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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백기완(80)은 거리에 있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투쟁 때도,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도 그는 늘 대오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지금도 거리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서울 중구청이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를 철거할 때도 백발의 백기완은 새벽같이 나와 천막을 지켰다.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있는 곳이 나의 삶터”라고 말하는 백기완. 스스로 “늙었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에 호통치고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 그는 여전히 젊다. 백기완의 삶과 예술을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백기완을 거리로 이끈 것은 가난과 분단이었다. 1933년 황해도 은율 산자락에서 태어났다. 땅 한 뼘 갖지 못한 아버지는 돈이 없었다. 배가 고팠다. “돼지기름 덩어리 한 조박(조각의 황해도 사투리)을 날로 먹는 것이 어릴 적 꿈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일제의 잔학한 수탈이 계속되던 때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왜놈들이 집에 와서 놋그릇을 뺏어갔어요. 쌀도 뺏고 밥그릇도 뺏고,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그런데 엄마가 그만 울래요. ‘사내 새끼가 자꾸 울면 키가 안 큰다. 어서 커서 엄마 원수를 꼭 갚아 달라’고. 그때부터 민족의식이 싹 텄던 것 같아요.” 1946년 백기완은 아버지를 따라 맨발로 서울에 왔다. 도시는 냉정했다. 설렁탕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식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에게 서울은 “주먹으로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는 곳”이었다. 가진 게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저항심리가 그에게 민중 의식을 심어줬다고 했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학교는 꿈도 못 꿨다. 충무로 책방에서 주인 몰래 영어 사전을 외우다 쫓겨나기를 거듭했다. 그의 할아버지(백태주)에게서 항일투쟁 때 도움을 받았던 백범 김구(1876~1949)와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1887~1958) 선생이 학교에 보내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마다했다. 아버지는 “백범에게 밥을 얻어먹으면 백범 같은 사람밖에 안 된다. 깡패가 되든 거지가 되든 혁명가가 되든 혼자서 크라”고 했다. 1950년 전쟁으로 나라가 찢어졌다. 어머니는 여전히 은율에 있었다. 남쪽에서 참전한 작은형은 “북쪽에 계시는 어머니를 겨냥해서는 단 한 방도 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늘에 대고만 빵빵 쏜다”는 편지를 남기고 전장에서 숨졌다. 형의 유해를 찾으러 강원도에 갔다가 사격을 당해 죽기 살기로 뛰었다. 뛰면서 다짐했다. 언젠가 나라의 허리를 내 손으로 잇겠다고. 전쟁이 끝났다. 국토는 폐허였다. 백기완은 ‘나라가 온통 퇴폐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고 여겼다. “우리 생명을 심자”며 젊은 날을 나무심기와 농민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1953년부터 꼬박 7년. 그때는 불덩어리 같았다고 했다. 젊은이들의 주머니를 털어 1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 뜨거운 청춘이 되살아나는 듯 백기완은 인터뷰를 멈추고 거친 목소리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다. “바라보라 붉은 산 햇빛에 탄다/ 저 산을 푸르게 마음도 푸르게/ 저 산을 푸르게 조국도 푸르게/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우리는 선봉이다 자진녹화대” 100만 그루의 나무는 이 땅에 생명이 되었을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은 반 세기 넘게 이어졌다. 그는 ‘가대기 형(兄)’ 이야기를 했다. “가대기 형은 서울역에서 막일하던 지게꾼이었어요.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그냥 가대기 형이라고 불렀어요. 싸움을 잘했지만 주먹쟁이는 아니었어요. 내가 가난한 친구들이랑 주먹다짐을 하고 나면 이렇게 얘기했죠.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들이랑 하는 거야. 없는 놈들끼리 싸워봤자 서로 코만 터져’ 그 말이 내 인생의 길라잡이가 됐어요.”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백기완에게 ‘나라를 반으로 가른 미국의 앞잡이’였다. 정권을 바꿔가며 30년 넘게 이어진 독재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가고 그래도 길이 없으면 새 길을 내자”며 4·19 혁명에 참여했다.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 반란이 터졌다. 그가 “독재자의 야욕과 자본주의의 폭악이 결합된 극악한 체제”라고 부르는 ‘박정희 18년’의 시작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나왔다. 1974년 1월에는 긴급조치 1호가 나왔다. 1973년부터 ‘유신헌법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벌이던 백기완과 고 장준하(1918~1975) 선생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2년 뒤 풀려났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그때를 꼽았다. 유신은 그에게 ‘반통일, 반평화, 반균등, 반자유, 반문화, 반예술, 반역사, 반진보’였다. “유신 타파 운동을 하다 집에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어요. 탕탕탕, 누가 현관문을 부수고 구둣발로 들어와 이불을 확 베끼더라고. ‘너희 집 안방에 강도가 구두를 신고 들어와서 이불을 벗기면 좋겠어. 빗자루로 쓸어 이 새끼야’ 그랬더니 나를 짓이기며 질질 끌고 가요. 기가 막혔습니다. 내 생각대로 목숨을 걸고 떳떳하게 살았는데 그렇게 끌고 가면 되겠어요. 온몸이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는 끌려가면서 아내에게 “여보, 나 기다리지 마. 훗날 내 무덤에 이름 모를 꽃이 피면 그게 해방 통일의 꽃일 거야”라고 외쳤다. “지금 들으면 어쭙잖은 얘기처럼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때는 죽기 살기로 싸울 때였으니 진지했어요. 거의 반 죽어서 감옥에 있는데 아내에게 편지가 왔어요. 새벽녘 추위가 더 매서운 법이니 견디어 내시라고.” 그러나 1975년 기다리던 아침이 오는 대신 믿고 따르던 장준하가 죽었다. 장준하는 그에게 “모든 통일은 좋다.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의 틀을 뒤집는 첫 걸음이 통일이다”고 알려준 스승이었다. 그는 “야비한 학살”이라고 했다. 여섯 달을 내리 울었다. 지난달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가 “머리에 둔기를 맞고 숨졌다”는 사인을 발표할 때 백기완은 다시 울었다. 1979년 유신 체제가 끝난 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또 다른 군사 정권이었다. ‘반동분자’ 백기완은 다시 끌려갔다. 모질게 맞았다. 손톱이 뽑혔다. 정신을 잃으면 물바가지가 날아왔다. 독재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죽기 살기로 시를 쓰며 버텼다. 그때 쓴 ‘묏비나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작곡돼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됐다.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중략)/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백기완은 민중후보로 대통령 후보에 추대됐다. 야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백기완이 단일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민주화는 눈앞의 신기루였다. 백기완이 선거 이틀 전 단일화를 외치며 후보를 포기했지만 ‘양김’은 끝내 각자의 길을 갔다.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민중을 위해 싸운 100여년을 승리로 매듭지을 기회를 날렸다.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1992년 말 다시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문민’(文民)의 간판을 내걸고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총칼을 앞세운 독재는 사라졌지만 백기완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를 거치는 사이 독재의 폭력은 신자유주의로 횡포로 바뀌고 있었다. 노동 현장을 찾아다녔다. 자본의 낯은 겉으로만 번지르르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는 가장 극악하게 노동을 탄압한 정권”이라고 했다. 정도는 달랐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 돈으로 환산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없애야 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민중이 해방되는 것이 역사적 과제”라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비바람과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여름 한때 없이 떨어지는 가랑잎을 ‘개죽’이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뜨릴 생각은 않고 그 속에서 출세, 돈벌이, 명예, 행복만 좇다가 개죽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여, 개죽이 되지는 마시오. 개죽으로 사느니 마음껏 자라다가 거름이라도 되는 게 나아요.” 그가 이번 정부에 가장 우선해 요구하는 것이 노동 문제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노조에서 최강서라는 젊은이가 서른넷에 목숨을 끊었어요. 유서에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5년을 더 기다릴 수 없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고 적었어요. 사실상 학살이나 다름없었어요. 장례식에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들이 ‘아빠 왜 안 오냐’면서 사탕을 먹고 있어요. 울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데 앞이 안 보입디다. 하지만 나는 앞이 안 보인다고 주저앉지는 않아요. 그대로 주저앉는 건 자본주의에 져서 인간성을 포기하는 겁니다.” 백기완은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유신 잔재’라는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유신에 대한 거부와 비판이 한마디도 없다”고도 했다. 그는 다시 ‘장산곶매’ 이야기를 했다. “장산곶매는 일찍이 애미 애비를 잃고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올빼미와 까마귀를 찾아가 밥 한 술을 빌다가 부리와 발톱을 빼앗겼죠. 땅 속으로 가면 쥐들이 쫓아오고, 바깥으로 가면 사람들이 보약이라며 달려들고. 그렇게 벼랑까지 쫓기다 보니 앞에는 끝도 없는 바다, 뒤에는 사람과 쥐새끼예요. 장산곶매는 벼랑 끝에서 넓은 바다와 하늘을 보며 깨친 바가 있어 힘이 약한 짐승은 잡아먹지 않고 일년에 두 번 나쁜 놈 하고만 싸우기로 합니다. 장산곶매가 싸움을 떠나는 날 밤이면 숲에서 ‘딱, 딱’ 하는 소리가 나요. 부리질로 제 둥지를 ‘딱, 딱’ 까부수는 소리. 집에 집착하면 온몸으로 싸울 수가 없어요. 싸움을 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돼요.” 2009년 백기완은 “한평생 하는 일들이 죄다 실패였다. 다시 실패의 어두움 속으로 반딧불이를 찾아 뛰어드는 느낌”이라고 했다. 어둠 속에 뛰어드는 그는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다. 백기완은 둥지가 없다. 백기완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하편에 계속).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백기완은 ▲1933년 황해도 은율 출생 ▲1953년 농민운동 시작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징역형,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 ▲1987년 민중후보로 대선 출마 뒤 단일화 주장하며 사퇴 ▲1988년 통일문제연구소 개소 ▲1992년 민중후보로 다시 대선 출마, 낙선 ▲1999년 계간 ‘노나메기’ 창간 ▲2002년 대한축구협회 요청으로 월드컵대표팀에게 강연, 히딩크 감독과 인연 ■주요 저서 항일 민족론(1986) 장산곶매 이야기(1994)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2009) 시집 이제 때는 왔다(1985), 젊은 날(1990) 극본 대륙(1998)
  • [부고]

    ●이상화(전 세방기업 상무)상호(전 행정자치부 기획관리실장·전 한국지방자치단체국제화재단 이사장)씨 모친상 김무웅(전 KCC종합창호 대표)기세규(유윈엔지니어링 전무)이동주(인천시청)씨 장모상 3일 중앙대병원, 발인 5일 오전 7시 (02)860-3510 ●한숙원(부림건축사무소 소장·전 우보엔지니어링 대표이사)씨 별세 지형(한국투자증권 기업분석부 수석연구원)소영(전 CJ엔터테인먼트 공연팀 부장)씨 부친상 강신웅(티캐스트 대표이사)박용원(전 비유컴 이사)씨 장인상 2일 서울성모병원, 발인 6일 오전 8시 30분 (02)2258-5940 ●김종남(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씨 부친상 우희창(충남도 미디어센터장)씨 장인상 3일 대전 을지대병원, 발인 5일 오전 9시 30분 (042)471-1653 ●박윤근(뉴스1 전북취재본부 부장)씨 부친상 3일 전북 익산 실로암사랑병원, 발인 5일 오전 8시 (063)834-4000 ●전경환(정보부처 사무관)혜경(알리안츠생명보험 과장)씨 부친상 김승호(외교통상부 주벨기에대사관 공사)씨 장인상 2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일 오전 9시 (02)3010-2236 ●손석주(전 문화공보부 문화예술국장)씨 별세 박응일(유일 대표)민경조(남양주YMCA 이사장)씨 장인상 2일 경희의료원, 발인 5일 오전 7시 (02)958-9545 ●한병훈(삼양화학 책임연구원)씨 부친상 3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발인 5일 오전 7시 (02)2227-7569 ●원의종(선리 부회장)씨 부인상 곽민석(미국 거주)김찬(KT 부장)정성채(PRT종합건설 상무)씨 장모상 3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5일 오전 7시 10분 (02)3410-6901
  • 종로구 ‘그날의 만세 함성’ 거리 축제로

    종로구 ‘그날의 만세 함성’ 거리 축제로

    종로구는 다음 달 1일 제94주년 3·1절을 맞아 인사동 남인사마당에서 ‘3·1 만세의 날 거리축제’를 개최한다. 종로문화원이 주관하고 서울시와 서울북부보훈지청이 후원하는 행사는 남인사마당 야외무대에서 오전 10시 시작하는 태극기 퍼포먼스와 역사노래 음악회로 막을 올린다. 천도교 원로로 독립선언에 참여한 이종훈(1856~1931) 선생의 자손인 이흥철옹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영종 구청장의 선창에 따라 만세삼창을 하는 행사도 열린다. 기념식이 끝나면 대형 태극기를 선두로 한 민족대표 33명과 3·1만세 운동 당시 의상을 입은 청소년 자원봉사자 500여명, 지역 주민,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재현한다. 행렬은 남인사마당에서 출발해 종로2가 금강제화, YMCA 앞을 지나 보신각까지 약 600m를 행진한다. 정오에는 보신각 앞 광장에서 보신각 33회 타종 행사를 갖는다. 행렬이 떠난 남인사마당 야외무대에서는 태평무, 경기민요 등 전통무용 공연이 펼쳐지며 야외무대 주변 인사동 거리에서는 태극기 그리기 행사가 오후 3시까지 진행된다. 이번 행사는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행사에 참여하는 시민에게는 소품인 태극기를 무료로 제공한다.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오전 9시부터 인사네거리~남인사마당 구간 차량을 통제한다. 김 구청장은 “이번 행사가 들불같이 일어났던 선조들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느끼고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면서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애국선열의 정신을 추모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도록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건물 11곳 불타… 도심 혼란

    건물 11곳 불타… 도심 혼란

    17일 오후 8시 26분쯤 서울 종로구 인사동 먹자골목 내 3층짜리 식당 건물에서 7~8차례 폭발음과 함께 큰불이 났다. 큰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10대 여성 7명이 호흡곤란으로 인근 중구 백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일대 11개 건물이 불에 타면서 23개 식당 등이 잿더미로 변하는 등 큰 재산 피해를 입었다. 이날 화재는 3층짜리 목조건물에 있는 식당의 프로판 가스 폭발 등에 따라 확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화 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시작된 폭발음이 여기저기서 계속되면서 인근 서울YMCA 호텔에 투숙하던 외국인들을 비롯해 시민들이 급히 대피하는 등 종로 일대에서는 큰 소동이 빚어졌다. 화재가 난 곳은 크고 작은 식당들이 몰려 있는 이른바 먹자골목으로, 한옥을 개조해 목조 골격이 그대로 남은 건물들도 적지 않은 데다 건물로 진입하는 도로 폭이 채 4m가 되지 않아 소방차 진입이 어려워 화재 때 피해 우려가 높은 곳이었다. 소방 당국은 불이 나자 소방차량 62대와 소방관 181명을 투입, 오후 10시쯤 진화했다. 한국전력은 불길이 화재가 난 건물 위로 걸친 전선으로도 옮아 붙자 이 일대 전력을 일시 차단, 주변 건물들이 정전됐다. 불이 난 골목의 한 식당 주인은 “신발과 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허둥지둥 빠져 나왔다”며 “우리 식당에까지 불이 번진 것 같은데 가까이 갈 수가 없다”며 울먹였다.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50)씨는 “폭발음이 들려 밖으로 나와 보니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며 “불이 난 건물 1층 식당에서 손님들이 폭발음을 듣고 긴급히 대피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화재로 종로 일대 교통도 극심한 정체를 빚었다. 트위터에서는 인명 피해를 우려하는 글과 가족의 안부를 묻는 글들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5명이 매몰됐다는 낭설까지 나돌았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진화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업주와 목격자 등을 상대로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할 방침이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비리·부실… 못믿을 사회적 기업

    정부지원금을 받는 사회적 기업 중 일부가 비리와 부실 운영으로 구설에 오르고 있다. 대구시는 6일 대구YMCA가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 2곳에 대한 지원금 회수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회수 대상 지원금은 고용노동부의 보조금 11억 5000여만원, 시의 사업개발비 1억 1000여만원 등 12억 6000여만원이다. 이들 사회적 기업은 재활용 자전거 수리사업을 맡아 온 ‘희망자전거 제작소’와 신천 생태습지조성과 생태교육사업을 한 ‘신천에스파스사업단’이다. 희망자전거 제작소는 2008년 12월, 신천에스파스사업단은 2010년 1월 고용부로부터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됐었다. 그러나 고용부 조사 결과 사회적 기업 인증 심사에 필수서류인 대구YMCA 이사회 회의록이 조작된 상태에서 두 기업이 인증심사를 통과한 사실이 밝혀져 지난해 인증이 취소됐다. 이들 사업단은 대구YMCA 본부 내에 센터를 두고 그동안 홈페이지 등을 통해 사업을 적극 홍보하고 공공기관과 실무협약을 맺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왔다. 특히 희망자전거 제작소는 사회적 기업 모범 사례로 소개됐으나 태생부터 불법인 것으로 드러났다. 대구YMCA는 인증 취소가 부당하다며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청구해 놓고 있다. 또 수성구 A업체는 2011년 9월 예비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된 이후 각종 지원을 받아 규모를 확장했다. 이 업체는 떡을 제조, 도·소매를 해왔으나 판매 부진 등으로 사회적 기업으로 승격하지 못해 지난해 9월부터 시 등에서의 지원이 끊겼다. 이후 직원들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 등 경영난을 겪고 있다. 이 밖에 중구의 B업체, 달서구의 C업체 등 일부 예비사회적 기업도 고용부가 제시한 사회적 기업 인증 기준을 통과하지 못해 지원금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이는 사회적 기업들이 기술개발이나 경영은 소홀히 한 채 지원금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기업은 일자리 창출과 시민사회 발전 등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공익사업이다. 현재 대구에는 52개의 예비사회적 기업과 33개의 사회적 기업이 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텃밭 광주, 野 민생투어에서 제대로 ‘회초리’ 들었다는데…

    텃밭 광주, 野 민생투어에서 제대로 ‘회초리’ 들었다는데…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가 15일 ‘회초리 민생현장 방문’의 첫 일정으로 호남 지역을 찾았다. 민주당을 지지해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데 대해 회초리를 맞는 심정으로 쓴소리를 듣고 당을 ‘재건축’하는 자양분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예상대로 혼쭐이 났다. 민주당 비대위원들과 지역 의원 50여명은 5·18 민주묘지를 먼저 찾아 헌화, 참배했다. 이어 ´광주전남 시도민께 드리는 삼배’를 올렸다. 문희상 비대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를 지고 말았다. 열화와 같은 광주시민들의 뜻을 받들지 못했다”며 “살려달라, 도와달라”고 읍소했다. 하지만 민주당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텃밭’으로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냉담한 기운이 느껴졌다. 비대위원들의 첫 방문지였던 광주 YMCA 간담회에는 당의 원로들과 당원들 외에 시민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마저도 전체 100석 자리 가운데 30여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민주당에 대한 쓴소리를 ‘봇물’ 터진 듯 쏟아냈다. 송희성 한국여성지도자연합 광주전남회장은 “태어나서 두번 울었는데, 한번은 1987년 DJ가 떨어졌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이번이다”면서 “전부 나서서 똘똘 뭉쳐도 이길까 말까 하는데, 대통령 경선에서 떨어진 분들이 똘똘 뭉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안성래 전 5월 어린이집 원장은 “(울먹거리며) 우리가 논밭 다 팔아서 민주당 만들었다”면서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나날이 자살하는 분들, 크레인 위의 그 분들을 위해 뭘 하겠다는 성명서라도 내라”고 지적했다. 이창 유네스코 협회장은 “문재인 후보가 대선 패배 후 감사와 참회의 민생투어를 하기를 기대했다”면서 “정치쇼로 보일지언정 봉사하고 독거노인 찾아가는 등 민생을 살펴야 민주당에 대한 연민이라도 생긴다”고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는 문 비대위원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계파 정치의 폐해도 지적됐다. 대선 광주 지역 선대위 공동선대위원장이었던 무진 스님은 “매번 위급한 상황이 올 때마다 계파정치 안 한다고 하더니, 꼭 선거 때마다 계파정치 되더라”면서 “민주당은 친노, 친손 세력이니 하는 계파를 우선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천 과정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송 회장은 “왜 꼭 새누리당보다 공천을 늦게 해 선거운동 출발이 늦어지나”라고 꼬집었다. 박종택 상임고문은 “권리당원을 등한시하는데, 내년 6월 지방선거 때는 납득할 수 있는 공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생현장 첫 방문지는 광주 양동시장이었다. 상인들과의 간담회에서도 ‘매질’은 계속됐다. 한 상인은 “민주당에서 정책다운 정책을 내놓은 게 없었다. 정말 한심스럽다”면서 “선거 때만 되면 호남, 광주를 볼모로 삼아서 광주 시민들에게 해준 게 뭐 있나. 상처만 많이 받았다”고 질타했다. 일반 시민들도 민주당을 호되게 비판했다. 광주 서구에 사는 나병수(56)씨는 “왜 선거만 지면 5·18 묘지에 오나. 정치인들은 하루만 인사하고 당선되면 끝이다”면서 “민주당은 호남 사람들을 그만 좀 이용해라”고 다그쳤다. 또 다른 시민인 정익주(72)씨도 “선거 때 친노니 비노니 하는 얘기는 정말 듣기 싫다”면서 “제발 줄 잘 서서 공천 얻고 이런 것 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비대위는 함평의 한 노인정을 방문해 어르신과의 간담회를 끝으로 이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16일에는 경남 창원에서 비대위 2차 회의를 연 뒤 봉하마을을 찾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 참배, 부산 민주공원 참배 등의 일정을 이어간다. 광주·함평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베토벤 듣는 2시간, 우린 하나입니다”

    “베토벤 듣는 2시간, 우린 하나입니다”

    인도 출신 명지휘자 주빈 메타(77)가 한국을 방문했다. 40여년간 호흡을 맞춘 그의 분신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5~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신년 갈라콘서트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 남달리 애써온 메타는 3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음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음악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생각이 다른 두 사람조차도 베토벤 연주를 듣는 약 두 시간 동안만큼은 하모니와 화합의 장 안에 있게 된다”고 밝혔다. 이어 “스스로 매우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 수백년의 역사가 있는 걸작을 연주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의 평화다. 이것만이 내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메타는 1968년 음악고문으로 이스라엘 필과 첫 인연을 맺었고, 1981년 종신 음악감독을 맡았다. 40여년을 함께하면서 3000회의 공연을 소화했다. 걸프전 때는 리허설마다 방독면을 들고 다녔고, 미사일 경보로 공연이 중단되는 것도 다반사였다. 예루살렘 YMCA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어린이 500명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2001년에는 두 민족 어린이들의 공동연주와 학교 방문을 위한 ‘키노트’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1990년 텔아비브에서 앙숙이었던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닉과 이스라엘 필하모닉의 역사적인 합동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누구보다 음악의 힘을 현실에서 입증해 온 그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9월 카슈미르 분쟁지역에서 힌두교인과 무슬림을 한자리에 초청해 공연을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메타는 음악에 정치가 개입하는 걸 반대한 원칙주의자이기도 하다. 1981년 10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은 지금껏 일화로 남아있다.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자이자 히틀러가 숭배했던 탓에 바그너를 연주하는 건 이스라엘에서는 금기시됐다. 하지만, 그는 관객의 야유에 맞서 “이곳은 민주주의 국가다.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자유가 허용돼야 한다. 바그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분들은 지금 공연장을 떠나도 좋다”면서 끝까지 지휘했다. 하지만, 메타는 이날 “올해 베르디와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맞아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와 베르디의 ‘오텔로’, ‘팔스타프’ 등도 연주할 계획”이라면서도 “바그너 음악을 이스라엘 필과 연주하는 것은 아니다. 나치 정권 아래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기억을 존중하기 위해 이스라엘에서 연주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마음만은 이미 홀~쭉 해요

    마음만은 이미 홀~쭉 해요

    27일 서울 서초구 양재YMCA 에어로빅실에서 열린 비만관리 교실에 참가한 초등학생들이 짐볼을 이용해 운동을 하고 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스마트폰 수리비 AS센터 ‘멋대로’

    스마트폰 수리비 AS센터 ‘멋대로’

    같은 스마트폰 부품이라도 애프터서비스(AS) 센터마다 수리 가격을 제멋대로 책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액정 등은 AS센터에서 제조사가 책정한 것보다 더 많은 교체 비용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YMCA는 26일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등 3개 스마트폰 제조사 9개 제품(각 사당 3개)의 부품 교체비용과 수리비용 등을 조사해 발표했다. 조사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예산 지원으로 이뤄졌다. 조사 제품은 ▲삼성전자 갤럭시S2, 갤럭시HD, 갤럭시S호핀(HOPPIN) ▲LG전자 옵티머스2X, 옵티머스3D, 옵티머스LTE ▲팬택 베가레이서, 베가No.5, 베가LTE 등이다. 서울지역 75개 AS센터를 조사했다. 조사에 따르면 AS센터들은 액정의 경우 9개 대상 제품 중 7개 제품에 대해 제조사보다 더 높은 부품 가격을 받고 있었다. 삼성전자 갤럭시S2 HD는 AS센터 평균 가격이 제조사 가격(11만 3000원)보다 2만 3000원 이상 높은 13만 5543원이었다. 35개 삼성전자 AS센터 모두 제조사보다 부품 가격을 높게 불렀다. LG전자 옵티머스2X도 2곳을 제외하고 제조사 책정가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 메인보드도 사정은 비슷했다. 삼성전자 갤럭시S2 메인보드의 제조사 가격은 14만 2000원이지만 AS센터 35곳 중 8곳은 이보다 높은 가격을 요구했다. 반면 LG전자와 팬택은 대부분의 AS센터에서 제조사 가격보다 저렴하게 부품을 팔고 있었다. 다만 배터리는 AS센터별 가격 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엿장수 AS비용’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도 상당하다. 올 상반기 소비자상담센터에 접수된 스마트폰 관련 상담 건수는 1082건을 기록했다. 장기간 수리 등 수리서비스 관련 불만이 49.5%로 가장 많았다. 상담사례 1건당 평균 부품 교체비용은 19만 4300원이었다. 한국YMCA 측은 “합리적인 수리비 책정을 위해서는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부품 원가 정보를 제공하고 부품가격 인하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스마트폰 수리비는 전국 AS센터에서 동일 가격을 적용하고 있다.”면서 “이번 조사는 전화 문의 방식으로 이뤄져 불량 정도 등에 따라 가격 편차가 발생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7·끝) 이승만과 박용만

    [선택! 역사를 갈랐다] (37·끝) 이승만과 박용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나 박용만(1881~1928)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두 사람은 절친한 동지로서 미국에서 유학한 후 독립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했지만, 노선의 차이로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외교론’은 조선의 힘으로는 독립이 어려우니 열강과의 외교 교섭을 통해, 그들이 조선을 독립시켜 주도록 교섭을 하자는 논리였다. 하지만, 박용만의 ‘무장투쟁론’은 체계적으로 군사력을 양성하여 일본과 무력항쟁을 벌일 준비를 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4·19 혁명의 결과 하와이로 쫓겨난 뒤, 비서에게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상대는 바로 박용만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옥중 결의형제, 미국유학을 떠나다 이승만은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서 배재학당을 다니다가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를 통해 일약 청년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그런데 박영효 세력들이 꾸민 역모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탈옥을 감행했다가 체포됨으로써 죄가 가중되어 사형선고를 받을 뻔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감형되어 감옥생활을 했다. 박용만은 관립일어학교를 다니다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1901년 귀국 후 박영효와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감옥생활을 몇 개월 하였다. 그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다가 다시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바로 이때 이승만과 만나 옥중 의형제를 맺었다. 1904년 출옥한 지 몇 달 뒤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은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이때 기자들에게, 자신은 일진회의 대표로 왔고 대한제국 국민은 고종을 지지하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보다는 일본에 더 우호적이라는 말을 하였다. 워싱턴 DC의 유력한 장로교 목사 추천으로 조지워싱턴대학에 들어간 그는 학업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았음에도 무사히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의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는 2년 만에 박사를 달라고 우겼지만, 성적 불량으로 석사를 마치지 못하게 되자, 또다시 프린스턴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2년 만에 파격적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 하버드대학에 석사학위를 달라고 요청하여 계절학기 수업 하나를 이수하는 조건으로 학위를 받았다.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려 취득한 그의 학위는 평생 그의 권위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는 1908년에 일어난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 통역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여 동포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한편, 박용만은 주로 미국 중부의 네브래스카와 콜로라도를 근거지로 삼고 미국으로 오는 조선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주선하면서 청년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네브래스카주립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대학이 좋은 군사훈련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ROTC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한인 소년병학교를 창립, 젊은 학생들에게 학기 중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여름방학에 입소하여 8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 후 헤이스팅스대학에서 기숙사와 학교 시설을 제공받아 한인 소년병학교를 이전하여 규모를 확대시켰다. 이 학교는 일본의 항의로 1914년 폐교될 때까지 6년간 90여명의 생도를 훈련시켰다. ●대한인국민회와 YMCA 여러 단체로 분립되어 있던 미주 지역의 한인 조직들은 마침내 1910년 대한인국민회(이하 국민회)로 통합되었다. 박용만은 이때 ‘백성은 있으나 토지가 없어 남의 토지 위에 만든 국가’라는 의미의 무형국가(無形國家)를 조직하기 위해 1911년 신한민보 주필에 취임하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중앙총회를 설립하는 데 전력하였다. 그가 주도한 헌장은 사실상의 헌법으로 국민회 중앙총회가 해외 한인의 대표기구이면서, 대한제국을 대신한 민주주의 정부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공화주의 선언이었으며 이를 주도한 것이 바로 박용만이었다. 한편, 이승만은 1910년 귀국하여 신변보장을 받으며 YMCA에서 종교활동과 교육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중, 105인 사건이 터지자 친일 선교사의 도움으로 1912년 세계감리교대회에 조선대표로 선발되어 다시 미국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는 미국에 도착한 후 일본의 조선통치를 비판하기는커녕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사회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경제의 중심으로 변모했다.’고 오히려 찬양했다. ●하와이의 결투 당시 하와이는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으로 자신들을 지도해 줄 사람으로 박용만을 초청하였다. 박용만은 1912년 말에 성대한 환영식을 치르고 본격적으로 하와이에서 자치제도를 실현하려고 애썼다. 그는 하와이 한인지방총회를 법인으로 등록하였고 특별경찰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국민의무금제를 도입하여 재정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사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그는 1914년 앞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사력를 양성하기 위한 대조선 국민군단과 장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교민들은 평소에 노동하고 틈틈이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 교관을 맡아 체계적인 훈련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편, 미국에 왔다가 귀국을 포기하여 오갈 데 없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해 준 것은 바로 박용만이었고, 이승만이 1913년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성대한 환영행사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이승만이 창간한 ‘태평양잡지’를 후원했다. 그러나 파국은 곧 시작되었다. 문제는 주도권과 돈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여자 기숙사를 짓겠다며 모금을 시작했으나 여의치 않자 국민회의 부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전시켜 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회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다음 해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는 국민회를 강하게 공개 비판하면서 각 지역을 돌며 추종자들을 모아 박용만 지지파에게 테러를 자행하면서 국민회를 장악하였다. 이때 박용만은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치러진 국민회 중앙총회 선거에서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회장으로 당선된 안창호는 이승만을 만나 평화적으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하와이를 직접 방문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피해 넉 달간이나 잠적해 버려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그 결과 이승만의 탐욕은 국민회와 박용만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해 놓은 조직과 재정을 송두리째 파탄내 버렸다. 결국, 하와이 한인의 최고기관이자 자치정부로 자리잡아 가던 국민회는 이승만의 개인 왕국으로 전락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1916년 10월 하와이 현지 신문에 자신은 반일교육을 하고 있지 않으며 한인 사회에서 어떤 반일적 언급도 하지 않도록 통제시키고 있다는 기고문을 실었다. 그후, 1918년 회계감사에서 이승만의 부정이 드러나자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하였고 이승만은 자신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인사들을 폭동죄 및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이승만은 법정에서 그들이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어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고 일본 함선을 파괴하려는 무리’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결국 모두 모함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살인미수 혐의는 기각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정행위를 감추기 위해 항일운동의 성과를 해치는 것마저 서슴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한 박용만은 1918년 이승만의 독선과 야욕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하와이 한인사회는 양분되고 말았다. ●상하이 임정과 군사통일회의 이승만은 3·1운동 이후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안이 나오자, 이를 수렴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을 자임하였고 이를 승인하도록 밀고 나갔다. 그리고 국채발행권을 고집하면서 구미위원부를 만들어 상하이에서의 집무를 거부하였다. 그가 상하이에 나타난 것은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위임통치 건의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여 갈등만 벌이고 몰래 돌아갔다. 이승만은 궁지에 몰리자 자신이 배신하였던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뻔뻔한 강심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박용만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무장투쟁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자신은 ‘군사노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취임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베이징을 거점으로 이회영, 신채호 등과 함께 1921년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했고, 이승만과 상하이 임시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후 군사기지 건설 자금을 모으고 중국 군벌들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1928년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에 의한 참극이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이승만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측에 한인 군사부대 창설을 제안하였다. 박용만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1910년대부터 준비했으나 이승만에 의해 뿌리가 뽑힌 노선이었다. 이승만의 방해와 파괴공작이 없었다면 박용만이 양성했던 조선인 군사력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여 훌륭히 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해방 이후 승전국의 대우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박용만은 이승만과의 대립, 나아가 노선이 달랐던 상하이 임정과의 갈등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잊히고 말았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선택! 역사를 갈랐다’ 연중 기획이 37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열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12월 10일에는 연재에 참여하신 역사학자들과 ‘역사의 역할과 교훈’을 주제로 한 토론 기사가 준비됩니다.
  • 한국인 싹쓸이?… GAP, 반값세일 한국서버 접속 차단

    한국인 싹쓸이?… GAP, 반값세일 한국서버 접속 차단

    미국의 의류업체 ‘갭’이 추수감사절 세일을 앞두고 본사 온라인 쇼핑몰에 대한 한국 서버의 접속을 차단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사실상 한국 고객의 온라인 구매를 막은 것이다. 수입사인 신세계인터내셔널 측은 23일 “한국인의 주문이 몰려 미국 내 물량이 소진될 것을 우려해 내린 조치로 해석된다.”면서 “세일 기간 동안 한국인들의 주문 취소나 불만 접수가 많아 이런 조치를 내렸다는 이야기도 들린다.”고 했다. 세련된 디자인으로 젊은 주부 등에게 인기가 높은 브랜드 ‘갭’은 국내 백화점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하지만 가격 차이가 커 주부들을 중심으로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서 공동구매를 하는 경우가 많다. 갭 닷컴(www.gap.com)에서는 이번 추수감사절 세일을 맞아 29.95달러인 남아용 아치 로고 플리스 후드 재킷을 20.96달러 우리 돈 2만 2700원(23일 기준 환율 1086.40원)에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매장에서는 같은 제품이 2배가 넘는 5만 4900원에 팔리고 있다. 할인 전과 비교해도 2만원 이상 차이가 난다. 갭뿐만이 아니다. 폴로닷컴(www.polo.com)에서는 아동용 클래식 메시 폴로셔츠를 29.95달러에 구입할 수 있다. 약 3만 2500원 선이지만 국내 백화점에서는 같은 모델을 7만 8000원에 팔고 있다. 배송비나 관세를 고려하더라도 공동구매 등을 통하면 최고 50% 가까이 저렴하게 옷을 살 수 있는 셈이다. 특히 최근 원화가 강세로 돌아서면서 젊은 세대 등을 중심으로 직접 구매가 유행이다. 스토케 등 유모차나 레고 등 장난감, 여성용 명품 가방류와 고가 청바지 등도 이런 직접 구매 방식으로 수입하는 일이 많다. 전문가들은 수입업체들이 유통과정에 지나친 이윤을 붙이다 보니 해외 상품의 온라인 세일 때마다 이 같은 쏠림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일부 네티즌들은 수입업체가 매출 감소를 우려해 해외 사이트 접근을 본사에 요청한 것이라는 주장도 펼친다. YMCA 심유정 간사는 “수입 유통업체의 폭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라면서 “수입업체들이 마진을 극대화하고자 소비자들의 해외 직접 구매를 막는 일도 있다.”고 지적했다. 신세계 인터내셔널은 “본사에 한국 네티즌의 사이트 접근을 막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면서 “한국 가격도 원가에 관세, 해외운임비, 부가세 등에 직원 급여, 기타 운영비 등과 마진을 고려한 수준일 뿐”이라고 밝혔다. 명희진기자 mhj46@seoul.co.kr
  • [경제포커스-현대車 연비 파문 확산] 국내 소비자 반발 왜

    현대기아차의 연비 사태를 보는 국내 소비자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제품에 대한 불만보다 그동안 차별받았다는 서운함이 쌓였기 때문이다. 현대 싼타페를 소유한 김모(34)씨는 8일 “국내에서는 소비자들이 불만을 제기해도 꿈쩍도 않으면서 미국 정부가 문제가 있다고 하니까 바로 사과 광고를 내고 보상안을 발표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을 수 없다.”면서 “규정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규정 준수… 국내선 보상 계획없어” 지난 2일 미국 환경보호청(EPA)의 현대기아차 연비 과장 발표 이후 현대기아차의 대응을 두고 국내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미국에서 보상 프로그램을 내놓은 것과 달리 국내 판매 차량에 대해선 “국내 규정을 준수했기 때문에 보상안을 마련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규정으로 따지면 현대기아차의 말이 맞다. 하지만 성수현 YMCA 자동차안전센터 간사는 “과거 배기가스 실내 유입이나 차량 녹 발생 등 소비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에 대한 현대기아차의 미온적 태도로 쌓인 불만이 이번에 터져나온 것 같다.”면서 “현대기아차가 수출을 늘리기 위해 미국 등지에서 할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도 국내에서는 자동차 값을 지속적으로 올리고 서비스는 강화하지 않은 것도 불만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일각 “느슨한 품질관리 규정이 문제” 일각에서는 현대기아차만 비난을 받을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국토해양부 등이 너무 느슨한 가이드라인을 유지하는 게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는 부분까지 보상을 해주는 것이 쉽지 않다.”면서 “개별 기업들의 태도만 탓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진영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 운영위원장도 “기업에 선의를 바랄 게 아니라 정부가 관련 규정을 세밀하게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학교주변 200m내 키스방·전화방 퇴출한다

    학교주변 200m내 키스방·전화방 퇴출한다

    학교 환경위생 정화구역에 있는 키스방 등 신·변종 퇴폐업소가 강제 폐쇄된다. 전국 지역교육청은 31일부터 정화구역에서 퇴폐영업을 하다 2회 이상 적발된 전화방과 키스방, 마사지업소 등을 이전 또는 강제 철거해 줄 것을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요청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상은 지난 8~9월 관계부처 합동 집중단속에서 불법영업을 하다 적발된 학교 주변 청소년 유해업소 4113곳 가운데 정화구역에 있는 신·변종 퇴폐업소 40여곳과 단속에는 적발되지 않았지만 지역교육청 현장 확인 과정에서 추가 확인된 업소들이다. ●정화구역 단속… 40여곳 적발 경기 의정부 의정부동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 전화방은 방에 침대와 PC 등을 갖춘 뒤 음란물을 상영하다 적발됐으며, 직선거리 193m 지점에 유치원이 있어 강제철거 대상이다. 용인 기흥구 신갈동 H전화방도 80m 지점에 신갈초교가 있어 같은 상황이다. 안양지역교육청은 지난 8~9월 합동단속에서는 전화방 1곳만이 정화구역 안에 있는 것으로 확인했으나 현장 확인과정에서 음란물을 공연한 10개 성인PC방을 추가 적발하고 이날 관할 구에 정화구역 밖으로 이전을 시키든가 시설 철거명령을 발동해 달라는 내용의 협조공문을 발송했다. 현행 학교보건법은 학교 경계선으로부터 반경 200m 이내를 절대정화구역(50m 이내) 또는 상대정화구역(200m 이내)으로 설정, 청소년 정서 형성이나 학습에 지장을 주는 유해시설이 들어설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전화방과 키스방 등의 신종 퇴폐업소들은 세무서에 사업자등록만 내면 영업을 할 수 있는 자유업에 해당돼 사전에 차단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 또 퇴폐영업을 하다 적발돼 영업장 폐쇄 등의 행정처분을 받더라도 소유권이 이전된 것처럼 명의자를 바꿔 계속 영업할 수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에는 한계가 있다. ●사전차단 등 근본대책 절실 의정부YMCA 최근혁 사무총장은 “자유업종이라 해도 청소년 유해시설은 정화구역 안에 들어설 수 없도록 사업자등록을 내주지 않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기도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김달수(민주통합당·고양8) 의원도 “청소년들이 낯 뜨거운 퇴폐업소 전단과 성 매매업소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청소년 탈선을 따지기에 앞서 미성년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유해환경부터 근절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여수시민단체 “시장 물러나라”

    “허술한 재무관리 시스템이 어처구니없는 대형 국고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광주지검 순천지청이 지난 29일 76억원을 횡령한 김석대(47)씨를 특가법위반(국고손실)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면서 전남 여수시의 부주의한 행정처리를 지적한 말이다. 지역민들은 이러한 총체적인 회계부실이 드러나면서 여수시가 지난 22일 대시민 사과문을 발표한 이후에도 10일 넘게 뚜렷한 해결 방안을 내놓지 못하자 크게 분노하고 있다. 시민들은 “여수시를 비리 도시로 만들었으면서도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는 사람 없이 시간만 축내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더구나 김충석 시장이 “‘회계과에 엄청난 비리가 있으니 잡아내라’는 꿈을 통해 비리사건에 대한 암시를 받았고, 이번 일은 김충석이 시장이기 때문에 밝혀졌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시켰다. 급기야 여수시민협, 여수환경운동연합, 여수YMCA·YWCA, 여수일과복지연대, 여수사랑청년회 등 여수지역 6개 시민단체들이 31일 김씨의 공금횡령 사건에 대해 ‘시장 사퇴’를 언급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시의 책임 있는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여수시민협 김태성(45) 사무처장은 “민선 5기 여수시는 청렴 행정을 강조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회계 및 감사제도의 허술함, 관리부실 등의 문제점들이 드러났다.”며 “시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어도 이번 비리를 막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한편 광주지검 순천지청은 이날 김씨의 아내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 김모(45)씨에 대해 대부업 등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등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서재필(1863~1951)와 윤치호(1865~1945) 두 사람은 개화파의 막내들로서 10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을 거쳤고, 1884년 갑신정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당시에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서 정식 대학교에 진학해 근대 서구문명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근대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들인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크게 엇갈린다. 서재필은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반면 윤치호는 친일파의 대표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무엇이 두 사람을 극단적으로 다르게 만들었을까. ●갑신정변 행동대장 vs 美 공사관 통역관 서재필은 19세였던 1882년 별시 문과에 합격했으나 무관으로 과감히 변신해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학교를 나온 후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변 과정에서 고위 대신들을 살해하는 행동대장이었다. 따라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 망명 길에 올랐다. 한편 윤치호는 16세였던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가 남아서 도진샤(同人社)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발탁돼 귀국하였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주도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정변에 반대했고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치호는 당시 김옥균 일파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중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 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서재필은 홀로 서기를 감행하였다. 그는 워싱턴 DC에서 야간 의과 대학을 나와 마침내 1893년에 의사 면허를 받았다. 1890년에는 미국인으로 귀화해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고, 4년 뒤에는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였다. 한편 윤치호는 1885년 초 중국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유학을 시작했으며 1887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8년 미국 남감리교의 후원으로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였지만, 시민권 취득이나 국제결혼을 생각하지는 않았고 유학을 마친 후 중국 중서학원으로 돌아가 교사가 됐다. ●서재필, 의사 되며 ‘원조’ 아메리칸드림 이뤄 서재필은 1894년 갑오개혁 정권의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1895년 12월 귀국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중추원 고문관에 취임하였고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또한 그해 7월에는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데 고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1897년 후반 러시아의 만주 침략과 조선 진출 정책이 강화되자 반러적 입장을 드러내다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해 이름을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으로 사용했다. 굳이 한글로 표현할 때는 제손 박사 또는 피제선(皮堤仙)이라고 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갑오개혁 이후 귀국하여 학부협판이 되었다. 그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정동파’로 분류됐고 을미사변으로 미국 선교사와 공사관에서 피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그는 고종의 특사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다녀왔다. 따라서 독립협회 창립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귀국 후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독립협회를 계몽단체로 개조했다. 그는 서재필이 떠난 후 독립신문을 운영했고, 이완용에 이어 1898년 8월부터 독립협회 회장을 맡아 이후 전개되었던 정치개혁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달리 만민공동회가 폭력화되어 결국 강제 해산되자 지방관으로 떠남으로써 독립협회 회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20년 동안 조선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서재필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며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잡지, 책자를 발행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하였다가 실패하자 항일활동을 마감하였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한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대한자강회의 회장이었고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했으며 안창호와 협력해 대성학교 교장과 청년학우회 회장을 맡았고 YMCA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12년에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 윤치호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그는 3·1 운동을 전후하여 파리 강화회의 대표, 임정 참여, 워싱턴 군축회의 참가, 미국 망명 등 모든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열강이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의 통치정책에 대해서는 반감을 품었지만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설령 독립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성 개조를 통한 민족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으로 산 서재필 vs 일본인 된 윤치호 서재필은 1922~1927년 갑자기 국내 일간지와 잡지 등에 다시 등장하여 식민지배에 순응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식민지화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에서 찾았고, 독립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보다는 경제적 활동에 주력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그가 1937~1938년에 미주 한인 2세를 위해 ‘신한민보’에 영문으로 기고했던 ‘MY DAYS IN KOREA’(나의 조선 시절)를 보면 대부분 조선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고 개화파를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일본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맞서 싸우는 미국 시민으로서 반일로 돌아섰다. ●윤치호, 日전쟁 승리를 백인인종차별 극복 간주 한편 윤치호는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고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에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일본 국민’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주도했으며 대표적 친일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45년에는 마침내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까지 선임되었다. 그의 친일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강요라기보다는 당시의 조건 속에서 조선 민족의 현명한 선택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이 구미 열강에게 승리하는 것을 황인종이 백인의 인종차별주의를 이긴 것으로 열광하였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일본이 소련에 승리하기를 기원하였다. 나아가 내선일체를 통해 민족차별 정책이 철폐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서재필은 점령국 미국의 시민으로서 미군정 고문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 대해 반대하면서 통일국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고국에 머무르기보다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윤치호는 더는 공적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죽기 몇 달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거기서 그는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의 해방은 항일민족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친일파를 사면하여 민족단결을 이루자고 호소하고 있다. 윤치호가 1945년 12월 사망하여 1947년 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한 서재필과의 재회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말년 볼 것인가 vs 인생 전체 평가할 것인가 서재필은 전 생애에 걸쳐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는 어느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들 만큼 도전과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은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투쟁과 희생을 요구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민족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희생적 자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것은 불과 27세까지였고 나머지는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해방 후 부모의 묘소조차 참배하지 않았다. 그의 묘지명에는 분명히 필립 제이슨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 택한 필립 제이슨의 유해를 억지로 국내로 모셔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은 분명히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반면에 윤치호는 모든 판단을 함에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국내에서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개조하여 근대 국민으로 발전할 것을 희망했다. 그는 안창호를 누구보다 아끼고 후원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필요로 한 민족 저항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활동했던 기간이 합해서 5년이 안 되지만 대체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같은 입장에서 행동하였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았지만, 두 사람이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본에 대한 선망과 동경도 비슷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긴 세월을 자의에 의해 미국인으로서, 윤치호는 타의에 의해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 결과 오늘날 서재필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반면에 윤치호에 대해서는 매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윤치호의 친일을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인생을 단죄하기에는 안타까운 연민의 심정이 든다. 하지만 그의 친일을 ‘협력’ 또는 ‘친일 민족주의’라고 정당화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한 인물의 굴곡에 찬 긴 인생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사학자로 살아가면서 점점 마음속으로 느끼게 된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수익 눈멀어 ‘막장’ 눈감는 인터넷 방송업체

    일부 인터넷 개인방송이 음란·엽기물을 방송하는 등 막장으로 치닫고 있지만 당국은 뾰족한 대책을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시청자들이 방송 중에 ‘별풍선’이나 ‘솜사탕’ 등 현금으로 아이템을 구입해 진행자에게 직접 선물하는 현재의 수익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터넷 개인방송 진행자들은 사실상 현금이나 아이템을 하나라도 더 받기 위해 무리한 방송을 이어간다. “별풍선 1000개가 모이면 야한 옷으로 갈아 입겠다.”는 식의 방송을 하거나 음식을 대량 섭취하는 등 음란·엽기 방송을 자처하고 있다. 일부 진행자의 무분별한 방송 행태도 문제지만 들여다보면 개인방송 플랫폼 업체의 탐욕이 이런 구조를 부추기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인터넷 개인방송 A업체에서는 시청자들이 100원에 아이템을 구입하면 40%를 자체 수익금으로 가져가고 있다. 환전 수수료라는 명목에서다. 진행자는 별풍선 한 개당 60원만 환전할 수 있다. 한 네티즌은 “아이템 거래가 많아질수록 업체에 이득이 되다 보니 유료 아이템 제도를 악용하는 음란쇼 진행자를 눈감아 주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인터넷 개인방송의 유료 아이템 구매는 도입 첫해인 2007년부터 줄곧 문제가 돼 왔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관계자는 “사실상 별풍선 등이 음란·엽기 방송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면서도 “유료 아이템 구조는 기업의 수익 구조와 직결돼 있어 우리가 함부로 나설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심의기관이나 업체가 유료 아이템의 어두운 단면과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해결책 모색을 외면해온 셈이다. 자체 모니터링을 강화해도 음란물 등의 단속 효과가 미미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다. 한 인터넷 개인방송 업체 관계자도 “좋은 의도로 도입한 시스템이 왜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지 모르겠다.”며 문제가 있음을 시인했다. 한석현 YMCA시민운동 본부 간사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인터넷 방송의 부흥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일부 방송처럼 음란·엽기 퍼포먼스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면서 “인터넷 개인방송이 자리 잡은 지 오래지만 수익 구조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공론의 장이 없었다. 이를 어떻게 선순환 구조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업체, 정부, 시민 모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명희진기자 mhj46@seoul.co.kr
  • 불길 커지는 여수 화력발전소 반대

    전남 여수 시민사회단체들이 여수국가산업단지 안에 화력발전소 건설이 추진되는 것과 관련해 대책위를 결성하고 건설 반대를 주장하고 나섰다. 여수수산인협회, YMCA,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 여수지역 14개 시민사회단체는 8일 여수시청 앞 광장에서 여수지역 석탄화력발전소 건설반대공동대책위 출범식을 가졌다. 대책위는 출범선언문에서 “최근 한양과 한국동서발전 등 2개 회사가 여수산단 안에 각각 1000㎿급의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들 발전소가 건설된다면 광양만권의 대기와 바다의 오염을 가중시켜 환경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책위는 “발전소에서 배출되는 온배수는 주위 해수 온도보다 7~9도 높아 해양생태계에 심각한 피해를 발생시킬 것”이라며 “산성비 등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와 발전소 굴뚝을 통해 수은, 비소 등 발암물질과 유해 중금속 배출로 주민과 산단 근로자들의 건강을 위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대책위는 “여수산단 주변의 낙후된 지역의 지역발전 전략은 화력발전소 건설이 아니라 지역 사회구성원과 정부, 여수산단이 공동으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오는 25일까지 여수시와 여수시의회에서 매일 1인 릴레이시위를 하기로 했다. 한편 한양은 17만㎡에 2조원을 들여 발전소 1기를 2014년 착공, 2018년 완공할 계획이다. 한국동서발전도 62만㎡에 2조 5000억원을 들여 한양과 비슷한 시기 건립할 방침이다. 여수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구미 불산 누출 2차 피해 급증… 특별재난지역 선포 추진

    지난달 27일 경북 구미에서 발생한 화공업체 ㈜휴브글로벌의 불산가스 누출 사고와 관련한 2차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구미시는 4일까지 가스 누출로 병원 치료를 받은 사람은 모두 893명으로 하루 전에 비해 294명 늘었다고 밝혔다. 이번 사고 피해가 가장 큰 산동면 봉산리 일부 주민은 목에서 피가 섞인 침이 나와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시 관계자는 “추석 연휴를 끝낸 근로자들이 병원을 많이 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 1차로 사고 현장에 투입된 소방관 32명 가운데 3명은 화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됐다. 소방관을 진단한 동국대 임현술 교수는 “잔류 가스로 피해가 있지만 앞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며 “불산 화상 환자는 지금까지 사례로 봤을 때 큰 후유증 없이 치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까지 물적 피해는 농작물 91.2㏊(180가구)와 가축 1313마리, 차량 88대, 조경수 고사를 포함한 기타 34건으로 집계됐다. 사고와 관련해 구미YMCA·구미참여연대·구미경실련은 성명을 내고 “정부 당국은 대책기구를 마련해 피해자와 피해 지역 오염에 대한 정밀 역학조사를 진행해야 한다.”며 “피해 및 인접 지역의 농축산물 수확과 유통을 엄격히 통제하고 산업단지 내 안전문제 전반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정부는 임종룡 국무총리실장 주재로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차관회의를 열어 사고 지역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기로 했다. 특히 대기·수질·지하수 오염 등으로 인체 및 농작물, 가축 등에 대한 2차 피해가 우려되는 만큼 이에 대한 대책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정부 관계자는 “합동조사단을 파견해 조사한 뒤 구미시의 자체복구 능력, 사고 회사의 책임문제 등을 고려해 재난지역으로 선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석우 선임기자·구미 김상화기자 jun88@seoul.co.kr
  • 단장없는 ‘文 대선기획단’… 쇄신·지역안배 고려

    단장없는 ‘文 대선기획단’… 쇄신·지역안배 고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가 18일 대선기획기구인 ‘담쟁이 기획단’(가칭) 1차 인선안을 발표했다. 기획위원으로는 3선의 김부겸 전 의원, 3선 노영민·박영선 의원, 초선 이학영 의원을 선임했다. 단장을 두지 않고 위원 4명이 서로 협의해 의사결정을 하는 회의체 형식을 내세운 점이 눈에 띈다. 하지만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용광로 선대위’ 추석 전 윤곽 김 전 의원 영입은 대선을 앞두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4·11 총선에서 야당의 불모지인 대구·경북(TK) 수성갑에 출마해 야권 후보 가운데 가장 높은 득표율(40.42%)을 기록했다. 지역주의 타파와 당 쇄신의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최근 단독 회동한 바 있어 민주당과 안 원장의 단일화에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주목된다. 김 전 의원은 이날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안 원장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노 의원은 경선 과정에서 캠프 공동선대본부장을 맡아 문 후보를 당 대선 후보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박 의원은 대여 투쟁력과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여성 정치인이다. 이 의원은 YMCA 사무총장 출신으로 시민사회와의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시민사회 인사는 2~3명 정도 추가 인선될 예정이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영입 0순위’로 꼽힌다. 문 후보가 밝힌 ‘용광로 선대위’의 윤곽은 이르면 추석 전에 드러날 것으로 전망된다. 기획위원들은 이날 저녁 첫 회동을 갖고 향후 구성할 선대위에 ‘시민캠프’를 구성하기로 했다. 문 후보 측 진선미 대변인은 “시민캠프는 자발적 시민들이 아래로부터 만들어가는, SNS 기반의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시민정치조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당 일각에서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인선’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당 관계자는 “상처 속에 치른 경선인 만큼 1차 과제가 상처 치유인데 비문(비문재인) 인사들을 폭넓게 수용하는 승자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과거사 반성땐 박정희묘역 참배” 한편 문 후보는 이날 경북 성주의 수해 복구 현장을 찾은 자리에서 전날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형식적인 건 싫다. 흔쾌한 마음으로 참배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란다.”면서 “과거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통합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일 먼저 찾겠다.”고 답했다. 박근혜 후보의 ‘텃밭’인 경북을 찾은 이유에 대해서는 “이 지역이 피해가 가장 심해서 온 것”이라며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황비웅·성주 이영준기자 stylist@seoul.co.kr
  • 성공회대 6대 총장 이정구교수

    성공회대는 이정구(58) 신학과 교수를 제6대 총장으로 선임했다. 이 신임 총장은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한 뒤 1987년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영국 버밍엄대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학대학원 교학부장, 신학전문대학원장 등을 거쳤고 성남 YMCA 이사 등을 지냈다. 취임식은 오는 26일 오후 2시 30분 교내 피츠버그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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