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악인 박병천(이세기의 인물탐구:140)
◎신의 소리·동작 전수하는 ‘굿판의 사자’/신들린듯한 소리·춤사위 ‘세습무의 증언자’/무형문화재 72호 ‘진도씻김굿’ 기능보유자
진도씻김굿의 전과정을 보기 위해서는 이틀에서 사흘이 걸린다.그러나 70년대 이후 진도씻김굿의 인간문화재 박병천은 망자를 불러들이는 초가망석,복덕을 비는 제석,매듭을 푸는 고풀이와 이슬털기,길닦음으로 1시간짜리 굿을 짜서 무대에 올리고 있다.
잔잔한 파도같이 밀려오는 삼현육각중에서도 대금과 쌍피리의 구성진 죽관음이 한맺힌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 흰 광목천으로 길을 닦아 혼을 승천시킨다.이때 주무는 흰 도포에 갓,단정하게 앉아 북가락과 구음으로 굿을 이끌되 신바람나게 뛰거나 번거롭게 휘도는 것이 아니라 시종 숙연하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한맺힌 망서 넋 위로
‘누웠던 환자가 벌떡 일어난다’는 박병천의 소리와 장단은 북춤에서 굿거리 한량춤과 지전춤 살풀이춤으로 한판을 펼쳐도 그 기량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특히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쌍가락으로 치는 북춤은 양어깨를 활짝펴고 솔개가 날아가다 동작없이 머문듯한 춤사위며 천길 낭떨어지에 내려꽂히는 물줄기처럼 시원하게 휘돌고 몰아치는 전과정이 가히 ‘달인의 경지’로 호평된다.
그는 ‘춤은 바로 장단의 기화’라고 말한다.‘춤은 우리 가락에 내몸을 놓는것’이며 ‘내몸에다 장단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락에 맞춰 내몸을 맞추는 것’이라고 했다.‘이김발(이긴발)까치발(새발)자진발디딤발’로 장단에 몸을 놓는 지무네(지무)를 추되 춤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전체속을 깊이 알고 추는 ‘무검질 속’춤이 제격이다.
그가 짠 씻김굿 무악은 2분박 보통 빠르기의 흘림을 기본으로 하면서 진양에서 굿거리 중모리 덩덕궁이 자진모리로 이어지는 삼장겹장단은 흥과 화사가 넘치고 너름새가 화려하여 다른 지방에서는 볼수 없는 장단이다.소리 역시 툭 트여서 현대창작무대의 잦은 초대와 요청이 들어오고 국립무용단에서는 그의 장단과 소리와 북춤을 무용극에 삽입하고 있다.
그가 이런 장단과 연희에 달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굿속에서 굿을 보면서 자라난세습무가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진도 신청의 당장이던 박범준과 당대 제일의 무당으로 알려진 김소심의 장남.그의 조상이 진도에 온 것은 9대조부터이며 그의 종조부인 박종기씨는 대금산조의 창시자이고 당숙인 만준씨는 피리의 명인,고모인 박선래씨도 무업을 이어받고 있다.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무동을 서기 시작했고 목포상업중과 목포 상선전문학교시절에는 연극부 밴드부에서 타고난 끼를 다방면으로 발휘했다.굿에 종사하던 사람을 천시하던 시절이라 한때는 미곡상도 해보고 포구에서 객주노릇을 하기도 했으나 무슨 일을 해도 되는 것이 없어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이다.
70년대에 접어들자 그는 집안에서 배운 진도만의 ‘남도 들노래’‘강강수월래’‘거문도 뱃노래’와 ‘진도다시래기’를 가지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 국무총리상 대통령상을 휩쓸었고 이보형 임학재씨에게 발굴되어 77년 서울 YMCA강당에서 첫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을 무대에 서 본적이 없는 무당과 악사들을 모아 연습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데다 막상 막을올리기 직전에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창피해한다는 이유로 공연을 취소하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세습무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그는 무대에 오르면 평소의 근엄하던 자태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희색만면에다 목소리에 마저 신기가 실려 징으로 녹여내고 목으로 풀어내는 ‘비나리’는 씻김굿 명인들 중에서도 독보적 명기로 구분된다.
‘나오소사 나오소사 씻김받자고 나오소사.잔옷벗고 마른 옷입고 상탕에 목욕하고 중탕에 메를 짓고,쑥물 향물 청계수로 목욕재계하신후에 …’
○어려서부터 굿속서 자라
엇중모리에 얹는 이 비나리는 굿에서 씻길 망자를 맞아들이는 초가망석(초혼) 첫머리 사설로서 애절한 허튼제와 일정한 장단이 없는 무장단이 특징이다.또 언제 손이 나가는지 2박자 하나라도 네개 여섯개 열두개로 끊어내고 둥둥 떠있는 혼을 능란하게 어우르는 품은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에 의하면 ‘남이 넘볼수 없는 경이의 수준’이다.
징을 칠때는 씻김굿에서만 만 9시간을 끌기도 하고 살풀이 장단하나만도 80여개로 쪼개치는 귀신같은 솜씨는 그의 손 마디마디에 박혀있는 굳은 살과 가죽처럼 두꺼운 손바닥에서 그만의 연륜을 되짚을수 있을 뿐이다.굿판을 시작하며 막을 올릴때는 ‘선부리장단’을 쓰고 중중모리로 넘어가야할 경우에도 중모리장단의 절반 다음박에서 중중모리장단을 ‘산 도리돈돈 닷 돈…’으로 절묘하게 끌어낸다.실제로 그가 굿을 진행하는 전과정에서 북가락에 구음을 넣는 그 소리는 어느때는 구슬프고 어느때는 화창하여 때묻지 않은 싱싱한 구음에 녹아들고 젖어든다.
송파구 석촌초등학교옆 살림방이 딸린 박병천문화재전수소는 에어컨 하나없는 선풍기 바람속에서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그는 온신명을 쏟아낸다.단 한사람이라도 완벽하게 가르치고 길러내자 하는 일념에서다.무무를 담당하는 부인 정숙자씨(58)와의 사이에 3남 4녀가 있지만 장남(환영)만이 국립국악원 대금주자로서 국악과 관련이 있을뿐 막상 진도씻김굿을 잇는 자녀는 없다.
우리민족음악회의 노동은씨(음악평론가)는 ‘우리가 박병천을 주목하는 것은 인간문화재나 대금산조의 창시자의 집안이라는 사실때문이 아니라’ ‘인간사 음악으로 장구한 역사의 지평을 이룬 신청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그 시대 신들의 언어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전달하는 음악사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시대의 음악사자”
그의 연희는 모든 민속예술자료의 사전에다 각종 민속연희에 가닿지 않는 부분이 없을만큼 무한한 기량을 갖추고 있다.그러나 그의 대에서 어쩌면 세습무가 끊긴다는 사실은 그를 아끼는 주변에 안타까움을 던져준다.그러나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세습무의 증언자로서 일생을 가무에 젖어 살아온 그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입신 대광에서 왕생극락을 현대에 실천한 초월의 예인이 아닐수 없다.
□연보
▲1932년 전남 진도 출생
▲1952년 목포상선전문학교 졸업
▲1960년부터 무무악 섭렵
▲1971∼7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남도 들노래’(국무총리상수상 ‘강강수월래’(대통령상)‘거문도 뱃노래’(국무총리상)‘진도만가’(문공부장관상)
▲1977년 진도다시래기 발표
▲1978년부터 서울YMCA강당,국립극장,공간사랑 ‘씻김굿’ 공연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기능보유자
▲1981년 ‘박병천문화재전수소’개설
▲1982년 국제민속예술제초청 유럽 6개국 순회공연,해마다 ‘명무전’ 참가
▲1984년 LA올림픽개막축제공연,니카라과 민속음악제 금상
▲1985년 베를린 국제민속음악제 국가대표 유럽7개국순회공연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참가
▲1990년 LA 세계민속페스티벌 참가
▲1994년 아시아 소사이어티 초청공연 ‘코리아 페스티벌’ 및 미국순회
▲1997년 ‘명인명창 한마당’(호암아트홀),‘진도 바닷길’ 축제공연
▷현재◁
사단법인 민속놀이진흥회 이사장,재단법인 문화재보호재단(한국의 집)전문위원 및 공연단 총감독,중앙대예술대학원 및 국립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