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재팬’ 뮤지컬 한국서 먹힐까
테니스 라켓을 손에 든 라이토와 엘(L)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하다. “탕! 탕!” 라켓에 공이 닿는 소리는 흡사 총소리처럼 뇌리에 박힌다. “이것은 / 서로 속이고 / 서로 찾아내고 / 서로 끌어내어 / 서로 죽이는 / 게임이다.” 이름이 적히면 죽는 ‘데스노트’를 손에 넣고 폭주하는 라이토와 그를 저지하려는 탐정 엘이 링 위에서 벌이는 신경전은 날 선 록 넘버를 입고 강렬한 불꽃을 튀긴다.
지난 6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의 닛세이극장에서 처음 공개된 일본 뮤지컬 ‘데스노트’는 향후 한국 뮤지컬 시장에 적잖은 변화를 예고할 작품으로 점쳐진다. 일본에서만 단행본이 3000만부 이상 판매되고 애니메이션과 영화, 게임으로도 만들어진 동명의 만화를 일본 굴지의 엔터테인먼트사 호리프로가 제작하고 일본의 거장 구리야마 다미야가 연출을, 한국에서 사랑받는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작곡을 맡았다.
오는 6월에는 세계 첫 라이선스로 한국에서 공연된다. 일본의 대형 뮤지컬이 라이선스로 한국 시장에 상륙하는 첫 사례이자 뮤지컬계 ‘블루칩’인 JYJ 멤버 김준수가 소속된 씨제스엔터테인먼트가 자회사 씨제스컬쳐를 설립하고 뮤지컬 제작에 뛰어드는 신호탄이다.
‘데스노트’는 작품 스타일 면에서 한국 시장으로의 연착륙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5일 닛세이극장에서 미리 본 ‘데스노트’는 만화의 실사판 뮤지컬에서 우려되는 유치함을 걷어내고 1200석 규모의 대극장에 맞는 무게감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원작 만화는 ‘데스노트’를 손에 넣은 고교생 라이토가 정의의 이름으로 살인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정의와 윤리의 의미, 현대사회의 ‘조용한 광기’가 가져오는 인간성의 타락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뮤지컬은 무대 언어를 효과적으로 조합해 원작의 메시지를 살려냈다.
철골로 된 2층 구조물이 전부인 무대 세트는 백색의 핀 조명과 핑그르르 도는 회전 무대, 영상과 결합해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만화의 독자들을 열광시켰던 치밀한 추리와 반전은 부족했지만 세상을 향한 냉소와 폭주하는 광기, 신이 되고자 했던 소년의 허무한 파멸까지의 과정은 연극적인 연출로 충실하게 되살아난다. 넘버의 가사는 정의, 진실, 삶과 죽음 등의 철학적인 메시지들로 비장미를 담았다.
프랭크 와일드혼의 넘버는 ‘한 방’은 없지만 무난하게 귀에 들어온다. 라이토와 엘의 대결에서는 록, 이들을 시험하고 지켜보는 사신 류크와 렘에 대해서는 엔카풍의 넘버로 캐릭터를 살리고 강약을 조절한다.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히면 40초 안에 죽는다는 설정은 째깍째깍 울리는 시계 초침의 효과음으로 긴장감 있게 살렸다.
한국 공연은 ‘레플리카’(대본, 음악, 동선 등을 그대로 옮겨 오는 것)로 연출될 계획이나 한국 관객들에게 맞춘 작품 수정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배우들의 부족한 성량에 맞춘 듯한 넘버는 웅장한 넘버를 선호하는 한국 관객들의 기대에 역부족이다. 교실에서 갑자기 정의를 외치는 학생들, 소녀 아이돌 가수로 설정된 ‘미사’ 캐릭터 등도 한국 관객들에게는 낯설다. 무엇보다 마니악한 이미지가 강한 작품을 1800석 규모의 대극장(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 걸맞게 키워 내는 것이 관건이다. 씨제스컬쳐는 ‘미사’ 캐릭터를 20대 가수로 바꾸는 등 한국 관객의 취향을 고려해 작품을 수정하는 데 고심하고 있다. ‘데스노트’ 이후에는 오는 12월 일본 뮤지컬 ‘오케피’가 한국에서 초연되는 만큼 일본 뮤지컬의 한국화(化) 가능성에 시선이 모인다.
한국 공연에서는 뮤지컬계 흥행 보증수표인 홍광호와 김준수가 라이토와 엘 역으로 ‘원투펀치’를 날리는 덕에 상업적인 성공은 무난할 전망이다. 이 때문에 주목되는 건 씨제스와 같은 엔터테인먼트사가 뮤지컬 시장에 안착할 가능성이다. 앞서 SM엔터테인먼트는 자회사 SM C&C를 설립하고 소속 아이돌 스타들을 앞세운 ‘싱잉 인 더 레인’을 지난해 초연했다.
관객 저변 확대와 아이돌 위주의 시장 재편이라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가운데 관건은 ‘아이돌 뮤지컬’을 넘어서고 완성도를 성취하느냐에 달렸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도쿄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