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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라하에서 시작된 유럽 첫번째 세계대전 [한ZOOM]

    프라하에서 시작된 유럽 첫번째 세계대전 [한ZOOM]

    1415년 7월 6일 화형대 아래 쌓여 있던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불길 속에서 타들어가던 남자가 엄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은 거위를 불태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00년 뒤에 등장하는 백조는 감히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체코의 유명한 사제이자 신학자 얀 후스(Jan Hus·1369~1415)였다. 그는 교회와 교황 그리고 성직자의 부패에 정면으로 맞서다가 화형에 처해졌다. 얀 후스가 예언한 날로부터 102년이 흐른 1517년 10월 31일 한 남자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교회 정문에 종이를 붙였다. 그는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였다. 그는 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교회와 교황의 부패를 비판했고, 역사는 이 날을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기록하고 있다.종교개혁의 불길 로마 카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에 참여한 자들을 이단으로 몰아갔다. 종교개혁 반대파 제후들은 이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독일)에서 시작한 개혁의 불길은 스위스, 네덜란드, 프랑스 등 주변국으로 계속 퍼져 나갔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종교로 인한 제국분열을 막기 위해 루터파 제후들을 상대로 군대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황제에게 유리한 듯 보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루터파 제후들의 저항은 격렬해졌다. 결국 1555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 양측이 모여 화의를 맺었다. 이 화의를 통해 루터파 교회가 정식으로 인정받았고, 제후들은 종교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제후가 신교로 개종하면 공직과 영지를 반납해야 했고, 제후는 종교결정권을 얻었지만 사람들은 제후의 결정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개종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또한 루터파를 제외한 칼뱅파는 제외되었다.창 밖 투척사건이 일으킨 세계대전 정통 카톨릭 교도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보헤미아(체코) 국왕들은 국민들에게 카톨릭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1617년 즉위한 반종교개혁파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1637)는 이전 국왕들과 달리 국왕 직할령에 개신교 교회 설립을 중단시키고 개신교도들의 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1618년 5월 23일 트런 백작과 개신교도들이 프라하 성에서 그 동안 차별과 학대를 받은 분노를 표출하며 섭정관으로 온 백작 두 명과 비서관을 창 밖으로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세 사람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개신교 제후들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전쟁준비를 시작했다. 1619년 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보헤미아 개신교도들은 페르디난트 2세를 거부하고 ‘프리드리히 5세(Friedrich V, 1596~1632)’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했다. 종교갈등은 보헤미아 국왕 자리를 건 정치싸움으로 변해갔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개신교 제후들은 각각 주변국들과 동맹을 체결했다. 동맹국인 오스트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스위스 등 수많은 유럽국가들이 참여하면서 보헤미아의 종교전쟁은 유럽 전체의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무려 약 800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30년 전쟁의 결과 1648년 10월 24일, 베스트팔렌(Westfalen) 조약을 체결하면서 30년 전쟁이 끝났다. 이 조약을 통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제외되었던 칼뱅파가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누구나 종교를 결정할 수 있게 하고 제후가 종교를 강제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편, 스위스가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제후들은 황제와 제국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상호 또는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종교적 자유가 확대되면서 교황의 세력이 약화되고 중세를 이끌어 온 종교 중심의 사회질서가 무너졌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 역시 약화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한편 세력이 약해진 교황을 대신해 국왕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절대주의 체제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프라하 성 창 밖 투척사건이 유럽 최초의 세계대전인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 전쟁은 중세 유럽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근대를 열었다. 트런 백작과 개신교도들은 집정관을 던질 때 이런 결과가 초래될지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만든다는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 이론이 역사적 사실을 통해 입증된 것이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
  • 황제가 만든 온천과 영화의 도시, 체코 카를로비 바리 [한ZOOM]

    황제가 만든 온천과 영화의 도시, 체코 카를로비 바리 [한ZOOM]

    우리나라에 위대한 세종대왕(世宗, 1397~1450)이 있다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체코(Czech Republic)에는 카를 4세(Karl IV, 1316~1378)가 있다. 카를 4세는 체코의 전신인 보헤미아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고, 가장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선정될 정도로 체코사람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트비히 4세’와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교황은 루트비히 4세를 견제하기 위해 카를 4세를 대립왕(현 국왕에 대항해 왕권을 행사하는 사람)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에는 루트비히 4세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많았다. 1347년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하자 카를 4세는 권력기반을 강화한 후 보헤미아 국왕에 올랐다. 그는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Prague)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삼고 도시재건사업을 추진했고, 중앙유럽에서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딴 ‘카렐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355년는 로마로 가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황제에게 온천수가 있는 곳을 알려준 사슴 어느 날 카를 4세는 자신이 쏜 화살에 맞고 도망치는 사슴을 쫓고 있었다. 한참 사슴을 찾아 숲 속을 헤매던 중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사슴을 발견했다. 카를 4세는 사슴의 상처가 치료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상처를 치료했다고 한다. 카를로비 바리(Karlovy Vary)는 이 전설로 시작된 도시다. 도시 이름 ‘카를로비 바리’는 ‘카를의 목욕탕’이라는 뜻이며, 수많은 지도자들과 괴테, 베토벤, 모차르트와 같은 유명인들이 찾을 만큼 유럽에서 카를로비 바리 온천의 인기는 대단하다고 한다. 카를로비 바리에는 12개의 원천지(온천수가 나오는 곳)이 있다. 빗물이 용암지반으로 흘러갔다가 다시 온천수가 되어 나오는데 그 시간이 자그마치 천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나오는 온천수는 무려 천년 전에 떨어진 빗물인 것이다. 카를로비 바리 온천수는 마시는 온천수로도 유명하다. 곳곳에 있는 상점에서 빨대 같은 손잡이가 달린 전용 컵 ‘라젠스키 포하레크’를 구할 수 있는데, 라젠스키는 ‘스파’, 포하레크는 ‘컵’이라는 뜻이다. 이 컵은 손잡이가 빨대로 되어 있어 온천수를 컵에 담고 손잡이 끝을 빠는 방법으로 마실 수 있다. 카를로비 바리 온천수에는 철분이 많아 그냥 마시면 철 맛이나 피 맛이 느껴지지만, 전용 컵을 사용하면 그 비린내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세계 제5대 영화제 KVIFF가 열리는 도시 2006년 개봉한 ‘마틴 캠벨’ 감독의 영화 ‘007 카지노 로얄’은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W. Craig, 1968~)가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은 첫 작품으로 작품성과 흥행성에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제임스 본드가 호텔에서 카드게임을 하는 장면이다. 영화의 설정은 몬테네그로에 있는 호텔로 되어 있지만 실제 촬영장소는 카를로비 바리에 있는 ‘그랜드 호텔 펍(’Grand Hotel Pupp)이다. 이 호텔은 영화 촬영지보다 영화제 개최장소로 더 유명하다. 매년 여름 이 호텔에서는 세계 5대 영화제의 하나인 ‘카를로비 바리 국제 영화제’(Karlovy Vary International Film Festival, KVIFF)가 열린다. 이 영화제에서 2017년에는 이창동 감독 작품 ‘박하사탕’이 심사위원특별상을, 2023년에는 유지영 감독 작품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 그랑프리를 수상한 바 있다.소화제 맛이 나는 명주 베체로브카 카를로비 바리의 마지막 명물은 ‘베체로브카(Becherovka)’라는 이름의 술이다. 체코를 대표하는 이 술은 약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술은 카를로비 바리의 온천수에 20가지가 넘는 약재를 넣어 만든다. 사실 처음부터 술은 아니었다고 한다. 재료를 보면 건강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처음에는 위장약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향도 좋고 맛도 좋아 약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수를 높여 술로 만들어 버린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체코사람들에게는 건강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약재가 들어가다 보니 소화제 맛이 나는 술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국제대회에서 1위를 한 전력도 있을 정도로 명주로 평가받는다. 제조비법은 코카콜라처럼 제조비법이 철저히 가문의 비밀로 붙여져 있다. 지금 제조비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 단 두 명뿐이다. 그리고 제조비법 유출을 막기 위해 생산도 오로지 한 곳에서만 한다고 한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
  • 러시아의 영웅, 자랑스런 고려인 ‘빅토르 최’ [한ZOOM]

    러시아의 영웅, 자랑스런 고려인 ‘빅토르 최’ [한ZOOM]

    정조(正祖, 1752~1800) 사망 이후 19세기의 조선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일부 세력이 권력을 독점한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인해 백성들은 도탄 속에 살아야만 했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만주(중국)로, 연해주(러시아)로 목숨을 건 이동을 시작했다. 1890년 연해주 조선인의 수는 연해주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섰다. 독립운동가와 상인까지 넘어오면서 극동지역 조선인 수는 한때 러시아인 수를 넘어서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은 이 곳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한국의’, ‘한국적인’ 뜻을 담아 ‘카레이스키’(корéйский)라고 불렀다. 누명을 쓰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조선인 1937년 소련의 스탈린은 극동지역 조선인에게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을 씌운 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다. 당시 소련은 일본과 치열하게 대립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일본인과 외모가 비슷한 조선인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두 나라의 싸움에 애꿎은 조선인이 피해를 본 것이었다. 소련의 강제이주 과정은 학살에 가까웠다. 스탈린은 공포분위기 조성을 위해 조선인 지도자들을 가두고 숙청했다. 공포가 극에 달했을 무렵 약 18만명의 강제이주가 시작되었다. 소련은 목적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어두운 열차 화물칸에서는 추위와 배고픔으로 사람들이 죽어갔다. 열차가 잠시 멈출 때마다 시신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땅에 묻혔고 곡소리는 사방에 울려 퍼졌다. 마침내 중앙아시아에 도착했지만 그곳에는 추위와 바람 그리고 황무지 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인의 후예 빅토르 최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사람들은 자신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조선 출신 소련인’이지만 한민족이라는 후예임을 잊지 않고 있으며, 이념적으로는 ‘한국’과 ‘조선’(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에 ‘고려’(高麗)를 선택했다. 다시 19세기 조선으로 돌아가보자. 함경북도에 살고 있던 최승준은 부모님과 함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하지만 이들 역시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인해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졌다. 최승준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로베르또가 러시아 여인과 결혼해 낳은 아들이 바로 ‘빅토르 최’(Victor Choi, 1962~1990)다. 어린 시절 빅토르 최는 과묵했고, 예술적 재능을 보이지도 않았던 평범한 아이였다. 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빅토르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다. 그의 독서습관은 훗날 시적인 가사를 쓸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빅토르는 미술학교 친구 ‘막심 빠쉬코프’를 통해 록음악과 기타를 접했다. 당시 소련에서 록음악은 환영받지 못했다. 록음악은 서방문화를 추종하는 행위이자,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록음악가들은 당국의 감시와 제지를 받고 있었다. 연주에 필요한 일렉트릭 기타와 같은 전자악기 구입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연주도 공연장이 아닌 개인 아파트와 같은 공간에서만 가능했다. 1982년 빅토르는 록밴드 ‘키노’(KINO)를 결성하고 첫 앨범 ‘45’를 발표했다. 45는 녹음된 시간이 45분인 것을 착안해 붙인 이름이다. 1983년 상트페테르부르크(舊 레닌그라드)에서 러시아 최초로 록 페스트벌이 열렸다. 빅토르가 이끈 키노는 1984년 두 번째 록 페스티벌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면서 널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소련 문화계의 변화를 상징한 인물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2022)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개혁과 개방을 내세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서구와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록음악에 대한 당국의 감시와 제재가 줄어들었다. ‘고르바초프가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정치적 변화를 주도하는 상징적 인물이었다면, 소련 문화계에서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을 빅토르였다. 사실 빅토르는 한 번도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한 시대의 상징적 인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빅토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소련 국민들은 그의 노래에서 자유와 변화를 읽어 나갔다. 소련 국민들, 특히 출구를 찾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빅토르의 노래는 삶에 지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대우 작가의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2012년) 인용) 1988년 다섯 번째 공식앨범 ‘혈액형’(Blood Type)이 공개되었다. 수록곡 모두 큰 사랑을 받았고 빅토르와 키노의 위상은 절정에 달했다. 특히 전쟁터에서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은 한 병사의 목소리를 담은 타이틀 곡 ‘혈액형’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반전(反戰) 메시지를 담고 있어 세계적으로도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후 빅토르는 미국, 프랑스, 덴마크와 같은 서방국가를 방문하여 공연을 했다. 1990년에는 일본 연예 기획사의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이미 빅토르와 키노는 일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1990년 모스크바 단독 콘서트를 마친 빅토르는 휴식을 위해 가족과 함께 라트비아(Latvia)의 수도 리가(Riga)로 떠났다. 그리고 그 곳에서 빅토르는 혼자 밤 낚시를 하기 위해 운전을 하다가 버스와 충돌하여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8세였다. 남은 키노의 멤버들은 빅토르의 사고차량에서 발견한 녹음 테이프로 유작 ‘검은 앨범’을 발표했다. 빅토르 최를 기억하는 사람들 빅토르 최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2020년, 벨라루스(Belarus)의 수도 민스크(Minsk) 거리에서 빅토르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와 빅토르 최의 노래 ‘변화’를 불렀다. ‘우리의 심장은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두 눈은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웃음에서, 우리의 눈물에서, 우리의 맥박에서, 변화를! 우리는 변화를 기다려!! ’(‘변화’ 가사 중에서) 2020년 벨라루스 대선에서 26년쨰 집권 중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80%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벨라루스 시민들은 독재자의 부정투표에 저항하는 민주화 시위를 일으켰다. 그들은 사람들은 빅토르 최의 노래 ‘변화’를 부르며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행진을 했다. 2014년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제22회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러시아명 빅토르 안)가 러시아 쇼트트랙 역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안현수에게 ‘빅토르 최의 혼을 안고 달린 빅토르 안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내용으로 축전을 보냈다. 1999년 윤도현 밴드(YB)가 ‘한국록 다시 부르기’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들국화, 송창식, 강산에 등 대한민국 록음악가들의 명곡을 리메이크한 앨범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빅토르 최의 대표곡 ‘혈액형’ 번안곡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노래는 러시아 본국에서도 인기를 얻었으며 윤도현 밴드는 러시아 록페스티벌에 참가해 이 노래를 원곡 가사로 불러 빅토르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빅토르 사망 3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는 러시아인들의 영웅이자 전세계 록음악가들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 오늘도 모스크바 아르바트거리 ‘빅토르 최 벽’에는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2012년 이대우 작가가 쓴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빅토르 최의 삶과 음악’(이대우, 뿌쉬낀하우스)를 참고했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
  • 돈가스와 단팥빵에 숨겨진 역사적 사실들 [한ZOOM]

    돈가스와 단팥빵에 숨겨진 역사적 사실들 [한ZOOM]

    일본 제40대 천황 덴무(631~686)는 상징적 존재를 넘어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행사였던 천황이었다. 그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와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을 도입했다. 그리고 천황이 되기 전 승려였던 경험을 살려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덴무는 오늘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육식금지령’을 내렸다. 5가지 짐승(소, 말, 개, 원숭이, 닭)의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하는 덴무 천황의 육식금지령(675년)부터 메이지 천황의 육식금지령 해제(1872년)까지 약 1200년 동안 일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일본인들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등장한 돈가스 1867년 메이지 유신을 시작으로 일본은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지도층에게는 여전 히 고민이 남아 있었다. 서양인들에 비해 일본인들의 체형이 너무 작고 왜소했던 것이다. 그 해결책으로 찾은 것이 바로 육식이었다. 하지만 약 1200년 동안 육식을 하지 않은 일본인들에게 고기를 먹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천황까지 직접 고기 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육식을 장려했다. 하지만 고기를 먹었다는 이유로 자식과 인연을 끊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육식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돈가스(とんかつ)’였다. 육식 장려를 위해서는 고기 특유의 비린내를 잡는 동시에 고기로 만든 음식이 아닌 것처럼 보여야 했다. 돼지고기에 두꺼운 빵가루를 묻혀 튀긴 돈가스는 그런 의미에서 최적의 대안이었다. 돈가스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영국 커틀릿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가장 널리 인정된다고 한다. ‘커틀릿’(Cutlet)은 얇은 고기에 빵가루를 묻혀 굽거나 튀긴 서양식 음식이다. 일본은 돼지고기로 커틀릿을 만들어 돼지고기 커틀릿(Pork Cutlet), 일본식 표현으로는 ‘포크가쓰레쓰(ポークカツレツ)’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했다. 이 음식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다가 1959년 이후 돈가스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호빵맨이 아니라 단팥빵맨(앙팡맨) 서구식 음식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빵이다. 동양 사람들의 주식이 밥이라면 서양 사람들의 주식은 빵이다. 빵이라는 이름은 포르투갈어 ‘팡(pão)’이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생긴 것이다. 커틀릿과 함께 서양음식인 빵 역시 일본인들 사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양식 딱딱한 빵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1869년 하급무사 출신 키무라 야스베에(木村安兵衛)가 네덜란드 유학생 출신 요리사 ‘우메키치(梅吉)’로부터 제빵기술을 전수받아 도쿄에 빵집을 차렸다. 하지만 이 가게는 두 번의 화재로 불타버렸다. 마지막으로 키무라는 수익금과 대출금을 합쳐 벽돌식 신식건물에 세 번째 빵집을 차렸다. 1874년 키무라는 서양식 빵에 일본식 팥소를 결합한 단팥빵을 만들어 냈다. 그는 효모 대신에 술누룩을 이용해 부드러운 새로운 빵을 만들었고, 단팥빵은 서양식 딱딱한 빵에 거부감이 있었던 일본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히트를 쳤다. 여담이지만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애니메이션 ‘호빵맨’은 사실 호빵맨이 아니라 단팥빵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다. 일본 이름도 단팥빵을 의미하는 앙팡맨(アンパンマン, Anpanman)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빵집, 군산 이성당 1906년 아들의 군복무를 피해 우리나라로 넘어온 히로세 야스타로가 전북 군산에 ‘이즈모야’(出雲屋)라는 빵집을 열었다. 당시 군산은 호남지역에서 생산한 쌀을 수탈하여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옮기던 도시였다. 그래서 군산에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즈모야 빵집을 차린 히로세는 당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단팥빵을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팔았다. 히로세는 단팥빵으로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고 군산에서 유력 인사로 자리를 잡았다. 1945년 광복 이후 히로세 가족은 모든 제빵장비를 버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석우씨가 이 곳을 불하받고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이 번성(盛)하는 집(堂)'이라는 의미를 담아 이성당(李盛堂)이라는 이름의 빵집을 열었다. 현재 이성당은 대한민국에서 현재까지 운영하는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 현재 이성당은 군산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려야 하는 핫 플레이스이자 빵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지로 인정받고 있다. 이성당 입구에는 매일 단팥빵과 야채빵을 사려는 사람들로 길게 줄을 서있고, 가게 안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제는 흔한 음식이 되어버린 돈가스와 단팥빵에 이런 웃지 못할 숨겨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만 느껴진다. 
  • 순교자들의 피 묻은 돌 위에 세워진 성지, 전주 전동성당 [한ZOOM]

    순교자들의 피 묻은 돌 위에 세워진 성지, 전주 전동성당 [한ZOOM]

    1656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1599~1667)는 “동양의 전통의식인 제사는 우상숭배라고 볼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1715년 클레멘스 11세(1649~1721)가 기존 교황청의 입장을 뒤집고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선언하면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이 혼란은 1939년 비오 12세(1876~1958)가 제사를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선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791년 전라북도 진산에 살고 있는 양반 윤지충(尹持忠, 1759~ 1791)이 어머니 제사를 천주교식으로 치르고,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종친들이 격렬히 반대했지만, 같은 천주교인이었던 외사촌 권상연(權尙然, 1751~1791)까지 윤지충의 편을 들면서 일은 점점 커져갔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구속되었고, 두 사람은 유교적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죄로 참형에 처해졌다.  역사는 이 사건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로 기록하고 있다. 내가 왕이 될 상...아니 여기가 왕이 될 땅인가. 전주(全州)는 삼국시대부터 전라도의 중심도시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왕의 성(姓)이 ‘전주 이씨’였기 때문에 전주는 그 어느 도시보다도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해방 후 남북의 초대 지도자였던 이승만(전주 이씨)과 김일성(전주 김씨) 모두 본관이 전주로 알려져 있으며, 견훤(甄萱, 867~936) 역시 전주를 수도로 후백제를 세웠으니,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의 기운이 영험하긴 한 것 같다.  전주 남부시장에서 콩나물국밥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이제 겨우 11살인 아들이 고개까지 박은 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역시 전주는 발 닿는 모든 곳이 맛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한옥마을 방향으로 걷다가 전주성 남문, ‘풍남문(豐南門)’을 만났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전주성은 원래 한양 사대문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주성의 남문인 풍남문을 보면 한양의 남문 ‘숭례문(남대문)’의 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영조가 화재로 불탄 전주성 남문을 재건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풍패(豊沛)의 남쪽(南)’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풍패는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고향이다. 정리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 선조의 고향 ‘전주’를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고향 ‘풍패’로 비유한 것이다.  1900년대 초 일본 통감부는 조선의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이 살 집을 짓기 위해 전국의 모든 성(城)을 허무는 ‘폐성령(廢城令)’을 내렸다. 이후 전국 수많은 성들이 허물어졌고, 성벽의 돌들은 집과 도로를 만드는데 쓰였다. 이때 전주성이 무너졌고 풍남문 역시 크게 훼손되었다. 다행히 1970년대 후반 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순교자의 피 묻은 돌로 지어진 성당 풍남문을 지나 길을 건너면 전주 한옥마을 입구가 나온다. 한옥마을 입구 바로 오른쪽에는 전라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전동성당(殿洞聖堂)’이 있다. 전동성당은 1791년 유교식 전통을 거부하고 천주교식 장례를 치른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형을 당한 바로 그 자리에 서있다.  두 사람이 참형을 당한 날로부터 100년이 지난 1891년, 프랑스인 보두네(Baudounet) 신부가 이 땅을 사들이고 성당을 지었다. 성당의 설계는 서울 명동성당을 완공한 경험이 있는 프와넬(Poisnel) 신부가 맡았다. 당시 일제가 폐성령에 따라 전주성을 허물던 시기였기 때문에 전주성에서 나온 흙으로 벽돌을 굽고, 성벽에서 나온 돌로 주춧돌을 세웠다. 전주성의 흙과 돌로 성당을 지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면 외에도 이 자리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참형을 당했다. 그들의 목은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전주성 성벽에 매달렸고, 순교자들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성벽 안으로 새어 들어갔다. 그들의 희생으로 조선에서 천주교가 지켜졌으니, 그들의 피가 묻은 돌을 발판으로 이 땅에 천주교를 일으키기 위한 성전을 만들겠다는 의미를 담았던 것이다. 전동성당을 떠나며 전동성당 입구와 마당에는 평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행복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 아래 순교자들의 피가 묻은 돌이 이 성당을 받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짧은 생각이었다. 순교자들도, 순교자들이 피를 뿌린 땅에 성당을 지은 신부들도 사람들이 이 곳에서 고통의 역사를 느끼기 보다는,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되찾기를 바랐을 것이다.
  • ‘12사도의 행진’을 위한 카운트다운을 외쳐라, 프라하 천문시계 [한ZOOM]

    ‘12사도의 행진’을 위한 카운트다운을 외쳐라, 프라하 천문시계 [한ZOOM]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초저녁부터 안개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오묘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낮에는 한 걸음에 닿을 것 같은 ‘얀 후스’(Jan Hus, 1372~1415)의 동상조차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짙은 안개를 뚫고 구시청사 쪽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 고개를 들고 벽에 걸려 있는 거대한 시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을 외치기 시작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마지막 ‘제로(0)’ 외침소리와 동시에 시계가 7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고, 위쪽 두 개의 창이 열리고 예수의 12사도 행렬이 시작됐다. 프라하에서 만난 ‘전설의 고향’ 1410년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구시청사 벽에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천문시계’(Pražský orloj)가 설치됐다. 전 세계에서는 세 번째지만, 지금도 움직이고 있는 천문시계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시계라고 한다. 이 시계는 시계제작자 미쿨라스(Mikulas)와 하누쉬(Hanus) 그리고 수학자 얀 신델(Jan Sindel)의 합작품이다.  이 시계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프라하 천문시계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이 주변국으로 퍼져 나가자, 천문시계를 갖고 싶은 왕과 영주들의 제작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프라하 시청은 곤란했다. 천문시계의 인기가 많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도 천문시계가 많아지면 ‘프라하 천문시계’의 희소성은 사라질 것이다.어느 날 새벽, 프라하 시청에서 보낸 사람들이 시계제작자 ‘하누쉬’의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하누쉬’를 붙잡은 다음 불에 달군 인두로 ‘하누쉬’의 눈을 지졌다. 억울한 일을 당한 ‘하누쉬’는 죽고 싶었다. 하지만 죽기 전 마지막으로 천문시계를 한 번만 만져보고 싶었다. ‘하누쉬’는 시계탑으로 올라갔다. ‘하누쉬’가 천문시계를 만지자 순간 천문시계가 멈추었다. 이후 수많은 시계전문가들이 천문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천문시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약 400년이 지난 1860년경 어느 날 갑자기 천문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천문시계에 얽힌 슬픈 이야기다. 그런데 이 전설은 그냥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꽃보다 남자, 기능보다 퍼포먼스 천문시계는 천동설의 원리에 따라 해와 달의 움직임 그리고 시간을 정교하게 나타낸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는 양자시계로 시간의 오차를 극복하고, 인공위성을 통해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천문시계가 주는 기능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오히려 오전 9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매시간 정각 보여주는 12사도 행렬과 같은 이벤트에 더 관심이 있다. 아쉬운 것은 천문시계의 이벤트가 약 20초로 너무 짧다는 것이다. 이벤트가 끝나자 요즘 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이 짧은 이벤트를 보려고 어렵게 군중 사이를 파고들어 자리잡았나 하는 허탈함마저 느껴졌다. 다행히 최근에는 이벤트 시간이 너무 짧다는 여론을 의식해서 나팔부는 기사를 추가하여 전체 이벤트 시간을 약 60초로 늘렸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천문시계는 위 아래 두 개의 시계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쪽 시계판에는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 인생을 낭비하는 ‘악기 연주자’, 허영으로 가득 찬 ‘거울을 들고 있는 청년’, 돈 주머니를 들고 있는 ‘고리대금업자’가 조각되어 있다. 이 조각들은 시계가 만들어질 당시 사람들이 ‘혐오하는’ 인간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아래쪽 시계판 주변에도 칼과 방패를 든 ‘정의의 여신’, 책과 펜을 들고 있는 ‘철학자’, 망원경을 들고 있는 ‘과학자’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이 조각들은 위쪽 시계판 조각들과는 반대로 당시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천문시계 제작자들은 나쁜 사람들과 좋은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인간세상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매시간 등장하는 해골로 죽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12사도의 행렬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지혜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종합해보면, 천문시계는 계절과 시간 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철학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천문시계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리 속에는 유홍준 교수가 인용한, 조선시대 정조 때 문장가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의 글이 떠올랐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게 되며, 보게 되면 모으게 된다. 이때 모으는 것은 그냥 모으는 것이 아니다.’
  • ‘짜장면이냐 짬뽕이냐’…인천 차이나타운 짜장면과 군산 짬뽕거리 [한ZOOM]

    ‘짜장면이냐 짬뽕이냐’…인천 차이나타운 짜장면과 군산 짬뽕거리 [한ZOOM]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중년이 된 지금도 이 선택은 어렵다. 젓가락을 손에 들고 메뉴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머릿속은 최근 먹은 음식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지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어느 쪽도 먹은 기억이 없다. 결국 ‘짜장면’의 달콤한 소스와 ‘짬뽕’의 얼큰한 국물을 모두 맛볼 수 있는 ‘볶음밥’을 주문했다.  1601년 덴마크 왕자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를 외쳤지만, 현대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딜레마 속에서 살아간다. 1997년을 즈음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고통받고 있을 때 중국음식점에서는 자구책으로 칸막이가 있는 그릇에 짜장면 절반, 짬뽕 절반을 주는 ‘짬짜면’을 출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짬짜면의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두 메뉴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숙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를 고통받게 했던 딜레마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짜장면의 표기법 ‘짜장면이냐 자장면이냐’가 바로 그것이었다. ‘짜장면이 자장면이면, 짬뽕은 잠봉이냐?’ 정말 환상적인 이 논리에도 불구하고 짬뽕은 살고 짜장면은 숨죽여 살았다. 다행히 2011년 온 국민의 염원이 해결됐다. 국립국어원에서 ‘자장면’과 ‘짜장면’ 모두 표준어로 인정한다는 발표를 했다. 수요일이었던 바로 그날 짜장면의 독립일을 축하하기 위해 회사 근처 중국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 모인 수많은 독립투사들 덕분에 짜장면 한 그릇 먹으려고 1시간이나 줄을 서야만 했다.  도대체 우리를 이토록 괴롭혀 온 짜장면과 짬뽕은 어디서 온 놈들일까? 우선 짜장면의 시작을 찾아 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짜장면 탄생 설화 짜장면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화교들이 춘장에 면을 비벼 먹는 중국음식 ‘작장면’을 한국인 입맛에 맞게 바꾼 것이 오늘날의 짜장면이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요리에 처음 ‘짜장면’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한 곳은 인천광역시 차이나타운에 있는 ‘공화춘’(共和春)이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국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이 들어섰다. 공화춘은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하며 ‘공화국에 봄이 왔음’을 기뻐하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차이나타운에 있는 공화춘은 2004년 개업한 가게로, 1983년 폐업한 원조 공화춘과는 무관하다. 원조 공화춘이 있던 자리에는 2012년 개관한 ‘짜장면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짜장면의 정체를 알아냈으니 다음은 짬뽕의 시작을 찾아 멀리 전라북도 군산시로 향했다. 짬뽕 탄생 설화 서해로 흐르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는 충남 서천군, 남쪽에는 전북 군산시가 있다. 그리고 금강을 가로질러 1930m의 동백대교가 두 도시를 이어주고 있다. 동백대교가 보이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길을 건너 왼쪽으로 약 300m 정도 걸어가면 ‘짬뽕거리’가 나온다. 군산시는 2018년부터 ‘복성루’, ‘지린성’, ‘빈해원’ 등 짬뽕으로 유명한 중국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장미동 일대 골목상권에 짬뽕 특화거리를 조성하고, 2021년부터 매년 ‘군산짬뽕 페스티벌’ 사업을 벌이고 있다.짬뽕의 시작 역시 여러가지 설이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짜장면과 같이 화교가 있다. 우리에게 ‘칭따오 맥주’로 유명한 칭따오(靑島)가 있는 산둥성(山東省)에서 동쪽으로 가장 가까운 도시가 군산이다. 군산에서 살고 있는 화교들이 '산둥식 초마면'에 고춧가루와 고추기름을 넣어 ‘매운 초마면’을 만들어 팔았는데, 이 음식이 군산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짬뽕이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선택의 기로 짬뽕거리 입구에 있는 ‘빈해원’을 들러 메뉴판에 있는 ‘군산짬뽕’을 주문했다. 각종 해산물이 가득 들어있는 군산짬뽕의 국물 맛은 먼 거리를 찾아온 보람을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 칼칼하면서도 불맛을 담은 담백한 국물맛은 분명 지금껏 경험한 짬뽕과는 달랐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눈 앞에 원조 짜장면인 ‘인천 차이나타운 짜장면’과 원조 짬뽕인 ‘군산 짬뽕거리 짬뽕’이 둘 다 놓여 있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게 될까? 짜장면과 짬뽕의 역사적 딜레마를 해결했는데도 또 다시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딜레마의 덫에 걸려들었다.
  • 숨막히게 빛나는 황금빛 사원, 일본 교토 금각사 [한ZOOM]

    숨막히게 빛나는 황금빛 사원, 일본 교토 금각사 [한ZOOM]

    입장권부터 신선했다. 얇고 기다란 종이 위에는 개운초복(開運招福), 가내안전(家內安全)과 같은 한자가 쓰여 있었다. 입장권이라기 보다는 ‘부적’에 더 어울렸다. 어쩐지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을 것 같아 입장권을 주머니에 구겨 넣지 못하고 곱게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일본 땅을 밟기 전에도 밟은 후에도 가장 궁금했던 곳이었다. 여행안내서에서 처음 사진을 본 순간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황금빛 색채 때문에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구글링을 했고 역사책과 소설책까지 찾아보았다. 소설책이 절반에 이르렀을 즈음 책을 덮었다. 남은 절반은 이곳을 직접 눈으로 본 후 읽고 싶었다.  매표소를 지나 낮은 담장을 따라 걸었다.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로 들어서니 저 멀리 잔잔한 호수 옆에 따가운 여름 햇살로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건물이 보였다.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감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멈춰 그 자태를 감상하고 싶었지만 다리는 계속 그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금각사의 시작 공식적인 이름은 ‘녹원사’(鹿苑寺, 로쿠온지)이지만 사람들에게는 ‘금각사’(金閣寺, 킨카쿠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원래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귀족 ‘사이온지 긴쓰네’의 별장이 있던 곳이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몰락하면서 황폐화된 이 곳을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1358~1408)가 사들여 사찰로 만들었다.  요시미쓰는 강력한 정치권력을 구축한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將軍)이었다. 1394년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승려가 되었지만, 배후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이었고, 귀족과 막부에 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요시미쓰는 예술적 소양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정원설계에 재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금각사를 만들면서 전국에 있는 다이며(영주)들에게 정원석을 가지고 오라고 전했다. 다이묘들은 살아있는 권력자에게 온갖 진귀한 정원석을 바치기 시작했다. 다이묘들이 바친 정원석에는 그 정원석을 바친 다이묘들의 이름이 붙여졌고 금각사 옆 호수 ‘경호지(鏡湖池)’ 주변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금각사의 특징 금각사는 12.5m 높이의 3층으로 지어진 목조건물이며, 2층과 3층이 금박으로 씌워져 있다.   1층은 일본 전통양식으로 지어진 곳이다. 이 곳은 트여 있는 방과 마루가 있어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2층은 고위직들이 회의를 하던 장소였고 지금은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중국 사찰양식으로 지어진 3층은 쇼군이 다도를 즐기거나 비공식 회의를 하던 장소였고 지금은 아미타삼존상과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멀리서 보면 금각사 꼭대기에 황금으로 만든 봉황이 놓여 있다. 상상속의 새인 봉황(鳳凰)은 동양에서 고귀함과 존귀함을 의미하며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요시미쓰는 저 봉황을 통해 자신의 절대적 권력이 살아 있음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금각사의 수모와 부활 1950년 7월 2일 새벽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젊은 승려 ‘하야시 요켄’이 금각사에 불을 질렀다.불을 지른 다음 자살을 시도했지만 사람들에게 붙잡혔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5년 후 가석방되었다. 1956년 일본의 유명작가 이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소설 ‘금각사’를 발표했다. 그리고 2년 후 1958년 이 소설을 원작으로 이치카와 곤(市川崑, 1915~2008) 감독이 만든 영화 ‘대화재(炎上)가 개봉했다. 화재 이후 금각사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고, 1955년 재건작업이 완료되어 현재 우리가 보는 금각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진이 담지 못하는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금각사의 모습을 머리와 가슴에 담았다. 어서 한국으로 되돌아 가서 절반이 남은 이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고려사이버대학교 융합정보대학원, 2024학년도 전기 입학설명회에 관심 집중

    고려사이버대학교 융합정보대학원, 2024학년도 전기 입학설명회에 관심 집중

    고려사이버대학교의 융합정보대학원은 지난 8일, 계동캠퍼스 인촌관 원형스튜디오에서 진행된 ‘2024학년도 융합정보대학원 전기 입학설명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고 15일 밝혔다. 오프라인과 온라인(ZOOM)으로 동시에 진행된 이번 입학설명회에는 고려사이버대학교 융합정보대학원 입학에 관심을 가진 예비 지원자 및 예비 입학생 50여 명이 참여하는 등 큰 호응을 얻음으로써, 고려사이버대학교 융합정보대학원의 높은 위상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입학설명회는 ▲대학원 소개 및 전공 안내, ▲학사제도 및 입학 안내, ▲대학원 생활 안내, ▲입학 상담 순서로 진행됐다. 입학 안내 이후에는 참석자들과의 질의응답과 대학원 원우회장의 대학원 생활 팁 공유의 시간도 이어졌다. 입학설명회에 참가한 한 예비 지원자는 “설명회를 통해 입시 일정 및 지원 방법 등 고려사이버대학교 융합정보대학원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특히 학부의 전공과 상관없이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학습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어문 계열 졸업자로서 지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나 이번 설명회를 통해 지원의 결심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한편 고려사이버대 융합정보대학원은 내년 1월 10일까지 2024학년도 신입생을 모집 중이다. 국내외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했거나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는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 학업수행능력/전공적합성 등을 고려해 서류와 면접전형을 통해 선발한다. 입학 상담은 대표 번호(02-6361-2002)와 홈페이지를 통해 받을 수 있다.
  • 조선 최초 왕비의 무덤을 파헤쳐라…청계천 광통교에 숨겨진 이야기 [한ZOOM]

    조선 최초 왕비의 무덤을 파헤쳐라…청계천 광통교에 숨겨진 이야기 [한ZOOM]

    호랑이를 사냥하던 무사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우물 가에 있던 여인에게 물 한 바가지를 부탁했다. 여인은 물이 담긴 바가지에 버들잎 하나를 띄워 무사에게 건넸다.“차가운 물을 급하게 드시면 탈이 날 수 있으니, 천천히 드시라고 버들잎을 띄웠습니다” 여인의 현명함에 감탄한 무사는 여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무사는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이고, 여인은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1396)로 전해진다. 이성계에게는 정실부인이자, 정종(定宗)과 태종(太宗)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1391)가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조선 건국 1년 전 한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덕왕후 강씨가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됐다. 이 이야기는 이성계와 강씨의 첫 만남을 로맨틱하게 그리고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의 만남은 정략결혼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고려 말기로 돌아간다.  고려 영웅의 등장과 권력 투쟁 1380년 이성계는 전라북도 남원 황산(荒山)에서 1500명의 군사로 왜구 10000명을 무찌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황산대첩(荒山大捷)을 통해 이성계는 고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변방의 무사였던 이성계에게 중앙정계의 벽은 높았다. 이때 개경의 권문세족 강씨의 집안이 이성계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정략결혼을 통해 강씨 집안은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성계는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강씨와 결혼한 이성계는 함경도에서 친어머니와 살고 있던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을 개경으로 불렀다. 아직 어린 이방원은 강씨의 집에 머무르면서 당대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강씨는 이방원을 친아들처럼 따뜻하게 보살폈다. 이방원 역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했을 때 목숨을 걸고 강씨와 강씨가 낳은 동생들을 지켰을 만큼 강씨를 친어머니처럼 믿고 따랐다.  1392년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그리고 강씨는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가 되었다. 이성계는 개국공신인 아들 이방과(훗날 정종)와 강씨의 큰 아들 이방번에게 태조의 친위군 절제사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조선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에게는 아무런 벼슬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함경도로 가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맡으라고 명했다.  얼마 후 이성계는 이방원을 궁궐로 불렀다. 당시 명나라는 새로 생긴 조선을 길들이기 위해 갖가지 핑계로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명나라로 가서 조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외교관계를 수립해 오라고 명했다. 어쩌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방원은 외교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방원의 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라도로 가서 왜구를 막는 일을 하라고 명했다. 한편, 궁궐에서는 이방원이 친어머니처럼 믿고 따랐던 강씨가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손을 잡고 자신이 낳은 둘째 아들 의안대군(이방석)을 왕세자로 만들었다. 이방원은 억울하고 또 두려웠다. 만약 왕세자 의안대군이 왕이 된다면 의안대군과 강씨는 최대 정적인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1396년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398년 이방원은 난을 일으켜 왕세자 의안대군을 포함해 신덕왕후가 낳은 자식들과 정도전을 제거했다(제1차 왕자의 난). 충격을 받은 이성계는 왕위를 영안대군 이방과(정종)에게 물려준 후 궁궐을 떠났다. 1400년(정종 2년)에는 이방원의 형인 회안대군(이방간)이 세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의 난을 평정한 이방원은 왕세가가 되었고 얼마 후 조선 제3대 왕 태종(太宗)이 되었다.어머니의 무덤을 파헤치라 명한 임금 1408년 태조 이성계까지 세상을 떠나자 이방원은 신하들에게 도성 안에 있는 신덕왕후의 무덤을 도성 바깥 산기슭으로 옮기고 무덤이 있던 자리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때 신덕왕후의 무덤이 옮겨간 곳이 지금의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이다.  그리고 1410년 홍수로 청계천 다리가 떠내려가자 이방원은 신덕왕후 무덤에 있는 병풍석(屛風石)을 가져와서 다리를 만들라고 명했다. 백성들이 밟고 다니는 다리에 왕비의 무덤에 있는 돌을 쓰게 한 것이다. 고인(故人)의 무덤을 훼손한 것으로도 모자라 병풍석마저 백성들이 밟고 다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리가 지금 청계광장을 기준으로 두 번째 다리인 청계천 광통교(廣通橋)다. 한때 친어머니처럼 따르던 여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 때문에 효(孝)와 충(忠)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왕이 부모에게 복수한 흔적은, 오늘도 청계천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 밑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 루체른 사자상에 남겨진 스위스의 흑역사 [한ZOOM]

    루체른 사자상에 남겨진 스위스의 흑역사 [한ZOOM]

    훈족의 침입을 피해 유럽대륙으로 넘어온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중세 유럽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독일인 조상들의 대이동’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당시 게르만족은 특정 민족을 부르는 말이 아니라 프랑크족, 반달족, 동고트족, 서고트족 등 여러 이민족을 함께 부르는 말이었다.  게르만족은 엄격한 장자상속(長子相續)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가 아닌 아들은 집을 떠나 스스로 먹고살 길을 찾아야 했다. 동화책에 떠돌이 왕자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독사과를 먹고 쓰러져 있던 백설공주를 살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왕자 역시 먹고 살길을 찾아 떠나던, 첫째가 아닌 아들이었다.  먹고 살길을 찾아 집을 떠난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던 직업은 용병(傭兵)이었다. 왕이나 영주에게 소속된 직업 군인이 되면 안정적인 수입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스위스 출신 용병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지금의 스위스는 선진국이지만, 과거의 스위스는 험준한 알프스 산맥과 호수가 전부이며, 농사지을 토지가 부족한 가난한 나라였다. 그래서 스위스 청년들은 먹고 살기 위해 유럽 각국으로 넘어가 용병이 되었다. 이들은 용병이 아니면 먹고살 길이 없었고, 스위스 용병의 이미지가 나빠지면 다음 세대가 용병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막힌다는 생각으로 고용한 왕과 영주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렇게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스위스 용병의 인기는 높아져갔고, 스위스 용병을 선호하는 전통은 지금도 남아 교황이 있는 바티칸시국에서는 스위스 근위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루체른의 상징, 카펠교(Chapel Bridge) 스위스 중부에 있는 루체른(Luzern)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 ‘카펠교’(Chapel Bridge)가 있다. 약 300m 길이의 다리의 지붕 안에는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담은 약 120점의 그림이 걸려있다. 다리의 가운데에는 탑이 있는데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포로를 감금하고 고문하던 반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루체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카펠교 주변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천천히 카펠교를 걸으며 안쪽 지붕에 전시된 그림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카펠교를 건너 북서쪽 방향으로 걸었다. 사거리가 나올 때마다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바위동굴 안에 쓰러진 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덴마크 출신 ‘베르텔 토르발센’의 설계하고, 독일 출신 ‘루카스 아호른’이 작업한 빈사의 사자상(瀕死의 獅子像)은 전투에서 쓰러진 사자의 모습을 자연바위를 조각해 만든 작품이다. 루체른의 또다른 명소, 빈사의 사자상 (瀕死의 獅子像) 빈사(瀕死)는 위독한 병이나 심각한 상처 때문에 죽음에 이른 상태를 의미한다. 빈사의 사자상은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쓰러져간 용맹한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1792년 튈르리 궁전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혁명군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멸한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빈사의 사자상을 두고 ‘전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다’라고 평가했다.  1789년 10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 부부는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파리 시내에 있는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곳에서 시민혁명군의 감시를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국왕부부는 1791년 6월 왕당파 군대가 모여 있는 파리 북동쪽 ‘몽메디(Montmédy)’로 탈출을 시도했다가 ‘바렌(Varennes)’에서 붙잡혔다. 국왕부부의 탈출시도 사건은 프랑스 시민들에게 충격이었다. 국왕이 탈출 후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되돌아올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프랑스 시민들은 국왕부부에게 심각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국왕부부에게 측은감을 느끼고 있던 온건파 시민들까지도 등을 돌렸다.  1792년 8월, 시민혁명군이 국왕부부를 끌어내기 위해 튈르리 궁전을 공격했다.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갔고, 국왕부부의 주변에는 약 800명의 스위스 근위대만 남아 있었다.  스위스 근위대는 시민혁명군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만약 자신들이 도망간다면 더 이상 비겁한 스위스 용병을 고용할 곳은 없을 것이며, 끝까지 국왕부부를 지킨다면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스위스 용병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루이 16세는 스위스 근위병들에게 퇴각하라는 명령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미 시민혁명군에게 포위당한 스위스 근위병들에게 왕의 명령서는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스위스 근위대 약 800명은 전투 중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가 죽음을 당했으며, 빈사의 사자상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먹고 살 것이 없어 용병을 수출하던 가난한 나라 스위스. 흑역사를 가진 이 나라는 시간이 흘러 선진국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도 스위스처럼 먹고살 것이 없어 미국으로, 중동으로, 유럽으로 일꾼을 수출하다가 이제 선진국 대열에 오른 나라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도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역사적 작업을 해야하지 않을까? 빈사의 사자상에서 가슴에 숙제를 안고 발길을 돌렸다.
  • ‘공포의 외인구단’ 까치와 엄지를 아신다면…경북 울진군 이현세 만화거리 마을 [한ZOOM]

    ‘공포의 외인구단’ 까치와 엄지를 아신다면…경북 울진군 이현세 만화거리 마을 [한ZOOM]

    웹툰(Webtoon)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 영화의 흥행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엔딩 크레디트(Ending Credits)에서 ‘웹툰 원작’ 이 네 글자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고, 웹툰 작가로 성공하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만화를 본다는 것은 시간낭비이자, 일탈이었고 심지어 나쁜 행동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사회적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 만화를 작품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가들이 있었다. 특히 군부독재시절 글자 하나하나까지 검열을 받아야만 했던 창의력 말살의 시대에 등장한 이현세, 허영만, 김수정, 박봉성, 황미나 등의 작가들은 대한민국 만화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선구자들이었다. 이 작가들의 작품은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애니메이션으로, 영화로,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 만화의 선구자 '공포의 외인구단'  작가 이현세  작가들 중에서도 ‘식객’, ‘타짜’ 등의 흥행을 통해 유명해진 허영만 작가는 미디어에도 자주 출연하여 대중의 인지도가 높다. 반면,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작가가 있다. 바로 ‘공포의 외인구단’의 이현세 작가이다. 2012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각계 전문가 100명과 독자 1000명을 대상으로 만화 선호도 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이현세 작가의 대표작인 ‘공포의 외인구단’이 1위에 선정되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1986년 작품이다. 출간된 지 약 30년이 흘렀음에도 1위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만화에서 이 작품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자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경북 울진군 매화면 ‘이현세 만화거리마을’ 경북 울진군 매화면은 이현세 작가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곳은 부친의 고향이다. 이현세 작가는 포항에서 태어났고 경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시라소니 역할을 맡았던 조상구 배우를 만났는데, 조상구 배우를 모티브로 ‘까치 오혜성’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매화면 매화마을 역시 많은 지방 소도시처럼 인구감소 위기로 고민하고 있었다. 비록 이현세 작가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모친이 이현세 작가를 임신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 작은 인연을 가지고 주민들이 이현세 작가를 찾아 설득했다. 이후 마을 곳곳에 이현세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들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2017년 이 곳에 ‘이현세 만화거리 마을’이 탄생했다. 매화초등학교와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란 벽에 그려진 ‘공포의 외인구단’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반대편에는 마을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만화거리는 매화초등학교와 매화면사무소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1구간’, 만화도서관이 있는 복지회관에서 시작하는 ‘2구간’ 그리고 마을 가운데 있는 3구간, 총 세 개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3구간은 ‘공포의 외인구단’ 전편 줄거리 명장면을 걸으면서 감상할 수 있는 구간이었다. 남벌열차 카페와 만화도서관 작품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어느 새 마을의 끝에 이르렀다. 마을 끝에는 매화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오래 전 철로를 달리던 새마을호 열차의 1량을 개조해 카페로 만든 ‘남벌카페’가 있었다. 카페 입구에는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인공 까치, 엄지, 마동탁의 동상이 서 있었고, 정문 옆 커다란 벽에는 이현세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 ‘남벌’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남벌(南伐)’은 이현세 작가의 1990년대 초반 작품이다. 조선시대 효종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청나라를 상대로 북벌(北伐)을 추진했던 것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대한민국이 일본 정벌전쟁을 일으킨다는 내용으로 대히트를 기록했다. 남벌카페에서 다시 마을로 들어서니 매화마을 복지회관이 나타났다. 복지관 1층에는 ‘만화도서관’에 들어서니 약 2000권의 만화책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이 곳에는 ‘공포의 외인구단’, ‘남벌’, ‘그리스 로마신화’, ‘아마게돈’, ‘폴리스’와 같은 이현세 작가의 대표작품뿐만 아니라 허영만, 이두호, 박봉성 등 유명작가들의 시그니처 작품들도 있었다. 이제는 대여하기도, 구매하기도 어려운 작품들을 마주하니 반가움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만화가 그린 미래를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 일본의 로봇 과학자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과학자가 된 동기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과학자들은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본 ‘아스트로 보이(Astro Boy, 한국명 : 아톰)’을 보며 인간과 교감하는 인조인간 로봇을 만드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2008년 마블 스튜디오(Marvel Studio)가 공개한 아이언맨(Iron Man)은 1963년 故 스탠리(Stanley Martin Lieber, 1922~2018)’가 창조한 만화 캐릭터였다. 현존하는 하이테크가 집대성된 아이언맨에 성인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이언맨을 보고 자란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인류가 인공지능 하이테크 수트를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만화에서 재미를 찾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만화가 그리는 세상을 현실로 만드는 꿈을 꾸기도 한다. 변신로봇을 타고 우주여행을 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꿈을 꾸는 세대들이 그 꿈을 놓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몫일 것이다.
  • 키가 큰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요새의 도시 코토르(Kotor) [한ZOOM]

    키가 큰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요새의 도시 코토르(Kotor) [한ZOOM]

    전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들이 사는 나라는 어디일까? ‘세계 인구 논평’(World Population Review)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 192개국 가운데 1위는 ‘네덜란드’가 차지했으며, 이어 ‘몬테네그로’ 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미국’은 47위, ‘한국’은 67위를 차지했다. 두 나라의 순위 차이는 크지만, 키 차이는 남자 1.4cm, 여자 0.1cm로 크지 않았다. 영원히 우리보다 키가 클 것만 같았던 미국인과 우리가 이제는 비슷한 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발견이었다.  2위를 차지한 몬테네그로(Montenegro)를 여행해보면 이 나라 사람들의 키가 크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레스토랑이나 호텔 화장실에 가면 변기의 높이가 높았다. 처음에는 그 불편함이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현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물어보니 변기의 높이가 높은 것은 사실이며, 몬테네그로를 방문하는 한국인들 대부분이 변기 높이로 인한 불편함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키가 우리보다 약 7cm나 큰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변기의 높이가 높은 것은 당연하지만, 키가 약 7cm 작은 우리 입장에서는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검의 산의 의미를 가진 나라, 몬테네그로  몬테네그로는 발칸반도의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나라다. 동쪽으로는 세르비아, 서쪽으로는 아드리아해, 남쪽으로는 알바니아, 북쪽으로는 보스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몬테네그로’는 ‘검다’의 ‘네그로(Negro)’와 ‘산’의 ‘몬테(Monte)’가 합쳐진 이름으로 ‘검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검은 산’은 아름다운 요새의 도시 ‘코토르(Kotor)’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로브첸 산(Mount Lovcen)’을 의미한다.  몬테네그로의 대표적인 관광도시 코토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이다. 성벽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요새의 웅장함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요새의 도시, 코토르  몬테네그로에는 수많은 도시가 있다. 그 중에서 아드리아해 코토르만에 위치한 ‘코토르’(Kotor)’는 작은 도시이지만 자연역사지구와 이 도시를 둘러싼 성벽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중세 해양도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코토르는 아드리아해 연안 코토르 만에 위치한 지리적 이유 때문에 수많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았다. 그래서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us I, 483~565)는 535년 이 도시를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요새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만 투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수많은 나라들이 이 도시의 주인 자리를 거쳐갔다.  고양이의 천국, 코토르  코토르 중심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차를 마시다가 잠시 화장실에 갔다. 돌아와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고양이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살짝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마시던 차를 포기하고 코토르 거리를 걸었다. 발이 닿는 곳마다 고양이들을 만났다. 관심을 끌기 위해 보스니아에서 산 육포를 내밀었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잠시 냄새만 맡고나서 다시 햇살이 비치는 자리로 돌아가 하품만 해댔다. 코토르는 고양이의 천국이었다. 곳곳에 고양이와 관련된 가게들이 있었다. 심지어 기념품 가게에는 계산대 옆에 고양이 먹이를 위한 모금함이 있었다. 기념품을 계산하면서 점원에게 코토르에 고양이가 많은 이유를 물었다. “오래 전 유럽 전역에 흑사병이 돌아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어요. 그때 흑사병을 옮기는 동물이 쥐였어요. 다행히 고양이들이 쥐를 잡아주었어요. 그래서 우리 코토르에서는 고양이를 고마운 동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고양이들은 코토르 사람들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관광객의 자리도 빼앗으며 이 도시의 주인이 된 것이었다. 
  • 대나무(竹島)가 한 그루도 없는 돌섬(獨島), 우리 독도 [한ZOOM]

    대나무(竹島)가 한 그루도 없는 돌섬(獨島), 우리 독도 [한ZOOM]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1989년 가수 겸 작곡가 한돌(본명 이흥건·李興健)이 태풍으로 일주일 동안 독도에 갇혀 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노래 ‘홀로 아리랑’을 발표했다. 이 노래는 가수 서유석이 불러 많은 사랑을 받았다.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이유 도대체 일본은 돌 밖에 없는 이 작은 섬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리적 가치’와 ‘자원적 가치’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지리적 가치를 보면 제국주의 일본에게 독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해를 거쳐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는 동시에 동해 바닷길을 통해 만주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1904년 2월 일본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명분으로 대한제국과 강제로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체결했다. 여기서 ‘공수동맹’이란 제3국의 공격을 공동으로 공격 또는 방어하는 동맹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일의정서는 대한제국의 모든 토지와 자원을 일본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일본은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고 만주로 진출하는 발판을 세우기 위해 한반도 북부에서 시작해 울릉도, 독도를 거쳐 일본까지 연결하는 해저케이블 설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독도에 망루(望樓, watchtower)를 설치했다.  두 번째로 자원적 가치를 보면 독도는 천문학적 규모의 경제를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유석재 작가는 그의 저서 ‘독도 공부 : 한 권으로 읽는 독도 논쟁의 모든 것(고유서가, 2019)’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순 계산으로도, 섬 하나로 주변의 영해라 12해리, 그러니까 22.2㎞ 더 멀어지는 해역의 광대한 바다다. 그 바다에서 얻는 자원은 ‘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정도를 넘어선다. LNG로 환산하면 500만t에 이르는 천연가스와 미래 자원인 메탄 하이드레이트가 독도 인근 바다에 있다. 독도 해저에는 현재 전량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인산염 광물이 부존돼 있다. 수심이 200m보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동해의 심층수는 그 자체가 중요한 수자원이다. 한마디로 그 가치를 가늠하기 어려운 미래 자원의 보고가 바로 이 바다다.’  일본 주장을 꺾을 수 있는 한 방 1987년 일본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교토대학교 호리 가즈오(堀和生, 1951~ ) 교수가 그의 논문 ‘일본의 다케시마 편입’에서 일본 정부가 오랫동안 은밀히 보관해 온 문서를 공개했다. 그 문서의 이름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태정관 지령’이다.  이 태정관 지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내무성에서 시마네현 토지를 조사하던 중에 ‘다케시마’라는 낯선 이름을 찾아냈다. 내무성 관리는 시마네현 담당자에게 문의했고, 시마네현은 ‘다케시마 외에 섬이 하나 더 있다’라고 답변했다.  1877년 3월 17일 내무성은 ‘일본해 내 다케시마(竹島) 외 일도(一島)의 지적편찬에 대한 질품서’라는 제목으로 국가 최고기관인 태정관에 질문서를 보냈다. 그리고 1877년 3월 20일 태정관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내무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지령(指令)을 통보했다.  “문의한 다케시마 외 일도의 건은 우리나라와 관계없음을 명심할 것” 당시 일본의 입법, 행정, 사법을 모두 관장하는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이 공식문서를 통해 다케시마(당시 울릉도)와 부속 섬(독도)를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였음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이 근거 없는 주장임을 결정적인 자료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가수 정광태의 노래 ‘독도는 우리땅’ 가사만으로 독도가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 태정관 지령과 같은 결정적 증거를 대한민국 온 국민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은 일본의 궁극적 목적은 독도가 아닌 울릉도라는 사실도 잊지 않아야 한다.   독도를 지킨 위대한 사람들 1954년 4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특무상사로 전역한 울릉도 출신 홍순칠(洪淳七, 1929~1986)은 울릉도민들과 함께 ‘독도의용수비대’를 창설했다. 1954년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온 나라가 전후복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도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높을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였지만 한국전쟁 특수로 경제성장을 이룬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악용해 독도 인근에 순시선을 보내는 한편,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글이 적혀 있는 말뚝을 박아 놓기까지 했다.  일본의 이러한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던 홍순칠 대장과 수비대원들은 독도로 건너갔다. 일본이 박아 놓은 말뚝을 모두 제거하고,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자를 새겨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표시했다. (독도의 한국령 암각을 새긴 주체에 대해서는 현재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재를 털어 구한 소총으로 일본의 독도상륙을 저지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목숨을 건 노력 덕분에 1955년 1월 1일 울릉경찰서는 독도의용수비대 전원을 경찰로 임명하여 정식 독도경비대를 출범시켰다. 마침내 국제법이 인정하는 ‘실효적 지배’ 를 이룬 것이었다.  민간에서는 1965년 3월 고(故) 최종덕씨가 최초로 독도에 거주를 시작했다. 이후 김성도, 김신열 부부가 주민등록증을 독도로 옮겼다. 현재는 2018년 김성도씨 별세 후 부인 김신열씨 혼자서 독도 지킴이로 살아가고 있다. 독도의 날은 대한제국 칙령이 발표된 10월 25일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관보를 통해 울릉도(鬱陵島)의 이름을 울도(鬱島)로 바꾸고 울도군의 영역을 울릉도 인근 섬 전체, 죽도(竹島), 석도(石島)로 규정한다는 칙령 제41호를 발표했다. 여기서 석도(石島)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독도이다. 독도의 옛 이름은 ‘돌이 많은 섬’ 즉 돌섬이었다. ‘독도(獨島)’라는 이름은 돌섬의 경상도 방언인 ‘독섬’에 한자식 음훈을 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가 발표되었던 바로 그날 10월 25일을 기억하자. 이 날이 바로 독도의 날이다. 
  • 네타냐후 “이 거래가 필요해”, 5주 카타르와 미국 노력 결실 맺은 순간

    네타냐후 “이 거래가 필요해”, 5주 카타르와 미국 노력 결실 맺은 순간

    “우리는 이 거래가 필요하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 14일(현지시간) 브렛 맥거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동·북아프리카 조정관의 어깨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가 전했다. 겉으로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협상하는 일이 절대 없을 것처럼 굴던 네타냐후였지만 이렇게 절박한 속내를 드러냈던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와의 통화에서 여성과 어린이 인질 50명을 우선 석방하는 협상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고 네타냐후 총리는 이에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도저히 마주 앉을 수 없는 적처럼 보였다. 서로가 상대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21일 밤 일시 휴전과 인질 석방에 합의하게 됐다. 전격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둘 사이를 오가며 중재한 카타르와 뒤에서 연출한 미국의 긴밀한 외교적 합작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고 폴리티코와 더힐은 보도했다. 카타르가 인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에 소규모 조직을 구성할 것을 제안했고 이 조직이 이번 인질 석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카타르는 백악관에 하마스가 납치한 인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이 조직 구성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행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맥커크 조정관과 조시 겔처 백악관 부보좌관에게 이 조직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비밀리에 가동된 이 조직은 하마스와 효과적이고 직접적으로 협상하는 과정을 담당했으며 바이든 대통령이 몸소 나서기도 했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지난달 13일 바이든 대통령은 줌(Zoom) 통화를 통해 이스라엘에서 실종된 미국인들의 가족과 통화를 했고 닷새 뒤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해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만나 인질 석방 문제를 논의했다. 같은 달 23일에는 하마스에 억류됐던 미국인 인질 두 명이 석방되면서 이 비밀조직이 더 많은 인질의 석방을 끌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스라엘과는 순탄하게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하마스와의 대화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여러 요구와 메시지가 카타르 도하에서 이집트 카이로를 거쳐 가자지구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일이 반복됐다. 이런 ‘비공개 외교’의 결과로 하마스가 결국 여성과 어린이 인질이 50명 정도 된다는 정보를 제공하면서 이들을 석방할 수 있다는 신호를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렇게 5주에 걸친 외교적 노력 끝에 지난 14일 네타냐후 총리가 협상안에 동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폴리티코는 하마스의 공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인질을 집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것에 대해 국내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던 네타냐후 총리에게 이 협상이 정치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다시 고비가 찾아왔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내 통신선을 전부 끊어버리는 바람에 하마스에 정보를 전달하고 받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하마스는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의 알시파 병원을 급습하자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비밀조직을 통해 이스라엘군이 병원 운영을 유지하게 할 것이라는 얘기가 하마스로 전해져 협상이 재개될 수 있었다. 지난 18일 맥거크 조정관이 협상안의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 셰이크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사니 카타르 총리를 도하에서 만났다. 당시 카타르 측은 하마스로부터 의견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이튿날 맥거크 조정관은 카이로에서 이집트 정보기관 수장인 압바스 카멜 국가정보국(GNI) 국장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하마스로부터 협상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메시지를 전달 받았다. 맥커크 조정관은 다시 이스라엘을 찾아 전시내각에 협상안을 설명했는데 윤곽에 동의할 수 있으며, 약간만 수정하면 되겠다고 해 이를 다시 카타르에 보내 하마스에 최종안이라고 전송했다. 이렇게 48시간에 걸쳐 미세한 조정을 했고, 결국 21일 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인질 석방과 휴전 합의에 이르렀다. 미국 행정부 관계자는 이번 협상 과정에 대해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표현했다. 얼마 전 바이든 대통령이 부모가 살해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하마스에 의해 끌려갔다고 밝힌 세 살 소녀 애비게일 때문이다. 그는 “세 살 소녀가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 임산부 배지처럼 ‘장애인 배지’를… 아픈 아이 병원 동행·돌봄 했으면

    임산부 배지처럼 ‘장애인 배지’를… 아픈 아이 병원 동행·돌봄 했으면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병원에 데려다주고 보호자가 올 때까지 돌봐 주는 서비스를 도입하면 어떨까요.”(국민참여단 이성환) “임산부 배지처럼 장애인 배지를 만들면 장애인이 편안하게 노약자석을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국민참여단 안해인)보건복지부와 산하기관 중앙사회서비스원이 지난 17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서울·온 영상스튜디오’에서 연 ‘사회서비스 온라인 타운 홀 미팅’에 7건의 우수 국민제안이 소개됐다. 올해 두 번째로 열린 타운 홀 미팅에는 200여명의 국민참여단이 온라인으로 참여해 실생활에 꼭 필요한 사회서비스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국민참여단 안해인씨가 제안한 장애인 배지는 현장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꼽혔다. 가족이 수술 후 장애를 갖게 됐는데 겉으로는 장애가 드러나지 않아 대중교통 노약자석을 이용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안씨는 “장애인 등록 여부를 확인하고 보건소나 온라인을 통해 장애인 배지를 발급한다면 노약자석을 편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전문가 패널로 참석한 남궁은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설문 조사를 보면 임산부 배지를 달고도 자리를 양보받지 못했다는 응답이 80% 이상”이라며 “시민들의 배려와 양보 문화,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이성환씨가 제안한 ‘어린이집·유치원 연계 긴급 병원진료 서비스’는 광주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 중인 돌봄 서비스다. 맞벌이하느라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기 어려운 보호자를 대신해 돌봄 전담 요원이 진료·귀가까지 병원 진료 전 과정을 대행해 준다. 이씨는 “아이 병원 문제 때문에 지난해 연차의 90% 이상을 쓴 뒤로 아이를 더 낳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아이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좋은 양육 환경을 조성하는 사회서비스를 시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학생 양여경씨는 ‘낮은 문턱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안했다. 심리상담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간편하게 상담 예약을 할 수 있게 하고 청년들이 자주 이용하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등에 서비스를 홍보하자는 것이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전문가 패널 배우 이서연씨도 “상담받으려면 최소 한 달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대기 시간이 길면 상담 의지도 꺾일 것”이라며 “SNS를 활용해 상담 장벽을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거동이 불편한 취약계층을 위해 침대나 식탁 등 가구 대여 서비스를 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업무상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을 자주 방문한다는 임혁철씨는 “무릎, 척추 등이 안 좋은데도 가구를 살 형편이 안 되거나 공간이 협소해 좌식 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다. 이런 분들에게 접이식 침대, 식탁 등 가구를 대여해 주면 관절이나 심혈관 질환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품정리사 김석중 키퍼스코리아 대표는 “지자체가 중고 의료 침대를 확보해 제공하거나, 유품으로 정리돼 필요 없어진 가구 등을 신체적 제약이 있는 노인들에게 주는 나눔 문화 확산도 필요하다”고 말했다.만 18세가 돼 보육원을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한 자립준비 청년을 위해 경제 교육 서비스를 시행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장지은씨는 “나도 ‘누가 내게 필요한 경제 정보만 쏙쏙 골라 알려 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는데 자립준비 청년들은 더 막막할 것”이라며 “퇴직 은행원으로 봉사단을 구성하거나 은행·기업 간 업무 협약으로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황재현씨는 홀로 사는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배달해 주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시장과 대형 마트가 멀면 독거노인들이 생필품이나 식재료를 사기가 어렵다”며 “사회복지 공무원이나 종사자가 독거노인 가정을 방문할 때 드시고 싶은 음식, 생필품 등을 주문받아 주 1회 이상 배달 서비스를 하자”고 제안했다.발달 지연 아이들의 학습을 지원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발달 지연은 또래보다 발달이 25%가량 뒤처진 상태다. 박영주씨는 “발달 지연 아동 치료에만 월 200만~250만원이 든다”며 “국가에서 고민해 달라”고 했다. 발달 지연 치료에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부모들은 민간 실비보험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 지원 바우처도 월 최고 25만원에 그쳐 턱없이 부족하다. 타운 홀 미팅에 접수된 국민제안 중 우수 제안은 실제 정책으로 재탄생한다. 지난해 타운 홀 미팅에서 국민참여단 유민주씨가 제안한 ‘비대면 맞춤 재활운동 서비스’가 대표적인 예다. 제안 당시 유씨의 아버지는 심정지로 쓰러져 재활치료를 하고 있었으나 장애 등급을 받지 못해 가족이 돌봄을 전담하고 있었다. 현재 유씨의 아버지는 복지부 ‘일상돌봄 서비스 사업’ 대상자로 선정돼 재활운동 동행서비스를 받고 있다. 중앙사회서비스원은 유씨의 아버지가 집에서도 재활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움직임연구소 ‘어댑핏(Adapfit)’서비스를 연계했다. 이 기관의 정고운 대표는 줌(zoom)을 통한 비대면 운동 코치를 한 달에 3회 제공하고 가정을 방문해 직접 필요한 운동을 단계별로 알려 줬다. 행복도시락 사회적협동조합은 국민제안을 바탕으로 중앙사회서비스원, SK 뉴스쿨, 드리머스사회적협동조합과 함께 자립준비 청년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전북사회서비스원은 네이버 클로바와협약을 맺고 독거노인 등을 대상으로 인공지능(AI) 안부전화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고독사 위험군에게 매주 수요일 자동 전화를 걸어 건강·수면·식사·운동 등 안부를 묻고 안전을 확인하는 서비스다. 이기일 복지부 차관은 “사회서비스는 특정 계층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아니라 이제 온 국민이 이용하는 서비스”라며 “누구나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 조선의 역사를 바꾼 종로 세검정(洗劍亭)의 유래 [한ZOOM]

    조선의 역사를 바꾼 종로 세검정(洗劍亭)의 유래 [한ZOOM]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담겨있는 소중한 역사적 기록이다. 실록은 당대 임금이 서거한 후 사관(史官)이 쓴 사초(史草)를 모아 만들었다. 조선시대는 임금의 사초와 실록 열람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러한 원칙을 지킨 나라는 전 세계에서 조선왕조가 유일했다.  실록이 만들어지고 나면 사초의 유출을 막고, 종이를 재활용하기 위해 사초로 썼던 종이를 물에 씻었다. 이를 ‘세초’(洗草)라고 했다. 세초 장소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세검정(洗劍亭)이 있는 곳이었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홍제천(弘濟川) 맑은 물에 사초를 씻고, 실록의 완성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세검정은 세초 외에도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을 안고 있다. 1623년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 1575~1641)를 몰아내기 위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킨 서인세력이 궁궐 쳐들어 가기 전에 이 곳에 모여 ‘흐르는 물에 검(劍)을 씻었던(洗) 정자(亭)’가 있던 곳’이다. 세검정(洗劍亭)의 이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가장 존경하는 조선시대 임금, 광해군? 예전 한 언론사에서 ‘한국사검정능력시험 준비생이 가장 존경하는 왕, 광해군’이라는 기사가 올라온 적이 있었다. 검정시험 전문포털 ‘리얼히스토리’가 실시한 설문조사를 인용한 이 기사에 따르면 준비생이 가장 존경하는 조선시대 왕은 광해군(32%)이며, 세종(30%), 정조(15%), 성종(7%), 태조(5%), 영조(4%)가 뒤를 이었다고 한다. 리얼히스토리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인기와 더불어, 극심한 불황과 청년실업문제 등 사회문제들이 대두되면서 개혁정치를 펼쳤던 광해군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설문조사 대상이 한국사검정능력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었다는 점이다. 정확한 역사를 공부하는 수험생들이 폭군(暴君)으로 평가받는 광해군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고 그를 개혁군주로 평가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는 의병을 지휘하며 조선을 지켰고, 전쟁이 끝나고 임금이 된 후에는 명(明)과 후금(後金)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며 조선을 사대주의 위험에서 지킨 인물이었다. 그러나 즉위 초부터 왕권강화를 명목으로 전쟁으로 소실된 궁궐 재건공사를 벌여 경제파탄을 앞당겼으며, 친형 ‘임해군’을 유배하여 죽이고,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밀실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죽였다. 그리고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를 경운궁으로 쫓아내 비참한 생황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적장자가 아닌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목숨과 왕위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임)와 정치적 실패는 결국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인조반정의 주도자, 능양군  1623년 4월 11일 밤 반정세력들은 홍제원(洪濟院)에 모였다. 그런데 대장 김류(金瑬, 1571~1648)가 나타나지 않았다. 김류는 반정이 들통났다는 소문을 듣고 집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심기원과 원두표가 김류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데려왔다. 홍제원에 모두 모인 반정세력들은 인근 홍제천 물에 검을 씻으며 결의를 다지고 광해군이 있는 궁궐로 향했다. 조선시대 반정은 반정세력이 반정을 마무리 한 후 새로운 임금을 추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인조반정은 달랐다. 이 반정을 통해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은 자신의 군사력과 친인적을 중심으로 주도적으로 반정을 일으키고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仁祖, 1595~1649)가 되었다.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체코 프라하의 ‘스트라호프 도서관’ [한ZOOM]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체코 프라하의 ‘스트라호프 도서관’ [한ZOOM]

     보헤미안 랩소디 그리고 보보스 처음 ‘보헤미안’(Bohemian)이라는 말을 알게 된 것은 영국의 록밴드 퀸(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통해서였다. 보헤미안이라는 글자가 주는 느낌이 그냥 좋았다. 의미가 궁금했지만 인터넷이 없던 시절 물어볼 곳은 학교 선생님뿐이었다. “집시(Gypsy) 알지? ‘이치현과 벗님들’ 노래 ‘집시여인’에 나오잖아. 보헤미안은 집시라는 뜻이야. 이상한 옷 입고 거지떼처럼 무리지어 돌아 다니는 사람들이야.”시간이 흐른 뒤 대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은 책을 통해 ‘보헤미안’을 다시 만났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쓴 ‘BOBOS in Paradise’ (한국출판명 : 보보스 : 디지털 시대의 엘리트)라는 책이었다. ‘보보스’(BOBOS)’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부르주아(Bourgeois)와 자유와 반전(反戰)을 추구하는 보헤미안(Bohemian)을 합친 신조어였다.  보헤미아 왕국의 유산 ‘스트라호프 수도원 도서관’ 보헤미안이라는 말은 체코(Czech Republic)에서 시작되었다. 로마시대부터 체코의 서부와 중부를 보헤미아(Bohemia)라고 불렀는데, 15세기 무렵 유럽의 집시들이 이 지역으로 건너가 살면서 이들을 보헤미안(Bohemian)이라고 불렀다. 체코의 전신인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서,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Praha, 영어 : Prague)는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 구시가지에서 관광지로 유명한 카를다리(Charles Bridge)를 건넌 후 프라하성(Prague Castle)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유명한 ‘스트라호프 수도원 도서관’(Library of Strahov Monastery)을 만날 수 있다. 1143년에 세워진 이 도서관에는 약 3000권의 초판과 약 30만권 책이 소장되어 있다. 신학의 방(Theological Hall) 도서관 입장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섰는데 문득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체코는 EU 회원국이지만 아직은 유로화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로화로 입장권을 살 수 없었다. 다행히 수도원 내에 환전소가 있어 유로화를 체코 화폐인 코루나(Kourna)로 바꿀 수 있었다. 처음 들어간 곳은 1층에 있는 신학의 방(Theological Hall) 이었다. 어떤 책들이 있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책과 프레스코화의 훼손을 막기 위해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문 밖에서 내부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다.신학의 방에는 약 2만여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책장 윗 부분에는 금박을 입힌 것 같은 곡선장식이 있고, 천장 12면에는 카톨릭 성직자 시아르드 노세츠키(Siard Nosecky, 1693~1753)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방의 입구에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목상이 세워져 있다.철학의 방(Philosophical Hall) 2층으로 올라가 진정한 엔틱(Antique)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철학의 방(Philosophical Hall)’을 만났다. 이 곳은 ‘철학의 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책에서부터 중세의 철학, 역사 등 약 5만여권의 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철학의 방 천장에도 신학의 방과 같이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었다. 안내하는 분에 따르면, 수많은 천사와 철학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인간의 지적성장을 상징한다고 했다.  책천자(冊賤者)는 부천자(父賤者)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프랑스 군인이었던 장 앙리 쥐베르(Jean Henri Zuber, 1844~1909)가 쓴 ‘조선 원정기’(Une expédition en Corée)(한국출판명 :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집 안에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극동의 나라들에서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또 글을 읽지 못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다.” (발췌 :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 살림출판사, 2010) 당시 프랑스는 강대국이었지만 문맹률은 60%가 넘었다. 그런 프랑스인으로서는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은 가난한 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 책 한권의 가격은 지금의 가치로 몇십만원이 넘었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책을 가진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책을 가까이 했다. 선진국의 지식과 지혜를 얻기 위해 책 유출을 금지하는 중국에서 목숨걸고 책을 가져왔다. 권력층에 저항하면서 책을 지켰고, 적의 침략에 맞서 책을 보호했다.  우리는 책이 흔한 세상에 살고 있다. 책이 가진 가치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언제 어디서든 책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넘쳐나는 책 때문인지 책을 찾는 사람도, 책의 가치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책은 단순히 종이에 씌여진 글자가 아니다. 책을 통해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책을 잃는 것은 과거를 잊어버리는 동시에 미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유교경전인 예기(禮記)에 나오는 ‘冊賤者 父賤者’(책천자 부천자, 책을 천히 여기는 것은 아버지를 천히 여기는 것이다.)를 다시 한 번 떠올릴 때이다.
  • 달마시안이 태어난 아드리아해의 지상낙원 두브로브니크 [한ZOOM]

    달마시안이 태어난 아드리아해의 지상낙원 두브로브니크 [한ZOOM]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1979년 구시가지 전체와 성벽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크로아티아 최대 관광지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렀고,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지상 낙원’이라고 불렀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みやざき はやお, 1941~)는 그의 작품 ‘마녀배달부 키키’에 서 이 도시를 그대로 재현했다. ‘작은 떡갈나무 숲’ 의미를 담은 최대 관광도시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어로 ‘작은 떡갈나무 숲’이라는 의미다. 크로아티아 최대 관광도시이지만 16세기부터 이미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했다. 한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Venice)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무역도시이기도 했다. 1979년 구시가지 전체와 성벽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예술적인 가치로,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도시다. 로마시대부터 이 지역은 ‘달마티아’(Dalmatia)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태어난 강아지가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달마시안(Dalmatian)이다.  지상 낙원에 새겨진 전쟁의 흔적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는 높이 25m, 길이 약 2㎞의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름다운 도시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유는 침략과 전쟁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길목에 있는 나라나 도시들은 치열한 방어의 흔적을 가진다. 두브로브니크 역시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길목에 위치한 이유로 베네치아, 오스만투르크,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같은 주변국가들의 끊임없는 침략을 버텨야만 했다. 심지어 이 나라들끼리 벌이는 전쟁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도시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해안절벽을 따라 성벽을 쌓아 거대한 요새를 만들어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만들어지면서 드디어 평화가 찾아오는가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벌어지면서 아름다웠던 도시의 곳곳에 총알자국과 화약의 흔적이 채워졌다. 폐허가 되어가던 이 도시를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던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과 사람들이 두브로브니크로 향했다. 그리고 총과 대포 앞에서 인간방패를 만들어 이 도시를 지켜냈다. 지상 낙원을 사진에 담아 성벽에 올라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니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거대한 빛줄기가 바다 속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잔잔한 바다와 절벽이 만나는 곳에서는 갈매기들이 성벽 끝에 앉아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다.  성벽에 올라 내려다보니 ‘버나드 쇼’가 왜 두브로브니크를 지상 낙원이라고 불렀는지 이해되었다. 여러 장의 사진에 두브로브니크를 담아왔다. 하지만 직접 두 눈으로 바라본 두브로브니크의 아름다움을 담아내지 못한 사진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 “내 무덤에 비석과 동상을 세우지 말라”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국부(國父) ‘호 아저씨’ [한ZOOM]  

    “내 무덤에 비석과 동상을 세우지 말라”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국부(國父) ‘호 아저씨’ [한ZOOM]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살고 있는 사촌동생이 ‘바딘광장’ (Ba Dinh Square)’을 가로 질러 보이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은 호찌민의 묘소에요. 호찌민은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방부처리한 호찌민의 시신을 직접 보기 위해 이 곳을 찾고 있어요. 호찌민의 시신은 매년 러시아로 보내서 점검한다고 해요.” 솔직히 그동안 호찌민(Ho Chi Minh, 1890~1969)’이라는 인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았던 어린 시절에는 사회주의자인 호찌민의 이름을 들어볼 일이 없었다. 게다가 ‘람보’, ‘머나먼 정글’과 같이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시각으로 다룬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베트콩(Viet Cong)의 정신적 지주였던 호찌민에 대한 이미지는 긍정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사촌동생의 말을 듣고 나서는 호찌민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유와, 베트남의 경제도시 사이공을 호찌민의 이름을 붙여 ‘호찌민시티’(Ho Chi Minh City)로 바꾼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호찌민이라는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호 아저씨’의 등장 호찌민은 1890년 5월 19일 베트남의 작은 마을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응우옌 신 꿍(Nguyễn Sinh Cung)’이었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한 174개의 수많은 가명 중의 하나였다.  한편, 베트남 사람들은 국부(國父)인 호찌민을 ‘박호(Bác-Hồ, 伯胡)’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호 할아버지’ 또는 ‘호 아저씨’라는 의미이다. 호찌민이 태어났을 때에는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원래 프랑스가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던 나라는 중국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양쯔강 유역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중국에서 내려오는 메콩강(Mekong River)과 홍강(红河, Red River)이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 역시 다른 열강들처럼 식민지 베트남을 세금과 노역으로 착취했다. 1907년 프랑스의 착취에 반발하는 농민들의 봉기가 절정에 이르던 당시 호찌민은 프랑스식 국립학교 학생이었다. 호찌민이 다니던 학교는 졸업만 하면 고위관리가 될 수 있는 곳이었지만, 호찌민은 농민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 외국어에 능숙했던 호찌민은 자청해서 농민들의 주장을 번역해서 프랑스 당국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농민들의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면서 시위에 연루된 호찌민은 퇴학당했고 프랑스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호찌민은 프랑스 경찰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어느 작은 마을에 정착해 교사가 되었다. 그러던 1911년 10월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사라졌다. 얼마 후 그는 남부 항구도시 사이공(現 호찌민시티)에 나타났다. 호찌민은 지금 이대로는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의 나라들이 힘을 가진 이유를 직접 보기 위해 주방보조 선원이 되어 프랑스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그렇게 호찌민의 세계여행이 시작되었다. 호 아저씨의 성장 프랑스로 가는 배에서 주방보조로 일하며 프랑스에 도착한 호찌민은 이후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의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했다. 그는 험한 일도 가리지 않고 경험하면서 가난하고,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직접 보고 경험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고통받는 조국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키워갔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호찌민은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원래 베트남은 중국 유교문화 영향을 받은 나라였다. 호찌민 역시 유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교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호찌민이 경험한 서구의 현실은 탐욕과 부의 착취로 보인 반면, 사회주의의 공동체 의식, 검소함, 평등 등의 가치는 유교문화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호찌민이 사회주의에 심취한 것은 어떠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찌민의 사회주의는 일반적인 사회주의와는 결이 달랐다. 유교는 봉건시대 도덕, 종교는 아편으로 취급하던 사회주의 속에서도 호찌민은 공자,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했다. 또한 호찌민은 규율과 복종에 가치를 두는 사회주의 속에서도 근면, 검소, 정의, 성실의 네 가지 덕목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호찌민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사실상 베트남 민족주의자에 더 가까웠다.  호찌민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설했고, 1941년에는 ‘베트민(Viet Minh, 越盟, 월맹)’을 결성해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에 맞서 싸웠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패망하자 베트남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1954년 5월 6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에 승리하면서 독립을 인정받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독립을 달가워하지 않은 열강들의 일방적안 결정으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나눠졌다. 이후 남베트남 정권의 폭정과 무장저항의 확산으로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다.  호 아저씨의 유언 “내가 죽은 후 웅장한 장례식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시신은 화장하고, 재를 셋으로 나누어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 주길 바란다. 내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대신 넓고 튼튼하며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지어 방문객들이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방문객들이 나를 추모하는 의미로 나루를 심는다면 세월이 지나 그 나무들이 숲을 이룰 것이다.”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2일 24번째 독립기념일 아침 호 아저씨는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7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은 검소하게 하고, 화장한 유해를 조국의 땅에 뿌려달라고 부탁한 그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애국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하지만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화장하지 않고 방부 처리되어 전시되어 있다.  쿠바의 혁명가로 유명한 ‘체 게바라(1928~1967)’는 호찌민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호찌민에 대한 대외적인 평가는 다양하다. 하직만 적어도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호 아저씨’, ‘호 할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다정하고 온화한 국부(國父)이자,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친 강인한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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