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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벽산그룹 김희철 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벽산그룹 김희철 회장家

    한때 18개 계열사를 거느리면서 30대 재벌그룹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외환위기(IMF)와 함께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벽산건설㈜,㈜벽산, 벽산페인트㈜,㈜인희, 동양물산 등 5개만 남은 미니그룹으로 축소된 게 오늘날의 벽산이다. 출자전환된 채권단의 주식을 되사들여 창업주 가문이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불행중 다행이다. 벽산의 주력사는 벽산건설이다. 전체 매출 가운데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때문에 벽산 사람들은 그룹이라는 표현 대신 건설 전문업체라는 표현을 쓴다.3세 경영체제로 넘어가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GS가문·박정희 대통령 등과 혼맥 형성 고 김인득 창업주의 3남 2녀중 장남 김희철(69) 벽산건설 회장은 경기고 3학년이던 16세 때 미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15년간 유학생활을 했다. 한 달에 2∼3통씩 집으로 편지를 썼는데 아버지인 고 김인득 창업주는 틀린 한자를 교정해 보내주는 등 자식 교육에 애착을 보였다. 김희철 회장도 기대에 부응해 미국 퍼듀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경영학 석사·MIT대와 퍼듀대에서 각각 원자력공학 석·박사학위를 땄다. 이어 미주리주 롤라대학에서 조교수를 역임하다 1969년 정부의 해외우수인재 유치 계획에 따라 과학기술처 1급 연구관으로 초빙돼 귀국했다. 김희철 회장은 1965년 김인득 창업주의 3남이자 김 회장의 동생인 김희근(60) 벽산엔지니어링 명예회장과 김 명예회장의 경기고 동창인 허광수(60)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의 제의로 삼양통상 고 허정구 회장의 장녀 허영자(66)씨를 만났다. 허광수씨의 누나인 영자씨는 이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미 노스웨스턴대 불문학과 석사 과정을 밟다 다음해 시카고에서 김 회장과 결혼했다. 김희철 회장은 1971년 건축자재 생산업체였던 ㈜벽산의 전신인 제일스레트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벽산 경영에 참여했고,1982년 그룹 부회장으로 오르면서 사실상 경영을 도맡았다. 하지만 김인득 창업주가 세상을 뜬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IMF 위기를 맞아 선친이 키운 기업을 구조조정해야 하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벽산은 3세 경영 체제에 안착했다. 김희철 회장의 장남인 김성식(39) ㈜벽산 대표이사 사장은 ㈜벽산페인트 대표이사도 겸하고 있다. 오하이오주립대 마케팅 학사,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이후 보스턴 컨설팅에서 일하다 2001년 1월 ㈜벽산 전무로 입사했다. 지금은 부도로 쓰러졌지만 80년대 말 주택사업을 활발히 펼쳤던 ㈜동신 박승훈 회장의 장녀 박성희(36)씨를 학교 선배의 소개로 만나 결혼했다. 김희철 회장의 차남 김찬식(37)씨는 주력사인 ㈜벽산건설에서 경영수업을 받는 중이다. 경영지원실장(전무)으로 내부 살림을 챙기고 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조지타운대에서 MBA를 땄다. 한 살 아래인 장현주(36)씨를 대학(이대 동양학과)시절 소개팅으로 만나 연애 결혼했다. 장씨의 아버지 장경환(74)씨는 포항제철 전무이사, 삼성중공업 사장 등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 경영연구소 회장을 지냈다. 장녀 김은식(35)씨는 서울대 음대 기악과를 나온 바이올리니스트. 양해엽(77) 전 재불 한국문화원장의 차남인 첼리스트 양성원(39·연세대 기악과 조교수)씨와 결혼, 음악가 집안을 꾸렸다. 이들의 결혼은 양가 어머니들의 오랜 친분으로 맺어졌다. 김인득 창업주의 차남인 김희용(64) 동양물산 회장은 미 인디애나주립대 출신으로 1987년부터 그룹의 모태이자 농기계전문업체인 동양물산 사장으로 취임,2001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고 박상희씨의 딸 설자(61)씨와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설자씨는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의 처제이기도 하다. 이로써 벽산가 혼맥은 경제계 뿐 아니라 고위 정치권과 닿는 계기가 됐다. 장남 김희철 회장가와 차남 김희용 회장은 2004년 주식 교환을 통해 사실상 독립경영 체제를 갖췄다. 김희철 회장 집안이 벽산건설과 ㈜벽산 등을, 김희용 회장 집안이 동양물산 지분을 갖는 것으로 구도를 정리했다. 김희용 회장의 장남 김태식(33)씨는 동양물산 이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딸 김소원(28)씨도 동양물산에 몸을 담고 있다. 셋째 아들인 김희근(60) 회장은 지금은 정리된 벽산건설의 해외부문을 담당하는 등 줄곧 건설을 책임지며 벽산건설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미 마이애미대 출신으로 IMF 위기를 맞아 건설에서 손을 뗐고 지금은 계열분리된 벽산엔지니어링 명예회장 직함만 갖고 있다. 벽산건설 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은행 대출을 받기 위해 재무제표를 조작한 사기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기소된 상태다. 미 LA에 살고 있지만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귀국해 수사를 받고 있다. 김희근 명예회장측은 당시 대출은 만기연장이 대부분이어서 사기 혐의는 터무니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고 이윤우 전 그린파크 회장의 4녀인 이소형(58)씨와 결혼했다. 고 김인득 창업주의 장녀인 김숙희(66)씨는 피혁전문 무역업체인 천마를 운영하는 정영현(72) 회장과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막내 딸 김연숙(57)씨는 원영종(59) 화인계기주식회사 대표이사와 사이에 치성(28)·치열(26) 두 형제를 두고 있다. ●고 김인득 창업주…소문난 근검절약가 고 김인득 창업주는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4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지만 계절에 따라 포목상 일을 겸해 형편은 어렵지 않았다. 고향에서 보통학교(칠서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3수 끝에 열 네살이 되던 해에 마산상고에 입학했다. 성적이 좋아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농구·탁구·축구 선수로 활약하는 등 운동도 잘했다. 남선주산대회에서 1등을 했고 서화전시회에 출품하면 항상 상을 받는 모범생이었다. 첫 직장은 1934년 봄 입사한 마산금융조합. 예금 권유부터 연체 독촉까지 항상 1등이란 팻말이 따라다녔다.‘남과 같이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철학은 이때부터 생겼다. 당시 월급 28원을 받던 그는 10년동안 1만원(현재 1억원)을 벌겠다는 목표를 세워 9년간 8900원을 모았다. 이 돈을 모으기 위해 숙직을 자청, 숙직비를 모았고 출장 갈 때면 새벽에 일어나 목적지까지 걸어가면서 출장비를 아꼈다. 투철한 절약정신만큼 가족 사랑도 깊었다.“1932년 1월11일 양가 부모와 일가친척의 축복 속에서 17세 신랑과 18세 신부는 결혼을 했어요. 신랑이 장남이라 결혼시켜 어린 5남매와 큰 살림을 맡기실 작정을 하신 모양이었어요.17세 신랑은 키도 크고 헌칠했어요. 결혼후 남편은 3년을 학생 신랑으로 지내고 저는 신랑 없는 시집살이를 했어요.” 고 김인득 창업주의 부인 고 윤현의 여사는 김 창업주의 첫 인상을 ‘벽산 김인득 선생 회갑 기념-남보다 앞서는 사람이 되리라’란 책을 통해 이같이 회고했다. 고 김인득 창업주의 동생인 고 김재동씨도 같은 책에서 창업주를 두고 애처가 중의 애처가라고 평했다. 평상시에도 “부인이 무슨 낙이 있겠어. 내가 아내의 종이 돼야지…”라고 말하며 부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 김인득 창업주는 일제 치하였던 만큼 기술자나 사업가가 아니면 한국인은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1943년 진주상공회의소로 자리를 옮긴다.1949년 무역업을 하기 위해 상경했는데, 당시 외국 무역이나 한다는 사람들은 으레 호텔에 머물며 식사도 고급으로 하는 등 허세를 부리기 일쑤였지만 김인득 창업주는 삼류여관에 머물며 국밥 외엔 다른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택시는 타지 않았고 걷거나 전차·버스를 이용했다. 모두가 멋쟁이 양복을 빼고 다녔지만 농구화나 군화를 신고 다녔으며 그나마 구두 뒷굽이 빨리 닳는다며 바닥에 말발굽 ‘징’을 박아 신고 다녔다. 호주머니에 쓸데없이 돈을 넣고 다니지 않았으며 필요한 돈만 명함꽂이에 넣어 다닐 만큼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극장의 제왕’서 건자재·건설업으로 비약 부산 동아극장 지배인으로 일하다 6·25가 발발한 1950년 피란갔던 부산에서 오늘날 벽산의 효시인 동양흥산(현 동양물산주식회사)을 창업한다. 외국영화를 수입해 전국 영화관에 공급하는 일과 수입·무역업이 주종이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당시 오락시설로는 극장이 전부인 시절이었고 동양물산은 외화의 60%를 수입했다. 중앙극장, 단성사 등 서울 주요 극장을 비롯해 부산 대전 대구 진주 등 전국에 100여개에 달하는 극장 체인을 형성, 극장 재벌로 부상하며 50년대 말 흥행업 왕좌에 올랐다. 산업의 본질은 생산업이라 여긴 김인득 창업주는 60년대 들어 ‘사업보국’을 내걸며 흥행업에서 점차 손을 떼고 제조업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단성사와 반도극장(현 피카디리) 등을 판 돈으로 1962년 9월 한국스레트공업주식회사(현재 ㈜벽산)를 인수한 것은 제2의 도약기를 맞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이 회사는 일제 당시 일본 아사노 스레트의 서울 공장으로 1929년 출범했지만 당시 부실화되어 개점 휴업상태인 회사였다. 인수 직전 9개월까지 실적이 3000만원에 불과했지만 주인이 바뀐 뒤 3개월간 6000만원의 실적을 올렸다. 이어 60∼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시작된 전국적인 농어촌개량작업으로 슬레이트 사업은 번창일로를 맞는다. 이후 건자재 생산업체인 오늘날의 ㈜벽산으로 자라났다. 1964년 1월 한국스레트공업주식회사에 건설사업부를 발족하면서 건설업을 본격화했다.1968년 시공능력 33위에서 1971년에는 11위에 오를 정도로 덩치가 커지면서 같은 해 1월 한국건업주식회사로 떨어져 나와 지금의 벽산건설로 성장했다. 그룹의 모태인 동양물산은 고구마 절단기 등 농기계 생산업체인 ‘한국이기공업주식회사’(1964년)와 한국경금속(1968년)을 인수하면서 새 전기를 맞는다. 동양물산은 지금도 경운기 등 농기계와 스푼 등 양식기를 만들면서 과거 명맥을 잇고 있다. 1973년 스레트공업사 내 페인트공장을 신규 착공하면서 시작한 페인트 사업도 그대로 있다.1999년 구조조정과 함께 벽산화학㈜에 합병됐다 2001년 벽산페인트로 거듭났다. 이로써 벽산그룹은 벽산건설,㈜벽산, 벽산페인트, 동양물산,㈜인희 등 5개사를 거느리고 있다. ●IMF때 대대적인 구조조정 그룹명 벽산은 고 김인득 창업주의 아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60년대말부터 회사를 끊임없이 인수·합병하는 등 사세를 키워카며 통일성을 위해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유통 금융 방송 지하자원개발 등 전체 18개에 달하던 계열사는 IMF이후 구조조정을 겪으며 현재 5개로 줄었다. 1976년 설립한 건축내외장제 제조사 벽산산업개발㈜은 1998년 그룹 경영합리화 계획에 따라 ㈜인희에 합병됐다.㈜인희는 영화산업에 애착을 가졌던 김인득 창업주가 1952년 중앙극장을 세우면서 설립했던 회사. 영상산업회사로 키우기 위해 비서실내에 신규 영상 사업팀까지 두고 챙겼었지만 지금은 발코니 확장과 일부 건자재만 만들며 ㈜벽산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1985년 벽산쇼핑㈜을 통해 유통업에 진출했지만 1999년 3월 구조조정계획에 따라 매각했고,1989년 인수한 정우개발㈜,㈜동부해양도시가스 등 정우 계열사들 역시 1999년 정리했다.1991년 유신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해 금융업도 본격화했지만 1998년 대출금 마련을 위해 팔았고,㈜한국케이블TV 전남동부방송을 설립해 종합유선방송(SO)사업도 손을 댔지만 1999년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리했다. 대부분의 그룹 사옥도 처분했다. 그룹 40주년 출범과 함께 서울역 앞에 지었던 시가 1100억원 연건평 900평 규모의 그룹 사옥인 ‘벽산 125빌딩’을 포함해 퇴계로 ‘인희빌딩’ 등이 모두 넘어갔다. 벽산 125빌딩은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씨의 마지막 작픔으로 유명하다. 전주 백화점, 안양 벽산쇼핑, 부산 남포동 복합상가빌딩 등 유통 사업 관련 부동산도 함께 정리했다. ●3대를 잇는 기독교 사랑 고 김인득 창업주의 3남2녀중 막내딸 가족을 제외하면 지금도 매주 일요일 오전 고 김인득 창업주 때부터 다니던 인사동 승동교회에 나가 예배를 들이며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김인득 창업주가 6·25때부터 승동교회에 나갔고 장남 김희철 회장도 같은 교회 장로를 지낸 바 있다.3세인 김성식 ㈜벽산 대표이사 사장도 술·담배를 일절하지 않고, 매사 성경이 판단의 기준이 될 만큼 신앙이 깊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벽산의 기독교 사랑은 가족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무식은 물론 창립기념식 등 모든 공식행사가 예배로 시작되는 ‘기독교문화’ 회사다. 국내 처음으로 직장예배를 도입한 기업으로 창립 초창기인 1956년 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첫 직장예배 이후 매주 금요일 아침 8시30분(일부 계열사는 다름)부터 1시간은 본사와 각 공장, 지점, 현장별로 직장예배를 보고 있다. 기독교를 통해 임직원을 통합해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평이다. 벽산건설이 1998년 워크아웃에 들어갔을 때에도 노사가 무분규로 일관, 회사 살리기에 힘을 합했던 것도 기독교 문화가 바탕이 됐다는 설명이다. jhj@seoul.co.kr ■ 오뚝이 정신으로 일군 ‘벽산 56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장33절) 고 김인득 창업주의 장손자인 김성식 사장이 맡고 있는 ㈜벽산은 최근 수년간 이 회사 주식을 사들이며 끊임없이 M&A 위협을 해온 창투사 아이베스트와 ‘적과의 동침’을 선언했다. 지난해 말 아이베스트가 구주 매출을 통해 벽산 주식 100만주를 주당 1만 5000원에에 팔고 나간 뒤 주가가 1만 1000원대까지 빠지면서 아이베스트는 시세 차익을 얻은 반면 개인 투자자들은 손해를 입어 벽산에 대한 개미들의 원성이 높았다. 특히 벽산은 적대적 M&A를 막기 위해 아이베스트 보유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는 등 양측이 경영권을 둘러싸고 대립해왔다. 이처럼 수년간 벽산을 괴롭혀온 아이베스트가 최근 대주주의 우호 지분을 자청하면서 두 회사간 구원(仇怨)관계가 일단 봉합된 상태다. 벽산그룹은 56년을 헤쳐오면서 고난도 많았지만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내실을 다져온 기업이다. 1998년 구조조정에 들어갔을 때에도 노사간 분규없이 한마음으로 대처했던 혼연일체는 지금도 업계의 귀감으로 회자된다. 벽산건설의 경우 워크아웃 당시 채권단과 맺은 목표보다 50%가량 많은 244명이 명퇴했다. 자진해 나간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남은 직원들은 상여를 전액 반납해 떠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대주주도 4대1 감자를 단행하는 등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덕택에 2000년 회사가 흑자로 전환됐고 2002년 말 워크아웃에서 졸업했다. 김희철 벽산건설 회장은 풋백옵션을 행사, 출자전환된 채권단 주식을 2004년 되사면서 회사를 되찾았다. 이에 앞선 지난 1992년 7월. 당시 재계 25위이던 벽산건설은 자사가 시공한 신행주대교가 준공 4개월을 앞두고 붕괴하면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부실공사가 원인으로 규명되면서 대대적인 이미지 실추와 함께 영업정지, 단자사 여신 동결 등 악재가 뒤따랐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인명 사고가 없어 복구공사비 200여억원 등을 전액 부담, 재공사를 맡아 결자해지로 매듭지었다. 여전히 우환은 끊이지 않는다. 벽산건설 임원 2명이 1999년부터 2005년까지 각각 회사돈 수십억원을 빼돌려 부동산 구입과 주식투자 등에 쓴 혐의로 조사를 받는 등 집안 단속 문제가 붉어져 조사 중이다. 벽산건설 관계자는 “주택 사업 이외에 토목공사 등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면서 “무엇보다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위축됐던 직원들의 사기와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게 가장 큰 과제다.”고 말했다. 벽산그룹 5개 계열사의 2005년 기준 총 매출은 1조 2500억원이며, 이중 벽산건설의 매출이 전체의 61%를 차지한다. jhj@seoul.co.kr ■ 벽산을 만든 전문 경영인들 벽산그룹은 올해로 56년을 헤쳐오면서 가장 훌륭한 전문경영인으로 이 회사 부회장을 지낸 정종득(65) 목포 시장을 꼽고 있다. 워크아웃 조기졸업의 일등 공신으로 지목되는 정 사장은 서울대, 산업은행, 쌍용을 거쳐 1983년 벽산건설에 이사로 입사 1994년 사장이 되면서 워크아웃의 시작과 끝을 지키는 등 벽산과 고락을 함께해온 인물. 특유의 인화력과 결단력으로 조직을 이끌며 대주주인 김희철 벽산건설 회장과 호흡을 맞췄다는 평이다.2005년 5월 시장 출마를 위해 부회장으로 위촉된 뒤 당선과 함께 회사를 떠나 지금은 공직자로 일하고 있다. 김재우(62) 아주그룹 부회장은 1997년 2월 워크아웃에 들어가기에 앞서 ㈜벽산 사장에 취임해 3년 만에 경영을 정상화시킨 능력을 인정받아 아주그룹에 스카웃된 인물. 삼성물산 출신으로 2005년까지 ㈜벽산 부회장 등을 지내며 ‘누가 우리회사 망한다고!!’‘거봐!안 망한다고 했지!!’ 등 벽산 구조조정 성공사례들을 책으로 발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광주고·건국대 출신의 신광웅(63) 신동아건설 사장도 벽산건설 출신이다. 한신공영을 거쳐 지난 1995년부터 2004년 6월까지 벽산에 적을 둔 바 있다. 벽산건설 부사장을 끝으로 회사를 떠났다. 한편 지난 2004년 뇌물수수죄 재판중 또다시 뇌물수수 의혹을 받아 감옥에서 자살했던 고 안상영 전 부산시장도 벽산건설에서 부회장직을 수행한 바 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토요일 아침에] 강자·약자의 진화로 양극화 해소를/박맹수 원광대교수·교화과장

    2006년 화두 가운데 하나로 양극화 문제가 있다.IMF사태로 불렸던 경제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도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왔다. 기업은 대규모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돌입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었으며, 그들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다. 국내 기간산업은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아래 개방을 강요당하여 많은 기업이 외국 자본가의 손으로 넘어갔다. 작년에는 농업 분야마저 완전 개방 쪽으로 협상이 타결됨으로써 국내 농업은 거의 빈사지경이 되었다. 대통령과 정부는 경제위기는 이미 완전히 극복했다고 선언한 바 있지만, 사회 구석구석에는 경제위기가 빚어낸 생채기가 치료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비정규직 문제와 농업회생 문제, 절대빈곤층과 차상위계층 문제 등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양극화 문제는 과연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IMF사태 이후에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구호아래 경쟁력 있는 회사, 경쟁력 있는 인재만 남기고 그 외는 모두 구조조정이다, 정리해고다 해서 도태시킨 총체적 결과가 결국은 양극화라는 현실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양극화의 주범인 신자유주의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전 세계를 풍미했던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을 그 이름만 바꾼 것과 다름없다.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속에서 적자(適者)만이 생존한다는 사회진화론과, 경쟁력 없는 회사나 인간은 도태시킬 수밖에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말만 바꿨을 뿐 강자의 논리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물음을 던진다. 지난 세기의 사회진화론이 인류사에 과연 어떤 결과를 안겨주었던가. 서양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정당화하여 수천만 명에 이르는 제3세계 민중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끝내는 제1,2차 세계대전을 초래하여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커다란 비극을 불러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사회진화론의 리바이벌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역시 또다시 대참극을 불러오지 말란 법도 없다. 여기에 바로 우리 사회가 지혜를 발휘하여 신자유주의라는 무자비한 바람을 막아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사회는 끝내 그 강자마저도 살아남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우주자연의 정칙이요, 인류사의 보편적 법칙이다. 일찍이 사회진화론이 난무하던 20세기 초반에, 서양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제3세계 국가와 민중들이 잔혹하게 유린당하던 시대에 소태산 박중빈(1891∼1943) 선생은 “강자는 약자로 인하여 강의 목적을 달하고, 약자는 강자로 인하여 강을 얻는 고로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하였느니라.”라고 가르쳤다. 약자(弱者)들이야말로 강자(强者)들이 존재할 수 있는 근본 바탕이라는 것, 즉 이 우주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모든 생명체들은 서로 떠날 수 없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소태산 선생의 이 가르침 속에는 강자만을 섬기고 강자만이 살아남는 신자유주의적 세계는 끼어들 틈이 없다. 약자와 강자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세계, 강자와 약자가 서로 진화하는 세계야말로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계이자 앞다투어 실현해야 할 이상세계요, 진여실상의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 소태산 선생은 강자들에게 늘 ‘영원한 강자’ 즉 진정한 강자가 될 것을 촉구했다.“약자라고 항상 약자가 아니라 점점 그 정신이 열리고 원기를 회복하면 그도 또한 강자의 지위에 서게 될 것이요, 약자가 깨쳐서 강자의 지위에 서게 되면 전일에 그를 억압하고 속이던 강자의 지위는 자연 타락될 것이니, 그러므로 참으로 지각 있는 사람은 항상 남이 궁할 때에 더 도와주고 약할 때에 더 보살펴 주어서 영원히 자기의 강을 보전하나니라.” 양극화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소태산 선생의 가르침처럼 “사회적 약자들이 제대로 숨쉬고 살 수 있어야만 강자들도 비로소 제대로 숨쉬고 살 수 있게 되는” 원리를 얼마나 절실하게 자각하고, 얼마나 절실하게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박맹수 원광대교수·교화과장
  • 동양시멘트·동일방직 회장 금탑산업훈장 수상

    제33회 ‘상공의 날’ 기념식이 1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렸다. 영예의 금탑산업훈장은 현재현 동양시멘트㈜ 회장,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이 받았다. 현 회장은 IMF 외환위기 당시 ‘스피드경영’이라는 독특한 경영스타일로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경영시스템을 정착시키고 97년 말부터 내수산업인 시멘트산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아프리카, 중동, 남미로 수출을 다변화해 지난해 사상 최고인 190만t의 수출실적을 달성한 공로 등을 인정받았다. 창사 이래 40여년간 이어온 무분규, 무파업 등 노사화합도 공적으로 평가됐다. 서 회장은 생산혁신, 품질혁신 활동을 통해 장항공장의 생산성을 업계 1위로 유지하고 이집트에 정방기 5만 3000추 규모의 현지법인을 설립, 중동·EU 등 신시장 개척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유재성 ㈜티시테크 회장과 허병하 ㈜우신시스템 대표이사가 은탑산업훈장을, 조헌제 대한송유관공사 대표이사와 정해영 안성유리공업㈜ 대표이사가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하성기 에쓰-오일㈜ 부사장과 홍성원 ㈜현대홈쇼핑 대표이사가 철탑산업훈장을, 성재생 ㈜삼테크 부회장과 함영준 ㈜오뚜기 대표이사, 이재원 삼성중공업㈜ 상무보가 각각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서울광장] 이총리가 물러나야 할 진짜 이유/이목희 논설위원

    [서울광장] 이총리가 물러나야 할 진짜 이유/이목희 논설위원

    김영삼(YS)정부 청와대를 출입하며 취재했다. 대통령 YS는 이전에 정당생활을 할 때보다 대단히 금욕적이었고, 외로워 보였다.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는 걱정까지 들게 했다. 주변비리,IMF경제위기로 지금은 인기 없는 전직 대통령이지만, 당시 느낌은 그랬다. YS의 과잉의욕과 금욕생활이 대통령직 수행에 오히려 장애라는 점을 간파한 이는 K씨였다.K씨는 YS청와대에서 고위직을 두번 역임했다. 그는 몇차례 YS를 파계시키려 했다. 한번은 YS와 친한 인사의 별장을 빌려 은밀한 파티를 준비했다. 접대하는 여인도 물색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와 달리 당시만 해도 ‘국민정서법’이 이를 용납할 리 없었다.YS는 “당신, 미쳤나.”라는 한마디로 파티계획을 백지화했다.K씨는 또 YS집무실 주변 경비관계자를 예쁜 여성으로 배치하려 했다. 이번에는 ‘가족정서법’에 걸려 그 역시 무산됐다. 대통령은 임기 중 함부로 교체할 수 없는 자리다. 수시로 바꿀 수 있는 임명직과 다르다. 왕조시대에는 많은 궁녀를 두기도 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지만 왕의 스트레스 해소를 구실로 한 것이다. 기회가 되면 대통령이 어느 수준의 수도승 생활을 해야 하며, 국민정서에 맞는 스트레스 해소법은 무엇인지 본격 탐구해보고 싶다. 몇달전 공무원 틈에 섞여 이해찬 총리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 총리는 “주요 회의만 하루에 서너차례 주재한다. 민주화운동하다가 감옥갔을 때보다 지루하고 힘들다.”고 말했다. 가만히 보니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준(準)대통령급으로 커버린 이 총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스트레스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든지, 아니면 총리직을 그만두어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3·1절 골프’ 파문이 일자 총리실 관계자들은 “업무스트레스를 풀고, 나빠진 건강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정황을 알면서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더욱 문제다. 이 총리와 측근들은 ‘국민정서법’에 어긋나지 않는 방법으로 총리가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어 합리적 판단을 할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다. 이기우 교육부 차관은 이 총리가 3·1절에 골프치겠다는 것을 차마 못 말렸다고 밝혔다. 골프장 관계자들은 “총리가 골프치러 내려온다기에 의아했다.”고 말했다. 골프장 직원조차 이상하게 여기는 일을 이 총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실행하고, 측근들은 반대하지 못했다. 정경유착 의심을 받을 인사들과 내기골프까지 했으니 감각이 무뎌져도 한참 무뎌진 셈이다. 국민신뢰를 잃은 이 총리는 버티기 힘든 형국에 몰렸다. 지방선거를 앞둔 열린우리당을 봐서도 총리직을 더 수행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판단력이 떨어져 국가정책이 잘못 결정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일에 찌들려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여겨지면 주위에서 유임하라고 해도 물러나야 한다. 쉬는 게 나라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옳다. 이 총리 사태는 국정운영시스템 전반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참여정부는 분권형을 내세워 과거 청와대가 가졌던 주요 정책결정권 가운데 상당 부분을 총리실로 넘겼다. 이 총리는 많은 국정현안을 최종조율하는 부담을 떠맡아야 했다. 총리실 기구가 따라서 비대해졌다. 총리의 권한은 늘었으나 합당한 자기관리와 보좌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골프파문의 본질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분권형 국정운영 체제를 그대로 가져갈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개헌을 하지 않고 이원집정부제식으로 국정을 이끌려니 무리가 생긴다. 실패한 총리를 또 만들지 않으려면 제도부터 따져봐야 한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신증권-양재봉 명예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신증권-양재봉 명예회장家

    주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큰 大 믿을 信’ 하면 대신증권을 단박에 떠올린다. 한때 큰 주목을 받았던 광고 카피가 알반인의 뇌리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한 이름만큼 회사의 규모나 역사는 일반인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대신증권은 증권업계에서 여타 대형 증권사와 다른 몇가지 ‘독자적인’ 위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재벌 계열이나 은행 계열이 아니면서 40년간 업계 상위권을 지켜왔다.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이후 재벌이나 은행을 끼지 않은 증권사가 살아남기 힘든 환경속에서도 여전히 ‘빅5’ 안에 든다. 대신증권은 또 선진국형 증권 시스템을 가장 먼저 도입한 곳으로 꼽힌다. 증권사 흑판에 분필로 시세를 적던 시절 최초로 ‘전광판’을 도입했다. 이후 ‘온라인 거래의 최강자’란 명성을 얻었고 사이버 누적거래 1위 자리를 지켜 오고 있다. 금융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3세 경영’을 잇게 된다.‘거상(巨商)의 꿈’ 하나로 빈손으로 대신증권을 일군 양재봉(81) 명예회장의 역할을 현재 아들과 며느리, 사위가 잇고 있으며 머지않아 손자가 이 역할을 대물림받을 전망이다. ●빈손 ‘송촌’ 거상의 꿈 양 명예회장은 1925년 전남 나주군 나주읍 송촌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 대한 애착으로 호를 ‘송촌(松村)’으로 지었고 훗날엔 이 명칭을 딴 ‘송촌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가 거상의 꿈을 품기 시작한 것은 송촌을 떠나 당시 ‘수재의 집합소’로 불리던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15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나주에서 간 유일한 합격자’가 된 양 명예회장은 이곳에서 ‘일본인들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공부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꿈도 키웠다. 그의 첫 목표는 한국은행 전신이었던 조선은행 입사였다. 양 명예회장은 “대학 졸업자들도 번번이 낙방하는 판에 상업학교 재학 중에 그 좁은 관문을 뚫어 자부심이 컸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 때 생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은 모험에 대한 열망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그는 안정된 은행원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거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장사를 할 기회를 살피며 아이디어만 생기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목포와 나주 일원의 쌀을 사서 부산에 파는 미곡상을 하기도 했고, 양조 사업에도 손을 댔다. 겁없이 뛰어든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다시 조흥은행 신입 은행원의 자리로 돌아와야 했고, 이후 여러 은행을 거치면서도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끊임없는 새 사업 궁리끝에 시작한 극장 사업에서 성공하면서 그는 자신감을 되찾게 된다. 금융업 경영자로서 본격 나선 것은 한일은행 서울 청량리 지점장으로 재직하던 1970년대초 무렵이다. 지점장 부임 1년도 안 돼 예금 계수를 2배로 만들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어 단자회사 설립을 권유받던 양 명예회장은 미원그룹 임대홍 회장, 해태제과 박병규 사장과 함께 ‘대한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증권 회사 설립은 그로부터 1년 뒤 일본 방문을 계기로 추진한다. 도쿄에 있던 ‘노무라증권연구소’의 선진적 체계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돌아오자마자 증권업 진출을 서둘렀다. 당시 정부는 소규모 증권사 난립을 경계해 새 증권회사 설립 허가를 꺼려했다. 양 명예회장은 75년에 직원 11명의 ‘망해가던’ 증보증권을 전격 인수한다. ●망해가던 증보증권 잘나가는 대신증권으로 증보증권은 경영 실적이 형편없는 하위권 회사였지만 그는 ‘꿈에도 그리던 증권회사를 세웠다.’는 생각에 희망에 넘쳐 있었다. 우선 회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대신증권’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름을 바꾼 뒤부터 대신증권은 연일 승승장구했다.75년 대기업들이 탐내던 명동 국립극장 입찰에 성공해 ‘주식 투자자들의 베이스 캠프’로 만들었다. 77년 양 명예회장은 대한투자금융 전무이사직을 버리고 대신증권 사장으로 나섰다. 이어 업계 최초로 ‘전광시황 속보판’을 세우는 등 혁신을 거듭한 끝에 업계 2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성공 가도를 달리던 양 명예회장에게도 암흑기는 찾아온다. 사장 취임 4개월만에 회사 영업부장이 고객과 회사의 돈을 빼돌려 피해자만 100명에 이르는 대형 금융사고를 일으켰다. 대신증권과 자신의 신뢰에 엄청난 손상을 입힌 사고였다. 그 여파가 얼마나 컸던지 양 명예회장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3년간 시골 농장에서 가축을 기르며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다시 증권계로 돌아온 것은 81년. 대신증권의 대주주들이 양 명예회장을 찾아와 쓰러져가는 대신증권을 살려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가 대신증권 사장에 복귀했을 때, 회사는 이미 자본잠식 상태였다. 그는 “죗값을 치르겠다.”는 심정으로 일을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흐트러진 임직원들을 단합시키는 것이었다. ‘구두쇠 100일 작전’,‘개미작전’ 등 전 직원의 단합을 유도하기 위한 각종 아이디어를 짜냈다. 잘 나가던 대한투자금융 주식을 주고 미원 임 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대신증권 주식을 인수, 최대 주주가 됐고, 회사 재건에 ‘올인’했다. 다행히 80년대 중반 국내 증시는 최고 활황의 시기를 맞이한다. 양 명예회장은 대신증권의 회생에 성공해 84년 대신경제연구소,86년 대신개발금융,87년 대신전산센터,88년 대신투자자문,89년 대신생명보험,90년 송촌문화재단,91년 대신인터내셔널유럽 등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대신을 명실상부한 종합금융그룹으로 만들었다. ●신뢰 중시 경영으로 IMF 극복 하지만 그에겐 또 한번의 어려움이 닥친다.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연 20%대의 살인적인 고금리 상황이 발생해 수많은 기업이 어려움에 빠졌다. 대형 증권사인 동서증권, 고려증권이 환매 사태로 하루아침에 부도에 이르면서 ‘재벌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비재벌 단독 증권사인 대신증권에도 이 분위기는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대신증권은 단기 차입금을 모두 상환해 빚이 없는 상황이었다.90년대 말 펀드 열풍으로 시중의 자금도 증권사로 몰렸다. 하지만 양 명예회장은 회사채를 편입한 수익증권 판매를 전면 중지시키고 안전한 국공채 위주의 채권형 펀드만을 취급하라고 지시한다. 예상은 맞았다. 대우그룹 부도, 하이닉스 사태,SK사태 등이 연이어 터지며 회사채로 수익증권을 판 증권사들은 잇따라 위기를 겪었지만 대신증권은 안전한 국공채를 편입한 수익증권만 판매한 덕에 손실을 입지 않았다. 결국 90년대 초반 업계를 대표하는 5대 대형사의 주인이 모두 바뀔 정도로 부침이 심한 증권업계에서 대신증권은 살아남았다. 양 명예회장이 이처럼 오뚝이처럼 일어선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업부문에 대해 과감하게 투자하는 결단력 때문이었다. 오래 전부터 전산부문이 증권회사의 성장을 이끌 것으로 본 양 명예회장은 전산부문에 과감한 투자를 감행했다. 초기 집중 투자를 통해 온라인거래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로 인해 99년 이후 온라인 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자 대신증권은 또 한번의 중흥기를 맞게 됐다. ●내실화 일군 고 양회문 회장 양 명예회장은 2001년 현업에서 물러나고, 차남인 양회문(2004년 작고, 당시 53세) 전 회장에게 회사 경영을 물려줬다. 양 명예회장의 4남4녀 중 차남인 고 양 회장은 7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신증권 공채 1기로 입사했다.10년동안 지점영업에서부터 인수, 법인, 자산운용, 기획, 인사 등 증권 전부문에 걸쳐 실무경험을 쌓으면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고 양 회장은 회장 취임후 외형 성장보다는 내실을 다지기 위해 재무 구조 정비에 나섰다. 생명, 정보통신 등을 계열 분리하고 대신증권, 투신운용, 경제연구소 중심으로 그룹을 정리했다. 그는 2002년 초 폐암진단을 받은 후 2004년 작고 때까지 약 3년간 초인적인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리더십을 발휘했다. 대신증권이 외국인 지분율이 가장 높은 내실있는 회사로 재탄생한 것은 고 양 회장의 공이 크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 양 회장 작고 이후 대신증권을 이끄는 주역은 고 양 회장의 부인이자 양재봉 명예회장의 둘째며느리인 이어룡(52) 회장이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이 회장은 남편이 투병생활을 하던 3년여동안 집중적으로 경영수업을 받은 뒤 2004년 10월 회장에 취임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종종 비교되는 이 회장은 특유의 세심함으로 회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한 달만에 109개 전 영업점을 순회방문하면서 직원들을 격려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뿐만 아니라 강단도 함께 갖췄다. 최근에는 자본통합시장법 제정에 따라 일본의 SPARX그룹과 자본 및 업무 제휴를 통해 향후 종합금융투자회사로의 전환에 대비하고 있다. 대만의 IBTS와 제휴하는 등 외국 금융기관과 국제적인 제휴를 진두지휘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 회장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며 조용히 책읽기를 좋아한다. 남편의 투병 중에는 국내·외에서 발간된 대부분의 암 관련서적을 섭렵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서울과학종합대학 최고경영자과정에 다녔다. 동기로는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SK텔레콤 김신배 사장이 있다. 이 회장과 함께 대신증권의 제2도약을 이끌 인물로는 양재봉 명예회장의 사위이자 차녀 회금(52)씨의 남편인 노정남(53) 현 대신증권 사장이 있다. 연세대 행정학과를 나온 노 사장은 지난해 10월 대신증권 사장에 취임했다. 노 사장은 77년 한일은행에 입사한 뒤 29년간 금융업에만 종사해온 탁월한 금융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87년 대신증권에 입사해 영국 런던사무소장·지점장,IB담당임원, 상품운용본부장, 국제본부장 등을 두루 거쳤다.99년부터 6년 동안 대신투신운용 대표이사로 재직해 왔다. 런던 소재 코리아유럽 펀드의 이사를 지내는 등 국제적 감각이 뛰어나고 강력한 추진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신증권의 1대 주주이자 실질적인 대신증권의 차세대 주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사람은 양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이어룡 회장의 아들인 홍석(25)·홍준(22)씨다. 장남인 홍석씨는 현재 서울대 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며, 차남 홍준씨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이다. 홍석씨는 올해안에 대신증권에 입사해 아버지인 고 양회문 회장이 밟았던 것처럼 말단에서부터 시작해 경영 수업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첫째이자 장녀인 정연(27)씨는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외국계 컨설팅회사 베어링포인트에서 근무하다 현재 미국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단출한 혼맥… 정략결혼은 없다 양재봉 명예회장은 부인 최갑순(78)씨와의 사이에 고 양 회장 외 3남4녀를 두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연애결혼을 해 평범한 집안에 시집·장가를 갔다. 양 명예회장이 자식들의 의사를 존중해 정략적 결혼을 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송촌 회장 및 전 광주방송 회장을 역임한 장남 회천(57)씨는 대구 교육자 집안 출신의 문홍근(58)씨와 결혼했다. 회천씨는 처음부터 대신그룹에 근무하지 않고 대신전기 등 제조업체를 경영했다. 문홍집(56) 대신경제연구소 사장이 회천씨의 처남이다. 문 사장은 비즈니스 위크에서 아시아를 이끌 50인으로 선정하기도 한 금융 IT부문 한국 최고의 전문가로 꼽힌다. 대신증권 IT본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개발한 온라인거래 시스템인 ‘U-사이보스’는 지금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격찬을 받는 등 전산부문을 한국 최고로 이끈 실력자로 평가받고 있다. 둘째인 고 양 회장과 현 이어룡 회장 역시 연애결혼을 했다. 이 회장은 충북 괴산 출신으로 부친이 한학자였다. 이 회장 동생인 제봉(43)씨는 대학 교수이고, 제영(41)씨는 대신증권 IB 1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3남인 용호(48)씨는 코스닥 상장 창업투자회사인 대신개발금융회장과 아인스 회장을 역임했다. 아인스는 세계 유명 건축물 모형 전시시설인 경기도 부천의 아인스월드를 운용하는 회사다. 서울시 공무원 집안의 조선미(45)씨와 결혼해 2남1녀를 두고 있다. 4남인 정현(37)씨는 현재 코스닥 상장 금융 IT전문 회사인 대신정보통신 전무이사로 있다. 부인 이현아(30)씨는 조선내화 이훈동 회장의 손녀이자, 민주당 이정일 국회의원의 딸이기도 하다. 장녀 영애(59)씨는 대학때 연애를 통해 만난 나영호(60) 현 경원대 겸임교수와 결혼했다. 재무학 박사인 나씨는 대신경제연구소 사장으로 재직하다가 2005년 은퇴했다. 차녀 회금씨와 노정남 대신증권 사장도 연애결혼했다. 노 사장은 한국행정연구원장을 역임했던 노정현(77) 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의 친동생이다. 3녀 미경(42)씨는 이시영(46) 현 중앙대 교수와 결혼했다. 이시영 교수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박사를 받은 뒤 중앙대에서 사회과학대학 상경학부 교수와 동대학 국제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이 교수의 부친은 전북지사와 공보부 차관을 지낸 이춘성씨다. 4녀 회경(41)씨는 이재원(46) 현 대신정보통신 대표이사와 결혼했다. 이 대표는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93년부터 금융솔루션 업체인 대신정보통신에 근무하고 있다. s123@seoul.co.kr ■ 슬로건 ‘큰大 믿을信’ 어떻게 지었나 대신증권을 오늘의 위치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은 ‘큰大 믿을信’이라는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양재봉 명예회장의 작품이다. 양 회장은 증보증권을 인수해 새 회사를 만들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믿음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신념으로 ‘대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큰 대 믿을 신’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986년부터다. 당시 증권 산업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국민들의 증권사에 대한 인식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양 회장은 주식 투자의 대중화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홍보활동을 강화했다. 86년 3월 처음으로 TV CF를 제작했지만 시청자에게는 크게 파고 들지 못했다. 새로운 홍보전략을 구상하던 양 회장은 어느 날 열차를 타고 가던 중 열차바퀴가 레일과 마찰하면서 일어나는 소리가 매우 경쾌하다고 느낀다. 그는 “마치 옛날 서당에서 ‘하늘천 따지’하고 천자문을 읽을 때의 리듬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소리가 곧 우리 정서에 잘 맞는 3·3조 가락과 닮았다는 생각에 바로 큰 대 믿을 신 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후 TV 광고에는 ‘큰 대 믿을 신’ 이라는 슬로건을 빠짐없이 사용하게 됐다. 이 슬로건은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증권회사 하면 ‘큰大 믿을信=대신증권’을 떠올리게 할 만큼 히트했다. 이후 ‘큰大 믿을信’은 20여년간 대신증권 광고의 슬로건으로 사용되면서 대신증권을 증권명가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s123@seoul.co.kr ■ 금융통 대거 배출한 ‘증권계 사관학교’ ‘증권업계 사관학교’로 불리는 대신증권은 금융계에서 내로라할 만한 인물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주택은행장과 중소기업은행장을 지낸 박동희(76)씨, 정해왕(59)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 김정태(59) 전 국민은행장, 이강원(56) 한국투자공사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1986년 대신경제연구소에 대표이사로 입사한 박 전 중소기업은행장은 대신개발금융, 대신투자자문, 대신증권 대표이사를 거쳐 대신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다. 정 금융경제연구원장은 미국 켄터키 주립대에서 경영대 조교수로 있다가 대신경제연구소 상무이사로 입사,89년부터 4년간 대신경제연구소를 이끌었다.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도 대신증권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조흥은행 출신인 김 전 행장은 양재봉 명예회장이 설립한 대한투자금융에 74년 스카우트됐다. 양 명예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그는 대신증권 비서실장으로 발령났고,80년 34세의 나이로 대신증권 최연소 임원으로 승진했다. 이강원 한국투자공사 사장은 89년 대신증권 국제영업담당 상무이사로 대신증권에 입사했다. 퇴사 후 아시아개발은행을 거쳐 외환은행장, 굿모닝 증권 사장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이밖에 이준호(61) 대한화재 사장은 77년 대신증권 종합기획실 실장으로 입사한 뒤 이사, 상무이사를 거쳐 94년에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김한(52) 메리츠증권 부회장은 89년 대신증권에 입사한 뒤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이사직에 올랐다.97년까지 대신증권에서 국제본부장, 인수본부장, 기획본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증권계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s123@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씨줄날줄] 기부의 두얼굴/임태순 논설위원

    기부는 서구의 전통이고 문화이다. 로마시대 때 원로원 등 귀족들은 대회당이나 목욕탕 등을 건설해 시민들에게 남겼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장군 등 유공자들에게 전리품이 주어진다. 이처럼 부를 축적한 귀족들이 노후에 사재를 털어 공공시설을 지어 기부했던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부의 사회환원인 셈이다. 여기에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앞장서 국방의 의무 등을 다하는 것이 이른바 ‘가진 자의 고귀한 의무’로 불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물론 기독교도 기부문화가 뿌리내리는 데 일조했다. 수입의 10%를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예수님이 다섯개의 보리빵과 물고기 두마리로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과 베풂의 힘을 일깨워주는 일화이다. 반면 우리의 기부문화는 아직 인색하다. 나눔운동을 선도하고 있는 아름다운 재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2001년 우리나라 국민 1인당 한해 기부액은 5만 1000원이었다. 이는 1998년 미국의 1075달러(105만여원),96년 일본의 240달러(23만여원)에 비해 크게 부족한 것이다. 그나마 미국은 정기적인 기부자가 전체의 70%나 되지만 우리나라는 18.2%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를 말해주듯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모금실적도 ‘개미’보다는 기업 등 ‘큰손’들에 크게 좌우된다. 경기가 얼어붙으면 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은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의 금모으기운동, 태풍이나 홍수피해시의 불우이웃돕기 성금 등의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 기부문화보다는 위기상황에 따른 동원체제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엊그제 지난해 국회의원 후원금 내역이 공개됐다. 몇백만원 등 고액기부자들은 5·31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사람들이 공천을 노리고 낸 로비성 또는 대가성 후원금이라는 분석이다. 기업들은 업무와 연관된 상임위 의원들에게 보험성으로 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우리은행 ‘얼짱’ 농구선수 김은혜씨가 거인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는 선배농구인 김영희씨를 위해 연봉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1000만원을 내놓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또 정부보조금을 받는 80대 할머니는 20년간 모은 돈 600만원을 장학금으로 기증했다고 한다. 대비되는 우리 시대 기부의 두 얼굴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사설] 대통령 阿순방중 국정표류 없어야

    한나라당 이계진 대변인은 이해찬 총리의 사의표명과 관련, 국정공백을 우려한다고 밝혔다. 지금 국정상황은 공세를 취하는 야당이 내각표류를 걱정할 정도로 좋지 않다. 이런 때 여야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를 발휘해보길 바란다. 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해외순방 기간 중 총리 퇴진공세 강도를 높이지 않았으면 한다. 대신 여권은 모든 의혹을 스스로 조사한 뒤 국민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이 총리 퇴진을 깨끗이 결단해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어제부터 8박9일간 아프리카 3개국 순방에 나섰다. 대통령을 대행해 국정을 책임져야 할 이 총리는 ‘3·1절 골프파문’으로 도덕적 치명상을 입었다. 사의를 표명한 상태에서 국정장악력이 떨어질 게 틀림없다. 여권내 권력암투설까지 나오니 당정협조가 잘될 리 없다. 이에 더해 5월 지방선거에 장관이 차출된 4개 부처는 차관대행체제로 운영될 처지다. 관료체제가 궤도에 올라 당장 큰 문제는 없다고 하지만 왠지 불안하다. 대통령 순방기간 규제개혁회의, 식품안전기구 통합회의, 일자리창출 회의, 공명선거 장관회의 등 굵직한 일정이 줄줄이 예정되어 있다. 이 총리 내각이 이들 현안을 제대로 교통정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해외에 나가있는 노 대통령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과거 정권에서 IMF경제위기를 겪거나 측근비리가 터졌을 때 외국순방에 나선 대통령은 국제정치적으로 대접을 못 받았다. 마음이 국내문제에 쏠려있으니 순방외교 성과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노 대통령은 한국 국가원수로는 24년만에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일본은 물론 중국·인도 등 신흥강국이 아프리카 자원외교에서 벌써 성과를 거두고 있다. 뒤늦게 아프리카 국가와 협력을 다지려는데 국내문제가 발목을 잡는다면 불행한 일이다. 난국타개를 위해 이 총리를 둘러싼 의혹의 진상을 먼저 규명해야 한다. 청와대나 감사원이 골프회동 관련 의문점을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로비의혹이나 대선자금 보은의혹에서 의구심을 남겨서는 안 된다. 야당은 여권의 조치를 지켜본 뒤 정치공세에 나서도 늦지 않다고 본다.
  • [현대차 어디로…](상)정말 위기인가

    [현대차 어디로…](상)정말 위기인가

    지난 몇년 사이 ‘잘 나가던’ 현대자동차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지난 1월11일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은 한국무역협회 강연에서 GM의 몰락과 도요타의 임금동결 등을 사례로 들며 “현대·기아차 근로자들도 이제 중산층 이상의 임금을 받고 있는 만큼 임금 동결을 선언할 때도 됐다.”고 포문을 열었다. 곧이어 1월26일 현대차는 경영전략실을 신설하고 기획총괄본부와 감사실의 기능을 강화하는 내용의 비상관리체제를 선포했다. 지난달 중순에는 협력업체와 납품단가 인하를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급기야 지난달 22일 현대·기아차의 과장급 이상 1만 1000명이 올해 임금동결을 선언했다. 곧이어 다른 계열사들도 동참했다.28일에는 최근 위기상황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과감하게 공표했다. 비상경영 시나리오에 대한 여론은 싸늘한 편이었다. 특히 협력업체 납품단가 인하는 공정거래위원회가 현장조사에 착수하는 등 ‘압박’을 받고 있다.“순이익이 2조원이 넘는 거대기업이 치사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게 비난여론의 골자다. 하지만 현대차 내부를 들여다보면 ‘위기상황’을 좀더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현대차는 올해 원·달러 환율이 950원으로 지난해(1020원)보다 70원 하락하면 매출은 7980억원, 영업이익은 5529억원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3일 970원대를 회복했지만 950∼970원을 오르내리며 위기감을 더하고 있다. 현대차의 올해 수출 달러 결제액은 114억달러로 환율이 1020원일 경우 11조 6820억원이지만 950원으로 떨어지면 10조 8300억원에 불과하다. 반면 북미, 유럽 등에서 현대차의 경쟁상대인 일본 자동차업체들은 엔화 약세를 업고 맹공을 퍼붓고 있다. 고유가도 복병으로 떠올랐다. 현대차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오르면 자동차 내수판매가 10만대 이상 감소하고 자사 내수 판매도 최소 5만대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두바이유가는 2004년 평균 33.64달러에서 지난해 49.37달러로 급상승했고 올 들어서도 58.10달러로 9달러 가까이 올랐다. 현대차는 올해 사업계획을 짜면서 내수 판매 목표를 지난해 56만 9721대에서 63만대로 10.6%나 늘려 잡았다. 수출은 해외공장 생산 확대와 환율 등을 감안해 0.5% 늘렸을 뿐이다. 국내 본사 매출 목표 30조원의 44%인 13조 2000억원이 내수 몫이다. 고유가로 내수시장이 움츠러든다면 현대차의 사업계획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최근 경영실적도 밖으로 알려진 만큼 탄탄하지 못하다. 현대차는 지난해 차 판매가 2만대가량 늘었음에도 매출은 27조 3837억원(본사 기준)으로 1998년 이후 7년만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환율이 하락한 때문이다. 기업의 경쟁력을 가늠할 수 있는 영업이익도 빨간불이 켜졌다. 현대차의 영업이익은 2002년 1조 6062억원에서 2003년 2조 2357억원으로 늘었지만 2004년 1조 9814억원으로 주춤한 뒤 지난해 1조 3841억원으로 곤두박질쳤다. 영업이익률은 2003년 8.9%에서 2004년 7.2%로 하락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5.1%로 떨어졌다. 통상 공격적인 목표를 내걸기 쉬운 올해 사업계획에서조차 1조 9000억원(6.3%)으로 제시하는데 그쳤다. 한국투자증권 서성문 애널리스트는 “현대·기아차의 수출이 1999년부터 호조를 보이고 있는 것은 품질 및 브랜드 이미지 개선도 있었지만 최근 7년간 평균 원·달러 환율이 97년 953원보다 23.5% 상승한 1177원이어서 가격경쟁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라면서 “현대차의 비상경영은 미국업체의 할인공세가 거세고 엔화는 약세인 반면 원·달러 환율은 IMF 이전 수준을 넘보고 있는 등 최근 여건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환그룹-최종환 명예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환그룹-최종환 명예회장家

    올해로 건설 외길 60주년을 맞는 삼환기업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1세대 건설기업이다. 대림산업·삼환기업·삼부토건 3개사만 명맥을 잇고 있지만 창업주가 살아 있는 곳은 삼환뿐이다. 대부분의 건설기업은 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전후에 부도가 나 좌초됐다. 삼환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70∼80년대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빌딩을 지은 주인공이자 중동에 처음 진출해 중동 붐을 일으킨 기업이지만, 최근엔 80년대에 비해 해외 수주액이 급감하는 등 예전보다 인지도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꾸준한 수익성을 유지하며 ‘환갑’의 값진 전통을 이어간다는 데 이견이 없다. 삼환은 올해 창업 60년을 맞아 국내외로 외형을 확장, 건설 명가로서 제2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창업 60년 맞아 제2의 르네상스 꿈꾸는 삼환 삼환기업은 올해를 제2 해외 르네상스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공항 확장공사 입찰에서 최저가를 써 1순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계약을 협의 중이다. 건축비가 지난해 삼환기업 해외 매출(600억원)의 4배 규모인 2500억원이다. 해외유전 사업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연 100억원대 수익을 올린 마리브 유전 투자에 이어, 지분투자(4.9%)로 참여한 베트남 가스전 개발사업이 올해 하반기부터 수익을 낸다. 이밖에 지분투자(1.6%)를 한 예멘 마리브 LNG 개발사업도 오는 2009년부터 수익을 낼 전망이다. 국내에서는 3조원대 규모의 대우건설 인수전에도 참여, 건설기업 전통 명맥을 잇기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창립자인 최종환(82) 삼환그룹 명예회장은 1924년 12월29일 최상림씨와 김림자씨의 5남2녀 중 4남으로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종로의 종(鍾)자에 돌림자인 환(煥)자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양반이 광화문 중심에서 사대문 밖으로 쫓겨나 사는 것을 몰락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사대부 출신인 그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면서 광화문 중심에서 다동으로, 이어 효자동, 종로4·5가 등으로 밀려났고 그는 종로 4가에서 태어났다.‘종환’이란 이름에는 사대문 안은 벗어나지 않았다는 안도의 뜻이 담겨 있다는 회고다. 훗날(1980년) 창덕궁이 내려다 보이는 종로구 운니동에 20층 규모의 삼환사옥을 세운 것을 두고 그가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 점령기에 초등학교(어의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글재주가 뛰어나 졸업할 때까지 각종 작문 대회에서 1등을 휩쓸었지만 학업에 뜻을 두진 못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궁핍한 살림에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일찌감치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건설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형들과의 연관이 깊다. 큰 형인 고 명환씨와 둘째 형인 고 영환씨가 졸업 이후 수도·난방공사 자재를 생산·시공하는 스기야마 제작소에 들어갔는 데 회사에서 쓰다 남은 자투리 파이프를 집에 가져와 가공, 다시 납품하는 식으로 돈을 벌면서 1933년 경동기계제작소를 설립했다. 그는 어의보통학교에 이어 2년제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뒤 18세가 되던 1940년 형들의 회사인 경동에 합류했다. ●약관의 나이에 창업…미군 공사로 국내 기반 삼환은 설립 이후 60년대 초반까지 줄곧 주한미군에서 수주한 공사에 전념했다.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 공병대에서 크고 작은 공사를 발주했는데 토목·수도·난방 등 업종별로 공사를 따로 주지 않고 한 업체에 모든 공사를 맡기는 식이었다. 그는 경동기계제작소안에 공사부를 설립해 영업부장으로 뛰며 미군 공사를 수주했다. 한발 더 나아가 하청업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물 한 살이던 1946년 3월15일 오늘의 삼환그룹 효시인 삼환기업공사를 설립했다. 큰 형과 둘째 형, 그리고 최 명예회장 삼형제가 합심해 만든 회사란 뜻에서 지은 이름이지만 실질적인 소유주나 최고경영자는 최 명예회장이다. 회사 설립후 8개월 동안 이룬 공사실적만 총 26건 130만원이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1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다.1948년 가을 을지로 2가 119번지 53호를 매입해 신사옥도 마련했다. 1949년에 착공한 강원도 영월 등 7개 광산지역의 미국인 광산기술자용 주택공사는 당시 업계의 부러움을 산 초대형 공사였다.1950년 6·25로 공사는 중단됐고 건물은 불에 타버렸지만 이 공사는 훗날 새옹지마격으로 그에게 전쟁 이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됐다. 서울 수복후 미군 공사 관계자는 그를 반도호텔(현 롯데호텔)로 불러내 큰 궤짝 하나를 내놓았는데 그 속에는 당시 2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불에 타버려 흔적조차 사라진 건물의 공사비를 뒤늦게 받은 것이다. 주식회사로 전환한 것은 전란 이후 1952년 9월의 일이다. 서울 수복후 전후 복구공사에 힙입어 사세를 키워나가던 중 삼환은 당시 주주 10명이 총 주식 2만주를 발행하면서 주식회사가 됐다. 그 중 최 회장이 1만주, 둘째 형 영환씨가 5000주, 큰 형 명환씨가 500주를 가졌다. ●국내 ‘중동 붐’ 조성…횃불신화로 국제 명성 쌓아 1961년 ‘5·16’은 새 전기를 가져왔다. 수의계약으로 이뤄지던 관급공사가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신문에 종종 입찰공고가 나는 일이 생겼고 삼환은 국내 주요 공사를 맡는 ‘건설 명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5·16 이후 삼환이 따낸 최초의 관급 공사는 1962년 발주한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 호텔이다. 이어 경부·호남·영동·남해·동해고속도로 등 각종 토목 공사에 참여했고, 국립극장, 삼일빌딩, 조선·프라자·신라 호텔, 지금은 사라진 남산외인아파트, 여의도 전경련 회관, 국립묘지 현충탑, 포항제철(현 포스코) 공장 등을 지으며 주택·오피스빌딩·토목·플랜트 등 각 분야에서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삼환은 국내사업에 만족하지 않았다. 해외진출 가능성을 계속 탐색하던 최 명예회장은 1963년 월남 사이공(호찌민)에 지사를 설립하면서 첫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정국 혼란으로 4개월 만에 철수했지만 이후 196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한국 업체 최초로 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1973년 국내 업계 최초로 중동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했다. 삼환은 사우디에서 네번 연거푸 고배를 마신 뒤 다섯번째 카이바∼알울라고속도로(175㎞) 입찰에서 2400만달러 규모의 공사를 따내며 국내 중동 진출 1호 기업이 됐다. 완공 때까지 3년간 자재 공급난, 종교 문제 등 시행 착오로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어 사우디 최대 규모인 제다시(市) 전체를 뜯어고치는 미화사업을 맡으면서 행운을 잡았다. 미화공사를 메카순례기간 전까지 끝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횃불을 켜놓고 야간공사를 강행하던 것을 파이잘 국왕이 보고 감동을 받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삼환은 6000만달러 규모의 대형 공사를 수의계약하게 됐고 ‘횃불신화’라는 말을 남기며 국내 건설업체의 중동 진출 붐을 조성하는 등 명성을 널리 알리는 개가를 올렸다. ●해외 프론티어의 꿈…정체된 90년대 80년대 들어서는 해외시장에 더 집중했다.1978년 미수교국이던 예맨에 진출했고 이를 계기로 1984년 북예맨 마리브 유전개발에 참여하면서 원유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요르단, 파푸아 뉴기니아, 알래스카, 방글라데시, 사할린 등 시장을 개척했다. 국내 기술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국제 모임에 적극 참여,1982년 아시아 서태평양 건설연합회인 아이포카(IFAWPCA) 5대 회장에 추대됐고 재임시절 세계건설인대회도 제창했다.1990년대 들어서는 회사 일 보다 민간 외교에 시간을 쏟았다.1992년 한·소 경제협력회 2대 회장으로 선임됐고 재차 연임됐다. 러시아의 정치·경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성과를 이루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아 있다. 이런 탓에 90년대 들어 삼환의 해외 실적은 급감했다. 건설협회에 따르면 삼환의 해외공사 수주액은 1982년 당시 5억 8834만 8000달러(한화 6000억원)였지만 10년 후인 1992년에는 10분의1 수준인 624만 4000달러에 그쳤다. 국내 건설 업계의 주요 테마인 아파트 실적도 많지 않다.90년대 후반부터 업계가 경쟁적으로 환상을 담은 아파트 브랜드와 광고에 집중하며 수주전에 열을 올릴 때에도 삼환은 아파트 광고를 하지 않았다. 최 명예회장은 오히려 당시 시류에 대해 자서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를 통해 “안쓰럽다.”는 평을 내놓았을 뿐이다. 한 때 9개에 달하던 계열사는 현재 6개로 정리됐다. 키친아트로 유명한 양식기 제조업체 경동산업(60년)과 코카콜라 등 청량음료 제조업체인 우성식품(69년)은 모두 1990년대 말 정리됐다. 태양관광(관광·77년)은 삼환엔지니어링(기술용역·76년)에 통합돼 삼환기술개발이 됐지만 설계 업무는 거의 하지 않고 관광업도 계열사 직원 출장을 위한 발권 업무 정도만 한다. 이밖에 우성개발(67년), 삼환까뮤(78년), 삼환종합기계(79년), 신민상호신용금고(78년), 회현상사(78년) 등은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건설 명가로서의 국내 입지와 안정적인 매출은 줄곧 유지하고 있다. 건설 계열사를 가진 한화그룹의 1000억원대 대한생명 리모델링 공사를 지난해 수주했고,2007년 준공되는 건축비 595억원 규모의 팬택계열 서울 상암동 R&D센터도 짓고 있다. 삼환기업은 2005년 기준 매출 6612억원, 당기순이익 500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종합 수주액은 1조 5000억원 규모다. 삼환그릅 기준 2005년 매출은 1조 1000억원, 당기순익은 650억원이다. ●교사 부인과 1남1녀의 단촐한 가정 1947년 봄. 삼환기업공사의 30대 청년 사장으로 뛰면서 당시 숙명여학교 교사이던 고 채광영 여사와 2년여 열애 끝에 1949년 4월 결혼했다. 최 명예회장은 부인을 만났을 당시 “‘아!이 여자다.’라는 느낌이 퍼뜩 들어 프러포즈를 했다.”고 언론을 통해 회고한 바 있다. 부인 채씨는 그를 홀로 남겨둔 채 1999년 노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부인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가업을 승계한 외아들 최용권(56) 회장은 동갑내기로 고 한정대 전 대한페인트잉크(DPI) 회장의 3녀인 봉주(56)씨와 1974년 결혼해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 보스턴대를 나온 용권씨는 미 유학중 같은 유학생 신분이던 봉주씨를 만나 결혼했다.1975년 삼환기업 기획조정실장으로 입사해 8년 만인 1982년 32세 나이에 삼환기업 사장에 취임했다. 이어 삼환이 창립 50주년을 맞은 1996년 9월 회장으로 등극,2세 경영 체제를 굳혔다. 선친인 최종환 명예회장은 ‘바늘로 찌를 구멍’은 있어 보였던 데 비해 최용권 회장은 ‘찌를 구멍’조차 없는 사람이란 평이 임원들 사이에서 나온다. 최 명예회장의 손녀이자 최용권 회장의 장녀 영윤(31)씨는 이준용 대림산업 회장의 며느리가 됐다. 이 회장의 3남 해창(35)씨와 1999년 3월 결혼하면서 국내 두 전통 건설기업은 사돈관계를 맺게 된 것. 대림의 창업주인 고 이재준 선대 회장과 최 명예회장은 건설 1세대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창씨는 현재 대림산업 계열사인 종합물류회사 대림H&L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나 2년여 교제끝에 결혼했다. 다른 손녀·손자들은 아직 모두 학생이다. 장손주 최제욱(29)씨는 예일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고, 최지연(26)씨는 세계 최고의 미술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RSID에서 공부 중이다. 막내 최동욱(22)씨도 콜롬비아대에서 학부 과정을 밟고 있다. ●형제들과의 인연…삼환에 친인척 1명도 남아 있지 않아 삼환은 인척들의 경영 참여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없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친·인척이 맡았던 경동산업과 우성식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리고 지금은 친·인척 중 단 한 명도 삼환에 적을 두는 이가 없다. 맏형 고 최명환씨는 6·25 당시 자신이 설립한 삼환기업의 모체인 경동기계가 잿더미로 변하자 동생 최 회장과 함께 삼환기업공사를 설립한 뒤 주주와 이사로 활동했다. 그의 아들인 동국대 출신의 용근(67)씨는 계열사인 우성식품 이사, 삼환기업 사장 등을 맡다가 1996년 삼환까뮤 사장직을 끝으로 삼환을 떠났다. 둘째 형인 고 최영환씨는 국내 최초 강관회사인 한국강관의 3인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삼환을 떠났는데 한국강관의 부회장까지 맡은 바 있다.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의 차녀 계자(64)씨는 18대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권숙일씨와 결혼했다. 장남 용재(56)씨는 1993년 삼환의 계열사로 지금은 사라진 키친아트 등 양식기를 제조했던 경동산업의 사장을 맡은 바 있다. 차남 용진(53)씨는 ㈜유창 사장으로 삼환과는 무관한 사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셋째 형 고 최경환씨는 1958년 삼환의 관계사로 설립된 양식기 제조업체인 경동산업의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이 회사가 정리되기 직전인 1999년까지 재직했다. 그의 아들 최용철(60)씨도 이 회사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경동산업은 인건비 상승과 경쟁 심화로 자금난을 겪다 94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0년 다시 법정관리 퇴출 명령을 받으면서 정리됐다. 그의 장녀 최형인(57)씨는 한양대 인문과학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 최경환씨의 사위이자 최형인씨의 남편이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이끌어온 이윤우(60) 삼성전자 기술총괄부회장이다. 막내 동생인 최정환(73)씨는 삼환이 코카콜라 부산·경남지역 판매권을 가진 우성식품을 1969년 창립하면서 이 회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연간 매출 1300억원대로 한 때 부산지역 대표 식품회사로 명성이 높았지만 방만경영과 과다 부채를 이유로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최정환씨는 형인 최 명예회장으로부터 1997년 4월 경질됐다. 이 회사는 1997년 코카콜라 부문을 매각한 뒤 같은해 말 부도처리됐다. 최정환 전 회장은 서울대 상대, 산업은행을 거쳐 1968년 삼환에 입사했다. 이 회사 사장을 지낸 최정환 회장의 장남 최용석(47)씨는 회사가 문을 닫은 뒤 새천년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활동하는 등 한 때 정치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지금은 정리하고 지성산업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장녀 영혜(45)씨는 건설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지낸 고 장예준씨의 차남 동욱(48)씨와 결혼했다. jhj@seoul.co.kr ■ 故 정주영 명예회장과 ‘형님-아우’ “아, 이리도 황망히 가셨습니까? 아직도 회장님이 하셔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데 무얼 그리 급히 가셨습니까? 여든 여섯의 춘추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경제의 영원한 등불로 언제나 함께하시기를 기도했는데 이리 가시니 이별의 안타까움과 아픔이 너무도 시리게 느껴집니다. 정주영 회장님.” 최종환 명예회장은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타계한 직후 당시 서울신문을 통해 이같은 조사를 남긴 바 있다. 두 사람은 생시에 형님-동생으로 서로를 부르며 경쟁보다는 조언을 구하고, 돕고 의지하는 형님과 아우로서의 정이 돈독했다. 그는 건설 1세대 중에서도 특히 고 정 명예회장, 고 이재준 대림산업 명예회장, 그리고 조정구 삼부토건 명예회장을 존경하면서도 가깝게 지낸 인물로 꼽았다. 자서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이’에서 고 정 명예회장에 대해 “타고난 능력과 자질 이외에 뛰어난 판단력과 결단력, 저돌적인 돌파력에 감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평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최 명예회장에게 부회장을 역임토록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최 명예회장에게 처음 소개시켜준 사람도 고 정 명예회장이라고 덧붙였다. 고 조정구 삼부토건 회장에 대해서는 “나는 상대방의 잘못이 보이면 즉석에서 쏘아대는 성격이지만 그 분은 어떤 경우에도 참고 있다가 나중에 조용한 목소리로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도록 설명해 주는 등 깊은 인내의 미덕을 갖춘 분”이라고 회고했다. 고 조 회장이 건설협회 회장을 맡을 때 최 명예회장은 이사로 그를 도왔다. 최 명예회장은 이들과 함께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건설업을 일궈냈다.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남은 건설 1세대로 원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 가회동 자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건강이 예전같지 않다. 수십년간 매일 30분씩 해온 ‘대나무 밟기’를 건강 비결로 소개했던 그였지만 요즘은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1996년 아들에게 모든 경영을 물려주고도 일주일에 최소한 사흘은 회사에 나왔지만 올들어선 일주일에 병원가는 날 하루 정도만 오전에 회사에 들른다. 평상시처럼 직원들과 지하 구내 식당을 찾는 등 검소한 모습은 그대로라는 평이다. ■ ’60년전통’ 삼환을 만든 사람들 삼환이 60년 건설 명가의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던 데에는 전문경영인들의 공이 컸다는 평이다. 최종환 명예회장이 꼽는 최고의 CEO는 경성공업학교(현 경기공고) 출신의 고 이창호 사장이다. 부사장직으로 순직한 뒤 사장으로 추서됐고, 최 명예회장으로부터 ‘고락을 함께한 벗’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 명예회장은 지난 1977년 회사장으로 치러진 고 이 사장의 영결식 조사에서 “지금 내 오른팔이 떨어져 피가 흐르고 여며드는 것만 같은 아픔이 밀어 닥치는군요. 그러나 당신의 유지를 받들어 나는 기어코 우리 삼환을 세계 속의 삼환으로 만들고야 말겠습니다.”라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격무로 일관하다 신병을 갖게 되어 휴양을 하다가도 중동 현장으로 달려가는 등 투철한 사명감은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가 사망한 이듬해에는 ‘회사를 위해 노력한 사원에게는 응분의 보상이 꼭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연금제도와 사원주택단지조성사업이 시작되기도 했다. 전동진(74) 사장도 삼환에서는 전설로 불리는 CEO중 한 사람이다.1975년 월남이 패망할 당시 월남지사장으로 근무하던 중 하청업자 공사대금 지불 등 잔무 처리를 위해 남아 있다 8개월간 공산 치하에 억류된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68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삼환기업 중기부 과장으로 입사한 이후 1996년까지 삼환기업·삼환엔지니어링·삼환까뮤 등 계열사 사장을 두루 역임했다. 지금은 삼환의 육영재단인 우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재직중이다. 행정고시 출신의 최석원(75) 고문은 내무부 치안본부장, 노동청장, 부산시장, 건설부 차관 등을 역임한 뒤 삼환의 해외사업이 꽃을 피우던 1982년 사장대우 상임고문으로 영입됐다. 지금도 우성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노년까지 삼환과의 인연을 지키고 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이경형칼럼] 임기4년차, 과욕은 금물

    [이경형칼럼] 임기4년차, 과욕은 금물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4년차에 진입했다.5년 가운데 이제 2년이 남은 셈이다. 단임제의 특성상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은 임기 초반에 탄력을 받아 상승, 중반쯤 최고조에 올랐다가 4년차부터는 가파르게 떨어지는 법이다. 이런 시기의 국정 수행은 새로운 과제보다는 기존 과제들을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과욕은 금물이다. 더욱이 자만이나, 오기를 부리는 것은 독배를 마시는 것과 다름없다. 5년 단임제의 역대 정권들이 비슷한 시기에 어떤 실패를 했는지를 되돌아보면 이를 알 수 있다.6공화국 노태우정권의 4년차였던 1991년은 수서사건에 이어 시위 중이던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이 발생하는 등 공안정국 여파로 몸살을 앓았다. 이러한 불행은 바로 전해의 3당 합당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여소야대에서 하루아침에 절대다수 여당으로 변신했지만,‘한지붕 세가족’은 내각제 밀약이 깨지면서 내분에 휩싸였다. 인위적인 정계 개편이 얼마나 허망하게 끝났는지를 보여준다. 문민정부 4년차인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은 5,6공 청산 작업에 이어 4·11 총선에서 여당의 수도권 압승으로 기세를 올렸다. 한편으로는 OECD에 가입,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며 때 이른 축배를 들었고, 연말엔 노동법을 기습 처리하는 등 권력의 오만함을 드러냈다. 그해 대외채무는 1045억달러에 달했지만, 펀더멘털 강조, 반도체 착시 등으로 IMF 위기가 도래하는 징후조차 포착하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의 4년차인 2001년엔 자민련에 민주당 의원을 꾸어주기까지 하면서 2차 DJP 공조를 선언했지만,9개월만에 다시 분열하고 말았다. 언론사 세무사찰을 4개월간 실시하는 등 권력의 칼을 휘둘렀으나,10·25 재·보선에선 한나라당에 완패했고, 결국 ‘게이트 공화국’으로 이어지다 DJ 아들까지 구속됨으로써 레임덕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불과 3대 정권에 걸친 사례들이지만 반면교사로 삼을 대목이 적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찌감치 권력기관을 독립시켜 권력을 분산하고, 청와대와 당을 분리해왔기 때문에 과거 정권에 비해 심각한 권력형 비리나 레임덕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함정은 늘 있다. 정권재창출에 매달리다 보면, 무리수를 두기 쉽다. 앞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후계 정권 창출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답시고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야당의 대권 주자들을 견제하고 싶은 유혹도 받을 수 있다. 정권 차원에서 합법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그럴싸한 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자제하는 것이 득이 된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여당에 몸담고 있다 하더라도 공정한 심판관에 머물기를 원한다. 불공정한 심판이라고 생각되면 유권자들은 여당 후보에게 그 몇배의 피해를 입히기 마련이다. 당면 국정 과제들 가운데 노사관계의 재정립이나, 부동산정책, 한·미 FTA 추진 등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것들만 잘 마무리지어도 높이 평가받을 것이다. 최근엔 양극화 해소와 고령화, 저출산 문제를 새로운 국정 과제로 제시하면서 해법을 찾고 있다. 단기 처방의 대증요법으로서는 안 된다. 다음 정권에 누가 들어서더라도 계승할 수 있는 장기 보약요법으로 가야 한다. 2차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은 매력적인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겠으나, 너무 매달릴 일은 아니다. 대선 국면에 이러한 대형 이벤트로 대박을 터뜨리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과욕=실패’로 끝나기 십상일 것이다. 본사 고문 khlee@seoul.co.kr
  • 아이칸, KT&G에 회계장부 열람 요청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 측이 회계장부 열람을 요청하며 KT&G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적대적 인수·합병(M&A) 과정에서는 현 경영진을 공격할 빌미를 찾기 위해 회계장부 열람을 요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KT&G는 28일 아이칸과 스틸파트너스의 연합체인 ‘KT&G의 가치실현을 위한 위원회’(대표 워렌 리히텐슈타인)가 이날 오후 6시쯤 팩스를 통해 ‘회계장부 및 서류열람 등사 청구서’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아이칸 측이 요구한 자료는 △이사 보수 지급 내역 △KT&G 사회복지재단 출연 내역 △자문사와의 계약 내역 등이다. 아이칸 측은 이같은 자료를 등사한 뒤 2일까지 자신들의 법률대리인 에버그린 법률사무소에 제출해줄 것을 요구했다. KT&G 관계자는 “합법적으로 공개할 수 있는 범위를 고려한 뒤 합리적인 기간 내 답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행법상 상장사의 지분 1%(자본금 1000억원 이상 기업은 0.5%) 이상을 6개월 이상 보유한 주주는 누구나 회계장부의 열람과 등사를 요구할 수 있다. 워렌 리히텐슈타인은 또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앞으로 KT&G의 주주를 대상으로 공개매수를 포함해 동원 가능한 모든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그는 “KT&G가 (사외이사 선임, 부동산 처분 등)우호적인 협상 제안을 정당한 이유없이 일방적으로 거절했다.”면서 “다양한 대응 방안을 모색중”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금융감독위원회는 적대적 인수합병 보완 대책의 하나로 의무공개매수제도의 재도입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무공개매수제도는 제3자가 상장기업 주식을 25% 이상 살 경우 50%+1주까지 공개매수를 통해 청약하도록 한 강제조항인데, 외환위기 직후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로 폐지됐다.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외국 투기자본 규제 선진국보다 취약”

    칼 아이칸의 KT&G에 대한 경영권 공격이 주목을 받으면서 투기성 외국자본에 대한 국내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은 27일 ‘투기성 외국자본의 문제점과 정책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외국자본 규제 제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외환위기를 계기로 선진국 수준 이상으로 완화됐다.”고 진단했다. 이 보고서는 이후 부실 기업의 구조조정을 촉진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인수·합병(M&A) 허용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경영권 보호장치를 대부분 폐지함으로써 투기성 자본의 불공정한 행태를 규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선진국에선 외국자본을 차별적으로 규제하지는 않지만 국가기간산업의 경우에는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면서 적대적 M&A의 폐해를 예방하기 위해 다양한 경영권 방어장치를 인정하고 있다며 국내 상황과 비교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남양유업 홍두영 명예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남양유업 홍두영 명예회장家

    기업설명회에 전혀 관심이 없는 회사, 돌다리를 몇 번씩 두들겨보고도 건너지않는 보수적 경영, 창업주 얼굴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회사…. 남양유업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자사의 우유와 유제품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도 기업과 창업주에 대해 더 많이 알려야 한다. 하지만 이 회사의 창업주는 ‘크렘린’처럼 베일에 가려져 있다. 남양유업을 창업한 홍두영(87) 명예회장은 한국 낙농업의 대부로 통한다. 홍 명예회장은 40여년간 한국 낙농산업의 기반을 조성하고 좋은 유제품을 만들기 위한 외길을 걸어왔다. 홍 명예회장은 지난달 2일 타계한 김복용 매일유업 회장과 곧잘 비교된다. 두 기업 창업주는 나이가 비슷하고 이북 출신이라는 점 등 공통점이 많다.‘짠돌이’ 경영도 닮았다. 우유·조제분유·발효유·치즈·음료 등의 제품군도 상당히 겹치면서 ‘모방과 카피’ 논란도 많다. 연 매출액도 8000억원대로 엇비슷하다. 여러면에서 두 회사는 ‘물고 물리는’ 숙명적인 관계다. 남양유업의 대표이사 3명 가운데 한 명인 창업주 홍 명예회장은 국내 최고령 최고경영자(CEO)이다.1919년 1월7일생이다. 남양유업이 창립된 1964년 이후 43년째 대표이사와 사장, 회장, 명예회장 직위를 줄곧 지키고 있다. ●영변 지주의 장남 홍두영 명예회장은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면 서부동에서 홍재영씨와 최점숙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영변에서 손꼽히던 지주여서 어린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홍 명예회장은 일제시대인 1944년 일본 와세다 제1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와세다대에 진학, 불어불문학과를 마쳤다. 홍 명예회장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어릴적 행적이 거의 알려진 게 없다. 일본에서 귀국한 27세의 청년 홍두영은 어수선하던 광복 정국에서 고향 영변의 숭덕여자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교사 생활을 하던 1947년 5월 같은 영변 출신의 열살 아래인 지송죽(77)씨와 결혼,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김일성 정권이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엘리트 가정을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홍 명예회장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 후퇴 때 가족과 홍선태(작고) 전 남양산업 대표 등 동생을 데리고 월남했다. ●배고픈 아이들 때문에 유업에 손대 홍 명예회장의 첫 사업은 경험 부족 등으로 실패했다. 종전 이듬해인 1954년 부산에서 비료를 수입하는 ‘남양상사’를 일으켰다. 회사가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는 듯했지만 62년에 화폐개혁이란 뜻밖의 복병을 만나 8년만에 모든 재산을 날려버렸다. 일각에서는 당시의 충격이 너무 심해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 소심증과 같은 마음의 병이 생겼다는 말도 한다. 남양유업 관계자는 “홍 명예회장은 신문이나 TV를 통해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꺼린다.”며 “경기단체 회장직 제의도 많았지만 다 물리쳤다.”고 말했다. 첫 사업 실패 이후 홍 명예회장의 보수적 경영이 시작됐으며, 큰 아들 홍원식(56) 회장에 대한 경영수업이 다른 기업보다 일찍 시작됐다. 홍 명예회장이 사업 재기를 꾀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분유였다. 비료 수입업에 종사하던 그는 1963년 선진 외국 출장길에서 분유사업을 눈여겨 봐뒀던 것. 분유를 마음껏 먹고 있던 외국 아기의 모습을 본 그에게 한국전쟁 직후 먹을 게 없던 고국의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국으로 돌아온 홍 명예회장은 64년 3월 13일 남양유업을 설립했다. 당시 정부는 ‘보릿고개’를 해결하고 농민들의 소득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낙농사업에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홍 명예회장은 영변의 지주 아들이어서 낙농업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뚝심으로 밀어붙였다.1965년 11월 충남 천안에 제1공장을 짓고 자가생산 체제에 들어갔다. ●한 때는 아들, 부인까지 경영에 관여 충남 천안 공장부지가 금광터였기 때문이었을까. 지난 67년 1월10일 출시된 유아용 제조 분유인 남양분유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어 77년에는 유산균 발효유인 남양 요구르트를 개발, 히트 브랜드 대열에 합류시켰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출연료 1억원을 주고 축구선수 차범근을 광고 모델로 내세웠다.78년 유업계 최초로 기업을 공개하고 주식을 상장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가족 모두 팔을 걷어붙였다. 장남 홍원식 회장이 회사일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중이던 73년부터 종종 회사에 나와 가업을 도왔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회사에 달려와 입출금 전표를 끊는 등 경리업무를 봤다.74년 기획실 부장을 시작으로 경영수업에 들어갔다.77년 이사,79년 상무,80년 전무,88년 부사장을 거쳐 지난 90년 4월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가 2003년 회장으로 물러났다. 그는 90년대에는 불가리스, 아인슈타인우유, 아기사랑秀,E-5, 위풍당당 동충하초 등을 내놓으며 남양유업이 성장가도를 달리게 했다. 회사가 성장 엔진을 필요로 하던 80년 9월 둘째 아들 홍우식(53) 서울광고기획 사장도 남양유업에 합류했다.85년 8월까지 남양유업 과장을 지냈다. 남양유업이 성장가도를 달릴 80년대 초반 큰아들 홍원식 회장과 둘째 아들 홍우식 사장이 모두 힘을 합쳤다. 홍 명예회장의 부인 지송죽씨도 한때 남양유업의 감사로 근무했다. 남양유업이 최근 곧잘 내세우는 ‘친인척 경영 참여 금지’는 그 당시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창업주 홍 명예회장은 당시 90년 4월 회사 최고경영자 자리를 홍원식 회장에게 물려주면서 회사 운영에 관해 두 가지 금기사항을 가르쳤다.‘기업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하지 말 것’과 ‘부동산 투기를 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고 전한다. 홍 회장뿐만 아니라 기업인이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사항이다. 연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홍 회장은 30년 가까이 남양유업에서 근무한 덕분에 누구보다 회사 사정에 밝았다. 홍 회장은 지난 99년 10월 덴마크 왕실로부터 ‘영예로운 메달’을 받았고,2001년 7월 무차입 경영과 축산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25회 전국경영생산성촉진대회에서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43년째 남의 건물을 사옥으로 지난 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위기 당시 대기업마저 자금난에 휘청거릴 때 남양유업은 오히려 20% 이상의 성장을 이뤘다. 대표적인 소매업종으로 불황을 잘 타지 않는 데다 기업 규모보다도 ‘브랜드 파워’가 강한 까닭이다. 게다가 98년 11월 그동안 상업·조흥·신한은행에 남아 있었던 180억원의 은행차입금을 모두 갚았다. 부채 비율을 167%에서 0%로 떨어뜨렸다. 회사는 당시 보도자료에서 ‘무차입(無借入) 경영의 원조’라고 공식 선언했다. 현재는 4700억여원을 확보,1만%의 사내유보율을 자랑한다. 이로 인해 상당한 금융소득도 올리고 있다. 이같은 남양유업의 성공은 창업주 홍 명예회장의 독특한 철학인 ‘4무(無)’경영에 바탕을 두고 있다.4무는 돈을 빌려쓰지 않고(무차입), 노사분규가 없으며(무분규), 친인척이 개입하지 않으며(무파벌), 자기 사옥이 없는(무사옥) 경영을 말한다. 인사에서의 투명성도 줄곧 강조된다. 오너의 친인척은 회사에 발붙이지 못하며, 파벌 형성 또한 용납되지 않는다. 홍보와 마케팅을 총괄하는 성장경 상무는 “남양유업에는 자연스럽게 인사청탁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사옥도 없다.43년째 남의 건물에 세들어 살고 있다. 현재는 서울 중구 남대문 대일빌딩을 빌려쓰고 있다.1000억원이 넘는 시설투자를 하고 종업원이 3000명이 넘는 기업이지만 임원은 단 9명에 불과하다.43년간 단 한차례도 노사분규가 발생하지 않았다. 남양유업은 목장주들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품질검사가 깐깐한 회사다. 그러나 원유값 만큼은 현금으로 결제하고, 결제기일도 정확하게 지키는 회사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목장주들이 거래하기를 가장 선호하는 회사로 통한다. 제품의 다양화는 추진하지만 사업의 다각화는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우유 캔을 만드는 회사나 낙농가를 위한 사료공장 등을 세우자는 내부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전공을 벗어나는 사업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게 지금까지의 방침이다. 식품 분야 세계 최고가 되기까지는 절대로 한 눈 팔지 않겠다는 창업주 홍 회장의 경영 철학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홍 회장은 지난 2003년 11월 대표이사 사장에서 물러나고 최대주주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홍 명예회장은 박건호 대표이사 부사장, 김승수 대표이사 전무 ‘3두마차’ 경영체제를 확립해 오고 있다. 홍 회장은 그러나 경영에 무관심하지는 않다. 회사에 사무실을 두고 거의 매일 출근을 하면서 중요 사항을 직접 결정할 만큼 경영에 깊이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 명예회장도 가끔씩 회사에 들르곤 한다. 남양유업과 거래하는 회사의 한 관계자는 “남양유업이 1억원 이상의 경비를 지출할 때는 오너가 반드시 결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이에 따라 남양유업의 의사 결정이 경쟁 기업에 비해 많이 늦다.”고 말했다. 홍 명예회장은 부인 지송죽씨와의 사이에서 3남2녀를 두고 있다. 하지만 회사 직제상 경영에 참여하는 이는 창업주 홍 명예회장 자신뿐이다. 큰아들 홍원식 회장은 최대 주주로 남아있다. 자본금 44억 3300여만원인 남양유업의 지난해의 정확한 매출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2004년의 매출은 7729억 8400만원에 당기순익은 427억 9400만원에 이른다. 홍원식 회장은 19.44%(13만 9964주)의 지분을 가진 최대 주주다. 홍 명예회장은 7.63%(5만 4907주)를, 홍원식 회장의 부인 이운경(54)씨는 0.89%(6400주)를 보유하고 있다. 둘째 아들 홍우식 사장이 0.63%(4568주), 셋째 아들 홍명식(46) 사까나야 사장은 0.4%(2908주)씩 갖고 있다. 홍두영 명예회장의 처남댁 김정선씨가 이색적으로 0.16%(1168주)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막내딸 홍영혜(44)씨는 지난해 초 장내에서 2612주를 매도, 지분율이 0.45%(3208주)에서 0.08%(587주)로 낮아진 것이 눈에 띈다. 특히 미국 투자회사 안홀드 앤드 에스 블라이흐뢰더가 15.90%(11만 4448주)를 보유하는 등 외국인들이 눈독을 들이는 회사다. 최대 주주와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지분은 23.74%에 이른다. 남양유업의 주식 거래가 극히 부진해 한때 상장폐지 위기까지 내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소액주주를 무시하며 경영권 방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내년도 매출 목표는 1조원으로 잡고 있다. ●평범한 집안과 결혼 창업주 홍 명예회장의 자녀 혼맥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큰 아들 홍원식 회장은 지난 76년 고려해운 창업주 이학철(작고) 회장의 장녀 이운경(54)씨와 화촉을 밝혔던 것이 눈에 띌 정도다. 홍 회장은 이동찬(84) 코오롱그룹 회장 가문과도 연결된다. 이동찬 회장의 셋째딸 이혜숙(54)씨가 고려해운 이 회장의 장남인 이동혁(59) 고려해운 회장과 결혼한 까닭이다. 홍원식 회장은 부인 이운경씨와의 사이에서 진석(30), 범석(27)씨 두 자녀를 두고 있다. 이씨는 사회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통한 남양유업의 3세 승계가 어떻게 이어질지도 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2004년 말 홍 회장은 어머니 지송죽 전 감사로부터 주식 2만 108주(2.79%)를 모두 물려받았다. 이를 두고 형제간에 사이가 소원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다. 둘째 아들 홍우식씨는 남양유업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광고회사 서울광고기획 사장을 맡고 있다. 홍 사장은 지난 71년 서울고교와 76년 연세대를 거쳐 83년 미국 산타클라라대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해군 중위 출신인 홍 사장은 지난 79년 8월 한국IBM을 거쳐 지난 80년 9월부터 85년 8월까지 남양유업 과장을 지냈다. 남양유업내에 있던 광고 부문을 들고나와 부친의 우산에서 독립했다. 홍 사장은 지난 85년 8월 서울광고기획의 상무,88년 전무,90년 부사장을 거쳐 93년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지난 1980년 설립된 서울광고기획은 2004년 총 취급고가 626억원으로 업계 17위였다. 주요 광고주로는 남양유업을 비롯해 태영·보령제약·보령메디앙스·BYC, 씨엠에스 천재교육·하선정종합식품 등이 있다.2005년도의 매출 목표는 900억원이지만 정확한 매출은 알려지지 않았다. 홍 사장은 지난 81년 5월 최수진(49)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연년생인 자녀 인석(24), 서현(23) 등 1남1녀를 두고 있다. 지난 72년 이름을 춘애에서 수진으로 바꾼 최씨 역시 별다른 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녀 영서(52)씨는 이교현(57)씨와 결혼, 수경·수영(25) 쌍둥이와 정호(18)군을 두고 있다. 홍 명예회장의 큰사위 이교현씨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씨는 개인사업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셋째 아들 홍명식(46) 사까나야 사장은 연봉이 1억원을 웃도는 외환 딜러직을 떠나 음식점 8개를 운영하고 있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그는 서울파이낸스센터 지하 2층에 회전초밥 전문점 사까나야 등 6개의 지점을 두고 있으며, 한정식집 돈후이 등을 운영하는 외식업 사장이다. 홍 사장의 이력은 다채롭다. 용산고와 연세대를 거쳐 지난 87년 미시간대에서 MBA를 땄다.1987년부터 JP모건체이스 은행 등에서 12년동안 근무한 금융통.99년 인터넷서점 ‘예스24’를 공동 창업해 한세실업에 매각되기 전인 2003년 5월까지 부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6개 사까나야와 돈후이 등의 전체 매출액이 100억원대에 이르는 등 외식재벌 반열에 들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외식업종으로 변경한 홍 사장은 지난해 초 인터넷 의류 쇼핑몰인 블루피치를 운영하는 김현정(40)씨와 결혼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김씨는 고려대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홍 사장은 전처에게서 효정·희정(19) 등 일란성 쌍둥이 자녀를 두고 있다. 홍 사장은 쌍둥이 자녀 외에도 동근(13)군을 두고 있다. 이들은 모두 싱가포르에서 공부하고 있다. 막내딸 홍영혜씨(44)는 지난 90년 영국 웨일스개발청의 황재필(44) 한국사무소장과 결혼, 하나(17)양과 승현(11)군을 두고 있다. 영혜씨는 경희대 작곡과를 졸업한 재원. 서울 양정고를 마치고 연세대를 다니다가 미국 조지아주립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한 황씨는 지난 86년 주한 영국대사관 부상무관을 거쳐 89년부터 영국 웨일스개발청 한국사무소장을 맡고 있다. 황씨의 부친은 헌병차감을 지냈던 황태섭(작고)씨다. 황씨는 86년 연세대 어학당에서 홍씨와 얼굴을 익혔다. 이들은 홍씨의 올케 소개로 사귀다가 이듬해 결혼에 골인했다. chuli@seoul.co.kr ■ 우량아 선발대회 아시나요 남양의 대표적인 성장 엔진으로는 1971년 시작된 ‘전국우량아 선발대회’를 들 수 있다. 자라나는 2세의 건강과 체격 향상을 일깨워주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사회 공헌 행사였다. 첫 대회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가했고 아기와 엄마 등 수상자를 청와대에 초청, 오찬을 할 정도로 관심이 깊었다. 변변한 행사나 이벤트가 없던 당시로는 전 국민이 참여하는 큰 행사였으며,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이 당시 행사를 기억하고 있다. 우량아 선발대회는 창업주 홍두영 명예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아기 엄마라면 누구나 자기 아기를 우량아로 키우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에서 토실토실한 아기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들었다.24개월 미만의 아기들이 지방 예선을 거쳐 결선을 겨뤘다. 제1회 전국 최우량아는 춘천에 사는 한영만 아기(69년 11월생)로 발육상황은 키 85㎝, 몸무게 13㎏, 머리둘레 50㎝, 생후 11개월부터 걷기 시작했으며 모유와 우유를 함께 먹였고 과일즙, 달걀 노른자 반숙 등을 간식으로 먹였다고 한다. 튼튼하고 건강한 아기의 대명사인 우량아 선발대회는 84년 제13회 대회까지 계속됐다. 이후 92년부터 임신육아교실로 바꿔 진행되고 있다. 출산율 저하를 막기 위해 새내기 주부들에게 올바른 출산 정보 전달에 힘쓰고 있다. 연간 100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전국에서 250회 이상 연다. 특히 산부인과·소아과·피부과·한방 분야의 권위있는 전문의들이 나와 임산부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저출산이라는 사회적 숙제를 풀기 위한 남양의 또 다른 사회 공헌활동이다.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참여정부 3년] (상) 평가와 과제

    [참여정부 3년] (상) 평가와 과제

    ‘비정한 사회, 따뜻한 사회-양극화 시한폭탄, 이대로 둘 것인가.’ 청와대가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본격적인 공론화를 시도하는 ‘양극화 문제’에 대한 특집 기획의 주제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올해 화두는 분명 양극화이다. 사실상 남은 임기 동안의 과제이다. 양극화의 ‘완전’ 해소가 아닌 완화를 위한 발판을 다지자는 의도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신년연설에서 “양극화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던졌다. 물론 노 대통령의 “재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발언은 ‘증세 논쟁’을 일으켰고, 급기야 같은 달 25일 신년기자회견에서 “당장 증세를 주장하지 않는다.”며 주춤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렇지만 일단 국민들에게 ‘양극화 해소’에 따른 해법 차이 및 갈등의 골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자평이다. 청와대의 등식은 ‘양극화의 해소=미래의 비전’이다.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간의 빈부 격차가 갈수록 심화되고, 중산층이 엷어지는 양극화에 대비하지 않으면 결국 훨씬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나아가 사회안전망이 없는 데다 저출산·고령화 사회까지 겹칠 경우,10∼20년 후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경고까지 서슴지 않는다. 해법으로 좋은 일자리 공급, 복지서비스 확충, 공공서비스의 양 및 질의 제고 등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속내에는 상위계층의 공동체에서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취임 3년 동안 경제의 침체 속에서 ‘성장’을 도외시할 수 없는 탓에 ‘분배’에 해당하는 양극화의 공론화를 꺼렸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이다. 정치권이나 학계에서도 성장과 분배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그렇지만 해법의 주체가 ‘국가냐, 시장이냐.’에 따라 다르다. 이화여대 이성형(정치외교학) 교수는 “국민들도 양극화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전제,“양극화가 구조화되면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또 “정부가 증세나 토지개발이익금의 환수 등 과감한 정책을 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지 못하면 자칫 중남미의 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지율에 얽매일 인기영합의 정책은 국가의 미래 준비만 더디게 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한신대 이인재(사회복지학) 교수는 양극화 해소에서 정부의 제도화된 조정력, 중장기 로드맵의 마련 등을 강조했다. 이 교수는 “부처별의 정책이 아닌 복지·일자리·교육 등 관련 정책이 함께 맞물려 돌아갈 수 있도록 정책을 수립해 시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교수는 양극화 해소를 시장의 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보다는 국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는 쪽에 무게를 뒀다. 청와대의 핵심 관계자는 “고도 성장과 압축 성장에 따른 IMF의 후유증이 중산층의 붕괴로 나타나고 있다.”면서 “양극화를 소모적인 정쟁으로 몰고 갈 것이 아니라 책임있는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열린세상] 한·미 FTA와 정치의 죽음/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시작한다고 한다. 통상교섭본부장이 워싱턴 미의회 앞에서 미국과 공동으로 협상 개시를 발표했다. 갑자기 머리가 뻐근해진다. 이렇게 중요한 사안이 어떻게 한번도 제대로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는지 나로서는 그저 신기롭기만하다. 언론도 애써 공론화를 피하는 것 같고, 정치인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시민사회 단체는 갑자기 날아든 소식에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향후 한국의 산업, 문화, 심지어 방위정책과 통일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사안이 정치의 손을 떠나 관료의 입으로 발표되었다. 정치는 명백히 죽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미 FTA는 무역과 투자를 넘어선 메가톤급 쓰나미가 될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세계화 정책보다 더욱 큰 해일이 몰아닥칠 것이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스크린 쿼터나 농산물 개방만이 문제가 아니다. 산업의 구조조정을 넘어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남북경협과 안보정책에서 대중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영향권에 들어간다. 미국측이 이구동성으로 협상개시를 자축하는 것은 불안한 한·미동맹에 쐐기를 박는 효과가 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나도 FTA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수순이 틀렸고, 협상하는 방식이 졸속이다. 정말 조마조마한 느낌마저 든다. 일단 경제규모의 압도적 차이에서 오는 협상력의 비대칭성에서 출발해보자. CIA의 2005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미국의 7% 수준에 불과하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은 멕시코의 GDP 규모가 8% 수준이다. 이런 수준이라면 미국에 한·미 FTA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올려놓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국이 겪어야 하는 것은 쓰나미 수준의 해일이다. 업계는 공산품 수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반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대미관세가 그다지 높지 않은 마당에 업계가 한·미 FTA를 목 놓아 기다리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신 농촌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큰 피해를 입을 것이고, 이제 겨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문화산업은 송두리째 무너져버릴 것이다. 경쟁력이 허약한 서비스 산업도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멕시코의 예를 보자면 금융업과 유통업은 너무 쉽게 미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교육, 의료, 법률 서비스 부문도 미국화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나마 위로거리를 찾는다면 기러기 아빠들이 줄 것이고 과거보다 영어 발음이 조금 유창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실업은 더욱 늘어나고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된다. 논란을 거듭한 한·미투자협정의 핵심내용도 고스란히 FTA에 옮겨지게 될 것이다. 미국인투자는 내국인 수준으로 보장되고, 노동의 유연화는 무역협정에 내장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사관계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되리라. 그래서 나는 한·미 FTA가 무역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미래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혁명적 수준이 되리라 예견한다. 혹시 공론화는 정책결정을 더디게 만드는 비용이라 생각해서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일까. 한·미 FTA는 제2의 개국에 버금가는 사안이다.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준비가 덜 된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으로 IMF 사태를 맞았던 우리가 아닌가. 성장과 안정이 보장되는 한·미 FTA가 되기 위해서 시민사회, 학계, 언론은 향후 1년 내내 토론회와 공청회를 열어야 한다. 당연히 이 사안은 다음 대선후보들의 공약이 되어야 하고 협상도 차기정부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닌 것 같다.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 [사설] 충남대 김밥할머니 기념관 이름 살려야

    평생을 어렵게 모은 돈을 기증받아 건립된 충남대 김밥할머니 기념관이 개명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충남대는 고 이복순 할머니가 기증한 50억원의 부동산과 현금 1억원으로 건립한 공연관을 할머니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정심화국제문화회관’으로 불러왔다.정심화는 할머니의 법명이다.그러나 이 일대가 복합단지로 변모하는 것을 계기로 학교측은 ‘충남대국제문화회관’으로 개명을 추진하고 있다. 충남대는 공연관 주변에 언어교육원,국제교류원 등이 들어서면서 교육문화연구단지가 돼 새 이름을 찾게 됐다고 해명한다.또 회관에 정심화홀과 할머니의 흉상이 남아있는 만큼 할머니의 정신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정심화회관은 할머니가 기증한 돈 외에도 국고 200억원이 더 들어갔고 IMF체제의 여파로 한동안 기증한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이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학교측의 명칭변경 작업은 겉치레,형식주의로 보여 씁쓸하다. 이복순 할머니는 지난 1990년 평생 모은 돈을 기증,척박한 우리나라의 기부문화에 불을 지폈다.부자나 사업가가 아니라 김밥 행상을 하면서 어렵게 모은 돈이어서 의미가 더욱 깊었다.이런 점에서 나눔의 정신을 일깨워준 할머니의 이름은 국제문화연구단지에서 오히려 더 빛이 난다고 할 수 있다.학교측은 학생과 지역주민들이 반발하자 명칭변경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차제에 아예 정심화회관을 ‘김밥할머니 기념관’으로 바꾸었으면 한다.학생들이 김밥에 담긴 할머니의 뜻을 새기면서 더욱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토요일 아침에] 거짓된 구조의 붕괴/이동익 신부·가톨릭대 교수

    요한 바오로 2세 전임 교황은 1989년을 희망으로 가득 찬 사건들이 절정에 이른 해로 묘사한다.1989년을 기점으로 소련을 비롯하여 중부 및 동부 유럽의 여러 공산 위성국가들이 무너지는 등 인류 역사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1980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독재와 압제의 정권들이 무너져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 교회가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고 향상시키기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자평하기도 한다. 실제로 교황은 당시 소련의 서기장인 고르바초프를 두 차례나 만났고 그후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원인을 ‘거짓된 구조들의 붕괴’에서 찾는다. 사유재산의 부정이라든가 인간 기본권으로서의 자유와 양심에 대한 억압, 나아가 인간 사회의 기본 구조인 가정에 대한 부정 등 인간다운 삶이 부정되는 국가 체제의 존속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경제적 평가의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없으며, 단순히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에 따라서 정의될 수 없는 존재이다. 만일 인간의 인간다움이 철저히 무시되고, 오직 유토피아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면 이는 결국 인간을 철저히 소외시키는 거대한 거짓의 틀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거짓 위에는 그 어떤 것도 온전히 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다. 우리 국민은 이와 유사한 교훈을 불과 몇년전 뼈저리게 경험했다.IMF 구제 금융을 받으면서 온 나라의 경제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이는 단순한 외환위기를 넘어 온 국민의 실존적 위기로까지 가속화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고통의 원인 역시 거짓된 구조 때문이 아닐까. 분식회계로 성과를 부풀리기에 급급한 기업들은 엄청난 부채와 외화 유출로 빈껍데기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가정이 무너지고, 자살은 급증했으며, 나라 전체가 붕괴되어 가는 위기감과 절박함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행히 온 국민이 힘을 합친 결과 이제 그 위기는 어느 정도 극복된 것 같다. 거짓을 참으로 바꾸려고 노력했고, 서서히 기업과 사회도 투명해지면서 거짓은 아예 발도 붙이지 못하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조금씩이나마 느껴진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와중에 우리는 ‘황우석 교수 사태’를 만나 또다시 충격과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황 교수의 논문 조작과 거짓이 세계의 과학계와 우리 국민에게 준 정신적 쇼크는 실로 대단했다. 논문 조작과 거짓이 서울대 조사위원회에서 밝혀졌음에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 국민들의 반응에서 그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조작과 거짓 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올바로 설 수 없다는 점이다. 무너진 소련 공산주의가 다시 일어설 수 없고, 거짓으로 국민을 속인 기업들이 결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최근 몇년간의 교훈을 통해 배울 수 있지 않았는가. 과학계의 의도적인 조작과 거짓으로 파생되는 손실은 국민의 안전과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만큼 실로 엄청나며 과학이 거짓된 구조 위에 자리잡을 수 없는 절대적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마르크시즘적 공산주의의 몰락이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가시화했고,IMF의 위기가 투명사회를 이루려는 우리의 노력을 한층 더 앞당겼다면, 황 교수의 논문조작과 거짓 사태는 그것을 과감히 떨침으로써 새로운 신뢰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확신한다. 이동익 신부·가톨릭대 교수
  • “재건축 집값 잡는것이 목적 조합원이익 줄여 투기 차단”

    8·31 후속 대책의 핵심은 재건축 집값을 잡는 것이다. 개발이익환수, 분양가 단일화 등 조합원의 이익을 줄여 투기를 방지한다는 게 골자다. 박헌주 주택도시연구원장은 재건축 아파트도 개발부담금을 내는 개발이익환수법 적용 대상으로 보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열린우리당 부동산정책기획단에 제안한 장본인이다. 그는 “은마아파트 등 상당수 강남 노후아파트들이 기본적으로 리모델링을 하기에 부적합한 구조다.”면서 “7월부터 시행되는 기반시설부담금제는 1대1 재건축엔 효과가 없고 임대아파트도 이미 의무적으로 짓도록 하고 있어 개발부담금 부과 방안이 최적이란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재건축을 통한 개발이익은 얼마나 환수할지와 관련,“당초 개발이익환수법이 시행된 1989년 당시 개발이익의 50%를 정부가 가져갔지만 이후 IMF 경제위기로 경기가 나빠지면서 한 푼도 받지 않다가 8·31대책 당시 다시 25%로 상향 조정한 바 있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토지주택실장 기획조정실장 등 25년간 국토연구원에 몸담은 뒤 지난해 공모를 통해 주택도시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제정 관련 연구를 총괄한 바 있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은 재건축 아파트의 조합원 분양가와 일반분양가를 같은 금액으로 책정하는 ‘분양가 단일화’ 방안을 통해 재건축 이익을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합원은 일반 분양자들보다 10∼30% 싸게 제공받아 재산을 불릴 수 있어 재건축을 추진한다. 때문에 분양가를 똑같이 만들어 놓으면 투자 차익이 감소해 재건축 투기에 대한 의욕도 줄어들 것이란 논리다. 현대경제연구원 출신인 김 소장은 건교부 신도시자문위원, 건설경기동향점검반, 주택협회 분양가자율조정위원, 강남구 행정자문위원 등 주택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해온 시장동향 전문가다.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노숙인 아닌 이름 석자로 불리고 싶다”

    “노숙인 아닌 이름 석자로 불리고 싶다”

    1일 오전 8시 용산구민회관. 서울시가 처음으로 추진하는 ‘노숙인 일자리갖기 프로젝트’에 참여할 노숙인 1000여명이 새벽부터 몰려들어 구민회관 앞 인도를 가득 메웠다. 오전 8시30분, 구민회관 입장이 시작됐다. 간단한 참가 신청 절차를 마친 노숙인들에게 옷 한벌과 점심 식권 한장이 주어졌다. 오리엔테이션 기간 동안 이들은 ‘하이서울’마크가 새겨진 푸른색 모자와 유니폼을 입는다. 시는 이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려 유니폼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체면 버리고 재기 성공하라.” 오전 10시30분, 노숙인들과 똑같이 푸른 유니폼을 입은 이명박 서울시장이 첫 연사로 나섰다.“모자를 조금만 올려써봐요. 얼굴이 안 보여요.”라며 강연을 시작한 이 시장은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 아직 정신을 덜 차렸습니다.”라는 직언을 쏟아냈다. 이 시장은 하루 한끼도 못 먹었던 10대 시절, 환경미화원으로 일했던 대학 시절 등 거지와 다를 바 없었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시장은 “기업은 동정하는 마음으로 직원을 뽑는 곳이 아닙니다.”라면서 “교회나 복지회관에 다니며 밥을 얻어먹으려면 차라리 굶고, 일할 의지를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시장은 또 “시는 여러분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어 갈 것”이라며 자립하겠다는 약속을 해주길 당부했다. ●“아기 분유값이라도 벌고 싶다.” 이 시장의 강연을 경청하며 간간이 박수를 보냈던 박모(53)씨.20년 전 결혼에 실패하고 혼자 살아온 박씨는 IMF 외환위기 때, 기능공으로 일해왔던 공장에서 쫓겨났다. 쉼터 생활이 올해로 8년째인 박씨는 “나도 이명박 시장만큼 못살았다. 이번만큼은 꼭 내 일자리를 찾아 노숙인이 아닌 내 이름 석자로 불리고 싶다.”며 재기의 의지를 다졌다. 15개월 젖먹이 아이와 함께 공원 등지에서 6개월 가까이 노숙을 했던 김모(33·여)씨도 서울시의 첫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며 빚더미에 앉은 김씨는 “남편도 노숙인이 돼 거리를 떠돌고 있다.”면서 “아기 분유 값이라도 벌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기업들 “노숙인들 일하는 것 지켜봐요.” 기업 관계자 50여명도 참석했다. 이들은 노숙자들을 아직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사회복지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크기에 우선은 이들은 지켜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SH공사 이철수 사장은 “사회 복지 차원에서 노숙인을 받아들일 것”이라며 “120명 정도를 우선 현장에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두산산업개발 박현우 관리과장은 “일단 3명에게만 일자리를 주고 결과가 좋으면 협력업체에도 이 인력을 전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노숙인들은 1∼4일 나흘 동안 용산과 중구 구민회관에서 특별정신교육, 안전교육, 건강관리, 참여기업 사업설명회 등 교육을 마치고 6일부터 은평뉴타운 건설 현장 등 147개 기업에 투입된다. 임금은 통상적인 공사장 일용인부 임금의 최저액인 5만원을 기준으로 해 시가 50%인 2만 5000원을, 건설회사가 나머지를 댄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데스크시각] 설에 본 ‘성공’의 단상/유진상 공공정책부 차장

    귀성전쟁을 치르며 찾아간 고향. 적막강산이던 농촌마을은 어느새 외지에서 명절을 쇠러 온 출향인들이 속속 들이닥치면서 시끌벅적해졌다. 마을어귀 따뜻한 햇살이 녹아드는 마을회관 앞에는 이웃 어른들이 일찌감치 터를 잡고 앉아 오랜만에 이야기 꽃을 피웠다. “위뜸 산지기 천서방네 둘째아들, 지나가다 인사하는데 몰라보겠더라고. 대기업에 취직했다더니 신수가 훤해졌더구먼. 남의 산 지키며 밭뙈기 몇 마지기로 어렵게 아들 놈 대학까지 공부시키더니… 천서방, 이참에 아예 아들 따라 서울로 올라간다더구먼.”이에 뒤질세라 옆에 있던 어른도 가세한다.“걔 성공할 줄 알았어. 이곳에서 학교다닐 때 상추 먹으면 밤에 졸립다고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던 애잖아. 그렇게 독하게 공부하더니 결국 성공했구먼….” 동네 어른들 내친김에 자식들 얘기가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이장 막내아들은 대학 졸업한 지 2년이나 됐는데 취직을 못해 이번 설에도 못 내려온다더라. 탱자나무집 아들내외는 아직도 부모한테 손을 벌리고 있다는 둥…. 그런 가운데 정부비판도 이어진다.“요즘 취직하기가 좀 어려워야 말이지. 제 밥벌이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될 판이니…. 정부는 뭐하는지 몰라, 만날 일자리 만든다고 떠들면서 실업자는 줄지 않으니 원….” 그러자 듣고만 있던 이장,“그래도 큰 돈 안 들이고 성공 보장받는 것은 공부밖에 없어요. 공부도 때가 있다고 그렇게 잔소리했건만 말 안 듣고 싸돌아다니더니…, 자업자득이지요 뭘.”이라며 애써 태연한 척한다. 그러면서도 못 내려온다고 한 막내아들이 내심 마음에 걸리는 듯 멀리 찻길을 바라본다. 어찌됐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들에게는 명절이 대수이겠는가. 특히 빤한 농촌에서 논밭 팔아대며 대학까지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이장댁 아들과 같은 처지의 청년 실업자에겐 명절이 또 다른 멍에로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웬만한 일자리라면 취업 경쟁률이 수백대일에 달하는 마당에 직장을 잡지 못한 것을 어디 개인의 능력탓으로만 돌릴 일인가.“취직 못한 것을 빼고 나무랄 데 없는 내 아들인데 어깨가 늘어져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는 이장님의 푸념처럼 상심한 청년실업자에겐 무엇보다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이 급선무라는 생각이다. 요즘엔 취업이 어려워지자 마음약한 청년들은 일찌감치 취업을 포기해버리는 풍조마저 생겼다고 한다. 이른바 ‘니트족’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의무교육만 마치고 진학이나 취직도 포기한 채 사회낙오자를 자처해 또 다른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얼마전 일본의 후생노동성은 일본 내 니트족이 85만명으로 추산되고 2010년엔 100만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밝혀 충격을 던져줬다. 니트족은 일할 의사가 있는데도 일하지 못하는 ‘실업자’와는 달리 ‘무업자(無業者)’로 불린다.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니트족이 18만 7000명(2004년말 기준)이나 되고,2015년에는 85만 4000명까지 증가할 것이란 전문가 분석도 나왔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IMF 경제위기 이후 니트족의 증가가 지속되는 추세라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너무 숫자 맞추기에 급급하다. 때론 취업이라고 보기에 어설픈 사례도 실업극복 사례로 소개되기도 한다. 더욱이 지도층 인사가 청년실업자의 고충은 아랑곳하지 않고 “취업에 관한 책임은 각자가 지는 것이다. 정부가 취직을 책임지는 것은 현대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밝혀 반감을 산 적도 있다. 움츠러든 청년 실업자들의 상한 마음에 소금을 뿌린 격이다. 최근 발언의 주인공은 사회부처 장관 내정자로 발표돼 취업재수생 부모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설 연휴가 끝났다. 취업 때문에 주눅들어 이번 설에 고향을 등진 취업준비생이라면 좀더 순수함으로 고향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보자. 취직을 개인의 능력으로 치부해버리는 위정자 이야기보다 고향엔 그래도 “내 자식…”이라며 끝까지 나를 믿어주는 부모님과 따뜻한 이웃들의 너그러움이 있지 않은가. 유진상 공공정책부 차장 js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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