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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7년 민정수석실 건의서 내용

    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진입을 석 달 앞두고 청와대 일각에서 일었던 ‘姜慶植-金仁浩’ 경제라인 교체 움직임은 우리나라가 최악의 환란을 피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소장층을 중심으로 한 이 움직임은 그러나 끝내 미완(未完)에 그쳤고,이후 우리나라는 빠른 속도로 환란(換亂)을 향해 치달았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근무한 한 비서관이 29일 밝힌 이 ‘姜-金라인 교체건의서’는 모두 A4용지 5쪽 분량으로 ▒환란으로 치닫던 당시 상황과 ▒정부의 미온적 대응에 대한 비난여론 ▒姜-金라인 교체 필요성 등 크게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건의서는 “외환위기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姜부총리는 ‘우리 경제의 하부구조가 튼튼해 동남아시아와 같은 위기상황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라며 지방순회강연에 나서는 등 사태에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金仁浩 수석에 대해서는 “경제상황의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건의서는 그러나 金泳三 대통령에게 보고되기에 앞서 文鐘洙 민정수석에 의해 묵살됐다.이 비서관은 “姜-金라인을 교체해야 한다는 건의서가 작성됐으나 文수석이 이를 묵살하는 바람에 결국 대통령이 이후 상당기간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陳璟鎬 kyoungho@
  • 기아사태 증인신문 이모저모

    국회 IMF 환란조사 특위는 29일 金仁浩전청와대경제수석과 李秀烋전재무차관·李信行전기산사장 등을 증인으로 소환,기아사태에 대한 신문을 계속했다.청문회는 폭설에 따른 교통정체로 일부 증인들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20여분 늦게 시작됐다.▒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李전의원(기산사장)은 수의 차림으로 교도관들의호위를 받으며 예정시간에 맞춰 도착해 張在植위원장, 국민회의 張誠源의원등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대기했다. 뒤이어 金전수석 등이 도착하자 張위원장은 “궤변이나 늘어놓는 비협조적인 사람도 있는데 주관적인 입장에서 양심에 따라 답변해 달라”고 당부하며 청문회 재개를 선언.▒위원들은 李전사장의 답변 태도를 놓고 여러차례 격돌.李전사장은 자민련鄭宇澤의원으로부터 “98년 신성한 국회를 ‘방탄국회’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란 추궁을 받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방탄국회로 득을 본 것은 오히려 여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흥분한 鄭의원이 “외환위기의 단초가 된 기아 비자금을 만든 하수인이자 정치권을 오염시킨장본인으로서 책임의식 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공박하자 그는 “여권이 방탄국회 책임을 나에게 뒤집어 씌우면서 여대야소 구조를 만든 것 아니냐”고 강변. 이에 李允洙의원은 “방탄국회는 李전사장 때문에 생긴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라며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늘어 놓지 말라”고 호통.▒李전사장의 ‘표정’도 질책의 대상이 됐다.李전사장이 말을 할 때마다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위원들은 “비웃는다”며 발끈.張위원장은 “원래 모습이 그런지는 모르지만 시청자들의 항의도 있다”면서 “가능하면 웃는모습을 보이지 말아 달라”고 주문.▒오는 2월8일과 4·5일 청문회 출석이 예정된 金泳三전대통령과 차남 賢哲씨의 증언을 들어야 한다는 발언이 이어져 눈길. 金榮煥의원은 “92년 총선전 李전사장이 賢哲씨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추궁하다 “賢哲씨가 증인으로 나오면 묻겠다”며 賢哲씨의 출석을기정 사실화하기도.張誠源의원은 “97년 초 賢哲씨가 李起鎬전기아그룹종조실장에게 전화를 해 ‘어려운 게 없느냐’‘뭘 도와줬으면 좋겠느냐’는 등의 이야기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기아 처리가 지연된 배경에 의혹을제기하기도. 姜東亨 yunbin@
  • 강서 마곡지구 개발 본격화

    서울의 서부 관문인 강서지역 마곡지구 개발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강서구(구청장 盧顯松)는 28일 21세기 구 발전의 관건이자 숙원인 마곡지구 개발을 앞당기기 위해 대외협력반과 실무추진반으로 ‘마곡지구 개발 추진반’을 구성,본격 가동했다. 趙大龍 부구청장을 총괄반장으로 대외협력반은 기획예산과 정책개발팀과 문화공보과 공보팀으로,실무추진반은 도시정비과 도시계획팀과 도시개발팀으로 짜여졌다.현재의 구 조직체계를 유지하면서 프로젝트 팀 형식을 취해 실무능력을 강화한 것이 특징. 대외협력반은 개발계획이 확정될 때까지 ▒마곡지구 조기개발을 위한 추진전략 수립▒정당,시·구의원,주민대표 등을 중심으로 구민의견 통합 및 분위기 확산▒기타 개발공감대 조성을 위한 홍보활동 전개 등의 임무를 맡게 되고,실무추진반은 ▒각종 민원,그린벨트 행위허가,토지 형질변경 단속 등 현안 처리▒시 및 중앙부처와의 실무협의▒실태조사 및 도시계획 차원의 종합계획 수립 등을 담당한다. 120여만평에 이르는 마곡지구 개발은 지난 96년 초 막대한 재원등을 이유로 유보된데 이어 IMF체제로 계속 늦춰졌지만 지역개발 및 일자리창출 등 국가경제 회복 차원에서 올해 시 업무계획 및 건교부의 제4차 국토종합계획에포함되는 등 조기개발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金宰淳 fidelis@]
  • 무분별한 해외여행 자제를

    요즘 김포국제공항은 해외여행을 나가는 내국인들로 무척 붐빈다고 한다.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급감했던 해외여행객들이 IMF 이전 수준으로다시 늘어난 것이다. 해외여행객 숫자로만 보면 IMF가 벌써 끝났는가 착각할정도다. 문화관광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내국인 출국자는 29만4,000명으로 IMF체제가 막 시작된 97년 12월에 비해 36.8%나 늘었다.이같은 증가세는 올들어서도 계속돼 1월에만도 지난해 1월보다 50% 늘어난 34만여명이 출국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IMF관리 첫해였던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해외여행객은 97년보다 37.8%나 줄었다가 지난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증가세로 되돌아선 것이다. 다음달 14일부터 시작되는 설 연휴기간의 상황은 더욱 걱정스럽다.태국·필리핀 등 동남아나 남태평양의 유명 관광지로 가는 항공편은 일찌감치 예약이 끝난 상태라고 한다.나흘간의 연휴기간중 해외여행자는 3만5,000여명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계산이다.IMF 관리체제를 상상하지 못했던 97년 설 연휴의 해외여행객 수를 정확히 회복하는 셈이다.여행객 숫자만 문제가 아니다.설 연휴 여행객의 행선지가 대부분 ‘춘절(春節)세일’이 열리는 홍콩이나 골프를 즐길 수 있는 호주·필리핀 등이다.IMF사태 이전의 무분별한 ‘싹쓸이 관광’이나 향락·탈선관광이 되살아나는 조짐이다.여행객 증가와 함께 국제공항에는 골프채·밍크·녹용 등 사치성 소비재 반입도 부쩍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어려운 경제를 살리기 위해 건전한 소비는 권장해야 한다.그러나 무분별한해외여행으로 아까운 외화를 마구 쓰는 것은 다르다.해외여행에 쓰는 돈은내수를 진작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먼 국부(國富)의 유출이라 할 수 있다.더구나 지금은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한푼의 외화라도 아껴야 할 때가 아닌가.지난 1년 동안 온 국민들의 고통스런 노력으로 이제 겨우 외환위기의 급한 불은 껐다고 하지만 경제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실업자는 200만명에육박하고 있지 않은가. 다행히 우리는 지난해 무역수지 흑자와 함께 몇년 만에 모처럼 여행수지도흑자를 기록해 외환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큰 힘이 됐다.외국관광객이 갑자기 늘어났다기보다 모두가 해외여행을 자제한 결과다.IMF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무분별한 해외여행으로 외화를 마구 쓸 때는 더더구나 아니다.
  • 경제청문회-李經植·姜慶植씨 신문 답변

    ‘국회 IMF환란 조사 특위’는 27일 李經植전한국은행총재,姜慶植전경제부총리,金仁浩전청와대경제수석 등 증인 3명과 참고인 5명을 상대로 환란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신문을 계속했다.다음은 신문 요지.■ 李經植전한은총재 증인신문▒(자민련 魚浚善의원)93년 금융실명제 실시도 외환위기의 원인이 아닌가. 경기가 나쁠 때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고,金泳三전대통령의 공약사항이며 정권초기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정치적 치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그렇지 않다.금융실명제가 국제수지 적자 폭을 늘리는 원인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외환위기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말하기 어렵다.▒(자민련 鄭宇澤의원)97년 한은법 파동시 은행감독원이 한은에 남아있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렇지 않다.건전성 감독을 중앙은행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은감원을 둘러싼 밥그릇 싸움이 아니었나. 그건 아니다.하여튼 한은에 그냥 두겠다는 것이었다.▒외환관리상 단기자금 위주의 차입구조도 환란 원인이 아니었나. 주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경제팀의실패를 인정한다.▒환율정책에 대한 한은의 역할은. 통화가치의 안정에 주력하는 것이 주된 관점이다.▒金전대통령 시절 환율이 기본적으로 고평가됐는데. 심한 고평가 수준은 아니었다.전반적인 추세가 고평가되는 쪽으로 가지는않았다.▒(국민회의 張誠源의원)한은이 외화자금의 무분별한 차입을 감독할 의무를태만히 한 것 아닌가. 단기차입이 외환위기의 큰 원인이었다.▒문민정권의 단기부채 급증이 외환위기의 직접 원인 아닌가. 그렇다.단기부채의 상환을 요구받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빚을 연기시키지 못해 환란이 닥쳤다.▒외환관리를 하지 못한 책임은. 위기의 근본원인은 힘에 부치는 부채경영을 하고,그것이 잘하는 것처럼 모두 따라가고,제어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은 따라가지 못하고,해외쪽 차입문호가 닫히고,이런 것들이 복합된 것이다.▒(국민회의 秋美愛의원)외자가 이탈하는 시점에 금리를 적기에 올리지 못했는데. 어떤 강력한 정부도 국내금리를 올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금융개혁법 처리를 둘러싸고 밥그릇 싸움을 하느라 외환업무를 소홀히 한것이 아니냐. 외환부문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姜慶植전부총리 증인신문▒(국민회의 丁世均의원)취임당시 실물경제와 금융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경기가 하강 국면에 들어갔고 업계에서는 경기부양책 요구가 있었다.▒국제경쟁력은. 좋지 않았다.고비용 저효율에 문제가 있었고 수출주력 상품인 반도체 등의가격이 급락했다.교역조건도 악화되는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다.▒문민정부 동안 원화 고평가의 지속,확대가 경상수지 적자와 과소비의 주요인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과소비의 가장 큰 원인은 과소득이라고 생각한다.개방경제시환율이 실물경제와 동떨어져서 따로 갈 수 있어 어려움은 있었다.▒증인이 취임 이후 93년 상반기에 환율을 상승시키는 등 특단의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데. 93년 기준으로 원화 고평가 상태로 환율을 운용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지금생각하면 환율이 오히려 떨어지고 안정상태였던 4,5,6월에 환율변동폭을 없애는 정책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자민련 鄭宇澤의원)74년 경제위기관리 시스템과 비교해 환란 대응에 문제가 있었는데.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다.74년 1차 석유파동때와 97년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70,80년대에는 정부가 결정하면 실천에 옮겨졌는데 97년에는 어려웠다.위기관리 시스템보다 문제해결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던것이다.▒당시 재경원에는 한국은행처럼 외환모니터링을 위한 전문팀이 없었는데. 97년 5월에 모니터링시켰다.▒10월22일 기아처리문제 발표가 신인도 하락을 불렀는데. 국내와 해외에서 상반된 평가가 나왔다.그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金大中대통령의 위기수습 노력을 보고 느낀 감회는. 가장 아쉬운 것이 지금 시행중인 구조개혁을 그때 서둘렀어야 한다.취임 직후 구조개혁을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그때 구조개혁을 할 수있도록 힘을 모아줬어야 했다.불난 집에 불을 끄러 갔다가 못 끄는 바람에방화범으로 몰린 것이다.▒(국민회의 張誠源의원)기아그룹 金善弘전회장이 퇴진하지 않아 기아사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부도유예기간 동안 기아가 구조조정하길 기대했는데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다.▒金전회장의 막강한 정치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기아살리기 운동 등으로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어떻게 몰아갔는지는 다 알고 있다.‘대마불사’라는 생각으로 버텨갔다고 생각한다.▒증인의 기아 법정관리 보고를 묵살한 金전대통령에게 기아사태의 1차적 책임이 있는데. 동의하기 어렵다.당시 기아처리가 지연된 것은 노조가 강성인데다 일부 언론,시민단체,정치권,기아 경영진 등에서 엄청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그런상황 속에서 찾아가야 한다.대농이나 진로는 부도를 유예하면서 기아만 유예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다.▒(국민회의 金民錫의원)97년 7월의 위기상황은. 3월 취임 이후 6월까지 다소 안정돼 가던 것이 7월 기아부도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다.▒3월과 7월의 위기상황을 비교하면. 3월쪽이 더 심각했다.▒7,8월 상황을 전혀 잘못 읽은 것이 아닌가. 오판이라기보다는 태국 등 동남아사태가 우리나라에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정당팀
  • 오늘의 헤드라인-환율정책 실패 시인

    국회 ‘국제통화기금(IMF) 환란(換亂)조사 특위’는 27일 전체회의를 속개,姜慶植전경제부총리 李經植전한국은행총재 金仁浩전청와대경제수석 등 ‘환란 빅3’ 등을 소환해 원화 고평가와 외환위기를 막지 못한 시스템 부재,기아사태 처리 지연 등을 집중 추궁했다. 姜전부총리는 “IMF로 간 것을 놓고 볼 때 상황이 다소 좋았던 97년 4∼6월 환율변동폭을 넓혔어야 했었다”면서 “당시에는 환율이 안정돼 있어 미처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환율정책 실패를 시인했다.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하루 전인 97년 11월 20일 환율변동폭을종전의 2.25%에서 10%로 확대하고 그해 12월 16일에는 완전 폐지했다.姜전부총리와 李전총재는 그러나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 데에는 원화가 고평가됐기 때문은 아니다”라면서 “97년의 환율은 적정했다”고 주장했다. 姜전부총리는 “기아사태 처리가 늦어진 것은 기아자동차를 국민기업이라고 보는 정치권과 시민단체,일부 언론,기아의 강성노조 때문”이라면서 “金善弘 전 기아그룹회장은 구조조정은 하지 않고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해 문제가 많았다”고 밝혔다. 28일에는 金善弘 전 기아그룹회장과 韓丞濬 전 기아그룹부회장 등 기아의전직 고위임원들을 소환,기아사태를 신문한다.기아사태와 관련한 증인 신문은 2월1일까지다.
  • 쟁점-금융개혁 법안

    26일 증인신문에서 金元吉정책위의장과 姜慶植전부총리가 한판대결을 벌였다.신·구여권의 대표적 경제통들이 ‘창과 방패’로서 정면충돌한 것이다.姜전부총리와 林昌烈전부총리의 엇갈린 진술내용도 관심을 끌었다.?겉記퓽揚? 공세는 초반부터 매서웠다.탄탄한 경제논리와 구체적 상황근거가 주요 무기였다.하지만 해박한 경제지식과 ‘소신’을 앞세운 姜전부총리의역공도 만만치 않았다.시종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공방전이 펼쳐졌다. 金의장은 姜전부총리가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추진했던 ‘금융개혁법안’을건드렸다.“금융개혁을 저지했던 야당도 환란책임을 면할수 없다”는 姜전부총리의 논리를 정면돌파하기 위함이다.金의장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금융개혁초안이 姜부총리의 개입으로 상당부분 변질·왜곡됐다”고 전제,“대선을 앞둔 구여권도 정치적 부담을 의식해 소극적으로 돌아섰다”며 금융개혁의 허구성을 집중 파헤쳤다.이에 姜전부총리는 “당시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대외 신인도였고 금융개혁은 신용도 회복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라고 항변했다. 姜전부총리의 안이한 ‘상황인식’도 도마위에 올랐다.金의장은 “당시 경제팀은 여름 장마는 예측했지만 둑이 무너질 정도의 집중호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97년 10월 초순 급박한 상황에서 姜전부총리가 전국 순회강연에 착수한 것이 단적인 예”라고 몰아쳤다.이에 姜전부총리는 ‘지진론’으로 맞섰다.“내진 설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진이 일어나 견디지 못한것”이라며 ‘불가항력’을 강조했다.姜전부총리의 ‘기초여건 건실론’에맞서 金의장은 “기초여건은 상대적 개념이며 姜전부총리가 취임했던 97년 3월에 이미 외환위기는 잉태된 상태로 진행되고 있었다”며 정책실패를 거듭추궁했다.?검æㅼ汰煥光祺?의 엇갈린 진술내용도 초점이 됐다.林昌烈 전 경제부총리가 취임한 97년 11월 19일의 기자회견을 할 때 IMF 구제금융신청 사실을 알았느냐 여부다. 姜전부총리는 26일 “당시 尹增鉉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은 IMF로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林전부총리는)여러가지 상황을 보면 IMF와 협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것”이라고 말했다.전날 林전부총리가 “취임 기자회견을 하는 날에 IMF로 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며 “IMF로 가는 것을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는 진술을 뒤짚는 증언이다. 姜전부총리는 “(林전부총리는)IMF 문제가 나왔을 때에는 ‘그 문제가 워낙 중요하므로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한다’는 취지로 발표했더라면 국제적으로 신뢰를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지만 “IMF 도움없이도 풀어나갈 수 있다는 취지로 말해 문제가 많았다”고 증언했다.郭太憲 吳一萬 tiger@
  • IMF시대 “안먹고 안썼다”

    지난 해 1∼3분기 가계소비지출이 사상 최대인 12%나 줄어 경기침체의 주요 원인이 됐던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은행이 26일 발표한 ‘외환위기 이후의 가계소비행태 변화’에 따르면가계소비지출은 외환위기 이전인 97년 1∼3분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4%의 증가율을 보인 반면 외환위기 이후인 98년에는 12% 줄었다. 이는 같은 기간의 경제성장률(-5.9%)보다 훨씬 큰 폭의 감소세를 보인 것으로,설비투자 감소와 함께 경기침체의 주 요인으로 작용했다.가계소비지출은97년 1∼3분기에는 성장률을 2.5%포인트 끌어올렸으나 98년 1∼3분기에는 6.5%포인트 끌어내렸다. 연간 기준으로 가계소비지출이 줄었던 때는 80년(-0.5%)뿐이었다. 소비형태별로 보면 승용차와 TV·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내구재 구입이 43.6% 줄었다.가계의 국외소비도 해외여행의 감소로 49.4%나 줄었다. 한은은 스웨덴 등 외환위기를 겪었던 나라의 예로 미뤄볼 때 소비가 회복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吳承鎬 osh@
  • ■구미공단 지역-“공장 이전 한다더라”

    “광주시에 1,000만평이상의 공단을 조성해 구미공단 업체를 그 곳으로 옮긴답니다”. 악성 유언비어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경북 구미시.26일 오전 기자가 탄 택시에서도 유언비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40대 택시운전기사는 “구미공장의 전라도 이전으로 승객이 줄어 앞으로 택시 운전도 하기 힘들 것 같다”면서 “OB맥주 구미공장이 문을 닫고 광주로 옮겼는데도 요즘 보도는 유언비어로 돌린다”며 오히려 언론을 질책했다. 구미 최대 번화가인 원평동 2번도로에서 여성의류 대리점을 운영하는 金모씨(47·여)는 “‘광주 백화점은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들었다”면서 “이러다보니 요즘 주변 상인들은 임대료도 내기 힘든 구미에서 광주로 옮겨 장사해야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이같이 지난해 말부터 구미지역에 급속히 확산된 유언비어는 현재 20여개.?걜悶윷卵? 한국전자 구미공장을 광주시로 옮긴다 ?갯ケ銖? 휴업에 들어간 OB맥주 구미공장의 생산기계를 철거해 광주로 옮겼다 ?걋歡捉동〈? 실업자가없다 등.근거나 출처가 전혀없이 떠도는 것들이다. 유언비어에 시달리는 한국전자 禹仁哲공장장은 “공장 이전에만 수천억원이 들고 광주에는 연고가 전혀 없어 실현 가능성은 단 1%도 없다”고 말했다.코오롱구미공장 趙元圭공장장은 “구미공장은 중화학공정이어서 시설 이전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여권 인사들이 최근 잇따라 현지에 내려와 지역경제 현안에 대해 상공인 및 주민들과 간담회를 갖는 등 민심 달래기에 나섰으나 유언비어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 11일 유언비어근절 비상대책회의에 참석한 구미상공회의소 金鍾培조사과장은 “구미공단은 IMF이후 50대재벌의 부도가 1개업체도 없어 축복받은 곳이라고까지 불렸다”면서 “그러나 OB맥주가 자체 생산량 감축계획에따라 지난해 8월 구미공장 가동을 중단한 이후 주민들이 위기감을 느끼다가지난해 말 대우전자와 LG반도체의 잇따른 빅딜 발표로 악성 유언비어가 나돌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 자민련 ‘YS 직접증언’ 철회?

    경제청문회가 무르익으면서 증인신문 강도 등을 둘러싸고 공동 여당간의 의견조율도 한창이다.金鍾泌총리는 26일 오전 金大中대통령과 독대를 한뒤 자민련 당사를 찾았다.새해들어 처음이다.金총리는 당사에서 朴泰俊총재와 金龍煥수석부총재를 15분동안 만났다. ‘청문회’문제를 논의했다고 설명했다.다음달 2일 중동방문에 앞서 인사차 들른 의미도 있다고 했다. 청문회와 관련해 핵심은 金泳三전대통령이다.金龍煥수석부총재는 “YS증언문제를 상의했다”고 말했다.이어 “국민회의보다 자민련이 강경하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덧붙였다.직접증언 방침을 철회했다는 해석을 낳게 한다.비디오증언 또는 방문조사 등 간접방식으로 바뀌는 분위기다.차남 賢哲씨에대한 3·1절 사면설도 주목된다. 또 다른 유추가 가능하다.전날 林昌烈경기도지사는 ‘국회 IMF환란조사특위’에 참고인으로 출석했다.자민련 의원들은 맹공을 가했다.두 여(與)간 마찰로 비쳐졌다.金大中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을 가능성을 읽게 해준다.자민련쪽에는 자제 당부로 이어진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언급이 둘 있다.朴泰俊총재는 이날 “흥분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李完九대변인은 “金총리가 실질적으로 유효한 청문회가 되도록 주문했다”고 소개했다. JP의 ‘행차’를 놓고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내각제 연기론’ ‘합당론’과 연결짓는 관측들이 나돈다.이날 金대통령으로부터 모종의 제의를 받았거나,그에 대한 의사표시가 아니냐는 해석들이다.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별로크지 않다.朴총재는 이 부분에서 ‘JP의 파트너’가 아니기 때문이다.朴大出 dcpark@
  • 林昌烈씨 일부 책임론 제기

    국회 ‘MF 환란조사 특위’는 26일 전체회의를 속개,姜慶植전경제부총리,金仁浩 전청와대경제수석 등 7명의 증인과 羅雄培전경제부총리,姜萬洙전재경원차관 등 3명의 참고인을 소환,외환위기를 초래한 경제정책을 집중 신문했다. 특위 위원들은 신문에서 IMF 구제금융 신청 과정에서의 최고 정책결정권자들의 정책적 오류,金泳三정부 환란보고체계 이상 여부,위기 관리체계의 가동 여부를 추궁했다. 姜전부총리는 답변에서 “긴박한 97년 11월 우리나라가 부도상황에 몰려서도 IMF의 구제금융 상황까지 가야하는 것은 미리 알지 못했다”면서 “경제운영의 책임을 맡았던 사람으로 외환위기를 막지 못해 온 나라가 환란 고통을 겪고 있는데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정책잘못을 시인했다.그는 답변도중 여러차례 “환란을 막지 못한 속죄의 마음으로 국민앞에 사죄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姜전부총리는 “林昌烈전경제부총리에게 IMF행은 알리지 않았지만 후임자인 그가 11월19일 취임 당시 ‘IMF행’을 몰랐을 것으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林전부총리가 취임당일 기자회견을 통해 ‘IMF의 도움없이도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발언,대외 신인도의 하락을 가속화시켰다”며 ‘林전부총리 일부 책임론’을 제기했다.柳敏 rm0609@
  • 11월16일 캉드쉬와 자금지원 합의

    ‘국회 IMF 환란조사 특위’는 26일 姜慶植전경제부총리,金仁浩전청와대경제수석 등 증인 7명,참고인 3명을 상대로 환란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신문을 벌였다.다음은 신문 요지.■姜慶植전부총리 증인신문??(국민회의 金民錫의원)외환위기 감지 시점은. 97년은 연중 위기상황이었지만 11월에 와서 국가가 부도상황에 몰려 IMF의지원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알게 됐다.?같姸┒置?상 위기예고를 7월부터 무시했는데. 경제위기 얘기는 3월 입각때부터 나왔다.한보 부도 등으로 매일 금융대란설이 보도되는 등 이미 위기상황에 있었다.주변에서는 정권말기에 왜 입각하느냐고 만류했지만 경제 침몰을 우려해 들어가서 일하기로 했다.??11월 이전 외환위기 징후는. 경제 운영자로서 당연히 알았다.그래서 10월 말 증시안정대책 등 경제정책을 추진했다.그러나 10월까지는 롤오버(만기연장)가 80∼90% 정도는 됐는데11월 급락하기 시작했다.종래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들어갔다.??7월 외환위기 대책을 세웠나. 10월 말 상황에서 11월 위기를 예상치 못한 것은 나만이아니다.IMF평가단의 10월15일 기자회견때도 그런 얘기는 없었다.98년 9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가서도 ‘예견하기 어려웠다’고 언급했다.??(자민련 金七煥의원)11월18일 금융시장안정 대책회의 내용은. 금융개혁법이 통과되지 않아 발표내용을 정리하고 의견을 교환했다.IMF행은 논의하지 않았다.??IMF행은 누가 알았나. 참석한 재경원 직원 가운데 尹增鉉금융정책실장 정도만 ‘구두발표’ 사실을 알았다.??19일 IMF행 발표는 언제 최종결심했나. 주초인 17일쯤이다.?곕탐퓽揚? 언제 알았나. 발표 전 ‘발표 형식’을 상의했다.尹실장이 발표 시기를 알았는지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尹실장은 기자회견문에는 넣지 말고 회견문 낭독 말미에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갹탔啖光祺?와 인수·인계하지 않았나. 19일 대통령 보고후 오후 5시 기자회견,저녁 미국 루빈재무장관 통화 등이예정돼 있었다.대통령에게 ‘IMF행을 구두 발표하겠다’고 했다.보고후 경질을 통보받았다.후임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이라 5시 기자회견은 무리라고생각해 취소시켰다.저녁에 루빈장관에게 “후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IMF로간다는 발표를 할 것이니 잘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갚뮐╂? 영향을 고려,반드시 발표해야 했는데. 11월16일 캉드쉬총재와 만나 얘기한 것이 IMF와 협의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그때 이미 IMF로 간 것이다.19일은 협의 시작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날이었다.?걷컥? 林昌烈부총리는 IMF행 발표를 몰랐다는데. 여러 상황으로 볼때 林부총리가 IMF 협의과정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발표를 언제 하느냐는 전적으로 한국정부가 일임받았다.19일 발표를 하지 않아도 됐다.그날 林부총리의 발표가 ‘IMF의 도움 없이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번복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데 문제가 있었다.대외신인도 하락을 가속화시켰다.??(국민회의 張誠源의원)3월 한국은행 보고서에 IMF 지원 요청 필요성이 명시돼 있는데. IMF관리체제로 간다는 것은 엄청난 문제다.정말 IMF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독립된 문서로 만들어 보고를 해야 했다.한은이 다른 문서 말미에 한줄을 넣어놓고 ‘IMF행을 건의했다’는 것은 말이안된다.??9월 당시 금융대란설에 안이하게 대처했는데. 금융대란설은 3월,5월에도 있었고 연일 있었다.안이하게 대처한 것이 아니라 그런 정도라면 그냥 끌고 갈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같姸╂? 펀더멘틀이 튼튼하다는 증인의 말만 믿고 국민이 안심한 것 아니냐. 정부의 책임있는 사람이 우리 경제에 문제가 있다고 했으면 그날로 거덜났을 것이다.?걋瑛潭? 창피해서 IMF에 못 간다고 했다는데. 그런 적 없다.그런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표현하겠느냐.나에 대한 인격모독이다.?곤討ㅷ뗌徨記볍뮐┷括葯? 같은 주장을 했는데. 鄭전부장 빼놓고 나에게 그런 얘기를 들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11월14일 대통령 보고시 정치적 부담과 문민정부의 자존심을 거론했나. 그렇다.우리 국민 전체의 자존심이 상하게 된 것 아니냐.??(국민회의 丁世均의원)외환보유고 관리책임 기관은. 한은이 책임·운용하는 것이다.?걘育? 당시 만성적자 상황에서 왜 자본수지로 경상적자를 메우려 했나. 경상적자에 대한 처방은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는 것이다.그래서 재정긴축을 했고 환율은 유동화시켜 실세가 반영되도록 운영했다.??2·4분기 환율 절상은 자본수지 흑자 때문이 아닌가. 97년 환율은 추세치를 전망하고 운용했으나 실제 환율은 추세치보다 낮게나타났다.??10월 지방 강연을 다닌 것은 안일한 대처 아닌가. 지방강연은 모두 9곳을 다녔다.당시 IMF 평가단이 평가했듯 그렇게 위급한상황이 아니었다.10월23일 홍콩 증시가 폭락하면서 갑작스럽게 위기가 닥친것이다.??(자민련 鄭宇澤의원)林부총리의 19일 취임 기자회견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16일 캉드쉬총재와의 회담에서 이미 제가 한국 대표로 지원요청 의사를 표시,수락받았다.대한민국과 IMF가 자금지원을 합의한 것이다.이것을 19일 회견에서 林부총리가 공식적으로 번복,취소했다.이것은 엄청난 변화다.국제신용도 제고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16일 회담에서 거시지표는 손대지 않겠다는 구두약속을 받았나. 그런 사실 없다.?걋京? IMF의 고금리정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나. 적절한 처방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거시경제 운용 자체는 건실했기 때문에 멕시코 위기와는 달랐다.결과적으로 대단한 문제를 가져왔다.
  • 증인·참고인 신문 이모저모

    이틀째 증인·참고인 신문을 벌인 27일의 ‘IMF 환란조사 특위’의 청문회는 姜慶植전경제부총리 등 환란위기의 와중에 핵심에 있었던 인물들이 대거나와 특위위원들과 팽팽한 입씨름을 벌여 ‘청문회 하이라이트’였다는 평가를 받았다.?걘? 질의에 나선 국민회의 金民錫의원과 姜전부총리간에는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고도의 신경전’을 벌였다.姜전부총리가 신상발언을 요청하자 金의원은 제동을 걸다가 張在植위원장이 허용하자 “질문시간에서 姜전부총리의 발언시간을 빼줄 것”을 요청했다.특히 姜전부총리는 “외환위기에 대한 용어 자체에 혼돈이 있다”며 외환위기에 대한 정의를 놓고 金의원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검㈏煥光祺?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이따금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金의원이 일본계은행들의 대출금 회수 등을 거론하며 “외환위기를 예고하는 지표를 제대로읽었는가”라고 묻자 姜전부총리는 “하나하나 말할 기회를 달라”며 반박할 자신이 있다며 아쉬운표정을 짓기도 했다.?검㈏煥光祺?는 대권을 꿈꿨다는 내용이 담긴 자신의 일기가 거론되자 “남의 일기에 대해 자꾸 얘기하지 말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국민회의 秋美愛의원의 계속된 일기내용 공세에 한때 답변을 거부하자 張위원장은 “외환위기 이후에 쓴 일기라도 환란규명에 관련이 있다고 판단될 수 있다”고 秋의원을 거들었다.秋의원은 “일기에는 자기 반성과 성찰이 없고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만 나와 있다”고 일침을 가하고 “마음을 건드렸다면 이해해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검㈏煥光祺?는 증인신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張위원장에게 신상발언을 요청하는 등 경제청문회를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對국민용’으로 활용하려는계산이 엿보였다.姜전부총리는 신상발언에서 “경제운영의 책임자로서 환란을 막지 못해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설사 본인의 답변이 변명같이 보일지라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姜전부총리는 첫날 다른 증인들이 답변에 대비,서류가방에 답변자료를 준비해온 것과는 달리 맨손으로 청문회장에 들어서 눈길을 끌었다.그러나 정작청문회가 시작되자 주머니에서 A4용지 20여쪽 분량의 자료를 꺼내 질의에 대비하는 등 청문회에 대비,치밀한 준비를 해왔음을 보여줬다.崔光淑 bori@
  • “IMF를 국제중앙銀으로”조지 소로스 제의

    ┑워싱턴 AFP 연합┑미국의 금융투자자인 조지 소로스는 국제통화기금(IMF)을 금융위기 방지기능을 가진 국제중앙은행으로 전환시킬 것을 제의했다.소로스는 24일 발매된 뉴스위크 최신호와 가진 회견에서 IMF가 최근의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보다는 문제의 일부가 돼온 것이 현실이라면서 따라서 이 기구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 경제청문회-속기록

    국회 IMF 환란 특위는 25일 李經植전한은총재,洪在馨전경제부총리 등 증인 4명을 상대로 환란 원인을 밝히기 위한 신문을 벌였다.林昌烈경기지사를 상대로는 경제부총리에 임명된 뒤 첫 기자회견 당시 IMF 구제금융을 받기로 한정부 방침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다음은 증인·참고인 신문 요지.■李經植 전 한국은행총재 증인신문▒(자민련 李健介의원)97년 11월 10일 오후 9시 30분쯤 金泳三전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사실이 있나. 있다.▒金대통령이 뭐라고 했나. 전화를 받고 당황했다.金대통령은 “李총재,주식시장도 나쁘고 이자율도 올라가고,환율도 불안한 등 경제가 어렵다는데 사실인가”라고 묻고,얘기해 달라고 말했다.그런데 나는 12일로 기억된다.▒뭐라고 답변했나. 다 어렵지만 더 긴급한 것은 외환사정이라고 했다.외환사정이 극도로 나빠잘못하다간 국가부도위기 사태가 올 수 있기 때문에 긴급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金泳三정권 탄생 당시 ‘동숭동팀’과 연계,경제정책의 아이디어를 많이낸 사람으로서,한은총재로서,당연히 국가원수가 전화하기 전에 찾아가 (외환위기에 대한) 분석보고서를 만들어 보고해야 되지 않았나.직무유기가 아니냐. 대통령 되기 전 그 어른과 관계가 있다는 말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金대통령이 당선된 뒤 공적으로 처음 만났다.11월9일 姜慶植 당시 경제부총리,金仁浩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과 얘기를 해 몇가지를 더 짚어본 뒤 (보고)할 생각이었다.▒외환시장 개입시 한은총재는 재경원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나,아니면 직무범위 내에서 상황을 판단해 아이디어를 내고 대책방안을 강구하나. 월별로 할 때는 보고서를 만든다.그러나 일건은 국제부장 보고를 받고 그때 그때 결정한다.▒97년 10월28일,11월6일 등 3차례에 걸쳐 姜慶植부총리가 한은에 전화를 걸어 외환시장 개입과 중단을 지시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했나. 10월28일엔 국제부장이 얘기해서 대체로 우리가 2.25%로는 환율변동폭을 못지킨다고 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변동폭을 지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외환을 쏟아부어야 했다.후퇴해가면서 방어하자고 했다.▒姜부총리가 국회에서답변하다 말고 전화로 지시했다던 데. 외환의 주무부서는 어디까지나 재경원이다.양측이 협의하다 안되면 재경원에 따른다.▒(국민회의 丁世均의원)한은총재로 있으면서 언제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97년 한보사건이 발생한 1월말쯤이었다.그 뒤 3∼4개월은 잘 넘겼다.그런데 기아사태로 곤란하다고 생각했다.이후 10월20일 홍콩이 못버티면 우리도 어렵다고 생각했다.구제금융 필요성을 느낀 것은 11월3일쯤이었다.▒97년 1·4분기 당시 한은이 안이하게 대처하지 않고 구제금융으로 갈 수도 있다고 느꼈어야 했다. 안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4∼6월 사태가 호전되고 환율방어를 위해 쓴 달러도 사들여 진정됐다.▒ 1·4분기에 위기를 인식했다면 환란으로 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답변은 못한다.10월 하순 이후의 사태가 워낙 커 6∼7개월 전에대처했다고 해서 10월 하순 이후 대처됐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왜 대통령에게 제때 보고하지 않았나.대통령이 몰랐다면 재경장관이나 한은총재가 보고해야 하지 않았나. 보좌를 잘못한 것은 할 말이 없지만 한은에서 보고했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국민회의 千正培의원)97년 10월28일 姜전경제부총리 주재로 金仁浩전청와대경제수석,李전한은총재 등이 대책회의를 가질 때 10월27일자 한은자료로했나. 자료를 내놓은 것은 사실이나 재경원에서 가져온 ‘토킹 포인트’(논의요점)라는 4개 사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얘기했다.▒ 이 회의에서 IMF행에 대해 얘기했나. IMF로 가는 게 주제는 아니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외환위기를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나.fm 연말까지는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자민련 金七煥의원)97년 11월 9일 한은 부총재가 국무총리실에 가서 高建 당시 총리에게 외환위기에 대해 보고한 적이 있느냐. 한은 부총재가 낮에 총리공관에 가서 보고한 것 같다.▒ 한은의 자발적인 보고였나. 아주 중요한 문제가 일어날 것인데 총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1월10일 金전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했는데 한은에서 직보를 한 적이 있나. 없다.내 기억으로는 전화를 받는게 12일로 기억된다.▒ (자민련 魚浚善의원)한은은 7차례 정도 환란을 위험성에 관해 보고서를냈다.그런데 국제부를 중심으로 환란 가능성을 경고하고,조사부를 중심으로한 거시경제 지표의 건전성 등을 보고하는 등 양면성을 띠었다. 조사부가 낙관적인 것만 보고 한 것 아니다.▒96년 경상수지 적자가 460억달러를 넘었다.경쟁력 강화를 위해 구조를 고쳐나가야 했다.대책을 세워야 했지 않느냐. 10월에 환란이 발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姜전부총리와 여러차례 회동했다.적극적으로 주장해서 대책마련을 이끌어야 했지 않느냐. 할 말은 없다.10월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면 대응도 달라졌을 것이다.▒외환위기인데 시중은행 해외점포에 돈을 꿔준 것은 잘못이 아니냐.종금사지원도 그렇다. 주식시장에서 돈이 빠져나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단기채에 대한 관리를 못했다는 데는 동의한다.▒(국민회의 張誠源의원)金전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金전대통령이 외환보유고가 얼마냐고 물은 것은 대통령 본인의 책임도 있지만 보좌진의 책임이크다. 보좌를 잘못한데 대해서는 옛날에도 말했다.▒(자민련 鄭宇澤의원)姜전부총리가 10월 28일 외환 개입을 총재에게 맡기겠다고 전화를 했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11월19일 신임부총리 기자회견을 보고 아떻게 느꼈나. 상당히 당황했다.구제금융에 대해 대통령 재가가 난 상황이어서 그랬다.■林昌烈전부총리 참고인신문(국민회의 千正培의원)IMF 구제금융신청한다는 걸 다르게 발표하거나 지시자체를 거부하거나 했을때 金전대통령으로부터 사후 질책이 있었나기자회견 이후 11월 20일 문서만들어 보고 들어갔을 때 아무런 질책 없었다.▒IMF행 언제 어떻게 처음 알았나. 재경원 간부들하고 신임 청와대 간부하고 토론회 가졌다.그때 金영섭신임수석은 가야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다음날 金瑢泰비서실장이 전화해 IMF의 피셔부총재가 온다는데 IMF문제 어떻게 하려느냐고 해 IMF로 가는 문제도 검토하겠다고 했다.가는 방향으로 해달라는 두분 말씀 종합해 가는 방향으로 상황 점검해보니까 이미 IMF로 가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었다.▒캉드쉬 면담보고와 11월16일 姜전부총리와 협의한 내용에 IMF로 간다는 얘기가 있었다는데…. 나도 이 문건 가지고 나왔다.합의서는 아니다.다음주중 2,3명의 금융전문가를 보내 실태파악 착수하겠다는 내용에 발표시기는 한국정부에 일임한다고돼 있었다.
  • 『경제청문회』쟁점…韓銀 ‘IMF행’건의 시점

    25일 증인신문 첫날은 환란위기에 대한 대통령 보고시점과 채널혼선이 ‘집중타’를 맞았다.언제 환란위기의 징후를 포착했고 위기상황이 대통령에게가감없이 전달됐느냐는 논란이었다. 의원들은 환란위기가 심각하게 진행됐던 97년 10월하순부터 11월14일 대통령의 IMF행 최종재가까지의 상황을 ‘재구성’,李經植전한국은행총재를 상대로 환란규명을 시도했다.이에 李전총재는 시종 “97년 10월부터 외환위기를강하게 느꼈고 각종 대책을 건의했지만 외환 주무부서인 재경원이 수용하지않았다”는 요지로 파상공세를 피해나갔다. 李전총재는 “IMF행이 불가피하다는 한은 보고서를 수차례나 姜慶植전부총리와 金仁浩전경제수석 등과의 10월 28일,11월 9일 대책회의를 통해 제출했다”며 자신의 ‘무혐의’를 거듭 피력했다.하지만 의원들은 “외환 흐름을누구보다 잘 아는 한은이 미리부터 외환위기를 감지하지 못했고 정부를 설득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직무태만”이라며 ‘자기반성’을 촉구했다. 李전총재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97년 1·4분기에 외환위기를 감지했더라도 6개월 사이에 근본적인 대책마련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한은은 그동안의 조사를 토대로 10월 28일 공식으로 IMF행을 건의했다”고 해명했다. 金전대통령에 대한 보고시점도 뜨거운 쟁점이 됐다.李전총재는 11월 7일 청와대 보고와 11월9일 ‘4인회의’ 사실을 밝히면서 “내각의 결정권자는 재경원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대통령에게 당연히 보고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은근히 姜慶植전부총리와 金仁浩전경제수석에게 공을 넘겼다.“金전대통령이 IMF행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姜전부총리는 내심 우방의 협조를 중요시 하는 것 같았다”며 姜전부총리의 IMF행 지연가능성을 내비쳤다. 특히 李전총재는 金대통령과의 11월 10일 전화통화 사실을 소개하면서 “金대통령이 金경제수석에게 국가부도를 막을 방법을 하문(下問)해 달라고 요청했다”며 “이러면 (IMF행이) 보다 빨리 결정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해金전수석에 대한 불만을 피력했다.吳一萬 oilman@
  • 李經植 전한은총재‘換亂 늑장대처’일부 시인

    97년 11월 IMF 구제금융 신청에 앞서 200억달러를 외국에서 빌려오면 외환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재경원이 金泳三전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시기에 한은은 300억달러가 필요하다고 판단함으로써 경제부처간에도환란대책을 둘러싸고 이견을 노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국회 IMF환란조사특위’의 증인신문 첫날인 25일 李經植전한은총재가 답변한 내용으로 외채 580억달러를 도입해 환란을 겨우 수습한점을 감안하면 정부 대처가 지나치게 안이했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李전총재는 “한보사태가 터진 97년 1월초 외환위기 가능성을 약하게 느꼈으며 8월 기아사태 때는 다소 강하게 느꼈다”면서 “11월 12일 저녁 金泳三전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경제상황에 대해 물어와 외환문제를 잘못 대처하면 국가부도사태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국제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와 무디스가 한국의국가신용 등급을 급격히 내렸을 때는 정말 어렵다고 판단했으며 IMF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은 11월3일이었다”고 답변했다. 당시 경제부총리인 林昌烈경기도지사는 참고인으로 출석,“같은달 19일 임명 직후 姜慶植전부총리로부터 정부의 IMF 구제금융 신청방침 및 발표시기에대해 인수인계를 받지 않았다”고 기존 주장을 거듭폈다.朴大出 dcpark@
  • 오늘의 눈-우리정치 부끄러운 자화상

    단상(斷想) 하나. 휴일인 24일,야당의 옥외집회장.마산역 앞뜰에는 1만5,000여명의 청중이 까치발로 귀를 쫑긋 세웠다. “현 정권은 600만평의 공단을 조성할 수 있는 마산의 발전 조건을 묵살했다”-재선의 이 지역 출신 의원은 1년 남짓 남은 차기총선까지 열기를 이어가려는 듯 현 정권에 화살을 쏘아댔다.한때 ‘잘 나가던’ 지역경제의 ‘쇠락’을 못내 아쉬워하는 눈빛이다. 단상 둘. 25일,국회 본청 145호실.‘IMF 환란조사특위’가 밤늦도록 이어졌다.전 정권의 경제실세들이 줄줄이 증인석에 소환돼 혼쭐이 났다. “증인은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외환위기를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나”-“연말까지는 갈 수 있다고…” “심각한 환란에 누가 책임져야 하나”-“… …(묵묵부답)” 증인들은 지난 악몽을 ‘액땜’하듯 이렇게 얼버무리고,저렇게 비켜갔다.때로 특위위원의 질책에 반론을 폈지만 자신있게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단상 셋. 25일 오전 한나라당 安澤秀대변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자실에 들어섰다.“마산집회는 성공적이었다.비싼 신문광고를통해 마산집회를 홍보해준국민회의에 감사한다.지난해 서울집회때와는 달리 술먹은 폭력배가 없었던점도 국민회의에 감사한다” 단상 넷. 한나라당 李富榮총무는 25일 총무회담 직후 인터뷰를 통해 “여당이 정한증인을 상대로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며 경제청문회 불참 의사를 재확인했다.여당 총무들은 “과거 경제 실정(失政)을 반성하는 뜻에서라도 야당은 거리로 나가지 말고 청문회에 동참해야 한다”고 한나라당의 ‘망국성(亡國性)’ 정치행태를 규탄했다. 단상을 잇는 어제 오늘의 풍경이 답답함을 더하게 했다.경제논리가 정치논리로 포장되고,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하는 정치현실이 환란의 근본원인은 아니었을까.경제파탄의 장본인인 야당이 과거 반성없이 정권교체의 희생양을 자처하는 몰염치에는 실소를 참을 수 없다. ckpark@
  • 『경제청문회』포커스 인물-李健介 자민련 의원

    자민련 李健介의원(전국구)은 25일에도 金泳三전대통령을 공격했다.국회 ‘IMF환란조사특위’ 위원으로 연일 맹공이다.적잖은 질문이 YS(金전대통령)를 겨냥하고 있다.그는 YS와 악연이 있다.문민정권때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됐었다.특위위원 가운데 유일하다. 李의원의 ‘폭로전’은 핵폭탄급이다.그는 지난 22일 YS의 대선자금 의혹을 제기했다.지난 92년 당시 113개 기업체로부터 5억∼800억원씩을 모금했다고 주장했다.하지만 증거를 내놓지 않았다.엄청난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다.무책임한 인상마저 준다.YS에 대한 한보 비자금 제공설도 마찬가지다.검찰 수사과정에서 600억원이 건너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그러나 입증되지는 못했다.李의원은 한술 더 떴다.대선 당선축하금 100억원을 더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증인신문 첫날인 이날 첫 질문자로 나섰다.첫 질문은 어김없이 YS로시작했다.증인으로 나온 李經植전한은총재에게 물으면서 그랬다.먼저 “지난 97년 11월10일 오후 9시30분 金전대통령으로부터 경제위기,환란위기와 관련한 전화를 받았느냐”고 추궁했다.“3당 합당 후에도 金泳三후보가 단돈 한푼을 안 받았다고 생각하느냐”고 추궁한 것은 마지막 질문이었다.朴大出 dcpark@
  • 작년 1인당 라면소비 16.5% 증가

    지난해 라면소비는 크게 늘고 쌀 소비는 줄었다.할인점·경차시장에 소비자가 몰린 반면 백화점·항공 및 관광·가전시장은 ‘파리만 날렸다’.특히 외국자본이 들어오면서 유통과 종묘산업 등은 외국기업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림부는 지난해 국민 1인당 라면소비가 전년보다 16.5% 늘었고 쌀 소비량은 99.8㎏으로 97년보다 0.8㎏이 줄었다고 밝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자유기업센터도 24일 펴낸 ‘1998년 한국의 시장’보고서에서 100개 시장 및 품목을 분석,이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위기로 시장위축이 심화됐으나 소득감소로 인한 소비패턴의 변화로 라면과 할인점 등은 새로운 시장으로 급부상했다.라면시장은IMF체제 이후 34%가 커졌으며 할인점시장은 98%,경차시장은 81%가 신장됐다.소주시장 8%,통신판매시장도 37% 신장됐다. 반면 백화점시장은 25%의 매출감소를 나타냈으며 항공여객시장 20%,광고시장 26%,맥주시장도 19%의 감소율을 보였다.가전시장도 품목에 따라 25∼50%줄었다. 통신분야에서는 이동전화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무선호출시장이 퇴조하고 있고 백화점은 할인점 위주로,자동차부문에서는 중형차가 경차 및 1t트럭시장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한편 월마트 등 외국의 대형유통업체가 국내 점포를 늘리면서 유통시장에서 차지하는 외국자본의 역할이 커지고 있으며 종자시장에서는 국내 점유율 1위업체인 홍농종묘가 다국적기업인 세미니스에 매각되고 중앙·서울·청원종묘가 외국계기업에 인수돼 외국자본의 국내 종자시장 점유율이 57%로 높아졌다.丁升敏 the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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