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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슈켄트 한인들의「위대한 삶」(본사 송정숙 논설위원 현지탐방:상)

    ◎사막에 일군 「콜호즈」는 타민족의 귀감/만나는 동포마다 “서울 한번 가보고 싶소”/「황성옛터」 부를땐 백발노인 몸떨며 통곡 『나의 조국,대한민국을 사랑하리.영원토록 사랑하리…』 4천석의 좌석은 물론,입석까지 그득히 메운 「레닌인민궁전」극장에서 한국의 가수 태진아는 「사랑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기쁨에 차서 목청껏 불렀다.이틀 연속 공연으로 연인원 1만명이 동원된 관객들은 노래마다 박수로 장단을 맞췄고 무대마다 긴 갈채로 화답을 보냈다. MBC가 기획한 「중앙아시아의 우리 동포를 찾아서」의 타슈켄트공연.레닌동상이 광장마다 서있고 사회주의식 구호가 붉은글씨로 여기저기 붙어있는 이 멀고먼 중앙아시아땅에서 우리의 가수 코미디언들의 공연이 이토록 성황속에 이뤄지고 있다는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웃기기 잘하는 가수 김상국씨가 「황성옛터」를 부르던 마이크를 들이댔을때 객석에 앉아있던 성이 「짐가」라는 백발의 노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통곡을 했다.쉽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을 것처럼 앉아있던 이 「고려사람」은 「원동」으로부터 그 악몽의 「강제이주」를 당해온 당세대의 한인이다.이곳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모두가 그때의 당사자거나 그 2세거나 3세였다. 타슈켄트는 소연방 15개 공화국중의 하나인 우즈베크 공화국의 수도다.이 공화국에만 「고려사람」 20만명이 산다.수도 타슈켄트시에만도 5만명이 살고 있다.그들은 애당초 「유랑하는 가축」처럼 살길을 찾아 모국땅을 떠나온 한인들이었다.1900년대 초기부터 부지런하고 쌀농사 재능이 뛰어났던 그들은 혁명러시아의 토지법에 의해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그많은 악조건을 물리치고 성공적인 정착을 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7년 9월,그들은 아직도 확연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스탈린의 음모에 의해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농사도 몽땅 버리고 다시 「가축」같은 신세가 되어 화차에 실린채 맨몸으로 서른날씩 마흔날씩 걸려 이곳 중앙아시아로 실려와 염분섞인 땅,갈대만 우거진 늪지대에 던져졌었다.지금의 중앙아시아에 사는 35만명은 그들과 그 자손들이다. 「치모페이」「웬체슬로바」「와렌티나」「보리스코프」…소련식 이름을 단 그들 「카레이스키」(한국인)2,3세들은 토굴을 짓고 산 할아버지 이야기,고사리와 미나리죽으로 봄기근을 이겨준 할머니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각각의 가슴속에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금 중앙아시아의 한국인들은 숱하게 많은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한결같이 잘살고 있다.타슈켄트에서도 사마르칸트에서도 알마아타 푸른제에서도 영특하고 지혜롭게 잘살고 웬만한 집에서는 다 아들 딸 모두들 대핵고(대학교)까지 필업(졸업)시켰고 도시의 직장에 진출시켰다. 이유없이 「적성민주」의 딱지를 붙여 공민권을 빼앗고 이주의 자유도 여행의 자유도,친척끼리 모여 사는 일도 허락받지 못했던 시기에도 그들은 사막땅을 일궈 쌀농사를 짓고 목화를 심어 혁명러시아가 산업화해가는데 원자재를 대고 전쟁중에는 인민의 식량을 보탰다.1%도 안되는 소수민족의 신분으로 이만큼 공헌한 사람들은 카레이스키(고려인)들 말고는 없을 것이다. 타슈켄트의 도심을 벗어나면 포리토구역에 잘사는 한인 콜호즈(집단농장)가 있다.많은 사람들이 이 성공적인 콜호즈를 찾아온다.2만1천명이 일하는데 그중 조선인은 4천명밖에 안된다.그래도 이 농장은 「한인콜호즈」로 불린다.애당초 이 농장은 강제이주된 조선인들만으로 만들어졌던 집단농장이다.그들의 「일 좋아하고 부지런한」특성때문에 벼농사 삼베농사 목화농사를 성공적으로 이뤄내 타민족보다 부유해졌다.그러자 1951년 소련정부는 그들을 타민족의 콜호즈와 병합시켜 버렸다.말하자면 가난한 콜호즈와 병합시켜 하향 평준화시킨 것이다.능력없는 민족까지 이끌고 발전시키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 콜호즈의 한인마을에는 전용회관이 있다.러시아어간판 옆에 「어서 오십시요」라는 간판도 붙여 놓았다.우리 일행이 찾아갔을 때는 전속 가무단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어린이들이 꼭두각시춤도 추고 아주머니들이 우리말 노래도 불렀다.2∼3년에 한번쯤 평양에서 「선생님」을 모셔다가 지도를 받아오는정도이고 스스로 엮어가는 가무단이라 가무가 약간 국적불명이긴 하다. 박이나겐치부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지난해 이 농장의소득은 농사지은 것 모두에 대해 국가가 수매해준 대금 1천7백80만루블이었다.배당하는 방법은 1인당 월급을 2백70∼3백루블씩 받고 그 나머지분을 배당금으로 나누게 된다.지난해에는 1인당 1년에 8천루블쯤 돌아갔다.노동자 평균임금이 월2백50루블이고 고급층 월급이 5백루블이상인 그나라 수준으로는 높은 소득이었다. 소득이 그만못한 또다른 솔호즈(국영농)로 우리를 안내해준 사람은 보리스라브 강씨였다.타슈켄트의 한인문화센터 일을 맡고 있는 건축설계 전문가다.40대초반인 그 역시 「37년 강제이주」한 고려인 2세이고 솔호즈에서 자랐다.그가 자란 곳인 솔호즈 근처에는 「강우주거리」라는 길이 있다.강우주는 바로 그의 아버지라고 한다.15년동안 솔호즈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공헌한 것을 평가받아 거리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솔호즈에 이를 무렵,한집안에서 흥겹게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중앙아시아식 경쾌한 음악에 맞춰 우즈베크계의 농민들이 춤추고 있었다.아마도 그들 민족 전통방식의 결혼식이 있는가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그 집의조그만 아들형제가 할례를 받아 그 잔치를 벌인 것이라고 했다.솔호즈 유지자격으로 한인회장도 참석하고 있었다. 예고없이 찾아든 한국인 여행객을 정도이상 반기면서 음식을 안기고 연설을 해라,춤을 춰라 하며 놓아주지 않았다.한인회장도 「시늉이라도 해야」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요령을 일러주었다.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올 때에는 아이들의 큰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친척들이 줄줄이 한참동안을 따라 나왔다.그중의 할아버지뻘인 우즈베크노인 하나는 술에 취한채 조선말로 『우리집에 갑세…』를 연신 외쳤다.그 사회에서의 한국인 위치가 지도자적인 자리임을 느끼게 해주는 분위기였다. 공민권도 뺏고 삶의 터전도 뺏고 어느날 느닷없이 「적성민주」이라는 딱지까지 붙여 열사의 사막 한복판에 실어다 버린 형국이었던 「카레이스키」들이 반세기가 지난뒤 그 선혈섞인 땀으로 이뤄낸 오늘의 위치는 위대한 것이라고 말해서 전혀 과장된게 아니다. 거기다가 새로 떠오르기 시작한 고국 「한국」은 중앙아시아의 몇개 공화국에 사는 「강제이주된 고려사람들」의 지위를 점점 더 높여주고 있다.그래서 만나는 동포마다 은근한 목소리로 『서울에 한번 기차게 가보고 싶소』라고 말한다.
  • “세계적 희귀조”저어새 서식처 발견/서울신문·스포츠서울탐사팀 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국제보호조/서해 무인도서 한쌍… 한국 텃새 입증 절종위기에 있는 국제보호조 「저어새」가 서울신문과 스포츠서울의 한국 야생조류 대탐사팀에 의해 관찰되어 국내 및 세계학계에 큰 경사가 되고 있다. 탐사단은 19일 서해안의 한 무인도에서 높이 1백m 기암 절벽위에 직경 50㎝ 크기의 둥우리를 틀고 부화된 지 24시간된 새끼 1마리 및 미부화된 알 1개를 품고 있는 저어새 한쌍을 발견,촬영에 성공했다. 저어새는 1900년대초 일인 학자에 의해 번식사실이 확인된 일이 있으나 한국인 연구팀에 의해 조사,관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저어새는 따오기과에 속하며 몸은 백로와 같으나 주둥이가 주걱과 같은 모양으로 길고 끝이 아래로 굽어져 있다. 이번에 관찰된 저어새 암컷은 눈주위의 앞쪽과 위·아래 피부는 노란색이었으며 수컷의 부리와 얼굴의 나출부는 온통 검정색이었고 암수의 머리 다발 깃 또한 옅은 황금색으로 바람에 흩날릴 때 더욱 화려한 모습을 보였다. 저어새는 우리나라를 비롯,중국 일부지역과 일본 등 극히 제한된 지역에 분포돼 절종의 우려가 있어 국제자연보호연맹(IUCN)은 적색목록으로 지정,보호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지난 68년 천연기념물 제205호로 지정한 바 있다. 노랑부리 저어새를 포함,국내에서는 1년에 한두 마리가 관찰돼 조류도감에 겨울철새로 분류돼 왔다. 탐사단 이정우 단장은 『그 동안 번식지 확인이 되지 않아 저어새를 겨울철새 또는 길 잃은 새로 취급해왔다. 이번에 뜻박에 비번식지인 서해안 무인도에서 번식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철새 아닌 「텃새」로 조류도감이 수정돼야 할 것』이라며 국내는 물론 IUCN에 곧 보고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 경제과학올림픽… 1851년 「런던」이 효시/세계박람회 유래와 특징

    ◎한국,1893년 미 시카고 개최때 첫 참가/파리선 다섯차례… 도시 재개발 전기로/런던 수정궁·파리 에펠탑·오사카 신간선등 명물 등장 대전엑스포는 우리나라가 지난 1893년 미국 시카고엑스포에 8칸짜리 기와집을 짓고 참가한 지 꼭 1백년 만에 개최하는 뜻깊은 행사이다. 이른바 엑스포란 인류문명의 성과와 나아갈 방향,미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더 나은 발전을 꾀하는 잔치이다. 이 때문에 흔히 「경제과학올림픽」으로 불린다. 근대 엑스포의 효시는 지난 1851년 영국의 산업혁명을 기념해서 열린 런던엑스포. 당시 앨버트공에 의해 창안된 엑스포는 지금까지 올림픽과 함께 지구촌의 양대행사로 자리잡고 있다. 엑스포는 과거의 예로 볼 때 주최국가의 역사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런던엑스포가 영국의 산업혁명을 기린 것이었듯 1889년 파리엑스포는 프랑스혁명 1백주년 기념으로 열렸으며 지난 88년 호주의 브리스베인엑스포는 유럽인의 호주정착 2백년을 되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또 내년 스페인에서 열릴 엑스포는 콜럼버스가 남미대륙을 발견한 5백주년을 기념해 그가 항해를 출발한 세비야시에서 개최된다. 엑스포에서는 획기적인 발명품들이 선보이는 게 상례. 초대 런던엑스포의 전시장은 상상을 초월한 수정궁의 모습을 선보였다. 4천5백t의 강철구조물 위에 30만장의 유리를 씌워 폭 1백42m·너비 5백60m의 전시장을 건설,건축공법의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했다. 1878년 미국 필라델피아엑스포에서는 전화기와 축음기,냉장고가 일반에 처음 소개되고 1889년 파리엑스포에서는 에펠탑이 세워져 그 철구조물 기술을 바탕으로 지하철 시대를 여는 밑거름이 됐다. 또 1900년 파리엑스포에서는 지하철과 토키영화가,1939년 뉴욕엑스포에서는 나일론과·플라스틱·TV·테이프레코드 등이,1962년 시애틀엑스포에서는 자판기가,1970년 오사카엑스포에서는 신간선 초고속열차가 처음 등장했다. 엑스포시설은 행사가 끝난 뒤 대부분 적절하게 활용된다. 파리는 5번이나 엑스포를 개최,이를 도시 재개발의 전기로 활용했으며 캐나다 몬트리올시는 공원·미술관·극장·경기장·오락센터를 갖춘 명소로,일본 쓰쿠바는 첨단과학기술단지로서의 지위를 다졌다. 한편 지난 28년 구미 31개 국가가 파리에서 결성한 국제박람회기구(BIE)의 가입국은 43개국인데 우리나라는 87년 5월19일에 가입했다. 엑스포에는 국가단위로 참석하는 게 특징이다.
  • 지구촌 인구 한해 1억명씩 는다/「세계인구의 날」계기로 본 실태

    ◎30년후 현재의 2배로… 1백억명 돌파/밀도는 방글라ㆍ대만 이어 한국이 3위 11일은 인구폭발의 위기로부터 지구촌을 구해내기 위해 UN이 선포한 「세계인구의 날」이다.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 따르면 현재지구촌에 살고있는 인구수는 52억9천2백만명에 달하고 있다. 이는 10년전과 비교해 8억4천2백만명이 늘어났으며 현재는 1년에 1억씩 늘어나고 있어 10년후인 2000년에 가면 세계인구는 지금보다 10억명이 늘어 63억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같은 인구증가 추세가 계속될 경우 지구촌의 인구는 2020년에 가면 1백억명을 돌파해 현재의 2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세계인구는 매일 26만6천8백명씩 늘어나고 있다. 이는 1시간에 1만1천1백명,1분에 1백85명,1초에 3명씩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이미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세계은행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 80년 기준으로 전세계 인구(44억5천만명)의 17.5%인 7억8천만명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양섭취마저 못하는 기아인구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같은 기아인구수는 세계 최대인구 보유국인 중국을 제외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기아인구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기아인구는 대부분 아프리카와 아시아권의 개발도상국에서 살고 있으며 기아인구가 많은 나라일수록 인구증가율이 높게 나타나 인구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인구증가는 기아문제 이외에도 자원개발과 공업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등 환경오염과 인구의 도시집중에 따른 주택난,교통난등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유엔인구활동기금(UNFPA)은 세계인구가 50억명을 넘어선 87년 7월11일을 기억하고 지구촌의 최대 당면과제로 등장한 인구문제해결에 전세계가 공동으로 노력하자는 취지에서 이날을 세계 인구의 날로 선포한 것이다. 세계인구는 1800년에는 약 8억∼11억,1900년에는 15억∼17억명 선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계인구가 2배로 늘어나는데 약 1백년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계인구 통계를 담당하는 국제기구가 없어 정확한 통계는 알수 없다. 세계인구 통계가 시작된 것은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참여한 국제기구인 유엔이 등장한 이후의 일이다. 1950년 세계인구는 25억1천5백만명이던 것이 60년에는 30억1천9백만명,70년에는 36억9천8백만명,80년에는 44억5천만명,90년 52억9천2백만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10년간 증가한 인구수를 보면 50∼60년 사이에는 5억4백만명에 불과했으나 60∼70년 사이에는 6억7천9백만명,70∼80년에는 7억5천2백만명,80∼90년에는 8억4천2백만명으로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인구학자들은 90년에서 2천년대 사이의 10년 동안에는 10억명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같은 인구의 급격한 증가추세는 세계인구가 10억명 늘어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점차 단축시키고 있다. 세계인구가 30억에서 40억으로 늘어나는데 14년(60∼74년)이 걸렸고 40억에서 50억으로 늘어나는데 13년(74∼87년)이 걸렸다. 그러나 50억에서 60억으로 늘어나는 데는 10년(87∼97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전 세계인구 52억9천2백만명 가운데 77%인 40억8천7백만명이 개발도상국에서 살고 있고 나머지 23%인 12억5백만명이 선진국에서 살고 있다. 이를 대륙별로 구분하면 아시아가 31억8백만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아프리카(6억4천8백만명),유럽(4억8천8백만명),남미(4억4천8백만명),북미(2억7천6백만명),오세아니아(2천6백만명)순이다. 90년 현재 국별로는 중국이 11억3천5백만명으로 세계 1위이며 인도(8억5천3백만명),소련(2억8천8백만명),미국(2억4천9백만명),인도네시아(1억8천만명),브라질(1억5천만명),일본(1억2천3백만명),파키스탄(1억1천7백만명)의 순이다. 우리나라는 가족계획으로 인구증가율이 지난해 선진국수준인 0.97%를 기록하고 있으나 인구밀도는 방글라데시ㆍ대만에 이어 세계3위(1㎢당 4백31명)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는 90년 현재 4천2백80만명이며 2000년에 4천6백80만명,2020년에는 5천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시베리아 철도개통이후 한인 푸대접/러시아동방정책 추진과 위상변모

    ◎러시아농민들의 극동행렬에 밀려나/1990년이민장려칙령마저 폐기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을 연결하는 5천8백마일의 시베리아철도는 명실공히 세계최장의 철도라 할 수 있다. 이 철도의 건설은 러시아의 동방진출과 동방경영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계획이 완성된 것은 1890년 12월이었다. 당시 집권자인 알렉세이3세는 우랄산맥 동쪽의 첼리아빈스크로부터 옴스크 이르크추크를 거쳐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하는 철도건설을 결정, 1891년에 그의 아들 니콜라이를 시베리아철도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한 후 본격적인 건설에 나섰다. 공사는 모두 6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됐다. 당초 건설계획은 1억7천5백만달러에 상당한 자금을 투입,1891년부터 1903년까지 13년동안에 완성키로 돼 있었다. 그러나 험악한 지형과 기후조건 등으로 건설공사가 지연된데다 노일전쟁ㆍ1차세계대전 등을 겪으며 계속 지연돼 볼셰비키혁명 1년전인 1916년에야 최종적으로 완공을 보게 됐다. 당초 계획보다 2배나 긴 26년만에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착공 7∼8년만에 개통돼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개통된 극동의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간 우수리선은 1891년에 착공,1897년에 완성되었으며 바이칼호이동의 공사는 1904년까지 대부분 마무리됐었다. 어쨌든 시베리아철도는 이 공사 책임자였던 세르게이 위테교통통신상의 말대로 『금세기 전세계 최대 사업중의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시베리아철도의 개통은 러시아인들의 시베리아 이민에 많은 편리를 제공하게 되었고 따라서 극동으로의 이주에 필요한 비용도 대폭 경감하게 됐다. 그러자 이민의 수도 늘어나게 되어 시베리아철도위원회는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에 많은 혜택을 주었던 1861년의 이민장려칙령을 1900년 6월에 폐기해 버렸다. 가난한 러시아 농민들은 주로 1900년 이후부터 시베리아철도를 따라 동방으로의 이주를 시작했다. 1900년에는 1만7천명의 농민들이,그리고 1901년에는 1만1천3백64명의 농민들이 연해주로 옮겨왔다. 이러한 이주농민의 급증에 따라 농민에게 분여할 경작지가 부족하게 되자 1902년에는 사전답사를 통해 1인당 15데샤치나(15정보)의 토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경우에만 이주를 허용하는 제도가 도입됐다. 이로 인해 이민의 수는 다소 감소해 1902년에는 5천8백62명,1903년 8천9백11명,1904년 1천3백77명,1905년에는 2백14명이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05년의 혁명이후에 러시아정부의 정책이 다시 바뀌어 극동에의 이민을 장려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럽러시아 지역의 지주들이 농민의 소요에서 벗어나도록 그들에게 이민을 허용하려 했던데 있었다. 이에 따라 이민 숫자가 크게 늘어나 20세기초 극동지방의 인구급증을 초래했다. 1897년에서 1914년까지 시베리아의 인구는 4백60만에서 7백60만이 되어 65.2%가 늘어났으며 그중 극동지방의 인구는 90만에서 1백60만으로 77.8%가 증가했다. 한편 행정편제는 1884년에 자바이칼,아무르,연해주(프리모르)지방이 극동변강을 구성하고 있었으며,1894년에는 자바이칼지방이 동시베리아 총독의 관할에 귀속됨으로써 분리됐고 1909년부터 1917년까지 극동변강은 아무르,프리모르,캄차카,사할린 등 4개의 지방(오블라스트)으로 구성되었다. 극동변강의 행정 책임자는 총독이었으며 각 지방의 책임자는 군무지사로 불리웠고 그 밑에 군ㆍ면에 해당하는 행정으로 우에즈드,볼로스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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