커뮤니티 실드 경기에서 지난해 처음으로 FA 컵 우승팀인 아스널이 우승했다. 4번 경기에서 리그 우승팀이 승리했다. 첼시는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기록한 2005년과 2009년 리그 우승도 함께 차지했다. 첼시와 아스널은 2005년 커뮤니티 실드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아스널 선수로는 유일하게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골을 넣었고 팀은 2-1로 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브레가스는 첼시의 선수로 친정팀 아스널을 상대하게 된다. 아스널은 이번 대회를 포함해 총 21번 커뮤니티 실드에 참가하게 되며 총 12번 우승, 7번 준우승(승부차기로 2번 패배) 그리고 1번 공동 우승을 경험했다. 반면 첼시는 이번 대회를 포함해 총 11번의 커뮤니티 실드에 참가하게 되며 4번의 우승(승부차기로 1번 승리), 6번 준우승(승부차기 2번 패배)을 경험했다. 지난 5번의 커뮤니티 실드 경기에서는 총 19골이 나왔다. 커뮤니티 실드에서 우승한 같은 해 리그 챔피언에 마지막으로 오른 팀은 2010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 아르센 벵거 감독은 조세 무리뉴를 상대로 지난 13경기에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벵거 감독은 13경기 6무 7패를 기록 중이다. 반면 첼시는 아스널을 상대로 지난 8번 경기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첼시는 현재 5승 3무를 기록 중이다. 아스널은 첼시를 상대로 482분 간 골을 넣지 못하고 있다. 커뮤니티 실드에서 우승한 팀 중 무려 50%가 같은 해 리그에서도 우승을 기록했다. 다시 말하면 커뮤니티 실드 우승팀의 리그 우승 확률은 50%다. 커뮤니티 실드에서 우승한 팀 중 70%가 패배를 기록한 팀보다 그 해 리그 성적이 높았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최용석 유럽축구통신원 fcpoint@hotmail.com 
  • [아하! 우주] 보이저 1호에 실린 ‘인류 메시지’ 공개

    [아하! 우주] 보이저 1호에 실린 ‘인류 메시지’ 공개

    지난 1977년 9월 인류의 원대한 꿈을 실은 무인 우주탐사선이 발사됐다. 바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전인미답의 우주를 여행 중인 미 항공우주국(NASA)의 보이저 1호다. 최근 NASA가 보이저 1호에 실린 소위 ‘골든 레코드’ 의 소리를 웹사이트(voyager.jpl.nasa.gov/spacecraft/goldenrec.html)를 통해 공개해 관심을 끌고있다.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보이저 1호에는 골든 레코드라 불리는 LP 3장이 실려 있다. 이 속에는 지구인이 우주인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담겨있는데 55개 인류 언어로 된 인사말이 대표적이다. 물론 한국어 인사말도 담겨있는데 여성의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라고 녹음돼 있다. 또한 파도와 바람같은 자연 소리, 동물 소리 그리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클래식 음악도 저장돼 있다. 여기에 수학 기호와 해부 사진, 태양계 모습 등이 담긴 이미지도 115장이 포함돼 있어 지구와 인류에 대한 많은 것들이 기록돼 있다. 지구인이 우주인에게 보내는 이 메시지는 유명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1934∼1996)이 선정한 것으로 NBC 뉴스등 현지언론은 "NASA가 처음으로 해당 사운드를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도록 공개했다"고 평가했다. 한편 보이저 1호는 2년 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태양권을 벗어나 ‘성간 우주’(태양권 밖의 우주)에 진입했다. 현재까지 보이저 1호가 여행한 거리는 약 190억㎞로 1차 목표인 목성과 토성 및 두 행성의 위성과 고리를 탐사하는 임무는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보이저 1호는 쌍둥이 탐사선으로, 보이저 2호(1977년 8월 20일 발사)보다 보름 늦게 발사됐지만 ‘1호’라는 명칭을 얻었다. 2호보다 더 빨리 우주를 탐험하도록 설계돼 현재 지구-태양 간 거리의 132배 거리에서, 그리고 2호는 150억㎞ 거리에서 태양계 바깥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피조물로 가장 멀리 날아간 셈. 보이저 1호의 수명은 애초 20년으로 예상됐으나, 플루토늄 배터리를 이용해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수명 예측은 이제 2025년 혹은 2030년까지 늘어났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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