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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 문화인물/안중근 의사/민족교육헌신·항일 투쟁 전개

    ◎상해 유적지순례등 행사 다양 8월의 문화인물에 나라를 위해 자신을 산화시킨 독립운동가 안중근의사가 선정됐다. 문화체육부는 광복절을 기념하는 8월을 맞아 안의사를 문화인물로 선정하고 그의 헌신적 생애와 위대한 업적을 오늘에 재조명하기 위한 각종 기념행사를 8월한달간 펼쳐나가기로 했다. 안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학교육을 받고 16세 때인 1895년 천주교에 입문하여 선진문물을 배웠다.을사조약후 그는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헌신하며 의병투쟁도 전개했다. 국내 활동에 제약을 느낀 안의사는 그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이끌고 일제와 싸우던중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온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포살하고 자신은 이듬해 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문화체육부가 안중근의사숭모회등 유관단체와 함께 8월중 펼쳐나갈 주요 기념행사는 다음과 같다. ◇강연회 ▲「안중근의달」기념 특별강연회=3일 하오2시 천안 독립기념관 ▲「안중근의달」기념강연회=13일 전북 옥구 대야복지예식장 ▲안중근의사 독립사상심포지엄=21일 상오10시 카톨릭교리신학원. ◇전시회 ▲안중근의사 도서전시회=8월1∼31일 국립중앙도서관 전시실 ▲「의열항쟁의 역사현장」특별기획전=8월17일∼10월30일 독립기념관 겨레의집 ◇유적지순례 ▲안중근의사 유적지 순례=8월10∼19일 숭모회주관 중국 상해∼하얼빈∼백두산 ▲안중근의사 항일 독립유적지 순례=8월20∼29일 문화재보호재단 만주 일원 ◇기타 ▲기념영화상영=8월14일「자유만세」,15일「의사 안중근」 ▲서도백일장=10월중 안중근의사기념관 광장
  • 터 상·하(화제의 책)

    ◎풍수에 얽힌 갖가지 비화 수록 『이순자여사의 할아버지이자 이규동·이규광씨의 아버지는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혀 있었다.19 78년 가을 이규광씨는 육관도사를 찾아와 땅 살 돈도 없지만 꼭 명당으로 이장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이에 육관도사는 우선 국유지에 이장하고 나중에 불하받으라면서 「왕비가 날 곳」이라는 용인군 내사면 금박산에 터를 잡아주었다.이에 규동·규성·규광 3형제는 밤에 몰래 관을 떠메고 가 묘를 썼으나 알고보니 국유지가 아닌 S씨 소유의 사유지.S씨는 당장 파가라며 으름장을 놓고 고발하겠다며 윽박질렀지만 그러는 동안 10·26과 12·12가 잇따라 일어나 상황은 오히려 S씨가 한번만 봐달라며 애원하는 꼴이 됐다』 이 책은 육관도사가 정부종합청사,경북도청,정신문화연구원,정·재계 인사의 집터와 묘터를 잡아주며 풍수사로서 밝힐수 없었던 비화를 수록한 논픽션이다.육관 손석우 지음 답게 각 5천원.
  • “예비비 백억 보안사서 전용/10·26직후 전사령관 요구로”

    ◎김원기 전 부총리 「10·26」직후인 지난 79년 11월 보안사령부가 예비비 1백여억원을 전용해 쓴 것으로 밝혀졌다. 김원기 전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은 3일 『재무장관으로 있던 지난 79년 11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장관실로 찾아와 국고에 있는 예비비를 보안사가 돌려쓸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해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1백여억원의 예비비 전액을 보안사에 넘겨주었다』고 밝혔다. 그는 전사령관이 『보안사가 일을 하는 데 돈이 필요하나 어디에서 얻어써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예비비 사용을 요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또 당시 국무회의에는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전보안사령관이 함께 참석했으며,예비비 전용 의결시 반대한 국무위원이 없어 절차상으로는 하자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 “범법해위 12·12 그냥 넘길수 없다”/정승화씨·민주조사위 문답

    ◎김재규재판 지연 주장 어불성설/박 전대통령비자금 음모에 쓴듯 민주당 12·12진상조사위원회가 26일 발표한 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의 증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김영삼정부가 12·12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면서도 처벌은 역사에 맡기자는 입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합법으로 위장한 범법행위인 12·12 쿠데타는 공소시효가 아직 남아있으므로 묵살할 수 없다. ­12·12를 묵인 또는 방조한 것으로 보이는 최규하 전대통령,노재현 전국방장관,윤성민 전육군참모차장의 책임도 규명해야 한다는 견해에 찬성하나. ▲책임을 진 사람들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점을 철저히 가려야 한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0·26이후 이듬해 9월 정권을 잡을 때까지 약 10개월동안 5백여억원을 정치자금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는 바가 있는가. ▲전보안사령관이 박정희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다 나온 9억원중의 일부라며 내게 2억원을 가져온 적이 있다.이 돈을 경리부에 맡겼는데 12·12 직후 전합수부장이 가져갔다고 들었다.그런 돈은 분명히 음모를 꾸미는데 쓰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당시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노재현국방장관이 만류하더라도 전보안사령관을 반드시 교체했을 것이다.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측에서 12·12 이전 정총장을 회유해보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은 없는가. ▲없었다.다만 전두환 합수부장이 찾아와 부정축재자 처단 이야기를 하길래 그 문제는 새정부가 할 일이라고 못박은 적이 있다. ­전두환합수부장측이 정총장이 김재규의 재판을 지연시켰다고 주장했는데 사실인가. ▲수사와 재판이 그처럼 신속하게 진행됐는데 가당치 않은 말이다. ­유신헌법의 폐기를 정총장이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오히려 10·26직후 최초로 열린 육군지휘관회의에서 『유신헌법 개정문제를 포함해서 이제야말로 국민이 바라는 정치발전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를 군이 동요없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 민주 「12·12」 관련 서면질의서 내용/요약

    ◎최규하대통령에 대한 “하야협박” 사실인가/재가 받지않은 상황서 정 총장 연행 이유는/전 전대통령/80년5월20일 광주방문 어떤 목적이었나/9사단 1개연대 출동 누구지시며 임무는/노 전대통령 ▷전두환 전대통령◁ ▲김영삼정부가 12·12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에대한 소감은 ▲79년 11월 하순 보안사 허화평대령과 만나 정치정화계획을 세우고 정화대상자들에게 합수부에 협조하면 명단에서 제외해주겠다고 회유했다는데 대상자의 규모와 이름은 ▲79년 11월25일에서 30일 사이 허대령이 수도권 각부대의 하나회 책임자들을 개별적으로 보안사에 불러 중대사태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는데 당시 소환인물들은 ▲79년 12월6일 보안사에서 노태우 당시 9사단장을 만나 정총장을 연행하기 위해 모의한 내용은 ▲79년 12월12일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중장을 경복궁 30경비단에 불러모은 근거와 경위및 목적은 ▲정총장에 대한 체포지시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했는가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정총장을 연행한 이유는 ▲9사단 28연대와 2기갑여단 예하의 16전차대대 출동은 언제 누가 명령했는가 ▲최규하대통령으로부터 정총장 연행을 재가받게 된 경위는 ▲대통령 재가를 집단건의하기 위해 출발직전 3공수여단장 최세창준장,5공수여단장 장기오준장에게 병력장악 또는 출동준비 지시를 내렸는가 ▲최대통령의 정총장 체포건의안 재가는 언제 누가 받았는가 ▲신윤희수경사 헌병단부단장에게 하소곤육본작전참모부장과 장태완수경사령관이 순응하지 않을 경우 사살하라는 명령을 한 특별한 동기는 ▲최세창여단장을 통해 3공수여단 15대대장 박종규중령에게 정병주특전사령관이 순응하지 않으면 사살하라는 지시를 했는가 ▲장태완사령관과의 면담시 장사령관이 회유를 거절했으며 당시 이학봉보안사수사국장이 대화내용을 녹음했다는데 사실인가 ▲신현확총리를 찾아가 최대통령을 박정희대통령 시해방조죄로 조사하겠다고 한 사실이 있는가 ▲광주항쟁 진압전후인 5월22일 전투교육사령부를 방문해 보고받은 내용과 지시내용은 ▲김정렬 당시 국정자문위원과 총리공관에 찾아가 최대통령에게 하야하도록 협박한 것이 사실인가 ▷노태우 전대통령◁ ▲김영삼정부가 12·12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했는데 소감은 ▲『12·12는 구국의 일념에서 발생한 것으로 상관에게 행한 불경보다 더큰 명분과 정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소신에 아직도 변함이 없는가 ▲신군부가 79년 11월 H그룹 조모씨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제공받았다는데 사실인가 ▲12월12일 경복궁 30단에서 열린 이른바 「생일집잔치」에는 누구의 지시로 참석했으며 발언내용은 ▲12월12일 9사단 1개연대를 출동시킨 것은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이며 출동이유와 임무는 ▲당시 귀하의 직속상관인 황영시1군단장은 사후에 보고를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80년 5월20일 직접 광주를 방문했다고 하는데 누구의 지시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갔었나 ▲80년 5월20일 보안사령관실에서 당시 전두환보안사령관,진종채2군사령관,정호용특전사령관과 회의를 가진 적이 있는가 ▲80년 8월10일을 전후해 최대통령의 삼청동총리공관에 김정렬씨와 함께 무기를휴대하고 들어가 하야를 협박했다는데 사실인가 ▲10·26이후 정치정화계획 구상,광주항쟁 유혈진압,요인숙정등 정권찬탈과정의 모든 문제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협의했다는데 사실인가
  • “서세원씨 전속 위약”/SBS,손해배상소(조약돌)

    ○…서울방송은 11일 인기개그맨 서세원씨가 자사와의 전속계약을 어기고 다른 방송사에 출연,손해를 입혔다며 서씨를 상대로 6천만원의 위약금 청구소송을 서울민사지법에 냈다. 서울방송은 소장에서 『지난해 10월26일 서씨와 계약금 2천만원에 1년기한의 전속계약을 맺었으나 서씨가 이를 어기고 지난 5월 MBC방송에 출연했다』면서 『서씨는 계약에 따라 전속계약금의 3배인 6천만원의 위약금을 물어야한다』고 주장했다.
  • 12·12관련 대령 2명/월내 자진전역 조치

    육군은 27일 12·12사태관련 현역장성들의 문책성 예편조치에 이어 당시 보안사에 근무했던 김모대령등 2명을 이달말까지 자진전역시키기로 했다. 이들은 79년 12·12사태당시 신군부측에 가담,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의 10·26개입여부 수사에 앞장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 군위상 바로 세우다(사설)

    문민정부시대를 맞아 군이 국민으로 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국민의 군」으로 거듭 나야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그것은 국민적 여망인 동시에 시대적 요청이다. 군이 강력하고 건전한 군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과거 권위주의시대의 면모를 일신시켜 국방의무라는 군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토록 해야 한다.또한 군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상명하복의 지휘체계도 완벽하게 확립해야 한다.이는 안보를 튼튼히 하고 민주화와 경제적 번영을 통한 「신한국」창조라는 대업을 이루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김영삼 대통령이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한 12·12사태 관련및 인사비리로 물의를 일으킨 장성들에 대해 전역등 전격적인 인사를 단행한 것은 군이 「국민의 군」으로 거듭 나게하기 위한 통치권차원의 결단이라 할 수 있다.뿐만아니라 그것은 비정상적인 한 시대를 정리함으로써 다시는 군의 정치개입이라는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통수권자의 의지표현이라 할 것이다.우리 군이 과거 30여년 동안 정치군인들로 인해 저질러졌던 오욕의 역사를 딛고 새로 태어나는 전기를 맞이하게 한 것이다. 김대통령은 그동안 누차 「잘못된 것은 반드시 바로 잡는다」고 강조해 왔다.그의 이같은 개혁의지는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 우리사회 전반에 걸쳐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속적이고도 광범위한 변화와 개혁을 가져왔다.군에 대한 개혁조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과감하고 파격적인 인사는 군부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하나회」군맥을 정리,군을 사조직으로 부터 보호하고 군의 지휘계통도 확립시켰다.새로 출범한 문민정부의 정통성 기반없이는 결코 해낼 수 없는 결단이기에 국민들로 부터 신속하고도 용기있는 조치로 평가받을만하다. 특히 이번 군수뇌부의 전격적인 인사에서 육군출신 장성의 독무대였던 합참의장 자리에 공군참모총장을 임명하고 2군사령관에 ROTC출신을 임명한 것은 군 역사상 전무한 일이다.이러한 인사는 국군현대화를 위한 각군간의 균형적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또한 이는 김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사항이라는 점에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의 면모를 새롭게하고 있다. 국민들은 결코 12·12사태가 역사의 정당한 과정이었다고 믿지 않는다.그것은 10·26사태로 권력의 공백상태가 됐을 때 일부 정치군인들이 하극상을 저질러 가며 비정상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사쿠데타적 사건」이다.국민들은 그같은 사건이 다시는 되풀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김대통령의 이번 군수뇌부 인사가 갖는 깊은 뜻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군은 이제 바로 서야 한다.
  • “진상규명 매달릴땐 개혁 위기”/김 추기경,방송3사와 회견

    ◎“이젠 용서와 화합의 위대함 보일때/가해자도 진심서 우러난 사과 절실” 김수환 추기경은 17일 5·18민주화운동을 통해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광주시민이 이제 용서를 통해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을 껴안는 위대함을 발휘해야 할때라고 강조했다.또 그 책임자 처벌문제는 용서로 감싸되 그에 앞서 당사자들은 진심으로 국민앞에 사과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것이라고 밝혔다. 김추기경은 이날 5·18광주민주화운동 13주기를 맞아 KBS·MBC·SBS등 TV3사와 각각 가진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김영삼대통령의 담화는 전체적으로 적절한 것으로 생각하며 온국민이 대국적 견지에서 이를 받아들여 모두가 한마음이 돼 신한국 창조에 나서야 할것』이라고 밝혔다. 김추기경은 『광주의 명예회복을 위해 대통령이 진심으로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고 그 밑거름으로 오늘의 문민정부가 나왔다고 높이 평가하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말했다. 김추기경은 책임자 처벌문제와 관련,『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요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경우 정치 경제 사회등 국가전반에 문제를 불러일으켜 문민정부가 힘을 잃고 지금까지의 개혁마저 무위로 돌아갈 염려가 있다』고 우려를 표하면서 『지금 중요한 것은 정말로 어느 길이 광주를 더 빛나게하고 그 명예회복을 가져오게 하는 길인가를 생각할때』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김추기경은 『우리사회가 비판만 앞세우고 잘못을 헐뜯기 시작하면 우리 민족공동체는 허물어지는 만큼 그 어느때보다도 용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5·18민주화운동을 통해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큰 업적을 남긴 광주시민들이 바로 상처를 입은 그 마음을 열어 용서하면서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들을 껴안는 위대함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한편 김추기경은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용서를 위해서는 누가 책임이 있는지를 먼저 밝혀야 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있지만 사실상 누구인지는 다 밝혀진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이제 그들도 뉘우칠줄 알고 국민앞에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추기경은 『단지 사법적 형사적 처벌을 않자는 것이지 그들의 죄를 없는 것으로 하자는 것은 아닌만큼 그들 스스로가 수사로 밝혀지기 전에 국민앞에 사과하고 광주시민에게 진심으로 뉘우치고 참회해야 한다』고 말하고 『역사속에서 진실은 밝혀질것』이라고 다시한번 강조했다. 김추기경은 또 광주비극의 기원에 대해서는 『10·26사태후 민주세력도 힘이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우리나라는 주인없는 나라가 됐으며 그 힘의 공백상황에서 신군부가 유일한 세력을 형성하게 됐던것』이라고 설명하고 『그러나 자기들만이 나라를 구할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 처방으로 5·17계엄확대를 실시했던 신군부의 판단은 엄청난 잘못이었으며 거기서 광주의 비극도 기인했던것』이라고 말했다.
  • 전·노 두 전 대통령 내란혐의로 고소/성주 민주당위원장

    【대구=한찬규기자】 민주당 성주·칠곡지구당 위원장인 도호기씨(33)는 12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12·12사태와 관련,내란혐의로 대구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 도씨는 고발장에서 『전,노씨가 79년 10·26 사태로 국가가 혼란할 때 보안사령관과 일선 사단장의 신분을 이용,군 본연의 임무를 저버린채 정권 탈취를 모의한 뒤 같은해 12월 12일 병력을 동원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체포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등 내란의 죄를 범했다』고 주장하며 『이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관련자들을 모두 엄벌할 것』을 요구했다. 도씨는 당시 상황에 대한 신문사설과 잡지기사 사본 1부씩을 첨부자료로 제출하고 최규하 전대통령,정승화 당시 육참총장,김영삼대통령,김종필 민자당 대표 등 4명을 이 사건의 증인으로 신청했다.
  • “F16기가격협상때 12억불 더 요구”/국방부가 밝힌 기종변경경위

    ◎90∼96년예산 1조3천억 추가 소요/총사업비 14억불 덜 드는 F16 채택 국방부가 28일 공식발표한 차세대전투기사업(KFP)기종변경경위는 다음과 같다. ▷사업개요◁ 차세대전투기사업은 공군의 전력증강과 항공산업육성을 목적으로 총사업비 약50억달러를 투자하여 94년부터 99년까지 F16 1백20대를 확보하기 위한 공군의 전력증강사업이다. ▷추진경위◁ 89년 12월 F18 1백20대를 도입키로 결정하고 미국측과 세부협상과정에서 당초 제시한 가격보다 12억3천4백만달러(한화 1조5천억원)가 상승되어 예산상 막대한 차질을 초래,90년10월 전면 재검토에 착수하여 91년3월 F16으로 기종을 변경하고 그해 10월 도입계약을 체결했다. ▷1차기종결정시 상황◁ 89년12월 F18을 선정할 당시에는 F18이 중거리 공대공유도탄장착및 발사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다 예산지원도 가능하다고 판단돼 F16으로 결정했다. 당시 F16은 중거리공대공유도탄을 개발중이었다. ▷F18협상결과◁ F18로 기종을 결정한뒤 90년 10월까지 약1년동안 미국측과 가격협상을 실시한 결과,총 사업비용이 기종 결정시의 50억5천만달러보다 12억3천만달러(24%)증가된 62억8천만달러(한화 4조6천9백43억원)로 상승했으며 환율변동까지 감안한 결과 국방중기계획기간인 90년부터 96년까지 1조 3천7백17억원의 예산이 부족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측은 가격인상요인에 대해 미국내 물가상승률이 당초 예상보다 더 높아졌으며 F18항공기에 대한 세계각국의 구매량감소와 성능향상으로 생산단가가 상승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면 재검토 결정◁ 국방부에서는 사업추진을 위한 가용국방예산을 검토한 결과,국방중기계획 90∼96년간 부족예산 1조3천7백17억원의 재원염출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90년 10월26일 사업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도록 결정했다. ▷재검토작업◁ 90년11월부터 91년3월까지 5개월동안 국방부,합참,공군등 관련기관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전문가들로 검토위원회를 구성하여 항공기성능,비용에 대한 효과분석,가용예산등을 심층검토했다. 이 결과 국방예산중 전력증강투자비의 연증가율이 당초 예상보다 크게 낮아져 KFP가용자금이 약3조5천7백94억원이 될 것으로 추산되었으며 이 예산을 사용할 경우 F16은 약1백10대,F18은 약 75대를 구매할 수 있었다. 항공기 성능의 경우 89년12월 1차 기종결정당시 F16성능상의 문제로 지적됐던 중거리 공대공유도탄 능력이 90년말에는 개발되어 대한국판매도 허가됨으로써 성능차이가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재검토결과◁ F16은 가용예산에 약4억달러만 추가하면 1백20대를 도입할수 있는 반면 F18은 가용예산으로 75대쯤만 도입할 수 있다는 최종결론으로 91년3월 F16으로 기종을 변경했다. ▷결론◁ 기본적으로 F18과 성능이 보완된 F16은 전투능력면에서 같은 급의 전투기인데도 불구하고 F18의 가격이 대당 1천2백만달러.총사업비 14억3천만달러(한화 약1조1천4백억원) 더 비싸 기종변경은 불가피했다.
  • 「경제두뇌」 집결… 정책산실 30여년/“기획원의 핵” 경제기획국

    ◎61년 창설… 주3∼4일 야근에도 자부심/역대국장 고 서석준씨 등 “기라성 인맥” 제2차 석유파동의 와중인 지난 79년 10·26사태 직후 그 다음 해의 경제전망은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다. 80년의 경제전망을 놓고 대통령 직속의 경제과학심의위원회(위원장 장덕진)와 경제기획원,그밖의 예측기관들이 격돌했다.경과심의 의뢰로 어떤 유력한 기관이 분석한 결과 적어도 5% 성장은 가능한 것으로 나왔다.그러나 기획원은 마이너스 성장이 불가피하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석유파동으로 배럴당 15달러이던 원유가격이 두배인 30달러로 올라 2억 배럴의 원유를 들여오는데 30억달러의 추가부담이 생기고 이것이 당시 국민총생산(GNP)6백억달러의 5%만큼에 해당돼 그만큼의 성장분이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논리였다. 당시에는 경제 외적인 변수가 너무 많아 전망이 힘들 수밖에 없었지만 80년도의 우리 경제는 3.7%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당시 기획원의 전망은 경제기획국에서 만든 것이다.최근 발표된 신경제 5개년계획 작성지침을 마련한 곳도 경제기획국이다.신경제 구상을 입안한 청와대의 박재윤경제수석비서관도 경제기획원의 경제제도 개혁안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뒷얘기도 있다.이처럼 과감한 개혁의 청사진을 설계한 사람들이 바로 기획국에 모여있다. 경제기획국은 우리나라의 경제를 운용하는 두뇌에 해당한다.우리 경제가 나아갈 장기 방향을 제시하고 단기적으로는 전체 경제흐름을 조율,관리하는 기능으로 요약할 수 있다.말하자면 한국경제의 조타수인 셈이다. 경제기획국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기획원이 창설된 지난 61년이다.「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각종 개발계획이 시작된 이후 경제기획국은 줄곧 선두에서 향도 역할을 해 왔다.이제까지 한국경제의 발전을 선도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제까지 경제기획국장을 거쳐간 인물들을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다.이경식 현부총리를 비롯,서석준 전부총리,이희일 전농림수산부장관,최창락 전동자부장관,강경식 전재무부장관,이진설 전건설부장관,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등 기라성같은 인맥들이다.이밖에 산업은행 이형구총재와 김대영 전건설부차관,김인호 소비자보호원장,이기호 총리실 제2조정관도 경제기획국장을 지냈다.기획원 내에서는 한리헌 공정거래위원장과 강봉균차관보가 역임했고 지난 해 8월부터 장승우국장이 맡고 있다. 기획원 청사 7층에 자리잡은 경제기획국은 지난해 가을 정부청사 가운데 처음으로 초현대식으로 사무실을 개조,사무자동화를 실현하고 있다.깨끗하고 정리된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사무실만을 보면 관청이 아니라 외딴 곳의 연구실 같다. 장국장이 진두지휘하는 기획국은 종합기획과(과장 이근경),자금계획과(조학국),지역투자계획과(한성택),인력개발계획과(임상규),사회개발계획과(이동훈),동향분석과(오종남)등 6개 과로 구성돼 있다.30∼40대의 패기만만한 이들이 맡은 업무는 우리 경제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할이나 비중은 막중하지만 시쳇말로 「춥고 배고픈」데다 별달리 실권도 없다.게다가 부총리나 차관등 간부들의 강연·대담원고·면담자료 작성등에 이르기까지 잡무가 많다.때문에 본연의 업무가 뒷전에 밀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직원들은 불평이 없다.오히려 한국 경제를 이끌어간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일주일에 3∼4일은 야근을 해야 하는 과중한 업무임에도 직원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하는 부서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경제기획국의 위상이 바뀌는 조짐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민간자율이 강조되며 정부의 역할이 줄어드는 추세인데다 올 가을 쯤이면 경제기획원을 비롯한 경제행정 조직 개편안이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경제기획국 직원들은 아직까지 『철로는 기획국이 깔고 그 위를 민간이라는 기차가 달리도록 해야 한다』(이근경과장)는 긍지로 밤샘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 박 의장 사저 이사… 정치매듭 풀릴까

    ◎격앙된 심기 진정… 남미여행도 취소/민자,「임시국회전 의원직사퇴」 기대 박준규국회의장이 20일 이삿짐을 옮겼다.공관을 떠난 박의장의 새 거처는 서울 서빙고동의 S아파트.전세로 급히 얻기는 했지만 60평 규모로 작은 편이 아니다. 의장공관이라는 공적 공간에 칩거하던 박의장이 사저에 머물게 됐다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복잡하게 꼬여있던 정치매듭이 풀릴 계기가 될수 있다. 정가의 현재의 관심은 『박의장,정말 화났는가』이다.박의장이 공관칩거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은 것은 그의 심경이 냉랭함을 시사해왔다.박의장은 의장직사퇴의사 표명이후 김종필 민자당대표가 몇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않은 것으로 알려졌다.김영구총무도 측근을 통해 접촉을 시도했지만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실 의장직 사퇴의사표명을 전후,박의장의 심사는 상당히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공직사퇴서에 「원의를 물어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밝혔었다.사퇴직전 김 민자대표와의 통화에서도 『너무 하는 것 같다.임시국회가 열리면 나의 입장을 신상발언을통해 충분히 소명하겠다.사퇴서가 처리되면 6개월 정도 외국여행이나 한뒤 의원직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박의장의 태도가 최근 눈에 띄게 누그러지고 있다고 측근들은 전한다.재산공개파문과 관련한 관계당국의 내사때문이 아니라 한때 격앙된 감정이 가라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측근들이 전한 박의장의 최근 어록은 다음과 같다. 『나 하나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불가항력으로 나왔지만 민자당에 대한 애정도 식지않았다.의원직이나 의장직에도 더 이상 욕심은 없다.다만 투기꾼으로 몰려 30년 정치생활을 마감하기는 싫다.명예를 지키고 싶다』 박의장은 함께 민자당을 탈당한 정동호의원이 지난 19일 돌연 출국,도피의혹이 일자 의장직 사퇴후 계획했던 남미여행을 취소했다.그만큼 여론의 동향에도 신경쓰고 있다는 반증이다. 민자당 지도부와 박의장간의 직접 접촉은 없으나 간접교감에 따른 박의장문제처리방향은 세갈래로 상정된다.①임시국회전 의원직사퇴 ②임시국회 본회의 불참,사퇴성명서 배포후 의장직사퇴표결→추후 적절시점 의원직사퇴 ③본회의에 참석해 소명발언 등이다. 민자당지도부는 ①안을 선호하고 있다.국회 표결없이 박의장문제가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제헌국회이래 국회의장이 임기중 사의를 표명한 예는 박의장을 포함해 모두 6차례.박의장이전의 경우중 지난 79년 10·26직후 백두진의장의 사퇴서가 「정치상황에 따라」무리없이 통과된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반려되거나 부결됐다. 그러나 박의장은 임시국회전 의원직사퇴는 자신의 불명예와 직결된다고 믿고 있는 눈치이다.어떡하든 소명기회를 갖고 싶다는 것이다. 민자당 당직자들은 당내 민정·공화계의원들의 반란표가능성과 민주당측이 박의장사퇴서 처리를 이동근의원석방결의안과 연계시키고 있는 점등을 감안,①안이 안되면 ②안의 차선책을 추구하고 있다.박의장의 한 측근도 『민정·공화계에서 반란여지가 보이면 박의장이 직접 나서 설득할 것』이라고 ②안의 합리성을 거론했다. 이삿짐을 옮긴 박의장은 「적당한」예우절차를 거쳐 21일 3년동안 정든 공관을 떠난다.사저라는 「자유공간」확보와 함께 조정의 명수 김윤환의원의 귀국은 박의장 문제처리전망을 밝게 한다.
  • 「그때 그 여인」 심수봉씨가 털어논 「10·26현장」

    ◎김재규,차지철 쏘며 “건방져”/“합수부 「버러지같은 자식」 발표 허위”/전두환씨,조사뒤 “보약먹으라” 돈줘/방송국에서 전화 받고 달려가/미스신 「사랑해」 부르던중 총성/김이 나에게 쐈으나 총알 없어 우리 헌정사의 대전환을 가져온 「10·26사건」현장에 있었던 「그때 그사람」의 주인공인 가수 심수봉씨(38·본명 심민경)가 14년간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였다.심씨는 10일밤 1시간동안 방영될 SBS­TV 「주병진 쇼」의 사전녹화에서 당시 끔찍했던 사건현장을 처음으로 공개증언했다. 『김재규가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기 직전 「각하,이 버러지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으로 항간에는 알려져 있지만 제가 기억하기로는 「건방져」라는 말 한마디뿐이었습니다.박대통령에게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차지철을 쏜 다음 곧바로 쏘았구요』­ 「10·26」현장에 있었던 몇 안되는 생존자인 심씨는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온 부분들을 바로 잡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심씨는 또 사건조사가 끝난뒤 당시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전대통령이 불러 가보니 『고생했다.보약이나 지어먹으라』며 금일봉을 줘 1백만원을 받았다는 새로운 사실도 털어놓았다.심씨는 자신은 병풍뒤에 숨어서 노래를 부른 적이 없다며 이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병풍이 있었다는 사실은 현장검증때 알았다』고 밝혔다. 심씨는 79년 10월26일 당시 TBC의 「쇼쇼쇼」녹화현장으로 전화가 두차례 걸려와 녹화를 취소한뒤 기타를 들고 궁정동으로 급히 달려갔다고 했다.『이전에도 두번이나 궁정동으로 불려간 적이 있지만 이 사건이 있기 며칠전부터 꿈에 초라한 행색을 한 육영수여사가 박대통령에게 뭔가를 전해달라며 나타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말했다.도착 즉시 술상이 차려진 방으로 안내됐는데 김재규씨와는 두번째,김계원씨와는 첫 대면이었고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고 했다.심씨는 주연에 앞서 「7시 뉴스」에 「삽교천 행사」와 「김영삼 현대통령이 외국인사와 만나는 모습」이 나오자 박대통령이 『신민당 총재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외국인사와 만난다』며 언짢아해 분위기가 어색해졌다고 말했다.그래서 누군가 노래를 부를 것을 제의해 심씨가 먼저 「그때 그사람」을 불렀고 뒤이어 차경호실장이 부른뒤 신모양이 「사랑해 당신을」을 불렀다고 했다.『미스 신이 노래를 부르는데 기타반주와 음이 맞지않아 다시 부르는데 「건방져」라는 고함소리와 함께 총성이 났고 손목에 총을 맞은 차실장은 화장실로 급히 몸을 피했습니다』 차실장이 노래를 부를때 김재규가 잠깐 밖에 나갔다왔는데 그때 권총을 갖고 들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총에 맞아 쓰러진 박대통령에게 신모양이 괜챦으냐고 묻자 「괜찮다」고 대답했고 재차 묻었을때도 「나는 괜찮아」라고해 총맞은 사람같지 않았다고 증언했다.심씨는 또 『제가 박대통령을 부축하고 있는데 김부장이 차씨를 뒤쫓아와 총을 발사,차씨는 탁자를 던지며 저항하다 쓰러졌고 김씨는 박대통령머리에 다시 총을 쏜뒤 저까지 쏘려다 총알이 없어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확인사살이 진행되는 동안 심씨와 신모양은 다른방으로 도망가 문을 잠그고 숨어있다 하오 11시쯤 집으로 돌아갔다. 심씨는 어려울때 전두환씨가 호의를 베풀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는데 대통령취임직후 자신에게 방송출연정지조치가 내려져 「박대통령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 때문」일 거라고 여기면서도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있었다고 털어놓았다.사건이후 유가족들과 만난 적은 없었다는 심씨는 지난 91년 박근영씨가 안부전화를 해왔을때는 놀랐다고 말했다.신모양과는 사건이후 친해져 요즘도 연락하며 지낸다고 덧붙였다. 7일 하오5시부터 「궁정동 모의세트」가 세워진 서울 운현궁 스튜디오에서 2시간가량 녹화가 진행되는 동안 시종 담담한 태도를 보인 심씨는 당시의 깊은 상처를 뒤로 한채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다시쓰는한국현대사」사회과학전문「돌베개」(책의해/우리가만든책:9)

    ◎출판사 자천도서 시리즈/해방 50년사 새 시각서 정리/북한사,민족사에 포함 젊은독자들에 인기 인문·사회과학전문출판사로 출판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돌베개(대표 임승남)가 펴낸 「다시쓰는 한국현대사1·2·3」(박세길지음)은 해방50년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한 스테디셀러이다. 88년 11월 1권 초판발행이후 제3권이 완간된 지난해 10월까지 이 분야서적들의 전반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판을 거듭하면서 25만부이상이 꾸준히 팔려나갔다.이 책이 호응을 얻은 것은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한국민중사」(풀빛),「바로 보는 우리 역사」(거름),「한국현대사」(풀빛)등 일련의 현대사재조명작업에 의해 현대사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이 달라진데 힘입었다. 대학생독서실태조사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독서토론회교재로 선정될만큼 젊은층을 사로 잡은 「다시쓰는…」은 이러한 시대흐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외세가 민족사에 미친 영향을 전면에 내세운 문제의식이 새로웠다.또 북한사를 민족사의 범위안으로 껴안으면서 동시대를 살아온 젊은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했다는 서평을 받았다. 한국현대사를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휴전에서 10·26까지」「19 80년에서 90년대초까지」로 크게 3분해 더듬어본 이 책은 시각의 전향성과 현대사에 대한 흡인력 강한 정보제공서란 측면에서 생명력을 인정받았다. 1·2권은 1945년 8월15일 해방에서부터 1979년 10·26사태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를 민중의 요구와 역할을 중심으로 외세와의 관계를 부각시키면서 남·북을 민족사의 공동주체로 설정하는데 서술의 주안을 두고 있다.3권은 우리들의 기억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야기다.80년 「서울의 봄」∼한중수교까지를 통사적으로 서술하면서 90년대의 진로를 전망했다.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붕괴의 원인과 그 파장 그리고 세계경제의 블록화추세,일본의 군사대국화,핵사찰문제등 한반도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발생한 역사의 분수령이 된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의 큰흐름과 맥을 짚어 주고 있다. 한철희주간은 『이 책은 일반대중이 우리 현대사에서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가에대한 답을 들려 주고 있다』고 기획의도를 밝히면서 『특히 우리가 처한 현실상황을 국제정세와 한반도주변정세,국내상황,민중의 역량등을 민족주체적 입장에서 연계시켜 분석했다』고 말했다.
  • 박준규씨 계기로 본 의장직사의/이번까지 6차례… 부의장은 7차례

    ◎거의 정치적 이유… 개인사유론 처음 국회의장이 임기중에 구두나 서면으로 사의를 표명한 경우는 이번 박준규의장을 포함해 모두 6차례가 있으며 부의장은 7차례의 전례가 있다. 그러나 국회의장이 사의를 표명한 이유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때문에 파행적인 국회운영의 책임에 따른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번처럼 의장 개인의 사유로 물러서는 예는 처음이다. 국회의장이 사의를 표명하면 국회 본회의에서 동의절차를 거치게 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본회의에서 의장의 사표가 받아들여진 경우는 10·26 직후인 10대국회말 뿐이다. 따라서 4월 임시국회에서 박의장의 사임서 처리 결과가 주목된다. 박의장처럼 구두로 사의를 표명한 예는 단 한번. 지난 64년 4월21일 제6대국회 41회 본회의에서 이효상의장이 의사진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의장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5월5일42회 본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서면으로 사의를 표명한 것은 4차례이며 이 가운데 단 한차례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난 60년 10월11일 제5대 국회 37회 본회의에서 상이학생데모대의 본회의장 난입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곽상훈의장이 이영준부의장과 함께 사임서를 제출했으나 14일 열린 본회의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또 69년 9월14일 7대국회 72회 본회의에서 헌법개정안 처리에 대한책임을 지고 이효상의장이 사임서를 제출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1년 12월23일 3대국회 78회 본회의에서는 야당측이 「국가보안에 관한 특별조치법」 처리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백두진의장에 대한 사퇴권고결의안을 제출하고 계속 사회를 방해,백의장이 사임서를 냈으나 역시 본회의는 동의하지 않았다. 국회의장의 사임서가 받아들여진 것은 10·26이후인 79년 12월17일로 10대 국회 1백31회 본회의에서 당시의 「상황에 따라」 백두진의장이 제출한 사임서를 통과시켰다.
  • 안기부 개편에서 보는 「변혁」의 실체(사설)

    안기부 개편은 시대적 요청이다.밖에선 탈냉전의 새 역사가 전개되고 안엔 문민의 새 시대가 도래했는데도 안기부가 여전히 냉전과 권위주의 체제의 너울을 쓰고 있다면 이는 시대역행이요,직무유기다.그런 점에서 안기부가 시대 변화를 반영한 자체 조직및 운영쇄신 방안을 내놓은 것은 시의적절했다고 생각된다.특히 안기부가 기구 개편 작업을 속히 진행시켜 이달중 완료키로 한것은 김영삼대통령의 개혁 의지와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심중을 잘 헤아린 처사라고 본다. 안기부 쇄신계획이 신임 부장의 지휘 아래 안기부에 의해 성안되고 안기부에 의해 추진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미있게 받아 들인다.만일 안기부 개편안이 여야간의 정치협상 줄다리기 끝에 나왔다거나 여론 공세에 밀린 형국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그 내용에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구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또한 「10·26」이후처럼 국가최고의 정보기관인 안기부의 개편이 다른 기관에 의해 주도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이다.안기부가 자체 개편작업을 주도한다는 건 안기부에 책임과 자부심을 부여하면서 국민에겐 국익수호를 위한 안기부 본연의 업무가 한시도 차질없이 계속 수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안기부의 대공활동및 정보수집·분석기능은 국가보위와 국익수호를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이다.특히 동서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국제적인 경제·기술전쟁이 가열되면서 안보에서 차지하는 정보기관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이번 개편안에서 안기부가 대북정보및 해외정보 수집활동에 전념키로 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본다. 최근 장세동전안기부장 구속으로 다시 상기된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이 말해주듯이 과거 안기부는 정권안보의 첨병이요,공작정치의 산실이었다.안기부가 이번 개편안에서 정치공작과 정치사찰은 물론 시국사범 수사 기능등을 제도적으로 철폐한 것은 정권안보 기구로서의 과거 청산이요 민주화에의 부응이라고 우리는 평가한다. 안기부의 진정한 개혁은 기구 개편이나 기능 조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의지와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구성원들의 의식개혁이다.무소불위의 월권행위를 일삼았던 과거에 연연하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그렇다고 심리적으로 위축될 이유도 없다고 본다.이제 안기부원들은 권력의 부끄러운 하수인이 아니라 국가를 보위하고 국가의 경쟁력을 키우는 전문가·기능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의식개혁 뿐 아니라 의식전환도 있어야 한다.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은 유연한 사고 구조를 가져야 낡은 냉전의 논리나 선입견의 포로가 안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 헐리는 밀실정치의 산실/박상렬 사회1부기자(현장)

    ◎안가철거 지켜본 시민 “새시대 실감” 『쿵,쿠르르 쿵』 11일 상오10시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분수대광장 앞 청와대 궁정동 안가(안전가옥). 50여명의 청와대 및 서울시 관계자들과 분수대 광장의 시민 1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시대 권위주의 정치의 상징인 청와대 안가 「영빈관」건물 3채가 맨 먼저 대형 포크레인 크러셔 2대의 거대한 압쇄기에 의해 폐허로 변하며 굉음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다. 청와대 궁정동 안가에서 이렇게 요란한 굉음이 울린 것은 79년10월26일 한밤중 요란한 총성이 울려퍼진 이래 13년5개월만이다. 80년초 총성의 현장인 궁정동 안가 「한국관」건물 1채가 헐려 없어진 뒤 13년만인 이날 나머지 안가건물도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부패한 권력의 밀실정치 상징물이 이렇게 빨리 없어질 줄은 몰랐는데….진작 사라졌어야 할 부끄러운 유산이 해체되는 것을 보니 가슴이 시원합니다』 건물해체를 담당한 산청개발주식회사 현장사무소장 장종복씨(45)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해체하는 것은개혁의 새시대를 막는 어떠한 장애물도 과감히 제거할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철거현장을 지켜보던 청와대 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안가해체의 의미를 이렇게 강조했다. 『안가를 해체시킨 것은 결국 개방시대를 바라는 대다수 국민의 희망이 집약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동네주민들과 함께 청와대 구경을 왔다는 김태규씨(56·농업·경남 사천군 곤명면 정곡리 105)는 분수대 광장에서 새시대에의 기대를 가득 담은 눈으로 「권위주의」의 종말을 매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날 해체현장에서 손도근 서울시 공원녹지과장(55)은 『25일까지 해체작업이 끝나면 10·26총성의 현장은 주차장으로,나머지는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해체건물에서 수거되는 기와 수천장과 정원수들은 양로원 등 사회복지시설에 기증될 것』이라고 밝혔다. 해체현장에는 문민시대를 맞아 과거 암울했던 밀실정치의 찌꺼기가 한꺼번에 없어지는 듯 후련함이 감돌았다.
  • 「안가 공원」 발표에 “열린 정치 실감”

    ◎주민들,“청와대 더 활짝 개방” 환영일색/70년대초 건립… 부지 1만여평/3개지역 12동 소재/“권부 회합 했던곳” 새 명소로 그동안 최고 권부의 비밀회합 장소로서 일반인들에게는 철저히 베일속에 가려져왔던 청와대 「안가」(안가·안전가옥)가 개방되자 시민들은 문민통치를 실감하며 환영했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청와대 주변도로가 시민들에게 개방된데 이어 「안가」의 문까지 활짝 열림으로써 청와대는 이제 사실 그대로 국민들에게 다가서게 됐다. 청와대가 4일 개방키로 한 「안가」는 서울 종로구 궁정동 6개동(3천6백60여평)과 청운동지역 3개동(1천2백62평)삼청동지역 3개동(6천18평)등 본관및 부속건물 12개동 1만9백40여평이다. 이는 지난달 25일 김영삼대통령의 취임과 동시에 청와대 주변도로가 개방된뒤 일요일인 28일과 3·1절 연휴기간동안 하루 2만여명의 시민과 관광객이 방문했으나 화장실과 식수등이 부족,방문객들이 큰 불편을 겪은데 따른 것이다. 이날 개방된 「안가」가운데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궁정동지역은 소공원으로 개발,시민들을 위한 편의시설로 활용된다. 청와대측은 이날 하오 궁정동 「안가」6개동가운데 본관건물인 「한국관」과 「영빈관」의 내부를 공개했다. 10·26사태가 일어났던 「한국관」가옥중 1동은 10·26이후 곧바로 철거돼 지금은 잔디와 나무만 심어진채 빈터로 방치돼있다. 나머지 한국관 가옥 1동은 1백20여평 규모로 대통령을 포함,7명이 앉을 수 있는 고급 양탄자가 깔린 응접실과 10여평 규모의 거실·화장실·부엌 등으로 내부가 꾸며져있다. 대지 1천여평규모의 「영빈관」은 2층짜리 3개가옥과 7백여평의 잔디 정원으로 이루어져있다. 「영빈관」본관 가옥은 50여평규모의 침실이 2층에 있고 1층에는 30여평규모의 대규모 온돌연회실과 10여평규모의 응접실이 있다. 2층 침실에는 일제변기가 설치된 화장실과 2인용침대·냉장고 등이 갖춰져 있고 10여평규모의 응접실도 딸려있다. 이 궁정동 「안가」는 박대통령시절인 70년대초에 만들어져 박대통령과 전두환전대통령이 「비밀스러운 비공식업무」를 위해 자주 사용해왔었다. 이번 청와대의 「안가」개방에 대해 시민들은 모두 청와대 앞길 개방에 뒤이은 문민정치시대의 또다른 상징으로 반겼다. 청와대앞길을 외국바이어와 함께 구경왔던 윤석영씨(37·사업·강남구 개포동)는 『어렸을 때 청운동에 살아서 궁정동안가 주변에서 자주 놀았는데 「안가」가 휴식공간으로 개방된다니 또 다시 가볼수 있게 돼 기쁘다』면서 『외국 바이어들에게 떳떳하게 안내할 수 있는 또다른 명소가 생긴 것 같다』고 흐뭇해 했다. 한편 이번에 개방되는 「안가」가운데 청운대지역은 모두 헐어 북악산기슭으로 복원되며 삼청동지역은 서울시와 협의,시민을 위한 시설로 활용된다. 「안가」에는 경비전화·군용전화·행정전화·특수기관과 연결된 특별전화·일반전화 등 다섯종류의 전화가 설치돼 있으며 경비는 청와대 경호실이,관리는 총무비서실에서 맡아왔었다.또 안가주변 길에는 감시용폐쇄회로카메라(CCTV)가 설치돼 있다.
  • 주가 단숨에 22P 급등/6백74.7… 상승폭 올 최고

    ◎경기부양책·실명제연기설 영향 주가가 올들어 가장 큰 폭으로 오르며 종합주가지수 6백70선을 넘어섰다. 22일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22.64포인트 오른 6백74.71를 기록했다.이날의 주가 상승폭은 지난해 10월26일(24.88포인트)이후 가장 큰 것이며 주가상승률은 3.47%로 지난해 10월29일의 3.49%이후 가장 높았다.상한가 2백97개 종목을 포함,6백73개 종목이 올라 오른 종목은 지난달 4일(7백67개)이후 올들어 두번째로 많았다. 개장초부터 9.5포인트가 오르는 초강세로 출발했다.대통령의 취임식을 전후해 경기부양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특히 증권 은행등 금융주와 대형제조주를 중심으로 매수세가 활발히 일었다.이달중 금융산업개편안에 대한 1차마무리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투자심리를 호전시켰다. 전장 중반 주가 급등에 따른 경계심리로 매물이 일부 나오면서 오름세가 주춤하기도 했으나 금융주와 국민주를 중심으로 매수세가 일면서 계속 올랐다.지난주 발표된 8·24의 후속조치와 수출이 회복기미를 보인다는 보도도 투자심리를 호전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후장들어 금융실명제의 조기실시가 어려울 것이라는 루머가 나오면서 급등했다.기관투자자들이 신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금융주와 국민주를 중점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으로 매수세가 금융주와 국민주에 몰렸다. 수상운송을 제외한 전업종이 강세였으며 특히 증권주는 전종목이 상한가를 기록했다.데이콤은 연20일째 상한가를 기록하며 5만원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거래량은 2천7백77만주,거래대금은 4천3백92억원이었다.1백10개 종목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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