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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주의로 가려진 아나키스트 신채호

    민족주의로 가려진 아나키스트 신채호

    신채호 다시 읽기/이호룡 지음/돌베개/332쪽/1만 8000원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며 굴곡 많은 삶을 산 단재 신채호(1880~1936). 봉건 유학자에서 자강운동가로, 자강운동가에서 민족주의자로, 다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사상적 변신을 거듭했지만 ‘한국의 대표 민족주의자’로 통한다. 신채호는 그 통념처럼 그저 민족주의자였을까. ‘신채호 다시 읽기’는 그 통념과는 다른 ‘아나키스트 신채호’를 부각시킨 책이다. 1910년대까지는 한국의 대표 민족주의자로 자리매김되는 게 맞지만 그 이후의 사상과 실천운동은 다르다는 게 핵심 내용. 신채호의 저술과 관련 문헌, 새 발굴 자료들을 분석해 그가 아나키즘 수용의 선구자이자 한국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였음을 밝히는 과정이 흥미롭다. 신채호는 1900년대에 제일 먼저 민족주의를 제창하고 1910년대 들어 민족주의에 기초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 민족주의자의 색채가 짙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통념이 고착화된 건 1960∼1970년대라는 주장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 관동군 장교의 이력을 가릴 도구로 민족주의를 내걸었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민주화운동세력들이 민족주의를 앞세우면서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성을 비판했던 시절. 강권(强權)에 맞서 사상을 실천에 옮긴 저항적 지식인의 표상인 신채호가 대표적 민족주의자로 부각됐다는 지적이다. 책에 제시된 새 자료들은 통념과는 사뭇 다른 신채호를 새록새록 들춘다. 1905년 황성신문사 근무 시절 고토쿠 슈스이의 ‘장광설’을 읽고 아나키즘에 감명받은 신채호는 3·1운동을 계기로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시작했고 1923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은 신채호의 아나키즘을 집대성한 글로 드러난다. 특히 ‘조선혁명선언’의 민중적 직접혁명론이 민족주의에 아나키즘을 접합한 것이라는 기존 학계의 주장을 일축해 주목된다. 신채호는 1936년 감옥에서 사망하면서 판결문 1통과 인장 1개, 수첩 2권, 서한 10여통, 중국 돈, 책 몇 권을 남겼는데 그중에는 ‘세계 대사상 전집’(크로포트킨 편)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신채호가 민족주의자보다는 아나키스트로 생을 마감했음을 보여 주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홍합탕/문소영 논설위원

    1970년대 초 스케이트장은 대부분 야외였다. 어린 시절 영하 17도까지 내려가던 청주에서는 별도의 스케이트 시설이 없어서 추수를 끝낸 논에 물을 채워 얼린 울퉁불퉁한 얼음에서 스케이트를 타야 했다. 머리가 쩡할 정도로 추운 겨울이 되면 매끄럽지 않은 얼음 위에서 놀다가 논두렁 간이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홍합탕으로 배를 채우며 추위를 녹이던 그때가 생각난다. 50원에 고봉밥 쌓듯 사발 한가득 홍합과 국물을 줬기 때문에 볼이 빨갛게 언 꼬마는 굉장히 좋아했다. 가격이 싸 서민적인 홍합을 나는 막연하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등 조상도 좋아했을 음식으로 믿어 왔다. 홍명희의 소설 ‘임거정’에서 말린 홍합이 술안주로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임거정은 조선 명종 때 의적이니 당연한 믿음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홍합이 외래종이란다. 지중해 담치로 1900년대 중반 유럽에서 들어와 국내에서 양식됐다는 게 해양수산부의 설명이다. 1550년대 임거정이 술안주로 먹던 홍합은 다른 거다. 묘한 배신감을 느낀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얼짱 각도,시크한 표정’…1800년대 세계 최초 셀카 화제

    ‘얼짱 각도,시크한 표정’…1800년대 세계 최초 셀카 화제

    디지털 카메라 혹은 스마트폰을 구입하면 아마 가장 먼저 셀카 촬영을 하지 않을까? 2013년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가 ‘셀피(selfie)’, 즉 국내 인터넷 용어로 ‘셀카’였던 것은 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세계 최초 셀카로 추정되는 사진이 공개돼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국 온라인매체 허핑턴 포스트의 5일 보도에 따르면 해당 촬영은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이뤄졌다. 기존 최초 셀카라 알려진 사진들은 대개 1900년대 초 사진들인데 해당 사진은 이보다 수십 년 앞선 것이다. 사진을 보면 시크(?)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남성이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네덜란드 출신 미국 사진작가 로버트 고넬료(Robert Cornelius)다. 이 사진은 1839년 10월,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그의 집 뒷마당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당 사진이 최초 셀카라 평가받는 이유는 인물 포즈에 있다. 초장기 사진 모델들이 뻣뻣하고 경직된 포즈를 취했다면 고넬료는 얼짱(?) 각도로 렌즈를 응시하며 표정도 자연스럽고 헤어스타일과 옷차림도 멋을 냈다. 현재 통용되는 셀카 촬영법에 가장 근접해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사진은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으로 촬영됐다. 이는 프랑스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erre)가 개발한 초창기 사진촬영법으로 은판사진법(銀板寫眞法)이라고도 불린다. 이 사진촬영법은 은막이 씌워진 구리판에 광택을 낸 다음 표면에 요오드화은 감광막을 만들어 빛에 노출시킨 후 수은증기로 현상해 사진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한다. 해당 촬영법은 초기에 사실적 사진을 찍어낼 수 있어 각광받았으나 1850년 값싸고 신속한 유리판사진이 등장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진=허핑턴포스트 캡처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얼짱 각도,시크한 표정’ 1800년대 세계 최초 셀카 화제

    ‘얼짱 각도,시크한 표정’ 1800년대 세계 최초 셀카 화제

    디지털 카메라 혹은 스마트폰을 구입하면 아마 가장 먼저 셀카 촬영을 하지 않을까? 2013년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가 ‘셀피(selfie)’, 즉 국내 인터넷 용어로 ‘셀카’였던 것은 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세계 최초 셀카로 추정되는 사진이 공개돼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국 온라인매체 허핑턴 포스트의 5일 보도에 따르면 해당 촬영은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이뤄졌다. 기존 최초 셀카라 알려진 사진들은 대개 1900년대 초 사진들인데 해당 사진은 이보다 수십 년 앞선 것이다. 사진을 보면 시크(?)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남성이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네덜란드 출신 미국 사진작가 로버트 고넬료(Robert Cornelius)다. 이 사진은 1839년 10월,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그의 집 뒷마당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당 사진이 최초 셀카라 평가받는 이유는 인물 포즈에 있다. 초장기 사진 모델들이 뻣뻣하고 경직된 포즈를 취했다면 고넬료는 얼짱(?) 각도로 렌즈를 응시하며 표정도 자연스럽고 헤어스타일과 옷차림도 멋을 냈다. 현재 통용되는 셀카 촬영법에 가장 근접해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사진은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으로 촬영됐다. 이는 프랑스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erre)가 개발한 초창기 사진촬영법으로 은판사진법(銀板寫眞法)이라고도 불린다. 이 사진촬영법은 은막이 씌워진 구리판에 광택을 낸 다음 표면에 요오드화은 감광막을 만들어 빛에 노출시킨 후 수은증기로 현상해 사진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한다. 해당 촬영법은 초기에 사실적 사진을 찍어낼 수 있어 각광받았으나 1850년 값싸고 신속한 유리판사진이 등장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진=허핑턴포스트 캡처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국내여행 | 부산 산복도로 르네상스- 이젠 초량동이다!

    국내여행 | 부산 산복도로 르네상스- 이젠 초량동이다!

    시작해 볼까 한다. 거의 40년 전 내가 태어났던 그곳에 대한 이바구를,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오르내렸던 까꼬막에 대한 이야기를.당신이 준비할 것은 기차를 타기 전 2시간뿐이다. *경상도 사투리로 이바구는 이야기, 까꼬막은 비탈길을 뜻한다.고향에 대한 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이다.‘오빠야~’를 쫓아 경사진 산복도로를 뛰어다니느라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던 가시내의 기억은7살에 멈추었다.이후 내가 태어났던 외갓집과 초량동은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사람들이 떠났고, 집들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그러나 32년 후 다시 찾아온 여행기자에게초량동은 ‘희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이바구 공작소가 생겼고, 유치환 선생과장기려 선생을 기리는 공간이 만들어졌고,손님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전망대, 카페,까꼬막 게스트하우스가 생겼다.산복도로 위에서 보는 초량동과 부산항,북항대교의 풍경은 비탈을 극복한 자만이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근현대사의 축소판, 초량동여행애호가들은 다 아는 이야기. 감천문화마을(감천2동 산복마을)은 부산 산복도로에 말 그대로 ‘르네상스’를 몰고 왔다. 2012년 감천마을을 다녀간 여행자가 10만명이라니, 마을 사람들이 불편을 호소할 정도로 조용하던 산동네는 일약 관심의 중심이 됐다. 그리고 그 르네상스의 맥을 잇는 다음 주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량동이라고 했다. 초량동이라니! 전쟁 통에 결혼한 외할머니가 8명의 자식을 낳아 키웠고 그 자식의 자식인 내가 태어난 그 동네가 아닌가.초량동은 한국전쟁 당시 판자촌이 얼기설기한 피난민 마을에서 시작됐다. 그나마 물자와 일거리를 구하기 쉬웠던 항구 근처에 난민들은 터를 잡기 시작했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판잣집이 세워져 있곤 했다. 칸칸이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 엉성한 집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며 구봉산龜蜂山(405m)의 거북이 등을 타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집과 집 사이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가는 미로 같은 골목이었고 우마차가 흙길을 다졌다. 산복도로의 시초였다.마을의 풍경은 태생적으로 아름답다. 감천마을의 경우 이미 부산의 산토리니라는 수식어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피난민촌의 역사를 알고 나면 이 풍경은 더 이상 이국적이지 않다. 파랑색 물탱크를 옥상에 이고 다닥다닥 어깨를 붙인 파스텔톤의 집들은 보따리를 하나씩 머리에 이고 산비탈을 오르는 어머니들을 닮았다. 치맛자락을 붙들고 따라 나선 계집아이의 얼굴엔 때구정물이 사라지지 않았다. 상수도가 없으니 급수차가 오는 날에는 아이들도 세숫대야라도 들고 나서야 했었다. 만만치 않은 세월이었다.감천마을에서 시작되어 산복도로를 타고 질주해 온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은 초량동이나 수정동 같은 낙후된 마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구의 생활문화사를 유적과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곳인 이바구공작소를 포함해 새로운 랜드마크들이 올 초부터 줄줄이 문을 열었다. 웅장하거나 화려한 건물들이 아니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유도하듯 평범한 주택들 사이에 전망대, 게스트하우스, 기념관, 카페 등이 자리를 잡았다. 이름이 무엇이든 이 모든 장소들은 최적의 전망대 역할을 한다. 이바구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없이 주저앉아 경치를 감상하고 싶어지는 ‘구석’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올라가는 과정이 고된 만큼 까꼬막길은 더 큰 보상을 안겨 준다.손쉬운 선택으로 산복도로에만 올라서도 건설 중인 북항대교는 물론이고 오른쪽으로는 남항대교, 왼쪽으로는 광안대교와 산 너머 해운대의 마천루까지 모두 보인다. 조금 더 욕심을 내서 큰일이 있을 때마다 불을 지펴 다급한 소식들을 한양으로 올려보냈던 구봉산 봉수대에 올라서면 부산 앞 바다의 경치는 더 너르고, 더 깊어진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 모든 풍경은 저마다의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참으로 은하수 같은 야경이다.굽이굽이 이바구가 들린다경험상, 도보여행은 가벼워야 한다.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부산 지하철역 사물함에 필요 없는 짐을 맡겨두고 길을 건너니 이바구길종합안내판이 쉽게 눈에 띄었다.길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부산 사투리, 중국어, 러시아어가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이런 곳이 있었나’ 싶게 생경한 외국인 거리를 정신없이 통과하니 사거리 한쪽에 붉은 벽돌 건물이 우뚝 서 있다. 1922년 부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이었던 구 백제병원 건물이었다. 한 때 외국의 의사들을 숱하게 초빙할 만큼 큰 병원이었지만 행려환자들의 시신을 인체표본으로 보관한 일이 밝혀지면서 도덕적 질타와 경영 악화로 문을 받았다는 이야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평생 봉사하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장기려(1911~1995) 박사가 알았다면 애통해 했을 일이다. 25년 동안 복음병원의 병원장을 지내며 1968년 의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던 그는 평생 집 한 채를 소유하지 않고 병원 옥탑에서 생활하며 낡은 의사 가운과 청진기만을 유품으로 남겼다. 그의 뜻을 기리는 기념관 ‘더 나눔’은 올해 초량동의 복음병원 분원자리에 문을 열었다.병원에서 몇 발자국을 옮기자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부산 최초의 물류창고였던 남선창고터가 병원 뒤에 남아 있었다. 부산항에 도착한 물건들은 1,000평 규모의 창고를 거쳐서 경부선(1905년 개통)을 통해 전국 각지로 보내졌는데 주요 품목이 함경도산 명태여서 ‘명태고방’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부산토박이치고 남선창고 명태 눈알 안 빼먹은 사람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최초’라는 수식어는 종종 ‘임시’라는 수식어와 연결된다. 한강 이남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던 초량 교회는 부산이 임시 수도였던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예배를 봤던 곳이다. 그 시절 임시 수도의 정부 교통부로 사용했던 건물은 부산지하철 좌천역 근처에 남아있다.그 당시의 마을 풍경 사진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골목길 갤러리다. 흑백 사진 속의 그곳과 지금의 이곳은 수십년의 시차를 마주하게 한다. 그 시차를 극복한 사람들이라면 168계단이 선사하는 아찔한 고도 차이도 우습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올려다보기에도, 내려다보기에도 아찔한 추억들은 168계단 옆 우물처럼 파도 파도 깊어진다. 시인 유치환, 개그맨 이경규, 노무현 대통령, 음악감독 박칼린, 가수 나훈아,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국회의원 안철수, 연출가 이윤택 등 동구 출신들을 마치 가족처럼 자랑하는 주민들의 정서는 2013년에도 유효하다. 그들의 사진과 이력이 벽에 걸려 있는 초량초등학교 동구 인물사담장 앞에 서 있으면 “이~갱규가 이 학교 나왔다 아이가. 나하고 동갑인데… 갸가…”로 시작되는 대화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 길을 오르내리며 학교를 졸업하고, 아이를 낳고, 손자를 마중 나가는 초량동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이다.부산역 앞 초량이바구길 안내도부산역에서 망양로 산복도로를 오르는 짧은 길은 가난하고 아팠지만 따스했던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이다. 부산역에 내려 바로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기만 하면 이바구길이 시작된다. 종합안내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1~2시간의 산책은 애환 어린 피난시절부터 현재까지 부산의 역사를 꿰어 줄 뿐 아니라 부산 특유의 정서와 서민생활을 깊숙이 느끼게 해준다.Route (옛)백제병원▶남선창고터▶담장갤러리▶동구 인물사담장▶168계단▶김민부 전망대▶이바구공작소▶장기려박사 기념관 ‘더 나눔’▶유치환의 우체통▶까꼬막까지 이어지는 1.5km①부산역 1905년 서울-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 계통 이후 부산역은 가장 중요한 부산의 관문 역할을 변함없이 해 왔다. 1953년 대화재로 이전의 부산역이 전소되면서 1968년 지금의 자리에 새로운 역사를 신축했고 2004년 KTX 개통으로 전국이 하루 생활권으로 묶이면서 부산역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②부산항 부산항은 원래 아주 조그만 어촌이었지만 고종 때 개항하면서 최초의 무역항이 됐다. 물자가 넘쳐나고 그만큼 일거리를 얻을 수 있는 곳. 전쟁이 터지자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항구 근처에 머물렀다. 산복도로 아래 피난민 마을은 그렇게 형성된 곳이다.③상해문 청관거리(1884년 청나라 영사관이 이곳에 있었다)라고 불렸던 이 지역은 중국인들이 밀집한 차이나타운이지만 현재는 러시아, 필리핀 사람들도 대거 거주하는 외국인 거리가 됐다. 소문난 중화요리점들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독해 불가능한 외국어 간판이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는 곳. 한때 텍사스골목이라는 불명예를 품기도 했었지만 2007년 7월 지역특화발전특구로 지정되어 새롭게 단장하고 있다.④(옛)백제병원 1922년 한국인 최용해가 만든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은 5층 규모의 건물로 외국인 의사들을 초빙할 만큼 번성했었지만 10여 년 만에 경영 악화로 폐업하게 되었다. 이후 봉래각이라는 중국 요리집, 일본 아까즈끼부대의 장교 숙소로 사용되다가 해방 이후 치안대 사무소, 중화민국 영사관, 신세계 예식장 등 여러 용도를 거치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어가다가 현재는 임대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1972년 화재로 5층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4층 건물로 남아있으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3층에는 부산그린트러스트가 입주해 있다. 주소 초량동 중앙대로 209번길 16⑤남선창고(터) 백제병원 뒤쪽 탑마트 주차장 정면에는 담쟁이가 엉켜 있는 붉은 벽돌담이 있다. 건물은 2009년 철거되고 담장만 남은 남선창고는 저 멀리 함경도에서 부쳐진 명태를 적재하던 창고라 하여 북선창고(1900년 건립)라고도 불리다 1914년 남선창고로 개명되었지만 명태고방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던 곳이다. 경원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함경도의 수산물과 강원도의 목재는 부산으로 옮겨서 경부선을 통해 전국으로 보급되었었다. 백제병원 옆(탑마트 주차장). 주소 초량동 393-1⑥김민부 전망대 김민부(1941~1972)라는 이름을 잘 몰라도 ‘기다리는 마음(장일남 작곡, 김민부 작사)’이라는 제목은 잘 몰라도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로 시작되는 노래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을 것이다. 부산시 동구 수정동 출신인 그는 부산고 3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이후 부산과 서울 방송국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했었다. 부산항의 경치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겸 야외카페도 있다.⑦당산 어디 시골마을이나 남아있을 것 같은 당산이 오밀조밀한 주택가 한가운데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매해 음력 3월과 9월의 보름날에 초량마을의 수호신인 당산 신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어린 시절에는 당산이 무섭기만 했었지만 피난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런 기복신앙에 기대서 어려울 때마다 위로와 힘을 얻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⑧이바구공작소 해방, 한국전쟁, 월남 파병 등의 굵직굵직한 이야기를 교과서적 역사가 아니라 삶의 이야기로 바꾸는 것은 6·25와 보릿고개를 넘으며 산복도로를 지켰던 어르신들의 생생한 목소리다. 2013년 3월 오픈한 이바구공작소는 산복도로를 관통했던 역사와 문화자원을 발굴하여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또 다양한 공연과 전시로 관광안내소와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망양로 486번길 14-13 관람료 무료 개관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매주 월요일 휴관) 홈페이지 www.ebagu.or.kr⑨유치환의 우체통 왜 갑자기 우체통? 의아할 수 있다. 청마 유치환(1908~1967) 선생을 기리는 대형 우체통이 동구의 산복도로에 세워진 이유는 그가 이곳 경남여고의 교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고 학교 앞에서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부산항을 향한 통유리창 카페에 앉아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특권을 놓치지 말자. 커피 한잔으로 쉬어 가기 좋은 곳이다. 부산역에서 333번 버스를 타고 컴퓨터과학고에서 하차.⑩천지빼까리 카페 마을 정자 옆에 만들어진 카페는 이름이 예술이다. 이른바 ‘천지빼까리 까꼬막 카페’. 동구청장이 아이디어를 냈다는 이 카페는 시원하게 뚫린 유리창을 통해 세상 어느 곳도 부럽지 않은 전망, 특히 근사한 야경을 선사한다. 부산역에서 33번 버스를 타고 초량6동에서 하차.⑪까꼬막 게스트하우스 마을에서 운영하는 체험센터라는 설명보다는 게스트하우스로 이해하면 훨씬 용도가 명확해지는 곳이다. 그것도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2층 방에 올라가 불을 끄고 창밖을 바라보면 산비탈 마을의 야경이 별빛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다고. 1층은 주방 겸 거실이지만 취사를 금지하는 대신 배달 가능한 동네 맛집 목록을 준비해 두었다.☞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interview 新 르네상스의 건축가 김진우그는 초량동에 아무 연고가 없는 이방인이다. 서울에서 판문점 ‘평화의 집’을 설계했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지금도 성북동 주택을 설계하느라 바쁜 건축가다. 그런 그가 어느날 산복도로를 찾아와 집 한 채를 구입하더니 동네에게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변신시킨 것. 구청 직원들이 ‘꼭 가봐야 한다’며 앞장섰다. 이런 방문에 익숙하다는 듯 건축가 김진우 선생이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놀 유遊’자에 ‘벗 붕朋’자, 유붕정이라는 이름이 게스트하우스화된 이 집의 용도를 설명해 준다면 파티에 최적화된 너른 주방과 식탁, 직접 디자인한 난로와 가구들, 거실 한 면을 장식하고 있는 앤디 워홀의 그림과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은 그의 취향을 말해 준다. 비밀스럽게 자리잡은 황토찜질방과 화장실, 기둥 역할을 하는 계단 등등 구석구석이 감탄거리다. 산에서 바다로, 막힘없이 내리꽂히는 이곳의 경치에 반해 버렸다는 그는 산복도로 르네상스를 위해 기꺼이 앞장설 생각이다. 그에게 자극받은 이웃들도 스스로 집 단장에 나서고 있다니, 이미 르네상스는 시작됐다.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부산동구청 051-440-4281
  • 女 히스테리 치료도 시대별로 제각각

    女 히스테리 치료도 시대별로 제각각

    짜증과 신경질이 반복되며 삶을 피곤하게 하는 ‘히스테리(Hysteria)’, 이는 정신의학에서 ‘전환성신경증’으로 분류되며 유독 여성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 허핑턴 포스트는 최근 고대 이집트부터 현대까지 변해온 ‘여성 히스테리 원인과 치료법’을 전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특수한 관심 대상이었고 해석도 다양했던 히스테리의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칼리아리 대 연구팀은 “고대인들이 여성 히스테리의 원인을 ‘자궁’의 불규칙한 이동 때문으로 정의했다”고 밝혔다. 기원전 1900년 생존했던 이집트인들의 기록을 보면 “자궁의 위치가 불안정할 때 혹은 다른 방향으로 이동됐을 때 여성들의 신경질이 늘었다”고 적혀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기록과도 연결되는데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히스테리의 원인이 ‘여성 자궁’의 뜨거운 기운 때문이라고 저서에 적어놨다. 참고로 ‘Hysteria’는 그리스어로 ‘자궁’을 뜻하며 히스테리의 단어의 유래는 여기에 기인한다. 19세기 영국 기록을 보면 히스테리의 중요 원인을 여성들의 성적 불만족으로 여겼다. 당시 치료법으로 여성 성기 주위의 골반 마사지가 성행했는데 전문가들 중 일부는 여성용 자위기구가 발달한 것도 히스테리 치료가 목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1800년 대 초에는 ‘고압 호스를 이용한 샤워’가 히스테리 치료법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프로이트 이론에 기초한 정신분석적 치유 기법을 사용한다. 정신과 전문의와의 지속적인 상담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으로 치료 확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허핑턴포스트 캡처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女 히스테리,고대부터 특수 연구대상 史별 분석 보니

    女 히스테리,고대부터 특수 연구대상 史별 분석 보니

    짜증과 신경질이 반복되며 삶을 피곤하게 하는 ‘히스테리(Hysteria)’, 이는 정신의학에서 ‘전환성신경증’으로 분류되며 유독 여성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21일 미국 허핑턴 포스트는 고대 이집트부터 현대까지 변해온 ‘여성 히스테리 원인과 치료법’을 전했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특수한 관심 대상이었고 해석도 다양했던 히스테리의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칼리아리 대 연구팀은 “고대인들이 여성 히스테리의 원인을 ‘자궁’의 불규칙한 이동 때문으로 정의했다”고 밝혔다. 기원전 1900년 생존했던 이집트인들의 기록을 보면 “자궁의 위치가 불안정할 때 혹은 다른 방향으로 이동됐을 때 여성들의 신경질이 늘었다”고 적혀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기록과도 연결되는데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는 히스테리의 원인이 ‘여성 자궁’의 뜨거운 기운 때문이라고 저서에 적어놨다. 참고로 ‘Hysteria’는 그리스어로 ‘자궁’을 뜻하며 히스테리의 단어의 유래는 여기에 기인한다. 19세기 영국 기록을 보면 히스테리의 중요 원인을 여성들의 성적 불만족으로 여겼다. 당시 치료법으로 여성 성기 주위의 골반 마사지가 성행했는데 전문가들 중 일부는 여성용 자위기구가 발달한 것도 히스테리 치료가 목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1800년 대 초에는 ‘고압 호스를 이용한 샤워’가 히스테리 치료법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프로이트 이론에 기초한 정신분석적 치유 기법을 사용한다. 정신과 전문의와의 지속적인 상담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으로 치료 확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허핑턴포스트 캡처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옥스퍼드 선정 2013년 올해의 단어는 셀피(selfie)…최초의 셀피는 1900년?

    옥스퍼드 선정 2013년 올해의 단어는 셀피(selfie)…최초의 셀피는 1900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사가 선정한 2013년 ‘올해의 단어’로 ‘셀피’(selfie)란 단어가 선정된 가운데 세계 최초의 ‘셀피’ 사진이 화제다.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셀피’란 ‘자가촬영사진’의 줄임말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는 인터넷 용어인 ‘셀카’(셀프 카메라)와 같은 의미다. ‘셀피’는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최근 1년새 급격히 많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스마트폰을 통해 자기 스스로 자신을 촬영하는 일이 일상화되면서 널리 쓰이게 된 신조어인 셈. ‘셀피’라는 신조어가 올 한해를 휩쓴 가운데 최초의 ‘셀피’ 사진도 화제다. 사진의 주인공은 신상이 밝혀지지 않은 영국의 한 여인이다. 1900년대 초로 추정되는 시기에 찍힌 이 사진은 한 중년 부인이 집에서 거울을 향해 커다란 박스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오래된 ‘셀피’ 중 유명한 또 하나의 사진은 러시아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 소녀가 거울을 향해 코닥사의 브라우니 카메라로 자신의 모습을 찍은 것. 이는 10대가 찍은 최초의 셀피. 사진 속의 소녀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로 유명한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다. 아나스타샤 공주는 1914년에 자신의 친구에게 이 사진을 보냈고 그 사진이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셀피’는 아직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공식 등재되지 않았지만 출판사 측은 향후 이 단어를 사전에 정식으로 올리는 것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글로벌 시대] 독도지킴이와 해양안보의 새로운 양상/윤영미 평택대 외교안보전공 교수

    [글로벌 시대] 독도지킴이와 해양안보의 새로운 양상/윤영미 평택대 외교안보전공 교수

    소중한 우리 땅 독도를 처음 방문했다. 지난달 22일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등 50여명을 실은 두 대의 시누크 헬기가 동해를 향해 날았다. 필자의 눈앞에 펼쳐진 ‘동도와 서도’를 아우르는 독도는 늠름한 모습 그 자체였다. 오랫동안 갈망해 왔기에 독도의 땅을 내딛는 그 가슴 벅찬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독도 곳곳이 보랏빛 해국이며 아름다운 들꽃들이 지천이었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동도는 남쪽 비탈을 제외하곤 60도가 넘는 벼랑과 가파른 경사인데 북쪽에서 바라보면 한반도의 형상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한반도 바위’가 있다. 독도의 국적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자연의 상징물인 것이다. 독립문의 형상과 닮은 ‘독립문 바위’는 신비로웠고 커다란 봉우리 서도에 우뚝 선 ‘탐건봉’은 아름다운 조각상처럼 보였다. 잘 알려진 대로 1년 중 독도 방문이 가능한 날은 40일 정도다. 파도 사정에 따라 선착장 접안이 어려우면 해상에서 독도를 마주해야 하는데, 접안을 해도 20분 남짓 머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독도를 찾는 관광객은 증가 추세다. 내국인 방문 30만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곳엔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독도경비대’가 있다. 이들은 불철주야 거친 파도를 견디며 독도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의 노고와 열정에 다시 한번 감사를 보낸다. 일본은 2005년부터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고 대대적인 행사를 진행한다. 특히 올해는 고위 관리가 처음으로 참석했다. 현역 국회의원도 역대 최다인 21명이 포함됐다. 또 지난달 16일 일본은 ‘다케시마에 관한 동영상’이라는 일본어판을 외무성 홈페이지와 유튜브에 올렸고, 31일에는 또 다른 2분 정도의 영문판 홍보 동영상도 게재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과 영토 분쟁화 시도 등 부당한 주장을 멈추지 않고 있고, 체계적으로 홍보하며 지원 예산을 증액하고 있다. 그런데 독도의 주권을 훼손하는 일본의 이런 시도에 우리의 대처가 다소 소극적이고 조용한 것은 아니었는지. 이젠 역사적으로,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땅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더 강화해야 한다. 마침 지난달 25일은 2010년 한국교총이 선포한 독도의 날이었다.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칙령 41호로 제정해 울릉군의 관할 구역에 석도(지금의 독도)를 포함한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비록 민간 차원에서 제정한 날이지만 점점 많은 국민들이 독도의 날에 관심을 갖고 행사에 참여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또 이날 육·해·공군과 경찰이 대규모 합동 ‘독도방어훈련’을 실시했는데, 일본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이자 영토 수호의지를 국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최근 독도를 포함해 탈냉전기 이후 동북아 역내 국가들 간의 도서영유권 분쟁과 배타적경제수역(EEZ) 획정을 둘러싼 해양 갈등과 이해관계가 증폭되고 있다. 게다가 중·일의 영유권 분쟁은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고, 최근 북극해에 대한 미·러의 해군력 증강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계속되는 선박 피랍과 테러, 해적활동, 마약과 불법난민 같은 전통적·비전통적인 해양안보를 위협하는 요인들이 곳곳에 산재한다. 글로벌 시대 해양을 둘러싼 이른바 ‘신냉전 체제’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해군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커버스토리] 간헐적 단식 No! 유산소 운동 No! 근력 운동은 Yes!

    [커버스토리] 간헐적 단식 No! 유산소 운동 No! 근력 운동은 Yes!

    “1㎏의 무게도 안 되는 물병을 들고 팔을 앞뒤로 흔들면 과연 팔뚝 살이 빠질까.” 대답은 ‘아니오’다. 호주 모던 필라테스 협회의 한국 지부 수석강사이자 지난 10년간 연예인과 일반인 수백명의 개인 트레이너로 활동해 온 고병준(37)씨. 그는 “예쁜 몸은 결코 예쁘게 운동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살빼기에 관한 한 전문가인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이어트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을 털어놨다. 그는 가장 먼저 “다이어트에는 왕도가 없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왕도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덴마크 다이어트, 간헐적 단식, 핫요가, 필라테스 등 특정 식이요법이나 운동이 반짝 인기몰이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살을 빼고 유지하려면 고강도의 운동, 식이요법, 생활패턴 조절 등 3박자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고씨는 “전교 1등을 하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노하우가 있는 것처럼 다이어트도 노하우가 있는 것이지 노력 없이 하는 경우는 없다”며 “힘든 노력을 들이지 않고 살과의 전쟁을 벌이려는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최근 유행하는 간헐적 단식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운동을 안 하고 12~24시간 굶기만 해도 살이 빠진다는 간헐적 단식은 최근 몇몇 방송 매체에 소개되면서 서점에는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공복을 유지하는 상태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면 그만큼 위의 크기가 줄어들고 자연스레 음식물에서 나오는 독소도 적어져 다이어트 및 건강 개선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씨는 “간헐적 단식의 효과가 나타날 수는 있지만 장시간 공복을 유지한 후 어떤 음식을 어떻게 섭취해야 하는지 소개된 적이 없다”며 “이는 오히려 심각한 폭식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체질적으로 위가 약한 사람들의 경우 위산이 분비될 확률이 높아 건강에도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살을 빼는 데 효과적인 운동으로 손꼽히는 유산소 운동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은 달랐다. 고씨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저강도 유산소 운동인 파워워킹이 퍼진 지 꽤 오래됐지만 단순히 걷는 것만으로는 심박수가 빨라지지 않는다”며 “심폐기능 개선 효과도 미미하고, 체지방 연소율이 높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생활 속에서 이미 저강도 유산소 운동이 이뤄지고 있으므로 별도의 운동 시간에는 차라리 뛰거나 근육량을 늘릴 수 있는 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고 밝혔다. 최근 필라테스를 가르치는 데 주력을 하고 있다는 그는 “필라테스를 요가의 한 종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몇몇 스트레칭 동작이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운동”이라고 차이점을 설명했다. 호흡법에 따라 매트 위에서 동작을 하는 요가와 달리 필라테스의 경우 요가, 웨이트트레이닝, 발레 등의 원리가 합쳐진 운동이다. 필라테스는 1900년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한 포로 수용소 병원에서 근무하던 독일인 요제프 필라테스가 당시 수용소 안에 있던 침대와 매트리스를 이용해 고안한 근육 강화 운동이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건너간 필라테스가 무용수들의 재활 치료에 이 운동을 보급했다. 1980년대부터 마돈나, 제니퍼 로페즈, 줄리아 로버츠 등 미국의 유명 연예인들이 필라테스로 몸매를 가꿔 온 것으로 알려졌다. 고씨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다이어터’들에게 “2주 동안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상세히 수첩에 기록하고, 무엇이 살을 찌게 하는 요인인지 자각하는 게 가장 첫 번째 할 일”이라며 “근력 운동에 초점을 두되 운동의 강도를 서서히 높여 가야 흥미를 잃지 않고 다이어트 과정을 즐길 수 있다”고 조언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경제동맹으로 시작된 EU, 정치·사회에까지 악영향… 유로존 해체가 유일한 답”

    “경제동맹으로 시작된 EU, 정치·사회에까지 악영향… 유로존 해체가 유일한 답”

    현재의 유럽연합(EU)에 열렬하게 갈채를 보내거나 성과에 기뻐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회의론자들이 큰 힘을 얻고 있고, 앞으로 상황은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내년에 치러지는 유럽선거에서 EU에 심각한 위기가 온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얘기죠.” 세계적인 경제·국제관계학 석학이자 ‘탈세계화’ 진영의 대표 주자인 자크 사피르(59) 파리고등사회과학연구원(EHESS) 교수는 마스트리흐트 조약 발효 20주년을 앞두고 지난 29일(현지시간)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제 동맹으로 시작된 EU의 근본적 맹점들이 정치, 사회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단계에 이르렀다”면서 “개혁된 형태로라도 EU를 지키고 싶다면, 유로화를 버리고 유로존을 해체하는 것이 유일한 답”이라고 진단했다. →EU가 본격적인 하나의 유럽을 표방한 지 20년이 흘렀다. -20년이라는 시간은 새로운 체제에 대해 대략적인 평가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정치인들은 EU가 유럽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는 보호장치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1914년 프랑스와 독일은 상호 핵심무역국이었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EU가 유럽대륙에 평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평화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가져온 것이다. 대의명분이 단순한 정치적 도구라는 점을 인식하면 다른 점들이 보인다. 하나의 유럽이라지만, 프랑스와 독일은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고 북유럽과 남유럽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고 있다. EU에 한 발만 담그고 있는 영국은 유럽보다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한다. ‘평화’를 표방한 EU는 자신의 뒷마당에서 벌어졌던 유고슬라비아 내전조차 제대로 종식시키지 못했다. 현시점에서 EU는 분명 실패작이다. →EU가 저성장으로 신음하던 유럽대륙에 긍정적인 경제적 효과를 가져온 것은 사실 아닌가. -EU는 1950년대 이후 꾸준히 ‘공동 시장’의 성공을 이어갔다. 하지만 유럽의 경제적 성과 대부분은 EU 이전에 이뤄진 것들이다. 기본적으로 유럽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경쟁을 통해 발전해 왔으며, 통합되면 통합될수록 이 같은 창의력과 생산성은 떨어진다. 안정만을 목표로 한 유로화는 경제 활력을 갉아먹었다. EU 내에서 유로화를 사용하는 국가들은 1999년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모든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경쟁력이 없다는 얘기다. →EU의 경제적 실패가 사회·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해 왔다. -경제가 고착 상태에 빠지면 사회 체제 전체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경제에서 시작됐는데, 경제가 망가지니 정작 중요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년간 회원국들은 임금과 사회적 혜택을 축소하기 위해 앞다퉈 경쟁하고 있고, 사회적 편익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규제 완화는 공공사업의 해체로 이어져 소외 계층을 돌보는 국가의 의무마저 막았다. 철도 사고 등 각종 안전사고가 급증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본다. →EU가 역할을 확대하면 회원국 간 입장을 더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 EU집행위원회의 생각이다. -1980년대 프랑스 동부는 탄광업과 관련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해결했고, 국민들은 ‘국가적 문제’라고 여겼기에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같은 논리를 EU에 적용해 보자. 독일은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남부 유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어도 10년간 독일 국내총생산(GDP)의 8~10%를 지출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독일 경제 자체가 흔들린다. 자국의 상황이라면 어렵더라도 받아들이겠지만 EU 차원에서는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각국이 안고 있는 경제적 불균형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 이 같은 불균형 해소를 위한 메커니즘조차 없는 것이 EU다. →회원국들 사이에서 EU 탈퇴 움직임이나 국가 간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1900년 이후 부유한 북부 유럽과 빈곤한 남부 유럽의 대립이 지금처럼 첨예했던 적은 없었다. 독일은 EU를 통해 남부 유럽의 혜택을 빨아들였고, 독일이 부유해지는 만큼 다른 국가들은 빈곤해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체제의 사소한 결함은 항상 그 결함보다 훨씬 더 큰 문제로 이어진다. 경제위기 심화, 실업 증가, 일자리 부족, 공공사업 부족으로 인한 이민자 소외 등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면 유로화와 EU로 귀결된다. EU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단순히 ‘인종주의’ ‘극단주의’로 폄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반EU 움직임의 중심에는 EU 체제에서 태어나 성장한 젊은 세대가 있다. 과거에 대한 향수나 보수화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내년 유럽선거는 20년 EU 역사에서 가장 큰 위기가 될 것이다. →EU와 유로화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그렇다면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답인가. -어렵겠지만 빠를수록 좋다고 확신한다. 지역 통합이라는 생각 자체는 여전히 진행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국권은 매우 신중히 존중돼야 한다. 국민국가는 역사적으로 이뤄진 산물이고, 경제적 혜택을 위해 단기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역 블록’은 엄밀히 말하면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얘기했던 전체주의의 개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치학적으로 보면 EU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정치인을 뽑는 대의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까지 무너뜨리고 있다. 파리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자크 사피르 교수는 195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10대학을 거쳐 1996년부터 파리고등사회과학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8년 러시아 경제의 붕괴 양상과 진행과정을 정확하게 예측하면서 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사회변동과 제도, 규칙의 역할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 왔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탈세계화’ 진영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저서로 ‘제국은 무너졌다’ ‘경제학자는 민주주의의 반대자인가’ 등의 베스트셀러가 있다. 2001년 금융경제 분야 최고 권위의 ‘튀고르상’을 수상했다.
  • 로마 오페라극장 130년 서울서 떠나는 시간여행

    로마 오페라극장 130년 서울서 떠나는 시간여행

    이탈리아 오페라의 성지, 로마 오페라극장이 자랑하는 의상과 무대가 서울로 옮겨왔다. 내년 1월 5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되는 ‘눈으로 듣다: 로마 오페라극장 의상·무대디자인 100선’이다. 로마 오페라극장은 1880년 개관 이후 푸치니의 ‘토스카’를 1900년 초연하는 등 엔리코 카루소, 루치아노 파바로티, 마리아 칼라스, 폰 카라얀 등 거장들이 잇따라 거쳐간 이탈리아 오페라의 요람이다. 극장은 조각가 자코모 만주, 추상화가 조르주 데 키리코 등 20세기 대표 예술가들을 무대로 불러들여 치밀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무대 미술을 구현해 냈다. 덕분에 극장은 이들이 손수 제작한 의상과 스케치한 의상·무대 디자인 1만 1000점을 유산으로 간직하면서 이탈리아 최대의 오페라 아카이브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여기서 골라내온 의상 21점과 회화 81점(의상·무대 디자인 스케치), 가면 3점 등 총 105점의 작품이 국내 관객과 처음 만난다. 오페라 ‘로엔그린’, ‘오이디푸스 왕’, ‘로미오와 줄리엣’, ‘율리우스 시저’, ‘카르멘’ 등의 공연에서 배우들이 실제로 입었던 의상들을 두루 볼 수 있다. 무료. (02)724-0146.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우리 동네 Secret 스토리] ‘역사·문화 보고’ 성북동

    [우리 동네 Secret 스토리] ‘역사·문화 보고’ 성북동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일제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말년을 보낸 심우장 이야기다. 1933년 지인들의 힘으로 지었는데 8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비탈길에 꼿꼿이 서 있다. 낡고 낡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야 해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최근 성북구에서 큰길가에 조그만 공원을 들여놨다. ‘님의 침묵’ 시비와 함께 돌 의자에 앉은 만해 동상이 발길을 붙든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북악산 아래, 한양도성 위에 자리한 성북동엔 전통의 숨결이 가득하다. 곳곳이 역사이고 곳곳이 문화다. 수려한 자연 환경은 덤. 심우장 아래쪽엔 마포에서 젓갈 장사로 시작해 거상에 오른 이종석 별장이 있다. 1900년쯤 지었다는 한옥이다. 한때 소설가 이재준이 살아 이재준 가옥으로도 불린다. 길 건너 수연산방은 소설가 이태준의 옛집을 외종손녀가 전통 찻집으로 개조한 곳이다. 이태준이 작품을 집필했던 공간에서 북악산을 바라보며 운치 있게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수연산방에서 성북초등학교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간송미술관과 만난다. 일제 수탈에 맞서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고 애썼던 전형필이 세웠다. 1년에 딱 두 번, 5월과 10월에 각각 2주 동안만 소장품 가운데 주제를 정해 전시회를 열 때면 관람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미술관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우리 미술사에 큰 자취를 남긴 미술사학자이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가 살았던 전통 한옥이 나온다. 재개발로 헐릴 위기였는데 시민들이 모금 운동을 벌여 사들이고 복원해 ‘시민문화유산 1호’라 불린다. 다시 천주교 성당 방향으로 계속 올라가면 길상사가 나온다. 1980년대 말까지 삼청각과 함께 최고급 요정으로 꼽히던 대원각이었다. 이곳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감명을 받아 시주하며 사찰로 바뀌었다. 시인 백석과 김영한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깃든 곳이자 법정이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최근 이 같은 숨결을 널리 알릴 바탕이 마련됐다. 시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된 것이다. 대규모 건축물이 우후죽순으로 생겨 난개발 우려도 따르는데 역사·문화 자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메카로 키우겠다는 취지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성동구 100년 자료집 발간

    서울 성동구는 17일 ‘성동의 어제와 오늘’을 발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구청 각 부서와 도서관 등에 비치했다고 밝혔다. 지난 100여년에 걸친 주거환경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도록 시가지 조성을 위한 토지구획정리사업 중심으로 사진 자료와 역사를 한데 모은 책자다. ‘성동의 어제와 오늘’은 5개 장으로 구성됐다. 1장은 1900년부터 1945년 이전까지의 자료다. 일제강점기 토막민촌, 주택경영기관의 개발 사업 등 성동구에서 근대적 주거지가 형성돼가는 과정을 돌아봤다. 2장은 1950년대 무허가 판자촌에서 1970년대 무허가 주택 이주사업 시기까지를, 3장은 본격적으로 시가지 조성 사업과 토지구획 정리 사업을 벌이던 기록들을 담았다. 4장은 성동구 구역벽 재개발 전후 현황 사진을 담아 주택재개발사업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5장은 성동구 지역의 토지이용과 용도지역지구, 주택이나 공원 현황, 도시계획 역점사업 등을 정리해뒀다. 고재득 구청장은 “책자를 통해 우리 지역이 어떻게 생성, 변화했는지 손쉽게 찾아보고 우리 마을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한국~유럽 최단 新항로 탄생… 수송 경제성·안전성 보장돼야”

    “한국~유럽 최단 新항로 탄생… 수송 경제성·안전성 보장돼야”

    우리나라는 지난 5월 15일 북극이사회 옵서버 국가가 되면서 북극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미국, 러시아, 캐나다,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아이슬란드 등 8개 정회원국과 함께 북극 자원 개발은 물론 환경 문제에 이르기까지 북극에 관한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면서 북극으로 진출하는 국제적인 발판을 만들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지난달 16일 스테나 폴라리스 유조선이 러시아 우스트루가항에서 첫 출항을 하면서 본격적인 북극항로의 활용을 시작했다. 서울신문은 14일(현지시간) 유조선에 승선한 북극항로 전문가와 함께 시범 운항의 의미와 전망, 향후 과제 등을 짚어봤다. 전기정 해양수산부 해운물류국장, 남청도 한국해양대학 교수, 황진회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해운시장분석센터장, 이동섭 한국해양수산연수원 교수, 조찬주 현대글로비스 이사, 이승헌 수석 항해사가 참석했다. 김재진 강원발전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인터넷으로 연결됐다. →북극항로 시범 운항의 의미와 전망은. -전기정 해양수산부 해운물류국장 이번 시범 운항은 우리나라 선사가 북극항로를 통해 화물을 운송하는 최초의 사례로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북극항로는 기존의 수에즈운하와 비교해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어 새로운 해상 운송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앞으로 북극항로 운항 가능 기간이 현재보다 5개월 더 늘어나고 2020년 북극 지역의 자원 개발 사업(Yamal Project)이 본격화되면 거대한 해상 운송 시장으로 발전하게 될 전망이다. 우리나라 선사도 시범 운항을 계기로 북극항로 운항 경험과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축적할 필요가 있다. -황진회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해운시장분석센터장 북극항로는 지난 7세기 바이킹족이 개척하기 시작했지만 빙하와 빙산으로 인해 인간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1900년대에는 러시아가 군사 목적 수송과 에너지 자원 개발을 위해 북극항로를 독점적으로 사용했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1987년 무르만스크선언으로 국제 항로가 됐다. 2009년 외국 선박으로는 처음 독일 벨루가시핑 선박이 북극항로를 통과했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나라 선사가 북극항로 운항을 시작했다.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해상 항로가 개통되고 1914년 파나마운하 개통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이 연결된 것과 같이 올해 북극해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 대한민국 간 최단 거리의 해상 항로가 개척되고 있다. -이동섭 한국해양수산연수원 교수 최근 많은 학자들이 20세기에는 정보기술(IT)이 주요 산업이었다면 21세기는 물류산업의 시대라고 말한다. 지난해 북극항로를 통과한 선박이 46척이었는데 이 가운데 3척은 한국에서 출항했고 8척은 한국으로 화물을 싣고 들어왔다. 주로 러시아에서 가스 콘덴세이트(원유의 한 종류)를 싣고 왔다. 예상대로 2020년 북극해 항로가 연중 활용 가능해지면 우리나라와 유럽 간 화물 운송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국제 교역 비중이 높아 북극항로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지만 어려움도 많다. -남청도 한국해양대학 교수 그렇다. 당장 유럽으로 가는 길인 북동항로는 겨울 동안 북극해가 얼어붙어 6월 말에서 11월 중순까지만 통행할 수 있다. 뱃길 수심도 얕고 쇄빙선과 아이스 파일럿을 반드시 동행시켜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쇄빙선 이용료와 보험료 등 부수적인 비용이 수에즈운하 등보다 2~3배 비싼 것도 걸림돌이다. 러시아 정부에서 점차 제도를 정비해 나가면서 어느 정도 어려움은 해소될 전망이지만 현재는 수익을 내는 루트로 단정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2007년 북동항로와 북서항로가 동시에 열린 이후 북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최단 항로인 해상 실크로드가 현실화되고 있어 우리에게 큰 기회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북동항로를 이용해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가는 거리는 종전 수에즈운하 경유 때보다 8000여㎞ 단축된다. 항행 기간도 열흘 정도 줄면서 물류 혁명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선진국들도 이런 가능성을 두고 경쟁적으로 북극항로 진출을 타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번 시범 운항을 계기로 발 빠르게 노하우를 축적해 선점 경쟁에 나서야 한다. →북극항로 활성화를 위한 과제는. -전 국장 북극항로는 아직 개발 초기로, 운항 기간이 연간 5개월 이내이고 내빙 선박과 적정한 화물 확보 등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북극항로의 경제성과 발전 잠재력이 크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운항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할 필요가 있다. 또 국내에서도 선·화주 기업 간 협력을 통해(특히 에너지, 석유화학) 북극항로 이용 화물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우리 선사 스스로 에너지 효율성이 높은 내빙 선박을 확보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조찬주 현대글로비스 이사 북극은 지금까지 알려진 조사에 따르면 원유가 약 13%, 천연가스가 약 30% 등 전 세계 부존자원의 상당 부분이 묻혀 있는 자원의 보고다. 하지만 북극항로는 물류 자체만으로 보면 아직 상업적으로 많은 한계가 있다. 우선 물류에서 가장 기본적인 적시성, 정기성, 화물과 운항의 안정성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 또 물류 간 상업 거래의 부수적 서비스로 해당 구간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상업 루트로 고려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북극항로는 화주사들에 매력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북극의 자원 개발이 속속 진행되고 강대국들의 발 빠른 움직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북극 관련 사업은 해당 국가의 북극 사업 영향력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북극 관련 사업은 그 자체로 향후 에너지 및 자원 관련 사업에 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선점 효과가 있다. -황 센터장 우선 북극항로에 많은 화물이 수송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화물 수송의 경제성과 선박 운항의 안전성이 보장돼야 한다. 화물 수송의 경제성과 관련해서는 많은 화물이 있어야 하고 선박 운항 비용 면에서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북극해의 많은 에너지 자원을 수송하는 비용 면에서도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즉, 북극항로 운항 시 연료비, 선원비, 보험료 등 선박 운행 경비가 다른 항로에 비해 낮아야 한다. 특히 북극항로에만 있는 쇄빙선 이용료가 경제적 부담이 되지 않도록 최소화돼야 한다. -이승헌 수석 항해사 선박 운항의 안정성은 북극항로 활성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다. 북극항로가 열리고 있지만 여전히 선사들은 운항 리스크를 안고 있다. 떠다니는 얼음 등은 북극 항해의 가장 위험한 요소이고 북극점 부근의 자기장 교란으로 인한 선박 통신 장애도 문제다. 해도 정보, 기상정보도 다른 해양과 같이 풍부한 정보가 저렴한 이용료로 제공돼야 한다. 북극항로 운항 지원을 위한 국제적인 공조 시스템 구축 등도 시급하다. →북극항로 활성화에 대비한 전문 인력 양성은. -김재진 강원발전연구원 부연구위원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수도권에서 인천을 통한 서부축과 부산, 울산, 전남 여수 등으로 이어지는 종축으로 물류 흐름이 이어져 왔다. 북극 등 북방 물류길이 막혀 있을 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북극항로가 열리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깊은 바다, 동해를 끼고 있는 강원권으로 물류의 물꼬를 터 북극항로 시대를 이끌도록 해야 한다. 강원도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과 동해안권 경제자유구역 지정으로 북극항로와 수도권을 연결하는 물류 루트와 산업 거점 기지를 확보했다. 동해항, 삼척항, 속초항 등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최적의 개발이 가능한 항구들도 있다. 이제는 북극항로 시대에 맞는 국내 육상 물류 흐름의 혁명도 절실한 때다. -이 교수 선박이 북극해 항로를 통과할 경우 무엇보다 해기사(항해 및 기관사)가 내빙 선박에 맞는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해양수산연수원에서는 내년 초에 자격증 훈련 코스 개설을 준비하고 있다. 2015년이 되면 북극항로를 이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선박이 최대 420여척에 이른다. 향후 북극해 북동, 북서항로가 완전히 개방됐을 때 필요한 최대 700~800명의 인력에 대한 교육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진행 사진 베링해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세계화 급행열차 탄 한국경제 복지없는 종착역은 대공황이다

    조용한 대공황/시바야마 게이타 지음/전형배 옮김/동아시아/200쪽/1만 2000원 많은 이들이 글로벌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들춰 대안을 내지만 뾰족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해결책은 정말 없는 것일까. ‘조용한 대공황’은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세계화를 주목, 그 탈출구를 제시한 책이다. 흔히 세계화를 경제 위기의 탈출 방편으로 여기는 대세와는 큰 거리를 둔 채 사회경제학적 관점에서 위기를 진단해 눈길을 끈다. 일본 시가대 경제학부 교수인 저자는 지금 상황을 단순한 경기침체로 보지 않는다. 1920년대 대공황 규모의 위기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현 글로벌 경제 위기가 세계대전을 불렀던 20세기 초의 대공황과 같은 수준이라면 왜 사람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까. 저자는 그 원인을 은폐와 축소에서 찾는다. 각국 정부가 대규모 재정지출을 통해 공황상황을 감추거나 최소화해 일반인들이 피부로 심각성을 느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책은 그 상황을 ‘조용한 대공황’이라 설명한다. 그러면 세계화와 지금 경제 위기의 연관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의 설명은 의의로 간단하다.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클수록 세계 경제 위기의 충격이 국내에 미치는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의 세계화에 따른 위기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만큼 거대하다고 본다. 저자가 지적한 세계화의 부작용은 비단 경제 위기에 머물지 않는다. 세대 간, 산업 간, 도시·지방 간 대립격화로 인한 극단의 양극화가 큰 문제로 들춰진다. 격차가 확대될 경우 국가 체제를 위협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게 될 것이란 전망도 곁들여진다. 저자는 지금의 양극화가 1900년대 초엽의 세계화처럼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진 않더라도 경제보호주의에 나선 국가 간 경제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경고한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세계화를 서서히 멈추고 복지를 확충하면서 가족과 공동체를 재생시켜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주로 일본과 세계 경제상황을 연결해 다룬 책이지만 세계화에 박차를 가해 달려온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가 강렬하다. 실제로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보다 세계화의 정도가 더 많이 진행되어 있어 글로벌 경제 위기에 따른 악영향을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2) 종로(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2) 종로(상)

    ■ 늙은 종가 며느리 같지만 위풍 여전… 우리에게 종로는 무엇인가. 불과 30년 전만 해도 ‘종로는 서울이고, 서울은 종로’라는 말에 토를 달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인구 2500만 명이 드나드는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의 중심도시로 급팽창한 서울의 중심이 더는 종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종로는 600년 가까이 서울 유일의 도심이었지만 지금은 여러 도심 중 하나로 ‘내려’ 왔다. 강홍빈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종로는 번성하던 문중을 지키며 늙어가는 종갓집 며느리 같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보신각 타종행사는 여전히 서울의 중심이 종로라고 외치는 듯하다”라고 종로의 흥망성쇠를 역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 비록 사람이 구름처럼 모인다는 운종가(雲從街)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종로는 여전히 한민족의 핏줄에 새겨진 대표거리이다. 광화문~숭례문까지 남북축선이 정치적 중심이라면, 광화문~동대문까지 동서축선을 이루는 종로는 생활의 중심이었다. 도성의 하루를 열고 닫는 종루(보신각)와 팔도의 물자가 모이는 시전행랑(市廛行廊)이 그 중심에 있었다. 수많은 것이 스쳐 지나가고 땅속에 묻혔지만, 종로에는 조선 초부터 지금까지 600년 가까이 서울을 지키는 ‘다섯 가지’가 건재하다. 종각과 종묘,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흥인지문(동대문) 그리고 시장이 그것이다. 개항 이후 종로의 변천사를 짚어보자. 보신각 종소리에 따라 성문 여닫는 제도는 1908년 폐지됐다. 1899년 5월 전차가 개통돼 성문 안으로 전차가 드나들면서 문을 여닫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1900년 4월 전기 가로등 3개가 종로의 밤거리를 대낮처럼 밝힌 이후 가장 아름답고, 활기차고, 제일 좋은 상점과 시장이 있는 곳으로 군림했다. 1931년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현대식 백화점 화신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장안의 모던(Modern)보이와 자유부인은 화신에서 쇼핑하고, 르네쌍스 다방에서 클래식음악 감상하고, 단성사에서 영화 보고, 청일집에서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담론을 즐겼다. 대중문화의 본거지였다. 주단 거리, 양복점 거리, 서점·출판사·학원, 포목점, 귀금속 상점의 성쇠가 거듭됐다. 육의전(명주·종이·어물·모시·비단·무명)의 명맥이 살아있었다. 근래 들어 국내 최대의 귀금속거리로 우뚝 서게 된 데에는 배경이 있다. 종로4가 예지동은 예로부터 돌이나 옥을 다듬는 공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석수방골, 옥방골로 불리던 곳이었다. 6·25전쟁 이후 단성사와 종묘 뒤편을 중심으로 시계노점상이 한 곳 두 곳 모이기 시작하더니 자연스럽게 세공업소와 귀금속 상가, 공방이 상권을 형성했다. 1980년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의 봉익동 이전은 영역확대의 신호탄이었다. 종로의 풍경은 귀금속의 메카로 바뀌었다. 서울YMCA는 1903년부터 종로의 터줏대감이었다. 이 땅에 시민사회운동과 사회체육의 씨앗을 뿌렸다. 종로서적은 1963년 문을 연 이래 2002년 문을 닫을 때까지 출판문화의 대명사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종로서적 앞’은 젊은이들의 대표적인 약속장소였다. 종로는 학원 일번지이기도 했다. 경복학원, 대성학원, 양영학원, 신성학원, 금자탑학원, 종로학원, 정일학원, YMCA학원, 제일학원 등이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탑골공원은 연산군 때 폐사된 원각사 터에 조성됐다. 1895년 고종이 황실음악연주회장으로 팔각정을 짓기 전까지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원각사비는 민가 안에 방치돼 있었다. 1919년 3·1 독립선언문이 낭독돼 민족운동의 성지가 되었지만 원각사 백탑은 또 유리집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종로라는 길 이름을 낳은 종루는 탑골공원 옆 인사동 입구에 있었다. 태종(1413년)이 한양의 동서대문을 연결하는 종로와 광통교~남대문이 만나는 곳에 누각을 세우고 큰 종을 달았다. 오늘날 종로 네거리 한가운데이자 사대문 한복판이다. 종을 쳐서 도성문을 여닫고 통행금지(人定)와 해제(罷漏)를 알렸다. 보신각(普信閣)이 된 것은 1885년 고종이 중건하면서 사액을 내린 데서 이름 붙여졌다. 종루는 모두 3번 불타고, 8번 다시 짓고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지금의 종은 ‘보신각종이 수명을 다했다’는 1984년 1월 15일자 서울신문 보도가 나가자 거국적인 국민성금운동이 벌어진 끝에 8억 원의 성금을 거둬 만든 새 종이다. 종로(鐘路)인가 종로(鍾路)인가. 종로의 한자표기를 놓고 한바탕 혼선이 일었다. 쇠 북 종(鍾)인가 아니면 (술을 담는) 쇠그릇 종(鐘)인가의 논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옳다. 강희자전을 보면 ‘고이자 통용’(古二字通用)이라 하여 서로 통용되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혼용해 썼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종로구 표기를 ‘종로구’(鍾路區)라고 표기하면서 쇠 북 종으로 굳어졌을 뿐이다. 쇠 북 종이면 어떻고 쇠그릇 종이면 또 어떤가. 종로는 그만큼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곳이다. 모든 이질적인 것을 녹여버리는 용광로 같은 곳이다. 1953년부터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이 울리면서 한국의 새해는 보신각에서 맞는 세밑풍속도가 생겼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타종행사가 계속되는 한 종로의 흥행은 이어질 것이다. ■ 지금의 삼성전자 같았던 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은 1930~50년대의 삼성전자였고, 박흥식은 당대의 이병철이었다. 화신은 식민시기 서울의 신화요, 대표 브랜드였다. 1937년 신축한 지하 1층 지상 6층의 화신백화점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첨단빌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와 옥상 전광뉴스판이 설치됐다. ‘화신 가서 엘리베이터 타고 6층 식당의 비빔밥을 먹은 것’이 화젯거리였다. 6·25전쟁 이후 지금의 SC제일은행 자리에 신신백화점을 추가로 지어 전성기를 누렸다. 풍운아 박흥식을 빼고 화신백화점을 이야기할 수 없다. 계열사 흥한화섬의 자금난으로 부도가 나 1980년 그룹이 해체됐고, 1987년 백화점도 철거됐다. 이후 바람처럼 사라져버려 한때 그의 이름이 인명록에서 빠진 적도 있었다. 지금도 포털에서 ‘박흥식’을 치면 동명의 프로야구 선수와 비슷한 비중의 인사로 취급받지만, 그를 제외하고 일제강점기를 거론할 수 없다. 본정통(충무로)에 있던 미쓰코시(신세계백화점), 조지아(옛 미도파백화점) 등 일본계 4개 백화점을 따돌리고 조선 최대의 백화점, 백화점 왕으로 군림한 식민지 조선의 자랑이었다. 상품권을 발행하고, 재고정리, 할인행사, 주택을 내건 경품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전국 350여 곳의 화신 연쇄점이 화신 왕국의 수족이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는 친일부역인사 1호로 박흥식을 체포해 구속했다. 풀려난 것도 1호였다. 법원은 “일제하에서 겨레의 상권을 수호했고 한민족의 긍지와 명예를 떨쳤다”라며 무죄를 언도했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구속됐다가 풀려나면서 제출한 ‘남서울 신도시계획안’은 10년 후 강남개발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의 강남지역 2410만 평에 11년간 270억 원을 들여 32만~48만 명을 거주케 한다는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친일기업가에 특혜를 준다는 여론을 의식한 정권이 등을 돌리면서 박흥식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구설수도 끊이지 않았다. 당시 화신백화점 선전 노랫말에는 ‘종로 십자가 봄바람 부는데 웃음꽃 피는 화신의 전당/안으로는 융화 밖으로는 신용 그 이름도 아름답다 화신이여’라고 하여 ‘융화’의 ‘화’ 자와 ‘신용’의 ‘신’ 자를 따서 작명한 것처럼 홍보했다. 일부에서는 친일사업가 박흥식이 일본의 정신을 상징하는 화(和)자에 믿을 신(信)자를 덧붙여 ‘일본을 믿는다’는 뜻으로 백화점 이름을 작명했다고 몰아붙였다. 백화점 외벽에 초대형 ‘和’ 자를 새긴 것도 시비 삼았다. 일본의 건국정신이 대화혼(大和魂)이고 ‘일본’이라는 나라이름이 야마토(大和)의 한자표기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남아있는 화신백화점의 모태가 된 ‘화신상회’라는 간판으로 미뤄볼 때 박흥식이 1931년 화신상회를 인수하면서 그 이름을 딴 것이 확실해 보인다. 화신백화점 자리를 화신그룹의 뒤를 이은 국내 최대 재벌 삼성이 인수해 종로타워를 지은 것도 흥미롭다. 이 나라 최고의 요지를 탐내지 않을 회사가 있겠냐마는 두 회사의 소유권 이전은 우연이라고 치기엔 공교롭다. 다만 ‘종로의 전설’ 화신백화점 자리에 백화점이 아닌 오피스빌딩을 지어 종로상권의 위축을 불렀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 건축가 라파엘 비뉼리가 설계한 종로타워는 ‘화신백화점의 역사와 종로의 도시적 맥락을 무시했다’(영남대 이우종 교수), ‘도시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혼자 군림하는 건물’(건축가 우대성)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광복 이후 지어진 최악의 건물 3위에 올랐다. 정체성 불명의 구멍 뚫린 건물이 종로의 전통과 풍광을 괴이쩍게 만들었다. joo@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재즈 인생 50여년…국내 남성 재즈 보컬 1세대 김준

    [김문이 만난사람] 재즈 인생 50여년…국내 남성 재즈 보컬 1세대 김준

    전설의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에게 묻는다, 재즈가 무엇이냐고. “궁금해도 절대로 알 수 없을걸”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비비디 바비디 부”라고 한다. 아마도 재즈가 느낌으로 전해져 오는 음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재즈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재즈는 원래 블루스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아프리카와 유럽 문화권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프랑스인과 흑인의 혼혈인 크레올들의 음악적 요소가 뒤섞이면서 탄생했다. 1800년대 후반 농장에서 불리던 노동요나 뱃노래 등이 발전해 1900년대 초반 블루스적 특징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재즈음악이 들어왔을까. 흥미롭게도 대한매일신보 기자를 지낸 바 있으며 ‘봉선화’ 등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이 재즈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1930년대 미국에 유학해 재즈를 익혔던 그는 지금의 KBS 전신인 경성중앙방송국에서 관현악단을 만들어 재즈를 연주했다. 1940년대 재즈 스타일 곡들이 대중음악에 조금씩 섞이면서 박단마가 부른 ‘나는 열일곱살이에요’가 국내 최초로 스윙 사운드를 사용한 재즈 스타일의 곡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광복 이후 미군 문화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재즈가 클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50년대 루이 암스트롱이 각종 영화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면서 본격적으로 재즈가 등장했다. 1960년대 미8군 쇼 무대는 가수 지망생들의 생활의 터전이었고 경음악단들이 앞다퉈 재즈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가을바람이 선선해지는 계절, 이쯤 해서 음악을 얘기해 보자. 음악은 귀로 마시는 황홀한 술이라고 했다. 이는 음악이 즐거움을 주는 것과 동시에 일상사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재즈는 어떨까. 재즈 인생 50여년, 우리나라 남성 재즈 보컬 1세대로 알려진 김준씨를 지난 5일 오후 만났다. 장소는 경기 남양주 호평동에 위치한 김준 재즈클럽이다. 3층 건물에 1층은 한식당(부인이 운영)이고 2층이 김준 재즈클럽 공연장이다. 단체 예약이 있을 때만 김씨가 직접 출연해 여러 곡을 선사한다. 클럽에 들어섰더니 ‘시작은 그 끝과의 약속이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신뢰에 대한 겸허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피아노와 드럼이 있다. 벽에는 재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미국 흑인 가수들의 공연 사진이 붙어 있다. 잠시 우리나라 재즈 1세대 뮤지션들의 얼굴이 나타난다. 1970~1980년대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수사반장’의 배경음악을 담당했던 재즈 드러머 유복성씨, 미8군 무대에서 비밥과 쿨 재즈를 다지면서 ‘영자의 전성시대’ ‘어제 내린 비’ ‘겨울여자’ ‘깊고 푸른 밤’ 등의 영화음악을 맡아 명성을 떨친 정성조씨, 피아니스트 신관웅씨, 트럼펫 연주가 강대관씨 그리고 보컬리스트 김준씨 등으로 이어진다. 클럽 내부를 잠시 구경한 뒤 야외에 마련된 의자에서 마주 앉았다. 주변에는 푸른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바로 앞에는 승마장이 있다. 자연의 치유에 대해 잠시 생각하면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여긴 언제 문을 열었나요?” “2002년부터 10년 동안 서울 평창동에 있다가 작년에 여기 왔어요. 재즈를 좋아하는 팬이 제공한 공간입니다.” “공연은 일주일에 몇 번 하는지요?”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는데 어떤 모임이 있을 때, 그렇게 모인 분들을 위해 재즈 한마당을 선사합니다. 재즈는 즉흥적이라 그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다 좋아합니다. 누구나 어울리기 좋지요.” “요새 한강에서 공연도 하고 있지요?” “여의도 쪽에서 합니다. 물빛무대라는 곳이 있는데 매주 수·금·토요일 저녁 7시에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예술총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관객이 700~800명쯤 모이는데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찾아와 재즈를 즐깁니다. 한번 오세요, 이 가을에(웃음).” “재즈는 사계절 중 언제 가장 듣기가 좋습니까?” “사계절에 다 맞출 수 있습니다. 가을에는 가을대로 맛이 있고요.” “국내 재즈 1세대는 몇 명이나 있나요?” “(잠시 생각하더니) 10명쯤 되지요. 공연 때 가끔 만납니다.” “국내 재즈 뮤지션은 어느 정도 됩니까?” “한 200~300명쯤 됩니다. 미국파가 있고 유럽 유학파가 있습니다. 우리 같은 1세대도 있지만 현재는 30대 전후인 재즈 3세대로 교체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재즈란 무엇인가요?” 지체 없이 답이 나온다. “가장 자유스럽고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음악입니다. 또한 가장 합리적이고 영적인 치유가 있는 음악이지요. 그래서 재즈는 영원할 겁니다. 혼이 담긴 음악, 흥이 녹여진 음악이라서 재즈만 가지고 있는 DNA가 있습니다. 재즈는 또 지구 상의 어떤 음악과도 협연이 가능합니다. 포용력이 있는 음악이지요.” 그는 재즈 보컬리스트 외에도 작곡가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동안 무려 1000여곡이나 작곡했다. ‘사랑하니까’(패티김)를 비롯해 1984년 TBC세계가요제 금상 수상곡 ‘나 이제 여기에’(박경희), ‘내 마음은 풍선’(장미화), ‘그래도 설마하고’(임희숙), ‘청바지 아가씨’(박상민) 등이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남성 4중창단 ‘쟈니 브라더스’의 멤버(리드 김현진, 테너 양영일, 바리톤 김준, 베이스 진성만)로 그 유명한 ‘빨간 마후라’를 불러 히트시켰다. 잠시 당시 얘기를 해 본다. 평상시에는 각자 점잖은 의상의 노신사들이지만 무대의상만큼은 반드시 화려하고 밝은 색상으로 통일했다. 김씨는 데뷔 시절부터 의상, 액세서리 등의 코디를 도맡았다. 그들에겐 ‘빨간 마후라’가 잘 어울렸고 정겨운 화음은 세월을 뛰어넘어 중장년층으로부터 깊은 공감을 얻었다. 김씨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 1940년 1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논밭 30만평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탄 자전거 짐받이에 앉아 신의주 시내를 구경했다. 가죽 장화를 신고 허리에 긴 칼을 찬 일본 기마경찰의 모습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다 1945년 광복을 맞이했다. 소련군이 진주했고 조선 노동당이 들어섰다.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아버지는 숙청 대상 1호로 낙인찍혔다. 가족들은 할 수 없이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월남했다.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원주로 이사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강원 영월과 경북 문경 등으로 피란을 갔다. 이어 1·4후퇴 때는 목포를 거쳐 제주로 피란 갔다.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산방산 인근이었다. 사계초등학교 6학년을 거쳐 대정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미군 부대 전용 교회의 찬양대에서 활동했다. 도내에서 열리는 음악 콩쿠르에서 ‘가고파’ ‘고향생각’ ‘고향이 그리워’ ‘달밤’ ‘봉선화’ ‘바다로 가자’ 등을 불러 우승을 휩쓸었다. 대정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단거리 육상과 마라톤 시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는 한편 음악 교사에게 피아노, 트럼펫,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합창단에서 바리톤도 맡았다. 195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관학교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고등학교 교장 선생의 권유로 나간 ‘전국 남녀 고등학생 음악경시대회’(경희대 주최)에서 3위를 차지해 경희대 성악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의 음악 인생은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4·19로 인해 잦은 휴강이 이어지다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종로2가 ‘뉴월드 음악감상실’에서 DJ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5·16 후에는 예그린가무단의 합창단원으로 강제로 뽑혀 갔다. 당시 가무단장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1년여 만에 예그린합창단이 해체되면서 쟈니 브라더스를 결성하게 된다. 쟈니 브라더스는 1962년 당시 TBC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주말 프로그램 ‘쇼쇼쇼’에 전속 가수로 출연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방앗간집 둘째딸’ ‘니가 잘나 일색이냐’ ‘마포 사는 황부자’ 등의 히트곡을 쏟아냈다. 신영균이 주연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제곡을 부른 것도 이때였다. 1968년 쟈니 브라더스가 해체된 이후 각자 솔리스트로 변신한다. 김씨는 멤버 중 가장 먼저 독립했다, 스탠더드 팝과 재즈 번안곡이 주를 이룬 음반을 발표하면서 솔로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1970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로 ‘음악은 곧 인생’이라는 일관된 삶을 살아 오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솔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저는 재즈 뮤지션으로서 더욱 열정적으로 재즈 음악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앞으로 이뤄 나갈 꿈은 ‘김준 재즈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입니다. 재즈 아카데미, 재즈 박물관도 생각하고 있지요.” 헤어지면서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이 나이보다 젊게, 해맑게 느껴진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김준은 1940년 평안북도 신의주 출생으로 경희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1962~1968년 ‘쟈니 브라더스’의 일원이었으며 KJC(한국재즈모임) 창립 회장과 고문을 역임했다. 이후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경기 남양주시 호평동에서 김준 재즈클럽을 운영하면서 극동방송 운영위원과 ㈔한국재즈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주요 공연으로는 ‘김준 디너콘서트’(1995년), ‘김준 재즈콘서트’(1996년), ‘서울 솔리스트 재즈 오케스트라 공연’(2007년), ‘아름다운동행 재즈콘서트’(2010년), ‘영화 브라보 재즈라이프 출연’(2010년), ‘브라보 재즈라이프 콘서트 출연’(2010, 2011년) 등이 있다.
  • 덕수궁 정관헌에서 문화계 명사와 함께…

    덕수궁 정관헌에서 문화계 명사와 함께…

    덕수궁 정관헌은 구한말 고종 황제가 ‘가배’(커피)를 마시며 연회를 즐겼던 러시아풍 건물이다. 1900년을 전후해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동서양의 건축 양식을 절충해 지었다. 문화재청은 오는 13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이곳에서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 행사를 벌인다. 문화계 명사의 강연을 듣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자리다. 매년 봄·가을에 나눠 열리는 행사는 올해로 5년째를 맞는다. 올해 강사는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 박동춘 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장이다. 13일에는 안 교수가 ‘한국 현대미술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현주소를 발표한다. 27일에는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인 이 교수가 이웃 나라에 얽힌 숨은 문화 이야기를 들려주고, 10월 4일에는 우리나라 차 문화 전통의 맥을 잇는 박 소장이 차문화 속에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를 강연한다. 이 행사는 정관헌 내부의 수용 규모를 고려해 사전 예약자를 180명으로 제한한다. 덕수궁관리소 누리집(www.deoksugung.go.kr)을 참고하면 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도쿄올림픽 정식종목 잔류 레슬링 다시 ‘한국 메달밭’으로

    도쿄올림픽 정식종목 잔류 레슬링 다시 ‘한국 메달밭’으로

    레슬링이 7개월 만에 2020년 도쿄올림픽 정식종목 지위를 되찾았다. 지난 2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대회 핵심종목(25개)에서 빠졌던 레슬링이 혁신의 일환으로 손질한 경기 규정은 훈련량이 월등한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IOC는 9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어진 제125차 총회에서 도쿄 대회의 마지막 정식종목으로 레슬링을 선정했다. 레슬링은 유효표 95표 중 과반인 49표를 얻어 야구-소프트볼(24표)과 스쿼시(22표)를 가뿐히 제쳤다. 레슬링은 이로써 지난해 런던올림픽에서 치러진 26개 종목 가운데 도쿄올림픽 핵심종목(25개)에서 유일하게 빠졌다가 골프, 7인제럭비에 이어 마지막으로 정식종목에 복귀, 근대올림픽에서 1900년 제2회 대회를 빼고 줄곧 잃지 않았던 정식종목의 지위를 지켰다. 결국 도쿄올림픽에선 3년 뒤 열릴 리우올림픽과 마찬가지로 런던올림픽 종목에 골프, 7인제럭비를 더한 28개 종목이 치러진다. IOC의 줄기찬 개혁 요구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레슬링은 국제레슬링연맹(FILA)의 수장을 교체했고 조직 개편과 규정 개정 등 전면 개혁에 나서 이번에 성과를 인정받았다. FILA가 지난 5월 임시총회에서 변경한 경기 방식이 먹혀들었다. 2분 3세트제를 3분 2라운드 결과 총점이 높은 선수가 이기는 제도로 9년 만에 돌아갔다. 패시브 벌칙을 적극적인 공격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바꾼 것도 좋은 평가를 낳았다. 이날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자축 행사를 연 대한레슬링협회 김학열 사무국장은 “과거 세트제는 풍부한 리그전으로 경험을 축적한 유럽 선수들에게 유리했다”며 “총점제 부활로 공격적으로 바뀌면서 투지력과 정신력에서 앞서고 많은 훈련 덕에 체력이 강한 우리 선수들에게 유리해졌다”고 말했다. 한국으로선 역대 올림픽에서 금과 은메달 11개씩에 동메달 13개를 안긴 효자종목을 잃지 않게 됐다. 라이벌 종목이 상대적으로 미적댄 것도 레슬링 잔류를 도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끝으로 정식종목에서 제외된 야구와 소프트볼은 양대 기구를 통합하며 관심을 끌었지만 미국 메이저리그(MLB) 사무국이 끝내 버티면서 동력을 잃었다. 한 차례도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한 스쿼시는 테니스와 배드민턴, 탁구 등 라켓 종목이 이미 셋이나 열리는 데다 관중이나 TV 시청자에게 다가가는 노력이 미흡한 것이 감표 요인으로 지적됐다. 도쿄올림픽 핵심종목을 뺀 세 종목은 IOC가 앞으로도 28개 종목 이상을 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운 만큼 언제든 레슬링처럼 지위가 휘청일 수 있어 끊임없는 혁신 압박에 노출돼 있다. 한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의 김진선 위원장 등 6명의 대표단은 이날 IOC 총회에서 경기장 착공·완공 일정, 숙박, 마케팅 등 준비 상황을 프레젠테이션했다고 밝혔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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