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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 커뮤니케·성명 차이

    북한과 미국은 12일 북·미 회담결과를 ‘공동커뮤니케’(Joint Communique)에 담아 발표했다.양국간 회담 뒤 흔히 발표되는 공동성명(Joint Statement)과는 국제법상 차이가 없지만 엄격히 말하면 두 가지는 외교관례상 분명히 다르다. 공동 커뮤니케는 양국간의 향후 정책방향을 제시할 때 쓰이며 공동성명은 이보다 좀 더 구체적이며 양국간에 정치적 효력도 갖는다. 미국과 중국의 역사적인 수교의 밑거름이 됐던 것이 바로 ‘상하이(上海) 공동 커뮤니케’였다.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북한과의 회담 뒤수교를 염두에 두고 이번 발표에 커뮤니케 형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최근들어 양국간 회담에선 커뮤니케는 거의 쓰이지 않는 추세다. 그러나 '코뮈니케'의 우리말 번역어가 마땅치 않아 그역시 '공동성명'으로 옮겨적을 수 밖에 없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온 6·15 선언은 공동선언(Joint Declaration)이다.공동 커뮤니케보다 한단계 낮은 의미지만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오히려 공동성명보다 더 많은 기속력(羈束力)을 갖고 있다. 국제법상 최고의법적 기속력을 갖는 것은 조약(Treaty)이며 협정(Agreement)은 이보다 한단계 낮다. 황성기기자
  • ‘北·美관계 새章’한반도 평화 기폭제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빌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키로 약속함으로써 북한과 미국은 50년 적대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신세기 새로운 동반자로 지구촌에 등장했다. 12일 북한에 이어 미국이 발표한 공동성명(Joint Communique)은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으로 상징되는 화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양측의 관계개선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어 북·미관계는 말 그대로 역사의 한 장을 바꾸는 새로운 차원에 돌입했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역사적인 방미길에 올랐던 조명록(趙明祿)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북·미간 모색해오던 관계개선 의지를 서로 확인,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정식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북·미의 새로운 시대 개막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또 하나의 주춧돌을 놓은 셈이며 국제사회 안정에도 커다란 기폭제가 될 것이다.북·미의 관계개선 합의는 지난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한 관계개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어서 햇볕정책의 또 다른 결실이자,이른바 페리 프로세스의 일단락을 의미한다. 공동성명은 테러·핵·미사일 등 3대 의혹에 대해 모두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해결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그동안 북·미 관계개선을 방해하던 장애물들을 완전히 거둬냈다. 조 특사의 방미로 상호신뢰를 확인한 양측은 이제 김계관-카트먼 협상팀 차원 이상으로 격상된 강석주-웬디 셔먼급 대화를 꾸준히 이어가면서 최종단계의 수교를 위한 단계이동을 계속할 전망이다. 수교의 초기단계인 상호연락사무소를 넘은 외교공관의 단계적 격상조치는 대화진행 속도와 함께 이어질 것이다. 테러지원국 명단제외 문제는 뚜렷하게 못박지 않았지만 30년 북한에 머문 적군파 요원의 신병이동여부에 대한 세계의 주목을 피해 결국조용히 진행,목표점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범위내에서 볼 때 북·미 관계 개선 모습은 북한이 그동안바람직하지 않게 묘사되던 ‘벼랑끝 외교’나 ‘줄타기 외교’차원을 넘어 성숙한 외교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게 한다. 클린턴과 만날 김정일 위원장은 한반도 내에서는 물론 국제무대에서도 일관된 의지를 가지고 개방정책을 선호하고 추진하고 있음을 확인케 해준다. 특히 김 위원장은 한반도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문제에도 4자회담에 근거한 논의를 받아들일 태세를 보여 한반도 안전과 평화에 대한 보장성을 그만큼 확고히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기술적인 면에서 북·미간 정식수교는 늦어질 수도 있다.과거 미국과 중국은 핑퐁외교로 서로의 담장을 넘어서 닉슨 대통령이 72년 방문한 이후 6년만인 78년에 대사급 외교를 수립한 바 있다. hay@
  • 서울·베이징·도쿄大 공동학위제 내년 시행

    서울대와 베이징(北京)대,도쿄(東京)대가 이르면 내년부터 두 대학에서 동시에 학위를 주는 ‘공동학위제(Joint-Degree)’를 시행한다. [대한매일 9월9일자 26면 보도] 서울대는 11일 “이기준(李基俊) 총장이 지난 6월 도쿄대 하스미 시게시코(蓮實重彦) 총장을 면담한데 이어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베이징대 쉬쯔홍(許智宏) 총장과 만나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면서 “다음달 초 베이징대에서 3개 대학 총장들이 만나 공동으로 학위를 주는 방안을 공동선언 형식으로 발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공동학위제는 5년 과정으로 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화장실 발코니’ 나온다

    화장실에도 발코니가 딸리고 햇빛이 들어오는 아파트를 조만간 볼 수 있게될 전망이다. SK건설은 아파트의 자유로운 곡선배치가 가능한 평면을 개발,실용신안 출원을 마쳤다고 3일 밝혔다.UBJ(Universal Block Joint)-시스템으로 명명된 이설계방법의 특징은 아파트 평면에 대한 변형없이 자유로운 곡선형 단지배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지금까지 곡선형 아파트나 타워형 아파트 건립시 부닥치는 시공불편과 복잡한 평면계획 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설계기법을 적용하면 화장실과 발코니가 만나게 돼 자연채광이 되고 바깥공기와 환기도 가능해진다.화장실하면 떠오르는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SK건설 관계자는 아파트 단위가구 평면을 설계할 때 화장실을 가구사이에자리잡게 해 유니버설 조인트의 기능이 되도록 구성했다”며 “이렇게 하면판상형 절곡형 요철형 등으로 다양하게 아파트 단지를 배치할 수 있어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성곤기자
  • 네티즌 클릭/ ‘닷컴 기자’들을 아십니까

    “독자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을 때 가장 기뻐요” 인터넷 신문사에서 일하는 소위‘닷컴 기자’들의 한결 같은 목소리다.인터넷이 각광을 받으면서 새롭게 생겨난 직업 중의 하나인 인터넷 기자.하루 평균 12시간 이상의 근무,일요일 교대 휴무도 일상이 돼버린 닷컴 기자들은 피곤함도 잊은 채 인터넷을 주시하고 있다. 현재 인터넷 신문사는 명예기자,인터넷 기자 등의 이름으로 그 수를 늘리고있다. 이런 추세를 두고 Joins.com의 최영은 기자는 “과거 특권을 누렸던기자들의 영역이 무너졌다.이제는 네티즌의 목소리를 어떻게 반영하느냐가관건”이라고 평가했다.또 Donga.com의 최영록 기자는 “특화된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를 육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지면·닷컴 기자간 갈등은 잠재된 불씨다.한 닷컴 기자는 “단순한 업로드 업무직으로 보는 편견이 안타깝다”고 말했다.닷컴 기자는 정보의 수용자인 동시에 생산자이기 때문에 지면 기자들과는 다른 전문 영역을 개척하고있다.특히 웹 프로그램과 같은 인터넷의 기술적인 구조를 숙지해야 한다. 이와 관련,Kdaily.com 전효순 기자는 “동영상 취재 및 편집 실력도 요구된다”며 끊임없는 자기 연마를 강조했다.더욱이 네티즌과 쌍방향성도 닷컴 기자들에겐 중요한 일과로 꼽힌다. 이제 막 날개를 펼치는 닷컴 기자들.생생한 정보를 조율하는 조율사로서 그리고 미래를 개척하는 언론인으로서 책임과 역할이 더욱 요구되고 있다.
  • [남북 화해의 길목에서] (1)판문점 르포

    D-10.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남북 당국자들이 만나는 판문점,민간차원 지원·교류가 이뤄지는 인천∼남포 항로,동해안 적십자지원 경로,신포 경수로건설,금강산 관광과 중국 베이징 등을 통한 경협과이산가족 찾기 등 남북간 접촉은 더욱 다양하고 활발해지고 있다.대한매일은 남북이 만나는 ‘접점지대’를 찾아 정상회담을 앞둔 남북 화해와 협력기류를 시리즈로 살펴본다. 판문점은 서울에서 북방으로 약 60km,평양에서 남방 약 180km에 위치해 있다.이곳에서 개성까지는 10km 지척이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이 ‘통일과 상생(相生)의 장’으로 탈바꿈할 수있을까.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다가오면서 판문점이 통일로 가는 대장정의 길목으로 변화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신록이 우거지는 6월의 첫날.판문점가는 길은 푸르름을 더했다.전날 남·북정상회담 선발대가 간 길을 따라 통일로를 달려 파주로 접어들자 예전에 감돌던 긴장감이 사라진 느낌이었다.머지않아 남북정상이 만난다는 데 생각이미치자 벌써 화해의 마음이 용틀임 튼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판문점’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상에 위치한유엔군과 북한군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을 뜻한다.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 400m,동서 800m의 타원형 지역이다.판문점을 중간에 두고 비무장지대 남쪽에는 우리측 대성동 ‘자유의 마을’,북측에는 기정동 마을이 있다.기정동 마을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160m의 게양대에 인공기가 펄럭인다. 유엔사 소속 안내장교의 설명에 따르면 판문점이란 지명은 공동경비구역 우리측 지역 평화의 집 뒤쪽 사천강 위에 걸려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유래됐다.이 다리의 본래 이름이 널문다리(板門橋)였다는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군사분계선상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등 5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남쪽의 평화의 집과 자유의 집,북쪽의 판문각,통일각 등 20여채의 건물이 보인다. 판문점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군사대치 상황을 염두에 둔 관광객들은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은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 테이블 중앙을 지나는 양측대표의 마이크선이 1천만 이산가족의 가슴을 피멍지게 한 군사분계선”이란설명을 듣고 한동안 어이없어 한다. 지난 한해동안 외국인 1,234명을 포함 모두 4만여명이 이곳을 찾았다.올해는 5만여명이 다녀갈 것으로 예상된다.미국인 크리스 존스(39·LA)는 판문점에 왜 왔느냐는 질문에 “세계유일의 분단국 한반도의 남북대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적인 명소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판문점의 역사는 오욕으로 점철됐다.한편으로는 대화의 장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치적 집회장,선전장으로 이용돼왔다.8·18도끼만행사건,임수경·문귀현 귀환,판문점 총격요청사건,김훈중위 총격사망사건 등이 판문점을 무대로 일어났다. 냉전논리가 기승을 부리던 61년 실향민 작가 이호철(李浩哲)씨는 단편소설‘판문점’을 통해 “해괴망측한 잡물,사람으로 치면 가슴패기에 난 부스럼같은 것”이라고 판문점을 표현했다.실제로 이곳은 지난 50년 동안 통일을갈구하는 한민족의 가슴을 갉아먹는 악성 종양이었다.그러나 지난 4월8일남·북정상회담발표 이후 판문점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96년 11월이후 기능이 중단됐던 남북연락사무소가 정상가동된 탓이다. 판문점 우리측 연락관 박모씨는 “말은 조심스럽지만 북측 연락관들의 표정이 매우 밝고 태도도 우호적”이라면서 “지난 5월8일에 열린 제4차 준비접촉을 앞두고 북측 연락관들이 ‘내일은 일요일이지만 우리는 정상근무하니남측도 나와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등 적극적”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판문점 노주석기자 joo@
  • 출자전환기업 구조조정 전담 금융기관 참여 기구 내년 설립

    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출자전환 대상기업의 구조조정 업무를 전담하는 기업구조조정기구(CRV)를 내년 3∼4월쯤 설립한다. 금융감독위원회 연구용역을 맡은 아더앤더슨은 22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CRV 설립방안에 관한 설명회를 열고 외국인 투자자를 유치해 51%이상의지분을 넘기는 ‘공동참여형(Joint-Venture)’과 국내은행들이 대주주가 되는 ‘조합형(Co-Operation)’ 등 두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공동참여형은 투자자가 51% 이상의 지분을 갖는 CRV를 설립하고 이 CRV가다시 각 은행들과 공동으로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방식이다.조합형은 은행들이 별도의 투자자 없이 출자전환 주식을 현물출자해 CRV를 설립하고 대상기업의 경영에 참여할 별도의 경영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금감위는 설명회 결과를 토대로 각 은행들이 최종모델을 확정해 설립할 수있도록 법적·제도적 지원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CRV란=Corporate Restructuring Vehicle의 약어.은행들로부터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 기업의 출자전환된 주식이나 부채를 이전받거나 위탁경영해 해당 기업의 주식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립하는 기업 구조조정전담 회사.기업의 원활한 회생을 돕고 금융기관의 자산건전성도 높이려는 기구다. 곽태헌기자 tiger@
  • 중앙일보 인터넷신문‘金대통령 비난’로동신문 인용 보도

    중앙일보사의 자회사인 ‘사이버 중앙’이 제공하는 인터넷신문(www.joins. co.kr/joongangilbo)의 영문판 뉴스(english.joongang.co.kr)에 지난달 22일부터 “북한이 김대중 대통령의 언론정책을 비판했다”는 기사가 실려 언론계를 비롯,네티즌들 사이에 파문이 일고 있다. 중앙일보 영문뉴스팀이 만드는 영문뉴스의 ‘북한’(North Korea)분야에 실려있는 이 기사는 지난 11월 21일자 북한의 ‘로동신문’ 5면에 실린 ‘파쑈광의 유치한 기만극’이라는 개인칼럼 성격의 기사를 요약 형태로 인용,“북한이 21일 어느 정권도 현 정권만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았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을 비난했다”고 전했다. 특히 이 기사는 “남한 정부가 언론에 대해 정부정책 관련 보도를 수정할것을 요구하고,정부에 불복종하는 신문사와 방송국의 반정부적 의견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북한의 주장을 담고 있다. 이는 자사신문을 통해 그동안 ‘언론탄압’을 받아왔다고 외쳐온 중앙일보가 북한의 언론보도를 통해 이같은 주장을 합리화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주고 있다. 이와관련 한 네티즌은 “전세계 사람들이 보는 인터넷신문에 북한의 극단적인 주장을 실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 “평소 ‘언론탄압’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북한의 주장을 인용해 옹호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부처 한 당국자는 “게재 의도가 불명확할 뿐더러 오해를 살만한내용을 번역해서 실은 것은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라면서 “현재 북한의 매체에 게재된 내용을 그대로 인용,널리 유포하는 행위는 법적 처벌과 제재를받을 수도 있는 사항”이라고 밝혔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기고] 열린정부와 공직개방

    공직사상 처음으로 개방형 임용직위 129개가 발표되는 등 공직사회에 일대변혁이 예고되고 있다.개방형 임용제는 공직사회에 본격적인 경쟁 도입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필자는 최근 공직개혁의 주요과제가 될 ‘고위공무원단’에관한 자료수집차 영국과 네덜란드를 1주일여 방문한 바 있다. 이번 방문은 새 천년을 맞아 선진국들이 정부혁신과 공직개혁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생생한 현장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개혁의 모범국으로 알려진 영국은 지난 20년간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80년대초 인력감축으로 시작한 행정개혁은 재정관리혁신,정부경영진단,책임운영기관의 출현으로 이어졌고,90년대 들어서는 서비스 혁신을 위한 시민헌장제 도입,외부위탁계약,민영화,시장성 테스트 등 예를 들기도 벅찬 개혁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런 노력은 노동당정부에서도 수그러지기는커녕 더욱 강화되고 있다.토니블레어 총리는 최근 ‘더 나은 정부’의 기치 아래 야심찬 국가개혁 청사진인 ‘정부 현대화 정책’을 발표했다.그 주된 내용은 정부정책 결정시스템의 개선,고객대응 서비스의 강화,정보화 정부의 구현,그리고 이를 실질적으로뒷받침할 공직사회의 쇄신등이다. 특히 정부기능과 조직에 대한 개혁에 이어 소프트웨어 혁신의 일환으로 ‘96년부터 대대적인 공직개혁이 추진되고 있다.이른바 고위공무원단으로 알려진 SCS(Senior Civil Service)를 신설하여 과장급 이상 약 3,000명을 정부엘리트로서 통합 관리하고 있다.대개 공석의 절반은 외부와의 공개경쟁에 부쳐져 이중 3분의 2는 민간인으로 충원된다.하위직도 계급설정권을 각 부처에위임한 결과 계급 대신 직무분석에 의한 보수등급과 직위에 의한 인사관리를 하고 있으며,행정개혁의 산실인 내각실(Cabinet Office)도 올해 직종별 24개 계급을 없애고 5개의 보수등급으로 전환했다. 공직혁신의 바람은 네덜란드도 예외가 아니었다.95년부터 국장급이상 350명을 고위공무원단으로 개편하여 개방형으로 관리하고 있으며,조만간 이를 과장급까지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다.공직이란 이제 더 이상 정부나 공무원의전유물이 아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영국이 내세우는 ‘민·관 연계정부(Joined-up Government)’의 정신이나 네덜란드가 국가인재관리시스템에 의해고위직 정보관리를 하는 것도 모두 민·관 파트너십에 의한 열린 정부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는 엄연한 환경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라 밖은 이처럼 새 천년의 엄청난 변화를 맞아 머리를 맞대고 변화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개방형 임용도 바로 이러한 열린 21세기에 대비해 정부가 해야 할 준비의 하나이다.그러나 새로운 제도의 도입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중심에 있는 공직자 스스로 과거 인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열린 자세를 가지는 일일 것이다.金聖烈 중앙인사위 급여정책과장
  • ‘세계를 하나로’ 정보통신 올림픽 개막

    ‘전 세계를 하나로’(Join the World) 세계 최대의 정보통신박람회인 ‘텔레콤 99’가 9일(현지시간)부터 17일까지 스위스 제네바 팔렉스포 전시장에서 국제전기통신연합(ITU)주최로 열린다. ?정보통신 올림픽 71년부터 4년마다 열려온 텔레콤 행사는 ‘정보통신의 올림픽’으로 불린다.올해에는 180개국에서 1,200여 회사가 전시물 출품이나참관 형식으로 참가한다.국내에서도 한국통신,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성미전자,에이스테크놀로지,RF하이텍 등이 한국관을 만들어 공동 참가하고 삼성전자,LG정보통신,현대전자 등은 단독관을 연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는 차세대이동통신(IMT-2000)의 국제표준을 마련하기 위한 세미나와 토론회도 활발히 열린다.안병엽(安炳燁) 정보통신부 차관은 12일 ‘정책과 규제 서밋 포럼’에 참석해 ‘사이버 세기의 비전’이란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며 13일에는 제네바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ITU와 각국 정부및 통신회사 주요 관계자 300여명이 참석하는 ‘한국의 날’행사도 열린다. ?화두는 IMT-2000 올해 텔레콤99는 20세기의통신기술을 마감하는 동시에21세기 통신의 흐름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초점은 2002년 상용화될 동영상 이동전화 IMT-2000.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은 직접 동영상 이동전화를 시연할 계획이다.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지국,교환국 등 시스템 장비와 동영상 휴대폰 등을 선보여 높은 기술력을 증명한다는 계획이고,LG정보통신도 동기식의 384Kbps급 컬러 영상전송을 직접 연출할 예정이다. 이밖에 한국통신은 고속교환기를 통해 고속인터넷 검색과 다자간 영상회의 등을 할수 있는 7가지 신기술을 선보이고,ETRI는 버스·승용차·항공기 등에 부착해 어떤 조건에서도 선명한 위성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능동안테나를 출품한다. 김태균기자 windsea@
  • [외자유치 성공사례] 두산그룹

    “우리 기업인들은 외국인한테 ‘투자만하고 배당만 받아라.경영은 우리가한다’는 식으로 요구한다.그런 마음씨 좋은 산타클로스는 세상에 없다” OB맥주 朴容晟회장(59)이 외자유치라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우리 기업들에게 던지는 메세지다.외국에서 자본뿐만 아니라 선진경영의노하우도 함께 끌어와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업구조조정의 선구자’이다.두산은 국제통화기금(IMF) 한파가 몰아치기 전인 지난 95년 알토란같은 투자지분을 외국에 팔기 시작했다.‘현금유동성이 왕이다’는 경영진의 결단에 따라 1단계 구조조정의 닻을 올린 것이다. 우선 우량기업이지만 경영권이 없는 주식은 모두 팔아치웠다.한국네슬레,한국3M,한국코닥의 주식 전량을 매각해 모두 1,635억을 끌어 들였다. ‘앉아서 돈을 버는’ 음료사업(코크)을 미국 코카콜라에 4,322억원에 팔았을 때 재계가 깜짝 놀랐다.80년 캐나다 시그램사와 절반씩의 지분으로 설립한 위스키전문회사인 두산시그램의 지분도 1,275억원을 받고 경영권을 넘겼다.주력업종이라고 하더라도 미래지향적인 사업구조정착을 위해 과감하게 정리했다.위기극복을 위해 경영권 보다는 현금유동성 확보를 더 중시하는 전략에 따른 것이다. OB맥주와 벨기에 인터브루사의 합작은 단순한 외자유치가 아니라 국내브랜드의 국제화 및 합작회사 운영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100년이 넘는 기업사를 가진 두산과 14세기부터 양조사업을 시작한 세계 제4위의 맥주회사인 인터브루사는 지난해 9월 50대50의 공동경영권을 갖는 합작파트너가 됐다. 그 결과 ‘부실의 늪’에서 헤매던 OB맥주는 자본금 4,000억원,자산 9,800억원,부채비율 145%의 재무구조를 가진 건실한 회사로 재탄생했다. 무엇보다 양사의 합작이 조인트 벤처(Joint Venture)방식으로 이뤄진 점이눈에 띈다.종전의 자본도입 및 지분참여방식의 딜(Deal)합작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합작이었다. 합작이후 OB맥주에는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다.‘맥주시장의최강자’자리를 하이트에 뺏긴 뒤 절치부심중이던 OB맥주에 재기의 역동감이 넘치고 있다. 朴容晩 ㈜두산 전략기획본부장 겸 사장은 “지난해 모두 8억6,000만달러의외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하는 등 1단계 현금유동성 확보에 성공했다”면서 “또 23개 계열사를 주력4개사로 개편하는 2단계 구조조정이 마무리단계로 흑자경영의 발판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魯柱碩 joo@
  • “金영훈 중사 北 초소서 술판까지”/전역 소대원들 증언 내용

    ◎일주일에 1∼3회 찾아가 담배 등 선물 갖고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근무중 수시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난 金영훈 중사(28)는 북한군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술판까지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金중사가 부소대장으로 있던 소대원들 가운데 일부 사병들도 북한군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2월24일 공동경비구역내 벙커에서 권총에 맞아 숨진채 발견된 金勳 중위의 아버지 金拓씨(55·예비역 중장)가 지난 10월26일 金중위의 소대원 출신 전역자들을 상대로 증언을 녹취해 최근 천주교인권위원회에 넘긴 자료에서 드러났다. 증언록에 따르면 이들은 金중사가 판문점 회담장 근무 때 일주일에 3회 정도 담배와 구운 고기 등을 들고 우리초소와 20∼60m쯤 떨어진 북한군 초소에 가서 인삼주,담배,독일제 의약품 등을 갖고 왔다”면서 “심지어 술을 마시고 취해 돌아올 때도 많았다”고 증언했다. 특히 金중사가 월경 때마다 공동경비구역내에 설치된 감시용 비디오 카메라의 방향을 돌려놓으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또 “북한군 원사가 견학단 경호임무 차원에서 합법적으로 우리측 구역으로 넘어와 ‘金중사와 친구’라면서 ‘오늘밤 0시00분에 1초소앞 군사분계선에서 보자고 전해달라’고 했다”고 말해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음을 반증했다. 전역병들은 金중위가 소대장으로 부임했을때는 물론 신병이 올때마다 북한군이 이름을 미리 알고 불러 놀란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金중사의 북한군 접촉행위를 알면서도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 데 대해 “金중사가 북한군에게서 받은 물품을 소대원들에게 나눠주면서 이를 습득물인 것처럼 거짓 신고를 하도록 꾀어 그 덕에 휴가 등 포상을 탄 소대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또 “金중사도 자신의 행동이 위험한 짓인 줄 알았지만 적 초소앞에서 술을 마신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협박할 지 모른다면서 만나기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었다”고 증언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JointSecurity Area)은 군사분계선상에 세워진 회담장을 축으로 하는 반경 400m의 원형지대. 54년 유엔과 북한의 협정에 따라 만들어져 양측 35명씩의 군인들이 공동 경비한다. 76년 8월18일 ‘도끼 만행사건’ 이후 양측 군인들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이 그어졌고 경비병 등 모든 군인들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우리측은 현재 4개 소대 160여명의 카투사들이 교대로 경비하고 있으며 북측 경비요원들은 모두 대남심리전 특수요원인 ‘적공조’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 선거제도:상(대한민국 50년:10)

    ◎5·10 첫 총선 ‘애국심 투표율’ 95.5%/56년 3대 정·부통령선거 자유당서 불법 자행/60년 3·15땐 온갖 부정 총동원… 4·10혁명 유발 민주주의 발전은 선거의 성숙도와 정비례한다.헌정 초기에 성숙되지 못한 권력은 독재의 풍토를 조성했다.이는 급기야 부정선거를 초래했고 결과로 4·19혁명을 불러왔다.5·16군사 쿠데타와 유신헌법에 따른 기형적인 선거제도를 거쳐 드디어 97년에 이르러서야 여야 정권교체라는 최초의 민주적 선거혁명을 경험하게 됐다. 1947년 11월 14일.유엔총회에서는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국회가 정부를 수립케 하기 위해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파견한다’는 미국의 제안이 43대 0,기권 6으로 가결됐다.그러나 파견된 유엔한국위원단은 북한에 주둔한 소련 점령군의 방해로 남북 총선을 실시할 수 없음을 유엔에 보고했다.유엔은 1948년 2월6일,가능한 지역내의 선거 실시 권한을 한국위원단에 부여했고 이에 따라 역사적인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게 됐다. ○26개 정당·단체서 1명씩 드디어 1948년 5월 10일.남북분단과 내전을 우려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이 실시됐다.당시 언론에는 ‘애국의 단심을 결집한 감격의 투표’ 등의 제목으로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투표에는 7백84만871명의 유권자 가운데 7백48만7천649명이 참여해 95.5%라는 놀라운 투표율을 기록했다.첫 총선에는 무소속 417명을 비롯해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48개 정당 및 사회단체에서 모두 948명의 후보가 등록,평균 4.4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이 가운데 단 한명의 입후보자를 가진 정당 단체도 무려 26개나 됐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이날 선거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으나 한국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의 진전이 될 것이며 투표과정도 대체로 원활히 진행됐다”고 유엔에 보고했다.미군정청의 하지 중장도 “한국의 자유선거는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같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구 광주 보성 화순 등 각지역에서는 좌익 등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통신망 파괴와 경찰서 습격,선거공무원 피살 등소란사태가 빚어졌다.당시 선거를 전후한 폭동 및 폭행사건 등은 총 1천47건으로 집계됐다. 선거 결과 정원 200명중 4·3민중항쟁으로 제주도 2개구가 제외되어 198명이 당선됐으며 북한을 위해 100석은 유보시켰다.정당별 분포에서는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했으며 다음으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가 55석을 얻었다.김성수의 한국민주당이 29석,대동청년단 12석,조선민족청년단 6석,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석,대한노동총연맹 1석을 차지했다.김구의 한독당후보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30석을 얻었다. 초대 국회는 제헌헌법을 제정한뒤인 1948년 7월20일 상오 10시 신익희 국회부의장의 사회로 초대 대통령선거를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실시했다.이승만 180표,김구 13표,안재홍 2표,무효 1표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에 선출했다.이어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시영이 당선됐다. 38선에서 소규모 충돌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5월 위기설이 정국을 불안케하는 가운데 1950년 5월30일,제2대 총선이 실시됐다.제2대 총선은 대한민국 정부 주관으로 실시한 첫 선거였다.6·25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선거는 실시됐다.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의 통과로 1952년 8월5일 제2대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부통령에는 무소속의 함태영이 당선됐다.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에게 독재의 길을 열어 주었다.이 선거에서 이승만정권은 야당에게 선거운동을 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선거 준비기간을 17일로 단축시켰다.당시 선거법은 선거일 40일전에 선거일자를 공고하도록 돼 있었으나 52년의 선거만은 예외규정을 두었다. ○유권자보다 많은 표도 1956년 5월 15일 치러진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에 의한 갖가지 관권선거와 부정선거가 자행됐다.선거 10일전 신익희 후보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에는 이승만 후보가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됐다.이는 자유당 정권의 실정에 대해 제한적이나마 국민들의 심판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대중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평가된다.‘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담은 민주당의 구호는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를 대변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의 집권 연장이냐,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냐 하는 갈림길이었다.이미 대통령선거에 앞서 58년 5월2일 실시된 총선에서는 정통야당 민주당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에 앞서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이승만 정부는 7월까지 여유가 있던 선거일자를 3월15일로 앞당겨 실시한다고 공고했다.조박사에게 선거운동 기간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그러나 미국의 월터리드병원에 입원중이던 조박사는 2월15일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야당에서 대통령후보를 내지못함에 따라 선거전은 부통령선거전 양상으로 변했다. 자유당은 이대통령이 후계자로 지목한 이기붕을,민주당은 장면을 각각 부통령후보로 내세웠다.선거전이 불꽃을 튀기는 가운데 이미 4·19의 전조들이 곳곳에서 불거져 나왔다.일요일인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민주당의 정견발표회에학생들이 집결할 것을 우려해 당국은 학생들의 일요등교를 강행했다.이에 반발한 3백여명의 경북고 학생들은 학교를 뛰쳐나와 경북도청앞에서 시위를 벌여 주동학생 30여명이 구속됐다.3월5일과 14일에는 서울과 마산 등에서 소규모 학생시위가 잇따랐다. 3월15일.투표개시전에 4할의 무더기 투표가 나오는가 하면 투표함 검사를 거부하고 집단 대리투표를 하는 등 민주주의의 초석인 자유선거와 비밀선거는 완전히 파괴된 가운데 투표가 실시됐다.개표과정에서도 올빼미표가 등장했다.민주당의 투개표참관 포기로 투표와 개표를 마음대로 조작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를 지나치게 많이 발표해 총유권자수를 초과하는 지역도 있었다.대구의 한 선거구에서는 이기붕이 5천표,장면이 32표로 발표된 곳도 있었다.이날 밤 자유당은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이승만은 80%,이기붕은 70∼75% 정도로 지지율을 조정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를 믿는 국민들은 아무도 없었다.민심은 자유당을 떠났다.부정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기본권을 유린당한 이승만정권은 결국 4·19학생의거로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지는 종말을 맞았다. ◎여,50년 2대총선 야 중진 ‘좌경용공’ 조작/미 대사관 비밀 주간전문 ‘조인트위커’서 확인 선거에 있어서 상대를 음해하는 흑색선전은 우리의 선거사와 역사를 같이한다.최초의 총선에서 부터 가장 최근인 97년 12월 대선에까지 흑색선전은 여지없이 등장했다.주요선거때마다 ‘용공’문제가 이슈화됐으며 지난 대선때는 ‘북풍’문제로 까지 이어졌다.그러나 시민의식이 성숙되어가면서 흑색선전은 효과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이는 우리 선거문화 발전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한 미대사관은 한국정부의 주도아래 처음으로 1950년 5월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에서 “윤치영 이범석 임영신 등 대한국민당 지도부가 야당인 민국당 중진들을 ‘좌경용공세력’으로 조작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주요현안에 대한 사건보고와 논평을 담은 미대사관의 비밀 주간전문 조인트 위커(JOINT WEEKA)에는 “총선을 앞두고 한국정부와 정당들은 갈수록 공익과 신문 등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서 “상대당을 누르기 위한 루머도 난무하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미 대사관측은 “특히 민국당은 각 선거구에서 후보당 일백만원까지 지원해주었다.48년 선거때와 달리 민국당은 각 선거구마다 한 후보씩만을 지원하기로 계획하고 있다”고 보고했다.또 “대한국민당은 혼란을 야기하고 민국당을 누르기 위해 지역구마다 한사람의 후보를 지원하는데 덧붙여 70명정도의 ‘새도우’후보(비밀공천자)들을 지원한다는 소문을 냈다.따라서 적은 수의 후보를 미는 정당은 갈수록 줄어들었다”고 보고하고 있다.돈선거와 함께 상대당을 혼란시키고 같은 정당내에서도 서로를 의심케하기 위한 흑색선전이 동원됐다는 얘기다. 보고전문은 관권선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경찰은 48년때와 마찬가지로 선거가 자유롭고 비밀리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에도 불구하고,선거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 LG,실리콘사업 진출/독사 합작 7천억 투자

    LG화학이 총 7천억원을 투자해 독일의 실리콘회사와 합작,실리콘 사업에 진출한다. LG화학은 독일의 실리콘 제조회사인 휠스사와 50대 50으로 합작,글로벌 조인트벤처(Global Joint Venture)사를 독일에 설립키로 하는 내용의 의향서를 체결했다고 20일 밝혔다.LG화학은 글로벌 조인트 벤처사에 총 7천억원의 현금을 단계적으로 출자하며 휠스사는 독일내 기존 실리콘 공장 등 실리콘 사업부문을 합작 회사에 흡수시키는 방식으로 현물 출자키로 했다.
  • 자민련 비충청권 의원들/「DJP 후보 단일화」 고민

    ◎“반DJ정서 강해 지역구관리 어려움” 토로/“DJ가 후보땐 모종의 결단” 내심 비추기도 자민련 비충청권 인사들이 지역구 관리에 고심하고 있다.자민련·국민회의 두당간에 「DJP」로의 대통령후보 단일화 논의가 본격화된 뒤부터다.특히 「반DJ(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정서」가 강한 경기·강원,대구·경북지역 출신의원들이 더욱 심하다. JP(김종필 자민련 총재)로 되면 다행이지만 지역주민들은 DJ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때문에 『JP가 된다』고 말해도 믿지 않고 오히려 『DJ가 정말 되느냐』며 반문한다는 것이다. 허남훈 정책위의장(평택을)은 『DJP가 민주연합정당이란 뜻의 「Democratic Joint Party」의 약자였으면 좋겠다』며 『당론도 당론이지만 차기 선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황학수 의원(강릉을)과 박신원 의원(오산·화성)은 『지역 유권자들은 누가 되든지 관계없이 당장 DJ와 손잡는 것 자체에 못마땅해 한다』며 『DJ로 단일화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모종의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 「조인트 위카」를 보고/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

    ◎「원절하 한국 동의」 처음 밝혀/통화 남발·물가고로 인플레 극심/미 “환율 실세화” 명분 금융안정책 요구 「조인트 위카」(JOINTWEEKA)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1950년대 한국사 연구의 실증성을 심화시켜줄 자료의 하나이다.국무성 동북아과 한국 담당자 에먼스(Emmons)는 1951년9월 국무성비망록을 통해 「조인트 위카」의 자료적 가치를 극찬했다.『정부안의 고위급과 국내·외의 사령부에 매우 광범하게 배포되고 있다.많은 경우 「조인트 위카」는 고위관리들이 이 위태로운 지역(한반도)의 사태발전에 적어도 뒤지지 않게 해주는 매우 신속하고 간편한 수단이다.동북아시아과 한국 담당 자의 관점에서 볼때 이 점이야말로 이것의 바람직스런 역할이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다.이런 각도에서 대사관이 이 보고서의 준비에 계속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조인트 위카」에 의하면 미국은 「환율의 실세화」라는 명분 아래 항상 기회있을 때마다 물가와 통화의 안정을 요구했다.당시 한국은 1951년 1백58%,1952년 96%,1953년 1백12%의 급격한 인플레가지속되었다.해방후 만성적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일제의 패망 직후 통화남발,외지조선은행권의 유입,물가앙등,생산력 저하,적자재정지출의 누증과 통화팽창 등이었다.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재정적자,유엔 등의 대여금과 일반금융기관의 민간대부에 있었다.융자대상자는 주로 관권과 결탁한 상업자본가가 대부분이었고,이들은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의해 막대한 불로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이것은 특히 1·4후퇴 이후에 두드러졌다. 금융기관을 통한 외화불하는 공정환율의 상승에 따라 산업에 투자하지 않고서도 하룻밤 사이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인플레는 공정환율과 실세환율간의 격차를 확대시킴으로써 부정과 특혜의 소지를 형성하게 되었다.이것이 국민경제 전반에 걸쳐 거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는 재정운영상의 부패와 상호 결합되어 소수의 특정재벌에 대한 자원의 특혜배분을 이루게 했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1959년 작성된 「콜론보고서」(Colon Associates)에서도 「실업가와 정부의 결합이 극도로 긴밀하여 불행히도 대규모의 개인적 특혜와 부패가 뚜렷하다.미국의 원조는 많은 한국인의 백만장자를 조성하였고 많은 부패행정을 유지해 왔다」고 비판하였다. 서울신문이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들은 이상의 문제들에 관한 기왕의 학계 통설을 뒤집는 내용을 담고 있다.타스카와 백두진의 회담진행과정에 대한 상세한 서술에 의하면 한국정부도 「환율의 실세화」에 반대하지 않고 동의하고 있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조인트위카」등의 자료 발굴은 앞으로 한국의 초기 자본축적기의 역사적 실상을 재구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 전시경제와 통화(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7)

    ◎전비 하루 10억∼40억원 지출… 인플레 심각/52년 화폐발행고 1조… 100대1로 화폐개혁 1951년 봄 전선에서는 수 많은 인명이 죽어갔으나 전선은 진지밖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그렇다고 숱한 인명의 희생이 국민들에게 어떤 반대급부적 대가를 안겨준 것도 아니었다.후방은 그저 전선이 멀리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뿐 날로 가중되어가는 경제적 궁핍이 먼저 피부에 와 닿았다.당시 경제문제는 전선의 전투못지 않게 심각했던 것이다. ○부산 빈민도시 전락 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에는 1백50만명의 인구가 들끓었다.전쟁전 43만명의 인구를 포용했던 매력있는 도시 부산은 제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남한의 피란민은 물론 북한을 탈출한 피란민,전쟁고아,전상자들이 삽시간에 부산을 빈민가로 만들어버렸다.전국의 후방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부두에는 태평양에서 꼬리를 물고 입항한 거대한 선박들이 매일 산더미같은 짐을 풀었다.그러나 당장 끼니거리가 없는 피란민들에게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전쟁은 이들을돌볼 겨를을 주지 않았다.한국정부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하루 10억원에서 40억원의 전쟁비용을 지출하는 입장이었다.이는 유엔군이 필요로 하는 원화경비를 지출키로 합의한 이른바 대구협정에 따른 것이다.유엔군에게 꾸어주는 대여금 이었지만 이를 흡수할 실물경제의 기반은 계속 허물어졌다.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온 돈의 홍수는 결국 한국통화의 지독한 인플레현상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정부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다.전쟁은 벌써 2년째에 접어들어 세입이 전무한 상태였다.그래서 세입은 한국은행에서 꾸어오는 인플레 방식의 한은차입금이 큰 줄기를 이루었다. 한국은행은 1951년 한햇동안 5천5백79억원의 화폐를 발행했다.이 수치는 전년도 화폐발행고 2천2백92억원에 비해 자그마치 3천2백87억원이 늘어난 것이다.그해 51년의 통화량은 전년도 보다 3천9백77억원이 많은 6천4백98억원을 기록했다. ○2년새 6배 치솟아 그것은 가장 기초적인 경제원리 조차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를 수 밖에없었다.해방 당시 도매물가지수를 1백으로 할 때 1951년 초에 이미 5천을 뛰어넘어 52년에는 단숨에 3만을 돌파했다.배고픈 피란민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쌀값은 1946년 1월 기준 1만6백50원에서 1952년말에는 9만원대로 치솟았다. 한국전에 개입한 미군 주축의 유엔군은 한화가 필요했다.그래서 한국정부는 대전에서 철수한 1950년 7월28일 대구협정을 맺었다.한국정부는 유엔군 지출관이 요구하는 액수의 원화를 필요한 장소에서 무제한 공급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이후에 어떻게 갚는다는 조항을 두지않고 일방적으로 공급의무 만을 규정한 이 협정은 오랫동안 말썽을 빚었다.이 협정에 따라 한국은 유엔군에게 원화를 꾸어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한은 20억 북에 뺏겨 그러나 현찰이 없었다.유엔군 대여금 보다 더 급했던 한국군에 공급할 현찰도 부족한 판이었다.한국은행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 6월26∼27일까지 20억원을 서울에서 풀었다.그리고나서 피란지로 수송한 돈은 5억원에 불과했다.금고에 그냥 두었던 20억원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남한경제 교란에 악용되었다.이때에 화폐인쇄용 원판을 서울 원효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빠뜨리고 온 실책을 저질렀다.대전에서 이 정보를 수집한 미 대사관은 곧바로 맥아더 사령부에 통보했다.그래서 원효로 일대는 개전 초기 미공군으로부터 엄청난 폭격을 받았다. 한국은행은 궁여지책으로 저액권 지폐에 고액 스탬프를 찍는 작업에 착수했다.10원짜리 지폐에 「당백원」 또는 「당천원」을 새긴 고무도장을 찍었다.이 지폐가 유통되지는 않았다.미 경제협조처(ECA)와 맥아더 사령부의 주선으로 19 50년 7월 하순부터 일본 토쿄에서 이승만대통령의 얼굴 도안이 들어있는 새 화폐를 찍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한국은행 토쿄지점이 발권업무를 맡아 서북항공(NWA) 전세기와 DC4 쌍발수송기로 부산 수영공항에 공수되었다.비행기만으로는 수송능력이 모자라 9·28 수복 이후에는 캐나다 선적의 1만t급 상선 아일랜드사이드호가 8일 간격으로 인천항에 닻을 내렸다. 한국정부는 유엔군에게 꾸어준 대여금을 받아내는 일이 시급했다.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상환독촉은 보통이 아니었다.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미국은 원화대여금을 전쟁이 끝난 뒤 그동안의 전비와 상쇄할 전도금으로 해석한 것이다.한·미간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다가 1952년 1월10일 우선 유엔군 휴가비로 나간 한화를 달러로 받았다.처음으로 한국정부 손에 들어온 외화는 1천2백15만5천7백14달러였다. 미국은 그 뒤에도 대여금 상환을 놓고 한국과 줄다리기를 계속했다.미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4월 클레어렌스 마이어를 대통령특사로 한 사절단 12명을 부산에 보냈다.백두진 재무장관을 수석대표로 한 한국대표단과 이들의 회담은 5월에 접어들어서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미국은 달러를 되도록 덜 주면서도 지불시기를 늦추고 지불한 돈에 대한 사용처를 명시한다는 입장이었다.이와달리 한국은 많은 액수를 빨리 받아 자유롭게 써야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 쪽에서 먼저 2천8백만달러를 제시하고 나섰다.이 액수는 지금까지 가져간 돈 가운데 52년 1월∼4월까지 4개월분을 달러로 환산한 것이다.한국대표단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승만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마이어는 이 대통령을 직접 예방하고 5개월분을 제시하고 수락을 간청했다.이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장장 40일간의 마라톤 회담이 5월24일 타결되었다.이를 양국 대표가 서명했는데 바로 유명한 마이어협정이다. ○6천대1 환율 적용 마이어협정은 미국의 대여금 상환 말고도 고용 한국인에 대한 노임 및 물자대(월 4백만달러)상환내용 등이 들어있다.여기서는 6천대1의 환율이 적용되었다.이 협정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통화팽창과 투자억제를 골격으로 한 한국정부의 의무조항이다.의무조항은 한국의 통화개혁을 부추켰다. 1952년 여름에 접어들어 화폐발행고는 1조원을 넘어서고 말았다.그해 가을 백두진재무장관이 국무총리 서리 겸임 발령을 받았다.백서리로부터 통화개혁 기초작업 착수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단호히 조치해보라』는 말로 이를 동의했다.백두진과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를 필두로 김정렴,배수곤 등이 실무팀으로 참여했다.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진 통화개혁 작업은 11월말 가닥을 잡았다.그 내용은 당시 통용화폐 원을 1백대1로 낮추어 환(원)으로 하고 일정액 이상의 통화를 예금으로 동결시킨다는 것이었다.백두진팀이 쉽게 통화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에스 프린트」라는 사용하지않은 신권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그것은 미군정이 화폐교환을 위해 1947년 미국에서 인쇄한 화폐였는데 그 도안이 절묘했다.이 미사용 신권지폐는 1천원,1백원,10원권 등이 「원」으로 표기되었지만 「환」으로 호칭한다는 원칙 아래 1953년 2월15일부터 통용되었다. ◎미 대사관 보고서 「조인트 위카」/미,통화개혁후도 원화 평가절하 요구/다스카 사절단 내한… 백두진 총리에/53년 1달러=60환서 18환으로 올려 한국정부가 1953년 2월15일 통화개혁을 단행한 이후에도 미국으로부터 원화의 평가절하 요구를 계속 받아들여 이를 수용했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주한미대사관 무관들의 19 53년 5월15일자 주간보고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에서 드러났다.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한국에서통화개혁이 이루어진 지 약 2개월 이후인 53년4월에 다스카가 이끌고 온 다스카사절단은 백두진 국무총리에게 원화의 평가절하를 요구했다.당시 한국의 공정환율은 1달러당 60환(원)이었는데 다스카의 평가절하 요구액은 1달러당 2백20환이었다.이에 대해 백총리는 1백80∼2백환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스카는 미국의 요구가 수용되어 쉽게 합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는 기록이 「조인트 위카」에 나온다.다스카의 예상은 사실상 적중했다.그해 12월 백총리와 우드간에 체결한 한미합동경제위원회협약을 통해 1달러당 60환이었던 환율이 자그마치 3배나 오른 1백80환으로 결정되었다.다스카의 애초 제시한 2백20환 보다는 적지만 원조 공여국인 미국의 요구가 어느정도 관철된 셈이다. 다스카는 방한중에 파악한 한국경제상황을 근거로 「다스카 보고서」를 작성했다.이 보고서에 실린 한국원조 3개년 계획안은 군사원조,구호,재건사업으로 나누어 모두 8억8천3백달러를 투자하는 내용을 담았다.그러면서 한국이 악성 인플레이션과 환율문제를 해결하지않고는 어떠한 시설투자도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입장에서 원조물자의 구성을 소비재 7,시설재 3을 제시했다.
  • 주한미 대사관 무관보고서(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0)

    ◎북,남침 보름전 남·북총선 제의/조국전선 요원 남파… 각계지도층 시도/“국회통합” 등 위장 평화공세… 전쟁준비 숨겨 북한정권은 대한민국 제2대국회의원 선거인 5·30총선이 끝난 직후에도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을 내세워 남북총선을 제의하는 등 한국의 혼란을 부추겼다.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19 50년 6월16일자 주한 미대사관 무관들의 주간보고서 조인트위카(JOINTWEEKA)에 따르면 이를 위해 북한은 조국전선 요원들을 남파 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국전선이 남한으로 보낸 요원은 서기국 조직부장 김태홍·이인규와 조국전선 신문기자 김재창.조인트위카는 19 50년 6월10일 38선 경계의 여현에 도착한 이들은 8월 5∼8일 사이에 남북총선을 실시하고 8월 15일 최고입법기구를 창설하자는 조국전선 선전선동물을 휴대 했다고 기록했다.이들은 5·30총선을 참관하기 위해 한국에 온 유엔한국위원단을 여현에서 만나 남북총선거에 의한 최고입법기구 설치를 주장하는 전단을 전달했다. 조인트위카는 김태홍일행이 한수를 더 떠서 남한의 여러 정당및 사회단체 인사를 만난다는 이유로 부득부득 남행을 강행 했다고 밝혔다.그런데 이들은 38선을 넘자마자 한국군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다.북한은 이 사건에 이어 6월 19일 자신들의 최고회의 정령을 통해 대한민국 국회와 최고인민회의가 단일 입법기관으로 연합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제의 했다. 북한정권의 이같은 제의는 진정한 평화통일의 의지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이 제안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대한민국 집권층을 대화의 상대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에 실현성이 희박 했던 것이다.특히 일련의 제안들이 나온 6월 25일에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평화의 제스처는 전쟁을 호도하기 위한 기만이었다고 할수 있다. ◎2대국회와 정계재편/신진들 대거 진출… 여소야대 정치구도 형성/지지기반 잃은 이승만… 새 정당 창당 서둘러 1950년 5·30선거를 통해 구성된 2대국회는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초라한 피란국회의 인상이 짙게 남아있다.6월19일 개원한지불과 1주일도 채 안돼 한국전쟁을 만난 2대국회는 27일 새벽 긴급회의를 끝으로 서울을 떠났다.9.28수복과 더불어 서울에 잠시 들렀지만 환도는 19 53년 8월16일에 가서 이루어 졌다. ○보수 기득권세력 참패 그러나 제2대 국회는 한국 정당정치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우선 제헌국회에서 보수세력이 철저하게 기득권을 이용해 세력을 굳혔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2대 국회에서는 이들 기존 세력들이 대거 탈락하는 대신 그 반대세력인 신진과 소장파등 무소속이 압승을 거두어 판도의 대변화를 일찍 예고했다.이로 말미암아 2대국회는 보수파 세력간의 각축장이 아니라 본격적인 여·야의 대립양상을 보여주는 계기가 마련됐다.이는 실질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기반 약화를 가져온 것으로 이대통령은 이에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2대 국회를 낳은 5·30선거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5·30선거는 19 48년 제헌국회를 낳았던 5·10선거와는 크게 구별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외부 개입없이 한국인들만에의해 실시된 5·30선거는 보수세력들만이 참여했던 5·10선거와는 사뭇 달랐다.그래서 남북 협상파와 중간파들까지 모두 끼어들었다.이 5·30선거야말로 표면적인 활동을 할 수 없던 공산주의자들을 빼놓고 당시 한국의 전 정치세력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총선이라 할 수 있다. ○남북협상파 총선 참여 5·30선거에서는 모두 2백10명의 국회의원을 뽑았다.총선에는 여당인 대한국민당(국민당) 1백65명,야당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의 1백54명을 포함해 39개 정당 사회단체에서 모두 2천2백9명이 입후보 했다.이 가운데 10명 이내의 후보자를 낸 정당 사회단체가 30개,1명 밖에 못 낸 정당 사회단체도 무려 18개나 됐다.특히 1천5백13명이라는 무소속 입후보자는 의원 총수의 7.2배나 됐다.이처럼 5·30선거에 여러 정당 사회단체가 참여한 데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과 제헌국회를 통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역량을 키워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제헌국회에 비해 입후보의 난립상을 보여준 5·30선거는 예상대로 여권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국민당 24명,국민회 14명,대한청년단 10명,일민구락부 3명,대한노총 3명,여자국민당 1명,대한부인회 1명,중앙불교위원회 1명등 여권에서 57명이 겨우 당선했다.야당은 민국당 24명,사회당 2명,민족자주연맹 1명등 27명이었지만 의원 정원의 3분의 2를 차지한 무소속 1백26명을 일단 야권으로 보았을때 여소야대가 분명했다.국회가 개원하던 6월19일 의장선거에서 5·30선거가 철저한 야권의 압승임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날 의장선거 1차투표 결과는 민국당의 신익희 96표,사회당의 조소앙 48표,무소속의 오하영 46표,국민회의 이갑성 11표,무소속 안재홍 3표순으로 집계됐다.이승만 정부가 지지하던 무소속 오하영은 46표밖에 못얻어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2대국회에서의 야당 우세는 이날 2차투표에서 더욱 두드러졌다.야당세력과 무소속의 대부분이 민국당으로 쏠려 결국 1백9표를 얻은 신익희가 의장으로 선출됐다.이는 정치갈등을 드러낸 제1라운드의 게임이었다. 민국당은 한민당과 신익희등 대한국민당의 일부의원,그리고 대동청년단등 3개 세력이 합동해 19 49년 2월20일 창당한 정당이다.민국당은 상해 임시정부에도 반대하고 국내 좌익세력과도 척을 졌던 한민당이 주축을 이루었다.한민당은 해방공간에서 남북의 대치상황이란 특수상황에 편승해 독립적 세력이었던 이승만과 가깝게 지냈다.일제하 기득권층이 대부분이었던 이들은 반공에 치우쳤던 이승만을 도와 정부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그러나 이승만의 입장에서 볼때 한민당이 가장 이상적인 정당은 아니었다. 한민당이 제헌국회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개각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다는 사실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한민당측은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과의 결별을 생존의 수단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결국 이승만 노선에 반대하던 세력과의 연합으로 손을 잡아 만들어낸 정당이 바로 민국당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직선 개헌 준비 민국당은 창당직후부터 이승만의 힘을 약화시키는 제도적 장치인 내각책임제 개헌을 강력하게 들고 나왔다.민국당의 내각제 개헌주장은 제헌국회에서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국민당등 여권세력의 결사적인 반대로 부결됐다.하지만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이 제출한 대통령직선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안과 국회가 낸 내각책임제 개헌의 대립에서 발췌개헌안이 통과돼 일단락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승만은 민국당의 성격이 이처럼 자신에 대한 반대와 퇴진에 초점이 맞춰졌음을 잘 알고 있었다.이승만은 5·30선거에서 민국당측이 실질적으로 원내를 장악하게 되자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한 창당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창당과정에서는 지지세력을 모으는데 이승만이 직접 나섰다.물론 여기에는 이승만의 지지세력이었던 여권이 만족할 만한 역할을 해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자유당 창당에 박차 5·30선거후 정당의 이합집산을 계속했던 2대국회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민국당을 중심으로한 야권의 결집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연합등 양분상을 나타냈다.야권이 이승만 퇴진이란 기치아래 민국당을 주축으로 굳건히 뭉친반면 여당은 상대적으로 약했다.이승만 대통령 쪽의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의 연합인 신정동지회,그리고 공화구락부의 통합 교섭단체인 공화민정회는 전체의원수의 과반수인 94명이 포진했다.그럼에도 민국당에 비해 오합지졸의 취약성을 띨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공화민정회는 열세를 면하기 위해 신당 창당을 서둘렀다.19 51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이승만대통령이 드디어 신당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창당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그로부터 4개월후 피란지 국회의사당에서 장차 독재집권의 기반이 될 자유당 결당대회가 열렸고 중앙위원회 의장에 이승만,부의장에 이갑성과 김동성이 선출되었다.
  • 신생 한국의 정치상황(새로쓰는 한국현대사:27)

    ◎“동족상잔 막자”… 김구중심 「대북협상」 강격 제기/5·30선거서 「보수」 약화… 이대통령 자유당 추진 분단정권의 수립후 남과 북에서는 각각 정권을 확고히 하기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신생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좌익과 북에 대한 견제를 강화해 나갔다.또 정치적으로 적과 동지가 생겨나고 정치상황도 변화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통일독립촉진회를 주축으로 한 남북협상파는 미소 양군의 철수와 민족자주권을 주장하며 북한과의 평화협상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나 목적은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이런 와중에 북한의 조종을 받는 좌익의 대정부 무장봉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남한에서는 마침내 19 50년 5월 5·30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를 구성하고 반공정책쪽으로 기울었고 얼마후 이 땅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좌익·대북견제 강화 우리는 분단정권 수립후 전쟁발발까지의 기간중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즉 당시 정치세력의 흐름을 적지않게 주도했던 통일독립촉진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주로 남북협상파를 주축으로 결성한 이 통일독립촉진회는 세력을 가진 한독당을 얼마만큼 끌어들이느냐를 놓고 고심했다.남로당의 반정부 무장봉기가 극성을 부리고 좌우의 대립이 거세지는 과정에서 남북협상파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막자는 환상에 기울었다. 이 통일독립촉진회 결성에는 김구 엄항섭 조완구 등이 발기인회를 만들 때까지 참여했다.통일독립촉진회의 주장은 ▲미소 양군의 한반도 동시 철수를 통한 민족자주권 쟁취▲남북 제정당및 사회단체의 정치협상등이었다.김구등 한독당의 일부인사는 초창기 다소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1948년이 지나가고 49년에 접어들면서 38선과 산악지대에서의 남북간 무력대립이 심해져갔다.이때 북한은 남북 제정당지도자협의회를 열어 그 협의회에서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해왔다.그 내용은 「남북에 현존하는 정권에 남북총선거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외국군대를 철거시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운동」제의에 대해 김구는 일단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반면 김규식은 소극적이었다.당시 김구의 심경은 그가 1949년 3월21일 「신민일보」사장과의 회견에서 밝힌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김구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우리민족의 생존권과 우리의 주권을 획득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민족자결정신에서 미소 양군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고 남북협상에 의해 우리의 통일정부를 우리의 손으로 세우는 것입니다.혁명세력과 반역집단이 합작할 수는 없으나 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김구는 이 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하고 혁명세력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등을 통해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호소했던 것이다.「혁명세력끼리의 남북협상」으로써만 동족상잔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므로 그 운동이 실패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한다는 주장이었다.이에 대해 김규식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김규식은 이미 서로 다른 정권이 성립한만큼 현실적으로북한의 제의가 불가능하며 자칫 북한 공산당의 계략에 빠져들 수 있다는 신중론이었다.한독당내의 반공주의자들은 물론 김규식의 견해에 동조하는 편이었고 끝내 통일독립촉진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1949년 4월을 넘기면서 북한은 남조선민전과 북조선민전을 합하고 인공수립에 참가했던 남한의 우익 혹은 중도좌파 정당을 참가시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을 서둘렀다.북한은 남한의 한독당,민족자주연맹,통일독립촉진회를 이 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성과는 없었다.그러던중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결성대회가 6월25일부터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이틀째 접어든 19 49년 6월26일 안두희라는 현역장교의 저격으로 그의 거소 경교장에서 생애를 마쳤다.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상을 추구해온 김구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렇게 마감했다.그 나이 73세였다. 해방공간에서 한때 김구는 이승만과 우정을 나누었다.그들은반탁운동에서는 협력했다.그러나 김구는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승만과 사실상 정적의 사이가 되었다.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더욱 그러했다.그리고 김구는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남북협상의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이승만은 김구가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지난날 임시정부 지지를 맹세하는 단체를 조직한다고 비난했다.또 김구가 다음해 예정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 지지자들을 당선시키려는 준비를 서두르는 가운데 반정부 운동을 선동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협상에 미련” 못마땅 이승만은 김구의 저격범 안두희를 김구의 측근으로 보았다.이승만은 1949년 6월28일 미국의 친지 R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두희를 한독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로 단정했던 것이다.이어 이승만은 이 편지에서 안두희가 김구를 방문했을때 비서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둘이서 비밀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고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고썼다.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편지내용을 어느 한구절도 인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제헌국회 안에도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그러나 부분적으로나마 반대파들을 통제해나갔다.이승만은 자신이 유엔대사로 임명한 조병옥도 사실상 경계했다.유엔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대통령의 뜻도 능히 거역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쪼들려도 개인자금을 조달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조병옥이라고 평가했다.특히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내무부장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민족주의세력 득세 어떻든 이승만은 임시변통으로 사람들을 쓰고 부려먹었다.조병옥도 그러한 케이스였고 뒷날에는 정적이 되었다.초대 주미대사였던 장면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리하여 서서히 정치판도가 변화하는 가운데 1950년이 다가왔다.그해 5월30일 제2대 국회로 가는 5·30선거가 실시되었다.그 결과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국민회등 기성 보수정파의 원내세력이 줄어들었다.반면 민족주의 세력을 포함한 중간파가 약간 두두러졌다.특히 여당입장에있던 대한국민당과 원내 제1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이 무소속에 밀려 소수로 몰락해버렸던 것이다. 19 50년 5·30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기반을 약화시켰다.무소속으로 자기 주장을 국민들에게 호소해왔던 이승만은 정당을 등에 업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이승만은 자기가 만들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중심으로 자유당을 서서히 엮어나갔다. ◎이정권·민국·한불업계 낙선 공작/“김성수·김준연 남감찹과 내통” 몰아/현야 경찰서장 교체… 중진들 대거 탈락 1950년 5월 실시된 5·30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카운터파트인 민주국민당과 한국독립당등 경쟁 상대들에 대해 조직적인 선거방해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났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긴급 입수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즉 주한미국대사관 주재 무관들이 작성한 주간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 정권은 선거전 민국당과 한독당 후보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간첩사건을 조작했으며 대대적인 경찰인사도 단행했다.조인트 위카 13편(50년3월31일자)에 따르면 이승만정권은 대한정치공작대를 통해 민국당 중진들이 군경에 잠입한 남파간첩들과 연계된 것으로 조작했다.이는 남북 분단정권 수립후 남쪽에서 좌익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던 시기에서 주효한 전략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풀이하고 있다 정치공작대는 그해 3월20일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 1백명으로 구성한 정보조직으로 김성수,조병옥,백관수,김준연등 민국당 중진들이 간첩과 내통한 것으로 조작했다.이 공작에는 윤치영 임영신 이범석등이 가담했고 특히 윤치영이 이끈 여당격의 대한국민당이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조인트 위카는 기록하고 있다(조인트 위카 16,50년4월14일자).대한국민당은 70여명의 입후보자를 내세워 민국당의 이슈를 혼란으로 몰아갔으며 민국당을 패배시키려는 선거전략도 구사했다(조인트 위카 13,50년 3월31일자). 조인트 위카는 이어 정치공작대 사건은 결국 4월중순경 조작극으로 드러났지만 당시 이승만 지지세력의 가장 큰 적수였던 민국당과 한독당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한편 이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정권은 선거에 앞서 5월초 미군정 시기부터 민국당이 장악했던 지방 경찰서장직을 대폭 바꾸는 바람에 민국당의 중진들이 선거에서 대거 낙선한 사실도 들추어냈다.
  • 미,50년대 북·중에 원폭 투하계획/합참본부 한국전 극비문서 공개

    ◎중국의 대북원조 종식시키려 단행 검토 미국이 한국전쟁 직후인 지난 54년 북한과 중국·만주일대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이에 관한 극비문서사본이 한 대학 연구소에 의해 공개됐다.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소장 최영희·사학과)는 27일 이 연구소 객원교수인 방선주박사(워싱턴 거주)가 지난달 빌 클린턴 미대통령의 지시로 비밀해제된 한국전 관련 극비문서중 하나인 「한반도와 인도차이나에서의 중국 공산당의 침략예측 보고서」(Possible CHICOM Aggression in Koreaand Indochina) 사본을 보내왔다며 이날 전문을 공개했다. 미 합동참모본부가 54년 4월17일 작성한 이 극비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종결됐음에도 불구,중국이 북한에 대한 대규모 군사원조등 미국에 대항하는 적대행위를 계속할 경우 만주와 북한내 군사시설물에 대한 원폭투하를 가장 우선적으로 실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 『한반도 일원에서 중국의 전쟁수행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중국 본토에 대한 대규모 공중폭격을 단행해야 한다』면서 『미지상군의 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해서는 고성능 재래식무기 및 원자폭탄을 투하,적군을 일시에 섬멸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어 『중국에 대한 공중폭격을 감행할 경우 중국의 공산화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중국내 목표물에 대한 신중한 선별폭격이 이뤄져야 한다』며 『이와함께 중국해안과 연안 도서들을 봉쇄하는 한편 중국본토 상륙을 위해 대만의 국민당 군대를 이용한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이번 작전계획은 미합참본부 「합동전략계획위원회」(JointStrategic Plans Committee)가 54년 4월16일 내부회의를 거쳐 작성한 것으로 각 예하부대는 이 계획에 따라 필요한 세부 작전계획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림대 이삼성교수(정치외교학)는 『미국은 실제로 54년 5월 베트남 서북부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열세에 몰리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월맹군 진지에 원폭을 투하하려 했으나 NATO회원국과 아시아국가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바 있다』며 『중국 원폭투하계획도 미아이젠하워 정부의 공산진영에 대한 「대량보복전략」(Massive Retaliation)의 일환으로 보면 타당하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또 『미국은 실제로 지난 58년 한국에 「제4미사일 사령부」(The Fourth US Missile Command)를 설치,이곳에 전술핵무기인 「어네스트 존」을 배치한 바 있다』고 밝히고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50년대 중·후반기 미국의 대한반도 핵정책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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