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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언내언]‘노근리’에는 왜 갔나

    6·25동란때 미군에 의해 양민이 대량학살된 충북 영동 ‘노근리사건’을조사하기 위해 지난 5일 현장을 방문한 국회의원들의 행태가 그곳 주민들은물론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노근리 양민 대학살사건 대책위’정은용위원장이 국회의원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데 국회의원중 누군가가 “미군이 오인사격(誤認射擊)을 한 건 아니냐?”고 질문을 했다.정위원장이 “절대 아니다”고 답변하는 순간 의원들 가운데 누군가가 “에이…그럴리가 없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별거 아닌데 그만 가지”라는 말도 이어졌다. 놀란 유족들이 발언자를 살폈으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확인되지 않았다.이뿐 아니다.자민련 박신원(朴信遠)의원은 “우리 고향에서는 2,000명이 미군에게 죽었다”고 했다.유족들이 ‘그정도 가지고…’라는 뉘앙스로 듣고 항의하자 박의원은 “유사 사건이 9건이나 있다는 의미였다”고 해명했다.유족들이 “그동안 정부가 진상규명을 외면한 것도 모자라 국회의원들까지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그러나 의원들의 반응은 엉뚱했다.“농담삼아 던진 이야기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느니,“의원들끼리 한 이야기인데(유족들이)쌓인 게 많아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는 식이었다. 국회 행자위 2반 소속 이들 국회의원들이 이날 보인 행태는 민족의 상처를뒤늦게나마 씻어주겠다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아니라 제3국 국회의원들의그것이었다.제3국 의원들이라고 무고한 양민이 대량학살당한 현장에서 그런태도를 보였겠는가.그렇다면 국민들은 “노근리에는 왜 갔는가?”그들에게묻지 않을 수 없다.AP통신이 ‘노근리양민학살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던 때 국내신문도 보지 않았다는 말인가.“그들(피란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Treat them(refugees) as enemy”라는 비밀해제된 당시 군 작전명령의 원문(原文)까지 나와 있었다.‘오인사격’은 무슨 얼어죽을 ‘오인사격’인가.게다가 ‘의원들끼리 던진 농담’이라는 말은 또 무슨 소리인가.거액의 출장비를 받고 농담이나 하려고 노근리에 갔다는 말인가.아녀자까지 포함된 무고한 주민 200여명이 학살당한 노근리사건이 ‘별것’아니라면,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떼죽음을 당해야 ‘별것’이 된다는 말인가.“나라가 참으로 큰일이다”라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장윤환 논설고문
  • [매체비평] 다시 도진 ‘외신 사대주의’

    한국언론의 ‘고질병’ 하나가 다시 도지고 있다. 이른바 ‘외신 사대주의’다. 지난달 30일부터 연일 국내신문·방송에 보도되고 있는 ‘노근리사건’속보기사도 그중의 하나이다.미국 AP통신 보도로 알려진 이 사건에 관한 기사는 이미 5년전 국내에 실태가 공개된 것으로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다.다만 그동안 국내 유수의 신문·방송들이 이를 외면해오다가 외신이 떠드니까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양’ 덩달아 떠들고 있는 셈이다.한국언론의 해묵은 병폐 가운데 하나인 ‘외신 사대주의’라고 하겠다. ‘노근리사건’이 외부에 처음 드러난 것은 민주당시절인 60년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낸 것이 계기였다.그러나 미군측의 기각으로 역사의 미궁속으로 빠졌다.이후 이 사건이 대중에 공개된 것은 정은용(鄭殷溶·76)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장이 94년 4월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소설을 출간하면서 부터다. 당시 이 책을 주목한 언론은 ‘한겨레’가 유일했다.‘한겨레’는 정씨와마을주민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그해 5월 4일자로 싣고 7월 20일자에는 다시집집마다 ‘떼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스케치기사로 실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취재는 월간 ‘말’지로부터 시작됐다.국내언론이 이 사건를 별로 주목하지 않은 것은 일간지가 아닌,월간지가 사건을 다룬데 대한 의도적 폄하였는지도 모른다.‘말’은 그 해 7월호에 ‘6·25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명 학살사건’이라는 현지취재를 통해 처음으로 조명하였다. 2년 뒤인 96년 MBC는 ‘말’의 취재내용을 바탕으로 시사고발프로 ‘2580’에서 다시 재조명하였다.그러나 이후로는 국내 어떤 언론도 이 사건을 주목하지 않았다.다만 ‘말’이 금년 6월호에서 ‘미 제1기병사단 병사들 마침내입 열다’제하의 기사로 다시 속보기사를 실었을 뿐이다. ‘말’은 이 기사에서 유족들의 증언을 입증할 수 있는 당시 미군측의 작전일지를 입수,보도함으로써 이 사건이 미군들의 ‘의도적 소행’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이번 AP통신의 보도는 결국 ‘말’의 자료협조를 토대로 여기에당시 미군들의 증언과 비밀해제 문건을 추가한 정도라고 할수 있다. AP 보도로 국내언론에 ‘역류된’ ‘노근리사건’ 보도는 한마디로 한국언론의 ‘몰역사성’과 ‘외신 사대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라 하겠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한겨레’의 보도는 단연 돋보였다.‘한겨레’는 9월30일자에서 이를 1면톱과 해설기사, 이튿날 10월1일자에 다시 종합면 전면기사로 다뤄 이 사건이 ‘역사적 숙제’임을 강조하였다.특히 10월 2일자에는베트남전 당시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최대의 양민학살사건인 ‘밀라이사건’을 소개하고 이 사건을 그에 못지 않은 사건임을 밝혔다. 반면 조선·동아·중앙일보를 비롯,여타 신문들은 사회면의 화제성 기사 정도로 취급하는데 그쳤을 뿐이었다.다만 한국일보가 발빠르게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의 기고를 받아 내용 가운데 일부를 1면 스트레이트 기사로 처리했다.중앙일보의 경우 9월 30일자 제2사회면 박스기사에서 “‘노근리 사건’의 진상이 미국 AP통신의 추적 취재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며 이 사건에 대한 그동안의 무관심과 무지를 드러냈다.AP측의 태도도 문제는 있다.그동안 국내 월간지와 방송에서 보도한 내용은 싹 빼버린 채 마치 자신들이 최초로 단독 발굴,보도한 것인 양 떠들어댄 것이다. 정운현 특집기획팀 차장 jwh59@
  • 韓·美 ‘노근리학살’ 진상규명 공조

    향후 ‘노근리 사건’의 진상규명은 한·미 양국의 ‘공조’속에 진행될 전망이다.한·미 양국은 지난달 30일 AP통신 보도 직후부터 다각도의 접촉을갖고 ‘공동조사단 발족’보다는 사안별 협조를 통한 공조체제로 의견접근을보았다는 후문이다. 양국은 당분간 자신의 영역에서 가능한 진상규명에 착수하되 사안별로 공조체제를 가동하는 모양새를 갖출 것으로 보인다.조사과정에서 협조가 필요할경우 양국 대사관과 외교부·국무부의 대화 창구를 상시 가동한다는 것이 정부 당국자의 설명이다. 미측은 금명간 미정부 보관문서 확인작업과 당시 명령·발포 계통 확인 등증거수집과 사실규명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한국측은 국방부를 중심으로당시 한국전사 및 비밀서류 확인작업을 하고 법무부는 국제법 등 법적 대응방안을 검토하게 된다.또 행자부는 피해보상 방안 등을 강구할 방침이다.양국 공조체제는 참전 미군이나 노근리 생존자 등 주요인물에 대한 공동인터뷰등의 형태로 이뤄질 전망이다. 정부의 움직임도 빨라졌다.4일 외교·국방·법무·행자부 등4개부처 과장급으로 노근리 사건 대책반을 발족시켰다.향후 진상조사는 사건 실상 파악과한·미 공조 두 방향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 당국자는 이날 “사건의 본질은 양민학살 여부에 있기 때문에 피해자 입장에서 진상여부를 다루게 될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진상조사 종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사실확인부터 발포 명령 주체, 법적 검토, 보상 여부 등 단계마다 쉽사리 결론을도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때문에 한·미 양국은 조사 과정에서 자칫 전통적인 한·미 관계를 저해할 수 있는 일부 단체나 정치권 등의 ‘반미(反美)감정’ 유도 가능성 등에도 객관적으로 대응해 나가기로 했다. 오일만기자 oilman@
  • ‘노근리 사건’ 풀리지 않는 의문들

    [뉴욕 AP 연합] 한국판 ‘킬링 필드’ 노근리 사건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많은 의문들로 가득차 있다.미 국방부 내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피란민들에게 발표 명령을 내린 지휘관은 누구인가.피란민들이 미군에게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는가.미군 지휘계통의 어느 선까지 노근리의 진상이 보고됐는가. 육군 진상조사단은 이와 같은 풀리지 않은 의문들의 답을 구하기 위해 참전용사들로부터 보다 상세한 증언을 확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그러나 이 모든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확보한다 해도 국방부가 왜 노근리 사건의 기초적인 사실들을 더 이전에 적발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답변은 국방부만이 할수있다. AP통신은 지난달 말 수개월간에 걸친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10여명의 참전용사들로부터 한국전쟁 초기인 50년 7월말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제7연대가노근리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향해 기관총을 쏘았다는 증언을 얻어내 보도했다.일부 제7연대 출신 참전용사들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현장에서 “모두 없애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증언했다. 그러나 이들은 챈들러 대위가 무전을 통해 연대본부와 사전협의를 했을 것으로 믿고 있으며 한 참전용사는 대대 수준의 장교가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그렇다면 더 윗선의 지휘계통,예를 들어 제7연대와 제1기갑사단 지휘부는 과연 노근리 사건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는 그리 용이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현장 지휘관이었던 챈들러 대위는 70년 숨졌고 다른 대대 장교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챈들러 대위의 상급 대대를 지휘했던 허버트 헤이어 대령은 88세 고령인데다 병을 앓고 있고 “학살사건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말하고 있어 육군 조사관들이 그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제1기갑사단 복무규정은 피란민을 포함,방어선을 넘으려고 시도하는 그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장병들이 발포할 수 있다는 규정을 담고 있다.다른 이웃 사단에서는 한 장군이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 전선을 책임지고 있었던 미8군 사령관 월튼 H 워커 중장이,나아가서 도쿄에 체류하면서 한국 전쟁을 총괄했던 2차대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이 그같은 불법적인 명령을 재가했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대두된다.또한 사후보고도 어느 선까지 올라갔는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노근리 피란민 학살사건 규명에 나선 미 육군은 증언 확보에 앞서 먼저문서 검토를 통해 스스로에 대해 잘못은 없었는지를 엄정히 물어야 한다.
  • 노근리 양민학살 규명 급진전 배경

    미군이 6·25 당시 양민들을 대량학살했다는 ‘노근리 사건’ 진상규명 문제가 급진전되는 분위기다.클린턴 미대통령은 30일 AP통신 보도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행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의 필요성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당초 한미 관계를 고려해 ‘신중한 반응’을보였던 정부는 1일 미행정부와 접촉을 갖고 진상조사를 포함한 다각적인 협의에 착수했다는 후문이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한미 당국간 두 갈래의 채널로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주한 미대사관-외교부,주미 대사관-미 국무부의 양자채널을 통해양국은 향후 대책 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미온적인 대응이 자칫한국민의 반미(反美) 정서에 불을 당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깔려있다.한국내 여론 동향이나 인도주의적 범죄 등에 대한 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국제법상의 원칙 등을 감안,한미 양국의 ‘조기 종결’ 의지로 풀이된다. 이 때문에 정부 내에서도 외교부와 국방부를 포함한 관련부처들은 ‘진상조사단’구성 문제와 ‘노근리 사건’이 사실로 밝혀질 것에 대비한 배상 등의 문제를 놓고 검토작업에 들어갔다는 후문이다. 이와관련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 정부의 진상조사 조사단 문제가 매듭되고나서 한미 공동진상 조사 등을 논의하는 것이 수순”이라고 밝혀 한미공동조사단 구성 가능성을 시사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나 진상규명이 이뤄질지는 아직 미지수다.‘노근리 사건’의 발생 동기부터 학살의 범위 등을 놓고 미 극비문서와 AP보도가 일정한 거리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미정부와 행정부가 ‘노근리 미군양민학살 사건대책위’의 수차례 걸친 사과와 배상 요구를 묵살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본격적인 진상조사가 시작되더라도 사과 및 보상 수준을 놓고 적지않은 진통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오일만기자 oilman@* “아직도 울부짖는 소리가…” CNN, 참전미군 고백 방송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 언론들은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기사를 전면 또는 국제면 주요 기사로 게재하는 등 비중있는 기사로 다루고 있다. CNN과 ABC,NBC,CBS등 3대 방송들은 AP통신 보도에 하루늦은 30일 보도에서클린턴 대통령의 조사지시를 앞세워 주요뉴스로 내보냈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AP통신의 기사를 토대로 사실관계를 적시한 뒤 이에 따른 미국정부의 반응과 적절한 대응방안이 어떤 것인지에 초점을 두고 보도했다. 특히 뉴욕 타임스의 경우 현장에 참여했던 미군 병사들의 증언을 생생하게인용하는 한편 현장에서 증언하는 전춘자씨의 사진과 1950년 당시 현장에 주둔한 25사단을 맡았던 윌리엄 킨 소장이 야전에서 지휘하는 장면 등 주요사진을 3단크기로 다루어 기사의 비중을 높였다. 특히 “현장의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며 그에 따른 행동을 취한다”는 내용이 적힌 50년 7월27일자 미보병 25사단 사령부가 내린 명령서를 사진으로 실어 기사가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강조했다. CNN은 매 15분마다 주요뉴스 소개에서 한국전 민간인 학살이란 제목을 소개하는 한편 현장에 있었던 생존 병사가 “아직도 바람부는 시절이 되면 어린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는 고백과 함께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부인의 증언을 함께 소개했다.워싱턴 포스트의 경우 관련기사의 제목을“미육군 학살 주장 부인”이라고 뽑아 정부의 행동전환을 촉구했으며 시카고 선 역시 “전 미군병사 한국에서의 살해를 증언한다”고 제목을 달아 정부의 부인보다는 사실에 더 비중을 두고 보도했다. 미 언론들은 특히 미 정부가 AP보도 첫날 사건내용을 부인한 것을 사건에대한 자세한 사실과 비교해 보도함으로써 미정부의 책임있는 행동을 간접적으로 촉구했다. hay@
  • 정부 진상조사 착수

    정부는 30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한국양민 학살사건을 전한 AP통신의 보도 내용과 관련해 미국측과 협의,보도의 사실 여부를 가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외교부와 국방부는 우선 AP통신 보도내용에 대한 진위여부를 가린 뒤 사실관계에 따라 정부차원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등 후속 대책을 마련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일만기자 oilman@
  • [사설]‘노근리恨’풀어 줘야

    미국의 AP통신이 30일 확인해준 미군에 의한 세칭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반세기전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아픔과 이데올로기 대결의 비극성을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우리를 구하러온 미군이 공산군 아닌 남한의 양민을 집단학살했다는 사실,그 끔찍한 사건이 49년이 지난 이제야 세상에 속살을 드러내게 된 현실,그것도 한국 아닌 미국 언론의 노력으로 확인되게 된 경위 등이 하나같이 이 사건의 비극성을 적나라하게 재조명해주고 있다. AP통신은 미군 제1기갑사단과 제25사단이 지난 50년 7월26일,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서를 예하부대에 하달했음을 공식문서로 확인했고 당시 이들 부대에 근무했고 지금 생존해있는 몇몇 군인들은 이 명령에 따라 민간인에게 발포했으며 또 일부는 대량학살을 목격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노근리 사건은 잊혀졌다기보다 일종의 ‘없었던 사건’이었다.피해자 유족들은 그동안 발을 구르며 억울함을 호소해 왔으나 어느 누구도 인정해 주려 하지 않았다. 피해 마을은 민주당정권이 들어선 60년부터 미국정부와 관계기관에 수없이탄원서를 냈고 97년에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보기도 했으나 아예 무응답이거나 ‘증거가 없다’,‘시효가 지났다’ 등의 이유로 기각되는 속에 반세기의 세월을 보냈다. 그런 노근리 사건이 얼마전 비밀해제된 미군문서에 의해 이제야 다시 드러나긴 했으나 모든 진상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우선은 진상규명부터 해야 한다.정부는 정부대로,국회는 국회대로,또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미군이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들을 적으로간주하게 된 경위,학살현장의 시말,피해규모 등이 정확하게 규명돼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날 노근리에서 있었던 진실을 토대로 미국으로부터 정당한수준의 사과를 받아내야 하고 적법한 배상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전시의민간인보호에 관한 제네바 협약’은 전쟁당사국은 민간주민과 전투인,민간물자와 군사목표를 엄격히 구별하고 작전은 군사목표물에 대해서만 행하도록엄격히 규정하고 있으며 인도주의에 관한 범죄,집단학살에 대해서는 시효를적용하지 않는 것이 국제법상의 원칙이다. 이런 사건이 드러날 때마다 곤혹스러운 것은 우리사회의 모호한 태도다.이제는 이런 문제에 대한 사회인식도 변해야 한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제주 4·3사건도 규명이 돼있지 않은 상황이다.이러한 반인륜적인 사건들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도 기필코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그리고 제2,제3의 노근리 사건은 또 없는가도 살펴야 한다.우리가이런 사건들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 있을 것인가.
  • 美행정부‘양민학살사건’확인 거부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 국무부 등 행정부는 29일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양민을 학살했다는 보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실이어서 답변이 불가능하다”며 논평하지 않았다. 제임스 폴리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AP통신이 비밀해제된 문건과 참전용사들의 인터뷰를 근거로 제1기갑사단이 50년 7월 한국인 피난민 400명을 학살했다고 보도한 내용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고 “전혀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폴리 대변인은 미국이 전쟁에서 양민을 군사적인 목표로 정한 정책을 세운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우리는 전쟁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고 “코소보전쟁 당시 미사일이 엉뚱한 데 떨어졌듯이 의도하지 않은 민간인 희생자는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hay@
  • 정부,노근리 사건“사실관계 파악부터”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한국 양민을 대량학살했다는 이른바 ‘노근리 사건’에 대해 정부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30일 AP통신의 노근리 사건 보도를 접한 정부는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여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한·미의 전통적우호관계가 이번 사태로 손상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깔려있다. 외교통상부 장철균(張哲均)대변인은 “AP통신이 보도한 노근리 사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관련 사항을 확인해 나가겠다”는 정부 입장을 밝혔다. 정부 당국자도 노근리 사건과 관련,한국 외교부와 미 국무부를 창구로 양국국방당국간 실무조사 등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미국측의 배상 및 사과여부 등에 대해선 “이른 시일 안에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라며 “사안 자체가 민감한 문제라 미국정부의입장 표명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원론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진상 규명이 ‘유야무야’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미 정부측은 AP보도와 관련,“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요지의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미 정부는 그동안 ‘노근리 미군양민학살 사건 대책위’의 수차례에 걸친 사과와 배상 요구를 묵살했다. 미국 정부의 미지근한 대응이 국민 감정을 자극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대처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오일만기자 oilman@
  • 피난 민간인 敵간주 발포명령

    ?워싱턴 AP 연합? 지난 50년 7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 부근에서 한국 양민을 살해한 ‘노근리 학살 사건’이 미 정부 공식 문서와 미군의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미 제1기갑사단,육군 25사단 사령부 명령서 등 미군 공식 문건 2건과 참전 미군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은 7월26일 당시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 발발 5주째인 당시 북한군이 농민 옷차림으로 위장,피난민 대열을 통해 미군 방어선으로 침투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미군 병력이 이에따라 어린이·여성 등을 포함,피난민 수백명을 살해했다.참전 병사들은 7월과 8월 두 차례 이와 유사한 피란민 학살 사건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미 육군 25사단장 윌리엄 B 킨 소장은 7월26일 야전 지휘관들에게 보낸 명령서에서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또 제1기갑사단 사령부도 명령서에 “전선을 넘어오는 자에게 발포하라”고 전했다.제1기갑사단에 근무했던 6명의 참전 장병들은 민간인을향해 발포했으며 또다른 6명은 대량학살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미군 병사들은 사건 발생 시간·장소나 희생자 중에 여성·어린이·노인들이 많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참전 미군병사들은 피살자 수가 100∼200명 또는 수백명에 이른다고 말했다.굴다리 부근에 있었던 참전 병사들은 사망자 수를 200여명으로 추산했으며 그밖에 상당수가 공군기의 기총소사로 숨졌다고 말했다.노근리 학살사건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 생존자들은 300명의 주민들이 노근리 다리 부근에서 살해됐으며 또다른 100명이 미군의 공습으로숨졌다고 말했다.사건 발생 당시 일본에서 한국전선으로 3일전 투입돼 우왕좌왕한 1기갑사단 7연대 2대대 소속 660명의 병력은 북한군이 침공해 오자인근 마을에서 피란민들과 만나게 됐다.한국 생존자와 몇몇 참전 병사들은미군기들이 피란민들이 있던 지역으로 갑자기 저공비행을 한 뒤 기총소사를하면서 학살이 시작됐다고 증언했다.미 공군 기밀 해제 보고서에 따르면 조종사들이 위장한 북한군이 피란민 대열에 있는 것으로 의심해가끔 민간인들을 고의로 공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민간인들에 대한 이같은 사살명령은 명백히 불법이다.참전 용사들은 중화기 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상급자와 연락을 취한 뒤 굴다리 입구에기관총을 설치하고 발포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다.미 국방부는 AP통신의 이같은 추적 보도 내용에 대해 군 공식 기록에는 그같은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으며 학살사건에 관한 육군당국의 공식기록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밀 해제된 군 문서를 토대? 병력 이동상황을 재구성한 결과 제1기갑사단 4개 대대가 학살사건 당시 그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美는 노근리 학살 보상하라”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확인하는 AP통신의 30일 보도와 관련,당시피해 당사자와 주민들은 “자국의 유력 언론에 의해 당시의 처참한 상황이밝혀진 이상 미국은 즉각 사과하고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노근리 사건의 생존자 양해찬(梁海贊·58·전 영동군의원)씨는 “자유를 수호한다는 미군이 피난길에 나선 선량한 민간인들에게 총탄 세례를 퍼부은 것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미국의 태도를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12살 소녀로 총에 맞은 상흔이 아직까지 남아 왼쪽 눈이 함몰된 양해숙(梁海淑·62·여)씨는 “미국측이 이곳에 위령비라도 세워 48년전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어간 양민들의 영혼을 달래줘야 한다”고 흐느꼈다. 영동군의회 정태호(鄭泰浩·58)의장은 “군의회 차원에서 미국정부와 미 의회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건의문을 제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장 정은용(鄭殷溶·76)씨는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미국측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보냈으나 회신을 받지 못했다”며 “앞으로 사회단체 등과 연대해 보상받을 수 있도록 각종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영동 김동진기자 kdj@
  • 6·25 ‘노근리 사건’ 진상규명 새 전기

    6·25당시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이 주민을 학살했다는 이른바 ‘노근리 사건’의 일단이 드러날 것 같다. 미국의 AP통신이 최근 비밀이 해제된 미군의 기밀 서류와 당시 참전했던 미군의 증언을 토대로 ‘사건’을 보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대책위원회’ 정은용 위원장(76·대전시 가수원동)과 노근리지역 주민들은 AP통신 취재진이 보도에 앞서 29일 충북 영동의 사건 현장을 찾아 취재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은 전날 ‘노근리 사건’을 200자 원고지 40장으로 기사화해 30일 오전 2시(한국시간) ‘노근리의 다리’라는 제목으로 타전하겠다고 예고했었다. 지역 주민들은 한국전쟁 초기인 50년 7월26일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노근리 경부선 철로 위에 영동읍의 주곡·임계리 주민 400여명을 “피난시켜 주겠다”며 모아 놓고 전투기로 기총 소사해 120여명을 숨지게 했다고 주장해왔었다. 영동 김동진기자 kdj@
  • 중국 건국50돌…32년간 취재 AP기자가 본 두거목

    [베이징 AP 연합] 지난 30년대 중반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大長征)이 끝난뒤 옌안(延安)에서 7개월 동안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지내는 등 이후 32년 동안 중국을 취재한 AP통신의 존 로드릭 기자가 중국 건국 50년을 맞아중국을 다시 찾아 마오쩌둥과 덩샤오핑(鄧小平) 두사람을 비교하는 기사를보내왔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살아가는 방식은 달랐지만 10월1일 건국 50주년을맞는 공산주의 중국을 상징하는 두 거목이다.지난 76년 타계한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아버지였다면 97년 서거한 덩은 중국 근대화의 어머니였다.이들은 전우였으나 마오가 수정 자본주의와 제한 민주주의를 통해 중국을 부자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저버리자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나는 중국을 취재하면서 두사람 모두 알게 됐다.두사람은 한때 추앙을 받다가 비판을 받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냉혹하고 계산이 치밀했던 마오는 53세때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20년 이상 무수한 분쟁에 개입했다.옌안 시민들처럼 평범하게 생활했지만 화려한 황제,황후 의상을 차려입은 베이징 오페라를 좋아했다. 마오는 중국을 근대화 물결에 편승할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다만 너무 낭만적 몽상가여서 중국을 강력하고 자족이 가능한 고대 중세왕국으로 간주,조공을 받을 순 있지만 외국의 지원이나 유대는 필요없다는식의 사고를 가진 게 문제였다. 반면 덩샤오핑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마오의 공산주의 관념에서 탈피,각종 유인제도와 정치적 개방성으로 부(富)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덩은 16세부터 5년 동안 유럽에서 지낸 탓에 경제적 마인드와 세계지향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를 79년 처음으로 만났다.당시는 덩이 마오의 사망 직후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개방정책을 거세게 밀어붙일 시점이었다.키가 작고 까다롭고시원한 눈매를 가졌던 덩은 마오와는 체질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었다.유머감각이 뛰어났고 얼버무리는 대화술도 능란했다.마오가 낭만적이고 의심이 많으면서도 아첨을 수용할 줄 아는 편이었다면,덩은 냉정하면서 조심성있고 자신감이 강했다. 덩은 나에게 중국 지도자들은 임기가 있어야 한다고했다.특히 정치 또는행정분야중 하나를 택해야지 모두 차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그는 자신이 도입한 자유시장경제를 사회주의자나 자본주의자 모두에게 ‘정당한 도구’라고 생각했다.덩의 명예에 누를 끼친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었다.3번이나 실각하고 다시 살아나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였지만 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때 두려움 때문에 군에 발포를 지시했다.이발포 명령은 그의 명예에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 자신의 개혁정책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중국을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화시킨 20세기 영웅으로 남게 됐다.
  • [외언내언] 케네디家 비극

    한 장의 가족사진을 들여다본다.막내아들을 무릎에 앉힌 아버지를 중심으로어머니와 9명의 자녀가 포즈를 잡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짓는다. 케네디가(家)가 1940년 하이아니스 포트의 집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지난 60년대 후반AP통신이 엮은 책 ‘케네디가의 승리와 비극’(서울신문 외신부 번역·발간)에 실린 이 사진에는 비극의 그림자가 없다.다복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있을 뿐이다.그로부터 4년후 가족사진 속의 맏아들이 죽는다.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언젠가는 미국대통령이 되겠다고 장담했던 조지프 패트릭이 2차대전중 연합군의 베를린 공습에 참여했다가 피격당한다. 그로부터 다시 4년후 9남매중 넷째인 딸 캐슬린이 비행기 사고로 또 죽는다. 이어 케네디 집안 영광의 정점(頂點)에 섰던 둘째아들 존 F 케네디 대통령(63년)과 일곱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68년)이 잇달아 암살당함으로써 케네디가의 비극은 미국의 비극이 되기에 이른다.이제 사진속의 가족 가운데 남은 사람은 막내아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4명의 딸뿐이다. 케네디가의 비극적 죽음은 3대까지 이어져 로버트의 두 아들 데이비드(84년)와 마이클(97년)이 각각 약물 과다복용과 스키사고로 숨진데 이어 케네디대통령의 아들 존 F 케네디 2세와 그의 부인 캐롤라인이 함께 탄 비행기가 17일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났다.공교롭게도 실종된 비행기는 케네디일가가 가족사진을 찍었던 하이아니스 포트를 최종목적지로 하고 있었다. 케네디가의 비극에는 운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미국 대통령 1명과 대통령 후보 3명(상원의원 3명),하원의원 3명을 배출한 미국 최고의 정치 명문으로 왕실이 없는 미국에서 로열 패밀리로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 집안에 드리운 운명의 그림자는 영광이 빛이 밝은 만큼 더 어둡게 보인다.워싱턴포스트는 케네디2세의 비행기 실종사고를 보도하면서 “미국에 셰익스피어가있다면 케네디가의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셰익스피어는 야망,부(富),정열,권력,섹스,사랑 그리고 죽음등 강력한 흡인력을 지닌 초대형 인생의 모든것이여기에 들어 있음을 즉각 간파했을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 가문의 이야기에는 마침표가 찍히지 않을 것이라며 호머의 ‘오디세이’에 비유한 국내 번역가도 있다.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30대에 백만장자가 되고 영국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조지프 케네디로부터 시작된 케네디가의 신화가 미국은 물론 세계적인 주목을 끈데는 이 비극의 그림자도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단란한 가족사진을 망가뜨린 비극은 너무 처절하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기원했듯이케네디 2세의 실종이 케네디가의 마지막 비극이 되길 바란다.
  • 13살소년 ‘입’에 놀아난 美언론

    13살짜리 온두라스 출신 소년의 거짓말에 미 사회가 한바탕 법석이다. 주인공은 에드윈 다니엘 사빌론.지난해 가을 허리케인‘미치’로 가족을 잃고 하나 남은 혈육인 아버지를 찾아 온두라스에서 뉴욕까지 37일 동안 5,000여㎞를 혼자서 여행했다는 이 소년의 소식이 전해진 29일 미 전역은 감동에휩싸였다.뉴욕타임스, CNN 등 대부분의 언론들은 에드윈의 사진과 함께 소년의 사연을 대서특필했다.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도 나서 아버지가 불법체류자이면 이민국에 선처를 호소할 것이라며 아버지 찾기를 도왔다. 아버지와 만나기로 했다는 소년의 말만 믿고 공항에 태워준 택시운전사에의해 27일 경찰에 인계된 에드윈은 이틀만에 뉴욕의 꼬마 저명인사가 됐고천진한 얼굴과 극적인 스토리에 감명받은 뉴욕시민들의 선물이 쇄도했다. 그러나 온두라스 주재 AP통신이 29일 밤 에드윈이 허리케인으로 인한 산사태로 죽었다고 밝힌 그의 외할머니 폴라 헤르난데스(65)를 인터뷰하면서 그의 거짓말이 드러났다.에드윈이 죽었다고 밝힌 어머니도 비록 에드윈이 태어난 지 10달만에 집을 나가긴 했지만 온두라스에 살고 있으며 정작 뉴욕 라과디아 공항 입구에서 만나자며 편지를 보냈다던 아버지는 지난해 10월 온두라스에서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것.할머니는 에드윈이 아버지가 숨진뒤 지난 3월부터 미 플로리다 고모집에서 생활해왔다면서 “아마 미국에서 살고 싶어그런 거짓말을 한 것 같다”고 밝혔다. 김수정기자 crystal@
  • 금세기 10대 히트상품 선정

    뉴욕 AP 연합 20세기 제조업은 쓸모없는 상품들을 양산했다.하지만 20세기는 간단하고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생활의 질을 높인 뛰어난 발명품들이돋보인 시대이기도 했다. 다음은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의 10대 히트상품. ■종이 클립 20세기초 독일에 거주하던 노르웨이인 요한 바알러는 구부러진 철사를 이용해 종이를 묶음으로써 종이가 흩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아이스크림 콘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에서 식품업자인 아놀드 포나초와 어니스트 함위가 아이스크림과 달콤한 식용과자를 함께 출품한 것이효시. ■네온 1909년 프랑스 물리학자 조지 클로드는 오렌지빛 유리 튜브에 가스를모으는데 성공했다. ■셀로판 파리시내 카페의 테이블보에 와인과 커피 얼룩이 지는 것을 막으려던 자크 브란덴버거가 1912년 발명했다. ■지퍼 1913년 지든 선드백이 “Z-z-zip”라는 간단한 디자인에 대한 특허를받았으며 이후 굿리치사가 고무 덧신을 죄는데 이를 사용하면서 지퍼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회용 반창고 붕대회사에 목화를 납품하던얼 딕슨이란 사람이 결혼후 신부가 작은 상처를 입자 조그만 무균 붕대조각을 만들어 붙여준 것이 시초였다. ■사진복사기 체스터 칼슨이 가루 잉크를 사용하는 정전식 복사기를 개발한것이 효시였다. ■볼펜 2차대전중 헝가리 발명가 라즐로 비로가 발명했으며 1943년 아르헨티나에서 특허권을 얻은 뒤 상품화됐다. ■프리스비(놀이기구 원반) 20세기 중반 미국 뉴햄프셔의 빌 로브스와 LA의프레데릭 모리슨이‘우주 비행접시’와 ‘프루토 접시’란 이름으로 각각 상품화했다. ■접착 메모지 1973년 3M사 직원 스펜서 실버가 발명했고 그의 동료 아서 프라이가 이를 응용 발전시켰다.
  • [제2공화국과 張勉](25)-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上)

    1950년 6월24일 오후9시쯤(이하 현지시각)워싱턴의 장면(張勉)주미대사는 모처럼 토요일 밤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신생 대한민국의 초대 주미대사로서 매일 저녁 칵테일파티니,디너파티니 두세 군데를 쫓아다니며 바쁘게 외교활동을 벌이다 이날은 오랜만에 관저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참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AP통신의 해리스기자였다.해리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북한군이 전면 남침했다는데 아느냐”고 물었다.장면은 “흔히 있는 산발적인 전투일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응답했다.이어 UP통신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해 장면은 미 국무부로 급히 연락하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밤10시30분쯤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북괴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밀고내려오니,장대사가 빨리 행동해 주어야겠소”라고 말했다.전화를 넘겨받은 임병직(林炳稷)외무장관은 “당신 한사람의역량에 국가 운명이 달렸소”라고 목이 메어 우는 소리를 했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갓 세운 조국,대한민국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빠진 순간이었다. 장면은 곧바로 미 국무부로 달려가 딘 러스크 극동담당차관보 등을 만났다. 장면과 러스크는 한국사태를 25일 열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기로 하고 이를 휴가중인 트루먼 대통령,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알렸다. 일단 관저로 돌아온 장면은 부랴부랴 짐을 꾸린 뒤 바로 비행장으로 나가 군용기 편으로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에 갔다.오후2시 개막한 안보리에서 장면은 연설 기회를 얻었다.“유엔 승인을 얻은 대한민국은 북괴군의 불법공격을 받고 있다.이 공격은 인도(人道)와 민심을 거슬리는 죄악이자 국제평화·안보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다”라면서 지원을 호소했다. 안보리는 미국이 제안한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9대0으로 통과시켰다.결의한내용은 ▲북한군은 전쟁을 중지하고 38이북으로 철수할 것 ▲유엔한국위원단이 이를 감시할 것 ▲유엔회원국은 북한에 일체의 원조를 하지 말 것 등이었다.북한을 침략국으로 규정한 유엔 안보리 결의는 이처럼 6·25발발 50여시간만에 이루어졌다. 안보리 결의가 나온 다음날 장면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너무도 황급해서 국가원수에 대한 예모도 차릴 겨를이 없이”(회고록에서의 표현)장면은트루먼에게 “6개월전 요청한 무기원조를 왜 해주지 않았느냐,이제 우리나라 운명이 당신 손에 달렸으니 어떻게 하겠느냐”고 마구 항변했다. 이 자리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트루먼은 27일 낮 해·공군을 한국에 파병한다고 발표했다.이날 유엔 안보리도 ‘북한의 공격을 격퇴하고 한국의 안전보장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라고 권고하는’결의문을 추가로 채택했다.30일에는 미국이 육군을 출동시켰다. 6·25가 발발하자마자 유엔 안보리 결의,미국의 파병을 이끌어낸 이 며칠은한국이 적화(赤化)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나날이었다.그 결실은 장면의 초인적인 노력 덕에 맺어졌다고 할 수 있다.장면은 훗날 “본국으로부터의 지시나 의논할 사람이 없어 고군분투하며 우방 제국(諸國)의 대표들에게 눈물의 호소를 했다”면서 당시를 “한 시간이 일년만큼이나 귀중했다”고 회고했다. 장면정부를 ‘실패’라고 규정하고 장면 개인을‘무능하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건국 초기에 두가지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한다.하나는 6·25직후 미국 및 유엔의 군사적 지원을 즉각 이끌어낸 점이고,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법 정부’임을 유엔에서 승인받은 일이다. 장면은 48월 5월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서울 종로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당선함으로써 정치의 장(場)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정부 출범 며칠뒤 장면은 9월 파리에서 열리는 제3차 유엔총회에 참가하는 한국대표단의 수석으로임명받았다.그와 함께 대표단으로 참가한 이들은 조병옥(趙炳玉)정일형(鄭一亨)장기영(張基永)김활란(金活蘭)모윤숙(毛允淑)전규홍(全奎弘)김우평(金佑枰)김준구(金俊九)등이었다. 한국의 법통(法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막중한 회의에,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떨어지는 장면이 수석대표로 임명된 사실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특히 조병옥을 앞섰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조병옥은 독립운동 경력이 화려한데다 한민당 창당에 한몫 했으며 미군정 때는 경찰총수인 경무부장을 지냈다.더욱이 대통령 이승만에게서 미 유학시절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고 있었다.반면 장면은 주요 경력이 동성상업학교 교장,입법의원 정도였다.이승만과도 해방공간에서야 처음 만난 사이다. 그런데도 당시 ‘국가 승인’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이승만이 장면을 수석대표로 선택한 것은 그만큼 신뢰가 두터웠기 때문일 것이다.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에 도착한 장면은 바티칸을 비롯한 가톨릭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그해 12월12일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 내의 유일·합법정부임’을 승인받는다.장면은 “쉬는 시간에도 혼자서 한국승인 문제를 위해 천주교인을 만나러 다녔고”(장기영의 회고담),그토록 과로한 탓에 쓰러져 입원한다.이때 병원에서 주사를 잘못 맞아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바람에 생을 마칠 때까지 간질환으로 고생하게 된다. ‘유엔의 한국 승인’에 성공한 장면은 대통령 특사로서 바티칸에 가 교황을 알현했다.귀국길에 미국에 들른 그는 그곳에서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됐다는 연락을 받았다.짐은 이미 집으로 부친 뒤였다. 장면은 다음날부터 각국 대사를 찾아다니며 대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먼저 공부했다.한편으로는 사무실과 사람을 구하는 등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갔다.1년반 동안 노력한 끝에 주미대사관이 궤도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듯 6·25가 터졌고,장면은 그에게 부여된 국가적 과제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해 11월 이승만은 장면을 제2대 국무총리로 지명했고 국회는 23일 이를 인준했다.그러나 장면은,유엔이 51년 2월1일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것까지를 지켜본 뒤에야 귀국해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용원기자ywyi@
  • 아버지 영정 든 네살배기 5·18묘역 관리원으로

    “어렸을 때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척 원망스러웠지만 이젠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80년 5·18의 참상을 상징했던 사진 속의 꼬마 조천호(曺天鎬·당시 4세)씨가 또다시 그날이 다가오자 역사의 현장에서 아픈 상흔(傷痕)을 추스르고 있다.그는 올해 23세로 지난해 5·18묘지 관리사무소 공무원으로 특채돼묘역 이곳저곳을 안내하고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상복을 입은 꼬마가 초점없는 눈동자로 아버지 영정을 품에 안고 입술을깨물며 앉아있는 모습’ 이 사진은 국내 보도가 통제되던 그당시 외신기자(AP통신)의 타전으로 전세계 신문과 방송에 오르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조씨의 아버지 사천(四天·당시 34세)씨는 그해 5월 21일 오후 1시쯤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다. “아저씨가 저 꼬마예요,아저씨랑 많이 닮았네요”우르르 몰려든 초등학생들이 사진앞에 서 있는 천호씨를 찬찬히 뜯어 보면서 물어봤다.“그래,맞아”라면서 눈시울을 붉혔다.뒤편에서 이 말을 들은 아주머니들이 조씨의 등을 두드리며격려했다.“이렇게 당당한 청년으로 자라줘서 고맙네,아버지 없이 고생은 얼마나 했을까…” 조씨는 초등학교 6학년이던 88년 이 사진을 5·18관련 책자에서 우연히 확인했다.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할머니는 87년 선거용 팸플릿에서 이 장면을보고 쓰러져 사흘만에 돌아가셨다고 가슴아파한다.조씨는 “이제는 아버지도편안하실 겁니다.제가 이렇게 옆에서 매일 돌보고 있으니까요”라며 웃었다. 광주 남기창기자 kcnam@
  • [사설] 한국축구의 가능성

    통쾌하다.10년 묵은 체증(滯症)이 내려간 듯 시원하다.28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한국­브라질 축구대표팀 경기에서 한국 축구가 세계 최강브라질 축구를 꺾은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아래 주눅든 우리 국민에게 모처럼 짜릿함을 안겨준 쾌거였다.“이 경기가 월드컵 본선경기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까지 갖게 한 멋진 승부였다. 한국 축구가 브라질의 ‘삼바축구’를 거꾸러뜨렸다는 것은 한국 축구사에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지난 64년 도쿄 올림픽에서 0대 4로참패한 이후 한국 축구는 국가대표팀은 물론 청소년대표팀도 브라질을 이겨본 적이 없다.따라서 35년만의 첫 승리가 감격적일 수밖에 없다. 비록 친선경기였지만 두 팀은 프랑스 월드컵 출전선수들을 포함한 주전급선수들을 모두 스타팅 멤버로 기용해 최선의 경기를 펼쳤다.한국팀은 ‘볼의 마술사’로 불리는 히바우두,세계최고의 수비수 카푸가 포진한 브라질을 상대로 당당히 싸웠고 끝내 1대 0으로 승리했다.절묘한 선수 기용과 작전으로AP통신으로부터이번 한국축구의 승리가 ‘전술의 승리’라고 평가받은 허정무감독과 김도훈을 비롯한 대표선수 모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들의 투혼(鬪魂)이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었다.해외활동 선수들의 풍부한 경험도 승리의 밑거름이었다. 사실 우리 대표팀은 지난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절감하고 좌절했다.잇따른 참패로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우물안개구리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이번 승리는 한국 축구가 다시 일어설 수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소중한 것이다.이제 우리 선수들은 세계 어느 나라와 맞붙어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그 자신감으로 2002년 서울에서 열리는 월드컵 대회에서도 승리를 일구어내기를 기대해 본다.이번 승리를 맛보기 전까지는 우리 안방에서 열리는 월드컵 경기에우리 팀은 들러리가 되고 남의 나라끼리 잔치를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없지 않았다. 이번 경기에서 꽃샘추위를 녹인 축구팬들의 열기가 보여주었듯이한국 축구는 지금 중흥기를 맞고 있다.이 상승세를 계속 유지시켜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내야 할 것이다.월드컵 대회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다.대표팀의 전력 강화에 더욱 힘쓰는 한편 축구장 건설 등 모든 준비에만전을 다해 한국 축구가 다시 일어서듯 한국 경제도 다시 일어서도록 우리모두 힘을 모아야겠다.
  • 싱겁게 끝난 ‘세기의 주먹대결’ …헤비급 통합타이틀전

    ‘금세기 마지막 빅카드’로 전세계 복싱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헤비급통합타이틀전이 판정 시비만 남긴 채 싱거운 무승부로 끝났다. 14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특설링에서 열린 에반더 홀리필드-레녹스 루이스전은 1971년 무하마드 알리-조 프레이저전 이후 첫 헤비급 통합타이틀전으로서 지대한 관심을 모았으나 시종 무기력한 경기 끝에 1-1 무승부를 기록,복싱팬들을실망시켰다. 이로써 세계복싱협회(WBA) 및 국제복싱연맹(IBF),세계권투평의회(WBC) 등헤비급 3대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쥐어 누구도 시비걸지 못할 진정한 최강자로서의 통합챔피언 탄생의 꿈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이날 경기에 대해 3명의 심판 가운데 미국의 진 윌리엄스(여)는 115-113으로 홀리필드의 승리로 판정했고 남아공의 스탠리 크리스토도루는 116-113으로 루이스의 승리라고 판정했다.그러나 영국의 래리 오코너는 115-115 무승부 판정을 내렸다. 한편 AP통신은 자체 집계에서 117-111로 루이스가 승리한 경기라고 보도했다.AP는 루이스가 모두 613차례 주먹을 내밀어 348회를성공시켜 57%의 적중률을 보인 반면 홀리필드는 385번 주먹을 뻗어 130차례 성공시켜 34%의 적중률에 그쳤다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펀치의 대부분이 잽 수준을 넘지 못했을 만큼 소극적인 경기를 펼침으로써 파이팅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았다.홀리필드 역시 장담했던 “3회 KO”는 커녕 큰 키와 긴 리치를 이용한 루이스의 견제에 밀려 제대로 접근조차 못한 채 12라운드 내내 상대를 쫓아다니기만 해 결국 거짓말장이가 되면서 실망감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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