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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 없는 반항’은 진행 중, LA 그리피스 천문대 [한ZOOM]

    ‘이유 없는 반항’은 진행 중, LA 그리피스 천문대 [한ZOOM]

    조금 늦은 저녁이었다. 해는 이미 저물어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렌터카에 앉아 있기 너무 답답해 동기들에게 먼저 내리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언덕 위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조금 덥기는 했지만 습도는 높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름 밤 풀내음이 너무 좋았다. 미국생활 경험이 있는 동기를 믿고 따라왔을 뿐 여기가 어디인지, 여기에 왜 온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언덕에 다다르자 넓은 정원과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동기는 여기가 영화 ‘라라랜드’(2016)와 ‘이유 없는 반항’(1955)의 촬영장소로 유명한 ‘그리피스 천문대’(Griffith Observatory)라고 설명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영화의 촬영장소에 왔다는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잠시나마 칼 세이건(Carl Sagan∙1934~1996)을 존경하며 천문학자의 꿈을 꾸었던 젊은 날의 기억 때문이었다.로스앤젤레스의 별명, 라라랜드(La La Land) 2016년 개봉한 영화 라라랜드(La La Land)에서 주인공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엠마 스톤)이 함께 왈츠를 추었던 장면을 촬영한 장소가 그리피스 천문대였다. 이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4억 4500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렸고, 골든 글로브상 7개 부문 수상, 영국 아카데미상 5개 부문 수상, 미국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을 수상해 흥행면과 예술면에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왔다면 영화에서 받은 감동을 이 곳에서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그 점은 너무 큰 아쉬움이다.영원한 우상, 제임스 딘(James Dean)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는 많지만 세상을 떠난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춘스타로 기억되는 배우는 제임스 딘(James Dean·1931~1955)이 유일할 것이다. 그는 ‘에덴의 동쪽’(1955), ‘이유 없는 반항’(1955)으로 한 순간에 슈퍼스타가 되었지만 자동차 사고로 한 순간에 전설이 되어 사라졌다. 1955년 생전 마지막 작품이 된 ‘자이언트’ 촬영을 마치고 며칠이 지난 9월 30일이었다. 제임스 딘은 자동차를 타고 과속으로 달리다가 맞은편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하던 자동차와 충돌했고, 병원으로 실려가던 중 구급차 안에서 사망했다. 그리피스 천문대는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서 제임스 딘의 결투장면을 촬영한 장소로 유명하며, 그 인연으로 제임스 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제임스 딘은 1955년 세상을 떠난 후 1956년 에덴의 동쪽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다음 해 1957년에는 ‘자이언트’(1956)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세상을 떠난 후에 두번이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유일한 배우라고 전해진다.이유 있는 반항은 지금도 진행 중 ‘라라랜드’와 ‘이유 없는 반항’ 외에도 그리피스 천문대가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는 수없이 많다. 아놀드 슈와제네거 주연의 ‘터미네이터 I’(1984)에서는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가 처음으로 등장한 장소였으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터미네이터가 내려다본 도시가 바로 이 곳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내려다본 로스앤젤레스였다, 어느 곳을 가든지 그 곳에 대해 미리 공부하는 습관을 만들어 준 장소가 바로 그리피스 천문대였다. 평범한 천문대가 아니라는 점을 미리 알고 갔다면 제임스 딘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라도 남겼을 것이다. 당시 찍은 사진들을 찾아보니 망원경 사진만 잔뜩 채워져 있었다. 알고 바라보는 것과 모르고 바라보는 것이 주는 감동과 정보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간격이 있다. 다음에 그 길을 밟는 사람들은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글을 시작했으며 이번 주제를 마무리한다. 이 글을 쓰는 것은 나름의 ‘이유 있는 반항’이다.
  • 모차르트 명성에 가려진 비운의 누이 ‘나넬’ [한ZOOM]

    모차르트 명성에 가려진 비운의 누이 ‘나넬’ [한ZOOM]

    오스트리아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 주에 있는 장크트 길겐(Sankt Gilgen)에 도착했다. 빈(Wien)이나 잘츠부르크(Salzburg)처럼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동화책에서 본 것 같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예쁜 카페를 발견했다. 카페 외벽에는 예쁜 여인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간판에는 ‘나넬’(Nannerl)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한 이름이었다. 볼프강호수 방향으로 한참을 걷고 있었는데 문득 카페 간판에 쓰여 있던 이름이 누구인지 생각났다. 안나 마리아 발부르가 모차르트(Anna Maria Walburga Mozart·1751~1829). 음악의 천재로 기록되어 있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의 누나였다. 그리고 그녀의 별명이 바로 ‘나넬’이었다.동생의 그늘에 가려진 천재 음악가 나넬은 모차르트 보다 5살이 많았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1719~1787)는 당대 유명한 음악가였고, 그녀 역시 모차르트처럼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 나넬은 7살부터 아버지로부터 하프시코드(피아노의 전신)를 배웠다. 그리고 11살부터 3년 동안 아버지와 동생 모차르트와 함께 유럽 순회공연(그랜드 투어)를 다녀왔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연주실력을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있어 주연은 항상 모차르트였고, 난넬은 모차르트의 연주를 뒷받침하는 조연에 머물렀다. 나넬은 훌륭한 작곡가이기도 했다. 1770년 7월 동생 모차르트는 누나에게 편지를 써서 “누나가 만든 곡은 정말 아름다워. 누나가 작곡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격려한 적도 있다. 아쉬운 점은 나넬이 만든 곡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를 살펴보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마저 든다.보수적 사회분위기 속에 좌절된 음악가의 꿈 나넬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은 아버지의 교육과 3년 간의 유럽 순회공연을 통해 발전했다. 하지만 300년 전 사회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여성에게 가혹했다. 시민혁명 이전 유럽은 철저한 신분제도 속에 보수적 사회분위기가 팽배했으며 엄격한 가부장제와 남녀차별이 있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유럽 순회공연 후 1769년 모차르트와 함께 다시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모차르트는 음악가로서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넬은 어머니와 함께 잘츠부르크에 남아 집안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음악가로서 진로가 막힌 나넬은 육군 대위 ‘프란츠 디폴트’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그와의 결혼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강요로 이미 두 번의 이혼경력이 있고 5명의 자식을 가진 판사 ‘요한 폰 조넨부르크’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녀는 어머니 고향인 장크트 길겐에서 살았고, 남편이 죽은 후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곳에서 살았다.영화로 재조명된 나넬 모차르트(Nannerl, Mozart’s Sister) 2011년 개봉한 마리 페레(Marie Feret) 주연의 ‘나넬 모차르트’(Nannerl, Mozart’s Sister)는 모차르트의 누나 나넬을 인생을 다룬 프랑스 영화이다. 동생 모차르트에게 가려져 클래식 음악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비운의 천재 여성 음악가를 다룬 만큼 페미니즘의 색채가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인 성(性) 대결보다는 프랑스 영화 특유의 담담한 스토리와 수려한 색채로 채워져 그녀의 인생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영화이다. 남아 있는 음악조차 없어 나넬을 언제 다시 떠올리게 될지 모르겠다. 그녀의 자취가 남아 있는 이 곳 장크트 길겐 역시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동생의 음악 속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그녀의 생각과 감성을 떠올려 보려 한다.
  • 경기도일자리재단, 24일까지 신성장산업 일자리 직업훈련 수행기관 공모

    경기도일자리재단, 24일까지 신성장산업 일자리 직업훈련 수행기관 공모

    경기도일자리재단이 오는 24일까지 경기도 미래 먹거리인 신성장산업 직업훈련 및 취업지원 사업을 수행할 직업훈련교육 기관 및 시군 공모에 나선다. 이번 공모는 민선 8기 중점 추진 사항인 미래 신성장 동력산업 유치를 통한 산업경쟁력 강화 및 혁신 생태계 조성을 위한 인력 양성과 시군 일자리 창출을 위해 마련됐다.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헬스, 스마트공장 등 기술혁신이나 서비스 고도화를 통해 지속적인 고부가가치를 달성할 수 있는 4차 산업 및 기술분야 산업을 대상으로 한다. 공모 분야는 신성장 산업분야 인력 양성을 위한 ‘훈련 특화 과정’과 시군 신성장 분야 일자리 마련을 위한 ‘지역 특화 과정’으로 이원화해 진행 예정이다. ‘훈련 특화 과정’은 도내 기관 중 160시간 이상 직업훈련 교육 진행이 가능한 경기도 시군, 시군 산하기관, 경기도 소재 공공기관 또는 대학, 비영리단체, 직업훈련기관이라면 신청이 가능하다. ‘지역 특화 과정’은 지역 내 산업수요를 반영한 신성장 일자리 취창업 프로그램, 인턴지원금 등 취·창업 지원에 대한 제안이 가능한 경기도 시군 및 시군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한다. 재단은 이번 공모 사업을 통해 향후 신성장사업 맞춤형 기술인력 배출과 산업전환 대비 안정적인 일자리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재단은 오는 16일 이번 공모에 관심 있는 기관 및 시군 등을 대상으로 화상 채팅 플랫폼 줌(ZOOM)을 통해 ‘2024년 신성장산업 일자리 시군 공모사업 설명회’도 실시할 예정이다. 공모 관련 자세한 사항 확인 또는 설명회 참여 신청은 경기도일자리재단 누리집(www.gjf.or.kr)을 통해 확인하거나 경기도일자리재단 남부교육팀(031-270-9794)으로 전화문의 가능하다.
  •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긴 황제의 순애보 [한ZOOM]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긴 황제의 순애보 [한ZOOM]

    서양인들에게 있어 ‘로마제국’은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에 로마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후에도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과 같은 수많은 나라들은 “우리가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해왔다.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나라 중에는 러시아도 있었다.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하자 러시아의 이반3세는 “나는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Sophia Palaiologina) 공주와 결혼했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은 유일한 황제는 나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따로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제국만 로마제국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동로마제국도 서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로마제국의 역사를 계승한 제국이다. 하지만, 일부 서유럽의 역사가들이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서술하면서, 동로마제국은 유럽대륙을 버리고 떠났다가 이슬람 제국에 의해 멸망한 나라로만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은 유럽대륙 변방으로 옮겼다가 이슬람 제국에 의해 멸망한 작고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동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us I·483~565)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동로마의 위대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482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황실경비대 사령관이었던 외삼촌 유스티누스에 의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왔으며 나중에는 외삼촌의 양자가 되었다. 518년 동로마제국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황제의 후사가 없는 혼란한 틈을 타서 유스티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외삼촌 유스티누스가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원로원의 신임까지 얻었다. 시간이 흘러 527년 유스티누스도 세상을 떠났고 유스티니아누스가 뒤를 이어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재위기간(527~565)은 동로마제국은 전성기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사산왕조페르시아의 침입을 막아 제국을 안정시켰고,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게르만족이 가져간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영토의 상당부분을 되찾았다. 그리고 537년에는 소실된 ‘성 소피아 대성당’을 재건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방정교회로부터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받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로 기록되어 있다.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사랑한 여인 ‘테오도라’ 522년 동로마제국의 황태자였던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Theodora)를 만나 한 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공식적으로 그녀와의 결혼을 발표했다. 황태자의 결혼발표는 로마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테오도라는 당시 가장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던 서커스 극단의 여배우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면 황태자와 여배우의 ‘세기의 결혼’ 또는 ‘세기의 로맨스’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관습법은 고위 관료와 천한 여배우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테오도라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황태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법을 개정해서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테오도라는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테오도라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천한 신분의 여배우를 황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테오도라 황후를 마녀처럼 묘사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테오도라 황후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함께 동로마제국의 번영을 이끌었던 위대한 리더였다. 반란으로 황제의 자리가 위태로웠을 때에도, 페스트에 걸린 황제가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었을 때에도 테오도라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황제와 황실을 지켜냈다. 신분이 달라도 결혼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여성의 지참금을 강요하는 악습을 폐지했으며,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행위를 엄격히 단죄하는 법을 만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구호활동에도 앞장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그녀의 진심을 알아갔고, 어느덧 황후는 성녀(聖女)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테오도라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황후를 잃은 황제는 발이 닿는 모든 곳마다 황후를 기억했고, 황후가 생전에 실천한 모든 것들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는 언제나 테오도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고, 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에도 테오도라의 무덤을 먼저 찾아 그녀에게 승리의 기쁨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황후가 떠난 지 17년이 지난 어느 날 81세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리워하던 황후의 곁으로 떠났다.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최대 업적은 ‘로마법 대전’의 편찬이다. 로마제국의 모든 법률, 판례, 칙령 등을 집대성하여 체계적으로 구성한 로마법 대전은 이후 대륙법으로 전승되었고 독일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 법률에도 영향을 주었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1818~1892)은 그의 저서 ‘로마법 정신’을 통해 로마는 세 번에 걸쳐 세계를 지배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는 무력을 통한 유럽대륙을 통일이고, 두 번째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종교적 통일을 이룬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서양법률의 근간이 되는 로마법을 완성해 인류의 행동기준과 정신을 통일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로마법 대전을 로마제국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동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업적과 순애보를 정리하며, 동로마제국은 결코 작고 약한 유럽대륙 변방의 나라가 아니었으며,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긴 위대한 제국이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 알프스의 숨은 진주, 슬로베니아 블레드섬 [한ZOOM]

    알프스의 숨은 진주, 슬로베니아 블레드섬 [한ZOOM]

    발칸반도 북쪽에 위치한 슬로베니아(Slovenia)는 알프스산맥 동쪽 끝에 위치해 있어 스위스와 더불어 산맥이 주는 유럽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슬로베니아를 ‘발칸반도의 스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슬로베니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이지만 호수 속에 있는 섬을 하나 가지고 있다. 이 작은 섬이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블레드섬’(Bled Island)이다.블레드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슬로베니아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 블레드에는 알프스산맥의 만년설이 흘러내려와 만든 블레드 호수가 있다. 그리고 이 호수의 한가운데에는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본 것과 같은 모습의 작은 섬 ‘블레드섬’이 있다. 일단 블레드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플라트나’(Pletna)라는 이름의 배를 타야 한다. 배는 약 15명 정도 승객을 태울 수 있는 작은 크기이다. 자연보호를 위해 동력을 사용하지 않고 뱃사공이 직접 노를 저어 배를 몬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등 발칸반도에 있는 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큰 편이다. 몬테네그로는 네덜란드에 이어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키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큰 키에 매일 노를 저어 생활근육까지 가지고 있는 뱃사공이 배를 몰기 시작하자 승객들의 관심은 목적지인 블레드섬보다 뱃사공의 외모에 쏠리기 시작했다. 슬로베니아가 미남이 많은 나라로 유명하기까지 하니 잘생기고 큰 키에 근육을 가진 뱃사공의 외모에 대한 승객들의 관심은 블레드섬에 닿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도 이 곳 블레드호수와 블레드섬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 곳이 사람들로 인해 훼손되는 것이 두려웠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여왕은 블레드섬을 오가는 배의 수를 제한해 사람들을 통제했다. 그리고 배의 수를 제한하는 대신 뱃사공 자격을 아무나 가지지 못하게 하고 자격을 상속할 수 있도록 해서 뱃사공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18세기부터 이어진 뱃사공 자격 상속제도 덕분에 오늘날 뱃사공들은 연봉이 1억원에 육박하는 고소득자라고 한다. 잘생긴 외모에 고소득자라는 이야기까지 퍼지자 승객들의 감탄사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동양에서 온 사람들이 왜 감탄사를 연발하는지 알 길이 없는 잘생긴 고소득자 뱃사공은 덤덤한 표정으로 블레드섬을 향해 계속 노를 저었다.블레드 섬을 둘러싼 전설들 블레드 섬에 내려 처음 만나는 것은 99개 계단이다. 블레드섬은 결혼식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는데, 신랑이 신부를 안고 99개 계단을 모두 오르면 평생 행복하게 산다는 전설이 있다. 99개 계단을 모두 오르면 ‘성모승천성당’이라는 이름의 성당이 나온다. 원래 이 성당은 고대 슬라브 전설에 등장하는 생명의 여신 ‘지바’(Ziva)를 모시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8세기 무렵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면서 이 곳을 성당으로 바꾸었다고 한다.이 성당 50m 높이 위에는 1534년 이탈리아 파도바(Padua)에서 ‘프란치스쿠스 파타비누스(Franziskus Patavinus)’가 만든 ‘소원의 종’이 달려있다. 이 종소리를 들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기 위해 이 곳을 찾고 있다. 강도에게 남편을 잃은 아내가 있었다. 그녀는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전 재산을 들여 블레드섬에 설치할 종을 만들었다. 그런데 종을 블레드섬으로 옮기던 날 폭풍이 불어 종을 싣고 가던 배가 호수 바닥에 가라앉고 말았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다. 결국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교황이 새로운 종을 만들어 블레드섬에 보냈다.알프스의 진주 블레드호수를 끼고 있는 절벽 위에는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인 블레드성(Bled Castle)이 있다. 이 성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알프스 만년설이 녹아 만든 맑은 블레드호수와 맑은 호수 물에 비친 그림자마저 아름다운 블레드섬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순간 이 곳에 오기 전에 읽은 슬로베니아 가이드북 내용이 떠올랐다. 그 책은 블레드섬을 ‘알프스의 진주’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곳에 올라 내려다 본 블레드섬은 가이드북의 표현대로 알프스 만년설 위에 놓여있는 진주알 같아 보였다. 역시 사람이 보는 눈은 크게 다르지 읺다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블레드성 계단을 내려왔다.
  • 전설의 시작과 남겨진 숙제, 불국사와 석굴암 [한ZOOM]

    전설의 시작과 남겨진 숙제, 불국사와 석굴암 [한ZOOM]

    신성함이 요구되는 곳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설이 남아 있다. 신라인들에게 황룡사(皇龍寺)와 함께 불국정토(佛國淨土) 건설의 상징이었던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의 시작에도 그러한 전설이 남아 있다. 불국사를 만든 김대성(金大城)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대성은 전재산을 모두 부처님에게 바치고 얼마 후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김대성이 죽던 날,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는 ‘김대성이 이 집에서 환생할 것이다’라는 계시가 내렸다. 얼마 후 김문량의 아내가 왼손에 ‘대성(大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황금막대를 쥔 아들을 낳았다. 김문량은 아이의 이름을 김대성(金大城)이라 지었고, 김대성의 전생 어머니를 데리고 와서 함께 살도록 했다. 다시 태어난 김대성은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곰을 사냥한 후 깜빡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김대성은 자신이 죽인 곰으로부터 위협을 당했다. 김대성은 곰에게 진심을 다해 용서를 빌었고, 꿈에서 깨어난 후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시간이 흘러 김대성의 전생 부모와 현생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났다. 김대성은 부모님들을 기리기 위해 불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그림자가 없는 탑 무영탑(無影塔) 부산 출신인 대학교 2년 선배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고 함께 같은 대학교에 들어왔다.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고 ‘부산갈매기’를 불렀다. 요즘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면 주변 사람들의 항의로 쫓겨나겠지만 그때는 그런 낭만 아닌 낭만이 가능했다. ‘부산갈매기’ 만큼 신나지는 않지만 경주(慶州)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는 역시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가수인 현인은 성악가의 길을 걷다가 대중가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인의 종숙(從叔)이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인 현진건(玄鎭健·1900~1943)이다. 그는 1938년부터 다음 해 1939년까지 동아일보에 ‘무영탑’이라는 역사소설을 연재했다. 이 소설에는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를 역사적 기록 또는 전설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현진건이 소설 ‘무영탑’을 쓰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다. 신라는 석가탑을 만들기 위해 당시 신라보다 건축기술이 앞서 있던 백제로부터 ‘아사달’이라는 이름의 석공을 데려왔다. 아사달에게는 ‘아사녀’라는 이름의 아내가 있었다. 아사녀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아사달이 보고싶어 경주로 찾아갔다. 하지만 탑을 만드는 동안 경건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아사녀는 아사달을 만날 수가 없었다. 아사녀는 탑이 완성되면 연못에 그림자가 비출 것이라고 믿고 매일매일 연못을 보며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지친 아사녀는 연못에 몸을 던졌다. 석가탑이 완성된 후 아사녀가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사달은 급히 아사녀를 찾아 갔으나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후 사람들은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 불렀다.부처님께서 1200년 동안 숨겨둔 돼지 한 마리 2007년 정해년(丁亥年)은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붉은 돼지의 해’가 10번째 되는 해라고 해서 ‘황금 돼지의 해’로 불렸다. 그런데 그해 초 불국사에서 엄청난 이벤트가 있었다. 바로 극락전(極樂殿) 현판 뒤에서 돼지조각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처음 불국사를 만든 때가 751년이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극락전을 다시 만든 때가 1750년이다. 그렇다면 이 돼지조각상은 최소 약 260년, 최대 1260년 동안 극락전 현판 뒤에 숨겨져 있었던 셈이었다.돼지조각상이 발견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신기한 조각상을 보기 위해 불국사를 찾았다. 게다가 이 조각상이 발견된 해가 600년 만에 찾아온 ‘황금 돼지의 해’라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의미를 전해주었다. 불국사에서는 이 돼지조각상에 ‘극락전 복돼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극락전 복돼지를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극락전 앞 마당에 똑같이 생긴 돼지상을 만들어 공개했다.인간은 물을 이길 수 없다 1913년 일제에 의한 석굴암 복원작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석굴암 복원 담당자들은 터널공사 전문가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고대 석조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조선의 석공들에게 조언을 구하지도, 조선인들을 복원공사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심지어 복원공사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으면서 주먹구구식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석굴암의 냉각과 제습체계는 오늘날의 과학기술로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무지와 오만은 결국 문화재의 손상을 불러왔다. 해방 후 우리 정부는 석굴암 복원공사를 재개했다. 당시 유네스코(UNESCO)에서 온 전문가까지 동원되었지만 습도를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석굴암 내부를 밀폐된 공간으로 만들고 24시간 에어컨을 가동하는 방법을 적용했다. 지금도 석굴암 본존불(本尊佛)은 24시간 가동되는 에어컨 공기 속에서 앉아 있다. 에어컨의 진동 속에서 시나브로 훼손되어 가는 부처님의 고통이 하루 빨리 멈추기를 기원한다.
  • 역사의 뒤로 사라진 서라벌의 랜드마크 그리고 쿠쉬나메 [한ZOOM]

    역사의 뒤로 사라진 서라벌의 랜드마크 그리고 쿠쉬나메 [한ZOOM]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서라벌 왕궁 동쪽에 궁궐을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땅속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갔다. 진흥왕은 황룡이 나타난 영험한 이 땅에 궁궐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시는 거대한 사찰을 지었다. 황룡이 나타난 영험한 땅에 지어진 사찰의 이름은 황룡의 ‘누를 황(黃)’이 아니라 ‘임금 황(皇)’을 붙인 ‘황룡사(皇龍寺)’였다. 수 세기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영토를 뺏고 뺏기는 동족상잔을 이어오는 동안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있었다. 진흥왕은 황룡의 전설과 불교의 힘을 빌어 백성들의 두려움을 어루만지고 더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상징으로 황룡사를 지었던 것이다. 불국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했던 이 사찰은 1283년 몽골의 칩입으로 불타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황룡사가 있었던 땅만 남아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는 황룡의 전설도 진흥왕의 호국의지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선덕여왕과 황룡사 9층 목탑 632년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신라 제27대 왕위에 올랐다. 선덕여왕은 밖으로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 기틀을 다졌으며, 안으로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던 성군이었다.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자장법사(慈藏法師)가 태화지(太和池)라는 연못을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신령이 나타나 말했다. “신라의 여왕은 덕(德)은 있으나 위엄(威嚴)이 없어 이웃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서 신라로 돌아가 황룡사(皇龍寺)에 9층탑을 세워라. 그러면 주변 나라들이 복종할 것이며 왕실이 평안해질 것이다.” 자장법사는 신라로 돌아가 선덕여왕에게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울 것을 권했다. 그런데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든 사람은 신라인이 아니라 백제인이었다. 신덕여왕은 당시 탑에 있어서는 신라보다 앞선 백제에 비단과 보물을 보내 장인(匠人)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백제에서는 미륵사 목탑을 만든 아비지(阿非知)를 보냈다. 황룡사 9층 목탑의 각 층은 주변국을 의미했다. 1층 일본, 2층 중국, 3층 오월, 4층 탐라(제주), 5층 백제, 6층 말갈, 7층 거란, 8층 여진, 9층은 고구려를 의미했다. 자장법사가 만난 신령의 말처럼 신라를 둘러싼 주변 9개 나라를 층마다 두고 이 나라들 위에 군림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백제에서도 장인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든 아비지는 탑의 기둥을 세우는 날 조국인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면서 신라가 거대한 목탑을 만드는 의도를 눈치챘다. 수많은 고민 끝에 아비지는 결국 운명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독실한 불자였던 아비지는 이 탑을 만드는 것은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것이지 신라 여왕의 위엄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동양 최대의 목탑으로 전세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대한민국 랜드마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룡사 9층 목탑 역시 황룡사와 불타 사라져 아쉬움을 남겼다.페르시아 대서사시 ‘쿠쉬나메’ 바실라는 평범한 도시가 아니었다. 선녀로 가득 찬 낙원과 같은 곳이었다. 깨끗한 물이 사방에서 흐르고 있었으며, 개천 가까이에는 향나무들이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성 벽은 정교하게 쌓여 있어 아무것도 지나갈 수 없었다. 도시의 냄새가 너무 향기로워서 사람의 넋을 잃게 하였다. (정명섭, 바실라, 2015년) 2009년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쿠쉬나메’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쿠쉬나메’는 페르시아에서 수백년 동안 전해 내려온 대서사시이며, 영웅 ‘페레이둔’이 ‘자하크’를 물리치고 잃어버린 페르시아를 되찾는 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슬람 침입자 ‘자하크’와 그의 아들 ‘쿠쉬’에 의해 페르시아가 무너졌다.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떠났다. 아비틴은 ‘바실라’라는 나라에 도착했고, 이 곳에서 공주 ‘프라랑’과 결혼했다.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과 바실라 공주 ‘프라랑’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쿠쉬나메의 주인공 ‘페레이둔’이었다. 훗날 페레이둔은 이슬람 침입자를 물리치고 페르시아를 되찾은 영웅이 되었다.페르시아의 왕자 아비틴이 머물렀던 나라 ‘바실라’(Basilla)는 바로 ‘신라’였다. 그리고 아비틴이 결혼한 ‘프라랑’은 신라의 공주였다. 페르시아(이란) 후손들은 쿠쉬나메 서사시의 주인공 페레이둔을 존경하고 있으며, 바실라(신라) 공주 프라랑의 피가 페르시아인들에게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호의적이라고 한다. 실제 통일신라시대에 서라벌은 수많은 외국인들과 교역의 장소가 되었고, 수많은 외국인들이 이 땅에 머물러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신라의 개방성과 다양성 그리고 국제감각 덕분에 신라는 천년왕국의 맥(脈)을 이어갈 수 있었다. 비록 동양 최대의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었던 황룡사와 황룡사 9층 목탑은 몽골에 의해 역사의 뒤로 사라졌지만, 불타지 않은 정신은 남아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는 초석이 되었다.
  •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짐승의 몸으로 환생한 왕 [한ZOOM]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짐승의 몸으로 환생한 왕 [한ZOOM]

    “호화로운 장례식은 나라의 재물을 낭비하고 백성을 힘들게 하니 간소하게 하기를 바란다. 나는 죽은 후에 용(龍)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니 나의 시신을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뿌려 주기를 바란다.” 681년 신라 제30대 임금 ‘문무왕’(文武王·661∼681)이 56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후 동해바다 바위에 수중릉(水中陵)을 만들어 유골을 모셨다. 비록 용이 신성한 동물이라 할지라도, 업보에 따른 윤회를 믿는 불교사회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다음 생애에서도 부귀영화를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문무왕은 그만큼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리더이자 성군(聖君)이었다.만파식적(萬波息笛) 전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효심이 깊은 왕이었다. 그는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를 무찌르겠다는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이어 682년 마침내 감은사(感恩寺)를 완성했다. 어느 날 바다 일을 담당하는 관리가 신문왕을 찾아와 말했다. “바다에 산 하나가 감은사를 향해 떠내려오고 있습니다.” 신문왕은 점을 치는 관리를 불러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분명 용신(龍神)이 되신 선대왕 문무대왕님과 천신(天神)이 되신 김유신 대장군님께서 선물을 주려는 것이니 왕께서 직접 받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신문왕은 바닷가로 갔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감은사를 향해 떠내려오고 있는 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산에 가보니 그 모양이 마치 거북이 머리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산 위에 대나무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낮에는 둘로 갈라졌다가 밤에는 다시 합쳐집니다.” 며칠 후 바다가 고요해지자 신문왕이 직접 배를 타고 산으로 들어갔고, 검은 용이 나타나 신문왕에게 대나무를 바치면서 말했다.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온 세상이 모두 평화로 가득 찰 것입니다.” 신문왕은 용이 전해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그랬더니 적들이 물러가고, 가뭄에 비가 내리고, 몰아치던 비바람이 물러갔다. 사람들은 이 피리를 ‘세상의 온갖(萬) 어려움(波)을 없애 주는(息) 피리(笛)’라는 뜻에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불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설이나 동화에서 피리는 마법의 도구로 등장한다. 멀리 서양에서는 쥐와 아이들을 유혹한 ‘피리부는 사나이’가 그랬으며, 가까이는 강동원 주연의 영화 ‘전우치(2009)’에 등장하는 피리가 그랬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만파식적으로 추정되는 ‘옥피리’가 전시되어 있다. 이 옥피리를 불어 대한민국에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그것보다는 만파식적 전설의 이면에 있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태종무열왕 보다는 김춘추로 더 많이 알려진 문무왕의 아버지는 삼국통일이 완성되기 직전에 숨을 거두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중국 당나라가 통일 신라를 집어 삼키려는 야욕을 보였고, 각지에서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백제와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켜, 당시 신라는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통일신라의 첫번째 왕인 문무왕과 그의 아들 신문왕은 사회통합과 안정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 이 숙제를 풀기 위해서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닌, 신(神)이 주신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신라를 지키기 위해 용(龍)으로 다시 태어난 문무왕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는 만파식적의 전설은 이렇게 태어났던 것이다.문무겸비(文武兼備)의 리더십 문무왕은 이름 그대로 문(文)과 무(武)를 모두 가진, 문무겸비(文武兼備)의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진골의 신분에서 왕이 되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추진한 무열왕(武烈王) ‘김춘추’였고, 외삼촌은 ‘김유신’ 장군이었다. 아버지가 추진한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것은 문무왕이었고, 삼국통일 후 신라를 집어삼키려고 했던 당나라를 물리치고 사회통합을 이룩한 것도 문무왕이었다. 672년 현재 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석문 들판에서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세력 연합이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석문 전투). 하지만 당나라 군의 유인계에 넘어가 신라군의 주력부대가 대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대로 당나라군이 진격해 온다면 통일신라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때 문무왕은 당나라 고종에게 편지를 썼다. “죽을 죄를 지은 제가 감히 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지난 날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던 저의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오니 이번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산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전쟁 중에 거의 항복에 가까운 비굴한 내용의 편지를 받은 당나라 고종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잠시 멈추었다. 문무왕은 피눈물을 흘리며 굴욕적인 편지를 썼지만, 이 편지 덕분에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675년 현재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매소성에서 신라군과 당나라 군의 전투가 벌어졌다(매소성 전투).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나라 군 4만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실리를 위해 과감하게 고개를 숙일 수 있는 문무왕의 리더십 덕분에 통일신라는 찬란한 불교국가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 성모 마리아의 기적을 목격한 아이들, 보스니아 ‘메주고리예’ 마을 [한ZOOM]

    성모 마리아의 기적을 목격한 아이들, 보스니아 ‘메주고리예’ 마을 [한ZOOM]

    1981년 6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 ‘메주고리예’(Medugorje)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우리는 포드브르도(Podbrdo) 언덕에서 놀고 있었어요. 갑자기 어디선가 팔에 아이를 안은 여인이 나타났어요. 그녀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지만, 우리는 처음 본 그녀가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않았어요. 다음 날도 그녀가 나타났어요. 우리는 다가오라고 손짓하는 그녀에게 다가갔어요. 그녀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우리에게 화해와 평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날 이후 그녀는 몇 번이나 우리 앞에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어요. 아이들이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하지만 사회주의 정부는 아이들이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부모 그리고 이들이 다니던 성당 사람들까지 박해했다. 심지어 성당의 신부를 3년 동안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퍼져 나갔고, 성지순례를 위해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한편, 교황청에서도 교구 주교를 통해 아이들의 이야기가 맞는지 조사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오랫동안 이 곳을 성모 마리아 출현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지순례를 위해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출현지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이 곳을 순례하는 것은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치유의 예수상 포드브르도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성 야고보 성당’이 있다. 성당의 정문을 등지고 바라보면 저 멀리 거대한 청동 예수상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거대한 청동 예수상은 ‘치유의 예수상’이라고 불린다. 예수상의 오른쪽 무릎 옆부분에 헝겊을 가져다 대고 살살 문지르면 물방울이 세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물방울을 환자의 아픈 부위에 가져다 대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어 이 예수상을 ‘치유의 예수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직접 헝겊을 가져가 대고 문질러 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쳐간 이 부분은 이미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조심조심 문지르고 있으니 물방울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신기함에 놀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 물방울이 어디서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응결현상이 생길 만큼 그 날은 춥지도 않았지만, 만약 응결현상 때문이라면 이 부분 말고도 주변에 물방울들이 맺혀 있어야만 했다. 역시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과달루페 성모의 기적 1531년 12월 9일 새벽 얼마 전 카톨릭으로 개종한 아스테카 원주민 후안 디에고가 새벽 미사를 가기 위해 ‘테페약’(Tepeyac) 언덕을 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를 따라간 곳에서 그는 성모 마리아를 만났고, 성모 마리아는 이 곳에 성당을 지어달라는 말을 주교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디에고는 성모 마리아의 말을 주교에게 전했지만, 주교는 개종한지 얼마 안된 디에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얼마 후 디에고 앞에 다시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성모 마리아는 디에고에게 장미꽃이 피어있는 곳을 알려 주고 주교에게 장미꽃을 가져가라고 말했다. 성모 마리아가 알려준 곳으로 가보니 한겨울임에도 정말 장미꽃이 피어 있었다. 디에고는 원주민 전통 복장인 ‘틸마’에 장미꽃을 싸서 주교에게 가지고 갔다. 그리고 주교 앞에서 장미꽃을 꺼내려고 하는데 장미꽃이 바닥에 떨어지고 틸마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교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렸고 처음 디에고가 말한 대로 언덕에 성당을 세웠다. 1531년부터 짓기 시작한 성당은 1709년에 완성되었다. 후안 디에고가 입고 있던 틸마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걸리면서 ‘과탈루페 성모 대성당’은 멕시코를 대표하는 카톨릭 성지가 되었다. 1754년 교황 베네딕토 14세(Benedictus PP. XIV∙1675~1758)는 과달루페를 성모 마리아 발현지로 공식 인정했다. 1966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PP. VI∙1897~1978)는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 그림을 보관하는 황금 장미장을 전달했고, 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Ioannes Paulus PP. II∙1920~2005)는 과달루페가 성모 마리아를 만난 12월 9일을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축일로 지정했다. 프랑스 루르드(Lourdes), 포르투갈 파티마(Fátima)와 함께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세계 3대 성모 발현지가 된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은 전 세계인의 성지가 되었으며, 매년 디에고가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고 전해지는 12월 9일이 되면 대성 주변에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다.과달루페 성모의 기적 메주고리예는 공식적인 성모 발현지로 인정받지 못했다. 반면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은 교황청으로부터 세계 3대 성모 발현지의 하나로 인정받았다. 두 곳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객관적인 증거가 무엇이길래 메주고리예는 인정하지 않고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은 공식적인 성모 발현지로 인정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은 사라졌다. 어차피 모든 기적은 과학적 합리론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 청풍명월(淸風明月) 뒤에 남겨진 아쉬운 이야기들, 의병과 순교의 도시 제천 [한ZOOM]

    청풍명월(淸風明月) 뒤에 남겨진 아쉬운 이야기들, 의병과 순교의 도시 제천 [한ZOOM]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친일내각의 단발령 강행으로 전국적인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을미의병로 불린 이 의병운동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의병부대는 제천을 중심으로 충주, 원주 등지에서 활동했던 유인석(柳麟錫·1842~1915)의 ‘호좌의진’(湖左義陣)이었다. 호좌의진은 의병 수가 약 4000명에 달할 정도로 위세와 명성이 대단했다. 한때 홍범도(洪範圖·1868~1943) 장군도 포수부대를 이끌고 호좌의진에 합류한 적도 있었다. 항일 의병운동의 본거지 안타깝게도 호좌의진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는 양반과 유생, 그리고 실제 전투를 수행하는 평민과 천민 사이에 남아 있는 신분제도에 대한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좌의진은 재래식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반해 일본군은 최신식 무기로 중무장한 정규군이었다는 사실이었다. 1896년 선봉장 김백선이 충주 수안보 점령을 앞두고 중군장 안승우에게 지원병력을 요청했다. 하지만 안승우는 지원병력을 보내지 않았고, 김백선의 수안보 점령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투가 끝나고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지원병력을 보내자 않은 이유를 물었다. 안승우는 대장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보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화가 난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칼을 겨누고 비겁한 태도를 비난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호좌의진 대장 유인석이 김백선을 향해 소리쳤다. “네 이놈, 한낱 포수에 불과한 네놈이 감히 양반에게 칼을 겨누다니, 항명죄로 엄히 다스리겠다.” 김백선은 평민이 양반에게 칼을 겨누었다는 이유로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호좌의진을 이탈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호좌의진에서 실제 전투를 수행했던 병사들은 평민과 천민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신분의 귀천이 없는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의병이 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김백선이 처형되는 것을 보며 그 희망이 꿈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의병부대를 떠나기 시작했다. 1896년 제천 남산(南山)에서 호좌의진은 일본군을 맞아 최후의 방어전을 맞이했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목숨을 잃었고, 남은 의병들은 유인석 대장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넘어갔다.역모와 순교의 가운데에서 1791년 전라북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 두 사람이 유교적 제사방식을 거부하여 참형에 처해진 사건이 있었다. 신해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천주교도들은 종교를 버리거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봉양읍 주론산 골짜기에도 천주교도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옹기를 구워 팔면서 신앙공동체를 유지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은 지형이 배의 오목한 밑창을 닮았다고 해서 주론(舟論), 다른 말로 ‘배론’이라고 불렸다.1800년 정조(正祖)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순조(純祖)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는 정조의 재위기간 동안 성장한 남인들을 뿌리뽑기 위해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천주교도가 많은 남인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1775~1801)이 ‘배론마을’ 이야기를 듣고 이 곳으로 숨어 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천주교도들이 당한 억울한 학살과 죽음을 하얀 비단 위에 낱낱이 적어 나갔다. 그리고 중국 북경에 있는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나 얼마 후 체포되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황사영의 편지가 공개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편지의 내용에 ‘서양의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조정을 협박해 천주교를 포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회적 정서로 볼 때 이것은 매국이자 반역이었다. 황사영 편지사건으로 인해 ‘천주교도는 외세의 힘을 이용해 조선사회를 뒤집으려고 하는 매국노이자 반역자 세력’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매일 유생들로부터 천주교도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고, 천주교 탄압의 불씨는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천주교를 비롯한 서학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더 강해지면서 조선은 사회발전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리게 되었다.청풍명월(淸風明月)의 도시 제천 모든 도시는 크건 작건 그 도시가 가지고 있는 아이덴티티(Identity)가 담겨 있는 브랜드가 있다. 제천의 브랜드는 ‘청풍’(淸風)이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이 이름의 시작이 너무 궁금해졌다. 맑은 바람, 청풍(淸風)이 불어오는 이 고장의 원래 이름도 바로 ‘청풍’이었다. 한때는 제천보다 큰 도시였지만 1914년 제천에 흡수되면서 사라졌다. 흡수될 당시 인근 읍내면, 근서면을 합쳐 ‘비봉면’이 되었다가 1917년 ‘청풍’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이름이 ‘청풍면’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정부는 매년 되풀이되는 가뭄과 홍수를 방지하는 동시에 농업용수를 확보해 식량생산을 늘리기 위해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등 4대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종합개발계획을 추진했다. 1970년 정부가 4대강 유역개발 과정에서 남한강에 다목적 댐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충주댐 공사로 제천과 단양의 많은 마을들이 수몰되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민이 되었다. 특히 제천의 피해가 가장 컸었는데, 61개 마을이 사라졌고 청풍면은 27개 마을 중에 25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그래서 정식명칭인 충주호가 제천에서는 ‘청풍호’(淸風湖)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충주댐이 지어지기 전 1982년부터 3년 동안 수몰지역에 흩어져 있던 보물과 문화재를 모아 청풍호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모아 야외 박물관을 만들었다. 제천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는 이렇게 탄생했다.
  • ‘청풍호반’의 고장 제천에 전해지는 두 개의 설화 [한ZOOM]

    ‘청풍호반’의 고장 제천에 전해지는 두 개의 설화 [한ZOOM]

    의림지에 전해 지는 설화 …심술궂은 부자와 스님 오래 전 충북 제천에 심술궂고 성질이 사나운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집 앞에 찾아와 시주를 부탁하며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부자는 시주를 하는 척하며 스님이 지고 있던 바랑에 똥을 가져다 부었다. 스님은 화도 내지 않고 인사를 하더니 발을 돌렸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며느리가 급히 달려왔다. “스님 너무 죄송합니다. 제발 아버님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아버님 몰래 가져온 쌀입니다. 이거라도 받으시고 노여움 푸시기 바랍니다.” 며느리가 건넨 쌀을 받아 든 스님은 덤덤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미타불, 곧 이 곳에 비바람과 천둥이 불어 닥칠 것이니, 어서 산 위로 피하시기 바랍니다. 단, 산 위로 피신하는 동안에는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됩니다. 명심하십시오.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됩니다.” 스님이 돌아간 후, 며느리가 몰래 스님에게 쌀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자는 화가 나서 며느리를 헛간에 가두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이 말한대로 비바람과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헛간을 빠져나와 정신없이 산을 향해 달렸다. 한참을 달리던 며느리는 문득 가족들이 걱정되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던 스님의 말이 기억났지만 착한 며느리는 두고 온 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어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 순간 며느리의 몸은 돌로 변했다. 그리고 집이 있던 자리는 땅으로 꺼지면서 빗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후대 사람들은 호수가 되어버린 이 곳을 의림지(義林池)라고 불렀다.충북 제천의 이름은 의림지(義林池)에서 비롯되었다. 제천(堤川)을 해석하면 ‘물가에 있는 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물이 바로 의림지를 말한다. 제천이 고구려 영토였을 때는 내토(奈土), 신라 영토였을 때는 내제(奈堤)라고 불렸는데, 모두 커다란 둑이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충청도를 ‘호서(湖西)’, 즉 호수의 서쪽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호수가 바로 의림지를 말한다. 전설 속에서 의림지는 자연재해로 인해 만들어진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의림지는 삼한시대에 농사를 지을 물을 끌어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저수지(貯水池)이다.하지만 의림지는 흔히 볼 수 있는 저수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의림지 주변 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며 해가 뜨는 모습이나 해가 지는 모습을 본다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일출성지’ 또는 ‘일몰성지’ 해시태그를 붙일 수 있는 근사한 장면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얼마 전부터는 ‘야경성지’ 해시태그를 붙일 수 있는 곳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관광객들에게 의림지란 그저 호젓한 호수이거나 소나무 숲이 우거진 원형 산책로 정도로만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의림지의 풍광은 나들이객이 찾아오는 한낮보다는, 아침의 해 뜨는 무렵이나 저녁의 해거름 즈음에 특히 극적이고 근사하다…(중략)…수면에서 물안개 피어올라 솔숲을 감싸는 아침 나절의 모습이나, 노을 지며 용두산과 하늘이 주홍빛에서 다홍빛으로 번져가는 저녁에 물 위로 지는 산그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만 말을 잊게 된다. (정원선의 ‘제천, 스물두 개의 아스피린’에서 인용) 박달재에 전해지는 설화…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러브 스토리 가수 고(故) 박재홍이 부른 ‘울고 넘는 박달재’의 3절 후렴부에는 ‘도라지 꽃이 피는 고개마다 굽비마다 금봉아 불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라는 가사가 있다. 박달재에는 가사에 등장하는 금봉 낭자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박달재 고갯마루에 오르면 이야기에 등장하는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경상도에서 온 박달 도령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박달재 근처에 도착했을 때쯤 해가 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근처 마을로 갔고 다행히 하룻밤 재워줄 수 있는 집을 찾았다. 박달 도령은 운명처럼 그 집 딸 금봉 낭자와 서로 눈이 맞아 버렸다. 다음 날 한양으로 떠날 계획이었던 박달 도령은 금봉 낭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떠나는 날을 하루 이틀 미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과거시험이 촉박해져서야 비로소 한양으로 올라갈 채비를 서둘었다. “내가 꼭 과거시험에 급제해서 낭자를 데리러 오겠소. 그때까지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시오.” 금봉 낭자는 박달 도령이 과거시험에 급제하게 해달라고 매일 밤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시간이 가도 박달 도령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타게 박달 도령을 기다리던 금봉 낭자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금봉 낭자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문은 고개와 고개를 넘어 퍼져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박달 도령은 그제서야 돌아왔다. 과거시험에 낙방해 돌아올 면목이 없었다며 금봉 낭자의 무덤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박달 도령은 너무 많은 감정을 쏟아낸 탓인지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몇 날 며칠 금봉 낭자를 찾아 고개를 헤매다가 그만 벼랑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는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그래서 처음 박달재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 곳이 바로 노래에 나오는 천등산 이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곳은 천등산(天登山)이 아니었다. 박달재는 ‘천등산’이 아니라 구학산(九鶴山)과 시랑산(侍郞山) 사이에 있고, 천등산과는 약 5~6㎞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왜 박달재가 천등산에 있다고 했을까? 박달재를 넘어 충주방향으로 가는 길이 천등산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박달재와 천등산이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작사가 고(故) 반야월도 ‘천등산 박달재’라는 가사를 쓴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빠른 걸음보다는 느린 걸음이 어울리는 ‘슬로시티’ 제천에는 도시생활에서 일상을 벗어나 가질 수 있는 휴식(休息)과는 다른 ‘비로소 쉼’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제천시에서도 물과 산을 벗삼아 느림의 힐링(Healing)을 만날 수 있는 슬로시티(Slow-City)를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제천에 가면 빠른 걸음으로 더 많은 것을 눈에 사진에 담으려고 하기 보다는,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에 넣고 느린 걸음, 때로는 제자리 걸음으로 쉼을 느끼기를 권하고 싶다. 하지만 슬로시티 제천에서도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생각하며 걸어야 하는 곳들이 있다. 제천은 우리나라 항일 의병활동의 중심지이자,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인 사람들의 성지이기도 했다. 그 역사적 기록들을 만나러 발걸음을 돌렸다.
  • 유럽 최초의 지하철을 보며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기억하다 [한ZOOM]

    유럽 최초의 지하철을 보며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기억하다 [한ZOOM]

    1804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Franz II·1768~1835)가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약 800년을 이어온 신성로마제국이 역사의 뒤로 사라졌다.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남은 국가들을 합쳐 동군연합(同君聯合·동일 군주를 모시는 연합체) 국가인 ‘오스트리아제국’을 세웠다. 1848년 오스트리아제국 헝가리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제국은 러시아제국의 지원을 받아 혁명을 진압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제국의 위상은 하락세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866년 오스트리아제국은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독일 연방에서의 영향력마저 상실했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위기를 느낀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1830~1916) 황제는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규모가 큰 헝가리에게 공동국가를 제안했다. 기나긴 대타협의 결과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탄생했고, 헝가리는 재정, 외교, 국방 외 분야에서 확실한 자치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유럽대륙 최초로 지하철이 등장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세운 황제에게는 헝가리 국민들의 민심을 얻어야 하는 다음 숙제가 남아 있었다. 황제는 오래 전부터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의 재건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만제국 침략을 막기 위해 세운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순환도로(링슈트라세·Ringstraße)를 만들었다. 그리고 순환도로를 따라 정부기관, 박물관, 미술관 등을 세웠다. 따라서 진행대로라면 다음 순서는 수도 빈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철도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황제는 헝가리 국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빈이 아닌 부다페스트에 먼저 도시철도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부다페스트 도시철도는 1892년 착공하여 1896년 개통되었다. 이렇게 전세계 두 번째 도시철도이자, 유럽대륙 최초의 도시철도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만들어졌다.유럽대륙 최초 지하철의 우여곡절 하지만 유럽대륙 최초의 도시철도는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해체되었고, 헝가리는 유럽대륙의 약소국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패전국이 되면서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소련은 헝가리 국민들의 민심을 달래야만 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같이 도시철도를 만드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게 부다페스트에는 1호선이 완공된 1896년으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1970년 2호선, 1976년 3호선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19세기 만들어진 1호선은 고전적인 분위기가 나는데 반해, 소련이 만든 2호선과 3호선은 소련의 느낌이 난다. 1989년 동유럽에 자유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헝가리 역시 소련에서 독립하여 마침내 헝가리 공화국이 되었다. 헝가리 정부는 1990년대 지하철 확장을 계획했지만 1990년대 동유럽의 혼란과 2000년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약 38년 후인 2014년에서야 4호선을 개통할 수 있었다. 1896년 1호선, 1970년 2호선, 1976년 3호선, 2014년 4호선 이렇게 19세기부터 21세기의 모습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는 부다페스트 도시철도는 2002년 전 세계 모든 도시철도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그리고 유럽대륙의 첫번째 도시철도는 다섯 번째 노선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1호선만 좌측통행, 2~8호선은 우측통행 “1호선만 좌측통행, 2~8호선은 우측통행. 헷갈렸다간 거꾸로 타요. 출퇴근 시간 뒤바뀌죠. 정신만 차리면 괜찮아요. 멋대로 달리는 지하철” 대한민국 뮤지컬의 전설 ‘지하철 1호선’(김민기 연출) 1부가 끝날 때쯤 모든 배우가 무대에 올라 함께 불렀던 노래 ‘일호선’의 가사이다. 노래가사처럼 서울 수도권 지하철 노선에서 1호선은 좌측으로, 2호선부터는 우측으로 통행한다. 물론 일부 구간이나 노선에서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일각에서는 지하철 1호선을 일제시대에 일본이 만들었고, 나머지 노선은 해방 후에 만들었기 때문에 운행방향이 다르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1호선 착공이 1971년이었기 때문에 일제시대가 아니라 해방 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졌다. 아마도 당시 우리나라 기술로는 지하철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일제시대에 일본이 만들었다는 오해가 생긴 것 같다. 또한 1호선이 좌측통행을 하는 것은 일본 기술자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 군수물자 운반을 위해 설치한 경부선 선로와 연결해야 했기 때문에 경부선과 같은 좌측통행으로 결정한 것이었다.학전 어게인(again), 학전 포에버(forever) 유럽대륙 최초의 도시철도의 역사를 머리 속으로 정리하며 퇴근길 지하철에 올라탔다. 우리나라 도시철도는 유럽대륙 보다 시작은 약 80년 늦었다. 하지만 쾌적함과 편리함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니 역사를 비교하기 보다는 자부심을 먼저 가져도 될 것 같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 스마트폰 메모장에 정리한 내용을 적어 나가고 있었다. 그때 김민기 대표의 건강과 재정난을 이유로 대학로 ‘학전’이 문을 닫는다는 속보가 올라왔다. 갑자기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20대의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이자, 대학로를 찾으면 공연이 없어도 괜히 근처를 서성거리며 추억을 되새김질 헸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퇴근길 내내 학전의 모든 공간을 채우던,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록음악이 그리워졌다.
  •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이 만든 ‘수원왕갈비통닭’ [한ZOOM]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이 만든 ‘수원왕갈비통닭’ [한ZOOM]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2019년 개봉한 이병헌 감독 영화 ‘극한직업’에 등장한 ‘수원왕갈비통닭’은 한국인의 소울푸드(Soul Food)인 ‘갈비’의 양념 맛과 ‘치킨’의 맛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하이브리드 메뉴이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수원왕갈비통닭을 판매하는 곳을 찾아 다녔고, 일부 발빠른 사람들은 직접 레시피를 개발하기도 했다. 수원왕갈비통닭의 원조는 수원화성 인근 ‘통닭거리’ 안에 있는 ‘남문통닭’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수원 통닭거리는 평일 하루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갈 정도로 영화 팬들의 성지가 되기도 했다.영화 ‘극한직업’이 알려준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바로 수원이 왕갈비의 성지라는 점이다. 영화는 치킨집에서 잠복하던 마약반 형사가 ‘수원왕갈비의 양념’을 ‘양념통닭의 양념’ 대신 사용하면서 수원왕갈비통닭이 탄생하는 것으로 그린다. 우선 수원왕갈비의 원조는 1940년대 수원 영동시장에서 이귀성씨가 운영한 ‘화춘옥’이 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귀성씨는 소갈빗대를 그대로 양념에 재운 후 손님에게 팔았는데, 이 소갈빗대를 ‘수원왕갈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원왕갈비가 시작된 1940년대는 해방 전후 혼란과 가난으로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갈비를 저렴한 가격으로 팔기 위해서는 먼저 저렴한 가격으로 소고기가 유통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수원왕갈비의 원조 화춘옥의 이귀성씨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던 것일까? 이야기의 시작을 위해 1790년대 조선시대 후기로 거슬러 가보자.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애민정신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正祖·1752~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한양의 남쪽 방어를 위해 1796년 수원에 화성(華城)을 건설했다. 병역의무 이행을 위해 건설에 참여한 백성들에게는 급여를 지급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정조는 백성들이 건설에 참여하는 동안 생계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급여를 지급했다. 또한 겨울철에는 건설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솜옷과 털모자까지 지급했다. 당시 솜옷은 재력가들이나 가질 수 있었으며, 토끼털로 만든 털모자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급되던 귀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조는 건설에 참여한 백성들의 건강을 위해 엄격하게 제한하던 소 도축까지 예외적으로 허용했다. 이러한 정조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년)의 거중기(擧重器)까지 더해지면서 약 12만평 규모의 수원화성은 단 2년만에 완공되었다. 화성 완공 후 정조는 둔전(屯田, 군비 마련을 위해 경작하는 토지)을 만들었고 둔전을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소를 나누어 주었다. 소가 늘어나면서 송아지 거래가 늘어났고 자연히 우시장(牛市場)이 형성되었다. 수원 우시장은 한때 전국 3대 우시장으로 성장했지만 도시개발로 쇠퇴하다가 1996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애민정신 → 수원 우시장 → 수원왕갈비 → 수원왕갈비통닭 정조의 애민정신으로 수원화성이 건설되고 계획도시 수원이 자리를 잡으면서 수원 우시장도 함께 성장했다. 덕분에 수원왕갈비가 등장했고, 수원왕갈비의 양념이 치킨에 입혀지면서 수원왕갈비통닭이 탄생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마치 단절된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또다른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는 것 같다. ‘세상 모든 건의 기원’(흐름출판·2023)의 작가 강인욱 경희대 교수(고고학자)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우리는 흔히 과거와 미래를 단절된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시간은 그렇게 흐르지 않습니다. 과거는 현재와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미래와 이어집니다. 또한 미래는 다시 과거의 반복일 때도 있습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말이죠.”
  • 역사의 흐름을 바꾼 고려거란전쟁의 위대한 영웅 [한ZOOM]

    역사의 흐름을 바꾼 고려거란전쟁의 위대한 영웅 [한ZOOM]

    1010년 11월 거란 황제 ‘야율융서’ (耶律隆緒∙972~1031)가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2차 고려거란전쟁). 12월 28일 현종은 수도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다음해 1월 13일 나주에 도착한 현종은 이 곳에서 태조 왕건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왕건은 호남지역을 두고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왕건이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용(龍)을 탄 백발노인이 나타나 지금 당장 바다를 건너라고 소리쳤다. 잠에서 깬 왕건은 무엇에 홀린 듯 서둘러 병사들을 이끌고 오늘날 영암군에 있는 남해포(南海浦)로 가서 배를 타고 떠났다. 덕분에 견훤의 기습공격에서 피할 수 있었다. 한편 배를 타고 무안에 도착한 왕건은 매복하고 있다가 뒤따라온 견훤을 공격해 무찔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왕건은 나주와 영암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현종은 남해포로 가서 왕건이 꿈을 꾸었다고 전해지는 자리에 제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란의 침공으로부터 고려를 지켜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현종의 간절함이 닿았는지 이후 고려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현종은 며칠 후 나주를 떠나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구국영웅, 양규(楊規) ‘예전 당나라에서는 강태공(姜太公)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삼고 사당을 지어 64명 장군들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우리도 무성묘를 세워 김유신, 을지문덕, 유금필, 강감찬, 양규, 윤관, 조충, 김취려, 김경손, 박지, 김방경, 안우, 김득배, 이방실, 최영, 정지, 하경복, 최윤덕 등 장군들의 위패를 모셔야 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편집) 1456년(세조 2년) 재상 ‘양성지’ (梁誠之∙1415~1482)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장군들의 위패를 모시자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 적힌 이름에는 고려의 구국영웅으로 존경받았던 ‘양규’ (楊規∙미상~1011) 장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2차 고려거란전쟁이 일어나자 양규는 고려 최북단 ‘흥화진’에서 3천명의 병력으로 40만 거란군과 맞서 싸웠다. 흥화진이 쉽게 함락되지 않자 거란황제는 40만 대군 중 20만은 흥화진 인근 ‘무로대(無老代)’에 남겨두고 20만을 이끌고 ‘통주성’으로 향했다. 통주성으로 가는 길에는 고려 총사령관 강조(康兆)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조는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거란군에게 패해 처형되었고, 남은 고려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강조의 패전 소식을 들은 양규는 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흥화진을 떠나 통주성으로 향했다. 양규는 통주성 주변을 지키던 거란군 정찰대를 물리치고 통주성으로 들어갔다. 통주성의 전열을 가다듬은 양규는 추가 징발한 1000명을 포함한 1700명 결사대를 이끌고 통주성 아래 ‘곽주성’으로 향했다. 이미 함락된 곽주성에는 6000명의 거란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양규는 한밤중에 곽주성에 들어가 거란군을 전멸시키고 7000명의 포로를 구했다. 양규의 곽주성 탈환으로 거란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전쟁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양규는 거란황제가 20만군을 남겨둔 무로대를 기습해 2000명의 포로를 구했다. 양규와 결사대는 기동력을 활용한 기습공격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양규가 구해낸 포로는 약 3만명에 달했다고 한다.1011년 1월 28일 양규는 퇴각하는 거란군 선봉대 1000명을 전멸시켰다. 겨우 전투를 끝냈을 무렵 거란황제가 이끄는 대규모 본대가 도착했다. 양규는 대규모 거란군 본대를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포위되어 온 몸에 화살이 박힌 채 전사했다. 이 전투로 거란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거란군이 늘어갔으며 때마침 내린 큰 비로 인해 거란군의 갑옷과 병기가 녹슬어 갔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을 때 흥화진을 방어하던 정성(鄭成)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 후방에서 거란군을 공격했고 수많은 거란군이 압록강 속에서 죽어갔다.현종의 리더십 2차 고려거란전쟁 이후 약 8년이 지난 1018년 12월, 거란의 총사령관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면서 3차 고려거란전쟁이 일어났다. 소배압은 강동 6주의 성을 정복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판단하고 주력부대와 함께 빠른 속도로 고려 황제가 있는 개경을 향했다. 2차 고려거란전쟁 당시 현종은 끝까지 개경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거란군이 개경 입구까지 몰려오면서 어쩔 수 없이 피난을 떠나야 했다. 지난 8년 동안 현종은 백성을 버린 왕이 되지 않기 위해 백성들의 믿음을 얻는 동시에 국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현종은 개경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개경 주변의 모든 들판을 불태웠다. 적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와 식량을 없애 적을 지치게 만드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쓴 것이었다. 그리고 개경성 안에 있는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거란군을 상대했다. 주변에서 고려군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소배압은 어쩔 수 없이 퇴각을 결정했다. 돌아가는 거란군을 강감찬이 뒤쫓았고 귀주성 동쪽 벌판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 역사는 이 전투를 한국사 3대 전투의 하나인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기록한다.자랑스러운 고려인 우리나라는 코리아(Korea), 우리나라 사람들은 코리안(Korean)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코리아로 부르면서 우리는 ‘코리아에 살고 있는 코리안’이 되었다. 해석하면 ‘고려에 살고 있는 고려인’인 것이다. 조선인, 조선사람이 익숙했는데 막상 코리아를 고려로 번역하고 나니 재미있다는 느낌도 든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세웠고, 무신정권에 의해 나라가 흔들렸으며, 몽골에 의해 지배를 받았던 나라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고려는 동아시아 최강국 거란을 물리쳤고, 이후 거란, 송나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강대국이었다. 우리가 대외적으로 고려인인 만큼 이제 고려에 대해서도 관심을 높였으면 한다. 우리는 반만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고려인이기 때문이다.
  • 금지된 사랑이 만든 아름다운 궁전, 잘츠부르크 미라벨 궁전 [한ZOOM]

    금지된 사랑이 만든 아름다운 궁전, 잘츠부르크 미라벨 궁전 [한ZOOM]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Salzburg)의 대주교 볼프 디트리히(Wolf Dietrich·1559~1617)가 우연히 연회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 살로메 알트(Salome Alt)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살로메 역시 오래 전부터 디트리히 대주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성직자인 주교는 여자를 만나거나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남을 이어갔다. 얼마 후 디트리히는 살로메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교황님께 허락을 받을 테니 살로메를 저에게 주십시오.” “대주교님은 결혼하실 수 없는 몸입니다. 저는 제 딸이 대주교님의 숨겨진 여인으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디트리히와 헤어질 수 없었던 살로메는 아버지를 떠나 디트리히에게로 갔다. 디트리히도 교황에게 살로메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교황은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비밀결혼을 이어갔고 열 다섯 명의 아이가 생겼다. 디트리히는 살로메와 아이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606년 잘자흐강(Salzach) 건너편에 ‘알테나우 궁전’을 지었다. 알테나우는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 알트의 집’ 이라는 뜻이었다.금지된 사랑의 슬픈 최후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그리고 정치적 갈등이 첨예한 시기였다. 디트리히는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1573~1651)로부터 함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대항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그 동안 많은 도움을 준 황제를 배신할 수 없어 막리시밀리언의 제안을 거부했다. 막시밀리언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한 디트리히를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 잘츠부르크를 공격했다. 디트리히는 황제가 이번에도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황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결국 디트리히는 막시밀리언의 편에 선 사촌동생 호헤넴스(Hohenems)에 의해 대주교 자리에서 쫓겨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 갇힌 디트리히와 알테나우 궁전에서 쫓겨난 살로메는 서로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몰래 편지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 1617년 디트리히는 알테나우 궁전이 내려다보이는 감옥에서 눈을 감았다. 디트리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살로메는 죽을 때까지 상복을 벗지 않고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1631년 눈을 감았다.남은 이야기 디트리히를 몰아내고 대주교의 자리에 오른 호헤넴스는 디트리히와 살로메가 떠난 알테나우 궁전에 계속 머물렀다. 그리고 궁전의 이름을 ‘미라벨 궁전’ (Mirabell Palace)으로 바꾸었다. 호헤넴스 다음으로 대주교가 된 로드론은 미라벨 궁전에 별채를 짓고 정원을 넓혀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금지된 사랑이 만든 아름다운 미라벨 궁전은 1818년 화재로 훼손되었다가 복원된 후 지금은 잘츠부르크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한 두 작가 괴테와 실러의 ‘브로맨스’ [한ZOOM]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한 두 작가 괴테와 실러의 ‘브로맨스’ [한ZOOM]

    오스트리아 수도 빈(Vienna)의 중심에 있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오페라 극장 사이에는 대문호(大文豪)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 동상이 세워져 있다. 괴테 동상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도로를 건너면 빈 미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가 나온다. 화가를 꿈꾸던 히틀러가 두 번이나 입학시험에 떨어진 것으로 유명한 이 학교 앞 작은 공원에는 대문호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1759~1805)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8세기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한 두 위대한 작가 괴테와 실러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다. 1749년생 괴테와 1759년생 실러는 10살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브로맨스’(Bromance)를 이어갔다. 강연회에서 처음 우연히 만났던 두 사람은 1794년 실러가 발간한 고전주의 문학 잡지 ‘호렌’(Horen)에 괴테가 함께하면서 본격적인 협력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학계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한 10년을 독일 고전주의 문학이 꽃피운 시간으로 평가하고 있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 그리고 괴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파우스트 앞에 악마가 나타난다. “당신이 원하는 쾌락을 주겠소. 만약 그 쾌락에 만족한다면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진정 아름다우니!’를 외치시오. 그때 당신의 영혼을 가져가겠소.”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여 청년이 된 파우스트는 그레트헨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악마의 음모에 빠져 파우스트는 그레트헨의 오빠를 죽이게 되고, 그레트헨은 파우스트 사이에서 가진 아이를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힌다. 파우스트는 그녀를 탈출시키려 하지만 그녀는 거부하고 법의 심판을 받아들인다. 파우스트는 악마의 도움으로 트로이 전쟁 시대로 넘어가 당대 최고의 미녀 헬레네와 결혼한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으로 헬레네는 사라지고 파우스트는 다시 현재로 되돌아온다. 황제를 도와준 대가로 땅을 받아 간척사업에 몰두하지만 악마가 끊임없이 방해를 한다. 시간이 흘러 경험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은 파우스트는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진정 아름다우니!’를 외친 후 쓰러진다. 악마는 약속대로 파우스트의 영혼을 가져가려 하지만 악마 앞에 천사들이 나타나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한다. 괴테는 실러와 함께 독일 문학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작가였다. 그는 20대 초반 자신의 경험을 모티브로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2)을 발표했다. 이 작품의 인기와 영향은 엄청났다. 주인공 베르테르의 패션이 유럽 전역에서 유행하고, 실연당한 사람들이 베르테르처럼 권총으로 자살하는 ‘모방자살’(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이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 작품으로 괴테는 엄청난 명성을 얻었지만, 정작 그는 해적판 때문에 돈을 벌지는 못했다. 게다가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작가로 기억되는 것이 싫어 다른 작품을 계속 냈지만 ‘파우스트’ 마저도 그 인기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세계 문학사의 위대한 걸작으로 손꼽히는 ‘파우스트’(Faust)는 괴테가 평생을 바쳐 완성한 작품이다. 수많은 작가, 음악가, 화가들이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갔으며, 2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통한 공연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빌헬름 텔’과 ‘환희의 송가’ 그리고 실러 스위스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는 스위스 각 주(州)에 태수를 보내 스위스인들의 저항의지를 꺾었다. 스위스에서 가장 저항이 강한 곳은 우리(Uri) 주에 있는 ‘알트도르프란’ 마을이었다. 이 마을의 태수는 포악하기로 유명한 ‘헤르만 게슬러’였다. 이 마을에는 ‘빌헬름 텔(William Tell)’이라는 사냥꾼이 살고 있었다. 평소처럼 사냥한 고기를 팔기 위해 아들과 함께 시장에 간 텔 앞에 병사들이 나타나 창을 겨누었다. 그리고 병사들 사이로 나타난 태수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왜 나의 모자 앞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이냐!” 얼마 전 태수는 마을 광장에 모자를 걸어 놓고 지나는 사람들마다 모자를 향해 인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텔은 산 속에 살고 있어 이 사실을 몰랐다. 태수는 텔에게 말했다. “자네가 명사수라고 들었다. 만약 자네가 자네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석궁으로 맞춘다면 특별히 살려주겠다.” 텔은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맞추었다. 사람들이 기뻐하는 와중에 텔은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화살을 들키고 말았다. 만약 사과를 맞추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태수를 죽이기 위해 숨겨두었던 화살이었다. 텔은 밧줄에 묶여 끌려갔다. 텔을 태운 배가 호수에서 폭풍을 만났다. 태수는 어쩔 수 없이 배를 다루는데 능숙한 텔의 밧줄을 풀어주었다. 텔은 배를 운전하다가 배가 바위에 부딪히기 직전 탈출했다. 그리고 항구 주변에 숨어있다가 배에서 내린 태수를 쏘아 죽였다. 이 사건으로 스위스 독립혁명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실러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스위스에 가 본 적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스위스 여행 경험이 있는 소울메이트(Soulmate) 괴테가 도와주어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괴테 역시 포기했던 ‘파우스트’를 실러의 격려 덕분에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실러는 괴테와 함께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한 작가였다. 그의 작품들은 ‘빌헬름 텔’처럼 인간의 자유와 자유를 위한 투쟁을 바탕으로 했다. 악성 베토벤도 실러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래서 1824년 발표한 교향곡 9번 ‘합창’에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 일부를 가사로 사용했다.영원한 소울메이트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 출신 괴테와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 출신 실러 두 사람은 모두 바이마르(Weimar)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두 사람으로 인해 바이마르는 독일 문학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도시 곳곳에 괴테와 실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이마르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한 도시로도 유명한 곳이다.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는 괴테와 실러가 나란히 서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0㎝ 대의 실러와 160㎝ 대의 괴테를 같은 크기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 앞에 서면 위대한 작품을 남겨준 두 사람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심, 그리고 두 사람의 브로맨스가 천국에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조각가 ‘에른스트 리첼’(Ernst Rietschel)의 마음이 느껴진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
  • 동화 같은 마을에 전해지는 잔혹한 이야기, 체스키 크롬로프 ‘이발사의 다리’ [한ZOOM]

    동화 같은 마을에 전해지는 잔혹한 이야기, 체스키 크롬로프 ‘이발사의 다리’ [한ZOOM]

    체코 남부에 있는 체스키 크롬로프(Český Krumlov)는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중세시대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작은 도시다. 주차장에서 마을을 향해 조금만 걸어가면 저 멀리 ‘망토다리’(Cloak Bridge)가 보인다. 이 다리는 체스키 크롬로프 성(城)의 바로크식 극장과 정원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어깨에 망토를 걸친 것 같이 생겼다고 해서 망토다리라고 불린다. 망토다리를 블타바강 위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면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본 그림 같은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이발사의 다리에 전해지는 전설 마을을 통과하여 왼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나무로 만든 작은 다리가 나온다. 다리 가운데에는 머리에 다섯 개의 별 장식이 달린 얀 네포무츠키(Jan Nepomucký) 신부의 동상과 십자가가 못박힌 예수의 동상이 있다. 이 다리의 이름은 ‘이발사의 다리’(Lazebnický Most)이다. 겉보기에 너무도 평범하고 작은 이 다리에는 잔혹하고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Rudolf II · 1552~1612) 재위 당시 황제와 애인 캐서린 스타리사 사이에 줄리어스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황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줄리어스 왕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왕자를 체스키 크롬로프에 요양 보냈다. 줄리어스 왕자는 마을 이발사의 딸 마르게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리고 왕자의 계속되는 구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왕자가 아내 마르게타를 살해했고, 자신이 아내를 죽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왕자는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겠다며 마을사람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이발사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마을사람들까지 죽어가는 것까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딸 마르게타를 죽였다고 거짓자백을 했고 결국 살인죄로 처형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마르게타를 죽인 진범이 줄리어스 왕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분노한 황제는 줄리어스 왕자를 교수형에 처했다. 마을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이발사가 자신을 희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을사람들은 이발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이 다리를 만들었다. 전설 속에서 다리는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며, 때로는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발사의 이야기에서 다리는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아마도 딸과 자신이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현실’과, 왕자와 결혼한 딸이 행복하길 바랐던 ‘꿈’을 이어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발사의 다리’를 보며 문뜩 우리나라에 있는 ‘용다리 전설’이 생각났다.경남 진주성에 남아 있는 용다리 전설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진주성에 들어가면 김시민 장군동상과 북장대(北將臺) 사이에 돌무더기가 있다. 이 돌들은 진주성에 있던 ‘용다리’의 잔해이며, 용다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돌에는 용의 모양이 남아 있다. 진주군수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다. 둘째 딸이 제일 먼저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죽어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다. 군수집의 머슴 돌쇠는 친정으로 돌아온 둘째 딸을 좋아했다. 그래서 둘째 딸의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둘째 딸도 과부가 된 이후 거리를 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에게 한없이 친절한 돌쇠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수의 딸과 머슴 돌쇠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해도 신분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었다. 결국 둘째 딸은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상사병에 걸렸다. 용하다는 의원도 불러봤고 영험하다는 약도 써보았지만 둘째 딸은 얼마 후 눈을 감고 말았다. 딸을 잃은 슬픔 때문에 군수는 진주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가족들과 하인들을 데리고 충청도로 향했다. 매일 둘째 딸을 그리워하던 돌쇠는 일행을 따라 가다가 용다리 인근 고목나무에 목을 매 숨을 거두었다. 돌쇠가 죽은 후 용다리 아래에서는 매일 개구리 떼가 울어대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부가 된 남녀가 다리를 건너면 울음을 멈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이 다리를 건너면 나았다고 한다.동화 같은 도시, 체스키크롬로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을을 걷다 보니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유럽의 겨울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 것 같다. 다시 이발사의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왔던 망토다리 방향으로 향했다. 망토다리로 올라가 체스키크롬로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슬픈 전설을 간직한 마을 치고는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동화 같은 마을의 모습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
  • 김윤태 KIDA 원장, 이재명 대선 지원…감사원 “해임하라”

    김윤태 KIDA 원장, 이재명 대선 지원…감사원 “해임하라”

    김윤태 한국국방연구원(KIDA) 원장이 지난 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현 당대표)의 선거활동을 지원해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났다. 31일 감사원은 ‘부패행위 신고사항 등 조사’ 감사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 같은 위법을 저지른 김 원장 등에 대해 국방부 장관에게 징계 및 문책을 요구했다. 감사원은 지난해 6월부터 33일간 감사인력 7명을 투입해 실시한 실지감사에서, 김 원장과 국방대학교 모 교수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실을 확인했다며 이같이 요구했다.감사 결과 김 원장은 2021년 3월말 ‘북한산등산모임’이란 텔레그램 단체 대화방에서 A연구소 부소장 B씨로부터 이재명 후보의 국방 정책공약 개발을 요청받았다. 김 원장은 이후 B씨에게 선거공약 개발과 검토·보완을 위한 자문,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국방연 소속 직원을 추천·소개하는 등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했다. 구체적으로 김 원장은 2021년 3월 30일 국방연 원장실에서 B씨와 면담하던 중 책임연구위원 C씨를 원장실로 불러 B씨에게 추천하면서 ‘B씨가 이 후보의 대통령 선거를 조력하고 있으니 잘 도와주라’고 하면서 모병제 공약 관련 문서를 보여주고 검토해 보라고 했다. 이후 김 원장은 2021년 4월 12일 북한산등산모임 대화방에서 B씨로부터 모병제 공약 관련 문서를 전달받았고, 같은 날 C씨에게 이 후보가 언급된 부분이나 모병제 관련 정치권 입장을 기재해 놓은 부록 등 민감한 부분을 삭제하고 국방연의 한 센터 책임연구위원과 센터장에게 공유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김 원장은 B씨가 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국방연에 방문하는 2021년 4월 14일, 해당 센터장 및 책임연구위원과 함께 B씨의 자문에 응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C씨는 해당 문서를 김 원장 지시대로 수정 후 2021년 4월 13일 센터장 및 책임연구위원에게 국방망 메일로 전송하고 다음날에는 B씨에게 모병제 관련 자문을 제공했다. 김 원장은 2021년 4월말 이 후보의 국방 정책공약 관련 아이디어 제공을 위해 군사 분야 이슈를 정리한 문서를 직접 북한산등산모임 대화방에 업로드해 B씨 등 대화방 참여자들에게 공유·제공하면서 B씨의 의견을 구체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2021년 4월 16일 북한산등산모임 대화방에서 한 국회의원의 보좌관이 업로드한 국방 정책공약 관련 문서의 타이틀에 대해 ‘지금처럼 타이틀을 기본방향이 아니라, 내용을 포함해 조금 구체화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라며 수정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김 원장은 B씨가 대화방 참여자들에게 국방분야 공약과제 10개를 제출하도록 하고, 이와 관련해 대화방 참여자들의 줌(Zoom) 프로그램을 활용한 화상회의를 제안하자 회의 일정을 조율하는 등 이 후보의 국방분야 선거공약 개발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나아가 2021년 4월 16일 북한산등산모임 대화방에 공유된 선거공약 작성 양식에 맞춰 2021년 5월8일 ‘4차산업혁명시대의 첨단과학기술 적용, 미래형 강군 건설’을 정책명, ‘미래형 첨단 강군 건설, 튼튼한 안보 구현’을 슬로건, ‘임기 중 지속’을 이행기간으로 기술하는 등과 같이 ‘미래형 강군 건설’ 공약 과제 문서를 직접 작성해 C씨를 통해 B씨에게 전달했다. 실제 2022년 2월 22일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에서 발표한 이 후보의 정책공약집에는 ‘스마트 강군’ 공약 내용이 포함됐다. 김 원장은 같은해 10월쯤 한 언론사와 세미나를 공동주최하기로 정하고 11월 11일 해당 언론사의 세미나 담당자인 기자들과 관련 협의 및 홍보 방안을 토의했다는 사유로 각각 21만원의 자문비를 지급하기도 했다.또한 국방연은 2021년도 후반기 정규직, 무기계약직 등 직원 채용을 위해 같은해 9월 공고를 하고 채용절차를 거쳐 12월 직원 12명을 합격자로 발표했다. 김 원장은 이 과정에서 뽑힌 합격자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함께 연구과제를 수행한 이력이 있는 등 면접 전형위원 제척 대상인 국방연 C위원장을 면접 전형위원으로 선정했다. 감사원은 국방부 장관에게 “공직선거법을 위반해 특정 후보의 선거공약 개발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는 등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고, 예산 규정을 위반해 자문 의견을 받지 않은 외부인에게 자문료를 지급하도록 지시했으며, 제척 사유에 해당하는 자를 전형위원으로 선정한 김 원장을 감사원법에 따라 해임하라”고 문책했다. 또한 감사원은 이재명 후보의 선거공약 개발을 위한 활동 참여 등을 함께한 국방연 전 부위원장, 전 센터장 등 3명에 대해 징계처분하라고 문책했다. 감사원은 김 원장을 비롯한 국방연구원장 임직원들이 이 후보를 도운 혐의와 관련해 대검찰청에 수사참고자료로 송부하고, 관련 직원에 대해서는 수사요청했다.
  • 프라하의 상징 ‘카를교’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한ZOOM]

    프라하의 상징 ‘카를교’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한ZOOM]

    체코 프라하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카를교’(Charls Bridge)를 선택할 것이다. 블타바 강(Vltava River) 위에 놓여 있는 길이 520m, 폭 10m의 이 다리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조 다리의 하나로 손꼽힌다. 134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체코) 국왕인 카를 4세(Karl IV· 1316~1378)는 천재 건축가 페테르 파를러(Peter Parler·1333~1399)에게 홍수로 떠내려간 다리를 재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1357년 7월 9일 5시 31분 새로운 다리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 놓였다. 그런데 왜 ‘1357년 7월 9일 5시 31분’이었을까?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전해진다. 현재 날짜 표기법으로는 ‘1357년 7월 9일 5시 31분’이 맞지만, 당시 유럽의 날짜 표기법은 일과 월의 순서가 반대였다. 다시 말해 ‘7월 9일’이 아닌 ‘9일 7월’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날짜 표기법으로 정리하면 ‘1357년 9일 7월 5시 31분’이 되며, 숫자로만 나타내면 ‘135797531’이 된다. 가운데 ‘9’를 기준으로 홀수가 좌우균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수의 배열을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균형을 잃지 않고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덕분에 카를다리는 1402년 완공 후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며 프라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블타바 강물에 생매장된 성직자 카를교를 만든 카를 4세는 체코인들이 존경하는 위대한 황제였지만, 그의 아들 바츨라프 4세(Wenceslaus IV, 1361~1419)는 게으르고 무능한 황제로 전해지고 있다. 바츨라프 4세는 평소 소피아 왕비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비의 고해신부였던 얀 네포무츠키(체코어 Svatý Jan Nepomucký, 1345~1393) 신부를 불러 소피아 왕비가 고해성사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말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얀 신부는 비록 황제의 명령이라고 해도 따를 수가 없었다. “성직자가 고해성사 내용을 누설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황제의 명령이라 해도 따를 수 없습니다.” 얀 신부는 모진 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얀 신부는 혀를 뽑힌 후 카를다리로 끌려가서 블타바 강물 속에 생매장되었다. 얼마 후 얀 신부가 빠진 지점 근처에서 다섯 개의 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얀 신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얀 신부의 시신은 프라하 성 안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체코어 Katedrála svatého Víta)으로 옮겨졌고, 고해성사의 숭고한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얀 신부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유럽 곳곳에 세워졌다. 얀 신부가 순교한 카를다리에도 얀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카를다리의 양쪽 난간에는 체코인들이 존경하는 성인(聖人)들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얀 신부만 동상으로 만들어져 있다. 동상의 왼손은 십자가를, 오른손은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를 들고 있다. 그리고 머리 뒤에는 얀 신부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별 장식이 달려 있다. 유럽 곳곳에는 수많은 성인들의 동상과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얀 신부만이 머리에 다섯 개의 별 장식을 달고 있다.카를교 보수를 위한 악마와의 은밀한 거래 카를교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얀 신부 사건 후 카를다리 일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곳은 얀 신부가 강물에 던져진 지점이었다. 온갖 방법으로 보수작업을 했지만 다리는 다시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 방법으로 보수공사 책임자는 악마를 찾아갔다. “다리가 원래 모습을 되찾도록 도와주시오. 도와주신다면 보수된 다리를 처음으로 건너는 생명을 당신에게 바치겠소.” 악마의 도움으로 카를교는 원래 모습을 찾았다. 보수공사 책임자는 악마와 약속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다리가 개통되는 날 주변을 막고 닭 한 마리를 풀어 이 닭이 다리를 처음 건너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의 생명이 아닌 닭 한 마리만 악마에게 바치면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악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계획을 눈치챈 악마는 카를교가 개통되는 날 보수공사 책임자의 조수로 변신한 다음 보수공사 책임자의 아내를 찾아갔다. “책임자님께서 공사 현장에서 크게 다치셨습니다. 서둘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보수공사 책임자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카를교로 달려갔다. 그리고 남편을 찾기위해 카를교를 막고 있는 보초들을 제치고 들어갔고, 아무것도 모른 채 보수공사 책임자가 놓은 닭보다도 먼저 카를교를 건너고 말았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
  •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가 필요한 지금, 프라하 ‘존 레논 벽’ [한ZOOM]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가 필요한 지금, 프라하 ‘존 레논 벽’ [한ZOOM]

    4년 전 가을 구글 맵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걷고 있었다. 도착한 장소는 스트리트 뷰로 본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누가 봐도 공사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레논 벽’(Lennon Wall)은 불투명 천막에 가려져 있어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4년이 지나 다시 그곳을 방문했을 때 다행히 몸은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 멀리 4년 전 천막에 가려져 있던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벽 앞에 서서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마침내 ‘존 레논 벽’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 이에요.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It’s been a long time. Good to see you again.)서울의 봄 그리고 프라하의 봄 1968년 알렉산데르 둡체크(Alexander Dubček·1921~1992)가 체코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개혁주의자였던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그의 행보는 체코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소련은 둡체크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둡체크가 일으킨 변화의 물결이 공산권 국가로 퍼져 나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체코로 군대를 보냈고,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는 소련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끌려갔다. 둡체크는 유혈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체코 군대와 국민들에게 소련에 저항하지 말 것을 당부한 후 소련에 투항했다. 당시 한 외신기자가 이 사태를 두고 ‘프라하의 봄은 과연 언제 올 것인가’라는 기사를 썼다. 이후 ‘봄’은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부다페스트의 봄’, ‘서울의 봄’ 등 자유화 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체코사태 이후 약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동구권에 불기 시작한 변화의 바람이 프라하에도 불었다. 1989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다. 경찰이 비폭력 평화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더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무력은 변화의 바람을 이길 수 없었다. 주변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체코의 반정부 평화시위도 식을 줄 몰랐다. 결국 체코 공산당은 물러갔고, 역사는 이 혁명을 피를 흘리지 않고 자유를 얻었다고 하여,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으로 기록하고 있다.‘프라하의 봄’을 예견한 존 레논 1980년 12월 8일 미국 뉴욕 다코타 빌딩(The Dakota) 앞에서 다섯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을 맞은 남자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과도한 출혈로 사망했다. 그는 비틀즈의 멤버였고 싱어송라이터 이자 평화주의 사회운동가인 존 레논(John Lennon·1940~1980)이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던 존 레논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체코에서 익명의 화가가 천주교 성당 벽에 존 레논의 얼굴과 그의 노래 가사를 그렸다. 이후 이 벽에는 자유와 평화를 주제로 한 글과 그림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공산당 정부는 이 벽에 그려진 메시지를 지웠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메시지들이 채워졌다. 벽을 허물면 그만이겠지만 아무리 정부라고 해도 천주교 성당 벽을 마음대로 허물 수는 없었다. 1989년 프라하에서 벨벳혁명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 비밀리에 모이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개방된, 그러면서 잘 알려진 장소가 필요했다. 레논 벽이 바로 그런 장소였다. 매일 이 곳에서 출발해 바츨라프 광장으로 이어지는 시위와 촛불집회가 일어났고 결국 자유를 얻어낼 수 있었다.만나지 못한 ‘존 레논’과 ‘레논 벽’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레논 벽을 찾아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존 레논은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많은 사람들이 존 레논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이 곳을 찾는 이유는 존 레논과 같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가족을 잃어가고 있다. 존 레논 당신이 꿈꾸었던 세상이 자꾸만 거꾸로 돌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평화를 위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기도로 힘을 보태기 위해 이 곳을 찾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다시 이곳을 찾을 때는 그 기도가 실현되길 바라며 발걸음을 돌렸다. 한정구 칼럼니스트 deeppock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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