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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융실명제·공직 재산공개… OECD 1년만에 외환위기

    금융실명제·공직 재산공개… OECD 1년만에 외환위기

    ■ YS가 남긴 功 김영삼 전 대통령도 국내외의 다른 모든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공(功)과 과(過)가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앞으로 역사적인 평가와 재평가가 계속 이어지겠지만 김 전 대통령 시절의 대표적인 공적으로는 ‘금융실명제 도입’ ‘군 사조직(하나회) 숙청’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일제 잔재 청산’ 등이 꼽힌다.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 등도 주요 성과로 기록됐다. 김영삼 정부의 첫 번째 업적으로 금융실명제를 꼽는 데는 이견이 없다. 모든 금융 거래를 실제 명의로 하도록 하는 제도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거액 어음 사기 사건’ 발생을 계기로 논의가 시작됐다. 제도 도입 전에는 가명이나 차명, 무기명으로도 금융 거래가 가능해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의 음성적 거래가 심각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발동했다. 그는 당시 “국회의 법 개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금융시장 동요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득이 ‘긴급명령’ 방식을 택했다”고 밝혔다. 또 “금융 거래에서 부정부패, 부조리를 연결하는 고리를 차단해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실명제는 우리 사회의 ‘검은돈’을 걷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합리적 과세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금융실명제는 부동산 실명제로 이어졌다.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 자금이 부동산 투기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1995년 1월 6일 부동산 거래 실명제 실시 계획이 발표됐다. 입법도 단 3주 만에 이뤄졌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대대적인 정치 개혁에 나선 김 전 대통령은 군의 대표적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했다. 하나회는 1963년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이 주도해 만든 조직이다.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등에 참여한 군부세력들이 주요 회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10일 만인 1993년 3월 8일 하나회 멤버였던 김진영(육사 17기)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육사 19기)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했다. 다음날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모두 깜짝 놀랬제”라며 웃었다고 한다. 이어 군부 실세들이 줄줄이 경질됐다. 모두 42개의 별이 날아가며 군사 정권의 종식을 알렸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전격적으로 숙청을 단행해야만 저들이 규합할 시간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베일에 가려 있었던 30조원 규모의 전력증강사업(율곡사업) 비리에도 사정의 칼날을 들이댔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도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시켰다. 김 전 대통령은 쇠말뚝 뽑기,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과 같은 일제 잔재 청산 작업에도 힘을 쏟았다. 1993년 8월 광복절을 앞두고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지시가 떨어진 이후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 8월 15일 중앙돔 해체가 시작돼 1996년 11월 13일 지상 부분 철거까지 모두 완료됐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취임 사흘째인 1993년 2월 27일 첫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자신의 재산을 공개했다. 17억 7822만 6070원이었다.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화의 첫 출발점이었다. 대통령이 솔선수범하자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 군 장성, 판검사들이 잇따라 재산을 공개했고 이 과정에서 전·현직 국회의장의 부정 축재 의혹이 드러나기도 했다. 고위 관료들의 부동산 투기 정황도 대거 노출됐다. 또 청와대 국무회의나 각종 회담 자리에서 제공된 ‘칼국수’는 개혁의 상징이 됐다. 시민사회운동 활성화, 정상외교 확대, 지방자치제 부활, 2002년 월드컵 유치 등도 김 전 대통령이 일궈낸 성과다. 현행 초·중·고교에서부터 대학까지의 교육제도 기틀을 잡은 1995년 5·31 교육개혁도 김영삼 정부의 공으로 평가된다. 민선 지방자치제를 부활시켜 지방분권 시대를 연 것도 김 전 대통령의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 YS가 남긴 過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선진국으로의 진입에 대한 기대감은 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켰지만 동시에 금융위기 사태를 초래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은 패착으로 인식된다. 김영삼 정부는 9%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적극적인 시장 개방이 이뤄지자 1996년 12월 OECD에 가입했다. 대한민국이 6·25전쟁의 상흔을 딛고 40여년 만에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고 대내외에 알린 것이다. 여권은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며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야권은 “외화 출자, 개발도상국 지원 등 의무 사항이 많다”며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OECD 가입은 1년 만에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방만한 경제 운영과 부실한 대처는 결국 ‘외환위기 사태’를 불러왔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계기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를 맞았다. 삼미와 기아자동차, 쌍방울, 해태,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연이어 쓰러졌다. 1997년 한 해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만 30조원을 훌쩍 넘었다. 해외 금융기관들의 부채 상환 요구가 쇄도했고 정부는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 유예)을 가까스로 면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비판이 김 전 대통령과 한국에 쏟아졌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11월 22일은 공교롭게도 18년 전인 1997년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이기도 하다. 김 전 대통령의 개인사뿐 아니라 대한민국으로서도 잊지 못할 ‘역사적인 날’이 된 셈이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공기업 민영화와 재벌 정책 등에서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대외적으로 공정 거래를 강조하면서도 재벌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펼친 까닭에 ‘대재벌’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세계화’ 역시 방향 설정은 좋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만 생기면 내린 고위 공무원 경질이라는 ‘충격적 처방’은 관가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과도한 사정은 역풍을 가져왔다. 정권 말 정작 자신의 차남인 현철씨가 알선 수재·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 수감되면서 김 전 대통령의 부패 척결 드라이브는 빛이 바랬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민주화 상징 인물” “임기말 경제 위기”

    주요 외신들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을 긴급 기사로 타전했다. 외신들은 대체로 ‘한국의 민주화 지도자 출신 전직 대통령 서거’라는 제목으로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여정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각지 한인회가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외신들은 야당 대표 시절의 민주화 여정과 대통령 재임 중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을 김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고루 강조했다. AFP 등 유럽 언론들은 김 전 대통령이 군부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출범시킨 대목에 주목했다. 영국 BBC 방송은 김 전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 가택연금을 당했던 사실과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의 북핵 시설 공습에 반대했던 일화를 전했다. 프랑스 일간 르파리지앵은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고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1993년 한국에서 군사정권을 끝내고 (실질적인) 민간정부의 시대를 처음 열었다”고 보도했다. 한편으로 외신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상황이 초래되며 그가 대통령 임기 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도 비중 있게 다뤘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반부패 개혁을 추진 중인 중국의 언론들은 문민정부 시절 군 개혁 및 반부패 개혁 정책에 큰 관심을 드러냈다. 중국신문망은 김 전 대통령 재임 중 하나회 척결 인사를 소개하며 “김 전 대통령이 반부패, 청렴을 기치로 개인의 배경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유재시거’(唯才是擧)를 실천했다”고 보도했다. 해외 한인회들도 잇따라 애도의 뜻을 밝혔다. 김훈 재외동포언론인협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에 항거해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끌어내신 한국 민주주의의 거목”이라면서 “가슴 깊이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박우민 재영 한인여성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신 분이란 점에 이견이 없을 것”이라며 명복을 빌었다. 외교부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사실을 재외공관에 통보하고 조문소 설치를 지시했다. 유제헌 재독한인총연합회 회장도 “어려운 시절, 젊어서부터 정치에 입문해 역경을 거쳐 승리했던 분이라고 본다”면서 “잘한 일도, 또한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금융실명제에서 IMF까지 ‘대통령 김영삼’의 공과

     22일 새벽 서거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공과는 어떤 역대 대통령보다 뚜렷하게 갈린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 청산과 금융·부동산 실명제 도입 등 과감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는 점은 주요 성과로 기록된다. 하지만 무리하게 시장개방 정책을 추진하다가 임기 말 외환위기를 맞은 점은 김 전 대통령의 과(過)로 지적된다.  5·16 군사정변 이후 31년간 동안의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문민 시대를 연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초 과감한 개혁으로 국민적 지지와 기대를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하자 마자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면서 사회 투명성을 전반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성과를 냈다. 또 과거사 바로세우기 작업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을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줄줄이 구속시켰다. 쇠말뚝뽑기, 구조선총독부 철거와 같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 작업이 이때 이뤄졌다.  특히 “변화와 개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내걸었던 김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둘러싼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우선 금융·부동산의 양대 실명제를 이룩해 부패 차단과 과세 형평성을 확보했다는 점은 성과로 꼽힌다. 당시 가명과 차명을 쓴 금융거래가 각종 비리·부패 사건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자,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발동을 통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시행했다. 또 금융실명제 실시로 부동산 투기 우려가 높아지자, 1995년 부동산 실명제를 전격 도입했다.  대외적으로는 임기 전반기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점도 업적으로 꼽힌다. 하지만 OECD 가입은 급속하게 시장개방과 자본 유출입을 허용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초래했다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이어진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는 한국을 금융위기로 몰아가게 된다. 같은 해 삼미그룹과 기아자동차의 도산 사태가 터졌으며 쌍방울그룹, 해태그룹, 고려증권, 한라그룹도 차례로 위기를 맞았다.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나자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 선언을 가까스로 면했다.  집권 초 지지율이 90%에 달했던 김 전 대통령은 부패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아들 김현철씨의 뇌물수수 및 권력형 비리가 드러나자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IMF 사태와 친인척 비리는 정권교체의 빌미로 작용해, 1997년 대선에서 영원한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물려주게 된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YS 서거]한국정치 ‘양대 산맥’ 상도동·동교동계도 역사속으로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한국 현대 정치의 ‘양대 산맥’을 이뤘던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YS는 1969년 상도동으로 이사온 뒤, 영욕의 세월을 상도동과 함께 겪어왔다. 집권때 까지는 군부독재에 항거해온 민주화의 성지로 상징됐지만, 집권 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면서 무능과 파벌 정치의 본산으로 치부됐다.  동교동 역시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1961년 이사온 뒤, 1995년까지 35년여 동안 DJ의 정치적 요새와 마찬가지였다. DJ는 1995년 일산으로 이사했다가, 대통령 퇴임 후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왔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과 마포구 동교동은 각각 ‘양김(金)’의 권력과 인맥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80년 신군부가 언론을 검열하던 당시 신문에서는 두 야당 거물의 이름 조차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신문들은 DJ와 YS를 각각 ‘동교동 인사’와 ‘상도동 인사’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두 거물의 집을 드나들던 인사들도 각각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로 불렸다.  1984년 YS와 DJ가 전두환 정권에 맞서기 위해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중심이 돼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심 축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영남을 상징해온 상도동계와 호남을 상징해온 동교동계는 1987년 YS와 DJ의 후보 단일화가 무산된 뒤, 서로 치열한 경쟁 속에 갈등과 반목을 거듭했다.  DJ가 서거한 2009년 이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해묵은 갈등을 씻고 화해했다. DJ 서거 직전 YS와 DJ간의 극적인 화해가 이뤄졌다. 2009년 11월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YS 주재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인사가 만찬을 갖기도 했다. 이듬해 새해 첫날에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22년 만에 ‘교차세배’를 하기도 했다. 이후 간간이 갈등이 재연되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의 교류는 이어졌다.  최근들어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인사들이 각자 제갈길을 택하면서 사분오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상도동계인 김덕룡 전 의원이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반면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상도동계 인사 중심의 민주동지회 소속 회원 100여명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공식선언했다. 동교동계에서는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 김경재 전 민주당 최고위원에 이어 ‘리틀 DJ’로 불렸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도 박 후보를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과 상도동계 김 전 의원 등 양측 인사 상당수는 최근 시민사회 원로들과 함께 ‘민주와 평화를 위한 국민동행’ 모임에 참여하는 등 새롭게 ‘결합’하는 양상이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주도 ‘정치9단’

     86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1926~2009)과 함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은 그가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년기-거제도서 출생, 한인학생 차별 일본인 교장 골탕먹이다 정학 처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초등학교를 나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경남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동래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으며, 1년 뒤 통영중에 진학했다. 통영중 재학 시절에는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하는 등 골탕을 먹인 일화가 유명하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한 것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이다. 대통령의 꿈은 이 때부터 비롯됐다.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뜻을 키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만 20세인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하는 등 정치 입문을 위한 사전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청년기-한국전때 학도의용대 가담,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와 맞선 한달만에 결혼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5·30 총선에서 경북 칠곡에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하기로 했던 목사가 날짜를 착각해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주례를 즉석에서 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생이었던 손 여사는 당시 교칙에 따라 결혼하면 퇴학을 당할 처지였지만,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 무사히 졸업했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이 있는 거제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1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에서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고, 이에 손 여사는 “좋아서 살았지예”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적 성장기-26세때 최연소의원에,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 의원등 숱한 기록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 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낙향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공천을 받아 최연소 의원(26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이 같은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으며, 이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30여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민주화 투쟁기-3선개헌 반대하다 초산테러, 10·26 신군부시절 가택연금 단식투쟁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으며,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상도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에 밀렸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정면 돌파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단은 정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권 도전과 성공-1990년 3당합당, 1992년 대선 당선 ‘문민정부’ 시대로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김 전 대통령 역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른바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맞붙은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는 제1야당의 자리마저 DJ의 평민당에 내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권 주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서민적인 청와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국수가 대표적이다. 칼국수가 당시 청와대 대표 메뉴가 되면서 대통령의 영양 관리라는 뜻밖의 고민거리도 생겼다. 청와대 방문객들이 한번쯤 맛보는 별미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내내 칼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감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 여론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해 ‘감(感)의 정치인’으로도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 명료했다.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화법 탓에 ‘말실수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표현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결식 아동’ 문제를 언급하려다 ‘걸식 아동’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도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민주화 동지에서 1987년 대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불편한 관계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DJ의 서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병원을 전격 방문, 22년간의 반복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화해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YS 서거]금융실명제 ·하나회 해체 성과, 외환위기 초래 뼈아픈 실정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첫번째 공적으로는 금융실명제가 꼽힌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모든 금융거래를 실제 명의로 하도록 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현재 은행 예금에서 본인 명의로만 계좌 개설이 가능한 것이 이 제도 때문이다. 제도 도입 전에는 가명이나 차명, 무기명으로도 금융거래가 가능해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의 음성적 거래가 심각했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거액 어음사기사건이 발생하면서 논의가 시작된 금융실명제는 대통령의 ‘긴급명령’ 형식으로 시행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회의 법개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금융시장 동요 등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득이 대통령의 ‘긴급명령’이라는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또 “금융거래에서 부정부패·부조리를 연결하는 고리를 차단해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고 밝혔다. 금융실명제는 우리 사회의 ‘검은 돈’을 걷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합리적 과세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군의 대표적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한 것도 김 전 대통령의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이 주도해 만든 조직으로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등에 참여한 ‘군부세력’ 대부분이 회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한지 10여일만인 1993년 3월 8일 하나회 멤버였던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경질하며 군부 척결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다음날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이 “모두 깜짝 놀랬제”라며 웃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 전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숙청을 단행해야만 저들이 규합할 시간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42개의 ‘별’이 물갈이 됐고, 하나회는 해체됐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군인정부 이후 처음으로 ‘문민 정부’를 표방하며 ‘군사 정권’의 종식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위 공직자와 공직 후보자의 재산공개 의무화, 시민사회운동 활성화, 정상외교 확대, 지방자치제 부활, 2002년 월드컵 유치 등도 김 전 대통령의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야기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최대 과오로 꼽힌다. 재벌들의 지나친 문어발 확장 묵인과 수출산업 강화, 임금인상, 물가상승, 외화낭비 등으로 인한 경제적 부실이 원인이 됐다. 1997년 11월 21일 당시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국가는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 원·달러 환율은 2000원대까지 치솟았고, 대량해고 사태가 빚어졌다. 김 전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 임기초 국난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임기 초반 90%를 웃돌았던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아들 현철씨 비리와 외환위기 등으로 임기 종반 10%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와 관련,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가입국이 된 것이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선진국 진입’에만 도취 돼 ‘세계화’라는 명분 하에 해외 기업과 자본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것이 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문민정부는 또 공기업 민영화와 재벌정책 등에서 일관성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대외적으로 공정거래를 강조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재벌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펼친 까닭에 ‘대재벌’을 탄생시켰고, 이에 중소기업은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문제만 생기면 ‘경질’이라는 ‘충격적 처방’을 내려 개혁적 이미지는 한층 부각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효성에서 적잖은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세계화’ 역시 방향 설정은 좋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문민정부의 과감한 민주화 조치 등은 민주주의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평등과 복지 확대에 있어서 소홀했던 것은 과거 정권에 비해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팍팍해진 삶… 기초생활보장 문의 3년째 1위

    팍팍해진 삶… 기초생활보장 문의 3년째 1위

    지난 9월 한 50대 여성이 ‘보건복지콜센터(129)’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 여성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생활고에 지쳐 극단적 선택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직장마저 잃어 작은 분식집을 차렸는데 이마저도 실패해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안았다고 털어놨다. 굶어 죽자는 생각에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웠다가 수화기를 들었다고 한다. 김인숙 보건복지콜센터 위기대응상담팀장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 드리고자 곧 제대한다는 아들 생각을 하시라고 했다. 이런 가슴 아픈 전화가 요즘 부쩍 늘고, 민원인들의 목소리도 예전보다 많이 어두워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5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콜센터 상담 유형 통계를 보면, 2012년까지는 보육 관련 문의가 가장 많았으나 이듬해부터 생계지원 등을 비롯한 기초생활보장 관련 상담이 급증해 순위가 역전됐다. 기초생활보장 문의는 2013년부터 3년째 부동의 1위다. 지난해부터는 상담 건수 5순위 밖에 있던 정신건강정책 관련 문의가 4위로 올라섰다. 대부분이 목숨을 끊고 싶다는 하소연이다. 올해는 더 늘어 기초생활보장, 보육사업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불과 몇년 새 삶이 많이 팍팍해졌다는 의미다. 김 팀장은 “기초생활보장 문의가 특히 많아 야간 상담까지 해야 할 정도”라며 “IMF 때보다 더 힘들다거나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내용이 심상치 않으면 민원인의 현 위치를 파악해 긴급 구조하도록 경찰에 출동 요청을 하고 긴급생계지원을 연계해주는 등 매뉴얼에 따른 위기대응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민원인의 마음을 달래는 일은 오로지 통화하는 상담원의 몫이다. 김 팀장은 “아무 희망이 없다는 얘기를 들으면 상담원도 막막하다. 어떻게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 동기부여를 한다는 게 정말 어렵다”고 토로했다. 2005년 개통 당시 월 2만 7000여건에 불과했던 콜센터 상담 실적은 10년 만에 12만여건으로 늘었다. 보건·복지 서비스가 활성화된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담원에게라도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고 싶어하는 소외된 이들도 늘었다. 세종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장형우 기자의 입시 talk] (2) 물수능의 비밀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열흘도 남지 않았습니다. 수험생들이 마지막 정리와 컨디션 관리에 몰두하는 시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능 다음날인 13일 어떤 기사를 쓰게 될지가 궁금합니다. 참고로 지난해 수능 다음날 썼던 기사의 제목은 “‘물수능’ 변별력·사교육비 다 놓쳤다”였습니다. 그 뒤 일주일 동안은 영어와 생명과학Ⅱ의 출제오류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올해도 같은 기사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출제오류만은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발. 수년째 수능 뒤에는 어김없이 ‘물수능’ 논란이 펼쳐집니다. 대다수 언론은 수능이 너무 쉬워서 학생들의 학업 능력을 서열화할 수 있는 변별력이 약하다는 점을 우려합니다. 지난해 영어 영역에서 만점자가 응시자의 4%가 넘는 바람에 실수로 1개만 틀려도 2등급으로 내려갔던 상황을 보면 타당한 이야기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수능이나 모의평가에 출제되는 문제가 쉬운 걸까요. 아니요. 어렵습니다. 수능 당일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등 시험이 시작되면 교육부 기자실에는 수험생들이 풀고 있는 시험지가 배포됩니다. 지난해에도 몇몇 기자들이 ‘왕년의 실력’을 발휘해 풀어보려 했지만 어려워서 이내 포기했습니다. 처음에는 ‘기자들이 공부한 지 오래돼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직 교사에게 물어봤습니다. 교사들은 모두 “문제 자체는 어렵다”고 했지만, “70% 이상이 EBS 수능 교재에서 나오기 때문에 학생들은 쉽게 푼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수능에서 지문, 선택지까지 똑같이 나오니까 고3 학생들은 현재 EBS 교재 외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100점 만점에 최소 70점까지는 암기력 테스트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1993년 처음 수능이 치러졌을 당시의 “학력고사식 암기 위주의 학습에서 탈피하고, 대학에서 수학(修學)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자를 선발한다”는 취지는 무색해졌습니다. 그러면 교육 당국은 왜 도입 취지마저 훼손해 가면서 수능을 쉽게 내려고 하는 걸까요. 답은 ‘사교육비’입니다. 수능이 어려우면 국가가 사교육을 조장하는 꼴이 되고, 결국 집권 세력의 인기가 떨어집니다. 물론 ‘IMF 사태’로 불리는 1997년 말 외환위기의 영향이 지배적이었지만, 그해 12월 이뤄진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역대 최고의 ‘불수능’(어려운 수능)이었던 그해 시험의 영향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어쨌든 쉬워진 수능에 골치가 아픈 곳은 대학입니다. 수능으로 지원자 변별이 쉽지 않은 대학은 우수 학생을 뽑기 위해 대학별고사(논술고사)를 치러왔습니다. 그런데 교육 당국은 이마저도 사교육을 부추긴다며 ‘고교교육정상화기여대학지원사업’ 등의 각종 대학 지원사업을 무기로 대학별고사 축소, 또는 폐지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대신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위주의 전형(종합·교과)을 확대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 입장에서는 어떤 고교인지도 보지도 않고 무조건 내신성적이 좋은 학생만을 뽑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고, 외국어고, 자사고 등 고교 입시 경쟁이 치열해집니다. 또 고교 내신 경쟁에도 사교육비가 들어갑니다. 뿐만 아니라 학생부 비교과 활동 관리에는 물량(사교육비)전과 함께 학부모의 정보전도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어른들이 “학력고사가 좋았다”고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zangzak@seoul.co.kr
  • [열린세상] ‘자본 수출’이 답이다/강태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주미 특임파견관

    [열린세상] ‘자본 수출’이 답이다/강태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주미 특임파견관

    “한국도 수혜자다.” 지난달 워싱턴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세미나에서 제시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의 실증분석 결과다. 양적완화 정책 덕분에 한국 장기금리가 낮아져 성장에 도움을 받았다는 거다. 미국 금리 인상도 큰 부담은 아니라는 주장이 뒤따랐다. 27년간 유입 일변도이던 신흥국으로의 자금흐름이 순유출로 방향을 틀었다. 10월 8일 페루 리마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를 뜨겁게 달군 주제다. ‘지도에 없는 길’을 헤쳐나갈 걱정에 신흥국이 긴장하는 게 당연하다. 우리 정책 당국도 급격한 자본유출에 대비해 왔다. 2010년부터 거시건전성 수단을 가동, 유입자본의 양과 속도를 조절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힘이 부쳐 보인다. 2009년 이후 증권 자금이 1800억 달러(약 200조원) 들어온 데다 경상수지 흑자 지속에 따른 외자 유입규모도 막대하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의 자본유입은 경제운용에 큰 짐이다. 원화 값을 올려 수출상품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외화가 나가 주면 환율이 안정을 되찾지만 유출보다 유입이 많다 보니 한국은행이라도 나서 외화를 사들여야 한다. “원화 값 상승을 막으려는 인위적 시장개입 아니냐”며 미국이 시비 거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게 다가 아니다. 외화를 거두어들일 때 풀린 원화가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인다. 유동성 환수비용이 한은 몫으로 추가된다. 누적된 유입규모가 과도하다면 ‘일부’는 내보내는 게 바람직하다. 미국 금리 인상이 계기가 될 수 있다. 퇴각 통로 역할을 하니까. 유입자금은 결국 빚이다. 그렇다면 자본유출은 빚을 상환하는 디레버리징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본이 해외로 나간다고 무작정 길목을 틀어막을 건 아니다. 급격한 유출은 억제하면서도 안정적으로 디레버리징을 관리함이 관건이다. 첫째, 정책 당국은 디레버리징 관리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미국 금리 인상은 예견된 충격이다. 제어 가능한 수준이 될 것이다. 둘째, 국내 금융시장을 확실하게 차별화시키는 것도 디레버리징 관리에 도움이 된다. 최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국가신용등급 상향조정, 경상수지 흑자, 상당 규모의 외환 보유고 등이 차별화 포인트다. 셋째, 설령 위기가 닥쳐도 정책대응은 시장이 예측 가능한 방식이라야 한다. 과도한 외환시장 개입으로 보유고를 낭비하거나 시장과 괴리된 환율 수준을 고집하면 치명적일 수 있다. 최근 금융 불안사태 발생 시 시장과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한 중국 당국의 무리수가 반면교사다. 외환시장 이중구조도 과도한 유입의 부작용이 증폭되는 채널이다. 국내 개설된 외환시장은 두 종류다. 환율 변동성 리스크가 중화된 ‘헤지(hedge) 시장’과 헤지 없이 사고파는 ‘비(非)헤지 시장’이다. 시장 고시 환율은 비헤지 시장에서 결정된다. 문제는 외환 수요자(보험사, 연기금, 증권사 등 해외증권 투자기관)의 헤지 선호도가 유난히 큰 데 있다. 외환 매입수요가 헤지 시장으로 집중되니 비헤지 시장에서의 원화 값이 상승압력을 받는다. 부작용은 또 있다. 멀쩡하게 달러가 남아도는데 헤지 시장 거래용 외화는 해외에서 단기로 빌려온다. 외채구조만 악화되는 모순이 계속되는 거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구조를 두고 보기만 할 건가. 헤지-비헤지 시장의 괴리 상황을 시급히 해소해야 한다. 환 헤지에 대한 지나친 맹신에도 경종을 울려야 한다. 헤지를 하고도 손해 볼 수 있다. 해외 주가가 급락하지만 달러는 강세인 경우가 좋은 예다. 국내 투자자가 환 헤지를 안 했다면 주가하락 손실은 달러자산 가치 상승으로 만회된다. 하지만 헤지를 하면 주가급락 손실만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충실한 환 헤지가 도리어 리스크를 증폭시킨 꼴이다. 과거 성행하던 해외 주식투자의 대다수가 실패로 마감된 주요 이유다. 어려움의 상당부분은 자본 유출이 치유한다. 원화 고평가에 수반되는 짐을 덜고 외환시장의 작동 여지도 확장된다. 민간 보유 해외 자산이 외국인의 국내 투자분을 압도하면 글로벌 위기가 발생해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다. 이스라엘 사례다. 경상수지 흑자로 들어온 외화가 국내에 머물기보다 해외로 나가 국부 창출로 이어지면 최상이다. 언제까지 자본유출 공포에 시달려야 하나. ‘자본 수출’이 답이다.
  • 석유 부자 사우디 국내 유가 올린다

    석유 부자 사우디 국내 유가 올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타다울 증시가 27일 3% 가까이 하락했다고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사우디 정부가 재정 위기 타개책으로 유류 보조금을 삭감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는 보도가 증시 하락의 기폭제가 됐다. ●국민 생활비 줄여 민심 수습하던 왕정 이미지 타격… 저항 클 듯 이날 알리 알나이미 사우디 석유장관은 “휘발유와 전기 등 에너지 가격 인상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AFP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정부가 연료 가격의 90%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까닭에 사우디의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6센트(약 180원)에 불과하다. 워낙 가격이 낮아 휘발유 가격을 올리는 게 당장 가계에 큰 부담을 줄 요인은 아니지만 심리적인 충격은 크다. 산유국인 데다 왕정 국가인 사우디에선 국민의 생활비를 줄여 민심을 수습한다는 이유로 에너지와 생활필수품에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펴 왔다. 이런 이유로 1971년 이후 사우디에서는 에너지 가격 인상을 시도한 게 불과 9차례다. 사우디 정부가 유류 보조금 삭감을 검토한다면 그동안 민심 악화를 우려해 다각도로 모색한 자구책들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뜻이 된다. 올해 들어 사우디는 보유 중이던 미국 채권을 팔아 40억 달러(약 4조원)를 조달하는가 하면 최근 6개월 동안 700억 달러(약 79조원) 규모 채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지난달 사우디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비용 삭감 명령을 극비리에 내리기도 했다. 영국 가디언이 입수한 사우디 정부 문서에 따르면 사우디 정부는 공무용 자동차와 가구를 사기 위한 비용 지출을 금지했고 공무원 승진과 임명도 중단시켰다. ●정부 비용 절감 효과 못 봐… 43달러인 유가 106달러는 돼야 재정 균형 그러나 정부의 비용 절감 노력만으로 사우디의 재정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는 경고음이 여러 곳에서 울렸다. 2년 가까이 지속되는 저유가로 인해 올해 사우디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21.6%까지 예상되기 때문이다. 에너지 관련 수출로 전체 GDP의 43%를 충당하고 원유에 관련된 수입을 올려 국가 재정의 90%를 감당하는 사우디의 재정이 저유가의 늪에 빠진 결과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국제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선에 머무르면 사우디, 오만, 바레인 등 산유국들이 보유한 현금이 5년 안에 고갈될 것”이라면서 “저유가 지속 전망에 따라 산유국들이 재정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IMF는 사우디가 현 상태의 재정 지출을 감당하려면 유가가 배럴당 106달러가 돼야 한다고 추정했지만 이날 유가는 두바이유 기준으로 배럴당 45.7달러에 불과했다. 저유가 기조가 지속되는 한 사우디 정부가 유류 보조금 삭감을 실행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가운데 보조금 삭감이 실현된다면 사회 불안이 커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2010~2011년 ‘아랍의 봄’ 대열에서 한 발 비켜서 있던 사우디였지만 생활비 부담이 커지면 민심이 동요할 수 있어서다. 사우디의 공식 실업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청년층 실업률이 높아 사회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IMF “중국 성장 둔화, 아시아에 큰 충격”] 中 성장 1%P 감소땐 亞 GDP 0.8%P 하락

    중국 경제 성장률이 1% 포인트 하락하면 아시아 국가의 국내총생산(GDP)은 0.8% 포인트 하락한다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예측했다. 이창용 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은 23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경제 성장 둔화) 여파가 애초 예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내년 중국 경제 성장률이 IMF 예상치인 6.3% 아래로 떨어지지 않더라도,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훨씬 커질 것이라고도 내다봤다. 이 국장은 그러나 중국 경제 경착륙 우려가 과도하고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제조업은 부진하지만 해운·소매 등 서비스업이 이를 상쇄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영 기업의 설비 과잉으로 제조업 둔화가 명백한 반면 제조업을 제외한 모든 분야의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분석했다. 이 국장은 “서비스업은 중국 GDP의 절반을 차지하는데도 과소평가돼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국장은 중국이 경기부양을 위해 과도하게 통화 정책에 의지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인민은행은 돈을 풀어 경제성장률 7%대를 유지하고자 예금과 대출 기준 금리를 각각 0.25% 포인트 추가 인하했다. 지난해 11월 이후 여섯 번째다. IMF는 국영 기업의 제조업 과잉 투자 합계액이 GDP의 25%에 이르는 것으로 내다봤다. 과잉 투자로 인한 막대한 기업부채를 관리하지 못하면 수년 안에 금융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내다본 것이다. 이 국장은 “만약 중국 정부가 금융시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경착륙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IMF는 소비 촉진을 위해 중국 정부가 저소득층에 국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한편 이강(易綱) 인민은행 부행장은 지난 24일 베이징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성장은 (다른 지역보다) 여전히 상대적으로 빠를 것”이라면서 “앞으로 3∼5년은 연간 6∼7%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사설] 한·중 FTA 비준해 중국 성장 둔화 대처해야

    중국 경제가 올 3분기에 6.9% 성장했다. 시장 전망치(6.8%)보다는 높지만 2분기에 비해서는 0.1% 포인트 하락한 것이다. 성장의 삼각 축인 수출·투자·소비가 모두 부진한 탓이 컸다. 중국의 분기 성장률이 7% 밑으로 떨어진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심각했던 2009년 1분기(6.2%) 이후 6년 반 만에 처음이라 우려가 적지 않다. 일각에서 중국 경제가 성장세 둔화로 경착륙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대두하고 있지만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등은 중국이 제조업과 투자 중심에서 서비스업과 소비 중심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고 있다고 분석한다. 당사자인 중국 역시 안정적인 중속성장(新相態)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점 등으로 봐서는 3분기 성장률 자체를 놓고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중국은 지금 누적된 과잉 부채, 과잉 설비투자, 부패한 국영기업 등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간 상태다. 이 같은 구조개혁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내수 진작책이 효과를 거둔다면 다행이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세계 경제의 뇌관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중국 경제의 앞날을 예단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건 중국 경제가 어디로 가든 그 여파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경제가 체질 개선을 통해 살아날 경우 대중 수출 비중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는 반면 우리는 경쟁력이 높아진 중국의 주력 상품과 세계 시장에서 한판 대결을 벌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경착륙으로 이어진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이럴 경우 중국은 지난 8월 두 차례에 걸쳐 위안화 평가절하(4.66%)를 한 데 이어 또다시 위안화 가치 하락으로 수출 경쟁력을 높이려 들 게 뻔하다. 우려되는 중국발 환율 전쟁이다. 우리는 대중 수출 비중이 25%에 이를 만큼 중국 의존도가 높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중국 경제의 경착륙에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돼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대중 수출의 70% 이상이 중국 경제 둔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중국 성장률이 1% 포인트 떨어지면 우리나라 성장률은 0.17% 포인트 하락한다는 게 KDI의 분석이다. 따라서 수출 다변화 정책 못지않게 서비스업에서 성장 동력을 얻으려는 중국의 내수 시장을 적극 공략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의 대중 수출품 중 중간재 비중은 73%인 반면 소비재 비중은 7%에 불과하다. 일본(10.6%)·미국(10.3%)·독일(9%) 등에 비해 크게 뒤진다. 이를 타개하려면 지난 6월 양국 정부 간 서명을 끝내고 국회에 계류 중인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하루라도 빨리 처리하는 게 급선무다. FTA가 발효되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5년 후 1.0~1.3%, 10년 후 2.3~3.0%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중국 내수시장 진출의 지렛대로 적극 활용할 수 있다. 동시에 중국 성장에 기댈 수 없는 철강·조선 등 일부 업종은 과감히 구조조정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는 중국의 중속성장에 따른 중·장기 대응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 강호인 국토부 내정자 “중책 맡아 어깨 무거워”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 내정자는 20일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아 어깨가 무겁다”고 소감을 전했다.  강 내정자는 “청문회 후보자 입장인지라 지금 정책구상을 내놓을 때는 아니고 청문회 준비에 노력하겠다”면서 “장관으로 임명된다면 전문성과 정책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갖고 일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국토부와 인연에 대해서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동아건설의 리비아 대수로공사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 국토부 관계자들과 함께 리비아 현지로 날아가 상황을 진정시킨 적이 있다”고 말했다. 동아건설은 2000년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며 당시 강 내정자는 유럽부흥개발은행 파견근무를 마치고 재정경제부 조정2과장을 맡고 있었다. 기획재정부 공공정책국장 당시 공기업 개혁작업을 추진하면서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의 통합작업에도 관여했다. 강 내정자는 기획예산처 전략기획관·재정정책기획관, 기획재정부 차관보, 조달청장을 지냈다.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연준 부의장 “연내 금리인상, 약속 아냐” 내년 가능성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의 스탠리 피셔 부의장은 11일(현지시간) 미국의 연내 금리인상에 대해 “이는 예상일뿐, 약속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금리 인상시가가 연내가 될 것이라는 일반적 관측과는 달리 내년 이후로 미뤄질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피셔 부의장은 페루 리마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를 계기로 한 국제금융전문가그룹인 G30의 국제금융 세미나에 참석, 연설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첫 금리 인상 시점과 뒤이은 연방 기준금리 목표 조정은 향후 경제의 진전 상황에 결정적으로 달려있다”고 강조했다고 블룸버그 등이 전했다.  연준은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12월부터 ‘제로금리’로 불리는 현재의 기준금리(0~0.25%)를 유지하고 있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지난 5월 “올해 안 어느 시점”에 금리인상을 시작하는 게 적절하다고 밝힌 후 이달이나 12월 인상이 예상됐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경기 불안이 두드러지면서 금리 인상 시점이 내년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피셔 부의장의 이 같은 발언은 세계 경기 부진으로 완만하게 확장해온 미국 경제에 악영향이 미칠 경우, 연준의 연내 금리인상 예상이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앞서 연준의 지난 9월 금리 동결과 관련, “그 결정은 부분적으로 금리를 정상화하기에 앞서 글로벌 경제, 특히 중국 경제에서 비롯되는 최근의 전개상황을 평가하는데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피셔 부의장은 이날 연설에서 세계 경제성장 둔화에 따른 미국의 수출부진, 저유가에 따른 투자감소, 미국의 일자리 증가 둔화 등으로 향후 미국 경제 동향에는 ‘상당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최근 상황들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한 것인지, 그래서 미국의 정책 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현재로서는 예측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피셔 연준 부의장 “연내 금리인상, 약속은 아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의 스탠리 피셔 부의장은 11일(현지시간) 미국의 연내 금리인상에 대해 “이는 예상일뿐, 약속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금리 인상시가가 연내가 될 것이라는 일반적 관측과는 달리 내년 이후로 미뤄질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피셔 부의장은 페루 리마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를 계기로 한 국제금융전문가그룹인 G30의 국제금융 세미나에 참석, 연설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첫 금리 인상 시점과 뒤이은 연방 기준금리 목표 조정은 향후 경제의 진전 상황에 결정적으로 달려있다”고 강조했다고 블룸버그 등이 전했다.  연준은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12월부터 ‘제로금리’로 불리는 현재의 기준금리(0~0.25%)를 유지하고 있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지난 5월 “올해 안 어느 시점”에 금리인상을 시작하는 게 적절하다고 밝힌 후 이달이나 12월 인상이 예상됐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경기 불안이 두드러지면서 금리 인상 시점이 내년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피셔 부의장의 이 같은 발언은 세계 경기 부진으로 완만하게 확장해온 미국 경제에 악영향이 미칠 경우, 연준의 연내 금리인상 예상이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앞서 연준의 지난 9월 금리 동결과 관련, “그 결정은 부분적으로 금리를 정상화하기에 앞서 글로벌 경제, 특히 중국 경제에서 비롯되는 최근의 전개상황을 평가하는데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피셔 부의장은 이날 연설에서 세계 경제성장 둔화에 따른 미국의 수출부진, 저유가에 따른 투자감소, 미국의 일자리 증가 둔화 등으로 향후 미국 경제 동향에는 ‘상당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최근 상황들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한 것인지, 그래서 미국의 정책 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현재로서는 예측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고령화 접어든 선진국, 난민이 성장동력 될 것”

    “유입된 난민이 고령화된 선진국의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은 7일(현지시간) 페루 리마에서 열린 연차총회 개막을 맞아 공개한 ‘글로벌 모니터링 리포트 2015/2016:인구 변화 시대의 개발 목표’에서 이같이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세계의 노동가능인구(15~64세) 비율은 2012년 65.8%로 정점을 찍었다가 2050년에 62.7%로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15세 미만 아동의 비율은 1960년대 38%에서 2050년 21%로 하락하는 반면, 65세 이상 노인 비율은 1960년대 5%에서 2050년 16%로 3배가량 늘 것으로 추산된다. 선진국의 경우 2015년부터 2050년까지 노동가능인구가 감소하지만, 라틴아메리카·남아시아·중동·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은 연평균 0.5~2.5%의 성장을 기록할 전망이다. 노동가능인구가 빈곤국에 몰리면서 부의 불균형도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전 세계 빈민의 90%가 빈곤국의 청년층인 반면, 세계 부의 75%는 출산율이 낮고 노인층이 많은 선진국에 집중돼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최근 유럽의 난민 위기처럼 빈곤국에서 선진국으로 이주하려는 대규모 난민의 행렬은 고착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고령화되는 선진국들이 빈곤국으로부터 온 난민과 이민자를 자국의 경제에 참가시킨다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며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이민자들은 자신들에게 지출되는 복지비용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낸다”고 강조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손성진 칼럼] 예측, 그 무거움과 가벼움

    [손성진 칼럼] 예측, 그 무거움과 가벼움

    몇 년 전 혹한이 닥친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아웃도어 업체들이 두꺼운 등산복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예보는 빗나갔고 업체들은 재고 소진에 골머리를 앓았다. 물론 적지 않은 손실을 보았을 것이다. 날씨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기업들에 틀린 예보는 막대한 피해를 준다. 미래 예측의 중요성은 기업들엔 존망을 결정지을 만큼 절대적이다. 트렌드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기업은 하루아침에 도태될 수 있다. 필름 카메라 시장을 100년간 지배한 코닥과 피처폰 1위 기업 노키아의 몰락은 애써 강조할 필요가 없는 주지의 사례다. 반대로 삼성이 최강의 전자그룹이 된 것은 미래를 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와병 중인 이건희 삼성 회장은 집무실에서 공상과학이나 우주에 관한 비디오물을 보며 경영전략을 구상했다고 한다. 미래를 내다보려는 노력이 지금의 삼성을 만든 것이다.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예측한 137가지를 미래학자 데이비드 굿먼이 1978년에 검토했더니 실현된 게 100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과학기술이 인간 사이의 소통을 뛰어넘을 그날이 두렵다. 세상은 천치들의 시대가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식사를 할 때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모바일 기기가 인간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현실을 보면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그러나 미래 예측은 쉽지 않다. 10여 년 전 미국에서 정보를 가진 증권사와 화살을 쏘아 종목을 고르는 개인의 주식투자 대결에서 증권사가 졌다는 일화가 있다. 유수의 연구기관들도 1년에도 몇 번씩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바꾼다. 그만큼 변수가 많다는 뜻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7%로 내렸다. 올해만 네 번째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섣부른 예측은 예기치 못한 피해를 유발하기도 한다. 증권사의 주가 예측을 믿고 투자했다가 낭패를 본 사람은 허다하다.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자칭 전문가의 말을 듣고 덥석 부동산을 사들였다가 ‘상투’를 잡은 경험이 있는 이들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맞지도 않을 예측은 넘쳐나는데 사기를 제외하면 책임지는 일은 없다. A씨는 2년 전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S전문가의 말을 듣고 주택 구입을 포기했다. 그런데 집값은 20% 이상 올랐고 A씨는 그 말을 믿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 미래 예측의 중요성은 변화의 속도와 정비례해 커진다. 경제주체들에게 예측, 정확한 예측만큼 중요한 게 없는 시대다. 자고 나면 세상이 달라질 정도로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측은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예측을 잘못하거나 잘못된 예측을 믿었다간 크나큰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거꾸로 정확한 예측을 통한 경영은 성공의 지름길이 된다. 어떤 이는 이를 ‘예측 경영’이라 이름 붙여 부르기도 한다(‘비즈니스의 99%는 예측이다’, 김경훈). 한국의 주요 산업은 중대기로에 놓여 있다. 혁신이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미래를 지배할 새로운 전략산업을 선점해야 한다. 변화의 트렌드를 읽어 내는 예지력이 필요하다. 30여 년 전에는 반도체, 20여 년 전에는 휴대전화의 발전 가능성을 읽었듯이 말이다. ‘일본 맥도날드사’를 창립, 일본에 햄버거 선풍을 일으킨 후지다 덴이라는 사람이 있다. 세계의 유대인으로부터 ‘긴자의 유대인’이라고 불린 그는 일본인들의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모습을 보고 햄버거를 선택했다고 한다. 국가, 정부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미래 산업은 국가가 주도해서 발굴해야 한다. 국가 차원의 미래 전략 연구가 태동한 것은 20여 년 전이다. 이후 미래기획위원회가 설립됐고 현 정부 들어서는 정부 부처로 미래창조과학부가 발족됐다. 국회에서도 ‘국회미래연구원’ 법안이 제출돼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얼마만큼 실질적인 미래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30년, 또는 50년 이후의 한국은 지금 미래를 어떻게 내다보고 준비하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입법·행정·민간이 힘을 모아 체계적인 미래 연구에 나서야 한다. 후손들의 미래 삶은 우리 손에 달렸다. 논설실장
  • 시진핑 ‘신형 대국관계’ 절반의 성공

    “세계 각국이 중국의 발전에 ‘무임승차’하는 것을 환영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8일(현지시간) 제70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끝으로 7박 8일간의 미국 방문 일정을 마무리했다. 시 주석은 국빈 방문 및 유엔총회 참석을 통해 중국을 실질적인 주요 2개국(G2)으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신형 대국 관계’가 외교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역량이 경제, 외교, 군사, 문화 등에서 미국과 나란히 하는 단계에 올랐음을 미국과 전 세계에 입증하려 한 것이다. 시 주석의 목표는 유엔총회 연설에서 잘 드러났다. 그는 “80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을 추가로 조성하고 유엔발전기금 10억 달러(약 1조 1940억원)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또 “아프리카연합(AU)에 1억 달러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군대 정비도 돕겠다”고 약속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날 “세계 50개국에서 총 3만명이 새로 평화유지군으로 합류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핵심이 중국군인 셈이다. 시 주석은 지난 27일에도 유엔 여성기구에 1000만 달러, 남남협력(개도국 간 협력) 기금으로 20억 달러를 쾌척하는 한편 최빈국의 부채는 탕감해 주기로 했다. 시 주석이 재정 적자 때문에 입으로만 세계 평화를 외칠 수밖에 없는 미국을 두고 보란 듯이 ‘수표’를 발행한 것은 미국에 신형 대국 관계를 실질적으로 인정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평화로운 굴기를 환영한다”고 인정했다. 미국은 또 위안화의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 가입과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 설립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했다. 하지만 남중국해 문제 등 중국이 ‘핵심 이익’이라고 강조했던 외교·군사적 영역에서는 오히려 갈등이 커졌다. 특히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유력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시 주석을 향해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직격탄을 날린 것은 미국이 인권 등과 관련해선 중국을 ‘삼류 국가’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시 주석 방미 전 중국 관영 매체들은 “미국이 외교적 예의를 중시하는 중국의 입장을 고려해 무례하게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시 주석 면전에서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과 인공섬 건설은 중대한 위협”이라면서 “미군은 어디에서든 작전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남중국해를 지배해 원유 수송 길목을 차지하겠다는 중국의 야망이 실현되기엔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리하이둥(李海東) 중국외교학원 교수는 “중국은 신형 대국 관계에 따른 미래 비전에 초점을 맞춘 반면 미국은 해킹, 남중국해, 경제 위기 등 현안 해결에 주력했다”면서 “경제 분야 외에는 미국이 중국을 G2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이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열린세상] 탐나는 시장으로 ‘차별화’될 기회다/강태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주미 특임파견관

    [열린세상] 탐나는 시장으로 ‘차별화’될 기회다/강태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주미 특임파견관

    국제 자금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신흥국 유출→선진국 유입’의 패턴으로 굳어졌다. 지난 14개월간 외국인 자금 1조 달러가 19개 신흥국 시장을 떠났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두 배 많다. 우리나라도 영향권이다. 주식, 채권시장에서 3개월간 10조원(약 100억 달러) 유출이다. 말도 많던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기준금리 결정이 지난 9월 17일(현지시간) ‘엉거주춤’ 동결로 끝났다. 신흥국 시장은 소나기를 피했다. 인상 시기만 잠시 미루어졌을 뿐이다. 오늘 맞을 매를 다음으로 미루면 두려움은 더 커지는 법. 자금이탈 압력은 갈수록 강해질 기세다. 외화자금 유출은 신흥국 통화의 ‘값’을 떨어뜨린다. 같은 상품을 수입해도 이전에 비해 돈이 더 들어간다. 수입량이 줄고 내수가 축소된다. 성장이 지체되니 유출자금 규모도 덩달아 커지고 화폐 가치는 더 떨어진다. 악순환이다. ‘화폐 가치 하락=수출 증가’가 교과서 설명이다. 하지만 중국 성장둔화에 신흥국 경기침체가 겹쳐 상반기 세계 교역액이 12% 줄었다. 환율이 절하돼도 수출이 늘어나기 어려운 환경이다. 전 세계 총생산량 52%가 신흥국 몫이다. 신흥국이 힘들면 세계 경기도 덜미가 ‘꽉’ 잡히는 구조다. 출타했던 ‘돈’이 부메랑이 되어 ‘고향’을 습격하는 모양새다. 역파급효과(리버스 스필오버)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긴장하는 이유다. 자금 유출에 따른 스트레스 상황을 신흥국이 버텨낼 수 있을까. 투자 자금은 어느 곳으로 옮겨야 할까. 외국인 투자자의 최대 관심사다. 한국 시장 ‘값어치’도 새롭게 가늠해 보는 중이다. 바로 이럴 때가 ‘탐나는 시장’으로 차별화될 절호의 기회다. 차별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익성’은 높이고 ‘리스크’는 줄이는 거다. 수익성이 좋아도 리스크가 크면 투자 대상이 아니니까. 정책당국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의 신뢰는 국가신용 리스크 측면에서의 차별화 과제다. 중국 금융시장 불안 사태가 교훈이다. 당국이 시장 안정화에 노력했지만 국제 금융시장의 평가는 냉정했다. 정책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의구심을 제기한 거다. 의구심은 불확실성(=차이나 리스크 공포)을 증폭시켰다. 자산에 값을 매기는 곳이 시장이다. 불확실성이 걷혀야 ‘이건 얼마짜리’라는 가격이 확정된다. 자산의 값이 아리송한 시장에 투자할 외국인은 없다. 최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한국 경제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했다. ‘정책당국의 역량’은 국가신용등급 평가 시 주요 항목이다. 7월 뉴욕에서 만난 S&P 최고위층이 강조한 포인트다. 미국 금리가 오르고 중국 성장속도가 둔화해도 한국경제는 성장을 이어갈 수 있다는 기대는 수익성 측면에서의 차별화 과제다. 2004년 6월부터 2006년 6월까지 2년간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4.25% 포인트 인상했다. 혹독한 시절에도 우리는 성장을 지속했다. 대미 수출을 증가시켜 미국 경기 상승 흐름에 올라탄 결과다. 국내경제의 흐름을 미국 경기 사이클에 맞춰야 한다. ‘금리를 내려 경기회복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8월 수출이 전년 대비 14.7% 급락이다.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국은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다. 중국의 경기하강에 맞선 정책 대응도 시급하다. ‘4대 구조개혁’에 대한 국민 합의와 실행 로드맵은 가장 중요한 핵심 차별화 과제다. 1997년 12월 4일,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협정을 체결한 날이다. 고작 210억 달러를 빌리면서 뼈를 깎는 구조개혁을 해야 했다. 금융회사 직원 40%가 일터를 떠났다. 500% 기업 부채비율을 200% 수준까지 끌어내렸다. 한국 경제의 ‘오늘’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한 결과다. 17년 전 결행한 구조개혁이 약발을 다했다. 통화·재정정책이 성장엔진은 아니다. ‘마중물’일 따름이다. 구조개혁 없는 ‘30년 성장’ 운운은 헛구호다. 독일의 하르츠 개혁, 스페인 라호이 총리의 노동 개혁 성과가 그 증거다. ‘9·13 노사정 합의’를 법제화하는 게 한국시장 차별화 과제의 완결판이다. 외국인 투자자에게 메가톤급 낭보다. ‘탐나는 시장’으로 단박에 탈바꿈시키는 동력이다. 이런 시장에서 철수하면 손해다. 자금 유출의 공포가 신흥국 시장을 위협 중이다. 지금이 우리에게 ‘차별화’ 적기인 이유다.
  • [스타뷰] ‘창단 20주년’ 민간 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상임 안무가 제임스 전

    [스타뷰] ‘창단 20주년’ 민간 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상임 안무가 제임스 전

    “많은 분들이 서울발레시어터가 창단 20주년을 맞은 건 기적이라고 합니다. 창단 멤버, 전·현직 단원들, 사무실 직원들, 서울발레시어터를 아끼는 모든 분들이 힘을 합쳤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관객 분들께서 저희의 순수성과 열정을 믿어주셨습니다.” 순수 민간 발레단체 서울발레시어터(SBT)가 스무 살 성년이 됐다. SBT를 창단한 상임안무가 제임스 전(56)의 감회는 남달랐다. 순수 예술로 40여명의 직원을 20년간 건사하며 SBT를 국내 대표 발레단 반열에 올려놓은 건 기적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도 “정말 다행스러운 건 아내와 제가 단원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발레단 운영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힘겨웠는지 익히 짐작된다. 그의 부인은 창단 멤버이자 현재 SBT를 이끌고 있는 김인희(52) 단장이다. ●“야반도주 안 한 게 다행… 우리만의 작품 만들고 싶어” 제임스 전 부부는 1995년 2월 SBT를 창단했다. 두 사람이 유니버설발레단에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이적한 다음해다. “1994년 11월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 지인들과 저녁을 먹을 때였어요. ‘우리도 해외 라이선스가 아니라 우리의 작품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고 해외에도 수출하자, 발레 대중화도 이끌어보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게 계기가 됐습니다.” 단체 운영 경험도 없었고 자금도 넉넉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여러 번 고비가 찾아왔다. 첫 고비는 창단 3년째인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닥쳤다. SBT에서 운영하는 발레 학원 수입으로 발레단을 빠듯하게 꾸렸는데 IMF 한파가 몰아치면서 학생들이 대거 그만뒀다. 제임스 전 부부는 살던 아파트를 팔아 발레단 명맥을 힘겹게 이어갔다. 부부는 집값이 싼 곳을 찾아 월세를 전전했다. 2001년 9·11 테러가 터졌을 땐 6개월 문을 닫았다. 당시 ‘창고’라는 대형 기획 공연을 야심차게 만들었는데 테러 여파로 위기감을 느낀 기업들이 문화접대비 지갑을 꽁꽁 닫으면서 기업들이 티켓을 전혀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 2월 현재 SBT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과천에서 다시 시작했다. 이후에도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세월호 참사’,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험로를 넘어야 했다.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발레단을 운영한다는 건 솔직히 모험에 가까워요. 저희 부부는 발레단을 창단할 때 아이를 갖는 걸 단념했어요. 대신 발레단 단원들을 자식으로 품었습니다. 발레단을 운영하면서 아이를 갖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있으면 잘 키우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발레단만 신경 쓸 수도 없죠. 그 욕심을 버렸기에 발레단에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창단 20주년 기념작으로 ‘BEING’(현존)을 택했다. 다음달 22~23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다. 제임스 전은 1995년 창단하던 그해 현존1, 1996년 현존2, 1998년 현존3을 무대에 올렸다. 현존1은 랩, 현존2는 록, 현존3은 미래적인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무용에 록, 뮤지컬 등 여러 장르의 공연을 가미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다들 깜짝 놀랐다. 이번 공연에선 현존1~3을 1시간 10분 분량으로 압축해서 하이라이트만 무대에 올린다. “현존을 통해 저희의 영혼은 아직 젊고 여전히 도전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저와 아내도 무대에 오릅니다. 어떤 장면에서 등장할지는 비밀입니다.” 제임스 전은 열두 살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갔다. 회계사가 되려고 공부하다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했다. 대학 2학년 때 취미로 연극을 배웠는데 지도 교수가 연극을 하려면 무용을 잘해야 된다고 했다. “재즈, 현대무용 등 여러 춤을 접했는데 저랑 안 맞았어요. 고전음악에 맞춰 부드럽게 움직이는 발레를 본 순간 ‘저거다’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샌프란시스코발레단원이었던 지도 선생님께서 ‘너는 재주도 있고 음악성도 풍부하다’며 발레를 적극 권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발레에 푹 빠져 버렸죠.” ●작품·안무 첫 수출… 새달 기념작 ‘BEING’ 무대 올라 1983년 뉴욕 줄리아드 예술대학에 입학했다. “뉴욕의 유명학원 선생님께서 발레를 배우러 오라고 해서 뉴욕으로 갔습니다. 아르바이트해서 모아뒀던 2000달러만 달랑 들고 갔죠. 이를 악물고 버텼어요. 소규모의 한 아파트에서 서너 명이 같이 살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를 충당했어요. 줄리아드 예술대학 오디션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이 없어 대출도 받고…. 진짜 힘들었죠.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해요.” 졸업 후 플로리다발레단에 입단했다. 1987년 유니버설발레단의 객원무용수로 초청받아 한국을 찾았다. 운명의 여인을 만났다. “당시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이 미국인이었는데 그분이 미국에서 제가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한국에 와서 발레를 좀 해달라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에 1년쯤 있다가 미국으로 가려 했는데 지금의 아내를 만나 새 삶을 살게 됐습니다.” 제임스 전은 1989년 결혼 뒤 부인과 함께 유니버설발레단에서 활동했다. SBT는 그동안 102개의 작품을 만들어 980회 이상 공연했다. 제임스 전은 그중 90여개의 작품을 창작했다. 1998년 무용예술사 선정 ‘올해의 안무가상’을, 2004년 ‘백설공주’로 ‘무용예술상 작품상’을, 2005년 ‘올해의 예술상 무용부문-은상’ 등을 받으며 국내 대표 안무가로 입지를 굳혔다. 2001년부터는 국내 최초로 해외에 작품과 안무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한국체육대학 생활무용학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잘하던 학생이 요가 전향 안타까워… 4대 보험 들어 보호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은 고전 발레를 중시합니다. 저희는 고전발레단이 아닙니다. 늘 혁신합니다. 새로운 ‘우리 것’을 만들죠. 이게 저희 발레단의 자부심입니다. 대중적으로 봤을 땐 많은 분들이 현존을 최고 작품이라고 하는데 제가 최고라고 여기는 작품은 없습니다. 모든 작품이 그때그때 하나의 의미가 있고 추억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는 “살면서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작품을 만든다”고 했다. “고등학생 땐 록과 춤에 빠졌었어요. 뉴욕에서 공부할 땐 음악, 미술, 패션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유럽 발레단 단원으로 활동할 땐 유럽 문화를 접했습니다. 영감은 없습니다. 살아온 삶에서 작품이 나옵니다.” 국내 발레단체 중 현재 4대 보험(국민연금보험, 고용보험, 국민건강보험, 산재보험)에 가입된 곳은 SBT를 비롯해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광주시립발레단 등 4곳뿐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안타까움을 많이 느껴요. 학생들 중에는 중도에 포기하거나 졸업 뒤 꿈을 접는 애들이 많아요. 잘하는 학생들도 요가, 필라테스, 공연기획 등으로 진로를 바꿔요. 춤을 추고 싶은데 직업적으로 춤을 출 곳이 지극히 적기 때문이죠. SBT처럼 단원들 4대 보험을 들어주는 직업단체들이 전국에 퍼져야 합니다. 그래야 젊은이들이 꿈을 키울 수 있고, 훌륭한 안무가, 예술감독, 무용수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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