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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전의 한국 / “호랑이 가죽 팝니다” 신문 광고도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1904년은 서양 문물이 물밀듯 밀려오던 개화기의 끝자락이었다.이듬해 을사조약 체결이 보여주듯 일본의 야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시절,우리네 삶은 근대 문물과 전통이 혼재한 가운데 소용돌이처럼 급변하고 있었다.종로 거리를 전차가 차지하고,전화가 등장했다.양복이 한복을 대신했고,여인네들은 장옷을 벗어던졌다.대한매일신보가 첫 선을 보였던 시절,당시 우리의 삶이 어떠했는지 100년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외국인들에게 ‘코리아’의 상징물로 잘 알려진 남대문.성벽도 없는 흉물(?)로 변해버린 것은 일본에 의해서였다. 1908년 당시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일 황태자를 초청하면서 남대문을 헐자고 했던 것.“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하는데 냄새나는 조선 대문을 걸어들어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전체를 허무는 것은 무산됐지만 결국 서쪽 성벽을 헐고 큰 길을 내 황태자가 탄 마차를 통과시켰다.다음해에는 동쪽 성벽마저 허물어 남대문은 ‘두 팔’을 잃었다. ●전차 아무데서나 세워 1904년 당시 서울에서 가장 인기있는 볼거리는 전차였다.전차가 처음 개통된 것은 1899년 5월 17일.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를 연결하는 8㎞ 구간으로 1896년 일본 교토에 이어 동양 두번째였다.전차요금은 상등 3전5푼,하등은 1전5푼이었다.당시 대한매일신보 한 부의 가격이 2전5푼임을 감안하면 그리 비싸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거장은 따로 없었다.승객의 요구에 따라 아무곳에서나 섰다.당시 전철이 개통되자 이를 신기해하며 하루 종일 전차를 타고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왔다갔다 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전차가 항상 인기만 누리던 것은 아니었다.당시 큰 가뭄이 들었는데 전차가 원흉으로 지목됐다.전차가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해서 가물다는 황당한 유언비어였다.결국 사고가 터졌다.개통 10일만인 5월 26일 종로 2가에서 전철길을 건너던 5세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즉사했다.아버지는 도끼를 들고 전차에 덤벼들었고 성난 군중이 전차 2대를 불질렀다.이후 4달동안 운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후 인기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아 1930년대에는 하루 평균 232대의 전차가 2000여명의 승객을 실어날랐다. 인력거는 택시역할을 했다.1911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육상교통수단은 자동차와 인력거,말수레,승용마차가 담당했다.하루종일 달리다보니 인력거꾼의 체력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일.운동회가 열리면 달리기대회 1등은 항상 인력거꾼이었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기 2년 전인 1902년,처음으로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됐다.당시 전화가입자는 24명.이중 조선인은 2명에 불과했다.시외전화가 먼저 개통된 것은 시내의 경우 하인을 보내 연락한 탓에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1920년대 이후에야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정착,1924년 서울의 전화가입자는 5969명까지 늘었다. 점점 서구의 영향을 받으면서 패션도 서구화됐다.1900년 문관들의 복장이 양복으로 바뀌었고 앞서 1896년에는 육군복장규칙이 제정되면서 구미식 군복이 등장했다.그러나 당시 양복은 개화에 영향을 받았거나 돈이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을 뿐 서민들의 옷차림은 무명옷이었다.갑오경장 이후 여성들의 외출이 훨씬 자유로워지면서 외출시 덮어썼던 장옷이나 쓰개치마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대신 등장한 것이 검정 우산.얼굴을 내놓고 다니기 쑥스러운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선호되면서 검정우산은 외출 여성들의 필수품목 1호가 됐다.당시 서울 자하문 밖으로 소풍을 갔던 한 여학생은 소풍감상문에 “양산에 가려 경치라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하루 종일 내 발등만 보고 다녔다.소풍이란 발등만 보는 운동회다.”라고 할 정도였다. ●성냥·비누 가장 잘 팔려 여성 옷차림의 변화는 1907년 김활란씨가 도쿄에서 귀국하면서 챙머리 헤어스타일에 발목 위까지 올라가는 검정 통치마를 입은 것이 발단이 됐다.이 패션은 여성들 사이에 ‘양장미인,단발미인,모단걸(毛斷傑·modern girl)로 불리며 신여성의 대명사가 됐다. 미(美)를 추구하는 여성들의 욕구는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화장품이라고 해봐야 머리빗는데 쓰는 동백기름,분꽃의 씨를 빻아만든 분가루 등 천연재료가 전부였다.팥이나 녹두가루는 비누를 대신했다. 비누는 1882년조선과 청나라가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수입됐는데 잡화상이 밀집한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일대에서는 성냥과 함께 최대 히트상품이었다.1904년 당시 비누 1장의 가격은 1원.당시 근로자의 하루 품삯이 80전이었던데 비하면 엄청나게 비쌌다.비누향은 ‘멋쟁이 냄새’로 통했는데 일부러 세수할 때 비누기를 남겨 향이 오래가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대중에 연분 화장품 인기 당시 가장 대중적인 화장품은 연분(鉛粉)이었다.고급 화장품에 비해 값이 싼데다 화장이 잘 퍼졌기 때문.특히 화류계 여성들에게 인기만점이었는데 연분 때문에 신세를 망친 여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연분은 납조각에 식초를 바르고 숯불에 달궈서 생기는 하얀 가루를 원료로 하는 일종의 가짜 화장품.바를수록 납에 중독돼 얼굴이 시퍼렇게 망가지는 납중독 증상에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자리가 없던 시절,가장 보편적인 직업은 식모나 급사 등 집안 일을 돌보는 ‘가사사용인’이었다.지게꾼과 인력거꾼 등 일용노동자가 그 다음으로 많았는데 이들의 일당은 최고 40전으로 설렁탕 한 그릇(15전)도 마음놓고 먹기 어려웠다.현진건의 소설 ‘운수좋은 날’에서 주인공 박첨지가 운수가 억세게 좋아야만 설렁탕을 먹을 수 있다고 한 것이 당시의 노동 현실이었다. 서민들의 삶터는 역시 초가집이었다.1899년 7월 서울의 주택은 4만2870호에 인구 20만992명이었다.이 가운데 초가집은 2만9831호로 전체의 69.6%를 차지했다. 양옥도 등장했는데 ‘쉬익-’소리를 내는 스팀 난방시설 때문에 웃지못할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1918년 호텔을 개조해 만든 이화학원 기숙사의 스팀 난방을 본 학부모들은 뜨거운 김이 음기(陰氣)를 죽여 불임증을 유발한다며 기숙사 사용을 거부했다. TV가 없었던 시절,광고는 신문광고가 거의 전부였다.최초의 광고는 1886년 2월 22일 한성주보 제4호에 등장한 독일상사 세창양행의 광고였다.판매물품은 호랑이와 수달 가죽에서 사람 머리카락,담배,돼지발톱,성냥 등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취급했다.처음에는 잡화광고와 책광고가 대부분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생필품 광고는물론 다이어트 광고까지 등장했다. ●기사는 이경재씨의 ‘한양이야기’와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펴낸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에서 일부 발췌해 재구성했다. 김재천 기자 patrick@
  • 페스트·사스…/ 인간을 어리석게 만든 역병의 공포

    흑사병이라 불린 역병 페스트는 1900년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다.쥐를 통해 감염되는 이 병이 증기선인 ‘오스트레일리아’호에 실려 수만명의 중국인들이 몰려 사는 샌프란시스코로 침투한 것이다.페스트균이 상륙한 이 해는 묘하게도 쥐의 해.차이나타운 주위로 방역선이 쳐졌고 대대적인 페스트 소탕작전이 벌어졌다.하지만 더욱 큰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인종적 편견과 격리 조치에 따른 심리적 공황,경제적 손실을 두려워한 샌프란시스코 행정당국이 사실을 은폐하고 축소하려 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 의학전문기자인 마릴린 체이스가 쓴 ‘격리’(어윤금 옮김,북키앙 펴냄)는 1900년 이후 1910년까지 샌프란시스코를 공포로 몰아넣은 전염병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다.‘태평양 연안의 파리’를 꿈꾼 샌프란시스코 당국자들은 페스트 발병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실상을 왜곡하려 했다.페스트를 ‘중국병’으로 몰아갔다.초기 방역라인이 차이나타운 경계를 따라 설치됐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그들은 페스트를 차이나타운으로몰아넣고 중국인들과 함께 박멸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페스트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20세기 초 샌프란시스코의 상황은 1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낯선 질병에 대응하는 오늘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11월 중국 광저우에서 발생한 사스(SARS)의 경우 중국 당국은 처음 병의 출현을 인식하고서도 침묵을 지켰다.이 질병의 전염성에 대해 전혀 경고하지 않았으며,심지어 언론에 대해서도 보도관제를 취했다.결국 남부중국에서 시작된 사스는 20여개국에 전파되며 8400명 이상이 전염됐고 최소한 800명이 죽는 결과를 낳았다.두려움은 인간을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로 만드는가.저자는 우리는 과연 불확실함에 대한 공포를 냉철한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이겨낼 용기를 갖고 있는가 반문한다.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끝장내고 신대륙의 원주민까지 몰살시킨 홍역과 두창,로마와 몽골제국을 강타한 흑사병, 러시아 정벌에 나선 나폴레옹의 50만 대군을 전멸시킨 발진티푸스 등 수많은 전염병들은 인간의 허약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하지만 저자는 두려움에대항하는 인간의 의지는 또 얼마나 위대한 것이냐고 말한다.이 책은 1세기 전 페스트가 만연한 샌프란시스코를 구한 방역 책임자 루퍼트 블루의 헌신적인 이야기를 통해 인간 의지의 숭고함을 일깨워준다.9800원. 김종면기자 jmkim@
  • [씨줄날줄] 이어도의 꿈

    “긴 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청준은 지난 1974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한 소설 ‘이어도’에서 제주도 뱃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오는 피안(彼岸)의 섬 이어도를 찾아나선다.천리 남쪽 바다 밖에 파도를 뚫고 꿈처럼 하얗게 솟아있는 이어도는 구원과 복락의 이상향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섬이기도 하다.제주도 뱃사람들은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올 수 없게 되면 이어도에 갔노라고 믿는다.이어도에 갔기 때문에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확신한다.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뱃사람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어도는 이청준의 소설에서처럼 사실과 전설의 중간지대다.전설을 간직하고 있기에 실재하는 섬인 것이다.전설의 섬에 남편을 보낸 뒤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해녀가 읊조리는 ‘이엿사나 이여도사나 이엿사나 이여도사나’로 반복되는 민요에서도 이어도의 실존은 확인된다. 수백년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이어도는 지난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좌초되면서 해도에 ‘소코트라 암초’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실체가 확인된 것은 1984년.이어도는 대한민국의 최남단 마라도 서남쪽 149㎞,중국 퉁다오(童島) 동북쪽 247㎞,일본 도리시마(鳥島) 서쪽 276㎞ 떨어진 바다 속에 자리잡고 있다.평균 수심 50m,남북과 동서 길이가 각각 1800m,1400m인 수중 암초다.암초의 정상도 수중 4.6m여서 거센 파도가 몰아칠 때면 모습을 드러낸다.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황금어장인 이곳은 한반도를 통과하는 태풍의 40%가 지나는 길목이다.황금어장과 태풍,암초가 어울어져 전설 속의 이어도를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0일 이곳에 8년에 걸친 공사 끝에 높이 76m,무게 3400t짜리 첨단 해양관측시설물 ‘종합해양과학기지’가 완공됐다.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섬에 임시 숙박도 가능한 시설이 들어선 것이다.한(恨)과 원(願)이 서린 이어도가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미래의 꿈도 담아내기 시작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우득정논설위원
  • [열린세상] 자본주의 천민화와 통일문제

    경제 발전으로 국민들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신체적인 만족감을 높여주는 것으로는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론이 적어도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 낸 결과로는 최상의 제도임에 틀림없다.마르크스는 이미 1900년대 꿈같은 이상 사회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예언했다.자본주의 사회는 발전되면 될수록 자체의 내부 모순이 증폭되면서 자연히 붕괴되고,세계사는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 제도가 도래되면서 노동자 중심의 무계급,무착취의 평등 사회가 된다고 했다.심지어 다음 단계인 공산사회로 진입하면 노동이 놀이로 변하면서 ‘아침에는 낚시하고 낮에는 목장에서 일하다가 밤에는 난로 가에서 정치 담론을 하는…’ 사회가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사관의 예언적 이상 국가는 마르크스 사후 117년 만에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붕괴하면서 하나의 시행착오로 평가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게 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가 인간들의 삶과 질을 완수하면서 마르크스가 그렇게도 분노하고 비판하던 부정적 측면을 오늘날극복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있다.그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성의 상실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생리는 ‘장사만 된다면 지옥에라도 찾아간다.’는 말처럼 인간 자존심의 최후의 보루라고도 볼 수 있는 성(性)마저도 상품화하는가 하면,레닌의 말처럼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노동력의 착취는 이제 인간에 의한 자연 착취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성은 자아 정체성의 기본인 것이다.이러한 성 질서나 도덕적 타락은 곧 개인으로서는 자존심의 포기로 스스로 하나의 인격체를 사물화로 전락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존엄성과 쇠퇴 그리고 멸망을 야기시키고 만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성’을 예로 들기도 한다.이와 같은 관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역사에서는 반드시 성적 타락의 단계를 거치게 됨을 예외없이 보게된다.인간은 본능적으로 배가 부르면 다음으로 쉽게 추구하는 것이 불건전한 성적 욕구로 향하게 마련이다.미국이 그랬고 일본도 그랬으며 이번엔 우리가 그렇다.건전한 윤리관을 가진 개인이나 고급 문화의 사회에 성문화가 침투하게 된다.이것이 곧 성의 상품화이며 저급 문화의 출발인 것이다. 앞으로 남북 통일을 앞두고 지금 남한 사회의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북한을 반드시 패배시키고 우위의 위치에서 그들을 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우리 사회가 건전한 성질서와 북한보다 수준 높은 정신 문화를 갖췄을 때만이 북한을 우리들이 압도하고 성공적인 통일의 명분과 실리를 갖추게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쩌면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명언처럼 남한의 배부른 물질 문명보다 북한의 배고픈 정신 문명이 더 강한 힘과 지구력을 나타낼 수 있음을 명심하고 지금부터라도 통일의 기본은 육체 건강보다 정신 건강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따라서 정부는 올바른 인생관과 수준높은 고급 문화의 창출과 보급에 힘 쓰는 것이야말로 성공적인 남북 통일의 힘을 키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일부의 사례이긴 하나 19살의 소녀가 동거하는 남자 친구와 결혼비 마련을 위해 매춘 행위를 하는 현실,어느 회사원이 노래방에 가서 주인더러 같이 놀 여자를 요구하자 자기 부인이 왔더라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의 사회에서 우리들은 무엇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겠는가.사실 이러한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최근 인터넷을 통한 음란물이 무차별적으로 각 가정과 어린이 세계에까지 침투되면서 심지어 초등 학생의 성 매춘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우리들의 현주소이다.각 가정과 학교 교육에서는 자녀들의 건전한 인격 교육에 눈을 돌릴 때이다. 김 동 규 고려대 교수 북한학
  • “죽음은 늘 우리 가까이에 生과死 생각하는 場되길”/ 장례역사박물관 짓는 임 준씨

    “장례와 제례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습니다.외형적인 변화가 문제가 아닙니다.고인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내용이 퇴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례역사박물관을 세우고 있는 임준(林駿·53)씨는 “요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제대로 슬퍼할 줄을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예전에는 장례를 ‘모신다,’했지만,요즘은 장례를 ‘치른다.’하는 것도 그런 변화의 하나라고 했다.인본적(人本的)인 부분이 사라지는 증거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도 제대로 슬퍼할 줄 몰라” 그는 서울보건대 장례지도과에서 후학들에게 장례문화를 전수하는 현직 교수이자,장례용품 제조회사의 대표다.또 한국민속박물관회(회장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이사로 국립민속박물관을 후원하는 데도 한몫을 거든다. 마당극 연출가이자 창작 판소리꾼인 임진택씨에게 ‘통과의례페스티벌’을 열도록 부추기기도 했다.임진택씨와는 사촌간.지금도 후원회장으로 페스티벌을 돕고 있다. 그런 임씨가 이번에는 박물관을 세우는 데 사재를 털고 있다.장례역사박물관은 ‘죽음’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한국 최초의 박물관이다.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에 대지 7000여평,건평 1000평 규모로 짓고 있는 박물관은 전시실과 수장고가 완성되는 오는 9월 1차 개관한다. “‘초혼’은 사람이 죽었지만,죽음을 바로 인정하기가 아쉬워 생시처럼 여기는 것입니다.입관할 때 비로소 죽음을 인정했지요.옛날의 장례는 이처럼 죽은 사람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그런데 요즘은 경제성과 편리만 따지다 보니 산 자가 장례의 주인행세를 하고 있습니다.가정문화의 뿌리가 약해졌기 때문이지요.” 이런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바로잡겠다는 것이 박물관을 세우는 이유이다.우리 상장례의 역사에 전시의 중점을 두지만,각국의 장례문화를 보여주는 데도 힘을 기울인다.세계 4대 문명의 장례문화도 비교전시한다. ●정주영·최종현 회장 장례도 직접 지휘 “우리만 허례허식으로 상장례에서 불편을 겪고,옛날 의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요.그러나 한국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지금도 우리보다 더 정중하게 상장례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박물관을 세우는 본질적인 이유는 죽음이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그러나 죽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죽음을 가까이해야 합니다.그래야 욕심을 부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지요.죽은 다음을 생각하면 스스로를 가다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죽음’과 맞닥뜨린 것은 아니었다.대학에서의 전공은 지질학이었지만 풍수지리에 빠져들었다.풍수지리에도 과학적인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공부가 깊어지면서 1988년 ‘자연과학으로 입증된 풍수사상과의 만남’이라는 글을 한 경제신문에 연재했고,‘좋은 땅 좋은 집’을 비롯해 책도 몇 권 펴냈다. 그는 현재 최고의 장례 전문가로 인정받는다.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과 최종현 전 선경그룹 회장 내외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장례를 지휘했다. “대기업의 조직이 아무리 방대해도 장례만은 자신있게 치르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그만큼 어렵게 생각하고,전통을 모르기 때문이지요.돌아가신 분을 장지까지 보내는 과정이 산 자와의 관계를 매듭짓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경기도 광주에 관과 수의 등을 만드는 장례용품 제조업체를 차린 것은 1991년.그의 표현대로 “불황을 타지 않는 사업”이었다.2001년 삼포실버드림이라고 이름을 새로 짓고,회사를 용인으로 옮길 때는 주민들의 반대도 없지 않았다.그러나 박물관을 짓기 시작하면서 동네 발전에 도움이 된다며 주민들도 호의를 갖게 됐다. “제례 체험관도 만듭니다.전통이 잊혀졌거나,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되살리고 싶어하는 젊은층이 적지 않습니다.이런 사람들에게는 제사의 모델이 필요하지요.” ●장사법 선택할 수 있도록 모델 제시 야외전시장에서는 묘지의 변천과정도 보여준다.어른이 자식들에게 “죽거든 알아서 장사지내라.”고 체념하기보다,함께 찾아와 장례의 방식을 ‘합의’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장사지내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돕겠다는 뜻이다. “장례분야에서 돈을 벌었으니,장례문화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앞으로 장례용품회사는 박물관에 기증할 겁니다.박물관이 돈에 구애받지 않고 각종 문화사업을 펼칠 수 있으려면 경제적 기반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장례역사박물관은 20만평 규모로 최근 문을 연 한택식물원에서 가깝다.문·무인석 등 한국 최대의 석물(石物) 컬렉션을 자랑하는 세중옛돌박물관도 멀지 않다.독특한 문화벨트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는 더욱 크다. 최근에는 경사스러운 일도 있었다.일본에서 1900년대에 만들어진 상여를 기증받은 것.앉은 자세로 시신을 안치하는 좌식(座式)이다.이를 포함하여 발리 상여와 중국 상여,배모양의 인도네시아 상여,태국상여,지붕모양으로 꾸민 일본의 영구차 등 2500여점의 유물을 확보하고 있다.이 가운데 1000여점을 1차 개관 때 선보인다. 그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유물 기증이었다.종교적 이유 때문에 처치가 곤란하게 된 상장례나 제사도구가 있다면 버리지 말고꼭 박물관에 기증해달라는 당부였다. 글 서동철기자 dcsuh@ 사진 강성남기자 snk@
  • “니체 정신착란 원인 매독 아니라 뇌종양”

    |베를린 연합|프리드리히 니체(사진)가 말년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 것은 매독이 아니라 뇌종양 때문일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고 5일 독일 24시간 뉴스전문 방송 ntv가 보도했다. 방송에 따르면 미국 메릴랜드 소재 아동발달연구소의 레오너드 색스 소장은 1900년 사망한 니체의 정신착란 원인은 뇌종양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면서 니체가 말년에 시력장애와 극심한 두통에 시달린 것도 이를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니체의 말년 정신착란과 사망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설이 난무했으며,특히 매독 감염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색스 소장은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많은 니체 비평가들이 주장해 온 매독감염설의 배경에는 니체의 초인(超人)사상이 나치의 정신적 좌표 역할을 했다는 추정 아래 이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
  • [맛 에세이] 요리사와 명예

    그가 자살했다는군요.리드미컬한 맘보에 맞춰 몸을 살살 흔들며 춤을 추던 잘 생긴 남자 장국영이….놀랍고 안타깝습니다. 음식 동네에도 얼마 전에 유명 요리사의 자살이 화제에 올랐습니다. 지난 2월24일,프랑스 최고 요리사 반열에 오른 베르나르 루아조가 자신이 운영 중인 레스토랑 ‘라 코트 도르’(부르고뉴 소재)의 등급 하락을 비관해서 자살한 것입니다.‘라 코트 도르’는 레스토랑 전문 소개서인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최고 등급인 별 3개를 받았고,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주식이 상장된 레스토랑이다. 그런 레스토랑을 또다른 레스토랑 전문 소개서인 ‘고미오’가 등급을 낮추자 이를 비관한 것이 그의 자살 원인이랍니다. 미슐랭이나 고미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스토랑 가이드북입니다. 타이어 생산업체 창업자인 미슐랭 형제가 1900년에 만든 미슐랭은 처음엔 타이어 구매 고객에게 타이어 판매점 위치나 도로법규,주유소 위치,그리고 운전자의 허기를 달래줄 식당 정보가 실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00년의 세월 동안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있지요.여기서 붙여주는 별(*)의 개수에 따라 레스토랑의 흥망이 좌우됩니다.별이 3개면 아주 훌륭한 음식점이므로 그곳을 가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여행이 된다는 뜻이죠. 고미오 가이드 역시 1972년 앙리 고와 크리스티앙 미오,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든 책.역시 엄격한 심사를 하고 20점을 만점으로 점수까지 줍니다.베르나르 루아조는 프랑스 미식문화의 자부심과 권위를 상징하는 고미오에서 줄곧 19점을 받았다가 17점으로 2점이 내려간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거죠.그의 자살 이후 레스토랑 평가에 대한 여러가지 불만들이 나오고 있다니 앞으로 레스토랑 평가단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진 셈입니다. 명예 때문에 자살한 요리사는 프랑스 역사 속에도 있습니다.1660년경 프랑스 콩드 왕자의 궁정 요리사였던 ‘바텔’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유명 요리사였던 바텔이 루이 14세를 위한 만찬을 준비했는데 예정에 없던 손님 70명이 더 와서 요리가 모자랐고,다음날 아침에도 예정과 달리 생선이 크게 모자라자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채 그대로 자살을 해버렸답니다. 그의 삶이 ‘미션’ ‘시티 오브 조이’ 등으로 유명한 롤랑 조페 감독에 의해 ‘바텔’로 영화화되기도 했답니다. 노력 없이 성공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프랑스 요리를 세계 최고로 치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는 까닭은 바로 바텔이나 루아조처럼 프랑스 요리사로서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신 혜 연 월간 favor 편집장
  • [실크로드를 가다] ①서역 가는 관문 ‘둔황’

    중국 시안(西安)에서 로마까지.일찍이 수많은 여행자들이 목숨을 걸고 다녔던 기나긴 이 길을 후세 사람들은 ‘실크로드’라고 부른다.이 길을 통해 교류된 문명의 씨앗은 동서에서 튼실한 열매를 맺었다.바닷길 발달 이후 쇠락했지만,당시의 눈부신 흔적은 지금도 전세계 여행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한다.동서 문명 교류의 중심축인 실크로드를 ‘둔황’ ‘투루판·우루무치’ ‘카스’ 등 거점 도시들을 중심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한다. |둔황(중국) 글·사진 임창용 특파원|‘성대하게 번성한다.’란 뜻을 지닌 둔황(敦煌)은 동서문화가 최초로 교류한 장소.시안을 출발해 현재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를 의미하는 서역(西域)으로 넘어가는 관문이었다. 둔황에 들어서니 도심 한복판 네거리에 서 있는 톈뉘상(天女像)이 불교예술의 도시임을 새삼 일깨워준다.둔황은 수·당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이 때 동서의 승려들이 모여 화려한 불교예술을 꽃피웠다. 둔황에 온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500여개의 굴이 뚫려 있는 모가오쿠(莫高窟)·룽먼(龍門)·윈강(雲崗) 석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히며,중국 불교미술의 보고(寶庫)다.예전엔 굴 앞에 설치한 목조계단을 통해 굴을 드나들었다고 하는데,지금은 송대에 만든 것만 남아 있고 대부분 나중에 만든 콘크리트 계단이다. 모가오쿠는 지정된 가이드를 따라 허가된 곳만 구경할 수 있고 사진·비디오 촬영은 할 수 없다.개방된 굴은 모두 192개.그 중 시기별로 몇 개씩 돌아가며 관람을 허용한다. 한국의 기자를 맞이 한 자오쥔화(趙俊華·45) 둔황시장은 “불상과 벽화 훼손을 막기 위해 보다 엄격한 관람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며 “각 굴엔 통풍과 온도 조절장치까지 설치돼 있다.”고 말한다. 한국역사를 연구한다는 중국인 가이드 리신(李新·35)씨를 따라 나섰다.먼저 들어간 곳은 당나라 말기 만들어진 제17호 장징쿠(藏經窟).모가오쿠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1900년 장경굴 내 벽에 숨겨져 있던 또하나의 굴(16호)에서 수많은 문서가 발견되고부터다.불교경전은 물론 천문·지리·문화·의학 등 다방면에 걸친 문서가 발굴됐으며,신라 때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여기서 발견됐다. 한 두개도 아니고,수백개의 굴 모두에 이토록 다양한 불상과 벽화가 있다니!.입이 딱 벌어질 따름이다.이곳 석굴들은 20세기 들어 서양의 도굴꾼들에 의해 상당부분 훼손됐음에도 그 규모와 다양함,뛰어난 예술성 등으로 관람객들을 압도한다.입장료는 86위안.일부 굴은 별도의 요금을 내야 한다. 모가오쿠를 나와 서북쪽으로 20분쯤 가니 모래산이 끝없이 펼쳐진 밍사산(鳴沙山)이다.바람이 불면 모래가 춤추며 우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밍사산 입구에서 10분쯤 걸어서 들어가면 3000년 동안 마른 적이 없다는 샘 웨야취안(月牙泉)이 나온다.크기가 동서 약 220m,폭은 40m에 이른다.‘사르르 사르르’ 나는 모래 소리가 투명한 호수에 비친 누각과 어우러져 신비감을 자아낸다. 부드러운 촉감을 만끽하기 위해 맨발로 산에 오르려니 얼마 못가 숨이 턱턱 막히고,푹푹 빠지는 통에 더이상 오르기 어렵다.임시로 설치돼 있는 나무 계단으로 정상에 올랐는가 싶었는데,앞에 더 높은 산이 가로막는다.밍사산은 이렇게 모래산 봉우리가 끝없이 이어진다.그 길이와 폭은 각각 40㎞,20㎞. 계단을 통해 산을 내려가니,20위안을 내라고 한다.나무 계단을 이용했기 때문이란다.장삿속이 얄밉지만 어쩔 수 없는 일.밍사산에선 낙타 타는 재미를 빠뜨릴 수 없다.보통 몇 개의 모래산을 에둘러 돌아오는데,요금은 코스에 따라 20∼50위안이다.여행자를 태우고 길게 줄지어 가는 낙타들은 모래산과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예전 캐러밴들이 사막을 가로지르던 모습도 아마 이랬을 것이다. 시간이 허용한다면 둔황구청(敦煌古城)과 위먼관(玉門關)도 둘러볼 만하다.둔황구청은 송나라 때의 고성.둔황 시내에서 서쪽으로 30분 정도 달리면 황량한 대지 위로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는데,바로 둔황구청이다.1987년 중·일 합작영화를 찍기 위해 고성과 거리를 실물 그대로 재현했다. 위먼관은 흉노족으로부터 서역을 지키기 위해 한무제의 명령으로 지어진 둔황 서북쪽 관문.동서 길이 24m,남북 길이 26m,높이 9.7m의 흙벽 건축물이다.2000년 이상이흘렀음에도 흙벽에선 견고함이 느껴진다. sdargon@ ◆실크로드는... 기원전 2세기 한무제때 뚫려 실크로드는 기원전 2세기 한무제 때의 장군 장건(張騫)에서 유래를 찾는다.흉노족 정벌을 위해 다른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며 지나간 루트가 이후 실크로드로 발전한 것으로 본다. 당시 장건은 시안을 출발해 둔황,투루판,우루무치,톈산(天山)산맥을 지나 인도방면으로 넘어갔다가 카스,쿤룬산맥,둔황을 거쳐 돌아왔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길을 따라 중국에선 비단을 유럽으로,유럽에선 향신료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를 중국에 전해주었다.특히 불교는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에 전해진 뒤 한국·일본까지 전래됐다.루트를 따라 흩어져 있던 소수민족들은 문화융합에 큰 역할을 다해왔다.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실크로드엔 크고 작은 길이 무수히 많지만,주요 루트는 3개다.먼저 톈산산맥을 경계로 북과 남으로 나뉜다.북쪽길인 톈산북로(天山北路)는 둔황∼하미∼투루판∼우루무치∼카자흐스탄∼로마,남쪽길인 톈산남로는 투루판∼쿠처∼아커쑤∼카스∼파미르고원∼로마 코스다.나머지 하나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의 시위남로(西域南路)로 둔황∼러우란∼허톈∼카스를 거쳐 톈산남로로 합류한다. ◆가이드 ●항공편 현재 실크로드 가는 길은 멀고 불편하다.베이징이나 상하이 등을 거쳐 우루무치나 둔황으로 가야 하기 때문.대기시간까지 합치면 오고 가는 데 이틀을 온전히 보내야 한다.그러나 중국 신장항공사가 오는 5월1일부터 인천∼우루무치 직항로에 주1회(목) 비행기를 띄워 실크로드 길이 한나절권으로 짧아진다.비행시간은 5시간 정도.직항노선은 10월 말까지 운영된다. 우루무치에서 둔황까지는 항공편(1시간30분)이 빠르나,버스나 기차를 이용해 오아시스의 도시 투루판 등을 거치는 방법도 권할 만하다.투루판엔 가오창구청과 훠옌산 등 세계적 유적들이 즐비하다.물론 투루판이나 하미에서 1박해야 한다.둔황 시내엔 철도역이 없고 2시간 떨어진 류위안에 둔황역이 있다.역에서 둔황까지 가는 미니버스가 자주 출발한다.시내는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다. ●먹거리 말로만 듣던낙타발 요리를 둔황에서 맛보자.모양은 도가니 수육 비슷한데 고소하면서도 입에서 살살 녹는다.3성급 호텔 둔황빈관에서 코스요리 ‘둔황연’을 시키면 낙타발 요리를 비롯한 17가지 고급요리가 순서대로 나온다.값은 300위안(4만 5000원).상당히 비싸지만 한번쯤 호사를 부려볼 만하다. 모가오빈관의 쓰촨요리점에선 매운 닭고기 냄비(35위안)를 맛볼 수 있고,둔황 시내 사저우 바자르(시장)의 노점식당에서 양고기 꼬치구이나 만두,군고구마,조린 달걀 등을 사먹는 재미도 쏠쏠하다.10위안이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둔황,투루판,카스 등 신장자치구 지역은 양고기 음식 일색.양고기 특유의 냄새 때문에 고역을 치르기 쉽다.감수할 자신이 없다면 김치,고추장 등 밑반찬을 준비해가자. ●시차 및 환율,물가 한국보다 1시간 늦다.환율은 100위안에 1만 5500원.물가는 상당히 싸다.시장에서 실크 스카프 30위안,수공 동(銅)화병 20위안 정도.물건을 살 때 일단 3분의1 가격으로 후려쳐 깎은 가격으로 흥정을 시작해야 후회가 없다. ●숙박 및 여행상품 3성급 이하호텔만 있다.둔황빈관 ,둔황다주뎬이 비교적 고급스럽다.380위안부터.배낭여행자가 이용할 만한 호텔로는 페이톈빈관이 좋다.숙박료는 280위안.공동침실을 쓰면 침대 하나당 20∼30위안으로 하룻밤을 묵을 수 있다. 우림여행사가 5월1일부터 인천∼우루무치 직항편을 이용해 기존의 200만원대가 넘던 실크로드 상품가격을 50만원 정도 줄인 상품을 선보인다. 우루무치∼둔황∼하미∼투루판(6박8일) 129만원,우루무치∼이닝∼둔황∼하미∼투루판 149만원.실크로드상 중국 마지막 도시인 카스를 넣은 우루무치∼이닝∼카스 상품은 159만원이다.(02)771-8366.
  • 국민1인 하루 수돗물 소비 374ℓ로 4년째 감소 추세,소득대비 물사용 日·캐나다의 2~4배

    18일 한국수자원공사가 발표한 ‘물과 미래’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국민 1인당 하루 수돗물 급수량은 1997년 409ℓ를 정점으로 98년 395ℓ,99년 388ℓ,2000년 380ℓ,2001년 374ℓ로 줄었다.낡은 수도관을 바꾸고 물 절약을 강조하면서 물 소비량이 90년대 초반 수준으로 줄었지만 아직도 일본(357ℓ),영국(323ℓ),프랑스(281ℓ)보다 많다. 가계소득 1000달러를 기준으로 한 생활용수 사용량은 42ℓ로 일본(9.7ℓ)과 이탈리아(19.1ℓ),캐나다(25.8ℓ),호주(22.4ℓ),영국(14.3ℓ),프랑스(10.7ℓ)의 2∼4배 수준이다.소득에 비해 물을 헤프게 쓰고 있음을 말해준다. ●수도료 t당 349원 세계 최저수준 우리나라 가정용 수도요금은 t당 349.4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싼 편이다.이탈리아(670원),미국(769원),호주(1003원),일본(1590원),영국(1897원),프랑스(2101원),독일(2241원)의 2∼6분의 1에 불과하다.다른 상품과 비교하면 생수·콜라·우유에 비해 각각 1022배,1773배,2863배 싸다. 우리나라는 오는 2011년 약 40억t의 물부족이 예상된다.이중 22억t은 노후관 개량,절수기 사용,농업용수 절감 등으로 해결하고 효율적인 물 이용으로 6억t을 절약해도 12억t의 물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네덜란드 물관리 세계 모범 국토의 60%가 해수면보다 6m가량 낮은 네덜란드는 역사가 ‘물과의 전쟁’ 그 자체다.그래서 오래전부터 물을 유용하게 개발·관리하고 아끼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물과의 전쟁,바다와의 싸움은 오래전에 시작됐다.11세기부터 맨손으로 둑을 쌓아 바다로부터 땅을 보호했고,16∼17세기에는 풍차를 이용한 간척지 확보에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바다정복’에 나섰다.이렇게 해서 1900년에는 16억 6000만평의 땅을 확보했다. 그러나 1953년 2월 북해(北海)는 무서운 파도와 해일로 공격,애써 쌓은 48㎞의 둑을 한순간에 앗아갔다.질랜드지역은 다시 바다로 변해 주민 1800여명과 수십만마리의 가축이 희생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네덜란드 국민은 ‘델타 플랜(Delta Plan)’을 세워 다시 바다정복에 나선다.이 사업은 라인강과 뮤즈강 하류의 로테르담과 질랜드 델타지역을 바다 위협으로부터 영구적으로지킬 수 있는 구조물을 설치하는 대역사로 무려 50억 유로달러가 투자됐다. 라인강의 범람이나 북해의 해일에 대비해 설치한 로테르담 장벽,바닷물의 역류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하링블리트 수문,세계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우스터스켈더댐 등 10여개의 크고 작은 댐과 수문이 건설됐다. 네덜란드는 댐을 건설할 때 가장 먼저 환경피해 방지와 주민 어업권을 고려한다.단순히 물을 가두거나 해수 역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메스란트케링 댐은 두 조각으로 만든 움직이는 수문.평소에는 바닷물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수문을 열어 아무리 큰 화물선이라도 마음대로 지나갈 수 있게 한다.바닷물 흐름을 돌려놓지 않고 그대로 유지한다.그러나 해일이 일어 바닷물이 역류하면 부챗살 모양의 양쪽 구조물을 맞대 바닷물을 막도록 설계됐다. 국제수리환경공대(IHE) 빌름 스판스 교수는 “로테르담이 쉘 정유사 등 국제적인 석유화학공단으로 발전하고,세계에서 물동량이 가장 많은 항구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델타플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물사랑,‘암스테르담 정수장’ 암스테르담 주변 도시의 100만명에게 물을 공급하는 암스테르담 정수장의 시스템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수(源水)는 라인강의 더러운 물이다.55㎞의 파이프를 통해 끌어온 물은 모래밭에 만들어진 40㎞의 인공 운하를 통과하면서 자연 정수돼 1급수로 만들어진다.인공운하는 86㏊에 이른다.화약 약품을 넣어 물을 걸러내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친환경 정수 시스템인 것이다. 로테르담 류찬희기자 chani@
  • 이라크戰 한·미동맹 시험대로...美지원 고심하는 정부

    윤영관 외교통상부장관이 12일 라디오방송과 인터뷰를 가졌다.그 자리에서 윤 장관은 “한반도의 전쟁을 반대하는 우리나라가 이라크 전쟁을 찬성·지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는 질문에 “동맹이라는 것이 상대방 국가가 급하고,어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와주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해주는 것이 기본적인 의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고 했다.이라크 문제는 평화와 전쟁 개념이 아니라,국익을 우선한 한·미 동맹의 코드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나타낸 것이다. ●한·미 동맹의 시험대? 미국의 대(對)이라크 공격에 대한 국제사회와 한국 시민단체의 반전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언론에서 이라크전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윤 장관도 이날 한·미 동맹론을 피력하면서도 “국내 여러 의견들을 봐가며 여론을 반영해 결정하겠다.”는 붙임말을 달았다. 이라크 문제가 최근 우리 외교의 제1화두가 된 한·미동맹 시험대라는 분석이다.노무현 신 정부 출범 이전부터 시작된 북한 핵문제와 주한미군 재배치 및 감축론을 둘러싼 불협화음이 표출될 때마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한·미 동맹 공고화 원칙은 변함이 없다.’는 말로 일단 갈등 해소에 주력했다.수평적 한·미 관계 정립이란 우리측 요구에 대한 미국이나 언론의 반작용이 있을 때마다 해결사로 등장해온 말이 한·미 동맹이다. 한 전문가는 “그 말의 진실성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말한다.미국이 요청한 지원 요구에 대해 우리측은 일단 동맹으로서의 성의를 다한다는 입장이다.외교부 당국자는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 미국이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문제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정부 일각에선 대 이라크전 지원을 최근 상처가 난 한·미 동맹 복원의 계기로 삼으려는 측면도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국익과 실리는 어디까지 다른 관계자는 “한·미 동맹 조약상 우리가 미국이 타국을 공격하면 지원해주는 조항은 없다.하지만 한·미 동맹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고 말했다.북핵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간 조율과정에서 우리 정부의입장에 힘이 실리기 위해서라도,또 향후 논의될 주한 미군 재배치 문제에서 우리가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북핵 문제로 한국의 국가 신용 등급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이는 절체절명의 문제란 것이다.반기문 청와대 외교 보좌관 등 경제·외교·국방 대표단이 뉴욕을 방문,우리 안보 상황을 무디스 등에 설명한 것도 우리가 처한 입지를 방증하는 것이다. 경제계에선 향후 이라크 복구 지원 과정에서의 우리 건설업체 참여 등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라며 경제적 논리로 바라보는 측면도 없지 않다. ●노 대통령의 시각은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전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미국 외교의 일방주의적인 측면….”이라며 이라크전을 간접 겨냥했다.또 최근 이라크전에 대한 지지 표명을 보고받는 자리에서도 “관계장관과 협의해 처리해 달라.”고만 했다.노 대통령이 그동안 갖고 있던 대미 정서상 이라크전에 대한 결정이 쉽지 않다는 측면일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지난 11일 육군사관학교 임관식에서 “앞으로도 한·미 동맹은 더욱 공고해야 하며 이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노 대통령의 선택이 어느 방향인지를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정부 관계자는 “우리가 실리만 추구하고,명분을 버린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한국은 그동안 유엔 석상에서 이라크가 국제적인 대량살상무기(WMD)의 비확산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한·미 동맹 관계 이전에,국제사회 대의명분을 따른 입장이란 것이다.무기사찰 종료 전에 무장해제를 하라는 유엔 결의안 1441호의 완벽한 이행을 촉구하는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참여정부의 딜레마 여론과 국익이 상충되는 것이 ‘참여정부’의 고민이다.이라크전 지원 방침은 정했지만,우리 정부의 입장은 신중하기만 하다. 한 관계자는 “역대 정부 같았으면 지금쯤 이라크 전에 대한 지지성명을 냈을 것이다.하지만 국내 반전 여론에 상당히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국내 반전 여론이 60%를 넘어서는 와중에서도 미국의 이라크전에 대한 공개 지지를 수차례 밝혔다.1900년대 초 영·일 동맹,1945년 이후 미·일 동맹 이후 국가 팽창과 경제 성장이라는 동맹의 과실을 듬뿍 받은 일본의 경우 정부 차원의 고민의 여지는 없는 듯하다. 13일 정부가 비공개로 통일·국방·외교 장관 회의를 가질 예정이지만,곧바로 지지 성명 등 결과물을 내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은 우리 정부의 여론과 국익 사이 줄타기가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씨줄날줄] 트로이 목마

    BC 1200년경,불화(不和)의 여신 에리스는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지혜의 여신 아테네,제우스의 아내 헤라 사이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쓴 황금 사과를 던져준다.제우스는 여신들이 저마다 자기 것이라고 우기자,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판정을 맡긴다.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고,그 대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얻는다.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와 그의 형 아가멤논의 그리스군은 배 1000척을 이끌고 트로이 원정길에 나서 10년만에 승리를 거둔다.그리스군은 거대한 목마를 남겨두고 철수하는 체했다가,트로이군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놓고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는 사이,목마 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 등이 성문을 열어주자 난공불락의 성 안으로 쳐들어가 함락한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BC 900년경에 쓴 대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전하는 트로이 전쟁은 19세기에 들어서자 신화나 전설로 치부하는 사람이 많았으나,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3년에 유적지를 발굴함으로써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그러나 최근에는 슐리만의 공과가 다시 논의되고 있다.영국 BBC 다큐멘터리 방송은 슐리만이 발굴한 유적지는 트로이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여러 시기의 유적이 켜켜이 쌓인 곳에서 한 두층을 발굴했을 뿐,진짜 트로이 유적은 발굴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파괴해버렸다는 것이다.그리스가 트로이와 전쟁을 벌인 것도 에게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보통신부가 개인용 컴퓨터(PC)에 ‘트로이 목마’가 광범위하게 유포돼 있다고 경보를 발령했다.‘트로이 목마’는 바이러스나 웜처럼 다른 파일을 감염시키거나 복제하지는 못하지만,목마 속에서 나온 그리스군이 트로이를 멸망시켰듯이,유용한 프로그램을 가장해 PC에 숨어든 뒤 배포자의 의도에 따라 신용카드 번호나 비밀번호 등과 같은 사용자의 정보를 외부에 알려주거나 파일을 파괴한다.‘트로이 목마’는 트로이 전쟁에 얽힌 수많은 영웅과 신들에 대한 서사시가 네티즌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황진선 jshwang@
  • 책꽂이/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외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김인숙 외 지음) 2003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를 비롯,특별상 수상작인 전상국의 ‘플라나리아’,추천 우수작인 복거일의 ‘내 얼굴에 어린 꽃’,하성란의 ‘자전소설’,전경린의 ‘부인내실의 철학’,김경욱의 ‘고양이의 사생활’ 등을 실었다.문학사상사 9000원. ●한국 현대문학사(김윤식 외 지음) 한국 현대문학 100년사를 통시적으로 조감했다.시와 소설,희곡,평론에 걸친 각 장르의 현역비평가 34명이 1900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문학의 흐름을 정리,문학 사료집으로 꾸몄다.김윤식 김우종 정현기 조남현 이동하씨 등이 집필했다.현대문학 1만 3000원. ●섬,나는 세상 끝을 산다(한창훈 지음) 지난 98년 소설 ‘홍합’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저자의 신작 장편소설.섬의 외진 곳에서 혼자 적막한 생활을 하는 주인공이 변방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열 두개의 이야기를 연작형식으로 엮었다.창작과비평사 8000원. ●피아노소리(김연화 지음) 제2회 ‘문학과 경계 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당선작.경기도일산 신도시에 있는 월마트를 무대로 중산층에 편입하려는 변두리 사람들과 외국 근로자들의 고달픈 생활을 그렸다.문학과경계 8000원. ●2003 신춘문예 당선시집 대한매일 등 올해 전국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 당선 시와 시조를 수록했다.시집에는 대한매일 시 당선자인 김경주의 ‘꽃피는 공중전화’등 14명의 당선작과 신작시 각 5편,심사평,당선소감과 당선자들의 약력 등을 실었다.문학세계 8000원. ●커피이야기(줄리아 알바레스 지음,송은경 옮김) 저자가 남편과 함께 고향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나무그늘을 이용해 환경친화적으로 커피를 재배,생산하며 이 체험을 소설로 썼다. 나무심는사람 6800원.
  • 한전프라자 ‘일렉트릭 파워’전/예술이 된 전기에너지

    미술에서 전기에너지는 어떻게 응용될 수 있을까.먼저 꼽을 만한 것으로는 1920년대에 시작해 1960년대에 절정을 이룬 키네틱 아트(kinetic art,움직이는 미술)와 네온이나 형광등 같은 인공의 빛을 이용한 라이트 아트(light art)를 들 수 있다.이후 ‘전기예술’은 비디오,컴퓨터,홀로그램 등으로 그 폭을 넓혀갔다.이러한 예술과 과학적 상상력의 만남은 곧 이미지의 모험으로 이어진다. 한국전력이 운영하는 서울 서초동 한전프라자갤러리가 마련한 ‘일렉트릭 파워’전은 시각 이미지로서의 전기와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색다른 기획전이다.전시를 꾸민 최금수씨는 “단순히 번득이는 빛과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력장치로 공간과 시간을 현혹시키는 눈요기 전시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전기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아울러 예술가들의 상상력이라는 콘텐츠의 변화도 읽어보자는 것이다. 전기가 보편화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1879년 토머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하면서 일상에 들어온 전기는 1887년 조선에 처음 선보였고,이어 1900년 종로에 3개의가로등이 켜지면서 우리 생활에 파고들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번 전시의 초점은 물론 전기의 역사를 더듬는 게 아니라 전기의 시각이미지화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출품작가는 김주호 정인엽 안상진 백남준 등 13명.김주호의 ‘유쾌한 날’은 나무와 철판,합성수지 등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로 인물조각을 만들고 센서를 단 작품으로,관람객이 다가서면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일종의 움직이는 조각이다.자칫 냉소적으로 비칠 수 있는 테크놀로지 아트를 따스하고 생기있게 만들자는 게 작가의 의도다.정인엽은 거울 아래 숨겨 놓은 전자석으로 실에 묶인 바늘을 움직이게 하는 키네틱 아트 ‘원 그리기’를 출품했고,안상진은 사이보그처럼 움직이는 로봇이 큰북과 작은북을 차례로 연주하는 영상설치작품 ‘달리기를 위한 장단’을 내놓았다.백남준의 영상작품 ‘TV첼로’도 나와 있다.2월16일까지.(02)2055-1192. 김종면기자 jmkim@
  • [씨줄날줄] 훈 장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일 게다.어렸을 적에는,나쁜 짓을 해도 전쟁터에서 큰 공로를 인정받은 훈장이 있으면 한번은 감옥에 안 가도 되는 것으로 알았었다.그만큼 훈장은 언제나 영예스러움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오래전 6·25 기념행사에서 한 늙은 예비역 장교의 연설을 들으며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학생시위로 나라가 어수선할 때였다.“오늘 아침 녹슨 충무무공훈장을 가슴에 차면서 목이 메었다.어떻게 세운 나라이고,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그에게 훈장은 생명이며,역사이며,먼저 산화한 전우들과의 추억이었기에 그랬으리라 짐작했다. 실제 1943년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에 패퇴하는 독일군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 ‘철십자 훈장(Cross of Iron)’은 전쟁터의 군인에게 훈장이 무슨 의미인가를 잘 보여준다.주인공인 슈타이너 중사가 가슴에 찬 철십자훈장은 군인으로서 명예이며,자존심이며,국가에 대한 뜨거운 충성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목숨을 담보한 전쟁의 광기이기도했지만…. 훈장제도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행된 것은 1900년,광무 4년때이다.당시 금척대훈장 등 4종류였으나,오늘날에는 무궁화 대훈장을 비롯해 건국,국민,무공훈장 등 12가지 종류의 훈장이 있다.전 현직 대통령 및 그 배우자,우방원수와 그 배우자에게만 수여하는 무궁화대훈장만 등급이 없고,나머지 훈장에는 5등급이 있다.예컨대 무공훈장의 경우 태극·을지·충무·화랑·인헌으로 나눠져있다. 우리는 너무 칭찬에 인색하다고들 한다.그래서 나라의 칭찬이자 격려인 훈장을 받는 유공자가 많다는 것은 어쨌든 반길 일이다.최근 현 정부에서 봉직한 장·차관급 인사 300여명에 대해 행정자치부가 훈장을 상신했다는 보도다.역대정부처럼 퇴임 후 곧바로 수여해야 하는데,미루다 보니 대상자가 많아졌다는 해명이다. 늦게나마 훈장을 챙긴 것은 잘한 일이나,장·차관을 6개월 이상하면 그가 남긴 성과나 업적에 관계없이 일괄적으로 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권위를 잃는다면 그것은 이미 ‘훈장’이 아니다. 양승현 yangbak@
  • “올해는 사상 두번째로 따뜻한 해”WMO예측

    (제네바 연합) 금년은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사상 두번째로 따뜻한 해로기록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세계기상기구(WMO)가 17일 밝혔다. WMO는 이날 올해 지표면의 평균온도는 지난 61∼90년의 연평균치에 비해 섭씨 0.5도 정도 높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지금까지 사상 최고로 따뜻한 해는 엘니뇨 현상이 집중된 지난 98년이다. WMO가 185개 회원국이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표면온도 상위 10위는 모두 87년 이후에 나타났으며 이 가운데 아홉해는 90년 이후에 기록됐다. WMO는 특히 지난 76년부터 2000년까지 지표면의 온도는 지속적인 상승세를유지하는 등 과거 100년 전에 비해 지표면 온도의 상승추세는 대략 3배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1900년 이래 지표면의 평균온도는 섭씨 0.6도 이상이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다. 기상관측 전문가들은 “지표면 온도의 상승률은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며지구온난화가 가속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서울시립미술관에서’밀레의 여정’전

    19세기 사실주의 화가이자 ‘바르비종’파의 핵심인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작품이 서울에서 전시되고 있다. 지난 14일 시작해 내년 3월3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밀레의여정’전에 나온 작품은 유화 35점,데생 33점,판화 14점 등 모두 80여 점.밀레에게 영향을 준 들라로슈·다비드 등 고전주의 작가와,밀레에게서 영향 받은 반 고흐·세잔 등 후기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 70여 점도 함께 소개한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라 샤리테(동정심)’ ‘여름,세레스’ ‘어머니와 아들’.밀레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은 ‘라 샤리테’는 제작한 뒤 100여년간 행방불명되었다 최근 발견된 작품이다.농부의 아낙이 딸에게 문 밖의 거지에게 빵을 전하게 하는 모습이 따스한 색채로 그려졌다.어머니의 채근에 어린 딸은 수줍기도 하고 거지가 무섭기도 한 듯 망설이며 뺨을 발갛게 물들인다. ‘여름,세레스’는 여신의 왼쪽 뒤에,일에 지친 채 건초 위에서 잠이 든 남녀의 모습을 담은 작품.고흐와 피카소의 ‘낮잠’에소재로 차용돼 화제가된 명작이다.밀레의 생전에는 ‘오줌누는 아이’라고 불리던 ‘어머니와 아들’은 모성의 친밀함·다정함 등 섬세하고 부드러운 서정이 잘 표현돼 있다.드로잉인 ‘아이에게 보리죽을 먹이는 어머니’에서도 같은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제 4전시실에는 비록 포스터들이지만 ‘별이 빛나는 밤’ ‘씨뿌리는 남자’ ‘낮잠’ ‘첫 발자국’ 등 밀레의 영향을 받은 고흐 작품을 나란히 전시했다.1999년 오르세 미술관의 ‘밀레·고흐’전과 같은 형식이다.‘낮잠’을 1889∼1900년까지 90차례 그렸다는 고흐는 밀레를 ‘나의 정신적 안내자’라고 말했는데,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난 밀레는 18세 때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으며 1837년 파리로 유학해 들라로슈의 제자가 됐다.그가 작가로서 명성을 높인 것은 1848년으로,살롱전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을 통해서였다.다음해 파리 교외인 바르비종으로 거처를 옮긴 뒤 농민의 고통과 노동의 신성함을 집중적으로 화폭에 옮겼다. 전시장에는 온도와 습도를 맞추는 기계를 들여놓는 등 세심하게 관리하고있다.관람료는 일반 8000원,청소년 6000원,어린이 4000원.(02)2124-8991. 문소영기자 symun@
  • 톨스토이와 거닌 날들/고리키가 회고한 톨스토이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와 막심 고리키(1868∼1936).이들의 삶의 출발점은 사뭇 다르다.귀족집안에서 출생한 톨스토이와 달리 고리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다섯살 때 아버지가,열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란 그는 각지를 떠돌며 짐꾼,그릇닦이,구두닦이,빵공장 노동자 등으로 살았다.그가 고통스럽다 또는 쓰다라는 뜻을 지닌 ‘고리키’를 필명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이처럼 다른 배경을 지녔지만 이들은 서로에 대한 문학적 경의를 잊지 않았다.고리키는 톨스토이가 생전에 가장 아꼈던 후배작가다. ‘톨스토이와 거닌 날들’(우물이 있는 집 펴냄,한은경·강완구 옮김)은 고리키가 쓴,말년의 톨스토이에 대한 회상기다.톨스토이보다 마흔 살 적은 고리키가 1900년 이후 톨스토이와 교류하면서 나눴던 짤막한 대화를 중심으로꾸몄다. 고리키에게 톨스토이는 인간영혼의 정점이었으며 예술의 수호신이었다.이같은 그의 믿음은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전설적 영웅이었다.용감했으나 야성적이었고 완고했으며 어린아이 같았다.”라는 평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고리키는 톨스토이를 무척 존경했지만 언제나 감탄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리키가 가까이서 지켜본 톨스토이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답지 않게 마차꾼처럼 냉소적이고 상스러운 말투를 잘 썼다.게다가 얄궂은 질문으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톨스토이는 어느날 공원에서 안톤 체호프에게 불쑥 물었다.“자네 젊었을 때 오입을 많이 했었나?”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한 체호프 역시 “지칠 줄 몰랐죠.”라고 상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고리키는 훗날,“톨스토이의 이런 말투는 엘리트주의를 싫어했던 그의 민중적 성향을 드러낸것이며,동시에 그런 막된 단어가 더 정확하고 요점에 맞는 말이라고 그가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고리키는 톨스토이를 삶의 진실 혹은 하느님을 찾아다니는 순례자로 보았다.“톨스토이는 평생동안 손에 지팡이를 쥐고 수천 마일을 걸어 수도원을 찾아 한 성인의 유골을 보고 또 다른 것을 찾아다니는 순례자 같다.”고 증언했다.그러나 톨스토이가 믿는 하느님은 달랐다.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톨스토이의 일기장에는 “신은 나의 욕망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톨스토이가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에 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고뇌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엘리트주의적’인 톨스토이는 고리키의 몸과 마음에 배어 있는 민중적인 것을 좋아했지만 무신론적 경향에 대해서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와 유럽 작가들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했다.그 중에서도특히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언급이 많다.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나쁜 소설’로 규정한다.나아가 “주인공이 건강한 인물이라도,그의 순수함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주인공을 간질병 환자로 그린 것은 자기스스로 병이 있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병이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이 책에는 톨스토이의 일상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70여점의 사진들이들어 있다.8500원. 김종면기자 jmkim@
  • 러시아 데이비스컵 첫 우승

    (파리 AP 연합 ) 러시아가 남자 테니스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서 막판역전극을 펼치면서 사상 첫 우승을 따냈다. 러시아는 2일 프랑스 파리 베르시코트에서 열린 남자 단식 두 경기를 잇따라 이겨 종합전적 3-2로 프랑스를 누르고 지난 1900년 대회 창설 이후 처음정상을 밟았다. 러시아는 첫 단식에서 세계 랭킹 5위 마라트 사핀이 세바츠찬 그로장을 3-0으로 완파해 2-2로 동률을 이룬 뒤 미하일 요즈니(32위)가 폴 앙리 메튜를 3-2로 꺾어 극적인 역전 우승을 움켜쥐었다. 귀빈석에서 경기를 지켜본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우승이 확정된뒤 선수들과 함께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첫 우승의 기쁨을 나눴다.
  • 근대회화 124점 한자리에/덕수궁미술관 내년 5월 11일까지 전시

    1900년부터 1960년대까지 그려진 한국의 회화를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27일부터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근대회화 124점을 내년 5월11일까지의 일정으로 선보이는 자리.‘근대미술의 산책’이란 주제 아래 제1부 ‘관념,현실 그리고 표현’과,제2부‘근대성의 모색’으로 나뉘어 전시된다. 먼저 내년 3월30일까지 1·2전시장에서 열리는 1부는 수묵채색화 위주의 전시.조선조 마지막 화원화가로 불리는 안중식과 조석진의 ‘사군자’‘기명절지(器皿折枝)’‘노안도’ 등이 나와 있으며 이상범의 ‘초동(初冬)’,이유태의 ‘탐구’,권영우의 ‘화실별견’도 눈에 띈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의 작품으로는 박래현의 ‘노점’,이응노의 ‘고향집’ 등이 대표작으로 전시된다. 유화·수채화 위주의 2부 전시는 새달 18일부터 내년 5월11일까지 3·4전시장에서 열린다.전시의 소주제는 정체성,여성의 이미지,전쟁과 미술 등.고희동의 ‘자화상’과 서동진의 ‘팔레트 속의 자화상’,황술조의 ‘정물’,박고석의 ‘범일동 풍경’,유영국의 ‘산’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02)779-5310. 문소영기자 symun@
  • 책/ 코르티잔, 매혹의 여인들 - 세상을 유혹한 전설의 ‘코르티잔’

    15세기 베네치아를 주름잡은 베로니카 프랑코,18세기 프랑스의 숨은 권력자 마담 드 퐁파두르,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의 모델 블랑시,벨 에포크(1900년 전후의 황금시대) 때 프랑스를 풍미한 리안 드 푸지,베르디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마리 뒤플레시스….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당대 최고의 코르티잔(courtesan)이었다는 점이다.코르티잔의 사전적 의미는 ‘부유한 남자들이나 귀족과 관계를 가진 고급 창녀 또는 정부’.그러나 시몬 드 보부아르는 코르티잔이야말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며,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여성으로서 유례없는 지적 자유를 누린 존재”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코르티잔,매혹의 여인들’(수전 그리핀 지음,노혜숙 옮김,해냄 펴냄)은 이러한 보봐르의 관점에서 코르티잔 이야기를 풀어간다.그런 만큼 독자들은 이 책에서 여성의 사회적·경제적·성적 제약을 비웃으며 자신들의 힘으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움켜쥔 특별한 여인들의 삶을 만나게 된다. 코르티잔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서구 문화예술사의 흐름은 물론현대인의 감성도 달라졌을지 모른다.코르티잔은 직접 시와 소설을 썼고,물랭 루즈에서 캉캉을 고안했으며,폴리베르제르에서 눈부신 연기를 보여주는 등 당대 문화사의 중심에 있었다. 코르티잔은 문인·화가·조각가들의 작품 소재로도 자주 등장한다.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아폴로니 사바티에라는 여인을 노래했고,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줄거리 한가운데에 코르티잔이 놓여 있다.또한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가 당시의 유명한 코르티잔인 프리네를 모델로 비너스를 조각한 이래 티치아노,베로네세,라파엘로,조르조네,부셰 등 많은 작가들이 코르티잔을 모델로 여신을 그렸다. 한국의 전통적인 기생이나 일본의 게이샤가 그랬듯이 코르티잔은 높은 교양을 갖춰야 했다.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 또는 뮤지컬 ‘마이 페어레이디’에서처럼 그들은 상류층의 말투와 옷 입는 법,우아하게 걷는 법,춤추는 법을 배워야 했다.식사예절뿐만 아니라 때로는 궁중의례를 포함한 예법도 알아야 했다.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코르티잔이 지닌 특별한 매력과 유혹의 기술을 일곱 가지 덕목으로 나눠 소개한다.특히 기회를 행운으로 바꿀 줄 아는 타이밍 감각,벨 에포크의 분위기를 주도한 쾌활함,여성의 부드러움과남성의 힘을 동시에 지닌 양성적 우아함 등은 그들의 삶을 이끈 강력한 무기였다. 프랑스에서 코르티잔은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전통의 일부였다.적어도 벨에포크 이전 수백년 동안 파리는 코르티잔과 코르티잔 후보들,그리고 그들과 함께 마법을 추구한 남자들을 끌어들었다.실제로 제2제정 시대에는 코르티잔들이 너무 활개를 쳐 “파리는 코르티잔이다.”라고 한 발자크의 말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코르티잔은 사라졌다.그 어떤 아름다움과 재능으로 세상을 유혹한다 해도 코르티잔이라 불리지 않는다.20세기 초 사라져가는 코르티잔의 역사에 마지막 생명을 불어넣은 인물은 미국에서 공연된 ‘춘희’의 여배우사라 베르나르.관중을 사로잡은 그녀의 음성은 황금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 사회에서 사교계를주름잡으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 간 코르티잔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그것이 서구의 문화예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1만2000원. 김종면기자 jm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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