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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 청와대 홈페이지 경제정책 자료방 최고 인기

    인터넷 청와대 홈페이지 가운데 지난해 10월26일 개설한 ‘경제정책자료’방이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인 것으로 나타났다.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26일 현재 접속건수가 1만5,000회를 넘어섰다고 29일 밝혔다. 이 자료방에는 金大中대통령이 주재하는 각종 경제관련 회의자료와 토론내용,주요 보고자료 및 강연자료 등이 매일 게재된다.수록되어 있는 자료파일은 경제대책회의,무역투자진흥대책회의,전경련회장단과의 간담회,경제수석강연 등 120여개다. 청와대 경제정책자료방은 청와대 홈페이지 http://www.cwd.go.kr에 접속한뒤 자료실로 들어가 찾으면 된다.梁承賢 yangbak@
  • 日 長銀전회장 “집팔아 반환”

    ┑도쿄 黃性淇 특파원┑일본 부실은행의 대명사격인 장기신용은행의 전 회장이 부실경영의 책임을 지고 9억3,000만엔에 이르는 퇴직금 반환을 위해 자택을 팔 뜻을 비췄다. 장기신용은행(장은)은 지난해 10월26일 3조엔이 넘는 부실채권을 안고 금융재생법 등에 따라 일본 정부에 인수된 국유화 1호 은행으로 전현직 경영진의 부실경영에 대한 비난이 쏠렸었다. 국유화되기 전 이 은행측은 은행 회생을 위해 현 경영진 전원 퇴진,대대적정리해고와 함께 부실 책임이 있는 옛 경영진 23명에 대해 퇴직금을 전액 반환받도록 하겠다고 일본 정부에 약속했었다. 스기우라 전회장의 퇴직금이 10억엔(한화 100억원 상당) 가까이 이른 것은그가 58년부터 이 은행의 임원에 취임,퇴직한 92년까지 행장,회장을 거치며34년간 임원생활을 했기 때문.퇴직할 당시 현금으로 퇴직금을 받았으나 장은 주식구입 등에 써 현금이 없는 스기우라 전회장은 궁리 끝에 도쿄(東京) 자택을 팔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2,820엔까지 하던 장은 주가는 2년전부터 하락,국유화되기 하루 전날에는2엔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스기우라 전회장이 보유한 주식도 하루아침에 종이조각으로 변한 것.
  • 테마기획 새해경제-과거 경기 사이클

    이번 경기의 흐름은 96년 1·4분기를 정점으로 근 24개월째 내리막이다.과거 경기순환을 보면 이렇게 경기수축기가 길었던 적이 없다. 통계청은 70년 이후 우리나라 경기의 수축기(정점에서 바닥까지 기간)는 평균 17개월,확장기(회복에서 정점까지 기간)는 33개월이라고 밝혔다.총 50개월이 걸리는 순환이다. 1순환기는 지난 74년2월 정점을 기록한 후 75년6월 바닥을 칠 때까지 16개월이나 떨어졌다.중동전쟁과 1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기가 하강한 것이다. 2차 석유파동과 10.26사건 등으로 인해 79년2월에 시작한 2순환기는 19개월의 하락세를 기록했다. 3순환기의 수축기는 84년2월에 시작,역시 19개월동안 지속됐다.그러나 저금리 등 3저 현상으로 경기는 85년말부터 호황으로 돌아섰다.88년1월부터 출발한 4순환기의 수축기는 노사분규의 본격화와 과잉투자의 후유증으로 인해 18개월 걸려 바닥에 닿았다. 5순환기의 하강기간은 92년1월부터 93년1월까지 12개월로 가장 짧았다.중화학공업 활성화와 반도체 수출 호전 등으로 경기가 빨리 회복세로 돌아선 때문이다. 현재 6순환기는 지난 96년1·4분기 정점을 기록한 후 2년째 내림세를 보이고 있다.정부는 지난 97년 4월,그해 3·4분기중 바닥을 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국제통화기금(IMF)체제 돌입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그후에도 경기는 계속 하락해왔다. 통계청은 현재 경기저점 통과여부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다.지난 75,89년에도 경기변동순환변동치 등 주요 잣대가 3∼4개월 오르다가 떨어졌다며 “바닥 확인은 더 두고봐야한다”고 말한다.
  • 金三雄칼럼-최규하 생가복원이라니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워싱턴의 기념관을 비롯하여 제퍼 슨, 링컨, 매드신, 루스벨트의 기념관과 케네디센터등 역사적으로 존경받고 업적을 남긴 정치지도자들의 기념관이 즐비하다. 이곳은 미국인들은 물론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기념관에 가보면 잘 설계된 건축물에 그들 생전의 활동상을 담은 각종 자료와 유품을 전시하여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관광코스가 되고 민주주의와 평화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특히 링컨대통령의 기념관이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는 것은 노예해방과 남북전쟁의 마무리를 지혜롭게 하여 ‘아메리카합중국251을 이룬 업적을 높 이 평가한 때문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경우 고향인 보스턴에도 거대한 기념 관이 마련되어 세계적 인물을 배출한 주민들의 자존심을 한껏 부풀린다. 우리의 헌정사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역대대통령의 기념관을 세우자고 나서 기가 낯부끄러울만큼 불행한 역정이었다. 이러한 부끄러운 역정을 고치려는 ‘충정251에서인지 최근 원주시에서 최규하 전대통령 생가복원 문제가 꽤 시 끄러운 양상으로 지역현안이 되고 있다. 이것은 지역문제와 함께 국민적 관심사다. 최씨가 전직대통령이고, 과거 우 리 사회가 역사적 검증과 국민적 합의과정 없이 함부로 동상이나 건조물을 세웠다가 정세가 바뀌면 철거하는 따위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원주시는 몇해전부터 시립박물관을 건립하면서 박물관 부지 안에 이곳 출신 최전대통령의 생가를 복원하다는 계획을 추진해왔다. 시당국은 최씨 생가복 원문제가 물의를 빚을 것을 우려하여 ‘전통한옥 복원251이란 구실을 대고 실제로는 6·25전란때 소실된 최씨의 한옥을 복원하려는 계획이라 한다.시민 단체와 종교인들의 반대운동이 거세다. 내세우는 반대 이유와 명분도 명료하 다. 첫째, 최씨는 일제때 친일관료로 출발하여 역대 독재정권에서 고위직을 지 냈으며 특히 10·26후 과도정권을 맡아서는 집권욕에 사로잡혀 민주화를 지 연시키다가 신군부세력에게 기회를 주고, 5·18광주항쟁을 폭도로 단정하는 등 반민족,반민주 인사라는 것. 둘째, 이은찬, 민긍호선생등 원주권 의병·독립운동 지도자의 기념사업은 전무한 상태에서 친일 행적의 최씨 생가 복원은 반역사적 행위라는 것. 셋째, 60∼70년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의 정신에 배치되며, 원주 민주화 고장의 명예와 정신을 훼손하는 사업이란 것. 넷째, 12·12, 5·18광주민주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 증언을 거부 하여 헌법과 국회법,그리고 국회에서 증언 및 감정에 관한 법률을 위반함으 로써 민주주의 원칙과 민의를 외면했다는 것. 다섯째, 최씨의 생가는 당시 그 지역에 흔했던 일반가옥으로서 문화재적 가 치가 전혀 없으며, 이 가옥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당시 주민의 기억을 되 살리는 정도의 고증으로 집을 지어서 무슨 의미를 찾겠는가라는 지적이다. 객관적으로 살펴봐도 최씨의 생가를 복원할 이유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다 . 굳이 복원하겠다면 개인땅에 개인돈으로 지으면 될 것이다. 왜 국민의 세 금으로 국민과 역사에 어긋진 인물의 생가를 복원하려는가. 박정희 전대통령 의 생가는 그의 문중에서 복원한 것, 그것까지 국민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미국 부시전대통령의 기념관도 개인 모금을 통해 텍사스의 한 대학 안에 건립했다. 최씨 생가복원 문제는 우리 현대사에 많은 교훈을 던진다. 특히 지도자의 삶의 궤적을 살피게 하는 계기가 된다. 생가를 복원하고 동상을 세우고 흉상 을 남기려거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파리 나폴레옹기념관 대리석 묘비가 지금도 백면(白面)인 것은, 그만한 인 물도 찬반론으로 갈려 비문을 쓸수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주필 kimsu@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안기부 ‘국정원’으로 변신

    국가안전기획부가 ‘국가정보원’(약칭 국정원)으로 거듭난다. 국회 법사위는 28일 전체회의를 열어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개칭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가안전기획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국회 본회의에서 이 법이 통과되고 대통령이 법안을 공포하면 안기부는 내년 1월 중순쯤부터 ‘ 국정원’으로 명칭이 바뀐다. 국정원의 영문이름은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NIS)로 표기된다. 안기부는 새정부 들어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部訓) 을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꾸며 과거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해왔 다. 지난 61년 창설된 ‘중앙정보부’(중정)를 전신으로 한 안기부의 역사는 격 동기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 했다.朴正熙 정권 탄생과 함께 현 金鍾泌국무 총리가 초대 부장을 맡았던 중앙정보부는 당시 반(反)혁명세력에 대한 대처 를 목적으로 탄생했다.이후 79년 ‘10·26사태’로 全斗煥전대통령이 집권하 자 ‘중정’은 안기부로 다시 태어났다. [柳敏 rm@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경비병 北 접촉 10개월 방치/나사 풀린 民·軍 수사기관

    ◎귀순자 통해 2월에 ‘40명 포섭’ 알아/“과장 진술”“구체적 혐의 없다” 무시/관련자 소환 등 조사않고 미온 대처 민·군 수사기관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내 경비병들이 북한 대남심리전 특수요원들과 접촉한다는 귀순자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10개월이 지나도록 본격적으로 수사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9일 국방부에 따르면 전 북한군 상위 변용관씨가 지난 2월3일 귀순한 뒤 JSA내 우리측 경비병 40여명과 접촉해 포섭공작을 했다고 진술했다.하지만 안기부 국방부 경찰청 기무사 정보사 등 5개 기관은 관련자들을 소환해 조사하는 등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변씨는 2월3일부터 9일까지의 5개기관 합동신문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판문점내 2초소와 북측 4초소 부근 군사분계선상에서 남한경비병들을 몰래 만나 선물을 교환하는 등 포섭활동을 펴고 있다”고 밝혔다.이어 “한국군 경비중대 4개소대 152명이 북한 공작조의 포섭대상이며 개인적으로 A일병,B일병,C일병과 직접 접촉했다.98년 2월 현재 한국군으로 북측 공작요원과 접촉하고 있다.2소대 김모상병과 친숙하게 만나 공작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그러나 합동신문조는 ‘변용관이 한국군과 접촉,대화만 했음에도 실적을 인정받기 위해 포섭된 자라고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변씨의 진술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군 기무사도 2월12일 변씨를 독자적으로 조사,‘한국군 경비병 3명을 직접 만났으며 또다른 4명을 포섭했다는 동료 특공조원의 보고서를 봤다’는 내용과 함께 이들의 이름까지 진술받았으나 ‘아직 포섭단계에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판단 아래 관련자들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무사 관계자는 “변용관이 우리측 경비병 3명을 1∼2회 만났지만 그 이상 접촉하려 하면 피했다고만 말할 뿐 구체적인 혐의 내용을 제시하지 못해 특이 사항이 없는 것으로 보고 적극 수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JSA내 우리측 경비병들의 대공 근무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지난 2월18일 유엔사측에 기무사 요원이 상주해 활동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무사는 또 지난 6월부터 金勳 중위 사망사건에 대한 정밀 재수사를 실시한 육군 검찰부로부터 수사협조나 협의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해 군 검찰의 수사가 허술하게 진행됐음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군 수사당국은 JSA에서 근무하다 전역한 병사들은 수사대상이 아닌 데다 구체적인 혐의나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에 나설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군 수사 관계자는 “이번에 구속된 당시 부소대장 金모중사는 변용관도 전혀 거론하지 않아 조사하지 않았으며 지난 6월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미18의 무사 행정관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고 말해 金중위 사망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극히 미온적이었음을 시인했다. ◎김훈 중위 의문사 일지 ●2월3일=판문점 대표부 소속 북한군 변용관 상위 귀순. ●2월24일=金勳 중위(JSA 소대장) 권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 ●2월25일=金중위 부대 공동경비구역에서 후방으로 빠지는 날. ●4월∼11월=金중위 아버지 金拓 예비역 중장,군 수사당국의 자살발표에 의혹 제기,국회 국방위에 탄원서 제출 등 진상규명 활동. ●10월26일=국회 국방위,金중위 사망사건 진상파악 소위원회 구성. ●11월27일=육군본부 고등검찰부 金중위 사망사건 최종수사 결과 발표.자신의 권총으로 자살 결론. ●12월3일=국방위 소위,JSA 소속 金영훈 중사(28)가 북한군과 자주 접촉했다는 참고인 진술 확보. ●12월4일=기무사령부,金중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12월9일=국방부,金중위 사건 전면 재조사 착수.
  • “金영훈 중사 北 초소서 술판까지”/전역 소대원들 증언 내용

    ◎일주일에 1∼3회 찾아가 담배 등 선물 갖고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근무중 수시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난 金영훈 중사(28)는 북한군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술판까지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金중사가 부소대장으로 있던 소대원들 가운데 일부 사병들도 북한군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2월24일 공동경비구역내 벙커에서 권총에 맞아 숨진채 발견된 金勳 중위의 아버지 金拓씨(55·예비역 중장)가 지난 10월26일 金중위의 소대원 출신 전역자들을 상대로 증언을 녹취해 최근 천주교인권위원회에 넘긴 자료에서 드러났다. 증언록에 따르면 이들은 金중사가 판문점 회담장 근무 때 일주일에 3회 정도 담배와 구운 고기 등을 들고 우리초소와 20∼60m쯤 떨어진 북한군 초소에 가서 인삼주,담배,독일제 의약품 등을 갖고 왔다”면서 “심지어 술을 마시고 취해 돌아올 때도 많았다”고 증언했다. 특히 金중사가 월경 때마다 공동경비구역내에 설치된 감시용 비디오 카메라의 방향을 돌려놓으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또 “북한군 원사가 견학단 경호임무 차원에서 합법적으로 우리측 구역으로 넘어와 ‘金중사와 친구’라면서 ‘오늘밤 0시00분에 1초소앞 군사분계선에서 보자고 전해달라’고 했다”고 말해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음을 반증했다. 전역병들은 金중위가 소대장으로 부임했을때는 물론 신병이 올때마다 북한군이 이름을 미리 알고 불러 놀란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金중사의 북한군 접촉행위를 알면서도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 데 대해 “金중사가 북한군에게서 받은 물품을 소대원들에게 나눠주면서 이를 습득물인 것처럼 거짓 신고를 하도록 꾀어 그 덕에 휴가 등 포상을 탄 소대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또 “金중사도 자신의 행동이 위험한 짓인 줄 알았지만 적 초소앞에서 술을 마신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협박할 지 모른다면서 만나기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었다”고 증언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JointSecurity Area)은 군사분계선상에 세워진 회담장을 축으로 하는 반경 400m의 원형지대. 54년 유엔과 북한의 협정에 따라 만들어져 양측 35명씩의 군인들이 공동 경비한다. 76년 8월18일 ‘도끼 만행사건’ 이후 양측 군인들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이 그어졌고 경비병 등 모든 군인들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우리측은 현재 4개 소대 160여명의 카투사들이 교대로 경비하고 있으며 북측 경비요원들은 모두 대남심리전 특수요원인 ‘적공조’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 美 단기국채 할인율 또 인하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 미국 재무부가 7일 실시한 단기국채 공매에서 상환기간 3개월 및 6개월의 평균 할인율이 모두 떨어졌다. 재무부는 이날 액면가액 기준 80억달러의 3개월 상환채권을 평균할인율 4.320%에 발행했다. 이 할인율은 지난주 4.435%보다 0.115%포인트 하락한 것이다. 6개월 상환채권 역시 액면가액 기준 80억달러를 발행했는데,평균할인율은 4.375%로 지난주 4.410%에 비해 0.035%포인트가 떨어졌다. 형성된 평균할인율은 3개월 상환채권의 경우 지난 10월26일의 4.320% 이후 최저 수준이며,6개월 상환국채는 11월2일의 4.360%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연간금리로는 3개월 상환채권 할인율은 4.428%,6개월 상환채권은 4.537%이다. 한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부동산 거래시 모기지(담보)금리의 기준이 되는 상환기간 1년짜리 재무부 증권의 평균수익률도 지난주 4.46%로 형성돼 전주의 4.59%보다 0.13%포인트가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 中企 대출 실적따라 은행 자금 지원

    ◎한은,총액한도대출 배정 종합평점제 도입/새달부터… 우수은행에 저리자금 더 배정/금융기관 중기 지원 촉진·신용경색 해소 다음달부터 은행들은 중소기업에 일반 운전자금을 많이 지원해 줘도 한국은행으로 부터 3%의 금리가 적용되는 총액한도대출을 받을 수 있다.수출환어음 매입 등 수출입금융 지원실적도 마찬가지다. 한은은 24일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해 다음달부터 총액한도대출(총한도 7조6,000억원)을 배정할 때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실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종합평점제’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종합평가 대상은 기존 총액한도대출 대상자금(50점),일반운전자금 대출(30점),수출환어음 매입 및 수입신용장(L/C) 개설실적(각 10점) 등 4개 항목이다. 종합점수를 기준으로 전체 은행을 5등급(A∼E그룹)으로 분류,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실적이 나쁜 은행(D,E그룹)으로부터 총액한도대출 배정액의 10∼15%를 차감해 우수은행(A,B그룹)에 전액 배정한다. 지금은 상업어음할인과 무역금융 및 소재부품 구입자금 지원실적만을 반영해 저리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한은은 이 조치로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기관의 자금지원이 촉진될 것으로 보고 있다.한은은 또 퇴출은행과 거래해 온 중소기업 등 지방 중소기업에 자금지원이 확대될 수 있도록 총액한도대출의 한은지점별 한도를 1조7,543억원에서 1조9,543억원으로 2,000억원 증액했다. 총액한도대출 배정방식 변경 등은 全哲煥 한은 총재와 금융통화위원들이 지난 10월26일∼11월7일 실시한 중소기업 현장점검 결과를 토대로 결정됐다.
  • 朴政熙 경제치적 외 ‘병폐’도 지적돼야/대한매일을 읽고

    서울신문(대한매일의 전신) 11월5일자 林春雄 칼럼 ‘더 그리운 朴正熙’에 대한 趙成敦 자민련 대변인 행정실장의 반론이 11월10일자 서울신문에 실렸다. 다음은 趙실장 글에 대한 반론이다. 趙실장은 10·26이 박정희의 비극적 종말이기는 하나 ‘영웅적 치적’까지 일순간 마감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박정희의 집권과정을 영웅적 치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소위 박정희의 영웅적 치적이라고 내세우는 것 중에서 대표적인 경제 발전은 민주주의 발전을 외면하며 추진한 탓에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과 대외 의존적 경제,소외계층의 발생,분단의 고착화등 많은 병폐를 낳았다. 또한,이러한 부작용을 양산한 경제 성장은 단순한 경제 그 자체의 지속적 발전에도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한 사회의 가치관이 그 당시 국민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사고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라는 데에 일면 수긍하면서도 독일의 나치즘,제국주의 일본의 신민사상 등 그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올바른 교정은분명 정치인,학자,언론 등의 역할임이 명백하다.(박정희 신드롬을 나치즘 등과 동일시하는 것은 절대 아님) 박정희의 평가와 관련,‘우리사회의 자연 발생적이라고 하는 박정희 신드롬을 보면서 여론을 주도하는 인사들은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날로 심화되고 있는지 의미를 되새겨 보고 역사를 앞서 살아간 지도자의 재평가에 인색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하지만 박정희의 소위 영웅적 치적이라는 것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박정희 신드롬이 보편적 사고에 미치는 문제점 등에 대한 분명한 지적은 오늘의 우리들이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항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崔章集 교수 논문’ 월간조선 販禁결정 반응

    ◎“발췌왜곡은 언론자유 아닌 언론 폭력”/사회단체 “당연한 조치” 일제히 환영/대책위,조선일보 불매운동 강력 전개 崔章集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고려대 정외과 교수)의 논문을 보도한 월간조선에 대해 법원이 판매 및 배포금지 결정을 내리자 고려대와 시민단체는 당연한 조치라며 환영했다. 고려대 대책위원회는 ‘조선일보 왜곡보도 근절을 위한 고려대 연석회의’(회장 김준형·고대대학원 총학생회장)를 오는 16일 열기로 하는 등 앞으로의 활동 일정 마련에 분주했다. 대책위 소속 위원들은 지난 10월16일 대책위가 결성된 뒤 27일만에 내려진 결정을 환영하며 학내 뿐 아니라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강화할 것을 결정했다. 대책위는 조선일보 불매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여 조선일보의 반성을 촉구할 계획이다. 조선일보사가 일제시대에 저질렀던 친일기사 등 과거 행적에 대한 고발형식의 전시회 등을 마련하기로 했다. 오는 30일에는 조선일보사를 추가 방문,항의집회를 가질 예정이다. PC통신 동호인들로 구성된 ‘언론개혁 통신연대’(대표 김동필·29)도 동호인들간 연대를 강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金씨는 “월간조선의 왜곡보도에 대한 법원의 결정은 정당하다고 본다”면서 “조선일보의 사과를 받아낼 때까지 여러 단체와 협의하여 유인물과 전단지를 배포하고 통신상에도 조선일보의 왜곡보도 자료를 폭로할 계획”임을 밝혔다. 시민단체도 대책마련에 분주하다. 13일 오후 1시 서울 마포구 불교방송 7층에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경실련,참여연대,전교조 등 20여개 단체가 대책활동 간담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경실련 魏枰良 연구위원(38)은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학문자유의 기본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판결이라 생각한다”면서 “우리 사회는 이제 좌·우 대립을 넘어 개혁·반개혁의 새로운 구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林崇澤 사무총장(48)은 “문제점을 여러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늦은 감은 있지만 일단 이번 조치를 환영한다”면서 “법원의 결정에도 불구,19개 문제항목 중 16개에서 이겼으니 자신들의 승리라고 아전인수(我田引水)적 해석을 하는 조선일보의 태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동”혹세 무민의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柳初夏 민교협의장(50·충북대 철학과 교수)은 “이번 사건은 국민적 동력을 집중하고 합의해야 할 시점에 불필요한 논쟁을 종식시켜준데 의미가 있다”면서 “정치권,언론,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그 본질의 하나인 사상의 자유 원칙을 존중해야 하고 이에 반하는 수구세력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金起式 사무국장(33)은 “언론이 검증한다는 명목으로 학문적 성과를 부분 발췌하여 왜곡하는 것은 일종의 언론 폭력이다”고 규정하면서 “이번 판결은 언론 자유의 범위를 벗어난 것임을 명확히 해준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민주노총 李敏壽 대외협력부국장(37)은 “법원의 결정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라면서 “조선일보사가 崔교수의 저작에 대해 필요에 따라 짜집기하는 등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을 적극적으로 바로 잡는 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소송 법적절차는/崔 교수측 ‘가처분’으로 정당성 확보/재판부 결정 번복 가능성 희박/명예훼손·사상검증 자유 맞서 조선일보사가 지난 11일 법원이 내린 ‘월간조선 11월호’ 발행·판매 및 배포 금지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키로 함에 따라 崔章集 교수의 논문해석을 둘러싼 법정공방이 2라운드로 접어들게 됐다. 이의신청은 잠정적인 조치를 취하는 가처분 결정에 불복,정식 재판을 통해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하는 절차다. 심리는 이번 결정을 내린 서울지법 민사합의51부(재판장 申暎澈 부장판사)가 맡는다. 다음달 초부터 열릴 이의신청 공판에서는 “공인에 대한 언론의 사상검증은 헌법도 보장한 자유”라는 조선일보측 주장과 “사실을 왜곡해 명예를 훼손한 행위까지 언론의 자유로 볼 수 없다”는 崔章集 교수측 주장이 맞설 것으로 보인다. 또 ‘6·25는 金日成의 역사적 결단’ 등 문제가 된 10군데에 대한 견해를 밝힐 정치학자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과정에서도 설전이 예상된다. 정치학자의 증언은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증인의 중립성’ 여부가 논쟁거리로 부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가처분 결정을 내린 재판부가 자신의 결정을 뒤집는 판결을 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쨌든 양측은 이의신청 판결에 대해 서울고법에 항소할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崔교수측이 조선일보를 상대로 낸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같은 법원 민사합의25부(재판장 李性龍 부장판사)에서 따로 진행된다. 심리에서는 월간조선 기사로 인해 崔교수의 명예가 훼손됐는지와 훼손됐으면 그 위자료는 얼마인지를 결정한다. 崔교수가 승소할 경우 위자료 액수는 보도 경위,매체의 영향력,기사 분량,월간조선 11월호의 판매 정도 등을 감안해 결정된다. 이의신청과 손해배상 소송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현재까지는 가처분 결정을 얻어낸 崔교수측이 한층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상태다. ◎‘崔 교수논문’ 논쟁 전말/월간조선 ‘좌파적 시각’ 게재에 시민단체 등 “매카시즘” 강력 비난/崔교수측 손해배상 소송/국내 외 학자·단체들 조선일보 비난성명 봇물 崔章集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고려대 정외과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쟁은 조선일보가 10월 18일 발간한 월간조선 11월호에 ‘崔章集 교수의 충격적 한국전쟁관’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시작됐다. 월간조선은 96년 10월 출판된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이란 崔교수의 저서에 들어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하나의 이해’란 논문을 문제삼았다. 이 논문은 崔교수가 90년 9월 ‘한국전쟁 연구’란 책에 발표한 것으로,월간조선은 ‘6·25는 金日成의 역사적 결단’ ‘南進은 민족해방전쟁,北進은 가공할 사태’라는 소제목 아래 崔교수의 논문이 좌파적 시각에서 쓰였다고 주장했다. 월간조선은 또 93년 4월에 발간된 ‘한국민주주의의 이론’이란 崔교수의 책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崔교수가 “한국전쟁은 미국이 金日成으로 하여금 남침을 하도록 유도한 결과로 일어났다”는 내용의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을 “한국 정치학의 연구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이면서 커다란 영향을 미친,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미치게 될 매우 복합적인책”이라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崔교수는 월간조선의 보도가 논문 가운데 일부 내용만을 발췌해 왜곡했다며 지난달 23일 서울지법에 월간조선 11월호의 배포금지 가처분신청과 5억원 상당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崔교수는 24일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월간조선은 金日成의 6·25 개전 결정과 관련해 전후 맥락을 빼버린 채 ‘역사적 결단’이라고 인용함으로써 마치 내가 이를 찬양한 것처럼 표현하고,심지어 조선일보는 내가 쓰지도 않은 단어인 ‘위대한 결단’이라고까지 표현했다”고 반박했다. 조선일보는 연일 사설과 기고,우익단체들의 崔교수에 대한 비난 등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에 비례해 국내외 학자와 시민단체들의 조선일보에 대한 비난도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 정치학회는 성명을 통해 “월간조선의 기사는 공정한 인용에 바탕한 합리적 비판이 아니라 논지의 부당한 왜곡에 근거한 이념적 폭력”이라며 매카시즘적 마녀사냥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민주노총 등은 “월간조선이 崔교수의 논문을 왜곡보도해 사상논쟁을 유발하고 용공조작을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정치연구회,민족예술인총연합,국민승리21,4월혁명회 등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단체의 성명이 줄을 이었다. 특히 미국 UCLA의 신기욱 교수(사회학)와 존 던컨 교수(동아시아 언어문화사) 등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의 한국학 학자 22명이 성명을 통해 “(조선일보 보도는) 냉전시대에나 통할 단순 흑백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11월 3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성명을 냈고,국민승리21은 조선일보사 사옥 앞에서 규탄집회를 가졌다. 6일에는 경실련,흥사단,환경운동연합 등 50여개 시민단체가 가입한 한국시민단체협의회가 조선일보사의 사상검증 시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언론개혁통신연대,고려대대책위 등 4개 단체는 이날 조선일보 앞에서 규탄집회를 가졌다. 조선일보를 옹호하는 우익단체들의 성명도 잇따랐다. 대한민국 건국 5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지난달 26일 ‘국가 정통성을 부인하는 崔章集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崔교수의 논문 논쟁은 11일 법원이 월간조선 11월호의 일부 내용을 삭제하지 않는 한 배포할 수 없도록 판결을 내림에 따라 1라운드는 崔교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논문 논쟁 일지 ▲10월18일 ­월간조선 11월호,‘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 崔章集의 충격적 한국전쟁관’이라는 기사에서 崔교수의 사상문제 제기. ▲10월20일 ­崔교수,월간조선 보도에 대한 반박문 발표. ▲10월23일 ­崔교수,서울지법에 월간조선 11월호 배포 금지 가처분신청 및 약 5억원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 제기. ▲10월26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고려대 정외과교수,조선일보 비난성명 발표 ▲10월27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조선일보의 과거 행적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 발표. ▲10월2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조선일보의 사상 시비중단을 촉구하는 성명 발표. ▲10월30일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의 학자 22명,조선일보의냉전적 사고를 비판하는 성명 발표. ▲10월31일 ­예비역 영관 장교 모임인 대한청죽회,‘崔章集 건국사관 규탄 결의대회’ 개최. ▲11월2일 ­언론개혁시민연대,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참여연대,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학술단체협의회 등 5개 단체,‘崔章集 교수의 현대사 연구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태도­실태와 문제점’이라는 토론회 개최. ▲11월11일 ­서울지법,월간조선 11월호 배포 금지 결정.
  • 막바지 투쟁과 폐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8)

    ◎‘1910년 國恥’로 끝내 스러져/재판·옥고 등 일제 탄압 裵說 36살나이로 타계/꿋꿋이 필봉지킨 梁起鐸 소유권 통감부이전되자 통한의 광고 낸뒤 퇴사 1904년 창간이후 일제배척과 국권회복에 앞장선 대한매일도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6년여만에 결국 스러진다. 대한매일이 강제 폐간되기까지 일제는 사장인 裴說을 두차례 재판받게 하고,지면을 실질적으로 이끈 梁起鐸을 구속·기소했으며,배설의 후임사장에게서 신문을 매수하는 등 온갖 수단을 부렸다. 그럼에도 대한매일은 양기탁이 떠나는 그날까지 결코 붓을 휘거나 붓끝을 돌리지 않았다. 배설은 1907년 10월 서울주재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영사재판정에서 ‘대한매일의 논설이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6개월간의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한매일의 논조는 강경해지기만 했다. 1908년 4월29일 일제가 신문지법을 개정,외국인 발행의 신문이라도 발매금지·압수할 수 있도록 하자 그날 ‘百梅特捏(백매특날)이 不足以壓(부족이압) 一伊太利(일이태리)’논설을 실었다. 민족주의운동을 탄압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매특날)가 100명 있더라도 이탈리아 하나를 억압하지 못한다는 이 논설은,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일제의 음모는 거듭됐다. 1908년 6월 배설을 두번째로 법정에 세웠다. 그 근거로 내세운 게 ‘스티븐스 포살사건’을 비롯한 반일 보도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설치한 영국 고등법원의 판검사가 서울에 와 열린 재판에서 배설은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을 언도받았다. 배설은 상하이에서 복역하지 않을수 없었다. 논조를 주도하는 양기탁에게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혐의를 씌워 구속·기소했다. 이 재판은 양기탁의 무죄로 끝났다. 그는 대한매일에서 일한 뒤로 치외법권지역인 사옥에서 생활함으로써 일제의 검속을 피할 정도로 철저한 인물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의연금을 총괄처리하면서 일제에게 꼬투리 잡힐 일을 할 리 없었다. 또 배설­양기탁으로 이어지는 지나친 탄압에 대한 영국측 반발도 한몫을 했다. 그후 대한매일에는 어려움이 잇따랐다.창간이후 울타리 노릇을 한 배설이 1909년 5월1일 타계한 것이다. 일제에 맞서 싸우느라 심신을 소모했고 상하이에서 옥고까지 치른 그는 ‘심장확장’이 원인이 돼 서른여섯 나이로 눈을 감았다. 배설은 숨지기 전날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은 영원케 해 한국인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많은 한국인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를 기렸다. 그 가운데 5월5일자 대한매일 1면에 실린 박은식의 추모시를 소개한다. ‘天遣公來又奪公(하늘이 보내 공이 오더니 다시 빼앗아갔네) 歐洲義血灑溟東(유럽의 의혈인이 조선의 어둠을 씻고자) 翩翩壹紙三千里(삼천리 곳곳에 신문을 뿌렸네) 留得芳名照不窮(꽃다운 이름 남아 끝없이 비추리)’ 배설은 가도 양기탁은 남았다. 대한매일의 필봉은 배설 사후에도 꿋꿋함을 지켰다. 1909년 10월26일 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해 이듬해 3월 순국할 때까지,대한매일은 거사·체포·재판·처형의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安의사가 밝힌 ‘저격 이유 15가지’를 그대로 실은 것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배설 사후신문사 소유권은 영국인 萬咸(Alfred W. Marnham)에게 넘어갔다. 배설은 2차재판을 앞둔 1908년 5월27일자로 발행인 명의를 만함으로 바꾼 바 있다. 배설이 타계하자 그가 소유권을 승계했고 일제의 압력에 못견딘 그는 1910년 5월1일 통감부에 신문사를 넘겼다. 일제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가 6월14일 발행인과 편집인 명의를 李章薰으로 바꾸었다. 이날 양기탁은 대한매일에 광고를 싣고 퇴사했다. 기자들 대부분이 그 뒤를 따랐다. 대한매일은 두달여 연명하다가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이라는 국치(國恥)를 맞아 종간한다.
  • 서울신문 영욕의 53년 나래 접으며

    ◎솔직한 참회 재탄생 초석으로 정론 벗어났던 일 냉혹히 자성/날카로운 시선·질책 겸허히 수용 서울신문이 지령 16851호,1998년 11월10일자를 마지막으로 영욕 53년의 나래를 접습니다. 11일자로 우리의 뿌리,자랑스런 항일 민족정론지 대한매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수십만 독자와 함께 해온 서울신문 반세기를 마감하며 지난날의 정도(正道)를 벗어났던 일들에 대해 냉혹한 자기반성을 하고자 합니다. 시대에 따라 국민과 독자의 애증(愛憎)이 교차되는 시선 속에 우리 서울신문 가족들은 땀과 눈물로 서울신문을 가꾸고 키워왔습니다. 53년의 연륜을 지닌 서울신문 제호를 새시대 역사의 흐름 속으로 띄워보내며 회한(悔恨)이 서리지 않을리 없습니다. 서울신문은 6·25전란(戰亂) 가운데서도 진중신문을 발행하여 국민들에게 전황을 알려주는 사명감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의 밝은 면을 부각시키고 약자를 부축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에도 힘썼습니다. 환경지키기에 앞장서고 농촌경제 발전을 지원했습니다. 한글 전용신문 발행과학자·문필가·예술가 지원 등 민족문화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그래서 강한 사회면,격조높은 문화면으로 언론계의 선두에 서기도 했습니다. 자본에 휘둘리거나 상업적 사익(社益)에 얽매이지 않고 국익을 우선하는 논조,센세이셔널리즘에 흐르지 않는 품위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결코 스스로에게 관대(寬大)하려 하지 않습니다. 서울신문 구성원 개개인의 잘못은 아니었다거나 소유구조상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등의 변명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설령 열을 잘했다고 해도 하나의 잘못이 그대로 용서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성의 아픔이 클수록 재탄생하는 대한매일의 정론(正論)을 향하는 발걸음이 곧고 굳건한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유당 정권의 나팔수로 검은 것을 희다고,흰 것을 검다고 한 부분에 대한 응징으로 4·19 민주혁명 당시 사옥이 불태워지기도 했습니다.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며 언론의 본분을 벗어난 세월이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하며 참회하고자 합니다. 한 세기 한국언론사에 이토록 진솔하게 과거의 잘못을 고해(告解)한 언론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극적 식민지 역사 속에,그리고 권력의 부침(浮沈)속에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생존술과 상술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해오며 민주언론의 선봉을 자처하는 사례가 없지 않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한 참회를 재탄생하는 대한매일 앞날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합니다. 언론의 본분을 지키는 데 피와 땀을 흘림으로써 과거의 잘못들을 속죄코자 합니다. 서울신문은 이미 공익정론지 대한매일로서의 변신을 시작했습니다. 재경부 포항제철 한국방송공사가 대주주인 소유구조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제작과 경영에 일절 간여치 않는다는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편집권 독립에 관한 노사(勞使)합의라는 공정보도의 제도적 장치도 마련했습니다. 우리의 이같은 처절한 자성과 제도적 장치를 바탕으로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공익(公益)정론지 대한매일로 재탄생할 것임을 국민과 독자앞에 다짐합니다. 날카로운 시선과 애정의 질책으로 대한매일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권 독립을 위한 대한매일 노사 공동선언문 노조와 회사는 편집권을 존중한다. 회사는 편집권의 독립성을 침해 하거나 훼손할 수 없다. 기자는 언론의 정도(正道)나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반(反)한 기사를 쓰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기자는 공정보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노사는 편집권 독립과 공정보도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점에 합의한다. 1.편집권은 회사의 사시(社是)와 독자의 알 권리에 반하는 부당한 압력이나 간섭에 의해 침해받지 않는다. 2.노조와 회사는 외부로부터의 지면제작 개입을 배제한다. 3.회사는 객관성과 타당성이 없는 편파적인 취재와 보도를 지시할 수 없다. 4.취재기자는 자신이 취재해 보도한 내용이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 됐을 때에는 데스크,편집자,국장단에 시청을 요구할 수 있다. 5.언론 자유를 위협사는 사태가 생기면 노사는 합심해서 이에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한다. 6.회사는 기자에 대해 회사의 영업 및 수익활동 등 본연의 업무와는 직접관련없는 일에 대해 압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영업 및 수익활동 등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줄 수도 없다. 7.노사는 이상의 내용을 성실하고도 적극적으로 지킨다. 1988년 10월19일 ◎남긴 功/재벌 비판·신문말 다듬기 성과/국가 성장기에 국민총의 결집/문화예술 활동 전폭 지원 서울신문이 진취적으로 남보다 앞서 계획하고 이루어낸 업적은 적지 않다. 특히 한글 전용과 신문말 다듬기를 연구하고 실천한 것은 한국 신문사상 선구적인 것이다. 1956년부터 60년까지 ‘한글판 서울신문’을 부분적으로 냈던 서울신문은 23돌 창간기념일인 68년 11월22일부터는 모든 기사와 제목을 한글로 썼다. 70년 2월14일 ‘신문말다듬기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신설했다. 위원회에는 국어학자와 문인 등 7명의 심의위원을 두어 신문말을 다듬거나 새로 만들었다. 심의위원은 정인승 허웅 한갑수 李應百 朴木月 柳周鉉 정재도씨였다. 신문 제작 방침이 수정돼 74년 1월4일 종전 체제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귀중한 성과를 남겼다. 위원회가 정리한 낱말은 1,600여개에이르며 71년 6월28일까지 33회에 걸쳐 지면에 연재됐다. 이때 만든 새 말 가운데 ‘사재기’처럼 널리 쓰이게 된 것이 많다. 요즘 신문들의 한글 전용 편집에도 긴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한국신문협회가 낸 ‘韓國新聞協會二十年’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서울신문이 힘쓴 이 말다듬기의 성과는 모든 신문의 신문제작현장 종사자들에게 많은 준용과 새로운 대응어를 발굴,사용해 나가게 하는 기폭제 구실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신문은 상업주의와 선정주의(煽情主義)에 휩쓸리지 않고 공익의 편에 서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재벌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태를 비판하는 데 과감했다. 재벌에 약한 여느 신문과는 달랐다. 지난 10월9일과 10일 부산 동아대에서 열린 언론정보학회 정기 학술대회에서 박용원씨(동아대 신방과 석사과정)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서울신문은 재벌을 가장 많이 비판한 신문이다. 상업주의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서울신문은 과장,억지윤색,냄비열정의 폐풍을 벗어나 침착하게 보도하는 전통을 세웠다. 서울신문을 매개로해 수행된 공익사업은 헤아릴수 없을 정도다. 서울 세종로 한복판의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덕수궁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은 서울신문이 애국선열조상건립워원회를 조직하여 성금을 모아 세웠다. 서울신문사 주도로 1966년부터 72년까지 세운 애국선열의 동상은 15기에 이른다. 서울신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신각종도 서울신문의 노력으로 새해를 여는 울림을 계속하게 되었다. 금이 간 원래의 종을 대신할 새 종을 서울신문이 주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은 보도와 행사 개최를 통해 어느 신문보다도 문화예술활동 지원에 열성적이었으며 농어촌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서울신문이 국가 성장기에 국민총의를 결집하고 국력을 집중하도록 하는 데에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발전에 기여한 서울신문 53년의 공이 전적으로 무시될 수는 없다. ◎끼친 過/절대권력 정당화·비호로 점철/10월 유신 지지·군부정권 미화 급급/4·19혁명때 태평로 사옥 불타기도 대한매일로 새롭게 태어나는 서울신문은 지난 반세기에 걸쳐 뼈아픈 족적을 남겼다. 1960년 4월19일 오후 2시. 성난 데모대는 태평로 사옥 앞으로 물밀듯이 몰려왔다. 먼저 취재차량에 불을 질렀고 이어 윤전실로 들이닥쳐 다시 불을 질렀다. 불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에 번졌다. 곧바로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데모대원들이 물탱크차를 빼앗아 다른 곳으로 몰고 사라져 버렸다. 자유당 李承晩 독재권력을 비호한 관제언론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최근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선정한 한국언론의 대표적인 왜곡보도사례 50건 가운데는 서울신문의 보도내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자유당 4捨5入 개헌 정당화(56년),10월 유신 지지(72년),全斗煥 권력 장악 정당화와 미화(81년),4·13 호헌(護憲)조치 옹호(87년) 등이다. 절대권력의 정당화에 앞장서고 민주화를 외면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언론의 선두로 꼽혀왔다. 일반 국민들에게 각인된 서울신문의 이미지는 항상 권력의 편에서 당시의 권력자를 옹호하는 전위대였다. 10월 유신때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와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해바라기 지식인’을 동원,유신대통령의 선출을 정당화하는 글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10·26사태후 80년 ‘서울의 봄’에 이르는 이른바 안개정국 시절엔 신군부 등장의 역사적 필연성을 예고하기도 했다. 5공의 全斗煥정권이 등장하자 “동천의 붉은 해가 불끈 솟았다.‥‥‥”며 그를 찬미하는 연재물을 게재했다.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도 “북괴방송,광주사태 집중적 선동” “광주시위 선동 남파간첩 검거” “공포의 유혈 무법천지” 등으로 ‘대공(對共)’문제와 ‘파괴성’을 권력의 편에 서서 부각시켰다. 해방후 53년에 걸쳐 점철되어온 서울신문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일관된 허물은 ‘권력의 대변지’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나온 시대는 역대 독재권력이 한국전쟁 이후 가열된 냉전시대의 안보논리를 그들의 체제유지논리로 위장한 시대이기도 했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시대를 같이 한 한국 제도권 언론의 곡필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울신문이 적어도 이같은 독재권력을 지지하는 선두에 섰다는 사실이다. 서울신문이 언론의 본분을 벗어났던 대목은 이밖에도 숱하게 많을 것이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한 정치문제에서 집권여당의 논리를 지나치게 앞세우고 상대적으로 야당의 입장을 폄하하는 지면을 제작함으로써 균형감각을 잃었다는 비판도 그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정부의 정책적 입장을 심도있게 보도한다는 취지를 왜곡하여 절대권력자의 일방적인 논리를 전파하는 데만 급급했던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제 대한매일은 서울신문의 지나온 역사를 깊이 자성하면서 철저한 자기비판을 토대로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 ‘더 그리운 朴正熙’(林春雄 칼럼)

    매년 10월26일은 이른바 ‘십이륙’이다.“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당시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현직 대통령이 쓰러진 날이다.금년에도 신문들은 이날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서 있었던 고(故)박정희 대통령 19주기 추모행사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26일자 어느신문은 ‘IMF체제속… 더 그리운 朴正熙’라는 제목으로 관련 기사를 다루고 있다.정론지임을 자처하는 신문에서 말이다.가슴 아픈 일이다.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란 것이 어제 오늘에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이쯤되면 사회통념이나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뿌리째 뒤틀리는 일이어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자민련에서는 ‘박정희 되찾기 운동’도 추진하겠다고 한다. 이 나라 역사상 박 전 대통령만큼 평가가 어려운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박 전대통령은 이땅의 가난을 물리쳐준 인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사람사는 일중에 먹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가.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가난을 추방해준 그는 분명히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다. ○잘못된 현실이 향수 불러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다.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강압적으로 3선 개헌을 했으며 역사의 시계바늘을 한참이나 거꾸로 돌려놓은 ‘유신’(維新)을 강행한 인물이다.그가 집권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으며 얼마나 많은 민주인사들의 인권이 손상됐는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박정희 평가는 전혀 다를 수 있다.그렇다고 박정희 평가의 이중성(二重性)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평가의 혼란은 그의 족적과 업적에서 오는 복잡성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시대적 상황도 적절치 못했다. 최근 간행된 ‘박정희의 유산’을 쓴 김재홍씨는 “오늘날 역사의 아이러니는 문민시대의 정치인들이 씨를 뿌렸다”고 말한다. “목불인견의 문민정치가 군인정치의 개발독재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박정희 향수의 실체를 단순논리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나 복고주의의 속성이 그렇듯이 진보의 가치를 신봉해온데 대한 배신감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 같다”고 진단하고 있다. 곤혹스런 현실이 복고에의 향수를 부른 일은 역사적으로도 얼마든지 있다.나폴레옹 황제를 맞아들인 프랑스 혁명이 그렇고 나치즘을 부른 바이마르 공화국이 그렇다.‘박정희 신드롬’의 위험성이 바로 여기 있다. 박정희 평가가 박정희 자신의 행적과 관계없이 잘못된 현실이 그에 대한 향수를 부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말이다.그리고 그 결과는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우리는 지금 IMF체제에 놓여있다.우리가 이 경제난국을 현명하게 극복치 못하게 되면 정치적으로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도 상상해 볼수 있다. ○이중적 평가로 가치관 혼란 그런 점에서 박정희 평가작업은 중요하다.어느 한 시각에서 만이 아니라 종합적 평가가 나와야 한다.어느 점은 잘못됐지만 어느 부분은 잘했다는 식의 평가는 가치체계에 혼란만 가중시키게 된다.평가에 어려움이 있으면 원칙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무엇보다 그는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이는 폭력이다.유신은 시대착오적 역사의 반동(反動)이었다. 그에게 국가 산업화 업적이있다고 해서 보다 원초적인 흠결이 가려 지거나 희석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는 분명한 독재자였다.무엇으로도 독재를 미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박정희 신드롬’은 위험하고 반 역사적이다.
  • 친일의 군상:11/여자 밀정 裵貞子(정직한 역사 되찾기)

    ◎伊藤博文의 꼭두각시로 매국·배족 선봉에/1885년 도일… 이등박문 만나 ‘스파이 교육’ 받아/러 견제·고종퇴우 막후활동… 만주지역서 독립운동가 탄압/태평양전쟁때 韓人 부녀자 100여명 위안부로 내몰아/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된뒤 후회의 눈물/시골 아전의 딸로 출생 대원군 실각후 집안 몰락/어릴때부터 조정에 반감/한때 官妓여승으로 전전 1949년 2월 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姜明珪 조사관 일행이 서울 성북동 언덕길을 급히 오르고 있었다. 한 양옥집 앞에 다다른 姜조사관 일행은 백발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우고 남대문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연행했다. 그 노파의 나이 79세.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가 반민특위로 잡혀오자 특위 요원들이 이 노파의 얼굴을 보려고 姜조사관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 나이에 수갑에 채워져 끌려왔을까? 과연 이 노파는 누구인가? 裵貞子(1870∼1952). 흔히 이름 앞에 ‘요화(妖花)’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배정자가바로 그 노파였다. 정사(正史)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한국근대사의 이면사(裏面史)에 ‘일제의 앞잡이’로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배정자급(級)에 드는 친일파는 몇 안된다. 한말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협조하였고 ‘한일병합’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항일세력 탄압에 앞장섰었다. 친일파 가운데 우두머리급에 드는 친일파였다. 해방후 반민법 위반으로 반민특위에 잡혀온 여성피의자는 총 6명. 그들중 첫번째로 잡혀온 사람이 바로 배정자였다. 흔히 ‘여자 스파이’의 대명사로 ‘마타 하리’를 든다. 고급창녀 출신의 마타 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1917년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배정자를 바로 이 ‘마타 하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 고을에서 아전노릇을 하던 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아명은 분남(粉男). 부친은 1873년 대원군 실각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었다. 모친은 이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그가 세살때의 일이었으니 그의 초년은 순탄치 못했다. 이후 그는 모친과 함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밀양에서 관기(官妓)로 팔렸으나 도중에 뛰쳐나와 양산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우담(藕潭)이란 승명(僧名)으로 목탁을 두들기던 그는 2년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 관청에 체포됐다. 여기서 우연히 은인을 만났다. 당시 밀양 부사 鄭秉夏는 그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일본으로 가서 살도록 주선해주었다. 1885년 15세 되던 해 그는 일본인 밀정 마쓰오(松尾彦之助)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에게 뜻밖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배정자는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安경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金玉均과도 알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물굽이를 틀어준 사람은 바로 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하녀 겸 양녀로 자기 집안에들여앉히고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이름을 지어주었다. 裵貞子의 ‘貞子’는 여기서 생겨났다. 이토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를 장차 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키울 요량으로 수영·승마·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다. 소위 ‘밀봉교육’을 시킨 셈이다. 일본으로 간지 9년만인 1894년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하야시(林權助)의 통역이었으나 본분은 일제의 밀정. 첫 임무는 당시 조선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엄비(嚴妃·고종의 계비)의 친인척을 통해 황실과 선을 댔다. 고종(高宗)은 미모에다 출중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를 총애하였다. 당시 한 신하가 고종에게 “비기(秘記)에 가로되,갓 쓴 여자가 갓 쓴 문(門)으로 출입하면 국운이 쇠한다 하였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아뢴 바 있다. 양장에 모자(갓)를 쓴 그가 대안문(大安門·덕수궁의 정문으로 현재 명칭은 ‘大漢門’임)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러일전쟁 직전 친러파는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이 정보를 빼내 일본공사관에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배정자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토가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빠 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토를 등에 업은 그는 밀정이자 막후 권력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제와 함께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기세는 1909년 이토가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6월) 다시 4개월 뒤 하얼삔에서 安重根 의사에게 살해됨(10월26일)으로써 한풀 꺾이고 말았다. 이토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은 ‘한일병합’후 부임한 조선주둔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그는 일본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는 이 지역에서 수년간 군사첩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봉천(奉天·현 瀋陽)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지역 거주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귀순공작을 담당했었다. 배정자는 1920년 일제가 옛 일진회(一進會)의 잔당들을 규합,만주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할 때 배후인물로도 활동하였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직한 무장 첩보단체로,초대회장 崔晶圭는 대한제국 시절 참위(소위)출신이었다. 매국노 李容九의 한일합방 청원을 지지했던 崔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배정자는 1922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경무국 촉탁으로 다시 고용하였다. 나중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00여평의 토지를 받기도 했는데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군 위안부 송출업무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 노구에도 불구하고 조선여성 100여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 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였다. 해방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 한 그릇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 배정자의 형량과 얼마동안 징역을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의 죽음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종로구청에 보관돼 있는 호적에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27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묘하게도 그가 죽은 날짜는 그의 출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어릴 때 조정(朝廷)에 대한 증오 때문에 조국을 배반,매국녀(賣國女)가 된 배정자는 해방후 조국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裵貞子의 남성편력/빼어난 미모에 화려한 경력 소유/결혼·동거 등 거쳐간 남자 7∼8명 裵貞子는 빼어난 미모와 화려한 경력에다 연령·민족을 불문한 ‘남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첫남자’는 田在植. 한 때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만나 사랑에 빠졌었다. 배정자의 일본행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재회,결혼했다. 이 사이에서 田有和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경응의숙(慶應義塾)에재학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두번째 남편은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玄暎運. 1895년 당시 외부(外部·현 외무부) 번역관(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만에 육군 참장(종2품·현 준장)으로 승진,농공상부 협판(차관)직을 맡았다. 배정자는 현영운과 1년 가까이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朴榮喆(일본육사 15기 졸업,함북도지사·중추원 참의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일본인 오하시(大橋),은행원 崔모,전라도 갑부 趙모,대구 부호의 2세 鄭모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총격요청 수사결과­안풀린 의문점들

    ◎안개속 銃風 배후 ‘의혹불씨’ 여전/3인방 혐의확인 ‘고문자백’ 논란은 불식/실체규명 미흡… 정치인 공방 계속될듯 검찰의 ‘판문점 총격요청사건’ 수사가 풀어야 할 많은 과제를 남긴 채 사실상 일단락됐다. 검찰은 26일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韓成基씨 등 3명의 총격요청 동기 및 경위 등만을 밝혔을 뿐 ‘배후’에 대해서는 확실한 설명을 못했다. 30여일 동안 여야 정치권의 첨예한 대치 상황을 불러일으켰던 파장에 비춰볼 때 수사 결과는 일반의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너무 미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朴舜用 서울지검장도 “속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시간도 부족했다”며 수사결과가 기대 이하임을 시인했다. 물론 검찰은 “이번 것은 중간수사발표이며 수사의 끝은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검찰은 이날 발표에서 韓씨 등 3명이 ‘대선 직전 북측인물과 내통,판문점에서의 총격을 요청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피의자들의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이어 ‘무력도발을 통해 긴장을 조성,특정 후보의 당선을 기도한 것으로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한 사건’이라고 성격을 강도 높게 규정했다. 검찰은 이번 수사에서 吳靜恩 전 청와대 행정관이 진로그룹 張震浩 회장의 자금 지원을 받아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의 ‘비선조직’을 결성,운영한 사실도 밝혀냈다. 아울러 이른바 ‘尹泓俊 기자회견,吳益濟 편지 공개’ 등 일련의 ‘북풍사건’을 이끌었던 權寧海 전 안기부장의 개입 사실도 검찰 수사의 성과이다. 權전부장은 대선 전 이 사건의 신빙성을 확인하고서도 사건을 묵살,한나라당 李후보를 음성적으로 지원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 사건의 본류인 정치권 등의 ‘배후’에 대해서는 ‘계속 수사 필요’라는 등의 말로 얼버무렸다. 특히 사건에 깊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던 한나라당 李총재의 동생 李會晟씨(52)의 개입 여부와 관련,“韓씨가 중국 출국 전 판문점 총격요청계획을 보고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간다”는 수준에서 결론을 유보했다. 정황으로 미뤄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는 뜻이다. 韓씨가 안기부 수사에서는 李씨로부터 500만원을 받았다고 진술했다가 검찰에서는 진술을 번복한 대목에 대해서도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 검찰은 이와 관련,‘의혹이 풀리지 않은 한 이 수사는 계속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총풍(銃風)’의 여진이 언제든지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검찰의 수사 발표와 상관 없이 ‘배후세력 규명’‘야당 파괴 음모’ 등을 주장하는 정치권의 공방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새로 밝혀진 사실들/3인방,李 후보 비선조직 결성 26일 검찰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에서는 權寧海 전 안기부장이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도 고의적으로 묵인했으며 진로그룹 張震浩 회장이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權 전 부장은 지난해 12월 11일 무력시위 요청에 관한 첩보를 입수하고 李大成 전 해외조사실장에게 진상파악을 지시했다. 나흘 뒤 李 전 실장으로부터 ‘韓成基씨 등이 옥수수박사인 金順權 교수의 방북 대가로 북한측에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퇴임 때까지 관련 첩보 및 증거물을 수사 부서에 넘기지 않았다. 검찰은 權 전 부장이 지난 대선에서 ‘尹泓俊씨 기자회견’ 등 일련의 ‘북풍(北風)공작’을 지휘하면서 특정 후보에게 불리한 사실을 은폐하려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진로그룹 張회장은 韓씨로부터 무력시위 요청을 보고받은 뒤 안기부 직원을 연결시켜 주겠다고 제의했다. 특히 韓씨에게 북한주민접촉 신청에 필요한 무역업필증 등의 서류도 발급해줬다. 며칠 뒤 귀국한 韓씨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자 그날 저녁 吳靜恩씨와 만나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쯤 자금압박을 받자 李會晟씨에게 진로그룹의 부동산 매각과 화의신청이 성사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부동산이 매각되면 탈당설이 나돌던 朴燦鍾 고문에게 자금을 지원,李會昌 후보 진영에 남도록 유도하는 것은 물론 대선자금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대선자금을 먼저 지원해 달라’는 會晟씨의 요청에 ‘부동산 매각이 우선’이라며 거부했다. 한편 吳씨 등은 비선조직을 전국적 규모로 활용할 방침이었다. 이를 위해 지난해 말 선거기획업무 경험이 있는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 조청래씨를 먼저 끌어들였다. 이후 李明博 의원 보좌관인 尹만석씨,정치평론가 高성국씨 등과 李會昌 후보 비선 참모조직으로 구성했다. 또 20∼30대 청년을 중심으로 전국 규모의 청년홍보단을 조직했다. 당시 청와대 행정관인 崔동렬씨를 중심으로 중앙 관리단과 전국 시도지부를 결성,활동하려 했으나 張회장으로부터 7,000만원 이외 자금지원이 없어 중단했다. ◎총격요청 수사일지 ▲97년 12월 안기부,韓成基씨 총격요청 첩보 입수 ▲12월12일 안기부,韓씨 조사 ▲98년 3월 안기부 내사 착수 ▲8월17일 경찰청,韓씨 사기혐의 구속 ▲9월1∼7일 안기부,서울지검서 韓씨와 張錫重씨 조사 ▲9월9일 吳靜恩 전 청와대 행정관 구속 ▲9월17일 張씨 구속 ▲9월25일 안기부,吳·韓·張씨 서울지검 공안1부 송치 ▲9월28일 李會晟씨 출국금지 ▲10월2일 張씨 동생 錫斗씨와 韓씨 변호인 姜信玉 변호사,안기부 고문 주장 ▲10월3일 韓·張씨 신체검증 ▲10월5일 韓·張씨 국과수 1차 신체감정 ▲10월8일 張震浩 진로그룹 회장 소환. 변호인단,안기부 수사관 등 가혹행위 고발 ▲10월10일 吳·張씨 구속적부심 기각 ▲10월12일 金順權교수 소환.국과수 1차 신체감정결과 통보 ▲10월14일 韓·張씨 서울대병원 2차 신체감정 ▲10월21일 李會晟씨 소환조사 ▲10월22일 서울대병원,2차 신체감정결과 통보 ▲10월26일 기소 및 수사결과 발표 ◎검찰 열거 사항/李會昌­會晟 형제 연루 “정황증거뿐”/한성기­회성씨 수차 접촉 총풍추진 결과 등 보고/오씨 작성 대선전략안 이 총재에 직접 전달 검찰은 26일 판문점 총격요청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와 동생 會晟씨의 연루의혹에 대해 여러 ‘정황증거’를 열거했다. 會晟씨의 연루의혹은 특히 구체적이다. 검찰이 韓成基씨 등 피의자 3인의 배후가 있다고 믿는 것은 이들이 낮은 직급과 신뢰성에도 불구하고 북측에 비료 등의 지원을 약속한 점 때문이다. 검찰은 會晟씨가 韓씨와 수차례 전화나 직접 접촉을 통해 대선관련보고는 물론 총격요청 계획을 보고받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우선 會晟씨가 대선기간중 조선호텔 스위트룸을 빌려 韓씨 등과 수차례 만난 데 주목하고 있다. 韓씨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會晟씨와 12월1일 두차례,6·8·9일 각각 한차례씩 통화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韓씨는 특히 12월13일 안기부에서 조사받은 후 “그동안 별일 없었습니까,선거는 잘되고 있습니까”라는 내용으로 통화했으며 16일경 호텔 로비에서 會晟씨에게 전화를 걸어 “북풍을 일으켜 달라고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고 수사 초기 시인한 바 있다. 韓씨는 또 “선거때 열심히 하신 분으로 앞으로도 큰 몫을 할 분”이라는 會晟씨의 편지를 휴대하고 군입대한 會晟씨의 아들을 면회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후원자 관계 이상임을 입증하는 증거라는게 검찰의 설명이다. 李會昌 총재의 연루의혹에 대해 검찰은 吳씨가 지난해 12월초 10여차례에 걸쳐 李총재의 이미지 제고방안 등 18건의 보고서를 작성,李총재에게 직접 전달한 사실을 확인한 데 만족하고 있다.이는 여권이 제기하는 ‘도의적 책임론’과 맥이 닿아 있다.
  • 재경위·산자위/國監 하이라이트

    ◎야,세풍 ‘연결고리’ 차단 안간힘/재경위­여,조세권 악용 ‘몸통’ 집중 추궁 26일 재경위의 국세청 국감에서는 ‘세풍(稅風)사건’이 단연 쟁점이었다.초반부터 여야의 불꽃튀는 공방전이 펼쳐졌다.국세청 불법모금 사건에 연루된 徐相穆 의원의 ‘국감불참’이 불씨가 됐다. 여권은 이에 “불법 모금을 자행한 장본인이 자신의 결백 성명서 하나만 던지고 불참한 것은 파렴치한 행위”라며 총공세에 나섰다.여권은 이어 검찰 공소장 등을 인용하면서 이번 사건을 ‘국세청 무장강도 사건’”으로 규정,‘몸통 배후’를 집요하게 캐물었다.韓英愛(국민회의) 邊雄田(자민련) 의원은 “대선자금을 모아오도록 지시한 한나라당이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고 있다”며 석고대죄를 촉구했다. 韓의원은 “한나라당은 국가의 조세징수권을 악용한 ‘삼정문란당(三政紊亂黨)’”이라고 몰아치면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불법모금액이 400억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국민회의 鄭漢溶 의원은 林采柱 전 국세청장의 1,000억원 ‘비자금 조성의혹’을 터뜨려 국감장을 술렁이게 했다. 이에 한나라당은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라”며 林采柱·李碩熙 전 국세청 청·차장의 ‘개인 모금행위’로 방어망을 구축했다.金在千 羅午淵 安澤秀 의원 등은 “법원의 최종판결까지 한나라당을 세도정당으로 몰아치지 말라.국세청이 대선자금을 국민회의에 줬는지 누가 아느냐”며 역공을 폈다.같은당 安商守 의원은 질의를 통해 “李전차장이 개인적으로 돈을 거둬들인 것을 ‘세도’로 규정한다면,金大中 대통령이 盧泰愚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20억원과 뭐가 성격이 다르냐”고 반문하며 공세를 폈다. 여야의 틈바구니에 낀 李建春 국세청장은 “검찰 발표 이외에 이번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없다”며 시종 ‘모르쇠 전략’으로 화살을 피해갔다. ◎산자위/중기지원책 “현실성 없다” 성토 26일 국회 산자위의 중소기업청 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은 기업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듯 하나같이 중소·벤처기업 육성책을 거론하며 중기청의 일부 현실감 떨어진 정책을 집중 성토했다.여야 의원들은 “중소·벤처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살고 경제가 살아나야 나라가 산다”면서 중기청의 ‘살아있는 행정’을 강도높게 촉구했다. 중기청 감사는 정부대전청사가 생긴 이래 11개 입주기관으로서는 첫 감사였다. 이날 가장 많은 자료를 공개한 국민회의 金明圭 의원은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 대출에 대한 금융권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고 지적하고 ‘중소기업의 현장 금융이용 애로실태를 통한 개선방안’으로 상당한 공감을 얻었다.같은 당 南宮鎭 의원과 朴光泰 의원은 金의원의 주장을 거든 뒤 각각 대출의 ‘원 스톱 서비스’와 중소기업의 자체경쟁력 강화를 주장했다.자민련 金七煥 의원은 중소기업 제품의 판로확대 지원책을 촉구,국민회의 朴光泰 의원과는 다소 시각을 달리했다. 한나라당 孟亨奎 의원은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세계은행 차관 7,000억원중 3,000억원이 주택경기활성화 자금으로 돌려진 이유를 추궁한 뒤 벤처기업 개발숫자에만 집착하는 ‘수치지상주의’를 질타했다. 때마침 10·26 19주년이어서 국감 출석이 눈길을 끈 한나라당 朴槿惠 의원은 중기청의 강력한 수출드라이브를 주문했다.秋俊錫 중소기업청장은 “의원들의 관심을 적극 정책에 반영하겠다”면서 현장의 소리를 적극 수용하려는 자세를 보여줘 호감을 샀다.秋청장은 특히 “벤처투자자금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내년부터 이스라엘의 요즈마 펀드 같은 ‘공공벤처 펀드’를 조성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 南北 안중근 의사 유해 찾자(金三雄 칼럼)

    오는 10월26일은 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에서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한지 89주년이다. 흔히 ‘10·26’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안기부장에게 암살된 날로 기억하지만 항일투쟁사에 길이 빛나는 안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날이다. 안의사는 의거 이듬해인 1910년 3월26일 일제 형법에 따라 불법적으로 중국 뤼순(旅順)감옥의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때 定根·恭根 두 아우를 통해 남긴 유언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안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것 이다. 우리는 안의사가 순국한 지 88주년, ‘국권이 회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안의사는 당일 오전 10시15분 교수형으로 순국하여 5분 후 백포(白布)에 싸인 관은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오후에 시 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 우리 항일 투쟁사에 으뜸가는 애국자 안의사는, 중국 袁世凱가 안의사 서거를 슬퍼하여 지은 “몸은 삼한 땅에 있었지만 이름은 만국에 빛났고/생은 백보가 못 되었지만 죽음은 천추에 남을 것이다”란 시 그대로 겨레의 스승이다. ○남북정부 유해발굴 나서야 남북한 정부는 ‘국권회복’ 5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의거일을 맞아 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안의사 유해를 찾아야 한다. 안의사의 유해는 뤼순의 시 감옥 묘지에 묻혀 그후 돌보는 이 없다가 현장의 개발과정에서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다.지난 8월 朴三中 스님과 조선족 동포 및 재일교포 몇 분이 안의사가 수감돼 있던 동(東)수감동 앞뜰에 추모비를 세우고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에서 가져간 무궁화 10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뜻있는 분들의 추모사업도 필요하지만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에 봉환하는 일이 중요하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해방 반세기가 지난이때까지 안의사의 유해를 해외에 방치해온 것은 한민족 모두의 부끄러움이다.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금이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최적기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통절한 사죄’를 함으로써 안의사를 죽인 죄업에도 사죄를 받게 되었으며, 안의사가 이루고자 했던 ‘동양평화’가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정권의 수립과 함께 민간차원의 남북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남북관계에도 조금씩 화해의 서광이 보인다. 이럴때 남북에서 함께 ‘가장 존경받는 역사인물’로 꼽히는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을 양쪽 정부가 공동으로 추진한다면 화해와 통일을 위해 값진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남북의 눈치를 보면서 안의사의 유해 확인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해주 출신인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북한의 ‘연고권’ 주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중국은 남북한과 국교를 갖게 되고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봉환하는데 협조할 터이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유해만확인되면 남북합의에 따라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어 모시고 통일의 상징으로 삼으면 어떨까. ‘연고권’ 문제는 안의사를 욕뵈는 일이다.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자. 정부는 즉각 북한에 제의해주었으면 한다. 정부 레벨이 안되면 민간차원이라도 나서자.
  • 안중근 이토 총살(秘錄 南柯夢:27)

    ◎탕! 하얼빈 1번플랫폼 충성… 일제원흉 즉사/이토 러시아 가던길서 사망/명치천황으로선 두손 잃은셈/“삼천리강토 원수 갚았을뿐” 安의사 죽음앞서도 당당/여순감옥서 순국땐 구슬비마저 기차 30분 넘도록 안화 낙심하며 돌아서는데 그때 도착하는 모습이 그래서 막 뛰어가…(安의사 회고中) 1909년 10월26일 오전 10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이 나라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강탈한 이토는 특별열차로 중국 만주의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그때 원수 이토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안중근의사는 뒷날 회고하기를 “이토 그놈을 가딱하면 놓칠뻔 했네. 그놈의 기차가 아침 9시 도착인데 9시30분이 되어도 오지 않아서 그만 걸어서 돌아서는데 다리있는데 오니까 아! 그때 기차가 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막 뛰어가 그놈을 쏘아 죽였네 그려”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해서 일제침략의 거물 이토를 하얼빈역 1번 플랫홈에서 쏘아 죽였다. 이것을 우리는 안의사의 이토 총살이라 부르고 있다. 전 통감 이토(伊藤)는 저희 나라의 일로 러시아에 가게 되었다. 하얼빈역에 잠시 내렸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리더니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아! 동양의 패권을 쥐었다는 자가 끝난 것이라. 이토가 끝났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끝났다는 이야기이다. 이토는 한국민에 대해 원수일뿐 아니라 일본인에 대해서도 원수인 것이다. 금년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 79주년이 되는 해인데 안의사가 외쳤던 ‘동양평화’는 과연 이루어졌는지 의심스럽다. 안중근은 이토를 죽인뒤 조용히 잡혀가면서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으니 충의는 당당하고 의리는 빛났으며 위엄있는 풍도는 늠늠하니 뉘 감히 그를 꺾을 사람이 있겠는가. 안중군 의사는 당년 32세의 젊고 젊은 나이에 의거를 결심했는데 그의 참뜻은 아직도 후손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지은 ‘장부처세가(丈夫處世歌)’는 이렇게 외친다. 동포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만세 만세 대한독립이로다. 안중근,그는 누구인가. 아무도 그 당시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얼빈에서 총을 쏜 소년은 뉘 집의 아들이었던가. 칼을 집고 바다를 건너갔다고 하는데 그의 선대는 알지못하겠으나 성은 안씨요 이름은 중근(重根)이라 하였다. 아이시절부터 칼 쓰기와 공차기를 좋아 했고 장성해서는 비분강개하고 활협(闊狹)의 의지가 강하여 남을 잘 도왔다. 또 나라일을 걱정하고 그 지략이 커서 사소한 일은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이토가 러시아땅에 들어가는 기회가 있음을 미리 알고 그 길목에 숨어 있다가 이토의 얼굴이며 신장의 처수까지 알아두기 위해 이토의 사진 한장을 얻어 오래 익힌 뒤 즉시 단총(육혈포)으로 방포(放砲)해 그자의 가슴을 바로 맞추어 즉사케 하였으니 아! 위대하고 장하도다 안중근 의사의 공판투쟁은 참으로 용감하고 씩씩하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의 법률에 따라 조선사령부에 호송되어 며칠동안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청천백일과 같아서 한결같이 정정당당했고 끝내 굴하지 않고 말하기를 “대장부 사내가 되어 한번 죽음은 당연한 것이거늘 어찌 이처럼 고달프게 문초하는가. 원래 조선에서는 사람을 죽인 자에 대해서는 죽음으로 갚게 되어있다. 어찌 한치라도 사심이 있겠는가” 하였다.심문관이 또 묻기를 “너와 같이 공모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하였다. 안중근이 대답하기를 “조선의 이천만 동포가 모두 같이 공모자다”고 했다. 또 묻기를 “누가 너에게 이런 불법적인 일을 가르쳤는가” 하자 “하늘이 가르쳤다. 누가 가르쳤겠는가.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법대로 하라. 이토로 말하면 우리 삼천리 강토를 늑탈하고 오백년 종사(宗社)를 멸망케 하였으니 내가 그 원수를 갚은 것이다. 나는 귀국의 원로를 죽여 조선의 수치를 씻었다. 그러나 귀국은 나를 살인죄로 죽이려 들 것이니 구차스럽게 문답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조용히 죽음에 임했다. 이토는 일본 근대사에 있어서 제일가는 위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래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만엔짜리 일본 지폐에 그 얼굴이 찍혀 나왔다. 이토의 이력에 대해선 벌써 온 세계 역사책에 기록이 돼있으니 더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방(列邦)과 교섭하는데 있어 이토같은 거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같은 인물이 죽었으니 명치천황으로서는 두 손을 모두 잃은 것 같았다. 이토의 지략은 독일의 비스마르크나 미국의 워싱톤 보다 못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명치 천황의 혁명이 아니었다면 어찌 동서양 패권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옛날 제나라때 관중(管仲)과 안자(晏子)는 제후에게 패도(覇道)를 써 임금에게 신임을 받았으나 이토의 경우는 달랐다. 예로부터 영웅은 시대를 잘만나 공을 이루는 법인데 이토는 명치천황의 악정(惡政)을 혼자 자기 사업으로 전용(專用)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 공로가 많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역사에 안의사와 같은 이가 또 있으니 바로 창해역사(滄海力士)다. 그는 조선인이었는데 박랑사중(博郞沙中)에서 철퇴를 던져 진시황을 저격했으나 다음 수레를 잘못 맞춰 온누리의 영웅으로 불려왔으며 진(秦)나라가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지금 안중근도 한번 단총을 쏘아 패권을 쥐고 있던 주인공을 꺼꾸러져 죽게 했다.그러나 일본은 점점 강해지고 조선은 반대로 멸망하니 이것이야 말로 일은 사람이 꾸미고 성패는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안의사는 죽음에 임하여 태연히 웃으면서 말하기를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먼저 일본이 정략을 고쳐야 한다. 시간이 지나서 기회를 잃으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過失機 追悔何及)”고 했으니 이 얼마나 앞 날을 꿰뚫어본 탁견인가. 안중근의사는 마침내 1910년 3월26일 10시 구슬비가 나리는 가운데 만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날 푸른 하늘은 답답한 듯 하고 백일(白日)이 침침하며 숙숙(肅肅)한 기운이 육대주에 충만하였으니 두공부(杜工部 즉,杜甫)가 지은 시에 “영웅의 가슴에 눈물이 가득하다”고 한 것은 안중근이 나오는 것을 미리 알고 지은 시가 아니었던가. 그 친척들이 시체를 거두어 고향산천에 반장하였으나 그 뒤에는 적적하여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이토는 안의사를 만나 잘 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 또한 빛을 잃었을 것이다. 이토의 만장(挽章) 영웅을 쏘아 죽이자 만국이 놀랐다/하늘이 그로 하여금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함일세/이로써 열강의 교섭은 끝나고/명치는 울어서 눈물이 쏟아지겠지 그러나 안의사의 죽음만큼귀중한 일은 없었다. 안중근의 만장 하얼빈의 총소리가 오대주를 진동하였으니/안중근의 기개가 천추에 관통하였네/지난해에 충의를 다한 자 누가 있었던가/자기 한몸 죽여가며 나라근심 보답했네.
  • 재일교포 연출가 김봉웅씨 작품/‘뜨거운 파도‘ 한·일 연속공연

    ◎내년 4·5월 서울선 일본어로 일선 한국어로 추진 일본 오이타시의 극단 쯔카 코우헤이가 내년 4월 연극 ‘뜨거운 파도­여형사 이야기’를 일본어 공연으로 무대에 올린다.재일교포 2세로 일본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중인 김봉웅씨(50)가 지난 95년 자신의 일본이름을 따 창단한 이 극단은 99년 4월과 5월 서울과 오이타시에서 이 작품의 연속 공연을 시도하면서 해방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일본어공연을 시도한다.반대로 오이타시에서 열릴 5월 공연은 한국어로 진행될 예정이며 현재 한국인 출연배우를 모집중이다. 한일 연속공연으로 추진되는 이 작품은 김씨의 자작 연출극 ‘매춘 수사관’으로 이 극단의 창단작품으로 소개된뒤 도쿄에서 호카이도,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국 순회공연을 통해 호평을 받은 화제작. 게이오대학 문학부를 중퇴한후 희곡을 쓰기 시작한 김씨는 73년 ‘아타미살인사건’이란 작품으로 키시다 쿠니오상을 최연소로 수상했고 82년 ‘카마다 행진곡’으로 나오키상을 받는 등 일본 연극계에서 입지를 굳혀왔으며 특히 오이타시에서는 ‘지방으로부터의 문화발신’이란 새로운 문화경향을 주도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김씨는 재인한국인으로서 이같은 한일 연극 페스티벌을 통해 좀처럼 풀리지 않는 두나라간에 작은 가교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밝혔다.일본 공연에 참가할 배우에 대한 원서접수는 2일까지 극단 쯔카 코우헤이 서울사무소.1차 오디션은 10월26∼30일.(02)826­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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