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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의 경제학(외언내언)

    1t의 철강을 생산하는데는 6만5천갤런(1갤런은 3.8ℓ)의 물이 소모되고 1t의 종이를 생산하는데는 3만9천갤런의 물이 쓰인다.그래서 책 1페이지당 2갤런의 물이 쓰인다고도 말한다.이런 식으로 따져보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부터.세계적으로 물부족현상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발유와 석유의 비교도 했다.정제과정에서 휘발유는 1배럴당 3백57갤런,석유는 7백70갤런의 물을 쓴다.가장 물을 많이 사용하는 제품은 소다.1t의 소다생산에 무려 8만5천갤런이 필요하다.위스키는 소량을 쓰는 편,1갤런 만드는데 80갤런이 든다. 이 분야 학자 찰스 브래들리는 우리가 한끼 먹는 쇠고기 한 접시에도 2천9백갤런의 물이 있어야 한다는 연구를「사이언스」지에 보고했다.7백파운드(1파운드는 454g)의 2년생 암소는 매일 12갤런의 물을 마셔야 하고,2만4천갤런의 물로 성장한 자주개자리(알파파)를 매일 30파운드씩 먹어야 하기 때문.그럴듯한 계산이라는 느낌보다,사람이 사는데 물이 얼마나 필수적이며 자연속에서 그 물이 어떻게 한 생명체처럼 엉켜 있는가에대한 깨달음이 중요할 것이다. 미국은 1900년부터 70년간 미국의 물수요가 어떻게 증가됐는가하는 계량까지 해보았다.1일기준 식수 수요량은 30억갤런에서 2백70억갤런으로,농업용수는 2백20억갤런에서 1천4백억갤런으로,공업용수는 1백50억갤런에서 1천9백억갤런으로 늘어났다.물이 부족해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신문증면 경쟁이 용수난을 가중시킨다는 보도가 있다.모든 분야가 물사용을 절반으로 줄였으나 신문용지는 줄일 수 없어 정상조업을 강행중이다.하지만 우리나라 신문용지 생산공장 초지실에서 1시간 쓰는 물만 가지면 8만5천명이 하루를 마실수 있다. 물은 유한한 자원이다.산업의 구조가 물부족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자각도 해야만 한다.산업수의 절약정신은 이 가뭄 극복을 크게 도울수 있다.
  • “문명사 대변혁” 지식사회 도래한다/「거대한 변화」

    ◎미 피터 드러커 교수 21세기 상진/자본·노동력보다 지식이 부국의 필수 자원/산업·생산·경영 혁명 거치며 사회주의 붕괴/“190년대 자본주의 몰락” 마르크스 예언 빗나가/효율적 지식 응용하는 개인·조직만이 생존 『국부의 달성을 위해서는 자본과 노동력보다 지식이 더 필수적인 지식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먼트 대학원의 피터 드러커 교수는 사회주의 패망이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거대한 변화로 지식사회의 등장을 꼽고 이는 인류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대변혁이라고 진단했다.그는 인류사가 산업혁명·생산혁명·경영혁명을 거쳐 이제 지식이 절대적 자원이 되는 지식사회로 진입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이 놀라운 변화의 주인은 지식의 의미변화로서 과거에는 지식이 존재에 과한 개념이었으나 지금은 행동에 관한 개념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지난 반세기에 걸친 자본주의 사회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심도 있게 분석해온 드러커 교수는 앞으로는 지식을 효율적으로 응용하는 조직과 개인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언했다.「변모하는 산업사회」「단절의 시대」등 다수의 저서로 잘 알려진 금세기 최고의 경영사상가이자 문명비평가인 드러커 교수는 1909년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그가 「다이얼로그」지에 기고한 「지식사회의 도래」란 제목의 논문 요지를 소개한다. 1750년부터 1900년까지 1백50년 동안 자본주의와 기술이 세계를 정복,문명세계를 창조했다.자본주의와 기술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새로운 것은 이것들의 확산속도다.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속으로 선진기술을 침투시켜 오늘의 절대적 자본주의를 만든 것은 이 두 요인의 속도와 규모였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한 요소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 자체가 됐다.절대화된 자본주의는 전과는 달리 국지성을 벗어나 서구와 북유럽에서 18 50년까지 위력을 발휘했다.그리고 다시 50년 동안 전세계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지식의 의미에서 일어난 극단적 변화가 이를 가능케 했다.서구와 아시아를 가릴 것 없이 지식은 「존재」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그것은 「행동」에적용되기 시작했다.그것은 자원이 되고 실익이 되었다.개인적 재산이었던 지식은 하룻밤 사이에 공공재산으로 둔갑했다. 첫 단계 1백년동안 지식은 도구·과정 및 상품에 적용됐고 이것이 산업혁명을 만들어냈다.그러나 지식은 동시에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화」를 초래,계급전쟁을 창조하고 급기야는 공산주의를 만들었다. ○생산요인으로 작용 1880년 언저리에서 시작된 2단계 과정에서 지식은 새로운 의미를 얻으면서 일에 적용되기 시작하더니 생산성 혁명을 가져왔다.생산성 혁명은 무산계급을 중산급 부르주아 계급으로 전환시켰으며 이들은 거의 중산층에 가까운 소득을 확보하게 되었다.결국 생산성 혁명은 계급전쟁과 공산주의를 패배시켰다. 지식의 마지막 단계 변화는 2차대전후에 왔다.이 단계에서 지식은 지식 자체에 적용되기 시작했다.이를 경영혁명이라 할 수 있다.지식은 자본과 노동 모두를 옆으로 밀어낸 채 생산의 한 요인이 됐다. 오늘의 사회를 「지식사회」라고 부르기엔 빠를지도 모른다.인류는 이제 겨우 지식경제를 갖게 됐다.하지만 오늘의 사회가 후기자본주의임에는 틀림없다. 자본주의와 산혁명에 의해 사회가 변하는데는 서유럽에서 1백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17 50년만 해도 미미한 존재였던 자본주의자와 무산계급자들은 19세기 들어 자본주의와 기술이 침투한 곳이면 어디서나 지배적 계급이 되었다. 일본에서 이 변화는 30년이 못 걸렸다.그 기간은 명치유신이 일어난 1867년부터 중일전쟁이 터진 18 94년까지였다.상해·홍콩·캘커타·봄베이,또는 제정 러시아에서도 더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기술적 변화의 속도는 자본 수요를 폭발시키고 새로운 기술은 생산의 집중을 초래,공장의 출현을 불가피하게 했다.지식이 수천개의 소규모 가내공장에 적용될 수는 없었다.생산은 하룻밤 사이에 손재주 단위에서 기술 단위로 옮겨졌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등장한 것도 제임스 워트의 증기 기관차가 등장한 무렵인 17 76년의 일이었다.그러나 「국부론」도 기계·공장·산업생산 등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국부론에서 언급한 생산이란 고작 가내공업 수준이었다.나폴레옹전쟁이 있은 40년 후까지도 공장과 기계가 재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1830년대에 들어와 발자크가 소설을 통해 은행원과 증권거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프랑스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산업화는 마르크스가 말한 「궁핍화」가 아니라 물질적 향상을 의미했으나 그 충격은 가히 병폐에 기까웠다.새로운 계급으로 변모한 프롤레타리아들은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소외」되었다.이들은 결국 그들의 생계를 소수 자본주의가들이 소유한 공장에 의존하다보니 갈수록 무력해지고 가난해져 종내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게 된다고 마르크스는 예언했다. 현세의 마르크스 주의자들도 이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심지어 반 마르크스 주의자들 마저 자본주의 「내재적 모순」에는 동의한다.19세기 후반까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믿음은 상당한 세력으로 사회를 지배했고 많은 뜻있는 인사들이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소외」와 「궁핍화」만을 가져온다던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고 반대로 사회주의가 망해버린 이유는 무엇인가.이에 대한 대답은 생산성 혁명이다. 미국의 저명한 경영학자였던 프레드릭 윈즐로 테일러가 비록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노동자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시력이 나빴던 그는 하버드대 입학을 포기하고 기계공이 되었다.기술이 뛰어났던 그는 곧 보스의 일원이 되었다.그는 이 과정에서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증오와 갈등을 목격했다.그는 갈등 해소의 방안으로 노동자의 생산성 향상에 착안했다. ○스미스 「국부론」 등장 그의 생산성 향상방안은 자본가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자본가에 다같이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그의 교훈을 가장 잘 활용한 예가 전후 일본의 사용자와 노조였다. 테일러의 생산성 혁명 이론은 선진국의 생산성을 50배 높였다.한국·대만·싱가포르 등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도 테일러의 교훈덕이었다. 생산성 향상은 부수적으로 노동자들의 생활 향상을 가져오고 이는 구매력증가를 수반했다.마르크스가 걱정했던 무산대중은 부르주아로 둔갑했다.자본가가 아니라 블루 칼라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진정한 수혜자가 되었다.이는 마르크스가 1900년대에 올 것으로 예언한 자본주의의 몰락이 왜 마르크시즘의 몰락으로 대체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1차 세계대전후 빈곤과 실업이 만연된 중부 유럽의 패전국에서 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같은 맥락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다.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예상한 대공황 이후의 공산주의 혁명이 나타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지난 수백년간 생산성 폭발을 초래한 경제를 가능케한 것이 지식을 일에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지식의 의미 변화는 사회와 경제를 변모시켰다.지식은 개인과 경제의 자원으로 치부된다.지식만이 오늘날 의미 있는 자원이다.재래식 의미의 생산의 요건들,즉 자본·노동·토지는 소멸된 것은 아니고 2차적인 요인으로 밀려났다.이 3대 요건은 지식만 있으면 얻을 수 있고 그것도 쉽게 구할 수 있다.이제 새로운 의미에서의 지식은 사회적·경제적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지식이다. 이같은 지식 적용의 다양성에서 오는 변화를 경영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이제 경영혁명이 지구를 휩쓸고 있다.경영혁명이란 말에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기업경영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이는다른 개념이다.기업경영은 주로 이윤추구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경영혁명은 영리·비영리를 가리지 않는 조직 관리의 방식이다. 이제 지식은 필수불가결의 절대적 자원이 된 반면 종래의 자원이었던 자본·노동·토지 등은 지식에 따라오는 수단으로 전락했다.이 현상은 오늘의 사회를 후기자본주의로 바꾸어 놓았다. 세상은 정치·경제·사회적 역동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인류는 하나의 지식에서 다양한 지식으로 옮겨가고 있다. ○후기자본주의 진입 전통적으로 지식이란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지금은 고도로 전문화된 필요성이 되었다.과거 우리는 『지식 있는 남자 또는 여자』란 말을 하지 않고 대신 『교육받은 사람』이란 말을 해왔다.교육받은 사람은 많은 것에 대해 알고 이해하지만 한가지 일에 전문가는 아니었다.많은 것을 아는 사람보다 한가지 일을 완벽하게 해내어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미국혁명의 해인 1776년 식으로 지식사회의 장래를 예측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그러나 한가지 예측가능한 것은 지식사회는 앞으로 지식의 형태와 내용,그 책임과 의미,그리고 교육받은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따라 도전을 받게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 가뭄과 물 자원/김승 건설기술연 수석연구원(기고)

    가뭄이 심하다.정부는 겨울 가뭄대책 특별상황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신문과 방송은 연일 가뭄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이 가뭄 문제는 일본 고베시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지진과 서유럽에서 발생한 금세기 최악의 홍수와 함께 자연재해의 문제로서 더욱 심각하게 다뤄지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가뭄은 극히 일반적인 자연현상이며 특별한 일은 아니다.비는 많이 올 수도 적게 올 수도 있으며,이러한 것은 우리가 국민학교 시절부터 배워 잘 알고 있다.다만 올해 가뭄 얘기가 심각하게 나오는 것은 그 정도가 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가뭄은 과연 그 정도가 심각한 것인가? 심각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94년도 우리나라 강수량은 전국적으로 평년의 약 70% 수준이다.특히 영호남지역 일부지방은 평년의 50% 미만인 반면 중부지방은 약 80% 수준으로서 지역적인 불균형이 매우 심하다.우리는 가뭄을 얘기할 때 비가 얼마나 내렸는가를 주로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우리는 빗물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빗물중에서 대기중으로 날아가고 난 나머지 물,즉 강물이나 지하수를 사용할 수 있다.그런데 대기중으로 날아가는 증발산량은 강수량과 관련은 있으나 연도에 따라 큰차이가 없다.그러므로 만일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대기중으로 날아가 버린 증발산량이 예년처럼 평년강수량의 45%정도였다면,전국적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물의 양은 70%에서 45%를 제외한 25%가 되며 이것은 평년에 쓸 수 있는 양의 45%에 불과하다. 작년 강수량이 평년의 반에도 못미친 영호남 일부지역에서도 예년과 비슷한 양의 물이 대기중으로 날아갔다면 우리가 쓸 물이 없을 수밖에 없고,사실 이 지역 대부분의 하천에 약간의 물이 흘렀을 뿐이다.이와 같이 비가 평년보다 약간만 적게 와도 우리가 쓸 수 있는 물의 양은 대폭 줄기 때문에 가뭄을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이번 가뭄은 역사적으로도 심한 것인가? 우리나라에는 측우기를 만든 세종대왕의 덕분으로 서울에서 관측된 강수자료가 1770년도부터 있어 과거 2백20년 동안의 강수기록을 비교해 볼 수 있다.한마디로 우리나라 강수량은 연도별로 그 차이가 매우 심하다. 우리나라의 연평균 강수량은 1천2백㎜로 오차가 플러스 마이너스 4백㎜이다.그러나 2백20년이란 장기간의 기록을 분석해 보면 연평균 의미가 무색해질 정도다.연평균 기록의 3분의2는 8백50∼1천5백90㎜ 사이에 있으나 나머지는 이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가뭄과 홍수의 기복이 심하다. 이 기록을 보면 1884년부터 1910년까지 1900년을 전후하여 30년간 극심한 가뭄이 있었다.이기간의 평균강수량은 평년의 70%에 불과했다.이 기간동안 발생한 민란과 정치적 문제는 사실상 가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최근 이번 가뭄과 같이 장마때 비가 적어 가뭄이 들었던 해는 1968년과 1988년을 들 수 있다.1968년은 부분적으로 이와 비슷했었으며,1988년은 12월까지는 비슷했었으나 때아닌 비가 1∼3월중 내려 어느정도 해갈이 되었었다.이번 가뭄이 최근의 기록들과 비교할 때 심한 것은 사실이나,과거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가뭄과 비교한다면 결코 심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이번 가뭄기간은 아직 1년이 채 안되었으며 과거 30년 가까이 지속된 가뭄기록이 엄연히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가뭄은 자연현상일 뿐이다.우리는 이렇게 가뭄이 심할 수 있는 땅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최근 10여년간 가뭄이 없었다고 가뭄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이다.이번 가뭄을 겪으면서 우리 모두가 우리나라의 수자원에 대한 부족함과 변동성을 깨달아 물을 아껴 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우편엽서 모으기/미에 동호인 6만­취미클럽 1백개

    ◎“돈 적게 들여 각국풍물 감상”/6·25참전용사 한국엽서 7천장이나 수집 돈을 별로 들이지 않고 세계 각국의 다양한 풍물을 접하면서 수집벽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우편엽서모으기」가 미국에서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미국 뉴 저지주 모리스타운에 사는 데이비드 코베트(36)는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포함해 모리스타운의 풍경을 담은 엽서를 6백장쯤 갖고 있다.그래서 그는 이제 이 도시에서 1910년대의 모리스타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됐다. 펜실베이니아주 노드에 사는 제임스 루이스 로(65).한국전 참전용사인 그는 한국우편엽서를 7천장이나 수집,한국우편엽서 최대 소장자로 꼽힌다.그는 이것들을 모으는데 3만달러(2천4백만원)쯤 들었다. 로가 모은 것은 현대 서울의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일제 지배하에 만들어진 오래된 것들이었다.한국인은 게으르고 일본인은 문명화된 것으로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다.특히 한국인이 술에 취해 술병을 땅바닥에 내팽개친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묘사한 것도 있다. 해방이후 한국은 일본이발행했던 수십만장의 엽서를 없애 버렸다.그러나 전후세대는 그들의 과거의 일부로서 이러한 옛 우편엽서들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로가 지난91년 한국에서 우편엽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 관람객들로 성황을 이뤘다.로는 다른 종류의 엽서들도 모으고 있으며 「표준 우편엽서 목록」등을 포함,여러권의 우편엽서 관련 서적을 펴낸 저자이기도 하다. 현재 미국에서는 6만명가량이 엽서를 모으고 있고 전국적으로 약1백개의 수집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가장 비싸게 팔린 우편엽서는 「아르 누보」작가 알퐁스 뮈샤가 도안한 것으로 1990년 1만3천5백달러(1천80만원)에 매매됐다. 1900년부터 1920년까지의 미국우편엽서 역사를 저술한 앤드리어스 브라운은 『그 취미의 아름다움은 태양아래 있는 모든 사물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우편엽서 수집을 예찬했다. 우편엽서는 뒷면에 글씨가 씌어 있으면 가치가 깎인다.일부 예외도 있다.마릴린 먼로나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과 같은 이의 서명이 담겨 있는 엽서는 명사들의 친필을 모으는 사람들 덕택에 수천달러씩에 팔리기도 한다. 일부 수집가들은 그들이 모은 엽서를 발행처나 도안가별로,또는 주제나 지역별로 분류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 열성수집가들은 또한 엽서의 사회적·역사적 의미를 탐구한 서적등 우편엽서관련 서적등을 두루 섭렵,우편수집 이론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 허드슨강 되살리기 운동/미국에선:6(녹색환경가꾸자:97)

    ◎철갑상어 50년만에 돌아와/뉴욕시,하수처리장 짓고 선박왕래 규제/72년 수질정화법 제정… 오수방류땐 벌금 최고 8억원 『허드슨 캐비어를 아시나요』 뉴욕의 미식가들은 수년전부터 허드슨강에서 철갑상어(스터전) 잡이가 재개되면서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1백여년전까지 허드슨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강가에 산재하던 철갑상어 요리집에서 스테이크와 캐비어 등의 맛을 감상하던 조상들의 풍류를 즐기게 될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캐비어·스테이크 일품 철갑상어의 알을 소금에 절인 캐비어는 값비싼 술안주로 식탁에 오르며 중앙아시아 카스피해에서 나는 것을 최고로 치나 허드슨강을 중심으로한 북대서양 캐비어의 맛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또 철갑상어 스테이크는 허드슨강 상류의 뉴욕주도인 알바니가 유명해 「알바니 비프」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에는 최고의 요리로 쳤었다. 뉴욕주 중북부의 아디론대크산지에서 발원하여 맨해턴의 대서양 어귀까지 5백여㎞를 흐르는 허드슨강은 수량이 많고 깨끗해 북대서양 철갑상어들의 최고 서식지로 알려져 있었다.따라서 이 일대에서 1800년대 초에는 연 3천t의 철갑상어가 잡힐 정도로 많았으나 점차 줄어들어 1890년대에는 4백30t으로 줄어들더니 그뒤 1920년대 들어서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철갑상어는 67년 멸종동식물로 지정돼 많은 어류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다가 다시 나타난 것은 지난 70년대,사라진지 50여년만의 일이었다.그때부터 20여년동안 중부 허드슨강가의 하베스트로 베이를 중심으로 철갑상어의 증식 노력이 계속됐으며 그 수는 점차 늘어 91년에는 북대서양 어획량 85t 가운데 5분의 1이 허드슨강에서 잡힐 정도가 되었다.과거의 명성에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돌아온 철갑상어의 보호를 위해 주환경국은 지난해부터 1년에 1개월로 조업을 제한하고 있다. ○공원서 폐수 마구버려 허드슨강은 1900년 이후 알바니를 비롯한 상류지방에 조성된 공업지대에서의 폐수유입과 왕래하는 수많은 선박들의 폐유 등으로 하류에서 3백20㎞ 까지가 연방환경보호처(EPA)의 환경보호 특별기금인 슈퍼펀드 투입지역으로 선정될 정도로 수질이 악화돼 있었다.암을 유발하는 유독성 공해물질인 PCB(폴리염화비페닐) 등 화학물질들로 인한 허드슨강의 오염은 70년대 한때 모든 낚시와 수영을 금지시킬 정도까지 심해져 있었다. 더욱이 외부에서 전파된 얼룩조개(Zebra Mussel)가 강어귀에서 급속히 번식,물의 흐름을 방해함은 물론 식물성 플랑크톤의 90% 이상을 먹어치워 강물속의 생태계 파괴를 급속히 진전시켰다.이로 인해 철갑상어 뿐 아니라 청어류와 농어 등 허드슨강의 어족 자원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한편 강물을 정화시키는데는 터널 등의 완공으로 허드슨강을 오가는 선박의 왕래를 줄인 것이 큰 역할을 했다.뉴저지의 호보컨과 맨해턴을 잇는 통근페리는 1908년 연간 2억1백만명이 이용했으나 홀랜드터널 건설 뒤인 67년에는 5백만명으로 크게 줄었다.또 73년 하루평균 1백91척의 선박이 오가던 것이 83년에는 1백72척,93년에는 65척으로 줄어 들었다. 또한 72년에 제정된 수질정화법 역시 허드슨강을 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5년까지 강으로 유입되는 오염물질의 근절을 목표로 한다고 규정한 이 법에 따라 뉴욕시는 건축할 때 하수정화 및 재처리 시설을 의무화했고 86년에는 노스리버에 하수처리장을 건설,1일 2억갤런의 맨해턴 오수가 허드슨강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았다. 이 법은 87년 처벌규정을 강화해 위반하는 개인에게는 25만달러까지의 벌금 혹은 15년 이하의 징역을,단체에게는 1백만달러까지의 벌금을 물릴 수 있도록 했으며 지방정부에 대해서도 감독책임에 따른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게 돼있어 환경에 관한 책임행정을 제도적으로 강화해 놓고 있다. ○수돗물 1년동안 정화 74년에 제정된 식수안전법은 수질정화법과 함께 깨끗한 물을 지탱해가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최대오염지수(MCLS)를 도입,인체에 유해성 여부를 엄격히 가려내 통제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뉴욕시의 수돗물을 마음놓고 마실 수 있다. 뉴욕시의 수돗물이 이같이 좋은 수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취수지에서 끌어온 물을 12개월 동안 중간 저수지에 보관했다가 정화시켜 가정으로 보내기 때문이다.충분한 시간을 가짐으로써 그동안 물의 자체정화와 함께오염물질이 가라앉아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현재 뉴욕시의 수돗물은 1백60㎞ 이상 떨어진 뉴욕주 중서부의 델라웨어강과 캐스킬산지 일대의 호수에서 취수해오고 있다.그러나 허드슨강물이 맑아지면서 수도당국자의 바람은 가까운 허드슨강물을 취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그것은 취수및 송수 비용을 절감시켜 양질의 수돗물을 싼 값에 공급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뉴욕시는 92년부터 신축건물에는 그동안 사용하던 7갤런까지 들어가는 대형변기 대신 1.6갤런이 들어가는 소형으로 사용토록 했다.「1백w 전구를 10시간 켜는데 물 4천갤런」「우유 1갤런 생산에 물 4갤런」「미국신문 하루치 생산에 3억갤런」 등 「깨끗한 물,아껴쓰기」 계몽에 열중하고 있다.
  • 수색철교 철거/내년 4월부터/하부빔 부식 심해

    철도교 형태의 인도교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수색철교가 철거된다. 은평구는 2일 6억2천만원을 들여 국방대학원 입구의 수색철교를 내년 4월부터 단계적으로 철거하기로 했다. 이는 지난 2월말 실시한 대한토목학회의 정밀진단에서 하부빔 부식 등으로 빠른 시일내 철거해야 한다는 결과에 따른 것이다. 수색철교는 너비 8.4m,길이 1백59m의 트러스교로 1900년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된 한강철교의 트러스를 떼어 1965년 은평구 수색동에 이전 설치한 다리이다. 수색철교는 다리연구와 역사적 측면에서 보존가치가 높아 이전,보존하려 했으나 장소가 마땅하지 않은데다 구조물이 오래돼 결국 사라지게 됐다. 이 다리는 경의선을 가로질러 은평구와 마포구를 연결,93년 10월까지 차량과 주민들의 통행이 계속됐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학규장군/서울신문사·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

    ◎광복군 대일후방공작 지휘/조선혁명 이끌고 일군과 2백회 전투/중국거주 동포 3만명 무사귀국도 도와 백파 김학규장군(1900년11월24일∼1967년9월20일)은 평남 평원군 서해면 선산리에서 출생,소년기에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독립사상을 몸에 익히게 됐다. 당시 만주에는 이시영·이회영·이상룡등 많은 애국지사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어 항일의식이 넓게 퍼져 있었다.이들은 만주에서 경학사·신흥강습소·부민단 등 교포교육기관을 세우고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있었다. 선생은 신흥강습소의 후신으로 설치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조직돼 있던 조선의용대 소대장으로 근무를 시작,항일무장활동에 투신했다.선생은 그러나 1920년 일제가 만주일대 독립운동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펼친 경신대학살을 피해 봉천으로 탈출,교포가 운영하는 동명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심어주는 데 힘을 쏟았다.선생은 1929년 학교를 그만두고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예하부대인 조선혁명군에서 총사령 양세봉장군의 참모장으로 일했다. 조선혁명군은 1931년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에 대항해 반일투쟁의 기치를 든 당취오등 중국 의용군과 서로 연계,공동전선을 펼쳐 큰 전공을 쌓았다. 한·중 양국연합군은 1932년4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일제와 2백여차례의 전투를 치렀다.그러나 11월들어 당취오가 일본의 공세에 밀려 군벌 장학량에게로 피신하고 다른 의용군지도자들도 잇따라 잠적함에 따라 조선혁명군도 약세로 돌아서게 됐다. 조선혁명군은 이같이 곤궁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 남경에서 장개석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김구선생과 의열단장 김원봉등의 도움을 얻기로 하고 선생을 대표로 파견했다. 선생은 이에 따라 1934년5월 부인과 함께 농부로 변장하고 남경에 도착,김규식·유동열·김원봉등 독립운동단체의 지도급인사들을 만나 인적·물적 지원문제를 논의했다.이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가진 결과 효율적인 독립운동 수행을 위해서는 이념·노선등에서 제각각인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선결과제라는 데 합의,우선 각 단체를 통합키로 결정했다. 선생은 이같은 남경 현지의 분위기를 조선혁명군본부에 전달,1935년 조선혁명당 대표로 임명돼 남경통일대회에 참가했다.남경통일대회에는 선생의 조선혁명당·의열단·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등 5개 단체가 참여했다.그러나 1937년7월 일제가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중국에 대해 전면전쟁을 일으키고 이 전쟁에서 중국군이 일제에 밀리면서 중국정부마저 중경으로 위치를 옮기게 되자 선생등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한구·장사등지로 이동하게 됐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1940년에 이르러 마침내 통합신당인 한국독립당을 건설,대한민국임시정부 예하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했다.선생은 광복군에서 총사령 겸 참모장인 이범석장군의 참모장대리로 임명돼 적후방공작을 담당하게 됐다. 광복군은 총사령부 예하에 5개지대를 편성,1지대장에 이준식,2지대장에 선생,3지대장에 공진원등을 임명했다.선생은 1941년 다시 3지대장으로 임명돼 1945년 해방까지 대일선전·초모공작·정보수집등의 일을 수행했다. 선생의 지휘 아래 있던 지하공작원들은 중국군과 미첩보기구 OSS에서 교육을 받았다. 선생은 업무수행과정에서 미 14항공대 소속 버치대위와 밀접한 친분관계를 형성,해방직전인 1945년5월에는 14항공대사령관 센 노트장군을 만나 한·미연합작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다.선생은 또 한국내 미군의 상륙작전을 돕기 위해 한국인을 후방침투요원으로 양성,국내진입작전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독립군 20명을 결사대로 선발,미 OSS에서 1개월동안 훈련을 실시하던중 일제의 무조건항복으로 아깝게 참전기회를 잃었다. 선생은 광복이후 중국땅에 살고 있던 3만여명의 동포가 한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운뒤 1948년 느즈막히 귀국,1967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성환선생/서울신문사 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

    ◎임정 무장단체 「광복진선」 결성/중국시찰 가쓰라 일본총리 암살기도/만주서 교포에 문맹퇴치운동도 펼쳐 청사 조성환선생(1875년7월9일∼1948년10월7일)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항일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25세때인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해 군복을 입은 선생은 일부 선배군인들이 주요보직을 차지하기 위해 일제와 야합을 일삼는데 분개,숙군을 외치다 군을 떠나게 됐다. 선생은 『썩은 군대는 나라를 망친다』면서 부패군인의 제거를 주장,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복역 3년만에 특사로 풀려나온뒤 신민회에 가담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다. 1907년 결성된 비밀결사 신민회에는 선생과 같은 무관출신,양기탁등 언론인,이회영등 교육자,민족자본가,안창호등 해외국권회복 운동가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동휘·노백린등 다른 무관학교 출신자 14명과 함께 신민회에 가입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 자주 북간도를 돌아보았으며 1910년 국권침탈을 맞아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믿기시작했다.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는 나철이 창시한 종교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내에서 만주 동삼성으로 자리를 옮겨 포교중이었다. 선생은 1912년 중국 동북지방을 시찰하는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를 암살하려다 사전에 붙잡혀 거제도에서 1년동안 유배생활을 지내기도 했다. 유배를 마친뒤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청소년교육에 몰두하던중 1918년 만주길림에서 「대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가운데 1명으로 참여했다. 다음해인 1919년 국내에서 발발한 3·1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독립운동가 사이에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이에 적극적으로 힘을 쏟았다. 선생은 4월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군무부 총장 이동휘와 함께 군무부차장에 임명됐으며 4개월후 동만주에서 활동중인 중광단에 참가,무장독립운동을 벌였다. 선생은 이와 별도로 대종교도들을 규합,정의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선생은 이어 1920년 청산리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제관동군이 추격에 나서자 이를 피해 노령 이만으로 이동,이곳에서 이청천·홍범도·안무등과 함께 고려의용군을 결성하고 의용군을 모집해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선생은 일제의 꾐에 넘어간 소련이 독립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기습해오자 동료들과 다시 만주로 돌아오게 된다. 북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단체들은 1923년 재통합에 나서 군정서·의군부·혈성단·독립단·광복단·국민회·신민단·대진단·의민단등 9개 단체로 각 단체의 통합을 위한 군사연합회 준비회의를 열었으며 선생은 이 과정에서 연락책을 맡았다. 선생은 이 모임이 진척을 보이지않자 김좌진을 중심으로 창설된 신민회에 참여,중앙집행위원회 외교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군정서를 모체로 하는 신민부는 백두산에서 흑룡강,장춘에서 구참까지를 활동무대로 정하고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한족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펼치면서 민족반역자의 징계,일본기관 습격등을 주임무로 삼았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정의부·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 조직운동등을 통해 흩어져있는 독립운동단체를 통일시키기 위해 수년동안 힘을 쏟았으나 정당의 이합집산이 심해 뚜렷한 진전을 얻지 못했다. 선생은 1938년에 이르러 비로소 뜻이 맞는 이동녕·차이석·엄항섭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외곽무장단체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선생은 같은해 이청천등과 함께 독립군 군사학편찬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임명돼 군사관련 교재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1년뒤 1939년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선생은 1939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3개년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광복군을 양성키로 한데 따라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서안에 파견돼 광복군설립의 기초를 닦았으며 1940년9월17일 마침내 광복군이 창설되자 최고원수부의 판공처장으로 임명됐다. 선생은 42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중국측의 광복군 무력화 움직임을 무산시켰으며 43년에는 국무위원에 올라 대일전쟁을 지도했다. 선생은 45년 들어 임시의정원 제4과 군무·교통위원으로 일하다 8·15해방을 맞아 같은해 12월 동료 임정요인들과 함께 환국했다. 선생은 환국 이후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성균관 부총재등을 지내다 48년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국립오페라단 「토스카」 공연/토스카역 김영애 양예경 더블캐스팅

    국립오페라단은 「토스카」를 7일부터 12일까지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린다. 「토스카」는 프랑스 작가 사르두의 5막짜리 희곡을 개작한 푸치니의 명작 오페라.1900년 1월 로마에서 초연된 이래 아름다운 선율과 극적 구성으로 가장 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오페라 가운데 하나이다. 「토스카」는 1800년쯤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는 로마 총독 스카르피아 남작이 토스카라는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를 수중에 넣으려다 여러 사건이 벌어지고 결국 모두 죽고 만다는 비극적인 내용.카바라도시가 부르는 「오묘한 조화」와 「별은 빛나건만」,토스카의 「사랑에 살고 노래에 살고」 등 주옥같은 아리아가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번 공연의 연출은 신경욱 서울예고교장이 맡아 특유의 짜임새있는 무대를 선보일 예정.또 건강문제로 오랫동안 지휘대를 떠나 있었던 홍연택 코리안심포니 음악감독이 이 무대로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토스카 역에 소프라노 김영애와 양예경,카바라도시 역에 테너 박성원과 최원범,스카르피아 역에 바리톤 김원경과 김범진이 번갈아 나선다. 공연시간은 하오 7시30분.문의는 274­1151.
  • 노들나루/나루터:상(서울 6백년만상:62)

    ◎교통·군사요충지 노량진의 옛이름/한양 입성 길목… 조정선 도승파견 관리/임금행차땐 나룻배 징발 배다리 가설 서울 성동구 광장동에서 영등포구 양화동에 이르는 경강에 있던 10여개의 크고 작은 나룻터 가운데 아직도 나루(진)라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노양진뿐이다. 나루라는 지명에 걸맞게 인근에 노량진수산시장이 있지만 원래의 나루터는 한강시민공원으로 변해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교통·군사의 요지이던 노양진을 옛날에는 노들나루라고 불렀다. 「노들」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해선 두가지 설이 있다.그중 하나는 나루터주변에 백로가 많이 모여들어 「백로가 노닐 던 곳」이라는 뜻으로 노들이라 했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노양이라는 주장이다.또 하나는 「노들강변에 봄버들 휘휘 늘어진…」이라는 노랫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곳에 수양버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수양버들의 버들과 노들이 뭔가 유사성을 가진 듯하지만 전혀 관련이 없고 한강변에는 원래 수양버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후세사람들이 오해를 한 데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지금의 용산구 서부이촌동 강변과 뱃길로 연결된 노들나루.당시 도성을 빠져나온 행인들을 건네주면서 도선료를 받았으며 조정에서는 도승이라는 관리를 파견,나루터를 관리하게 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도승은 도성을 드나드는 사람 가운데 수상한 자를 적발하고 강물의 수위를 측량하는 한편 나룻배의 운항을 감독했다.사공들이 정원과 짐을 초과한다든가 뱃삯을 많이 내는 승객이나 이를 요구하는 비리를 저지른 사공을 적발,곤장을 때리게 했다.그러나 도승들은 뱃사공들과 짜고 웃돈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나루 북쪽강변 즉 용산구 이촌동에는 사형장으로 쓰인 새남터가 있었다.세조의 즉위에 반대한 성삼문등 사육신이 이곳에서 효수됐고 병인양요 때는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사육신이 효수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 강건너 노들나루 언덕에 네개의 봉분이 만들어졌고 박씨지묘·성씨지묘등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성씨만 새겨놓은 비석이 세워졌다.매월당 김시습이 새남터에서시신을 수습,나룻배로 옮겨와 장사지냈다는 이곳이 지난 1977년 서울시에서 새롭게 단장한 사육신의 묘다. 노들나루를 통한 임금의 행차가 빈번해지면서 배다리(주교)가 놓여지기도 했다.배다리는 용산에서 노들나루까지 70여대의 나룻배를 이어 그위에 널빤지를 깔아 만들었다.배다리는 임금일행이 위엄을 갖추고 8열로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고 튼튼했으나 다리를 놓기 위해 경강의 나룻배를 모두 징발,원성을 사기도 했다. 노들나루는 서울에서 지방으로,지방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육운과 조운의 심장이었던 관계로 이곳에 교통수단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철교가 가설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결국 1900년 한강철교가 놓여지고 1905년 경부선,1917년 한강인도교가 건설됨에 따라 나룻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들어 노들나루는 자연스럽게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됐다. 육운의 발달로 나루터의 명성은 사라졌지만 요즘도 노들나루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엔 수산물들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몰려 성시를 이루고 있다.
  • 콜로세움(세계의 명소 걸작 건축감상:2)

    ◎고대로마 검투장… 1900년간 “우뚝”/역동성 넘치는 둘레 6백m 원형의 4층/각층마다 80개의 아케이드 구조물 방사상 배열… 아이디어 돋보여 고대 로마제국(BC 8세기∼AD 9세기)의 유적에서 느끼는 간격은 2천여년에 가까운 시간만이 아니다. 본래의 모습에 흠이 가고 용도도 바뀌고,어떤 곳은 폐허로 변해 옛모습을 되살리기 어렵고 당시의 사회상도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다만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커크 더글러스역)와 바라바의 검투 장면은 그 처절함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훈련소를 방문한 로마장군 부부 앞에서 오락대상으로 펼쳐지는 검투장면,검투사의 분노·저항·죽음 등을 통해 검투를 주목적으로 건설된 콜로세움의 기능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는 서기 64년 폭군 네로황제에 의해 로마 대화재의 방화범으로 몰린 기독교도들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는 참혹한 장면을 볼수 있다. 로마제국은 대중오락을 국가가 제공했다.시민들은 잔인하고피투성이가 되는 경기의 관람을 좋아했으며 수천명이 운집한 원형투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검투사 경기는 가장 인기를 끌었다.검투사들은 관중들의 함성속에 생사를 건 경기를 했다.한 검투사가 쓰러지면 그를 살리느냐 또는 심장을 찌르도록 하느냐는 관중들의 특권이었다.투기마당의 모랫바닥이 피로 범벅되어 질척거리면 새로운 모래로 덮고 경기를 계속했다. 콜로세움은 건축가 라비리우스의 설계로 72년 착공,82년 완성됐으며 공사에는 유대인 포로들이 동원되었다.부지는 네로황제의 황금별궁안 연못터로서 폭군의 불타버린 저택지에 시민오락시설을 건설한 극히 정치적 상징을 띤 곳이었다.콜로세움의 북서방향은 포름로마눔(핵심적 정치·기념건물군과 광장)에 연계되어 캐피톨언덕의 로마의 수호신 「주피터 신전」과 공화정의 상징인 「원로원」과 직선축을 이루고 있다. ○라비리우스 설계 콜로세움은 투기마당(84×52m 타원형)을 4개층에 걸친 경사관람석이 타원형으로 둘러싼 구조물(둘레 6백m 높이 48m)이며 관람석 아래층은 통로공간으로 여러원형투기장에서의 경험을 살려 지어졌다. 구조체는 아치와 볼트로 되어 있는데 양외면에 벽돌을 쌓고 속은 로마식 콘크리트(화산재 콘크리트)로 채움으로써 매우 강하고, 겉에는 대리석으로 장식 효과를 살렸다. 콜로세움의 건축적 의의를 보자면 일단 구조적 안전성에 있다.현대와 같은 철근 콘크리트도 없던 당시 7층 높이로 지어 2천년 가까이를 버틸수 있게 한 기술이 놀랍고 건물 또한 아름답다.건물 외벽의 아치는 진·선·미에 해당하는 도리스식(1층),이오니아식(2층),코린트식(3층) 기둥양식을 적용하고 3세기에는 코린트식 장식벽을 4층에 증축함으로써 수평과 수직의 위계이다.또한 타월형평면으로 이룬 공간의 역동성과 축,명확한 통로공간이 특징이다. 외벽의 아치중 2,3층에는 석조인물상이 배치되고,1층은 독립된 출입구 구실을 하도록 했다.북동(장축) 중앙에 황제의 출입문이 있으며 로열박스는 2층에 남서향으로 배치되었다.4층 외벽면 상단에는 목제 마스트를 꽂아 깃발을 달고 차양을 쳐 한껏 축제기분을 내며 뜨거운 태양을 가리도록 한 것이다. 건물중앙의 투기마당은 4.5m의 담장을 둘러쳐 구경에 열중해 흥분하는 관람자들의 안전을 기했다.마당밑의 지하에는 검투사 대기실·맹수우리·무기고·경비대숙소·공연보조물 운반기계창고·지하도로 등이 있었다. ○관람객 안전 고려 콜로세움 완공후 1백일간의 준공축제 동안에만도 많은 검투사와 5천여마리의 맹수가 살육되었다고 한다.또한 한때는 초기 기독교도들의 처형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검투경기는 407년에 금지되고 맹수와의 싸움도 523년에 금지됨으로써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서로마제국이 게르만민족에게 망하고(476년)로마가 교황국가에 편입된 이후 1천년동안 이 건물은 방치되었다가 15세기부터 3백년간은 건축 석재 채취에 쓰이는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르네상스 시기 로마에 건설된 유수한 건축물인 베네치아궁을 포함한 3개 궁전,성베드로 대성당 신축 등에 쓰인 석재들이 이곳에서 캐내어진 것이다. 그러나 1749년 교황 베네딕트 14세가 콜로세움을 순교자의 피로 성화된 곳으로 선포함으로써 석재 공급 역할은 끝났으며 1800년부터 부분적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콜로세움 주변의 정리는 1933년 파시스트정부가 행한 유명한 로마도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주변의 고적군을 밀어내고 광장과 도로를 넓힘으로써 오늘의 경관을 확보했다. ○현대에도 모델로 현재 건물의 북동벽면은 온전한 상태이나 나머지 벽면은 멸실되고 2개층만 남아있는 곳도 있다.관람석과 투기마당의 바닥슬라브도 벗겨져서 내부의 아치·볼트가 앙상하게 드러난 채로 있다.1973년 이후 부분적인 복원·수리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콜로세움은 경기와 관람을 위한 건물의 한 전형이 되고 있다. 근대 올림픽 시작 이후 세계적으로 번진 스포츠 스타디움의 건설및 대중문화의 상징으로서의 엘리트스포츠와 이의 기업화에 따라 자재와 기술은 새로워져도 건축 원리는 타원형 콜로세움을 되풀이하고 있다. 콜로세움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건축의 사회적 기능을 보여준다. 제1기 로마제국(4세기까지)에서는 검투사 또는 동물 투기장,제2기 중세(4∼14세기) 혼란기에는 지진피해,방치,또는 요새,제3기 르네상스기(15∼17세기)에는 약탈수난,제4기 근대계몽기(19세기)에는 순교지 지정,제5기 단일세계권(20세기후반 이후)에서는 세계적 역사관광 순례지로서 기능이 바뀌어 가고 있다. 1천여년의 망각과 3백여년의 약탈 수난과 도괴의 위기를 거쳐 근세에 들어와서 그 가치가 다시 부활하고 있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철거 운명에 놓인 우리의 조선총독부 청사(현 중앙박물관)에서 상기하는 아픔은 크다.식민 통치의 부끄러운 역사의 잔재라하여 허물어져야 한다면 남아있는 건축이나 역사 유산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콜로세움은 변덕스레 바뀌는 이념과 가치관 때문에 과거의 건축 유산을 부수고 새로 짓기를 반복하는 낭비와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함을 일깨워준다.
  • 불여우 마들렌 르노

    【파리 AP 로이터 연합】 프랑스 연극·영화배우로 반세기동안 프랑스 연극·영화계를 풍미했던 마들렌 르노가 23일 파리의 아메리칸 병원에서 향년 94세로 타계했다. 1백52㎝의 단신인 르노 여사는 지난 1월 영화감독이자 배우였던 남편 장 루이 바로를 잃고 난 이후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 건강이 악화된 채로 살아오던 중 사망 전날 기운을 잃고 쓰러져 파리 교외 뉠리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었다. 1900년 파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교사인 아버지에 의해 일찍 문학에 입문,고교를 졸업할 당시 단편소설과 희곡·소설을 쓰기도 했다.르노는 연극학교를 거쳐 21살에 코미디 프랑세즈에 입단,24년간 활동하면서 라신·몰리에르등 프랑스의 고전레퍼토리를 두루 섭렵하면서 활발한 연기생활을 했다.
  • 「범세계 우편전산망구축」새 전기/만국우편연합 서울총회 성격과 과제

    ◎체신서비스 획기적 개선책 중점논의/「도착국 배달요율」 조정 최대쟁점 부각 우리나라가 1900년에 국제기구로는 처음 가입한 만국우편연합(UPU)은 5년마다 총회를 열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총회가 개최되기는 지난 69년 도쿄(16차)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다. UPU는 1874년 설립된 국제기구로 국가간 우편물 중계의 보장과 요금표준화,세계 단일우편영역 형성,국가간 우편분쟁조정 등이 목적이며 현재 1백89개국이 가입돼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89년 제20차 워싱턴총회에서 실질적 정책결정기관인 집행이사국으로 선출됐고 총회유치를 만장일치로 승인받았다. 특히 이번 서울총회는 급변하는 우편환경에 대응,우편물의 전달과정을 컴퓨터로 확인할 수 있는 범세계우편전산망 구축을 통해 우편서비스의 획기적인 개선책을 논의하는 등 UPU사상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서울총회에서 우선 해결돼야 하는 문제는 「도착국료」의 개선이다.도착국료란 국제통상우편물을 주고받을 때 발송국이 배달국에 지불하는 우편배달 보상금을 말한다. 이 문제는 그동안 우편물 발송량이 많은 선진국과 배달량이 많은 개발도상국 사이에 큰 논쟁거리였다.즉 선진국에서는 배달요율 인하를,개도국은 인상을 요구해 서울총회에서 원만한 조정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서울총회에서는 이밖에 오는 12월 임기가 만료되는 보토드바로스사무총장(69·브라질)의 후임을 선출하게 된다.현재 사무총장 후보로는 레비집행이사회의장(미국)과 아스칸도니 UPU사무차장(스페인)이 등록,각국 대표단을 상대로 득표활동을 벌이고 있다. ◎48개국 장관급이상 참석… 유엔총회 “방불”/9개국어 동시통역… 관광수입 96억 전망/막오른 「서울총회」 이모저모 ○…22일 개막된 UPU서울총회는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유엔산하 국제전문기구 회의인데다 참가자도 1백70여개국 2천여명에 달해 유엔총회를 방불케했다. ○…이번 총회의 공식어는 불어.이를 위해 한국외국어대 부설통역번역센터요원 23명이 동원되고있으며 총회기간중 이들에게 지불되는 경비만도 모두 9천여만원에 이른다.한편 UPU사무국에서도 40여명의 통역요원을 데려와 회의 진행상황을 불어,영어,독일어,스페인어,일본어,중국어,포르투갈어,아랍어,러시아어 등 9개국어로 동시 통역해줌으로써 언어소통을 지원하고 있다. ○…이번 총회에는 차관급 이상 각료만도 96명이 참석.이 가운데 아르메니아와 베베이도스는 부수상급,일본·체코·인도 등 46개국은 우정장관,호주·러시아 등 21개국은 차관급이 참석했으며 미국·영국·스웨덴 등 27개국은 체신공사 사장급들을 대거 파견,국제대회로서의 비중을 알려주고 있다. ○…UPU서울총회 사무국(국장 이교용)은 각국 대표단의 경호를 위해 행사장 주변과 공항,숙소 등에 정사복 경찰 5백여명을 배치했으며 총회장에는 30여명의 무장경찰이 3교대로 근무하는 등 경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또 서울시와 한국전력 등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아 각종 안전사고에 대비중이다. ○…이번 총회개최로 우리나라가 벌어들일 관광수입등은 모두 96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총회사무국의 한 관계자는 『총회예산이 70억원인데 기념우표 판매액만 74억원이 넘어 체신부로서는 4억원이흑자』라며 『또 대표단이 거의 매일 리셉션을 열기 때문에 호텔 등의 수입도 엄청날 것』이라고 기대. ○윤장관 만찬 주재 ○…윤동윤체신부장관은 이날 하오7시30분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UPU대표단을 위한 개회만찬을 주재. 윤장관은 만찬사에서 『시작이 반이듯 서울대회가 성공적 시작임을 확신한다』며 『서울총회가 세계 우편발전과 21세기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인사. 만찬에 이어 펼쳐진 공연에서는 화관무와 부채춤·장고춤·농악 등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개,참석자의 흥을 한껏 돋우기도. 만찬에는 보토드바로스 UPU사무총장을 비롯,권령수총회의장,장경우국회체신과학위원장,민주당 김충현의원,아스칸도니 UPU사무차장등 1천5백여명의 각국 대표단이 참석했다.
  • 전화기 발달 1백년사 한눈에/한국통신,내일부터 용산전화국서 전시회

    ◎세계 첫 전화기 등 155종 선보여/자석·공전·자동식 사진·실물 전시 19세기 후반 전화기가 처음 발명된 이후 지난 1세기동안 제작된 세계의 전화기 1백55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한국통신은 서울 용산전화국에 마련된 사료전시관에서 20일부터 9월30일까지 「세계 전화기 1백년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전시회에는 1876년 벨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전화기를 비롯,1976년 미국이 전화발명 1백주년을 기념해 만든 전화기 등 11개국의 각종 전화기들이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장은 특별전시실과 제2전시실로 구분,특별전시실에서는 187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전화기 1백년사를 연도별 사진으로 소개하고 자석식·공전식·자동식·공중전화기 코너를 각각 마련해 실물도 함께 전시한다. 자석발전기의 전원을 발생시켜 전화를 거는 자석식전화기 코너에는 벨전화기와 1878년 미국서 처음 실용화된 전화기,대형 벽괘형전화기,에펠탑형전화기 등 34점이 전시된다.또 송수화기를 들면 바로 교환원이 연결되는 공전식전화기는 가위형·촛대형·기름통형 전화기와 지난 62년 국내에서 처음 개발된 체신1호 전화기 등 67점이 전시되고,직접 다이얼을 돌려 통화하는 자동식 전화기는 이탈리아 대리석전화기 등 46점이 선 보인다. 제2전시실에는 전기통신 이전의 통신수단인 마패와 봉화군 징발에 관한 문건,1900년대 초기의 통신지도류 및 전보식지,1930년대 전화번호부 등 최근 새로 발굴된 개인소장 통신사료들이 전시된다.
  • 화장실 혁명(외언내언)

    마르크스가 독일에서 추방되어 런던에 망명한 1849년 영국은 빅토리아여왕의 번성기였다.런던과 남서부 무역항에는 식민지에서 실어온 물자가 산같이 쌓이고 신흥공업지 곳곳에서 기계생산이 시작되어 면사와 포목이 대량으로 나왔다.그런데도 이때 함께 영국에 와 생활한 엥겔스는 영국노동자들 생활에 깊이 탄식하며 『그것은 인간의 생활이라고 볼 수 없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영국 산업사회발전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노동자들이 더럽고 좁은 판잣집방에서 몰려살고 화장실과 하수도시설이 안된 동네에서 살며 공장에서 지나치게 혹사당하기 때문에 노동력의 계속 공급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당시 영국사회는 잘사는 사람들만 상하수도와 수세식화장실을 갖추고 서민사회 공장지대는 밀집된 주거에 위생시설이 전혀 안되어 있었다. 영국이 엥겔스의 걱정을 떨치고 산업혁명을 완수,부강국으로 군림하고 오늘 세계제일의 장수국이 된 것은 1900년대초 사회전반의 「위생혁명」을 이룩했기 때문이라고 영국 위생학자들은 분석한다.특히 집이나 공중화장실을 위생적으로 바꾸고 찬물과 함께 뜨거운물 공급을 의무화한 후부터 수인성전염병이 근절되고 식중독과 피부병 같은 질환이 급격히 감소됐다는 통계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선진국의 위생경험과 지식전수로 공중위생도 알만큼 알고 위생시설설치공법도 세계수준에 있다.또 대중이 많이 드나드는 역이나 공원·극장·병원 같은 곳은 거의 수세식화장실로 바꾸었다.그러나 시설이 깨끗이 유지되거나 작동이 제대로 되는 곳이 드물다.뜨거운물은 아예 못쓰게 되어 있다.접객업소 화장실도 제대로 잘된 곳이 드물다. 국무총리자문기구인 국제화추진위원회가 우리의 국제화를 저해하는 문화장벽의 중요저해요인으로 화장실의 불결을 들었다.모두 절감하는 치부다.시·도당국은 화장실위생에 혁명적인 시책을 강구해야 한다.
  • 세계인구/매년 9천4백만명 증가(현장 세계경제)

    ◎식량부족·자원고갈 등 심각/2100년엔 지구촌 1백억명 “빽빽”/90년대도 7억8천만 영양결핍 상태 경제발전에 따른 식량·식수·에너지부족과 환경오염등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과연 무엇일까?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개도국들은 90년대 들어서도 80년대를 웃도는 꾸준한 경제성장을 달성했다.경제성장의 가시적 성과는 산업생산력의 증가뿐만 아니라 의료보호나 교육기회의 증가등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더 뚜렷이 나타났다. 그결과 55개 최빈국들은 지난 25년동안 평균수명은 53세에서 62세로,유아 1천명당 사망률은 1백10명에서 73명,그리고 안전한 식수보급률을 33%에서 68%로 늘리는등 현저한 발전을 성취했다. 그러나 급격한 인구증가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빈곤층의 증가를 가져와 개도국 인구의 30%인 11억여명을 하루 1달러로 연명하는 극빈층으로 전락시켰다.특히 세계인구증가분의 54%를 차지하는 남아시아지역에는 전세계 극빈자의 62%가 밀집,지역경제발전에 무거운 부담이 되고 있다. ○빈곤층 크게 늘어 세계인구는 그동안연간 9천4백만명씩 늘어났다.이같은 증가속도라면 올해 56억6천만명인 인구는 98년 60억을 넘고 2025년 85억,2100년엔 1백억명에 이르게 된다.물론 2020년이후 8천4백만명 이하로 늘어난다는 조건하에서만 이렇다. 지역별로는 아프리카가 식량부족과 에이즈,내전에도 불구하고 현재 세계최대인 연평균 2.8%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1.8%,북미 1.1%,구소련 0.5%,유럽 0.3%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치다.이런 추세라면 50년대 아시아(55%),유럽(16%),아프리카(9%) 순서의 인구분포는 2015년에는 아프리카(19%)와 유럽(6%)은 역전될 것이 분명하다. 이같은 과도한 인구는 각종 사회간접자본과 환경이 떠받쳐주지 못하면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특히 사막화로 인해 농작물수확량이 급감하고 있는 아프리카는 내전과 에이즈등 질병으로 삼중고를 당하게됐다.지난 10년동안 세계 식량생산은 인구증가를 훨씬 앞지르는 24% 늘어났지만 아프리카는 예외다.인구는 이 기간 34% 늘어난 반면 식량생산은 실제로 5% 줄어들어 아프리카인을 기아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분쟁도 잇달아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94년 현재 20개국에서 식량부족현상이 일어나 개도국의 7억8천여만명이 영양결핍상태에 놓여있다.물론 식량생산 공급능력은 충분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지만 이지역의 빈곤은 곧바로 식량부족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과도한 인구증가는 지구환경에 치명타를 가한다.적절한 기술과 인구 그리고 자원소비 수준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제어할 수 있지만 그렇지못할 경우 자원의 소모는 극에 달해 열대우림파괴,토질악화 그리고 지구온난화등 전지구적인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특히 열대우림의 파괴는 심각한 수준이다.브라질,미얀마,인도의 열대우림은 80년대 평균 1천7백만㏊씩 감소했다.그 결과 1900년 1천6백만㎦이던 열대우림은 90년 8백만㎦로 절반으로 줄었다.삼림감소는 토질악화와 수량감소,나아가서 사막화에 이은 농산물 생산감소로 직결된다. 특히 전세계 물 사용량의 69%를 차지하는 농업은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90년 관개농업지역은 2억5천만㏊정도로 전세계 농산물 수확량의 3분의 1을 담당한다.물론 50∼90년 사이 관개농업지역은 2배로 늘어났다.그러나 농업용수등 각종 물공급능력은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한계에 도달했다는 지적이다.이에 따라 국지적 물분쟁도 심심찮게 잦아 2천여개의 물조약이 체결돼 있다. 인구증가가 안고 있는 문제중의 하나는 에이즈등 질병이다.에이즈는 92년 2백70만명이 발병,90%이상이 사망했다.HIV는 감염자가 훨씬 많은 1천4백만∼1천8백만명에 이른다. ○사회문제 많아져 인구증가와 개발은 21세기의 부양능력의 상호관계를 결정한다.인구증가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는 이제 일개 국가의 노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지구온난화등이 원인제공지와 상관없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것이 그 예다.국가간 국제적 공조체제를 통해서 저출산을 유도해야 한다.특히 아시아등 개도국 가임여성의 임신과 출산율을 낮춰야만 인구의 도시집중등의 문제를 막고 경제성장의 성과가 의료혜택,교육및 취업기회 증가등으로 가시화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덕수궁/궁궐:9(서울 6백년만상:46)

    ◎함녕전 화재후 1906년 중건/고종,수옥헌을 거처로… 을사조약 체결도/석조전은 최초 서양식건물… 9년걸려 지어 덕수궁은 궁의 이름을 고종의 존호를 따온데서 알 수있듯이 고종과는 떼 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종41년(1904년) 4월14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불이나 대한문과 대분의 전각이 불에 탔다.중신들은 고종에게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옮길 것을 권했으나 경복궁의 민비 참변사건과 창덕궁에서 갑신정변·임오군란의 쓰라린 경험때문에 옮기기를 꺼려했다.이에 고종은 화마를 면한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기고 중건에 착공,2년뒤 완공을 보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든 전각들은 이때 지어진 것들이다. 고종이 거처를 옮긴 수옥헌에서 이듬해 11월18일 이등박문을 앞세운 일제의 강압과 이완용의 매국행위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다.또 고종이 헤이그밀사사건을 계획했던 곳이기도 하다.결국 이 사건으로 고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왕위를 이어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길때까지 거처로 삼았다.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나 수옥헌은 정동교회를 조금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져 들어가 미대사관저와 인접한 곳에 있었다. 영국의 건축가 하딩이 설계,1900년에 공사에 착공한뒤 9년만에 완공한 석조전은 두개의 동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우리 나라 최최의 서양식 건물로 화강암으로 쌓아 올린 3층건물이다.임금의 거처로 쓰일 예정이었으나 완공을 못보고 국운이 기울어 빛을 보지 못했다. 석조전은 광복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후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 지금은 궁중유물 전시관과 문화재관리국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덕수궁의 또하나의 현대식 유물은 석조전 앞의 청동 분수대.1937년 만들어진 이 분수대는 2차대전당시 일제에 의해 전시물자로 철거돼 콘크리트로 대체됐다가 지난 84년 복원됐다.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여느 궁궐과 마찬가지로 김천교라는 돌다리가 놓여있다.이 돌다리는 일제가 자동차 통행을 위해 흙으로 덮었두었으나 광복후 40년이 지나도록 존재자체를 모르다가 지난 86년에 비로소 복원되는 말못할 사연을 안고 있다. 일제에 의해축소되고 훼손된 덕수궁은 1960년대 들어 또한번 시련을 겪었다.태평로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담장을 허물어 대한문에서부터 태평로 파출소까지 철책을 두른 것이다. 이때 오늘날 시민들의 만남의 광장으로 애용되고 있는 대한문과 문앞을 지키고 있는 두마리의 석수도 태평로의 도로가 넓혀진 만큼 뒤로 물러나는 설움을 받았다.이것도 모자라 서울시는 덕수궁을 시민공원으로 만든다는 발상아래 스케이트장을 만들고 상점과 음식점을 지었다.담장도 뒤로 물러 앉은 상태로 복원됐으나 궁궐내부는 옛모습을 많이 잃었다. 그러나 옛것과 새로운 것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덕수궁안에 들어서면 언제나 유유자적했던 선조들의 정취를 맛볼 수 있어 좋다. 비록 옛 모습이 훼손되기는 했어도 서울의 궁궐 가운데 가장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덕수궁의 규모는 1만8천여평.크기는 작지만 각박한 현실에 쫓겨 사는 서울시민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휴식공간으로 서울의 새로운 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 “구한말∼일제 농촌 변화과정 생생”

    ◎구례 지주 유씨가의 일기 농촌경제연서 분석/할아버지와 손자가 85년간 쓴 농업일기/당시 작목구조·농사방식 연구에 큰 도움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르는 기간 우리 농촌경제의 변동과정이 할아버지와 손자에 걸쳐 쓰여진 85년 동안의 일기를 통해 연구됐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두순 부연구위원과 박석두 책임연구원은 「한말·일제하 양반 소지주가의 농업경영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의 지주인 유씨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일기와 각종 문서를 이용해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이다. 연구에 이용된 일기는 유제양(1846∼1922년)이 1851년부터 1922년까지 모두 72년 동안 쓴 「시언」과 그의 손자인 유형업(1886∼1944년)이 할아버지의 권유로 13살 때부터 1936년까지 쓴 「기어」.또 금전출납부인 「당용록」과 연도별 소작료 수취부인 「추수책」,노동력 사역부인 「전가일기」 및 「농가일기」,식량소비를 기재한 「양미책」 등 농가경영요소가 망라된 가전문서들이 분석됐다. 연구에 따르면 유씨가는 17 93년쯤 논·밭을 합쳐 8백83두락(22만3천4백여평)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1백년뒤에는 분할상속과 매각 등으로 1백62두락(2만5천평) 정도로 줄어들었다.이후 19 00년에는 1백두 미만으로 축소됐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친족의 방탕이나 횡령 질병등으로 인한 매각 때문이었다. 당시는 조선이 일제의 강제농정에 휩쓸린 시기였다.일제는 조선을 일본이 필요로 하는 식량 및 원료농산물의 생산기지로 만들려 농업 방식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했다.이에따라 유씨가의 작목구조와 농사방식도 크게 바뀌었다.「군청에서 양뽕나무 150그루를 보내 1백10그루를 뒷 채소밭에 심었다」(1911년 3월25일)는 일기에서 보듯 일본산 뽕나무로 종자를 개량했고 이어 재래면의 재배를 금지함에 따라 면화재배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조선총독부는 일본 쌀시장에서 인기높은 품종을 강압적으로 보급했다.미곡증산사업의 목표가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신품종이라는 미모의 종자가 여러 군데에서 얼어 죽었다」(1931년)는 기록처럼 일본품종은병해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재래종보다 휠씬 심했다. 농사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씨가가 화학비료를 처음 구입한 것은 1930년이다.일본 괭이와 왜낫을 산 것은 1912년이었으며 1916년에는 탈곡기구를 샀다.또 1937년부터 벼를 도정할 때는 물레방아 대신 동력 정미기를 썼다. 유씨가는 한해 2백∼4백50명의 노동력을 외부에서 조달했다.노동력 조달 방법은 호역와 매고·머슴의 세가지로 크게 구분됐다.호역은 농토를 빌려주고 지대로 춘추 각 4일의 노동을 제공받는 것이며 매고는 호역으로 충당되지 못한 노동력을 현금 또는 현물을 주고 쓰는 것이다.유씨가는 1900년대 초에는 호역으로 대부분의 농사일을 하고 부족노동력을 매고로 보충했으나 1920년쯤에는 소작으로 전환했다. 농촌경제연구원은 이 연구에 쓰여진 유씨가의 문서를 이용해 앞으로 「류씨가의 수입지출구조 및 생활실태」「토지소유 및 지세의 변화에 관한 연구」「오미동의 사회구조와 사회조직」 등을 연차적으로 연구해 갈 계획이다.
  • 노동조합(외언내언)

    『과연 노동조합은 살아 남을 것인가?』 전국을 뒤흔드는 파업열기로 뜨거운 한국의 노동조합에 이 질문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그러나 지난 80년대 이미 선진국의 환경무역장벽,즉 그린라운드를 제창한 바 있는 미국의 「경영학의 시조」 피터 드러커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20세기 사회사의 가장 극적인 변화는 공업노동자의 흥성과 쇠퇴이다.1900년만 해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합법적인 존재였던 노동조합이 1950년대에는 서구 선진국의 중심적인 정치세력이 되어 영국등에서는 정권을 잡기에 이르렀으나 1970년대 이후 급속히 그 영향력과 지위가 저하되고 있는 중이다. 대대적인 파업을 통해 보수당을 정권의 자리에서 끌어내렸던 영국의 탄광조합은 지난 80년대 마거릿 대처 보수당 당수총리에 의해 무력화되었고 그 이후 오늘까지 영국의 노동조합은 4분의 1의 조합원을 잃었다.같은 기간 미국의 노동조합도 5분의 2의 조합원을 잃었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조합원수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노동조합이 쇠퇴하는 이유를 드러커는 3가지로 꼽는다.첫째 선진국에서는 조합이 요구해온 것이 거의 법제화되어 노동조합이 조합원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사라졌으며,둘째 노동조합 자체가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진 횡포스러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데다 조합간부의 질이 저하되고 있고,셋째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로 노동력의 중심이 제조업의 공업노동자로부터 지식노동자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 한국의 노사관계는 선진국에 비해 50∼60년의 격차를 보인다는 주장도 있으나 노동조합의 퇴조현상은 선진국과 비슷한 상황.6·29선언 이후 3년동안 3배로 급증했던 노동조합이 89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하여 92년말에는 6·29선언 이전보다 그 조직률(16.4%)이 떨어졌다.강경 일변도의 파업투쟁은 선진국에서 처럼 노동조합의 입지 자체를 위험하게 만든다는 점을 우리 노조 지도자들도 알아야할 것이다.
  • 독일축구(외언내언)

    세계축구를 경기운영면에서 보면 유럽식축구와 남미식축구로 나눌 수 있다.유럽식이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하는 힘의 축구인데 반해 남미식은 현란한 개인기를 바탕으로 하는 기술의 축구.브라질이 남미축구의 대명사라면 독일은 유럽축구의 대표주자다. 일반적으로 남미선수들은 몸이 부드럽고 리듬감각이 뛰어나 기술축구를 선호하고 있는데 비해 유럽선수들은 강인한 체력과 안정된 팀워크로 전차처럼 밀어붙이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그래서 전형적인 유럽축구를 구사하는 독일대표팀을 「전차군단」이라고 부른다. 60년대 독일축구의 스타 우베젤레는 『우리는 축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한다.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28일 아침 한국과 맞붙게 되는 독일은 54년 스위스대회,74년 서독대회,90년 이탈리아대회 우승에 이어 사상최초의 4번째 우승을 노리고 있을뿐 아니라 대회2연패를 넘보고 있는 강력한 우승후보. 월드컵대회에서 독일처럼 화려한 전적을 쌓은 팀도 드물다.우승 3회,준우승 3회,3위 2회가 그것을 말해준다.월드컵대회 통산전적은 40승16무14패.독일축구의 저변은 엄청나다.1900년 축구협회를 창설한 독일은 분데스리가에 38개(1부 18개,2부 20개)의 프로축구팀이 있고 아마추어클럽은 2만1천여개나 된다.등록된 선수만도 4백70만명. 객관적인 여건이나 전력으로는 한국이 뛰어넘기 힘든 높은 벽이다.그러나 공은 둥글다.우리라고 파란과 이변을 연출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더구나 이번 독일대표팀은 「손발이 안맞고 노쇠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전차군단임에는 틀림없지만 첨단장비가 장착된 최신의 전차군단이 아니라 낡은 전차군단 이라는 것이 볼리비아전과 스페인전에서 증명됐다. 한국선수들이 특유의 투혼을 발휘한다면 독일을 물리칠 수 있다.문제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다.선전분투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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