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900년
    2026-06-03
    검색기록 지우기
  • 미르
    2026-06-03
    검색기록 지우기
  • 무덤
    2026-06-03
    검색기록 지우기
  • 조민
    2026-06-03
    검색기록 지우기
  • 독대
    2026-06-0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685
  • [종교플러스]

    이기흥 중앙신도회장 13일 공식취임 조계종 중앙신도회는 13일 오후 2시 조계사 대웅전에서 제24, 25대 회장 이·취임식을 연다. 이·취임식은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치사와 포교원장 지원 스님의 격려사, 중앙지도법사 추대, 자비나눔 전달식 순서로 진행된다. 이기흥 신임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중앙신도회 운영 방침과 주요 사업계획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신도회는 이날 나눔문화 행사로 독거 노인 등 지역 이웃들을 위한 ‘자비의 쌀 모음행사’와 교정 시설에 교양 도서를 전달하는 ‘희망도서 모음 행사’를 펼친다. 가톨릭작곡가협회 13일 음악회 한국가톨릭작곡가협회(한가작협)는 13일 오후 8시 서울 삼성동 성당에서 ‘둘이 하나, 주님 안에’ 음악회를 연다. 지난 6월 마장동 성당 하상바오로성가대와 협연한 이후 두 번째 공연으로 회중용 성가부터 영성체 후 묵상곡, 연주회용 작품까지 다채로운 작품을 선사한다. 1700년대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비발디의 ‘글로리아’도 연주돼 18세기와 21세기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 진흥문화, 기독교역사문화관 개관 ㈜진흥문화는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를 정리한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서울 신설동 진흥빌딩 4층)을 최근 개관했다. 역사문화관에는 최초의 한글 성경인 누가복음(1882년)·마가복음(1884년) 영인본을 비롯해 서상륜·서경조 형제의 주기도문(天)·사도신경(地)·십계명(人) 공예품(1887년) 등이 소장돼 있다. 1900년 한국 최초 성화 캘린더와 천로역정 한글 영인본, 쿰란 동굴 항아리 등도 전시된다. 한편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은 소그룹 모임을 위한 세미나실을 무료로 대관한다. (02)2230-5113.
  • 퀸메리호 유명 여자유령 ‘하얀 옷 여인’ 찍혔다

    퀸메리호 유명 여자유령 ‘하얀 옷 여인’ 찍혔다

    유령이나 귀신을 쫓는 고스트헌터라면 꼭 한 번 방문해야 한다는 퀸메리호. 지금은 호텔로 변한 이 선박에서 ‘햐얀 옷의 여인’으로 불리는 유령이 찍혔다고 한 여성 고스트헌터가 주장해 이목을 끌고 있다. 1일(현지시각) 영국 일간지 더 선 등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 ‘고스트 걸’ 쇼를 진행하고 있는 발렌티나 롬보르가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롱비치 항구에 정박 중인 퀸메리호를 방문해 촬영한 사진 중에서 유령으로 보이는 형체를 발견했다. 덴마크 모델 출신의 고스트헌터인 그녀는 퀸메리호의 ‘불법 거주자들’ 즉 유령을 조사하기 위해 그 배를 방문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맨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면서 “추후 집에 돌아가 사진을 살펴보던 도중 찍힌 유령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하얀 옷의 여인’일 수도 있다.”면서 “그 유령은 자주 직원들에게 목격되고 있지만 이렇게 카메라에 찍힌 경우는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발렌티나는 자신의 사진에 찍힌 것이 하얀 옷의 여인으로 불리는 젊은 신부라고 주장했다. 목격담에 따르면 이 유령은 퀸메리호의 객실 밖 복도와 벽을 마구 통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퀸메리호에는 몇몇 유명한 유령이 목격된다고 전해진다. 이 중에는 소방 훈련 중에 사망한 18세의 엔지니어나 수영장에서 익사한 소녀, 그리고 탈의실에서 살해된 젊은 여성 등이 유령으로 나타난다고 알려졌다. 한편 퀸메리호는 1900년대 초, 영국에서 퀸엘리자베스호와 함께 만든 최고급 유람선으로, 1967년 미국에 팔려 호텔과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진=멀티비츠(스플래쉬 뉴스·위에서 부터), 트위터, 더 선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세계 예술대학들 협력으로 동북아 분쟁해결 기여 희망”

    “세계 예술대학들 협력으로 동북아 분쟁해결 기여 희망”

    “각국의 예술대학들 간 협력이 (영토문제로)경색된 동북아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바지하길 바란다.” 박종원(52)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총장은 25일 기자간담회에서 개교 20주년을 기념해 오는 10월 4일부터 6일까지 유럽예술기관연맹(ELIA·엘리아)과 함께 국제예술교육 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말했다. 대회이름은 ‘엘리아 아시아 국제예술교육심포지엄’. 엘리아는 1900년 설립돼 47개국 350개 기관으로 이뤄진 유럽 고등예술교육단체로, 예술분야 교육자, 행정가, 학생 간 교류가 활발하다. 이런 엘리아를 모델로 아시아 국가 간에 교류협력기구 설립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박 총장은 “타이완, 일본, 한국과 동남·중앙아시아 등이 예술교육의 최소한이라도 공유하고 유럽처럼 예술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취지”라고 덧붙였다. 서울 석관동 한예종에서 열리는 학술대회는 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의 ‘세계 예술대학 네트워크 창립의 의미와 역할’이라는 제목의 기조발제를 시작으로 엘리아 전 회장인 크리스 웨인라이트 런던예술대 학장, 엘리아 사무총장 칼라 델포스 박사, 엘리아 회장인 키에란 코르코란 교수, 박 총장 등의 발제와 토론으로 진행된다. 심포지엄 마지막 날인 6일에는 아시아 예술대학 간 첫 번째 교류기구인 아시아예술교육협의체(ANAE)를 창립한다. 이 행사에는 일본, 중국, 베트남, 미얀마,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19개 나라의 예술대학과 기관대표 37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박 총장은 “국제영화제나 각종 세계대회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한국의 문화 역량을 배우고자 하는 나라가 많다.”면서 “가수 싸이가 한국 대중문화의 힘을 세계에 널리 알렸듯이, 한예종은 순수예술과 예술교육에서 한국의 역량을 널리 알려 나가겠다.”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사설] ‘독도는 한국땅’ 진실 밝힌 일본의 한 양심

    이달 중순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이후, 일본 정부와 우익세력의 억지가 갈수록 도를 넘고 있다.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겠다고 법석을 떨더니 급기야 홍보영상물을 만들어 국제 여론전에 나서겠다고 한다. 참으로 가관이고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일본인 고지도 수집가인 구보이 노리보가 그제 소장한 지도를 공개하면서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밝혔다. 양심이 살아 있는 일본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교사 출신인 구보이는 “더 이상 영토와 관련된 진실을 감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본인이지만 지도를 공개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더구나 지도를 공개하기까지 일본 우익세력의 공격을 각오했다니, 그 용기를 높이 살 만하다. 그가 공개한 지도 가운데 하나는 1901년 일본 문부성이 발간한 ‘수정 소학일본지도’(修正 小學日本地圖)이다. 이는 일본 국민에게 자국영토를 정확하게 알리려고 만든 지도로, 문부성의 검정을 거침으로써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담긴 교과서인 것이다. 이 지도에 일본은 자국영토를 여러 색으로 칠해 놓았다. 그러나 울릉도는 표시만 있고 색칠을 하지 않았고, 독도는 아예 그려 놓지도 않았다. 이는 17세기부터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해 왔다는 일본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사료(史料)인 것이다. 그제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신찬지지(新撰地誌) 등 1886~1900년에 발간된 일본의 교과서 지도 7점 어디에도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표시는 없다. 이런 명백한 증거들 앞에서도 독도 영유권을 고집하는 일본 정객들의 뻔뻔함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진실을 호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일본 정부와 국수주의 세력은 자국 국민의 양심 바른 목소리에 귀를 열기 바란다. 한·일 두 나라의 진정한 미래를 위해서는 거짓과 외교 소모전을 빨리 접을수록 좋다.
  • 1887년 日 교과서도 “독도는 한국땅”

    1887년 日 교과서도 “독도는 한국땅”

    독립기념관이 28일 공개한 일본 근대 역사·지리 교과서는 ‘독도는 한국땅’이란 ‘확실한’ 증거들처럼 보인다. 그간 일본이 주장해 온 ‘독도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논거를 스스로 부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구체적으로 이번에 공개한 자료를 살펴보면 일본의 근대지도 제작자인 오카무라 마쓰타로가 문부성의 출판허가를 받아 1887년에 편찬한 지리 교과서 ‘신찬지지’(新撰地誌)가 흥미롭다. 신찬지지에 실린 ‘일본총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에 속한 섬이라는 의미로 가로줄이 표기돼 있다. 독도에서 157㎞ 떨어진 오키 섬을 포함한 나머지 일본 영토에는 별도의 가로줄이 그어져 있어, 독도의 영유권이 한국에 속해 있음을 명확히 보여 준다. 1900년 문부성이 검정한 ‘소학지리(小學地理) 1·2권’에 수록된 일본 전도에는 일본 영토가 붉은색으로 표시돼 있는데, 오키 섬 외에 1894년 청·일전쟁으로 식민지화한 타이완을 붉은색으로 칠해 자신들의 영토임을 강조했지만, 독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없고 색깔로도 표시하지 않고 있다. 이보다 앞서 발행된 1886년 ‘일본사요(日本史要) 상권’에도 대마도와 오키나와 등 주변 군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기하고 설명했으나, 독도는 표기하지도 언급하지도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1888년 아오키 쓰네사부로가 지은 ‘분방상밀 일본지도’(分邦詳密日本地圖)에서도 오키 섬까지만 영토로 표시해 놓았을 뿐이다. 정영미 동북아역사재단 산하 독도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날 “1905년 러·일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일본은 러시아 함정의 남하 여부를 감시하고자 울릉도와 독도를 점령한 것이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계기가 됐다.”면서 “17세기부터 실효지배를 해 왔다는 일본의 역사적 고유영토론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소리인생 60년’ 국악인 신영희씨

    [김문이 만난사람] ‘소리인생 60년’ 국악인 신영희씨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후회하지 않을까. 그게 처절하든 아니든 말이다. 그런데 후회라는 단어를 한 번도 떠올려 보지 않고 외길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온 한 여인이 있다. 지난 18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신영희 국악 연습실’에서 20여명의 젊은 여인들이 목청을 가다듬고 있었다. ‘저 처량한 새 울어 울어, 평생 낭군을 못잊어 이팔 청춘 과부되어, 공방 적적 홀로 뚝~’ 가만히 들어 보니 새타령 가락이긴 한데 처음 듣는 가사내용이었다. 하지만 곱디고운 목소리에 내면 깊숙한 한이 곳곳에 서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새달 15, 16일 이틀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신영희 소리인생 60주년 콘서트’에 출연하는 사람들이다. 국악인 신영희(70)씨는 2002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50주년 기념공연을 한 이래 10년 만에 대형무대를 마련한다. 함께 연습 중인 신씨와 잠시 만났다. 방금 전 불렀던 노래에 대해 먼저 물었다. “조선 말기 5명창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전설의 소리꾼 이동백 선생의 새타령입니다. 1900년 고종 황제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벼슬을 얻었지요. ‘춘향가’, ‘적벽가’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새타령’은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새타령에는 온갖 상상의 새들이 다 등장합니다. 가사나 가락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소리 인생 60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터. 소감을 물었다. “세월이 무상하지요. 10살 때 소리를 시작했는데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하지만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본분에 충실하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지요. 뒤돌아보니 그동안 고생도 있었지만 많은 제자를 길러낸 것을 가장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60년 국악인생’ 처음으로 무대 올려 제자 자랑이 계속 이어진다. 지금까지 대통령상 수상자 8명, 국무총리상 수상자 20여명, 장관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며 웃는다. “저는 제자들에게 항상 주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이 돼라. 그 다음에 소리다’라고 말입니다. 소리가 조금 부족하면 연습해서 도달하면 되지만 인간이 안 되면 연습해도 소용이 없잖아요. 효제사상, 그러니까 덕을 갖추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라고 늘 강조합니다. 이런 관계로 20년, 아니 30년된 제자들도 여럿 있지요.” 다시 공연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신씨는 “이상벽(방송인)이랑 누나 동생하며 지내는 사이인데 이상벽이가 그래요. ‘누나, 올해가 60주년인데 그냥 있으면 되겠습니까. 멋진 공연 한번 해 보시지요. 송해 선생님도 하는데 못할 게 뭐 있습니까’라고 해서 이번 무대를 마련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하여 이씨가 사회를 보고 친구인 배우 사미자, 김형자, 윤문식씨가 함께 출연한다. 한때 개그 프로그램에서 명콤비를 이루었던 ‘쓰리랑 부부’의 김미화와 김한국씨도 무대를 빛낸다. 김미화씨는 신씨의 딸과 오랜 친구이다. 신씨의 애제자 30여명도 함께 출연한다. 60주년인 만큼 퓨전 국악무대로 꾸민다. 1부에서는 신씨의 60년 일대기가 드라마 형식으로 펼쳐진다. 사미자, 김형자씨가 어머니 역할로 번갈아 출연하고 명창 김일구씨가 아버지 역할을 맡는다. 신씨의 제자 둘이 10~30대 연기를 하고 40대 이후 역할은 본인이 직접 맡는다. 2부에서는 쓰리랑 부부와 함께 흥겨운 마당놀이로 꾸며지며 옹헤야, 뱃노래, 새타령, 물레타령 등 신나는 노래를 직접 들려준다. “지난 60년 세월, 그러니까 제 인생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영민, 이주희 작가가 대본을 썼는데 그걸 읽고 세번이나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와 제가 소리하면서 고생했던 대목에서 울었지요. 이래저래 이번 무대에서 진정한 저의 모습을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가 조금 잠긴 듯했다. 몸 상태를 물었더니 감기 기운이 있는 것 빼고는 컨디션이 좋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매일 아침 스트레칭을 하고 저녁에는 올림픽 공원에서 걷기 운동으로 컨디션을 조절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자신에게는 식지 않는 패기와 정열, 그리고 용기가 있으니 좋은 무대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국악은 내 팔자이자 생명 그 자체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국악을 할 것입니다. 국악이 서양음악에 비해 훌륭한 이유를 아시나요. 서양음악은 소프라노, 메조 소프라노, 바리톤, 테너 등으로 나눠 부르지만 국악은 이 모든 것을 함께 아우르며 고저 장단의 음을 다 소화해내지요. 외국에 공연가면 서양음악인들은 바로 이런 점을 매우 놀라워합니다.” 그가 국악을 하게 된 계기는 판소리 명인 아버지(신치선)의 영향을 받았다. 10살 때인 어느 날 아버지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가만히 들어 보니 제자들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소리를 배우겠다고 아버지한테 졸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자로 태어났으니 살림이나 하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노래 솜씨가 영 없는 것은 아니니 한번 가르쳐 보라.”고 설득해 그날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들은 것이 소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소리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반대하셨지요. 그렇게 시작된 것이 어느덧 60년이 됐네요.” 신씨가 16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드러눕는 바람에 소녀 가장이 됐다. 고등학생인 오빠, 그리고 초등학생인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열심히 판소리를 했다. 권투를 하는 오빠와 공수도를 하는 남동생 사이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권투와 역기, 아령 등을 익힌 것도 이때였다. 이에 대해 신씨는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교육자로 살아가는 오빠를 볼 때마다 늘 자랑이고 보람을 느낀다.”고 술회했다. 고생했던 일도 기억한다. “15살 때인가 그래요.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어혈이 심하게 생겼습니다. 목과 배가 너무 아파 식초와 섞은 계란 흰자를 1년 넘게 먹으면서 견디기도 했지요. 좀 고생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소녀 가장이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나중에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대학원에서 무대예술을 전공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출연하는 무대는 대부분 직접 무대감독과 안무까지 한다. 국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은 “우리 국민들이 우리 것을 외면할 때, 남의 나라 음악을 추구할 때였다.”고 말한다.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국악 중의 꽃은 바로 소리입니다. 장단과 몸놀림까지 합쳐진 종합 예술이지요. 그런 자부심으로 1979년부터 유럽, 미국, 일본 등으로 해외공연을 다녔습니다. 특히 독일 공연 때 함성소리와 함께 기립박수를 받았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우리의 판소리가 인간의 생명 그 자체임을 실감했지요.” ●“국민들이 국악 외면할 때 가장 힘들어” 우리 문화가 살아야 나라도 산다고 강조하는 그는 세 가지 실천 덕목을 지킨다. 음식을 손수 만들어 먹고, 꾸준한 운동으로 몸관리를 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항상 유지하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봉사활동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알고 보니 그는 1976년부터 교도소와 수녀원 등을 다니면서 36년째 매년 남 모르게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지난 6월에는 육군교도소와 영월교도소에서 1시간 넘게 공연을 했고 7월에는 나자로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국악하는 지인,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간다. 이럴 때면 좋은 쌀을 사다가 절편 등 직접 떡을 만든다. 대개 1시간 20분 정도 무료공연을 하는데 판소리와 가야금 병창 등을 곁들인다. 올가을에만 4곳에서 예정돼 있다. “제가 국악인의 딸로 태어나 국악인으로 사랑을 받았으니 당연히 사회에 봉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무대의 수익금도 봉사활동을 하는 데 쓰일 것입니다. 나이 70인 제가 늙지 않는 것도 이런 즐거움과 보람이 있기 때문이지요(웃음).” 선임기자 km@seoul.co.kr [신영희씨는] 박봉술·김소희 선생 등에 익혀… 판소리 준문화재 지정 194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판소리 명창인 아버지한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16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드러눕는 바람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판소리를 불러 오빠와 동생을 뒷바라지했다. 이후 안기선, 김준섭, 박봉술, 강도근, 김상룡, 김소희 선생한테 판소리를 익혔다.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김소희 선생 전수장학생에 선정됐다. 1976 중앙 국립창극단에 입단했으며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 준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대학원에서 무대예술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 판소리보존회 이사와 원광대학교 국악학과 교수 등을 맡고 있다. 남원 춘향제 명창부 최우수상(1977)과 2005년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 “친일 할아버지 ‘무사유의 죄’… 15일 또 그 죄 짓고 있지 않나”

    “친일 할아버지 ‘무사유의 죄’… 15일 또 그 죄 짓고 있지 않나”

    밝은 미래 찾기는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서 가능하다. 일제시대 지방 군수를 지낸 친일파의 손자가 광복 67주년을 맞아 서울신문 독자와 국민들에게 조부의 친일 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글을 보내 왔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반발하는 후손들이 적지 않은 가운데 이 같은 고백은 진정한 광복 정신의 표현과 다름없어 보인다. 다음은 1년 전 친일인명사전에서 할아버지 이름을 발견한 윤석윤(55)씨가 14일 보내온 편지다. 윤씨는 현재 경기도 군포시에 거주하며 독서토론 강사 및 기업체 근로자 교육강사 등으로 일하고 있다. 8월 15일이 왔습니다. 광복절입니다. 올해는 저도 이날에 대한 감회가 새롭습니다. 1년 전, 행적을 몰랐던 할아버지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대한제국에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담당할 인재를 키우고자 1895년 제1회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된 양반 자제 200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일본 도쿄의 게이오의숙에서 3년 동안 공부하고 귀국하여 1900년에 농상공부에서 관리로 공직을 시작했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군수로 일하다 1926년 50세에 퇴직하였고, 195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아버지를 찾게 된 것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덕분입니다. 일제강점기 군수를 했다고 하기에 ‘혹시’ 하고 찾아봤는데 그곳에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삶을 알게 된 기쁨과 내가 미워했던 친일파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이 교차해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제의 앞잡이였다니. 할아버지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할 때 왜 관리를 그만두지 못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저는 그 답을 유대인 여성 철학자 해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찾았습니다. 그녀는 유대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담당했던 아이히만의 죄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철저한 무사유(無思惟)’에서 찾고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조직이 요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친일파들도 역시 조직에 순응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무사유의 죄’를 지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죄도 바로 그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평범한 관리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식민지 관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무사유의 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는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방해하고 무력화시켰습니다. 오히려 많은 친일 인사들을 관료로 등용하였습니다. 친일파와 그의 후손들은 잘 먹고 잘 살며,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자리에서 생활하는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했던 분들의 후손들은 못 배우고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사실 앞에 누가 나라를 믿고 목숨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역사 청산의 문제는 나라 안팎으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며칠 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것이 한·일 간의 외교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독도 문제는 단순히 영토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입니다. 안에서는 일부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의 땅을 찾기 위해 국가와 소송을 벌이고, 조상의 잘못을 덮고 공적비나 동상을 세우는 일에 앞장서는 등 후안무치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역사 앞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닐는지요. 조선의 대학자인 정약용 선생은 큰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리 판단 기준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옳고 그름’, 즉 시비(是非)를 따지는 기준이고, 또 하나는 이로움과 해로움, 즉 이해(利害)를 따지는 기준이라 말합니다. 여기에서 시비가 이해보다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후손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 주는 죄를 짓게 됩니다. 역사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8·15를 맞이하여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유공자들과 순국선열,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친일파의 손자가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내내 평안하십시오. 경기 군포시 거주 윤석윤 씀
  • 방학 맞은 아이들의 체험장 된 미술관

    방학 맞은 아이들의 체험장 된 미술관

    “컴퓨터 화면에 있는 그림을 설명하면 그것을 친구가 듣고 그림을 그리니까 신기하고 재밌어요.” 지난달 29일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 어린이 미술관에서 만난 장우진(10)양의 말이다. 3일 저녁 8시 케이블채널 서울신문STV에서 방영하는 ‘TV 쏙 서울신문’에서는 여름방학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양한 미술 체험을 하는 학생들을 만났다. 초등학생 20여명은 3개 조로 나뉘어 한 명씩 차례로 모니터에 나타난 그림을 건너편에 앉은 친구에게 설명했다. 친구는 상상력을 동원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학생들은 서로 그림을 맞춰 보며 즐거워했다. 자신이 본 것을 상대방에게 전달함으로써 ‘귀로 그리는 이미지, 눈으로 말하는 이야기’를 체험했다. 어린이 미술관 ‘에듀 스튜디오’는 예술과의 ‘소통’을 위해 지난 4월 기존 미술관을 교육 문화 공간으로 바꿔 여름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 행사를 준비했다. 신진 작가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작품 속 창작 아이디어와 기법을 경험하는 ‘미디어 아트·현대예술 작가 워크숍’, 상설전시 연계 교육인 백남준의 아트 랩 심화과정 등을 통해 예술 작품의 경제적 가치와 작품의 유통 과정을 알아보는 ‘탕탕탕! 가족 옥션교실’, 상설교육 ‘카페 아틀리에’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이 밖에 ‘TV 쏙 서울신문’은 112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국악기 11점을 소개한다. 국립국악원은 오는 7일 국악박물관 재개관 기념으로 두달간 열리는 특별전 ‘1900년 파리, 그곳에 국악’을 통해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또한 현재 진행 중인 제30회 런던올림픽에서 보여주고 있는 여성들의 활약을 집중 탐구한다. ‘톡톡!! SNS’로 이번 주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을 뜨겁게 달군 이슈들을 살펴보고 지자체장 릴레이 인터뷰에서는 ‘섬기는 리더십’을 통해 낮은 자세로 일하겠다고 말하는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을 만나 취임 2주년의 소회를 들어본다. 성민수PD globalsms@seoul.co.kr
  • 3000년전 이집트 석관속 미라, CT사진 최초 공개

    3000년전 이집트 석관속 미라, CT사진 최초 공개

    3,000년전 고대 이집트 석관 속 미라의 CT 사진이 최초로 공개됐다. 1일 영국 데일리메일 보도에 의하면 영국 맨체스터대 아비어 헬미 박사는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던 이집트 미라 7구를 CT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헬미 박사는 수년전 부터 이집트 미라의 비밀을 풀기 위해 대영박물관을 설득, 미라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최신 엑스레이 기술은 석관을 훼손하지 않고도 내부의 모습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에 사용된 미라 중 첫 번째는 이집트 남부의 여사제로 확인됐는데 내부에는 11개의 황금 부적이 함께 잠들어 있었다. 이는 이 여성이 한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다른 미라는 작은 체구의 12세 소녀로 확인됐으며 나머지 5구의 미라는 50대 남성들로 석관에는 유품이 함께 묻혀 있었다. 이 밖에도 헬미 박사는 연구를 통해 이들 미라가 어떠한 질병을 앓고 있었는 지도 알아냈다. 가장 어린 소녀는 심각한 치주 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2구의 미라에게서는 빈혈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렇게 제공된 정보를 통해 전문가들에게 미라의 건강상태는 물론 행동습관, 경제력, 그리고 기원전 900년 당시 개인사까지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연구를 위해 헬미 박사는 지난 수년간 박물관에서 320km나 떨어진 맨체스터 왕립 병원까지 미라가 실린 이집트 석관을 운반해 왔다. 헬미 박사에 따르면 5년 전 엑스레이 기술은 두께 10mm의 슬라이스까지 지원했지만 이제는 0.6mm의 두께까지 세밀한 모습을 촬영할 수 있다. 한편 이집트 미라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4세기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졌으며 죽은 자가 부활할 때 자신의 몸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석관에는 생전의 얼굴을 그려 넣었으며 시신은 썩지 않도록 방부처리돼 있다. 사진=데일리메일 캡처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대한제국 국악기 112년만에 귀환’

    대한제국 국악기 112년만에 귀환’

    국립국악원 정악대가 31일 인천국제공항 아시아나 화물터미널에서 1900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됐다가 112년만에 국내로 돌아온 대한제국 국악기 11점 귀환을 환영하는 대취타 연주를 하고 있다. 손형준기자 boltagoo@seoul.co.kr
  •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겠습니다”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겠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선교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떻게 살았을까.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독특한 전시회가 열려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28일 개막해 9월 2일까지의 일정으로 서울 합정동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100주년기념교회·담임 이재철 목사) 양화진 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양화진 선교사 탁본 및 사진전시회’가 그것. 이 전시회에는 150여점의 양화진 선교사 묘비 탁본과 60여점의 한국 기독교 초창기 모습이 담긴 사진이 들어 있어 흥미롭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구한말 복음의 씨앗을 한국에 뿌린 벽안의 선교사들이 안장된 개신교 성지. 1890년 7월 28일 묻힌 최초의 의료 선교사 존 헤론을 비롯해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젤러 등 145명이 안장돼 있다. 이번 전시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조성 122주년과 100주년기념교회 설립 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전시 개막일도 처음 묻힌 존 헤론 선교사의 안장일(7월 28일)을 택했다. 전시회의 주제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이다. 고종의 밀사로 활약한 호머 헐버트 선교사의 묘비명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에서 딴 것이다. 전시에는 헐버트 선교사 말고도 가슴 뭉클한 사연과 묘비명 탁본이 수두룩하다. ‘만일 나에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겠습니다’(한국에 온 지 8개월 만에 26세의 나이로 숨진 의료 선교사 루비 켄드릭),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제중원에서 일했던 헤론 선교사)…. 서울신문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과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폰 에케르트 등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반인 안장자의 탁본도 눈에 띈다. 여기에 1880년대 후반∼1930년대 말에 걸친 선교사들의 각종 행사·모임과 가족 사진, 1900년대 초반 서울 모습을 담은 사진도 선교사들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전시회를 기획한 박종호 목사는 “초기에 이 땅에 들어와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들은 대부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희생하다 목숨을 잃었다.”며 “도심의 살찐 닭둘기처럼 편하고 안이하게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인의 모범을 다시 생각하고 세우기 위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시회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출품 국악기 11점 112년만에 귀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출품 국악기 11점 112년만에 귀환

    지난 1900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 때 출품됐다가 프랑스에 기증된 우리 국악기 11점이 112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다. 국립국악원은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 악기박물관이 소장한 거문고와 정악가야금, 해금, 대금, 단소, 양금, 향피리, 세피리, 북 등 11점이 오는 30일 아시아나항공 편으로 한국으로 향한다고 26일 밝혔다. 이 국악기들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고종황제의 지휘 아래 왕실 생활용구와 도자기, 무기류 등과 함께 출품됐으나, 박람회 폐막 후 비용 문제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출품작들과 함께 프랑스에 기증된 것들이다. 11점의 국악기는 다음달 7일부터 10월 7일까지 2개월간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재관과 함께 특별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런던올림픽 D-3] 개최국 효과, 金 13개 더 땄다

    [런던올림픽 D-3] 개최국 효과, 金 13개 더 땄다

    수많은 홈 팬, 익숙한 경기장, 시차가 없는 이점 등등. 이른바 ‘홈 어드밴티지’(Home Advantage). 올림픽에서 개최국이 누리는 ‘홈 어드밴티지’는 어느 정도일까.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역대 올림픽 개최국들이 직전 대회보다 평균 13.2개의 금메달을 더 수확했다는 자료를 내놓았다. 1900년 제2회 파리올림픽부터 4년 전 제29회 베이징올림픽까지, 역대 23개 대회 개최국이 직전 참가했던 대회보다 더 많이 따 낸 금메달은 모두 304개. 전쟁으로 인해 취소된 1916·40·44년 올림픽과 동서 냉전으로 ‘반쪽짜리’가 된 1980년 모스크바·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다. 홈 이점을 가장 크게 누린 나라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를 유치한 미국이다. 미국은 4년 전 파리올림픽 때보다 59개나 많은 78개의 금메달을 따내면서 메달 순위 1위에 올랐다. LA를 제외하고 세 차례 올림픽을 개최한 미국은 모두 85개의 금메달을 직전 대회보다 더 추가하면서 홈 이점을 가장 잘 살린 나라로 꼽혔다. 반면 홈에서조차 성적이 떨어진 국가도 있다. 영국과 핀란드가 주인공. 영국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직전 대회보다 금메달이 1개 줄었으며 핀란드는 1952년 헬싱키올림픽을 개최했지만 지난 대회보다 금메달 2개가 줄었다. 1908년 런던올림픽에서 55개의 금메달을 더 따내며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홈 이점을 잘 살렸던 영국에 40년 뒤 대회는 두고두고 아쉬운 대회가 됐다. 캐나다 역시 홈 이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나라로 기록됐다. 캐나다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을 개최하며 금메달을 더 따내는 데 실패했다. 텔레그래프는 이번 올림픽을 개최하는 영국이 홈 이점에 힘입어 32개의 금메달을 긁어모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대로 이뤄진다면 4년 전 베이징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한 영국이 종합순위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도 있다. 당시 중국은 2004년 아테네대회보다 19개의 금을 보태면서 종합 1위에 올랐다. 명희진기자 mhj46@seoul.co.kr
  • [커버스토리] “女봐라” 112년 걸린 첫 양성평등 축제

    [커버스토리] “女봐라” 112년 걸린 첫 양성평등 축제

    오는 27일 오후 9시(한국시간 28일 오전 5시) 런던올림픽 개막식에는 카타르와 브루나이, 그리고 그토록 완고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자선수들이 리 밸리의 올림픽 스타디움 트랙에 당당히 들어서게 된다. 이로써 이번 올림픽은 참가하는 모든 나라가 여자선수를 출전시키는 첫 대회가 된다. 다음 날 오후 11시 30분에는 여자복싱 경기가 시작된다. 이번 대회 26개 모든 종목에 금녀(禁女) 빗장이 풀리는 것. 올림픽이 감동적인 건 늘 장벽과 한계를 뛰어넘는 몸짓이 이어지기 때문인데 여성이 올림픽에 처음 나선 1900년 제2회 파리 대회부터 이번 대회까지 무려 112년이 걸린 셈이다. 근대 올림픽을 창안한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은 “올림픽은 남자들에게 어울리는 것”이라며 “여자의 역할은 고대 올림픽에서처럼 승리자에게 왕관을 씌우는 일”이라고 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망언인데 그가 193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생각을 버리지 않은 것처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늘 세상의 변화에 한두 발 뒤처져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고대 올림픽에선 몰래 참가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여성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근대올림픽 1회인 1896년 아테네 대회에는 주최 측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라톤을 완주한 여성이 있었다. 자녀가 일곱이나 딸린 그리스의 35세 여성 마타 레비타가 주인공인데 그녀는 남자들의 레이스가 끝난 다음 날 혼자서 그 코스를 5시간 30분 동안 뛰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물론 스타디움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유럽을 벗어났네, 북반구를 벗어났네, 흑인도 출전했네 하는 얘기들이 대회마다 거듭되면서 올림픽의 감동을 더했지만 늘 ‘세상의 절반’에게는 ‘불편한 진실’일 따름이었다. 흑인 노예들을 마라톤 경주에 뛰게 하기 위해 사냥개들을 풀어 뒤쫓게 했다는 얘기는 고대가 아니라 1904년 3회와 1908년 4회 대회 때였으니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사슬을 목에 두른 노예와 노예주인이 나란히 촬영한 사진까지 전해진다. 파리 대회에서 22명의 여자선수가 골프와 테니스 경기에 처음 참가한 이후 올림픽 무대는 늘 조금씩, 생색 내듯 문을 열어 왔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에서 양궁이 추가됐고, 1912년 스톡홀름 대회에서 수영이 포함됐다. 여자육상이 허용된 것은 1928년 9회 암스테르담 대회였으며 그나마 800m가 가장 긴 종목이었다. 여자 마라토너가 스타디움 안에 들어오는 장면은 1984년 23회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야 비로소 볼 수 있었다. 1952년부터 20년 동안 IOC 위원장이었던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여자들은 수영, 테니스, 피겨스케이팅, 펜싱 등 여성에게 어울리는 운동만 해야 한다.”는 엉뚱한 소리를 공공연히 늘어놓았다. 같은 맥락에서 ‘강하게 빠르게 높게’란 올림픽의 이상(理想)도 남녀의 신체 차이를 외면했다는 여성계의 목소리도 있다. 1972년 스포츠 등 모든 교육 영역에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타이틀 9’ 법안이 제정되면서 여성의 스포츠 참가가 불붙었다. 1952년 헬싱키 대회에 참가한 여자선수 비율이 10.5%였던 것이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20.7%가 됐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선 38.2%,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선 39.9%가 됐고 아직 런던 대회 집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50%에 가까울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 베이징 대회를 끝으로 정식종목에서 탈락한 야구는 2020년 대회 재진입 시도를 위해 소프트볼과 국제기구를 하나로 합치는 데 의견 접근을 이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양성평등이 아닐까. 김민희·조은지기자 haru@seoul.co.kr
  • [커버스토리] ‘피겨여왕’ 김연아 유·무형 경제효과 5조원

    [커버스토리] ‘피겨여왕’ 김연아 유·무형 경제효과 5조원

    여성이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것은 1900년 열린 제2회 파리 대회부터다. 그러나 경제적 가치 측면에서는 여성 올림픽 스타들은 여전히 남성에 비해 ‘변방’에 머무르고 있다. 상품성을 인정받는 올림픽 스타들은 대부분 프로에서도 활동하는 이들이고, 프로스포츠 자체가 남성 편향적이기 때문이다. 20일 산업계 등에 따르면 이번 올림픽 역시 남성 스포츠 스타들이 먼저 주목받고 있다. ‘번개’ 우사인 볼트(육상 남자 100m 등), 박태환(남자 수영 자유형 400m 등), 미국프로농구(NBA) 스타 르브론 제임스(남자 농구) 등이 주인공이다. 특히 볼트의 경제적 가치는 2억 5000만 유로(약 3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역대 올림픽 최고의 여성 스타는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전설의 체조요정’으로 등극한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가 꼽힌다. 그녀는 은퇴 이후 미국에서 여러 광고모델로 출연, 막대한 부(富)를 거머쥐면서 여성 올림픽 스타의 상업적 가치를 처음으로 증명했다. 개인 브랜드 가치만 놓고 봤을 때 이번 올림픽에서 최고의 여성 스포츠 스타는 러시아의 미녀 테니스 선수 마리아 샤라포바다. 지난해 10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조사에 따르면 샤라포바의 브랜드 가치는 900만 달러(약 100억원)로 평가받았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5500만 달러),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2600만 달러), 르브론 제임스(2000만 달러) 등에는 못 미치지만 여자 선수로는 유일하게 10대 브랜드 가치 스포츠 스타(8위)에 이름을 올렸다. ‘피겨 여왕’ 김연아조차도 순위에 들지 못했다. 더구나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샤라포바의 상업적인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전망이다. 이미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우승을 한 데다 올림픽까지 평정한 선수에게 붙여지는 ‘골든 슬래머’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샤라포바가 골든 슬래머가 된다면 슈테피 그라프(독일·테니스) 이후 여자 선수로는 두번째다. 국내에서의 여성 스포츠 스타로는 김연아가 독보적이다. 이번 하계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않지만 그녀의 인기와 경제적 가치는 여전하다.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을 획득했던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당시 김연아의 전체 경제 효과는 5조 2350억원에 달했다. 김연아 개인 수입과 관련 광고 제품의 매출 증대, 국가 이미지 홍보 효과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서구인들의 독무대로 여겨졌던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희소성’ 덕분이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는 국내 여성 스포츠 스타 중에서는 손연재(리듬체조)가 두드러진다. 이미 귀여운 외모로 LG전자 등의 광고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리듬체조 사상 첫 올림픽 결선 진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한다면 김연아 못지않은 ‘블루칩’이 될 전망이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전구 발명가는 에디슨이 아니다”

    킹 캠프 질레트는 왕관 모양의 병뚜껑을 판매하러 다녔다. 그러면서 일회용 제품에 관해 오랫동안 궁리했다. 1895년 어느 날 수염을 깎으려고 면도기를 집어 들었다. 당시 면도기는 두툼한 강철 날을 사용했던 터라 날을 계속 세우려면 가죽 숫돌로 자주 갈아줘야 했다. 이 때문에 귀찮은 데다 날이 금세 낡아 깎으나 마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그 순간 질레트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아주 값싸게 만들어서 부담 없이 쓰고 버릴 수 있는, 종이처럼 얇은 면도날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결국 8년 후 1회용 면도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세계 최초로 하늘을 비행한 사람은 라이트 형제로 알려져 있다. 과연 그럴까. 라이트 형제가 등장하기 900년 전인 1010년 어느 날 영국 맘즈베리에서 에일머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직접 만든 날개를 양쪽에 달고는 맘즈베리 대수도원에 있는 탑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불시착할 때까지 무려 200m에 달하는 거리를 날았다. 이 같은 사실은 ‘영국 왕의 역사’라는 책에 실려 있으며 에일머의 비행은 당시 가장 훌륭한 역사적 위업으로 평가받았다. 토머스 에디슨이 남긴 수많은 발명품 가운데 가장 전설적인 물건을 꼽으라면 백열구다. 그러나 사실 에디슨은 백열구를 발명한 적이 없다. 에디슨이 등장하기 전 이미 20명 이상의 발명가들이 백열전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1844년 신시내티 출신의 19세 천재 소년 존 웰링턴 스타가 진공관에 들어 있는 탄소 필라멘트로 빛을 내는 백열전구를 발명했다. 그러나 22세가 되기 전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그의 백열전구도 잊혔다. 신간 ‘과학편집광의 비밀서재’(릭 베이어 지음, 오공훈 옮김, RHK 펴냄)는 이러한 내용들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최고의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과학 분야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내가 모르는 과학적 진실이란 있을 수 없다’며 열렬히 과학 역사를 탐구해 왔다. 따라서 그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여태까지 접하지 못했던 과학사의 은밀한 순간들을 그림과 도표, 설계도 등과 함께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과학 편집광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에디슨이 전구를,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를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들이 전구와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가 아님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내용과 함께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한다. 누구는 이름을 알렸고 누구는 무명으로 남았지만 열정적으로 세상에 없던 것을 찾아 헤맸던 사람들의 사연이 눈길을 끈다. 1만 3500원.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커버스토리] 스파링 상대도 전담코치도 없다 박수? 바라지 않아…그런데 자꾸 주먹이 운다

    [커버스토리] 스파링 상대도 전담코치도 없다 박수? 바라지 않아…그런데 자꾸 주먹이 운다

    스물하나 청춘이 샌드백을 두드린다. 깔끔한 ‘민낯’에 어울리지 않게 손에는 파란색 글러브를 끼고 있다. 대한민국 선수단 본진이 런던으로 떠난 20일 태릉선수촌 복싱 훈련장은 적막하기만 했다. 소녀가 샌드백을 두드리는 타격음만 텅 빈 공간을 채웠다. 개막을 일주일 앞둔 런던올림픽은 근대 올림픽 116년 역사상 처음으로 26개 모든 종목의 남녀 차별이 없어진다. 1900년 2회 파리대회에 처음 입성이 ‘허락된’ 이후 금녀(禁女)의 마지막 빗장이 복싱에서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대표 김예지(한체대 2년·51㎏급)는 런던의 링에 오르지 못한다. 다른 두명의 대표도 마찬가지. 김예지는 지난 5월 중국 세계선수권에서 8강에 들지 못해 올림픽 출전권을 쥐지 못했다. 글러브를 처음 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간직해온 꿈을 이룰 첫 기회를 놓쳤다.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비난하는 이도 없다. 셋은 전국체전에 대비해 선수촌에서 훈련하고 있다. 그나마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신종훈(49㎏급)과 한순철(60㎏급)이 떠났으니 선수촌에서 나가야 한다. 김예지는 오는 28일 오후 11시 30분 시작하는 여자복싱 A그룹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보게 됐다. 무관심에서 비롯된 열악한 인프라를 탓할 여유도 없다고 했다. 여자복싱이 유망할 것이란 코치의 말에 복싱을 시작했는데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다이어트 삼아 체육관을 찾는 여성은 늘었지만 대회에 나가기 위해 운동하는 이는 찾기 힘들다. 마땅한 스파링 파트너도 구하기 어렵다. 지난 석달 동안 체격이 엇비슷한 남자 중학생들과 글러브를 맞대 왔다. 이훈(45) 코치는 뼈대가 다른 남자들과 겨루다 행여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아직은 복싱이 너무 좋다.”는 김예지와 달리, 스승은 많지 않은 제자를 받아줄 실업팀이 거의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3체급(51·60·75㎏) 선수를 모두 뽑는 곳은 경북체육회와 보령시청뿐. 다른 실업팀은 여자가 없거나 형식적으로 한명만 받고 있다. 남자들의 훈련 메커니즘을 좇을 수밖에 없다. 3분 동안 3회를 뛰는 남자 경기와 달리, 여자는 2분 4회로 정해져 있어 훈련 방법이 달라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김예지는 “여자선수에게 여자 코치가 한명쯤은 있어야 하는데…. 여자 선생님들이 있는 유도나 레슬링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라고 말했다. 김예지는 “오빠(남자 대표)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 다시 복싱의 인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코치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와야 하는 남자들에게 훈련이 맞춰지니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글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사진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 현대음악 개척 강석희 前서울대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 현대음악 개척 강석희 前서울대 교수

    오는 27일 런던올림픽이 열린다. 올림픽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성화가 아닐까. 시곗바늘을 잠시 1988년 서울올림픽 현장으로 돌린다. 9월 17일 저녁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 숱한 곳을 돌고 돌아온 성화가 드디어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우스 신, 천둥, 번개, 투창대회, 춤 등의 이미지가 컴퓨터와 트럼펫, 여성 보컬 등에 의해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로 형상화됐다. 그 음악을 타고 성화대에 점화가 되는 순간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전 세계 음악인들이 놀라움과 찬사를 아낌없이 보냈다. 역사상 처음으로 컴퓨터 음악을 성화에 접목시켰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 오다’라는 제목에 걸맞게 문명의 다양성을 잘 조화시켜 세계 음악사적으로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10월 2일 저녁 성화가 꺼질 때에도 이 같은 광경이 다시 연출됐다. 당시 이 음악을 직접 작곡하고 감독까지 맡았던 주인공이 바로 강석희(77) 전 서울대 교수다. 지금도 그날의 광경을 잊지 못한다. 그의 이름 석 자를 세계 음악인들에게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1966년 국내 최초의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을 작곡했다. 이를 시작으로 30인의 타악기 주자를 위한 ‘예불’, 관현악을 위한 ‘생성69’, 피아노를 위한 ‘정점’ 등의 작품을 연이어 쏟아냈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음악의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자음악을 비롯한 음악극, 칸타타, 독주곡,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만들어내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아울러 1969년 그가 처음 주도한 ‘판 뮤직 페스티벌’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면서 세계 음악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1970년 일본 오사카 국제박람회 때 그의 창작곡이 연주되면서 일본과 유럽의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1984년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주최 세계 음악제에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부회장에 선출돼 세계 무대에서 확실히 인정받기에 이른다. ●11월 도쿄·내년 4월 루브르박물관서 연주 올해로 그의 음악 인생은 55년째다. 지금까지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모두 80여 곡에 달한다. ‘가야금을 위한 다섯 개의 정경’, 국악 관현악을 위한 ‘취타향’ 등 전통과 접목시킨 것도 있고 김수용 감독의 ‘화려한 외출’ 등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보다 유럽과 미국, 남미 등 해외에서 초연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는 작품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솔로, 오케스트라, 오페라, 실내악 등 전통적 형식의 작품들을 형식에 따라 각기 적합한 어법으로 소화해 낸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젊은 청년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16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악보와 여러 음악 관련 책들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그런데 피아노가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그 까닭을 먼저 물었다. “저는 원래 피아노가 없습니다. 작곡할 때 미리 다 소리를 알고 하기 때문에 피아노를 전혀 쓰지 않습니다. 물론 피아노 앞에 앉아 소리를 들어보며 작곡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방법이지요. 제 경우는 창작할 때 고도의 집중력을 가져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곡을 다 쓰고 나서 어떻게 듣느냐고 했더니 “연주하는 무대 객석에서 처음 듣습니다. 연주는 연주가의 몫이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요즘에는 어떤 일로 바쁜지 물었다. “작년에 일본으로부터 위촉받은 ‘8중주’가 있는데 8월 말까지 끝내야 합니다. 오는 11월 도쿄에서 첫 연주회가 예정돼 있거든요. ‘8중주’가 끝나면 곧바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를 써야 합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측에서 오래전에 위촉을 받아 놓은 상태거든요. 이 곡은 내년 4월에 루브르박물관에서 연주될 예정입니다.” 이렇듯 그의 곡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찾는다. 최근 브라질 상파울루와 미국 뉴욕에서 그의 오케스트라곡이 연주됐다. 11월에는 일본, 그리고 12월에는 토론토 연주회가 있으니 하반기에만 4차례 해외에서 연주되는 셈이다. “오사카엑스포 당시 오케스트라곡인 ‘생성69’와 실내악 2곡이 연주됐을 때 일본의 신문이나 음악잡지에 크게 게재됐습니다. 얼마 뒤 독일에 갔을 때였지요. 저를 알아보는 음악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분이 좋더라고요.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는 말이 있잖아요(웃음).”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에게 대중들이 현대음악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음악이 어려우냐 쉬우냐가 문제가 아니라 좋은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라면서 “좋은 음악은 분명 감동을 던져 줍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대개 현대음악에는 기립 박수가 없다고들 하지만 1997년 ‘피아노 콘체르토’ 파리 연주 때와 서울 연주 때 등 그동안 기립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작품의 성공적인 연주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함과 자신감으로 이어집니다.”고 말했다. 대중들도 음악을 자주 접하다 보면 그런 행복과 감동을 맛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1년에 2곡 정도 작업… 지금까지 80여곡 탄생 그는 한 해에 2곡 정도 쓴다. 곡을 쓸 때마다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고 고통을 이겨내며 난해한 수학문제를 풀 듯이 논리적으로 연결해 나가는 작업을 한단다. 마치 건축가가 설계해 놓은 전체의 디자인에 따라 그려 나가듯이. “작곡가가 작곡한다는 것은 순수한 음과의 대결을 의미합니다. 소리는 차갑고 냉정한 것이지요. 그런 소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작곡가가 할 일입니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예술이기 때문에 그 구조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흐르는 건축물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어떻게 해서 작곡과 인연을 맺었을까. 초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탐정과 추리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증조부와 손을 잡고 집을 나섰는데 도착한 곳이 경성공업고등학교 교장 선생 댁이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고종 때 장원급제하고 1900년에 일본 유학을 다녀올 만큼 공부를 많이 한 분이었고 경성공고 교장은 바로 할아버지의 제자였다. 이때 할아버지는 경성공고 교장에게 손자를 부탁했다. “그런 인연으로 나중에 음악과 전혀 관계없는 경성공고에 진학했습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그런데 대개 좋아하는 선생님을 만나면 그 과목을 잘하게 되잖아요. 미술 선생님이 좋으면 미술을 공부했고 음악 선생님이 좋으면 음악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미술과 음악, 수학 등을 좋아했지요. 또 32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했는데 그게 나중에 음악에 대한 집중력과 저력을 키우는 원천이 됐습니다.” 그는 음악대학에 진학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도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종로6가에 살 때였다. 하루는 서울대 음대에 놀러갔다. 우연히 작곡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고 그 모습이 아주 멋있게 다가왔다. 문득 작곡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는 청음 실력이 남다르다는 얘기를 듣고 있던 터였다. 곧바로 책을 몇 권 읽고 서울대 음대에 응시했다. 당시 47명이 시험을 치렀는데 8명이 합격했다. 이강숙, 백병동, 송해섭, 장광열, 이영욱, 임종영, 장성덕 등이 동기들이다. “1964년 급성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습니다. 대학 동기 백병동이 ‘전기와 전자’라는 책을 놓고 갔습니다. 평소 관심이 있어서 단숨에 읽었지요. 전자음악이란 이렇게 만드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퇴원하자마자 KBS 스튜디오를 빌렸고 3개월의 작업 끝에 전자음악을 만들어 냈지요.” 이후 전자음악과 컴퓨터를 접목시키는 등 오늘날까지 한국의 현대음악을 개척하며 꾸준히 이끌어 오고 있다. “예술가란 기존에 닦아 놓은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험한 정글에서 길을 찾아 나가는 모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작곡가 강석희는 국내 첫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 발표 1934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1946년 경성공고 토목과에 진학했다가 6·25전쟁 때 경북 안동으로 피난 가서 안동고를 졸업했다. 이 무렵 성가대 활동을 통해 음악을 접했다. 이후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6년 동안 정신여고 음악 교사로 재직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서양의 현대적 작곡 방식에 관심을 가졌으며 1966년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을 첫 작품으로 발표했다. 1968년 잠시 한국에 와 있던 윤이상 선생에게 작곡을 배웠다. 1969년 ‘판 음악제’의 모태가 되는 ‘서울 현대음악 비엔날레’를 개최했다. 1970~1971년 독일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배웠다. 이후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음향학자 프란츠 빈켈 등을 사사했다. 1982~1999년 서울대 작곡과 교수로 재직했다. 1984~1990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부회장을 맡았다. 이후 서울올림픽 폐회식 음악감독(1988), ISCM 서울 세계음악제 집행위원장 및 예술감독(1997), 계명대 특임교수(2000) 등을 지냈다. 주요 수상으로는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0), 보관문화훈장(1998), 서울사랑시민상(2004) 등이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 피 철철 ‘사탄의 인형‘ 500개와 함께 사는 괴짜女

    머리에 뿔이 달리고 피가 철철 흐르는 ‘사탄의 인형’ 시리즈를 가족 삼아 사는 괴짜 여성이 언론에 소개됐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17일자 보도에 따르면, 별난 인형을 모으는 취미를 가진 마릴린 맨스필드(33)라는 미국 여성은 영화 ‘사탄의 인형’에 나올 법한 기괴한 인형 500개와 함께 산다. ‘호러 인형의 집’을 연상케 하는 그녀의 보금자리에는 ‘처키’ 뿐 아니라 처녀귀신, 뿔 난 악마, 흡혈귀 등 각종 희귀 캐릭터 인형으로 가득하다. 맨스필드는 “1900년대 후반에 나온 영화 ‘사탄의 인형’ 시리즈를 본 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처키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때부터 호러 인형들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호러 인형에 빠진 뒤 스스로 인형을 제작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녀의 무서운 인형은 언뜻 보면 실제 아이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리얼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맨스필드는 “최대한 현실과 가까운 인형을 만들려고 노력한다.”면서 “종종 생각지 못한 곳에 인형을 몰래 놔두고 아기 울음소리를 내는 장난을 치면 지인이나 가족들이 매우 놀란다.”고 말했다. 이어 “인형을 안고 가는 길에 어떤 행인이 ‘당신 아이 얼굴이 너무 창백하다. 어디 아픈 것 아니냐.’고 물을 만큼 내 인형들은 리얼리티를 살렸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직접 제작한 무시무시한 인형들은 개당 300달러(약 34만3000원)가 넘는 가격이지만, 꾸준히 찾는 고객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멀티비츠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한류정책을 바꿔라] “콘텐츠+공격적 비즈니스 결합… ‘제2 한류’로 세계시장 공략”

    [한류정책을 바꿔라] “콘텐츠+공격적 비즈니스 결합… ‘제2 한류’로 세계시장 공략”

    유진룡 가톨릭대 한류대학원장은 “한류의 콘텐츠만 향상시켰던 기존 방식에서 한 단계 나아가 비즈니스 차원에서 콘텐츠 활용을 극대화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글로벌화한 한류 콘텐츠와 공격적인 비즈니스가 결합한 제2의 한류 전성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한류대학원장은 서울신문이 창간 108주년을 맞아 기획한 ‘한류, K컬처로 거듭나라’ 특별인터뷰에서 이처럼 밝히고 일각에서 제기되는 한류 수급 포화 우려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세계를 공략하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만큼 한류의 확산은 당분간 더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다음은 17일 서울신문 편집국 회의실에서 황성기 문화에디터와 가진 인터뷰 내용. 대담 황성기 문화에디터 →문화체육관광부에 계실 때(2006년 8월 차관에서 퇴임)와 비교해 지금의 한류, 어떻게 달라졌나요. -한류가 싹튼 2004년에는 드라마가 중심이었습니다. 그 전부터 드라마나 K팝은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확 올라온 건 일본에서였지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한류의 폭이 굉장히 넓어졌습니다. 문화부 문화산업국장도 지내본 터라 비즈니스 관점에서 한류를 눈여겨보는데 과거엔 한류를 잘 이용하지 못했어요. 당시 배우 류시원, 최지우의 캐릭터숍이 한국에는 없었지만 일본에선 상점 하나 가득히 그 사람들 캐릭터 상품을 팔았어요. 원 소스는 우리인데 정작 우리는 극대화하지 못하고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에요. 이제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한류 콘텐츠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민해야 합니다. →세계의 문화 조류 속에서 한류의 존재 의의라고 한다면. -한류라고 하니까 비로소 세계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아준 것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한류 열풍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문화적인 우수성이 나타난 것이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위치가 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드라마, 가요, 영화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한국 대중문화의 경쟁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정서와 포맷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역동성, 리듬감, 음악성을 글로벌하게 만든 겁니다. 대중문화는 한 사람의 천재적인 창조자가 아닌 집단 창작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글로벌하게 통용되는 정서와 형식을 내놨기 때문에 먹힌 겁니다. →그중에서도 K팝이 으뜸인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나요. -K팝 작곡가들의 상당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정서와 형식을 추구합니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언어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언어, 정서 면에서 한국적 틀을 벗어나기 힘들지만 K팝은 이미 글로벌화돼 있기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발전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대중문화계에서는 기업이 키운 한류에 정부가 숟가락만 얹으려 한다는 불만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한류의 주류인 대중문화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한 적도 없어요. 하류 문화,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다가 이제서야 우리 문화라고 대접하는 겁니다. 일본은 자국 문화를 프랑스에 보급하기 위해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꾸준히 노력을 해 왔어요. 화가 마네, 모네의 동네에 일본식 정원을 꾸며 주거나 일본 소설을 20세기 초에 번역해 주기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일본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노력은 했지만 미약했지요. →한류에서 순수예술은 소외돼 있는데 문학, 미술 등이 세계로 뻗어 나갈 잠재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만 ‘한국 문화의 우수성’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한류라고 떠들고 호들갑 떠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를 알리려는 노력은 필요하지요. 하지만 우리 문화가 우수하다는 것은 열등한 문화도 있다는 얘긴데 그렇지는 않거든요. 꾸준히 우리 문화를 알리고 세계 문화와 교류하면서 우리 문화적 요소, 우리의 것이 강력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있으면 우리도 상대방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문화 콘텐츠 산업에선 엔터테인먼트가 꽃입니다. 꽃의 향기를 보고 관광 등 관련 산업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줄기와 뿌리가 없으면 꽃이 필 수 없듯 가치관과 정서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밑(순수예술)이 없으면 위(엔터테인먼트)도 없습니다. →한류가 8년을 넘게 이어 오고 있지만 그 지속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일본은 자기네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전략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옛 기록에는 일본 화상들이 1800년대부터 1900년대 초에 자기네 그림을 유럽 등에 갖다 팔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일본 도자기 가격을 영국 것보다 비싸게 매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본 문화에 유럽 사람들이 젖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재팬 웨이브’라는 표현은 안 썼어요. 일본 문화는 외국의 지식층 속에 녹아 있습니다. 그만큼 안착한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코리안 웨이브’라고 해야 하나요. 일본의 J팝은 세계 음악사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K팝이 일본 문화의 뒤를 따라갈 것인지, 한때 절정기를 누렸다가 사라진 홍콩 영화의 뒤를 따라갈 것인지는 우리 하기에 달렸습니다. 한류라고 호들갑 떨지 말고 차분하게 분석하고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대응이 필요한가요. -문화를 산업적 측면에서 볼 때 규모의 경제가 돼야 성공할 수 있어요. K팝을 만들려면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데 인적, 물적으로 우리나라 가요시장이 좁고 음반시장도 죽었어요. K팝을 세계 시장으로 넓혀야 성공합니다. 모든 콘텐츠 사업이 세계 시장을 상대로 전략을 짜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K팝이 성공했고 온라인 게임도 성공하고 있지만 아직 성공을 거두지 못한 데가 많아요. 다른 분야는 왜 성공하지 못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드라마도 성공은 했지만 구조적인 활용이 안 되고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 산업이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문화 산업은 경제적 효과도 크지만 스필오버(spill over·어떤 요소의 경제 활동이 다른 요소에 영향을 미쳐 전체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현상) 효과도 큽니다. 일본은 배우 류시원, 배용준으로 몇조원을 벌었습니다. 비즈니스 분야에서 문화 콘텐츠 후광 또는 파급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논의해야 합니다. →한류를 K팝이 아닌 K컬처로 확대시키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순수예술 분야도 창작은 발전했는데 향유 기반이 취약합니다. 기본적으로 국내 시장이 바탕이 돼야 해외 시장도 바라볼 수 있어요. 국내 시장, 국내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열심히 안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류가 공급도 한계 상황, 시장도 포화 상태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능력은 충분한데 우리에게 부족한 게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이 가능하려면 규제가 없어져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허용 가능한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부가 할 일입니다. 콘텐츠 공급에서 질이 높아진다면 수요 창출도 가능합니다. 시장을 만들어야죠. 좋은 물건만 있으면 좋은 시장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9월에 출범하는 한류대학원의 초대원장으로서 한류 확산에 어떤 역할을 할 계획인가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한류가 나왔습니다. 엔터테인먼트에 부가가치가 있고 그에 따른 후광효과, 파급효과가 더 큽니다. 우리는 그걸 거의 살리지 못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베트남에서 한국 화장품이 많이 팔리고 TV나 에어컨도 많이 팔리고 관광객이 늘어나면 그런 후광효과를 본 기업은 원천효과를 만들어 낸 기업 또는 개인에게 보상해 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장 내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선순환을 돕는 역할을 한류대학원이 할 겁니다. 결국은 콘텐츠와 비즈니스의 결합이 있어야만 콘텐츠 시장 자체를 더 넓힐 수 있고 그에 따른 후광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정리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유진룡 가톨릭대 한류대학원장은 1956년생.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행정고시 22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무국장을 거쳐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산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2006년 8월 문화부 차관으로 퇴임. 올해 초까지 을지대 부총장을 하다 지난 6월 설립된 가톨릭대의 초대 한류대학원장에 임명됐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