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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식인의 ‘변질’ 혹독한 비판

    △ 지식인의 종말(드브레 지음/예문출판사 펴냄). 지난해 12월초부터 프랑스 지성계에는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다.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 레지 드브레가 ‘프랑스지식인=진보’라는 등식에 죽음을 선포하면서 좌·우파를막론,현대의 프랑스 지식인을 싸잡아 혹독하게 비판한게발단이었다.그가 당시 지식인을 향해 읊은 조문 ‘지식인의 종말’(원제 Intellectuel Francais suite et fin:프랑스 지식인 연속과 종말)이 예문출판사에서 나왔다. 이 책은 프랑스의 지식인상을 묘사한다.큰 얼개는 1898년 드레퓌스 사건으로 떠오른 ‘처음의 지식인’이 시간이지날수록 타락하다가 20세기말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드브레는 지식인의 유형을 몇가지로 제시한다.지식인의자세에 충실했던 ‘최초의 지식인’,그리고 그가 조롱하는 ‘최후의 지식인’을 가장 빼닮은 현대의 ‘프랑스 지식인’ 등이다.저자의 눈을 빌자면 최후의 지식인은 프랑스언론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로 유명한 에밀 졸라로 대변되는 1900년대 ‘최초의 지식인’은용기와 이성으로 무장한채 앙가주망(사회참여)운동을 주도했고 이 흐름은 사르트르에서 정점에 이른다.그러다 지식인들이 ‘정치적 바이러스’에 걸려 ‘최후의 지식인’으로 변질됐으며 그 뒤에는 미디어 권력과 자본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드브레가 그리는 ‘최후의 지식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대중·민중과 떨어진 채 집단 자폐증에 걸려있거나,텔레비전에 얼굴 비치느라 공부를 못한 탓에 현실감 상실증에도 시달리고 있다.또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회를 선도한다고 착각하는 도덕적 자아도취증,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못하는 만성적 예측불능증,매스컴의 주문에 따라 그럴듯한 말만 남발하는 순간적 임기응변증에 신음하고 있다. 현대의 프랑스 지식인을 꼬집는 저자의 입은 매섭다.책이 나온 뒤 드브레가 잇단 인터뷰에서 “텔레비전에 얼굴이나 비치려하고 사인회나 여는 스타주의에 빠져 공부하는것을 잊었다”며 날이 곧추 선 말을 잇따라 터뜨리자 앙리 레비나 솔레스 등 구체적 이름이 도마에 오른 지식인들이 반박하면서 전장(戰場)이 확대되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텔레비전에 대하여’에서 시도한 지식인 비판을 연상케 하는 드브레의 문제 제기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상을 되돌아 보는데도 좋은 거울이 될 것으로 보인다.1만3,000원. ▲레지 드브레는=1940년생으로 프랑스의 명문 파리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수재.쿠바로 건너가 체 게바라의 게릴라부대에 합류하여 혁명활동을 하다가 1967년 볼리비아에서 체포돼 30년형을 언도받았다가 드골 정부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었다.체 게바라,카스트로와 친했고 소르본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매개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받고 리옹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국내에 ‘혁명 중의 혁명’(석탑),‘불타는 설원’(한마당)‘이미지의 삶과 죽음’(시각과언어) 등이 번역 소개됐다. 이종수기자 vielee@
  • 구한말 외교명소 ‘손탁호텔’ 전경 첫 공개

    구한말 독일여성 손탁(Sontag·孫鐸·1845∼1925)이 건립,‘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당시 서울 정동(貞洞) 외교가의 대표적 명소였던 손탁호텔의 화려했던 전모가 처음으로 공개됐다.그동안 손탁호텔에 대해서는 건물의 정면일부 사진 정도만 전해질 뿐 구체적인 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했다.손탁호텔은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지학자인 이종학(李鍾學·74) 사운연구소장이 18일 본지에 단독공개한 자료에 따르면,중구 정동 32-1번지(건립당시는 정동 29번지·현 이화여고 동문 일대)에 위치한 손탁호텔은 러시아풍의 2층 양옥건물로 부지가 1,184평에 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 이번에 이 소장이 공개한 자료는 손탁호텔의 대형 홍보용엽서에 실린 호텔 전경사진을 비롯해 토지대장, 지적도면,그리고 건립자 손탁의 사진 등으로 모두 처음 밝혀지는 것이다.건축전문가들은 한국 근대건축사의 미비된 부분을 보충해줄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국적이 독일인 손탁은 프랑스 태생으로 구한말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따라 1885년 조선에 왔다.손탁은고종이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俄館播遷·1896년) 전후 고종을 측근에서 모신 공로로 고종으로부터 궁궐의 일부를 하사받아 1902년 그 자리에 서양풍의 호텔을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손탁호텔로 명명했다.1905년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직후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에게 팔았으며,손탁호텔은 1910년 한일병합 후 유럽풍으로 개조돼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1918년 이화학당에 팔려여학생 기숙사로 쓰이던 손탁호텔은 4년뒤인 1922년 새 건물을 짓기 위해 완전 헐리고 말았다.새 건물(‘프라이홀’)도 지난 75년 화재로 소실됐다. 김정동(목원대·건축학) 교수는 “당시 손탁호텔은 일본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로쿠메이칸(鹿明館)과 같은 급의 격조높은 호텔로 건축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건축물이나그간 관련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했다”면서 “이번에 공개된 자료들은 기존 한국건축사를 보완해줄귀중한 자료”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번에 처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손탁호텔은 화려한 외양에 걸맞게 전체 규모 및 내부·부대시설 또한 당시로선보기 드물게 크고 고급이었다. 우선 토지대장을 보면 손탁호텔의 부지는 이제까지 알려진 184평이 아니라 이보다 1,000평이나 많은 1,184평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또 건물 역시 본관 1개동이 아니라 모두 3개동이었으며,부속건물에는 바와 당구장 등 고급 오락시설도 딸려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배재학당,독립문 등을 시공한 것으로 알려진 심의석(沈宜錫)이 시공한 이 호텔은 2층 벽돌건물로 1층은 보통 객실과 식당,다방으로 사용되었고,2층은 왕과 귀빈들의 특별 객실로 사용되었다.객실 수는 모두 25개. 한편 손탁호텔은 건립 당시에는 ‘정동 29번지’였으나,중구청 지적과에 확인한 결과 현재는 ‘정동 32-1번지’로지번이 바뀌어 있었다. 땅주인 명의도 명치45년(1912년)에손탁에서 ‘감리교회 부인(婦人)외국선교부’로 넘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정운현기자 jwh59@. ■손탁호텔 사연과 인물들.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그리고 손탁은 어떤 내력을 가진 여인인가. 목원대김정동(건축학과) 교수는 “구한말 당시 손탁호텔은 각국 외교사절들과 국내 개화파 인사들의 사교장으로서는 물론 1900년대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대표적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시내 유일의 최고급 호텔이었던 이곳에는 외국의 명사들이 종종 투숙하기도 했다.‘톰소여의 모험’으로유명한 미국작가 마크 트웨인이 러일전쟁 취재차 한국에들렀다가 이곳에 묵었으며,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따님인 앨리스 루스벨트 양도 숙박한 적이 있다.또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앞서 1904년 3월,1905년 11월 두 차례 방한했다가 머무르기도 했다.조선 국내 인사로는 친미 개화파들의 모임인‘정동구락부’소속 민영환·서재필·윤치호·이완용 등이수시로 이곳을 찾기도 했다. 한편 손탁호텔의 건립자인 손탁은 당시 서울(한양) 정동외교가의 ‘프리마돈나’라 할 수 있었다.4개국어에 능통했던 데다 조선 황실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1845년 프랑스 알사스 로렌 지방 출신인 그녀는 1885년초대 주한러시아공사로 부임한 웨베르를 따라 한국에 처음왔는데 웨베르의 처제, 혹은 처형이라는 등 신분에 대해서는 설이 엇갈린다. 당시 국내정세는 친러파가 득세하던 시절이어서 그는 황궁을 자주 드나들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고종황제 내외의 총애와 신임을 받게 됐다.‘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당시 그는 고종황제의 수라상을 차리는 등 측근에서 모셨으며,나중에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에는 웨베르의 추천으로 궁궐에서 사용하는 서양 집기 관리업무를 맡기도 했다.이같은 신임으로 1897년 고종으로부터 현 덕수궁 맞은편의 궁궐 땅 일부를 파격적인 값에 할양받은 손탁은 1902년 구옥을 헐고 그 자리에 러시아풍의 2층 벽돌건물을 짓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손탁호텔’로 이름지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손탁은 호텔을 프랑스인 보엘(J.Boher)에게 판 뒤 호텔 주방에서 일하던 이(李)씨 성을 가진 한국 어린이를 양자로 입양,프랑스 니스로 귀국,그곳에서 죽었다.양자로 데리고 간 한국인이씨는 후에프랑스 여인과 결혼,프랑스 이씨의 시조가 됐다. 정운현기자
  • 러서 순국 구한말 이범진선생 묘터 확인

    구한말 외교관이자 순국지사인 이범진(李範晉·1852∼1910)선생의 묘소 위치가 최근 러시아 교포들에 의해 확인돼 그 자리에 기념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최근 재외동포재단의 초청을 받아 러시아측 자문위원 6명과 함께 고국을 찾은 조 바실리 이바노비치(51·모스크바 거주)고려인연합회 회장은 “최근 상트페테르부르그 시내 한 아파트단지에서 이 선생의 묘소자리를 고증을 거쳐 확인했다”며 “조만간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현지에 기념표지판을 부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 선생의 묘소는 러시아 공산혁명 이후 멸실돼 흔적을 찾을 수 없다가 지난 90년 한-러 수교 이후 한국측에서 다시 수소문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서울출신으로 187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선생은‘아관파천’의 주역으로 법부대신 겸 경무사를 지냈으며 이후주미공사를 거쳐 1900년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돼 근무했다.1905년 ‘을사조약’으로 재외공사 소환요구가 있자 이에 불응,현지에서 밀사로 활동하였으며,1907년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밀사’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3년 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해 휴대한 권총으로 자결,순국했다.헤이그밀사 3인중 1인인 이위종(李瑋鍾)은 그의 아들이며,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정운현기자 jwh59@
  • [씨줄날줄] 울릉도

    동해의 파수꾼 울릉도(鬱陵島)가 위기를 맞고 있다. 상주인구 1만명이라는 마지노선이 무너졌다.일제 강점기인 1932년 이후 69년 만의 일이다.올해 초까지만 해도 울릉도를 터전으로 삼고 있는 주민이 3,840가구에 1만426명이었는데 최근 9개월 사이에 또 39가구 436명이 떠났다.의료시설과 같은 생활기반 시설이 빈약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녀들의 교육문제 때문에 육지로 떠난다고 한다. 울릉도의 역사는 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우산국으로 불렸다가 고려 시대에는 우릉도(羽陵島)로,조선 시대에는 무릉도(武陵島)로 명명됐다고 한다.중앙의 행정력이 미치지못하며 해적의 본거지가 되자 공도(空島) 정책으로 한동안무인도가 되기도 했다.그러다 울릉도가 비어 있는 것을 틈타 왜구들이 드나들자 고종 즉위 19년째 되던 1882년에 왜구를 소탕하고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한편 1900년에는 행정구역을 손질하며 이름을 지금의 울릉도로 바꿨다. 울릉도의 성쇠는 오징어와 운명을 같이했다.부근에서 오징어가 많이 잡히던 1974년에는 주민등록 인구는 무려 2만9,810명에 달했다.오징어를 잡으러 외지에서 온 사람들까지 합하면 7만명에 육박했다고 한다.그러나 이를 정점으로 해마다 많게는 600여명에서 적게는 300여명씩 줄었다.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자녀들의 명문 학교 진학을 먼저 고려하게 됐다는 것이다. 울릉도는 용암이 분출해 만들어진 화산섬이다. 73.15㎢로서울 여의도의 20배가 조금 넘고 주위에는 44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딸려 있다.하와이를 비롯한 대개의 화산섬들이그렇듯 자연경관이 수려하다.또 기후도 해양성 기후로 육지와 다르다 보니 섬잣나무·솔송나무·너도밤나무 같은 육지에서 볼 수 없는 나무들이 39종이나 자라고 있다.섬 전체가한 폭의 그림이요,생태 학습장인 것이다. 울릉도의 진가는 동해의 파수꾼이라는 대목에서 더욱 빛난다.강원도 삼척에서 따지면 134㎞,경북 포항에서 재면 217㎞나 되는 넓고 푸른 동해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동쪽으로 94㎞ 앞에다 독도라는 보초까지 세워 놓지 않았던가.올 가을에는 단풍놀이 대신 울릉도를 한번 다녀올 일이다.뱃길로 넉넉잡아 3시간이면 닿을 울릉도를 찾아 소중함을 직접 느껴 보았으면 하는바람이다. 정인학 논설위원 chung@
  • 윤흥렬 전 치과의사협회장, 세계치과의사연맹 회장에

    윤흥렬(尹興烈·60)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장이 2년 임기의 세계치과의사연맹(FDI)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윤 전 회장은 27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세계무역센터에서 열린 FDI 정기총회 차기회장 선거에서 투표자 104명 가운데 71명(68%)의 지지를 얻어 경쟁자인 벨기에의 미셸 아덴후보를 압도적 차이로 누르며 당선됐다고 대한치과의사협회가 28일 밝혔다. 현재 FDI 재무이사를 맡고 있는 윤 전 회장은 오는 2003년9월부터 2005년 9월까지 FDI 회장직을 맡는다.FDI는 지난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설립된 국제단체로 149개 회원국,75만명의 치과의사들이 가입해 있다. 유상덕기자 youni@
  • 근대문학가6인 삶과 글 다시보기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과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현기영)는 20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를 연다. 주인공은 김동환 박영희 박종화 심훈 이상화 최서해 등 6인. ‘근대문학,갈림길에 선 작가들’이란 주제가 말해주듯 이들 6인의 작가는 한국 근대문학 형성기의 중심에 있다.신경향파문학이라는 ‘공통 못자리’에서 출발,시대 상황과 개인적 세계관에 따라 다른 길을 걸었던 이들의 작업을 조명하는 것은 우리 근대문학 초기 모습과 만나는 자리다. 기념문학제 주요 행사는 심포지엄.총론 각론으로 나눠 이틀 동안 진행된다.첫날엔 김윤식 서울대명예교수가 ‘근대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정과리 연세대교수가 ‘인공 선택과 장기 생성으로서의 근대문학’을 주제로 발제한다.이어최동호 고려대교수(국문학)가 시인 김동환 이상화,‘신경향파 문학’으로 박사 논문을 낸 박상준씨가 소설가 박종화 심훈 최서해의 작품세계를 각각 집중 조명한다. 둘째날에는 임규찬 성공회대 교수가 ‘평론가 박영희와 이상화’를,김재용 원광대교수와 황종연 동국대교수가 ‘근대문학의 갈림길’을 주제로 발제를 맡았다. 두번째 행사는 서지집 발간이다.사실 이 분야는 빛도 안나서 국문학계에서도 소외받아왔다.소설가 한설야의 출생년도만 해도 1900년과 1901으로 오락가락하고 있는 사실이 단적인 예다.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대산문화재단과 작가회의는 6인의 작가에 대한 서지집과 주제논문집을 만들어 일반에 배포할 예정이다.(02)721-3202 313-1486이종수기자 vielee@
  • 한강철교 100년만에 대대적 보수

    우리나라 철도역사와 함께 해온 한강철교가 100년만에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들어간다. 철도청은 다음달 5일부터 내년 말까지 한강철교에 대한 전반적인 보수공사를 한다고 24일 밝혔다. 한강철교는 길이가 각기 1,113m인 총 4개 노선으로 수도권전철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A·B선,국철로 쓰이는 C선,국철과 전철을 혼용 운행중인 D선이 있다.지난 95년에 건설된 D선은 이번 보수공사에서 빠진다. 모두 98억원이 드는 이번 보수공사를 통해 3개 철교의 238개 교량받침대가 교체되고 334개 상부빔과 79개 교각의 벽체도 교체 또는 보수된다. 또 철로 옆에 953m의 보도가 설치되고 44년 건설된 C선에는 도색작업도 가해진다. 1900년 건설된 A선은 건설 5년후 경부선 개통과 함께 처음으로 서대문∼부산 초량을 운행하는 열차가 통과했다. 이후 1911년 B선이 건설된데 이어 C선과 D선이 잇따라 놓여졌다.A선은 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B선과 함께 전철전용 노선이 됐고 국철은 C선이 맡았다. 현재 4개의 철로를 통해 하루 1,220 차례의 왕복 열차가 43만3,000명의 승객과 1만7,400t의 화물을 실어나르고 있다. 철도청 관계자는 “지난 6월 시설안전기술공단에 의뢰,A,B,C선의 잔존수명을 평가한 결과 주요 부재는 200년 이상,보조 부재는 60∼90년으로 분석돼 안전엔 문제가 없으나 교량의수명연장과 월드컵때 미관을 위해 보수에 나섰다”고 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탱글탱글 농익은 ‘가을 유혹’

    L형. 수은주가 여전히 30도를 오르내리지만 성큼 다가온 가을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하늘도 어쩌면 그렇게 높아보이는지요. 우리 오늘 경기도 안성 들녘으로 떠나볼까요.서울에서 가까우니 차가 밀린다 한들 크게 걱정할 일 없고 안성들녘에고개를 척척 드리우기 시작한 벼이삭 구경도 할겸 해서요. 그리고 무엇보다 거뭇거뭇,탱글탱글,가을의 때깔로 익어가는 포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지 않겠어요.동의보감에도 심장병·암 등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기재돼 있다지요,아마. 경부고속국도의 포도(鋪道)를 냅다 달립니다.참,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이 새콤달콤한 과일로 착각했던사춘기 시절이 문득 생각나지 않나요.안성 나들목을 나와안성읍을 거슬러 충남 입장까지 흐르는 38번 국도변은 우리나라 최대의 포도 산지라 할 수 있지요.안성 들녘은 일교차 크고 강우량 적어 맛좋은 포도산지로 유명하지요. L형. 이 안성들녘을 수놓은 포도가 한 프랑스 선교사의 한국사랑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아시나요.1900년 10월 안성천주교회를 창설한안토니오 공베르신부가 마스커트,함부르크포도나무 등 묘목 20여그루를 성당 앞뜰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에 포도가 전래된 100여년이 지난 지금 이렇듯 풍성한포도밭으로 발전됐다는 거지요.핍진한 삶에 절어있던 안성 농민들에게 새 소득원으로 권장한 것이었는데 이만하면그 프랑스인 신부의 선교가 종교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지금도 안성성당 뜰에는 그때 조성된 포도밭이 남아있다는군요. 눈치챘겠지만 포도는 그저 모두 한가지 종류인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에서 모두 13종 정도가 재배될 정도로 종류가다양하네요.캠벨얼리를 비롯해 거봉,청포도,델라웨어,마스커트 등의 크기와 색깔,맛이 다 다르고 수확시기도 조금씩차이가 나죠. 남·북위 20∼50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재배되니 이만한 생존능력을 지닌 과일도 찾아보기 힘들죠. 근데,이 포도밭들이 몇년전인가부터 회색빛 탈출을 꿈꾸는 도시인들의 헙헙한 입맛을 알아채버렸다는 거요.어느포도밭이나 들어가면 나들이나온 가족들 마음놓고 따먹을수 있도록 하고 도시락도 ‘까먹게’ 하고 포도나무 그늘아래 모여앉아 노래부를 수 있게 문을 열어젖히기 시작한거지요. 아이들에겐 황토흙 밟으며 제 손으로 키돋움해서 포도를따서 먹는 재미가 어디 동네 슈퍼에 쌓여있던 포도를 냉장고로 옮겨와 꺼내먹는 재미에 비길 수 있겠어요.그러니 포도밭 순례는 단순히 과일을 얻으러 가는 길이 아니어야지요.어린 아이들이 아예 모르고 자란 고향을,어른들이 잊어버렸던 그 가을을 추억하게 하는 여정이지요. L형. 그래서 2년전에 가보았던 삼정원이란 옥호가 붙은 포도밭을 지난 주말 다시 찾았지요.이 농원은 벽돌로 화덕도 만들어놓아 갖가지 재료로 재어온 고기들을 구워먹을 수 있게 했고 제법 널찍한 잔디밭도 갖추어 놓아 젖을 막 뗀 아기들과 마음껏 몸을 데구루루 굴릴 수도 있어 특히 좋아요. 포도나무 그늘아래 돗자리깔고 정담을 나누기에도 좋고들마루도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안성들녘을 거쳐온 시원한 들바람을 이마에 맞는 재미도 쏠쏠하지요.규모는 초미니이지만 퍼팅연습장까지 갖춰져 있고 이번에 찾으니 춘향이가 타고 뛰었을 만큼 제법 운치있는 그네까지 큰나무에 묶여있더라고요. 한가운데 주택을 빙 둘러 2만평 되는 포도밭이 감싸고 있어요.군데군데 비가림(하우스) 재배하는 곳이 눈에 띄고요. 온몸을 수건과 긴옷으로 철저히 감춘 아주머니들이 말없이 포도따는 장면을 지켜보던 딸애가 지레 엄숙해져 있더라구요.딸애는 “아빠,저 아주머니들 일하는 것 보니 무섭다,그치” 해요. 포도의 당도는 여름날 햇빛이 좌우하는데 올핸 유난히 비가 오는 날이 많아서 당도가 올라가지 않는다고 주인 아주머니는 걱정이 태산이랍니다. 요즘 가장 많이 찾는 포도인 캠벨은 당도가 높고 알갱이가단단한 데다 저장성이 좋아 맛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해요.맛있는 포도를 내놓는 비결은 “당도가 오를 때까지진득하게 기다리는 일”이라고 주인 송태연씨(62)는 귀띔합니다. 돌아오기 전 아이에게 포도 상자를 들어보게 했지요.아이는 제손으로 따낸 포도가,아니 우리들의 희망과 삶이 가져올 희열(喜悅)에 들떠 환히 웃고 있었지요.이빨 사이에 낀포도껍질로 말입니다.후훗. 참,포도껍질에 묻어있는 하얀 분말,농약 찌꺼기인 줄 다들알지만 천연당분이래요.그래서 세제로 씻어내지 말고 큰그릇에 소금풀어 살짝 씻어내는 게 비결이래요. 안성 글·임병선기자 bsnim@. ●가는 길.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안성읍까지 가서 택시를 4,000∼5,000원 정도에 이용할 수 있다. 자가용족은 경부고속국도 안성나들목을 나와 안성쪽으로38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내리 삼거리에서 중앙대 안성캠퍼스쪽으로 난 지방도로를 탄다.안성경찰서를 지나 오른쪽도로로 갈아타 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오른쪽으로 삼정원표지판이 나온다. 삼정원(031-672-1247, 1364) 말고도 서운면 산릉리 오하농장(031-677-7749)도 가족 여행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그외 포도밭 문의는 안성농업기술센터(031-674-2003),입장농협(041-585-5830),대부 농협(031-886-0004),김포 농협(031-980-2577). ●들러볼 곳= 안성 지방도로는 곳곳에 아름다운 저수지를끼고 있어 드라이브명소로 이름높다. 작고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석남사는 진천 넘어가는 313번 지방도로를 타고 배티고개 넘어가기 직전 오른편에 있다.열두굽이 계곡이 시원하고 우거진 숲이 나그네의 지친 심신을 달래준다. 배티고개를 넘어서자마자 충북 진천.고갯마루 바로 다음에 카페 ‘그곳에 가고 싶다’(031-533-7844)가 있다.깨진항아리를 얹은 지붕과 흙벽집,안에 들어서면 라틴음악이흘러나와 쉬어갈 만하다. 안성읍에서 20㎞ 떨어진 고삼저수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 촬영지로 이름높다.늦가을 억새가 무성한 저수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재미가 삼삼하다.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4)식민지 저항적 지식인

    근대 여성작가 중 가장 치마폭이 넓었던 최정희는 유파와연령을 초월하여 문우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소중한 것으로는 국제 입찰에 부칠만한 중량급 서간문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김사량(金史良,본명 時昌,1914∼1950)의 편지이다.일본에서 더 유명한 김사량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를 일깨워 준 근대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한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평양에서 1914년에 태어난 그는 평양고보 재학 중 배속장교와 일본인 교사 및 그들에 동조하는 조선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처분을 받고는 형 시명(時明,교토제대 법학부 졸업 후 사법·행정 양과 합격,홍천·평창 군수,조선인 최초의 전매국장,8·15 후에는 중앙산림조합연합회 이사장 등을 지냄)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학창시절에는 연극에 관심이 많아 신협(新協)극단과 연계,장혁주(張赫宙)가 각색한 ‘춘향전’의모국 순회공연에도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치다 여러이유로 경찰에 자주 구금 당했다. 결혼 직후 하이네에 관한 논문으로 도쿄제대 독문학과를졸업(1939)한 그는 잠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서울의 하숙집에서 출세작 ‘빛 속에서’를 썼다.이 무렵에 아마 서울의 잡지사와 문인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것인데,최정희와의 인연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도쿄제대 대학원 입학허가를 받은 그는 6월 아내와 도일,일본과 한국 문단을 잇는 가교 역할을 맡게 된다.편지에서 김사량은 매우 조심스럽게 최정희의 ‘지맥’을 추천했으면 싶었으나,이미 일본의 다른 출판사(赤塚書房)가 추진하고 있던조선문학 선집에 관여하는 장혁주가 손을 댔기에 ‘흉가’로 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몇 차례 오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는 최정희가 자신의 소설을 일본에 소개되기를 희망한데 대한 답신 내용이 대부분이다. 장혁주는 누구였던가.김사량보다 먼저 등단한 그는 잡지사,문인 등을 후배에게 소개시켜 주는 역할을 했던 재일조선인 문단의 대선배였다.1905년 대구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은중(恩重),창씨개명은 노구치 가쿠주(野口赫宙,첫 창씨명은 野口이었음)로,불륜사건에 연루되어 도일,본처와 이혼,일본여자와 재혼,8·15후 아예 일본으로 귀화해 버린 인물이다. 그는 초기의 민족적인 성향과는 달리 친일화 정도가아니라 아예 혈통까지도 일본인화 해야된다는 각오로 일본여자와 결혼을 감행한 친일문학인 가운데서도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었다.1952년 10월,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변장한 채 일본 ‘부인구락부’ 특파원 신분으로 입국하여 취재활동을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을 힐난하는 글을 써서 당시 문학단체가 법석을 떨게 했던 장본인이다.그는 아예 일본문학보국회에 가입하여 활동에 열을 올렸던 인물로한국을 영원히 등진 조국상실자가 되었다. 최정희의 ‘지맥’은 평론가 한식(韓植)이 번역을 맡은 것으로 드러나며,편지에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김사량은 ‘모던 일본’에다 이광수의 ‘무정’을 번역했는데,아마 이 사실은 고의로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김사량은 ‘조광’에장편 ‘낙조’(1940.2∼1941.1)를 연재하면서 모국어 문제에 대하여 매우 겸허하게 최정희의 조언을 구하고 있지만사실 그는 ‘양국어 작가’로 손색이 없었다.그가 ‘삼천리’에 발표한 글로는 잡문 ‘조선문학과 언어문제’(1941.1)와 소설 ‘지기미’(1941.4)인데,이 두 사실을 편지에 대입해 읽으면 그와 최정희의 교유가 대략 1939∼1941년임을 알 수 있다.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문예춘추’는 1935년 일본최고의 아쿠다가와 (芥川)문학상을 제정했는데,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김사량이 이 상의 후보작으로 뽑혀 일약 일본문단의 유망주가 되었다(1940.2).1941년12월 9일 새벽 진주만 기습에 따른 사상범예방구금법으로감금당했고,유명세만큼 그에게 부하되는 역사적인 책무도커서 친일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했다. 일본 문학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 1월29일 석방된 그는 이내 귀향,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강제동원을 피할 수 없었다.이효석(1942년 작고)이 있었던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사가 된 건 1944년 4월.강제 친일에 동원되면서도 일본문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격렬하게 식민통치를 비판하던 이투사는 1945년 2월 조선출신학도병 위문단으로 중국에 파견,일정을 마친 뒤 탈출,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하여 떳떳하게 해방을 맞았다.이때의 탈출 투쟁기는 ‘노마만리(駑馬萬里)’란 제목으로 남아있다. 1945년 11월 서울에서 그의 희곡 ‘호접’이 단성사에서 공연되는 등 광복 후 한국 좌익문단의 정화에 일조했던 그는이듬해 평양으로 돌아가 6·25때 종군작가로 참가,후퇴 도중 원주 부근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낙오된 채 행방불명된 게 그의 최후다(안우식 지음,심원섭 옮김 ‘김사량 평전’ 참고).김사량은 자신의 친일행각이 강제에 의한 것임을 문학인들에게 공공연하게 실토했던 점과 모험을 무릅쓴 극적인 탈출로 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 문학인이었다는 점에서식민지시대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세계 저항문학사에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극적인 생애는 한설야(韓雪野)도 마찬가지다.기생 이름 같은 낭만적인 필명과는 달리 1900년 함주(함흥)에서 태어난그는 1976년 북한에서 사망할 때까지 영욕을 두루 겪은 비극적인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인물인데,유명한 한의학자 이제마(李濟馬)의 제자로,홍범도(洪範圖)등의 의병활동을 무마시키라는 일제의 강요를 거절코 고향을 떠나 피신했다.한설야는 경성제일고보에다니다가 서모(庶母)와 불화로 귀향,함흥고보로 전학,3·1운동에 관련되어 구금 체험을 한다.중국,일본 등지를 떠돌거나 유학 한 뒤 ‘조선문단’으로 등단한 그는 서울에 머물렀다가(1925∼1926),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죽자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1927) 귀국하여 카프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문학과 사상 연구회,‘한설야 문학의 재인식’).한설야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은 1932년경인데 함남지역에 특파됐다가 본사에 왔을 때는 경영권 문제로 매우 복잡 미묘할 때였다.창간 초기부터 경영진의 시국 순응 성향과 편집진의 민족의식 지향이 갈등관계를 유지했던조선일보는 계속 사주가 바뀌면서도 반일논조 때문에 정간과 필화가 잇따랐다.신간회(新幹會)운동으로 안재홍(安在鴻)사장이 구속되는 등 혼란을 틈타 고리대금업을 하던 채권자 임경래(林景來)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주장하여 조병옥(趙炳玉)·주요한(朱耀翰)의 정통 편집팀과 대결,두 개의 조선일보 발행이라는 희극이 연출되다가 방응모(方應謨)가 참여,부사장을 거쳐 발행인이 된 것이 1933년 7월(사장은 조만식).이 혼란 속에서 한설야는 학예부에 근무하며 노동 현장소설의 신기원이란 평가를 받은 이북명(李北鳴)을 발굴하여 ‘질소비료공장’을 연재 중단 당하는 등 카프노선에 충실한 언론인으로 활동한 것 같다. 당시 정황을 한설야는 단편 ‘세로(世路)’에서 너무나 자세히 언급하여 한국언론사의 충실한 증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소설은 자신이 회사로부터 해직 통고서를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왜 그렇게 됐는가에 대한 자초지종을 회상하고있다.등장인물은 모두 실명이지만 사정상 이니셜을 썼는데,쉽게 알만한 인물들이 그대로 나온다.새 경영진은 기구와인사 개편을 통하여 그때까지 신문사의 주류였던 M일파(투옥 경력자 등으로 묘사)를 약화 시키는데,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배신감과 사회적인 공분이 폭발한 한설야는 술자리에서 변절한 동료의 뺨을 후려친 게 화근이 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 조선일보 사사(社史)에 의하면,1934년 1월 1일자로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특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된 M(문석준)의 좌천도 바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미뤄 볼 때 한설야의 퇴직도 이 무렵일 것이다.이 문석준은 1943년 함흥에서 한설야와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한설야는 1944년 5월 석방) 당하는 주인공이다.1934년은 그에게 매우 불행한 한 해였다.해직 후 8월 그는 카프 2차사건으로 구속됐기 때문이다.달필인 한설야의 편지는 함흥에서보낸 것인데,아마 1941∼2년초 경 ‘삼천리’가 ‘대동아’로 개제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최정희가 한설야에게 잡지에 재수록할만한 짧은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에 대한 회답 형식인 이 편지에서 그는 ‘강아지’와 ‘능금’을 천거했다.앞의 작품은 ‘한설야 단편집’에 실려 있는데,그게 1941년 7월에 나왔으며,뒤의 것은 1940년 간행 단편집 ‘귀향’에 게재된 것으로 볼 때,그리고 ‘대동아’개제가 1942년 3월부터였음을 감안하면 이 편지가 씌어졌던 시기는 밝혀질 것이다.이 무렵 그는 함흥에서 서점·극장·인쇄소 등에 손을 대는 등 생업과 창작에 전념하면서 해방의 날을 준비하고 지냈다.여담이지만 한설야는 광복 후북한에서 ‘김일성장군 전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쓴 한편 소련(1947),평화옹호 세계대회 참석차 프랑스(1949) 등지를 방문하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1962년 비판당한 후 불행한 최후를 마치고 작품도 판금,아직도 전면적인 해금이 안된 상태에 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8월의 독립운동가 정정화 선생

    국가보훈처는 31일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맡았으며,한국애국부인회 재건을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鄭靖和)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3.1만세운동 후인 1920년독립운동단체 대표이던 시아버지와 남편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이후 31년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국내에 잠입,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임정에 전달했다. 22년 일경에 체포돼 고초를 겪기도 한 선생은 일제의 패망으로 1946년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아 왔다.당시 임정 요인 가운데 선생이 지은 밥을 먹지 않은 이가없었다.이동녕 선생이 중국 사천성에서 외롭게 숨질 때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43년에는 임시정부내 좌우익 통합을 위해 여성 차원의 민족통일전선인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는데 주요 역할을 하기도 했다.광복 이듬해 귀국한 선생은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김구(金九) 선생의 노선을 지지했다.정부는 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김삼웅 칼럼] ‘일왕의 음모’에 도사린 음모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둘러싸고 현해탄의 파고가 높아간다.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북한과 중국·대만 등 과거일제 침략을 당한 많은 나라가 일본의 ‘신군국주의 교과서’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동북아 평화질서를 교란하는 일본의 처사에 분노가 치솟는다. 일본은 전후 미국의 핵우산 아래 급속히 경제성장을 이루는 한편 ‘전범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침략주의보수본류세력이 지금까지 일본사회를 지배해왔다. ‘도쿄재판’으로 A급전범 몇명이 처형됐지만 미국이 주도한 재판이고 그나마 미·일간의 유착으로 최소한에 그쳤다. 일본군국주의 만행이나 독일·프랑스 등과 비교할 때 형식적인 처리에 불과했다. 오늘날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은 여기서 배태되고, 한국이 친일세력을 척결하지 못하여 수구세력이 득세한 것과 비슷하다. 흔히 일본의 이중성을 비판하여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제시되지만 일본의 이중성과 교활성은 ‘일왕의 음모’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면서일본 왕실은 은밀하게 우수한 인재를 골라 미국에 유학을보냈다. 패전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일본의 로비스트로 육성하려는 원려지계(遠慮之計)였다. 실제로 패전후 이들의 역할은 대단했다. 일본을 잘 모르는 미국은 이들의 자문으로 전후처리에 나섰다. 일왕(천황)제 유지, 전범처리최소화 등 일본의 명운에 크게 기여하고 전후 복구와 미·일동맹관계에도 역할을 했다. 전쟁을 준비하면서 적국에 간첩이 아닌 유학생을 보내는 나라, 그것도 왕실에서 은밀히 추진한 저들의 이중성과 교활함에 전율을 느낀다. 도쿄의 고서점가를 둘러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의 저력은고서점에서도 찾게 된다. 도쿄중심지의 최신건물에 진열된어마어마한 고서들, 분야별·국가별·전문서적을 갖추고 그것이 사업으로 번창하는, 일본독서층을 볼 때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1900년대 초기에 한국의 가축, 도로, 하천, 귀신, 무당…등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전문분야를 연구하고 출판하고 보존·유통하고 있다. 일제의 한국병탄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연구하고 준비하여 먹어삼킨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한국의 족보를 연구하는 사람이 수십명이라고 들었다. ‘족보’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저들의 한국연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치열하고 치밀하다. 우리는 어떤가. 사학자들은 너도 나도 독립운동사에 매달린다. 국가정통성에서 볼때 중요하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보다 몇십배 많은 친일파·매국노문제를 본격적으로, 필생의과제로 연구하는 학자는 드물다. 유학이라면 대부분 미국행이다. 서울대교수 64%가 해외유학출신이고 미국이 전체 유학파의 78.6%다. 미국으로 가야 출세가 보장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군국주의는 누가 뭐래도 갈데까지 갈 것이다. 우리 정부의 군사교류 중단이나 문화개방연기, 일본함정입항불허 등 대책이나 국민의 규탄시위로 시정될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김치 하나라도 ‘기무치’를 이기는 전략과 치밀함이다. 세계적 석학 앨빈 토플러가 정보통신 정책연구원의 의뢰로청와대에 제출한 ‘발전전략’에는 음미할 대목이 많다. “한국정부는 민간기업 및 대학과 공동으로 ‘바이어벤처펀드’를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 이 펀드를 통해 미국·유럽·중국지역의 최첨단 생명공학 신생업체 100곳을 선정, 한국과학자와 대학원생이 연구에 공동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투자해야 한다. 투자과정에서 일부 손실이 발생하겠지만 가장 진보된 지식영역에 한국을 진출시키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는 내용이다. ‘일왕의 음모’에 비교할 바 아니지만 정부나 기업, 민간단체들이 서둘러야 할 지적이다. 일제가 침략하던 100년전과 비교하여 지금 우리는 무엇이얼마나 변했는가. 국토는 여전히 두동강이고 정쟁에 날이저물고 수구언론은 족벌이해에 얽혀 사회정의와 민족문제를왜곡한다. 일본을 깊이 알자. ‘일왕의 음모’속에서 또 무엇이 ‘음모’되는가를. 김삼웅주필 kimsu@
  • [씨줄날줄] 기록없는 정부회의

    국회 의장이나 상임위원장이 온 것만으로 회의가 시작되지는 않는다.무엇보다 속기사가 착석해 있어야 한다.중구난방,동문서답 일쑤인 정치인들의 말을 일일이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그런 의구심은 국회 속기록을 보면 스르르 녹는다.1970년대 초 사채를 동결한 8·3조치 관련 국회 속기록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당시 의원들의 웃음,호통까지낱낱이 기록된 데서 회의분위기가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1,900년전 사마천(司馬遷)이 대나무에 한 글자씩 적어 사기(史記)를 완성시킨 고초에는 못 미쳐도 말 한마디,한마디를 기록한 속기사의 수고와 고마움을 알 것 같다. 요즘 기록수단은 녹음기와 비디오로 다양화됐다.모 은행부장은 무역회사 사외이사로 오라는 제의를 거절했다며 그이유를 토로했다. “요즘 기업 이사회는 살벌하다.임원들이 회의에 들어갈 때 녹음기를 갖고 들어간다”이사회 결정이 문제되면 재산가압류까지 당하기 때문에 미리 분명한책임 한계를 밝혀두려고 눈에 불을 켠다는 것이다. 대조적인 것이 요즘 정부 회의다.참여연대가 작년 1월부터올 4월까지 차관급 이상이 주재한 중앙행정기관 225개회의를 조사했다.이 가운데 속기록이 작성된 회의는 7개뿐이며 녹음기록을 남긴 회의는 전혀 없고 회의록도 부실한것으로 드러났다.2년전 중앙부처 회의 기록 작성을 법에의무화했는데도 장·차관들이 이를 무시하고 회의를 대부분 ‘말’로 끝낸 것이다.기록을 게을리 하거나 회피하는우리나라 풍토는 잘 알려져 있다.자신의 말이 낱낱이 기록되다 보면 어느날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는,안개같이불투명한 정치·사회적인 격동 때문이었으리라. 정부기록보존소는 정부기관의 한심한 기록 문화를 이렇게전했다. “1980년대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러서는 핵심 기관의 문서일수록 대부분 등록하지 않고 무단파기하는 일이자행되고 있다. 책임이 따르는 문서일수록 보존기간을 짧게 하고 있고 정책이 결정되는 중요회의일수록 회의록·대화록을 작성하지 않고 있다” 기록은 역사적 경험 축적이다.그런데도 기록을 기피하는것은 물론 한술 더 떠 기존 기록을 없앤다니 어이가 없다. 시행착오가 빈발하는 이유의 일단을 알 수 있을 것같다.장·차관들에게 정책실패와 기록폐기의 책임을 따끔하게 물어야 한다.그래야 녹음기를 지참하고 회의록도 만들지 않을까. 이상일 논설위원 bruce@
  • 책임과 자율 강조하는 몬테소리 교육

    [신시내티 이순녀특파원] 지난달 말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시에 위치한 클락몬테소리 중·고등학교의 수학 수업시간.우리나라 중1·2학년에 해당하는 7·8학년 학생 30여명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학생들은 삼삼오오원형 탁자에 둘러앉거나 바닥에 주저앉아 문제풀이에 열중이었다.교사 2명은 교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학생들의질문에만 답할 뿐 강의하지는 않았다.아킴 톰슨군(13)은 “수업시간에 공부할 내용은 각자가 정한다.선생님은 가이드라인만 제시하고 어려운 부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말했다. 일반 학교와 달리 2∼3학년을 한 반으로 묶는 다연령학급편성과 자율적인 수업방식은 이 학교뿐 아니라 몬테소리교육을 적용하고 있는 모든 학교의 공통된 특징이다. 이웃한 노스아본달 몬테소리 초등학교 역시 1∼3학년과 4∼6학년을 한 교실에서 가르친다.학생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교과를 스스로 선택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다.교사들은매월 교육계획을 꼼꼼히 짜지만 학생들에게 교과과정을 강요하거나 주입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대신 주변 환경을 조성해 학생들이 알아서 공부하도록 세심히 보살핀다.이 학교 미차 콘스탄티니 교장은 “외견상 혼란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책임과 자율을 강조하는 몬테소리교육 철학의 효과는 높다”고 말했다. 클락 몬테소리와 노스아본달 몬테소리는 신시내티시의 공립학교다.몬테소리는 이탈리아의 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여사의 독특한 교육법을 적용한 일종의 대안학교 프로그램이다.1900년대초 빈민가에서 시작된 이 교육방식은 세계 각지로 전파되면서 중·상류층 대상의 사립학교 위주로 확산됐다. 신시내티 시교육위원회가 몬테소리교육을 공립학교에 도입한 것은 지난 70년대 초.공교육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미국 전 지역에 걸쳐 공교육에 대안교육 프로그램을 접합한 마그넷스쿨운동에 따른 것이다.거주지역에 따라 학교를 배정받는 보통 공립학교와 달리 마그넷스쿨은 원하는 학생 모두에게 문호를 개방한다. 현재 신시내티시의 공립 몬테소리학교는 노스아본달,샌즈,윈톤,카슨 등 초등학교 4곳과 클락 등 모두 5곳이다.이중클락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몬테소리교육을 도입한 공립 중등학교로 주목받고 있다.7년 전 설립된 클락은 지난해 처음 졸업생을 배출했다. 신시내티 시교육위원회 샐리 워너 위원은 “초등학교 교육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학부모들이 수년간 시교육위원회를 설득해 중등학교 설립을 이끌어냈다”면서 “학부모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가 새로운 시도를 가능하게 했고,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워너 위원 역시 두 아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고,현재 두 딸이 재학 중이다. 몬테소리교육이 일반학교 교육과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교사에 의한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적절한 교재와 환경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데 있다.두 세살터울의 학생들을 한 학급에 배정하는 이유도 서로 돕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체득하게 하려는 배려에서다.수업분위기는 대단히 자유롭지만 자율과 책임이 똑같이중요시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자리잡혀 있다.대부분 석·박사 학위소지자인 교사들은 학습환경을 만들어주고,개개인의 지적 성장과 행동발달 상황을 지켜보는 세심한 관찰자의 역할을 한다. 수학,사회,과학,외국어 등 일반교과 과정 외에 체육,예술,야외활동 등 다양한 현장체험을 강조하는 것도 몬테소리교육의 특징이다.클락몬테소리의 토머스 G 로스웰 교장은 “학년 말 체험여행을 위해 학기 초부터 학생들이 스스로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기금마련 방안을 논의한다”고 설명했다. 몬테소리교육은 80년 중반부터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유아교육의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일부 초등학교에서는 몬테소리 교재를 통해 개별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cora@. *코른골드 몬테소리교사양성센터 소장 . [뉴욕 이순녀특파원] “몬테소리 교사는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할 때까지 기다립니다.스스로 내재된 가능성을 발견하고,어떻게 공부하는지에 대해 교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미국 몬테소리교사양성센터(CMTE)의 캐럴 울프 코른골드소장은 ‘어린이는 창조적이며 능동적인 존재’라는 몬테소리의 기본 철학을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교사를 길러내는데 초점을맞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몬테소리 교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대졸자면 누구나 지원가능하며 1∼2년의 교육과정과 1년간의 현장실습을 거친다.CMTE는 지난 20여년간 미국내 몬테소리 교사 양성본부 역할을 해왔다. ◇몬테소리 교육의 장점은=개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고,다양한 교재들을 통해 이해력 향상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어 몬테소리 유아반의 모든 시설물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제작된다.아이들은 자신의 키에 맞는 식탁과 싱크대에서 직접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다.어릴 때부터 사회성을 기르도록 3∼6세,6∼9세,9∼12세로 다연령 학급을 구성하고 있다. ◇학업성취도는 어떤가=다른 학교보다 성적이 우수한 편이다.이 때문에 매년 학교수가 배로 늘어나고 있다.초기엔 중·상류층이 대상이었지만 점차 공교육으로 확대되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수천개의 공·사립 몬테소리 학교가 있다. ◇몬테소리 학교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면=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또 교재를 갖추는데 드는 예산이부족한 경우도 종종 있다. 뉴욕 인근에 있는 센터 옆에는 몬테소리 영·유아 시범학교가 자리잡고 있어 교사 양성과 실습이 동시에 이뤄지고있다.35년 넘게 몬테소리 교육에 몸바쳐온 코른골드 소장은 지난해 미국 몬테소리협회가 주는 영예의 상을 수상하기도했다.
  • 동서양 고전램프 한자리에

    고전적인 자태를 뽐내는 동서양의 오래된 램프들을 감상할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김훈정(金薰庭·56) 훈스 앤틱 갤러리 대표는 오픈 기념행사로 세계 앤틱(Antic) 램프전시회를 다음달 15일까지 개최하고 있다.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이 갤러리는 김 대표가 20여년 동안 전 세계에서 수집한 램프 100여점으로 가득차 있다. 포도,사과,새 등 갖가지 모양을 뽐내고 있으며 쇠,유리 등재질도 다양하다. 천장에 달린 것,책상 위에 어울리는 것,1900년 초기 프랑스·미국의 스탠드 램프,천장에 거는 램프,동서양의 꺼멍쇠 기름 등잔,촛대….이들 앤틱 램프들은 은은하면서도 화려하다.특히 사막에서 사용되었다는 ‘데저트램프’(desert lamp)는 바람이 불면 자연스럽게 회전해 쉽게 불이 꺼지지 않는다.바람이 많은 사막에 적응하도록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다. 갤러리에는 램프 외에도 고전적인 팔찌,목걸이, 반지들이램프와 어우러져 이국적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김대표는 유럽과 미국,터키,인도,이스라엘,네팔,이집트 등을 여행하며 이들 램프와소품들을 수집했다.시조시인 김상옥 옹의 맏딸로 김 시인이 70년대 서울 인사동에서 한국골동품점‘아자방’을 경영하면서 램프와 인연을 맺었다. “이상하게도 동서양의 램프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램프는길을 밝히는 도구였기 때문에 무역하는 상인들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였을 것입니다.따라서 오랜 세월동안 동서양을 넘나들며 종합적으로 발전한 것 같아요”라고 김대표는 설명했다. 램프를 즐겨 수집한 까닭에 대해서는 “동양이나 서양이나불빛은 인간에게 영혼을 상징하고 종교적으로 희생, 광명,소망을 말해주는 것인데 램프는 그 불빛을 담는 그릇이기에어느 것보다도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02)3445-0888이송하기자 songha@
  • 박은식선생 호적 발굴

    사학자·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지낸 백암 박은식(朴殷植·1859∼1925)선생의 대한제국 당시의 호적이 처음 발굴됐다. 이 당시의 호적자료가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는 데다 대표적인 민족지사 가운데 한사람인백암의 가계·가족사항·생활상태 등을 소상히 보여주는 자료여서 사료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이 호적은 대한매일신보사가 지난 99년 간행한 ‘백범김구전집’에 이어 ‘박은식·양기탁전집’(전10권) 간행을 위한 자료수집 과정에서 전집편찬위원회(위원장 윤병석)가 발굴,공개한 것이다. 이번에 발굴된 호적은 광무10년(1904년) 6월 한성부(현 서울시) 북서(北署)에서 작성한 것으로,당시 백암의 집주소는가회방(嘉會坊·현 가회동)이나 통(統)·호(戶)는 상태불량으로 확인이 어렵다. 당시 백암은 호주로 나이는 48세,본(本·본관)은 밀양,부인은 연안 차씨 44세로 나와 있다.또 직업을 쓰는 칸에 백암의 직업을 전교관(前敎官)으로 적고 있다.백암은 1900년부터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수를 지냈다.호적에 직업을 적은 것은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호적에 신분을 명기할 수 없게 된 데 따른 것이다. 선조의 가계란에는 부(父·用浩)·조(祖·宗錄)·증조(鳳儀)·외조(外祖·盧允儉) 등은 물론 생부(生父)란까지 두고있는데 이는 당시 입양이 흔한 일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윤병석 전집편찬위원장(인하대 명예교수)은 “백암 선생의부인·증조부·외조부에 대한 신상은 이번 호적에서 처음확인됐다”면서 “백암이 남긴 이력자료가 거의 없는 데다이번에 발굴된 호적은 공문서라는 점에서 사료가치가 매우크다”고 말했다.‘전집’은 대한매일신보사와 ㈜동방미디어가 공동주관으로 발행하며,올 가을 전10권(박은식 7,양기탁 3) 규모로 출간될 예정이다. 한편 전집편찬위원회는 백암의 저서 가운데 ‘한국통사’등 11종은 입수했으나 ‘동명성왕실기’‘발해태조건국지’‘명림답부전’‘대동민족사’‘이순신전’‘이준전(李儁傳)’‘발해사’‘금사(金史)’ 등 8종의 행방은 수소문 중이다.(02)2000-9008정운현기자 jwh59@
  • “”美·유럽은 장애인 천국””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식 날 “모든 행정관서 장은 법과 규정에 의거 인종,피부색,종교,성별,이전 국적,연령 그리고 장애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인들에게 공평히 대해야 한다”는 명령을 하달했다.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아니더라도 1900년대초부터 있어온 법률을 총정리해 지난 70년대말 공식 선포한 ‘장애미국인법’은 일상생활내 신체·정신적 차별금지는 물론 고용·복지혜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일반인과 동등대우를 명시하고 있다.그 결과 미국은 장애인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공공건물은 물론 모든 건물·시설에 장애인 접근불가능 사례가 발견되면 엄청난 벌금을 부과당하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다.대중교통수단 역시 장애인 접근을 고려하지 않으면 신청단계에서 취소된다.어떤 도시 뒷골목에 가도 장애인용 보도블럭은 언제나 보수돼있다. 또한 장애인들이 고통을 겪는 원인단계에서부터 대책을 강구,일반인이 장애를 당한 일터에서부터 장애정도에 따라 엄격한 지원혜택 체계를 마련하고 있다.물론 일터에서의 장애자 차별은 엄두도 못내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된지는 오래됐고 차별에 대한 벌금 또한 사안에 따라 엄청나다. hay@. 유럽에는 '장애인의 날'이 따로 지정돼있지 않다.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장애인 정책은 각 정부 정책의 기본 바탕에 깔려있다. 유럽 정치·경제 통합을 추진하고 있는 유럽연합(EU)집행위 차원에서 '장애인의 권리'는 곧 '유럽시민권'의 개념. 장애인에 대한 기회 균등및 권리 보장은 유럽통합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 간주린다. EU집행위는 '장애인 기회균등 회원국 정책 백서'등을 두고 15개 회원국간 사회보장 분야의 격차를 줄이는 데 노력하고 있다. 유럽내에서 장애인 정책을 선도하는 나라는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이다. 네덜란드는 장애인부를 별도로 두고 있다. 모든 장애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주택도 무상으로 보급하고 있다. 독일은 보건부 등 정부기구와 비정부기구(NGO)가 유기적으로 협조하는 체제. 고용및 서비스 이용에 있어 기회 균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정보기술(IT)접근에 장애인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장애인 IT학습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고 있다. '장벽없는 환경(barrierfree environment)' 프로젝트는 장애인들이 대중교통과 빌딩 등 모든 공공시설을 이용하는데 불편을 주는 장벽들을 없애는 사업이다. 김수정기자
  • 역사왜곡 日교과서 검정통과 파장/ 신용하교수가 본 ‘우익교과서’

    일본 극우파들이 채택운동 전국조직을 만들어놓고 모리정권이 이번에 검정통과시킨 후쇼사(扶桑社·새역사교과서를만드는 모임편)의 2002년도용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한국관련 부문을 재침략 책동에 맞추어 다시 날조 왜곡한 것이 큰문제이다. 우선 고대사부터 보면,일본은 야요이시대부터 7세기 야마토 정권의 고대국가 수립 때까지 한반도 국가들의 선진 문명·기술·지식 전수와 한자와 기술자의 파견까지 간청,한민족 국가들이 이에 응해서 친절하게 가르쳐주어 일본 고대국가와 문화의 기초를 만들었다.이것이 역사적 진실이어서,20년 전 한국 대통령 방일 때에 일본왕은 ‘귀국이 특히 5∼6세기에 우리 일본에 준 원조에 깊은 감사의 생각을 간직하고 있다’는 요지의 환영사를 한 바도 있다. 그런데 1890년대∼1900년대 초기에 걸쳐 일본 황국사관 주창자들은 하야시(林泰輔)를 선두로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한국침략 식민지 강점을 준비 지원하기 위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날조해내었다.야마토 정권이 4∼6세기에 한반도 가라 지방을 식민지화하여 ‘임나일본부’라는 총독부를두고 직할식민지로 통치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1910년 일본의 한국점령은 ‘침략’이 아니라 고대의 성취를 ‘복구’하는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완전한 날조였다. 1982년 일본교과서 왜곡사건 때 다수 교과서는 ‘임나일본부설’을 사실이 아니라고 뺐고,일부는 수록했었다.이에 분개한 한국 국민과 정부의 규탄으로 결국 모든 일본 교과서는 ‘임나일본부설’은 뺐고,전문가들이 황국사관의 지나간한 주장으로 검토하기로 낙착되었다. 이번 문제의 일본교과서는 이를 다시 부활시켜 교과서에넣고,나아가서 고구려·백제·신라가 야마토 정권에 조공을했다고 기술하였다. 수정을 요구받고는 백제·신라가 야마토 정권에 조공을 했고,고구려는 유사하게 접근했다고 고쳐썼다.완전히 역사 날조인 것이다.야마토 정권의 간청에 응해서 스승·학자·기술자·선진 문명을 보내어 가르쳐준 ‘은혜’를 ‘조공’을 했다고 배은망덕하여 날조하고,직할식민지까지 두어 통치했다고 21세기의 일본 중학생들(미래 전국민)에게 교육하겠다니,또 재침략 정신과 의지를 배양하려획책하는 것이다. 다음 근대사 부분에서 일본은 ‘정한론’ 실행의 단계로‘불평등 조약’(치외법권 등)에 의한 ‘개항’을 강요하기 위해 ‘운양호 사건’을 조작했다.강화도 조약은 일본 군함 5척의 함포사격 소리를 들어가며 일본이 작성해 온 ‘불평등 조약’문에 서명해준 것에 불과했다.개항후 일본은 단계적 침투와 침략을 감행하여 1910년 결국 ‘정한’의 목적을 달성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병탄 강점하였다.1982년 일본교과서 사건 때, 일본 교과서들은 이 침략사실들은 대체로인정기술하고 한반도 ‘진출’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이에격분한 한국 국민의 규탄으로 ‘진출’을 ‘침략’이나 그에 준하는 용어로 수정했었다. 이번 2002년도용 문제의 일본 역사교과서는 아예 일본이개항후 한국의 군제개혁을 도와주는 등 원조했다고 날조했다.갑오개혁 때에 잘 증명된 바와 같이 일제가 가장 방해했던 것이 조선의 근대적 군제개혁과 자주국방능력의 증강이었다.또한 이번 교과서는 한국 병탄은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권익’을 지키기 위해 국제열강의 동의 아래 합법적으로 수행된 병합이라고 한국식민지화 강점을 정당화했다.한반도는 일본을 향해 뻗은 흉기(팔뚝)와 같은 것이어서 일본이 점령해야 일본이 안전하다는 것이다.도대체 이런 엉터리침략논리가 어디 있는가. 열본 열도가 한국과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방해하는 흉기와 같은 곳이니 폭파하여 없애버리려고 점령해야 한다면 일본 국민과 세계 인류가 납득하겠는가. 일본을 침략 강점하는 것이 한국과 중국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면 납득하겠는가.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요할때부터, 강박에 의한 조약은 국제법상 모두 무효라고 이미1906년부터 국제법학계는 이를 무효 선언했고,1927년 미국국제법학회,1960년의 유엔 국제법위원회가 강박에 의한 무효화의 대표적 사례로 일제의 한국침략 조약을 들었다.일제는 한국을 불법 강점하기 위해 한국을 침략했으며,청·일전쟁,러·일전쟁까지 도발해가면서 한국을 불법 강점한 것이었다. 이번 문제의 교과서는 일제의 36년간 식민지통치가 철도·관개시설 등 한국을‘개발’시켜 주었다고 하여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개발’ ‘근대화’ ‘시혜’의 논리로 정당화하였다.한국인·애국자들 수만명의 체포·투옥·학살,관동대지진 때의 수천명 재일한국인 학살,한국인 기본권 완전박탈, 식량·자원·광물약탈, 산업발흥 저지·탄압,한국어말살,한글 말살,성명 말살(창씨개명),한국민족문화유산 파괴, 민족문화 말살, 강제공출,강제연행,강제징병,종군위안부… 등 한국민족 말살정책과 수탈정책을 어느것 하나도 기술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 식민지 강점과 정책이 스스로 발전과 근대화할 능력이 없는 조선사람에게 ‘개발’ ‘근대화’ ‘혜택’을 준 것이니 일본이 한국 강점과 식민지 정책은 잘된 정책이라고 일본 중학생들에게 교육하고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도된 역사의 가치관으로 교육받은 일본 중학생들이자라면서 한국 재침략을 고취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문제의 교과서는 또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소위 15년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영·불·미의 지배하에 있는아시아 민족들에 대한 ‘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수정지시를 받고는 ‘해방전쟁’의 용어는 빼고 해방을 위한 ‘용기’ ‘계기’를 준 전쟁이라고 긍정적으로 기술하였다.‘난징(南京)대학살’은 사실이 아니며 오직 패전했기때문에 도쿄(전범)재판에서 (강요당해)인정했을 뿐이라고,‘난징 학살 사건’의 실재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현재 난징에는 일본군의 대학살 전시관이 있고 무수한 증거물이 전시되어 있다.문제의 교과서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용어인 ‘대동아전쟁’ ‘대동아공영권’의 용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면서 이것이 아시아 공동번영을 목적으로한 훌륭한 정책이었다고 시사하였다.실제로는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의 ‘아시아점령책’이었고 침략정책이었기때문에 아시아 각국의 독립운동세력은 영 ·불 ·미 세력에대항하다가 다시 일본 침략군에 맞서 이중의 더 무거운 침략에 대항,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종전후 해방·독립하게된 것이 진실이다.이 때문에 일본은 모든 침략 점령지역에대해 전후 배상하게 된 것이었다. 이번 문제의 교과서는 광복 전 일본군국주의자들의 국정교과서 내용을 부활시키고 황국사관을 부활시킨 것이다.이 문제 교과서 검정통과 때문에 82년에 한국·중국·동남아 각국 국민들이 투쟁하여 고친 7종의 교과서까지 ‘침략’용어를 빼고,‘종군위안부’,한국민족말살정책을 빼는 등 개악되어 버렸다.이런 교과서로 의무교육인 일본 중학생(미래일본국민)이 교육받으면,일본인들은 한국과 모든 아시아 민족들을 깔보고 재침략을 죄의식 없이 시도하게 되어 있다. 한국 국민과 정부,북한은 물론 중국·동남아 각국 등과 연대하여 82년도 이상으로 대사 소환은 물론이요 모든 가능한방법을 동원, 단호하게 강력 대응하여 조국과 아시아 및 세계 평화와 진실을 지켜야 할 것이다. 신용하 서울대교수·사회사상사
  • [대한광장] 우리 고유의 산줄기 이름

    역사왜곡을 일삼은 일본의 새로운 교과서가 곧 검정을 통과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우리나라나 중국이 발끈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런데 정작 우리 어린이와 젊은이가 공부하는교과서에,일본들에 의해 왜곡된 내용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면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태백산맥 소백산맥 광주산맥 노령산맥….초등학교에 다닐때부터 수없이 듣고 배워 귀에 익은 이름들이다.몇년 전에는 ‘태백산맥’이라는 장편소설이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인 까닭에 산줄기 구조선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그 산줄기를 경계로 하여 이쪽 저쪽의 서로 다른 인문·풍속·지리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뿌리와 역사를 인식하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그런데 이 산맥이라는 보통명사 앞에 ‘태백’‘소백’이 붙어 고유명사가 된 이름들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최근 십여년 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이름뿐만 아니라 오래 통용돼 온 산맥 개념과 산맥선 자체가 틀렸으므로 모든 교과서도 서둘러 고쳐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태백산맥’‘노령산맥’ 따위의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다.당시 일본인들은 우리 땅에 묻힌 광물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몇몇 지리·지질학자들이 건너와 지질을 조사해 갔으며,이를 토대로 광권·채굴권을 따내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동경제국대학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1900∼1902년 열네달 동안 전국을 답사연구하여 만들어낸 것이 곧 지금까지도 널리 쓰는 무슨무슨산맥이라는 이름과 그 개념이다.현재 각급학교에서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지리부도,사회과 부도를 비롯하여 많은 지리서적 백과사전 국어사전들에 나오는 산맥의 명칭과 개요가 모두 고토의 ‘창작’을 그대로 따른다. 그러나 이 일본인 학자의 산맥 분류는 주로 땅속의 지질구조에 따라 이뤄진 것으므로 실제로 땅 위의 지형이나 산세와 맞지 않는다.산줄기(산맥)가 물을 가르는 분수령이 아니라,강을 건너 뛰기도 하는 모순과 불합리를 만들어 놓았다.실제 우리 산줄기는 거개가 끊임없이 곡선과 중첩으로 돼 있는데도,산맥 지도는거의 모두 직선으로 그어졌고 토막토막 끊어진 것들이 많다.‘산맥’은 또한 백두산을 애써 무시하여 마천령산맥으로 독립시킴으로써 산줄기의 무게 중심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켰다.이같은 왜곡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지리 인식을 흐리게 하고,역사·문화 인식에 혼란을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일본인들이 창작한,또는 창씨개명한 ‘산맥’을 버리고,우리 고유의 산줄기 이름인 ‘대간·정간·정맥’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한 것은 엉뚱하게도 지리학자가 아닌 산악인들로부터였다.산악인들은 직접 발로 산줄기를 밟고,이 산줄기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까지 가는가를 체험했기 때문이다.산악인들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산경표’에 주목하고,‘산경표’야말로 우리나라의 모든 산줄기를 실제 지형과 맞게 체계적으로 정리한 산의 ‘족보’임을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옛 지도인 ‘동국지도’(1463년 간행),‘대동여지도’(1861년 간행)가 이미 수백년전부터 우리 손으로 만든 실측 지형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당시 아무런 현대적인 지리 측정장비나 기구 없이 두발로 걸어서 만든 지형도가지금 사용하는 등고선 지도와 큰 오차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산경표’에서 우리나라 산줄기는 ‘대간·정간·정맥’으로 나뉜다.하나의 ‘대간’,즉 ‘백두대간’에서 두 갈래 ‘정간’과 열세가지 ‘정맥’으로 갈라져 나간다.백두대간은 백두산을 할아버지산으로 삼고 남쪽으로 뻗어 두류산 금강산 설악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들을 거쳐 지리산천왕봉까지 이어지는 가장 형세가 큰 산줄기다.이 산줄기는결코 강이나 내로 끊어지는 법이 없다.‘정간’‘정맥’도마찬가지이다.최근 수년 사이에 ‘백두대간’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산꾼들도 많아졌다.그러나각급 학교 교과서와 여러 사전류는 아직 그대로 ‘태백산맥’이다.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성부 시인
  • 생물자원 관리실태·문제점

    보스턴의 웨스턴 화원과 워싱턴DC의 벤키 화원 등 미국의 대표적 꽃시장을 방문하는 한국인은 유난히 눈에 익은 나무를 발견하게 된다. 점원에게 그 나무의 이름을 물어보면 ‘미스킴 라일락’이라고 답변할 것이다. 미스킴 라일락은 바로 서울 북한산에서 자라는 정향나무이다.지난 47년 미국 군정청의 식물채집가였던 미더가 북한산 백운대에서 정향나무를 채취,몰래 미국으로 보낸 것이다.그후 연구 개발을 거쳐 인기있는 판매품이 됐다.미스킴 라일락은 꽃봉오리가 열리기 전후에 보라색에서 라벤더색,하얀색으로 절묘하게 변하는 아름다움과 이국적인 향기로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장악하고 있다.벤키 화원에서만 1년에 1만1,000그루(그루당 30달러)가 팔려나가는 점을 감안하면,우리나라는 매년 최소한 수백만달러의 꽃나무 수출 기회를 날려보낸 셈이다. ■심각한 생물자원의 유출 정부와 학계,원예업계 어느 쪽도 한반도에서 얼마만큼의 생물자원이 유출됐는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한반도의 생물자원 유출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로 외국 선교사들이자생식물의 묘목과 종자를 가져가면서부터다.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국의 어네스트 윌슨,프랑스의 타케,러시아의 슈바리바키,일본의 나카이,미국의 비링거 등 열강의 생물학자들이백두산에서 한라산,울릉도까지 전국을 누비며 닥치는 대로 토종생물을 채집해 나갔다. 한반도에서 채집된 생물은 각국에서 개량돼 상품으로 팔리고 있다. 정향나무 말고도 원추리가 해외에서 다양한 품족으로 개량돼 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있으며,주목은 크리스마스 트리로 가장 잘 팔린다.콩은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품종이 개량돼 역수입되는 현상도나타난다. 외국유출과 함께 국내에서 멸종되는 현상도 심각하다.전세계적으로녹색혁명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인정된 밀의 반왜성인자는 우리 토종인 앉은뱅이밀에서 유래됐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다.환경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의 재래 작물품종은 지난 85년에 비해 74%가사라졌다. ■생물자원의 중요성 생물자원의 보전과 연구는 단순한 환경보호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기술,경제력,부(富)와 직결되는 전략적인문제가되고 있다. 브라질은 20세기 초반 세계 천연고무 공급의 98%를 차지하며 막대한외화를 획득했다. 브라질은 천연고무 공급의 독점권을 유지하기 위해고무나무 반입을 통제하기는 했지만 끝내 20세기 중반에 말레이시아로 유출됐다.그후 20년 만에 말레이시아가 천연고무시장을 석권했고브라질의 고무농장은 완전히 붕괴됐다. 미국의 제약회사인 BMS는 62년 시애틀 북서쪽의 작은 섬에서 채집한태평양주목에서 추출한 물질로 항암제 택솔을 개발했다.택솔은 98년전세계에서 13억달러(1조5,000억원) 어치가 팔려나갔다.전세계에서가장 많이 팔리는 약품 가운데 하나인 아스피린은 버드나무에서 추출한 물질을 화학적으로 합성해 만든 것이다. 21세기의 대표산업인 생명공학산업의 기초가 바로 생물종 표본이다. 현재까지 화학성분이 조사된 식물은 전체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외국의 생물자원 보전 현황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선진국들은 이미 17,18세기부터 생물자원의 표본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미국은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사박물관에 생물표본관을 만들기 시작해 346개의 표본관을 보유하고 있다.일본은 1890년부터 국립대학 등에 표본관을 운영,198개를 보유 중이다. 미국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는 8,000만점,프랑스 파리국립자연사박물관에는 7,000만점,영국 런던자연사박물관에는 6,000만점의 생물표본이 확보돼 있다. 중국,멕시코,태국,필리핀 등 개발도상국가도 생물자원의 중요성을인식,표본관을 설립하기 시작하고 있다. ■국내 생물종 보전 실태 우리나라 전체가 갖고 있는 생물표본은 300만점으로 선진국 1개 박물관 소장규모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대한표본연구소가 곤충 5,918종 82만2,610점의 표본을 보유하는 등 53개 대학과 연구소에서 30만6,486점의 식물과 208만1,503점의 동물,1만100점의 미생물 표본을 소장하고 있다. 정부는 97년 전국자연환경조사 때부터 채집·획득한 생물표본 100만점을 대학·연구소 등에 위탁보관하고 있다.그러나 생물표본을 갖고있는 53개 대학과 연구소의 50%가 관리예산·인력도 없다.그나마 확보한 표본의 전산화도 20% 수준에 머물고 있다. 또 개인이 희귀동·식물을 무분별하게 채집해 생물종 멸종이 가속화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국내에 존재하는 3만여종의 생물 가운데 자연환경보전법 등 법적으로 보호되는 동·식물은 전체의 1.7%에 지나지않는다. ■생물다양성협약 정부는 94년 10월3일 생물다양성협약에 가입했다. 협약은 ‘자생생물은 그 나라에 귀속된다’고 배타적인 경제적 이용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생물자원의 주권을 인정받으려면 생물자원의 표본을 확보하고 채집자,채집기록,동종(同種)확인절차,국내 자생지 확인,전세계적인 분포현황 등의 자료를 갖춰 자생식물임을 확인해야 한다.또 협약은 체결국들에 자연사박물관 건립과 생물분류학자 양성 등을 촉구하고 있다. ■대책 전북대 생물교육학과 이병훈(李炳勛)교수는 “정부가 국립생물자원표본관을 세우고 표본을 데이터 베이스화해 체계적으로 생물자원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를 통해 대학 등에 방치된 표본을 국가에 기부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연환경보전법에 생물표본의 국가 관리를 위한 조항을신설하거나 야생생물보호법 제정 등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것도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같은 지적에 따라 환경부도 지난 98년부터 생물자원표본관 설립을위한 예산을 기획예산처에 신청했다.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예산은배정되지 않았다.환경부는 2006년까지 232억7,600만원을 투입,생물자원표본관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청와대와 기획예산처 등을 계속 설득하고 있다. 이도운기자 dawn@
  • ‘이어도’ 표기 海圖 나왔다

    제주도민의 이상향으로 민요에 많이 등장하는 전설의 섬 ‘이어도’를 공식 표기한 해도(海圖)가 16일 첫 간행됐다. 국립해양조사원이 발행한 이 해도에는 제주 마라도 서남쪽 150㎞ 해상의 이 섬이 ‘이어도’로 표기됐고,항해자의 혼돈을 방지하기 위해그동안 쓰였던 ‘소코트라초(Socotra Rock)’ 지명이 그 밑에 병기됐다. 해양조사원은 내년에 이어도 해양과학종합기지가 준공되면 한글 표기를 영문인 ‘Ieodo’로 바꿔 국제적으로 공식화할 계획이다. 이어도는 최고봉이 썰물 때 수중 4.6m까지 올라오는 암초로 1900년처음 발견한 영국 상선의 이름을 따 소코트라초로 불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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