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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전야(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1)

    ◎비전투요원 472명 남고 미군 전원철수/6월17일 내한 덜레스 국무 “38선 이상무” 우리 민족이 가장 불행하게 맞은 20세기가 꼭 절반이 저문 19 50년 1월12일 워싱턴으로부터 달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한국은 미태평양방위선밖에 있다는 애치슨의 발언이었다.그토록 머물러 주길 희망했던 미군마저 철수한 위기상황 속에 날아든 애치슨의 발언은 한국민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미 방위선 바깥” 한국에 남아있던 당시 미군의 병력은 4백72명에 지나지 않았다.전투병력이 아닌 미군사고문단(KMAG)자격의 비전투 요원들이었다.미군은 성급하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0일뒤인 19 48년 9월15일부터 한국을 빠져나갔다.미안전보장회의가 대통령 H S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부터 미군들이 극비에 철수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그리고 48년 12월말까지 완전 철수할 계획이었으나,중대한 모험이라는 여론에 따라 몇개월 연장되었다.미군은 결국 1949년 6월29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철수를 끝냈던 것이다. 미국은처음부터 남한에 병력과 기지를 유지하는데 전략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이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판단이었는데,극동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 주둔 미군은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다.미국의 입장에서는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지상작전보다 쉽고 돈이 덜드는 미 공군의 활동에 더 기대를 걸었다.또 심각한 병력 부족현상을 겪고있던 미국은 남한에 유지하고 있는 병력 2개사단 약 4만5천명의 병력을 다른 지역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49년 3월22일 미국가안전보장회의는 그 전해에 만든 「한반도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재검토하고 철군 건의안을 대통령 트루먼에게 제출했다.미군의 철수에 뒤따를지도 모를 공산주의 지배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동시에 한국정부를 실행 가능한 한도에서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였다.이는 한국에서 미국이 병력과 비용부담 의무를 줄일 수 있다는 국익과 맞물려 트루먼의 승인이 곧바로 떨어졌다. 어떻든 트루먼의 미 행정부는 철군 보상으로 한국에 미군 장비와 6개월분의 비축물자를 이양키로 했다.이와 더불어 미국 경제협조처(ECA)로 하여금 19 50년 회계연도에 1억9천2백만달러의 경제원조를 주는 방안이 고려되었다.그러나 중국 국민당 정부에 더 많은 원조를 주려는 하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결국 한국정부는 50년 2월15일 이전에 사용할 수 있는 6천만달러의 원조금을 겨우 받아냈다. 한국군의 군비는 실로 말이 아니었다.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미국인 친지 R T 올리버(당시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한국 육군의 탄약 비축량은 5일분에 불과했다.북한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면 5개월을 버틸 수 있다는 분량이라고 예측한 미국의 여론에 대해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불만을 품었다. 1949년 9월 한달 동안에 북한의 공격이 1천1백84회나 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육지와 연결된 통로가 없는 옹진반도에서는 한국군이 매일 공격을 받은만큼 사실상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은 명목상 한국군을 위한 것일 뿐 실제 임무는 한국군을 통제하는 일이었다.항공기는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에서 사용할 수있는 6대 이외는 허용하지 않았다.탱크나 장갑차 보유는 엄두도 못냈다.포병은 탱크를 격파하기에는 너무도 가벼운 바주카포와 화포에 국한시켰다. 그렇다고 영토보전을 위한 어떤 보장도,외부공격에 대한 지원약속도 없는 상태였다. ○탄약 비축량 5일분 불과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1월 한국이 미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렸다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이 전파를 탔던 것이다.정부수립 만 3년이 안되는 신생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놀라움이었다.한국은 참으로 고독했다.이승만 대통령이 19 49년부터 힘을 기울인 태평양 반공방위조약이 실현되었더라면 한국은 덜 외로웠을 것이다.자유중국·필리핀·인도·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이 참가하는 방향으로 구상한 이 조약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도 매듭을 짓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 정권의 1950년은 의기양양했다.김일성은 1월1일 신년사에서 강력한 민주기지의 축성과 신속한 국토완정을 외쳤다.여기 나오는 국토완정은 얼핏 애매모호한 용어로 들리지만,실로 가공스러운 의미를 함축했다.국토의완전한 정리,다시 말하면 무력통일을 선언했던 것이다.그러면서 인민군대·경비대·보안대는 능숙한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남한의 유격투쟁을 부추기는 내용의 발언을 덧붙인 김일성은 1949년에 이어 그해 3월에도 훈련된 빨치산 요원 1천50명을 남으로 보냈다. 김일성은 특히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발언에 고무되었다.북한은 한국과 대만을 미태평양방위선 밖에 둘 것이라는 애치슨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의 연설이 있기 그 이전에 이미 병력과 장비를 증강해놓은 상태였다.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만큼 전력을 증강한 것은 1949년 여름 이후였다.먼저 5만명에 이르는 중공군 출신 한인의용군을 중국으로부터 불러들였다.이로써 북한 정규군의 약 3분의 1이 실전경험을 갖추게 되었다.그리고 나서 1950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소련제 중화기와 T34형 탱크가 청진항으로 속속 입항했다. 미군의 철수와 소련에 의한 북한의 군사력 강화는 한반도에 대한 미·소의 정책차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는 북한군 능력의과소평가와 동아시아 전략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의 활동반경은 한반도 전역을 커버할 수 있다는 미국의 판단은 한국군 무장의 불필요성과 한국포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었다.이 시기에 미국은 직전의 적국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일본의 제한적 재무장을 심도있게 들고나왔다.국제정치는 그토록 냉혹한 것이었다. ○“5년 이내에 전쟁 없다” 한국의 위치는 계속 흔들렸다.1950년 5월5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T 코널리는 미국의 전략에서 볼때 한국은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아니라는 발언을 했다.그의 발언은 파문을 일으켰지만,국내에서는 제2대국회를 뽑는 5·30선거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코널리 발언에 앞서 5월4일 미 대통령 트루먼은 전쟁이 일어날 위험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그러나 한국의 판단은 사뭇 달라 5월12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북한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국기자들에게 밝혔다. 그리고 6월이 다가왔다.그 6월의 첫날 트루먼은 또 『5년 이내에 전쟁이 없다』는 말로 5월4일의 발언을 더 구체적으로 확신했다.이어 6월17일에는 신임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서울로 날아들었다.38선을 시찰한 덜레스는 국회연설에서 한국을 물심 양면으로 돕겠다는 말을 남기고 19일 서울을 떠났다. 세계전사를 통해 가장 지루하고 긴 대규모의 국지전으로 치러야 했던 며칠후의 한국전쟁을 예측하지 못한채 극동의 화약고를 멀리했던 것이다 ◎미 CIA 정보평가 보고서/미 “북한은 전면전 펼 능력 없다”/“중·소의 적극지원 전제돼야 가능/대남투쟁 선동·유격전에 그칠것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19 50년 북한이 전쟁 수행능력 어느 정도 지녔던 것으로 평가했다.그러나 전면 남침이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발굴한 미 CIA 정보평가보고서(NIE)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입증하는 문서는 CIA가 1950년 6월19일에 작성한 「NIE리포트­3」등으로 되어있다.이 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탱크와 야포 등의 장비를 갖추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했다.그 능력이란 단시일 내에 서울을 손아귀에 넣은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북한의 군사적 우위성에 근거하여 이같이 판단한 NIE문서는 소련과 중공이 적극 지원하면 한국에서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남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군사원조가 대폭 삭감되거나 낭비되지 않는다면 남한 전체의 공산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다만 이 문서의 한계성이 있다면 미구에 닥칠 전면전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그래서 북한정권이 남한을 겨냥한 목표를 단순한 선동선전및 침투·사보타지·파괴공작·유격투쟁 등으로 예견했다.또 북한은 전적으로 소련에 의지하여 정권을 지탱하고 있으나 정권을 위태롭게 할 내부의 위협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은 이밖에 1950년 북한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북조선노동당 문서도 NARA에서 입수했다.6·25가 일어난 19 50년 5∼6월까지의 사업계획을 명시한 이 문서는 군사적 측면을 가장 밀도있게 강조했다.10부만을 등사물로 간행,극비문서로 분류한 조선노동당 문건은 미군이 평양에서 가져온 노획문서.이 문서 역시 서울신문이 국내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 달러화비중 대폭 축소/엔·마르크화 보유 늘려/아주중앙은

    【홍콩 로이터 연합】 아시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미 달러화의 가치하락에 따라 국고에서 달러화의 비중을 줄이는 대신 엔화나 마르크화 등 다른 주요 화폐의 비중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콩 통화당국(HKMA)은 11일 홍콩달러화를 방어하기 위해 구성돼 있는 외환기금중 미 달러화의 구성비율을 감축했다고 밝혔다.사실상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고있는 HKMA의 한 대변인은 『금년 초부터 달러화 가치하락을 주시해왔으며 달러화 자산을 줄이고 엔화 및 마르크화 자산을 늘려왔다』고 말했다. 홍콩 외환기금 중 미달러화의 비중은 94년 말 현재 73%로 1년전의 74%에 비해 1%포인트가 떨어진 것으로 집계됐다.
  • 미국인 본사이사 선임/기아자

    기아자동차는 24일 미국 현지법인인 기아자동차 아메리카(KMA)의 그레그 워너 영업담당 부사장(51)을 본사 비상임 이사로 임명했다. 아시아계 자동차회사가 외국인을 본사 이사로 임명한 것은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는 일본 자동차회사의 관례에 견주어 볼 때 기아의 이번 인사가 「파격」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에는 혼다·마쓰다·현대·기아 등 아시아계 자동차 회사가 10여개이나 미국인을 본사 이사로 임명한 것은 처음이다.기아는 수출 중심의 판매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워너부사장을 본사 이사로 승진시켰다고 설명했다. 기아는 지난 2월부터 세피아를 미국에 수출,지난달까지 8천여대를 판매했으며 오는 12월부터는 스포티지도 시판할 계획이다.
  • 판문점사태를 보며/이정연(시론)

    1년여를 끌어온 북한의 핵외교놀음의 진의를 판문점에서 그들로부터 직설적으로,그도 거친 모욕적인 어투의 얘기를 듣고서야 깨닫는 그런 체제속에서 우리는 안주해 왔다. 19일 판문점에서 북의 박영수대표와 그 수행원들이 보여준 거친 말솜씨나 협박은 그리 대단한 식견을 가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 땅에 몸담고 북의 실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신문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예견 할수있는 그런 상황으로 국외자는 인식하고 있다.다만 좀 빨리 그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으로 보여지며 그간 어떤 형식의 통일을 선택할까,어떻게 저들을 도울까등 잠꼬대처럼 되뇌던 환상에서 뒤늦게나마 그들의 실체를 실감케 해주는 계기가 된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전쟁 불사」「NPT(핵확산금지조약)탈퇴 불사」등 브랭크맨십(Brankmanship)게임으로 북이 서둘러 나선것은 아마도 북의 어려운 체제유지 책략과 대남교란용으로 「북을 자극하면 전쟁을 도발한다」며 전쟁공포증과 반전·반미 센티멘트로 비쳐지고 있는듯한 최근의 한국 사회분위기에 위기의식을 고취하면서 전쟁기피성향의 미국여론까지 겨냥한 3중전략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북이 가졌는지도 확실치 않고 아직 위협이 실재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핵무기가 갖는 위력을 실감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다.어찌보면 현재 북의 핵수준은 군사적인 영향보다는 단지 정치 심리전적인 차원에서 그 뜻을 찾을수 있을 정도이나 우리는 이를 사전에 차단하는 치밀한 전략과 일관된 정책없이 때로 그들의 허세를 오히려 부추기는 듯한 사려깊지 못한 몸짓들을 정치인이나 정책당국자들이 보여 이번 판문점 사태와 같은 날벼락 해프닝을 자초한 꼴이됐다. 무엇이 이처럼 저들을 기세등등하게 만들었는가는 우리의 책임있는 핵협상 당국자들이 협상전략이라면서 내비친 몇몇 발언에서도 쉽게 감지할수 있다. 한승주외무장관은 뉴욕에서 「우리정부의 입장은 북한이 핵무기를 이미 보유했더라도 과거는 상관 않겠고… 협상방향도 앞으로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게 될것」이라든가,주한미군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은 북한을 자극,전쟁을 도발할 우려가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함으로써 우리의 무기력해 보이는 핵대응 의지와 논리를 드러내 보였다. 북은 이같은 메시지를 통해 그들의 핵개발로 인해 미국의 군사적 공격을 받을 현실적 위험은 없고 한국 사회내부는 점차 일종의 심리적인 무장해제 상황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것으로 그들을 오판케 할 소지를 제공하고 있는게 아닌가 우려된다. 어찌보면 지금껏 남북대화는 언제나 저들의 전술상 필요와 스케줄에 따라 열렸다가 닫히는 형국이었다.때로 어떤 합의가 이뤄져도 저들이 필요하면 이행됐고 저들이 돌아서면 휴지화하는 합의요 협정이었다.판문점 협상에서 우리의 의지와 요구가 일관성있게 끈질기게 주장되고 실현된 것이 과연 있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지금 대놓고 우리를 미·북한회담에 「끼어든다」며 큰소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의 정치권은 또 어떤가.야당대표가 대통령의 만류에도 불구,아직도 평양을 방문,김일성주석과 면담을 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것이 그의 당내의 정치적 입지에 도움이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 이나라의 정치현실이며 기업가들은 북한당국과 선만 닿으면 돈벼락이라도 맞을듯 홍콩으로 북경으로 분주히 드나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산발적인 대학생들의 반미시위나 일부시민들의 반미정서에 힘입어 그들은 지금 고무되고 흥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이같은 복합적인 요인이 깔린 상황속에서 계산된 판문점 해프닝은 일어 났고 NPT 탈퇴위협도 서슴지 않고 있다. 우리는 미국조야에서 일부 일고 있는 대한비판여론이 북핵문제가 난관에 부딪칠수록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흐를수도 있음을 눈여겨 봐야 한다.역사가 우리편이라는 당위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 과정에서 위기관리능력의 허점으로 때로 역류현상도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이제 우리는 북의 돌출사태를 사전에 봉쇄하면서 미국·IAEA등과의 빈틈없는 공조체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외교안보체제의 재점검과 핵을 가진 북과 의연하게 공존해야 하는 상황도 준비에 착수하는 주도면밀한 대책이 요구되는 시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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