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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B 5·18 30주년 기념사 “5·18로 산업화·민주화 성취”

    이명박 대통령은 18일 “5·18 민주화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서도 드물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식에서 정운찬 국무총리가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의) 놀라운 위업에 세계는 뜨거운 찬사를 보내고 있으며, 이제 그 바탕위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선진일류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서고 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5·18 민주화 운동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화해와 관용’에 기초한 성숙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민주영령들의 피땀으로 성취된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가 그 정신과 문화에 있어서도 성숙, 발전되고 있는지 거듭 성찰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생산적 대화와 토론이 뿌리내리지 못했다.”면서 “법을 무시한 거리의 정치와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기대는 일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대통령은 ‘중도실용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것이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길이자 선진일류국가의 초석이다.”고 강조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5·18만 되면… 여야 유별난 광주사랑

    5·18 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아 여야 지도부도 광주로 총출동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지도부는 18일 오전 같은 항공기 편으로 광주에 도착, 북구 운정동 5·18 민주묘지에서 거행된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어 광주를 6·2지방선거 무대로 삼아 움직이며 필승을 다짐했다. 한나라당은 오전 기념식 참석에 이어 광주시당에서 중앙선대위 현장회의를 가졌다. 정몽준 대표는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의 5·18정신을 잊지 않고 희생자들의 고귀한 뜻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광주의 위대한 경험을 살려 선진화의 길로 나서자. 한나라당이 호남에 대해 애정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 대표는 한나라당 정용화 광주시장 후보와 김대식 전남지사 후보를 가리켜 “두 분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아끼고 신뢰하는 분”이라면서 “두 후보가 정부와 당에 요청하는 게 있으면 최우선으로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김무성도 “분위기 망친 정부 개탄” 김무성 원내대표는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추모곡으로 쓰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식순에서 제외한 것과 관련, “이 노래가 왜 안 되는지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 “엄숙해야 할 기념식장에서 노래 한 곡 부르냐, 안 부르냐 문제를 갖고 분위기를 망친 그 미숙한 조정능력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민주당도 정세균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 10여명이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다른 광주·전남 지역 의원들과 지역위원장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기초단체장 및 지방의원에 출마한 후보들도 이명박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을 폄하하고 있다면서 기념식에 불참하고 대신 구(舊) 묘역에서 시민단체들이 주관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정세균 대표는 5·18 민주묘지를 참배한 뒤 김선옥 민주당 광주 서구청장 후보 사무소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5·18 30주년을 맞아 민주주의를 승화시켜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데 대해 비애감을 느낀다.”면서 정권 심판론을 강조했다. 그는 또 “대통령이 30주년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틀지도 못하게 한 것은 문제로, 이런 식의 기념식은 정말 잘못된 것이고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정 대표는 이날 오후 광산구 송정동에서 5일장 민생투어에 나서는 등 ‘텃밭’ 다지기에도 열을 올렸다. ●정몽준 총천연색 화환 보냈다가 교체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명박 정권 집권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지역차별의 망령이 부활하며 법치주의가 무너지는 암흑시대가 재현되는 상황”이라면서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깨어 있는 시민의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 측이 이날 오전 서울광장에서 열린 ‘5·18 민중항쟁 30주년 서울행사 기념식’에 조화(弔花)가 아닌 총천연색 화환을 보냈다가 1시간 만에 교체하는 소동이 빚어졌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두쪽 난 5·18

    두쪽 난 5·18

    18일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식이 ‘임을 위한 행진곡’ 연주 문제를 놓고 주최 측과 5월 단체간 빚어진 갈등 때문에 반쪽 행사로 전락했다. 장대비 속에서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기념식은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이어 정운찬 총리가 대통령 기념사를 대독하자 유족 등 50여명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식장에 난입, 노래와 구호를 외치는 등 한때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신묘지와 이웃한 5·18 구 묘역에서는 또 하나의 기념식이 열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 배제에 반발한 5·18 기념행사위원회가 국가보훈처 주최의 행사 참여를 거부한 채 별도의 기념식을 마련했다. 구 묘역 기념식에는 민주당 정치인과 재야·사회 단체 회원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와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신묘역을, 민노당 강기갑 대표는 구 묘역을 찾았으며 민주당 내에서도 정 대표는 공식 행사에, 강운태 광주시장 후보와 지역 의원들은 구묘역 행사에 참석하는 등 해프닝이 빚어졌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5.18’ 30주년…‘임을 위한 행진곡’ 관심 재점화

    ‘5.18’ 30주년…‘임을 위한 행진곡’ 관심 재점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0주년을 맞아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향한 네티즌들의 관심이 뜨겁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김종률 작곡, 황석영 작사의 곡으로 원시 ‘묏비나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임을 향한 행진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는 곡으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등의 가사를 통해 ‘5.18’ 당시 항쟁의 상황을 담고 있다. 네티즌들은 ‘임을 향한 행진곡’에 감상을 전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에 대한 나의 무식함을 일깨워 줬다.”, “솔직히 그냥 무서운 노래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오늘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가사를 듣는데 가슴이 울컥했다.”, “까놓고 말해서 조선시대 즈음 있었던 일이라고 알고 있었다. 내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하다.” 등 솔직한 의견을 남겼다. 아이디 857wing를 쓰는 한 네티즌은 “임가(임을 향한 행진곡)를 처음 안 것도, 불러 본 것도 대학에 올라와서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야 조금씩 이 노래를 가슴으로 부르는 법을 배워간다.”고 짧은 감상을 덧붙였다. 하지만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30주년 기념식’ 수순에서 제외됐다. 장대비 내리는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0주년 기념식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대신 ‘방아타령’이 울려 퍼졌다. 사진 = ‘5.18 민주화 운동’ 기념 재단 홈페이지 서울신문NTN 전설 인턴 기자 legend@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KBS 5·18기념 ‘5월의 노래’

    KBS 1TV는 5·18 민주화운동 30주년 기획 ‘5월의 노래’를 18일 오후 10시 방송한다. 당시 민주항쟁이 벌어지게 된 배경과 전개과정, 결과, 진상 규명 노력 등을 되짚어 보고 현재의 관점에서 5·18의 의미와 과제를 진단해 본다. 프로그램은 “특히 지금까지 독일 공영방송의 활약에 가려져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독일 교회의 5·18 민주화운동 후원 과정을 상세히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광주항쟁의 실상을 최초로 알린 독일 특파원들의 증언, 당시 서독 개신교 지도자들의 광주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 서독 전역 교회에 배포한 ‘뉴스 특보’ 등도 공개된다.
  • [사설] 5·18 30돌, 사법적 치유 서두르자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0년이 흘렀다. 5·18은 전세계에서 아시아의 대표적인 인권운동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국내에서의 평가는 여전히 인색한 형편이다. 관련법을 3개나 만들었지만 발포 명령자 등 규명하지 못한 진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공식적인 백서 발간 등 서둘러야 할 일들도 많다. 현대사의 아픈 상처이기도 한 5·18은 미래지향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한 세대가 흘렀지만 세계에 교훈을 주는 역사로 만들어가는 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책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아직 남아 있는 상처 치유는 더욱 서둘러야 한다. 5·18과 관련해서는 김영삼 정부의 결단에 따라 전직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일반인 등이 관련된 여러 건의 민·형사 재판이 이뤄져 사법적으로 과거사 정리 작업이 진행됐다. 1990년대 들어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국가의 불법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법원의 유죄 확정 판결로 내란죄와 함께 내란 목적 살인죄가 인정돼 처벌받았다. 하지만 핵심 피해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선승리 뒤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 과거 청산과 국민 화합 차원에서 사면·복권됐다. 문제는 민초들이다. 신군부 핵심인사들은 사면복권 뒤 원로대접을 받으며 활동 중이다. 반면 다수의 피해자, 유가족들은 아직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아람회 사건 피해자 등 국가의 불법행위로 큰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지지부진한 재판으로 아픔이 큰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피해자들이 잊을 만하면 정치권에서 선거국면 등에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다. 정신적·사법적 치유를 서둘러야 한다. 신군부의 권력욕과 민초들의 민주화 염원이 충돌한 5·18은 역사 속의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시대의 울림이 되어 상생과 국민통합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 ‘임을 위한 행진곡’ 재발견...’5.18 30주년’

    ‘임을 위한 행진곡’ 재발견...’5.18 30주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0주년을 기념해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 화제다.김종률 작곡, 황석영 작사의 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는 곡으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등의 가사를 통해 ‘5.18’ 당시 항쟁의 상황을 담고 있다.네티즌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통해 ‘5.18’에 대해 다시 일깨울 수 있었다.”,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가사를 듣는데 가슴이 울컥했다.”, “임가(임을 향한 행진곡)를 처음 안 것도, 불러 본 것도 대학에 올라와서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야 조금씩 이 노래를 가슴으로 부르는 법을 배워간다.” 등 반응을 보였다.하지만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30주년 기념식’ 수순에서 제외됐다.장대비 내리는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0주년 기념식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대신 ‘방아타령’이 울려 퍼졌다.사진 = ‘5.18 민주화 운동’ 기념 재단 홈페이지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18일 5·18 30주년 기념식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식이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묘지에서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린다. 기념식에는 정운찬 국무총리 등 정부 요인과 각 정당 대표, 5월단체 회원과 유가족, 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다. 행사는 국민의례, 헌화·분향, 추모의 나비 날리기 순으로 30여분간 진행된다.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 앞 등지에서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전야제가 열렸다. 전야제는 ‘저항과 공동체’란 주제의 거리 퍼포먼스인 ‘시민난장’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대학생·주민 등으로 구성된 거리 퍼레이드단은 동학혁명, 항일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대동세상 등 다섯 가지 주제를 표현하며 거리 행진을 펼쳤다. 또 오후 8시쯤부터 옛 도청 앞에서 ‘빛-이어지다’란 주제로 열린 본행사는 합창단 518명의 노래와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 등이 이어지면서 절정을 이뤘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日 개헌절차법 시행… 군사대국화 첫발

    日 개헌절차법 시행… 군사대국화 첫발

    │도쿄 이종락특파원│일본의 헌법 개정 절차를 규정한 국민투표법이 18일 본격 시행된다. 전쟁 포기, 군대 보유 금지 등을 규정한 헌법 9조를 바꾸자는 개헌 논의가 다시 불붙을지 주목된다. 일본 헌법은 지난 1947년 5월3일 시행됐으며 헌법 96조는 ‘헌법을 개정하려면 상·하원 의원 각각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발의한 뒤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개헌안의 제출 요건이나 국민투표권자의 연령 등을 규정한 국민투표법은 2007년 5월18일에야 공포됐고 대부분 조항은 3년이 지난 18일부터 시행된다. 자민당은 지난 3일 헌법기념일을 맞아 조만간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회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과 사회당 등이 개헌에 부정적인 데다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어 실제로 국회에서 정식 심의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공식적인 개헌 논의기구인 중·참의원 헌법심사회도 가동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헌법개정에 대한 물꼬를 튼 이상 상황이 바뀌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헌법 9조를 언제든 바꿀 수 있게 된다. 최근 들어 일본은 중국이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 해군 헬기가 최근 일본 자위대 함대에 가까이 접근하고, 서태평양에서 함대 훈련을 벌여 일본을 자극했다.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무상과 중국의 양제츠 외교부장이 지난 15일 경주에서 핵무기 감축을 놓고 고성섞인 설전을 주고받은 것도 이런 일본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실제로 자민당 헌법개정추진본부가 검토 중인 주요 개헌 내용에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병역의무 의미, 군대와 국민의 관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자위권을 위해서 군대를 가져야 한다는 게 자민당의 당론이다. 민주당 지도부도 일단 국민투표법이 시행되고 나면 헌법심사회 가동을 무작정 미룰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참의원 선거 이후 지도부 재편 결과에 따라서는 민주당이 개헌 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jrlee@seoul.co.kr
  • 아직도 끝나지 않은 5·18재판

    아직도 끝나지 않은 5·18재판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마무리됐지만 시민들의 ‘5·18’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민주화 인사 등은 재심을 통해 무죄선고를 받거나 사면·복권됐지만 ‘이름 없는 시민들’은 여전히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소송을 진행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아람회 사건’이다. 이는 5·18 직후 신군부에 비판적 태도를 보인 교사나 공무원 등을 ‘아람회’라는 가상의 반국가 단체 구성원으로 몰아 불법적으로 수사하고 중형을 선고한 것이다. 최근 재심 판결을 통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중학교 임시 교사로 재직하다 연행된 박해전(55)씨 등 5명은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 등의 제목으로 5·18에 대한 신군부의 진압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주민 등에게 배포한 것이 문제가 돼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으로 기소됐다. 1982~1983년 징역 1년6개월에서 10년이 확정된 이들은 1983년과 1988년에 특별사면·복권됐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다음 2000년 재심을 청구해 지난해 5월에야 비로소 서울고법에서 무죄 또는 면소를 선고받았다. 박씨를 비롯한 피해자와 유족은 이를 근거로 국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1심과 2심에서 모두 배상판결을 받았지만 국가가 상고해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1심은 배상금과 지연이자를 포함해 184억원을, 항소심은 206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소송을 수행한 검찰은 박씨 등에 대한 형사판결이 확정된 날인 1983년 6월14일부터 5년이 경과한 때에 소멸시효가 완성됐고, 지연이자는 재심 대상인 유죄 판결이 취소된 시점부터 계산해야 과잉 배상을 피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국가의 불법행위가 있다면 배상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면서도 “적정한 액수를 산정하는 것은 배상 책임을 따지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 만큼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항소심에서는 배상 시효가 지났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박씨 등의 주장에 따라 재심 대상 판결이 확정된 시점부터 지연 이자를 산정했지만 아직 대법원의 판단이 남아 있어 최종 결과가 주목된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주남마을 ‘민주인권마을’로

    1980년 5월23일 오후 2시쯤 광주 동구 월남동 주남마을 앞길을 달리던 소형 버스 한 대가 집중 사격을 받았다. 마을 뒷산 능선에 매복해 있던 계엄군이 정지 신호를 보냈으나 운전자가 이를 무시하고 줄곧 전남 화순 방향으로 달리자 일제 사격이 가해졌다. 버스엔 모두 18명이 타고 있었고 여고생이던 홍금숙씨를 제외한 17명이 현장에서 사살됐다. 다음달인 6월 주민의 제보로 시체 2구가 마을 뒷산에서 발굴됐다. 이들은 나중에 당시 총격에 의한 사망자로 밝혀졌다. 5·18 당시 이런 역사를 간직한 주남마을이 ‘민주인권마을’로 새롭게 조성된다. 마을 주민 등으로 구성된 ‘주남마을위령비건립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20일 광주YMCA 등과 함께 5·18 희생자 시체가 발굴된 마을 뒷산에서 위령비 제막식과 주먹밥 나누기 행사를 갖는다고 17일 밝혔다. 또 진상 규명 과정에서 언론 등에 소개된 주남마을 주민 30여명의 인터뷰 내용이 담긴 ‘5·18 이야기’ 책이 발간된다. 이번에 나오는 ‘5·18 이야기’는 민주·인권 등의 의미를 일반 시민의 관점에서 새롭게 재발견·재해석한 책이다. 추진위는 외지인들이 위령비 등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마을 입구에 이정표와 마을 지도 등을 담은 표지판도 세운다. 추진위는 이를 통해 5·18의 이미지를 밝고 긍정적으로 알린다는 복안이다. 또 마을에서 위령비에 이르는 500여m의 구간을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과 같이 광주를 대표하는 ‘5월길’ 코스로 만든다. 이 마을 통장 김재린(48·여)씨는 “1980년 5월 당시 이곳 일대가 계엄군의 주둔지였고, 인근을 통과하던 무고한 시민들이 집단 학살된 역사적인 장소”라며 “위령비 제막을 계기로 우리 마을을 역사공원과 순례 코스 등으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추진위 관계자는 “5·18이 30년이 지난 만큼 관련 이야깃거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란 판단으로 이 사업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5·18민주화운동 30주년] 80년 5월의 광주…그날 무슨일이

    1988년 국회 5공청문회를 통해 5·18의 진실이 조금 드러났다. 명예 회복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도 이뤄졌다. 하지만 핵심 쟁점인 발포명령자는 아직껏 미궁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5월17~18일 17일 오후 9시40분 임시국무회의가 비상계엄확대 선포안을 의결했다. 신군부는 곧 전국 대도시에 군대를 투입했다.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됐다. 18일 오전 10시쯤 전남대 정문에서는 휴교령이 내려진 줄 모르고 등교한 학생들이 “전두환은 물러가라.”며 구호를 외쳤다. 계엄군은 진압봉을 휘두르며 해산에 나섰다. 10여명의 학생이 다치고, 나머지는 시내로 진출했다. ‘5월항쟁’의 신호탄이었다. ●5월19~20일 광주는 전날 벌어진 공수부대의 ‘만행’으로 공포와 분노의 도시로 변했다. 19일 오전부터 금남로에는 대학생·시민 2000~3000명이 나와 군경과 대치했다. 11공수여단 3개 대대가 가세했고 젊은 사람들이 무차별 폭행당했다. 시내 병원들은 부상자로 넘쳤다. 20일부터는 3공수여단 1100여명이 추가 파견됐다. 하지만 전날과 달리 M16 소총에 착검도 하지 않았다. 말씨도 공손했다. 금남로에는 10만여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MBC방송국 등이 불탔다. 밤 11시쯤 광주역 부근에서 총성이 울렸다. 차량을 앞세워 저지선을 돌파하려던 시위대를 향한 첫 발포였다. ●5월21일 새벽이 돼도 군중들은 물러설 줄 몰랐다. 세무서·파출소 등이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전날 광주역 발포로 숨진 시체 2구가 시민들의 손에 넘어왔다. 오전부터 수만명의 인파가 금남로를 꽉 채웠다. 오후 1시 정각. 전남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때맞춰 계엄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내뿜었다. ●5월22~25일 날이 밝자 광주는 ‘해방구’로 변했다. 사실상 무정부상태였다. 시민군은 치안유지를 맡는 등 ‘자치 활동’에 들어갔다. 주민들은 주먹밥을 해다 날랐다. 각계 원로가 참여한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됐으나 ‘결사항전’을 주장한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이 기간 단 한 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 ●5월26~ 27일 26일 새벽. 마침내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했다. 원로 수습위원들이 최후 담판을 시도했으나 무산됐다. 27일 새벽 4시쯤 도청 안에서 첫 총성이 울렸다. 특공대는 5시10분쯤 시민군을 완전 진압했다. 항쟁지도부가 머물렀던 상황실 등은 피로 물들었다. 열흘간의 항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금남로·대학가 5월도 썰렁”…잊혀지는 그날의 함성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금남로·대학가 5월도 썰렁”…잊혀지는 그날의 함성

    5·18 민주화운동이 30돌을 맞았다. 민주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지만 단순 역사적 사건으로만 기억할 뿐 그날의 의미는 뇌리에서 점점 잊혀가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했던 가해자들이 함구하면서 그날의 핵심 진실 규명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국내 민주화 운동에 큰 획을 그은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과제를 짚어본다. 1980년 5월 피로 물들었던 광주는 지금 화려한 ‘꽃’으로 부활했다. ‘폭동’ ‘사태’ 등 갖가지 누명도 벗었다. ‘광주의 5월’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동남아 등 제3세계 국가의 인권운동가들은 ‘5월’을 배우러 광주로 몰려든다. 5·18은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에겐 꿈이자 희망이다. 시민들의 머릿속에 또렷이 기억되는 ‘짧은 시간’이 있었다. 계엄군을 몰아내고 연출했던 일주일간의 ‘대동세상’이 그것이다.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누고 부상자들에겐 피를 보탰다. 내것·네것도 없었다. 원시 부족사회처럼 운명 공동체였다. ‘시민군’은 최후의 순간까지 총칼에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전남도청 상황실을 끝까지 지켰던 이모(50·공무원)씨는 “죽었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겉으론 ‘실패한 항쟁’이었지만 그 실패는 오래가지 않았다. 5·18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군부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1988년 국회 5공청문회가 열리면서 ‘살육 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학생들은 분신과 거리 투쟁 등을 통해 보다 수준 높은 민주화를 요구했다. 5·18은 결국 문민정부의 책임자 처벌 등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을 끝으로 일단락됐다. 전두환 등 신군부의 몰락과 함께 사실상 30여년간의 군부통치는 막을 내렸다. 실패한 항쟁이 아님이 증명된 것이다. 격랑의 현대사 속에서 고비고비마다 민주화 투쟁에 불을 지핀 화수분이자 발전소였다. 5·18은 민주·인권·평화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다. 세계 민주항쟁사에서도 돋보일 만큼 그 위상이 확고해 졌다. 그러나 30년이 흐른 지금은 기억의 저편으로 가뭇없이 사라져 간다. 망각과 무관심 탓이다. 금남로에서 만난 김현석(49)씨는 “5·18 기념일이 돌아와도 항쟁 직후처럼 뜨거운 감정이 일지 않는다.”며 “1990년대 이후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지는 등 5·18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뒤부터 먼 과거처럼 여겨진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다. 광주 지역 대학을 둘러보면 1980년대의 대학 풍경과는 너무 동떨어진 느낌이다. 5월 행사를 알리는 플래카드 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어쩌면 이게 정상인지 모른다. 전남대 정다정(22·여·영문과 3년)씨는 “친척 중에 5·18 때 다친 분이 있어서 당시 상황은 대충 안다.”며 “그러나 의미 등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선대 총학생회의 한 간부는 “학내문제로 가끔 집회가 열리지만 일반 학생들의 참여는 거의 없다.”며 “취업난 등 현실적 고민 때문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최영태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항쟁 과정에서 실재한 ‘영웅적 죽음’ 등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면 젊은 세대들도 자연스레 그 정신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김성수씨의 끝나지 않은 상흔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김성수씨의 끝나지 않은 상흔

    “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며옵니다.” 1980년 5월 아내·딸과 함께 총탄세례를 받았던 김성수(77)씨는 지금도 한많은 세월의 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80년 5월22일 오전 10시. 김씨는 자신의 4.5t 화물차를 몰고 광주교도소 앞을 지나다가 계엄군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조수석에는 아내(당시 43세·1985년 사망)와 막내 딸(당시 5세)이 타고 있었다. ‘난리’를 피해 고향(전남 진도)으로 가려다가 길이 막혀 되돌아오던 순간이었다. 수십발의 총소리와 함께 트럭 뒤쪽 유리창이 깨졌다. 등짝이 불에 덴 듯 후끈함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옆자리로 눈을 돌렸다. 아내와 딸은 피를 흘린 채 고꾸라져 있었다. “처자식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났다.”는 그는 아픔도 잊은 채 차를 시내 쪽으로 몰았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겨우 이른 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전남대병원 응급실이었다. 등에 박힌 총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아내는 머리에, 딸은 척추 관통상을 입었다. 아내는 3차례 뇌수술을 받고도 회복되지 않고 두통에 시달리다가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였다. 결국 1985년 12월 딸의 병상을 지키다가 숨졌다. 딸은 더 큰 충격에 빠졌다. 김씨는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9남매 자식을 키웠다. 시간을 쪼개 ‘보상법 제정 투쟁’ 시위에도 참여했다. 딸은 광주에서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특수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언니집에서 살고 있지만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한다. 김씨는 “가해자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사라졌다. 하지만 고통으로 성장이 멈춰버린 딸은 어찌해야 하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딸의 2번 척추에 총탄이 박혀 있지만 이미 마비된 하반신의 신경을 되살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차라리 내가 대신 그랬으면 좋겠다.”며 입을 깨물었다. 5월의 ‘악몽’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김씨처럼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환자가 수십명에 이른다. 알코올 중독과 가족 해체 등의 아픔에 시달리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이들 중에는 실제로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허연식 ‘5·18유공자단체통합추진위’ 기획위원은 “세월은 흘렀지만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며 “이들의 고통이 2세에게 이어진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5·18민주화운동 30주년] 보상 어디까지 했나

    올 30돌을 맞은 5·18민주화운동의 법률적 마무리는 어디까지 왔나. 1990년 ‘5·18민주화운동보상등에관한법률’이 제정됐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6차 보상 공고를 통해 8721명이 보상을 신청했다. 광주시는 이들에 대한 심사를 거쳐 5233명을 대상자로 확정했다. 사망 155명, 상이후 사망 102명, 행방불명 76명, 부상 3379명, 연행·구금 1476명 등이다. 이들에게 모두 2356억 3500만원의 보상금이 지급 또는 지급될 예정이다. 1995년 5·18특별법 제정과 1997년 국가기념일 지정 등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에 이어 2002년 ‘5·18민주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 제정됐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5·18민주화운동 30주년] ‘5월 정신’ 계승 어떻게

    ‘5월 정신’은 현실 정치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최근 천안함 사건으로 야기된 남북대결 문제 해결에 ‘평화’의 정신을 보태는 것이다. 사회 양극화 문제도 나눔문화 확산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 등 정치·사회적 갈등 요인도 1980년 당시 ‘하나됨’의 공동체 실현으로 극복할 수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에게도 ‘5월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중동·아프리카 등 곳곳에서 인권과 민주화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국가폭력과 이에 맞서는 민중들의 힘겨운 싸움이 진행 중이다. 한국은 가장 짧은 기간 안에 압축적으로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다. 제3세계 국가들은 그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와 광주로 몰려든다. 5·18 정신의 세계화를 위한 절호의 찬스다. 이 기회에 각종 학술대회를 유치하고, 5·18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서적 발간 등이 시급하다. 가치 확산에 앞서 스스로 되돌아 봐야 한다. 역사의 격량 속에 몸을 내던져야만 했던 5·18 피해자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그것이다. 일시적 현금 보상과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지만 일부는 아직도 육체·정신적 충격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시 광주에서는 상당수의 ‘5·18 정신 이상자’들이 거리를 떠돌기도 했다. 대부분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실성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이 그날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가산 탕진과 가정 해체는 또다른 2차 피해자를 낳고 있다. 정신적 장애를 앓거나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인 생활 대책이 시급하다. 지역사회의 정서적 통합과 가치 공유도 선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런 문제가 해결돼야 5·18을 품격 높은 브랜드로 활용할 수 있다. 장년기에 접어든 만큼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이 필요하다. 박만규 전남대 5·18연구소장(역사교육학과 교수)은 “5·18은 불의에 대한 저항과 나눔의 공동체 실현이 핵심이고 저항의 밑바닥에는 민주·인권·평화란 가치가 자리하고 있다.”며 “이런 보편적 가치를 확산하고 인류 평화를 꾀하는 것이 궁극적인 과제”라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그날의 정신···해외선 긍정평가·국내에선 인색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그날의 정신···해외선 긍정평가·국내에선 인색

    5·18민주화운동의 평가는 오히려 나라 밖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세계 인권운동가들은 해마다 광주를 찾아 ‘5월 정신’을 공유하고 연대를 강화한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지역 사건’으로 폄하하려는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진상규명 과정에서 나타난 사실 왜곡 때문이다. ‘북한 개입설’ 등이 대표적이다. 관련 단체의 과격한 행동도 외면을 부추겼다. 해외에서의 긍정적인 위상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해외선 세계 민주주의 희망 인식 10여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5·18민주화운동 세계화 사업은 5·18을 아시아 인권과 민주주의의 중심 무대로 옮겨 놓았다. 대표적 프로그램은 광주인권상 제정이다. 첫해 수상자는 사나나 구스마오 현 동티모르 국회의장. 아웅산 수치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무르니 말리크 파키스탄 인권변호사 등 10여명이 이 상을 받았다. 17~23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는 ‘2010 광주아시아포럼’이 열린다. 아시아민주희생자가족연대, 광주국제평화캠프, 광주아시아인권학교 등이 참여한다. 포럼에서는 이주노동자 인권, 인권조례, 한반도 평화, 아시아의 언론자유와 환경문제 등이 논의될 예정이다. 국제 인턴 파견, 미국·일본 등 해외동포 단체와 정기적으로 교류하면서 활발한 국제협력 프로그램도 펼쳐진다. 최근 5·18기념재단 직원으로 채용된 수바쉬 아디카리(29·네팔)씨는 “5·18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민주화운동의 ‘롤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네팔은 2006년 민중운동 당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지금껏 진상규명 등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5·18의 위상 정립 과정과 절차 등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5·18기념재단 국제협력팀 정린(29·여)씨는 “세월이 지났어도 5·18의 정신과 가치는 세계인들 사이에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며 “이같이 소중한 자산을 확산·계승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국내 “들어본 적 없다” 26% 달해 그러나 국내의 상황은 좀 다르다. 일부 보수 논객들의 인테넷 사이트에는 아직도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저지른 국가 전복 사태’라는 황당한 글들이 보인다. 네티즌들은 이런 사이트에서 5·18과 ‘전라도’를 폄하하기 일쑤다. 기념식도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형식적으로 치러질 뿐이다.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난다. 기념재단이 2008년 실시한 ‘5·18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 결과 아직도 응답자의 9%가 ‘폭동’ 으로, 6.6%가 ‘사태’로 답했다. 5·18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란 답도 26%에 달했다. 민주주의 발전 영향 여부에 대해선 11.6%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5·18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엄존하는 것은 5월단체의 ‘밥그릇 싸움’과 5·18에 대한 ‘독점적 권리행사’ 행태에서 비롯됐다는 지적도 있다. 그동안 공법단체 등록을 둘러싸고 빚어진 각 단체 간 ‘헤게모니 싸움’과 운영비 마련을 위한 수익사업 추진 등은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한 시민은 “5·18은 전 시민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이지, 단체 회원들만의 전리품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5·18민주화운동 30주년] 끝까지 도청 사수한 정해직씨

    [5·18민주화운동 30주년] 끝까지 도청 사수한 정해직씨

    “5·18의 진정한 가치는 ‘대동(大同)정신’이죠.”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정해직(59)씨는 “자발적 ‘투사’로 변해가던 시민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며 30년 전의 기억을 되살렸다. 정씨는 시민군 항쟁지도부 민원부장을 맡았었다. 그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것은 우연이었다. 전남 보성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정씨는 휴일을 맞아 18일 광주에 올라왔다가 금남로에서 못볼 것을 봤다. 계엄군이 시위대를 쫓아가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쓰러지면 군홧발로 짓밟는 것을 코앞에서 목격했다. “19일 학교로 돌아왔으나 수업이 제대로 안 됐습니다. 선혈이 낭자한 시민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죠.” 그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곧바로 광주행 버스를 탔다. 자연스레 거리 시위에 합류했다. 집단 발포가 처음 있었던 21일 오후 장동 로터리에서였다. 앞서가던 시민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를 본 정씨는 “끝까지 싸우겠다.”고 맘먹었다. 금남로는 시가전 현장으로 변했다. 그는 장례준비와 거리청소, 사망·실종자 신고 접수 등의 업무를 맡았다. 26일 자정 무렵 도청 전화가 모두 끊겼다. ‘사수파’들은 최후를 맞을 준비에 들어갔다. 총탄을 나눠 챙기고 민원실 건물 1·2층 복도에서 군부대와 대치했다. 새벽 4시를 지나 복도에서 총소리가 콩볶듯했다. 정씨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다. 그 순간 “부모님과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 생각이 퍼뜩 스쳤다.”고 말했다. 그는 군 수사관들의 고문에 못이겨 자술서를 썼다. 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다음해 3월 대법원 확정판결을 거쳐 4월 초 잔여형기 면제로 풀려나 복직했지만 2005년 스스로 교단을 떠났다. 지금은 한 초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한다. “민중이 모든 것을 공유했던 그 힘은 어디서 나왔는지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요. ‘야만 상태’에서 그들이 보여준 힘은 놀라웠으니까요.”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하프마라톤] 나이·장애 잊고 웃음꽃…1만여명 하나되어 뛰었다

    [하프마라톤] 나이·장애 잊고 웃음꽃…1만여명 하나되어 뛰었다

    출발을 10분 앞둔 오전 8시50분.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에 사회자인 개그맨 배동성씨의 우렁찬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참가자 분들은 모두 스타트 라인으로 이동해 주세요.” 1만여명의 ‘2010 서울신문 하프 마라톤대회’ 참가자들의 표정엔 들뜬 긴장감이 역력했다. 서로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치는 단체부터 가족들과 웃으며 정겨운 인사를 하는 가장까지 모두의 얼굴에 설렘과 흥분이 가득했다. 공직자 2500여명과 외국인 100여명도 소속 기관과 자국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짐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온화한 날씨에 참가자 대다수는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었다. “탕!” 하는 출발 총성이 울리자 참가자들은 신선한 5월의 공기를 가르며 거침없이 달려나갔다. ●“월드컵 16강 기원하며 달려요” ‘2010 남아공월드컵’ 개막을 3주 남짓 앞두고 열린 대회에는 태극전사들의 16강 진출을 기원하는 참가자들의 열띤 응원이 눈에 띄었다. 동덕여대 체육학과 새내기 13명은 아예 붉은 티셔츠를 입고 대회장에 나왔다. 자칭 ‘마라톤을 사랑하는 열혈소녀’인 이들은 학교에서 육상수업을 같이 듣는다. 정다예(23·여)씨는 “우리가 완주를 하면 축구 국가대표선수들이 16강에 진출하는 데 힘을 북돋워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반민송(23·여)씨는 “태극전사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개사곡을 부르며 16강 진출을 기원했다. 월드컵대회 관련 주무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의 마라톤동호회 회원 40여명도 월드컵 유치를 기원하며 달렸다. 이들은 ‘2022월드컵 코리아’라는 문구가 새겨진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하프코스와 10㎞ 코스를 완주했다. 엄현희(57) 동호회 회장은 “이국땅에서 땀흘릴 선수들을 생각하며 결승선을 향했다.”면서 “대표팀의 16강 진출은 물론이고 2022년에 월드컵을 유치하길 바란다.”며 미소지었다. 23명이 참가한 ‘월드컵 마라톤클럽’ 회원들도 이름만큼 월드컵과 인연이 깊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을 2주 앞둔 5월18일 창단됐다. 회원 이효진(30·여)씨는 “2006년 월드컵 때 응원 안무로 유행했던 ‘꼭짓점 댄스’를 연습하며 마라톤 훈련을 했다.”며 미소지었다. ●공무원들, ‘사랑과 친목의 질주’ 청와대 마라톤 동호회(청마회) 회원 13명은 하프코스에 참가했다. 지난해 3월 정식 출범한 청마회는 매주 토요일 아침 양재천을 따라 과천 광무체육관까지 왕복 15㎞를 꾸준히 달릴 만큼 왕성한 체력을 자랑한다. 회장인 김정기(55) 교육비서관은 “대회 참가를 계기로 친목도모는 물론 건강까지 챙길 수 있어 기분이 좋다.”고 웃었다. 28명의 직원이 함께 뛴 서울본부세관은 선수로 참가하는 것 외에도 일반시민 참가자들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마라톤과 함께하는 청렴확산운동’을 주제로 시민들에게 ‘청렴 꽃씨’와 마약탐지견 모형 인형을 나눠줬다. 10㎞를 완주한 우종완 서울본부세관장은 “사회적 청렴 활동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마라톤에 참가했다.”면서 “철저한 관세 국경 관리로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안전 개최 지원에 만전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장애 넘어 ‘한발짝 한발짝’ 마라톤 코스에 용기를 내 참가한 장애인들도 눈에 띄었다. 경기 부평의 특수체육전문센터 ‘킴스짐’에서 온 6명의 발달장애·지적장애 학생들은 5㎞ 코스에 참가했다. 이들을 인솔한 정재화(33) 특수체육교사는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아이들이 기뻐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활짝 웃었다. 최진무(14)·백종원(15)군은 “파이팅”을 외치며 “완주 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꼈다.”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시각장애 참가자들은 시각장애 마라톤 도우미 모임인 ‘해피레그’ 회원들과 팔뚝에 ‘사랑의 끈’을 묶고 아름다운 동행을 했다. 경기 부천시에서 온 김명희(63)씨는 딸 혜정(31)씨와 아들(29), 사위 등 온 가족이 함께 달려 눈길을 모았다. 서울 오금동에서 온 정완균(51)·이희숙(49)씨 부부도 서로 지칠 때마다 손을 잡아주며 끝까지 완주했다. 정씨는 “마라톤을 시작한 걸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아내의 볼에 입을 맞췄다. 백민경 김양진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광주 5·18은 신자유주의와의 싸움?

    그 시절 광주에는 단 한 곳의 금은방, 은행에서도 절도 사건이 없었다. 전남도청에는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꾸려졌고,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있기까지 시민군은 시민들의 격려를 받으며 자치의 근거들을 하나하나씩 만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언론들이 보도했던 ‘폭도들에게 점령당한 1980년 5월 무법천지 광주’의 모습이었다. 미국의 사회정치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 웬트위스공과대학 교수는 이렇게 얘기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민중의 자발적 통치 능력을 보여 주는 두 개의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1871년의 파리코뮌과 1980년의 광주민중항쟁이다. 파리와 광주에서 비무장 시민들은 각자의 정부에 맞서 도시의 통제권을 장악했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려는 중무장 세력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민중권력을 유지했다.’ ‘공통도시’(조정환 지음, 갈무리 펴냄)는 카치아피카스 교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1980년 이후부터 셈한다. 그리고 5월 광주의 항쟁은 군부독재와의 싸움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맞선 싸움이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신자유주의로 이행하는 자본주의에 맞선 전 지구적 투쟁의 일환이자 초기적 양상이었으며, 이후 국내외 투쟁들에 커다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광주가 제기한 근본문제가 생생한 현재성을 갖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밝혀 나간다. 과거의 사건으로 치부되며 학술적 논의조차 그리 활발하지 않은 상황에서 1980년 광주를 바라보는 낯선 해석이다. 다중네트워크센터 대표인 저자는 “오늘날 1980년 광주를 다시 얘기하는 것은 미래사회를 상상하는 전지구적 다중들의 세계사적 과제”라면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짓기 위해 전남도청을 철거하는 것은 광주의 기억을 삭제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조치라고 비판한다. ‘공통도시’(common city)라는 말은 1980년대의 노동자연대와 조직된 공장의 이미지를 현대의 계급구성에 맞게 발전시키고 혁신하겠다는 취지로 저자가 만든 용어다. ‘제헌권력의 절대공동체’ 정도를 의미한다. 1만 2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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