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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해 군시설 정찰이 목적/군당국,공비 침투의도 분석

    ◎어제 7명 사살… 잔당 추적/총19명 사망·생포… 아군 2명 부상 【강릉=특별취재반】 동해안 강릉 앞바다에 침투한 무장공비는 20여명으로 지난 15일 강릉 앞바다에 도착,요원 5명을 내륙에 투입해 강릉비행장을 비롯,동해안의 군사시설 등에 대한 정찰활동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이양호 국방부장관은 19일 국회 국방위에 참석,『생포한 이광수가 침투한 무장공비의 규모에 대해 대략 20명이라고 진술했다가 다시 25명이라고 말하는 등 횡설수설하고 있다』며 『현재 공비가 20명이 넘는 것으로 보고 작전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합참의 군사작전전문가들은 『이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며 『잠수함의 크기 등 여러 정황과 증거로 볼때 25명까지 침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군 수사당국에 따르면 이광수는 『잠수함이 지난 13일 상오 5시쯤 함남 흥남 북쪽 퇴조항을 떠나 15일 상오 1시쯤 강릉 앞바다에 도착,정찰조 5명을 내려놓았다』고 진술했다. 이어 『잠수함은 공해로 빠져나갔다가 17일 상오 4시30분쯤 침투 지점으로 돌아와 해안정찰활동을 하다가 하오 10시쯤 임무를 마친 정찰조 5명을 태운 뒤 북한으로 출발하려다 암초에 걸려 모두 내륙으로 도주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국군 전투복 등 발견 군 당국은 이와 관련,▲강릉비행장이 전방지역 초계활동과 적 항공기 요격업무 등을 맡고있는 점 ▲침투 공비들이 권총 등 개인화기만을 휴대한 점 ▲좌초된 잠수함에서 5백m쯤 떨어진 숲속에서 중위와 중사 등 국군복장과 M16 실탄 수백발이 발견된 점 등에 비추어 이의 진술이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진위 여부는 계속 확인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군·경수색대는 이날 무장공비 잔당 7명을 추가로 소탕했다. 수색대는 상오 10시20분쯤 강릉시 강동면 만덕봉에서 15분간의 총격전 끝에 공비 3명을 사살한데 이어 하오 2시57분쯤 강동면 칠성산에서도 3명을 사살했다. 하오 4시26분쯤에도 공비 1명이 강릉시 강동면 산성우리에서 추적중인 수색대와 교전끝에 사살됐다.이 과정에서 173연대 2대대 5중대 소속 사병 2명이 무장공비가 던진 수류탄이 터지면서 부상을 입었다. 이로써 침투 공비 18명이 자살하거나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됐다. 군당국은 그러나 이광수의 진술 번복에 따라 공비가 6명 정도 더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민·관·군 통합방위체제를 유지하며 수색작전을 펴고 있다.
  • 공비 경계 예비군 오발사고로 숨져

    【강릉=조성호 기자】 19일 하오 9시45분쯤 강원도 강릉시 남항진동 바닷가 동성횟집옆에서 무장공비 출현에 대비해 경계를 서던 포남2동대 소속 예비군 이석철씨(30·강릉시 포남2동 삼호아파트 마동 307호)가 지급받은 M16 소총을 잘못 다루다 오발사고를 일으켜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 “발목지뢰 등 2백여발 민간지역에 유실 추정”

    ◎육군,10일까지 80%회수 전망 육군은 6일 지난달말의 집중호우로 민간지역에 유실된 지뢰는 M14 대인지뢰(일명 발목지뢰)를 포함,모두 2백여발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육군관계자는 『전방지역에 매설된 지뢰가운데 이번 폭우로 유실된 지뢰는 1천2백여발로 추정되나 이중 1천여발은 민간인통제구역 북방에 매몰돼 있으며 나머지 2백여발이 민간지역으로 떠내려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민간지역으로 넘어간 지뢰 2백여발은 M14 대인지뢰 1백50여발,M16 구형 대인지뢰 30여발및 M15 대전차지뢰 15발가량이다. 육군은 지뢰탐지기와 군병력 5천여명을 동원,이번에 유실된 23ⓣ의 탄약과 지뢰를 수거하기 위한 수색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오는 10일까지 80%가량 회수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 장세동 피고­국선변호인 「불협화음」/26차 공판 이모저모

    ◎방학 맞은 여고생들 재판 참관 “눈길” 12·12 및 5·18사건의 피고인과 증인들을 상대로 한 사실심리가 1일의 26차공판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5개월에 걸친 「마라톤 재판」이 막바지에 접어든 이날 방청석에는 방학을 맞은 여고생 3∼4명이 나란히 앉아 재판과정을 지켜봐 눈길. 대원외국어고 김수현양(17)은 『역사적인 재판을 직접 보는 것이 살아있는 공부라고 생각해 반 친구들과 함께 방청하게 됐다』고 소감을 피력.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문인 10명도 공판시작 20여분 전부터 일찌감치 방청석에 자리잡고 재판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박종규 피고인은 증인신문 말미에서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진술강요나 협박을 받은 사실이 있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 다분히 감정적인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변.박피고인은 『나이도 어린 검사가 「이 사람아,그게 아니잖아」,「당신,밤새워 조사받아도 좋아?」라는 등 반말조의 말을 해 모욕감을 느꼈다』며 『협박은 아니지만 검찰로부터 자백을 유도받은 사실이 있다』고 주장. ○…장세동피고인은 국선변호인의 신문내용이 헬기의 내부구조등 지엽적인 문제로 흐르자 『변호인께서 무엇을 물어보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퉁명스럽게 답변해 변호인과 「불협화음」을 내기도. ○…현역군인(육군 중령)으로 증언대에 선 김광택 전20사단 61연대 6중대장은 『당시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검문에 불응했을 경우 경고­하퇴부 조준사격이라는 수칙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고 진술,계엄군이 무차별 진압을 했다고 증언. ○…최규진 전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장은 증언을 마친뒤 『계엄군으로 참가한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숙연한 표정. 최씨는 80년 5월24일 보병학교 병력이 철수중인 자신의 부대에 총격을 가한 사건과 관련,『사전에 아무런 신분확인 조치없이 중화기로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났다』며 『육군장교로서 한없이 부끄러운 일이었으며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고. ○…김영일재판장은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12·12 국정조사 국방위원회 7차회의록 등 20여점과 12·12 사건당시사용된 38구경 권총탄환·M16 소총탄환 등 5점의 압수물을 증거로 채택. 특히 우국일 전보안사 참모장의 업무일지와 일기사본이 증거물에 포함됐으나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5공전사」는 피고인들이 모두 채택에 부동의,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박은호·김상연 기자〉
  • M16 실탄·군용 폭발물/포천 빈집서 대량발견

    【포천=박성수 기자】 빈 주택에서 권총 실탄과 뇌관 화약 등 군용 폭발물이 다량 발견돼 군과 경찰이 30일 수사에 나섰다. 지난 26일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미분양 상태로 비어 있는 현대빌라 다동 102호에서 45구경 권총 실탄 11발,M16소총 실탄 12발,크레모아 격발기와 도화선,화약류 등 50여점이 보관돼 있는 것을 이 마을에 사는 고형진씨(24)가 발견,군부대에 신고했다. 군·경은 전기식 뇌관과 고성능폭약인 콤포지션 등 사제폭탄을 제조하는데 필요한 물품들이 함께 보관돼 있는 점으로 미루어 누군가 다른 범행에 사용하기 위해 숨겨 놓았을 것으로 보고 수사중이다.
  • 대낮 은행에 무장강도/한미은 백마지점/20대 1명

    ◎M16 4발 난사… 5백여만원 털어 도주/청원경찰 총상 입어 【고양=조덕현·강충식·이지운 기자】 20대 초반의 남자가 M­16으로 보이는 소총을 들고 은행에 침입,총탄 4발을 발사해 청원경찰에게 부상을 입히고 현금 5백20여만원을 강탈해 달아나는 은행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29일 하오 3시6분쯤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마두1동 산수상가빌딩 2층 한미은행 백마지점에 스포츠형머리에 파란 마스크를 한 20대 초반 남자 1명이 총기를 들고 들어와 청원경찰 임우택씨(31)에게 총을 쏴 중상을 입히고 여직원을 위협,현금 5백20여만원을 털어 달아났다. 청원경찰 임씨는 『2층 은행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20대 초반의 남자가 공포탄 1발을 발사하며 「움직이지 마라」고 해 총열을 잡고 총을 빼앗으려 몸싸움을 벌이는 순간 범인이 실탄을 발사했다』고 말했다. 범인은 은행에 들어오자 마자 공포탄 1발을 발사하며 직원들을 위협했고,청원경찰 임씨와 격투를 벌이는 과정에 실탄을 발사,임씨의 허벅지에 부상을 입혔다. 범인은 이어 공포탄 1발과 실탄을 허공에 쏜뒤 창구에 있던 여직원 방모씨(32)에게 총을 겨누고 미리 준비한 가방을 던지며 돈을 담을 것을 요구했다. 범인은 방씨에게 돈을 넘겨받은 뒤 『내가 나갈 때까지 움직이면 모두 쏴 죽이겠다』고 위협하고,1분여만에 은행문을 빠져나가 미리 세워두었던 경기XX가 2149호 자주색 티코승용차를 타고 백마역쪽으로 달아났다. 경찰은 고양경찰서 마도파출소에 수사본부(본부장 김귀하 고양경찰서장)를 설치하고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 또 은행안에 설치된 CC―TV를 분석하고 있으며 범인이 군인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인근 군부대와 공조수사를 벌이고 있다. 현편 범인이 타고 도주한 티코 승용차에 부착된 뒷번호판은 김모씨(27·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일산1동)소유의 봉고차 앞 번호판으로 도난당한 것으로 밝혀졌다.경찰은 김씨가 번호판을 도난 당하고 곧바로 신고하지 않은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 러 “영 외교관 9명 추방”

    ◎“대사관 비호아래 스파이 활동”… 영 즉각 반발 【모스크바·런던 로이터 AP 연합】 러시아는 6일 자국 주재 영국 외교관 수명이 모스크바에서 스파이활동을 벌였다고 비난하고 이들을 24시간내에 추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대해 영국은 러시아측 주장이 부당하다고 즉각 반박하면서 추방이 강행될 경우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양국 사이의 심각한 분규 발생이 우려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날 『대사관의 비호 아래 활동해온 다수의 영국 정보원들을 「환영하지 않는 인물」로 규정,이들을 추방중』이라고 밝혔다. 세르게이 크릴로프 러시아 외무차관은 이날 인테르팍스 통신에 러시아 외무부가 앤드루 우드 러시아주재 영국대사를 불러들여 영국 외교관의 스파이활동에 대해 『엄중한 항의』를 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홍보책임자인 알랙산드르 즈다노비치는 이번 조치가 FSB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러시아인을 지난달 체포한후 그가 영국 정보기관 M16(SIS)을 위해 활동했다고 시안함에 따라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 러시아 외무부의 그리고리 카라신 대변인은 추방조치될 영국외교관이 몇명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러시아 NTV는 4명이 러시아를 떠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 마취총 「살상용」 개조/M16실탄 사용 가능하게 총열 부착

    ◎총포상 등 6명 구속 【광주=최치봉 기자】 동물 마취용 총을 군용 M16소총 실탄을 발사할 수 있도록 개조해 일반에 판매해 온 총포상과 사격선수용 실탄을 몰래 뺀 팔아온 중학교 사격코치 등이 검찰에 구속됐다. 광주지검 강력부(박광빈 부장검사)는 26일 총포상 허정회씨(38·광주시 북구 임동),서울 경원중 체육교사 겸 사격코치 김용철씨(28) 등 6명을 총포·도검·화약류등 단속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또 군용 M16 실탄을 총포상 등에 공급해온 박소균씨(53·광주시 북구 동림동)를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허씨는 지난 92년 11월부터 자신이 경영하는 관광총포사에서 동물용 마취총에 M16소총 총열과 조준경 등을 부착해 개조한 「대포총」 1정과 M16실탄 2백40발을 함께 구속된 박정연씨(46·무직·광주시 광산구 월곡동)에게 불법·판매한 혐의를 받았다.
  • “중국군 훈련 최근접지” 대만 팽호도를 가다/본사 이기동 특파원

    ◎전투기 굉음… 도로엔 군보훈련 군인/섬 전체 팽팽한 긴장감… 주민들 출어 못해/마공 시내는 선거철 소란 가득… 묘한 대조 대북을 출발한 90인승 쌍발 프로펠러여객기는 불과 1시간만에 팽호군도의 수도 마공시 공항에 도착했다.만만치 않은 전운은 비행기가 내리면서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느껴졌다.군용비행장의 한켠을 민간기들이 이용하는 탓인지 대만군의 주력 F5기들이 연이어 뜨고내리며 내는 굉음에 귀가 멍멍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통하는 해안도로변 곳곳에 위장망을 씌운 대공포가 솟은 방공포대가 연이어 눈에 들어왔다.중국군이 공정대를 투입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꼽히는 전략요충지인 탓인지 도로 곳곳에서 M16 소총으로 무장한 소대병력이 구보훈련을 하고 있다. 도로변의 한 대공포진지를 찾아들어가보니 진지를 에워싸고 갓 만든듯 흙이 채마르지 않은 엄호·방어진지들이 불과 4∼5m간격으로 들어서 있다.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려던 앳된 얼굴의 병사는 1주일여 전부터 엊그제까지 새 방어진지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중국군이 2차 실탄사격훈련을 벌였던 해역은 이곳 팽호도에서 서남쪽으로 불과 70여㎞ 떨어진 곳.고기잡이 배로도 1시간30분 남짓 거리이다.마을주민들이 가리키는대로 섬 남단 이수산항의 방조제 위에 올라 망원경을 통해서 보니 훈련 인근지역인 화도가 한눈에 들어온다.팽호도의 주민 10만여명은 대부분이 어업을 생업으로 한다.잡은 고기를 대북,홍콩,일본 등지로 수출해 보기 드문 부촌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중국군의 훈련으로 출어를 제대로 못해 생계에 적지않은 피해를 보고 있다고 한다. 왕씨성을 가진 한 어부는 『중국군의 훈련을 전후해 출어를 삼가라는 현당국의 당부가 있었다.그리고 요즈음 날씨도 좋지 않아 이래저래 출어를 않고 있다』고 했다.왕씨는 『중국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대대로 살아온 이곳을 떠나기는 싫다.맞서 싸우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팽호도에서 중국군이 상륙하기에 가장 용이하다는 지형의 익문촌 일대 해변초소들에서는 병사들이 참호를 파고 모래주머니로 진지를 보강하느라 한창이다.진지 주변의 긴장감과는 달리 초소 앞까지택시를 들이대는데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게 인상적이었다.26세라는 대만 가오슝 출신의 장교는 『전쟁이 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초소의 엄호시설과 참호보강 작업을 하고 있지만 평소와 생활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마공시내로 들어오면서 해변의 긴장감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23일 실시되는 총통선거의 각당 운동원들이 떼지어 다니며 전단을 뿌리고 스피커를 단 선거운동용 차량이 거리를 누비고 있다.대북시도 그랬듯이 전쟁의 긴박감보다는 선거철의 소란함이 앞서는 것같았다.관광상품을 파는 한 가게주인은 심지어 『외국기자들이 왜 이렇게 몰려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당신들이 전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아니냐』고까지 했다. 해질 무렵 항구에서 닻을 내리던 한 어부는 『중국군 훈련지역 쪽으로 가니까 대만해군정이 가로막고 더이상 밑으로는 못가게 하더라』며 그곳 사정을 전해주었다.한화로 30만원에 배를 빌려 이튿날 훈련해역으로 나가볼 생각이라고 했더니 그는 손을 가로저으며 『가까이 갈 수도 없을 뿐아니라 아무 표시도 없는 망망대해일 뿐인데 뭣하러 가느냐』고 만류했다.해가 지면서 시외곽으로는 또다시 전에 없는 긴장감이 에워싼다.군인들이 지나는 차량을 일일이 세워 검문하고 순찰군인들이 수시로 눈에 띄었다.해안순찰도 크게 강화됐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피차 사생결단의 전의를 다지는 것도 아니고 적의 머리끝 하나 비치지 않는 이상한 「전쟁전야」속에 팽호도의 밤은 깊어갔다.
  • 「12·12」·「5·18」 핵심 5명 영장

    ▷유학성◁ 피의자는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황영시·차규헌·박준병 등과 함께 79년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7시 사이에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그곳 참석자중 최상서열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모임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함. 하오 9시30분쯤 자신의 주도하에 전두환·황영시·차규헌 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찾아가 최규하대통령에게 집단적으로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그 무렵 육군 정식지휘계통에서 피의자등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진압할 움직임을 보이자 정승화총장 연행에 항의하는 장태완수경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쪽으로 오라』고 회유함. 또 하오 9시부터 11시 사이에 윤성민참모차장,김용휴국방차관,1·2군사령관,제3군사령부 참모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육본측 지시에 따른 병력출동의 저지를 부탁한 것을 비롯,출동가능성이 있는 제9공수여단 제26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에 전화를 걸어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아달라고 회유하는 등 각 부대의 출동을 사전에 저지함. 전두환등과 함께 80년5월2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령으로 제안된 국보위설치령을 의결하게 한뒤 공직자숙정계획에 따라 공직자 8천6백1명에게 사임을 강요하고 각 언론사에 언론인 3백36명의 해직을 종용하는 등 계엄하의 고유업무와 무관한 조치들을 결정함. 이를 통해 전두환등의 국정수행능력을 내외에 과시,유일한 집권세력으로 부각시키는데 이용하면서 행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을 무력화하고 10월29일부터 81년 4월10일까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도록 함. 80년 9월1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언론을 계속 통제한 상태에서 집권과정의 제반조치들을 헌법에 반영하고 신당을 창당,정계를 재편하는 등 향후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81년 1월24일까지 비상계엄상태를 유지함. 이로써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황영시◁ 피의자는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유학성·차규헌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7시 사이에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해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그곳 참석자중 최고령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모임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함. 하오 9시30분쯤 자신의 주도하에 전두환·유학성·차규헌 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찾아가서 최규하대통령에게 집단적으로 정승화총장의 연행재가를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또 육군 주요지휘관이나 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 육본 정식지휘계통에 따른 병력출동을 저지하는 한편 12월13일 0시30분쯤 이상규에게 중앙청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도록 지시하고 1시10분쯤 박희도에게 고려대학교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는 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반란을 일으킴. 80년 5월초 전두환·노태우·유학성 등과 함께 수시로 만나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도록 한뒤 이를 추진하기로 모의함. 5월17일 전군에 소요진압부대 투입작전명령을 하달,5월18일 하오 2시30분쯤 광주의 전남대·조선대를 포함한 전국 92개 주요대학과 국회 및 신민당사와 공화당사,언론기관,공공기관등 1백36개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 2만5천여명을 배치하여 각 해당시설을 점거함. 5월18일 상오 1시쯤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고 국회의원들의 국회출입을 저지함으로써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함. 피의자등의 정국장악을 위한 비상계엄확대조치와 계엄군 투입 및 정치인들의 체포에 반대하고 전두환의 퇴진과 민주화추진을 요구하는 광주 학생·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발포하는 등 강경진압함. 이후 공직자 숙정,언론 통·폐합,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등 자신들의 향후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81년 1월24일까지 비상계엄상태를 유지하는 등 폭동하여 내란을 일으킴. ▷최세창◁ 피의자는 1957년 6월 육군사관학교를 제13기로 졸업했으며 10·26사건 당시에는 제3공수여단장으로 근무했던 자임. 피의자는 10·26사건과 관련,정승화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해 군 지휘권을 박탈하는 한편 군의 정식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해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는사전계획을 세웠음. 이에 따라 노태우·유학성·황영시·차규헌·박준병·백운택·박희도·장기오·장세동·김진영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쯤부터 하오 7시쯤까지 사이에 경복궁내 수경사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유사시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했음. 피의자는 같은날 하오 11시30분쯤 자신이 여단장으로 있는 특전사 제3공수여단 육군중령 박종규에게,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했음. 박종규는 이날 자정쯤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에서 제3공수여단 제15대 소속 1개 지역대 병력 38명에게 사령부 외곽을 포위하도록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육군대위 김홍열·육군대위 나영조·육군중사 신현수·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육군하사 6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정병주와 비서실장 육군소령 김오랑이 집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했음.이어 육군하사 6명이 이들에게 M16소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해 김오랑을 살해하고 정병주에게 중상을 입힘. 피의자는 또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을 위반하고 다음날인 13일 상오 2시쯤서울 송파구 거여동 제3공수여단 연병장에서 2개 대대병력 6백여명을 인솔하고 천호대교·강북로·한남동을 거쳐 3시경 경복궁으로 진주했음. 피의자는 이같이 반란군 지휘부 결성과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자신의 부하인 박종규에게 지시하여 직속상관인 정병주를 체포하고,제3공수여단 2개대대 병력을 인솔하여 경복궁으로 진주하는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반란중요임무종사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장세동◁ 피의자는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의 잦은 월권행위와 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을 문제삼아 인사조치할 것으로 알려지자 그 지휘권을 박탈하고 무력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함.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하오 7시 사이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함. 하오 7시40분쯤 허화평으로부터 정승화총장을 무사히 연행하였으며 전두환이 정승화총장 연행조사문제를 보고하기 위해 총리공관에 갔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해 있는 장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줌. 잠시후 허화평으로부터 총장연행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연행하러간 우경윤대령이 부상을 입었으며 동원된 제33헌병대 병력이 공관경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 병력에 포위되었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장성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준 뒤 제33헌병대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김진영으로 하여금 제30경비단 소속 5분대기중대 병력 80여명을 인솔하고 총장공관으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도록 조치함. 수경사에서 비상이 발령되고 장태완수경사령관으로부터 주요 지휘관 비상소집 명령이 하달되었음에도 소집에 응하지 않음. 제30경비단 상황실로 전파되는 상황과 각 부대에 전화하여 파악한 상황등을 통해 육본 수뇌부가 비상을 발령하고 정승화총장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과 제9공수여단 제26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에 병력출동을 전제로 한 준비명령을 하달된다는 첩보 등을 수집,제30경비단장실에 모인 장성들에게 전파함. 중요임무종사자로서 반란군 지휘부 결성과정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정승화총장 연행,부대동향 및 병력이동 상황을 수시 파악,지휘부에 전파하면서 총장공관에 억류된 합수부측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병력을 출동시키는 등 전두환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이학봉◁ 피의자는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인 「10·26사건」당시 보안사대공처 대공수사과장으로 근무하고 육군준장으로 전역한 뒤 13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자임. 1,79년 「10·26」사건 합수부본부장으로 임명된 전두환은 계엄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마찰을 빚어왔음.이에 정총장의 지휘권을 박탈,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김재규의 범행에 관련됐는지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정승화총장을 강제연행키로 결의했음.연행일을 12월12일로 결정한 전두환으로부터 연행장소 등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허삼수 등에게 통보했음.또 79년 12월12일 하오 6시20분쯤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정동렬과 함께 전두환을 수행해국무총리 공관으로 가서 정총장의 연행재가를 요구했음. 피의자는 중요임무종사자로서 정총장에 대한 연행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연행장소를 결정했음.허삼수등이 정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합수부수사관 7명을 지원하는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반란을 일으킴. 2,80년 5월초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전두환의 지시를 받았음.그뒤 전국계엄의 실시,과도정부적 성격의 소극적인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비상기구 설치 및 국회해산 등 「시국수습방안」을 추진했음.5월16일 보안부대 대공과장들을 보안사로 불러 소요 배후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등의 검거대상자 명단을 주고 검거를 지시,사회혼란 조성등 혐의로 김대중 국민연합공동의장,문익환목사등을 체포하고 권력형부정축재라는 불분명한 범죄혐의로 김종필 공화당총재,이후락·박종규국회의원등을 구속했음.11월12일 45개 언론사 사주들로부터 언론통폐합 조치에 이의가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았음. 피의자는 중요임무종사자로서 주요정치인·재야인사에 대한 수사계획을 수립,이들을 체포·구속했음.국가기관을 강압으로 전복하거나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자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 전씨 1천억 투신 입출금/검찰/전 한국투신 사장 소환 조사

    ◎5·18 관련 5명 환문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3차장)는 30일 전두환 전대통령이 재임 동안 한국투자신탁에 1천여억원을 입출금시켰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전씨의 사돈인 전한국투자신탁 사장 윤광순씨를 소환,조사했다. 검찰은 또 이날 전씨의 장남 재국씨의 장모인 김경자씨도 소환,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지난 15일 압수수색한 한국투자신탁 계좌를 추적한 결과,전씨가 83년 10월25일 「청와대 경호실」명의로 한국투자신탁에 계좌를 개설,지난 10월까지 1천여억원의 비자금을 입금시켜온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날 5·18 당시 청와대 민원수석이었던 이원홍씨를 비롯,광주 투입됐던 11공수여단 61대대장 안부웅씨,11공수여단 62대대장 이제원씨,3공수여단 13대대장 변길남씨,3공수여단 15대대장 박종규씨 등 5명을 소환 조사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이날 5·17비상계엄 확대를 의결하던 임시 국무회의장 주변에 투입됐던 윤태이 전수경사 소속 중대장도 소환,투입 경위와 당시 상황에 대해 신문했다. 민원수석 이씨를 상대로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에서 최규하전대통령의 돌연 하야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신군부측의 움직임,국보위 설치 요강과 조문화 작업에 참여하게 된 이유 등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안부웅씨등 공수여단 대대장을 통해 80년 5월20일 3공수여단이 광주지역에 출동한 뒤 최세창3공수 여단장에게 실탄 지급을 요청하고 실탄을 지급 받아 중대장 등 장교들에게 나눠준 경위,M60 기관총·M16 소총으로 위협사격을 실시해 사망자를 발생케 한 과정,광주 시위 상황 등에 대해 확인 작업을 벌였다. 한편 검찰은 당시 국보위 설치령에 반대의견을 냈던 박동진 전외무부장관과 광주진압에 투입된 조창구11공수여단 63대대장,공무원 숙정과 관련해 송영은 총무처 인사국장등 3명을 31일중으로 소환하기로 했다. 이차장은 『내년 1월 하순까지 모든 수사를 마무리지을 계획』이라면서 『비자금 수사에 대해서는 그전에라도 단계적으로 사법처리 수순을 밟아 갈 것』이라고 말했다.
  • 수배강도,경관 M16 뺏어 난사/전북 부안

    ◎추격경관 3명 사상/총격전 끝 범인 사살 【부안=조승용 기자】 강도 등의 혐의로 수배를 받던 피의자가 검문하던 경찰관을 칼로 찌르고 달아나다 추격 경찰관의 총기를 빼앗아 경찰 1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총상을 입혔다.범인도 사살당했다. 15일 상오 10시45분 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성일원(중국음식점)에서 밥을 먹던 한상기(26·전과 4범·부안군 동진면 중산리 210)씨가 자신을 검문하려던 부안경찰서 남서림 파출소 소속 이승로(27)순경의 왼쪽 허벅지를 갖고 다니던 길이 40㎝의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한씨는 부안읍 쪽으로 달아났다가 낮 12시20분 쯤 안서예식장 옆 골목길에서 뒤쫓아온 방범과 소속 민순기(29)순경과 격투를 하다 민순경이 M16 소총을 놓치자 이를 주워 쫓아오던 경찰관들에게 10여발을 난사했다. 이 총격으로 경비과 소속 박세일(33)순경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민순경은 목에 총상을 입어 중태이다. 경찰은 범인이 1차 범행 후 달아나자 기동타격 대원 9명 등 37명을 11개 조로 편성,뒤쫓았다.총격이 벌어지자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근처 다방 등으로 피했고 상가들도 모두 문을 닫았다가 2시간 뒤에 다시 열었다.다행히 시민들의 피해는 없었다. 한씨는 지난 93년 5월 강도와 절도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살고 지난 5월21일 순천교도소에서 만기출소했다.그는 지난 11일 부안군 계화면 황부리 금산마을 앞길에서 이복순씨(55·여)의 얼굴을 칼로 찌르고 현금 10만원을 빼앗는 등 최근까지 모두 8차례의 강도·강간을 저질러 수배를 받아왔다. 숨진 박순경은 오는 31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4형제 중 둘째로 지난 82년 군산제일고를 졸업,90년 경찰에 투신했다.
  • 전두환 전대통령 구속영장 전문

    피의자는 55년 9월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육군 제1공수특전단장,제1사단장을 거쳐 79년 3월5일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재직중 같은 해 10월26일 소위 「10·26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계엄사령부 소속 「고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80년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80년 9월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80년 10월27일 제8차 개헌에 의해 실시된 81년 2월25일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81년 3월3일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88년 2월24일 임기 만료로 대통령직에서 퇴임하여 현재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자인 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중인 79년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유신헌법을 개정해 민주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국회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새로운 헌법질서 창출이 모색되는등 유신체제의 폐지가 기정사실화되고 군 내부에서도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에 즈음, 합수부 본부장인 피의자의 권한 남용으로 인해 정승화 계엄사령관겸 육군참모총장과 잦은 갈등을 빚는 한편 군장성 진급심사에서 피의자를 중심으로 한 소위 「하나회」 소속 군인들의 진급이 여의치 않게 될 뿐 아니라 피의자의 여러 가지 월권 등이 문제가 되어 정승화총장이 이를 이유로 인사조치할 기미를 보이자 정승화총장을 김재규내란사건 관련 혐의로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불법 연행해 제거함으로써 군의 실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육군 소장으로 제9사단장인 노태우,육군 중장으로 국방부 군수차관보인 유학성,육군 소장으로 제20사단장인 박준병,육군 준장으로 제71방위사단장인 백운택,육군 준장으로 특전사령부 제1공수여단장인 박희도,육군 준장으로 특전사 제3공수여단장인 최세창,육군 준장으로 특전사 제5공수여단장인 장기오,육군 대령으로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인 장세동,육군 대령으로 수경사 제33경비단장인 김진영,육군 대령으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인 허화평,육군 중령으로 보안사 대공처 대공2과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인 이학봉,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인사처장겸 합수부 조정통제국장인 허삼수,육군 대령으로 육본 헌병감실 범죄수사단장겸 합수부 수사2국장인 우경윤,육군 중령으로 수경사 제33헌병대장인 최석립,육군 중령으로 육본 헌병대장인 이종민,육군 준장으로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인 정동호,육군 대령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인 고명승,육군 대령으로 수경사 헌병단장인 조홍,육군 중령으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보안처장인 정도영,육군 소장으로 제30사단장인 박희모,육군 대령으로 제30사단 제90연대장인 송응섭,육군 준장으로 제1군단 제2기갑여단장인 이상규,육군 대령으로 제9사단 참모장인 구창회,육군 대령으로 제9사단 제29연대장인 이필섭,육군 중령으로 제9사단 작전참모인 안병호,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제2대대장인 서수열,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제5대대장인 박덕화,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인 박종규,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정보처장인 권정달등과 공모하여, 1979년 11월 중순경부터 피의자는 상피의자 노태우및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김진영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등과 수차례 회합하여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 문제등을 논의한 끝에 같은해 12월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먼저 정승화 총장 연행에 반발하여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거사 당일 18시30분 만찬 초청 명목으로 유인하여 부대 지휘를 사전 차단하고,피의자를 비롯한 위 15명은 거사 당일 같은 시각에 보안사와 인근 수경사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정승화 총장 추종세력이 무력으로 대응할 경우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하기로 모의하고, 이에따라 피의자는 위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우경윤 등에게 지시,정승화 총장 연행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연행에 필요한 인원의 차출과 차량,권총,M16소총및 실탄을 준비하게 한후, 같은해 12월12일 18시30분경 위 계획에 따라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박준병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김진영 등은 수경사 제30경비단실에 집결,보안사에 있는 피의자및 위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과 함께 지휘부를 구성하고 위 조홍 등은 피의자 등의 지시에 따라 같은 시각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김진기 육본 헌병감 등을 연희동 요정으로 유인하여 놓은뒤, 같은날 19시경 위 허삼수 우경윤 성환옥 최석립 이종민 등은 무장한 보안사 수사관 7명과 수경사 제33헌병대 병력 60여명을 동원하여 한남동 육군 참모총장 공관을 무력으로 점거하고,정승화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 등에게 권총을 난사하여 이들을 제압한 다음 같은날 19시30분경 정승화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고, 피의자와 위 이학봉은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정승화 총장이 10·26사건에 연루된 새로운 혐의사실이 발견되었으므로 연행·조사하겠다』면서 그 재가를 요구하였으나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한 상황에서 정승화 총장 강제연행 사실을 인지한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정병주 특전사령관등이 정승화총장을 원상복귀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같은날 21시30분경 위 정동호 고명승 등이 대통령 경호실 병력을 무단 동원하여 대통령 관저인 총리공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피의자및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희도 백운택 등이 집단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 재차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를 재가해 줄것을 다시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지휘계통을 제압하기로 결의하고, 같은날 23시경 피의자는 위 박희도에게는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해 올 것을,위 최세창에게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와 휘하 병력의 경복궁 출동을,위 장기오에게는 휘하 병력의 육본 출동을 각 지시하고,상피의자 노태우는 위 구창회에게 휘하 병력의 중앙청 출동을 지시하고,위 황영시는 위 박희도에게 휘하 병력의 고려대학교 진주를 지시하고,위 황영시 백운택은 위 이상규에게 전차부대의 중앙청 출동을 지시하고 위 정도영 등은 위 김정룡 신우식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작전 지원을 지시하고 위정도영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등은 피의자를 비롯한 지휘부에 각 지휘관의 전화도청및 각 부대 보안부대장의 보고를 통한 각 부대 이동상황을 수시로 보고토록 하는 한편,제26사단 제30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의 지휘관·참모 및 보안부대장에게 합수부측의 위와 같은 조치에 동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이에따라 같은날 23시30분경 위 최세창 박종규는 특전사령관실에 제3공수여단 병력을 투입,총격을 가하여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부상을 가한 후 그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하는 한편 같은달 13일 2시경 제3공수여단 병력을 경복궁에 진주시키고, 위 박희도 서수열 박덕화 등은 같은 날 0시30분경 제1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국방부 근무 초병인 정선엽 병장에게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위 장기오는 같은 날 3시경 제5공수여단 병력을 효창운동장으로 진주시키고 위 구창회 이필섭 안병호 등은 같은 날 1시30분경 제9사단 제29연대 병력을 출동시켜 같은 날 3시30분경 중앙청을 점령하고 위 박희모 송응섭은 같은 날 3시30분경 제30사단 제90연대 병력을 고려대학교에 진주시키고 위 이상규는 같은 날 1시30분경 제2기갑여단 제16 전차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같은 날 3시30분경 중앙청을 점령하고, 위 조홍 신윤희는 같은 날 3시40분경 위 김진선의 지원을 받아 수경사 사령관실에 진입,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총격을 가하고 부상을 입게 한 후 육본 수뇌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문흥주 합참 대간첩대책본부장 등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함으로써 피의자는 수괴로서,상 피의자 노태우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탈취,휴대하고 반란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중요지점을 점령하는 등 부대를 진퇴함과 아울러 수소를 이탈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위 정병주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이재천 김인선을 각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친 자로서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염려가 있는 자임.
  • “전씨 사법처리 속전속결” 신호/검찰 「오늘 출두요구」의 배경

    ◎“피의자” 규정… 조사뒤 즉각 구속 가능성/“관련자 재소환 조사 물꼬트기” 분석도 검찰이 12·12 및 5·18 전면재수사에 착수한지 이틀만인 1일 전두환 전대통령을 2일 소환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속전속결식」수사의지를 보이고 있다. 검찰은 특히 내일 소환되는 전전대통령의 신분에 대해 「피의자」라고 규정,소환조사 즉시 구속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아 주목된다. 이종찬 수사본부장은 구속가능성도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 말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그러나 『조사할 분량이 상당히 많다』고 부연설명해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밤샘조사를 받을 것임을 시사했다. 노태우 전대통령이 검찰에 불려 나왔을 때도 소환 첫날 구속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최소한 3차례 정도의 소환조사가 이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2번째 소환에서 노씨가 구속되자 놀라워 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검찰이 올해안으로 전씨를 어떤 방식으로든 조사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소환통보를 한 이상 구속으로 향하는 「사법처리일정」이 더욱 단축될 가능성이 크다.다만 노씨의 예에 비춰 전씨도 최소한 2차례 이상의 소환조사를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을 뿐이다. 이와 함께 전씨에 대한 전격소환은 노씨를 구속수사한 경험이 검찰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때문이라는 분석과 함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 거칠 것이 없다는 검찰의 수사의지도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씨가 검찰소환에 불응할 경우다.『불응하면 진행상황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신중한 반응을 보였지만 이 경우에 대비한 대책도 이미 충분히 세워 놓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강제구인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검찰은 지난 12·12사건 당시의 수사기록을 상당히 검토했으며 전씨의 진술이 고소·고발인 및 피해자들의 진술과 상치되는 부분이 많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 이같은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검찰은 처음부터 전씨를 조사해야 모든 꼬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전씨 조사를 통해 32명의 12·12관련자의 재소환 조사 및 사법처리문제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씨가 소환을 거부할 경우 관련자들을 우선 소환해 방증자료를 더 수집하는 방안도 있으나 현재의 검찰분위기와 검찰수뇌부의 이번 사건에 대한 의지에 비추어 채택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날 이본부장은 전·노 두전직대통령이외에 나머지 핵심관련자들의 사법처리를 가름하는 5·18 재수사착수여부와 관련,『수사기법상의 문제이며 다음에 말하겠다』고 답변을 피해 검찰이 「공소시효의 벽」에 부딪혀 고민하고 있음을 엿보게 했다. 현행법상 사법처리는 12·12쿠데타가 완료된 79년 12월 13일이 공소시효의 기산점으로 적용되지만 대통령재임기간의 공소시효 중단으로 15년의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사람은 전·노 두전대통령 뿐이다.그러나 두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12·12사건 공범 32명의 공소시효는 이미 종료됐다는 내부결론이 검찰을 괴롭히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2·12­5·18 재수사 쟁점/정승화 육참총장 강제연행 규명­12·12/보안사 집권 시나리오 실체 추궁­5·18 검찰이 전두환 전대통령을 상대로 조사하게 될 12·12와 5·18사건을 쟁점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2·12◁ ◇우발적 또는 계획적인가 여부=경복궁 30경비단에 집결한 장성들은 지휘부를 형성해 집단으로 대통령의 재가를 요구할 것을 결정했다.쿠데타를 반대할 우려가 있는 주요 지휘관들을 연희동 요정으로 유인,그들의 병력 동원을 저지시켰다.12월13일 새벽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하기 전에 이미 이희성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육군 참모총장직을 제의하고 합동수사본부측 장성들을 군 요직에 중용하는 인사안을 제시한 것은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강제연행=전두환 전대통령측은 거사 당일 하오 7시10분쯤 허삼수 우경윤 성환옥등 보안사 수사관 7명과 수경사 33헌병대 병력 60여명을 한남동 총장공관으로 보내정총장에게 동행을 요청,거부당하자 정총장을 M16소총으로 위협하며 강제 연행했다.군사법경찰관이 수사권을 발동할 때는 형사절차법상 필요한 절차를 밟는 것은 물론 군통수권과 정상적인 군 지휘계통을 문란시키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동시에 취해야 한다.따라서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의 사전 재가 또는 승인 없이 비상계엄하에서 사실상 최고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계엄사령관인 정총장을 강제 연행한 것은 직속 상관에 대한 하극상임은 물론 군 통수권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된다. ▷5·18◁ ◇보안사 집권시나리오의 실체=80년 3월부터 세간에 나돌기 시작한 보안사의 집권 시나리오 실체여부는 신군부측의 집권의도와 내란혐의 규명을 위한 중요한 단서이나 신군부측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80년 3월 전씨의 중정부장 겸직은 최규하 전대통령의 인사발령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국내외 정보와 중앙정보부의 예산을 장악,신군부의 영향력을 정계에까지 미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배제한 채 전씨가 직무상 관련이 없는 보안사 참모들에게 지시해 입안하게 한 다음,이를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군 지휘관들이 결의하는 형식으로 추진했다. ◇정치인 및 재야 인사들의 활동 금지조치=기성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을 체포·연행·구금한 조치는 향후 정국운용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사전에 제거,경쟁자없이 권좌에 오르게 된 기반이 됐다. ◇임시국회 무산=국회의 계엄해제 결의를 차단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기획 및 설치=대통령이나 국방장관,계엄사령관이 배제된 채 보안사 참모들이 기획해 전씨 주도로 설치됐다.전씨는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취임,사실상 내각을 조정,통제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최규하 전대통령의 하야=최 전대통령이 자의로 사퇴한 것으로 발표됐으나 최씨의 전술거부와 신군부측의 강압 부인 등으로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계엄상황을 이용,정국을 주도하고자 한 신군부측이 학생·시민들의 계엄해제 등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호한 진압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 판단,강경진압과 증원으로 사태를 수습함으로써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사전 계획된 증거는 없으나 상당한 정치적 판단에 따라 단행됐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 야산 빈집서 접선 순간 「번개작전」/부여 무장간첩 상보

    ◎군경 1천2백명 도주로 봉쇄 24일 하오 충남 부여에 나타난 무장간첩 2명의 소탕작전은 경찰의 5분대기조 등 군경의 신속한 출동과 합동작전으로 이루어졌다.생포된 간첩은 식량난을 겪고 있던 북한에 쌀을 지원하던 지난 8월 남파된 것으로 드러났다. ▷신고◁ 이날 하오2시30분 충남 부여경찰서 상황실의 경비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 정각사 부근에 거동수상자 2명이 나타났다.빨리 5분대기조를 보내달라.긴급이다.긴급…』 전화에서는 안기부직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남자가 병력출동을 요청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기부직원들은 이날 상오 거동수상자가 나타났다는 민간인의 신고를 받고 낮 12시30분부터 추적에 나서 하오 정각사 뒷산 폐가에서 접선을 시도하는 간첩을 덮치려다 이들이 낌새를 눈치채고 권총을 쏘며 폐가를 뛰쳐나와 달아나자 군경에 신고를 했다. ▷출동◁ 신고를 받은 부여경찰서는 비상사이렌을 울리며 5분대기조 등 경찰관 1백10여명을 즉시 현장에 출동시켰다.또 인근에서 대침투훈련을하던 군부대에 연락,합동으로 작전을 전개했다.간첩들은 폐가에서 빠져나와 태조봉 정상으로 달아났다. 추적및검거 5백여명으로 편성된 군경합동수색대는 하오3시5분쯤 정각사에 도착,포위망을 압축하다 하오4시부터 태조봉정상 인근 계곡에서 대치했다. 간첩들은 대치중 인근 도로가로 나와 민간인의 승용차를 탈취하려다 경찰이 계속 뒤를 쫓자 산으로 달아났다.이 과정에서 하오4시25분쯤 간첩 김도식(33)이 부여경찰서 황수영 순경(31)이 쏜 M 16총에 대퇴부를 맞고 쓰러져 생포됐다. ▷수사◁ 김은 생포된뒤 우리나라가 수해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쌀을 보내던 지난 8월 남파됐으며 달아난 동료는 박광남(31)이라고 말한뒤 침투이후의 활동내용 등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달아난 박은 노란색 점퍼에 넥타이를 매고 있으며 키는 1백75㎝가량이다. ▷수색◁ 군경은 총상을 입은 김을 버리고 인근 야산으로 달아난 나머지 1명을 검거하기 위해 포위망을 압축해가며 수색을 벌이고 있다.또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 부여∼논산간 국도와 지방도,방범초소,역,터미널 등에 모두 1천2백명을 배치했다. ◎수훈감 황수영 순경/92년 경찰 투신한 충남 특등사수/50m전방까지 유인 M16 쏴 생포 충남 부여군 석성면 태조봉에 출몰한 무장간첩을 생포한 부여경찰서 황수영 순경(30)은 충남지방경찰청에서 알아주는 특등사수. 부여 토박이인 황순경은 목원대 독문과를 졸업하던 지난 92년 3월 경찰에 입문,줄곧 부여경찰서에서만 근무했다. 탁월한 사격솜씨로 부여경찰서 5분대기조에 편성된 황순경은 이 날 하오 출동 명령을 받고 무장간첩의 도주로를 예상,정각사 부근 청룡저수지에서 동료 경찰관 2명과 함께 잠복했다. 하오 4시25분 쯤 무장간첩 김도식이 저수지 부근으로 나타나자 김을 50m전방까지 유인한 뒤 왼쪽 허벅지에 M16을 발사,생포하는 침착성과 대담성을 보여줬다.
  • 5월20일/시위진압때 4명 총격 사망/검찰수사로 재구한「5·18」

    ◎휴교항의 전남대생 18일 공수단과 첫 충돌/21일 무장시민군 도청 접수… 최소 38명 희생/시민군 23일 “무기회수”… 군27일 도청점령 “끝” 상오10시 전남대앞에서 휴교조치에 항의,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과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간에 충돌.하오2시40분쯤 학생·시민들이 금남로로 진출,진압에 실패한 경찰이 군병력 출동을 요청해 7공수 33·35대대가 시위진압에 나섬.이 과정에서 첫사망자 발생.시위대 2천여명으로 불어 시내 중심가에서 산발적 시위.하오5시50분 11공수 61대대 진압에 투입됨. 대검을 착검한 공수부대원들의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민·학생들 금남로 일대에서 화염병·투석 시위.상가대부분 철시한 상태에서 11공수 61·62·63대대 학생·시민들을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연행함.하오2시 광주지역 기관장회의서 과격진압항의및 연행자 전원석방요구.하오5시 11공수63대대 장교가 M16소총으로 시위대에 첫발포.하오11시 육본이 3공수 5개대대에 추가투입명령. 전남도교위 광주시내 중고교에 임시휴교조치.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17정을 시위대가 탈취.하오4시 금남로일대에 시위군중 2∼3만명 운집하고 택시·버스·트럭 등 차량이 시위에 합세.하오9시45분 진압상황 보도요청을 거부한 광주문화방송국 방화.하오10시30분 진압군에 실탄지급.M60등으로 공포사격.하오11시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전지역을 시위대가 장악.광주역일대 진압과정에서 4명이 총격사망. 20사단 61·62연대 추가투입.시위대들이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 등지로 진출,나주경찰서등에서 총기4천9백여정·실탄13만여발·수류탄2백70여발 탈취해 무장.정오 전남대·도청등지에서 수만명의 시위대들이 무장시위 벌임.하오1시30분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발포.하오1시35분 광주 외곽도로망 차단하고 진압군 자위권 발동.하오4시30분 전남도청·도경을 시민군이 접수.최소 38명이 총격사망. 광주외곽지역 총격전으로 수십명 사망.상오9시 지역유지와 학생들을 주축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구성.하오3시 도청분수대 앞에서 시민궐기대회개최. 상오9시35분 수습위 시민군들 상대로 무기회수 시작.상오10시 11공수 62대대 병력이 매복한 주남마을 부엉산아래 광주∼화순간 국도에서 미니버스에 타고있던 여고생등 10여명 총격사망.하오3시 도청앞 광장에 5만시민이 운집해 민주수호시민궐기대회 개최. 상오9시55분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에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부대복귀중이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진압군끼리 총격전을 벌여 사병3명 사망.하오1시55분 효천역 부근에서 전교사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11공수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총격전을 벌여 9명 사망. 강경학생·청년들이 수습위를 대신해 무력대항결의.무기반납도 백지화.상오4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인 「상무충정작전」수립지시해 작성됨.하오5시30분 최규하 대통령 광주방문,담화문발표. 상오10시30분 소준렬 전교사령관 주재로 진압작전 지휘관회의 개최해 27일 새벽 작전개시키로 결정.하오6시 전남도청에서 최후항쟁 주장하는 강경파 2백여명이외에 시위대 해산함. 상오4시 3공수여단 11대대 1지역대 병력이 전남도청 후문으로 들어가 1시간21분만에 도청점령.7공수33대대 8·9지역대 병력도 상오5시6분 광주공원 점령.11공수61대대 4중대 병력은 상오4시46분 도청주변 주요건물 점령.20·31사단은 상오7시15분쯤 광주시내 진입완료하고 10분만에 모든 작전완료.계엄군의 광주재진입작전과정에서 시위대 16명,계엄군 3명 총격사망. ◎고소·고발인 향후 대응방향/「검찰 결성」 불복땐 어찌될까/항고·재항고 기각땐 헌법소원내야/헌법재판소서도 「결정번복」 힘들듯 1년2개월 가량을 끌어온 「5·18」 고소·고발사건이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일단 마무리됐지만 고소·고발인들이 검찰의 결정에 불복하고 있어 앞으로 전개될 법률적 대응이 주목된다. 현행법상 고소·고발인들이 취할 수 있는 법률적 대응방안은 3단계로 구분된다. 우선 해당 검찰청인 서울지검을 통해 상급청인 서울고검에 항고하는 것.항고가 기각되면 대검에 재항고를 할 수 있으며 재항고마저 기각될 경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하는 길이 열려 있다.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고검이나 대검이 1차 결정 당사자인 서울지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사전조율결과 도출된 결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고·재항고는 헌법소원을 내기 위한 요식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건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간다해도 고소·고발인들의 주장이 관철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비록 헌법재판소가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인용」 결정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인용결정이 곧바로 검찰의 기소결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뿐더러 헌법소원을 통해 검찰의 결정을 뒤엎기에는 여러가지 면에서 무리라는 것이다. 우선 검찰은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사안이 사법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언제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공소시효에 대한 판단자체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헌재가 검찰의 결정을 번복하려면 공소시효부분에 대한 판단을 먼저 내린 뒤 시효만료일 이전에 재기수사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고소·고발인들이 주장하는 내란죄의 공소시효(15년)는 오는 8월15일에 만료돼 27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배적인 견해인 점으로 미루어 시간상 공소시효와 본안에 대한 판단을 함께 내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번 사건이 헌재에서 다뤄질 경우 검찰이 유보한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여부에 대해서도 심판해야 하므로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된다.종래 통치행위는 검찰이나 법원의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으나 헌재의 헌법판단대상이라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헌재의 인적 구성이나 12·12사건 당시 보인 소극적 자세 등을 감안할 경우 헌재가 8월초쯤 헌법소원이 제기되면 공소시효부분에 대한 판단여부로 시간을 끌다가 결국 『소의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결정을 내릴 공산이 크다. 따라서 고소·고발인들의 향후 법적대응은 실익보다는 검찰의 사법적 판단에 대한 「불복」차원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장윤석 공안부장 일문일답/“어떤 비판 제기돼도 최선다한 결정”/고소인 주장 입증할 증거 발견못해/양민학살한 계엄군 처벌도 어려워 「5·18」고소·고발사건의 주임검사인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18일 하오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에 대해 상당한 국민적 반발과 파장이 예상되는데.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이 해야할 고유의 일이지만 시를 감상하고 비평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어떤 비판이 제기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80년 8월 최규하 전대통령 하야과정과 발포경위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입증자료가 없다」고 발표한 것은 검찰수사력의 부족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아닌가. ▲충분한 자료수집과 검토를 했지만 고소인들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최전대통령이 정권에서 물러날 시기를 전후해 강압과 불법행위는 정말 없었는가. ▲전두환 전대통령은 답변서를 통해 강압이 없었다고 진술했으며 최전대통령은 서면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자료가 전혀 없었다.또 세간에는 이 과정에서 김정렬 전총리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 정설로 돼있는데 김씨 역시 사망해 강압여부에 대해 확인할 수 없었다. ­80년 4월 권정달·허삼수·허화평씨 등이 모여 국보위 설치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정권찬탈등의 의도가 있었다는데. ▲조사결과 4월 당시 그런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80년 8월 최전대통령이 하야하고 간선제를 통해 전전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두사람간에 강압이 없었다는 말인가. ▲최전대통령이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아 알 수가 없었으며 전전대통령의 경우 「당시 최대통령이 스스로 결단했을 것」이라는 답변서만을 냈다. ­광주시민등 양민학살 부분의 책임자들에 대한 개별적 처벌은 가능하지 않은가. ▲공수부대가 광주 외곽지역에서 총격을 가해 주민 2명을 사망케 한 일이 있었으나 발포자와 구체적 경위에 대해 특정되지 않는등 행위자를 가리기 어려워 처벌이 어렵다. ­12·12사건 때는 군형법상 반란죄등 혐의를 인정했는데 5·18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12·12 사건의 경우 소장급 장성이 별넷인 장성을 제거하려 한 것이므로 군형법상 반란죄 인정이 가능했지만 이번 사건은 통치권 찬탈을위한 사전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웠으며 당시 전씨가 모든 과정에서 부단히 최전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고 노력했으므로 전혀 다른 성격이다. ­계엄군에 의한 주민학살만이라도 처벌할 수 없는가. ▲공소시효 5년이 지난 것으로 알고 있다.군형법상 군지휘계통을 들어 책임자를 처벌하기도 어렵다.구체적 행위자등 기본적 사실관계 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가 있었다는데 입수했나. ▲입수는 했지만 당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계획서였을 뿐 정권찬탈 음모는 보이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 시위대가 장갑차 포위하자 장교 첫발표/「5·18」수사 의문점 규명

    ◎21일 전남도청앞 충돌전 장교위주 실탄분배­발포경위/전교사령관­31사단장 계통밟아 군병력 투입­군지휘권/광주시내 시위대처 급급… 병력운용 여유없어­무기피탈 방치/인명피해·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 확인안돼­헬기 기총소사/8명의 사체서 자상 발견… 대검 사용 인정­대검등 사용/정지불응 미니버스에 총격… 10여명 사망­광주외곽 피해/「신원·사망경위 불명」 많아 확정 불가능­사망자수 검찰이 18일 「5·18」사건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의문점들이 밝혀졌다.검찰수사 결과 드러난 발포경위 및 헬기 기총소사 여부,대검과 화염방사기 사용여부,사망자 수,무기피탈 고의방치 여부,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2원화 여부 등 7가지 의문점을 정리해 본다. ▷발포경위◁ ▲공수부대의 발포는 5월20일 하오11시쯤 광주역 앞에서 시위군중에 발포하면서 계속되었는데 21일 하오1시쯤 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의 형태는 시위대의 차량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자위목적의 우발적 사격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는 주장. ­광주에서의 최초발포는 5월19일 하오5시쯤 광주고부근에서 있었던 바,당시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배속 장갑차가 이 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공격하면서 불붙은 짚단을 던져 불을 붙이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사격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당했음. 또 20일 하오11시쯤 3공수여단이 광주역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수세에 몰리자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21일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경찰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공격에 대응해 발포,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이는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는 할 수 없음. 이와 함께 21일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경위에 대해 그동안 국회 청문회 등에서는 시위대의 1차 장갑차공격후 도청에서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소량의 실탄을 인수하여 장교들에게 분배한 상태에서 다시 시위대가 차량공격을 해오자 장교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돼왔으나 이번 수사결과 11공수여단 61·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20일 밤 12시쯤 대대장이 대대장 지프 등에 통합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이상 장교에게 15발들이 1탄창씩 분배하고 63대대는 21일 상오10시30분쯤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같은 날 하오1시쯤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있기 전에 이미 장교 위주로 실탄이 분배돼 있었음이 확인됐음. 또 당일 하오1시쯤 시위대가 장갑차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공격해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해 첫 발포가 있었으며 다시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했고 이와 비슷한 시점에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근 건물로 산개했던 공수부대원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사실이 확인됐음. 따라서 이같은 발포는 대대장이나 여단장이상의 상급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이거나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없고 현장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해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해 자위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발포중에는 비록 시위대가 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도로에 나와 단순히구호를 외치거나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시위현장 부근에서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 등 군에 대해 직접적 위협을 가하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실탄 및 사격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됐음. ▷군 지휘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상급지휘관인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정상적인 지휘계통하에 있지 아니하고 별도세력의 사전계획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는 주장.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등 3개 대학에 배치한 것은 소요예방과 진압을 이유로 육본이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므로 이때 이미 군병력의 시위진압투입은 전제돼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5월18일 하오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시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확대선포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군병력 투입을 결정한 사실이 인정됨. 11공수여단의 추가투입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인 18일 하오2시쯤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에서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만 공수여단중 적절한 파견부대의 결정을 위해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11공수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한 것임. 또 초기에 7공수여단을 시위진압에 투입한 후 5월18일 야간에 공수부대를 광주시내에 거점배치하고 19일 11공수여단의 추가작전통제에 다라 책임지역을 구분해 시위진압에 투입했으며 20일 3공수여단의 추가투입에 따라 다시 책임지역을 구분,시위진압에 투입하고 21일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는 등 일련의 부대운용에 관한 지휘를 실제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됨. 21일 하오4시 31사단장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전교사령관에게 전환된 후 광주 재진입작전은 전교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특전사령관 등의 자문과 조언을 참고해 그의 책임하에 수행한 것이 인정되며 군부대간의 오인사격은 전교사와 공수여단 및 전교사 예하 각 부대간에 상호 상황전파 및 통제의 미숙,단위부대 지휘관들의 상황판단미숙과 침착성 부족 등에 기인해 발생한 것으로 이를 두고 지휘권 이원화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음. 물론 광주에 파견된 3개 공수여단이 전교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작전통제하에 있었음에도 31사단 등과는 무전교신체계가 상이한 상태에서 특전사 일부장교가 전교사에서 전용 무선 발수신장치를 설치해 각 공수여단과 별도로 교신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특전사령관이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증원결정에 의견을 제시하고 수시로 광주를 방문하면서 공수여단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광주 재진입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특공부대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사실 등이 인정되나 이를 가지고 당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이 이원화됐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임. ▷무기피탈 방치◁ ▲사전에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광주 재진입작전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시민으로 하여금 무기고를 습격,무장을 하도록 상황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근거로 광주시민이 광주 외곽지역에서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해 광주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고 이후 외곽도로가 봉쇄되었다는 주장.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하오3시15분쯤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하오11시쯤 광주세무서 방화,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하오1시쯤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카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하오1시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당시 조기진압의지와는 달리 시위가 급격히 확산됨으로써 경찰과 군병력이 광주시내 시위에 대처하는 데만도 급급한 상태였고 지방경찰 병력도 대부분 광주시내로 차출돼 인근지방으로까지 진출해 무기를 탈취하는 시위대를 사전에 막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며 특히 21일에는 전남대에서 3공수여단이,전남도청 앞에는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시위대와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은 전남도청 등을 포기하고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형편이었으므로 군이나 경찰이 병력운용에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무기고 습격을 방치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움. ▷헬기 기총소사◁ ▲광주에서 무장헬기의 공중사격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야기됐다는 주장. ­군관계 자료상으로는 21일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무장헬기 AH­1J(코브라) 4대를 지원하고 사태기간중 헬기가 모두 48시간동안 무력시위를 했다는 기록외에 실제공중사격 실시여부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음. 조비오신부가 헬기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란은 검찰조사에서 부근 건물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사격에 의해 다쳤다고 진술했으며 정낙평은 21일 하오2시쯤 광주경찰서 상공에서 기종미상의 헬기가 기관총 사격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부근 진주다방의 종업원이 옥상에서 헬기가 쏜 기관총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진주다방 종업원인 심동선씨(30)에 대한 검시조서에 의하면 사인이 M16소총에 의한 관통총상이고 당시 빌딩옥상에 있던 공수부대원의 사격에 의한 피격이라는 취지의 증언이 있음. 아놀드 피터슨목사는 헬기가 선회하고 상공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사격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피터슨목사가 사격장면을 촬영한 것을 검찰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 불빛은 기관총사격시 발생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등 불빛임이 확인됐음. 이와 함께 광주시내 적십자병원·기독병원·전남대병원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도 그 당시 각 병원에 헬기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들어왔거나 입원·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백65명에 대한 광주지검 사체 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기총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음. 또한 AH­1J헬기의 장착무기인 토미사일,2.75인치 로켓,20㎜ 발칸포(1분당7백50발 발사),500MD헬기의 장착무기인 2.75인치 로켓,7.62㎜ 6열 기관총(1분당2천∼4천발 발사)에 의한 표적사격의 경우 나타나는 대규모 인명피해와 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이 확인되지 않았음. ▷대검등 사용◁ ▲계엄군이 시위진압과정에서 대검과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주장 ­당시 광주일원에 투입된 계엄군은 착검상태에서 트럭을 타고 위력시위를 하다가 시위대로부터 투석공격 등을 받으면 착검상태로 하차해 시위대를 추적,체포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그 과정에서 대검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음. 실제로 사망자 손옥례·권근립씨등 8명의 사체에서 자상이 발견됐고 부상자 하헌남·최승기씨 등이 자상을 입은 점 등을 종합할 때 당시 시위진압현장에서 지휘관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수부대원에 의해 대검이 사용된 사실이 인정됨. 군관계자들은 화염방사기가 토치카 또는 장갑차 공격용이므로 인체에 화염방사기를 직접 사용할 경우 전신 중화상으로 대부분 사망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당시 광주에서 화염방사기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소용진압용 작용제(CS분말)나 소요군중 식별용 유색수를 살포하는 데 화염방사기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했거나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상사망사실을 인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치 못했음. 5월21일 광주시청 앞에서 시위대의 장갑차를 몰고가다 화염방사기 공격으로 화상을 입은 것으로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 기록된 최강식씨(87년 사망)의 보상금지급 관련서류를 조사한 결과 최씨는 당시 광주시 중흥동의 한 건축현장에서 계엄군에 체포돼 전남대·광주교도소·상무대로 이동하면서 전신을 구타당하고 화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됐음. 또 같은 날 전남대 앞 시위에서 계엄군의 화염방사로 안면화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돼 있는 최병옥씨(당시 21)의 경우 당시 계엄군에 쫓겨 전남대부근 가정집의 화장실에 숨어 있던 중 화장실 환기창문으로 불꽃이 들어와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나 그것이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염인지는 목격하지 못했다고 검찰조사에서 진술하는 등 다른 피해사례나 목격담에 대한 조사에서도 화염방사기 사용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음. ▷광주외곽 피해◁ ▲5월21일 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5월27일 재진입작전을 할 때까지 시외곽 봉쇄 및 도로차단 등과 관련해 여러 건의 민간인 피해사례가 있었다는 주장. ­이같은 주장 가운데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5월21일 광주교도소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수십명을 천막등으로 덮은 트럭에 실어 호송하면서 더운 날씨에도 불구,과다한 인원을 탑승시킨 상태에서 최류탄을 터뜨려 화상환자를 발생시켰고 교도소 도착당시 트럭에는 질식 등으로 인해 5∼6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음. 3공수여단은 또 같은 달 22일 하오10시쯤 광주교도소부근을 통과하던 김성수씨일가를 시위대로 오인,총격을 가해 가족 3명에 총상을 입히고 그중 김씨의 처 김춘아씨가 후유증으로 사망케 하는 등 24일까지 광주교도소를 방호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와 수차례 교전을 했고 이같은 교전및 부상자치료,철수과정에서 사망한사체 12구를 교도소부근에 가매장한 사실이 확인됐음.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효천역부근에 배치됐던 20사단 61연대 병력은 5월22일 상오5시40분과 9시쯤 2차례에 걸쳐 시위대로 오인하고 민간인에 총격을 가해 왕태경 등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했음. 5월22일 하오5시쯤에는 20사단 62연대 2대대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기 위해 민가를 사이에 두고 무장시위대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인근주민 이매실·함광수씨 등이 총상을 입고 사망 또는 부상했고 23일에는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와 시위대간의 2차례 교전과정에서 박영철씨 등 민간인 2명이 사망했음. 11공수여단 62대대가 매복하고 있던 주남마을 앞 광주∼화순간 국도에서는 23일 상오10시쯤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박현숙씨 등 10여명이 사망했고 남자 중상자 2명이 후송도중 다시 총격에 의해 사망했음. 24일 하오1시30분쯤에는 주남마을에서 송정리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 병력과 시위대 10여명이 송암동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던 중 공수부대의 난사로 전재수 등 어린이 2명이 사망했고 또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의 오인사격을 받고 격분한 63대대 병력이 피격지점부근를 수색해 시위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원 1명과 권근립씨 등 주민 4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했음. ▷사망자수◁ 정부 관련 자료에 근거한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는 군인 23명,경찰 4명,민간인 1백66명등 모두 1백93이고 이에 광주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돼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이 47명임. 그러나 광주시위기간에 발생한 사체 가운데 신원및 사망경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목격자 진술 등에 의해 사망자가 확인된 경우에도 당시 사체가 발견돼 확인됐는지 여부와 신원불상 사체와의 동일성 여부 등에 대한 판단이 현재로서는 곤란해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를 확정짓는 것은 불가능함.
  • 게임용 총기 밀수/2억대 챙겨 구속

    경찰청 외사과는 19일 건강식품 납품업체인 한미해상 마산지점장 조홍연(35·부산시 남구 남천2동 3의11)씨등 2명을 관세법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조씨 등은 지난 2월중순 M16 모의소총과 콜트MK4 권총등 10여종의 서바이벌 게임용 총기류를 일본에서 몰래 들여와 서바이벌 게임 동호인들에게 한정에 23만∼2백50만원씩 모두 2억8천여만에 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소총실탄 44발/하수구서 발견

    【부산=이기철 기자】 24일 하오 4시45분쯤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3가 218 LG전자앞 하수구 바닥에 M16 소총 실탄 44발이 버려진 것을 준설작업중이던 서구청건설과 직원 안용관씨(44)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안씨는 『환경미화원들과 함께 하수구 준설작업을 하던중 심하게 녹이 슨 실탄들이 준설물에 섞인 채 버려져 있었다』고 말했다.
  • 공수부대 하사1명 소총휴대한채 탈영

    【광주=최치봉기자】 12일 상오8시30분쯤 전남 담양군 육군 제○○공수특전여단 소속 최한식하사(21)가 유탄발사기가 장착된 M16소총 1정을 갖고 탈영했다. 군·경에 따르면 최하사가 이날 대대종합전술훈련을 마치고 인근 자동화사격장으로 집결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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