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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소리축음기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6)

    ◎영혼을 두드렸던 ‘소리틀’ 오롯이/뮤직박스·축음기·첨단오디오/세월 들려주는 3,000점 망라/소리의 역사 따라 관람 가능/에디슨관 美보다 앞선 소장품 “십년 감수했다”라는 말이 있다.흔히 쓰면서도 이 말이 축음기와 관련됐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구한말 축음기가 이 땅에 들어온지 얼마 안됐을 때의 일이었다.일반인들은 대부분 소문으로만 그 신기한 ‘소리단지’를 들어 알고 있을 뿐이었다.황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고종이 당대의 유명한 광대 朴春載를 궁 안으로 불러 들였다. 박씨가 노래 한마디를 끝내고 축음기를 틀자 박씨의 노래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다.축음기 소리에 놀란 고종이 불쑥 꺼낸 말 한마디.“춘재,네 명이 10년은 감했구나”.축음기가 사람의 정기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시대의 한과 삶의 고달픔을 달래주던 추억의 축음기부터 첨단 오디오 시스템까지­.시공을 초월해 소리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이색 박물관이 있다.강원도 강릉시 송정동 216의 4 ‘참소리축음기오디오박물관’(관장 孫成木·55).1877년 에디슨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축음기부터 최신 음향기기까지 소리세계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아파트 숲 속에 덩그마니 자리잡아 조금은 삭막한 분위기지만 알맹이로는 세계 최고다. 200년전의 뮤직박스부터 축음기를 거쳐 최첨단 오디오세트로 안내하는 이 박물관의 소리여행은 흥미진진하다.규모는 비록 3층짜리 본 건물과 에디슨관·뮤직박스관 등 단층 건물 2동이 전부지만 담겨진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축음기만 해도 1877년∼1990년대 초기 왁스 실린더 300점,1890년∼1915년 원반 축음기 800점,1920년∼1940년대 중반의 포터블 축음기 200점 등 1,300점. 여기에 에디슨 발명품 500점과 라디오·텔레비전·전축·현대 오디오·음반·서적과 자료들이 곳곳에 진열돼 있어 전문가들도 쉽게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1901년 스페인에서 제작된 수공예 캐비넷형 축음기부터 1925년 영국산 최초의 리모트콘트롤형 축음기인 오토매틱 그래머혼,1930년대 미국산 웨스턴 일렉트릭 보이스 등 모두 내노라는 명품들.1800년도 외장형 나팔 축음기부터 1924년∼1940년 내장형 축음기,1925년형 최초의 텔레비전,1930년∼1940년대의 텔레비전·라디오를 샅샅히 보고나면 축음기 역사의 윤곽이 잡힌다. 에디슨관은 40여종 400점에 달하는 에디슨 발명품만 모아놓은 곳.최초의 벽부착용 스탠드형 전구와 주식시세표시기·영사기 등이 서로 최고를 자랑하듯 자리잡고 있다.최초의 축음기인 틴 호일과 클래스엠,엠베롤라,치펀데일은 금방이라도 에디슨의 탄성을 쏟아낼 것만 같다.현재 미국내에 에디슨 관련 전시관이 세 곳 있지만 에디슨의 명성에 비하면 부실한 편.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내 에디슨관과 디트로이트 포드자동차사내 에디슨관,뉴저지주 멜로파크 에디슨연구소의 소장품을 모두 합해도 여기에 비하면 턱도 없다는게 손관장의 귀띔이다. 뮤직박스는 1796년부터 1800년대까지 사람들의 귀와 혼을 자극하던 소리기기.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하면서부터 사라져 갔지만 옛 사람들의 음악세계에선 빼놓을 수 없는 환상적인 소리단지다.이처럼 축음기에 앞서 명성을 떨치던 갖가지 뮤직박스들도 이곳의 자랑거리다.원통형과 원반형,플레이어 피아노,오케스트리온,노래하는 새,움직이는 인형이 있는 뮤직박스,의자 뮤직박스들이 200년전 소리의 세계로 시계추를 돌리고 있다. 박물관 소장품중엔 세계적인 희귀품이 상당수.이 가운데 아메리칸 포노그래프(1900년 미국산)는 아르헨티나의 한 경매에서 구입한 것.수제품으로 만들어진 6대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또 축음기의 여왕으로 불리는 멀티폰(1908년 미국산)도 미국 샌프란시스코 경매장에서 구입한 것으로 현존하는 2대중 한대다. 그런가 하면 1층에 놓여있는 웨스턴 일렉트릭 보이스도 1928년∼35년 당시 음악 애호가들이 소리를 듣는 것은 물론 눈으로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일만큼 귀중한 것이라고 한다. ◎孫成木 관장/‘세계 유일’ 많지만 ‘내것’이란 집착 없어/남극 포함 60개국 찾아 강도 납치 사기 수난도/“공간 넓혔으면” 아쉬움 孫成木 관장(55)은 중학교 2년때 작은 아버지의 망가진 축음기를 고친 것을 계기로 축음기를 모으기 시작,박물관까지 만들어낸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축음기 전문가다.축음기를 찾아 돌아다닌 나라만도 60개국.남·북극까지도 다녀왔다고 한다. “한 해 평균 7∼9회,매년 7∼8개월 정도씩 외국에 살면서 소문난 축음기 경매나 소장가들은 빼놓지 않고 찾아 다녔습니다.” 수집 초기엔 가짜를 진품처럼 속은 적도 많고 오지의 소장자를 만나러 가던중 강도를 만나거나 납치당하기도 수십번.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것이 모두 3,000점.이중엔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을 훨씬 웃도는 축음기도 들어 있다. “세계에서 하나 뿐인 축음기 등 희귀품이 많지만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습니다.저는 단지 관리·보관 책임을 질 뿐입니다”.초등학생부터 노인들까지 찾아드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지만 가장 반가운 손님은 역시 학생들.단체 학생 방문객들이 찾아올 때면 직접 강의도 한다.이젠 국제적으로도 조금은 알려져 학위논문 자료수집차 찾는 외국인 방문객이 있을 정도다.지난 해 방문했던 張庭延 주한 중국대사는 에디슨 발명품과 중국 문화재 교환전시를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최근 孫씨의가장 큰 걱정은 시설확대문제.찾아드는 손님이 늘고 있고 무엇보다도 귀한 소장품을 모두 보여주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고 한다.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후세에 전해주는 게 제 소망입니다.부지만 확보되면 건물과 전시 등은 쉽게 해결될 수 있을텐데…” ◎참소리박물관 가는 길 강릉시내에서 20분∼25분 정도 소요된다.시내에서 송정·안목 방면 버스편을 이용하면 20분∼25분 정도 거리.터미널에서 48번·21번·19­1번 노선버스가 운행하고 있고 터미널과 강릉공항·오죽헌·경포에서 택시로 각각 20분 정도면 충분하다. 연중무휴로 문을 열고 있고 개관시간은 상오 9시부터 하오 5시까지.관람시간은 1시간30분 정도.관람료는 어른 3,500원,중·고교생 2,500원,초등학생 1,500원,6세 미만은 무료,30인이상 단체는 어른이 2,500원,중·고교생 1,500원. 0391)652­2500.
  • 3·1운동 기념탑/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서울의 안산(案山)인 남산(南山)은 예부터 목멱산(木覓山),또는 인경산(引慶山)이라 일컬어지며 서울 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오고 있는 명산이다. 산세가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운 기품을 갖추고 있어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이곳에서 사랑을 나누었으며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도 이 곳에 올라 서울의 산세와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보며 감회에 잠기곤 한다.서울시민의 허파역할도 하는 남산이야말로 세계 어느 나라 수도를 가봐도 찾지 못하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 남산 동쪽 기슭에는 일제(日帝)에 항거하다 숨진 군인들의 넋을 기리는 장충단(奬忠壇)이 있던 장충단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조선왕조 말엽이던 1895년 8월 20일 새벽,흥선 대원군을 앞세운 한 떼의 일본인 자객과 난군들은 순식간에 광화문 문짝을 밀어제치고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건청궁(乾淸宮)까지 침입,閔왕후를 찾아내 끝내 살해하고 말았다.이런 치욕의 난장판 속에 저마다 제 목숨만 살겠다고 달아나는 판에 당당히 일본인들에 맞서 싸우며 본분을 다한 군인들이 있었다.洪啓薰·廉道希·李暻鎬·金鴻濟·李學承·李鍾九·李耕稙·林最洙 등이 그들이다. 장충단은 바로 1900년 9월 19일,어명에 따라 이들을 추모하고 제향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충정공 閔泳煥이 쓴 비문에는 ‘그 서릿발,눈보라에도 늠름하고 당당했던 뛰어난 절개는 해와 별 같다’고 했다. 이 비문을 짓고 쓴 충정공도 불과 5년 후인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2일 후 자결하고 말았다.그리고 5년 후 한일합방이 되자 장충단은 폐사(廢祀)되고 공원으로 꾸며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국립극장 맞은 편에 3·1독립운동 기념탑이 건립된다고 한다.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한민족의 의기와 절개가 90여년만에 남산 동쪽 기슭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이는 서울시가 최근 공원위원회를 열어 3·1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이 곳에 짓기로 한 284평 규모의 소공원 건립안을 허용함으로써 가능하게 됐다.이 공원안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기리기 위한 19.19m의 기념탑이 세워진다.추진위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오는 8월 15일 기공식을 갖고 3·1절 80주년에 되는 내년 3월 1일 준공한다는 계획이다.처음 세워지는 3·1운동 기념탑이 일제에 짓밟히고 찢긴 한(恨)서린 땅에 세워지는 의미를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겠다.
  • ‘건강한 다리’/하진규 건설기술연구원장(굄돌)

    우리나라의 다리는 97년말 현재 1만4,939개로 그 길이만도 932㎞에 달하며 대부분(98%)이 정부수립 이후 건설된 것이다.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 시대에 지은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이다.차량이 통과하는 현대식 다리는 1900년에 완공한 한강철교이다.이를 효시로 현재 서울시에만 20개의 다리가 한강을 가로질러 교통량이 엄청나게 는 것을 실감한다.건설기술의 발달과 함께 다리의 종류와 공법도 다양해졌다.또 물동량 급증으로 대형 차량의 통행이 많아지면서 다리가 노후화하는 속도도 그만큼 빨라져 철저한 유지·보수가 뒤따르지 않으면 안심하고 건너다닐 수 없게 된다. 평소 건강관리에 힘쓴 사람은 건강하게 오래 살듯이 다리도 마찬가지다.사람이나 동물은 아프면 말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지만 다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질병을 진단하기가 더 어렵다.뿐만 아니라 치료법이 가지각색이어서 치료하기가 새 다리를 건설하는 것보다 훨신 더 어렵다.건강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몸에 조금 이상이 있어 진찰을 받은 뒤 불치병으로 판정받는 경우를 우리는종종 본다.그래서 1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진단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 나이가 많거나 몸이 약한 사람은 수시로 건강진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같은 맥락에서 정부는 구조물의 붕괴사고를 방지하고자 95년 시설물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구조물의 규모별로 안전점검 주기와 방법을 규제하며,240여가지의 점검목록을 만들어 전산으로 교량을 관리한다.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면 안전진단과 유지관리에 관한 기술개발 투자를 더 늘려야 한다.그래서 모든 구조물의 안전진단과 보수·보강을 제때 한다면 구조물의 수명을 연장할 뿐만 아니라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사고도 막을 수 있으며 자랑스런 건설문화 유산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 무분별한 日語 사용/홍명호 고려대 가정의학과 교수(굄돌)

    ‘환경 호르몬’이라는 새로운 말이 신문에 등장했다.‘폴리프로필렌이나 폴리스틸렌 같은 컵라면 용기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공해물질이 남성의 정자수를 줄인다’‘미국에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태어난다’‘물고기 등에서는 수컷이 암컷으로 변한다’등등의 변화를 초래했는데 이것들이 ‘환경호르몬’탓이라는 것이다. 호르몬이란 신체의 내분비샘이나 장기에서 만들어지는 화학물질로서 몸 안의 다른 부위에 있는 세포군이나 장기의 활동을 시작하게도 하고 조절도 하는 물질을 말한다.생성된 호르몬은 혈액을 통하여 장기로 전달되며 시상하부­뇌하수체­내분비샘을 한 축으로 하여 생체 내의 정보를 옮긴다.어느 한군데가 지나치면 견제하고 모자라면 촉진하는 되먹임으로 상호조절되는 특성이 있어 생체의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여 생명을 지키는 데 기여한다. 1900년대초에 나온 호르몬이라는 말이 1900년대가 가기 전에 생체 내부에서부터 갑자기 세상으로 튀어나와 ‘환경 호르몬’이라는 끔찍한 모습으로 변형된 것이다. 생명을 유지하려고 생체에서 생긴 것도 아니요,스스로 많고적음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해를 끼치고 되먹임의 조정도 없는 일방적인 공해물질의 독소를 ‘환경 호르몬’이라고 쓰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종전에도 ‘성인병’‘과로사’등 일본에서 생산된 의학용어들을 거리낌없이 들여와서 무분별하게 쓰고 있다.성인병이라는 말은 ‘성인병 검진’‘성인병협회’로 쓰이고 심지어는 ‘어린이 성인병’이라는 기묘한 말까지 사용한다.법원에서조차도 ‘과로사’라는 표현을 쓰는 모양이다. ‘환경 호르몬’이라는 것은 내분비를 교란시키고,부정확한 말은 우리의 무엇을 교란시킬까?일본은 새로운 말을 잘도 만들어낸다.
  • 밀레니엄버그 해결에 내년말까지 76억 투입

    ◎정부 中企지원책도 마련 정부는 내년 말까지 ‘밀레니엄 버그’를 해결하기 위해 총 76억원을 투입키로 했다. 특히 중소기업을 위해서는 중소기업청과 정보통신부가 소프트웨어 업체가 계약을 맺고 문제를 해결하면 자금을 지급하는 제3자 계약방식을 체결키로 했다. 밀레니엄 버그는 컴퓨터가 연도의 마지막 두자리만을 인식하도록 돼 있어 2000년부터 컴퓨터가 1900년과 2000년을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다. 정부는 16일 상오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경제차관 조찬간담회를 열어 이같이 결정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무디스 및 스탠더드 앤 푸어스(S&P) 등 신용평가기관이 하반기부터 국내 금융기관의 밀레니엄 버그 대응상황을 신용평가에 반영키로 함에 따라 이를 적극 독려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에 앞서 지난 3월 ‘컴퓨터 2000년 문제 종합대책’을 발표,공공 부문은 99년 상반기까지 문제해결을 마치고 민간부문은 기업이 자율적으로 추진하되 대응능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에는 기술,인력 및 비용을 정부가 지원키로 했었다. 이날경제차관간담회에서 산업자원부는 엔저(低)로 수출이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고 수입업체 위주로 짜여진 무역금융 지원을 수출업체로 전환하는등의 다각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공정위가 내놓은 ‘지주회사 제한제도 개선방안’과 관련,구조조정 차원에서 지주회사 제한요건을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공정위는 지주회사가 순(純)자산을 초과하는 부채를 보유하거나 자회사 주식을 50%미만 소유하는 행위,1개 지주회사가 금융자회사 및 비금융자회사를 동시에 소유하는 행위 등을 금지하는 내용의 개선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 中企/밀레니엄 버그 “우리는 잘몰라”/중기청 조사

    ◎8%만 해결… 34% 무대책 중소기업의 셋 중 하나는 밀레니엄 버그를 아예 모르거나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밀레니엄 버그란 컴퓨터가 2000년을 1900년과 혼동해 일으키는 연산 오류 사고.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산업계 역시 이를 개선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혼란이 일어난다. 중소기업청이 최근 전국 170개 중소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밀레니엄 버그를 해결한 업체는 8%에 불과했다.전혀 검토하지 않은 업체가 34%,대책을 세우고 있는 업체가 33%로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대응이 매우 뒤늦은 것으로 조사됐다.특히 PC만 갖고 있는 소규모 업체는 무려 50%가,중형시스템보유업체는 17%가 무대책이었다.중소기업청은 이와 관련,26일 吳盈敎 차장과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등 관련부처 국장이 참석한 가운데 중소기업 지원대책협의회를 열고 내년까지 1,0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중소기업의 밀레니엄 버그를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올해 안에 100개 업체에 대해 기술지도도 하기로 했다.
  • 美 밀레니엄 버그 訟社 봇물

    【워싱턴 연합】 이른바 ‘밀레니엄 버그’로 불리는 컴퓨터의 2000년 연도 인식착오와 관련,손해배상을 둘러싼 소송사태가 홍수를 이룰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가 3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컴퓨터가 2000년을 1900년으로 잘못 읽어 발생하는 밀레니엄 버그의 피해와 관련,미국내에서는 이미 본격적인 송사가 시작됐다고 밝혔다. 디트로이트 부근의 한 식품점은 금전 등록기가 2000년에 기한이 만료되는 크레딧 카드를 읽어내지 못하자 등록기를 생산한 제조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오하이오주에서는 한 컴퓨터 회사가 회계 소프트웨어를 제작한 업체를 고소했다. 현재로서는 밀레니엄 버그를 해결하기 위해 추가로 드는 비용만 약 3천억∼6천억달러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계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금액과 변호사 비용이 1조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 靜觀軒/李世基 社賓 논설위원(外言內言)

    덕수궁에 들어가면 지금의 덕흥전 후원에 자리잡은 정관헌(靜觀軒)은 구리빛으로 고색이 창연하다.한눈에 보아도 다른 궁중건물과는 달리 녹색 단청이며 난간의 문양 등이 이색적인 정취를 자아낸다.이 건물은 중앙의 석조전(石造殿)보다 10년 앞선 것으로 고종 4년(1900년)에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하여 완공한 것이다. 정면의 지붕은 일본풍에다 둥근 창을 뚫었고 철제기둥과 난간의 문양도 사슴 소나무 박쥐 당초문이 투각되어 한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고는 하지만 철제가 주는 차가운 이미지와 기둥머리의 로마네스크장식,대리석 바닥과 돌벽 때문에 이질적인 서양풍이 강하다.한때는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고 고종의 어진(御眞),순종의 예진(睿眞)을 모시기도 했으나 주로 고종이 연유처(宴遊處)로 사용하던 곳이다.모란꽃이 흐드러지게 핀 후미진 전각에 앉아 왕이 차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면서 나라 빼앗긴 설움을 정관(靜觀)으로 다스렸리라는 짐작이다. 문화재 관리국은 최근 정관헌의 보수공사에 착수,5월 중순까지 단청과 내부 도색을 끝내고 빠르면 7월부터 우리 음악을 들으면서 전통차를 즐기는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60년대와 70년초까지는 이곳에 앉아 음악과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었으나 오래 폐쇄되다가 다시 개방한다니 여간 반갑지 않다.문화재 보호라는 측면에서 모든 전통공간을 멀리 두고 바라보는 데그친다면 이는 ‘그림의 떡’처럼 무의미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우리 문화를 거리감없이 숨쉴 수 있도록 한국적 특성을 살린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개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외국인이나 청소년들에게도 한낱 고궁이 아닌,지나간 역사의 그림자가 오늘의 세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다리로서 의미를 심어줄 필요가 있다. 고궁 뜰을 거닐다가 어디선지 들려오는 아악(雅樂)연주로 인해 우리의 문화는 한층 운치있고 생명감있게 꽃피울 수도 있다.비운의 고종이 어떤 생각에 젖어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었을까.한번쯤 정관헌에 들러 스스로를 체관(諦觀)하는 자세도 이 어지러운 세태를 살아가는데 진실한 휴식이 될 것도 같다.
  • 咸寧殿 화재(秘錄 南柯夢:9)

    ◎“섣달 그믐 궁내 火變” 정환덕 御前예언 적중/한달전 아뢴내용 맞아떨어지자 高宗이 1주일뒤 至密로 불러 “정해진 운수 알았나,우연인가.나라·황실 지탱할 방안도 아는가” 민선시대의 정치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선거의 결과가 궁금하다.그래서 과거 3공시대에는 세검정의 점쟁이 집에 정계의 거물들이 몰려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점쟁이 가운데는 1천금의 복채를 놓아야 보아준다는 대무(大巫)가 있고,단 몇푼으로 쉽게 점쳐주는 소무(小巫)들이 있다.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장래에 대한 불안이 심하고 그럴수록 대무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20세기의 문이 열리던 1900년처럼 불안한 때도 없었다.그래서 그런지 고종은 적지 않은 대무들을 궁궐안에 들여 몰래 점을 쳤다.고종에게 불려갔던 대무는 한둘이 아니었는데,그중의 하나가 충주 사는 성강호(成康鎬)였다.성강호가 돌아가신 명성황후의 귀신을 불러들일 수 있다 하여 고종이 끌어들인 것이다. ○高宗,몰래 무당 불러 점쳐 어전에 불려나온 성강호는 갑자기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땅에 내려앉았다.그런 다음 “지금 죽은 명성황후의 혼령이 이 의자에 와 앉으셨습니다”라고 하니 고종은 의자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다.성강호는 한술 더 떠서 “그렇게 요란을 떠시면 귀신이 놀라 떠나버리실 것입니다.조용히 하십시요”라고 했다.그래서 고종은 울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는 것이다.강원도 통천(通川)에 사는 또 하나의 사기꾼 김원동(金元同)이란 자는 요술병 하나를 갖고 서울에 왔다.그리고는 고종에게 불려가서 어린 영친왕(엄비의 소생)의 병이 언제 나을 것인가를 정확히 알아맞히었다.그래서 고종의총애를 받았다가 강원도 금화(金化)군수로 발령받고 앞의 성강호도 벼슬이협판(協判·차관급)에 이르렀다고 하니 대한제국의 인사행정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알 수 있다. 정환덕은 정통 역술가로서 성강호나 김원동 같은 사기꾼과는 달랐다.그래서 조선왕조의 운명을 알아맞혔을 뿐 아니라 덕수궁 함녕전에 불이 난다는것도 알아맞혀 고종을 놀라게 했다. “11월 28일 하오 3시 금마문(金馬門=함녕전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 밖에서 등대(等待=대령)하고 있었는데,성상께서 옥체가 편안하지 않으시다 하여 물러났다.이튿날 궁내부에서 입궐하라는 어명이 계시다 하여 즉시 입대(入對)하였는데 물러나오면서 아뢰기를 ‘근자에 궁안에 불이 날 화변(火變)의 염려가 있사오니 각별히 조심하셔서 예방하셔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였다.성상께서는 깜짝 놀라는 빛을 지으면서 ‘어느날 어느 시각에 불이 날 것같은가’고 물으셨다.‘다음달 12월에 일어날 것입니다’고 하자 다시 ‘12월 며칠인가’고 하셨다.‘그믐쯤에 날 것입니다’고 아뢰자 ‘그러면 어느 방위에서 일어날것인가’하고 또 물으셨다.‘함녕전 바로 남문(南門)입니다’고하자‘이 불이 정전까지 침범하겠는가’ 재차 물으셨다.대답하기를 ‘거의 침범할 것입니다.그러나 군졸로 하여금 잘 지키게 하시면 불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압니다’고하자 이번엔 ‘어떻게 하면 잘 지킬 수 있는가’고 물으셨다.‘군졸 수 백명으로 하여금 매일밤 궁중과 궁 밖을 돌게 하여 근처의 인가를 조심시키시면 됩니다’하고 아뢰었다.” 도대체 국왕이라는 사람이 이토록 낯낯이 역술가에게 묻고 일을 처리하였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하겠는데,아무튼 정환덕의 예언은 적중하여 이해 12월 그믐날에 덕수궁 가까운 민가에서 불이 나고 말았다.불은 청국인이 경영하던 석물공장에서 일어나 수십채로 옮겨붙었다. “12월 그믐날이 되자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싸락눈까지 부슬부슬 내렸다.하늘과 땅이 어두컴컴하여 마치 암흑 속에 있는 것 같았다.초저녁이 지난 후에 갑자기 한바탕 광풍이 불더니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쓰러졌다.얼마후 함녕전의 정문 밖 청국인이 경영하는 석물공장에서 불이 나 수십채에 연소하더니 불길이 맹렬한 기세로 함녕전 정문을 범하였다.성 안팎의 백성들이 힘을 다하여 불길을 잡으려 했으나 날씨는 춥고 바람이 매서워 진화할수가 없었다.화염은 점점 정전(正殿)으로 육박하였다.이때 진고개(泥峴·충무로 입구)의 일본 소방대가 달려와서 소방기계 수십대로 근근이 불을 꺼 함녕전은 우뚝하게 홀로 남았다.불행중 다행이었다.” 정환덕이 한달 전 함녕전에 불이 날 것이라 예언한바 있었는데 고종은 까맣게 이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앞날 미리 맞히는 귀신” “이날 밤 조정의 백관들이 모두 와서 함녕전의 안전을 축하하였고,머리털이 그을리고 이마에 화상을 입은 군졸이 셀 수 없이 많았다.이 때를 당하여 전화과장 이규찬이 엎드려 ‘정환덕이 앞날을 미리 알아맞히는 것은 귀신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고 아뢰었다.상께서 ‘정환덕이 누군가’ 말씀하시자 이규찬은 ‘지난 11월 29일 현릉참봉에 임명하신 그 정환덕입니다.당시 12월 그믐날 반드시 화변이 있을 것이라 아뢴 일이 있는데 폐하께서 잊어버리셨습니까’하고 옛일을 떠올렸다.상께서 다시 ‘짐(朕)이 근래에 골치아픈 일이 많다 보니 벌써 잊어버렸다.그러나 이 사람은 어찌해서 들어와 나를대하지 않는가’ 하심에 ‘소명이 없으셔서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 신하가 입궐하여 임금을 만나뵙고 자문에 응하는 것을 입대(入對)라 했다.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입대하는 것을 소대(召對),문무관이 차례로 입대하는것을 윤대(輪對),중신이나 대신이단독 입대하는 것을 독대(獨對)라 했다.요즘 김대통령은 아무하고도 독대하지 않겠다고 했다는데,원래 독대란 이처럼 궁궐에서 쓰던 말이다. “이규찬이 와서 정월 초이렛날 입대하라는 명을 전하는지라 이날 함께 대궐에 나아가 함녕전 뒤뜰에서 대령하였다.이윽고 내시 강석호가 칙령을 받들고 나와 급히 대령하라 하여 따라 들어가니 이곳이 곧 함녕전의 지밀(至密)인 침소였다.지밀은 상감 3부자께서 취침하시는 방이다.엄비 이외에는 비록상궁과 나인이라도 마음대로 무상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지밀’이라고 한다.이날은 눈이 한시간동안 내려 장안천지가 배꽃이 만발한 듯한 이화세계(梨花世界)로 변하였다.이윽고 황상폐하가 서쪽 온돌방에서 용상(龍床)으로 내려와 좌정하신 뒤 ‘너는 앞날을 아는 똑똑함이 있으니 그 계산에 정한 수가 있어서 그런가.아니면 우연히 맞아서 그런것인가.만약 정한 수가 있다면 오늘날 천시(天時)가 불리하고 이웃나라와의 외교도 잘 안되고 사람들이 모두 종묘사직의 안위와 나라의 존망을 알지 못하고 있다.임금이 된나도 아득하게 알지 못하고 앉아있으니,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그 방안을 물어보고 싶다’고 하교하셨다.엎드려 아뢰기를 ‘무릇 수는 성의(誠意)에서 나오는 것입니다.천하만사가 한갓‘성(誠)’이라는 한 글자 뿐입니다.그래서 이르기를 ‘성심이면 금석도 뚫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조용히 시변(時變)을 살피시고 천심(天心)을 추측하시면 국운이 장차 밝은 태양처럼 될 것이니,소신의 구구한 좁은 견해는 반드시 준거하여 믿으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간절히 말씀드립니다’라고 하였다.”
  • 21세기 기산점 뒤늦은 논란/英 “2001년부터” 95년 공식화

    ◎중 “2000년이 타당” 최근 반론/국제기구도 이견… 통일 시급 【베이징=鄭鍾錫 특파원】 “2000년인가,2001년인가”. 눈앞에 닥친 21세기를 앞두고 그 기산점(起算點)을 언제로 할 것인가를 따지는 논란이 벌어졌다.2001년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진 21세기의 기산점을 2000년으로 해야 한다고 중국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온 까닭이다. 신·구세기 교체는 세계적인 관심사이다.2000년대 진입은 더욱이 1천년(millenium) 만에 한번 오는 것으로 국제사회 여러 부문의 활동과 직접 관련돼 있다.세기 구분에 관해서는 1995년 영국왕실의 그리니치천문대가 이미 21세기의 기산점이 2001년이라고 밝힌 바 있다.인류가 통용하는 연대기 가운데기원 0년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에 대해 중국천문학명사심사결정위원회는 최근 국제천문학연합회에 공식으로 서한을 보내 21세기를 2000년 1월1일부터 계산하는 한편 세기구분과 2000년 귀속에 관한 통일규범을 조속히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1900년대가 끝나는 2000년부터 마땅히 21세기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중국의 주장이다. 중국은 지난달 베이징 교외의 파다링(八達嶺) 만리장성 기슭에 대형 ‘역산(逆算) 날짜시계’를 설치,매일매일 2000년까지 남은 날짜를 고시하고 있다.누가 뭐라든 중국은 2000년부터 21세기를 계산한다는 의지를 과시한 것이다. 현재 21세기의 기산점이 국제적으로 완전히 통일된 것 같지는 않다.그리니치천문대의 기산점 발표 직후 영국시민들 가운데서도 일부가 이 결정에 반대했으며,많은 국제기구과 국제적 인사들 사이에서도 언제부터 21세기가 시작되는지를 둘러싸고 일부 의견을 달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결국 세기말 계산에서 1년이라는 차이가 나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이것이 통일돼야 한다는 주장이 중국을 중심으로 강력히 일고 있다.
  • 정부 ‘밀레니엄 버그’ 대책 착수/“방치땐 컴퓨터 대란”

    ◎총리실 대책협 구성/이달중에 실태조사/중기에 기술 등 지원 ‘컴퓨터 2000년 문제’ 해결에 내각이 매달리기 시작했다.정부는 31일 총리실 국무조정실에 민·관이 참여하는 ‘컴퓨터 2000년 문제 대책협의회’를 구성해 범정부적으로 대처하기로 했다.그동안 부처별로 추진돼온 대책이 범정부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다.앞으로 20개월내 해결하지 못하면 ‘큰 일’이 벌어진다는 판단 때문이다. ‘컴퓨터 2000년 문제’는 연도 표기 4자리 가운데 마지막 2자리만 인식하도록 컴퓨터가 설계돼 발생될 문제.현재 컴퓨터는 2000년 4월1일을 00:04:01로 읽고,1900년 4월1일도 마찬가지로 읽는다. 예를 들어 지난 90년 입사한 사원은 2000년이 되면 근속연수 10을 기록하지만 컴퓨터는 -90으로 인식하게 된다.이런 문제는 행정·금융 등 사회 전반에 대해 발생하게 돼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까닭에 정부는 4월중 공공부분을 중심으로 정보시스템의 현황 및 실태조사를 실시해 종합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지방행정,금융,원전,전력 및 에너지,통신,운송,항만,의료,중소기업,산업자동화설비 등의 문제해결 능력이 취약한 부문을 10대 중점관리대상으로 선정해 지속적으로 점검해 나가기로 했다. 문제해결 능력이 없는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중소기업지원 대책협의회’를 4월중에 발족시켜 지원하기로 했다.기술지원방안과 정보제공,애로타개책도 제시될 예정이다.
  • 봄나들이/가족과 함께 ‘선열의 얼’ 되새기자

    ◎천안 유관순 열사 추모각­봉화대­생가 등 유적지 인접/홍성 한용운·김좌진 장군 생가도… 하루 코스로 적격 79년전 우리 선조들은 3월1일을 시발로 일제에 맞서 근 3달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그래서 3월은 우리들에게 설레임보다는 숙연하게 다가온다. 절기상으로는 봄이지만 봄나들이를 나서기에는 아직 이르다.3월을 맞아 독립투사의 생가 등 항일운동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독립투사들의 생가를 보려면 충남으로 가야한다.유관순 열사는 천안에서 태어났고 윤봉길 의사는 예산,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은 홍성출신이다.충남에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것은 충청도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있는 유관순 열사 유적지는 추모각,봉화대,생가가서로 가까이에 있어 순회코스로 안성마춤이다.천안시내에서 독립기념관으로가는 21번 국도로 나가 18㎞정도 가면 아우내장터가 나오고 이 곳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열사의 영정을 모신 추모각이 있다.추모각을 구경한뒤 추모각 뒷편의 매봉산에올라 독립운동 거사를 알리기 위해 봉화를 피운 봉화대를 둘러보고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생가가 나타난다.모두 다 둘러보는데 1시간이면 된다.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의 생가가 있는 홍성은 인근의 용봉산과 천수만 방조제를 연계하면 하루 단위 나들이길로 적격이다.먼저 충남 서부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홍북면 용봉산으로 가 1∼2시간 땀을 흘린다.하산길에 점심식사를 하고 생가터로 발걸음을 옮긴다.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에는 24평 규모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기념관에는 국내 및 해외활동과 관련된 유품과 함께 영상자료가 전시돼 있다.이 곳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는 한용운 생가가 있으며 생가를 거쳐 방조제로 가면 된다. 윤봉길 의사는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출생했다.시량리에는 윤의사가 태어나서 4살때까지 살던 광현당,중국으로 가기 전인 23살때까지 지냈던 저한당,윤의사의 사당을 모신 충의사와 유물전시관,충의관 등이 4만2천여평의 경내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서울에는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종로2가 탑골공원,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이 있다.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은 189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다.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3·1운동 벽화,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과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서대문 독립공원은 일제시대 유관순,손병희 등 애국지사가 수감돼 있었던 곳으로 지난 92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조성된 곳이다.감옥 7동,사형장,지하옥사 등이 복원됐으며 독립문,3·1운동기념탑,순국선열 추념탑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의인 대거 배출된 충청도 충청지역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라고 불려 왔다.이러한 사실은 실제로도 입증된다.1900년부터 1973년까지의 명사 150인을 분석한 한 조사에 따르면 충남은 독립운동가 부문에 6명(유관순,윤봉길,김좌진,한용운,이범석,조병옥)이 올라 10명인 서울 다음으로 2위에 올랐다.조사 당시 서울인구가 충남인구의 두배가 넘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비례로는 충남이 서울보다 훨씬 높은 셈이다. 충남에서 의인이 많이 배출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뒷받침된다.사육신인 성삼문(홍성),박팽년(대전)을 비롯,북벌론을 주장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 회덕출신이다.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실질적인 고향은 아산이고 구한말 의병운동이 가장 먼저,가장 강하게 일어난 곳도 충청지역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충청지역은 일찍부터 충절 또는 민족의식이 저변에 강하게 깔려 있었고 이러한 전통이 독립운동가 배출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송시열로 대변되는 기호학파가 200여년간 지배세력이었다는 것도 간과할수 없다.즉 나라를 잃은데 대한 책임의식이 그만큼 강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충청인의 기질을 보면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처럼 대체로 행동이 점잖고 느린 편이다.이 말은 뒤집어 보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행동은 신중한 것으로 해석된다.즉 충동적이기 보다는 심사숙고하며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바로 이러한 요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여주게 된 동인이었는지도 모른다.
  • 영 윈저 왕가의 내밀한 이야기/미 전기작가 키티 켈리의‘로열스’

    ◎1917년부터 80년간의 다큐멘터리 왕실사/찰스­다이애나의 파경 등 가감없이 기록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공립학교에 다니지 않았다.가정교사에게 하루 한시간씩 영국사와 문장학을 배웠을 뿐이다. 때문에 수학이나 과학에 약했고 자연계에 관해서는 개와 말밖에 몰랐다.그녀는 러드야드 키플링과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제외한 그밖의 모든 시들을 싫어했다.어느날 그녀는 이탈리아 시인 단테에 대해 ‘단테란 말(마)의 이름?’이라고 물었다” 영국 윈저 왕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로열스’(전2권,키티 켈리 지음·이종인 옮김)가 도서출판 동방미디어에서 나왔다. 키티 켈리는 ‘낸시 레이건:비공식 전기’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베스트셀러 전기작가.켈리는 금세기 들어 윈저 왕가는 비영웅적일 뿐아니라 결손가정화해 ‘미디어를 위한 인형극’으로 전락했다고 꼬집는다. 이 책은 1917년에서 1997년에 이르기까지 80년의 영국왕실사를 다룬다.1917년,독일을 미워하는 영국의 국민정서를 잘 알고 있던 영국왕 조지 5세는 자신의 독일 뿌리를 감추기 위해 왕가의 이름을 하노버에서 윈저로 바꿨다.그는 하룻밤 사이에 바텐베르크,메클렌베르크­스트렐리츠,헤세,베틴 등 독일계 가문의 이름을 왕가의 계통에서 박탈해버리고 영국 이름과 타이틀을 만들어 넣었다. 켈리는 이 책에서 훗날 윈저 공작이 된 에드워드 8세의 느닷없는 양위와 그 뒤를 이어 동생 앨버트 왕자가 조지 6세로 등극하는 과정을 그린다.그리고 영국 왕실에 커다란 안정을 가져온 엘리자베스 왕비를 묘사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곧 현재의 ‘퀸 마더(Queen Mother)’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 중의 하나다.켈리는 우아한 미소에 강철같은 성품을 지닌 퀸 마더의 생생한 초상을 제시한다. 퀸 마더는 비록 평민 출신이지만 2차대전 당시의 런던 공습때 대피하지 않고 런던에 그대로 체류,왕가의 체통을 지켜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켈리는 퀸 마더의 출생을 둘러싼 신비를 밝히고 인공수정으로 두 딸을 낳게된 내막도 폭로해 눈길을 끈다. 켈리는 또 조지 6세의 장녀인 엘리자베스 2세의 외로운 유년시절과에든버러공 필립과의 결혼,1952년 아버지의 급서로 인한 갑작스런 등극 등을 상세히 다룬다.켈리가 엘리자베스 2세의 생활에 대해 밝힌 구체적인 사항들 중에는 여왕이 냉정하고 무심한 어머니였다는 내용도 있어 자못 충격적이다.그에 의하면 윈저 왕가의 파탄은 여왕이 기능부전한 어머니였다는 사실에 상당부분 그 원인이 있다. 여왕의 네 자녀 중 셋은 이혼했고 나머지 한명인 막내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바람둥이 남편인 필립 공,속만 썩이는 동생 마거릿 공주, 우유부단한 아들 찰스 왕세자,뻣세기가 남자 못지않은 앤 공주,왕족이 아닌 평민계급에서 데려온 두 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와 사라 퍼거슨….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모든 풍상을 헤치고 이제 2002년 대망의 즉위 50주년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은 여왕의 부군으로 여왕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왕궁내의 실세’ 필립 공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묘사한다.켈리는 필립공이 아직도 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말한다.이 책의 후반에서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파경,둘째 며느리인 요크 공작부인 사라 퍼거슨의 이해할 수 없는 음란한 행동 등을 가감없이 다룬다.이 책은 영국 왕실도 이혼과 결손가정의 증가라는 영국적 사회현상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윈저 왕가는 또다시 위기의 시대를 맞았다.왕가를 ‘재창건’해야하는 과업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엘리자베스 여왕­찰스 왕세자­윌리엄 왕세손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영국 왕실 상황은 빅토리아 여왕­에드워드 왕자­조지 왕세손으로 이어지는 1900년의 빅토리아 말기와 비슷하다.모후인 빅토리아 여왕 사후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그는 이미 59세의 나이로 평생 여자들의 품에 안겨 샴페인이나 마시며 인생을 탕진한 사람이었다.그가 즉위한지 10년도 못돼 죽자 조지왕자는 조지 5세로 등극,윈저 왕가를 창건했다.영국 왕실은 이제 100년 세월의 간격을 두고 똑같은 운명을 맞고 있다.영국 왕실은 과연 ‘스캔들의 궁전’인가. 그러나 영국 왕실은 그 많은 스캔들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역경과 비난을 견뎌내는놀라운 능력을 보여왔다.켈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1천200년 역사의 영국 군주제는 이제 신과 같은 광휘가 부식되었고 또 위축될대로 위축돼 수모를 겪고 있다.그렇지만 장엄함에 대한 매혹과 새로워진 왕권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영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 출병의 현장 의란(흑룡강 7천리:21)

    ◎청­러전 참전 조선군 함성 들리는듯/효종,청 지원요청 따라 포수부대 262명 파견/1658년 ‘송화강 전투’서 러시아군 270명 섬멸 지난해 12월 2일 나는 하얼빈에서 가목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96년 여름 송화강 답사차 가목사로 갈 때는 장장 9시간을 밤기차를 탔고 1년 전 가목사에서 하얼빈으로 갈 때만 해도 택시로 근 10시간을 달려야 했던길이다. 그런데 이제는 국가 1급 도로가 완공돼 화장실까지 갖춰진 독일제 호화버스로 345㎞를 4시간만에 닿았다. 신나는 여행이었다.하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조선족역사 연구’(고영일 저)에서 인용했던 ‘이조실록’의 한 토막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면서 역사의 귀곡성이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효종 5년(1654년) 2월 이상진이 국왕에게 상소했다. “지금 나선(러시아를 가리킴)의 정형은 걱정거리로 되었나이다.만일 강변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또 어떤 군대로써 이를 방어하겠나이까. 신하의 소견은 문신중에서 덕재를 겸비한 자에게 북노병마사의 직책을 지우고 그 지방의 백성으로 하여금 조정의염려의 덕택을 알도록 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군정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보나이다” ○영고탑서 청군과 합류 효종은 찬동을 표시했다. 1643년 외흥안령 야크츠크의 보야코브가 흑룡강을 넘어 살륙을 시작하면서부터 침략이 빈번해지자 청 정부는 경차도위 명안달례를 파견,‘송화강전투’를 발동하게 하면서 조선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청군 주력이 모두 관내에 진출한 불리한 조건이라 청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지원군은 150명.그들의 행군노선을 보면 함북 회령에서 두만강을 넘어 오늘의 연변지역을 경과하여 8일만에 영고탑(오늘의 흑룡강성 영안시)에 도착,거기서 청군과 합류하여 목단강 뱃길로 닷새만에 회통강(송화강)에 이르렀다고 한다. 목단강이 송화강과 합수하는 곳이면 바로 오늘의 흑룡강성 의란현의 소재지 의란이다.하얼빈에서 235㎞,가목사로 가는 길옆에 있는 현성인데 36만 인구중 조선족은 겨우 4천592명이 살고 있다.서쪽은 소흥안령,동과 북은 완달산,남쪽은 장광재령에 둘러싸인 분지다.만족의 조상이 거주했던곳이라 청실의 ‘조종발상중지’라고도 한다.의란을 만족어로는 ‘의란허라’라 부른다.의란은 셋,허라는 성이라는 뜻으로 의란의 원이름은 삼성이다.지금도 도시 안에는 ‘삼성전화공사’ ‘삼성관상대’ ‘삼성상점’ 등 간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삼성이란 갈,노,호씨인데 청나라 천명원년(1616년)에 태조 고황제의 초무를 받아 기적에 든 허저족 커이거러(갈의극륵),누예러(노업륵),허리(합리)씨족을 지칭한다.이들은 만주 팔기에 들어 누르하치,황태극,순치 등을 따라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전공을 세웠다.그 공으로 천명 5년에 의란땅을 세습지로 하사받았던 바 영고탑,훈춘과 나란히 길림삼변으로 유명했다. ○오국성유적 그대로 12월 3일 의란현성에 이르자 나는 당시 청군과 조선 지원군이 러시아군과 혈전을 벌였으리라 짐작되는 목단강과 송화강의 합수목으로 달려갔다.얼어붙은 항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봄이 오고 강이 녹으면 배들은 짐을 싣고 송화강을 거슬러 하얼빈으로 가기도 하고 또 물결을 따라 흑룡강으로 가기도 한다.그런데 애석하게도 송화강 물결을 따라 의란과 가목사로가는 항로에는 암초가 많아서 큰 배는 통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하지만작은 배는 무난히 오갈 수 있다고 했다. 조선 지원군이 적선에 불벼락을 안겼던 곳인 목단강과 송화강의 합수지점엔 오국성 유적이 남아 있다.의란진 북쪽 변두리에 ‘오국성옛터’라고 쓴 커다란 시멘트판이 서 있다.그 뒤로 세월의 흐름속에 겨우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흙으로 쌓은 성벽이 낙엽진 버드나무의 쓸쓸한 형상을 띠고 언 대지위에 누워 있었다.역사의 기록에 보면 오국성 성벽의 둘레는 2천210m,높이 4m,기관 8m,정관은 1.5m였다고 한다. 오국성이 유명해진 것은 중국 역사상 ‘정강지란’이 이곳에서 있었기 때문이다.의란진에 있는 자운사의 용왕묘 옆에 세워진 시멘트 푯말에는 ‘휘흠이제유금지지’라고 적혀 있다.바로 여기서 송조 말기의 두 황제가 연금생활 끝에 1133년 한많은 생을 마쳤다. 자운사가 선 때가 1928년,바로 용왕묘 자리는 의란 부도통의 포병진지였다고 한다.1900년 러시아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포격으로 이곳을 초토화시켰다고 한다.17세기 중반 조선 지원군의 포화에 쫓겨갔던 러시아는 20세기 초입에 다시 포화로 진격해왔다.역사는 톱질과 같이 밀고 당기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런 와중에 인간은 애향심에 울며 세상을 떠나갔다. ○아군 8명 전사 25명 부상 1658년 6월 조선정부는 신류를 대장으로 소관 2명,포수 200명,고수와 화정 60명의 군사들에게 군량 3개월분을 휴대시켜 두만강을 넘어 영고탑으로 진군시켰다.이들은 6월 5일에 출발,10일 흑룡강에 이르렀다.전투는 도착날인 6월 10일(양력 7월 11일) 흑룡강과 송화강의 합수지점(오늘의 흑룡강성 동강시)에서 벌어졌다.싸움은 저녁까지 계속됐는데 쓰제바노브의 러시아군은 270명이 섬멸되고 47명이 겨우 도망했다.아군은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했다. 그들이 이름 석자도 남기지 못하고 거친 북만주에서 시신으로 쓰러진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던 순간 나는 분명 애끓는 귀곡성을 들었다.
  • 개화기 근대시 이론 태동서/70년대 시비평의 세계까지

    ◎‘한국 현대시론사 연구’/불 상징주의 시 통해 서구시 처음 접촉/김기림·김종길의 현대시 비평도 소개 “개화기 이후의 우리 근대시는 개화가사,개화시조,창가, 신체시 등을 거쳐 1910년대 중반기의 자유시로 이어졌다.자유시 형태의 등장을 조선시대의 엇시조나 사설시조,그리고 가사에까지 소급하려는 이들도 있지만 시조나 가사는 보통 정형시로 분류된다” 개화기 근대시 이론의 맹아에서부터 1970년대 시비평의 이론적 양상에 이르기까지 한국 시론의 역사를 고찰한 연구서 ‘한국 현대시론사 연구’(한계정 등 지음)가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왔다. 우리 근대시는 1900년대 육당 최남선이 ‘한양가’‘경부텨ㄹ도가’‘세계일주가’ 등을 말하면서 이름붙인 이른바 ‘구가류’라는 낭송시가들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글을 모르는 독자들이 대부분인 시대에 눈으로 읽는 시를 기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한국 근대시의 성립과정에서 1920년대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최남선에 의해 주도된 신시운동이나 개화기 시가의 설교조 계몽주의는 이 시기에 비로소극복됐다.1910년대 후반에 시작된 ‘폐허’나 ‘장미촌’ 동인들의 서구 상징주의 수용은 이러한 경향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우리가 서구 시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이 번역·소개되면서부터.초기 상징주의의 수용은 백대진·황석우·김억 등에 의해 이뤄졌다.백대진이 주로 말라르메 중심의 지적 상징주의를 소개한 반면,김억은 베를렌·구르몽·시몬스 등과 같은 감정적 상징주의를 주로 소개했다. 1930년대의 시사적 의미는 무엇일까.1930년대의 한국문학은 ‘전형기’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게 이 책의 입장이다.20년대 후반 카프(KAPF),곧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 차지했던 문학사적 위상과 비교할 때 30년대는 뚜렷한 주조없이 온갖 이론과 사조들이 각축을 벌인시기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해방기에서 1950년대 전반에 이르는 우리시론의 양상은 ‘문장’파의 전통주의를 통해 검토한다.전통주의는 속성상 보수적인 경향을 띤다.그러나 ‘문장’파의 전통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래에 대한전망으로까지 나아간다.가람이 진란에 대해 애정을 보이고 시조창작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나,상허가 골동품과 서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것,지용이 ‘바다’로부터 ‘산’으로 시선을 옮겨 한시적 발상에 기대 시를 쓴 것,지훈이 고전적 분위기의 시를 쓰고 전통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밝힌 것 등은 그런 맥락에서다. 이 책에서는 또한 김기림과 김종길을 중심으로 한 영미 신비평의 한국적 수용양상을 통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현대시의 새로운 전망을 살핀다.넓은 의미의 신비평이 우리에게 소개된 것은 1950년을 전후해서이다.신비평의 초기 이론가인 리처즈와 엘리어트의 논저가 번역됐으며,소략하나마 신비평의 기본관점과 갈래에 대한 소개가 이양하·김기림·백철·최재서·김용권 등에 의해 이뤄졌다.특히 김기림이 자신의 저서 ‘시의 이해’를 통해 보여준 리처즈 비평이론은 당시로서는 독보적이라고 할만큼 일목요연하고 정확한 것이었다.물론 ‘내용’과 ‘기교’의 통일을 내세운 형식논리적인 ‘전체시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점은 있었다.이에 비해 김종길은 무엇보다 유기체적 존재로서의 시 텍스트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김기림과 구분된다는 것이 이 책의 지적이다.끝으로 하나의 창작방법으로서의 민중시론과 1970년대 ‘문학과지성’동인의 시론을 다뤘다.
  • 초미의 관심사 「신용평가」(눈높이 경제교실)

    ◎‘투자 부적격’ 한국 새달 신용등급 상승 기대 지난 13일 국제적 신용평가기관들이 대거 방한했다.미국의 무디스(Moody’s)와 스탠더드 앤 푸어스(S&P),영국의 피치­IBCA 등이다.1주일 동안 체류하며 재경원과 한국은행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에서 우리 경제의 현주소를 낱낱이 조사했다. 이들은 조사결과 한국의 등급전망을 부정적에서 유동적 또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등급 자체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상향조정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이들은 국제수지와 통화 환율 등 거시지표와 기업과 금융부문의 구조조정 등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살피고 갔다. 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이들의 신용등급 평가에 따라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의 외화조달이 달라지기 때문이다.외환위기가 시작된 97년 11월부터 이들은 신용등급을 급격히 내리기 시작했다.당초 무디스와 S&P는 한국에 대해 각각 A1과 AA­로 신용을 ‘우수’ 등급으로 분류했었다. 그런데 기아사태가 장기화되고 외환사정이 나빠지자 두 평가기관은 등급을 Baa와 BBB 수준으로 두 단계씩 떨어뜨렸다.이 정도의 등급도 국제시장에서는 ‘적절’한 수준으로 평가돼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자금을 지원받은 뒤 무디스는 Ba1,S&P는 B+로 ‘투자부적격’ 등급을 매겼다.이유는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줄어 대외채무 상환능력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투자부적격 판정을 받으면 해외에서 채권발행을 통한 외화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채권을 발행한다고 하더라도 금리를 연 10% 이상 물어야 한다.보통 리보(런던은행간 금리로 5.5% 수준)에 0.5% 안팎의 가산금리를 물어야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고금리다. 영국의 신용평가기관인 IBCA는 무디스 등의 하향조정이 잘못됐다고 평가하면서도 한국의 신용등급을 6단계나 낮춰 투자부적격으로 평가했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지나치다는 비난이 거세자 이들 평가기관들은 이번 조사를 통해 S&P는 유동적,IBCA는 긍정적으로 전망을 바꿨다.무디스는 공식 언급이 없었으나 한국 경제의 전망이 좋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신용등급은 무디스의 경우 19단계,S&P는22단계로 분류하고 있다.우리나라는 무디스의 경우 상위 5번째 단계인 A1에서 6단계가 떨어진 11번째인 Ba1로 낮춰졌다.S&P는 4번째인 AA­에서 10단계가 낮아진 14번째 B+로 떨어뜨렸다.해외에서 국채 발행이 쉬워지려면 무디스는 10번째 단계인 Baa3 이상,S&P도 BBB­ 이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가 투자적격 등급이 되기 위해서는 무디스의 경우 1단계,S&P는 4단계 등급이 올라가야 한다.정부는 외채협상이 원활히 마무리되면 신용등급이 올라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시점은 2월 중으로 보고 있다. ◎등급 어떻게 매기나/평가위서 결정… 모니터링·분석 계속/고려요인 기관마다 달라… 변경 90일 소요 신용등급 평가방법은 평가기관 별로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우선 신용평가기관은 평가팀을 구성한 후,계량화된 자료는 자체적으로 분석하고 계량화가 어려운 질적인 요소의 평가는 평가대상기관 관련자와의 면담 등을 통해 자체 평가를 마친다.그 다음 평가결과를 상위 ‘평가위원회’에 보고하고 여기서 신용등급을 결정하게 된다. 이 때 평가대상기관이 신용등급 평가결과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경우 대외공표를 유보하고 재검토하기도 하며 대외공표 이후에는 평가결과의 정확성을 검증하기 위해 평가대상기관을 계속 모니터링한다. 한편 신용평가기관들은 신용등급이 발표된 이후 해당 국가 또는 금융기관,기업 등의 신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발생하였을 때는 평가대상기관에 대해 실사하는 등 신용상태를 재검점한 후 향후 신용등급에 관한 개략적인 중장기 전망을 발표하고 일정기간 지켜본다.이 경우 신용등급의 변경 여부가 결정되기까지는 보통 90일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신용평가기관들의 평가는 기본적으로 장기신용등급 및 단기신용등급을 매기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다만 무디스의 경우 은행에 대해서는 재무건전도 평가와 장·단기 예금지불능력 평가도 실시하고 있으며,IBCA는 재무건전도 평가와 국가 및 주주로부터의 지원 정도에 대한 평가도 병행하고 있다. 장기신용등급의 경우 S&P는 AAA∼D등급까지 총 22개 등급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중 AAA∼BBB­(10개)는 투자적격,BB+∼D(12개)는 투자요주의 및 부적격 등급으로 분류하며 무디스는 Aaa∼C까지 19개 등급중 Aaa∼Baa3(10개)은 투자적격,Baa1∼C(9개)는 투자요주의 및 부적격등급으로 분류한다. 단기신용등급은 S&P의 경우 A1∼D 등급까지 총 6개 등급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중 A1∼A3(3개)은 투자적격 등급,B∼D(3개)는 투자요주의 및 부적격 등급으로 나누고 있다.무디스의 경우에는 투자적격등급 3개(Prime1∼Prime3)와 투자요주의 및 부적격(Not Prime)등급 1개 등 총 4개 등급으로 구분하고 있다. ◎왜 낮게 평가됐나/외환위기로 장기등급 12월 7단계 하락/경상흑자 지속땐 다소 숨통 트일듯 97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은 S&P의 경우 AA­(22등급중 4등급),무디스는 A1(19등급중 5등급)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었으나 하반기 이후 대기업의 연쇄 부도에 따른 국내금융기관의 부실화 심화 등을 반영하여 크게 낮아졌다. S&P는 10월 26일 국가신용등급 중 장기등급을 AA­에서 A+로 1등급 하향조정한데이어 11월 26일에는 우리나라 금융·외환사정의 악화를 이유로 장기등급을 A+에서 A­로 2등급,단기등급을 A1에서 A2로 1등급 하향조정하였다.그리고 12월 들어서는 우리나라의 IMF 긴급자금 신청,이에 따른 단기 소요외자급증 및 가용외환보유액 저조 등을 이유로 11일과 22일 두차례에 걸쳐 장기등급을 A­에서 B+로 7등급이나 낮추었다. 단기등급도 A2에서 C로 3등급 하향조정하였다.무디스의 경우도 11월 28일,12월 10일,12월 21일 3차례에 걸쳐 장기신용등급을 A3→Baa2→Ba1으로 총6등급 낮추었고 단기신용등급도 Prime2에서 Not Prime으로 떨어뜨렸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제신용등급은 장·단기 모두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개별 은행 및 기업의 신용등급도 국가신용등급 이하로 평가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분류되고 있다. 최근 S&P와 피치­IBCA는 우리나라에 대해 다시 신용조사를 한 후 우선 신용등급의 중장기을 종전의 ‘부정적(negative)’에서 각각 ‘유동적(developing)’,‘안정적(stable)’으로 변경하여 앞으로 신용등급이 오를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이 앞으로 다소 상향조정될 것으로 전망되는 것은 부실금융기관 정리 및 기업구조조정에 관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 표명,지난해 11월 이후 3개월 동안 정상수지 흑자 지속,가용외환보유고의 증가등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지난 1월 21일부터 뉴욕에서 진행중인 우리나라와 외국 채권금융기관들과의 외채협상에서 우리나라의 단기외채가 중장기 외채로 원만히 전환될 경우 앞으로의 신용등급 조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신용평가기관들은 대체로 해당 국가의 장기적 경제전망에 큰 비중을 두고 신용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들 기관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보다 선진화된 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장기적 지불능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총수요의 적정관리 및 수출증대 등을 통하여 경상수지의 흑자 기조를 정착시켜 나갈 것이 요망된다.또한 부실금융기관의 정리와 금융산업의 전반적인 구조조정을 앞당겨 국제투자가의 불안심리를 진정시키는 한편 기업구조조정의 촉진,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등을 통해 국내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초래한 기업의 방만한 차입경영을 개선하고 기업경영의 효율성을 높여 나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정부도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 등을 통해 민간부문의 경제구조조정 노력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각종 규제들을 대폭 완화·철폐하고 정책추진에 있어서 일관성과 투명성을 더욱 높여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신용평가기관/투자대상국의 실태 전문적으로 분석/S&P·무디스·피치IBCA사 대표적 국제투자가들이 어떤 나라에 자금을 빌려 주거나 그 나라가 발행하는 채권 등에 투자하려 할 경우 우선 원리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겠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투자 국가의 정부는 물론 해당 융기관이나 기업의 신용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투자가들이 개별적으로 투자대상국의 신용상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뿐만 아니라 이에 소요되는 비용도 적지 않을 것이다.이에 따라 각국 정부,금융기관,기업 등의 신용평가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면서 국제투자가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대가를 받고 제공하는 기관들이 국제신용파회사들이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대표적인 신용평가회사로는 미국의 무디스사(Moody’s Investors Services)와 스탠더드 앤 푸어스사(Standard & Poor’s Corporation),영국의 피치­IBCA사(Fitch­IBCA Inc.)등을 들 수 있다. 무디스는 세계 최초의 국제신용평가기관으로 1900년에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던 & 브래드스트리트사(Dun & Bradstreet Co.)의 자회사로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다.S&P는 1916년 스탠더드사를 모태로 설립되었는데 1942년 푸어스와 합병된 데 이어 1966년 출판·언론그룹인 맥그로 힐사(McGraw­Hill)의 자회사로 편입되어 현재 약 60여개 나라의 약2만여개 금융기관,기업 등을 평가하고 있다.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다.한편 유럽 최대의 신용평가기관인 IBCA가 지난해말 피치사와 합병하면서 피치­IBCA사(본사는 런던 소재)로 개명되었으며 주로 국가 및 금융기관의 신용평가를 담당하고 있다.
  • 자연보호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미국의 대통령 문화:9)

    ◎도약의 20세기 연 ‘공익의 조정자’/트러스트 해체 등 대기업 부당행위에 철퇴/포츠머스 조약 중재… 미 최초의 노벨상 수상/역사·자연·여행·정책관련 등 저서 38권 남겨 【메도라(미 노스다코타주)=나윤도 특파원】 ‘컬러드(colored canyon) 캐년’.미중부 대평원 북단 노스다코타주의 서쪽끝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국립공원 초입에 위치한 이 거대한 골짜기는 이름 그대로 형형색색의 띠를 두른 바위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신비의 조화를 이룬다. 남북 다코타주의 남북을 가로질러 흐르는 미주리강의 지류인 리틀미주리강을 따라 색동 바위의 군무를 연상케 하는 비경이 루즈벨트 컨트리가 된 내역은 이 공원의 입구에 해당하는 인구 100명의 소읍 메도라에 들어서면 이내 알 수 있다. 루즈벨트가 3년간 머무르던 ‘말티즈크로스’통나무집 앞에 세워진 그의 기념관에는 자연보호 대통령인 그의 생활에 관한 자료들과 함께 미국의 자연보호역사가 다양하게 전시돼 있어 다코타의 황량한 벌판을 달려온 여행객들에 컬러드 캐년의장관과 함께 위대한 대통령과의 만남이라는 기쁨을 선사해 주고 있다. 미 26대 태통령으로 미 역사상 도약의 시대인 20세기를 연 그는 저술가,언론인,등산가,카우보이,전쟁영웅,노벨 첫 수상자 등 미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많은 타이들을 보존하고 있을만큼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그같은 루즈벨트의 업적에 대한 설명이 다코타에서 시작하는 것은 젊은 시절 이곳에서의 경험이 그의 정치철학이던 ‘공익정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튼 출신인 루즈벨트는 1884년 2월14일 발렌타인데이에 23세의 젊은 부인 앨리스와 부친을 한날 병으로 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 컬러드 캐년으로 훌쩍 떠나 왔다.이곳 목장에서 카우보이 생활을 하며 갖게 된 자연의 애착과 그것들이 방치된 채 손상돼가는 안타까움이 후에 그가 대통령이 된 후 국립공원 시스템을 창안하게 했다는 것이다.이는 오늘날 미국이 많은 자연을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고 또 엄청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큰 업적으로 꼽힌다. 그의 공익정신이 유명해진 원인은 취임후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대기업 조정정책 때문이었다.남북전쟁이후 급격한 산업발전은 미국의 경제를 과거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팽창시켰고 문명기기의 발달로 국민생활을 몰라보게 바꿔놓았지만 그 발전의 뒤안길에 만연돼 가는 각종 병폐는 미국 사회를 엄청난 불평등의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당시 가장 크게 대두된 문제는 대기업들의 횡포였다.철도 철강 석유 등 분야에서 통합과 독점을 통해 경제권을 장악한 기업인들은 정치인들과 언론까지 돈의 힘으로 매수,자신들에 유리하게 이끄는 등 국민 전체의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심각한 위협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19세기말 20세기초 미국내에는 사회 도처에 만연된 부정부패 일소와 진정한 민주사회로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지고 있었다.루즈벨트의 공익정신은 이같은 시대적 요구와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당시 부통령으로 있다가 1901년 9월14일 대통령의 암살로 예기치 않게 대통령이 된 그는 “연방정부는 어떤 특별한 세력의 대변자가 아니다.바로 공익의 조정자가 돼야만 한다.또한 대통령은 바로 이같은 조정자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강조,대기업 병폐의 치유에 대통령이 직접 개입할 것을 천명했다. 루즈벨트의 정책 핵심은 대기업들의 부당행위를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그 결과를 국민들에게 공개할 수 있는 힘을 정부가 갖도록 하는 것으로,우선 악명높은 몇몇 기업의 통합을 해체시키는데 주력했다. 그 첫대상은 철도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던 북부증권회사였다.당시 미 최대의 금융가 J.P 모건과 철도업자 제임스 힐이 공동으로 만든 막강한 파워를 가진 이 회사에 대해 손을 댄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다.그러나 루즈벨트는 과감하게 법무부에 이 회사에 대한 셔먼 트러스트 금지법위반 여부 조사를 명령했다.모건과 힐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으나 루즈벨트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결국 2년후 대법원의 판결로 해산명령이 내려지게 됐다.그는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트러스트 해체에 나섰으며 반발하는 기업인들에게 “만일 대기업들이 정부가 불법이라고 간주한 무엇인가를 행해 왔다면나는 그것을 끝까지 척결해 버릴 것이다”,“부패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부패기업들에도 칼이 필요하다”는 등 강경입장을 고수했다. 또한 노동문제에 있어서도 그동안 노사분규시 일방적으로 고용주 편을 드는 것으로 돼 있던 정부의 입장을 노동자의 입장도 동동하게 고려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이같은 그의 온건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는 과격한 변화를 반대하는 대다수의 미국인들을 만족시켰으며 1904년 압도적 지지로 재선 대통령이 되었다. 루즈벨트는 대외적으로 미국의 위상을 제고,국제사회의 지도국으로 부상케 했다.파나마를 콜롬비아에서 분리독립시키고 파나마 운하를 완성시킨 것은 중요한 그의 업적의 하나로 지적되며 1905년에는 러·일 전쟁 당시 양국 대표를 뉴햄프셔의 포츠머스로 불러 평화조약을 중재하기도 했다.이같은 그의 국제평화 노력은 이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돼 미국에 첫 노벨상 수여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1858년 뉴욕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수학한 루즈벨트는 24세때 뉴욕주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뉴욕경찰국장,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했다.또 1898년 미·스페인 전쟁 발발시에는 의용기병대 대장으로 참전,산 후안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전쟁영웅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후 뉴욕주지사에 당선됐으며 1900년 선거에서 매킨리 공화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부통령이 된 후 8개월 만에 42세의 나이로 미국 사상 최연소 대통령에 취임했다.그는 21세때 첫 저서인 ‘1812년 해전’을 발간한 이래 역사,자연,여행,정책관련책 등 38권을 펴내 미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저서를 남겼다.또 대통령 퇴임후 10년간 ‘The Out look’이라는 잡지의 편집자 등 언론인 생활도 하고 아프리카 사냥여행,브라질,정글 탐험을 했으며 새로운 정당을 결성,정치적 재기를 꿈꾸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도을 하다가 1919년 60세의 나이로 롱 아일랜드의 자택에서 생을 마쳤다.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 따르면 는 종합순위 5위를 나타내 2위를 기록한 제 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12촌간)와 함께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수잔 사르나 루즈벨트박물관 큐레이터/백악관 역사상 첫 흑인 초청/애칭 딴 ‘테디 베어’ 곰인형 인기/미국 이상적 남편·아버지의 전형 【오이스터베이(미 뉴욕주)=나윤도 특파원】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적지인 사가모어 힐은 뉴욕 롱아일랜드 오이스터베이 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사저와 박물관,당시 농장건물 등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이곳 박물의 수잔 사르나 큐레이터는 “아직까지 그가 대통령같다”며 설명에 들어갔다. ­루즈벨트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남북전쟁 이후 19세기말 30여년 대통령들이 지나치게 무능했고 기업들에 매수되다시피해 땅에 떨어졌던 대통령직의 권위를 되살렸기 때문이다.그리고 부통령에서 승계한 대통령의 경우 그때까지는 대부분 잔여임기만 때우는 식이었는데 그는 그같은 관행을 종식시켰다. ­그가 애칭으로 많이 불리는 이유. ▲미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이었고 또 최초의 현대적 대통령으로 친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래서 TR이라는 이니셜도 처음으로 사용됐다.또 애칭 테디(Teddy)가 광범위하게 불렸으며 그를 딴‘테디 베어’라는 곰인형은 지금까지도 어린이들에게 유명하다. ­루즈벨트의 가족관계는. ▲첫 부인 앨리스와 1녀,소꿉친구로 두번째 부인이 된 에디트와 4남 1녀를 두었다.무척 자상한 성격으로 미국의 이상적 남편,이상적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특히 전투기 조종사이던 막내아들이 1918년 프랑스 공중전에서 전사해 슬픔을 안겨 주었으며 그후 큰 아들이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 전사,1,2차 대전에 아들 하나씩을 잃은 아버지가 됐다. ­그의 성품은 어떠했는가.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대통령 취임직후 백악관 첫 손님으로 흑인 지도자였던 부커 워싱턴을 초청했던 것은 유명하다.백악관 역사상 첫 흑인 초청을 놓고 남부 정치가들로부터 반감을 사 고전하기도 했다.그는 사냥 등산 등 야외생활을 좋아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책을 읽었으며 6천여권의 장서를 남겼다.
  • 미 주가 15년간 10배 껑충/1929년 대폭락이후 최장기 호황

    ◎시가총액 GNP의 1.5배 늘어 한국의 주식값이 10년래 최저수준까지 곤두박질 하는데 비해 미국의 주식 가격은 최근 15년 사이에 무려 10배가 오르는 장기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정신없이 오르다가도 금세 가파른 내리막길을 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주가지만 길게 살펴보면 상승과 침체 국면이 확연히 구분되는게 또한 주식시세다.땅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하는 투우 황소에 빗대 상승국면은 ‘불’ 마켓으로,겨울 내내 동면하는 곰 같다고 해서 침체국면은 ‘베어’ 마켓으로 불리는 미국에서 주가는 82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뿔 센 황소처럼 위로 위로 치달려온 형국이다.주식시장이 본격화된 1900년 이래 최장의 상승국면으로서 1929년 대폭락 이후 금융면에서 가장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워싱턴 포스트는 평가하고 있다. 불 마켓도 단기적인 급락 및 하락조정 국면이 간헐적으로 출몰하나 아무리 급락하더라도 전년도 최저점보다는 항상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82년 중반 800선을 돌파한 다우 주가지수는 올 상반기 8천200까지 뛰었다.평균 불 마켓은 지속기간이 만 2년이 못되고 그간의 평균 상승폭이 72.5%인 사실을 참고하면 현재의 상승국면이 얼마나 이례적인지를 알 수 있다. 지난 15년간 미국의 주식은 총시가면에서 미국 1년 국민총생산의 1.5배인 9조달러가 늘어났다.주주들이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번 것인데 특히 최근 3년도 못되는 새 다우지수는 갑절로 뛰었다. 주식투자가 이처럼 수지맞은 장사가 되자 주식보유 붐이 크게 일어났다.지난 3년동안 미 일반가정이 보유한 주식의 시세는 세금 등을 내고 남은 이들의 가처분소득에 비해 5배나 빠르게 증가해온 것으로 나타났다.실제 호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아니지만 주식 평가재산이 두둑해짐에 따라 소비를 늘이고 이것이 경기부양의 효과로 이어진다고 분석된다.주가호황이 경기 선순환 단초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미국 주가는 한국 주가와는 정반대 길을 달리고 있으나 시사하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이 장기호황의 스타트를 끊은 82년 여름 미국 경제는 대공황이후 최악의 불경기의 맨바닥에 있었다.한국 주가도 침체의 최저점에서 미국에 버금가는 대기록의 대장정에 시동을 걸 수 있다.
  • 일 시중은행 첫 파산/북해도척식 영업권 북양은서 인수

    일본 유수의 시중은행인 홋카이도타쿠쇼쿠(북해도척식)은행이 17일 거액의 부실채권으로 인해 파산했다. 일본에서 금융빅뱅(금융개혁)을 앞두고 지방은행이 도산된 예는 있지만 시중은행이 쓰러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일본 금융계 안팍에 ‘은행 도태가 본격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등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다. 미쓰즈카 히로시(삼총박) 대장상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홋카이도타쿠쇼쿠은행의 홋카이도내 예금과 건전자산,영업업무를 6개월 내지 1년사이에 홋카이도 지방은행 2위인 호쿠요(북양)은행에 인도하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타쿠쇼쿠은행은 1900년 설립된 이후 1백년 가까이 홋카이도 개척사업을 뒷받침하는 등 홋카이도 굴지의 은행으로 군림해왔으나 최근 공표된 것만 9천3백40억엔에 이르는 부실채권으로 경영위기에 몰려 왔다.
  • 천년대의 의문들/스테븐 제이 굴드 저(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2000년 앞둔 세기말의 논란 분석/천년대 개념 기독교계시록­역법적 측면 나눠 설명/단순한 숫자적 해석땐 인류 종말 예언과 관련 없어 다가온 2000년대는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미하바드대학 동물학과 교수 스테펜 제이 골드 박사(55)의 최근 저서 ‘천년대의 의문들’(Questioning the Millenium)은 세기말과 천년대말이 겹치는 2000년을 앞두고 인류에게 제기되고 있는 천년대에 관한 끊임없는 의문들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하바드대학 비교동물박물관의 무척추 고생물관 큐레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는 골드 박사는 ‘건초더미 안의 공룡’‘풀 하우스’‘팬더의 엄지’등 동물생태학 연구를 통한 문명비판서를 무려 17권이나 출판,베스트셀러 저술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골드 박사는 자신의 18번째 저서인 이 책에서 집필동기에 대해 8살때인 1950년,라이프지에 실린 세기의 중간점에 관한 기사에서 감명을 받은 이래 줄곧 천년대 전환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다고 회고하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규명을 위한 추적의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천년대 전환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이같은 스펙트럼의 인위적 종말을 설정해보려는 인간의 약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서,그동안 자신이 추구해온 역사적 탐구와 직관을 천성적인 위트와 유머를 바탕으로 결론 보다는 논란이 되는 문제들의 상황과 그 전개과정을 주로 기술하고 있다. 저자의 박학한 인용구와 통찰력 있는 서술은 물론 지적 흡인력으로 가득찬 이 책은 인류의 천년대에 관한 광적인 집착을 가져오게한 커다란 의문들을 무엇을(what),언제(when),왜(why)의 세가지로 설정하고 그에 대한 설명 형태로 구성하고 있다.그리고 그 주제를 설명하는데 있어 예언적 이거나 심리적 방법이 아니라 역법적이고 천문학적,역사적인 방법에 의거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첫번째 질문은 천년대의 정확한 개념은 무엇이며 그 개념이 어떻게 변화돼 왔는가에 대한 것이다.저자는 먼저 서구문화에 있어서 천년대의 기본적 개념은 인간이 다루기 힘든 세계로부터 질서와 의미를 가까스로 얻어내기 위해 사용한 이분법적 분류와 인간 두뇌의 궁극적 사고용량의 제한이라는 두가지 중요한 정신적인 카테고리로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개념의 변화는 계시록적(apocalypse)인 천년대에서 역법적(calendrics) 천년대로의 변화를 지칭한다는 것이다.전자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과 같이 세상이 천년간 계속된 후 마지막에 최후의 심판을 받는 전통적 기독교적 천년대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고,후자는 달력의 계산에 따른 단지 1000년이라는 수의 양적 개념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두번째 질문은 새 천년대의 시점을 설정하는 문제로 2000년대의 시작을 2000년 1월1일로 할것이냐 혹은 2001년 1월1일로 할것이냐는 간단한듯 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것이다.저자는 먼저 세기의 종점을 99년으로 할것인가,또는 00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시도했다.그리스도의 탄생을 A.D.1년으로 했기 때문에 100년을 한 세기로 할때 세기의 종말은 00년이고 새세기의 시작은 01년 이라야 한다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첫1세기는 99년이 되므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같은 주장을 논리적 입장 혹은 그리니치적 입장이라고 설명했다.그러나 최근의 현상은 새세기가 01년이 아니고 00년을 시작으로 한다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이를 팝(pop)문화적 입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혼란상을 설명하면서 뉴욕타임스의 예를 들었다.1899년 12월31일자에서 “우리는 내일 금세기의 마지막 해로 들어간다“라고해 1900년을 19세기의 마지막 해로 보는 입장을 취한 반면,1996년 12월8일자에서는 “시계가 1999년 12월31일 자정을 알리면 세계의 수십억 인구들은 새 천년대의 새벽을 기념할 것”이라고해 1999년을 세기와 천년대의 마지막 해로 보는 입장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세번째 질문은 왜 우리의 캘린더는 천년대의 문제를 포함하여 인간의 의도적인 통제에 이끌리는등 복잡화 되었느냐는 것이다.저자는 첫째로 태양력의 복잡한 시간을 들고 있다.즉 태양력으로 1년은 365일 5시간 48분 45.96768…초의 복잡한 길이로 돼있기 때문에 그에 의한 시간계산이 복잡해질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태양력과 월력의 불일치 때문으로 설명했다.월력의 1년은354.36709일로 태양력보다 거의 11일이 적은 상황이다.유대교,이슬람교,중국의 도교 등 대부분의 종교들이 월력을 쓰고 있는 반면 기독교는 태양력을 사용하는데도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2000년을 눈앞에 둔 우리들 앞에 가장 흥미로운 의문들 즉,요한계시록의 신비,인류 역사및 예언·두려움·열망의 천년대에 대한 의문들을 제기한 뒤 자신의 간결한 문체와 수리상의 집중력으로 쉽게 풀어나가는 능력을 보이고 있다.그리고 천년대의 문제들은 천년대를 인간이 설정해놓은 단순한 숫자적 개념으로 볼때 특별한 의미는 없어진다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고 있다.‘천년대의 의문들’(원제:Questioning the Millenium),스테펜 제이 골드,하모니 북스(뉴욕),1997,200쪽,17.95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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