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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스트 용준형 “윤두준, 결혼 일찍 할 것 같다” 성지 발언?

    비스트 용준형 “윤두준, 결혼 일찍 할 것 같다” 성지 발언?

    비스트 용준형이 결혼을 일찍 할 것 같은 멤버로 윤두준을 꼽아 눈길을 끌었다. 비스트(양요섭 윤두준 손동운 이기광 용준형)는 7일 오후 2시 방송된 SBS 파워FM ‘두시탈출 컬투쇼’ 3, 4부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날 DJ 컬투는 “결혼을 일찍 할 것 같은 멤버는 누구냐”고 물었고 용준형은 “윤두준이다. 윤두준이 아기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윤두준은 “얼마 전에 조카가 태어났는데 느낌이 완전 다르더라. 아기를 평소에 좋아하는데 가족이, 그것도 저보다 아랫세대가 태어나니까 제가 딸이나 아들을 낳으면 어떤 기분일까 싶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손동운은 “저는 중학생 때부터 독신주의라고 말하고 다녔다. 독신주의자라는 말이 멋있어서. 그런데 독신주의자라고 말을 잘 안하고 다닌다. 혹시 나중 일을 모르는 거니까”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Why So Lonely?’ 원더걸스, 외롭지 않아 “연애금지령 5년전 해제”

    ‘Why So Lonely?’ 원더걸스, 외롭지 않아 “연애금지령 5년전 해제”

    신곡 ‘Why So Lonely’로 활동 중인 원더걸스가 ‘연애 금지령’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7일 방송된 SBS 파워FM ‘두시탈출 컬투쇼’(이하 ‘컬투쇼’) 스페셜 라이브 1탄에는 원더걸스가 출연했다. 이날 DJ 컬투는 “원더걸스는 연애금지령이 해제됐느냐”고 물었다. 이에 원더걸스는 “예전에 해체됐다” “벌써 5년 전에 해제됐다”고 답했다. “연애는 자연스럽게 하고 있느냐”고 DJ 컬투가 묻자 원더걸스는 “각자 알아서 하고 있다”며 “알아도 말 못하는 게 있을 것”이라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한편 원더걸스는 7일 오후 생방송되는 Mnet ‘엠카운트다운’에서 최초로 컴백 무대를 가질 예정이다. 이들의 신곡 ‘Why So Lonely’는 원더걸스의 첫 자작 타이틀곡으로, 다채로운 리듬과 그에 맞게 변하는 곡의 분위기가 매력적인 것이 특징이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사진작가 김중만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사진작가 김중만

    김중만(62)과의 만남은 금요일인 지난 1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예정돼 있었다. 그 주 수요일부터 수영 박태환을 리우올림픽에 내보내자는 1인 시위를 국회 정문 앞에서 벌여 온 그가 일단은 그곳에서 보자고 제안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후에 쏟아진 폭우로 그는 철수를 해야 했고 결국 청담동 스튜디오로 장소가 변경됐다. 폐렴 증세가 있는데 비까지 흠뻑 맞은 그는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좀 있으니 그에게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법원에서 박태환의 올림픽 출전 자격을 인정했다는 뉴스였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이제 정말 사자도 보고 침팬지도 보고 하마랑 코뿔소도 보고 그러는 거예요?” 1970년 여름 어느 날 저녁 나는 만세를 불렀다. 끓어오르는 희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홍대부고 1학년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는 충남 한산에서 외과의원을 운영하셨는데, 가족들을 불러 앉혀 놓고 상상도 못했던 말씀을 하셨다. “정부에서 아프리카 봉사활동 파견 의사들을 모집하는데, 거기에 지원했다. 거기 가면 여기에서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다.” 나와 동생은 기뻐 날뛰기만 했지, 아버지의 입가에 흐르는 씁쓸한 미소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대접받는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안 되는 나라로 떠나갈 결심을 한다는 게 얼마나 깊은 번민의 산물이었을지는 나중에 좀더 철이 든 뒤에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6·25 참전 군의관이셨다. 내가 휴전 이듬해 강원도 철원에서 2남1녀의 맏이로 태어난 건 그래서였다. 아버지는 군인들이 이 땅을 계속 통치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셨던 모양이다. 요즘 ‘헬조선’이라며 이민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46년 전에 그걸 몸소 실천에 옮기셨던 것이다. 그것도 가난과 모래폭풍이 지배하는 아프리카 오지에 가는 걸로 말이다. -아버지는 전역 후 당신 아버지의 고향인 전북 군산 대신에 어머니의 고향인 한산에 정착해 의원을 차리셨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만 해도 우리 집이 양계장을 하는 줄 알았다. 아픈 사람들이 돈이 없으면 닭을 가져왔고 아버지는 늘 그걸 웃으며 받아주셨다. 매일 닭 요리가 밥상 위에 올라왔는데, 그때 물리게 먹어서 지금도 닭을 안 좋아한다. -내가 아프리카행에 그토록 환호했던 것은 탐험 소설가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대니얼 디포의 고전 ‘로빈슨 크루소’를 주셨는데, 난생처음 밤을 새워 읽은 책이었다. 이후 내 머릿속에는 무인도나 정글 생활 같은 것들이 꽉 들어찼고, 중학생이 돼 서울로 올라와서는 틈만 나면 청계천 8가 헌책방 거리로 달려갔다. -아버지의 중대 발표가 있고 보름 후 부모님과 우리 형제, 이렇게 네 식구가 탄 비행기가 서아프리카 오트볼타 상공에 도착했다. 오트볼타는 지금은 부르키나파소로 개명된 옛 프랑스 식민지였다. 하지만, 비행기가 랜딩 기어를 내릴 즈음 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창밖의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그림이 전혀 아니었다. 밀림이나 사자는커녕 아래로 온통 시뻘건 모래사막뿐이었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사하라 남쪽에 위치한 오트볼타는 거대한 사막의 끝자락이었다. ‘아프리카면 다 똑같은 줄 알았더니….’ 게다가 우리가 살 곳은 수도인 와가두구에서 버스로 20시간도 더 들어가야 하는 오지였다. 철판으로 벽을 세운 묘한 형태의 집에 방 두 칸과 나무침대가 전부였다. 옆에서 흐뭇하게 웃고 계시는 아버지가 야속했고, 할머니와 함께 서울에 남은 여동생이 부러웠다. -아버지는 그 길로 평생을 아프리카 사람으로 사셨다. 오트볼타에서 의료 활동을 마친 후에는 더 남쪽에 있는 보츠와나로 옮기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계셨다. “내 통장에 2000풀라(보츠와나의 화폐 단위)가 있는데, 그 정도면 괜찮겠냐.” 1999년의 어느 날 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직감한 아버지가 미국에서 돌아와 병 수발을 들고 있는 나에게 물으셨다. 그게 장남인 나에게 남겨 주시는 전 재산이란 얘기였다. 아버지의 표정은 대단했다. 2000풀라면 우리 돈으로 200만원 정도인데, 거의 200억원을 물려주시는 듯한 그 당당함이란. 얼마 후 돌아가셨을 때 당신이 남긴 거라곤 정말로 그 2000풀라와 양복 2벌, 청진기 3개, 모자 3개, 모터 달린 자전거 1대 그리고 ‘김정’이란 이름 두 글자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위대한 유산이 그리고 이만큼 멋진 분이 또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나는 동생보다도 아프리카 생활을 못 견뎌했다. 일단 마을에 학교가 없어 답답했다. 불어를 익히는 것 말고는 나를 채워 줄 것이 없었다. 신물 나게 양배추 김치만 먹어야 하는 것도 싫었고, 독거미에 물려 사경을 헤맸던 일도 끔찍했다. 1971년 나는 아버지가 수소문한 끝에 프랑스 서부의 작은 도시 숄레로 보내져 고1부터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인생의 황금기가 열렸다. 사방이 포도밭이었는데, 모두가 와인을 만들어 먹고살았다. 학교건 기숙사건 와인이 넘쳐났다. 그리고 1500명 학생 중에 유일한 동양인인 나에 대한 남녀 학생들의 관심과 배려는 한이 없었다. 꿈결 같은 3년을 보냈다. -원래 꿈대로라면 문학을 전공해야 했는데, 그러기엔 수학 실력이 너무 달렸다. 수학 시험을 안 보고 갈 수 있는 대학 전공은 미술밖에 없었는데, 그건 자신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으로 숱하게 상을 받은 나였다. 1974년 니스에 있는 국립응용미술대 서양화과에 입학해 1년을 보내고 난 어느 날, 기숙사에서 사진을 취미로 하는 법대생 친구가 인화 작업을 도와 달라고 했다. 사진 한 장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는지 처음으로 보게 됐다. 3~5분 만에 인화지에 그림이 새겨지는 건 미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내 그림은 석 달이 걸려도 완성이 될까 말까인데. “맞다 저거야. 내 성격엔 저게 딱이야.” 친구에게 카메라를 빌렸다. 잠자고 씻을 때를 빼고는 카메라를 품고 살았다. 풍경, 얼굴, 동물 등을 닥치는 대로 찍었다. 아르바이트해서 몇 푼 손에 들어오면 무조건 필름 가게로 달려갔다. 늘 필름에 목이 말랐다. 주변에 있는 여자들의 누드도 찍었는데, 이는 내가 작가로서 초기에 명성을 얻게 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데뷔 시절 나의 주제가 아름다운 여성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1975년 대학 2학년 때 일찌감치 아들을 보았다. 아이의 엄마는 특수교육을 전공하던 한 살 어린 프랑스인 여자친구였다. 가장이 됐으니 생활비가 필요했고 필름값도 벌어야 했다. 돈을 아끼려고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아이를 몰래 돌보다 쫓겨난 적도 있었다. 주말이건 심야건 닥치는 대로 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 디스코텍에서 DJ도 했다. 점심때 식당 주방에 설거지를 하러 가면 늘 4~5m 높이 분량의 접시들이 쌓여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아프리카 의료 활동으로 받는 돈은 고작 석 달에 500달러였다. 멀리 프랑스에 있는 아들에게 전혀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사진에 대한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얼마 안 돼서 나는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공을 살려 사진에 과감하게 미술적인 프레임을 접목한 게 먹혀들었다. 주어진 것을 찍는다는 생각보다는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장소를 정하고 모델을 세웠다. “니스에 동양인이 한 명 있는데 사진을 잘 찍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나를 찾는 곳이 늘어갔다. ‘프랑스 오늘의 사진 80인’ 등 몇몇 중요한 상을 거머쥐고 나는 파리로 진출했다. 자연히 니스에서의 학업은 더이상 이어갈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는 유명작가들 밑에서 패션 사진 촬영을 시작했다. 당시는 세계적인 대가일수록 동양인 어시스턴트를 두는 게 유행이었다. 이게 나에게는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어떠한 다른 동양인 사진작가도 나만큼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다. -1977년 서울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23세 때였다. 칸 미술제 참석을 위해 프랑스에 온 우리나라 화가들이 우리 집에 왔다가 내 사진을 보더니 “한국에는 이런 사진이 없다”며 전시회를 열어 보라고 했다.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 인연으로 한국에 계속 머물게 됐다. 이듬해 배우 오수미(1950~1992)를 만났다. 남편인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고 혼자 살고 있던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아름다움에 현기증을 느꼈다. 얼마 후 한국에 같이 머물고 있던 첫 번째 아내에게 “새로운 운명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아내는 별말 없이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로 떠났다. 그녀는 지금도 니스에서 전공을 살려 정신지체아들을 돌보고 있다. 지금도 아내와 아들과는 자주 연락하며 지낸다. 그녀는 가히 천사다. 방학이면 해마다 인도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다. 나는 테레사 수녀님을 따서 그녀를 ‘마더 테레사’라고 부른다. 지금도 우리들은 자주 연락하며 지낸다. 아들은 나와 같은 사진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이 땅에서 두 번의 추방을 당했다. 1985년에는 프랑스 국적의 외국인이면서 당국에 신고도 하지 않고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1986년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정보당국에 붙들려가 일본과 미국행 비행기에 강제로 태워 보내졌다. 두 번째 추방은 신상옥 감독이 북한을 탈출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그걸 계기로 오수미와는 자연스레 결별을 하게 됐다. -1988년 프랑스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이 됐다. 당시 나는 프랑스에서도 톱클래스에 있었다. 그런데 오기가 생겼다. 두 번이나 나를 추방한 이 나라에 뭔가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해 당시 톱 모델이던 이인혜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1995년 5월에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됐다. 검찰이 일부 마약사범의 진술에 의존해 나에게 대마초 흡연 혐의를 씌웠는데, 나는 이미 2년 전에 같은 혐의로 구속돼 55일 동안 구치소 생활을 했고, 이후로는 완전히 절연한 상태였다. 검찰은 소변 검사에서 마약 성분이 검출되지 않자 13일간 나를 정신병원에 가뒀고, 이는 인권탄압 사례로 신문 등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어쨌거나 이 일로 나는 국립종합예술학교 영상원 강사에서 잘리고 아내에게 이혼까지 당했다. -다섯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갔다. 1년을 아이와 둘이 살고 있으니 아내가 다시 찾아왔다. LA에서 3년 동안 패션사진, 상품 카탈로그 등을 찍으며 세 식구가 괜찮게 먹고살았다. 그런데 1997년 말 한국 외환위기의 파고가 멀리 LA까지 밀려왔다. 주된 고객이던 한국 기업들이 도산을 하거나 경영난에 빠지면서 일감이 뚝 끊겼다. 결국 월세 3000~4000달러짜리 아파트에 살다가 빈민들이 사는 300달러짜리 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꼬박 1년을 살면서 전당포를 세 번을 갔다. 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다. 500달러에 카메라를 잡히면 그날은 LA갈비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거기에서 얻은 건 가족애였다. 극심한 가난 속에 우리 셋은 정말로 하나가 됐다. 너무도 소중한 가치였다. -“형, 처자식 고생 그만 시킬래.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형이 사진전 좀 열 수 있도록 주선해 줘.” 1999년 LA라디오 사장이던 가수 이장희에게 귀국을 고했다. 떠나기 전에 라디오코리아에서 내 작품들의 전시회를 열었다. 어느 정도 돈이 모였다. 사람들에 신세진 것들 좀 갚고 남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부모님 계신 보츠와나를 거쳐 서울로 오는 티켓이었다. 그런데 카메라 장비며 책이며 옷가지 등 해서 짐이 250kg이나 됐다. 추가 화물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수중에 남은 돈이 고작 400달러 밖에 안됐기 때문이다. 사진 5장을 별도의 휴대용 박스에 넣고 우리가 예매한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카운터를 찾아갔다. 책임자를 보자고 했다. 후덕해 보이는 여성이 나왔다. “저는 사진을 하는 예술가입니다. 짐이 좀 많은데, 추가 비용을 낼 형편은 안됩니다. 저의 작품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게 힘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녀는 내 사진을 한 장, 두 장 보더니 곧바로 ‘오케이’ 사인을 냈다. 이에 더해 우리 가족의 티켓을 이코노미석에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해 주었다. 내가 절실할 때, 진실할 때 정성이 통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진의 힘이란 걸 새삼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보츠와나에서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그의 30년 아프리카 여정을 기리는 뜻에서 카메라 장비를 챙겨 초원으로 나갔다. 요하네스버그, 세렝게티, 타랑기레 등의 동물들을 담아 2001년 8월 15일 광복절에 한국에 돌아왔다. -막상 귀국을 하니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내 한 몸은 고사하고 아내와 아들이 머물 수 있는 집 한 칸이 없었다. 상업사진을 시작했다. 명함을 만들고 압구정동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패션, 영화포스터, 음반표지 등 닥치는 대로 작업을 했다. 3년을 일하니까 서울 전농동에 아파트 한 채를 살 돈이 모였다. 3년을 더 하니까 한 해에 15억원 정도가 손에 들어왔다. -‘이게 내가 추구하던 삶인가? 맹목적으로 일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먹고 살 만 해지니까 또 다른 생각에 발동이 걸렸다. 2006년 고비 사막으로 여행을 갔다. 보름 동안 50대, 60대의 김중만은 어때야 할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돌아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나 상업사진 그만할게. 그래도 괜찮겠지?” 6년 동안 상업사진을 찍으면서 50억원 이상을 벌었는데 남은 건 거의 없었다. 빌딩 한 채 사 두라는 주위의 말들 무시한 채 어려운 나라에 학교 지어 주고, 카메라 장비 사고, 스튜디오 운영하고, 먹고 놀고 했더니 남은 게 없었다. -2008년 관광공사의 외주를 받은 것을 계기로 한국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앵글에 담기 시작했다. 한국의 이미지는 나에게 새로운 전기가 되어 주었다. 그동안 나는 우리나라의 이미지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어느날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에 갔다. ‘600년 된 학교인데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있고, 옆에는 숲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600년 전에 이런 학교를 지었던 것이다.’ 내가 그동안 우리나라를 너무 피상적으로만 보아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이미지 촬영은 나에게 새로운 전기가 됐다. 무엇보다도 해외에서 호평이 이어졌다. ‘극단적으로 동양적인 본질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극단적으로 서양적인 표현력을 갖고 있다’, ‘동양과 서양을 겸비한 이중성을 갖고 있는 유일한 작가’ 등 평가들이 나왔다. -예술사진으로 다시 돌아와 시간이 흐르니 내 작품 가격이 2500만원, 5000만원, 7500만원 등으로 해가 다르게 뛰었다. 대부분 외국에서 구매하는데 3개월 전에 처음으로 작품 하나를 파리에서 1억원에 계약했다. 작품의 가격은 작가의 자존심이다. 5억원까지는 올려보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건 나의 철칙은 지키려 한다. 작품의 영역에서 만큼은 그 누구보다 순결해지자는 것이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사진작가 김중만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다. 10대 중반 아프리카를 거쳐 프랑스에 유학해 21세 때인 1975년 니스에서 개인전을 열고 데뷔했다. 1977년 ‘프랑스 오늘의 사진’에 역대 최연소 작가로 선정되면서 주목받았다. 인물, 동물, 꽃, 풍경, 패션 등 다양한 주제에서 틀에 짜인 관습과 앵글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을 창조해 왔다. 현재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운영하고 있다. 2006년부터 상업 활동을 중단하고 예술 사진에 집중하고 있다. 아프리카 어린이 지원과 캄보디아, 베트남 학교 건립 등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이다. ▲1954년 강원 철원 출생 ▲한산초, 홍익중, 프랑스 숄레 고등학교, 니스 국립응용미술대 서양화과 중퇴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페스티벌 젊은 작가상(1977), 올해의 패션사진가상(2000), 마크 오브 리스펙트상(2010), 한국패션 100년 어워즈(2011) ▲ 작품집 ‘불새’, ‘인스턴트 커피’, ‘동물왕국’, ‘아프리카 여정’, ‘애프터 레인’, ‘네이키드 소울’, ‘오키드’ 등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韓스텔스기vs日스텔스기, 결과는? ‘한국 참패’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韓스텔스기vs日스텔스기, 결과는? ‘한국 참패’

    흔히 우리나라를 ‘일본을 우습게 보는 세계에서 유일한 민족’이라고들 한다. 일본은 GDP 순위 세계 3위로 세계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나라일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국력이 우리나라를 크게 앞서는 나라지만, 이러한 객관적인 지표의 열세와 관계없이 우리 국민들은 일본을 ‘무시’, ‘괄시’, ‘멸시’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은 평상시에 제아무리 뛰어난 성적을 거두더라도 한일전에서 패하면 사퇴를 각오해야 하고, 각종 지표나 통계에서 일본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왔다는 뉴스가 보도되면 분통을 터트리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우리나라가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단군 이래 최대의 국방 사업’이라고 불리는 한국형 전투기(KFX) 체계 개발에 들어가자 일본은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 기술실증기의 시험 비행을 실시하고, 최근 차세대 전투기 개발 본격화를 위한 기술공개 접수를 마감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기 개발에 들어갔다. 韓 KFX vs 日 F-3 우리나라의 KFX와 일본의 F-3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할 전투기지만, 그 성능 면에서는 ‘하늘과 땅’에 가까울 만큼의 차이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사시 독도 상공에서 KFX로 F-3에 덤비는 것은 무모한 자살행위에 가깝다. 2026년부터 실전 배치되는 KFX는 4.5세대 전투기를 표방하고 있다. 라팔이나 유로파이터와 같은 4.5세대 전투기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등장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등장 자체가 경쟁 기종들보다 20년 이상 늦었다는 이야기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들은 이미 5세대 전투기를 실전에 배치하고 있고, KFX가 한창 양산될 2030년대 출시를 목표로 6세대 전투기에 대한 개념 연구 단계에 들어가 있다. F-16보다 조금 더 큰 24.5톤의 최대 이륙중량에 쌍발엔진, 마하 1.8 수준의 최대속도를 갖춘 KFX는 현재 기준에서는 상당히 우수한 전투기지만, 5세대 전투기 보급이 일반화되는 20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성능 면에서 주변국 주력 전투기보다 상당한 열세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KFX는 블록(Block) 개념을 도입해 단계적으로 성능을 향상시킬 계획이지만, 기체 크기의 한계 때문에 개량형인 블록 II나 블록 III에서도 충분한 용적의 내부 무장창이나 항공전자장비를 갖추기 어려워 주변국 대비 성능 열세는 극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이 준비하고 있는 F-3는 목표 성능치가 KFX와는 ‘클래스’가 다르다. 일본은 F-3의 목표 성능을 현존 최강의 전투기라는 미국의 F-22A 랩터(Raptor)와 동등 이상으로 설정하고 있다. F-3에는 스텔스기를 원거리에서 탐지할 수 있는 고성능 AESA(Active Electronically Scanned Array) 레이더와 전자전 장비, 적외선 탐색추적장비(IRST) 등을 통합한 선진통합센서는 물론, 기체 표면에 붙여 사각지대를 없애주는 레이더인 스마트 스킨(Smart skin),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 6발 이상을 수납할 수 있는 넓은 내부 무장창과 30톤급 이상의 대형 전투기를 마하 1.5 이상으로 초음속 순항시킬 수 있는 고성능 엔진, 그리고 고기동을 위한 비행제어시스템이 구현될 예정이다. 일본은 지난 4월과 5월에 시험 비행을 실시한 기술실증기 X-2에서 F-3에 탑재될 통합센서와 엔진의 선행 개발 제품들의 기술 테스트를 실시했을 정도로 관련 연구를 상당 수준 진척시켰다. 이 때문에 오는 2028년까지 F-22A와 동등 이상의 성능을 가진 세계 최고 수준의 전투기를 개발한다는 일본의 목표는 어렵지 않게 달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방위성은 F-3 전투기를 F-2 지원 전투기의 후계로 100여 대 이상 전력화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지만, 지난해 11월 방위장비청 기술 심포지엄에서 공개된 F-3의 요구 성능 중 공중전 능력과 장거리 작전 능력, 내부 무장 능력 등이 대단히 높게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전투기는 F-2보다는 F-15의 후계에 가깝다. 즉 장거리 항속 능력과 우수한 공중전 성능을 바탕으로 주변국에 대한 공세적 항공 작전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며, 이는 유사시 독도 상공에서 우리 KFX가 이 전투기를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공개된 제원을 비교하면 KFX는 레이더와 항공전자장비 성능, 무장 능력과 공중 기동 능력 등 모든 능력에서 F-3에 열세다. 여기에 공중조기경보통제기와 이지스함 등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자위대의 네트워크 교전 능력까지 감안한다면 KFX로 F-3에 대적하는 것은 자살 행위가 될 우려도 있다. 분통이 터질 일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양국의 전투기들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성능 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난 수십여 년 간 항공산업을 바라보는 양국 정부의 시각차 때문이었다. 파격 투자 일본과 최저가 한국 장중하고 맑은 종소리로 유명한 국보 제29호 선덕대왕 신종은 본명보다 ‘에밀레종’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종을 완성시키기 위해 쇳물에 어린 아이를 던져 넣었는데 이 때문에 종소리에서 ‘에밀레(어미 때문에)’라는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 때문이다. 이 종이 완성된 것은 통일신라 선덕왕 재위 기간 중이었는데 무엇인가를 만들 때 사람을 희생시켜 물건을 완성시키는 전통(?)은 에밀레종 이후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계에는 ‘공밀레’라는 말이 있다. 과학자나 기술자들을 비하하는 표현인 ‘공돌이’라는 단어에 에밀레종의 ‘밀레’를 합성해 탄생한 단어로 어떤 제품이나 물건을 개발하거나 만들 때 인력을 혹사시키는 연구개발 풍토를 비꼬는 말이다. 이러한 풍토는 산업계 전반에 만연해 있지만 무기 개발 분야에서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국형 명품 무기’는 최저가 낙찰제를 통해 결정된 부족한 연구개발비를 가지고 지정된 기간 내에 개발을 완료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탄생한다. 정해진 기간 내에 납품하지 못하면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지체보상금을 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연구원들의 피와 땀,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이 한국형 명품무기 탄생의 댓가로 지불되고 있다. 실제로 T-50 고등훈련기 개발 과정에서 2명, K-9 자주포 개발 과정에서 1명의 연구원이 과로로 순직했다. 문제는 연구개발 기간 중 과로에 시달리던 연구원들도 막상 무기체계의 개발 프로젝트가 끝나면 갈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ADD)와 같이 국가에서 운영하는 연구소는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지만, 민간업체들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은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끝나면 당장 다음 달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뛰어난 능력과 잠재력을 가진 전문 인력들은 생계를 위해 타 업종으로 전환하거나 해외 업체의 러브콜을 받아 우리나라를 떠나기 일쑤다. 이러한 문제는 연구개발 인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민간업체들은 항공기나 장갑차 등 군에서 주문한 물량에 대한 납품이 끝나면 후속 물량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설치한 생산라인을 뜯어내고 이 생산라인에서 근무했던 근로자들을 정리 해고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가령 항공기 생산 업체의 사례를 들어보자. 국산 고등훈련기와 전투기를 생산하는 K업체는 현재 우리 공군과 필리핀, 이라크 등에 인도될 항공기들을 생산하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현재 수주 물량은 내년 연말까지 모두 인도되기 때문에 추가 수출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내년부터 KFX 양산 개시 시점인 2026년까지 약 9년간 이 업체는 고정익 항공기 생산라인 유지가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항공기 생산은 일반적인 자동차 생산과 다르기 때문에 현장의 말단 인력도 수개월 이상의 전문 교육을 이수해야 하며, 현장 관리자들은 이름만 생산직일 뿐 석·박사 학위를 소지한 고급인력들이 필요하다. 생산 물량이 없어 항공기 생산라인을 접는다면 항공기의 개발과 관리, 생산 업무에 종사했던 수백여 명 이상이 국내 타 업종 또는 해외 동일 업체로 이직해야만 한다. 항공산업의 맥이 끊어진다는 이야기다. 흔히들 항공산업을 미래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신성장동력으로 언급한다. 대당 수백억 원을 훌쩍 넘는 항공기 1대를 수출하면 중형차 수천 대를 수출하는 것과 같은 경제적 이익을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항공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또 항공산업을 육성해 제반 기술 기반을 닦아 놓으면, 해외에서 항공기를 구매할 때 바가지 쓸 일도 없다.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살 때 사고자 하는 물건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 소위 말하는 ‘호갱님’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때문에 항공산업 육성은 정부 차원에서 반드시 해야하는 과제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항공산업은 그 맥이 끊길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13년 전에도 있었다. 2002년 KF-16 120대 면허생산이 종료되면서 2005년 T-50 양산 개시 이전까지 2년간 생산라인 가동 중단 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참여정부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군 전력증강 계획에 없었던 KF-16 20대 추가생산 카드를 꺼내들었고, 공군은 FX 사업 예산이 전용될 우려가 있다며 강력 반발했다. 하지만 정부가 1조 2천억 원에 달하는 KF-16 추가 생산 비용을 공군 예산이 아닌 산업자원부 예산을 쓰기로 결정하면서 공군 전력공백 방지와 항공기 생산라인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향후 9년간의 항공기 생산라인 가동 중단 위기를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대비책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멀쩡한 이 생산라인이 개점휴업하고 있을 9년의 기간 중 우리 공군의 전투기 전력공백이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는 점이다. 공군은 노후 정도가 극심해 비행이 위험한 수준까지 와 있는 F-4E 40대와 F-5E/F 120대 등 160여 대의 전투기를 2019년까지 퇴역시킬 예정이지만, 이 시기에 도입되는 전투기는 F-35A 40대가 전부로 2019년부터 2030년까지 약 10여 년간 우리 공군은 100~120대의 전투기가 부족한 사상 최악의 전력 공백 사태를 겪게 된다. 항공산업 위기와 전력공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국내에 있는 생산라인을 이용해 전투기를 추가 생산하는 것이 그것이다. FA-50이 전투기 전력을 대체하기 위한 기체로 부족하다면 KF-16의 성능 개량형을 추가 생산하는 방법도 있고, 일본처럼 F-35를 면허생산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방안에 대해 정부와 군에서는 회의적인 분위기다. 정부 입장에서는 수 조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F-16 전투기 면허생산 비용은 대당 600~800억 원 선이고, 옵션에 따라 차이가 큰 편이지만 일본의 사례를 보자면 F-35 면허생산 비용은 1700~2000억 원을 넘어간다. 이러한 전투기들을 매년 10대 안팎씩 9년간 생산한다면 적게는 5.4조에서 많게는 18조원의 돈이 들어간다. 부정적인 것은 군도 마찬가지다. 계획에 없던 전투기 추가 양산이 결정되면 다른 전력증강사업 예산이 타격을 입게 된다. 가뜩이나 복지비 부담이 큰 상황에서 선거 때 표로 연결되지 않는 국방예산은 지출을 꺼리는 것이 예산당국의 일관된 입장이기 때문에 전투기 추가 양산을 한다는 결정이 내려지면 기존의 국방예산을 전용하라는 압박이 강할 것이라는 것이 군의 걱정이다. 또한 공군의 전투기 보유 정수는 430대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중기계획에 없는 F-16이나 F-35 면허생산 카드를 꺼내게 되면 다른 전투기 도입 수량, 즉 KFX 도입 수량이 줄어들어 한국형 전투기 개발 사업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부와 군의 이러한 경직된 사고는 일본의 사례와 너무도 대조적이다. 일본의 항공산업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군용기 생산을 계기로 시작되었지만, 그 전개 과정은 우리나라와 너무도 상이했다. 요컨대 일본의 전투기 생산라인은 지난 반세기 동안 멈춘 적이 거의 없었다. 일본정부는 1955년부터 1960년까지 300대의 F-86 전투기를 면허생산하고, 이 사업이 끝나기도 전에 F-104 전투기 면허생산 계약을 체결, 1967년까지 230대의 F-104를 생산해 생산라인을 유지시켰다. 잠시 숨을 고른 뒤 1969년에는 F-4D/E 전투기 140대 면허생산 계약을 체결해 1981년까지 생산했고, 그 직후 F-15CJ/DJ 전투기 100대 생산 계약을 체결했다. F-15 전투기가 생산되던 당시 항공자위대는 F-104와 F-4 등의 전투기를 300대 넘게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F-15 전투기는 당초 항공자위대가 요구한 100대면 충분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F-15 전투기 100대의 생산이 종료되면 차세대 독자개발 전투기인 F-2의 생산이 시작되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항공산업이 침체기에 접어들 것을 우려해 3차례에 걸쳐 각각 55대, 32대, 36대 추가 생산을 결정했다. 당초 군이 요구한 100대에 무려 123대를 더 얹어준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일본은 F-3 양산이 시작되는 2028년 이후까지 자국의 전투기 생산라인 유지를 위해 F-35 면허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계약된 것은 42대지만, 지속적인 생산라인 유지를 위해 F-35 도입 대수를 100대 이상으로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F-35는 일본 자국기업이 생산한 부품 비중이 40%에 육박하는데, 이 때문에 도입 가격이 타국의 F-35보다 50% 가량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기존 소요 대비 2배 이상 추가 도입을 추진하는 것은 단순한 군비증강이 아닌 항공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다. 이러한 투자 덕분에 일본은 완성기 생산뿐만 아니라 항공전자, 항공엔진, 소재 기술 등 항공과학기술 전반에 걸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F-2 전투기 개발 이후 세계 각국으로부터 공동개발과 기술이전 등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현재는 이러한 기술력 기반 위에 4500억 원에 달하는 R&D 예산을 투자, X-2라는 5세대 스텔스 전투기 기술실증기를 완성하기도 했다. 요컨대 한국은 전투기 생산을 단순히 소모성 국방사업이라고 생각해 정부 차원의 투자를 꺼렸고, 일본은 전투기 생산을 항공산업 명맥 유지와 발전을 위한 투자라고 인식했다. 수십 년간 지속된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한일 양국 간 항공산업 수준의 격차를 천지차이로 벌려 놓았다. 이제 15년 후면 우리나라는 북한을 제외하면 동북아에서 질적·양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공군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고, 일본은 질적으로 미 공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최정상급 공군력을 가지고 동북아시아 하늘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 시간은 있다. 정부가 미래 대한민국 안보를 걱정한다면, 또 항공산업을 미래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범정부차원의 공세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과거에는 ‘공돌이’를 쥐어짜면 “안되면 되게하라”가 가능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산업을 육성하자는데 1000년전 에밀레종 만드는 스타일로 덤벼들 수는 없지 않은가? 이일우 군사 전문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finmil@nate.com
  • [현장 행정] 주말마다 물만난 신촌, 물오른 축제

    [현장 행정] 주말마다 물만난 신촌, 물오른 축제

    오는 9일부터 7월 주말 내내 서울 신촌 연세로에서 신나는 여름 축제가 이어진다. 대표적인 구도심인 신촌을 살리기 위한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의 노력이다. 1990년 말까지 연세대와 서강대, 이화여대 등이 밀집한 신촌은 넘쳐나는 젊은이들로 불황을 모르는 거리였다. 하지만 홍대와 신천뿐 아니라 강남 가로수길 등으로 젊은이들의 시선이 분산되면서 구도심의 대표인 신촌은 서서히 쇠퇴기를 맞았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지역 상권이 어려움에 처하고 젊은이 발길이 확 줄었다. 그래서 문 구청장이 2010년 민선 5기부터 ‘신촌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적 지원에 나선 것이다. 신촌에 각종 축제뿐 아니라 주말 차 없는 거리 조성 등으로 고사 직전이었던 신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서대문구는 오는 9일 신촌물총축제를 시작으로 14일 맥주축제, 23일 신촌워터슬라이더 축제 등이 이어진다고 5일 밝혔다. ‘여름’이라는 계절적 요인을 활용해 물놀이와 맥주 축제를 기획한 것이다. 문 구청장은 “7월 여름축제는 휴가로 더욱 어려움을 겪는 신촌 상권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면서 “도심 한복판에서 다양한 축제와 이벤트로 잊혀 가던 ‘신촌’을 핫 플레이스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올해 4회를 맞는 신촌물총축제가 오는 9~10일 이틀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연세로 곳곳을 시원하게 물들인다. 개막을 알리는 해적단 출정식을 시작으로 물총 하나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와 웅장한 퍼레이드, 신나는 공연으로 올여름 더위를 잊게 만든다. 특히 올해는 DJ의 신나는 공연에 맞춰 ‘신촌을 점령한 해적단’과 ‘그들에게 맞서 싸우는 시민들’이라는 콘셉트로 물총 싸움이 펼쳐진다. 또 오는 14~15일에는 지난해 10월에 이어 두 번째로 신촌맥주축제가 열린다. 모래와 야자수로 장식해 여름 해변으로 변신한 연세로가 거대한 맥주 파티장이 된다. 축제 무대에서는 음악공연을, 거리에서는 버스킹 공연 등 흥겨운 볼거리를 즐길 수 있다. 7월의 마지막 주말인 23~24일에는 도심에서 대형 워터슬라이더를 탈 수 있는 ‘신촌워터슬라이드 2016’이 열린다. 120m 길이의 대형 워터슬라이드가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 준다. 또 밤에는 DJ들과 함께하는 전자댄스음악 파티도 열린다. 문 구청장은 “무더운 여름 신촌에서 신나는 여름 축제 3종 세트를 통해 일상의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풀고 삶의 여유와 활기를 되찾길 기대한다”면서 “세계인들이 꼭 한번 가 보고 싶어 하는 축제의 거리로 성장할 때까지 신촌 연세로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이효리, 라운지 바에서 댄스 ‘포착’

    이효리, 라운지 바에서 댄스 ‘포착’

    결혼 후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가수 이효리의 근황이 전해졌다. 지난 4일 베트남 매체는 라운지 바를 겸하는 제주도의 한 레스토랑를 찾은 이효리 이상순 부부의 모습을 포착해 공개했다. 이날 이상순은 DJ를 맡아 직접 음악을 틀었고, 이효리는 사람들 틈에 어울려 춤을 추는 모습이다. 특히 이효리는 민소매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채 여전히 완벽한 몸매를 자랑해 눈길을 끌었다. 한편 2013년 9월 이상순과 결혼한 이효리는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 신혼집을 차린 후 연예계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한 상태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정희, 33년 만에 6집…“이젠 ‘국민 언니’로 불리고파”

    “제가 한 28년을 노래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28년은 더 노래할 수 있다는 마음에 용기를 얻었어요. 죽을 때까지 노래하겠다는 각오죠.” 히트곡 ‘그대여’로 유명한 1980년대 가수 이정희가 33년 만에 6집을 발표했다. 그는 1983년 5집을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떠났고 1988년 결혼과 함께 은퇴했다가 지난해 가요계로 복귀해 화제가 됐다.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한 그는 “그간 노래가 너무 하고 싶었는데 참았다”며 “이제부터는 그 누구보다도 몇갑절로 열심히 노래할 것”이라고 의욕을 내비쳤다. 이정희는 한양대 무용과 1학년이던 1979년 동양방송(TBC) ‘대학 가요 경연대회’에서 ‘그대 생각’으로 대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그해 데뷔 앨범의 ‘그대 생각’과 ‘바야야’를 시작으로 1980년 2집의 ‘그대여’와 이문세가 리메이크해 더 유명해진 ‘나는 행복한 사람’ 등이 잇달아 히트하며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깨끗한 음색과 풍부한 성량이 매력으로 1981년 KBS 방송음악대상 여자가수상을 받는 등 지금의 ‘국민 여동생’급 사랑을 받았다. KBS 1TV ‘콘서트 7080’의 MC인 배철수는 “옛날 아이유”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갑작스럽게 은퇴한 데 대해 “벼락스타가 됐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연예계 생활을 하니 자아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미련보다는 혼란스러웠고 미국에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떠올렸다. 미국에서 패션 회사를 경영한 그는 그 사이 친분이 있던 PD들로부터 가수 복귀 제안도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클 때까지는 가정에 충실하고 싶었고 복귀해서 ‘잘 될 수 있을까’란 생각에 망설였다. “한 친한 PD가 ‘네가 가장 만족하는 모습은 가수 이정희일 것’이라고 했죠. 아이들도 다 컸고 그간 노래가 너무 하고 싶었는데 참았던 터라 결심하고 이민 생활을 청산했어요. 그만큼 간절함이 컸으니까요.” 가수가 된 건 우연이었다. KBS어린이합창단 출신으로 중고 시절에 무용을 하다가 대학에 진학했는데 첫 미팅 때 만난 남자의 제안이 인생 진로를 바꿨다. 그는 “미팅에서 만난 남자가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 다음날 내게 찾아왔다”며 “노래를 잘할 목소리라고 자신이 작곡해둔 ‘그대 생각’을 들려줬는데 노래가 좋았다. 먼저 한양대 가요제에 나가 1등을 했고 ‘대학 가요 경연대회’까지 나가게 됐다”고 웃었다. 이후 그는 전영록, 남궁옥분, 이용, 민해경, 윤시내, 이은하 등과 활동하며 상복도 많았고 발표하는 노래마다 히트했다. “저와 같이 활동하던 가수들이 여전히 있고, 오랜만에 돌아오니 더욱 자극이 돼요. 우리 세대가 공감할 노래가 부족한데 또래뿐 아니라 젊은 세대까지 공감할 멋있는 노래를 많이 들려주고 싶어요.” 기획사를 설립하고 직접 제작한 새 음반에는 각기 다른 장르의 신곡 3곡이 수록됐다. 타이틀곡 ‘스윙’은 성숙한 어른들의 진한 사랑을 노래했다. 다음 생의 사랑을 약속하는 중국풍의 트로트곡 ‘슬픈 사랑’은 중국어와 일본어로도 선보일 예정이다. 보사노바 풍의 ‘파리에서’도 파리에서의 추억을 노래한 개성 넘치는 곡이다. 그는 “기다려준 팬들을 위해 성의없이 앨범을 제작하면 안 될 것 같았다”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화보를 찍고 직접 쓴 글을 담아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6집 활동과 함께 과거 팝 프로그램 진행 경험이 있어 라디오 DJ도 욕심 난다고 했다. 또 히트곡과 부르고 싶은 노래를 담은 베스트 앨범도 낼 계획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예정이다. 어느덧 50대인 그는 “예전의 청순한 이미지로 그대로 생각해주는 분들이 많더라”며 “하지만 시간이 훌쩍 흘렀으니 이젠 ‘국민 언니’로 불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연합뉴스
  • [정치뉴스 테이크아웃] 의좋은 ‘박남매’ 이젠 불편해요!

    [정치뉴스 테이크아웃] 의좋은 ‘박남매’ 이젠 불편해요!

    김대중(DJ) 정부의 ‘입’(口)이었던 국민의당 박지원(왼쪽) 비상대책위원장과 박선숙(오른쪽) 의원의 ‘얄궂은 운명’이 화제. 두 사람은 DJ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해 DJ의 총애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시절 대변인(박 위원장)과 부대변인(박 의원)을 지내며 시작된 이들의 인연은 20년 넘게 이어져.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는 각각 대통령 비서실장과 청와대 대변인으로 호흡을 맞추기도. 특히 18대 국회에서 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에 몸담았던 두 사람은 더민주 박영선 의원과 함께 ‘박(朴)남매 3인방’, ‘3박’으로 불려. 박 위원장이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냈던 2010년 ‘박남매 3인방’은 뛰어난 팀워크로 인사청문회 국면에서 연일 활약. 이후 ‘호남 중진’과 ‘안철수 핵심 측근’으로 각자의 정치 행로를 걸어온 두 사람은 20대 총선 전 국민의당에 합류하면서 재회. 하지만 지금은 ‘리베이트 사태’의 당사자와, 당을 구해야 하는 비대위원장이라는 대척점에 서게 돼. 박 위원장은 한때 명콤비였던 박 의원에 대한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자진 탈당을 직접 권유하며 당 수습에 분주.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지식이 권력이 되는 세상…그가 상상한 미래가 왔다

    지식이 권력이 되는 세상…그가 상상한 미래가 왔다

    “변화는 삶에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현대 사회의 변화 방향을 제시해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 토플러가 부인과 함께 설립한 컨설팅회사인 ‘토플러 어소시에이츠’는 지난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자택에서 그가 영면했다고 29일 밝혔다. 그의 사인은 밝히지 않았다. ●‘제3의 물결’ ‘권력이동’ 등 저서로 미래 예측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 등 10여권의 저서를 통해 인류 사회가 제조업 기반 경제(육체노동)에서 지식과 데이터 위주(지식노동)의 사회로 이동해 갈 것을 예측했다. 미래 사회상을 전망한 ‘제3의 물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는 이 책에서 인류가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을 거쳐 제3의 물결인 정보화 혁명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함으로써 지구촌에 큰 반향을 이끌어냈다. ‘권력이동’에서는 세계는 ‘폭력’이라는 저품질 권력에서 ‘돈’이라는 중품질을 거쳐 ‘지식’이라는 고품질 권력으로 이동한다고 정의했다. ●세계 지도자와 교류… DJ 햇볕정책에도 영감 줘 토플러는 특히 세계 정치 지도자들과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에게 국가 통치철학과 경영비전을 제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뉴트 깅리치 전 미국 하원의장의 멘토 역할을 했다. 1998년 청와대에서 토플러와 의견을 나눈 김 전 대통령은 그의 ‘남북한의 평화 통일을 위한 기초 이론’을 받아들여 훗날 ‘햇볕 정책’의 토대로 삼았다. 2001년 한국 정부로부터 의뢰받아 ‘21세기 한국비전’ 보고서를 발표했다. 한국에 대해 쓴소리도 했다. 토플러는 “한국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간을 허비하는’ 교육 풍토는 아직 바뀌지 않고 있다. 자오쯔양은 1980년대 초 공산당 지도부의 일부 반대를 무릅쓰고 ‘제3의 물결’ 판매금지를 해제했다. 이후 이 책은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돼 개혁·개방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86년 토플러 연구 모임을 만들어 소련의 첫 비정부기구(NGO)로 등록했다. 세계 4위의 부자인 멕시코의 통신재벌 카를로스 슬림 회장도 경영전략 구상에 토플러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61년에는 IBM을 위해 컴퓨터가 사회 및 조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썼으며, AT&T에 분사를 조언하기도 했다. 1928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한 토플러는 뉴욕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다. 사회운동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그는 대학을 중단하고 1950년 클리블랜드로 이주해 알루미늄 제조 공장에 취직, 용접공으로 5년간 일했다. 현장 경험을 살려 신문사 노동전문 기자로 활약하다가 백악관을 취재하기도 했다. 그의 아내 하이디 토플러 역시 작가이자 미래학자로 글로벌 트렌드에 대한 집필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컬투쇼’ 애즈원 “맨날 붙어있다가 크게 싸운적 있다” 백예린도 공감?

    ‘컬투쇼’ 애즈원 “맨날 붙어있다가 크게 싸운적 있다” 백예린도 공감?

    ‘두시탈출 컬투쇼’에서 애즈원(이민, 크리스탈)이 활동하며 다퉜던 경험을 고백했다. 30일 방송된 SBS 라디오 파워FM ‘두시탈출 컬투쇼’는 ‘특선라이브’ 코너로 꾸며진 가운데 새 앨범으로 돌아온 가수 애즈원과 백예린이 출연해 라이브 무대를 펼쳤다. 이날 DJ컬투는 애즈원에게 “서로 엄청 싸웠다고 들었다”고 물었다. 이에 애즈원의 크리스탈은 “뉴욕에서 있을 때부터 친구였다. 24시간 붙어 있었다. 같이 원룸에 살아서 싸우고 나면 피할 곳도 없었다. 이불 덮고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애즈원의 이민은 “맨날 붙어 있다보니까 정말 쓸 때 없는 일로 굉장히 많이 싸웠다. 그래서 다 그만두겠다고 하면서 싸운 적도 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이에 박지민과 피프틴앤드로 활동하고 있는 백예린은 크게 공감하며 “정말 공감이 간다. 나는 학교에 학급까지 똑같아서 정말 내내 붙어 있었다. 그러다 보면 일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일 얘기를 하면 꼭 싸운다”고 털어놨다. DJ컬투는 “그래서 숙소를 나와서 혼자 살고 있나”고 물었고 백예린은 “혼자 살고 있다. 지민이도 좋아할 것”이라고 말해 주위를 웃음을 자아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백예린, ‘컬투쇼’서 정기고에 콜라보 러브콜 “목소리 섹시하다”

    백예린, ‘컬투쇼’서 정기고에 콜라보 러브콜 “목소리 섹시하다”

    피프틴앤드 백예린이 가수 정기고에게 콜라보 러브콜을 보냈다. 30일 방송된 SBS 라디오 파워FM ‘두시탈출 컬투쇼’에서는 ‘특선라이브’ 코너로 가수 애즈원과 백예린이 출연했다. 이날 DJ컬투는 “지난주에 배치기가 나왔는데 같이 콜라보 하고 싶은 가수로 백예린를 뽑았다. 옆에 서인영이 있는데도 백예린을 뽑았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애즈원 역시 공감하며 “어떤 가수라도 같이 해보고 싶은 목소리다”라고 칭찬했다. 이에 DJ컬투는 백예린에 “콜라보 제의가 많이 올 것 같은데 왜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백예린은 “콜라보를 하고 싶다. 근데 제의가 오면 회사(JYP엔터테인먼트)를 통해서 듣는데 좀 늦게 알게 되더라. 그럼 다들 이미 다른 사람과 콜라보를 하고 나서더라”며 “회사에서 잘 안해주신다”고 털어놨다. DJ컬투는 “누구와 제일 콜라보를 하고 싶냐”고 물었고 백예린은 “정기고와 하고 싶다. ‘썸’ 부르기 전부터 팬이었다. 목소리가 너무 섹시하다”고 답했다. 사진= ‘두시탈출 컬투쇼’ 캡처 연예팀 seoulen@seoul.co.kr
  •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불려… 20대 총선전 민주 탈당 ‘4선’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불려… 20대 총선전 민주 탈당 ‘4선’

    29일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된 박지원 의원은 원내대표만 세 번을 지낸 ‘노회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1942년생으로 올해 74세인 박 위원장은 30여년의 정치 경험과 연륜을 자랑한다. 호남 정치의 좌장 격으로, ‘DJ(김대중)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도 불린다. 전남 진도 출신인 박 위원장은 단국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가발 사업을 하다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이후 1987년 김 전 대통령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92년에는 제14대 국회 전국구(비례대표)에 당선됐다.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제18~20대 전남 목포에서 내리 당선되면서 4선 고지에 올랐다. 20대 총선 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 국민의당에 합류해 20대 국회 첫 원내대표로 합의 추대됐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열린세상] “아가,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릴 때” 이제 YS, DJ를 보내드리자/이형용 거버넌스센터 이사장

    [열린세상] “아가,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릴 때” 이제 YS, DJ를 보내드리자/이형용 거버넌스센터 이사장

    보배섬. 이름값을 한다 싶었습니다. 꼭 20년 전 국내를 배낭여행하던 중에 전남 진도에 들렀을 때 인상입니다. 둘러본 미술관만 운림산방을 비롯해 섬 안에 서너 개였습니다. 석양도 일품이었습니다. 더하여 전혀 기대 밖의 조우. 읍내에서 상여 나가는 장면을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풍경. 상복을 입은 여인네들이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전해, 꼴까다 마더 하우스에서 자원봉사해 보자 하고 인도 간 길에 얼마간 배낭여행을 하는 중에 길거리에서 마주치던, 들것에 시신을 둘러메고 간다는 묘사가 어울릴 것 같던 장례길 장면들과 오버랩됐습니다. 어둡지 않고 가볍고 조금은 왁자한 분위기였습니다. 다음 생에는 더 좋은 생을 받으리라는 믿음 혹은 바람 탓이었을 것입니다. 5분쯤은 됐을까. 극장 안에 불이 들어온 후에 그리 오래 자리를 지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올봄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을 관람하고서입니다.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감사했습니다. 스크린에 이름이 다 소개될 때까지 앉아 있는 게 그분들에 대한 마음의 일단을 표현하는 것 같았고, 그렇게라도 함께했다는 위안을 삼고 싶었을 것입니다. ‘잠자는 동안 우주가 맑아졌어.’(김선우 ‘퉁소’) 그랬습니다.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으로 몸 받아 나서 차마 겪어 내지 못할, 겪기는커녕 보고 듣는 것을 참아 내기에도 힘든 비탄과 절망, 분노와 죄의식의 한 시대를 이런 식으로 잘 작별하는 느낌이었다 할까요. “아버지마저 보내 드리자” 하시며 물가에서 옷가지와 신발을 태우면서 “좋은 세상으로 가시는 갑다. 냉갈(연기)도 하나 안 나는 것 본께” 하시며 물기 마른 목소리로 덧붙이던 어머니 말씀. “없는 형편에 자식들 대학 공부시킨다고 당신 손으로는 일평생 아이스께끼 하나 사 잡숫지 못 하더니.” 며칠간 생전에 함께했던 기억을 더듬어 혼자 남도를 다니던 중에 큰어머니댁을 들렀습니다. 구순 연세에 장례에도 참석 못하신 큰어머니께서 보자마자 하신 말씀, “아가, 느그 아부지 세상 버릴 때….” 세상 버릴 때. 아! ‘그렇게 모질고 신산스런 시대에 한 세월을 살아 내시며 자식들을 성장시키고 뒷날 세상은 자식들 몫으로 맡기고 훌훌 털고 다른 세상으로 떠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구나.’ 한결 편안했습니다. 생의 강을 건너는 이와 작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개인이 아니라 시대의 인연과 작별한다는 것은 더더욱 간단한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역사적 성취를 이룬 인물과의 작별 방식은 ‘계승’과 ‘극복’의 측면이 동시에 있습니다. 그중에 우위는 ‘극복’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역사적 공로의 부정이 아니라, 그래야 역사의 고만고만한 반복이 아닌 새로운 도약과 상승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6월 항쟁으로 변곡점을 성취한 민주화 운동을 두고 말하면 적어도 세 그룹과 역사적 작별을 감내해야 합니다. 역사적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작별해야 합니다. 또 역사적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작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로서 86세대를 극복해야 합니다. 각각의 작별사 제목으로 ‘극복’에 방점을 두고 이리 적으면 어떨까요. ‘YS, 그 담대함에 대하여: 당신의 결단, 다수의 혼돈 혹은 파탄’ , ‘DJ, 그 주도면밀함에 대하여: 당신의 집념, 다수의 혼란 혹은 타락’, ‘86세대, 슬픔 혹은 보수화의 함정: 그대들의 애달픈 영광과 콤플렉스, 역사의 실종’ 6월 항쟁의 산물인 87년 체제를 넘어선다는 것이 단순히 권력 구조를 변경하는 문제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산업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시기를 관통해 극단적 성장제일주의 또는 맹목적인 결과지상주의와 함께했던 20세기적 근대화를 넘어 선진화·인간화라는 21세기 사회 발전 단계의 성숙한 도약을 위한 광범위한 사회 세력 혁신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진정 YS와 DJ를 따르는 이들이 이 시기에 할 일은 자신의 정치적·사회적 기득권을 위해 대중의 추억을 볼모로 YS를 팔고 DJ를 파는 저열한 행태가 아니라, 다음 단계 역사적 성취를 위해 그분들을, 그분들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성찰하고 분투함이 백번 천번 마땅한 것입니다.
  • 개그맨 ‘갈갈이’ 박준형 부천국제만화축제 홍보대사 “공포의 외인구단 가장 좋아해”

    만화광으로 유명한 개그맨 ‘갈갈이’ 박준형이 제19회 부천국제만화축제 홍보대사로 활동한다. 국내 최대의 만화전문축제인 제19회 부천국제만화축제는 오는 29일 공식 기자간담회에서 개그맨 박준형을 축제홍보대사에 위촉할 예정이라고 28일 밝혔다. 만화축제 홍보대사로 활동할 박준형은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해 각종 만화를 섭렵했기 때문에 아마도 나만큼 만화를 많이 본 사람도 없을 것”이라며 만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만화로 ‘공포의 외인구단’과 허영만 화백의 ‘무당거미’를 꼽았다. 이어 그는 “어릴 적 주말이면 만화방에서 살았고 만화 때문에 소년지를 7년간 정기구독할 정도로 굉장한 만화광이었다” 며 “부천국제만화축제 홍보대사가 된 것은 이런 나에게 더없는 영광이고 내 개그의 원동력은 만화다.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만화를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축제를 홍보하겠다”며 선정 소감을 밝혔다. 박준형은 KBS 공채개그맨 13기로 데뷔해 ‘개그콘서트’에서 ‘갈갈이’라는 코너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 방송 3사에서 각종 개그프로그램을 섭렵하며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그는 ‘아기공룡둘리’ 뮤지컬에서 ‘마이콜’ 역할을 맡는 등 만화 공연에도 다수 출연했다. 현재는 MBC라디오 ‘박준형 정경미의 2시 만세’에서 DJ로 맹활약 중이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검은 금요일은 예고편” vs “저가 매수 기회”… 엇갈린 투자 전망

    “검은 금요일은 예고편” vs “저가 매수 기회”… 엇갈린 투자 전망

    “검은 금요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장불안은 단기일 뿐 저가 매수 기회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현실화된 뒤 본격적인 장(場)이 열린 27일 국내외 금융시장은 예상 외로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이를 놓고 조만간 상당 폭의 추가 조정이 있을 것이라는 암울한 예상이 나온다. 브렉시트는 단기 악재인 만큼 신흥국에 투자할 타이밍이라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된다. 이날 국제금융센터 등에 따르면 영국계 투자은행 바클레이즈는 ‘검은 금요일은 예고편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바클레이즈는 보고서를 통해 “지난주 브렉시트 직후 미국 증시가 보인 하락 폭이 연 저점 대비 11% 이상 높은 만큼 며칠 또는 몇 주 안에 큰 추가조정(deeper adjustment)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바클레이즈는 유럽 금융주들도 2월 저점 대비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아시아 국가를 ‘죄 없는 구경꾼’(innocent bystander)이라고 정의하면서 “단기적으로는 아시아 국가의 일부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예상했다. 반면 씨티그룹은 ‘위기는 기회’라고 역설했다. 시장 불안이 단기에 그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악재는 아시아 신흥국 자산을 저가에 매수할 기회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브렉시트가 글로벌 경제 근본에 미칠 영향이 제한적이며 ▲투자자들은 이미 보수적 투자를 해 왔고 ▲G3(미국·중국·EU)가 모두 경기 완화정책을 쓸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한술 더 떠 한국 기업엔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의견도 내놨다. JP모건은 “파운드 및 유로 약세는 대만과 한국 수출기업에는 부정적이지만 그 비중은 크지 않다”면서 “특히 한국 수출 기업은 엔화 강세로 경쟁력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브렉시트가 당분간 변동성 요인이 되겠지만 영향력은 EU 지역 내로 제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 역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지금은 다르다고 전망했다. CS는 “브렉시트는 경제 시스템적인 위기라기보다는 정치적 쇼크”라면서 “정치적 쇼크 때 시장은 초기 과민반응을 보이지만 곧 내재된 가치를 보고 회복하기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영국계 자금이 대거 이탈할 것이라는 우려는 아직까지는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36조원 규모의 영국계 자금 이탈을 걱정하는 이가 많았지만 오늘도 영국계 투자자는 우리 주식을 소량 순매수했다”고 밝혔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포토] 머라이어 캐리, 가터벨트에 망사스타킹만… 파격 하의실종

    [포토] 머라이어 캐리, 가터벨트에 망사스타킹만… 파격 하의실종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의 하의 실종 파격 패션이 미국 연예매체 스플래쉬닷컴에 의해 포착됐다. 26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미라지 호텔 나이트클럽 DJ로 데뷔한 머라이어 캐리는 블랙 가터벨트에 망사 스타킹만 신은 섹시한 모습으로 포토월에서 포즈를 취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진=TOPIC / SPLASH NEWS(www.topicimages.com)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캐나다서 1.3kg 드론 추락해…여성 목뼈 부러져

    캐나다서 1.3kg 드론 추락해…여성 목뼈 부러져

    비행 중인 드론이 사람 머리 위로 추락하는 사고가 결국 벌어졌다. 25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은 지난 11일 캐나다 퀘벡 주의 한 야외행사 촬영 중인 DJI 팬텀3 드론이 스테파니 크레뉴(Stéphanie Creignou·38)란 여성의 머리에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1.3kg DJI 팬텀3 드론은 행사장 위를 비행 중이었으며 사고 장면은 행사 주최 측에서 항공촬영을 의뢰한 VTOL-X 드론스의 드론에 의해 고스란히 포착됐다. 영상에는 군중이 모여있는 트럭 옆에 남편 에릭 데자르댕(Eric Desjardins)과 있던 크레뉴 머리 위로 하얀색 드론이 떨어지고 드론에 맞은 그녀가 기절해 쓰러지는 장면이 포착돼 있다. 사고 직후 크레뉴는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으며 경추(목뼈)를 크게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VTOL-X의 플라비오 마틴코프스티(Flavio Martincowski) 대표는 “추락한 드론을 조종한 로제 튀르콧(Rosaire Turcotte)씨가 드론 조종 가이드라인을 지켜서 비행하지 않았다”면서 “당시 드론은 군중과 너무 가까이 비행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튀르콧씨에게도 이러한 부분을 지적했지만 그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사람들이 몰려 있는 장소에 너무 낮게 비행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라고 밝혔다. 사고를 낸 튀르콧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면서 “안정적으로 드론을 조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추락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드론을 안전하게 조종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캐나다 교통안전위원회는 드론에 의한 또 다른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드론 사용 규칙 위반을 철저히 조사 중이며 사고를 당한 크레뉴는 현재 드론을 조종했던 튀르콧씨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사진·영상= VTOL-X Drones Inc. youtube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에너지 기업 특집]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에너지 인력 트랙 받은 학생은 취업이 ‘일!사천리’

    [에너지 기업 특집]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에너지 인력 트랙 받은 학생은 취업이 ‘일!사천리’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이 우수한 역량을 지닌 청년 구직자들에게 취업의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일!사천리’(http://hrd.ketep.re.kr)라는 취업 연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우수 인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에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전문 취업 기관인 ‘이공계인력중개센터’(RNDJOB)와의 협업으로 마련됐다. 취업 포털 이용 대상자는 에너지 인력 양성 사업에 참여한 학생 중 과제별 이수 조건을 충족한 ‘트랙 인증’ 학생이다. 이력서 화면에 ‘트랙 이수 인증자 마크’를 부착해 채용 기업들이 학생들의 우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에너지 인력 양성 사업은 에너지 효율 향상과 기후 변화 대응, 자원개발 활성화를 위해 연구개발(R&D) 인력과 산업현장 인력을 육성하는 프로젝트다. 전체 인원 가운데 30% 정도만 트랙 인증을 받는다. 에너지기술평가원 관계자는 “구직 청년들이 체감할 수 있는 대면 서비스도 추가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라면서 “채용 기업은 우수한 인력 정보를 얻고, 취업을 희망하는 청년들은 본인에게 맞는 기업 정보를 얻음으로써 ‘고용 절벽’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김나희 “올드스쿨 지금요 지금!” 김창렬과 인증샷 ‘아찔 미모 눈길’

    김나희 “올드스쿨 지금요 지금!” 김창렬과 인증샷 ‘아찔 미모 눈길’

    개그우먼 김나희가 ‘김창렬의 올드스쿨’ 청취를 독려하며 인증샷을 공개했다. 김나희는 23일 오후 자신의 SNS에 “김창렬의 올드스쿨 지금요 지금!”이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에는 SBS 파워FM ‘김창렬의 올드스쿨’ DJ인 이광섭, 김창렬과 밝은 미소로 인증샷을 찍고 있는 김나희의 모습이 담겨 있다. 김나희는 2013년 KBS 28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해 ‘개그콘서트’에서 활약했으며 빼어난 미모로 주목받았다. 한편 ‘김창렬의 올드스쿨’은 매일 오후 4시~6시 청취자들을 만난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면접 선생님’ 강북구

    면접관의 질문이 나를 향한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하지만 옆에 있는 경쟁자는 미소를 띠고 존경하는 인물,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책 등 묻는 질문에 척척 대답한다. 지난달 취업포털 ‘사람인’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구직자 858명 중 절반이 경쟁자로 인해 위축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서울 강북구가 2030 구민들을 위해 스피치 교육을 마련한 이유다. 강북구가 다음달 4일부터 3일간 20~30대 구내 청년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파워 스피치’ 교육을 실시한다. 이번 교육은 구직자들에게 취업 면접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취업 성공을 실질적으로 돕기 위해 마련됐다. 교육은 말하기 기초를 쌓기 위한 목소리 훈련과 실전 면접에 즉시 적용 가능한 스피치 기법을 중심으로 3일간 진행된다. 교육생들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하루 4시간씩 총 12시간 집중 트레이닝을 받는다. 소리 훈련 과정은 현재 라디오 DJ이자 퀸스스피치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있는 이지연 소장이 진행한다. 스피치 기법은 현직 아나운서가 알려준다. 강북구에 거주하는 20~30대 청년 구직자 20명을 27일부터 7월 1일까지 선착순 모집한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구인·구직자가 대면하는 면접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져 실전 면접에 도움이 되는 3일간의 집중 훈련 과정을 마련했다”면서 “앞으로도 구직자의 취업 역량을 강화하고 취업 성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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