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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못된 한국관 바로 잡는일(사설)

    올바른 한국관을 세계에 심어주자는 사업이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공보처는 지난달 30일 「한국관시정사업 추진협의회」를 열고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등 4개지역을 대상으로 그들 교과서의 왜곡된 부분을 시정하기 위한 다각적인 대책을 세우는 한편 우리나라에 관한 자료공급의 일환으로 영문판 한국 대백과사전을 편찬키로 했다. 우리의 실상이 왜곡되거나 굴절되어 외국인에게 잘못 소개된 것을 바로잡겠다는 노력은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통성을 지니고 출범한 새 문민정부에서의 이같은 사업추진은 매우 시의적절한 정책선택이라고 본다.과거 권위주의 정권처럼 이른바 체제홍보의 부담에서 벗어나 잘못된 한국관을 시정한다는 순수한 의도가 그대로 전달될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마련한 추진방안을 보면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등 4개국을 대상으로 교과서의 왜곡·오류부분을 시정하기위해 대상국의 관계자 초청 세미나개최,대상국학술단체에의 용역의뢰,국내 관계자 파견을 통한 현지에서의 문헌자료 수집및 조사활동등이 망라돼있다. 또한 그들의 새 교과서를 미리 입수하여 철저한 내용분석을 통해 오류가 있을 경우 정부차원에서 시정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국제화시대의 지구촌이라고 하지만 외국 교과서에 나타난 한국의 모습은 왜곡과 오류투성이여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정도이다.캐나다의 사회교과서에는 서울이 「인구 1백만의 도시」,「한반도에서 가장 큰 농업의 중심지」등으로 서술돼 있을 정도다.칠레의 한교과서에는 『국어는 한국어이나 중국어와 일본어가 함께 쓰인다』로,스페인의 교과서에는 『아직도 1인당 국민소득 2백50달러』로 소개되고 있다. 중국이나 러시아·동구권국가에서는 아직도 「6·25는 남한의 북침」으로 기술하고 있고 김일성에대한 미화는 물론 『3·1운동은 러시아혁명의 영향』이라고 왜곡 되어있다.전적으로 북한의 자료에만 의존해온 탓이다.바로 이웃인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고대사 부문에서의 「일본임나부」의 하구를 비롯하여 현대사에서는 일제침략부분을 왜곡기술하여 한일간의 끊임없는 쟁점이 되고 있다. 외국교과서의이같은 오류와 왜곡은 한국에 관한 정확한 정보나 자료의 부족 또는 학술연구의 부족에 기인한다.또한 낡은 자료를 바탕으로 했거나 일본을 통한 2차자료를 사용하여 집필했기 때문이다.결국 우리 스스로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데서 파생된 결과이다.따라서 한국관 시정사업을 위해서 한국을 소개하는 기본자료와 문헌을 외국에 충분히 공급해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이러한 홍보전략은 정부차원만이 아니라 민간단체,학술단체,민간기업등에서 함께 참여할때 더욱 큰 효과를 거둘수 있을 것이다.
  • 교통사고/토요일·퇴근시간 “조심”

    ◎경찰청,작년사고 분석… 발생건수 최고/총사망 1만1천… 13% 줄어/10월 2만3천건 “연중최다”/승용차 윤화가 전체의 50%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월별로는 10월에,요일별로는 토요일에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28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모두 25만7천1백94건의 교통사고가 발생,이중 1만1천6백40명이 숨져 전년의 26만5천9백64건보다 건수로는 3.3%가,사망자수로는 13.3%가 각각 줄었다. 이 가운데 10월중 사고는 2만3천9백20건으로 월평균 2만1천4백여건보다 훨씬 높았으며 요일별로는 토요일에 모두 3만9천6백25건이 발생,요일평균 3만6천여건보다 많았다. 하루중 시간대별로는 퇴근시간대인 하오6시부터 8시 사이의 사고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돼 운전자의 피로가 사고와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냈다. 또 차종별로는 승용차가 12만9천여건의 사고를 내 전체사고의 50.2%를,화물차 5만8천2백여건(22.6%),버스 3만9천9백여건(15.5%),2륜차 1만6천9백여건(6.6%),특수차 1천4백여건(0.6%)순으로 조사됐다. 사고내용별로는 안전운전의무위반이 15만7천여건으로 전체의 61.1%를 차지,운전자 부주의가 사고의 주요원인으로 조사됐으며 안전거리미확보는 6.4%,중앙선침범 5.4%,무면허운전 3.7%,신호위반 3.7%등으로 나타났다.
  • 책을 지키는 사람들/이경문 국립중앙도서관장(굄돌)

    햇빛은 커녕 통풍도 제대로 안되는 지하서고.형광등만 꺼지면 영락없이 칠흑의 토굴같다. 마스크를 쓰고 미로를 찾듯 서가를 헤집으며 자료를 챙기는 김갑희여사(60).1955년 국립도서관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40년 가까이 책을 지키는 외길인생을 살아 온 그녀의 회상은 가슴뭉클하게 하는 대목이 많다. 소공동시절,지하서고에서 열람실 5층까지 책을 한아름 안고 층계를 걸어 오르내릴 때는 힘에 겨워 계단에 넘어질 때도 있었으며,안고있던 책이 와르르 쏟아질 때는 왜 이 길을 택해야 했나하는 원망도 했었다. 또 여름 장마철이면 지하서고에 물이 들어 물 퍼내기에 온힘을 쏟고나면 일할 기력조차 회복하기 힘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서고 환경이 아직도 열악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장서가 많이 늘어 이용자가 읽고 싶어하는 책을 그런대로 챙겨 찾아줄 수도 있고,사서들도 힘들게 직접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아도 좋은 리프트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다행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또 책을 지키다 지금은 은퇴하신 선배사서 할아버지를 가끔 떠올리곤 한다.자기보다 먼저 도서관에 들어와 40여년을 책과 씨름하다 10여년전 은퇴하신 국립도서관의 산 증인 이의영할아버지.해방되던 해 일인관장으로부터 서고 열쇠를 인수받던 일,「문헌수집대」를 조직하여 서울 거리에서 각종 인쇄물을 수거하던 일,그리고 6·25당시 인민군이 탈취해 가려던 귀중본 1만여권을 미아리 근처에서 다시 찾던 일들을 들려주던 이할아버지의 추억을 김씨는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6·25당시 북한군이 인천에 처들어 왔을 때 피란도 가지 않은채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지키다 인민군에 의해 총살당한 사서도 있다. 이같이 목숨과 바꿔가며 책을 지켜온 사서들의 얘기는 서가에 꽂혀 있는 한권한권 책들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한다. 비록 낮은 봉급에 알아주는 이 없는 도서관 근무이지만 신앙의 정신으로 봉사할 때 책은 지켜지고 많은 이가 생활의 질을 높여갈 것이다.
  • 본사초청 모범용사들이 말하는 후방의 5박6일

    ◎“문민시대 군의 사명 새삼 실감”/사회곳곳 변화의 바람 피부로 느껴/조국의 밝은미래 산업현장서 확인 6·25 43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사가 초청한 국군모범용사와 배우자등 1백34명은 5박6일동안의 산업시찰과 관광을 마치고 26일 경주에서 부부동반으로 휴가길에 올랐다.모범용사 일행은 이번 초청기간 동안 서울신문사와 청와대·안기부·국회·한국방송공사 등을 방문한뒤 대전·광주·대구·포항·경주등지의 산업시설과 관광지를 차례로 돌아 보았다.제30회 모범용사 초청행사를 마무리하면서 광주에서 좌담회를 마련,이들이 돌아본 후방에 대한 소감과 문민정부 출범에따른 변화된 군의 위상및 6·25를 맞는 용사들의 각오를 들어 본다. ◇좌담 참석자 △배인권소 령(38·3군사령부) △신재철주임상사(49·해군작전사령부) △하부영 〃 (53·제2해병포병연대) △조종택 〃 (53·1117야공단) △강영태 〃 (47·공군 군수사령부) △황미경중 사(29·여·육군본부) ▲배인권소령=훌륭한 선배들이 많은데도 제가 전군을 대표한 모범용사로 뽑혀 영광에앞서 오히려 부끄럽습니다.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산간오지 등지에서 묵묵히 국토방위에 열중하고 있는 장병을 위해 30년째 국군 모범용사초청 행사를 계속해온 서울신문사에 대해 전 장병과 함께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따뜻한 환대 감사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번 5박6일간의 행사가 육·해·공 전군에서 선발된 모범용사들이 모여 서로를 알고 대화한 자리여서 더욱 뜻깊었고 군 사기진작에도 보탬이 되리라 봅니다. 특히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군의 새로운 위상정립이 요구되고 있는 가운데 마련된 이번 행사를 통해 사회 곳곳에서 일고 있는 변화의 바람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도 큰 보람으로 여겨집니다. ▲하부영일등상사=35년 동안의 군생활중 집사람과 함께 이처럼 마음놓고 여행을 즐겨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등 고위인사들을만날 때는 떨리기도 했으나 그분들이 오히려 따뜻하고 편하게 대해줘 시대의 변화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같은 좋은 기회가 유능한 후배들에게도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조종택일등상사=국토방위에 대한 일념으로 군에 투신한 지가 벌써 34년이 흘렀습니다.오랜 기간동안 사회와의 단절에서 오는 군인들만의 고독감도 느껴온 것도 사실이나 이번 모범용사 초청에서 어디를 가나 환대하는 각지역 기관장들과 시민들의 친절에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황미경중사=제복에 대한 멋,우리사회에서 남녀평등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곳이 군이라는 생각으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복을 입게 됐습니다. 보통여자들처럼 부모님 밑에서 편안히살려다가 군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는심적 부담과 함께 많은 인내가 필요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군제 폐지와 함께 지난해 10월부터 개정된 인사제도로 승진이나보직등에서도 남자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등 여성군인 복무의욕이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자기실현 의지가 강한 여성들은 직업으로 보장된 군에 입대,남성들과 당당히 능력을 겨뤄보도록 권하고 싶습니다.이번 산업시찰에 역시 군인인 남편이 동행하지 못한게 다소 섭섭하지만 여러 전우동지들과의 만남은 영원한 추억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신재철일등상사=저는 30년 동안 험한 파도와 싸워온 바다사나이 입니다.최근 잠수함인 장보고함이 취항하는등 6·25당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증강되고 있는 해군전력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모처럼 아내와 함께한 여행도 좋았고맡은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모범용사로 뽑힌 것 뿐인데 우리가 국군의 대표인 것처럼 모든 국민들로부터 환대를받아 무거운 책임감마저 느낍니다.참된 모범용사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국토방위에 자부심 ▲강영태일등상사=우리나라 공군력과 조종사들의 비행전투력은 세계 어느곳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공군은 최근 급속히 발전한 항공기술을 바탕으로한 장비의 현대화와 함께 불철주야 조국의 하늘을 지킨다는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배소령=모든 공정이 자동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후방산업 현장과 그곳에서 땀흘리는 산업역군들을 대할때 마다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뿌듯했습니다.이번 행사를 통한 산경험을 일선 전장병들에게 알려 사기를 드높이는 한편 더욱 굳건한 안보태세를 확립해 나가겠습니다. ▲조상사=저희 군도 사회의 변화추세에 발맞춰 빠르게 달라지고 있습니다.군간부가 연병장에 떨어진 담배꽁초 하나라도 솔선수범해 주우면 사병들은 10개 이상을 찾아내 주울 수 있는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등 위로부터의 의식개혁이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군대도 많은 변화 ▲하상사=그렇습니다.모든 군은 국민의 군대,민주군대로 거듭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1주일에 4시간씩 실시되는 정신교육 시간도 의식개혁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강상사=병사들의 내무생활도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구타가 완전히 없어지고 교육훈련이나 작업등도 자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같은 의식개혁이 정착되면 겉으로는약하고 다소 질서가 없이 보일지라도 사랑과 신뢰로 뭉쳐진 전군의 전투력은배가될 것으로 봅니다. ▲황중사=여군도 이제는 단순한 행정보조역에서 전투·병참·군수·정보등 다양한 병과에서 그 능력을 인정 받고 있습니다.멀지않아 우리나라 육사도 여성들에게 개방될 것으로 봅니다. ▲배소령=우리들은 5박6일동안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확인한 국가발전의 가능성을 각 부대에 돌아가 다른 전우들에게 알리고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 포철·대구동화사 방문(모범용사초대)

    【대구=이동구기자】 6·25동란 43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사가 초청한 국군 모범용사와 배우자 등 1백34명 일행은 25일 대구 팔공산 동화사와 포항제철 등을 차레로 둘러 보았다. 이에앞서 이들은 이의익대구시장이 팔공산 정상에서 베푼 오찬에 참석,6·25당시와 현재의 달라진 대구 모습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일행은 포철이 베푼 만찬에 참석한뒤 경주 보문단지내 코오롱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 남북화해의 실마리/안경렬 역촌동성당 주임신부(굄돌)

    MBC­TV 타큐「78인의 포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았다.6·25전란의 상처를 안고 살아오는 사람이 그들 뿐이랴만 거제 포로수용소안에서까지 얼마나 사상논쟁이 극성스럽고 살인에까지 이르는 공포분위기였기에 오죽하면 북한으로의 귀환도 남한의 잔류도 마다하고 제3국행을 택하였을까. 더욱이 납북인사는 말할것도 없고 국군 포로중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하고 강제노역등으로 억류되어 생사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말문이 막힌다. 이제 조국은 통일된 나라와 고향,그리고 형제들을 그토록 보고 싶다는 그들에게 대답해야한다.그들이 조국을 등진게 아니라 추악한 형제싸움이 그들을 떠나게 한것이다.북에도 남을 그리워하는 이인모 같은 이가 없단말인가. 구약성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의 동통태복수를 가르치지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시며 친히 모범을 보이신다.이같은 정신으로 남북문제를 풀어야한다. 제일 어려운 핵문제부터 다루려는 입장에도 일리는 있다.북쪽도 답답한 사람들이지만 그거라도 붙들고 늘어져 남한의 경제적추월에 직면해 살아남으려는 몸짓일게다.지금은 어차피 국제화시대다.핵은 더더구나 핵확산금지조약(실은 몇 힘센나라들이 위협적인 장난감을 저회끼리만 갖고 놀며 덕보겠다는 꿍꿍이속이지만)으로해서 약소국은 넘볼수 없는 분야다.다른데서 실마리를 찾아야한다. 우리의 가장 큰 현안인 새 공항건설과 고속전철사업이 떠오른다.아시아의 국제공항을 꿈꾼다면 어찌 북의 형제들과 한마디 상의가 없을손가.문외한의 생각으론 공항터로는 차라리 임진강 근처가 어떨까.서울 평양 인천 원산 금강산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개성이 미래의 행정도시가 되고 서울은 코리아의 뉴욕으로,평양은 시카고로 될수 있지않을까.고속전철은 좀더 앞을 내다보면 좋겠다.부산에 두어시간 빠르게 가서 시내에서 막힌다면 무슨 큰 이익이 생길건가. 차라리 좀 더딜지라도 신공항처럼 국제화를 꿈꿔야한다.세계의 기운이 동북아에 모인다고 하지않는가.남북을 잇고 중국 소련을 관통해서 베를린 파리에 다다르고 런던에 이르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구상해봄직하다.남과 북의 자본기술과 인력,중국 소련의 인력과 자원에다 고속전철국들을 합친다면 아시아와 유럽을 새롭게 이어줄 세계의 대동맥을 어찌 이루지 못할손가. 엊그제 신문에 남북을 오가는 화물뱃길이 열렸다는 작은 기사가 눈에 띈다.
  • 격전지 베티고지 초병“전선이상무”/6·25 43돌…그날의 현장르포

    ◎중공군 수십차례 공격… 1개소대 사수/“3개대대 격퇴” 전공 새겨/10만명 발길… 충혼탑 준비 동족상잔의 비극은 강허리마저 남북으로 갈랐지만 강물은 지금도 한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다. 임진강이 손에 잡힐듯이 내려다보이는 경기도 연천군 중면 횡산리 해발 2백64m 중부전선 독수리 고지. 갑자기 찢어질듯 터져나오는 대남비방방송이 비무장지대의 적막을 깨면서 한가롭게 풀을 뜯던 노루 한마리가 놀라 달아난다. 서울(65㎞)보다 평양(40㎞)이 더 가까운 고지위에서 불과 1㎞거리에 있는 북한측 초소를 응시하는 태풍부대 장병들의 눈초리가 매섭게 빛난다. 베티고지는 휴전을 앞두고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위해 막바지 격전이 계속되던 53년 7월15일 아군1개소대가 중공군 3개대대를 맞아 백병전을 벌여 승리한 6·25의 최대 격전지.당시 1사단 11연대소속 김만술소위(92년작고)는 소대원 34명을 이끌고 고지를 점령한 뒤 18시간동안 19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받았으나 죽음을 각오한 소대원들의 결의앞에 중공군들은 낙엽처럼 떨어졌다.중공군 3백56명 사망에 아군6명 전사,18명 부상. 지난91년 독수리고지위에 태풍전망대가 세워진뒤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전사의 현장 베티고지를 둘러본 사람들이 10만여명에 이른다. 또 베티고지전투등 6·25참전 생존자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육탄용사회」가 당시 11연대를 상징하는 11각형의 충혼탑건립을 준비하고있어 이곳 장병들의 각오를 더욱 새롭게 하고 있다. 초병 박태숙일병(22)은 『최근 북측은 김정일우상화와 핵사찰문제대한 대남방송선전을 더욱 강화,전선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언제 돌발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적을 무찌를 각오가 돼있다』고 다짐했다. 6·25때 전장에서 부친을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양치규대령(43·육사29기)은 『최근 북한군초소에서 집단패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는등 해이해진 군의 상황을 감지할수 있다』고 설명하고 『이럴때일수록 내부불만을 해소하기위한 국지전등의 도발가능성이 많은 만큼 경계태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북한군은 지난달 2일과 지난16일에도 아군초소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가해왔다고 남북대화의 그림자속에 가려진 전선의 실상을 설명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즉필생」의 교훈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근무에 나서는 우리부대장병에겐 두려움이나 공포가 있을 수없다는 중대장금진석대위(30)는 『전선 이상무』를 외치며 경계근무를 벌이고 있는 초병들을 향해 베티전투당시의 선배들보다 더 깊은 신뢰와 필승의 눈길로 화답했다.
  • 여야,「6·25」 43주 성명

    여야는 24일 6·25 43주년에 즈음한 성명을 발표했다. ▲강재섭민자당대변인=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과업은 지나친 환상도 금물이고 남북관계를 적대적 차원에서 보는 냉전적 사고도 지양되어야 한다.북한은 민족자멸의 핵개발보다는 천만 이산가족의 고통을 해소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남북대화에 서슴없이 나오기를 촉구한다. ▲김도연민주당부대변인=정부는 통일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진취적이고 대승적인 자세로 수렴,금세기안에 남북화해의 공동체가 민족적 합의로 건설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최근 냉전적 사고에 젖은 일부 기득권세력에 의해 정부내의 통일정책에 혼선이 초래되고 있음을 깊이 우려한다.
  • 오늘 「6·25」 43돌/향군 등서 기념행사

    25일은 한국전쟁발발 43주년. 재향군인회·반공연맹 등 각종 단체들은 이날 지역별 기념행사를 갖고 6·25의 참뜻을 기리고 통일의 염원을 실현하기위한 결의를 다질 예정이다.
  • 이런 전쟁(외언내언)

    「6·25」에 대한 역사적 정의라든가 전쟁사적 규정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그래서 동란이니 사변이니 하기도 하고 한국전쟁·조선전쟁 또는 그냥 「6·25전쟁」이라고도 쓴다. 「6·25」는 이를 체험한 세대에겐 민족적 비극이며 악몽이다.휴전선철책과 판문점,국립묘지와 녹슨 훈장,빛바랜 사진 한장이 그 비극의 실체다. 19 49년 4월13일 당시 38선을 시찰한 미 전권대사 필립 C 제섭은 『실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최전선에 서니 전율을 금할 수 없다』고 소감을 밝혔다.50년 6월초에 주한미대사 존 무초는 『북한군이 38선에 집결되고 있다.남한군은 형편없이 약하다』는 내용의 전문을 본국정부에 보냈다.그는 그 직전 워싱턴에서 『한국군이 전차와 장비로 증강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서울로 귀임한 터였다.국무차관 딘 러스크는 무초의 전문을 읽고는 같은 소리거니 판단하고 서랍속에 처박았다. 50년 6월19일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38선 부근으로 소제 전차와 중포가 대량으로 이동완료됐으나 병사들의 동태는 「쥐죽은 듯이」고요했다는 게 당시 미국방장관 존슨의 훗날 증언이다.바로 엿새후 일요일 새벽에 북한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총공격을 감행했다. 남침공격에 앞서 김일성이 공격계획을 마무리할 무렵 소련의 스탈린은 계획승인과 동시에 인민군의 사단·연대에 배치됐던 소련측 군사고문단을 모두 본국으로 소환했다.그 당시 소련공산당 초급간부였던 흐루시초프가 의아해서 까닭을 물었다.『고문단을 그대로 거기에 두는 것은 너무 위험해.잘못하면 포로로 잡힌단 말야.우리가 끼어들었다는 증거를 보여선 안되지.그건(전쟁)모두 김일성의 일이지 우리일은 아니니까』흐루시초프회고록에 나오는 스탈린의 대답이다.또다시 「6·25」를 맞는다.아니 벌써 43년전의 일이다.
  • 6·25… 모두 잊고들 있는가(사설)

    국토의 허리가 잘려있는 그 상태대로 또 한번의 6·25를 맞는다.동서이념대결의 시대상황으로 해서 광복된 조국이 남북으로 갈려 동족끼리 3년 남짓한 전쟁을 치러야했던 비극이 6·25였다.이제 그 싸움 있게한 냉전시대는 공산주의의 조락과 함께 스러졌건만 지구촌에 유일한 냉전시대 산물로서의 분단국인채로 그날의 아픔을 되새겨야하는 우리의 마음은 쓰리고 착잡해진다. ○「침략상기」와 「통일추구」 사이 6·25에대한 인식은 해가 갈수록 달라져간다.흔히 구세대는 「침략의 상기」로서,전후세대는 「통일의 추구」로서 인식한다고 표현되기도 한다.그만큼 「역사」는 흘렀다.발발한 그해가 43년전이고 보면 지금 50세초로가 국민학교 1∼2학년이었다는 얘기이다.그렇다할때 이 역사적인 민족의 비극을 피부로 지각할수 있었던 세대는 이제 20%안팎으로 좁아들었다고 할것이다.그 현실 속에서 「역사」로서만 객관화하려는 경향은 짙어간다.그탓에선지 일부 체험세대까지 잊어가고들 있고 또 그러한 사고의맥락에서 남북한문제에 접근하는 층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현실은 포성만 멎었다뿐 그날의 연장선상에서 대치가 계속되고있는 상황이다.힘의 균형이 무너질때 언제 그날이 재현될지 모르는 살얼음판 휴전선이 그 대치의 경계가 아닌가.더구나 그날에 전단을 연 북의 무리들은 그날에 내건 「적화통일」의 기치를 이 엄청나게 변화한 지구촌의 시대상황 속에서도 결코 내리지않고 있다.붙들어야할 종주국을 잃은 마당에서 외로워진 생존을 위하여 더 배타적으로 냉혹해졌다고도 할 것이다.핵무기 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세계에 도전장을 낸사실이 그 일단을 말해준다. ○불변의 노선 「적화통일」 그들은 휴전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높이2백m에 이른다는 「전승」기념탑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인민들은 굶주리고 있는데도 6·25를 「이긴전쟁」으로 선전하고자하는 무리한 공사이다.그들은 그렇게 내부결속을 다지면서 개방을 외면한채 체제유지를 위한 폐쇄사회의 틀을 더 굳혀나가고 있다.이와같은 그들의 기본자세를 외면한채 공개사회이기에 지닐수있는 가치관의 잣대로써저들을 재려하는데는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통일의 추구」도 「침략의 상기」를 바탕에 깔때 비로소 올바른 이정표를 세워나갈수 있다고 할것이다. 사실,민주사에 커다란 오점을 찍은 저들의 죄업을 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물질적 피해는 잠시 젖혀두더라도 국군·유엔군의 사망·실종·부상자 1백15만8천명,민간인 1백만명이라는 인명피해만으로도 참상을 알기엔 충분하다.거기에 전재민 4백만명,전쟁미망인 30만명,전쟁고아 6만명,수많은 실향민이 있다.이는 이쪽의 피해일뿐이니 피아를 합치면 얼마로 될것인지 모른다.그 상처를 쉬이 잊을수가 있겠는가.또 잊어서 되겠는가.국립묘지에 잠들어있는 영령은 말할것 없고 수많은 무명용사와 무고하게 죽어간 원혼이 잊지못한다.그뿐이 아니다.그날의 상이용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훈병원에 누워 그날을 신음한다.「침략의 상기」를 바탕에 깐 「통일의 추구」여야 한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 ○잊지 않는것이 재발 막는길 그날에 배후조종한 구소련과는 물론 그날에 우리와 직접 총칼을 맞댄중국과도 수교를 했다.그만큼 세상은 변전했다.그렇건만 유독 북녘의 내나라 내겨레와는 그날과 다름없이 갈라선 채로 오가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다.그럴수록 겨레의 통일에의 욕구는 용솟음친다.현실보다도 이상쪽에 치우치는 젊은 혈기의 경우는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냉철할수 있어야한다.북한의 인민을 생각하면서도 그 인민과 그 위에 군림하는 집권층은 다르다는 사실에 상도해야한다.남한에 남아도는 쌀을 괭이낯짝같은 체면때문에 못받는것이 집권층이라면 이밥에 고기국물 배부르게 먹기 바라는 것이 인민들이다.감시원 있는데서는 『경애하는…』 운운하다가도 그가 잠시 눈돌리는사이 손을 꼭쥐며 눈물흘리는 고향방문단 누이동생의 마음과 집권층마음을 혼동하지 말자는 뜻이다.하건만 대화의 상대는 불행하게도 그 집권층이다.그점에서 민족을 앞세운 감상이나 여과되지못한 정열은 저들에게 자칫 오판만 심어줄 뿐 지향하는바 통일에의 길에는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겠다. 국민들은 전쟁재발에 대한 우려도 적잖이하고있다(61.1%=91년조사).그러나 그날을 잊지않는 것이 재발을 막는 길임은 두말할것이 없다.잊진않되 민족의 양심으로 돌아올때 용서하고 그 바탕에서 순이에 따를때 통일은 이뤄진다고 할것이다.새문민정부 아래서 그를 위한 지혜와 힘을 모아 나가게 돼야겠다.
  • 광주박물관·OB공장 들러/모범용사 초대

    【광주=최치봉기자】 서울신문사가 6·25동란 43주년을 맞아 초청한 국군 모범용사와 배우자등 1백34명 일행은 24일 광주시립 민속박물관 충장사 OB맥주 광주공장등 문화유적지와 산업현장을 차례로 둘러본뒤 하오에 이균범 전남지사가 베푼 만찬에 참석했다. 이들 일행은 이에앞서 광주시청을 방문,강영기시장과 오찬을 함께하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등으로 달라진 광주의 새로운 모습등에 관해 환담했다. 강시장은 이 자리에서 『광주시는 올 민족 대화합을 이루는 전국체전 개최와 5·18 기념사업추진 등으로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며 『이번 광주방문이 국토방위에 열중하고 있는 모든 장병들에게 광주의 참모습을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오찬에는 안준광주시교육감 정순길광주시의회의장 정기식공군제1전비기지전대장등이 참석했다.
  • 다시 맞은 동란의 그 아침에/박경석 군사평론가·예비역육군준장

    ◎북은 아직도 기회를 노린다/과격시위·불법쟁의·감상적 통일론 자제를 6·25동란 발발 43주년을 맞는다.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그때의 상처가 워낙 크기 때문에 참전세대에는 그리 먼 일 같지 않다. 김일성은 남침준비를 완료하고 병력을 휴전선에 전진배치 시켜놓고도 1950년 6월8일에 대남방송을 통하여 8월5일에서 8일까지 서울에 통일입법기관 설치를 위한 총선거 실시를 제의해 왔다. 이 발표문이 전파를 타고 세계에 퍼진 다음날인 6월9일에는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알고 있는 소련 외상과 중공정부 대변인이 「이번에 발표된 결의문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가장 합리적인 내용」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북한당국이 감금하고 있는 민족지도자 조만식을 볼모로 하여 남로당의 지하 공작책인 김삼룡과 이주하 양인을 교환하자는 제의를 하면서 우리를 철저히 기만하고 있었다. 전쟁발발후 4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김일성과 그의 광신자들은 우리에게 단 한번 성실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시종 일관하여 우리의 분열과 붕괴를 획책하는 술수를 부려왔다. 지금까지도 북한당국은 6·25동란 발발을 「미제와 이승만 도당에 의한 도발에 대응한 자위책」에서 연유했다고 강변하고 있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남조선 군군의 북진론」이 허위임이 백일하에 밝혀졌지만 일부 의식화된 몰지각한 부류들은 아직도 착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문민시대를 맞아 자칫 해이하기 쉬운 북한에의 대비책에 더욱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더욱이 한심스러운 것은 일부 전후세대들 가운데 북한의 불법남침에 의한 동족상잔이라는 역사적 진실까지도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진실을 믿는 대학생은 불과 30%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자성해야 한다.지난 세월 권위주의 정치하의 불신의 늪에서 자란 탓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북한당국자들은 더욱 인민에 족쇄를 죄고 있다.핵문제를 비롯하여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면서 「시간벌기」와 남침의 「기회잡기」에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당국은 43년간 단 한 해도 우리에 대한 야욕을 버린적이 없었다.어떤 방법으로라도 우리에 대한 적대행위는 계속해 왔다. 우리는 대망의 문민시대를 맞아 보다 알찬 조국의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그러나 김일성과 그의 광신자들은 오히려 남침기회 조성의 호기로 삼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근간의 한총련 과격데모 및 일련의 노사분규는 북한당국자들에게 호재를 제공하는 꼴이 된다. 얼마나 좋아하고 있겠는가. 데모 학생들이 진압 경찰관을 치사하고 노동현장이 전장을 방불케 하는 난장판을 그들이 본다면 박수를 치며 통쾌하게 생각할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또한 일부 대학생의 감상적 「평화통일론」은 다수 국민에게 합리화될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김일성의 평화통일논리는 민족화합 차원이 아닌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족벌권력 영구화에 있다는 뚜렷한 색깔이 있기 때문이다.이 시기에 있어서 몰지각한 대학생과 과격 근로자의 망동을 철저히 응징하지 않고서는 신한국 건설은 한낱 무의미한 공염불이 될 것이다.그들은 자의가 아닐지라도 이미 김일성과 그의 광신자들의 리모트 컨트롤에 의해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참전세대가 공산주의자와 싸워 피로써 쟁취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해서는 안된다.망동에 휩쓸리고 있는 젊은이들이여! 구소련군이나 구동독군 병사들이 스스로 사용했던 각종 비품을 들고 나와 관광객에게 팔려고 서 있는 저 처량한 몰골에서 오늘의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읽을 수 있다면 그대들은 곧 질서를 지킬 것이다. 북쪽의 눈은 지금 이 시각에도 적화야욕에 불타고 있다.그러므로 감히 6·25동란은 계속되고 있다고 결론짓고 싶다.
  • 북침론·남침유도론 논거 상실/러 극비목록 전달 의미와 전망

    ◎49년부터 중공군 개입전까지 기록/구소군 투입·지원무기 등 밝혀질듯 냉전시대의 산물인 한국전쟁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고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가 멀지않아 역사적 확인 절차를 거칠 것 같다. 정부가 러시아로부터 앞으로 우리에게 건네줄 6·25관련 외교문서들의 목록을 전달 받은 것이다. 우선은 목록만을 전달받았으나 옐친러시아대통령은 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방문때 문서사본을 모두 건네주겠다고 지난 8일 러시아를 방문한 한승주외무장관에게 약속했다.향후 문서가 공개되면 6·25를 둘러싼 모든 논쟁들이 종지부를 찍게되고 실상이 보다 분명해질 것으로 점쳐진다. 현재까지 전해진 바에 의하면 문서목록은 49년 1월부터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인 50년 10월까지의 기록이다.약 40페이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한 러시아측의「비밀요청」으로 정부는 받았다는 사실외에는 내용 일체를 비밀에 부치고 있다.한외무장관도『내용은 너무 앞서가지 않는 것이 양국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무척 조심스런 반응이다.한장관이 옐친대통령에게 목록을 건네받은뒤 직접 챙겨 귀국후 김대통령에게 단독 보고한 것도 이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황에선 외교문서의 내용을 파악하기는 아직 이르다.다만 이 자료 정리 책임자인 볼코고노프대통령보좌관이 그동안 언론등을 통해 밝힌 사실로 미뤄보면 한국전쟁 개전부터 정전협상이 시작된 배경까지의 모든 과정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특히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2년안에 전쟁을 끝낼수 있으니 지원해 달라』는 부분,50년 5월 김과 스탈린이 개전일자를 결정한 부분,김이 북한주재 소련대사에게 남침동의 요청대목등이 들어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러한 문서들은 상투적인 북침론이나 일부 소장학자들의 남침유도론이 더이상 자리할수 없게 만들 것이라는 게 외무부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여기에 그 기간으로 보면 전쟁직전 소련이 「북침설」을 위한 국제 여론 조성과정,전쟁계획 수립과정,소련군 투입상황등도 포함된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볼코고노프보좌관은 『스탈린은 북한군이 궤멸적타격을 받게되자 2개 항공사단과 2개 고사포사단으로 특별 편성된 소련군을 투입했다』고 밝힌바 있다.이를 감안하면 49년 9월부터 50년 4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지원한 무기내용과 군투입상황도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구체적인 내용을 아직 파악할수는 없지만 이번 외교문서가 우리에겐 「현대사의 확실한 정립」이라는 측면에서,러시아와의 관계증진 차원에서 커다란 외교적 성과라 할수 있다.그러나 중국으로부터도 관련 서류를 전달받아야 한다는 점이 여전히 외교적 숙제로 남아있다.
  • 러,6·25관련 문서목록 전달/외무부 인수

    ◎김일성­스탈린 외교전문 포함 수백건/사전 남침준비·중개입경위 밝혀질듯/“김 대통령 방러때 문서사본 제공” 러시아정부는 6·25한국전쟁 발발 43주년을 맞아 당시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 사이에 주고받은 전문을 비롯해 러시아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한국전쟁 관련문서의 목록을 우리 정부에 전달해왔다고 홍순영외무부차관이 24일 발표했다. 이 목록에 들어있는 문서들은 북한이 전쟁발발 전해인 49년1월부터 전쟁준비를 위해 구소련과 주고받은 전문을 포함,중공군이 참전한 50년 10월까지 소련의 군투입및 무기제공 내용을 밝혀주는 것들이라고 홍차관은 말했다. 이들 문서 내용 자체가 공개되면 한국전쟁이 한국군과 미군의 북침에 의한 것이라는 북한측의 주장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고 북한측이 일찍부터 남침준비를 해왔다는 사실과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경위가 밝혀지는 등 한국전쟁의 진상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40페이지 분량의 이 목록은 한승주외무장관이 유럽을 순방하면서 러시아를 방문중이던지난 7일 옐친러시아대통령을 예방했을 때 옐친대통령이 직접 한장관에게 건네준 것이다. 옐친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러시아정부는 한국전쟁 관련 문서의 발굴과 수집및 정리작업을 하고 있으나 워낙 방대한 분량이어서 우선 목록을 전달한다』면서 『목록외의 문서 사본은 김영삼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면 직접 전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서목록은 러시아정부 문서보관소와 국방부,구KGB등에 산재해 있는 한국전쟁 관련 문서 수백건의 제목과 이에대한 간단한 요약설명이 첨부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 문서목록은 물론 앞으로 러시아측으로부터 전달받을 문서사본도 일단 국사편찬위에 넘겨준 뒤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정부는 한국전쟁의 진상규명 차원에서 중국 정부측에도 보관중인 관련 문서 사본의 공개와 인도를 요청할 방침이다.
  • 독립기념관·엑스포 방문/모범용사 초대

    【대전=이천열기자】 서울신문사가 6·25동란 43주년을 맞아 30번째로 초대한 국군모범용사 68명과 배우자 등 1백34명 일행은 23일 상오 천안 독립기념관과 대전 엑스포 현장을 차례로 관람한데 이어 하오에는 대전시청을 방문,염홍철시장이 베푼 만찬에 참석했다. 염시장은 이 자리에서 『대전시는 군 본부가 모두 이전해 와 군의 중핵도시로 탈바꿈했다』며 『이번 대전방문이 민·관·군의 유대를 더욱 굳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이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이날 만찬에는 맹귀재 32사단장,조창현 607기무부대장,문희흔 505여단장 등이 참석했다. 모범용사 일행은 산업시찰 3일째인 24일 광주시와 전남도청을 방문하고 민속박물관을 돌아볼 예정이다.
  • 6·25 반미집회/북,이례적 취소/대미유화색 일환

    【워싱턴 연합】 북한은 대미 우호제스처의 일환으로 이번주 북한전역에서 개최할 예정이던 연례 반미집회를 취소했다고 워싱턴 타임스지가 23일 김종수 유엔주재 북한부대사의 말을 인용,보도했다. 김부대사는 지난번 뉴욕에서 열렸던 미·북한회담의 정신을 훼손시키지 않기위해 6·25발발 기념일을 맞아 북한 전역에서 연례적으로 가져온 반미집회를 취소했다고 밝히고 이같은 조치가 미국정부와 원만하게 대화를 풀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제스처로 간주되길 기대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이 신문이 전했다. 이 신문은 또 북한측이 다음 미·북한회담 개최장소를 평양으로 제안했으나 이번 회담이 내달초 제네바에서 개최될고 개최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하고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사찰을 끌어내기 위해 주한미군에 대한 동시핵사찰을 허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 구소의 한국전개입 비사:상

    ◎“소 2개비행사단 50년11월 첫 참전”/극비특명… “계급장없이 중공군 위장”/당시 비행단 정보장교 올로프전사특별기고/중국 안동에 본부… 총병력 2만6천명 투입/51년3월 증파… 미기와 북 상공서 공중전/스탈린,해군출전도 계획… 미 자극 우려 포기 ▷남침 초기◁ 러시아가 개방·개혁정책추진으로 철의 장막을 걷고 한국과의 교류를 확대함에 따라 한국전쟁관련 비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6·25발발 43주년을 맞아 당시 소련군 정보장교(대위)로 9개월동안 소련의 제64비행단에 근무했으며 현재 러시아군사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세묘노비치 올로프박사(69)의 증언을 3횡에 걸쳐 게재, 구소련의 한국전 참전비밀을 파헤쳐본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3월 초순 어느 날 모스크바 군사영어학교에 근무하던 나는 새 임지로 전출명령을 받았다.그렇게 해서 그해 10월까지 8개월여동안 한국전에 참전하게 됐다.근무지는 한국전 지원임무를 맡은 소련공군 제64비행단이 주둔하던 중국의 안동. 정보장교로 참모본부에 근무한 덕에 나는 당시 비행단의 병력규모,위치등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다.우선 참모본부 아래 미그 15기 3개사단이 있었다.제1,2사단은 1950년 11월 최초로 안동에 자리를 잡았고 제3사단은 이듬해 3월 배치됐다.그외 구경 85㎜,37㎜로 무장한 대공포 2개사단이 별도로 있었다. ○미그­15 3개사단 병력수는 참전초기부터 종전을 맞아 철수할 때까지 2만6천명선이 계속 유지됐다.이는 조종사 3백명이 포함된 숫자이다.보유무기로는 주력기종인 미그­15기가 1백80∼2백대,야간전투기인 LA­11(재래기종)25∼30대,대공포구경85㎜가 1백40∼1백60문,37㎜포가 1백30∼1백50문이 있었다. 당시 소련당국은 이 전쟁에 불개입을 선언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그래서 여러가지 비상수단이 취해졌다.모든 병력이 기장,계급장이 없는 중국군복을 입었고 조종사들은 비행중 무선교신시 절대 러시아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물론 이런 지시들은 애당초 지켜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조종사들이 초기에 조종간옆에다 간단한 교신어를 한국어나 중국어로 음을 적어놓고 발음만 흉내내기도 했으나 작전시 이로 인한 혼란이 커서 대부분 러시아어로 교신을 했던게 사실이다.물론 전투기들도 모두 중국·북한표지를 했다. ○중국·북한기 표지 보다 중요한 점은 혹시 격추돼 참전사실이 탄로날 것에 대비해 작전지역이 철저히 제한됐다는 사실이다. 이 원칙은 종전때까지 지켜졌다.동으로 동해,남으로는 전선에서 1백80㎞ 떨어진 39도선이 우리의 작전한계선이었다.즉 북한영토내에서는 압록강을 끼고 청진과 신안주사이가 우리의 작전지역이었다.미군측은 이 지역을 「미그앨리(소로)」라고 불렀다. 전쟁개시 2개월 전인 1950년 4월 김일성이 당시 외교부장 박헌영과 함께 극비에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가 전쟁지원을 요청한 이래 스탈린은 참전에 끝까지 적극적인 태도롤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의 직접무력대결을 원치않았기 때문이다.마지막에 스탈린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리게 만든 것은 모택동의 참전결정이었다.김일성은 전쟁준비를 착실히 진행시켜왔고 특히 중국내전에 참여해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한 1만4천명의 북한출신 공산주의자들이 50년초 귀국,정규군에 합세한 것을 계기로 북한군의 사기는 상당히 드높았다. 이런 여러 고무적인 정황들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의 참전을 두려워했다.개전 이튿날인 6월26일 대련항을 떠난 소련군함들이 참전의혹을 받지 않도록 즉시 귀항명령을 받았고 이후 전쟁기간 내내 소해군은 한국전에 개입치 않았다. ○중 개입 영향받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됐을 때도 스탈린은 크게 낙담하면서도 무력개입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당시 정치국원으로서 모스크바 시 당제1서기였던 흐루시초프가 무력개입을 의미하는 「즉각적인 방어정책수립」을 강력히 권유했으나 스탈린은 이도 묵살했다.스탈린의 마음을 돌리게 한 것은 결국 중국군의 개입이었다. 모택동은 중국의용군의 한국파병을 결정하며 스탈린에게 병력이송과 물자보급을 위해 압록강 교량6곳의 안전이 긴요하고 이를 위해 소공군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누차강조했다. 1950년 11월 말 소공군 2개 전투비행사단이 실전에 투입되자 미군의 B­29기들이 압록강 철교들에 엄청난 폭격을 가했다.주 목표는 안동과 신의주를 잇는 교량 2곳이었다.하나는 복선철교였고 또 하나는 자동차·철도 겸용 다리였다. 당시 북한은 임시수도를 신의주에 두고 있었고 김일성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중국군·북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B­29기 폭격이었다.그래서 그 해 11월 12월 사이 미그­15기의 최대공격목표도 이 B­29였다.안동에서는 40∼50대의 미그­15기가 당시 압록강을 넘어 출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50년말 소련군지도부는 제공권을 되찾기 위해 64비행단의 보강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그 결과 이듬해 3월 소련공군의 영웅 이반 코제두프 대령이 이끄는 새 비행사단이 안동에 도착했다.이렇게 해서 그해 봄 북한상공에서는 보강된 소군기와 미군기 사이에 전례없이 치열한 공중전이 전개됐다. ▷필자 약력◁ ▲1924년생 ▲러시아군사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역사학박사) ▲소공군 64비행단 정보장교로 한국전참전 예비역대령 ▲저서 「절대무기의 개랍」(1988)「제3제국과 제3의 법칙」(1993)
  • 부전전투 영웅 이병형씨(예비역 육군중장 전쟁기념사업회장)는 말한다

    ◎“6·25 끝난줄 아는 착각 안타깝다”/안이한 안보관으론 나라지탱 못해/우방지도층 자제의 한국전 희생 본받아야 전선에서 산화한 전우와 두고온 산하를 못잊는 노병 이병형씨(67·예비역 육군중장·전쟁기념사업회장)에게는 아직 6·25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사에 길이 남을 전과를 세운 전쟁영웅이기도 한 이씨는 『지금 모든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지난76년 2군사령관을 끝으로 예편한 이씨는 30년 가까이 군에 있으면서 참군인의 면모를 과시,칭송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다.그의 군인 됨됨이를 높이 산 노태우전대통령도 88년 취임초 그에게 전쟁기념사업회 일을 맡겼으며 장태완전수경사령관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군인의 한 사람으로 그를 꼽았을 정도. ­다른 사람들 하고는 달리 6·25를 맞는 소감이 각별하다고 봅니다만.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합니다.6·25 발발소식을 듣고는 마치 댐밑에 서 있다 댐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에는 뚜렷한 승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승패없는 전쟁에서는 전쟁을 치른 대가를 보상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아직도 6·25전쟁의 승패가 나지 않았다고 보시는 겁니까. ▲전혀 결정이 안났다고 봅니다.이질적인 집단간의 투쟁에서 아직 가부간의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김일성이 엄연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6·25는 어디서 맞았으며 그때 얘기를 좀 들려주시죠. ▲당시 수도사단 18연대 인사참모로 대위였습니다.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원산탈환후 북진할 때는 18연대 1대대장으로 참가 했습니다.전쟁얘기를 다 할수는 없지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몇 개 있지요.50년 12월초로 기억되는데 두만강을 90리 정도 앞둔 함북 부령까지 북진해 갔을때 갑자기 연대에서 대대장회의를 소집하더니 철수한다고 하더라고요.중공군 때문이었지만 그날 새벽 이미 2대대 6중대는 선발대로 두만강 쪽으로 출동한 상황이었지요 6중대에는 통신이 안닿아 할 수 없이 남아있는 병력만 철수했습니다.6중대를 먼저 보낸 것은 적의 급속한 진격을 막기 위한 일종의 작전이었지요.당시 6중대장인 이원개소령은 그 사실을 몰랐고…. 고향이 부령인 이소령은 얼마전에 소령으로 진급했음에도 부령전투에 참가하겠다고 고집,중대장으로 남아 있었습니다.나중에 들은 소문에 따르면 6중대 1백60명은 고립돼 유격전을 펼쳤다고 합니다만 이처럼 알려지지 않은 고귀한 희생들로 인해 이 나라를 이만큼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함남 북청출신으로 실향민인 이씨는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작전시 동부전선에서 안강→청송→평창을 거쳐 서림(양양군)지역의 38도선을 돌파한 후 북진의 선봉대열에 서서 간성→양구→화천→신고산을 경유,원산까지 진격한다.원산탈환후 18연대 1대대장이 된 이씨는 대대를 이끌고 함흥을 공격,점령하고 50년10월 하순에는 함흥 북방 신흥지역의 백암산에서 부전호를 따라 남하하는 중공군 5명을 최초로 생포한다.곧이어 1개 중대의 중공군을 기습,매복으로 전멸시켰다. ­최근 탈냉전분위기등 주변상황변화로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많이 해이해진 것 같습니다.국민들이 안보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6·25는 종전된 것이 아닙니다.휴전상태가 너무 오래되다 보니 모두들 전쟁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남북이 유엔에 가입하고 남북협상등이 있고 보니 그렇게들 보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안보관을 개혁하지 못하고서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특히 권력층·지도층·부유층에 문제가 있습니다.나서야 할 사람들은 항상 뒤로 빠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이익의 방패로 썼기 때문에 망국의 설움과 6·25를 겪었던 것입니다.군대가는 문제만 해도 지금도 큰 변화가 없습니다.권력층·지식층·부유층자제들이 나라를 지키는 데 소극적입니다. 이게 고쳐지지 않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외국의 지도급 자제들이 6·25에 참전,많이 전사했다는 점을 거울삼아야 합니다.우리의 안보의식을 혁신해야 할 것 입니다. ­6·25때 생명을 내던져 쌓은 군의 신뢰가 최근 많이 실추된 듯 합니다. 군원로로서의 견해는. ▲군은 특별한 조직이 아닙니다.군도 국민의 일부입니다.국민이 합쳐서 군을 이루는 것입니다.국민들 이익에 반대되는 일이 있어선 안될 겁니다.군과 민이 별도라는 개념은 바람직하지 않아요.최근 군내에 「하나회」등 사조직이 문제가 됐다고 들었습니다.군내에선 사조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물론 일부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국민들도 전체 군과 관련지어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는 요즘 전쟁기념관건립에 몰두해 있다.6·25를 경험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동족상잔의 비극을 똑바로 알려주고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헌신함으로써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한 노병의 한을 달래고 있다.
  • 「제주도 소설」 잇따라 발표/제주 출신작가 오성찬 현길언 한림화

    ◎「어두운 시대…」「껍질과 속살」「꽃한송이…」 출간/「4·3사건」「6·25」 등을 토속정서로 묘사 제주도를 작품의 주요무대로,제주도의 토속정서를 소설언어로 그려낸 이른바 「제주도소설」이 오성찬,현길언,한림화등 제주출신작가들의 잇따른 발표로 문단의 이목을 끌고 있다.최근 발간된 오성찬의 「어두운시대의 초상화」(푸른숲),현길언의 「껍질과 속살」(나남),한림화의 「꽃한송이 숨겨놓고」(한길사)등 3편의 소설집이 그것. 이들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막다른 변방으로 자리한 제주도에서 과거에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그리고 지금 벌어지는 일상사를 토속정서와 독특한 설화에 담아 제주도특유의 사투리로 표현하고 있다.이들 가운데 현재 한양대국문과 교수로 있는 현길언을 제외한 두사람은 아예 제주도에 정착해 있다. 오성찬의 「어두운…」은 6·25직후 서귀포에 피난와서 살았던 천재화가 이중섭의 삶을 소재로 한 표제작을 포함,7개의 작품을 싣고 있다.자신의 15번째 소설집인 이 작품집은 작가가 10년정도 문예지등에 발표해온 중·단편가운데 무게가 느껴지고 애착이 가는 작품만 한데 모았다.표제작은 이중섭과 동시대를 거쳐온 한 무명화가가 제주도박물관 학예관으로 취임,개관준비를 위해 이중섭이 제주도에서 그렸던 그림과 인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라는 범속한 인물과 「천재」로 불리는 이중섭의 삶을 대칭적으로 살피고있다.현대인들이 쫓고 있는 허상의 의미를 분석한 이 중편속에는 이중섭의 제주도시절을 반추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거리가 곳곳에 녹아있다.또 단편 「연북정」과 「잡초이야기」는 조선시대 제주도의 역사적 사실에 착안한 작품이다. 오성찬은 지난 69년 군대문제를 다룬 「별을 따려는 사람들」로 등단,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이나 오랫동안 구전되어온 전설등을 직접 취재하여 문학적인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캐릭터의 작가로 제주신문기자등을 거쳐 현재는 제주역사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제주토박이. 현길언도 나이 40살이 되던 지난 80년에 등단할때까지 그곳에서 태어나 중년기까지 보냈다.그의 작품 「껍질과 속살」중 단편인 「김녕사굴 본풀이」는 제주도의 전설을 소재로 삼고 있다.제주판관이 유가적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김녕사굴을 없앴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불행한 운명을 맞는다는 줄거리로 제주사람들의 현실과 논리를 뛰어넘는 집단의 꿈과 진실,그리고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또 「우리들의 조부님」에서 보듯 제주도 4·3사건때 억울하게 아들을 잃은 노인이 죽음을 얼마 앞두고 아들의 모습으로 빙의해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는등 자신의 체험을 소설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그는 문학이란 「체험의 진실」을 어렵사리 주워 모으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인 4·3사건이나 6·25에 대한 작가의 입장은 비교적 중립적이다. 한림화의 「꽃한송이…」는 제주섬을 위한 작가의 10년에 걸친 진혼곡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제주여성들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삶을 소설을 통해 표현해 보고자 하는 작업이었다.「여정들」「자청비」「비바리」등 작품속에는 우리가 「해녀」라고 부르는 잠수세계와 지금 우리 여성계가 이루어내려는 여성사회의 모델이 제시돼 있다. 작품전편에는 제주지역의 말이 집요하리만치 고집스럽게 쓰이고 있다.작가는 『우리의 땅에 이런 언어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우리의 동족이 있음을 배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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