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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는 조국 해방전쟁” 주장/한총련출범식 유인물 파장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파쇼정권」 규정/“대북 핵사찰압력 방관않겠다” 위협도 경찰이 한총련출범식과 관련,용공·이적행위 주동자및 연계·배후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선 것은 학생들의 노골적인 반국가적 불법행위를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찰은 제2기 한총련출범식행사에서 화염병을 던지거나 쇠파이프를 사용하는 등의 폭력시위는 줄고 참가학생수도 지난해 5만명에서 2만5천여명으로 감소했으나 국가보안법위반 유인물및 전시물은 예년보다 훨씬 늘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총련출범식에서 드러난 ▲출범식선언문등 6종의 유인물내용 ▲북한정권의 성립과정등을 정당화하는 사진및 모형물전시 ▲범청학련과 통신을 통한 북한과의 연계활동시도등은 명백히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경찰은 이에따라 국가보안법상 찬양및 고무·이적표현물제작및 배포,회합통신,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등을 적용이 불가피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한총련출범식선언문에서 『한총련 백만청년은 현정권을 매국정권·대결정권으로 낙인찍어버리고 새롭게 자주적 민주정부수립투쟁에 다시 일어섰다…』등의 내용을 통해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친미 파쇼정권으로 규정한 것을 비롯,6·25를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한총련의 핵심조직중 하나인 조국통일위원회의 출범선언문에는 『주한 미군철수와 미군기지철폐를 위한 투쟁에 나서자』면서 이미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청학련」조직을 강화,95년까지 연방제통일을 이루겠다는 주장도 담고 있다. 이 선언문은 이와 함께 『이북에 대한 부당한 핵사찰압력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까지 하고 있다. 또 한총련명의로 나온 유인물 「조국통일위원회에 새 돛을 달기 위하여」에는 『연공연북의식에 기반한 민족대단결의식을 확고히 다지는 장이 되어야 한다』면서 출범식에 참가한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다. 전남대 민족사랑학생연합의 「민족의 길 제8호」,「자주적 평화통일 원문」등에도 북한이 평소 주장해오고 있는 연방제통일안과 핵사찰의 부당성,주체사상 등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경찰은 출범식장내에 「조선인민해방군창설」 「타도 제국주의동맹결성」등 북한정권의 성립과정을 정당화하는 사진과 설명을 게시하고 북한이 대외선전용으로 만든 인민문화궁전등 각종 건물모형을 제작해 전시하며 북한체제와 사회의 우월성을 선전한 부분도 용공·이적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 고속철 차관도입조건 확정/리보금리비 1.38%P 낮게 들여와

    ◎프랑스 제공,만기 15∼18년 경부고속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프랑스가 우리나라에 제공하는 23억3천7백만달러의 차관 도입조건이 만기 15∼18년에 금리는 리보(런던은행간 금리) 마이너스 1.38%포인트∼리보 플러스 0.57%포인트로 결정됐다. 재무부는 차관 제공은행인 프랑스의 엥도수에즈은행과 지난 1월부터 벌여온 고속철도 차관의 도입조건에 관한 협상을 마무리,27일 정덕구 경제협력국장과 타부이 엥도수에즈은행 부행장이 재무부에서 합의문에 서명했다. 차관 중 16억1천7백만달러는 만기 18년에 고정금리 연 6.25%인 수출금융으로,변동금리로 바꾸면 리보금리보다 연 1.38%포인트 낮은 수준이다.
  • 「러」 외교문서서 밝혀진 「6·25전야」

    ◎「웅진반도 점령·삼척해방구 건설」/김일성,당초 국지전 계획/개전직전 소·중지원 약속받고 전면전 선회 김일성은 남침계획을 세우면서 초기에 전면전 대신 옹진반도 점령과 강원도 삼척의 탄광지대에 「해방지구」건설등 국지전 전략을 수립했다가 개전 직전 이를 남침 전면전으로 수정했음이 25일 러시아 외무부 비밀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졌다.다음은 김일성이 남침의사를 굳힌 49년 여름 주평양 소련대사관과 모스크바 사이에 오간 전문 요지. ◇49년8월12일=김일성과 박헌영은 남조선이 자신들의 평화통일 제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남조선에 대한 무력공격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함.두 사람은 무력공격이 남조선 내부의 대규모 인민봉기를 수반할 것이라고 강조.슈티코프소련대사는 북한지도자들의 기도가 실현될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함.김일성은 이런 「냉담한」반응을 들은 뒤 남조선 강원도 삼척 탄광지대에 「해방지구」를 만드는 계획을 제시함.슈티코프대사는 이에 대해 그런 일은 매우 신중히 준비하고 상황을 분석한 연후에 실행에 옮겨야한다고 말함. ◇8월14일=김일성은 남조선 공격이 가능하다는 점을 재차 강조.아울러 소련으로부터의 무기,기술지원 조속 실행을 요구.김은 옹진반도 점령문제를 제기함.그럴 경우 38도선에 걸친 수비지역이 줄어 적은 병력으로 국경을 수비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함.슈티코프대사는 김일성과의 이날 면담내용을 전문으로 보고하지 않고 모스크바 귀환후 직접 본부에 보고함. ◇8월27일=슈티코프는 8월12일,14일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이 자리에서 슈티코프는 다음의 이유로 남침이 불가하다는 의견을 제시함.첫째,남침시 미국이 개입할 것임.미국은 무기,탄약공급 뿐 아니라 일본군대까지 투입할수 있다.둘째,미국은 남침을 소련에 대한 적대적 선전용으로 이용할 것임.셋째,북한군은 남한군에 대해 확고한 전력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 슈티코프대사는 「해방지구」안과 옹진반도 점령은 군사적 관점에서 긍정 검토할만 하다는 견해를 밝힘. ◇9월3일=평양발.김일성은 자신의 개인비서겸 러시아어 통역인 문일을 임시대리대사 툰킨에게 보냄.문일은 옹진반도 점령에 대한 소련의 입장을 재차 문의.2주내,길게 잡아 2개월이면 남한전역을 점령할수 있다는 김일성의 뜻을 전달함. ◇9월11일=모스크바발.툰킨대리대사에게 본부의 지시.김일성을 가능한한 빨리 만나 다음 사항을 알아볼것.1,김일성이 남한군의 전투능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2,남조선내 빨치산조직의 활동상황.3,남침시 남한국민들의 반응.4,미국의 대응.5,북한군 전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 ◇9월12일∼13일=툰킨대사 김일성·박헌영과 면담.김은 38도선 지역에서의 충돌경험을 근거로 남조선군의 전력을 약하다고 평가.김은 남한에 1천5백∼2천명의 빨치산이 활동중이라고 밝힘.박헌영은 빨치산의 기여가능성을 높게 평가.남한내 주요 건물,지역의 점령계획이 이미 수립돼 있다고 말함. ◇9월13일=김일성은 남한에 대해 압도적 무력우위를 확보하지 못해 일단 옹진반도 일부와 옹진반도 동쪽의 남조선영토 일부(해주까지)를 점령하는 국지전을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힘. 김은▲옹진반도에 위치한 남조선 2개여단을 패퇴시키고 ▲이 거점을공고히 한뒤 ▲이후 상황전개에 따라 확전여부를 결정한다는 3단계 전략을 제시.옹진반도 점령 뒤 남한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면 남쪽으로 추가공격을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점령지역에서 요새를 공고히 한다는 전략.김일성은 옹진반도 점령시 수비병력의 3분의 1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 이후 김일성은 스탈린과의 2차회담 및 모택동과의 회담을 통해 남침에 필요한 적극적인 군사,정치적 지원을 보장받으면서 전면전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 산업현장에 긴장감/「현총련」·대우자 등 대규모 노조

    ◎6월10일께 일제 쟁의신고키로 해마다 노사분규를 주도해온 「현대그룹노조총연합」과 「조선업종노조협의회」등 대규모 노조들이 6월10일을 전후로 일제히 쟁의발생신고를 낼 것으로 보여 전국산업현장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에따라 올해 노사안정여부는 이들 노조의 냉각기간이 끝나는 6월25일을 전후해 판가름날 것으로 예상된다. 24일 노동부와 「전국노조대표자회의」에 따르면 「현총련」과 기아자동차,대우자동차,「전노협」,서울지하철공사등 대규모 노조들은 지난 20일 대표자회의를 열고 6월10일을 전후로 일제히 쟁의발생신고를 내기로 했다. 이들 노조는 26일 「대규모사업장 임투책임자회의」,6월1일에는 「대규모사업장노조위원장회의」를 잇따라 열어 올해 임투일정과 공동요구사항등을 정할 계획이다. 「전노대」의 한 관계자는 『올 임투의 공동요구사항은 자율교섭보장,노조의 경영참여,해고자복직보장등이 될 것』이라면서 『이같은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파업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현총련」에는 현대그룹 27개 계열사 가운데 현대중공업등 22개사 노조가,「조선노협」에는 대우조선과 한진중공업등 6개사가 각각 가입돼있으며 이들은 13∼17%의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이날 현재 전국 1백인이상 사업장 5천4백83곳 가운데 1천7백32곳의 임금교섭이 타결돼 31.6%의 타결률을 보이고 있으나 30대 그룹의 임금교섭 타결률은 19.1%에 불과하다.
  • 6·25남침 러시아의 증언(사설)

    러시아 최대 국영TV방송인 오스탄키노방송이 최근 한국전쟁의 내막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극비자료와 기록필름을 공개하고 북한의 남침 내막을 소상히 보도했다고 한다.이 자료들은 러시아에선 처음 공개된 것으로 극비리에 추진된 남침전쟁 준비과정에서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자간의 구체적 협의 내용과 소련군의 역할및 중국군의 참전경위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날 방송 진행자로 나온 옐친대통령의 전군사보좌관이며 한국전쟁연구 권위자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장군은 스탈린 개인문서고등에 보관된 극비전쟁자료를 직접 들고나와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무력통일을 희망하는 김일성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필요한 모든 군사장비를 제공키로 약속하는 한편 모택동과도 긴밀히 협의한 뒤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6·25는 그들 3인이 합작해서 일으킨 범죄적 도발행위였음이 명확해진 것이다.「6·25는 북의 남침」이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와 소련 인사들의 증언등을 통해 이미 오래전에 증명됐었다.그럼에도 북한은 시종일관 「남한의 북침전쟁」이라며 허위선전에 열을 올려왔다.뿐만아니라 구공산권 국가들은 물론 상당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조차 북한의 날조된 「북침설」에 동조해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그들의 교과서나 백과사전에 아직도「북침설」로 기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국내 일부 학자와 대학생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이다.「진보」라는 미명아래 북한의 날조된 「북침설」에 동조하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 분단전후의 냉전과 열전의 책임이 북에는 없고 남에만 있으며 그 책임이 중·소에는 없고 미국에만 있다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논리에 매달리고 있기도 하다.북한의 종주국이었으며 전쟁을 허락하고 지원한 러시아 역사기록의 진실을 보고도 북침운운의 그런 논리에 매달릴 것인지 묻고싶다. 북한도 이제는 더이상 날조된 「북침설」을 주장하는 억지는 쓰지말아야 할 것이다.그런 생떼는 이제 더 이상통하지 않게되었다.북침설로 민족과 세계를 우롱해온데 대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비밀자료들은 옐친대통령이 새달 러시아를 방문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그동안 가려져 있던 역사적 진실들이 한층 더 명확히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스스로 가해자측인 러시아 대통령이면서 세계사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비밀자료들을 넘겨주려는 옐친대통령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 정계원로들 목소리 낸다/“대화합” 분위기 맞물려 관심

    ◎신당추진세속 「DJ회동」 돌출/박준규씨/「청와대독대」이후 행보에 촉각/김재순씨/DJ 북핵발언 비난,복귀 경계/이철승씨 정계 원로들이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해 개혁의 열풍속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계를 떠나 「조용히」 지내오던 이 원로들이 최근들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이같은 변화는 김영삼대통령의 「대화합」내지 「소외인사 감싸기」분위기와 맞물려 이들의 재기여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야당시절 양김씨와 경쟁하던 이철승전신민당대표최고위원은 광복후 우익민족운동가들의 모임인 건국애국단체총연합회의 공동의장을 맡아 보수우익성향의 원로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는 한국정책연구회가 펴내는 6월호 「민주정론」에 현시국을 『6·25때보다 더 위험하다』고 진단하는등 각종 여론매체를 통해 우익계의 소신을 아낌없이 피력해오고 있다.이 자리에서 정부의 대북정책의 오류에 대해 핵주권포기를 꼽고 『남북평화협상은 인도주의 인권옹호,반핵,경제협력의 순으로 전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나아가 제2의 6·25를 피하기 위해 ▲해이된 반공의식 강화 ▲안보대책기구의 범국민적인 기구로의 확대 ▲통일문제의 초당적 대처 ▲북한의 대남통일전선전술을 막기 위한 「역통일전선전략」개발등을 제시했다. 아울러 이민우전신민당총재등 원로정객이나 헌정회자문위원등 과거 우익민족운동을 이끌어온 인사들과도 자주 접촉하며 정국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그는 지난 10일 헌정회간부들과 청와대오찬에 참석,안보문제에 관한 소신을 건의할 생각이었으나 개인적인 일로 불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민주정론」지에 특히 최근 북핵과 관련한 김대중아·태재단이사장의 발언을 강력히 비난하는 내용을 실은데 이어 김이사장의 정계복귀를 경계했다. 지난해 「격화소양」(구두를 신고 가려운 곳을 긁음)이란 개혁에 대한 비판론을 남기고 정계를 은퇴한 박준규전국회의장은 「정치성향」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재산파동때 쌓인 감정의 앙금을 그대로 드러내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신당을 준비하고 있다는풍문까지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이러한 소문은 지난 21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과 비밀회동했다는 얘기와 겹쳐 정가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한동안 칩거생활을 해오던 그는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에 개인사무실을 내면서부터 부쩍 바빠졌다.자서전 준비로 기정사실화되기도 한 「완전한 은퇴설」도 주춤한 느낌이다.그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채문식전국회의장·신현확전국무총리·백남억전공화당의장등 구여권인사들은 물론 이철승·고흥문·이중재씨등 구야권 원로들과도 자주 만난다.또 그는 지난해 외유중 경북고 총동창회회장으로 뽑힌 뒤 고향인 대구에도 수시로 내려간다. 역시 「토사구팽」이란 말은 남기고 정계를 떠난 김재순전국회의장은 지난 19일 청와대에서 김대통령과 단둘이 만났다.이자리에서 그는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에 대해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는 절대로 개혁이 성공할 수 없다』고 진단하고 김대통령의 통치에 대한 바람도 표시했다.그동안 신중한 행보를 보여온 그의 이날 독대는 처음이 아니라는 항간의소문도 있지만 김대통령으로부터 원로로서의 「대접」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됐다는 것이 정가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민자당 고문으로 있는 박용만전의원은 당측의 「강제예편」움직임에 강력히 반발,『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민자당고문회의등 기회가 닿을 때마다 당지도부에 「원로대접」을 요구하고 있다.지난해 명주·양양보선에서 패배,민자당고문으로서 「이름」만 유지하던 김명윤전의원은 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일선에 복귀했다. 이밖에 이민우전신민당총재·유치송전민한당총재등 정계원로등도 곧 김대통령과 면담,국정운영에 대한 자문과 협조를 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컴퓨터교육 프로개발 절실/「초중고 전산교육 실태」 세미나

    ◎기종 XT가 대부분… 보급률도 저조/정보망 연결·활용방법훈련 아쉬워 『학부모로부터 컴퓨터를 대여받아 수업에 사용한 뒤 학생이 졸업할 때 되돌려 주자』 『학교 컴퓨터교육의 목적은 컴퓨터 운용기능을 가르치는데 있는게 아니라 컴퓨터의 활용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초·중·고교에서 실시중인 컴퓨터교육이 기재 부족과 기능교육에만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교육개발원(원장 한종하)은 21일 회의실에서 각계 전문가가 참석한 가운데 「교육용 컴퓨터시스템의 발전과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학교에서의 바람직한 교육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컴퓨터교육 공간의 협소는 물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의 개발부족,네트워크 연결의 미흡,전문교사의 절대부족등을 문제점으로 들었다. 정성무박사(교육개발원)는 『각급학교의 컴퓨터보급률이 어느정도 수준에 올랐지만 내용면에서는 미흡한 실정』이라면서 『89년이후 지난해말까지 전국 1만3백96개 초·중·고교에 보급된 컴퓨터 대수는 19만3천7백26대로 XT종이 주종을 이루고 있고 지난해부터 386종이 보급되고 있다』고 말했다.정박사는 『그러나 1개 학급규모의 컴퓨터 교실을 갖춘 정도의 보급률은 국교가 73.5%,중교 72.8%,일반고 61.3%,실업고 95.9%로 기대에 못미친다』고 지적했다. 또 민은기교감(서울 오주중)은 『서울의 1천93개교에 제대로된 시설을 갖추려면 적어도 10년이 걸리며 그 예산 또한 막대할 것』이라면서 『컴퓨터교육이 프로그램의 작성이나 기능숙지,영상과 도표등을 통한 단순한 지도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예를들어 「공자의 사상을 알려면 어느 책을 보아야 하는가」,「6·25동란사는 어느 책에 나와 있는가」에 대한 답이 주어질 정도로 정보망을 갖춰야 하고 또 학년별·학급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도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주영충북과학고 교사는 『컴퓨터교육은 상당한 성과를 거둬 XT기종에 대한 교실망을 설치해 학생들의 성적관리와 인적관리·전자사서함 운영·학생들의 그룹활동등 모든분야에 활용하는데 불편이 없다』고 현장경험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이밖에이만재박사(솔빛조선미디어)는 『컴퓨터의 보급확대를 위해 경제력 있는 학부모가 자녀입학때 컴퓨터를 학교에 빌려주고 졸업할 때 되찾아가는 「대여제도」를 실시하자』고 제안해 관심을 모았다.
  • 러시아의 외교결례/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오늘의 눈)

    러시아정부가 한·러경제공동위 개최를 무산시키면서 19일 우리측에 취한 행태들을 보면 한마디로 「이 나라가 우리를 정상적인 외교파트너로 생각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20,21일 양일간 서울에서 열기로 한 이번 회의는 두나라가 수교후 처음 갖는 것이다.더구나 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방문을 불과 열흘앞둔 시점이고 회담대표도 양국 부총리들이다. 러시아수석대표인 쇼힌부총리일행은 이날 하오5시 특별기편으로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런데 상오10시 갑자기 파노프외무차관이 김석규주러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회담에 응할 수 없다』고 일방적인 통고를 해왔다.아무런 해명도 없었다.김대사는 그 자리에서 국가간의 합의사항에 대해 이럴 수가 있느냐며 강하게 항의했다.하지만 파노프차관은 자신도 메신저일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우리 공관측은 망연자실할뿐이었다.서울로 급전을 띄워 회의무기연기를 보고했다.그런데 하오2시쯤 다시 외무성에서 전화로 대표를 유리 야로프 사회복지담당 부총리로 교체해 예정대로 출국한다는 통보가왔다. 우리 공관 실무자들은 「다시 살아난」기분으로 특별기가 떠나는 공항으로 서둘러 환송나갈 채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김대사와 담당참사관이 대사관문을 막 나서는 3시30분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대표단은 아무도 가지 않는다』는 짤막한 통보였다. 그 시각이후 외무성,쇼힌부총리,야로프부총리측과의 전화연락은 모두 두절됐다.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로부터 이런 외교적인 무례는 우리나라만 당한 것은 아니다.일본은 옐친대통령이 공식방문 사흘전에 방문취소를 통보하는 수모도 겪었다.끝도없이 계속되는 권력투쟁,온갖 음모설…각료명단이 밥먹듯이 바뀌는 이런 나라에서 무슨 격식있는 대접을 기대하는가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국가관계가 이런 「일방통보식」이 돼서는 곤란하다.6·25전쟁,KAL기참사,한인강제이주등 러시아는 아직 우리에게 청산하지 않은 빚이 많은 나라이다.이런 외교 무례는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 6·25남침 모택동이 최종승인/러 비밀문서 공개

    ◎“미군개입땐 중공군 즉각투입” 약속/김일성,개전 한달전 모만나 작접계획 보고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북한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기 불과 1개월전인 1950년5월13일부터 나흘간 북경을 극비리에 방문,모택동에게 3단계로 된 작전계획을 상세히 보고해 최종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이 러시아외무부 비밀외교문서를 통해 처음 밝혀졌다. 이 비밀문서에 따르면 특히 모택동은 김일성과의 비밀회담에서 『미군개입시 중공군을 한국전에 즉각 투입시키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드러나 그동안 정설로 여겨져온 『스탈린이 모택동을 설득,중공군의 한국전개입을 유도했다』는 설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모택동의 요구로 극비리에 진행된 이 회담에서 모는 김일성에게 『소련은 미군과 38도선 분계선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소련군의 직접개입은 어리석은 짓이다.그러나 중국은 그런 협정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북한을 지원할수 있다』고 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모택동은 『중국이 대만을 완전히 점령한 뒤에 전쟁을 시작하면 보다 충분한 지원을 할수 있을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당장 전쟁을 시작하더라도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전쟁개시를 적극 부추긴 것으로 드러났다.이와함께 모택동은 무기·탄약 지원과 중국·북한 국경지역으로 중공군을 추가파견할 것을 김일성에게 제의한 것으로 이 문서는 밝히고 있다. 러시아외무부 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이 비밀문서는 당시 모스크바의 소련외무성과 평양의 소련대사관 사이에 숨가쁘게 오간 전문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전후 40여년만에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이 전문들은 49년1월부터 전쟁초기인 50년10월 사이 스탈린,김일성,모택동 3인간의 직접대화 및 협의내용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그동안 논란이 돼온 한국전쟁발발 책임소재의 규명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 대구 덕산국교 담임 이의환옹과 6학년 1반 「어린이들」

    ◎6·25때 스승에 “재회 카네이션”/9“28 수복때 헤어졌다 90년 극적해후/팔순스승­초로제자 야산수업등 회상 『선생님 부디 오래오래 사십시오』 팔순을 넘긴 옛 국민학교 담임선생님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50대중반 초로의 제자들 눈가에는 어느덧 기쁨의 눈물이 맺혔다. 서울에서 피란온 학생들로 구성됐던 대구덕산국민학교 6학년1반 동창 20여명은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저녁 서울 강남구 K한식집에서 당시 담임이던 이의환옹(81)을 모시고 재회를 기뻐했다. 『나보다 빨리 머리가 희어지는 녀석은 내년부터 나를 만날 생각은 아예 말거라』 이옹의 우스갯소리 한마디에 좌중은 금방 웃음바다가 됐다. 이에 뒤질세라 학급의 익살꾸러기였던 강대영씨(56·성림감정원대표)가 그시절 오락시간마다 불러 인기를 모았던 노래 한곡을 불렀다. 『구야 구야 담방구야 어디메서 놀고가냐…』 한명 두명 따라부르다 결국 이옹까지 콧소리로 박자를 맞춘다. 43년전 6·25동란의 와중에서 선생님도 어린 학생들도 모두 헐벗었던 대구 피란시절.모두가일생중 가장 어렵던 때였지만 당시의 스승과 제자들이 만난 이 자리에서 만큼은 모든 기억이 즐거운 화젯거리로 변한다.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서울 매동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이옹은 피란지 대구에서 서울지역 피란학생들을 모아 만든 덕산국민학교 서울피란분교의 6학년1반 담임을 맡았다. 말만 분교였지 교실조차 마련돼 있지 않아 대구 대봉동의 옛 육군관사자리에 가교사를 짓기전까지는 인근 야산에서 수업을 해야만 했다. 『책상 대신 화판을 무릎에 대고 전쟁터에서 주워온 M1소총과 칼빈소총의 탄약통이 책가방겸 의자역할을 했지만 언제나 소풍나온 기분이었죠』 이제는 모두 장성한 자식들을 둔 가장이 되고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기반을 갖춘 초로의 제자들은 그때 일을 되새기며 미소짓는다. 『추우나 더우나 검게 물들인 군복 하나만을 입고 다니면서도 항상 웃음띤 얼굴로 우리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의 당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당시 반장을 맏았던 김시형씨(55·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의 말에 모두들 잠시 숙연한 표정이었다.서울 염창국민학교 교장직을 끝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40년동안을 교직에 몸담았던 이옹은 퇴직한 교직자들의 모임인 삼락회에 나가서도 이들 서울피란 대구덕산국민학교 제자의 얘기로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살 때가 많다. 서울 환도전까지 대구의 연합중학교에 같이 진학했던 제자들은 9·28수복후 뿔뿔이 흩어지고 이옹과의 연락도 끊겼다. 그러다 덕산국시절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사람이름 외는데 천재라고 소문난 박종필씨(56·사업)가 여기저기 수소문해 당시의 급우들을 찾아내 82년 덕산회를 만들었다. 모임이 결성되자마자 어려운 시절 자신들을 이끌어준 이의환선생님을 찾아나선 제자들은 4년전 총무 장덕진씨(56·맥산산업사장)가 옛 담임선생님을 찾아내 오랜 그리움을 풀었다. 이후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이처럼 스승과 제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웃음꽃으로 밤을 지샌다.
  • 평양 우라늄공장 출신 탈출자 김대호씨 증언

    북한 원자력공업부 남천화학 연합기업소 폐수처리반장으로 일하다 생활고와 차별대우를 견디다 못해 북한을 탈출,중국을 거쳐 귀순한 김대호씨(35)는 12일 서울신문에 구술한 탈출기에서 북한이 체제수호를 위해 우라늄 증산을 독려하는 등 핵무기 개발에 혈안이 돼 있다고 증언했다. ◎“북 핵개발비 김일성 특별회계서 지출”/“통일은 핵으로 시작… 핵으로 마무리” 교시/“영변사업 성과에 만족” 김부자 TV 선물/“공해상 섬 날아갔다”… 핵무기 실험소문 여러차레 나돌아 지난 2월 2일 새벽 2시쯤.중국 땅의 따사로운 불빛이 두만강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다.이제 저 강만 건너면 지긋지긋한 북한을 탈출하게 된다.가슴이 뛰었다.주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순찰도 심하지 않은 것 같았다.강변의 갈대숲을 헤치고 나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약간 전진했다가 5분동안 주위를 살피고 또 앞으로 나아갔다.회색 코트를 입어 눈에 잘 띄지않을 것이라는 점이 조금 위안이 됐다. 강을 건너며 31년전 길림성에서 살다 어머니의등에 업혀 북한으로 오던 생각이 문득 났다.일제때 만주땅으로 건너간 부모님은 탁아소에서 중국말을 먼저 배우고 있던 나를 내내 못마땅해 했다.부모님이 귀국을 결심하게 된 것은 이런 나를 조국에서 떳떳이 키워보리라는 뜻에서였다.그러나 북한에서 살아온 지난 30년은 결코 떳떳하지 못했다.저주스러울 뿐이었다. ○생일날 “남행” 첫발 한편으로 저 강을 건너더라도 앞으로의 내 인생은 어떻게 펼쳐질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연길에 사는 친척의 전화번호는 갖고 있었지만 만나지 못한다면….북한 관원들에게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1시간만에 일단 중국 땅에 발을 딛는데 성공했다.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피로감이 몰려왔다.주위는 아직도 어두웠다.정신을 차리고 수첩을 꺼내 들었다.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때 심정을 이렇게 옮겨 놓았다. 「내 진정 사랑했어요 충성을 다했어요 하지만 그대는 사랑하지 않았어요… 아 북녘의 하늘아래 이내 짝사랑 원한으로 묻혔어요… 내 이젠 깨달았어요 늦게야 알았어요 나는야 이제라도 찾겠어요 진정한 사랑을」 85년 8월 제대한 나는 북한 원자력 공업부 산하 남천화학연합기업소의 건설을 맡았던 1248부대에서 복무했다는 이유로 우라늄 정광 생산공장인 평북 운전군 4월기업소에서 우라늄 폐수처리작업 노동자로 일하게 됐다.북한은 김정일의 지시로 1248부대의 제대자들을 4월기업소와 영변지구에 배치했던 것이다.이때부터 내 뜻과는 관계없이 핵원료 제조공장에 몸담게 되었다. 87년 9월에는 건설중이던 남천화학으로 옮겨 조업준비업무를 맡았다가 그후 남천화학의 폐수처리작업반장을 담당하게 됐다. 북한의 핵문제가 전세계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북한이 진정 핵무기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나의 직책이 우라늄 정련공장의 폐수처리작업반장으로 핵무기 개발과정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북한이 옆 공장의 공정조차도 다른 부서 사람들이 알 수 없게 할 만큼 핵개발과정을 극비에 붙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나는 4월기업소와 남천화학에서 9년동안 일하면서 북한이 우라늄증산을 독려하는등 핵무기 개발에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됐다. 북한은 평남 순천과 황북 평산 1월기업광산,황북 금천 월암광산등 3곳의 우라늄광산에서 우라늄을 캐내고 있고 다른 지역에도 탐사대를 두고 대대적인 탐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평산과 금천광산에서 생산된 우라늄 원광은 남천화학으로 보내져 정련하게되고 순천광산의 광석은 4월기업소로 보내진다.4월기업소는 또 남천화학에서 정련하다 남은 찌꺼기를 다시 모아 재정련하는 일도 한다. ○안도의 심정 수첩에 두곳에서 정련된 우라늄은 다시 핵개발 시설이 집중돼 있는 평북 영변의 8월기업소와 12월기업소에 보내져 재정련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8월기업소는 핵발전 동력원으로 쓰이는 순수한 우라늄 연료봉을 생산하고 12월기업소는 연료봉을 연소시켜 핵발전물질을 추출하는 일을 한다. 남천화학은 1천5백여명의 노동자가 있는 우라늄정광 생상공장과 501연구소,월암광산,1월광산,보조기업소인 67건설사업소,6월20일 농장등으로 구성돼 있고 총 노동자는 8천명이 넘는다. 남천화학은 파쇄,침출,추출,바나듐추출,폐수처리등 공정별로 나눈 11개 공장으로 편성돼 있고 우라늄뿐만 아니라 바나듐,라외듐,니켈,몰리브덴등도 생산한다.501연구소는 준박사(박사 아래를 지칭)인 소장아래 핵물리학을 전공한 1∼2급연구사 2백여명이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67건설사업소는 직원들의 주택이나 공공건물을 짓는 일을 담당하고 6월20일 농장은 기업소의 부업농장이다. ○우라듐 증산 독려 남천화학의 설계상 우라늄 생산능력은 40만t이었으나 91년 6월 조업을 시작할 당시의 생산능력은 20만t이었다.그러나 설비는 갖춰 놓았어도 현재는 많이 생산할 때가 한달에 8∼10t가량밖에 되지 않는다. 채광하는 데도 문제가 많을 뿐 아니라 캐낸 원광을 원반할 차량의 기름이 없고 갈아 끼울 타이어가 없어 생산량이 크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여기에다 생산설비들이 우라늄추출 첨가제인 유산으로 인해 산화돼 정상가동을 못하는데다 노동자들의 직업병으로 생산능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4월기업소 또한 많이 생산할 때가 한달에 1t정도로 두공장을 합쳐 1년 생산량이 1백여t 정도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이상이 내가 알고 있는 북한의 핵원료 생산과정이다.앞서 밝혔듯이 핵무기 보유여부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그러나 북한의 핵개발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극히 위험한 단계에 와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4월기업소에 근무할 때 언젠가 극비문건으로 취급되는 김일성부자의 지시문을 본 일이 있다.거기에는 「원자력 공업을 자체의 기술과 설비 자재로 주체화해야 한다.원자력에서 조국통일을 시작해 원자력에서 조국통일을 총화(마무리)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원자력개발을 위한 자금은 「주석자금」으로 불리는,말하자면 김일성의 특별회계에서 지출된다. 3공병국이라는 원자력 건설담당부대는 김정일이 친위대라고 부른다.그만큼 김부자는 원자력개발에 총력을 쏟고 있는 것이다.이 부대는 88년 10월 평북 대관군에 핵저장고를 건설했고 90년 10월에는 함북 화성군에 핵시험소를 건설하는등 핵시설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핵물리학자 수백 88년에는 김부자가 영변지구를 시찰한뒤 핵개발에 성과가 있었다고 매우 만족했다고 하며 핵기술자와 과학자들에게 「색테레비」를 선물로 주었다는 얘기도 들었다.그뒤에 핵무기 생산원료로 쓰이는 플루토늄도 생산했다는 말도 들었지만 이것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 수 없다. 핵무기와 관련해서 이런 소문도 있다.「일본 도쿄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공해상의 섬이 북한의 핵실험으로 없어졌다」는 것이다.이것말고도 북한이 어디어디에서 핵실험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북한의 핵개발 상황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이 정도이고 다시 내가 북한을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얘기하고자 한다. 91년 어느날 남천화학의 초급당 비서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너한테는 현재 그자리도 과분하다』는 말이었다.나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나는 중국에서 태어난데다가 장인이 6·25때 치안대에 가담해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관계로 나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껴왔던 것이다. 나의 장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끝에 남포 수산기지의 책임자로 자원하기로 했다.거기가서 당에 충성하면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이 수산기지는 남천화학이 자체 외화벌이를 위해 전복이나 해삼,대합조개등을 따 수출하는 사업체였다. 이곳으로 간 것이 결국은 나의 운명을 바꾸었다.한 무역회사의 간부에게서 미화 5천달러의 이자를 주기로 하고 일화 3백10만엔을 기지 운영자금으로 빌렸다가 종업원의 동생인 골동품 장수와 태권도 국장의 아들에게 그만 사기를 당하고 만 것이다.이 일로 해서 나는 체포령을 받아 쫓기던 끝에 두차례 감옥생활도 하고 강제노동도 했다.그후 교화소에 보내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병원에 입원을 했다.병원에서 나는 「여기서 일생을 망칠바에야 탈출하자」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뇌물주고 증명떼 인민위원회 2부의 관리에게 뇌물로 양복지를 주고 여행증명서를 얻어 친척집이 있는 두만강 하류 새별시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것은 1월 7일 새벽1시.그곳 친척집에 머물다 첫머리에 쓴대로 두만강을 넘어가 중국 연길시의 친척집에서 두달동안 지냈다.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북한 밀정들이 탈북자를 손에 쇠줄을 꿰어 끌고 갔다」는둥 하는 별의별 흉흉한 소문을 다 들었다. 하루는 북한이 한 군관이 남방으로 가 남한에 귀순,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 소식을 듣고 나는 결심했다.나도 남한으로 가자.친척을 통해 귀순 경로에 대한 도움을 받고 중국돈 3천원을 품속에 넣은채 남행을 출발한 것은 4월 9일 새벽 5시.그날은 마침 나의 생일이었다. 남방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길림성 역전에 앉아 생일을 자축하는 소주잔을 들이키며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보았다. 그리고 서른다섯번째 생일인 오늘 나는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 여만철씨 세자녀가 말하는 북녘 사회상

    ◎여성 생산직 기피… 교원·호텔접대원 선호/당간부 자녀 아니면 대입추천 엄두 못내/방과후도 김일성학습… 취미활동 어려워/러 벌목공 다녀오면 3년간은 쌀밥 먹어 북한 청소년들은 요즈음 너무나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음이 지난달 30일 귀순한 여만철씨 일가의 3자녀에 의해 다시 한번 확인됐다.이들은 11일 서울신문과 가진 회견에서 한창 자라야 할 나이에 제대로 먹지못해 키가 크지 않았고 굶주림과 다그치는 사상교육으로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 녹아떨어지기 일쑤라고 말했다.금주(20),금룡(18),은룡(18) 3남매로부터 북한 청소년들의 생활상과 북한의 실상을 들어보았다. ­서울을 둘러본 느낌은. ▲금주=모든 것이 너무 놀랍다.내가 살던 함흥에선 보지 못했던 고층건물이 너무 많아 놀랐다.특히 자동차가 어찌나 많은지 차가 빠지지 않아 차속에 앉아 있는 게 답답할 정도였다.여성들의 옷차림 색깔과 형태가 너무나 다양한 것도 북한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금룡=북한에서 남한에 대해 「교양」받은 것과는 1백80도 달랐다.서울엔 아파트도 없고 거지가 많으며 어지럽다고 들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남한의 어린 학생들이 껌팔이나 구두닦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배웠지만 역시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은룡=밤거리가 너무 화려해 놀랐다.북한에선 가정집에서도 전기를 아끼느라 밤에도 불을 켜지 않기 일쑤인데 남쪽에선 길가 상점의 간판이 번쩍번쩍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셋다 키가 작아보이는데. ▲금룡=내 키는 1백51㎝로 북한에서 학교동무들과 비교하면 중간쯤은 된다.그러나 여기와서 보니 내키가 말못할 정도로 작다는 것을 알았다.중학생이라고 하는 학생의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장 1백51㎝ 중키 ▲금주=내 키는 1백58㎝로 북한에선 큰 축에 들었는데 서울의 학생들에 비해선 작은 것 같다.학교에 가면 선생님들도 우리보고 『너희들은 우리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작다』고 말할 정도로 북한에선 갈수록 학생들의 키가 작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먹을 것을 제대로 못먹다 보니 키가 안자라 지금 인민학교 학생들은 옛날의 유치원 학생들 키보다 더 작아진 것 같다. ­북한에 있을 때 남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나. ▲금주=남한이 북한보다 더 잘 산다는 것은 북한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그러나 구체적으로 얼마나 잘 사는지는 모른다.나 자신도 다른데에 가보지 않고 북한의 작은 테두리 안에서만 살았고 외국영화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바깥 세상이 어떻게 살고 있는 지는 정확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한번 가본 적이 있는 평양이 지구상에서 제일 훌륭한 도시라 생각했으나 서울에 와서 보니 이곳이 지상의 천국으로 느껴졌다. ­북한당국이 방송을 통해 당신들 일가족이 남한으로 탈출한 데 대해 「배은망덕한 인간쓰레기」니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 ▲금룡=그렇게 욕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먹을 것만 걱정하지 않게 해줬으면 이렇게 내려왔겠는가.배만 안고팠으면 아무리 조직생활이 싫어도 견뎌냈을 것이다. ­북한 학생들은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나.이성교제는 허용되는가. ▲금룡=방과후에도 학교에 남아 복습시간을 가져야하고 특히 김일성주석의 교시 말씀 「침투」학습을 받는 등 개인시간이 거의 없다.피곤해 집에 와선 밥먹고 자기가 급급할 정도로 취미 활동은 엄두도 못낸다. 이성교제는 공부가 끝나고 주로 밤에 만 이뤄진다.갈 데가 마땅치 않아 아파트 뒤에서 몰래 얘기하다 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대학생 뿐만 아니라 고등중학교 5∼6학년들도 이성교제를 하는 학생이 더러 있다. ­대학진학시 당간부 자녀와 일반 주민들의 자녀간에 차별이 없나. ▲금룡=당간부들과 대학당국의 간부들이 대개 서로 통하기 때문에 당간부의 자녀들이 유리한 추천을 받는다.일반노동자들의 자녀들은 추천을 받을 엄두도 못낸다.물론 학교성적이 전교에서 1,2등을 다툴 경우 남의 눈도 있고 해서 추천을 해주지만 좋은 대학이 아닌 시시한 대학에 추천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데 점심은 어떻게 하나. ▲금룡=상오에 2시간 수업을 마치면 집에서 점심을 먹고 하오에 다시 등교하게 돼있다.그러나 집에 가도 먹을 것이 없는 학생들이 운동장 한편이나 철봉대 밑에 앉아 있다 하오 수업을 받는 경우가 많다.구내식당은 아예 없고 국영상점도 식료품이 모자라 문을 닫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학교에서 김일성체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 가르치나. ○「혁명역사」가 열쇠 ▲금주=김일성의 혁명활동과 혁명역사에 대한 교육이 다른 과목에 비해 우선적으로 취급된다.대학 입학시험에서 다른 모든 과목이 만점을 받아도 혁명역사 과목의 점수가 나쁘면 낙방이다.수시로 강연회나 영화문헌학습(비디오 교육)을 통해 김일성부자의 교시 말씀을 「침투」시킬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 김일성의 교시에 비춰 자기 생활을 반성하는 시간도 있다.특히 일주일에 한번 「김일성연구실」에 들어갈 때는 양말을 깨끗이 갈아 신고 김일성 배지를 가슴에 모시는등 외모부터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반정부 학생조직도 ­청소년들은 김일성부자 세습체제를 어떻게 보며 불만은 없는가. ▲금주=가정토대가 나쁜 아이들은 어차피 북한사회에서 제대로 살기는 글렀다고 생각해 불만이 쌓이고 있다.고등중학교 학생들 중에도 중국으로 튀는 경우가 간혹 있는 데 붙잡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들었다. 함흥시 서운고등중학교에서는 학생 몇명이 정부를 반대하는 조직을 만들었다가 발각됐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북한에서 김일성부자의 술시중 등을 전담하는 「기쁨조」라는 것을 운용하고 있다는 데. ▲금주=기쁨조라는 것은 북한에선 보천보전자악단 등을 가리키고 김일성별장이나 주석궁 등에서 일하는 여자는 「5과」(호위총국)에 속한다.나 자신도 선발에 앞서 몇차례 신체검사를 받은 적이 있으나 뽑히진 않았다.내가 고등중학교 2학년 때 2년 위 상급생 언니가 졸업후에 선발됐으나 지금까지 집으로 한통의 편지도 없이 소식이 끊겼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변에서 벌목공으로 시베리아에 다녀온 사람을 본 일이 있나. ▲금룡=많다.우리 반에도 아버지가 「재소」(북한에서는 이렇게 부른다)하러 갔다온 아이들이 5명이나 된다.그곳에 갔다오면 여느 노동자들보다 잘 산다.3년동안은 쌀밥을 떨구지 않고 먹는다.그래서 3년 계약이 끝나 돌아온뒤 다시 간 사람도 많다.­어떤 사람들이 갈 수 있나. ▲금주=토대(가정환경)가 좋아야 한다.당원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친척중에 6·25전쟁때 월남한 사람이 없어야 하고 미국이나 중국에 친척이 있으면 안된다. 정치범은 물론 안된다. ­중국여행은 자유로운 편인가. ▲금주=식량을 가지러 간다면 통행증을 발급해준다.나도 우리 원장이 「쌀을 가지러 갈 수 있으면 모두 가라」고 해서 허천에 사는 고모네 집에 한번 다녀온 적이 있다.또 가정부인들은 몇명씩 무리를 지어 황해도등에 가서 몇 마대씩 가져다가 나누어 먹기도 하는데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며 죽는 사람도 있다.그래서 북한에서는 남자는 힘으로 살고 여자는 악으로 산다고 한다. ­얼마전 특사교환을 위한 남북실무접촉에서 북한대표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북미회담 내용 몰라 ▲금룡=없다.북한에서는 북남고위급회담을 하면 남한이 북한의 정당한 주장에 대해 부당한 제의를 들고나와 진전을 가로막는다고 선전한다. ­북한이 미국과 회담을 한다는 이야기는. ▲금주=뉴스시간에 내용은 말하지 않는다.비공식으로 진행됐다고만 말한다.어느날 회담을 했으며 다음 회담은 언제 한다는 식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못들었나. ▲금주=개발할 능력도 없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그러나 아이들끼리는 「언제 어디서 시험을 했는데 섬이 통째로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한다.교원들의 강연대회에서 공공연히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주민들에게 시위를 하기 위한 것 같다.
  • 똥털영감의 꿈 1·2/이철호지음(화제의 소설)

    ◎철거민 집단거주촌의 다양한 인간상 한국 현대사의 희생자들을 등장시켜 서로의 아픔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려 인간애를 부각시킨 장편소설. 뚝방이라는 철거민 집단거주촌을 배경으로 이곳에 정착하게된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지적하면서 결국 패배주의로 끝나야 했던 희생자들의 심리를 서정성 있게 파헤친다. 6·25전쟁에서 홀로 남게된 똥털영감과 월남전 참전의 후유증을 앓는 파월병,광주사태 진압군인,학생운동으로 제적된후 위장취업한 청년등 각기 다른사연을 안은 뚝방 주민들이 타의에 의해 저지른 과오나 감내해야만 했던 희생과 그 후유증을 극복해가는 모습을 묵직하게 다루고 있다. 남송문화사 각권 5천원.
  • 휴전선의 야생화/김태정 글·그림(화제의 책)

    ◎DMZ 야생화 모습 담은 첫 사진집 민족분단의 상징인 「DMZ」.「6·25」이후 사람의 발길이 끊긴 그곳의 생태계,특히 꽃과 풀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최초의 사진집이다. 제비꽃·할미꽃·애기똥풀을 비롯해 금강초롱꽃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보기 힘든 우리의 야생화들이 천역색사진에 고운 모습을 드러낸다. 또 꽃뱀·오소리·꼬리치레도롱뇽·부전나비등 동물들도 사진 속에 생생히 숨쉬고 있다. 민족비극의 현장이 철조망,버려진 철모등으로 뒤덮인 가운데서나마 개발과 공해로 사라져버린 동식물들이 그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런 부분이기도 하다. 식물학자인 지은이는 지난 87년부터 여러차례 이지역을 학술탐사했다. 대원사 3만원.
  • “북 방사능노출 환자 많아”/귀순자 3명 일문일답

    ◎어린이들 제대로 못먹어 키 안자라/주민 10%정도 남한방송 몰래 청취 북한을 탈출한 김대호씨등 3명은 9일 하오 2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에서는 가정환경이 불순한 사람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한데다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어 탈출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탈출동기와 경로는. ▲(김씨)장인이 6·25때 치안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고 사회적 발전을 기대하지 못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됐다.그러던 차에 남포 수산기지의 책임자로 있을 때 차용한 거액의 외화를 사기당해 탈출을 결심했다.지난해 2월2일 두만강을 넘어 연변의 친척집에 숨어 있다 인민군 군관이 남한에 귀순해 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순하게 됐다. (황군 형제)87년에 어머니가 협동농장에서 강냉이를 훔쳤다는 이유로 15년형을 선고받고 교화소에 복역하게 됐다.이 일로 사회적 냉대를 받게돼 탈출하기로 했다.작년 6월 5일 우리 형제는 두만강을 도강,친척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어느농촌집에서 일하며 숨어 있다가 남한 사회교육방송을 듣고 남한 배를 몰래 탔다. 중국에 있는 동안 탈북자를 북한 공안원이 코를 꿰어 체포해 갔다는 말을 들었다. ­북한의 핵시설은. ▲우라늄 광산이 평남 순천등 3곳에 있고 채광된 원석은 남천화학등 2곳의 정련공장에 보내진다.여기서는 순도 40%정도의 우라늄을 생산하는데 최근에는 원석 운반차를 움직일 휘발유가 없을 정도로 경제난에 시달려 생산량이 떨어지고 있다. ­직업병을 가진 노동자는 없나. ▲많은 노동자들이 방사능에 노출돼 간염·백혈구·감소증·탈모증·결핵등에 시달리고 있으나 변변한 치료시설도 없다. ­북한 주민들의 동향과 남한방송 청취정도는. ▲10%정도 된다.주민들의 남한 방송청취는 주파수를 고정시켜 버리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다.북한주민들은 강냉이도 못 먹는 현실을 한탄하며 속아 살았다고 불평하고 있다.어떤 사람들은 이씨왕조가 5백년을 갔는데 김부자도 5백년을 갈까 걱정이라고 숨어서 말한다. ­북한의 식량사정은. ▲(황군 형제)북한에 있을 때는 키가못 먹어서 1백57㎝밖에 되지 않았고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였다.중국으로 탈출해서 몸이 많이 좋아졌다.아이들은 두달이 지나도 걷지 못하고 구루병에 걸린 아이들도 40∼50%나 된다.2∼3개월이나 식량을 배급받지 못해 들쥐굴을 파 강냉이를 구하기도 한다.군인들이 보초를 서는동안 닭이나 돼지등을 도둑질하는 일도 흔히 있다.먹을 것은 물론이고 간장이나 된장,치약 칫솔 빨래비누도 귀하다.
  • 북,“정전위서 철수”/지난 29일 일방통보/군사직통전화는 유지

    ◎폴란드도 중립국감독위 철수 북한은 6·25이후 휴전과 관련된 사항을 처리하기 위해 유엔·중국·북한등으로 구성,유지돼온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해왔다고 유엔사 관계자들이 2일 밝혔다. 북한측은 또 중립국감독위 북측감시국인 폴란드를 철수시키겠다고 통보해왔다고 군정위 우리측 관계자가 덧붙였다. 유엔사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달 29일 북측 군사정전위비서장 김연기대좌를 통해 유엔측비서장 칠튼대령에게 이같은 내용을 전해왔다는 것이다. 김연기대좌는 『앞으로 정전위명의가 아닌 북한군대표와 미군대표로 만나자』라고 요구하면서 『정전협정의 위반여부를 감시하는 중감위대표 폴란드를 철수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측은 그러나 현존 휴전협정에 대해 대체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준수할 것이며 일직장교간등 군사당국간 전화는 현행대로 계속 유지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북한측은 이어 김연기대좌를 포함하는 정전위 인원을 평양으로 철수시켰으며 당일 하오 경비병력을 교대하면서 비무장지역인 판문점공동경비구역에 소총과 철모로 무장한 북한측 소대병력을 투입,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북한측의 이같은 태도는 지난 28일 외교부성명을 통해 현행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 직후 나타난 것으로 정전협정을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북한측은 지난 91년3월 정전위수석대표가 유엔측에서 한국군 황원탁소장으로 바뀌자 수석회담을 거부,지금까지 비서장회담·일직장교회담·경비장교회담등 나머지 회담만 가져왔다.
  • 우리 가락·우리 춤 “신명의 한마당”

    ◎6월25일까지 서울놀이마당서 중요무형문화재 발표회/농악·가면극·굿·탈춤·산대놀이 등 공연/27개 종목·34개 보유단체 1천명 출연 우리 민족의 흥과 멋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농악과 굿,가면극등이 5월 1일부터 6월 25일까지 잠실 석촌호수 옆 서울놀이마당에서 잇따라 펼쳐진다.문화재관리국이 주최하고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관하는 제25회 중요무형문화재 마당종목 발표공연이 그것.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농경사회를 통해 형성된 귀한 문화유산을 직접 보고 배우는 시간이 될 이번 공연엔 모두 27개 종목에 34개 보유단체가 출연한다. 마당에 나서 흥겨운 가락과 장단,춤사위 등으로 신명나는 한판을 벌일 연희자는 예능보유자와 전승자를 합해 1천여명. 특히 「북청사자놀음」의 전광석,「밀양백중놀이」의 하보경,「동해안별신굿」의 김석출,「진도다시래기」의 강준섭 등 67명의 예능보유자는 전통예술의 참맛을 만끽하게 해준다. 또 국악의 해와 한국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전국 곳곳에서 이어져온 농악과 가면극,굿등을 같은 종목끼리묶어 하루 2종목씩 선보이고 외국인 관람객들을 위해 공연 프로그램을 영어와 일어로 만들었다. 그리고 선조들의 생활문화와 그 시대의 풍속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전통예술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공연날자를 매주 토,일요일(5월 오후 3시,6월 4시)로 잡았다. 문화재관리국은 지난 60년부터 예능보유자의 원형보존 상태를 점검하고 이수자의 전수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봄에는 마당종목을,가을에는 무대종목을 각각 무대에 올려왔다. 이를 위해 문화재위원과 전문위원들은 지정된 문화재의 원형이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 문제가 있을 경우,이를 해당 보유단체에 통보하여 시정토록 하고 있다. 다음은 마당종목 발표 공연 내용이다. 5월 공연 ▲7일=양주별산대놀이,강령탈춤 ▲8일=봉산탈춤,은율탈춤 ▲14일=하회별신굿 탈놀이,가산오광대▲15일= 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 ▲21일=수영야유,동래야유 ▲22일=강릉농악,남사당놀이 ▲28일=평택농악,진주·삼천포농악 ▲29일=이리농악,임실필봉농악 6월 공연 ▲4일=좌수영어방놀이,밀양백중놀이 ▲5일=고성농요,예천통영농요 ▲11일=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황해도평산소놀음굿 ▲12일=남해안별신굿,동해안별신굿 ▲18일=남도들노래,진도씻김굿 ▲19일=진도다시래기,강강술래 ▲25일=줄타기,택견,대취타,양주소놀이굿
  • 인고의 1주일 “무언의 준비”/「내정자」 꼬리뗀 이영덕총리

    ◎주위의 축하인사에도 담담한 표정 이영덕국무총리가 김영삼대통령으로부터 총리 지명을 받은 것은 지난 22일.29일 국회에서 인준안이 통과됨으로써 꼭 1주일만에 「내정자」꼭지를 떼었다. 그는 29일에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5층에 있는 통일원장관실로 출근을 했다.청사를 나선 것은 하오 6시25분.국회에서 인준안이 처리되기 직전이었다. 이총리가 서대문구 대신동 자택에 들어서자 모여있던 친척들이 그를 맞았다.그런 직후 총리비서실에서 「국회에서 인준안이 통과되었다」는 보고와 30일 일정이 팩시밀리를 통해 들어왔다.친척들은 모두 축하인사를 했지만 이총리 자신은 담담했다.일주일동안이나 마음고생을 한 기색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 참석자가 밝혔다.여야 합의로 인준안이 통과되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는 밝은 표정으로 친척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국회 인준동의를 기다리는 동안 이총리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을 것이다.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상무대사건이 임명동의와 결부돼 정치권이 옥신각신했을 때 웬만한 사람같으면 벌써 한마디쯤 볼멘 소리를 늘어놓았음직 한 상황이다.그렇지만 그는 참았다. 그런 그의 처지가 안됐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딱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이회창전총리와 비교해 그를 평가절하 하던 사람들도 차츰 마음이 바뀌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물론 「보수적」이라든지 하는 이총리에 대한 일반의 평가가 갑자기 확 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야당이 그와 관계없는 일을 임명동의와 연계시켜 따지고 드는데 대한 반발도 있는 것 같다.이총리는 반사적으로 동정을 얻는 것 같아 보인다.또 야당이 그렇게까지 총리 임명에 딴죽을 걸 만큼 그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냐 하는 의문도 그에 대한 평가의 반전에 한 몫 거들고 있는 것 같다.평상시에 총리로 지명됐으면 「인품이 훌륭한 총리」로 칭송받았을 수 있었다는 자각이 생기고 있다고도 여겨진다. 이총리는 자신의 취임이 늦어져 국정에 공백이 생긴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표정이라고 한다.실제로 국정의 공백은 그의 걱정이 아니더라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29일 열릴예정이었던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는 주재할 사람이 없어 취소됐다.또 3급이상 공무원들은 언제 취임식이 열릴지 몰라 업무를 위해서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통일원장관 인선등 후속 개각도 늦어졌다. 이총리는 그러나 한편으로 취임식이 지연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취임전에 미리 오리엔테이션을 받게 돼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사실 취임 전에 업무를 검토하고 이런저런 구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 다방:하(서울 6백년만상:28)

    ◎6·25후 명동일대 예술인 아지트로/60년대까지 각종문화행사 산실 역할/80년부터 카페·자판기에 밀려 사양길로 주로 예술인들의 사랑방겸 문화공간으로 애용되던 다방의 「전성시대」는 아무래도 6·25동란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가 나자 제각기 흩어지거나 혹은 종군을 하며 문필·연예활동을 하던 문인들은 서울이 수복되면서 다시 명동으로 돌아왔다.대구로 피난을 갔던 모나리자다방이 가장 먼저 문을 열었고 돌체가 곧바로 영업을 재개해 명동은 문인과 예술인의 거리로 되살아 났다. 명동의 다방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1955년에는 지금의 외환은행이 있는 명동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동방살롱이 문을 열어 더욱 활기를 띠었다. 당시의 문단은 문예살롱파와 모나리자파로 나눠졌고 모나리자파의 문인들은 대거 동방살롱으로 옮겨왔다. 동방살롱을 연극인 이해랑이 맡아 경영하면서 바로 국립국장의 지척에 있는 이곳에 김승호·주선태·최남현·김동원등 연극인들이 몰려들었다.동방살롱에는 문인·연극인 뿐만아니라 화가·음악인들도 모였다.백영수·천경자·변종화화백,김인수·임만수등이 단골이었고 이곳을 무대로 명동의 샹송인 「세월이 가면」(박인환작사·이진섭작곡)이 탄생했다. 명동의 다방에서는 문인·예술인들이 그저 모여서 차를 마시고 연락처로 삼는데 그치지 않고 많은 문화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시인들을 위한 출판기념회·시낭송의 밤이,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리고 시화전이 개최되곤 했다.또한 조촐한 작곡발표회가 있는가 하면 해외로 떠나는 예술인을 위한 환송회·귀국보고회등 다채로운 각종 문화행사로 명동의 다방은 60년대까지 그야말로 종합예술의 넓은마당 역할을 해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울의 「다방문화」는 대중화를 지향한다.대학가를 중심으로 통기타와 청바지차림의 젊은이들이 「다방문화」를 이끌었다.「르네상스」「명」「본전」「대호」다방등이 당시장안에서 손꼽히는 다방이었다. 80년대에는 야간통행금지가 폐지돼 심야다방이 등장,사회문제화되기도 했다.그동안 다방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1945년 해방당시 서울시내에 60개소에 불과하던 다방수는올림픽 직전인 87년에 9천1백17개소나 됐고 몇년전부터 재래식 다방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점포임대료와 인건비의 상승으로 다방의 영업수지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커진데다 웬만한 사무실마다 커피자판기가 보급됐기 때문이다.20∼30대 젊은층은 이른바 카페형을 선호하고 있어 재래식 다방의 고객도 대폭 감소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서울의 다방가에 얼굴마담마저 사라져 분위기가 더욱 썰렁해졌다.마담없이 세칭 레지로 통하는 다방여종업원 2,3명만으로 꾸려가거나 주인이 직접 나서 마담·주방장·레지등 1인3역을 해내는 운영방식이 보편화됐다. 특히 최근에는 패스트푸드점과 24시간 영업의 편의점 말고도 프랜차이즈 형태의 「커피전문점」들이 늘어나고 이색 이벤트와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지는 새로운 형태의 카페도 등장하고 있다.최근 대학가를 중심으로 실내에 팩시밀리 같은 통신기기를 갖춘 「테크노 카페」,「도서관 카페」·「레포츠 카페」등이 바로 그것. 이에따라 개화기 이후 1세기에 걸쳐 서민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재래식다방은 점차 고객을 빼앗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 다방:상/30년대들어 급증…예술가가 주고객(서울 6백년만상:27)

    ◎소공동 미모사다방에 마담 첫 등장 『봄은 돌아와 믿은 피어도 …그대 가버린 쓸쓸한 방안에…』­다미아의 노래 「어두운 일요일」이 서울명동의 다방에서 흘러나온 것은 1938년경의 일이었다. 진종일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날 흐느껴 우는 듯한 이 가사는 일제하에서 상처받은 이땅의 젊은이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서울에서 커피를 파는 다방이 처음 생긴것은 조선 말기 고종때이다.그 무렵 러시아공관의 손탁(Sontag)이라는 독일계 여인은 고종을 극진히 위했다.손탁은 고종의 도움으로 1902년 중구 정동 지금의 창덕여중 정문앞에 지은 손탁호텔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3·1운동이 지나고 일본인이 명동에 「멕시코」라는 다방을 열었다.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장한몽」을 연출한 최초의 영화감독 이경손이 1927년 처음으로 관훈동에 「카카투」라는 다방을 차려 커피를 팔았다.「카카투」는 삼베로 내벽을 장식,갖가지 탈을 걸어두고 촛불을 켜는등 특색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사교의 광장으로 자리를 잡았다.이감독은 서울의 다방문화에 남을만한큰일을 했지만 경영이 익숙치 못해 수개월만에 문을 닫고 상해를 거쳐 태국으로 가버렸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천재시인 이상이 다방을 열었다.1933년 7월14일 종로1가에 「제비」를,그 이듬해 역시 종로1가에 「식스 나인」(69)이라는 이상야릇한 이름의 다방을 잇따라 문을 열어 화제가 됐다.얼마안가서 영업이 부진해 모두 문을 닫았지만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이 무렵 연극영화인·화가·음악가·문인들이 여기저기에 다방을 차렸다.대개 명동·충무로·종로,또는 소공동에 문을 열어 서울에 이른바 「다방문화」가 꽃을 피웠다. 초창기의 우리 다방들은 영리보다는 멋이요,그 멋을 알아주는 손님을 고객이라기 보다는 동지로 알고 동고동락하는 장소로 제공했던 멋이 깃들여 있었다.요즘처럼 손님이 와서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엽차인지 무슨 색소를 탄 물인지 알 수 없는 물한컵 갖자놓고 주문부터 재촉하는 지금의 세대와는 전혀 달랐다. 1940년대를 전후해 다소 다방의 규모도 커지기는 했지만 일제의 태평양전쟁 말기로 다방의 수난기였다.이때 소공동에 유명한 「미모사」다방이 등장했다.미모사는 이름 그대로 지금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굉장한 미인이 마담으로 손님을 끌었다.이 미모사의 마담이 「다방 마담」의 효시라는 설도 있다. 해방되던 해에 명동엔 고전음악전문의 봉선화다방이 등장했다.물론 『울밑에 선 봉선화야…』의 이미지로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그때의 다방이란 벽에는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가 걸려있고 음악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과 리스트의 「헝가리 무곡」,그리고 「봉선화」노래가 전부였다. 당시 다방은 「차마시는 장소」이기 보다 「만나는 장소」의 구실이 더 컸다.사람들의 사회활동이 넓어진 것이 그 첫째 원인이다.고급 룸펜이 많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아침에 출근하다시피 나와 커피 한잔을 마시고 다방 구석에 꼼짝 않고 앉아있는 사람을 가리켜 「벽화」라고 불렀다.여하튼 다방은 6·25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예술인들이 주고객이던 별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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