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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캘리포니아 산불 속 뛰어들어 토끼 구한 美운전자

    캘리포니아 산불 속 뛰어들어 토끼 구한 美운전자

    한 남성이 야생동물을 구하기 위해 운전 중이던 차를 세우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6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지역방송 KABC는 캘리포니아주(州) 벤추라 카운티의 초대형 산불 현장에서 한 사진기자에게 우연히 찍힌 영상을 공개했다. 라 콘치타 1번 고속도로를 따라 운전 중이던 신원미상의 남성은 화재로 속수무책인 야생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 즉시 그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 토끼를 향해 달려갔지만 토끼는 남성이 다가오자 깜짝 놀라 사나운 불길 속으로 되려 도망갔다. 당황한 남성은 어쩔줄 몰라 몇 차례 펄쩍 뛰어오르다 토끼의 안전이 더욱 걱정돼 화염 속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구조에 성공한 그는 두 팔로 토끼를 꼭 껴안은 채 현장을 빠져나왔다. 현지언론은 남성이 인터뷰를 거절한 뒤 토끼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전했다. 해당 영상을 본 사람들은 동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한 불길 속으로 뛰어든 그의 행동을 치켜세우며 그를 ‘영웅’이라 불렀다. 한편 지난 4일 로스앤젤레스(LA) 북서쪽 벤추라에서 시작된 산불은 큰 규모로 번져 서울 면적의 80% 수준인 12만 에이커(약 485㎢)를 태웠다. 산불 피해가 가장 큰 벤추라에서만 5만여 명의 주민이 대피했지만 지금까지 진화율은 5% 미만에 머물고 있다. 사진=유튜브캡쳐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 왜 잦을까? 알고보니...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 왜 잦을까? 알고보니...

    지난 10월 미국 북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로 유명한 나파와 소노마 밸리 등 8개 카운티에서 발생한 산불은 건물 8500여채를 태우고 40여명의 사망자를 유발시켰다.두 달 만에 캘리포니아 남서부에서 다시 발생한 산불은 인명 피해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규모는 이전과 비슷하게 확대되고 있다. 7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북쪽과 북서쪽, 서부 지역에서 잇달아 발화한 토머스, 크릭, 스커볼, 라이 4개 대형 산불은 서울시 전체 면적의 80%에 육박하는 약 485㎢를 태웠다. 매년 연중 행사처럼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대형 산불이 발생하고 있는데 원인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지구 온난화 현상’을 꼽고 있다. 우선 산불을 확산시키는 원인은 ‘샌타애나’라고 불리는 강풍이다. 샌타애나는 모하비 사막과 미 서부 내륙 대분지에서 형성된 고기압이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오면서 매우 건조하고 강한 돌풍 형태의 바람으로 바뀌어 태평양 해안가를 향해 몰아치는 현상이다. 샌타애나는 1등급 허리케인과 맞먹는 최고 시속 130km의 위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번 산불로 가장 피해가 큰 벤추라 지역에서 발생한 토머스 산불은 초당 1200평을 태우는 속도로 15분만에 뉴욕 맨하탄 샌트럴파크만한 땅을 태워버렸다. 샌타애나로 인한 연기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도 관측됐다.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UCLA) 기상학자 대니얼 스웨인 교수는 “올해 여름이 기상관측 사상 가장 더운 여름이었고 가을도 기록적인 폭염이 지속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뜨겁게 데워진 태평양 해수 온도가 강한 고기압을 형성해 샌타애나의 강도를 더욱 세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덥고 건조한 날씨가 지속되면서 숲이 바짝 마르면서 강력한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LA 지역은 지난 9월 이후 강수량이 5㎜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건조하다. 다른 전문가들 역시 “11월에도 계속된 더위가 이례적으로 12월의 대형 산불을 만들어냈다”며 “산불의 직접적 원인은 전기합선이나 담배꽁초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산불의 확산 추세를 보면 온난화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미국 내에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속도가 빨라지는 이유를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고 지구온난화는 과학자들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찾고 있기도 하고 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사망자 시신 처음으로 확인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사망자 시신 처음으로 확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LA) 북서부와 북부에서 초대형 산불이 일어나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특히 7일(현지시간) 미 일간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숨진 사망자의 시신이 처음 확인됐다. 보도에 따르면 LA 도심에서 북서쪽으로 100㎞ 떨어진 벤추라에서 발화한 토마스 산불이 이날 오전 시속 80∼130㎞의 강풍을 타고 북동쪽 휴양지 오하이 밸리 쪽으로 번졌다. 오하이 지역에서 불에 탄 여성의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지난 4일 저녁 발화한 이번 산불이 나흘째 계속되는 가운데 사망자 시신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지 소방당국은 불이 거세게 번지고 있는 데다 지역별로 수만 명이 대피하고 있기 때문에 인명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다. 오하이 지역으로 번진 불 때문에 이 지역 주민 8000여명이 전날 밤부터 이날 새벽 사이에 황급히 대피했다. 벤추라 산불이 확산하면서 미 서부 LA와 벤추라, 샌타바버라를 잇는 간선 교통망인 101번 고속도로가 126번 루트부터 150번 루트 구간까지 한동안 폐쇄됐다가 이날 아침 7시부터 통행이 재개됐다. 앞서 실마 카운티에서 발생한 크릭 산불로 인근 목초지에 있던 말 30마리가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미 언론과 소방당국·기상당국에 따르면 진화율이 5% 미만에 그친 가운데 지금까지 불에 탄 면적은 12만 에이커(약 485㎢)가 넘는 것으로 현지 소방당국은 보고 있다. 서울시 면적(605㎢)의 거의 80%에 육박한다. 산불 영향권에 있는 주민 20만명 이상에게 강제 대피령이 내려졌다. 산불 피해가 가장 큰 벤추라에서만 시 전체 주민의 절반인 5만여명이 대피한 상태다. 기상당국은 8∼9일에는 바람이 다소 잦아들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이날 낮에도 시속 80∼90㎞의 건조한 강풍이 계속 불어 산불 피해 지역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앞서 지난 10월 북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인 나파·소노마 밸리 등 8개 카운티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 당시에는 주민 40여 명이 사망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산타 아나’ 공포…서울 면적 불탔다

    ‘산타 아나’ 공포…서울 면적 불탔다

    건조한 숲 만나 역대급 화재 불러 대피령·휴교 등 20만명에게 영향 UCLA·게티 박물관 근처로 번져 한인 많은 북부도 간접 영향권 미국 서부에 올해도 어김없이 ‘산타 아나’의 공포가 찾아왔다.고온 건조 계절풍인 산타 아나의 영향으로 지난 4일(현지시간)부터 시작된 초대형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매년 10월에서 3월 사이 미 캘리포니아주에 발생하는 산타 아나는 매년 이 지역 산불의 최대 원인으로 꼽힌다. 강하게 몰아치고 있는 산타 아나는 건조한 식생과 만나 캘리포니아 남부에 역대급 화재를 불러왔다.CNN 등 미 언론에 따르면 산불 발생 사흘째인 6일 산불은 5군데로 나뉘어 위세를 떨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LA) 북서쪽 벤추라에서 발화한 ‘토머스 파이어’가 가장 큰 규모로 번지고 있고, 그다음으로 규모가 큰 ‘크릭 파이어’가 LA 실마 일대를 태우고 있다. LA 북서부 발렌시아의 대형 놀이공원인 식스플래그 매직마운틴 인근에도 ‘라이 파이어’로 명명된 산불이 발화했으며, LA 북쪽 샌버너디노 카운티 인근의 ‘리틀 마운틴 파이어’, LA 서부 스커볼 문화센터 근처의 ‘스커볼 파이어’ 등이 있다. USA투데이에 따르면 이날까지 이들 화재로 인해 불에 탄 면적은 17만 3075에이커(약 700㎢)로 서울의 전체 면적(605㎢)을 웃돈다. 1800명 이상의 소방관들이 밤잠을 쫓아가며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진화율은 불길을 모두 잡은 ‘리틀 마운틴 파이어’를 제외하고 5~10%에 불과하다고 캘리포니아 산림·소방국은 이날 밝혔다. 벤추라에서 대피한 약 3만 8000명과 실마 카운티에서 대피령이 내려진 11만명을 포함해 이번 산불로 영향을 받는 주민이 무려 2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LA 인근 260개 이상 학교들이 휴교령을 내렸다. 특히 이날 오전부터 미국의 대표 부촌 중 하나인 벨에어와 캘리포니아대(UCLA) 근처에 ‘스커볼 파이어’가 번지기 시작해 소방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벨에어는 할리우드 연예인이 다수 거주하는 부촌으로, 수백만 달러를 호가하는 고급 저택이 많다. 현재 700가구 주민이 대피한 상태로,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모라가 와이너리도 화재 피해를 입었다. 벨에어는 1961년에도 대형 화재로 가옥 500여채가 전소한 적이 있다고 LA타임스는 전했다. 또 유명 화가들의 회화작품과 조각품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게티센터 박물관도 근처에 있다. 게티센터는 전시관을 폐장한 상태에서 자체 방화시설을 가동해 예술품을 보호하고 있다. UCLA 일부 건물에도 전기 공급이 끊겼고 이날 열릴 예정이던 농구 경기 등이 취소됐다. 대학 측은 “캠퍼스가 폐쇄된 상태는 아니지만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 경우에만 등교하라”고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권고했다. 하루 교통량 40만 대 이상으로 미 서부에서 가장 혼잡한 405번 고속도로의 일부 구간도 폐쇄됐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LA 북부 라크레센타와 발렌시아 지역도 산불의 간접 영향권에 들어 주민들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LA 한인단체 관계자는 “한인들 사이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친지가 사는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한 한인들이 많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 기상당국은 산타 아나로 인한 산불 경보가 8일까지 내려진 상태라고 전했다. 기상당국은 6일 오전부터 바람이 약간 잦아들었으나 이날 저녁과 7일 새벽 사이에 시속 100㎞의 강풍이 다시 불 것으로 예상돼 이번 화재의 최대 고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내 생각과 기도가 산불과 맞서고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한다. 믿을 수 없는 임무를 수행 중인 긴급구조대원들에게 감사한다”고 밝혔다. 김민희 기자 haru@seoul.co.kr
  • 美 캘리포니아 초대형 산불 3일째…여의도 면적 110배 불에 타

    美 캘리포니아 초대형 산불 3일째…여의도 면적 110배 불에 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일어난 초대형 산불이 발화 사흘째인 6일(현지시간)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있다.로스앤젤레스(LA) 북서쪽 벤추라에서 발화한 ‘토마스 파이어’가 가장 큰 규모로 번진 상태에서 건조한 강풍 탓에 소규모 산불도 여러 곳에서 발화했다. 이날 오전까지 불에 탄 면적은 8만3000 에이커(약 335㎢)로 여의도 면적의 110배가 넘는다. 미 일간 USA투데이는 벤추라에서 대피한 3만8000여 명과 실마 카운티에서 대피령이 내려진 11만 명을 포함해 이번 산불로 영향을 받는 주민이 무려 2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연예인들 거주 LA 서부 부촌에서도 산불 발화 미국의 대표적인 부촌 중 하나인 LA 서부 벨에어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캠퍼스 근처에도 새로운 산불이 일어나 주민들을 위협하고 있다. CNN 등 미 방송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전 해안을 따라 LA를 관통하는 405번 주간(州間) 고속도로 주변에서 ‘스커볼 파이어’로 명명된 산불이 발생해 50에이커(6만 평) 정도를 태웠다. 이 산불은 벨에어, UCLA 캠퍼스와 예술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게티센터 박물관 컴플렉스에 가까운 지역을 위협하고 있어 소방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벨어어 지역도 가옥 여러 채가 불에 탔다. 미 서부에서 가장 혼잡한 고속도로 중 하나인 405번 프리웨이에는 산불로 날아든 잿더미가 흩날리고 있다. 이 고속도로 북쪽 방향 일부 구간이 폐쇄됐다. 벨에어는 1961년에도 대형 화재로 가옥 500여 채가 전소한 적이 있는 곳이라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는 전했다. 호화저택이 많아 할리우드 연예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부촌이다. LA 북서부 발렌시아의 대형 놀이공원인 식스플래그 매직마운틴 인근에서도 ‘라이 파이어’로 명명된 산불이 발화했으며, 진화율은 5%에 불과하다. LA 북쪽 샌버너디노 카운티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작은 산불 2개가 발생했다. 현재 LA 주변 지역에는 5만 에이커(약 200㎢)를 태운 벤추라 산불을 비롯해 LA 북부 실마 카운티 지역의 ‘크릭 파이어’ 등 대형 산불 2개와 그 밖의 지역에서 발생한 소규모 산불 4개가 동시다발로 발화한 상태다. 벤추라 지역은 인구 10만여 명 중 거의 40%에 가까운 3만8000여 명이 대피했다. 60가구로 구성된 아파트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으며, 가옥 1000여 채가 소실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벤추라에는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화재 지역에서 약탈 등 범죄를 막기 위한 조치다. 벤추라와 인근 샌타바버라 카운티에는 20만 가구 이상이 정전됐다. 한인들 많이 사는 라크레센타·발렌시아도 간접 영향권 크릭 파이어로 위협을 받고 있는 실마 카운티와 샌퍼디낸드 지역에서 대피령이 내려진 주민 수는 11만 명에 달한다. 실마 카운티에는 4만3000가구가 정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마 카운티 인근 210번 고속도로로 불길이 번져 도로가 폐쇄됐고 인근 주택 수십 채가 전소했다.관내 학교 수십 곳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리틀 투정가 캐년로드 목장에서 말 30마리가 불에 탄 사체로 발견됐다. 이번 산불로 인한 정확한 인명피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산불 때문에 LA 북서부 지역이 시커먼 연기에 뒤덮인 상태로, 당국은 주민들에게 실외활동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LA 북부 라크레센타와 발렌시아 지역도 산불의 간접 영향권에 들어 주민들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기상당국은 극도로 건조한 강풍인 ‘샌타애나’로 인한 산불 경보가 8일까지 내려진 상태라고 전했다. 샌타애나는 미 서부 내륙 대분지에서 고기압이 산맥을 넘어오면서 해안 쪽으로 건조한 강풍을 일으키는 현상을 말한다. 미 삼림국(USFS) 관계자는 “강풍은 매년 이맘때면 이 정도로 부는 경우가 많았다.문제는 바짝 마른 상태로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는 건조한 식생”이라고 말했다. 당국은 강풍이 시속 70㎞ 넘는 세기로 불 때는 소방헬기를 동원한 진화 작업이 무력화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기상당국은 6일 오전부터 바람이 약간 잦아들었으나 이날 저녁과 7일 새벽 사이에 시속 100㎞의 강풍이 다시 불 것으로 예상돼 이번 화재의 최대 고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지구를 보다] 우주에서 본 역대 최악의 캘리포니아 산불

    [지구를 보다] 우주에서 본 역대 최악의 캘리포니아 산불

    역사상 최악의 산불 피해로 고통받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일대의 모습이 우주에서도 관측됐다. 최근 미 항공우주국(NASA)은 위성 테라(Terra)에 장착된 열-굴절 복사계인 아스타(ASTER)가 촬영한 캘리포니아 일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공개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촬영된 사진을 보면 우주에서도 거대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것이 한 눈에 관측된다. 사진에서 붉은 색 부분은 초목을 의미하며, 노란색으로 묘사된 부분이 바로 산불이 피어오르는 지역이다. 이에앞선 11일 지구자원 등을 탐사하는 NASA의 위성 '랜드샛8'(Landsat 8)도 지옥같은 산불의 모습을 촬영해 지구로 보내왔다. 이 사진에서도 역시 산불로 인한 연기로 자욱해진 캘리포니아 일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있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지난 9일부터 나파, 소노마 등 북 캘리포니아 8개 카운티에서 발생한 20여 개의 동시다발 산불로 지금까지 40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백 여명이 실종 상태다. 특히 북 캘리포니아 전역에 시속 35∼45마일(56∼71㎞)의 돌풍까지 불어 당국은 산불 진화에 어려움을 겪고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미 캘리포니아 산불 사망자 31명으로 늘어

    미 캘리포니아 산불 사망자 31명으로 늘어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나파밸리에서 시작된 산불이 확산하면서 이로 인한 사망자가 최소 31명으로 늘어났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 등이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소방당국은 이날 소노마 카운티에서 가장 많은 17명, 멘도시노 카운티에서 8명, 유바 카운티에서 4명, 나파 카운티에서 2명이 각각 숨졌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는 캘리포니아주 역사상 최악의 화재로 기록된 1933년 그리피스 파크 화재 사망자 수보다 2명 더 많다. 인구 밀집지역인 소노마 카운티에선 실종자만도 400명에 이르러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커보인다. 피해가 큰 산타로사 시에서만 2834만 채의 집이 소실됐으며, 상업지역 3만7천161㎡가 불에 탔다. 산타로사 시의 최신 소방서마저 소실됐다고 시 당국은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취임 전 가뭄·수해현장 찾은 농식품장관

    취임 전 가뭄·수해현장 찾은 농식품장관

    김영록 장관, 현장행정 분주후보자 시절에도 농민들 만나…지명 전엔 AI지역 찾기도김영록 신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공식 취임도 하기 전에 가뭄·수해 현장을 수차례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책상보다 현장에서 답을 찾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3일 농식품부에 따르면 김 장관은 이날 임명 직후 첫 일정으로 경기 화성 덕우저수지를 방문해 가뭄 대책을 점검했다. 이어 평택 내천배수장에서 폭우로 인한 피해 대비 상황을 살펴봤다. 4일 예정된 취임식까지 기다리지 않고 현장에서 공식 업무를 시작한 셈이다. 앞서 김 장관은 후보자 신분으로 가뭄 현장을 찾기도 했다. 지난달 16일에는 경기 안성 금강저수지를 둘러봤고, 20일에는 염해 피해가 큰 충남의 서산 간척지와 홍성 가곡저수지를 방문했다. 이어 지난 2일에는 삽교호 방조제와 서산 A간척지구에서 농민들을 만났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김 장관이) 후보자 신분이라며 의전을 최소화하라고 요청해 지방자치단체나 언론에 알리지 않고 실무자 한두 명과 함께 조용히 현장에 다녀왔다”면서 “후보자 지명 전에도 조류인플루엔자(AI) 발생 지역을 찾는 등 현장 행정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라고 전했다. 한편 김재수 전 농식품부 장관은 이날 이임식을 치르고 40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김 전 장관은 “유례없는 쌀값 하락과 김영란법 시행에 따른 농식품 분야 피해, AI와 구제역 발생, 산불과 우박 등 하루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나날이었다”면서 여러 농정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는 아쉬움을 털어놨다. 김 전 장관은 후배 공직자에게 “(농축산물·가축질병) 파동이 날 때마다 장차관이 경질되거나 실무자가 징계당하는 쓰라린 고통이 닥치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절대 책임을 회피하거나 남에게 전가해선 안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세종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미국 LA 산불, 진화할 새도 없이 급격히 확산…1만 5000가구 강제대피령

    미국 LA 산불, 진화할 새도 없이 급격히 확산…1만 5000가구 강제대피령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시 북부에서 발생한 산불이 24일(현지시간)까지 사흘간 89㎢(2만 2000 에이커)의 임야를 태우고 빠르게 확산돼 피해가 커질 전망이다. LA 카운티 소방국에 따르면 이번 산불은 지난 22일 오후 2시쯤 LA 북쪽 50㎞ 떨어진 샌타 클라리타 밸리 지역에서 발생했다. 산불은 고온·건조·저습한 환경 속에서 강풍을 타고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번졌다. 산불은 23일 오전 22.3㎢(5500에이커)를 태운 데 이어 이날 저녁에는 북서쪽에서 불어온 시속 40∼50㎞ 강풍을 타고 구릉 지역과 주택가 인근까지 확산됐다. 소방관 1600여명과 소방헬기 15대, 불도저 9대, 소방차 122대 등이 대거 투입됐지만, 40℃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에 지형까지 험준해 산불 진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불 진화율은 10%에 불과한 실정이다. 실제로 미국 전역을 강타한 ‘열돔 현상’(heat dome·정체된 고기압으로 생성된 뜨거운 열기가 마치 돔에 갇힌 모양새를 뜻하는 고온 현상)으로 산불 발생 지역의 최고 기온이 42℃까지 치솟았다. 게다가 산불은 인근 주택가로 번지면서 전날 리틀 터헝가와 샌드 캐년, 플레세리타 캐년 지역에 사는 1만 5000가구에 강제대피령이 내려졌다. 이 지역의 주택 18채가 전소됐으며, 건물 100여 채가 위험에 처해있다고 소방국은 전했다. 이날 대피령이 추가된 곳은 베어 디바이드에서 LA강 레인저 지역 사이, 로스트 캐년 길에서 베어 디바이드 지역 사이, 네이처 센터에서 샌드 캐년 사이, 로빈슨 랜치 골프장, 플라세리타 캐년 등이다. 특히 산불이 활동 중인 아이언 캐년 도로에서는 시신 1구가 발견됐다. 경찰은 조사 결과 산불 지역 거주민으로 확인됐다면서 화재에 따른 사망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불로 생긴 거대한 검은 연기와 재 구름이 LA 시뿐만 아니라 남부 오렌지 카운티 북부까지 뒤덮었다. 잿가루는 LA 다운타운 남쪽까지 날렸다. 이때문에 글렌데일과 패서디나의 야외 수영장이 문을 닫기도 했다. 남부해안대기관리국은 이에 스모크 경보를 발령했다. 또 주민들에게 야외 활동을 삼가고 집에 있을 때는 창문을 닫을 것을 권고했으며 호흡기나 심장 질환을 지닌 노약자는 반드시 실내에 머물라고 권유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소방국은 고온건조한 날씨로 산불의 규모가 커질 가능성이 크다며 산불 예상 진행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대비책 마련을 촉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포토] 美 LA 산불 강풍타고 확산… 1명 사망·주택 18채 전소

    [포토] 美 LA 산불 강풍타고 확산… 1명 사망·주택 18채 전소

    2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샌타 클라리타 밸리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산불은 인근 주택가로 번지면서 리틀 터헝가와 샌드 캐년, 플레세리타 캐년 지역에 사는 1만5천 가구에 강제대피령이 내려졌다. 이 지역의 주택 18채가 전소됐으며 아이언 캐년 도로에서 시신 1구가 발견됐다고 소방국은 전했다.AP·EPA 연합뉴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전신화상 딛고 철인3종 완주, 희망의 상징으로 떠올라

    전신화상 딛고 철인3종 완주, 희망의 상징으로 떠올라

    전신에 화상을 입고 죽을 위기를 넘겼지만 ‘희망의 아이콘’으로 우뚝 선 호주 여성 투리아 피트의 근황이 공개됐다. 28세의 피트는 지난 2011년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 킴벌리에서 열린 ‘울트라 마라톤’ 행사에 참여했다가 잡목림 지대 산불에 갇히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다행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전신의 65%에 달하는 면적에 화상을 입고 왼쪽손 손가락 네 개와 오른쪽 손 엄지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당당한 자세와 긍정적 삶의 태도를 잃지 않았던 피트는 곧 언론을 통해 호주 국민들 사이에 ‘희망의 아이콘’이 됐고,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그는 인스타그램에 안면 레이저 수술을 받아 딱지와 물집이 생긴 자신의 얼굴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당당한 표정의 피트는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수술을 받은 뒤로는 간혹 스스로를 크게 의식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내 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번 주는 특히 심했고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다”고 전했다. 이어 “하지만 가끔 우리는 삶 속에서 자신을 한 단계 발전시켜야 할 국면을 맞는 법이고, 이 때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고 썼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진 그는 현재 동기부여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개발도상국 어린이 화상환자를 지원하는 단체 ‘인터플라스트’(Interplast)의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연인 마이클 호스킨의 청혼을 받았다. 그는 2011년 핏이 치료를 받던 시기에 이미 약혼반지를 산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방송에 출연한 호스킨은 “투리아가 집중치료실에 입원했던 당시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다”며 “투리아는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난달에도 피트는 2016년 포트 맥쿼리 철인경기에 출전, 사이클 180㎞, 달리기 42㎞, 수영 3.8㎞의 강행군에 기꺼이 참가했고 최종 기록 13시간 24분 만에 끝마쳤다. 이러한 끊임없는 활동은 피트의 꺼질 줄 모르는 열정과 도전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역경을 당당하게 맞이하면 된다. 결국 자신의 문제는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지구를 보다] 우주에서 본 캐나다 산불…거대 흰 구름 같은 연기

    [지구를 보다] 우주에서 본 캐나다 산불…거대 흰 구름 같은 연기

    캐나다 서부 앨버타주를 덮친 초대형 산불이 2주 째로 접어든 가운데 그 지옥같은 모습이 우주에서도 관측됐다. 지난 10일(현지시간) 미 항공우주국(NASA)은 지구관측위성인 아쿠아(Aqua)가 촬영한 캐나다 상공 위 구름 이미지를 공개했다. 거대한 흰 구름이 하늘을 덮고있는 이 사진에서 구름을 잿빛으로 휘감고 있는 것이 바로 산불 연기다. 마치 아름다운 그림을 잿빛 물감으로 망쳐놓는 듯한 이 사진은 아쿠아에 탑재된 ‘중간해상도 영상 분광계’(MODIS)로 촬영됐다. 우주에서도 관측되는 캐나다의 초대형 산불은 이미 서울의 5배 면적 이상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캐나다 당국에 따르면 100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화마는 건물 2500동 이상을 불태웠으며 이 과정에서 9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화마가 삼켜버린 앨버타주 포트 맥 머레이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폐허가 돼 유령 도시를 방불케 한다는 것이 현지 언론의 보도 내용이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전국각지에서 소방인력과 공중 살수기 등이 속속 도착해 산불을 진압하고 있다"면서 "세계 각국의 국제적 지원 제의는 고맙고 감동적이지만 현 시점에는 필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사진=NASA image courtesy Jeff Schmaltz LANCE/EOSDIS MODIS Rapid Response Team, GSFC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In&Out] 인공지능의 산불방지계획/곽주린 한국산불방지기술협회 회장

    [In&Out] 인공지능의 산불방지계획/곽주린 한국산불방지기술협회 회장

    내 이름은 알파 플래너(Alpha Planner). 원래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알파고(AlphaGo)를 좀 닮아보라고 힐난 반, 조롱 반 나를 만든 개발자가 개명해 주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산불 예방 대책을 수립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생소한 분야였으나 못할 게 없다고 요량했다. 기획은 어떤 사안이든지 동일한 틀과 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파악해 원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면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문제 규명을 위한 정보 수집과 정보 간의 위계 설정, 목표 지향성 대안 선택, 프로그램 실천상의 장애요인 제거, 평가 환류에 따른 성과 모색 등 내용이 좀 복잡하긴 하다. 그러나 이 정도는 우리 가계(家系)의 먼 조상 할아버지인 계산기 세대에서 이미 해결했던 연산체계다. 큰 부담 없이 먼저 산불 발생 건수와 규모를 좌우하는 기상을 살핀다. 기상청 예보에 따르면 올봄 강수량이나 기온이 평년과 비슷하거나 높다고 한다. 산불 발생 빈도가 예년과 어금버금할 거라고 볼 만한 근거다. 문제는 지난 겨울철 날씨다. 봄철 발생하는 산불이 큰불로 번지느냐의 여부가 겨울에 눈비가 얼마나 왔느냐에 달려 있어서다. 겨울에 가물면 봄에 나무가 말라 있다는 얘기고 나무가 말라 있으면 불에 탈 연료가 많아져 작은 산불이 재난성 ‘화마’로 확산될 가능성이 커진다. 지난해 겨울은 가물었다. 그렇다면 대책은 무엇인가. 산불 발생 원인을 찾아 산불이 안 나도록 집중관리를 해야 하는데 지금 단계에서는 재난형 산불 대응 방안을 준비하는 일이 우선이다. 산불이 난다는 걸 전제로 하고 산불이 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자료를 학습하니 의뢰인은 이미 ‘산불 재난 위기관리 표준,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을 작성해 놓고 있었다. 일람해 보니까 과거 혼란스러웠던 재난 현장들도 이 매뉴얼이 있었다면 일사불란하게 수습될 수 있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세월호 사건 이후 매뉴얼 무용론이 비등했지만 그건 매뉴얼이 지켜지지 않은 데 따른 사회적 분노의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매뉴얼 없이 재난 대응을 한다는 건 눈을 감고 칠흑의 밤길을 걷는 거나 마찬가지다. 산불 재난 위기관리·대응 매뉴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안심되는 일이긴 한데, 관건은 매뉴얼의 현장 이행이다. 매뉴얼이 현장에서 작동되게 하는 방법은 불문가지, 무식할 정도로 반복하는 숙달 훈련뿐이다. 그런데 몇 해 전 TV에서 본,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 실시하는 현장 훈련은 훈련이 아니라 무슨 산불 방지 결의대회 같았다. 위기관리·대응 매뉴얼을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경각심 고취다. 우리나라 산불은 거의 100% 사람들이 불씨를 잘못 관리해서 일어난다. 영농 폐기물과 논·밭두렁을 태우거나 야외활동을 하다 산불을 낸다. 사람이 부주의로 불을 내니까 사람을 대상으로 교육과 홍보 또는 등산로 폐쇄와 같은 법적 강제를 통해 산불을 예방하려 한다. 때만 되면 농·산촌과 휴양지를 산불 방지 깃발로 뒤덮고 입산통제 구역과 기간을 확대 연장하며 실화범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앞으로는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한 폐쇄회로(CC)TV를 대폭 확대 설치하는 게 산불 예방에 가장 효과적이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사실 파악과 추론이 여기에 이르니 산불 예방 대책의 핵심이 잠재적 발화자로 간주된 일반인의 활동을 통제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규제와 단속이 싫다면 시민 스스로 경각심을 고취해 산불예방에 나서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니 산불예방 대책을 수립하는 일이 난제라는 걱정이 몰려온다. 큰 부담 없이 맡은 과제였는데…. 그럼 여기서 알파고처럼 리자인(resign·과업 포기) 선언을 해야 하나.
  • 캐나다 로키의 속살을 만나다 쿠트니 로키

    캐나다 로키의 속살을 만나다 쿠트니 로키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캐나다의 로키가 아니다. 과거 일확천금을 꿈꾸던 사람들이 모인 캐나다 골드러시의 중심지였던 쿠트니 로키는 이제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독특한 겨울스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100년이 넘은 알파인 마을들에서 로키의 속살을 만났다. 캐나다의 동서를 잇는 기찻길이 만나다 쿠트니 로키 여행은 크레이겔라히Craigellachie에서 시작되었다. 캐나다의 동서를 잇는 기찻길, 캐네디언 퍼시픽 레일웨이Canadian Pacific Railway는 1885년 이 작은 도시에서 완성됐다. 각각 동쪽과 서쪽에서 출발한 기찻길이 바로 이 도시에서 만난 것이다. 크레이겔라히에 오기 위해 밴쿠버 공항에서 국내선을 타고 1시간 만에 켈로나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려야 크레이겔라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꽤나 먼 길을 왔지만 여전히 브리티시컬럼비아주였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크기의 캐나다를 동서로 잇는 기찻길이라니 그 길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180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19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골드러시 시대에 캐나다 서부지역에서 채굴된 각종 광물들을 옮기기 위해 설치된 이 기찻길은 아직까지도 캐나다의 주요 화물 운송을 담당하고 있다. 철로의 마지막 못이 박힌 장소는 ‘라스트 스파이크Last Spike’라는 이름의 명소가 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화물열차가 지나는 기찻길 옆에서 마지막 못을 박는 기념사진을 찍고, 기찻길이 지나는 모든 캐나다 주州의 이름이 적힌 기념비도 구경한다. 100년이 지나도록 수많은 이야기를 대륙을 가로질러 운반했을 기찻길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Revelstoke레벨스톡 인간과 자연이 만나 역사를 만들다 기찻길이 완성되었다는 도시를 지나 기찻길 덕분에 생겨났다는 또 다른 도시를 찾았다. 레벨스톡은 1880년대 캐네디언 퍼시픽 레일웨이CPR가 개통되면서 형성된 도시로 도시의 이름 역시 자금난을 겪던 CPR을 구제하고 선로를 개통시킨 영국의 귀족, 레벨스톡경의 이름에서 따왔다. 인간이 만들어낸 열차와 광산업으로 도시가 성장했지만 레벨스톡의 자연환경은 사람들에게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겨울에는 1m가 훌쩍 넘게 쏟아지는 눈 때문에 눈을 털어내기 쉬운 양철지붕을 고집해야만 했고 높은 산에서 일어나는 눈사태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하지만 100년이 넘게 이 산간마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자연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법을 점차 터득했다. 현재 레벨스톡에는 캐나다눈사태협회 본부가 설치되어 전국의 눈사태를 예보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또한 눈이 많은 환경을 적극 활용해 겨울 스포츠의 도시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인간과 자연이 만나 함께해 온 도시에는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과자집 사이를 걷는 달달한 산책 레벨스톡은 100년이 훌쩍 넘은 도시이기에 다운타운 역시 그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여느 알파인 타운과 마찬가지로 뾰족한 지붕을 가진 과자집 모양의 주택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다.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입구에는 레벨스톡을 상징하는 그리즐리 베어의 동상이 우뚝 서서 방문객을 환영한다.마을을 가장 잘 아는 방법은 레벨스톡 박물관에 가보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직접 운영에 참여하는 작은 박물관은 오래된 우체국 건물을 수리해서 사용하고 있다. 32년째 레벨스톡에서 살고 있다는 아담한 체구의 캐시 할머니가 안내해 주시는 박물관에는 처음 미 대륙의 서부를 탐험하며 컬럼비아강을 따라 지도를 그렸던 데이비드 톰슨David Thomson의 발자취와 1920년대 캐나다의 스키점프 챔피언인 넬스 넬슨Nels Nelson의 활약상도 담겨 있다. 박물관을 나와 다운타운의 메인 거리를 걷다 보면 작은 로컬 커피숍과 레스토랑들이 자리하고 있다. 눈이 많은 산악 마을인지라 따뜻한 커피 혹은 런던 포그London Fog 한 잔이면 차갑게 얼어붙은 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다. 런던 포그는 홍차에 거품을 많이 낸 따뜻한 우유를 넣고 바닐라 시럽을 첨가한 달달한 음료로 이 지역 커피숍에서는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저녁에는 이 지역의 로컬 맥주를 즐겨 보는 것도 좋다. 레벨스톡에서 잘 보이는 커다란 설산, 마운틴 벡비Mt. Begbie의 이름을 딴 맥주는 100% 천연원료로 만드는 이 지역의 맥주이다. 빙하에서 녹아 내려온 물을 사용해선지 그 맛 또한 일품이다. 산악 마을에서의 식사 메뉴로는 엘크 혹은 바이슨 스테이크를 추천한다. 로컬 와인과 함께 생전 처음 먹어 보았던 스테이크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레벨스톡 박물관315 First Street West, Revelstoke, BC V0E 2S0 월~금요일 10:00~17:00, 토 11:00~17:00, 일 휴무일반 CAD5, 60세 이상 & 청소년 CAD4, 가족 CAD12(12세 이하 무료)+1 250 837 3067 www.revelstokemuseum.ca Woolsey Creek Bistro600 Second St West, Revelstoke, BC V0E매일 17:00 오픈바이슨 CAD27, 엘크스테이크 CAD29www.woolseycreekbistro.ca ▶Theme Park놀라움이 가득한 유령마을 쓰리밸리 고스트 샤토Three Valley Ghost Chateau 유령마을. 이름만 들어도 오싹해진다. 챙 넓은 카우보이모자에 가죽점퍼를 입은 백발노인이 마을 입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더욱 무서울 것이다. ‘세 개의 계곡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이름이 붙여진 쓰리밸리 고스트 샤토는 사실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고 서 있는 3성급 호텔이다. 하지만 호텔보다 더욱 유명한 것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고스트타운이다. 1800년대 후반 이후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자 번성했던 광산타운들은 유령도시가 됐다. 지역의 유지이자 유명한 수집광이었던 고든 벨Gordon Bell은 사라지는 유산들이 안타까워 크고 작은 물건들을 하나씩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건물까지 수집하기에 이르렀다고. 각 지역에서 오래된 교회, 상점 건물들을 하나씩 옮겨 와 골드러시 당시의 마을을 복원하여 테마파크처럼 만들었다. 기찻길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역이기에 북미에서 가장 크다는 기관고와 6개의 열차도 수집했다. 20여 개의 올드카가 시대별로 차고를 가득 채우고 있고 각각의 건물 안에는 당시에 사용되던 숟가락부터 오래된 가구까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컬렉션이 가득하다. 혹시라도 이 소중한 공간에 화재가 일어날까 염려되어 아예 타운 내에 소방서까지 마련해 둔 이 수집가의 열정에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쓰리밸리 고스트 샤토 4월 중순~10월 중순 성인 CAD12, 청소년(12~17세) CAD7, 어린이(6~11세) CAD5, 가족 CAD30(5세 이하 무료) +1 250 837 2109 www.3valley.com 가이드였던 백발노인 셰인은 수집가의 오랜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그는 옛 기차역을 복제하여 만든 고스트타운의 입구 앞에서 나무로 만든 투박한 피리로 기차 경적 소리를 들려주었다. 달리지 않는 기차가 머무는 고스트타운의 경적 소리가 사방으로 겹겹이 둘러친 로키 산맥까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여유롭게 만나는 로키의 속살 마운트 레벨스톡 국립공원Mount Revelstoke National Park는 국립공원치고는 작은 규모에 속하지만 주변 산세와 컬럼비아강Columbia River을 따라 자리 잡은 레벨스톡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1914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니 그 역사도 벌써 100년이 넘었다. 잘 관리된 도로가 산 정상까지 놓여 있어 누구나 레벨스톡에서 차를 타고 쉽게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정상을 5분 정도 남겨 놓은 지점부터는 생태환경 보존을 위해 개인 자동차의 출입을 제한한다. 그 때문에 국립공원에서 운영하는 셔틀을 타고 올라가거나 20분 정도의 트레킹을 해야만 했다. 바늘같이 뾰족하게 솟은 침엽수들이 하늘을 향해 촘촘하게 뻗어 있는 사이로 짧은 산책을 했다. 아침의 공기가 갓 떠 놓은 약수처럼 아삭했다. 코로 한껏 들이마시니 겨울 냄새가 났다. 곧 하얗게 눈이 덮일 것만 같은 느낌. 해발 1,933m의 정상에 올라가니 산불을 관찰하기 위한 작은 관망대가 있다. 레벨스톡산 정상에서 보는 로키 산맥은 평평하고 넓으며 각 산맥의 봉우리들이 제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인다. 해발 2,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에는 천년만년 녹지 않는 빙하가 있다. 또 다른 국립공원인 글래시어 국립공원Glacier National Park의 새하얀 봉우리가 레벨스톡산 정상에서 바라다보인다. 빙하를 따라 시선을 조금만 내려 보면 나무가 잘 자라지 않아 고스란히 땅을 드러내고 있는 알파인 그리고 침엽수들이 대부분인 서브알파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쿠트니 로키 지역은 고산 초원지대Alpine Meadow가 많아 가파른 코스를 피해 여유롭게 트레킹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따뜻한 계절에는 초원 가득 피어나는 야생화가 아름다워 세계 각지의 하이커들과 사진가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마운트 레벨스톡 국립공원 국립공원은 1년 내내 개방하지만, 몇몇 구간과 안내시설은 눈이 많은 10월에서 5월 사이는 운영하지 않는다. 트레킹을 하고 싶다면 매일 업데이트되는 홈페이지의 트레일 컨디션 리포트Trail Condition Report를 확인하자. 어른 CAD7.8, 어린이 CAD3.9, 가족(최대 7인) CAD19.6 +1 877 737 3783 www.pc.gc.ca(‘Mount Revelstoke National Park’ 검색) ●Nelson넬슨 깊은 산 속 작은 샌프란시스코 “곧 미니사이즈의 골든게이트브릿지가 보일 거예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말 ‘금문교’가 나타났다. 호수가 좁아지는 길목을 연결하는 커다란 오렌지색 다리는 크기도, 색깔도, 모양도 샌프란시스코의 그것과 닮았다. ‘커다란 오렌지색 다리Big Orange Bridge’를 줄여 ‘밥B.O.B’이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넬슨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히피들의 성지라는 별명을 가진 넬슨은 쿠트니 로키에서 가장 젊고 예술적인 도시로 유명하다. 음악, 미술, 영화 등 예술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라면 찾고 싶어질 넬슨의 다운타운에는 크고 작은 아트숍, 캐나다의 현대 팝이나 포크음악을 즐길 수 있는 소규모 공연장, 중고 책이나 음악CD 등을 판매하는 오래된 서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넬슨을 가장 제대로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자전거 투어. 그냥 자전거보다는 오르막길을 쉽게 오를 수 있는 전기자전거를 탈 수 있다면 가장 좋다. 핸들의 버튼만 눌러도 앞으로 쌩 나가고 오르막길에서 힘을 쓰지 않아도 되니 타는 재미가 있다. 넬슨 자전거 투어의 백미는 호수를 따라가는 자전거 길이다. 넬슨의 랜드마크인 밥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고 푸른 잔디가 깔린 공원에서 공놀이를 하는 캐나다 가족도 만나 볼 수 있다. 여름에는 호수에서 카약 등 수상레포츠도 즐길 수 있다. 넬슨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베이커 스트리트Baker Street다. 예술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넬슨은 독특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모두 베이커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위치해 있다. 베이커 스트리트의 한 카페에서 발견한 빙고게임이 도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설명해 준다. 길 쪽으로 난 테라스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며 빙고판에 적힌 장면을 볼 때마다 체크해서 빙고를 만드는 게임이다. 빙고판에는 요가매트, 머리를 묶은 남자, 깃털귀걸이, 음악페스티벌 입장권 팔찌 등 지극히 히피스러운 장면들이 담겨 있다. 쿠트니 로키에 살고 있다는 가이드 앤디에게 이 빙고판을 보여 주자 넬슨의 이미지가 그대로 담겨 있다며 웃는다. 넬슨은 넬슨만의 매력이 있다.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도 존중받을 수 있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매력. ▶Hotel유령과 함께하는 파티의 밤 흄 호텔Hume Hotel 넬슨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으스스한 매력이다. 지하묘지가 있다는 소문부터 시작한 무서운 이야기는 오렌지색 다리를 건너자마자 위치하고 있는 오래된 흄 호텔로 이어진다. 무려 1898년에 만들어져 100년이 넘은 호텔은 오랜 시간만큼이나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물론 보수와 개조를 거쳐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는 않지만, 벽돌로 만들어진 벽난로와 오래된 엘리베이터, 미로처럼 뻗어 있는 비밀통로들이 세월을 드러낸다. 이러한 호텔의 매력을 강조하기 위해 흄 호텔에서는 가끔 손님들을 위해 호텔 곳곳에 숨겨진 비밀의 방들을 둘러보는 유령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호숫가를 따라 운행되는 오래된 트램은 1년에 한 번 핼러윈 때가 되면 유령 트램으로 변신한다. 넬슨에서 활동하는 ‘초자연적현상연구회’는 핼러윈마다 넬슨 시내를 돌아다니며 각 명소에 얽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 투어를 진행한다. 흄 호텔 422 Vernon Street, Nelson, BC V1L 4E5 +1 250 352 5331 www.humehotel.com ●Heli-skiing & Cat-skiing차원이 다른 겨울스포츠의 천국 쿠트니 로키의 겨울스포츠는 차원이 다르다. 잘 다져진 스키 슬로프와 곤돌라가 아닌, 아무도 없이 고요한 설원 한가운데, 자연이 만들어 놓은 슬로프를 따라 스키를 타고 내려올 수 있다. 쿠트니 로키는 캐나다에서도 헬리스키Heli-skiing와 캣스키Cat-skiing의 천국이라고 불린다. 슬로프 없는 곳에서 내려오는 백 컨트리 스키가 더욱 일상적인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하얀 설산, 헬리스키 헬리콥터를 타고 설산을 올라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헬리스키는 모든 스키어의 로망이다. 처음 헬리스키에 대해 상상했을 적엔 마치 익스트림 스포츠 영상에서 본 것처럼 헬리콥터에서 직접 뛰어내려야 하나 하고 걱정을 했지만 그건 오해였다. 아직 스키 시즌이 아니라 헬기투어만 하고 돌아왔지만,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로키 산맥 사이를 날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실제 헬리스키를 하게 되면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헬리콥터가 착륙할 때 날리는 눈보라의 장관도 멋지지만 헬리콥터에서 내린 후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음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다가 헬리콥터가 사라지면서 찾아오는 설산의 고요함을 만나게 된단다. 쿠트니 로키에는 초보자부터 전문가까지 다양한 난이도의 헬리스키 코스가 있다. 망설여지는 이유가 가격이라면 그룹의 크기별로 다양한 헬리콥터가 있어서 비용부담도 줄일 수 있단다. 신개념 스키여행, 캣스키 캣스키는 요즘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스포츠로 캣Cat이라고 불리는 설원용 전동차를 타고 산을 올라 백 컨트리 스키를 즐기는 것이다. 최대 14명 정도의 스키어가 탈 수 있는 이 전동차 내부에는 따뜻한 커피와 간단한 음식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캣스키의 장점은 한 번 나가서 여러 코스를 돌고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한 번 출동하면 코스 길이에 따라 다르지만 3~4회 정도 스키를 타고 내려올 수 있다. 캣스키의 가장 큰 장점은 헬리스키처럼 자연의 설산 위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올 수 있지만 가격이 훨씬 저렴하다는 것. 더 많은 인원이 함께 이동할 수 있기에 금액을 나눠서 부담하기도 좋다. 다른 코스로 이동하는 시간에 차 안에서 따뜻한 음료도 즐길 수 있으니 더욱 좋다. ▶Tip쿠트니 로키에서 스키 즐기기 뭉치면 더 즐거운 스키 타기쿠트니 로키에는 스키 리조트가 많고 각각의 거리도 가까운 편이다. 차를 렌트한다면 이동이 어렵지 않으니 일정 내내 하나의 리조트에 있기보다는 여러 개의 리조트를 돌아다니면서 다른 슬로프를 경험해 보는 것이 좋다. 헬리스키나 캣스키를 탈 때는 실력이 비슷한 사람들과 그룹을 만드는 것이 좋다. 실력이 비슷해야지만 그에 알맞은 코스를 선택할 수 있고 모두 함께 스키를 즐길 수 있다. 가이드가 없이는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이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스키를 떠나기 전 가이드와 원하는 일정과 코스를 충분히 상의하자.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노천온천 쿠트니 로키는 겨울스포츠만큼이나 노천온천도 유명하다. 낮에는 설원에서 겨울을 만끽하고 밤에는 따뜻한 온천에서 몸을 녹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스키 리조트 근처에는 온천 리조트가 있으므로 둘 중 한 곳에 묵으면서 오고가면 된다. 스키를 타지 않아도 괜찮아, 헬리투어 꼭 스키를 타야지만 헬리콥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봉우리 가까이로 다가가 빙하를 구경할 수 있는 헬리투어는 쿠트니 로키의 아름다운 광경을 하늘 위에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겹겹이 둘러싼 산맥 사이로 빙하가 녹아 만들어낸 맑은 호수와 작은 마을들은 마치 장난감 세상을 둘러보는 듯 아기자기하고 아름답다. 파일럿이 전해 주는 산 봉우리에 얽힌 전설이나 마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30~40분 정도 비행할 수 있다. ▶travel info AIRLINE쿠트니 로키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알버타주, 그리고 미국과 경계가 맞닿아 있다. 밴쿠버 혹은 캘거리에서 켈로나 혹은 크랜브룩으로 국내선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넬슨을 방문하고 싶다면 밴쿠버에서 캐슬가로 가는 방법이 제일 가깝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에어캐나다가 인천-밴쿠버 직항편을 운행 중이다. TRANSPORTATION캐나다횡단고속도로Trans-Canada Highway 1번이 캐네디언 퍼시픽 레일웨이CPR: Canadian Pacific Railway를 따라 쿠트니 로키를 지나간다. CPR은 화물열차로만 운영되고 있어 차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며, 적설량이 많을 때를 제외하면 도로 사정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카페리를 타고 호수를 건너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캐나다 사람들도 많이 이용하는 루트라 이용이 쉽고 가격도 무료다. CAFE오소 네그로Oso Negro커피 로스터이자 카페인 오소 네그로는 이 커피맛을 찾아 쿠트니 로키 곳곳에서 원두를 사러 찾아올 정도로 유명하다. 독특한 구조의 정원과 건물 장식으로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단델리온 라떼는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음료로 민들레 가루를 넣은 라떼다. 604 Ward Street, Nelson, BC osonegrocoffee.com/cafe 에스프레소 CAD2, 민들레라떼 CAD2.75 HELI-TOURS하이 테라인 헬리콥터High Terrain Helicopters넬슨의 외곽에 비행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코카니 빙하Kokanee Glacier와 발할라 마운틴Valhalla Montain 투어를 할 수 있다. 4인승 작은 헬리콥터부터 10인승의 헬리콥터까지 여러 대를 구비하고 있으며 벌써 25년째 운영 중인 베테랑이다. 3인부터 탑승이 가능하며 가격은 30분 투어에 1인당 CAD199부터다. www.htheli.com SKI RESORT레벨스톡 마운틴 리조트Revelstoke Mountain Resort레벨스톡 시내와 가깝고, 가장 최근에 생긴 편이라 신식 시설을 갖춘 스키 리조트다. 52면의 스키 슬로프가 존재하고 가장 긴 슬로프는 15.6km에 달한다. 해발 1,713m까지 리프트로 올라갈 수 있는 데다 산을 둘러싸고 내려오는 완만한 슬로프가 있어 초보자도 산 정상에서부터 내려오는 스키를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레벨스톡에서는 거의 2,000km2에 달하는 대지에서 헬리스키나 캣스키를 즐길 수 있다. 2950 Camozzi Rd, Revelstoke, BC +1 250 814 0087 www.revelstokemountainresort.com HOT SPRING할씨온 핫스프링 Halcyon Hot Springs로키 산맥과 호수를 비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노천온천은 굉장히 로맨틱하다. 온수 자쿠지가 두 개, 냉수 자쿠지가 하나 있으며 커다란 수영장도 갖추고 있다.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온천을 즐길 수 있으며 탈의실과 샤워실도 크고 넓다. BC-23, Nakusp, BC +1 250 265 3554 www.halcyon-hotsprings.com 아인스워스 핫스프링Ainsworth Hot Springs산 중턱에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아인스워스 리조트의 온천은 동굴이 있어 독특하다. 말발굽 모양으로 생긴 동굴 속에 온천을 만들었기에 스팀이 빠져나가지 않아 더욱 따뜻하게 온천을 즐길 수 있다. 1회 입장권 혹은 하루 이용권을 구입할 수 있다. 3609 Highway 31. Ainsworth Hot Springs, BC +1 250 229 4212 www.hotnaturally.com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윤지민 취재협조 캐나다관광청 keepexploring.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올 ‘가을산불’ 10년 평균의 4배… 가뭄 극심 중부 화재 무방비

    올 ‘가을산불’ 10년 평균의 4배… 가뭄 극심 중부 화재 무방비

    100년 만의 가뭄으로 중부지역 산과 들에 대형 산불 발생 경고등이 켜졌다. 낙엽이 쌓이는 가을부터 내년 봄까지 건조한 날씨 탓에 ‘바스락’거리는 숲은 화약고로 변했다. 슈퍼 엘니뇨 현상으로 2020년까지 가뭄은 더 심해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올해 9~10월의 산불 빈도는 최근 10년 월평균보다 4.1배 높아졌다. 서울과 강릉, 경북, 충청도 등 가뭄이 극심한 지역을 중심으로 산불이 잇따랐다. 무엇보다 극심한 기후 변화로 낙뢰에 의한 자연발생 산불이 2012년 한 해 22건이나 발생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자연 발생적인 대형 산불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지자체는 10월부터 조기 산불 경계에 나서고 있다. “낙엽을 밟으면 바스락거리며 모두 부서진다. 이렇게 메마른 숲 속에 불씨라도 옮겨 붙으면 큰 산불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경기도 포천 영북면 산정리에서 야영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홍수(60)씨는 산속에 마련한 보금자리를 산불로 잃지나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어느 해보다 심각한 가뭄 속에 행락객이 많은 단풍철까지 겹치며 바짝 마른 산이 언제든 산불 화약고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 4월 대형산불로 피해를 본 강원도 강릉 등 영동지역 주민들도 산악 지형과 높새바람 영향으로 해마다 봄철 동안 산불을 걱정했는데 이제는 ‘산불 비수기’인 9~10월에도 산불을 걱정한다. 산불 피해를 보았던 사천면 최종민(53)씨는 26일 “바짝 마른 산에서 언제 또 큰불이 날지 몰라 요즘에는 바람 소리만 들려도 불안해 잠을 이룰 수 없다”면서 “버섯을 캐고 도토리를 주우려는 사람들이 아예 산에 들어가지 않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강원지역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단 1건에 불과하던 9, 10월 가을 산불이 올 들어 11건이나 발생했다. 동부지방산림청 김정황 보호팀장은 “최근 강릉 삼산마을에서 발생한 0.8㏊ 산불은 불씨가 땅속까지 파고들어 낙엽을 걷어 내고 고압 펌프까지 동원하며 진화에 3일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강원지역에는 올가을 대기 중 평균 습도가 9월에 72.5%, 10월 들어 68%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지난 30년 평균 9월 76.5%와 10월 70.5%에 크게 못 미쳐 가을 산불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국내 주요 대형 산불은 1996년 강원 고성산불로 3일 동안 진화했고, 3762㏊의 산림이 훼손돼 당시 피해액이 230억원이었다. 2000년 강원 동해안 산불은 9일 만에 진화했고 2만 3794㏊ 소실돼 피해액이 360억원이었다. 강원 양양 산불은 2005년에 발생해 3일 동안 재산 피해가 213억원이었다. 경북에서도 예년에 없던 여름, 가을 산불이 잇따라 산불 비수기인 지난 5월 15일 이후 최근까지 모두 38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9.57㏊의 임야를 태웠다. 지난해 같은 기간 17건(피해면적 3.03㏊)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다. 피해 면적은 3배나 늘어났다. 마른장마를 겪으며 6월에만 13건이 발생했고, 10월에는 10건이나 발생했다. 지난 20일 발생한 산불로 순식간에 임야 0.2㏊가 불에 탄 경북 봉화군 문촌마을 금용락(60) 이장은 “마을 주민이 쓰레기를 태우다 삽시간에 산불로 번졌다”면서 “헬기 투입 등 신속한 초동 대처가 없었다면 아마도 대형 산불로 번졌을 것이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충북에서는 지난해 11건에 그쳤던 산불 건수가 10월 26일 현재 28건을 기록하고 있다. 25건이 봄 가뭄 때 발생했다. 피해 면적도 지난해의 6배에 가까운 6.63㏊에 달한다. 괴산진화대 양석근(63) 조장은 “너무 건조해서 불씨만 있으면 산불이 날 것 같다”며 “특히 요즘은 농가에서 고춧대를 태우는 시기라서 산과 가까운 곳에 고추밭이 있는 지역을 집중 순찰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수리나무 등 활엽수가 많은 충남 서산시 대곡리 가야산 자락은 메마른 낙엽 더미가 발목 높이까지 차올라 주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1992년부터 10년 동안 100건이 넘는 산불이 나면서 주민들이 ‘도깨비불’이라 부르며 치를 떨던 산불의 발화지역이기 때문이다. 마을 이장 김근복(64)씨는 “무서운 산불이 한두 해 잠잠해 마음 놓고 있었는데 올 들어 가을 가뭄이 이어지면서 그때 악몽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당시 서산시는 해마다 산불이 끊이지 않자 방화범을 잡고자 3000만원 포상금을 걸었다. 주민들은 민심이 흉흉해지자 굿판까지 벌였다. 시는 산불감시 요원을 이달 1일부터 투입했지만, 등산로가 많은 가야산을 완벽 방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접한 산수리 주민 강현목(68)씨는 “도깨비불 방화범으로 몰릴까 봐 주민들은 요즘 아예 산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활용수 제한 급수까지 겪는 충청지역은 저수지 등이 말라붙어 산불 진화에도 어려움이 예상된다. 소방헬기가 진화할 때 물을 퍼갈 저수지는 가뭄으로 바닥이 드러나 쩍쩍 갈라진 탓이다. 충남 서산시 대곡리 산수리 주민들은 대부분이 70~80대 노인들로 불을 끌 수 있는 기력이 없다. 주민은 “큰 산불이라도 나면 어떻게 끌지 걱정이 태산이다”고 긴장했다. 산림청과 자치단체들이 진화대와 감시원을 조기에 구성·모집하는 등 긴장하고 있다. 봄 가뭄의 무서움을 실감했던 충북도는 가을 가뭄으로 산불 발생 가능성이 커지자 지난 12일 시·군별로 산불전문예방진화대를 구성, 운영에 들어갔다. 지난해보다 3주나 앞당겼다. 괴산군도 37명으로 진화대를 구성해 자체 순찰 활동에 나서고 있다. 산불 진화대 모집은 쉽지 않다. 충북 보은군 김남훈 산림담당은 “당초 산불 진화대 30명을 모집할 계획이었지만 대부분 노인인데다 가을 수확기라 모집이 안 된다”면서 “3차 모집까지 19명밖에 못 뽑았다”고 했다. 원명수 국립산림과학원 연구관은 “가뭄이 지속되면 2000년 전후로 동해안에 발생했던 대형 산불이나 미국 LA지역 대형 산불이 우려된다”면서 “우리나라 동해안 산악 지형과 높새바람, 광범위한 침엽수림 지역 등이 미국 LA지역과 꼭 닮은꼴이다”고 말했다. 춘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포천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동정] 최문순 도지사, 최양희 미래부장관 ,백선기 칠곡군수, 박래학서울시의장, 정진엽 복지부장관, 김기찬 세계중기학회장

    [동정] 최문순 도지사, 최양희 미래부장관 ,백선기 칠곡군수, 박래학서울시의장, 정진엽 복지부장관, 김기찬 세계중기학회장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12일 오후 1시에 평창 알펜시아리조트에서 열리는 제6차 산불총회 개막식에 참석한다.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12일 오후 포스텍 학내 창업 인큐베이터인 지곡연구동 APGC-lab과 C5(융합동) 포항창조경제혁신센터를 찾아 산학협력 현장 둘러보고 입주 기업 관계자들을 격려한다. ●백선기 칠곡군수는 12일 호국평화기념관에서 열리는 개관전 사업설명회에 참석한다. ●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은 12일 오후 2시 국제의료사업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서울시 중구 제일의료재단 제일병원을 방문했다. 정 장관은 병원 내 국제진료소를 찾아 국제의료코디네이터들과 간담회를 열고 외국인환자 유치사업 활성화와 양질의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애로사항과 개선의견을 듣는다. ●김기찬(가톨릭대 경영학 교수) 세계중소기업학회(ICSB) 회장은 7∼9일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제 20회 남미 중소기업대회에서 ‘사람중심 기업가정신’(Humane Entrepreneurship)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고, ‘사람중심 기업가정신’을 핵심으로 하는 아르헨티나 선언을 발표했다. 김 회장은 또 아르헨티나 델 리토랄 국립대학과 국립과학기술대학에서 ‘한국식 경영과 한국의 기업가정신’에 관해 특강했다. ●박래학 서울시의회 의장이 몽골에서 사막화와 황사를 방지하기 위한 숲 조성 활동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몽골 울란바토르시 최고훈장을 받았다고 서울시의회가 12일 밝혔다. 몽골 울란바토르시의회 초청으로 시의회 대표단과 함께 몽골을 방문 중인 박 의장은 앞서 9일 몽골 자연환경녹색개발관광부의 엔 바트레첵 장관, 사단법인 푸른아시아 오기출 사무총장과 기후환경변화 대응을 위한 몽골 사막화 및 황사 방지사업 협약을 체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캘리포니아 산불...불꽃...석양..빨갛네...소방비행기마저 삼키려는 듯

    캘리포니아 산불...불꽃...석양..빨갛네...소방비행기마저 삼키려는 듯

    1일(현지시간) 일몰 무렵 미국 캘리포니아 클리어레이크(Clearlake) 근처에서 난 산불, 이른바 록키 파이어(Rockey Fire)를 진화하기 위해 소방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다. 석양과 산불 속에 붉은 빛만 도는 저녁 소방 비행기가 하염없이 초라해보일 정도다. 지난 29일 발생한 불을 끄기 위해 소방관 1900명이 동원됐지만 2만 2000에이커를 태웠다. 주택 14채도 삼켜버렸다. ⓒ AFPBBNews=News1/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자산불평등이 소득불평등보다 훨씬 심각”

    우리나라의 자산 불평등이 소득 불평등보다 심각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8일 발간한 ‘우리나라 가계 소득 및 자산 분포의 특징’ 보고서에 따르면 가계의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0.4259다. 순자산 지니계수는 0.6014로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보다 높다. 지니계수는 소득이 어느 정도 균등하게 분배되는가를 나타내는 지수다. 0에서 1까지의 숫자로 나타내며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지난 2월 발표된 통계청과 한국은행 등의 ‘2014 가계금융·복지조사 자료’를 이용해 우리나라 가계의 소득과 자산 분포 특징을 분석했다. 그 결과 가처분소득은 상위 10%가 전체 가처분소득의 29.1%를, 하위 40%가 13.4%를 갖고 있었다. 반면 순자산은 상위 10%가 43.7%를 갖고 있고 하위 40%는 5.9%를 보유하는 데 그쳤다. 어떤 연령대가 순자산 불평등에 많이 기여하는지를 살펴본 결과 45∼54세의 상대적 기여율이 높았고 다음으로 55∼64세였다. 은퇴 전후에 자산 불평등이 가장 많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남상호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경제적 불평등은 소득 변수만을 활용해 불평등을 분석했지만, 소득과 달리 자산은 소득에서 소비를 뺀 금액이 계속 쌓이는 것이라 누적된 불평등을 살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 위원은 “은퇴 전후 불평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해 불평등을 분석할 때 생애주기적 속성도 반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눈 들면 별천지 숙이면 꽃 천지

    눈 들면 별천지 숙이면 꽃 천지

    뜨겁고 끈적대는 여름. 도시마다 불쾌지수가 지배하는 때다. 하지만 강원 태백에서라면 사정이 다르다. 평균 고도 800m에 이르는 고원도시엔 시원한 여름이 머문다. 만항재 고갯마루에 서면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고, 함백산 비탈에서 바람을 맞으면 과장 좀 보태 살갗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자연이 선사한 에어컨이다. 게다가 입이 삐뚤어질까 봐 모기도 얼씬대지 못한단다. 무엇보다 좋은 건 수수한 들꽃과 마주할 수 있다는 것. 수십종의 야생화들이 산비탈을 따라 별처럼 피어 있다. 탐화와 피서를 동시에 즐기는 태백 여정, 돌팔매질 한 번에 새 두 마리 잡는 격이다. 서울의 밤 기온이 28도 언저리까지 치솟았던 지난 10일. ‘잠 못 드는 밤’이 단연 화제였다. 그날 밤 태백 시내의 기온은 22.7였다.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연못 주변의 온도계에 표시된 수치였다. 서울과 무려 5도 이상 차이가 났다. 게다가 습도는 낮았고 바람도 적당히 살랑댔다. 살갗이 느끼는 체감온도 또한 최소한 1~2도가량 더 낮았을 터다. 태백시 관계자는 온도계를 가리키며 “해마다 함백산 자락에서 열리는 ‘태백 쿨 시네마 페스티벌’ 축제장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은 반드시 담요를 가져 온다”고 했다. 긴팔 옷까지 준비한다고도 했다. 그 말이 과장만은 아닌 듯하다. 이런 상황은 낮에도 비슷했다. 이튿날 서울 등 수도권이 33도까지 치솟았던 바로 그 시간에 만항재 초입의 온도계는 28도, 삼수령은 26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낮엔 물론 덥다. 하지만 나무 그늘을 찾아들면 더위는 금세 사라진다. ●해발 1330m 만항재에 핀 둥근 이질풀·노루오줌·범꼬리… 들꽃 향연 태백에서 시원한 여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은 대개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들이다. 찾아가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고갯마루까지 차가 올라가거나, 한 시간 안팎의 발걸음으로 마주할 수 있는 곳들이다. 이보다 더 좋은 건 수수한 들꽃들과 만날 수 있다는 거다. 대개 봄꽃 명소로 알려진 곳들이니 전성기는 지났다고 봐야 옳겠지만, 그렇다고 여름꽃이 숫자가 적거나 박색이라는 뜻은 아니다. 봄꽃과 차이가 있을 뿐 보고 또 봐도 예쁘다. 먼저 찾아갈 곳은 만항재다. 태백과 정선, 영월이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고개다. 우리나라 고갯길에 놓인 도로 가운데 가장 높다. 해발 1330m를 지난다. 지리산 정령치(1172m)나 평창 쪽 운두령(1089m)보다도 높다. 만항재에 오르면 서늘한 바람이 몸을 감싼다. 냉기가 다소 부족할망정 시원하기로는 에어컨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듯하다. 만항재는 해안기후와 고산기후가 병존하는 곳이다. 다양한 종류의 야생화가 피고, 남방계와 북방계 꽃들의 경계가 이곳에서 그어진다. 누가 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이쪽저쪽 산비탈마다 들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둥근 이질풀과 노루오줌, 범꼬리, 산솜방망이 등이 흐드러졌고, 동자꽃과 술패랭이꽃, 잔대, 기린초 등도 화사한 제 몸빛을 자랑하고 있다. 마타리는 새끼손톱만 한 꽃술을 열었고 일월비비추는 곧 터질 폭죽처럼 꽃술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 7월 하순께면 산자락이 온통 일월비비추꽃으로 가득 찰 게다. 오는 26일부터 8월 3일까지 이 일대에서 ‘함백산 야생화축제’도 열린다. 함백산 등산길에도 들꽃들은 활짝 피었다. 만항재에서 정암사 방향으로 내려가다 주차장 옆으로 나있는 등산로가 들머리다. 경사가 완만해 별 어려움은 없다. 등산로 왼쪽은 정선, 오른쪽은 태백 땅이다. 식생은 만항재와 비슷한데, 보기 드문 꽃들이 좀 더 많이 분포돼 있는 듯하다. ‘산신령의 비아그라’ 산짚신나물, 산제비난 등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김상구 태백시청 문화관광해설사는 “희귀 식물은 보는 사람마다 캐 가려 해서 문제”라며 “함부로 식생을 훼손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두문동재에서 분주령(1080m)과 금대봉(1418m), 대덕산(1307m)을 거쳐 한강발원지인 검룡소로 이어지는 능선은 우리나라 최고의 야생화 군락지 가운데 하나다. 특히 대덕산은 시기를 달리하며 능선을 뒤덮는 들꽃들이 인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산비탈을 따라 꼼꼼히 살피며 가다 보면 진귀한 꽃들과 마주할 수 있다. 대덕산 야생화 트레킹은 두문동재에서 시작해 금대봉, 분주령, 대덕산을 거쳐 검룡소로 내려오는 코스(4시간 30분)와 반대로 검룡소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 두문동재로 나오는 코스, 검룡소에서 쑤아밭령~금대봉~분주령~대덕산을 거쳐 검룡소로 다시 내려오는 원점회귀코스(6시간)가 있다. 검룡소에서 출발해 대덕산에 올랐다가 분주령를 거쳐 검룡소로 내려오는 짧은 코스(3시간)도 좋다. ●백두대간 노랗게 물들인 100만 송이 해바라기… 구와우 마을 8월쯤 태백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구와우 마을을 돌아보는 게 좋겠다. 7월 말부터 피기 시작하는 100만 송이 해바라기가 백두대간 구와우 언덕을 샛노랗게 물들인다. 태백고원자연휴양림은 한여름에도 아침저녁으로 난방을 한다는 곳. 잠자리에선 이불 끌어당기기 바쁠 정도라고 한다. 수백만 포기의 고랭지 배추들이 자라는 매봉산 풍력발전단지와 귀네미마을도 여름철 특급 여행 코스다. 방학 맞은 자녀와 함께라면 태백 365세이프 타운을 다녀올 만하다. 안전을 테마로 한 ‘안전체험 테마파크’다.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재난 대처 요령을 재밌게 배울 수 있도록 설계됐다. 체험시설은 3개 지구로 나뉜다. 5개 체험관(산불·설해·풍수해·지진·대테러), 대습격 곤충관, 곤돌라승강장 등으로 구성된 장성지구와 한국청소년안전체험관, 트리트랙, 짚라인, 조각공원, 별자리전망대 등이 들어선 중앙지구가 주축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교육 프로그램이 대폭 강화된 곳은 철암지구다. 종합훈련탑, 종합훈련관, 소화피난실, 주택화재진화훈련장, 항공기화재진압훈련, 수난구조훈련장 등으로 이뤄진 강원도소방학교에서 심폐소생술 등 다양한 긴급 상황 대처 요령 등을 교육하고 있다. ‘청소년 재난안전체험 캠프’도 연다. 오는 26~27일, 8월 2~3일 두 차례에 걸쳐 1박 2일씩 운영된다. 참가대상은 청소년 및 가족으로 1회당 100명씩 모집한다. 캠프는 재난체험, 응급처치법, 트리트랙 등 체험 위주로 운영된다. 참가 신청서는 세이프타운 이메일(blackmoon08@taebaek.net)로 제출하면 된다. 참가비는 1인당 3만원이다. 별도의 캠핑 비용은 없고, 텐트와 코펠, 식재료, 개인물품 등은 각자 준비해야 한다. 글 사진 태백·정선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 제천 나들목에서 38번국도를 타고 곧장 가면 태백이다. 만항재를 먼저 보겠다면 고한을 지나 정암사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산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된다. 대덕산 야생화 트레킹 코스는 최소 4일 전에 생태탐방 신청을 해야 한다. 태백시청 관광홈페이지(tour.taebaek.go.kr)에서 받고 있다. 태백 시내에서 사용한 7000원 이상 카드 영수증이 있으면 당일 입장도 가능하다고 한다. 550-2061. 야외영화제 ‘태백 쿨 시네마 페스티벌’은 오는 26일부터 8월 3일까지 오투리조트 스키하우스 앞 인조잔디구장과 태백시내 중앙로에서 열린다. 역린, 변호인, 넛잡 등 총 9편의 국내외 영화가 상영된다. 태백 365세이프 타운은 태백 남서쪽에 있다. 구문소, 철암역두 등 인근에 볼거리도 많다. 550-3101~5. →맛집 강산막국수는 막국수와 수육으로 이름난 집. 상장동에 있다. 552-6680. 해조림은 생선찜, 두부찜 등을 잘한다. 553-7791. →잘 곳 황지연못 주변에 모텔들이 몰려있다. 꿈모텔은 최근 리모델링을 마쳐 깨끗하다. 552-2111. 패스텔도 깔끔한 편. 553-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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