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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시각] 세상을 바꾸는 1000개의 직업/주현진 사회2부 차장

    [데스크 시각] 세상을 바꾸는 1000개의 직업/주현진 사회2부 차장

    ‘세상을 바꾸는 1000개의 직업’.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1년 10·26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 직전에 펴낸 책이다. 우리 사회 이민자들을 위한 다문화 기업 기획자, 유통 마진을 없애면서도 농촌을 돕는 친환경 상품 디렉터, 에너지 사용 요금을 줄여 주는 에코 라이프 디자이너, 이웃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디자인하는 코하우징 전문가, 각종 공유경제 사업가 등 1000개의 신종 일자리를 제시했다.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들어가려 하지 말고 ‘아름다운 가게’처럼 세상을 바꾸는 착한 일을 하면서도 돈은 돈대로 버는 직업을 꿈꾸라는 이야기였다. 검사에서 인권 변호사를 거쳐 1995년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시작으로 16년 가까이 시민사회를 이끌어 온 그의 가치관이 오롯이 담겨 있다. 실제로 박 시장이 서울시장이 된 뒤 이 ‘착한 일자리’들은 시정 곳곳에서 구현되고 있다. ‘찾동’(찾아가는 동사무소) 서비스는 공무원들을 발로 뛰는 복지 플래너로 만들어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고 있다. 2012년부터 5년간 확충·승인한 국공립 어린이집은 직전 시장(46개) 때보다 16배 이상 많은 761개로 늘렸다. 청년 창업인들의 일자리와 주거 공간을 동시에 마련한 임대아파트 사업에도 열을 내고 있다. 나눔 가치가 핵심인 공유경제 등의 글로벌 의제를 잘 구현했다며 영국 가디언지로부터 ‘세계 5대 혁신시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서울의 발전 패러다임을 토목 개발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꾼 것이다. 박 시장이 말한 착한 일자리는 서울 25개 구의 생활정치 속에서도 계승 발전하고 있다. 구로구가 최근 국내 귀화 외국인을 상대로 내놓은 ‘원스톱 개명 서비스’는 다문화 배려 정책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강동구가 한 건설기술 업체로부터 후원을 받아 컴컴한 반지하 저소득 가구에 200만원 상당의 자연 채광 장치를 설치해 주는 사업은 ‘햇살복지’라는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다. 박 시장이 촛불시위 기간에 펼친 행정 서비스는 그가 책에서 말한 ‘주민 소통 전문가’의 진수를 보여 줬다. 그는 우선 백남기 농부를 사망에 이르게 한 물대포를 사용할 수 없도록 경찰의 서울시 소화전 사용을 금지했다. 지난해 10월 말 시작한 촛불집회 참여자가 100만명을 훌쩍 넘긴 제3차 촛불시위(11월 12일)부터 집회 현장에 서울시 직원 1만 5000여명을 투입해 시민 안전을 챙겼다. 광화문 인근 건물을 설득해 200개가 넘는 화장실을 개방했다. 귀가 교통 편의를 위해 임시 지하철을 투입하고 버스 운행 시간도 연장했다. 박 시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 낸 1등 공신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돌이켜 보면 박 시장은 세상을 바꾸는 1000개의 신종 일자리를 지난 6년여간 곳곳에 안착시켰다. 좋은 가치들을 생활 정치, 생활 정책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다만 박 시장이 책에서 세상을 바꾸고 디자인하는 일은 원래 공무원의 영역이라고 적시했듯 이번 ‘장미 대선’을 이끈 행정 서비스도 시장의 당연한 서비스라고 스스로 평가할 것 같다. 박 시장은 숲을 생각하면서 나무를 심고 있다지만, 시민은 시장이 나무만 심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7년째 지지부진한 뉴타운·재개발 문제로 불만들이 쌓이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대선이든 서울시장 3선이든 정치인으로서 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섬세한 행정 외에 청계천 복구와 같은 기념비적 대형 과제도 고민해 봐야 한다. 박 시장이 심은 나무들이 그려 낸 큰 숲의 모습을 하루빨리 보여 주길 바란다. jhj@seoul.co.kr
  • [씨줄날줄] 권한대행 사회/이동구 논설위원

    [씨줄날줄] 권한대행 사회/이동구 논설위원

    부모 자식 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게 권력이라고 했다. 이방원을 비롯해 역대 조선 왕들 가운데는 왕위를 지키려고 부모 형제, 심지어는 자식까지도 무참히 제거했다. 최근 북한의 김정은이 자신의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한 것도 이와 유사한 사례로 꼽히지 않을지. 모두가 권력이 특정인에게 집중된 전제 군주국이나 이와 유사한 독재 국가에서나 일어날 일들이다.작금의 대한민국은 권력을 합법적으로 대신 행사하는 권한대행이 대유행이다. 대통령 권한대행,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법무부 장관 직무대행,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직무대행 등 국가를 통치하는 상층부 권력기관의 상당수가 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최순실 국정 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빚어진 현상이다.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다. 바른정당은 대통령 파면 이후 주호영 원내대표가 대표 권한대행을 맡고 있고 자유한국당은 비상대책위원회가 가동 중이다. 심지어는 이화여대, 성신여대 등 상아탑에서조차 직무대행이 운영을 맡고 있다. 포천과 하남시, 해남과 괴산군 등 지자체에서도 대행 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없다.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는 상황은 우리 현대사에서 9번이나 반복됐다. 4·19혁명으로 허정 당시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고, 5·16 군사 쿠데타로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10·26 때에는 당시 최규하 총리가 권한대행에 올랐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됐을 때는 고건 당시 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대부분 혁명이나 쿠데타, 탄핵 등 굴곡진 현대사와 함께 등장한 것이다. 현재의 황교안 권한대행은 역사상 첫 대통령 탄핵을 직접 지켜본 대행이 됐다. 남을 대신해 무엇을 이뤄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대역 배우처럼 어렵고, 위험한 일을 대신하지만 정작 자신의 업적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게 특징이다. 권력을 대신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이 쌓아 올렸거나 쟁취한 권력이 아니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임기가 보장되지 않은 한시적인 역할이니 이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받기란 더욱 어렵다. 황 권한대행의 처지 또한 이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황 권한대행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에 국정 책임을 지고 있다. 대통령 탄핵으로 국민은 사분오열돼 있고,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의 압력에다 경제 상황까지 예사롭지 않다. 다가올 대선을 제대로 치러야 하는 책무까지 부여받았다. 수습해야 할 국정 현안이 태산이다. 내우외환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대한민국호를 구해야 하는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각오가 필요한 권한대행이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대통령의 딸 → 첫 탄핵대통령… 몰락한 20년 정치인생

    대통령의 딸 → 첫 탄핵대통령… 몰락한 20년 정치인생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 대통령’이라는 오명의 주인공이 됐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까지 올랐던 화려한 정치 인생을 마감하고 쓸쓸하게 자연인 신분으로 돌아가게 된다.박 전 대통령은 1952년 2월 2일 경북 대구 삼덕동의 한 셋방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맏딸로 태어났다. 당시 35세였던 아버지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 제1정보과장이었고, 27세의 어머니 육영수는 중등학교 교사 출신이었다. 그녀의 평범한 삶은 10세가 되던 1961년 5월 16일 완전히 달라졌다. 아버지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제5대 대통령이 됐고,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의 딸, 영애(令愛)가 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의 운명은 1974년 또 한 번 뒤바뀌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육 여사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해 서거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비극의 첫 시작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영문도 모른 채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박 전 대통령은 자서전 등을 통해 “온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당시 심정을 회상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5년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발단이 된 최태민씨와 인연을 맺은 것도 이때였다. 최태민은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활동에 주력하던 박 전 대통령에게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 근혜양을 도와주라고 했다”는 편지를 쓰며 접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9년 10월 26일, 이른바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그녀는 또다시 비극을 맞았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피 묻은 아버지의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직접 빨면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 재임 당시 측근들이 하루아침에 자신과 동생들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적은 일기들에는 특히 사람들의 배신에 대한 언급이 많다.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달리 먹고 배신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진정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어차피 약한 인간이기에 차츰 권세와 명예와 돈을 따라 마음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1981년 8월)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씨에 대해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40년 가까이 자신의 곁에 두고 의지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최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대통령님이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굉장히 강한 분이었기 때문에 제게 많이 의지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이후 대국민 담화에서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로 순식간에 ‘야인’이 된 박 전 대통령은 18년간 은둔 생활을 했다. 이후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금융위기를 계기로 정치에 입문한다. 1998년 4월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여의도로 입성했으며 19대 때까지 5선 의원을 지냈다.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해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키면서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다졌다. 박 전 대통령은 2년 3개월 동안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며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했다. 또 대표 시절 치른 거의 모든 선거에서 승리하며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직전 서울 신촌에서 유세를 하던 중 습격을 당한 박 전 대통령이 의식을 회복한 직후 꺼낸 “대전은요?” 발언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여권의 유력 대권 주자로 우뚝 선 박 전 대통령은 16대 대선과 17대 대선에서 두 차례 대권에 도전했지만 매번 당내 경선에서 패배하며 본선에는 오르지 못했다. 2007년 당내 경선 과정에서 ‘최태민 스캔들’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18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2월 25일 야심 차게 임기의 첫발을 뗐다. 하지만 임기 내내 끊임없는 대내외 악재에 시달리며 국정운영에 수차례 위기를 겪었다. 취임 첫해에는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를 시작으로 장차관급 고위공직자 후보들이 사퇴하거나 낙마하면서 ‘인사 난맥’을 겪었다. 같은 해 5월 미국 순방 도중 벌어진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문 사태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고는 정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번 탄핵 사유에도 포함된 박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을 비롯해 정부의 무능한 대처는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11월에는 최씨의 전남편인 정윤회씨의 비선 실세 의혹이 터진 데 이어 이재만·정호성·안봉근 전 비서관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 논란이 불거졌다. 박 전 대통령은 이를 ‘찌라시’ 수준으로 규정했지만 파장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2015년 온 국민을 공포에 몰아넣은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위기대응능력 부재로 질타를 받았다. 또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16년 만에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가 형성되면서 박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 동력도 위기를 맞았다.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국회를 방문해 ‘개헌 카드’까지 꺼내며 국면 전환을 노렸지만, 비선 실세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포함해 총 세 차례 대국민 담화를 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저는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가족 간의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 왔다”면서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들을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순실씨로부터 도움받게 됐고 왕래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풍문으로 나돌던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관계가 최씨의 태블릿PC 등으로 드러나는 등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면서 국민적 퇴진 요구에 직면했다. 야 3당은 지난해 12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고, 국회 본회의에서 234표로 가결됐다. 박 전 대통령은 관저 칩거 생활 속에서 명예 회복을 위해 헌법재판소 탄핵심판과 특별검사 수사에 총력 대응했다. 탄핵 소추 의결 이후 92일 만에 열린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에서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 파면’ 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은 총 5년의 임기 중 1년에 조금 못 미치는 351일을 남겨두고 대통령의 자리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게 됐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5년 만에 당사 찾은 홍준표 “탄핵심판 후 대국민 사과해야”

    5년 만에 당사 찾은 홍준표 “탄핵심판 후 대국민 사과해야”

    인 “당에 오셔서 역할 해달라”… 홍, 당원권 회복 문제도 논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하루 앞둔 9일 홍준표 경남지사와 자유한국당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이 회동했다.이날 여의도 한국당 당사를 찾은 홍 지사가 인 위원장에게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비대위원장을 중심으로 당을 끌어 주니 참 감사하다”고 덕담하자 인 위원장은 “우리 당에 오셔서 역할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화답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홍 지사의 당사 방문은 2011년 12월 ‘10·26 재보선 참패’와 ‘디도스 파문’에 책임을 지고 한나라당(현 한국당) 대표를 전격 사퇴한 이후 5년 만이다. 이후 비공개로 진행된 회동에서 홍 지사는 탄핵 이후의 해법을 묻는 인 위원장에게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당 대표로서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회동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최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벗은 홍 지사에게 대선 출마의 마지막 걸림돌인 당원권을 회복시켜 주기 위한 수순으로 보고 있다. 홍 지사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되면서 당헌·당규에 따라 당원권이 정지된 상태다. 당 관계자는 “홍 지사의 당원권 정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윤리위원회를 소집하는 방안 등 탄핵 이후 정국을 대비한 움직임들이 당내에서 논의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국당으로서는 당내 ‘유의미한’ 대선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홍 지사의 출마를 통해 야권 주자 쪽으로 기울어진 ‘대선 운동장’을 흔들어 보려는 속셈이 엿보인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탄핵심판 D-1…홍준표 “좌파 광풍, 탄핵심판 결론나면 달라질 것”

    탄핵심판 D-1…홍준표 “좌파 광풍, 탄핵심판 결론나면 달라질 것”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10일로 예정된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에 대해 “기각되든 인용되든 (한국당은)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이 옳다”고 인명진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조언했다. 특히 홍 지사는 “국민이 이 우파 정부를 불신했지만, 우파 전체를 불신한 것이 아니다”며 “지금은 ‘좌파 광풍’ 시대다. 탄핵심판 결론이 나면 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홍 지사는 9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를 찾아 인 위원장 등 당 지도부와 만났다. 홍 지사는 2011년 12월 ‘10·26 재보선 참패’와 ‘디도스 파문’에 책임을 지고 한나라당(현 한국당) 대표를 전격 사퇴한 이후 5년여 만에 처음 당사를 방문했다. 홍 지사는 당사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비대위원장을 중심으로 당을 끌어주니 참 감사하다”는 소회를 밝혔다. 홍 지사는 대표직 사퇴 당시 맸던 것과 비슷한 붉은색 넥타이를 맸다. 인 위원장은 홍 지사에게 “저희 당에 오셔서 역할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 지사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되면서 자신이 대표 시절 마련했던 당헌·당규에 따라 당원권이 정지된 상태다. 당원권이 정지된 사람은 당 대선 후보가 될 수 없다. 홍 지사는 지난달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검찰이 상고하면서 무죄가 확정되지는 않았다. 당 안팎에선 ‘사실심’인 항소심 무죄로 사실상 그의 혐의가 벗겨진 만큼 당 지도부가 당헌·당규상 특례에 따라 홍 지사의 당원권을 회복시켜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홍 지사는 “때가 되면 (당원권 문제는) 자동적으로 정리가 될 것”이라면서도 인 위원장에게 “때가 되면 당비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원권이 정지된 상태에선 당비를 내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인 위원장은 웃으면서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고 홍 지사가 면담 직후 기자들에게 전했다. 인 위원장은 “지사님이 다 말씀하셨다”며 기자들의 질문에도 답변하지 않았다. 인 위원장은 지난달 28일 경남 창원을 방문했을 때 홍 지사와 오찬을 함께했다. 당시 오찬 이후 이날이 두 번째 만남이다.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박 대통령, 탄핵 인용되면 23년 산 삼성동 집 판다…이후 어디로?

    박 대통령, 탄핵 인용되면 23년 산 삼성동 집 판다…이후 어디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 결정 선고일이 10일 오전 11시로 정해졌다. 아직 탄핵심판 결과는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헌법재판소의 변론기일이 진행되면서 이달 초 선고가 유력하다는 전망이 많이 나왔던 터라 청와대는 물밑으로 박 대통령이 퇴임 후 머물 거주지를 물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헌재가 만약 탄핵을 인용할 경우 박 대통령은 즉시 ‘현직’에서 ‘전직’으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대통령이 청와대에 거처하는 것에 대한 법적인 근거 규정은 없다. 대통령직을 상실하면 청와대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언제까지 짐을 빼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탄핵시 청와대에서 바로 나와야 하는 게 원칙이지만 이삿짐 정리 등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재직 중 헌재의 탄핵결정을 받아 퇴임할 경우를 대비해 청와대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박 대통령의 사저를 매각하고 경기도 모처의 새 사저를 물색 중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박 대통령은 삼성동 사저에 1990년부터 2013년 2월 25일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약 23년 동안 거주했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0·26 사태로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 서울 신당동 집으로 이사갔다. 이후 1982년 성북동, 1984년 장충동에서 1990년 현재의 삼성동으로 이사했다. 박 대통령의 ‘40년 지기’ 최순실(61·구속기소)씨의 측근인 류상영 전 더블루K 부장이 최씨 소유의 강원도 평창 땅을 박 대통령이 퇴임 후 사용할 사저 부지라고 언급하면서 “부지 가봤어? 거기가 사실 아방궁이 될텐데…. 맨 끝이 VIP가 살 곳이야”라고 말하는 녹음 파일이 지난달 21일 법정에서 공개된 바 있다. 과연 박 대통령의 퇴임 후 청와대의 이삿짐 차량이 과연 어디로 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9일 동아일보는 삼성동 사저 인근 주민들과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 등의 말을 종합해 “지난달 말 청와대 직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사저와 주변 건물의 매물 시세를 파악하고 갔다”고 보도했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한 부동산중개업소 사장은 “30, 40대 남성 3명이 사저 등 인근 건물 5곳의 가격을 묻고 갔다”면서 “그중 매물로 나와 있는 한 곳은 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 경호동으로 쓰였던 건물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주로 사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3층 이상 건물을 찾았다. 중개업소 사장은 “‘청와대 경호실에서 나왔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고 전했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로 ‘정치적 고향’인 대구 달성군 등 TK지역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고향이 있는 충청 지역 등에 새 사저를 마련하는 방안을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서울에서 주로 생활해 온 박 대통령이 서울에서 먼 지방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어렵다고 결론을 내리고, 경기도 모처에 새 사저를 마련하기로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현행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전직대통령법)엔 대통령이 재직 중 탄핵심판으로 퇴임(파면)될 경우 비서관 채용이나 연금 등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돼 있지만 경호·경비는 예외다. 따라서 사저 옆엔 경호동이 있어야 하고 사저 자체도 주변 민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야 한다. 그런데 삼성동 사저의 경우 지금 상황으로는 재건축 수준의 공사를 하지 않으면 경호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탄핵이 기각되면 청와대는 삼성동 사저 자리에 새 건물을 짓기로 한 기존 계획을 그대로 실행할 방침이다. 청와대는 1983년에 지어져 노후화된 삼성동 사저를 허문 뒤 박 대통령과 비서관들이 머물 방과 사무실이 있고 전직 대통령 경호·경비에 적합한 새 사저와 경호동을 신축할 계획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최순실 독일 체류 중 ‘보이스톡’ 사용…옷과 약 보내라해”

    “최순실 독일 체류 중 ‘보이스톡’ 사용…옷과 약 보내라해”

    ‘비선 실세’ 최순실(61·구속 기소)이 국정농단 사건이 보도되자 카카오톡의 인터넷 전화인 ‘보이스톡’을 이용해 측근들과 통화한 것으로 확인됐다. 24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최씨는 지난해 10월 중순 조카 이모씨(40)에게 보이스톡으로 연락해 “지금 독일에 있다. 바로 한국에 들어갈 상황이 안된다. 한국에 있는 옷과 약을 챙겨 보내달라”고 했다. 부탁을 받은 조카 이씨는 개인 사정으로 독일에 가지 못했고 대신 최씨의 측근인 김영수 전 포레카 대표가 독일에 갔다. 최씨는 김 전 대표에게도 보이스톡으로 전화해 이것저것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표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최씨 소유 빌딩 경비실에서 맡겨놓은 짐을 받아 출국 준비를 했다. 짐 꾸러미에는 옷과 약 외에 휴대전화와 인터넷 전화기 여러 대가 포함돼 있었다. 김 전 대표는 당시 독일 현지에 몰려있는 한국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스위스를 거쳐 독일로 들어갔다. 김 전 대표는 지난해 10월22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1박을 한 뒤 렌터카를 타고 독일 뮌헨으로 가 24일 한 호텔에서 최씨를 만났다. 당시 기자들은 최씨 모녀가 거주했던 프랑크푸르트 일대를 뒤지고 있었고 최씨는 그 사이에 프랑크푸르트에서 375㎞ 떨어진 뮌헨으로 도피 행각을 이어갔다. 김 전 대표는 10월26일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때도 독일이 아닌 체코 프라하를 출발지로 택했고 그로부터 나흘 뒤인 10월30일 최씨는 브리티시에어라인 항공편으로 영국 히드로 공항을 출발해 인천공항으로 귀국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그레그 전 미국대사 “5·18 북한군 개입설 슬퍼…깡패같은 우익”

    그레그 전 미국대사 “5·18 북한군 개입설 슬퍼…깡패같은 우익”

    도널드 그레그(사진·90) 전 주한 미국대사가 공개 서한을 통해 “한국에서 아직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해 매우 슬프다”고 밝혔다. 5·18 기념재단은 그레그 전 대사가 20일(한국시각) 오전 재단 앞으로 ‘5·18 북한군 개입설’을 유포하는 일부 우익 세력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자우편을 보냈다고 이날 밝혔다. 재단에 따르면 그레그 전 대사는 4∼5줄 분량으로 보낸 전자우편에서 “5·18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전 세계 사람이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레그 전 대사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국대사로 일했다. 그에 앞서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책임자를 지낸 경험이 있다. 김양래 재단 상임이사는 “그레그 전 대사는 ‘한국의 우익이 깡패 같은 우익’이라고 표현했는데 경우에 따라 ‘도둑’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했다”면서 “우리 정부가 국민에게 5·18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보도했다. 재단은 최근 그레그 전 대사에게 ‘5·18 당시 북한의 군사행동 기미가 없었다’고 확인한 CIA 기밀해제 문건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다. 앞서 CIA는 지난달 19일(현지시간) 1300만쪽에 달하는 93만 건의 기밀 해제 문서를 온라인에 공개했다. 이 중에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비밀 문건들도 포함돼 있었다. 1980년 5월 9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비밀문건에는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한 어떤 군사행동도 취하는 기미가 없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10·26 사태)과 12월 12일(12·12사태)의 사건에 무척 놀라고는 있다’는 동향보고가 기록돼 있다. 같은 해인 1980년 6월 2일 미 국가정보위원회(NIC) 극비 문서에는 ‘현재까지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행동이, 전두환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그것이 알고싶다’, 2011년 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 파헤친다

    ‘그것이 알고싶다’, 2011년 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 파헤친다

    SBS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가 이번엔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홈페이지가 디도스(DDoS·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을 받은 사건, 이른바 ‘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은 과거에 디도스 공격을 실행한 해커 강모씨가 당시 친한 목사에게 쓴 자필 편지를 입수해 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을 사주하고 조종한 ‘검은 배후’의 존재를 추적하게 됐다고 11일 밝혔다. 이 사건 발생 당시 붙잡힌 범인들은 놀랍게도 대구에서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던 20대 해커들이었다. 그런데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이들에게 공격을 지시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온 국민들은 경악했다. 일명 ‘진주팀’ 이라는 이 해커들은 최구식 한나라당 의원의 수행비서관인 공현민씨의 지시를 받고 손쉽게 선관위 홈페이지에서 투표소 검색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수행 비서관인 공씨가 독자적으로 이런 일을 꾸몄을 리 없으며 분명히 ‘윗선’의 개입이 있을 거라는 의혹이 쏟아졌고, 결국 특별검사팀(박태석 특별검사)까지 꾸려졌다. 그러나 특검팀은 3개월의 수사 기간 끝에 “윗선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구식 의원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자 디도스 공격사건 배후를 밝히는 것은 ‘신의 영역’ 이라는 말만 남긴 채,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 되는 듯 했다. 하지만 범행을 실행한 해커 강씨가 당시 친한 목사에게 쓴 자필 편지를 제작진이 입수했다. 편지에는 아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목사님. 저는 이렇게 범죄를 저지를 때에도 아무 대가 없이 이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속되어서부터 특검을 받기까지와 지금도 계속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인지요?” 제작진은 이 대목에서 ‘이용되었다’는 말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이용되었다’ 는 말은 이 판을 기획한 제3의 설계자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라면서 “과연 대구에 거주하던 ‘진주팀’이 서울시장선거에 개입한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취재 과정에서 제작진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비서관 공씨와 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을 감행한 해커들과의 관계가, 서울시장 보궐선거로부터 약 6개월 전 실시된 경남 김해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묘하게 관련돼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당시 김해을 선거구는 경남 지역에서도 진보 진영이 상대적으로 우세한 지역구였다. 김태호 당시 한나라당 의원 측과 이봉수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 측 두 진영에서는 젊은 유권자들이 집중되어 있던 장유 신도시를 선거구 내 주요 공략 대상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유 신도시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일한 통로인 ‘창원터널 통행’을, 선거 당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것이 제작진의 설명이다. 이른바 ‘터널 디도스 사건’이다. 제작진은 터널 디도스 사건의 배후를 폭로한 손인석씨를 만났다. 손씨는 전 새누리당 청년위원장으로, 당시 선거를 둘러 싼 진흙탕 싸움을 낱낱이 밝혔다. 손씨의 진술서에 따르면, 당시 한나라당 중앙당의 요청으로 자신이 김태호 후보 캠프 측에 1억원을 전달했는데, 이 돈이 이 젊은 직장인들의 투표 참여를 방해하기 위해 창원터널에서 허위공사를 하는 데 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씨의 자필 편지를 받은 목사는 “2011년 4월 어느 날 밤에 강씨가 밤에 왔다고 들었다. 이 밤에 어디 갔다 왔냐 했더니 강씨가 하는 말이 김해 갔다 왔다고 했다. 김해는 왜 갔냐 했더니 김태호 선거캠프에 갔다 왔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의 풀리지 않은 의혹들을 파헤치고, 이 사건의 배후와 관련된 단서들을 추적해 현 시국에 반드시 다시 돌아봐야할 ‘선거’ 와 ‘민주주의’ 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고 밝혔다. 방송은 이날 밤 11시 5분에 전파를 탄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김재규 재조명한 ‘그것이 알고싶다’…“온전하지 못한 역사일 수 있다”

    김재규 재조명한 ‘그것이 알고싶다’…“온전하지 못한 역사일 수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21일 방송된 ‘암살범의 압수리스트 : 미인도와 김재규’ 편을 통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해 재조명했다. 26년째 위작 논란이 진행 중인 ‘미인도’는 천경자 화백의 1977년 작품으로 1991년부터 26년 간 ‘위작’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위작’으로, 천 화백 측은 ‘위작’으로 주장하는 가운데 과학 감정 결과도 상반됐다. 프랑스 감정기관인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는 위작, 국내 검찰과 국과수는 진작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천 화백 본인과 유가족 모두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국내 기관에서만 늘 ‘진작’이라는 결론이 나는 배경에 대해 추적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감정시장이 자신들의 위치를 위해 △김재규 전 부장을 부정축재자로 만들기 위해 이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검찰은 천 화백의 ‘미인도’가 진작이라는 증거로 김 전 부장의 환수재산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 천 화백과 가장 많은 그림을 거래한 화랑 대표와 김 전 부장 개인비서 최종대 씨의 증언을 통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김 전 부장이 매우 검소하게 살았는데 국가가 압수한 재산 목록이 너무 많았고, 이때 합동수사본부는 집에 있던 낡은 집기까지 챙겨갔다는 주변 증언을 전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공금 10억원을 횡령했다는 등 김 전 부장을 부정부패한 인물로 그리는 데 기여했다. 제작진은 “10·26 당시 김재규 곁에서 그를 돕다 함께 사형당한 이들은 5명이다. 그들은 다시 그 순간이 와도 상관 김재규의 명령을 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형 집행 전날 김재규는 가족들에게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 부하들의 가족을 챙겨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김 전 부장은 독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을 저격했다고 밝혔으나 이는 당시 언론에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합동수사본부는 김 전 부장이 정책 건의 면에서 대통령에게 불신받았고 업무 집행상 무능으로 질책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제작진은 “신군부가 짠 ‘부정축재자의 정권 찬탈 시도’라는 프레임에 갇혀 (김재규라는 인물이 제대로)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다”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김재규의 모습은 정권을 잡은 승자들이 독식해 벌인, 온전하지 못한 역사의 한 부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미국 CIA 비밀 문건 공개...“5·18 당시 북한군 개입 기미 없었다”

    미국 CIA 비밀 문건 공개...“5·18 당시 북한군 개입 기미 없었다”

    19일(한국시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300만쪽에 달하는 93만 건의 기밀 해제 문서를 온라인에 공개했다. 이 중에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비밀 문건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 문건들은 북한군이 5·18 민주화 운동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국내 일부 극우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5·18 민주화 운동 북한군 개입설’이 일방적인 역사 왜곡이고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5·18 기념재단은 20일 오전 광주 서구 쌍촌동 기념재단 시민사랑방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CIA가 지난 18일(한국 시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비밀문서(TOP SECRET) 일부를 번역해 공개했다. 재단이 공개한 문건은 5·18 민주화 운동을 전후로 미 정부가 소집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국가정보위원회(NIC)에서 만든 기록물이다. 1980년 5월 9일 미 NSC의 비밀문건에는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한 어떤 군사행동도 취하는 기미가 없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10·26 사태)과 12월 12일(12·12사태)의 사건에 무척 놀라고는 있다’는 동향보고가 기록돼 있다. 10·26 사태는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씨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이고, 12·12 사태는 당시 군부 실세였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군사 쿠데타를 가리킨다. 같은 해인 1980년 6월 2일 미 NIC 극비 문서에는 ‘현재까지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행동이, 전두환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어 ‘북한은 지속적으로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주장해 왔지만 북한의 전쟁도발 억지력을 가진 것은 미 육군이 아니라 미 공군과 해군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시 미국이 보여준 미 공군과 해군의 파워에 북한은 겁을 먹었고, 이는 1980년 사태(5·18 민주화 운동)에도 북한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고돼 있다. 김양래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보수단체가 주장하고 있는 5·18 민주화 운동의 북한군 개입을 완전히 반박할 수 있는 자료”라면서 “5·18 민주화 운동의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재단 측은 위 두 문건이 ‘5·18 민주화 운동은 북한군 선동에 발생한 폭동’이라는 극우 논객 지만원(75)씨 등의 주장에 합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증거라고 보고 있다. 김 상임이사는 “미국의 정보력에 대한 신뢰와 최상층이 공유하는 회의에서 나온 정보임을 고려하면 이를 넘어서는 수준의 다른 자료가 당분간 나올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재단을 비롯한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단체들은 지씨와 인터넷 신문 ‘뉴스타운’ 등 5·18 민주화 운동 왜곡 세력을 상대로 제기한 민·형사 소송 담당 재판부에 해당 문건을 증거자료로 제출할 방침이다. 지만원씨는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북한에서 침투한 간첩이라고 비방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로 지난달 28일 불구속 기소됐다. 지씨는 또 지난해 4월에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북한 특수군’이라고 허위 사실을 퍼뜨린 혐의(명예훼손)로 불구속 기소돼 서울중앙지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이임을 앞둔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는 지난 18일 광주 서구 5·18 기념공원을 방문해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미 CIA가 작성해 본국에 보고한 총 301쪽 분량의 5·18 관련 문서 89건을 5·18 기념재단에 전달한 바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씨줄날줄] 청와대 경호실 격하 논란/최광숙 논설위원

    [씨줄날줄] 청와대 경호실 격하 논란/최광숙 논설위원

    노태우 전 대통령은 관저에서 오전 8시 집무실로 등청했다. 이후 경호실장으로부터 첫 보고를 받았다.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독대해 국정보고를 하는 것이 상식일 듯하지만 경호실장이 ‘1순위’였다.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들이 신변에 관한 보고를 중요시한 탓도 있지만 경호실장이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첫 독대자부터 확 바꿨다. DJ가 관저를 출발한다는 연락이 오면 비서실장이 본관 현관에서 기다렸다가 대통령과 함께 집무실로 같이 가 전날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다룬 국정 현안 등을 보고했다. 국정 최고의 책임자인 대통령은 경호실장에 앞서 비서실장으로부터 국정에 관한 보고를 받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었다. 사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경호실장의 위세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막강했다. 권력자의 지근 거리에서 ‘귀’를 사로잡고, 게다가 ‘돈’까지 주물렀으니 대통령 다음의 2인자나 다름없었다. 권력이 집중되면 사달이 나는 법. 박 전 대통령이 10·26 때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진 것도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차지철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이를 견제하려던 김 전 부장과의 알력에서 빚어진 비극이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까지 경호실장은 권력의 뒤로 밀려났다. 경호실의 업무 특성에 따라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머물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경호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이후 최씨를 비롯한 ‘보안손님’들이 신원조회도 없이 청와대 초소를 통과한 것으로 드러나는 등 경호실의 직무를 놓고 논란이 불거지면서다. 최순실을 몰라보고 검문한 이유로 101경비단장이 교체됐다는 의혹도 나왔다. 최근에는 73세의 무자격자 주사 아줌마와 기 치료 아줌마까지 청와대에 들락거렸다는 얘기도 들린다. 최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권력 적폐 청산 방안’을 발표하면서 청와대 경호실 폐지를 주장했다. 선진국 대부분은 대통령 직속 경호실이 없는 만큼 권력의 상징이었던 청와대 경호실을 없애고 대신 경찰청 산하 ‘대통령 경호국’으로 위상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제 한 방송에서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했던 경찰 간부의 ‘최순실, 정윤회’가 언급된 수첩이 공개됐다. 경호실이 최씨의 국정 농단 의혹을 묵인했을 가능성과 함께 경호실의 경찰 인사 농단 의혹까지 제기돼 경호실 폐지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포퓰리즘적이고 안보 총책임자로서 대통령의 직분을 고려하지 않은 신중치 못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경호실의 문제는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하는 데 있다. 문제가 있다고 없애기보다 경호실의 노하우를 살리면서 적폐를 도려내는 것도 개혁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사설] 최순실 일가 불법 재산 환수법 통과시켜야

    최순실씨 일가의 재산을 환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 가운데 특검이 최씨의 해외 재산 추적에 나섰다. 최씨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특별검사팀은 지난주 최씨 일가의 국내외 재산 형성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별도 전담팀을 발족했다고 밝혔다. 재산추적팀은 최씨와 박근혜 대통령 사이의 금전거래 내역은 물론 독일에 은닉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외 재산 조성 과정 등에 대해 수사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과는 별도로 독일 헤센주 검찰도 최씨 관련 회사의 돈세탁 의혹을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의 재산 규모와 재산 형성 과정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최씨 일가의 재산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최씨의 아버지 최태민씨가 구국봉사단 총재로 박 대통령과 자주 접촉하던 1970년대 중·후반부터로 알려졌다. 특히 1990년대 박 대통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있던 시절 재단 자금을 빼돌렸을 것이라는 혐의도 받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1979년 10·26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 관저에 있던 현재 가치 2000억~3000억원 규모의 재산을 박 대통령이 최태민에게 넘겼고, 그 돈이 종잣돈이 됐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최씨 일가의 재산 규모는 알려진 몇 천억원이 아니라 최고 10조원이라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특검은 먼저 최씨 일가의 차명 재산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파악하고 재산 형성 과정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최씨가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국내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면 이는 몰수나 추징도 가능하다. 해외로 빼돌린 자금이 국내에 신고된 적이 없다면 탈세 혐의도 적용할 수 있다. 국내 재산이 공직자나 공익재단 등을 통해 형성한 것이라면 배임이나 횡령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재산 형성 시기가 오래전이라면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으면 추징은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새누리당 출신 심재철 국회 부의장이 최근 최순실 특별법을 발의했다. 이에 앞서 국민의당은 ‘민주헌정침해행위자의 부정축적재산 환수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특별법 제정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고 있다. 박 대통령의 재산과 최씨 일가의 재산을 구분해 내는 일도 중요하다.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에 비추어 박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금전 관리를 최씨에게 맡겼을 가능성이 크다. 재산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부정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최씨가 대통령의 옷이나 가방을 살 때도, 미용시술비를 지불할 때도 한꺼번에 수천만원을 현금으로 결제하는 등 주로 현금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자금 출처와 사용처를 숨겨야만 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물을 받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은 반드시 추징해야 한다. 전두환추징법처럼 적용할 법이 없다면 제정을 해서라도 단죄해야 국정 농단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 37년 전 발생한 ‘1212 사태’···전두환·노태우 ‘쿠데타’ 일으킨 날

    37년 전 발생한 ‘1212 사태’···전두환·노태우 ‘쿠데타’ 일으킨 날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79년 12월 12일 당시 전두환·노태우를 앞세운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일명 ‘12·12 사태’가 일어난 날이다. 신군부의 쿠데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분출했던 ‘서울의 봄’의 열기를 꺼뜨렸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이 살해된 ‘10·26 사태’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10·26사태를 수사하기 위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갈등을 빚었다. 전두환은 정 총장이 10·26 수사에 미온적이고 박 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의 내란에 방조했다는 혐의를 앞세워 그를 강제 연행할 계획을 세웠다. 1979년 11월 당시 9사단장을 맡았던 노태우 등과 쿠데타를 모의한 전두환은 군부 내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 총장을 강제로 연행했다. 정 총장을 연행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최 대통령에게 사후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신군부는 노재현 국방장관까지 체포해 대통령 압박에 나섰고, 결국 1979년 12월 13일 대통령은 정 총장의 연행을 재가했다. 이후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해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학교에서의 정치 활동이 일체 금지됐다. 이에 항거해 그 다음날인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두환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제 진압한 뒤 같은해 9월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최태민의 전횡 보고했던 박정희 마지막 비서실장

    최태민의 전횡 보고했던 박정희 마지막 비서실장

    김재규와 공범 혐의로 옥살이 “병상서도 박근혜 대통령 걱정”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 전 창군동우회 회장이 지난 3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김 전 실장은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 사망 당시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과의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 공모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어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1988년 특별사면복권됐다. 그는 2006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10·26 당시 상황에 대해 “박 대통령께서 비스듬히 쓰러지셨는데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사건 다음날 새벽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 대통령을 깨우기 위해 청와대에 도착해 눈물을 쏟았다고도 증언했다. 김 전 실장은 당시 사건이 박 전 대통령에게 혼이 난 김 중앙정보부장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이라고 주장했다. 유족 측은 김 전 실장이 병상에서 최태민·최순실 일가의 국정농단 사건을 전해 듣고 박 대통령을 많이 걱정했다고 전했다. 김 전 실장의 인터뷰나 회고록의 내용들은 최태민 목사와 최순실씨의 대를 이은 국정농단 사건이 한국을 뜨겁게 달구며 다시 회자되고 있다.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계원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최태민 사건) 수사보고서를 박 대통령에게 줬고 박 대통령은 그걸 최태민에게 줬다”고 말했다. 1923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김 전 실장은 연희전문학교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박정희 정권 당시 육군 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장, 주대만 대사,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이후에는 창군동우회 회장을 지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에 차려졌다. 발인은 7일 오전 10시. 유족으로는 부인 서봉선씨와 기화산업 대표·한국스페셜올림픽 이사인 장남 병덕씨, 미국에 체류 중인 차남 병민씨, 장녀 혜령씨 등 2남 1녀가 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서울광장] 촛불 정국 공직사회 비틀어 보기/김성곤 편집국 부국장

    [서울광장] 촛불 정국 공직사회 비틀어 보기/김성곤 편집국 부국장

    # 1. “청와대와 정치권의 간섭이 없어서(?)인지 이번에 역대 가장 공정한 인사가 이루어진 것 같아요.” # 2. “중요한 일들이 산적해 있는데 청와대의 사인이 없으니 대충 수정해서 낼 수도 없고….” # 3. “‘시키니까 했다’는 영혼 없는 ‘코스튬 플레이’만 성행하고 있어요. 공직사회가 이래서 되겠나 싶습니다.” 정치권 등 온 나라가 최순실 국정 농단이라는 블랙홀에 빠져들면서 나타난 공직사회의 단면들이다. 이를 비틀어서 한번 분석해 봤다. 첫 번째 얘기는 갑작스런 인사로 논란을 낳은 경찰 인사의 다른 면이다. 인사가 당겨지고, 청와대와 정치권이 다른 데 정신이 팔리면서 ‘자기식 인사’를 했다는 것으로 들린다. 거기에는 경찰대와 비(非)경찰대 출신의 조화나 지역 안배, 연공서열 등의 조화 등 산술적 의미도 포함돼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번 게이트 이후의 상황이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 읽힌다. 다른 부처도 다르지 않다. “국민만 보고 간다. 이 상황이 빨리 정리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간섭이 줄어서 좋다는 반응은 현실이다. 두 번째는 경제 부처의 얘기다. 매사 청와대나 정치권의 눈치를 보면서 결정을 하다가 ‘시어머니’가 없어지니 시원하기는 하지만,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결정을 미루는 ‘금단현상’도 엿보인다. 경제 관료들이 간섭에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실제로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은 지금 마무리를 해 중순쯤 발표를 해야 하는데 청와대 등과의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연말로 미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라든가 고려할 변수들이 있기는 하지만, 익숙한 ‘시그널’ 부재로 인해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이 맹탕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다음 예는 엘리트들의 몰락에 대한 공직사회의 자조다.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문제가 될 때만 해도 “‘일반미’(비공무원 출신 정무직 공무원)보다는 그래도 ‘정부미’(공무원 출신 정무직 공무원)가 낫다”고 자위했다. 조원동 전 경제수석이나 최상목 기획재정부 차관 등이 이번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놀라움과 함께 “대한민국의 머리 좋은 공무원들 다 쓰러진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키니까 했다’는 코스튬 플레이가 번지고 있다는 게 현장의 얘기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격랑들이 제법 많았다. 1979년 10·26에서부터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1987년 6월 항쟁,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등이 꼽힌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경제성장률은 10·26의 여파와 제2차 오일쇼크가 이어진 1980년(-1.7%·1981년 7.2%)을 빼고는 모두 예년 이상이었다. 1987년은 12.5%(1988년 11.9%), 2004년은 4.9%(2005년 3.9%)였다. 물론 당시의 성장 배경이 고도성장기(1981년과 1987년)였다거나 금융위기 이후 반등기(2004년)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뿐일까. 여기에는 정치적 격변기에도 생업에 전념하며 인내한 국민과 주어진 업무를 묵묵히 수행한 공무원들의 공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위기 때마다 리더십을 발휘한 고위 경제 관료도 있었고, 서슬 퍼런 통치자에게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관료들도 있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 때 물가가 급등하자 성장주의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고집을 꺾고 강력한 물가 대책을 폈던 강경식 차관보, 김재익 경제기획국장도 있고, 전두환 전 대통령 때에는 김재익(경제수석), 2004년엔 이헌재 전 부총리가 있었다. 이들 외에도 소신과 철학이 있었던 관료들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과 친한 강남 아줌마의 하수인 역을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경제수석이나 관료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아무리 판이 뒤집어지는 과정이고, 경제 수장인 부총리의 위상마저 어정쩡하지만, 공직자만큼은 자존심과 제자리를 찾았으면 한다. 지금 공직자들은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는 평가받는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sunggone@seoul.co.kr
  • 그것이 알고싶다 최태민 朴대통령 관계 언급한 김재규 재조명

    그것이 알고싶다 최태민 朴대통령 관계 언급한 김재규 재조명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26일 ‘악의 연대기 - 최태민 일가는 무엇을 꿈꿨나?’ 편을 통해 朴대통령과 최태민 일가의 악연에 대해 상세하게 다뤘다. 이에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김재규(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경상북도 구미 출신으로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재임했다. 10.26 사건 당시 박정희를 암살하고,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로 사형을 언도받아 교수된 인물이다. 당시 그를 변호했던 변호인은 “면회를 갔더니 최태민 목사 얘기를 꺼냈다”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쏜 이유로 구국여성봉사단의 망국적 전횡도 작용했다며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면 교통사고라도 내서 처치해야 할 놈이라고 분개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당시 최태민 목사는 구국여성봉사단을 앞세워 기업들로부터 수억원대의 돈을 뜯어냈다”며 “당시 박승규 청와대 민정수석도 최태민 목사의 전횡을 알고 김재규 부장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최태민 목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접근해 온갖 못된 짓을 했다”면서 “(김재규 부장이)박근혜 대통령이 온갖 나쁜 짓을 당하면서 아버지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데 이렇게 해도 되냐고 했다”고 말했다. 박승규 민정수석은 최태민 목사가 여성 정치 지망생 6명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내용을 조사해 김재규 부장에게 자료를 넘겨줬다.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며 최태민 목사와 박근혜 영애와 떼어놓아야 한다고 보고했으나 묵살당했다. 이는 1995년 방송된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도 묘사돼있다. 김재규 부장(박근형)은 박정희 대통령(이창환)과 독대를 하고 “큰 영애(박근혜)문제입니다”라고 말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그 최 뭣인가 하는 목사(최태민) 얘기요?”라고 묻는다. 김재규 부장은 “예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큰 영애 후광을 얻고 지나친 짓을 하고 있습니다.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란 건 허울 뿐이고 뒤에서 업체에서 찬조금을 챙기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여자 문제까지. 여기 보고 내용입니다”라며 보고서를 제출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내용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근혜 말은 그게 아니던데. 오늘 이쯤에서 그만 둡시다. 나가봐요”라며 김재규 부장의 말을 흘려들었다. 김재규 부장은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대근)에 “정말 이러기요? 왜 매사에 시시콜콜 나서면서 정작 빠져야 할 일에 나서는거요?”라고 따진다. 차지철 실장은 “빠지다뇨. 제가 정보력이 있습니까?”라고 받아치고 김재규 부장은 “각하를 잘 보위하고 싶으면 각하가 듣기 싫어하는 직언도 필요할 때는 해야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그것이 알고싶다’ 朴대통령과 최씨 일가의 악연…”여왕을 만들어야겠다”

    ‘그것이 알고싶다’ 朴대통령과 최씨 일가의 악연…”여왕을 만들어야겠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일가의 오랜 인연에 대해 심층 분석한다. 26일 방영될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악의 연대기-최태민 일가는 무엇을 꿈꿨나?’ 라는 주제로 박 대통령과 최태민 일가의 만남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조망한다. 1974년 육영수 여사의 서거 이후 실의에 빠진 대통령의 장녀에게 한 남자가 세 차례 위로 편지를 보내고 이를 계기로 박근혜 당시 큰 영애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그가 바로 최근 국정 농단사태의 핵심인물인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이다. 일본 순사에서 불교 승려로, 다시 중학교 교장에서 사이비 무속인과 목사에 이르기까지 변신을 거듭하며 이름도 무려 일곱 번이나 바꿔가며 살던 의문의 인물. 그는 당시 절대 권력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를 만나 이른 바 ‘구국 선교단’ 총재의 직함을 달고 퍼스트레이디의 최측근으로서 활동을 이어나간다. 최태민은 ‘구국’을 명분으로 재단을 만들고 그 재단을 통해 기업에 모금을 강요했을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서도 돈을 헌납 받고 그 돈을 모두 관리했다. 법인 재산을 팔아 사적으로 자금을 축적하고 부정 입학을 주도한 영남대 비리사태는 물론 그보다 앞선 육영재단 분규 사태까지 최태민은 대통령 일가의 재산과 관련된 문제의 핵심에 있었으나 박근혜라는 방패막이를 활용해 살아남았다 대통령의 딸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최태민의 행보는 그의 딸 최순실에게로 이어져 상상을 초월한 국정농단의 사태까지 몰고 온 것이다. 그러나 최태민과 최순실에게 그러한 권력을 부여한 이는 다름 아닌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대를 이은 최씨 일가와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 무엇이 이들을 서로 떨어지지 않게 엮어놓았으며, 40년 넘게 이어져 온 유착의 비밀은 무엇인가? 최태민은 일찍부터 대통령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 꿈을 품었다고 한다. 채병률 전 구국봉사단 최태민 총재 보좌관은 “이제 웃으면서 왕이 될 거라 그래요. (최태민이) 여왕을 만들어야겠다는 얘기를 몇 번 저한테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계획은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며 무산된 듯 했지만 결국 그의 딸 최순실에 의해 2대에 걸쳐 완성된다. 18년 철권통치를 해 온 아버지 밑에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청와대 생활을 한 박근혜는 자연스레 아버지의 정치와 사상을 배웠다. 국가는 아버지이며 권력은 아버지의 시대를 복원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대통령이 되어서 가장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버지의 업적을 찬양하고 관련 사업 예산을 늘리는 일이었다. 대통령 박근혜에게는 아버지 시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 시대를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것을 도울 누군가가 필요했다. 최태민과 최순실 일가 또한 대통령 박근혜를 만들어 내는 동시에 대통령의 권력을 이용해 엄청난 이득을 누렸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그들의 은밀한 유착은 결국 세상에 알려졌고 박근혜 대통령이 지키고 싶어했던 아버지 박정희 시대의 허상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초래한 국정농단사태를 거치며 조금씩 깨지고 있다. 이번 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독재정권기까지 변신의 귀재로 생존을 이어오다 권력에 기생해 부를 쌓아온 최태민의 행적을 추적해 그의 딸 최순실에게까지 이어진 국정농단의 근원을 취재하고, 이른 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민주주의 국가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박대통령·최순실 ‘40년 유착’의 비밀 ■그것이 알고 싶다(SBS 토요일 밤 11시 5분) 국정 농단 사태를 낳게 한 최태민·최순실 일가와 박근혜 대통령의 40년 넘게 이어져 온 유착의 비밀을 추적한다. 일본 순사에서 불교 승려로, 다시 중학교 교장에서 사이비 무속인과 목사에 이르기까지 변신을 거듭하며 이름도 무려 일곱 번이나 바꾼 의문의 인물 최태민. 최태민이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영애 시절부터 대통령으로 만들 꿈을 꿨던 정황을 캔다. 그의 계획은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무산된 듯했지만 결국 그의 딸 최순실에 의해 2대에 걸쳐 완성됐다고 제작진은 봤다. 변신의 귀재로 생존을 이어오다 권력에 기생해 부를 쌓아 온 최태민의 행적을 추적해 그의 딸 최순실에게까지 이어진 국정 농단의 근원을 밝힌다. ■불어라 미풍아(MBC 토요일 밤 8시 45분) 미풍(임지연)과 장고(손호준)는 결혼 생활을 시작하지만 금실(금보라)은 미풍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못한다. 청자(이휘향)는 신애(임수향)의 정체를 알게 되고 쫓아내려 하지만 신애는 자신의 거짓말을 덮을 방법으로는 돈을 주는 것밖에 없다며 청자를 설득한다. ■서가식당(KBS1 일요일 밤 11시 10분) 책과 음식을 접목한 교양 프로그램으로 책에 등장하는 음식을 통해 책 한 권을 소화한다는 콘셉트다. 배우 권해효, KBS 아나운서 강승화,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 셰프 박찬일, 희극배우 겸 인터넷 소설가 이세영 등 6명의 출연자가 한 주에 한 권씩 책을 읽은 다음 찬사는 물론 혹평을 내놓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 김재규 변호사, “박정희, 최태민-박근혜 떼어놓으란 김재규 말 들었다면 국정농단 없었을 것”

    김재규 변호사, “박정희, 최태민-박근혜 떼어놓으란 김재규 말 들었다면 국정농단 없었을 것”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가 권고한 대로 최태민과 박근혜를 떼어내고, 최태민의 범죄를 엄벌했더라면 오늘과 같은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25일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 일가와의 뿌리 깊은 인연과 도움으로 대통령까지 됐지만 결국 재임 중 최태민 일가로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며 이같이 말했다. 때문에 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잘못된 역사의 업보”라고 진단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뿌리는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강 변호사에 따르면 당시 김재규 부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잘 아는 이였고, 최태민과 박근혜의 부적절한 관계가 10·26 사건을 일으킨 원인이라고 꼽기도 했다. 강 변호사는 “김재규 부장이 사형당하기 4개월 전인 1980년 1월 28일 면회를 갔더니 최태민 얘기를 처음 꺼냈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쏜 이유로 구국여성봉사단의 망국적 전횡도 작용했다며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면 최태민은 교통사고라도 내서 처치해야 할 놈이라고 분개했다”고 회고했다. 그에 따르면 최태민은 구국여성봉사단을 앞세워 양로병원을 짓는다며 기업들로부터 수억원대의 돈을 뜯어냈다. 박승규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도 최태민을 조사하니 그가 박근혜 영애를 등에 업고 수십억원을 갈취한 사실이 적발돼 김재규 부장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소연했다는 것. 박승규 민정수석은 최태민이 여성 정치 지망생 6명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내용까지 조사했다. 강 변호사는 “김재규 부장은 이를 종합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며 최태민과 박근혜 영애와 떼어놓아야 한다고 권고했으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박근혜 말만 듣고 이를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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