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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완 산울림 데뷔 ‘아니 벌써’ 30년… 연기경력도 20년

    김창완 산울림 데뷔 ‘아니 벌써’ 30년… 연기경력도 20년

    “음악을 아는 데는 10년, 연기를 알기까지는 20년이 꼬박 걸렸죠.”의외였다. 국내 최장수 록밴드인 ‘산울림’의 보컬이자 드라마·영화·CF를 누비며 감초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김창완(52)씨의 고백(?)이다. 관록의 그에게도 음악과 연기는 수십년간 끊임없는 화두이자 도전이었다.1977년 ‘아니 벌써’라는 파격적인 곡으로 데뷔, 올해로 음악활동 30년째인 그는 요즘 MBC 주말드라마 ‘진짜진짜 좋아해’에서 청와대 요리사를 맡아 맛깔스러운 연기를 보이고 있다. 서울 목동 SBS 옆 공원에서 그를 만나 ‘요리사’로서의 생활과, 산울림 30주년 기념공연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청와대 속이 궁금했다” 드라마에서 그는 대통령의 요리사로, 주인공을 가르치는 스승 역할이다. 그동안 보여준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함과 서민적인 면모가 오롯이 담겨 있다.“개인적으로 역할이 너무 좋아요. 평소 비빔국수나 볶음밥, 미역국 등을 잘 만들죠.” 청와대 주방장 역할이 들어왔을 때 그는 “정치중심지인 청와대를, 내부에 일하는 주변인물을 통해 어떻게 묘사할지 흥미가 생겨서” 주저없이 받아들였다고. 청와대도 사람 사는 곳인데 그 안에 부는 훈훈한 인정에 대한 궁금증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음식이라는 게, 먹고 초대하고 그러다 보면 식사 이상의 커뮤니케이션, 소통의 채널이 돼요. 청와대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차원에서 역할의 비중을 떠나 자부심을 느낍니다.” ●영화서 조만간 악역 맡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그동안 드라마·영화 등에서 감초 조연만 맡았던 것 같다.‘만년 조연’이라는 말에 뜻밖에 손사래를 쳤다.“1985년부터 10년간 드라마 음악을 맡다보니 같이 일했던 감독들이 자연스럽게 출연 제의를 했어요.‘바다의 노래’ 2부작 등 그 당시에는 주인공도 몇차례 했어요. 홀아비나 노총각역 등 주연도 많았는데 다들 조연만 한 줄 안다니까요(웃음).” 그러나 연기에 대한 자기 확신이 생길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당시 10년간 계속 출연하면서 ‘이게 맞나?’하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감독들이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해줬고, 동료 연기자들로부터 많이 배웠어요.”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보는 눈이 생겨 연기를 조금 알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동안 편안하고 서민적인 아버지나 아저씨 역할을 주로 맡았다고 했더니 “변함이 없다는 것 자체로 안심이 될 수는 있지만 원래 성격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했다. 평상심을 유지하기보다는 기분이 들쭉날쭉하고 예민한 편이라고.“예민하지 않으면 세상을 어떻게 보겠느냐.”며 되레 묻는다. 비밀도 털어놨다. 충무로에서 몇년째 계속 악역 캐스팅 순위에 올라간다는 것. 도시적인 악역 연기도 해보고 싶다는 게 그의 원대한(?) 바람이다. ●산울림, 새달 5일 30돌 기념공연 최근 불고 있는 ‘7080’ 복고바람이나 중년들의 활약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았다.“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배우나 가수는 소모적으로 이용된다는 느낌입니다. 복고바람도 언제 썰물처럼 빠져나갈지 몰라요. 한 시대의 경향으로 치부할 게 아니라 꾸준히 이어졌으면 합니다.” 산울림은 그런 의미에서 복고가 아닌,‘살아 있는 밴드’로 평가받는다.1997년 13집을 낸 뒤 매년 1∼2회 기획공연으로 팬들과 함께 숨쉬고 노래해왔다. 산울림 멤버인 동생 창훈·창익씨가 각각 미국·캐나다에 살고 있어 자주 모이지 못하지만 ‘개구장이’‘산울림 매니아’ 등 오래된 열성 팬클럽들이 산울림 생명력의 원동력이다. 팬클럽뿐 아니라 산울림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희소식이 있다. 바로 다음달 5∼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산울림 30주년 기념공연’이다. 이달 말 귀국하는 동생들과 함께 첫 앨범과 첫 콘서트의 감동을 팬들이 다시 느끼고 기억하도록 하고 싶단다. 그러나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통해 미래를 계획하는 공연으로 만들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그러나 30주년 기념앨범이나 새 앨범은 당분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그동안 곡을 쓰면 당연히 음반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책을 써보니 다 그런 것은 아니더라고요. 음반도 언제 발표할지, 가치가 있는지, 경제적인 이유 또는 홀대받는 중견가수에 대한 반감 등 주저하는 이유가 뭔지 혼란스러워요. 앨범을 낼 수 있는 주위 환경이 중요하죠.” ●“주변 행복하게 하는 게 천직” 2시간쯤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공원에 내리쬐는 햇볕을 즐기는 듯했다. 뜻밖에 “사춘기 때보다 더 마음의 격랑이 일고 있다.”고 털어놨다. 주변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신록이 더 아름답고, 예전에 퍼부었던 독이 다 차서 이제는 다른 빈 그릇을 찾아 채우려 한다고 말했다. 그가 더 철학적이 된 건, 최근 신부님이 건네준 책 2권을 읽은 덕분이라고 했다. 매일 빽빽한 스케줄에 쫓기는데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이 부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는 그. 그 방법이 연기든, 노래든, 만나서 술을 한잔 하든 그 모든 것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글 사진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부드러운 저음의 가수 안다성(2)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부드러운 저음의 가수 안다성(2)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은 당시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 안다성씨와 송민도씨가 듀엣으로, 그리고 40인조 시온성합창단(단장 이동일)에 의해 취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려지는 노래는 스스로도 근사했으며 반응 또한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정작 음반은 현인씨와 권혜경씨의 목소리로 출반되었다. 이 노래로 실력을 인정받게 된 안다성씨는 곧바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된다. 당시 오아시스는 일류 작곡가들이 활동하던 메이저 음반사로 그는 전속되자마자 박춘석 작곡의 ‘아주까리 주막집’을 비롯해 이재호, 손석우, 김호길씨의 곡을 고루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모나리자, 비극은 없다, 흐르지 않는 강, 보헤미안탱고, 굿바이탱고,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 등. 이미 가요 명곡으로 자리매김한 그의 초창기 노래들은 발표 당시만 해도 이전 가요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안다성씨는 이 노래들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을 유감없이 표출해 보였다. 안다성씨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당시 내 월급이 아마도 대통령 월급의 다섯 배는 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이듬해 국민들의 귀를 온통 라디오에 쏠리게 만든 드라마 ‘꿈은 사라지고’의 주제가 역시 취입한다.50년대 말, 이 ‘꿈은 사라지고’는 ‘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꿈이 절실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드라마로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주제가 역시 영화화되면서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최무룡씨에 의해 음반으로 출반되었다. 안다성씨 입장에서는 ‘청실홍실’에 이어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는 워낙 철두철미한 성격 그대로 누구보다 연습을 많이 했고 취입에 대비했다. “당시는 단 한 번만에 녹음을 끝내야 했지요. 악단이라든지 가수가 취입 도중 실수라도 하면 가차 없이 처음부터 새로 녹음해야 했기에 모든 경비가 이중으로 든다는 것이 당시 여건에서 가장 큰 난제였습니다. 실제로 가수가 취입 도중 몇 번씩 가사가 틀려 계속 NG를 내자 화가 난 음반사장이 연주인들과 식사를 하러가면서 가수를 안에 가둔 채 아예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갔던 일화도 있었던 시절이었지요.” 때문에 안다성씨는 취입할 때 감정에 몰입하다 보면 1,2,3절 가사가 혼동되어 실수할까봐 가사를 각각의 다른 색깔로 구분했다. 이를테면 1절은 검정,2절은 빨강,3절은 파랑 등으로 가사를 악보에 적어 마이크 앞에 섰을 정도다. 때문에 그로 인해 녹음이 중단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성기 때 그의 별명이 ‘탱고의 왕’이었듯 그에 걸맞게 무려 20여곡이 넘는 탱고 곡을 발표했다. 보헤미안 탱고, 뒷골목 탱고, 나의 탱고, 이별의 탱고 등….‘에레나가 된 순이’ 역시 탱고리듬의 곡. 이 노래는 본래 가수 한정무씨가 취입했으나, 한씨가 교통사고로 타계하자 안다성씨가 재 취입해 60년대 말부터 ‘극장식 술집’에서 십년 넘게 불러 유행시킨 노래이기도 하다. 2005년, 그는 50여년 만에 꿈을 이룬다. 그의 데뷔 초기 취입곡 ‘청실홍실’과 ‘꿈은 사라지고’를 비로소 자신의 육성으로 음반을 출반한 것이다. 우리 가요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며 지금의 한국가요, 즉 ‘K-Pop’을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작곡가 손석우 선생의 음악생활을 기념하는 ‘손석우 노래 55년’ 음반에 이 노래가 비로소 수록된 것이다. 이 노래를 첫 취입한 지 무려 50년 만이다. 그는 분위기 있는 노래 위주로 활동했던 만큼 다른 한편으론 분위기를 띄우는, 일종의 신나는 템포의 곡은 거의 없다. 심지어 지나치게 서정적인 노래로 인해 곤혹을 치른 적도 있을 정도다. 전성기였던 50년대 말, 경남 사천비행장 항공대원들을 위한 공연에서 그는 대표곡인 ‘바닷가에서’를 부르는 도중 갑자기 관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를 받았다. 말하자면 신나고 빠른 노래를 불러달라는 주문의 야유였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에선 앙코르가 나오고 또 다른 한 쪽에선 야유가 계속되면서 급기야는 객석을 가득 메운 장병들이 두 패로 나뉘어져 싸움이 났다. 야유가 나오면 무대 뒤로 들어가고 앙코르가 요청되면 다시 나오고. 두세 번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지금은 웃으며 회고하지만 당시 가수 입장에서는 식은 땀나는 노릇이었을 터. “얼추 잡아도 그동안 500여 곡은 족히 불렀던 것 같은데 말이지,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무대에서 내 노래를 부르는 후배들을 보지 못했어요. 그만큼 내 노래가 너무 어려웠던 것 같아. 안 그런가?” 안씨의 얘기다.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부드러운 저음의 가수 안다성 [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부드러운 저음의 가수 안다성 [1]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가 그렇듯 부드러운 저음, 고즈넉한 시를 읊조리는 듯한 분위기의 노래로 먼저 떠올려지는 가수 안다성씨.‘안다성’은 본인 스스로 지은 예명이다. 세계적인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의 이름에서 착안한 것으로 대중으로부터 부드럽게 불려지고 싶어 ‘앤더슨’과 비슷한 발음,‘안다성’이라 이름지었다. 본명 안영길(安泳吉).31년, 충북 제천 태생. 지금까지 몇 차례 만나오면서 그에게는 늘 변함없는 것 한 가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약속장소에 항상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다는 점과 늘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옛날 가수들은 항상 먼저 와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괜스레 불안하지, 허허….” 그는 말한다.“우리나라 초창기 연극배우 이종철씨 알지? 그 냥반(양반) 꽤나 엄했어요. 분장한 채 대기실 밖에라도 나갈라치면 가차 없이 귀싸대기야. 어떻게 연예인이 무대에 서야 할 얼굴을 함부로 내보이느냐고….” 분장한 얼굴을 함부로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을 금기시 여기고 살았듯 그 이면에는 일상에서조차 맨 얼굴을 그대로 내보이며 ‘책’잡히고 ‘흉’잡힐 일을 되도록 삼가려 함도 그가 연예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몸에 밴 것들이리라. 처음 그가 무대와 연을 맺은 것은 51년, 당시 전쟁으로 인해 임시로 청주에 내려와 있던 ‘신흥대학교(현 경희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었을 때였다. 전쟁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그 역시 휴학계를 내고 군예대에 지원했다. 그러고는 군예대 지원의 대가로 받은 쌀 두가마니를 집에 메어다 놓고 그는 홀로 군예대로 향했다. 송달협, 고대원, 유춘산 등의 가수들을 비롯해 7인조 악단과 무용수들, 쇼 단원을 모두 합쳐 봤자 고작 25명이 전부였던 ‘1102 야전공병단’ 소속 군예대는 동부전선 강릉 부근에 배치해 있었다. 군용트럭으로 100여 리 길을 두 시간, 혹은 그 이상씩 달려 이동하는 도중에 포격 세례를 받기도 수차례였고 비포장도로의 흙먼지를 뒤집어 쓰며 천신만고 끝에 공연장에 도착하면 도랑물로 흙투성이만을 겨우 털어낸 채 이내 웃음 띤 모습으로 무대에 나서곤 했다. 예고 없는 무차별 폭격은 공연장에도 예외일 수 없어 공연은 수시로 중단되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공연이었다. 이 전장에서 그는 2년 9개월 동안 무려 100여 차례의 공연을 치렀다. 목숨을 건 사투의 시간에도 일순간이나마 노래가 공포나 두려움으로부터 얼마나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는가 하는 사실이 생생하게 현실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직접적인 이때의 경험이 그의 오랜 가수생활 동안 노래에 대한 ‘신념’으로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 쉽사리 짐작되어졌다. 그가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 때는 9·28 수복 이후 서울로 복귀한 대학 3학년 때인 55년. 친구 생일자리에 초대받아 간 곳이 당시 종로의 ‘여정카바레’. 사교춤이 한창 유행하던 무렵 이곳은 풀 멤버 밴드가 있던 일류 카바레로 명성만큼이나 무대 또한 근사했다. 물론 그가 이전에 섰던 야전무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때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친구들이 그를 무대로 끌고 올라간 것이다. 이 돌발사태를 제지하던 웨이터와 친구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이윽고 몸싸움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무대에 오르자 그는 버릇처럼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했다.‘서울야곡’. 야전무대에서 즐겨 부르던 가수 현인의 노래. 노래가 시작되자 아수라장이던 장내가 일순간 잠잠해졌다. 순간 그는 더욱 긴장했다. 그러나 이내 악기들이 하나 둘씩 자신의 노래를 따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삼절까지 노래를 마쳤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의외로 악단장이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방송국 전속가수 시험에 응시할 것을 제의해왔다. 명함에는 ‘중앙방송국 경음악단장 손석우’라고 적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대학생 신분에서 대중가요 가수는 썩 매력적이지 않았죠. 하나 방송국의 전속가수 시험제도라는 것이 묘하게 도전의식을 자극하더군요.” 결국 그는 이듬 해, 노래와 악보 테스트를 거쳐 권혜경 등과 함께 전속가수로 발탁된다. 그리고 몇 달 뒤 비로소 첫 취입할 노래의 악보를 건네받는다. 이 노래가 바로 우리나라 연속방송극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이다. 그는 악보를 훑어내려 가면서 난감해졌다. 노래가 지극히 짧고 단순해 감정을 이입할 부분이 도무지 없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작곡자 손석우씨를 찾았다.“선생님, 이 노래는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이에 작곡가 손석우씨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그냥 쉽게 불러요, 동요 부르듯….” (계속)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보이지 않는 소리의 마술사’ 손인호[2]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보이지 않는 소리의 마술사’ 손인호[2]

    ‘얼굴 없는 가수’의 50년만의 외출 손인호씨는 대중들 앞에 일절 나서지 않았던 것은 물론 이미 톱 가수 반열에 오른 1955년 결혼 당시 부인조차 그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현재 손인호씨의 가족은 부인 이선자 여사를 비롯해 3남1녀, 그의 음악적 인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장남 손동준씨가 뒤늦게 대를 이어 ‘사랑은 OX’라는 곡으로 데뷔,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네 아버지가 가수인 줄 알았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지요. 때문에 어릴 때 집에서 아버지 노래를 부르면 야단을 맞곤 했는데 밖에서만큼은 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비단 어머니뿐 아니라 당시엔 연예인들을 ‘딴따라’라고 비하하기도 했고 유독 가수활동을 말렸던 어머니가 뒤늦게 제 가수 활동만큼은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하시는 걸 보면 전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수로 50년 후배인 손동준씨의 말이다. 취입된 노래만으로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가수 손인호씨는 정작 그 시각에 피 말리는 영화녹음현장에 매달려 있었다. 손인호씨는 우리나라 영화녹음 발전사의 산증인인 처남 이경순씨와 ‘한양녹음실’을 설립, 운영해왔다. 이곳에서 녹음한 영화는 무려 3500편 정도.50년대에서 90년대까지,40년간 제작된 한국영화의 70∼80%를 도맡았다. 물자 부족과 낙후시설로 인해 녹음 환경이 매우 열악했던 시기, 특히 필름은 ‘핏방울’이나 다름없이 귀했다. 당시는 ‘후시녹음’시절이라 이미 촬영된 생필름에 직접 녹음을 해야 하는 ‘피 말리는 작업’에 따르는 긴장감과 압박감은 엄청났다. 한 ‘씬’마다 음악과 음향효과, 그리고 연기자와 성우의 호흡과 감정을 맞추는데 몰입해야 했다. 게다가 이미 개봉날짜가 정해진 영화를 마무리하는 작업이기에 밤샘 작업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노래 취입 자체가 사실상 버거웠다. 결과적으로는 레코드사 전속가수로 한달에 몇 곡 이상은 반드시 녹음해야 하는 계약조건 때문에 그나마 여러 곡들을 취입, 남길 수 있었던 셈이다. 일화도 많다. 지금처럼 다양한 특수음향효과음을 모아놓은 ‘sound effect(음향효과)모음집’이 없던 시절이라 효과음향들을 일일이 직접 녹음해 만들어내야 했다. 재래식의 무거운 장비를 들고 기적소리가 울리는 현장, 즉 안양 밖 수원 못 미친 지점을 찾아내 철도 밑에서 밤새 기다렸다가 비로소 시나리오에 적혀진 대로 ‘차가운 새벽을 가르는 적막한 기차소리와 서글픈 기적소리’를 녹음기에 담아, 스크린을 통해 재현해야 했다. 임시 방편으로 철판을 흔들거나 두들겨 산들바람부터 비바람을 동반한 천둥소리까지 만들어내야 했고 ‘백치 아다다’의 경우 화면 배경의 매미소리를 내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두셋이 셀로판지를 입에 물고 매미소리를 직접 흉내내야 했던 웃지 못할 일화도 부지기수이던 시절. 신상옥 감독의 ‘젊은 그들’에서 주인공 최무룡과 개들이 싸우는 장면에서는 고민 끝에 실제로 개 네 마리를 직접 녹음실로 데려와 마이크를 목에 매달고 두 마리씩 편을 갈라 싸움을 붙이는, 말하자면 성우 대신 성견(聲犬)까지 동원했다. 특히 어려웠던 것은 전투장면. 우리 측 무기와 상대 전투기소리는 물론 M1과 카빈소총, 그리고 따발총소리 역시 제각각 달라야 했다. 영화편집용 기기인 ‘무비올라(moviola)’가 없던 시절이라 영사기 렌즈로 한 프레임씩 필름을 검색해 그림에 맞춰 한방 한방씩 녹음, 일일이 소리맞추기를 해야 했다. 특히 그에게 대종상 녹음상의 영광을 안겨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경우는 등장인물도 많았고 또 소리의 원근감까지 정확히 묘사했던 작품으로 보름 이상 소요되었다. 워낙 철두철미한 성격에 ‘보통사람과 다른 귀’를 가지고 있어 작곡가 이봉조씨가 그에게 지어준 별명이 ‘손형사’.‘소리의 달인’ 손인호씨가 가수로서 노래를 취입할 때마다 마이크 앞에서 갖는 중압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짜깁기’가 불가능했던 시절 ‘마그네틱 녹음테이프’ 또한 혈관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던 때인지라 취입 도중 반주나 노래가 틀리기라도 하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미 오랫동안 ‘긴장감’에 숙련된 그였지만 녹음에 들어가기 전 아예 독한 술을 미리 마시고 노래를 취입하기도 했던 일화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가 브라운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2001년,75세 때 가요무대 특집방송 ‘얼굴 없는 가수 손인호 편’에서다.2003년 뒤늦게 가수분과에 입회,77세 되어서야 비로소 가수에 적을 둔 셈이고 재작년에는 40여년만의 신곡 ‘휴전선아 말해다오’를 발표했다. 이 노래가 결국 우리나라 최고령 가수의 취입곡이 되는 셈이다. 손인호 선생이 지난 4월12일 필자와 함께 부산 해운대를 찾았다. 그의 대표곡이자 동시에 해운대를 대표하는 노래 ‘해운대 엘레지’의 주인공이 노래 발표 50년 만에 첫 방문한 것으로 장남인 가수 손동준씨도 함께 동행했다. 지난 2000년에 세워진 ‘해운대 엘레지 노래비’ 앞에서 그는 사뭇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보이지 않는 소리의 마술사’ 손인호[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보이지 않는 소리의 마술사’ 손인호[1]

    미남(美男), 미성(美聲)의 가수 손인호씨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비 내리는 호남선’ ‘울어라 기타줄’ ‘해운대 엘레지’ ‘하룻밤 풋사랑’ ‘한 많은 대동강’ 같은 우리의 1950∼60년대를 대표하는 숱한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10여년 간 정상에 서 있는 동안에도 방송 무대에 전혀 서지 않았다. 심지어 일반 무대에서조차 거의 볼 수 없었다. 당시 일반 대중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의 본 직업은 영화 녹음기사였다. 그는 가수로서 150여곡의 노래들을 발표했지만 영화 녹음기사로는 무려 2000여편 이상을 작업했다.‘돌아오지 않는 해병’ 그리고 ‘로맨스 빠빠’ ‘빨간 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이 모두 그가 녹음작업을 한 영화들. 이로 인해 대종상 녹음상을 무려 일곱 차례나 수상했을 만큼 영화녹음작업에 있어 독보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 손인호씨가 가수로서 받은 상은 단 한차례도 없다. 보릿고개 시절, 라디오와 영화가 국민들에게 최고의 오락수단이었던 때, 그 두 무대를 동시에 장악한 인물로 ‘소리의 마술사’라고까지 불리던 손인호씨는 속칭 ‘38 따라지’다. 본명 손효찬(孫孝燦).1927년 평북 창성에서 출생해 창성보통학교 6학년 때, 수풍댐 건설로 인해 마을 일대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가족 모두 만주 창춘(長春)으로 이주해 생활했다. 광복 후 신의주로 옮긴 손인호씨는 평양에서 열렸던 이북 도민 전체 노래자랑대회인 ‘관서콩쿠르대회’에 참가,‘집 없는 천사’를 불러 1등을 차지한다. 이때 심사위원장으로부터 ‘가수가 되려면 이남으로 가야 소질을 살릴 수 있다.’는 권유를 받고 이남 행을 결심, 광복 이듬해인 46년 12월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단둘이 서울로 내려온다.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시내 곳곳에 걸려 있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들 몸에 뿌려진 것은 DDT, 즉 살충제였다. 나이가 어려 곧바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그는 당시 서울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사람은 1주일 동안 굶어도 물만 먹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고 회고할 정도다. 그는 당시 작곡가 김해송씨가 이끌던 KPK악단에서 실시한 가수모집에 응모, 참가자 300명 중 1등을 차지해 악단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윤부길씨가 이끌던 ‘부길부길쇼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군예대에 들어가 ‘군번 없는 용사’로 전쟁터를 누볐다. 제대 후 공보처 녹음실에 입사한 그는 ‘대한뉘우∼스(뉴스)’ 녹음을 담당하며 아울러 영화 녹음기사로도 활동을 시작한다. 그 무렵 많은 음악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씨. 이 인연으로 그는 노래 두 곡을 받아 취입하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나는 울었네’와 ‘숨쉬는 거리’다. 휴전 이듬해인 54년도의 일이다. 그의 노래 중 56년에 발표한 ‘비 나리는 호남선’과 관련,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유당 시절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이 유세 도중 호남선 열차 내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발생했기에 충격에 빠진 국민들은 마치 추도곡처럼 ‘비 나리는 호남선’을 애창했다. 때를 같이 해 온갖 유언비어가 꼬리를 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신익희 선생의 미망인이 직접 이 노래를 작사해 만든 노래라는 것.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진 이 소문으로 인해 노래를 부른 주인공 손인호씨를 비롯해 작사가 손로원, 작곡가 박춘석씨도 줄줄이 당국에 의해 조사를 받아야 하는 수모를 겪는다. “담당 수사관이 대뜸 ‘이 노래를 취입할 때 어떤 감정으로 불렀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가수는 감정을 가지고 노래를 해야지, 감정 없이 노래 부르면 그건 가수가 아니죠.’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수사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야.” 손인호씨의 회고다. 사실 이 곡은 바빠서 일년 이상 차일피일 취입을 미뤄왔던 곡으로 취입 도중 반주가 틀렸음에도 별로 히트되지 않을 곡이라고 판단,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긴 곡이었다. 노래 역시 단 한번 만에 OK사인이 났다.(계속)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삶과 노래(2)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삶과 노래(2)

    1964년‘동백아가씨’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트로트 시대를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이미자씨. 그러나 이후 3대 히트곡인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에 이어 ‘기러기 아빠’까지 왜색, 비탄조 등의 사유로 금지되면서 한때 가수 생명까지 위협받는다. 이 노래들의 금지 배경에는 아직도 확실히 규명되지 않은 몇 가지 설이 나돈다. 그 중 하나는 정치적 희생양 설. 당시 한·일국교를 맺을 즈음 치닫던 반일감정을 ‘왜색 근절’이라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민심 달래기용’으로 이용되었다는 설과 아울러 당시 정책구호였던 ‘재건’에 대한 ‘의욕 저하 설’ 등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다른 하나는 주위 음반사의 작용설. 정작 당사자인 이미자씨는 후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는 99년에 발간한 자전 에세이 ‘인생 나의 40년(황금가지刊)’에서 본인의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65년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른 주체성 확립 차원에서 본보기로 규제한 시대적 희생물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지만 정작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해 청와대 영빈관에서 만찬이 있을 때마다 나를 불러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며 정말로 ‘동백아가씨’가 왜색이어서 정부가 금지시켰다면 일본에 대해 강경자세를 취했던 박 대통령이 그 노래를 내게 부르게 했을 리 없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권력층에서는 정작 이 노래의 금지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며 오히려 연속되는 빅히트로 상대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타 음반사가 극에 달한 ‘반일감정’에 편승, 심의실과 결탁해 여론몰이를 통한 ‘마녀사냥’에 나선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해적판’까지 기승을 부리게 만든 ‘동백아가씨’ 신드롬은 우리 가요계에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미8군 출신가수들이 주축을 이루던 가요계가 트로트 붐으로 급선회했고 아울러 한국 최고의 메이저 음반사로 꼽히던 지구레코드사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피란 시절, 이북 출신 일곱명의 ‘38 따라지’들이 고물을 주워 모아가며 부산에서 설립한 미도파레코드사는 9·28수복 후 서울로 본거지를 옮긴다. 임정수·김능억 공동사장으로 운영되던 미도파는 동백아가씨가 ‘대박’을 터뜨리자 이듬해인 65년 1월부로 결별, 각각 독립한다. “두 공동사장이 분가할 때 그동안 미도파 라벨로 출시된 음원들도 똑같이 분배했지요. 그런데 정작 분가의 불씨를 제공한 선택 1호 ‘동백아가씨’ 만큼은 임정수 사장의 ‘지구’ 몫이었습니다. 미도파 전속 후 별다른 히트곡이 없던 작곡가 백영호씨의 그동안 밀린 월급을 임사장이 개인적으로 주어왔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지구’는 출발부터 돈방석에서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도파레코드사에 근무하던 현 한국가요작가협회 김병환(68) 이사장의 증언이다. 결국 임 사장은 지구를, 김 사장은 그랜드를 각각 설립, 결별한 이후에도 미도파 당시에 출시한 동백아가씨 판매수익 지분을 놓고 법정싸움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지구의 출발과 함께 ‘이미자 시대’는 본격적으로 막을 연다. 게다가 천재 작곡가 박춘석씨가 자신의 곡을 이미자씨에게 취입키 위해 자청, 지구에 전속된다. 작풍도 ‘이미자풍(風)’에 맞춰 트로트로 선회, 스스로 ‘제2의 전환기’를 맞는다. 이렇게 해서 60년대 빅 히트 3대요소인 ‘지구+박춘석+이미자’라는 진용을 갖추고 ‘섬마을 선생님’ ‘그리움은 가슴마다’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 ‘황혼의 블루스’ ‘한번 준 마음인데’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동시에 이미자씨는 백영호 곡인 ‘여자의 일생’ ‘아씨’ ‘서울이여 안녕’ ‘여로’, 그리고 손석우 곡인 ‘사랑했는데’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거침없는 질주를 계속했다. 쉴 새 없는 공연과 취입으로 그녀의 목은 늘 잠겨 있었다. 따로 연습할 시간조차 없어 ‘녹음이 곧 연습’이었다. 그럼에도 ‘타고난 목소리’에 대한 찬사는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성대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의 한 연구기관이 그녀의 성대를 사들였다는 소문까지 전국에 파다하게 나돌기도 했다. 물론 낭설이었지만 이미자씨 역시 이 소문을 접했을 때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상의 목소리’ 그리고 ‘촌스러움’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았던 이미자씨 노래는 89년 10월,30주년 기념공연을 기해 세종문화회관무대에 오른다. 처음 이 공연은 ‘공연장의 품위와 관객의 질적 수준 저하’라는 이유로 세종문화회관 운영자문위원회의 결사반대에 부딪혔던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격이 낮다’는 노골적인 멸시를 받으며 막이 오른 이 공연은 정작 시작 첫날부터 세종문화회관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당시 민정당 박태준 대표,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주당 김영삼 총재, 공화당 김종필 총재, 즉 당시 4당 총재부부가 나란히 관객석에 자리한 것이다. 한국인만의 정서를 대변하고 달래주었던 이미자 노래, 그 실타래 같은 노래 한가닥 한가닥은 서민의 밑바닥 정서부터 한국을 움직이는 최고 수뇌부까지 모두 하나로 묶는 소중한 ‘끈’이었던 것이다.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삶과 노래(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삶과 노래(1)

    절세 가인(歌人),‘이미자’라는 이름은 어느덧 우리 가요사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 격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과 노래를 취입한 가수로 이미 1990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그때까지 발표한 음반은 총 560장, 발표곡 수 2069곡. ‘가늘면서도 비단결같이 고운, 한 세기에 나올까말까 한 미성,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한풀이이며 마음의 정화요, 깊은 교감’이라는 평가를 받는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씨의 음성. 그는 그 많은 노래를 ‘악보 그대로’ 부르는 ‘원곡주의자’이기도 하다.1958년, 그녀의 나이 18세 때 ‘도라지 부루스(손로원 작사, 김성근 작곡)’,‘무명초’ 등을 취입하며 정식으로 가수에 데뷔해서 오늘날까지 그녀의 노래는 50년 가까이 한국인들과 함께했다. 그녀는 2002년 남북한 동시에 생중계로 방영된 평양공연에 이어 2004년 45주년 기념 콘서트까지, 한국인이 자랑할 만한 많은 무대에 섰다. 마침 어렵사리 그녀와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공연이 열리기 불과 며칠 전. 소박한 외모만큼이나 ‘친근한 이웃’ 같은 그녀는 정작 국민가수라기보다 한국의 전형적인 평범한 주부에 가깝게 느껴졌다. 실제로 그녀는 요즘 음반가격은 잘 모르지만 쌀값, 콩나물 값 등은 줄줄 꿰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집에는 일반가정에도 흔한 오디오시설조차 없다고 했다. 있는 것은 고작 카세트 정도.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평생을 살아온 그녀의 위상을 떠올리면 쉽게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그만큼 집에서는 가수로서가 아니라 철저히 살림주부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인터뷰 자리에서 그녀가 서울 문성여고 3학년 때인 58년,HLKZ TV 신인가수선발 프로그램인 ‘예능 로타리’에서 1등을 차지한 뒤 곧바로 작곡가 김성근씨에게 픽업되어 그 해 유니버샬 레코드사를 통해 김성근 작곡의 노래 네 곡을 취입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번 무대는 ‘이미자 노래 45년’이 아니라 ‘46년’이 되는 셈이라고 강조했다.‘대한민국을 움직여 온 100인(1985년 한국일보)’,‘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1998년 조선일보)’ 그리고 ‘한국을 움직이는 100인의 여성’,‘한국인이 좋아하는 인물 베스트 10’에도 이미 선정된 한국 근대사의 주요인물, 가수 이미자씨가 설령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대중문화사에서의 정확한 기록은 나름대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10월,KBS TV에서 ‘대한민국 가치의 대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이 기획되어 방송된 적이 있다. 이를테면 2002 월드컵 전사들의 몸값, 양평 용문산 은행나무의 가격 등 유무형의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해 그 가치를 따져보는 프로그램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인물로 가수 이미자씨가 선정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평가단으로 필자도 섭외되었는데 처음엔 다소 난감해 거절했었다. 거절 이유는 간단하다. 가수 이미자씨를 우리의 소중한 문화로 접근해야지 어떻게 돈의 수치로 가치를 매길 수 있겠느냐는 것. 그러나 제작진은 바로 그 ‘무형의 가치’를 평가하는 작업이기에 선정했다며 집요하게 설득해와 결국 이 프로그램에 참여, 그간 추정된 수치를 함께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KBS 측은 이미자씨가 데뷔 이후 기네스북에 오르는 시점인 90년도까지의 음반 총 판매량을 추산해 음반수입을 1662억 1898만 7000원으로 추정해놓고 있었고 지금까지의 공연 횟수와 수익을 이미자씨 전속인 김춘광 악단장과 함께 추정, 총 3320회 공연에 현재 출연료를 대입해 그간 공연 총 수익이 498억원이라고 1차 산출해놓고 있었다. 갈수록 국민가수 이미자씨의 문화적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가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난감했던 나는 이러한 숫자의 공포에 눌려 그 수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실체가 더더욱 가늠되지 않았다. 더구나 대중문화에 끼친 ‘무형의 가치’를 어떻게 내 능력으로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나는 우리가 잘 아는 영국속담 중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인도 전체와 바꿀 수 없다.’는 말을 예로 들었다. 그만큼 대문호 셰익스피어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이겠는데, 나 역시 한국인으로서 갖고 있는 이미자씨에 대한 자부심은 그에 못지않기에 이미자씨에 대한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라면 나는 그냥 우리 식으로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하겠다며 얼버무렸다. 물론 프로그램 기획의도와 맞지 않다면 이 부분은 잘라도 좋다고 덧붙였다. 그 결과 실제로 방송에서 한 말 중 이 멘트 부분은 편집되어 잘렸다.(계속) (sachilo@empal.com)
  • [마니아] 금천·구로구청 색소폰 동호회 ‘인사모’

    [마니아] 금천·구로구청 색소폰 동호회 ‘인사모’

    지난달 31일 밤 10시 40분 서울 금천구 독산동 라이브 카페 ‘콘서트 7080’. 지하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서자 감미로운 색소폰 선율이 흐른다. 여성 4인조가 화음에 맞춰 공연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힘차면서도 부드러운 음색에 빠져 들었다. 공연이 끝나자 소프라노 김수진, 알토 이연경, 테너 차영희, 바리톤 김경화씨에게 박수 갈채를 보냈다. ●공무원들로 구성 금천구청과 구로구청 공무원 9명으로 구성된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사모) 회원들도 여성 4인조를 응원하러 이날 카페를 찾았다. 이들은 2003년 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색소폰을 함께 배우며 인연을 맺었다. 색소폰 마니아가 많지 않은 터라 공연이 열리면 함께 즐긴다. 인사모는 2003년 5월에 결성됐다. 구로구청 대세영씨가 색소폰을 배우고 싶은 구청 직원을 모았고, 금천구청 박종찬(47) 이동수(44) 이석근(43)씨 등이 초창기 멤버로 참여했다. ●3년 동안 ‘주경야독´ 그리고 고교 때 밴드부로 활동하던 유병호(51)씨를 ‘선생님’으로 초청했다.‘김무균 색소폰 앙상블’에서 활동하던 유씨는 “함께 배우자.”며 기꺼이 참여했다. 먼저 색소폰을 구입했다. 가격은 50만∼300만원으로 다양하다. 그리고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하고 강사를 초빙해 연주법을 배웠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처음에는 소리내기도 버거웠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색소폰에 빠져들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 뿜어나온 호흡이 악기를 통과하면 아름다운 선율로 바뀌는 게 신비로웠다. 게다가 기분에 따라 음이 달라졌다. 이들은 “피아노는 건반만 제대로 치면 음이 나지만, 색소폰은 그렇지 않다.”면서 “누르는 방법이 같더라도 호흡에 따라 전혀 다른 음이 들려 우울할 때와 신날 때 색소폰 소리가 완전히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연습을 통해 음색의 차이를 줄여가야 한다는 설명이다. 회원들은 연습 장소가 없어 애를 먹기도 했다. 소리가 커서 아파트에선 연습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일이 끝나면 무작정 차를 몰고 한적한 곳을 찾아갔다. 안양천을 바라보며 차 안에서 연습하다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연습장소 없어 차 안에서 하기도 금청구청 한만석(41)씨는 밤 11시에 나가 홀로 연습하다 새벽 1시에 돌아오기도 했단다. 색소폰 소리가 그리워 잠을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2003년말 빗물펌프장 창고를 연습장으로 얻었다. 인사모는 뛸듯이 기뻤다. 틈 날때마다 개별적으로 찾아가 색소폰과 씨름을 한다. 매주 토요일에는 정기모임을 갖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 주고 있다. 색소폰의 매력은 무엇이냐고 묻자 구로구청 김구현(48)씨는 “소리가 너무 좋지 않습니까.”하고 반문한다. 김씨는 이어 “색소폰을 불면서 그 소리에 심취하면 스트레스를 아예 잊어버리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게 된다.”고 덧붙였다. 유병호씨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몇 십년만에 색소폰을 다시 불었다. 그는 “사업에 실패하고 속상한 마음에 술로 세월을 보냈는데 색소폰을 꺼내 불었더니 술보다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현재 ‘양천 코리아 윈드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있다. 색소폰은 재즈 클래식 대중가요 팝송 등 다양한 음악과 어울리는 것도 매력이다. 누구와도 벽을 허물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단다. 박종찬씨는 “고등학생인 딸이 피아노를 치고, 제가 색소폰을 연주하면 집안에 웃음꽃이 떠나지 않는다.”면서 “아내는 색소폰 연습하느라 술을 훨씬 덜 마신다고, 아이들은 무뚝뚝하던 아빠가 ‘로맨티스트’로 변해 좋아한다.”고 만족해 했다. ●닦은 기량 뽐내는 발표회 추진 만석씨는 얼마전 작은 공연을 가졌다. 아버지 생신 때 색소폰으로 ‘황성옛터’‘초우’ 등 축하곡을 연주했다. 그는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놀랐다.”면서 “앙코르를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른다.”고 자랑했다. 친척 어른들이 용돈을 쥐어주며 앞으로 가족 행사마다 공연을 해달라고 한단다. 인사모는 조만간 발표회를 가질 계획이다. 지난 3년간 갈고 닦은 실력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보이는 자리다. 일이 많지만 틈틈이 연습하는 이유다. ●은퇴하면 소외이웃 위문공연 다닐터 이들은 은퇴 후에 본격적인 연주활동을 펼칠 생각이다.“노인정이나 양로원, 독거노인을 찾아다니며 연주회를 갖는 게 꿈입니다. 소록도도, 섬마을도 좋습니다. 지금 어르신들은 색소폰에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가 늙으면 70∼80년대를 그리며 색소폰 연주를 즐기지 않을까요.” 이석근씨가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최성수의 ‘기쁜 우리 사랑은’을 연주한 뒤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독산1동 색소폰교실 주1회 월 수강료 만원 금천구 독산1동 주민자치센터는 지난해 6월부터 색소폰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매주 목요일 오후 6∼8시 동사무소 7층 문화관람실에서 진행한다. 수강료는 월 1만원으로 저렴하다. 50대 안팎인 수강자 모두 처음부터 강좌를 들어 중급수준이다. 그래서 초보자가 수강하기에는 실력차가 심하다. 주민자치센터는 초급회원이 10명 이상 모이면 새로운 교실을 운영할 계획이다. 악기는 본인이 구입해야 한다. 강좌를 맡은 홍원엽 선생님은 “수강자 모두 수업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과제도 충실히 해온다.”면서 “열정은 어느 대학생 못지않다.”고 말했다. 문의 02)839-1381 ■ 라이브 카페 ‘콘서트 7080’ “당신의 눈동자 속에는 그리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7080에서 접할 수 있는 이 음악밖에 없답니다.”-2005.7.22. 서울 금천구 독산동 금천보건소 옆에 자리한 라이브 카페 ‘콘서트 7080’ 입구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아마추어 예술가의 아지트답게 매일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 시낭송과 동아리의 밴드 공연이 이어진다. 손님 가운데 누구라도 악기를 연주하고 싶으면 무대에 오를 수 있다. 드럼, 베이스기타, 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가 갖춰져 있다. 연주자가 없으면 듣고 싶은 음악을 쪽지에 적어 신청해 보자.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이 1000여 장의 LP판에서 은은하게 흘러 나온다. 실용음악을 전공한 양성진(41) 사장은 “좋은 사람들과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고 싶어 카페를 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음악연습실을 꾸미듯 지난해 문을 열면서 인테리어를 직접했다. 비틀스, 레드 제플린, 조용필, 이선희, 나훈아 등을 벽에 그려 넣었다. 곤충 모양의 동판 조명도 그의 솜씨다. 덕분에 70∼80년대의 향수가 물씬 풍긴다. 오후 2시에 문을 연다. 송이덮밥 등 음식을 팔다 저녁이 되면 맥주를 내놓는다.1인당 1만원이면 무제한 마실 수 있다. 연락처 02)866-7010 ■ 색소폰 자세히 알기 우리가 흔히 접하는 색소폰(saxophone)은 소프라노·알토·테너 색소폰 등 3종류가 있다. 소프라노 색소폰은 케니지(50ㆍKenny G)가 주로 연주하는 기다란 악기로 클라리넷과 비슷하게 생겼다. 알토 색소폰은 악기 위쪽이 구부러진 모양으로 중음과 고음을 낸다. 테너 색소폰은 알토와 비슷하지만, 조금 크며 구부러진 모양도 약간 다르다. 중음과 저음을 내며 밤무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외에 소프라니노·바리톤·베이스 색소폰이 등이 있는데 이들은 전문가들이 사용한다. 처음 배울 때는 알토 색소폰이 적당하다. 누르는 방법과 부는 방법이 같아 나중에 소프라노나 테너도 쉽게 연주할 수 있다. 소프라노는 소리 내기가 쉽지만, 전체적으로 음정이 불안정하고, 고음을 처리하기가 어려워 상당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테너는 크기 때문에 많은 호흡량이 필요하다. 그래서 저음 중음 고음을 비교적 쉽게 낼 수 있는 알토 색소폰이 초보자에겐 알맞다. 소리를 내려면 마우스피스와 리드가 필요하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의 크기가 다르듯 마우스피스와 리드도 악기에 따라 다르게 선택해야 한다. 특히 악기는 형편에 맞게 구입하더라도, 마우스 피스는 좋은 걸 구입하는 게 바람직하다. 색소폰을 배우는 기간은 개인마다 차이가 나지만, 간단한 동요는 2∼3주면 연주할 수 있다. 가벼운 곡은 한 달 정도면 멜로디를 낼 수 있다. 대중가요를 연주하려면 6개월 정도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 제공 색소폰나라(www.saxophonenara.net)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여자 학사가수 1호’ 김상희(2)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여자 학사가수 1호’ 김상희(2)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빨간 선인장’ 같은 서정적인 노래들과 더불어 김상희씨는 지극히 보편적인 소시민의 시각을 담은 경쾌한 노래들로 뭇 선남선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의 ‘3대 걸작 서민가요’를 보면 60년대 당시 청춘남녀의 이상향과는 사뭇 거리가 먼 캐릭터조차 따듯하게 감싸 안는다. 텁수룩한 얼굴이 나이보다 7∼8세 위로 보이지만 그래도 내겐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경상도 청년’, 단벌옷에 넥타이 두 개뿐인 서른한 살 노총각으로 주머니가 텅텅 비어 영화구경 한번 제대로 못할지언정 그래도 듬직하다고 치켜세우는 ‘단벌신사’, 행여나 장가간 게 아닐까 궁금할 정도로 나이 들어 뵈지만 그래도 내일 또 만나질까 기다려진다는 ‘대머리 총각’. 이렇듯 그의 노래는 당시 이상향의 주류에서 한참 비껴난, 일종의 ‘괄호 밖의 남자’들에 대한 따듯한 포용이 물씬 배겨 있다. 이뿐인가.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가 많고 많지만 그래도 순박한 ‘울산 큰애기’가 제일 좋더라 하는 식의 삼돌이의 편지 내용은 또 어떤가. 이렇듯 단순명쾌하고 자신만만한 그녀의 메시지는 ‘만인의 연인’이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러한 범국민적인 지지로 그녀는 68년 ‘연예인 납세실적 1위’라는 전성기를 누린다. 가수 김상희에 대해 특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70년을 전후해 여러 장르의 노래들을 시도했다는 점.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 타이틀 롤인 2대(代) ‘아랑’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고,‘성불사의 밤’ ‘그대에게 내 말 전해주’ 등을 담은 가곡음반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또한 작곡가 신중현씨와 손잡고 ‘어떻게 해’를 비롯,‘나만이 걸었네’ ‘파도소리’ 등을 담은 ‘사이키델릭 음반’을 취입하는 등 여러 장르의 노래들을 시도,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을 한껏 펼쳐보였다는 점이다. 이 즈음 그녀는 또한 ‘월드스타’로 도약한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각각 음반을 발표하게 된 것.70년, 일본에서 ‘EXPO 70’이 열릴 때 그녀는 우리 문화의 기수로 가수 패티김과 함께 파견, 도쿄에서 한 달간 ‘아리랑 페스티벌’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일본 측으로부터 음반 취입을 제의받는다. 이 여세로 세계적인 트럼펫 주자인 히노데루 마사와의 합동 리사이틀을 갖기도 했고 홍콩, 태국 등 해외공연과 더불어 미국 MGM과도 계약,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한국 대형가수의 세계무대로의 진출은, 오히려 국내에서 ‘한국가수의 월드스타 출현’이라는 기대와 맞물려 국내에서도 팝송만을 불러 취입, 수출용 음반을 출시하기도 했다. 김상희씨는 현재까지도 가수활동과 더불어 방송 진행자로도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그녀 스스로도 가수 활동보다 ‘방송국 월급쟁이’로 지낸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할 정도. 어느덧 그녀는 ‘방송 진행은 옷 입는 것같이, 노래는 밥 먹는 것같이’한다고 토로한다.40년 가까이 하다 보니 그만큼 자연스러워졌다는 얘기다. 그녀가 방송 진행자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7년 KBS TV ‘당신의 멜로디’라는 쇼 프로그램. 당시로서는 여성 진행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담당 PD가 방송이 잘 안되면 사표를 쓰겠다며 방송국 간부들을 설득했다. 그 PD가 바로 지금의 남편인 유훈근씨다. 유PD와는 이듬해인 68년에 결혼했다.4선 의원을 지낸 그녀의 시아버지 유청(柳靑)씨는 광복 후 한민당 전라도당 위원장을 지낸 유직양씨의 아들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인기 가수와 종갓집 7대손 장남이 결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남편 유훈근씨는 KBS PD로 일하다가 MBC에서 뉴스 앵커를 지냈다.79년 MBC 보도부 차장으로 근무할 때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다.10·26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면복권 되면서 공보비서로 들어가게 된 것. 이 여파일까, 김상희씨는 5공화국 들어서면서 무대에 설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화여대 옆에서 반평짜리 공간을 얻어 샌드위치 장사를 하기도 했다. 김상희씨는 연예인 봉사단체 ‘한마음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데 벌써 30여 년째다. 그래서 전국 각지의 노인 복지시설을 열댓 번쯤은 찾았다고 한다. 주로 남들이 잘 찾지 않는 무허가 시설 같은 데를 주로 가기 때문에 보통 방이 비좁아 악기도 겨우 전자오르간 하나만으로 노래를 해야 할 경우도 다반사. 그래도 돌아올 때는 다들 눈물을 흘리곤 한다. 가수 겸 방송인 김상희씨는 2004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당시 조선극장을 운영하는 상당한 재력가의 딸로, 그리고 4선 의원을 지낸 종갓집 7대손의 맏며느리로 결코 쉽지 않은 가수활동과 방송활동을 병행하면서도 늘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는 김상희씨, 그녀는 여전히 ‘만인의 연인’이자 ‘서민들의 변함없는 친구’다.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여자학사가수 1호’ 김상희(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여자학사가수 1호’ 김상희(1)

    ‘여자 학사가수 1호’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김상희씨.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는 숱 많은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린 헤어스타일, 즉 뱅 스타일이다. 이 ‘김상희식 단발머리 헤어스타일’을 위해 30여년 동안이나 머리를 잘라주는 전속 미용사가 있을 정도다. 본명은 최순강(崔純江). 고려대 법대 61학번. 데뷔곡은 ‘삼오야 밝은 달(61년)’. 풍문여고 재학 시절, 성적 1∼2위를 다퉜던 그녀는 ‘특차시험’을 통해 대학에 합격한 뒤,‘서울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 모집’에 참가, 최고 득점으로 발탁된다.‘구김살 없이 밝고 발랄하면서도 동시에 현명해 보이는’ 이 가수 지망생에게 호감을 느낀 당시 KBS 가요방송 지휘를 맡고 있던 작곡가 손석우씨는 김상희 이미지를 모티브 삼아 노래를 만든다. 바로 ‘삼오야 밝은 달’. 이 노래는 이로부터 한참 뒤인 79년, 한 작곡가에 의해 32소절이 16소절로 바뀐 채 무단 도용되어 ‘십오야(노래 와일드 캐츠)’라는 제목으로 발표, 오히려 대히트하게 된다. 대학에 갓 입학한 김상희가 방송활동이나 가수활동을 집과 학교, 양쪽에 모두 숨겨야 했던 건 유명한 일화다. 이때문에 ‘김상희(金相姬)’라는 예명을 쓰게 된다. 가장 흔한 김씨 성에 친구 이름을 한 글자씩 조합해 만들었다. 이 무렵 얼굴 알려질 게 두려워 공개방송 무대에는 일절 나서지 않았고 녹음방송만으로 가수활동을 해야 했다. 이를테면 ‘얼굴 없는 가수’였던 것이다.‘반쪽 가수’ 김상희는 이 노래를 시작으로 ‘텍사스 루울라’,‘나는 능금’ 등을 연달아 발표하지만 대부분 빛을 보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만다.‘얼굴 없는 가수’ 김상희의 반쪽 활동 등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겠다. ‘김상희’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어필하며 제법 인기를 얻게 되는 곡이 ‘처음 데이트(64년)’다. 물론 이 때까지만 해도 김상희씨가 재학중이던 고려대학교에서는 이 가수가 본교생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워낙 철저하리만치 비밀리에 가수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대학 4학년 때 ‘처음 데이트’가 히트되고 있던 어느 날, 공교롭게도 타고 있던 버스가 굴러 가벼운 부상을 당했는데, 마침 학보사 기자가 함께 타고 있다가 신문에 기사화되면서 내가 ‘가수 김상희’였음이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털어놓는다. 명문대 여대생이 가수활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65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가수로서의 재능을 한껏 펼치기 시작한다.70년대 말까지 매년 히트곡을 꾸준히 발표하며 대형가수로 자리한다. 히트곡들을 대략 꼽아보자면,▲64년-처음 데이트(손석우 곡, 이하 괄호 안은 작곡자) ▲65년-울산 큰애기(라화랑), 오늘같은 날은(손석우) ▲66년-경상도 청년(전오승), 대머리총각(정민섭) ▲67년-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김강섭), 뜨거워서 싫어요(정민섭), 진정 난 몰랐네(김희갑) ▲68년-단벌신사(정민섭), 결혼지각생(김기웅), 빗속의 연가(이철혁) ▲69년-빨간 선인장(김강섭), 당신을 알고부터(남국인), 어떻게 해(신중현) ▲70년-토요일과 일요일 사이(전우중), 홍콩엘레지(김강섭) ▲71년-참사랑(남국인), 사랑의 가족(김학송) ▲72년-팔벼개(민인설) ▲73년-가고 싶어라(김학송), 기다려(남국인) ▲74년-어쩌나(원희명), 황소 같은 사나이(박춘석) ▲75년-나 이제 외롭지 않네(신대성), 행복할 수 있다면(장욱조) ▲76년-주룩비(신대성) ▲77년-즐거운 아리랑(김강섭)등등…. 말하자면 김상희는 당대의 ‘히트 제조기’라 할 수 있는 실력파 작곡가들과 골고루 손잡고 기복 없이 매년 히트곡을 발표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노래들은 비교적 밝다. 그럼에도 방송금지된 곡들도 있다.‘어떻게 해’는 ‘창법 저속’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딱지가 붙여졌다. 또 한곡은 ‘단벌신사’. 이 노래는 당시 북측에서 “지금 남조선에는 ‘단벌옷에 넥타이 두개로 지낸다’는 노래가 불려질 정도로 인민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역선전한 것이 빌미가 돼 방송금지시켰었다. 현재 두 손자를 둔 할머니이자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안이다. 그녀만의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오늘도 TBS 교통방송에서 저녁 8시부터 두 시간 동안 ‘아름다운 서울의 저녁입니다’를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있다.(계속)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밝은 노래가 세상을 바꾼다”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밝은 노래가 세상을 바꾼다”

    ‘노래의 메아리가 전국 방방곡곡 울려 퍼질 때까지’‘온 국민이 하나 되어 노래할 때까지’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건전가요 보급에 앞장선 전석환씨는 생활 속 ‘노래운동 실천가’였다. ‘포크송’과 ‘캠프송’의 못자리 역할을 맡았던 ‘싱어롱 Y’를 매주 토요일 정기행사로 끌어들인 YMCA측은 거리에 임시 포스터를 붙여 알림판으로 활용했다. 이렇게 해서 첫날 모인 인원은 모두 13명. 이 중 초청한 아마추어 가수 남성3인조 ‘코코넛 트리오’를 빼면 실제 참가인원은 불과 10명뿐. 그러나 회가 거듭될수록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한달 뒤에는 200여명이 집결, 대성황을 이룬다. 이때 전씨는 개인적으로 통기타와 전자오르간을 직접 가져와 반주를 맡았다. 이 행사가 연일 화제를 모으자 당시 YMCA의 미국인 총무 베이커는 현장 사진을 세계본부에 보내 세계 YMCA 포스터에 사용되기도 했다. 젊은이들 위주로 진행된 이 노래 부르기 대열에 합류한 초창기 가수들을 보면 남성 4중창단 쟈니브라더즈를 비롯해 ‘별넷’의 전신인 ‘넷소리’. 또한 코코넛 트리오, 여성 3인조 ‘탑 트리오’ 그리고 파주의 고아원생들로 구성된 무궁화소녀합창단 등이다. 이를테면 남녀 중창단들이 주축이 되어 행사를 이끌었다. “우리 한민족이 천년 전 삼국시대 때부터 즐겨 불렀던 노래들을 보면 서로 ‘멕이고 받고(주고 받고)’, 후렴을 다같이 부르는 ‘론도(Rondo)’ 형식이 많았습니다.‘밀양아리랑’이나 ‘뱃노래’,‘군밤타령’ 그리고 구한말 창가인 ‘꼬불꼬불’ 등이 바로 상대와 호흡을 주고받음으로써 같은 효과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모두가 합쳐집니다.” 전씨가 추구하는 음악은 여러 목소리가 함께 어울려야 제 맛이 난다. 아울러 ‘통기타 1세대’이자 ‘전령사’인 전씨의 노래들은 밝고 힘차다. 외국 팝이나 전래민요를 발굴·채보해 보급하는 것 외에 직접 작곡을 해 노래를 전파시킨 것들도 밝고 건강하다. 공개방송 ‘삼천만의 합창’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된 ‘정든 그 노래’와 70년대 새마을 운동의 대명사격으로 불려진 노래 ‘좋아졌네’들이 그렇다. 전씨는 69년 3월 대한노래부르기중앙회를 발족시켰고 71년에는 (사)대한노래중앙회, 그리고 ‘새마을 노래협의회’라는 모임체를 조직해 전국 행사와 해외활동까지 겸했다. 그는 이러한 공개방송 활동 외에도 새마을 연수원의 교육이나 국방대학원에서 노래 지도와 강의를 18년간 꾸준히 해왔다.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를 가리켜 김동길 교수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강단에 선 인물로 꼽는다. ‘부르는 노래에 따라 생활이 바뀐다’는 이론을 강조,‘음악요법’이라는 용어를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항상 언제 어디서든 늘 밝고 건강한 노래만을 부르기를 강조했고 그 스스로도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멜로디와 가사만을 고집했다. 노랫말 역시 1절에서는 이별을 하고 떠날지라도 2,3절에서는 반드시 돌아오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그의 열변은 한편으로는 과격하게 비춰지기도 했고 또 저속가요와 건전가요의 비교론이 너무 극단적인 면도 없지 않아 반론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노래철학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아침이슬’의 경우 ‘태양은 묘지 위에’가 아니라 ‘대지 위에’였다면 희망의 노래가 되었을 것이고,‘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를 ‘나를 데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만 걸어도 행복해요’라고 개사해 불렀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지금도 서슴없이 펼친다. “밝은 노래를 부르는 것은 건강에 매우 좋다. 미래지향적 순기능 소리와 꼴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일흔셋이라는 나이가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 넘쳐 보였다. 글 박성서(가요평론가·저널리스트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 ‘건전가요 부르기’의 선구자 전석환(1)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 ‘건전가요 부르기’의 선구자 전석환(1)

    ‘아름다운 노래 정든 그 노래가 우리 마을에 메아리쳐 오면….’ 60∼70년대 라디오 전파의 잡음 속에 들려오던 그리운 노래들 중 하나인 ‘정든 그 노래’다. 이 노래들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60년대 말, 달달 꿰고 다니던 ‘국민교육헌장’만큼이나 아직도 선명하게 각인된다. 다름아닌 전석환씨다.‘싱어롱 Y’를 통해 ‘건전가요 부르기’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던 그에 의해 전국적으로 번졌다. 특히 스포츠머리에 기타 하나 달랑 메고 노래를 지도하던 그의 캐릭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능란한 화술과 시원시원한 리더십으로 공개방송 ‘다함께 노래하자’ ‘노래의 메아리’ ‘삼천만의 합창’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 직장과 학교를 찾아다니며 노래를 전파했다.70년 9월 한 인터뷰에서,“그동안 2500회의 노래 부르기 지도를 했으며 한 해 동안 만나는 사람이 무려 16만명, 그리고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는 3000여곡 정도 된다.”고 했다. 그의 왕성한 활동과 함께 전국적으로 벌어진 ‘다함께 노래 부르기’ 열풍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유행가 일부를 ‘소리의 공해’라 치부하기도 했고 때문에 건전가요 보급은 일종의 국가적 시책이기도 했다. 전석환씨는 “하루 여덟 시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나머지 시간을 모두 노래와 함께 살았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그는 1934년 황해도의 섬, 용매도에서 태어났다. 음악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인천고 3학년 시절인 55년, 교회 성가대원들로 4중창단을 결성해 활동하면서부터. 이어 57년 HLKX(인천기독교방송국)에 특별출연하면서 찬송가를 기타반주에 맞춰 부르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이 행동은 당시 경건하게만 여겨지던 교회음악에 대한 정서로 인해 찬반논쟁까지 불러일으켰을 정도로 파장을 몰고 왔다. 파격적인 시도만큼이나 음악을 바라보는 눈도 깨어 있던 그는 연세대 종교음악과에 입학한 후인 58년 조선호텔 ‘미군장교클럽’에서 전자 오르간을 연주하며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이때의 레퍼토리들이 그가 후에 전개하는 노래 부르기 운동의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60년대 초, 전석환씨는 학교 선배이기도 한 당시 YMCA 청년부 김창열 간사와 함께 ‘싱어롱 Y’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당시는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매우 혼란했던 시기로 연일 데모와 함께 휴강이 잦았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대부분 갈 곳이 없어 음악감상실 등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둘은 의기투합해 ‘돌체’ ‘뉴월드’ 등 음악감상실을 돌며 ‘싱어롱 Y’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싱어롱 미치’라는 프로그램 명에서 힌트를 얻은 이 이름의 Y는 ‘Young’과 ‘Youth’ 그리고 ‘YMCA’ 등의 의미를 함께 포괄한 단어입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 그동안 부르기 쉽지 않았던 외국곡이나 민요 등을 발굴, 채보해 보급했는데 대표적인 곡들이 ‘작별(Auld Lang Syne)’ ‘사모하는 마음(I Do Adore Her)’ ‘그리운 고향(Sloop John B)’, 그리고 전래민요인 ‘군밤타령’이나 ‘밥타령’ ‘꼬불꼬불’ 같은 노래들이다. 현재 악보집을 살펴보면 전석환씨가 채보, 개사한 대부분의 노래들은 특정 가수 표기가 없다. 주로 합창을 통해 불려져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역시 많은 가수들과 함께 활동을 전개했는데 그 중 하나가 남성4중창단 쟈니브라더스. 당시 예그린합창단 출신들로 구성된 이 남성4중창단의 첫 멤버는 김산현(김준), 양영일, 장호성, 진성만. 이 중 장호성씨가 멤버에서 빠지자 전석환씨가 긴급 합세해 62년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된 MBC 주최 ‘5·16혁명 1주년 기념 중창 콩쿠르’에 출전, 대상을 수상한다.‘쟈니’는 전석환의 미8군 무대에서의 애칭. “이 무대에서 내가 직접 통기타를 치며 함께 하모니를 맞춘 노래가 ‘냉면’과 ‘맹꽁이와 삽살개’였는데 이 노래들 역시 그 무렵 내가 악보를 만들어 보급하던 노래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때까지 소규모의 ‘싱어롱 Y’를 통해서만 불려지던 노래가 대형무대에서, 그것도 통기타 반주만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선보인 최초의 장면일 것입니다.” 이렇게 선보인 통기타 음악은 계속해서 ‘코코넛 트리오(박상규, 남승우, 김경수)’,‘사인트리오(리더 이인순)’ 등 대학생 보컬팀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고 YMCA가 본격적으로 ‘싱어롱 Y’라는 프로그램을 정기행사로 끌어들이면서 통기타 붐은 젊은이들 사이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전석환의 싱어롱 Y’는 이렇듯 우리나라에서의 캠프송, 레크리에이션송 문화로 깊이 자리 잡으며 포크송, 즉 통기타 노래 붐으로 점차 확산되어 갔다.(계속) 글 박성서(가요평론가/저널리스트)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 맨얼굴의 끼 ‘더블A’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 맨얼굴의 끼 ‘더블A’

    # 윤복기-복희-성복희-보키 폰 보데-그리고 비로소 ‘윤복희’로 돌아오다 ‘어제’를 돌아보지 않고 ‘오늘’만 바라보며 산다. 윤복희씨의 오랜 습관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옛날로 돌이키는 ‘아주 편한 무대’에 선다. 바로 올 4월에 가질 ‘인생 60년, 무대 55주년’ 기념공연이다. 윤씨의 본명은 윤복기(尹福起).‘여러분’으로 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순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을 연출했던 오누이. 바로 오빠 윤항기씨의 ‘기’자 돌림이다. 무대를 따라 옮겨 다니는 ‘떠돌이별’이었던 그는 정작 호적조차 없었다. 그냥 남들에 의해 발음상 ‘복희’가 되었다가 해외공연을 떠나기 직전인 열여섯 살 때 어머니 성을 따 ‘성복희’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처음 올렸다. 그 뒤 독일계 혼혈가수 유주용과 결혼하면서 ‘보키 폰 보데’가 됐다. 그러던 86년 비로소 부친의 성을 따 ‘윤복희(尹福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호적에 올렸다(이때 호적을 45년생으로 잘못 기재했다). 이름만큼이나 파란과 곡절의 삶을 살았던 그는 불과 열살 남짓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오로지 ‘무대’ 하나만을 의지해 살아왔다. 본인 스스로 거슬러 가본 최초의 기억에서조차 먹는 것, 잠잘 곳을 걱정해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이미 어른 아닌 ‘어른’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굶거나 길에서 잔 적은 없었다. 스스로 터득한 재능으로 미8군 쇼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오산비행장 부근의 미8군 클럽의 ‘제트 스트립밴드’의 마스터에게 겨우 사정을 해서 ‘10분간의 무대’에 서기 시작한 열세살의 복희는 이어 당시 ‘더블 A급 단원’들만으로 구성된 미8군쇼단 ‘에이원쇼’에 스카우트된다. 당시 ‘에이원쇼’ 밴드마스터였던 작곡가 김희갑씨의 회고. “복희가 아주 어릴 때였죠, 영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 발음을 적어 연습하곤 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복희는 발음이 매우 정확해 3개월마다 갖는 오디션에서 늘 더블 A를 받곤 했지요. 또한 내가 기타를 가르쳐주면 이내 무대에 올라 독주를 해낼 정도로 놀라운 음악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연기, 춤, 노래 그리고 ‘끼’를 타고난 윤복희는 이후 해외무대로 진출,‘코리안 키튼즈’를 결성해 맘껏 실력을 펼친다. 이때 만난 영국인 매니저 찰스 메이더는 그의 스승이자 수양아버지. 열여섯살인 그에게 언제나 무대란 ‘비상구 없는 공간’이라고 가르쳤다.‘용서가 허용되지 않는 땅’이라고도 했다. 사실 이런 가르침이 아니었더라도 그에게 있어 무대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이었다. 대중가수였던 그가 처음 뮤지컬 배우로 선 것은 77년,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그린 뮤지컬 ‘빠담 빠담 빠담’. 이 무대를 통해 그는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했고 이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는 넓은 음역을 넘나드는 놀라운 가창력으로 수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우는 듯 웃는, 얼굴 가득 찡그린 표정에서조차 어쩐지 행복감이 충만해 보이는 윤복희씨. 그는 지난 2001년에 ‘꾼’이라는 타이틀로 데뷔 50주년 기념공연을 가진 이래 5년 만인 올 4월에 감격의 무대에 선다. “50주년 공연이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테크닉을 보여 주기 위해 꾸며진 무대였다면 이번에는 저나 관객들에게 매우 편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얼굴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며 담담하게 각오를 밝힌다. “오히려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이 내겐 말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줍니다. 그것으로 인해 허비했던 시간도 엄청 많이 남고…. 생활의 중심 하나를 바꿔버리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더군요.” 지난 55년간 혼자 헤쳐 나온 ‘손때’가 잔뜩 묻은 무대가 그러하듯 말 한마디 한마디에 ‘땀내’가 짙게 배어 있는 듯했다. 글 박성서(가요평론가/저널리스트)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미니스커트 신드롬의 눈부신 핵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미니스커트 신드롬의 눈부신 핵

    『무대 서기 위해 (분장)은 하되 예쁘게 보이기 위해 (화장)은 않는다』 윤복희씨.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고 걸음마를 채 떼기 전부터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보았다고 스스로 회고한다. 그는 (문밖의 천직)으로나 여겼던 핏줄을 이어받은 탓에 극장에서 젖을 먹고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익혔다. # 1집 앨범 재킷, 60년대 ‘미니스커트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다 ‘부길부길쇼단’을 이끌며 각본, 무대장치, 연출, 연기까지 모두 소화해내던 ‘원맨쇼의 일인자’로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 평가받는 윤부길씨가 그의 부친. 그리고 악극인 고향선씨가 어머니다. 또한 현재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가수 윤항기씨가 오빠. 윤씨에게 무대는 곧 ‘제2의 고향’으로 극장 안에 있으면 어릴 때부터 마냥 편했고 그 느낌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털어놓는다. 어느덧 환갑.‘인생 60년, 무대 생활 55주년’을 맞는 윤씨를 만났을 때 뜻밖에도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채였다. 그가 무대에 처음 나선 것은 만 다섯 살 때인 51년. 한창 전쟁 중이었다.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할 때 대구의 한 극장 무대에 처음 섰어요.‘산타클로스의 선물’이라는 연극이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산타가 선물자루를 풀면 그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깡총 튀어나와 ‘메리크리스마스!’하고 외친 후 시계추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부기우기 리듬에 맞춰 노래하는 역할이었지요.” 무대에서 펼친 첫 역할은 ‘선물’. 이후 55년 동안이나 대중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선물을 선사했다. 윤씨는 67년 가수로서 첫 독집음반 ‘윤복희 스테레오 제1집’을 발표한다. 이 음반에서 빅 히트하는 노래 ‘웃는 얼굴 다정해도’와 더불어 재킷의 앞뒷면을 장식하는 아찔한 포즈가 등장한다. 바로 이 사진은 당시 거센 ‘미니스커트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최초의 진원지가 된다. 앞서 63년 해외공연을 떠나 눈부신 활약을 펼치다 잠시 귀국한 그는 단연 ‘톱 뉴스메이커’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첫 독집에 실린 이 문제의 사진은 당시 중앙일보가 서소문 고가도로 위에서 찍은 것으로 음반에 앞서 지상에 보도되자마자 사회 각계에 논란을 큰 불러일으켰다. 물론 아직도 세간에 회자되는 ‘윤복희가 귀국할 때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며 입었던 미니스커트’하는 식의 소문은 사실과는 다르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가 귀국할 때는 1월6일로 한겨울. 바지에 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더구나 새벽 2시, 통금시간이었기 때문에 인적은 물론 지나는 차량마저 없어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윤씨는 회고한다. 당시 64년부터 시작된 월남전 파병과 때를 같이해 이른바 ‘월남치마’가 유행했을 무렵이었다. 때와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입을 수 있었던 ‘월남치마’는 심지어 시골 아낙네들까지 농사일을 할 때에도 간편하게 입을 수 있었다. 또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여성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던 시기였으니 이 사진 한 장으로 점화된 쇼킹한 미니 논쟁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란이 채 가시기도 전인 두 달 뒤 3월26일, 직접 윤복희를 모델로 무대 전면에 내세운 미니 패션쇼까지 등장, 성황을 이루면서 미니 논쟁은 한층 가열됐다. 다리의 각선미가 주는 섹시한 매력 때문에 ‘여성들은 더더욱 용감해지기 시작했고 남성들은 휘파람을 불어댔으며 노인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는 것이 당시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이러한 신드롬은 영화로까지 이어져 신봉승 각본에 김영찬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윤복희가 직접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 ‘미니아가씨’가 제작,68년 10월 개봉됐다. 또한 윤복희는 그 해 말, 가수 유주용과의 결혼식에서 미니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 연일 ‘이슈메이커’로 자리했다. 때를 같이해 각선미를 뽐내고자 하는 멋쟁이 여성들의 치마길이와 하이힐은 하루가 다르게 짧아지고 높아져 갔다.(계속) 글 박성서 (가요평론가/저널리스트)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공교롭게도 배호의 본격적인 가수 활동은 병마와 함께 시작되었다.1966년 2월, 신장염을 앓기 시작하면서 음색이 탁성으로 변해 바이브레이션조차 제대로 구사하기가 어려웠지만 가수로서 그는 되레 적극적이었다.‘황금의 눈’이 제법 방송을 타기 시작하자 배호는 그 해 말, 연세대 작곡가 출신인 당시 나규호 MBC PD를 직접 찾아간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작곡가 나규호(70)씨는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를 이렇게 술회한다. “작사가 전우를 통해 알게 되어 형 아우로 지내던 배호가 방송국엘 찾아왔어요. 당시엔 PD들이 하루 50장 정도의 원고까지 직접 써야 하는 매우 분주한 때였는데 급하게 곡을 써 달라 부탁해서 배호를 10여분간 기다리게 해놓고 악상을 오선지에 그려준 기억이 납니다. 나로선 대중가요 작곡에 처음 손 대본 것이기도 합니다.” 이 악보는 전우에게 건네져 ‘누가 울어’와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으로 탄생된다. 이후 ‘전우-나규호-배호 콤비’는 ‘당신’ ‘안녕’ 등의 명곡들을 잇달아 발표하며 배호가 지닌 도회적인 분위기의 근간을 이룬다. 배호를 한 순간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은 ‘돌아가는 삼각지’ 역시 노래에 ‘쉼표’ 몇 개를 자의적으로 넣겠다는 조건 하에 취입했음에도 병마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긴 숨 가쁜 톤이 그러하듯 배호는 투병과 호전 상황에 따라 때로는 끊어질 듯 탄식에 가깝게, 때로는 비교적 건강한 음색으로 여러 가지 창법을 구사하며 당시 아세아-신세기-지구 등 메이저음반사 전속가수를 거치면서 5년간 무려 260여곡을 취입했다. “이를테면 배호는 ‘달러박스’로 각 방송사의 인기가수상을 휩쓸며 전성기 때는 ‘돈다발을 베개 삼아 잔적도 있다’는 일화가 회자될 만큼 인기에 비례해 수입이 좋았지만 약값으로 인해 그는 늘 쉴 틈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한 회사의 전속가수로 있으면서도 다른 레코드사를 통해 ‘도둑 취입’을 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작곡가 김인배(74)씨의 회고다. 그렇듯 배호는 한 때 연예인 납세실적 3위에 올랐을 정도였지만 병원비, 그리고 가족을 위한 생계비를 감당하기 위한 무리한 공연과 취입으로 다시 병세가 악화되는 악순환을 반복하며 생의 마지막 시간을 빠르게 소진해 갔다. 그럼에도 자신의 ‘배호와 그 악단-사파이어스’를 이끌며 혁신적인 활동을 계속했고 점차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지자 차를 구입해 ‘멋쟁이의 대명사’인 마이카족의 대열에도 합류한다. 그러나 점점 몸은 부어올라 옷과 신발을 매번 새로 바꾸어야만 했다. 이 무렵부터 식사 때마다 꼭 소화제를 복용했고 말 수도 점차 줄어갔으나 입버릇처럼 ‘쓰러져도 무대에서 쓰러지겠다’는 말만은 늘 입에 달고 다녔다 한다.‘행방불명설’과 ‘사망설’이 항간에 수시로 나돌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보란 듯이 나타났다. 때로 휠체어에 앉은 채 레코드판으로 노래를 대신해 무대에 올랐고 심지어 사회자의 등에 업혀 노래하기도 했다. 무대에서 각혈까지 하며 중도 퇴장하기도 했다. 관중들의 박수소리와 환호만이 삶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힘이었던 배호는 결국 71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배호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죽기 며칠 전 억지로 이별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직계 혈육은 이제 아무도 없다. 얼마 전까지 경기도 장릉 신세계공원에 안치되어 있는 그의 묘는 장기간 무연고로 관리되어오고 있었다. 더 이상 방치되면 ‘파묘’된다는 관리사무실의 관례 소식을 접한 배호 팬들은 너·나 없이 십시일반으로그동안의 미납분과 향후 5년간의 선불금을 선뜻 지불했다. 이렇듯 배호는 그가 살았던 스물아홉해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을 대중들로부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 놀랍게도 취입 당시 음반으로 발표되지 않았던, 배호가 남긴 미발표 릴테이프를 직접 찾아냈다. 그중 한 곡이 67년에 취입했던 곡,‘추억’. 외삼촌 김광빈씨의 곡으로 당시에는 이 노래가 히트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음반제작이 보류되었던 곡이라고 했다. 배호 사후 30여년 동안 레코드사의 창고에 묻혀 있던 그 릴 테이프에서 재생되던 생생한 원음, 감격스러웠다. 불안한 호흡을 스스로 조절하기 위해 당겼다, 놓았다하는 애드립으로 싱커페이션(syncopation)과 앤티시페이션 (anticipation)을 적절히 구사했던 그만의 독특한 창법. 그 속에 담긴 배호의 삶과 노래, 그 ‘한 박자 빠른 삶, 반 박자 느린 슬픔’이 온 몸으로 전해져 왔다. 마치 노랫말이 그의 음악적 스승, 김광빈씨가 배호에게 이제서야 바치는 ‘헌시’처럼 들려오기도 해 순간 묘한 감회에 젖어들었다.39년 전에 만든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글 박성서 가요평론가·저널리스트 sachilo@empal.com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배호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배호

    # 배호가 남긴 노래,‘굿바이’에서‘0시의 이별’까지 우리나라 최초로 가수 이름을 따 제정된 길은 다름 아닌 ‘배호길’이다. 서울 용산의 삼각지 로터리에 있는 400m 구간이다. 이 길이 ‘배호길’로 명명된 것은 지난 2000년 11월. 배호는 1963년 스물한 살에 데뷔해 71년 스물아홉에 타계했다. 가수로써 배호의 활동기간은 불과 8년. 서른 문턱을 채 넘기지 못하고 타계한 지 올해로 만 35주기가 된다. 드러머 출신의 ‘북재비 무명가수’로 출발해서 전성기를 맞을 때 신장염을 앓아 사투를 반복했던 그의 첫 취입곡 제목은 하필 ‘굿바이’였다. 또 마지막 취입곡 제목은 ‘마지막 잎새’와 ‘0시의 이별’이었다. 우리 대중가요의 주 테마가 ‘사랑과 이별’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발표곡 중 ‘안녕’이나 ‘또 하나의 이별’ ‘파란 낙엽’ 등의 단어들이 암시하듯, 배호는 활동기간 내내 늘 일찍 닥쳐올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은 인상마저 받게 한다. 때문에 그의 노래들이 더욱 팬들의 가슴을 적시는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노래들 중 현재 ‘돌아가는 삼각지’를 시작으로 ‘두메산골’ ‘파도’ ‘마지막 잎새’ 등은 노래비로 남겨져 있다. 또 ‘배호 가요제’도 1년에 세 차례, 그 것도 각각 다른 단체에 의해 개최되고 있다. 저간의 사정을 제쳐두고라도 이러한 현상은 분명 한국 대중문화 풍토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배호의 막내 외삼촌이자 작곡가·연주인인 김광빈(80)씨에게 ‘배호 스토리’를 들어봤다. 본명 배만금.42년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부친 배국민과 모친 김금순 사이의 3대 독자로 태어난 배호의 직계 혈육은 이제 아무도 없다. 세살 때 해방이 되면서 귀국 행렬에 합류, 월남했다. 타고난 음악적 자질은 외탁인 듯하다. 어머니 형제는 4남2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인 김광수는 셋째 외삼촌이고 막내인 넷째 외삼촌이 바로 김광빈씨다. 배호에게 첫 취입곡 ‘굿바이’를 만들어준 김광빈씨는 배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어린 시절, 만금은 독립운동을 하던 부친을 대신해 막내 외삼촌의 손에 의해 자랐고 김씨의 등에 업혀 한국 땅에 도착했다. 음악을 하고 싶어 중학교 2학년을 중퇴했다. 무작정 막내 외삼촌을 찾아 상경한 배호는 열여섯 살 때 ‘김광빈 악단’에서 드러머로 첫 음악생활을 시작했다.‘배호’라는 예명도 김씨가 지어준 이름이다. “배호의 ‘호’자가 늪 ‘호(湖)’로 운명이 그 이름을 따라간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픕니다.” 이름을 호랑이 ‘호(虎)’자로 쓰지 못했던 것이 내내 아쉽고 마음에 걸린다는 김씨.“배호는 음폭이 매우 넓은 가수였습니다. 보통 18음을 넘어 19음까지 구사했는데 저음은 물론 고음도 일반 여성보다 세 음이나 더 올라갔지요.” 배호의 발성은 악보의 오선지 밖을 지나 ‘솔’ 음까지 구사할 정도였다고 김씨는 회고한다. 배호의 트레이드 마크인 중절모와 검은 뿔테안경도 나이가 들어보이게 하기 위해 그가 권유한 것이고 현재 경기도 장흥 신세계공원에 안치돼 있는 배호의 묘에 세워진 노래비 ‘두메산골(반야월 작사)’ 또한 그의 작품이다. 배호는 악단 시절 취입한 첫 노래 ‘굿바이’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김인배 작곡의 영화주제가 ‘황금의 눈’을 발표했던 66년도부터다. 데뷔곡 ‘굿바이´에서부터 마지막 취입곡 ‘0시의 이별´까지 무수한 명곡을 남긴 가수 배호씨의 노래는 대부분 悲歌이다. 예명을 지어준 김광빈씨는 호자를 虎로 않고 湖로 쓴 것이 못내 맘에 걸린다고 회고했다. 이 노래가 제법 방송을 타기 시작하면서 배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나타난 인물이 당시 월간 ‘아리랑’의 연예기자였던 유명 작사가 전우(본명 전승우)다. 이후 배호의 후견인 역할까지 맡는다. 전우는 당시 MBC PD로 있던 작곡가 나규호와 콤비를 이뤄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과 ‘누가 울어’를 비롯한 노래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배호는 신장염이 더욱 악화돼 두 달 간 무대를 떠나 있어야 했다. 이때 배호를 찾아온 또 한 사람이 바로 ‘돌아가는 삼각지’의 작곡가 배상태(71)씨.‘돌아가는 삼각지’는, 당시 아세아레코드사 전속가수 김호성에 의해 먼저 녹음됐다. 얼마 전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당시 마스터 취입 기록카드에는 녹음날짜가 67년 3월12일, 그리고 그 옆에 ‘NG’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때문에 음반으로까지 제작되지는 않았다. # 병실에서 연습한 ‘안개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를 불러줄 가수로 배호를 수소문해 찾아갔을 때 그는 청량리에 있는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살고 있더군요. 한 눈에 보기에도 병세가 심해 거동은 물론, 호흡조차 가빠 보였습니다.” 결국 취입을 만류하는 배호의 어머니를 설득해 ‘돌아가는 삼각지’를 취입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들은 인근 여관에서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연습을 했고 며칠 뒤 장충스튜디오에서 노래를 취입했다. 이때가 67년 3월16일.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삼각지에는 67년 2월부터 착공된 원형 입체고가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배호는 처음 녹음에 들어가기 전부터 매우 힘들어보였으며 노래가 끝날 즈음에는 아예 앉아서 취입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장충녹음실에 근무하던 최길순(58·현 수창녹음실 대표)씨. 녹음날짜가 잡혔는데도 배호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결국 그해 4월 2일 배호는 전우-나규호 콤비의 새 노래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과 ‘누가 울어’를 비롯한 13곡을 대도스튜디오에서 취입한 뒤 뉴스타레코드사를 통해 첫 독집음반을 발표한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몇몇 가수들에게 취입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하지만 배호의 음성으로 나간 후 예상을 뒤엎고 각종 인기차트 상위에 랭크되기 시작한다. “배호가 급부상하자 아세아레코드사 측은 서둘러 전속금 30만원에 월 1500원을 주고 그를 전속가수로 영입했고 이 전속금으로 배호는 비로소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히트곡 ‘안개 낀 장충단공원’(7월14일)은 이때 병실에서 연습했던 곡이지요.” 배상태씨는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세아 측은 내친김에 뉴스타에서 발매된 배호의 독집음반 판권마저 사들여 아세아 레벨로 바꿔 다시 음반을 찍어내기 시작했다.68년 1월, 수록곡들을 새로 편곡해 재취입한다. 이렇게 해서 재탄생한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과 ‘누가 울어’를 비롯해 그가 발표하는 대부분의 노래들은 대히트를 기록하며 배호는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병마에 시달리던 배호의 호흡은 늘 불안했다. 때문에 배호는 무대에서 그때그때 감정과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싱커페이션(syncopation)과 앤티시페이션 (anticipation)을 적절히 구사해 불안한 호흡을 스스로 조절했다. 드러머 출신가수답게 리듬 감각은 탁월했던 그는 당겼다, 놓았다 하는 애드리브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창조해 멋진 창법을 한껏 구사했다.(계속) 가요평론가·저널리스트 sachilo@empal.com
  • We 확 바꿨다

    서울신문 독자 여러분을 위해 ‘주말매거진 We’가 한층 달라집니다. 점차 가족, 건강, 웰빙, 웃음 등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암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겠지요. 그래서 올해 초부터 ‘We’는 ‘웃음은 인생도 바꾼다,’‘부자되세요’ 등의 테마로 독자 여러분께 건강과 행복을 선사하려고 새로운 각오를 했습니다. 특히 이번 2월9일자부터 ‘We’를 좀더 알차고, 건강하고 흥미있게 확 달라진 모습으로 꾸밉니다. 앞으로 더욱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 월척樂漁 웰빙樂漁 낚시는 국민 1000만명이 사랑하는 대중 스포츠로 자리잡았습니다. 얼마나 많이 낚느냐 보다는, 얼마나 즐겁고 건강하게 쉬다 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낚시면을 준비했습니다. 낚시전문 인터넷 사이트인 ‘낚시사랑’이 저희와 함께 지면을 제작합니다.1997년 개설된 낚시사랑은 국내 최고의 낚시전문 인터넷 사이트입니다. 전국의 통신원들로부터 들어오는 낚시정보를 알차고 신속하게 독자여러분께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 노 래는 늘 우리 생활과 함께 합니다. 가족이나 친지, 또는 친구들이 모이면 노래로 즐거움을 한껏 표현하지요. 세월이 흘러, 그 가수와 작곡가는 갔어도 노래는 우리곁에 늘 남아 추억과 함께 새록새록 불려집니다. 또한 가요는 우리 사회의 변천사,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은 기록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요계의 이면에 있는, 알고 보면 흥미있는 비화들이 많습니다. 우리 대중가요사의 흐름을 바로잡을 일도 많고요. 가요평론가 박성서씨가 발로 뛰면서 그 이면과 비화를 흥미있게 취재한 내용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번호에는 그룹사운드 최초의 음반은 신중현의 ‘빗속의 여인’이 아니라 키보이스의 ‘그녀 입술은 달콤해’라는 새로운 사실을 보여줍니다. ■ 요리조리 명사와 함께 사람은 태어나 먹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한평생 살면서 맛있게 먹는 것은 큰 복이겠지요. 그렇다면 다른 집에서는 어떤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을까. 궁금하지요. 특히 명사들의 주방은 더욱 그렇습니다. 국내 인사들은 주로 문화·예술계와 멋쟁이 기업 CEO, 그리고 외국의 경우 올해 벌어질 독일 월드컵 32강에 든 나라의 대사관 가족과 외국계기업 CEO들을 중심으로 재미있게 엮어보는 페이지입니다. 이번에는 우리와 월드컵 예선에서 맞붙을 스위스의 부대사 가족들과 스위스의 정통요리를 함께 만들어 봤습니다. ■ 부부 Diary 신세대 부부의 알콩달콩, 어리버리 사랑 이야기를 새로운 만화로 연재합니다. 젊은 부부 만화가의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와 재미난 에피소드로 꾸며집니다. 남편 김인호씨는 파란 닷컴, 아내 남지은씨는 인터넷 다음에서 많은 팬을 가질 정도로 인기가 ‘짱´입니다. 이들이 매주 그려내는 따뜻하고 재미난 이야기로 여러분에게 잔잔한 웃음과 따뜻한 감동을 전해줄 것입니다. ■ Love 뷰티& 헬스 요 즘 최대의 화두는 건강과 아름다움이죠. 지난 설 TV에 방영된,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사람들을 뽑는 ‘동안선발대회’가 여전히 대화의 중심에 있는 것을 보면 젊은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큰 관심거리인지 알 만하죠. 우리 속담에 ‘정승을 부러워 말고 네 몸이나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 하나만 튼튼하면 사실 뭐든지 못할 것도 없지요. 세상을 살면서 쌓이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를 그냥 놔두면 절대 안 되지요. 여러분의 건강을 위해 ‘요가’ 코너를 신설했습니다.‘요가’는 누구나 다 알면서도 선뜻 가까이 못합니다. 이런 점을 감안,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건강요가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세계 최고의 요가 스승 ‘아헹가’로부터 정통 요가를 배운 현천 스님이 그 비법을 소개합니다. ‘테마가 있는 멋’ 코너는 주말 패션 정보를 드립니다. 방송과 패션업체에서 트렌드 리포터로 활동한 스타일컨설턴트 이혜숙씨가 멋스러운 스타일을 제안합니다. 성형 칼럼 ‘英&Young’은 티 안나는 성형으로 유명한 ‘영앤영 성형외과’의 허재영·윤지영 원장이 맡았습니다. 또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자연담은 한의원´ 김기준원장이 미용·성장 등 건강에 모든 것을 알기 쉽게 풀어주는 ‘웰빙 한방´이란 칼럼을 연재합니다. 보다 더 아름다워지고 건강해지고 싶은 독자분들은 참고하세요. ■ 복을 부르는 집은 안이 다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어떻게 하나요? 맑은 공기를 쐬거나 쇼핑을 하겠지요. 가끔은 집안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데 워낙 큰 일인데다 방법을 몰라 포기한 적이 있지 않은가요. 그래서 신설했습니다. 집안 분위기를 확 바꿔줄 ‘해피 하우스’. 작은 소품을 이용한 집안 꾸미는 노하우부터 리모델링에 이르는 방법까지 모두 담았습니다. 집안에 좋은 기(氣)를 불어넣는 풍수·사주인테리어 칼럼도 함께 합니다. 현재 ㈜드림젠 역학연구 담당 이사이고, 인터넷 포털에서 운세·작명 상담실을 운영하는 ‘혜원선생’이 도움말을 맡았습니다.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록그룹사운드 효시 ‘키보이스’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록그룹사운드 효시 ‘키보이스’

    가요평론가/저널리스트.1956년 충주에서 출생. 월간지 ‘여원’‘수정’ 등 취재기자를 거쳐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문화사 편집부장 역임. 현재 한국대중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한국가요작가협회 편집위원, 그리고 서울 wbs-FM 원음방송 ‘박성서의 가요사 5060닷컴‘과 부산 mbc ’박성서의 음악파일’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첫 록그룹 음반은 ‘빗속의 여인´이 아닌 ‘그녀 입술은 달콤해´ 지난 한해 가요계의 큰 변화 중 하나는 ‘포크’와 ‘그룹사운드 음악’을 주축으로 하는 이른바 ‘7080 음악’이 부활됐다는 것이다. 아울러 LP 음반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사상 최초의 음반은? 지금까지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신중현이 이끌던 그룹 ‘에드포’의 첫 앨범에 담긴 ‘빗속의 여인’을 꼽는다. 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필자가 취재한 결과 ‘키보이스’가 발표한 노래 ‘그녀 입술은 달콤해’로 확인됐다.‘에드포’‘코끼리 캄보’와 더불어 우리나라 록그룹사운드의 효시를 이루는 5인조 그룹 키보이스의 ‘그녀 입술은 달콤해’가 처음 취입, 발표된 것은 1964년 7월3일. 이는 ‘빗속의 여인’(64년말)보다 5개월 앞선다. 따라서 ‘그녀 입술은 달콤해’는 그룹사운드 최초이자 최고(最古)의 음반인 셈이다. 당시 키보이스의 멤버는 차중락(싱어), 김홍탁(리드기타), 옥성빈(리듬기타)), 차도균(베이스기타), 윤항기(드럼) 등이다. 이 라인업이 갖춰진 것은 1963년 늦가을. 이 음반의 실제 주인공들인 당시 키보이스의 멤버들을 직접 만나봤다. 멤버 중 차중락씨는 이미 고인이 됐고 옥성빈씨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김홍탁, 윤항기, 차도균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존재 자체를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필자가 제시한 음반과 그리고 당시 취입 날짜가 기록된 마스터 카드, 그리고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들려주자 이들은 매우 놀라워했고 어렴풋이나마 조금씩 당시 상황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설핀사운드(Surfin Sound)를 모방하는 그룹으로 출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 의거, 그리고 5·16으로 이어지는 60년대는 그야말로 격동의 연속이었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리버풀 출신의 비틀스가 요란스레 ‘I Wanna Hold Your Hand’을 외쳐대고, 롤링 스톤스가 폭발적이면서도 괴상한 불협화음으로 세계 젊은이들의 심장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의 60년대는 ‘보릿고개’ 시절이었다. 작가 김승옥의 단편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드러나 있듯 60년대 젊은이들은 현대에 동화되지도 못하고 전통에 대한 미련도 없는 우울한 세대였다. 가요사적 측면에서 보면 64년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대히트한 해로 61년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촉발된 신가요의 붐이 다시 트로트로 급선회한다. 그러나 이때 미8군무대를 중심으로 그룹사운드가 고고한 탄성을 알리며 ‘젊은이들만의 또 다른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미8군 무대를 통해 활동을 시작했던 키보이스는 ‘이미테이션(카피) 그룹’이었다. 비치 보이스와 비틀스의 노래·연주가 이들의 연습 테마였고 무대에서의 주요 레퍼토리였다. 때문에 이들의 초기 사운드는 ‘설핀 사운드’가 주류를 형성한다. 미국에서는 50년대 베이비붐 세대를 거쳐 풍요로운 60년대, 여유와 놀 거리를 찾던 틴에이저들에 의해 캘리포니아 사운드, 즉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가 열광적 지지를 받은 시기였다. 한국에 온 젊은 미군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키보이스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인지 ‘한국의 비틀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비틀스의 등장이 당시 각국의 록그룹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특히 기타 3대와 드럼만으로도 노래와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획기적으로 제시해 주었고 이것이 곧 세계 그룹사운드의 형태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5인조 키보이스 역시 초기에는 기타 셋, 그리고 드럼과 보컬로 구성됐다. 키보이스는 ‘Ky’에서 시작 키보이스의 태동은 가수 윤항기로 부터 시작된다. 윤씨의 회고. “해병대 군악대 복무 중이던 60년대 초 휴가때면 친구들과 어울려 록그룹의 꿈을 지폈지요. 그때 함께 어울렸던 멤버들이 나중에 키브러더스에 합세하는 김광정,‘김치스’의 리더가 되는 유희백 그리고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는 차도균이었습니다.” 차도균은 62년 KBS 신인 콩쿠르를 통해 발탁돼 작곡가 손석우로부터 곡을 받아 ‘타고난 팔자’ 등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당시 방송국 전속가수 제의를 마다하고 본인의 취향인 팝을 부르기 위해 미8군 무대에 나섰던 패기 넘치는 젊은 싱어였다. 보컬을 강화하기 위해 차도균은 사촌동생 차중락을 가세시키고 연습시절 함께했던 유희백이 떠난 자리에 ‘한국 기타의 파이오니아’로 일컬어지는 김홍탁을 불러들였다. 한국 록 역사에서 ‘김홍탁가(家)’라는 확실한 계보를 구축하는 김홍탁의 가세로 키보이스는 한국 록그룹 사상 가장 개인기가 출중한 초호화 라인업을 갖춘다. 이들이 처음 모여 사용한 그룹명은 ‘더 키즈’였다. 당시 미 8군쇼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은 이름 끝에 ‘키’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작곡가 손목인의 장남인 ‘후랭키손’, 그리고 신중현은 ‘잭키’,‘히키신’으로 통했다. 또 윤항기는 ‘항키, 차도균은 ‘도키’로 불리었다. 해서 이들은 처음 그룹명을 ‘더 키즈’로 정했으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보다 분명한 뜻을 가진 ‘Key(열쇠)’, 즉 ‘키보이스(Key boys)’로 팀 이름을 바꾼다. 한국 록의 1세대 키보이스는 미8군 쇼 가수들을 공급하는 업체 ‘대영’에 소속되면서 미8군 무대에 진입한다. 아울러 일반 무대로의 진출을 위해 발표한 노래가 바로 ‘그녀 입술은 달콤해(김영광 작사·곡)’였다. 이로써 당시 젊은 작곡가 김영광에 의해 마침내 우리나라에서도 록 스타일의 노래가 탄생됐던 것. 김영광의 곡이라는 점도 록 그룹사운드 역사상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당시 서울 장충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이들의 첫 음반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곡이 ‘정든 배는 떠난다’이다. 이 노래는 나중에 에보니스 나훈아 등에 의해 리바이벌된다. 첫 발표때 리드보컬은 가수 송기영이 맡았다. 송기영은 활동기간 동안 10여장의 음반을 발표했음에도 음반 어디에도 얼굴 사진이 공개된 적이 없다. 그래서 얼굴 없는 가수로 불렸다. 지금도 도대체 그가 누구였는지 가요계 관계자들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 지면을 통해 그의 실체를 비로소 밝히자면 바로 작곡가 김영광이었다. 이에 얽힌 에피소드와 비화는 후에 소개하기로 한다. 키보이스의 인기는 일반무대에서도 여전했다. 세시봉 디쉐네 등 음악감상실의 무대를 통해서 대중적 영향력을 과시했던 이들은 64년 여름 KBS-TV에 출연해 한국 최초의 록 그룹사운드임을 과시한다. 그해 12월 내한했던 영국의 5인조 록그룹 ‘리버풀 비틀스(리버풀5)’와 경복궁 합동공연의 파트너로 선정된 주인공 역시 키보이스였다. 이 공연은 프로모터가 오리지널 비틀스가 내한했던 것처럼 홍보해 사기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렵 부산 해운대에서 한국 록그룹사운드 사상 처음으로 단독 야외공연을 펼치며 인기를 얻는다. 초기 키보이스 멤버들은 모두 넉 장의 음반을 남기고 67년에 해체한다. 이후 윤항기는 71년 ‘키브러더스’를 결성하며 컴백했고 이후에도 솔로로 활동했다. 리드싱어 차중락은 66년 키보이스 시절 솔로로 발표하는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Anything That Part of You)’을 발표하면서 솔로로 전향했다. 이후 ‘사랑의 종말’ ‘철없는 아내’ 등을 발표하며 이듬해 가수왕에 등극했고 차도균 역시 67년 ‘가이즈 앤 돌스(Guys & Dolls)’에 잠시 몸담았다가 68년 12월 ‘꽃잎에 새긴 사랑’을 발표하며 다시 솔로로 전향했다. 스탠더드 팝보다 헤비메탈 사운드를 추구하던 김홍탁 역시 이후 ‘HE5’‘HE6’ 등을 거치면서 당대 최고 인기그룹으로 부상하며 그룹사운드 황금기를 주도한다. 이들 초기 멤버들은 키보이스를 떠나서도 솔로로, 그룹으로 각기 가요사에 큰 획을 그었다. 초기멤버 중 옥성빈만이 잔류하게 된 키보이스는 다시 조영조 장영 등과 함께 제2기 키보이스를 결성, 활동하게 된다. 키보이스의 대표곡인 ‘해변으로 가요’ ‘바닷가의 추억’ 등은 모두 2기 키보이스 시절의 발표곡들이다. 이들에 의해 굳건히 명맥을 이어온 키보이스는 이후로도 3,4기 등으로 이어지며 키보이스 계보를 이어간다. <계속>
  • 7080 추억의 설 풍경

    7080 추억의 설 풍경

    “세 밤 남았다, 두 밤 남았다.” 섣달 그믐날 밤이 왔습니다. 눈썹이 셀까 조바심에 눈꺼풀을 열심히 비빕니다. 아버지가 안타까웠는지 화롯불로 손짓합니다. 가래떡을 살짝 구워주시며 화장실 귀신, 참새 귀신, 처녀 귀신 얘기로 공포스럽게 합니다. 시간이 지나 동이 터오를 새벽녘에 그만 꾸벅 잠이 들었습니다. 때때옷이랑 새 신발을 손에 꼭꼭 쥔 채로…. 드디어 정월 초하루가 밝았습니다. 눈 비비고 일어나니 마당에 눈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 된 강아지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 블루스를 춥니다. 볏을 꼿꼿이 세우고 닭이 바짝 경계를 합니다. 백옥같이 흰 가래떡을 쑥쑥 썰던 어머니가 힐끔 쳐다보더니 “저것들도 명절인 줄 아는가벼.” 하면서 밤새 음식을 장만하느라 지친 몸을 달래 봅니다. 아버지가 어깨를 툭 치며 어서 가자고 손짓합니다. 이끌려 할아버지한테 세배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복주머니를 꼭꼭 쥔 채로…. 설날 저녁이었습니다. 삼촌이랑 건넛마을에 사는 친척 형제들이 세배하러 왔습니다. 아버지가 술과 음식을 권합니다.“느그들 명절엔 온갖 근심을 다 내려놓그라. 가족이 있어 이렇게 보는 게 얼마나 좋으냐.”고 몇 번이고 강조하십니다. 어머니는 “어여 많이들 먹어.”라며 분위기를 돋웁니다. 쌀밥과 쇠고기, 기름진 떡을 실컷 먹었습니다. 이날 밤처럼 변소간을 자주 들락거린 적이 없었습니다. 신문지를 찢어가며 손에 꼭꼭 쥔 채로…. 자라서 나중에 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졌습니다. 똥개 ‘도그’와 올가미에 걸린 꿩을 잡으러 갔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꿩은 해산한 순이 엄마한테 갖다 주라던 어머니 말씀에 막 울었던 나의 살던 고향이 그립습니다. 성질부려 흘리는 코를 손으로 닦아주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좋아했던 술을 줄여 동네 꼬마 장애인에게 휠체어를 설 선물로 주었던 아버지의 모습에 새삼 머리 숙여집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설 명절이 왔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고향은 늘 아무 조건없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들뜨고 설레는 마음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손가락으로 ‘세 밤’‘두 밤’을 헤아렸던 아이가 “고향 가면 할아버지 산소에 가야지.” 하는 얘기에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독자 여러분 올해는 더욱 가족을 챙기시고 꼭꼭 부자되세요∼. WE팀
  • 연말 공연 풍성 사다리 타보세요

    연말 공연 풍성 사다리 타보세요

    # 올나잇!올나잇! 역시 12월 마지막 날은 밤을 새우며 카운트 다운과 함께 새해를 맞는 것이 제격.YG 패밀리 소속 가수들이 3년째 계속하고 있는 브랜드 공연 ‘원 콘서트’가 31일 밤 자정부터 새해 1일 오전 6시까지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위 아 원 & 넘버 원(We Are One & No.1)’이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이번 무대엔 세븐, 휘성, 렉시, 지누션, 원타임, 빅마마, 거미 등 기존의 톱가수는 물론 스토니 스컹크,45RPM, 소울 스타 등 올해 데뷔한 신인들이 참여해 뜨거운 무대를 선사한다. 최근 공익 근무를 마치고 ‘소집해제’된 싸이는 23∼24일 부산 벡스코에서,29∼31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싸이 올나잇스탠드- 에너지나잇’ 공연을 갖는다. 싸이 특유의 노래와 춤, 걸쭉한 입담으로 파워 넘치는 화끈한 무대를 만들 계획. # 열정의 밤 ‘슬픈 언약식’의 가수 김정민과 전 플라워 멤버 김우디·고성진으로 구성된 3인조 밴드 ‘리플레이’가 30∼31일 서울 삼성동 섬유센터 이벤트홀 3층에서 첫번째 콘서트를 연다.‘Crazy Tonight’이라는 타이틀의 이번 콘서트는 단순히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연이 아닌, 함께 즐기며 팬들과 하나가 되는 무대.1집 수록곡과 역대 히트곡 이외에 김정민의 고난도(?) 춤 등 신나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02)567-1318. MBC ‘10대 가수 가요제’의 본상 수상을 거부해 화제가 되고 있는 올해 최고 인기 그룹 ‘SG워너비’가 30일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한해를 마무리하는 무대를 갖는다.‘죄와벌’‘살다가’ 등 히트곡과 리메이크 앨범에서 선보인 ‘내마음의 보석상자’등 향수 어린 음악 등을 들을 수 있다. 자우림도 31일 밤부터 새해 1일 새벽 1시까지 서울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MIDNIGHT EXPRESS 2005-2006’ 타이틀의 올나잇 콘서트를 연다. 기존 대표곡과 5.5집의 수록곡 등 다양한 노래들을 선보인다. 힙합 뮤직의 대부와 전도사를 표방하는 바비킴과 부가킹즈가 30~31일 홍대앞 롤링홀에서 ‘Don’t worry Be happy’라는 타이틀의 콘서트를 갖는다. 관객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스탠딩 공연으로 진행된다.11시 공연은 콘서트 도중 새해를 맞이하는 이벤트도 선보인다.(02)747-1253. 안치환과 자유는 28∼30일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Happy Ending 2005’ 콘서트를 마련했다.‘내가 만일’‘사랑하게 되면’‘광야에서’ 등 히트곡을 새롭게 편곡해 들려준다.(02)747-1252. # 추억의 밤 30∼3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대서양홀에서 열리는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의 ‘더 신승훈 쇼’는 추억의 무대. 데뷔 15년을 맞는 신승훈은 이번 콘서트에서 ‘미소 속에 비친 그대’ ‘보이지 않는 사랑’ ‘그 후로 오랫동안’ 등 1990년대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들을 총망라해 선보인다. 또 히트곡들에 얽힌 비화도 데뷔 이후 처음으로 공개한다. 20일까지 서울 능동 돔아트홀에서 열리는 ‘7080 빅콘서트-반갑다 친구야’는 386세대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할 무대.‘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송골매,‘나 어떡해’의 샌드페블즈,‘그대로 그렇게’의 휘버스,‘불놀이야’의 옥슨80,‘구름과 나’의 블랙테트라,‘젊은 미소’의 건아들,‘연’의 라이너스,‘바다에 누워’의 높은음자리,‘희나리’의 구창모,‘내가’의 김학래,‘잃어버린 우산’의 우순실 등이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노래한다.(02)780-0603.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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