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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년 전 파피루스에 언급된 ‘숙취해소법’

    1900년 전 파피루스에 언급된 ‘숙취해소법’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에서 ‘숙취 해소법’과 관련한 내용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런던 옥스퍼드대학과 런던대학교 합동 연구진은 최근 고대 이집트 도시인 옥시링쿠스에서 발견된 1900년 전 파피루스를 연구하던 중 위와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스어로 쓰인 이 파피루스에는 숙취로 인한 두통을 해결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안 월계수(alexandrian laurel)라 부르는 관목의 잎을 사용하는 방법이 소개돼 있다. 이 월계수의 잎사귀를 잘 엮어 이를 목어 걸어주면 증상이 완화된다는 것. 이 파피루스에는 숙취로 인한 두통해소법 외에도 궤양이나 치액, 치통, 병 등을 예방할 수 있는 ‘고대 레시피’ 24개가 빼곡하게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진은 숙취해소 방법이 담긴 파피루스 옆에서 고대 그리스 의사로 알려진 갈레노스 (130-200)와 히포크라테스에 의해 적혀진 것으로 보이는 의서 파피루스 11점을 추가로 발견했다. 연구를 이끈 이집트 파피루스 전문가인 마가렌트 마운트포드 박사는 “이 문서들은 1900년 전 고대 인류의 일상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내포한다”면서 “예컨대 숙취해소를 위해 월계수 잎을 목에 감싸는 방법은 실제 효과가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위약효과(플라시보 효과)가 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파피루스 해석을 담당한 전문가들은 고대 파피루스에 숙취해소법이 언급된 이유에 대해 “고대인들이 물 보다는 와인을 더 많이 마시는 습관 때문에 자주 숙취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 파피루스가 발견된 옥시링쿠스 지역은 지금까지 총 50만 점이 넘는 파피루스가 발견된 고대 도시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돌강이 흐른다…세월을 빚는다

    돌강이 흐른다…세월을 빚는다

    비슬산(琵瑟山, 1084m)은 흔히 ‘대구의 어머니 산’이라 불린다. 대구를 상징하는 팔공산에 빗댄 표현이지 싶다. 산정에는 옹골찬 바위들이 시립해 있고, 비탈을 따라서는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암석들이 널려 있다. 말잔등 같은 능선 위엔 참꽃(진달래) 군락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부드럽게 팔을 뻗은 지맥들은 대구의 들녘과 굽이치는 낙동강을 깊게 껴안는다. 그 위로 석탑 한 기가 다소 힘겨운 듯한 자태로 서 있다. 대견사지 삼층석탑이다. 어렵사리 세월의 강을 건너오느라 외모는 다소 남루해졌지만, 꼿꼿한 기상만은 잃지 않은 듯하다. 비슬산은 4월이 되면 늘 산꾼들의 머릿속을 맴돈다. ‘참꽃’ 때문이다. 해마다 봄이면 정상 아래 너른 고위평탄면에 참꽃이 만든 연분홍 세계가 펼쳐진다. 이 모습 보려고 산꾼들이 그야말로 장사진을 친다. 하지만 비슬산이 산꾼을 불러 모으는 이유는 이뿐 아니다. 세월의 흔적 켜켜이 쌓인 암석들이 펼쳐 낸 ‘장사진’도 꽃 못지 않게 볼 만하다. 비슬산을 ‘암석 전시장’이라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산비탈 바위들이 강물처럼 흐르는 듯… 비슬산은 대구 달성군과 경북 청도군에 걸쳐 있다. 비슬산 휴양림에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오른쪽으로는 암괴류(岩塊流, 천연기념물 제435호)가, 왼쪽으로는 너덜지대가 펼쳐진다. 암괴류는 둥글거나 각진 바위덩어리들이 산비탈이나 골짜기를 따라 아주 천천히 흘러내리면서 쌓인 것을 일컫는다. 바위들이 강물처럼 흐르는 모습을 하고 있어 ‘돌강’ 또는 ‘바위강’이라 부른다. 비슬산 암괴류는 해발 약 1000m의 산정에 터를 잡은 대견사 인근부터 시작된다. 여러 개의 암괴류가 각기 다른 산비탈을 따라 내려오다가 해발 750m 지점에서 합류해 450m 지점까지 이어지는데 길이 약 2㎞, 최대 폭 80여m에 달한다. 세계 최대 규모다. 기이한 형태의 암석들을 병풍처럼 두른 대견사는 개창 연대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연스님이 고려 고종 4년(1227) 22세 때 승과 선불장에 장원급제한 뒤 초임 주지로 22년간 주석하면서 ‘삼국유사’ 집필을 구상한 사찰이기도 하다. 대견사는 일제강점기 때 폐사됐었다. 경내 일곱 건축물의 가람배치(칠당가람, 七堂伽藍)가 일본의 대마도를 바라보는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산정에 높이 앉은 대견사가 째려보는 탓에 일본인의 기가 꺾인다는 것이다. 이후 흔적으로만 남았던 ‘대견사지’ 위에 현재의 대견사가 중창된 건 지난해 3월 1일이었다. 일제에 항거해 만세운동을 벌였던 3·1절에 산문을 열어 강제 폐사의 수모를 씻겠다는 뜻이 담겼다. ●100여년 만에 복원된 신라시대 대견사 절집 앞은 절벽이다. 이 깎아지른 암봉 위로 석탑 한 기가 서 있다. 신라시대 세워진 대견사지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42호)이다. 수차례의 전란과 강제 폐사에 이어 지난 2009년 낙뢰를 맞아 탑 일부가 훼손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옛 모습를 잃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탑 주변은 그야말로 암석 전시장이다. 앞으로는 암괴류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특이한 형상을 한 ‘토르(tor)’도 곧잘 눈에 띈다. 토르는 부분 침식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자잘한 물질은 제거되고 특이한 형태의 모습만 남게 된 대형 화강암이다. 석탑 주변의 거북바위, 부처바위, 형제바위, 스님바위 등이 토르다. 특히 톱(칼)바위는 토르이면서도 비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덜의 형성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대견사 위에서부터 비슬산 정상 아래까지는 고위평탄면이 펼쳐져 있다. 봄이면 참꽃이 무리 지어 피어 방문객을 경탄케 하는 곳이다. 해마다 4월 하순께 절정을 이루는데, 올해는 18일부터 참꽃 축제가 열린다. ●문익점 후손들이 절터에 일군 인흥마을 비슬산의 지맥이 안온하게 감싼 땅 화원읍에 남평 문씨 세거지지인 인흥마을이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후손들이 인흥사 절터 자리에 일군 마을이다. 인흥사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으로 전해지는 절집이다. 마을에 들면 날아갈 듯한 처마의 한옥들과 세월의 흔적이 더께로 쌓여 있는 돌담길, 그리고 오래된 나무들이 단박에 이방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 주는 살림집과 재사, 문고 등이 돌담을 경계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대부분의 집들은 문이 잠겼다.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흙을 이겨 만든 돌담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수백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른 듯한 정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관광객을 위해 문을 연 집은 종가인 죽헌종택과 수백당이다. 특히 노송과 어우러진 수백당의 정취는 정말 일품이다. 주로 손님을 맞거나 일족의 모임 장소로 이용됐던 곳으로, ‘우물 정’(井)자 형태의 우물과 대나무로 경계를 이룬 뒷간 등이 옛 건물과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마을의 가장 안쪽에 터를 잡은 광거당(廣居堂)에도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 등 볼거리가 많지만 아쉽게도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 있다. ●천리마 한 쌍의 전설 깃든 마비정 벽화마을 인흥마을에서 산자락을 거슬러 오르면 마비정(馬飛亭) 벽화마을이다. ‘비무’와 ‘백희’ 등 천리마 암수 한 쌍의 애달픈 전설이 깃든 마을이다. 대도시 대구에 속해 있지만, 대중교통이라곤 하루 8번 운행하는 군내버스가 고작일 정도로 도심 속 오지로 꼽히기도 한다. 마을에 들면 토담을 따라 그려진 벽화들이 외지인을 맞는다. 쟁기질하는 황소, 난로 위에 도시락을 빼곡하게 올려놓은 옛 교실 풍경 등 향수를 자극하는 벽화들이다. 200년 된 초가집과 동네 할머니들이 음료수와 과자 등을 파는 이른바 ‘점방’도 시선을 끈다. 화원읍 낙동강 변의 사문진나루터는 우리나라 최초로 피아노를 들여온 장소다. 마비정 벽화마을에서 15분 남짓한 거리다. 안내판은 1900년 3월 대구에 온 미국인 선교사 사이드보탐 부부가 미국에서 가져온 피아노를 배편으로 사문진나루터까지 싣고 온 뒤 대구 시내 사택으로 옮겼다고 적고 있다. 당시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은 지역 주민들은 빈 나무통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 ‘귀신통’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를 기념해 ‘귀신통 납시오’란 조형물과 피아노 장승 등도 세웠다. 사문진나루터는 1932년 나운규 주연의 ‘임자 없는 나룻배’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명화’로 꼽히는 ‘임자 없는 나룻배’는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정신과 리얼리즘이 결합된 우리 영화의 대표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기념하는 조각상이 나루터 초입에 세워져 있다. 글 사진 대구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3) →가는 길 : 비슬산 대견사는 중부내륙고속도로 현풍나들목으로 나가 현풍·비슬산자연휴양림 방향으로 좌회전한 뒤 이정표대로 따라가면 된다. 인흥마을, 마비정 마을 등을 먼저 보겠다면 중부내륙고속도로 지선인 화원·옥포 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낫다. 직선거리로는 남대구나들목이 가깝지만 대구 시내를 관통해야 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비슬산 휴양림에서 대견사까지는 ‘반딧불이 전기차’를 타고 오른다. 휴양림 주차장에서 대견사 입구까지 5.8㎞를 운행한다. 소요시간은 편도 30분으로 길다. 급경사와 급커브가 반복되는 산길이라 속도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요금은 어른 5000원, 어린이 3000원(이상 편도)이다. 비슬산 자연휴양림 614-5481. 휴양림에서 걸어서 대견사까지 오르는 건 편도 1시간 30분 이상 소요된다. 대견사 뒤편의 능선에 진달래가 본격적으로 피기 시작하는 이달 말부터는 교통 체증을 연상시킬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맛집 : 달성에서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현풍면의 곰탕이다. 현풍면 성하리 인근에 원조 현풍할매집곰탕(614-2031) 등 곰탕집들이 몰려 있다. 화원읍 천내리의 교동면옥(634-9222)은 진주식 냉면을 내는 맛집이다. 대구 시내 쪽에선 안지랑 곱창골목이 유명하다. 푸짐한 돼지곱창구이를 내는 집들이 길 양쪽으로 40여곳이나 늘어서 있다. 이곳의 가게들은 재료를 공동으로 구매한다. 구입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 덕에 매콤한 양념의 돼지곱창 한 바가지를 불과 1만원 안팎에 맛볼 수 있다. 북성로 철물 공구 골목은 밤이면 포장마차촌으로 변한다. 얇게 저민 돼지고기를 연탄에 구워 먹는 불고기집들이 많다. →잘 곳 : 달성 쪽에선 비슬산자연휴양림을 추천할 만하다. 다양한 형태의 숙소가 진달래 핀 산자락 속에 조성돼 있다. 가창면 삼산리, 성서공단 등에 모텔들이 있지만 낡거나 유흥가와 인접해 만족도는 떨어질 수 있다. 가족단위 여행객이라면 대구 시내에서 숙소를 찾는 게 낫다. 호텔인터불고 대구, 노보텔앰배서더 대구 등 특급호텔을 비롯해 엘디스리젠트호텔, 호텔대구, 대구그랜드호텔, 프린스 호텔 등 수준급 숙소가 있다.
  • [기고] 시간선택제, 혁신사회로 가는 길/오호영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

    [기고] 시간선택제, 혁신사회로 가는 길/오호영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로마의 1년 휴일은 120일 전후, 하루 노동시간은 7시간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중세 수도원의 하루 노동시간은 6시간 내외였다. 100년 전 한국 머슴들 역시 연간 200일 정도만 일했다는 연구도 있다. 그런데 지금의 노동시간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다. 산업혁명의 영향이 크다. 다행히 근로시간은 꾸준히 감소해 왔다. 미국의 경우 생산직 근로자의 주당 근로시간은 1900년 55시간에서 현재 34시간 수준으로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3년 기준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은 2079시간으로 멕시코의 2237시간에 이어 2위다. OECD 회원국 평균은 1712시간이고, 가장 짧은 나라인 네덜란드는 1380시간, 독일은 1388시간이다. 주 40시간 근로로 볼 때 우리는 네덜란드보다 19.5주, 약 5개월 더 일하는 셈이다. 그런데 근로시간이 짧은 네덜란드나 독일이 우리보다 잘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규 근로시간, 휴가일수, 야근문화, 휴일근무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시간제근로 보급 면에서 차이가 두드러진다. 2013년 기준 전체 취업자 중 시간제근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네덜란드 38.7%, 독일 22.4%이다. 반면 한국은 11.1%에 불과하다. OECD 회원국 평균 16.8%와 비교해도 크게 낮다. 이들 국가가 짧게 일하면서도 높은 소득을 누리는 것은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부가가치는 생산 과정이 아닌 혁신에서 비롯되고 있고 혁신의 주체가 되는 개인의 일과 삶이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소수의 정규 근로자가 장시간 일하는 1960~70년대의 성공 도식은 더이상 효과가 없다. 정규 근로자의 근로부담을 줄이면서 노동시장 외부의 우수한 인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하루 8시간, 주당 40시간이라는 고정된 근로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간제의 적극적인 활용이 필요하다.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가 확대되면 출산, 육아, 학습, 돌봄, 건강, 은퇴 및 창업 준비 등으로 전일제 근로가 어려운 인력이 노동시장에 남을 수 있게 되고 우수 인력이 노동시장에 유입된다. 시간제를 한시적 일자리가 아닌, 제대로 된 일자리로 만드는 노력도 필요하다. 시간제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전일제 근로자보다 짧게 일하지만 근로조건 등에 차별이 없는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시간제 근로자가 전일제 근로자보다 생산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듯 성수기, 피크타임에 인력을 집중 활용하면 생산성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기존 근로자의 피로도가 낮아지므로 업무 집중도를 높일 수 있으며 산업재해도 예방할 수 있다. 핵심 인력의 이직을 막을 수 있어 효율적인 인력 운영도 가능해진다. 시간제 확대로 일자리의 질이 전체적으로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잘만 활용하면 경제 활성화를 통해 일자리 총량을 늘리는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 장시간 근로에서 벗어나 혁신 사회로 진입하려면 시간선택제를 확대해 사장되고 있는 우수 인력을 적극 활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프로야구 개막전 시구의 사회학] 때론 정치적, 때론 감동적… 공 하나에 메시지를 담다

    [프로야구 개막전 시구의 사회학] 때론 정치적, 때론 감동적… 공 하나에 메시지를 담다

    시구(始球)는 영어로 ‘퍼스트 볼’(first ball)이다. 한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공이지만, 선수가 아닌 외부 인사가 던지기 때문에 ‘초구’(初球·first pitch)와 구분된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1900년대 초반부터 시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KBO리그도 원년인 1982년부터 시구가 행해졌다. 특히 시즌의 시작인 개막전에서 시구를 하는 것은 큰 영예다. 28일 5개 구장에서 2015시즌 개막전이 일제히 열리는 가운데 눈에 띄는 인사가 시구자로 선정돼 눈길을 끈다. 롯데와 kt가 맞붙는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고(故) 최동원 선수의 모친 김정자 여사가 시구를 한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거두며 롯데에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안긴 최동원은 부산은 물론 한국 야구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삼성-SK전이 열리는 대구구장에서는 삼성의 원년 어린이 회원 출신 팬 박용현씨 가족이 시구와 시타, 시포를 맡았다. 두산-NC의 잠실 경기는 걸그룹 ‘AOA’의 지민, 찬미가 시구와 시타를 하고, KIA-LG의 광주 경기에서는 윤장현 광주시장과 초등학생 임지용 군이 함께 시구할 예정이다. 넥센과 한화가 맞붙는 목동에서는 걸그룹 ‘포미닛’의 전지윤이 시구자로 선정됐다. 올해 개막전에는 선수 가족과 팬, 연예인 등 다양한 계층이 시구의 영광을 안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개막전 시구는 대통령이나 장관, 지방자치단체장 등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다. KBO리그 출범 첫해인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MBC와 삼성의 개막전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시구를 했고, 이듬해에는 이원경 체육부 장관이 나섰다. 1984년에는 정선호 차관과 염보현 서울시장, 김찬회 인천시장이 각각 3개 구장에서 공을 던지며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역대 시구자 명단을 보면 1982~1995년 개막전 시구를 한 41명 중 35명(85.4%)이 정치인이다. 대통령이 2명, 체육부 장차관 7명, 지방차지단체장 24명, 국회와 지방의회 인사 2명이었다. 정치인들은 얼굴을 팔고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시구를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면서 시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989년 해태-빙그레의 광주 개막전에서 영화배우 강수연이 김집 체육부 장관과 함께 연예인 중 처음으로 마운드에 섰다. 강수연은 2008년 10월에도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삼성의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시구를 했다. 1998년에는 나가노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안상미가 다른 종목 스포츠 선수로는 최초로 개막전 시구를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시구자 면면이 한층 다양해졌다.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가 없는 장애를 안고 미국으로 입양된 애덤 킹이 2001년 두산-해태 잠실전에서 아홉 살의 나이로 의족을 단 채 시구를 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2002년과 2004년에는 ‘불사조’ 박철순과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이름을 알린 감사용 등 은퇴한 선수들이 시구자로 나서 옛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2006년에는 한국계 미국 프로풋볼(NFL) 스타 하인스 워드와 여덟 살에 인하대에 입학해 국내 최연소 대학생이 된 송유근군이 개막전 시구자로 초청받았다. 지난해 개막전에는 ‘빙속여제’ 이상화가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LG전에 시구자로 나서 눈길을 끌었다. 각 구단은 이색적인 시구자 외에도 다양한 이벤트로 시즌 첫 경기를 찾은 팬들을 즐겁게 한다. 롯데는 개막전에서 고급 외제 승용차를 경품으로 내걸었다. KIA는 걸그룹 ‘여자친구’와 강남-치타의 공연을 준비했고, 현대자동차그룹 오케스트라(HPO)가 경기 개시 음악 ‘전쟁의 서막’을 연주한다. 넥센은 태권도 시범공연과 ‘턱돌이’와 함께할 새 마스코트를 선보인다. 삼성은 ‘라이온즈 메모리홀’을 운영하며 대구구장의 마지막 해를 기념하고, 두산은 9명의 두산 팬이 선수와 함께 입장하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겨우내 야구를 기다려 온 팬들의 치열한 티켓 경쟁으로 5개 구장 모두 온라인 예매분은 거의 동난 상태다. KBO는 올 시즌 관중 목표를 850만명으로 잡았다. 역대 최다인 2012년의 715만 6157명보다 훨씬 많다. 10구단 kt의 가세로 경기 수가 576경기에서 720경기로 크게 늘었고, ‘야신’ 김성근 한화 감독의 복귀 등 흥행 요소가 많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500년 비밀 풀어보니 미라의 정체는 3살 여아

    500년 비밀 풀어보니 미라의 정체는 3살 여아

    잔뜩 몸을 움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페루 어린이 미라의 나이와 성별이 확인됐다. 미국 신시내티박물관은 페루 어린이 미라의 나이가 약 3살로 추정된다며 성별은 여자로 판명됐다고 최근 밝혔다. 신시내티박물관에선 전시회 '세계의 미라'가 열리고 있다. 내달 26일까지 계속되는 전시회에선 페루에서 발견된 어린이 미라도 관객을 만나고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정밀검사 결과 어린이 미라의 뼈와 장기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며 외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질병의 흔적도 미라엔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영양분이 부족한 것으로 확인돼 영양실조가 유력한 사인으로 추정됐다. 어린이 미라는 20세기 중반 리마로부터 약 25km 떨어진 엘시마에서 발견됐다. 엘시마는 기후가 덥고 건조한 곳이다. 현지 언론은 "사망한 어린이가 특별한 방법으로 매장되진 않았지만 특유의 덥고 건조한 기후가 자연 미라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미라는 그간 비밀을 품고 있었다. 약 500년 된 미라로 추정됐지만 그간 나이와 성별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라를 훼손하지 않으면 정밀조사가 불가능했던 1900년대 기술의 한계 때문이었다. 어린이 미라는 1978년 한 남자에 의해 미국 샌디에고의 인류박물관에 기증됐다. 이후 줄곧 어린이 미라를 보관해온 샌디에고 인류박물관은 지난 1월 신시내티로 미라를 옮겼다. 신시내티박물관이 기획한 미라 전시회를 위해서다. 어린이 미라의 비밀은 여기에서 벗겨졌다. 신시내티박물관은 전시회를 앞두고 현지 병원과 협력해 단층촬영을 통해 미라의 나이와 성별을 밝혀냈다. 미라가 발견된 지 약 40년 만이다. 신시내티 박물관 관계자는 "나이와 성별을 밝혀졌지만 아직은 어린이 미라가 우리에게 할 말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디아리오코아우일라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서울 정릉 재실 복원…15억 들여 복원한 모습 보니

    서울 정릉 재실 복원…15억 들여 복원한 모습 보니

    서울 정릉 재실 복원…15억 들여 복원한 모습 보니 ‘서울 정릉 재실 복원’ 서울 정릉 재실이 3년 만에 복원됐다.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는 23일 “1960년대 멸실됐던 서울 정릉의 재실(齋室·제사를 준비하거나 왕릉 담당 관리들이 머물던 곳)을 3년 만에 복원 완료했다”고 밝혔다. 복원된 서울 정릉 재실은 25일 오전 10시 기념행사를 통해 처음 공개될 예정이다. 정릉은 조선 초대 왕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으로, 원래는 중구 정동에 있었다. 당시 규모는 현재보다 크고 화려했지만 태조의 정비였던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고 태조가 승하하면서 1409년 현재 자리로 이장됐고 능의 규모도 대폭 축소됐다. 이후 폐허처럼 방치됐던 정릉은 1669년에 정비, 1900년에 재실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초석만 남은 채 1960년대 멸실됐다. 문화재청은 2009년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능제복원 차원에서 2012년 재실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 6칸 규모의 재실터와 건물 배치 등 양호한 형태의 유구를 확인했다. 이런 결과와 사료를 근거로 2012년부터 3년간 총 사업비 15억원을 투입해 정릉 재실의 본채, 제기고, 행랑, 협문(3개소)과 담장 등을 복원했다. 문화재청은 “재실 복원을 통해 조선 왕릉이자 세계유산으로서 정릉의 진정성을 회복하고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국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 창출을 통해 그 본연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 정릉 재실 복원…멸실됐던 사연은?

    서울 정릉 재실 복원…멸실됐던 사연은?

    서울 정릉 재실 복원…멸실됐던 사연은? ‘서울 정릉 재실 복원’ 서울 정릉 재실이 3년 만에 복원됐다.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는 23일 “1960년대 멸실됐던 서울 정릉의 재실(齋室·제사를 준비하거나 왕릉 담당 관리들이 머물던 곳)을 3년 만에 복원 완료했다”고 밝혔다. 복원된 서울 정릉 재실은 25일 오전 10시 기념행사를 통해 처음 공개될 예정이다. 정릉은 조선 초대 왕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으로, 원래는 중구 정동에 있었다. 당시 규모는 현재보다 크고 화려했지만 태조의 정비였던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고 태조가 승하하면서 1409년 현재 자리로 이장됐고 능의 규모도 대폭 축소됐다. 이후 폐허처럼 방치됐던 정릉은 1669년에 정비, 1900년에 재실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초석만 남은 채 1960년대 멸실됐다. 문화재청은 2009년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능제복원 차원에서 2012년 재실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 6칸 규모의 재실터와 건물 배치 등 양호한 형태의 유구를 확인했다. 이런 결과와 사료를 근거로 2012년부터 3년간 총 사업비 15억원을 투입해 정릉 재실의 본채, 제기고, 행랑, 협문(3개소)과 담장 등을 복원했다. 문화재청은 “재실 복원을 통해 조선 왕릉이자 세계유산으로서 정릉의 진정성을 회복하고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국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 창출을 통해 그 본연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 정릉 재실 복원…25일 공개될 모습 미리 봤더니

    서울 정릉 재실 복원…25일 공개될 모습 미리 봤더니

    서울 정릉 재실 복원…25일 공개될 모습 미리 봤더니 ‘서울 정릉 재실 복원’ 서울 정릉 재실이 3년 만에 복원됐다.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는 23일 “1960년대 멸실됐던 서울 정릉의 재실(齋室·제사를 준비하거나 왕릉 담당 관리들이 머물던 곳)을 3년 만에 복원 완료했다”고 밝혔다. 복원된 서울 정릉 재실은 25일 오전 10시 기념행사를 통해 처음 공개될 예정이다. 정릉은 조선 초대 왕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으로, 원래는 중구 정동에 있었다. 당시 규모는 현재보다 크고 화려했지만 태조의 정비였던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고 태조가 승하하면서 1409년 현재 자리로 이장됐고 능의 규모도 대폭 축소됐다. 이후 폐허처럼 방치됐던 정릉은 1669년에 정비, 1900년에 재실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초석만 남은 채 1960년대 멸실됐다. 문화재청은 2009년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능제복원 차원에서 2012년 재실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 6칸 규모의 재실터와 건물 배치 등 양호한 형태의 유구를 확인했다. 이런 결과와 사료를 근거로 2012년부터 3년간 총 사업비 15억원을 투입해 정릉 재실의 본채, 제기고, 행랑, 협문(3개소)과 담장 등을 복원했다. 문화재청은 “재실 복원을 통해 조선 왕릉이자 세계유산으로서 정릉의 진정성을 회복하고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국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 창출을 통해 그 본연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대학로 문화지구/서동철 논설위원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는 1900년 시어터 리퍼블릭이 대형 극장으로는 처음으로 문을 열면서 전성기가 시작됐다고 공연예술의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극장은 벨라스코 극장과 빅토리아 극장이라는 이름을 거쳐 현재는 뉴빅토리 극장으로 불린다. 1903년 동시에 개관한 리시엄 극장과 뉴암스테르담 극장도 여전히 ‘더 비짓’과 ‘알라딘’을 각각 장기 공연하고 있는 ‘현역’이다. 1920년대 브로드웨이의 대형 상업 극장은 80개까지 늘어나지만, 이후 줄어들어 현재는 30개 남짓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브로드웨이의 공연 문화가 쇠퇴한 것은 아니다.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 잡은 대형 극장 건물주들이 더 나은 수익을 기대하며 업종을 전환했을 뿐이다. 브로드웨이 공연 문화는 오프 브로드웨이와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를 포괄한다. 브로드웨이가 상업화로 치닫자 예술성을 추구하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외곽에 생겨난 것이 오프 브로드웨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프 브로드웨이의 상업성 또한 짙어지자 실험성 강한 예술인들은 다시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로 나갔다. 단계적 개념이 형성된 것은 공공기관의 지원도 한몫했다. 당국은 500석 이상의 극장은 브로드웨이, 100~499석은 오프 브로드웨이, 99석 이하는 오프 오프 브로드웨이로 규정해 세금 및 지원금에서 차등을 두었다. 3단계 개념이 극장의 물리적 위치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예술성에 대한 열망이 강한 극장일수록 외곽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이다. 문화의 거리가 형성되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치솟은 부동산 값에 밀려난 문화는 다시 외곽에 재편되기 마련이다. 전통 문화의 거리 인사동이 그렇고, 인디밴드 문화의 본거지인 홍대앞이 그렇다. 상업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진 전통 문화와 인디 문화는 벌써부터 카페와 레스토랑, 옷과 신발 가게, 화장품과 장신구 가게로 대치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사동 문화는 삼청동으로 흘러가고 서촌으로 넘어가면서 대형 전통 문화권으로 발전하고 있고, 홍대앞 특유의 문화 역시 분위기를 주변으로 크게 넓혀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제 신문에는 ‘대학로는 죽었다’면서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에서 시위를 벌이는 연극인들의 사진이 실렸다. 동네 터줏대감인 대학로극장이 호되게 오른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을 위에 몰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학로를 ‘문화지구’로 지정한 정부에도 반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문화지구 정책은 브로드웨이처럼 문화가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것을 막고 있다. 지금처럼 문화가 집중된 곳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가 없는 곳, 있어야 할 곳을 문화지구로 지정해야 한다. 상업화한 대학로는 시장 원리에 맡기고, 또 하나의 연극 거리가 형성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새로운 문화지구 정책이 필요하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뉴스 플러스] IS, 끝없는 ‘아시리아 유적’ 파괴

    이슬람 급진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고대 유산 훼손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라크 당국은 5일(현지시간) IS가 이라크 북부에 있는 ‘님루드’의 유적을 불도저를 동원해 파괴했다고 밝혔다. 님루드는 기원전 900년 티그리스강 인근에 세워진 고대 아시리아의 두 번째 수도로, 1980년대 님루드의 왕조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은 20세기 고고학사에서 기념비적인 것으로 꼽힌다.
  •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곡물 조·기장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곡물 조·기장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밀렛’(millet)은 벼의 사촌격으로 알갱이가 작은 곡식 종류를 통틀어 말한다. 한자어로는 ‘서속’(黍粟)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 기장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밀렛류는 조와 기장이지만 세계 생산량으로 보면 진주조와 조, 기장, 손가락조 등을 의미한다. 또 일부 국가에서 중요한 식량인 피, 코도, 포니오, 기니, 테프 등도 밀렛에 해당된다. 조, 기장 등의 밀렛류는 인류 농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신석기 시대부터 유라시아와 중국 북부 지역, 한반도 등에서 재배됐다. 중국의 초기 신석기인 ‘츠산문화 유적지’(기원전 8300~6700년)에서 기장의 껍질과 기장 재배와 관련된 석기가 발견됐다. 기원전 2400~1900년 전 ‘제가 문화 유적지’에서는 기장과 조를 섞어 만든 인류 최초의 국수도 나왔다. 유럽에서는 중세 시대 빵이 전파되기 전까지 기장죽이 서민들의 주식이었다. 한반도에서 조, 기장 재배는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부산 영도구 동삼동의 패총에서 발견된 불에 탄 조 75알과 기장 16알의 방사선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신석기 중기인 기원전 3360년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반도에서 농경이 신석기 중기에 시작됐고 지역적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조와 기장은 쌀이 우리 밥상을 차지하기 전까지 우리의 주식이었다. 조는 해방 직후인 1940년대까지 벼 다음으로 재배 면적이 많을 정도로 중요한 곡식이었다. 전통문화 속에 조, 기장과 관련된 문화와 속담, 음식도 풍부하다. 일례로 사극에서 국가를 이르는 말인 ‘종묘사직’(宗廟社稷)에는 기장이라는 곡식이 숨어 있다. 종묘는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을 뜻한다. 이때 직(稷)은 기장을 뜻하는 한자어다. 조와 관계된 재미있는 어원과 속담도 많이 있다. 우리가 답답할 때 자주 쓰는 말 ‘조바심’에서 ‘바심’은 ‘타작한다’라는 뜻의 우리말이다. 수확된 조를 비벼서 알곡을 떼어내는 과정인 조타작은 막상 해보면 좀처럼 비벼지지 않고 힘이 든다. 그래서 생각만큼 되지 않아 마음이 조급해지고 초조해지기 쉬운 상태를 ‘조바심’이라고 한다. 경남 지방에는 ‘조밭을 맬 때는 부부 간에 싸워야 날 수가 난다(수량이 많아진다)’는 말도 있다. 소립종자인 조는 빡빡하게 심는 경우가 많아 싹이 올라온 후 과감하게 솎음 작업을 해줘야 한다. 부부 싸움에 대한 분풀이를 하듯 마구 솎음질을 해줘야 채광 통풍이 잘되고 병충해 발생도 적어진다. 밀렛은 전통 음식문화와도 관련이 많다. 밀렛과 관련된 음식으로는 오곡밥을 빼놓을 수 없다. 오곡은 시대에 따라 그 종류가 조금씩 바뀌어왔다. 다만 오곡 중 조, 기장, 수수가 빠진 적은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벼, 보리, 콩, 피, 기장을 뜻했고, 지금은 찹쌀, 차수수, 검은콩, 차조, 팥으로 오곡밥을 만든다. 오곡밥 외에도 밭이 농경지의 전부인 제주도에는 전통적으로 ‘흐린조’(차조)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문화가 발달했다. 그중 대표적인 음식인 오메기떡은 차조를 반죽해 도넛 모양으로 만든 떡이다. 오늘날 오메기떡은 소비자 기호를 고려해 찹쌀과 팥을 이용한 퓨전 형태의 떡으로 변화했다. 존재감 없던 밀렛이 최근에는 슈퍼푸드로 재조명받고 있다. 건강 곡물로 잘려진 현미 등의 통곡물보다 영양과 기능면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다. 밀렛류는 다른 곡물보다 곡식의 알갱이가 작아 배아와 ‘호분층’(단백질 알갱이가 모여있는 세포층) 비율이 높다. 이는 같은 양을 섭취했을 때 밀렛류가 상대적으로 단백질, 식이섬유, 여러 가지 미량 원소를 더 섭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밀렛류는 곡류 중 단백질 함량이 9~12%로 높고(쌀 6%, 현미 7%), 식이섬유와 미네랄 함량도 풍부하다. 식이섬유는 쌀에 비해 3~10배, 칼슘 3~5배, 철분은 3배가량 더 많다. 베타카로틴 함량도 많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아프리카와 인도, 네팔 등에서 많이 먹는 손가락조(finger millet)는 밀렛 가운데 칼슘 함량이 월등히 많다. 조의 10~20배, 쌀의 30~100배에 해당하는 양이 들어있다. 비타민 B도 풍부하다. 밀렛에는 티아민(비타민 B1), 리보플라빈(B2), 니아신(B3) 등이 모두 함유돼 있다. 그 외에 폴리페놀과 피트산 등의 항산화물질도 많다.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당뇨 예방에 뛰어나다. 이런 장점 때문에 밀렛을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섭취하는 경향도 강하다. 밀렛류는 선진국에서 영양가가 높은 작물의 종류에 불과하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곡물이다. 선진국에서는 영양 과다와 비만 등으로 대사증후군이 증가하고 있는 반면 세계 인구의 9억명은 기아, 20억명은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사망하는 어린이 중 절반인 500만명 이상이 영양 부족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런 국가에서는 조, 기장, 피 등의 밀렛이 매우 중요한 식량 작물이다. 밀렛은 고온에서도 벼나 밀에 비해 성장이 좋을 뿐 아니라 필요한 물의 양도 적다.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는 뜻이다. 인류 역사의 가장 오래된 곡물이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곡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고지연 농촌진흥청 밭작물개발과 농학박사 ■문의 golders@seoul.co.kr
  • 강릉선교장 태극기 문화재 등록 예고

    강릉선교장 태극기 문화재 등록 예고

    문화재청은 25일 ‘강릉 선교장 소장 태극기’를 문화재 등록 예고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현존 형태와 역사적 유래, 4괘와 태극문양의 위치, 제작 방식, 게양 방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역사성과 희귀성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강원도 강릉 선교장 태극기는 1900년 전후 제작돼 1908년 선교장 내 설립된 근대식 학교 동진학교에 보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탄압으로 폐교 뒤 광복 때까지 땅속에 묻혀 있다 광복 후 하나는 임시정부에 기증됐고 하나는 선교장에서 보관해 오다 지난해 발견됐다.
  • 세계 최초 컬러 영화 만든 카메라 경매 나온다

    세계 최초 컬러 영화 만든 카메라 경매 나온다

    영화 역사상 가장 의미가 깊은 카메라가 경매에 나올 예정이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21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번에 공개된 카메라는 1908년 역사상 처음으로 컬러 영화를 찍기 시작했을 때 사용됐던 것으로 1906년에 제작된 키네마컬러 카메라다. 이 카메라는 현존하는 키네마컬러 카메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개인 수집가가 보관하다 최근 경매에 나왔다. 경매 진행업체 측은 이 카메라의 예상 낙찰가를 최소 2만 파운드(약 3400만원) 상당으로 보고 있다. 2012년에는 이 카메라로 촬영한 런던의 1900년대 초반 모습이 공개돼 눈길을 사로잡은 바 있다. 당시 영상은 런던의 거리 모습과 어린이 3명이 집 뒤뜰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이를 찍은 사람은 무명의 사진작가였던 에드워드 레이몬드 터너로, 그는 천연색 영화(테크니컬러, Technicolor) 기술이 발명되기 10여 년 전 키네마컬러 기술로 영상을 촬영했다. 터너는 빨강, 초록, 파랑의 필터를 통해 연속적으로 프레임을 만든 후 이미지를 겹쳐 촬영하는 방법으로, 영상에 등장하는 세 어린이는 터너의 자녀들이다. 당시 터너가 개발한 이 기술은 ‘키네마컬러’ 기술로 재탄생해 1906년 특허를 획득했고, 이후 세계 최초의 컬러 제작 기술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키네마컬러 필름은 터너의 후원자였던 찰스 어반이 보유하다 1937년 영국 과학박물관이 보관해왔다. 컬러영화의 ‘산 증인’으로 평가받는 키네마컬러 카메라의 경매는 올해 하반기 영국 런던에서 열릴 예정이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세계 최초 ‘컬러 영화 카메라’ 경매 나온다

    세계 최초 ‘컬러 영화 카메라’ 경매 나온다

    영화 역사상 가장 의미가 깊은 카메라가 경매에 나올 예정이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21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번에 공개된 카메라는 1908년 역사상 처음으로 컬러 영화를 찍기 시작했을 때 사용됐던 것으로 1906년에 제작된 키네마컬러 카메라다. 이 카메라는 현존하는 키네마컬러 카메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개인 수집가가 보관하다 최근 경매에 나왔다. 경매 진행업체 측은 이 카메라의 예상 낙찰가를 최소 2만 파운드(약 3400만원) 상당으로 보고 있다. 2012년에는 이 카메라로 촬영한 런던의 1900년대 초반 모습이 공개돼 눈길을 사로잡은 바 있다. 당시 영상은 런던의 거리 모습과 어린이 3명이 집 뒤뜰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이를 찍은 사람은 무명의 사진작가였던 에드워드 레이몬드 터너로, 그는 천연색 영화(테크니컬러, Technicolor) 기술이 발명되기 10여 년 전 키네마컬러 기술로 영상을 촬영했다. 터너는 빨강, 초록, 파랑의 필터를 통해 연속적으로 프레임을 만든 후 이미지를 겹쳐 촬영하는 방법으로, 영상에 등장하는 세 어린이는 터너의 자녀들이다. 당시 터너가 개발한 이 기술은 ‘키네마컬러’ 기술로 재탄생해 1906년 특허를 획득했고, 이후 세계 최초의 컬러 제작 기술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키네마컬러 필름은 터너의 후원자였던 찰스 어반이 보유하다 1937년 영국 과학박물관이 보관해왔다. 컬러영화의 ‘산 증인’으로 평가받는 키네마컬러 카메라의 경매는 올해 하반기 영국 런던에서 열릴 예정이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해외여행 | 멕시코의 마법사들 Magic Cities in Jalisco, Mexico①매직시티 Pueblo Magico

    해외여행 | 멕시코의 마법사들 Magic Cities in Jalisco, Mexico①매직시티 Pueblo Magico

    내가 아는 세상의 가장 근사한 마법은 사랑이다. 그리고 두 번째 마법은 여행이다. 멕시코 서부의 할리스코주를 여행하는 동안 3개의 매직시티를 방문했고, 도처에서 마법사들을 만났다. 매직시티 Pueblo Magico 멕시코에서의 ‘마술같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2001년 멕시코 정부가 주도한 프로그램으로 현재 83개의 도시가 매직시티로 지정되어 있다. 멕시코의 역사, 전설, 상징, 축제와 전통을 간직한 작은 도시들은 해변휴양지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멕시코의 내밀한 속살을 보여 준다. 매직시티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심의 전깃줄을 모두 지중화해야 하고 공공장소에 무료 와이파이를 설치하는 등 도시정비와 편의시설 확충을 진행해야 한다. 취재를 위해 방문했던 할리스코Jalisco주에는 총 5개의 매직시티(산 세바스티안 델 외스테, 타팔파, 테킬라, 라고스 데 모레노, 마사미틀라)가 있는데, 그중 3곳을 방문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Pueblo Magico Ⅰ San Sebastian del Oeste 산 세바스티안 델 외스테 산골 마을의 금빛 추억들 300년 동안 금과 은이 쏟아지던 광산도시의 부귀영화는 사그러들었지만 꺼지지는 않았다. 스스로 반짝반짝 빛나는 방식을 선택한 매직 시티는 보석처럼 귀하다. 어느새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해변의 휴양도시 푸에르토 바야르타를 출발해 시에라마드레 산중으로 접어들었다는 신호다. 졸음에 겨워 누웠더니 돌덩이들의 비명이 귓가를 스쳐가는 듯 생생하다. 그렇게 도착한 해발 1,650m의 고원에는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 있었다. 불과 한시간 반 전에 머물렀던 도시와 전혀 다른 풍경. 일단 공기부터가 달았다. 여전히 쨍쨍한 햇볕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훨씬 상쾌해졌다. 산 세바스티안 델 외스테는 1605년부터 금과 은을 캐어 온 노다지 땅이었다. 1785년쯤에는 25개 이상의 광산이 세워졌고 1900년대에는 주민이 2만명에 육박했을 정도였다. 유명한 휴양도시인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당시 이 마을로 오기 귀한 관문에 불과했다니 격세지감이 크다. 1910년 멕시코 혁명 이후 쇠퇴하기 시작해 이제는 인구 600여 명의 고즈넉한 마을이 됐지만 그렇다고 을씨년스러운 폐광촌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바로크 양식으로 세워진 교회 건물은 산중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우아하고 석재와 석회질 점토로 세운 오래된 건물들이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 채굴한 금과 은, 동을 보관하던 건물은 현재 파벨론 호텔Pabellon Hotel로 사용되고 있는데 건물 뒤로 돌아가면 경비병들이 숨어서 망을 보던 망루가 아직도 건재하다. 오래된 풍경 사이로 동네 주민을 태운 말들이 말발굽을 또각거리며 지나갈 때, 이곳이 매직시티로 지정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을은 작지만 하루 정도의 나들이에 최적화되어 있다. 하나하나 다 들러 보고 싶은 레스토랑, 바, 카페들이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멕시코 전통요리를 먹고 싶다면 레스토랑 ‘라 루피타La Lupita’를, 좀더 익숙한 요리를 원한다면 이탈리아 출신의 부부가 운영하는 ‘몬테벨라Montebella’를 추천한다. 후식으로는 마을의 명물인 100% 천연 아이스크림을 강추한다. 그리고 커피는! 커피만을 위한 장소는 따로 있다. 마을 초입에 위치한 ‘카페 데 알투라Cafe de Altura’는 5대째 대를 이어오고 있는 커피농장이다. 커피나무 사이로 걸어 들어가니 온통 벌레투성이. 지난 125년 동안 농약 한 번 치지 않은 유기농 농장임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한 해 생산하는 아라비카종과 로부스타종을 모두 합치면 30톤 정도인데, 인근에서 다 소진되기 때문에 마을 밖으로 빠져 나갈 틈이 없다. 그 자체로 유물이라고 할 만큼 낡은 로우스팅 기계는 여전히 바쁘게 원두를 볶으며 변함없는 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가업을 잇고 있는 라파엘 산체스Rafael Sanchez씨는 어머니 마리아씨가 개발한 여러 가지 디저트도 함께 상품화해서 판매하고 있었다. 신선한 유기농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의 궁합 앞에 지갑이 환히 열렸지만 짐이 될까 봐 한 봉지밖에 구입하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 Cafe de Altura San Sebastian del Oeste, Jalisco +52 322 297 2845 에스프레소 원두 1kg 180페소 산 세바스티안 컬처 투어 +52 322 132 5417 www.tourculturalsansebastian.com ●Pueblo Magico Ⅱ Tapalpa 타팔파 여전히 꼿꼿한 멕시코의 자부심 200년 이상 태어난 자리를 지켜 왔던 타팔파의 가옥들은 이 마을에 대한 힌트다. 굳게 닫혀 있지만 두들기면 쉽게 열린다. 그 안에 진짜 멕시코와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타팔파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였다. 나무 기둥 위에 타일로 지붕을 얹고 벽을 하얀색과 붉은 색으로 나눠서 칠한 집들은 17~18세기부터 이어온 역사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1650년대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세운 산 안토니오 교회건물이 노쇠하자 1976년 바로 맞은편에 새로 지은 과달루페성모성당은 마을의 거대한 랜드마크였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곳이다. 도시는 오래된 풍경뿐 아니라 보수적인 가치관까지 이어오고 있다. 타팔파의 시장님보다 마을 신부님의 권위가 더 높아서 아직도 “우리 신부님이 말씀하시길…”이라는 말이 통하는 곳. 인구가 6,000여 명 정도라서 이웃이 모두 가족처럼 지내는 공동체적 마을이다. 사제에 대한 이 마을의 존경심은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1530년경 이곳에 도착한 스페인의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아타코Attaco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타팔파에서 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수도사들은 교회보다 원주인들을 위한 병원Hospital de Indios을 먼저 짓고 환자와 고아, 과부들을 돕기 시작했다. 또 선교사들은 병원을 지역 주민들이 살 수 있도록 내어주고 타팔파에 땅을 얻어 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타코와 타팔파의 규모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현재 아타코의 인구는 1,000여 명으로 타팔파의 6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옛 병원은 현재 ‘파르마시아 비비엔테Farmacia Viviente’로 사용되고 있는데 허브를 재료로 멕시코 전통방식으로 생약을 제조하는 여인들의 협동조합 사무실이자 매장이다. 대를 이어 전해 온 선조들의 지혜를 전수받은 17명의 여인들은 허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심지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묘약도 만들 수 있는데 너무 많이 쓰면 신경을 마비시키는 부작용도 있어서 잘 만들지 않는다(원래 사랑은 이성을 마비시키지 않는가). 몇가지 크림을 사고 돌아서는데 소화불량에 특효라며 녹즙처럼 생긴 물약을 함께 넣어 준다. 줄곧 과식을 해온 것을 어찌 알았을까. 연륜의 통찰이 내 안색을 훑고 지나갔나 보다. 방문할 만한 또 다른 조합은 수공예품을 만드는 타팔파 우먼스 협동조합이다. 가방, 장식물, 털모자, 캔디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고 있어서 직접 보고 구입할 수 있는데 가격도 저렴하다. 단 일요일에만 문을 여니 일정을 확인할 것. 타팔파에 머무는 동안 마침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성모알현 퍼레이드가 열렸다. 메르세드성모성당Templo de Nuestra Sra de La Merced의 성모상을 앞세운 퍼레이드 행렬이 마을을 도는 동안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밤이 늦도록 축제를 즐겼다. 토착신앙에 스며든 멕시코의 가톨릭이 성모에 대한 유난스러운 애정을 보이는 이유가 어쩌면 지난 며칠 동안 타팔타에서 만났던 여인들, 전통을 수호하고 가족을 보호하고 부양까지 하는 멕시코들의 어머니들 때문이 아닌지, 마법 같은 깨달음이 왔다. 타팔파 관광정보 www.tapalpaturistico.com ●Pueblo Magico Ⅲ Tequila 테킬라 시간을 빚는 마을, 기다림이 빚은 술 테킬라를 마신다는 것. 그것은 시간을 마시는 일이라고 했다. 테킬라 마을에 가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왜 테킬라라는 술에 시간이, 그리고 멕시코의 자부심이 담겨 있는가를. 와인은 포도로 만든다. 맥주는 보리와 홉으로, 소주는 쌀로 만든다. 그렇다면 테킬라는? 아가베agave·용설란로 만든다. 생김새가 알로에와 비슷하지만 더 크고 단단하며 잎 끝이 가시처럼 뾰족하다. 테킬라는 아가베의 줄기를 원료로 만드는 술이다. 열매나 곡물을 이용하는 다른 술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원료를 얻기 위해 적어도 8년, 길게는 12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테킬라에 대한 나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갑자기 독한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능력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테킬라 술병 앞에 서면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이었다. 10년 가까운 기다림도 기다림이지만, 수확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테킬라를 수확하는 과정을 히마Jima라고 하는데 아가베는 자라는 동안 몇 번씩 잎을 잘라 주어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아가베가 더 튼튼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의 운송수단은 나귀였는데, 이것만큼은 현대화되어 자동차를 이용한다. 아가베를 재배하고 수확하고 운송하는 모든 노하우는 아버지에서 아들에게로 전수된 중요한 기술들이다. 이들을 히마도르Jimador라고 부른다. 이렇게 수확된 아가베가 테킬라가 되는 과정을 보기 위해 테킬라 마을로 들어갔다. 테킬라는 술의 이름이기 전에 마을의 이름이다. 해발 고도 1,000m에 자리한 테킬라 마을은 화산토질이어서 특별히 블루 아가베 재배에 더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테킬라 품질 보증을 위해 멕시코 정부가 아가베 생산지역을 제한하면서 테킬라 마을은 멕시코의 테킬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됐다. 유네스코도 2006년에 테킬라 마을의 농장과 주조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여전히 작고 한적해 보이는데, 모든 영광을 흡수한 것은 요새처럼 자리잡고 있는 ‘문도 쿠에르보Mundo Cuervo’, 즉 쿠에르보 월드다.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대중적인 테킬라 브랜드가 탄생한 바로 그곳이다. 남미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양조장 라로옌La Rojen과 테이스팅장, 상점, 호세 쿠에르보 가문의 저택 등으로 이뤄져 있다. 20년 이상 일해 왔다는 안나씨는 “데칼라는 멕시코의 역사이고 문화이자 인내심의 산물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자신들의 역사가 바로 테킬라의 역사라는 것. 250년의 역사를 이어 오고 있는 호세 쿠에르보는 100% 블루 아가베Agave Azul만을 사용한다는 자부심을 부르짖지만 대량생산을 위해 수액을 믹스한 대중적인 상품도 판매하고 있다. 양조장 지하 저장고에는 1890년대의 테킬라도 보관 중이다. 오크통에서 막 따라 낸 테킬라는 휘발이 되지 않아서 도수가 무려 51도나 됐다. 귀한 것은 알겠는데, 홀짝 넘겨지지가 않았다. 내게 시간의 앙금은 여전히 쓰기만 한가 보다. 호세 쿠에르보 익스프레스Jose Cuervo Express 2012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호세 쿠에르보 익스프레스는 테킬라 마을로 가는 유일한 기차이자 멕시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객열차다. 선택하는 객차에 따라 서비스가 다른데 다이닝 객차를 선택하면 영광스러운 과거로의 여행은 무제한 테킬라 시음과 함께 시작해 샌드위치, 꼬치요리, 토스타다, 화지타 등의 간단한 음식이 제공된다.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에 과달라하라의 페로멕스Ferromex역에서 출발해 테킬라 간이역까지 60km를 달리는 동안 아가베 농장과 열차를 한 프레임에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생긴다. 출발 시간 매주 토요일 11:00, 금요일과 일요일 운행은 별도로 문의할 것 프로그램별로 1,350~1,700페소 +52 800 523 977 377 www.josecuervoexpress.com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멕시코정부관광청 www.newmexico.org Mundo Cuervo Jose Cuervo 73 46400 Tequila, Jalisco, Mexico 양조장 투어(1시간 소요) 180페소, VIP 투어(테이스팅 포함, 2시간 소요) 430페소, 농장방문 및 VIP 투어 650페소 +52 374 742 0050 www.mundocuerv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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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꽂이]

    선셋 리미티드(코맥 매카시 지음, 문학동네 펴냄) 서사가 아니라 등장인물인 ‘흑’과 ‘백’ 두 남자의 대화만으로 이뤄진 ‘극 형식’의 소설. 미국 뉴욕을 지나는 급행 통근열차 ‘선셋 리미티드’에 자살하려고 뛰어든 ‘백’과 그를 구한 자칭 수호천사 ‘흑’의 대화로 구성됐다. 인간의 운명, 삶과 죽음, 행복과 고통, 환상과 현실, 유신론과 무신론 등 생을 떠나지 않는 한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철학적인 문제들을 담았다. 작가는 ‘서부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며 해마다 노벨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전작인 ‘더 로드’나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영화로도 제작됐다. 144쪽. 1만 1000원.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헤르만 헤세 지음, 김영사 펴냄) 헤세가 쓴 3000여편의 서평과 에세이 가운데 가장 빼어난 73편을 가려 뽑았다. JD 샐린저, 카프카, 토마스 만, 도스토옙스키 등 세계문학 고전부터 공자, 노자, 붓다, 우파니샤드, 바가바드기타 등 동양 걸작까지 두루 실렸다. 헤세는 스물세 살인 1900년부터 세상을 떠난 1962년까지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서평을 썼다. 420쪽. 1만 4000원. 끝의 시작(서유미 지음, 민음사 펴냄) 보통 사람들이 한두 번씩 경험하는 이별의 아픔과 상처,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슬프고 담백하게 담아냈다. 특유의 서사성과 서정성이 돋보인다. 기존 작품들에서 보였던 세태 반영적 성격이 준 것도 특징이다. 2007년 ‘판타스틱 개미지옥’으로 문학수첩작가상을, ‘쿨하게 한걸음’으로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다. 사자, 포효하다(유순하 지음, 문이당 펴냄) 빛나는 청춘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생명처럼 긴요한 희망이 아예 불가능한 불모 상태에서 지향마저 불확실한 항해를 할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에게 진정한 희망은 무엇인지, 그 희망은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지를 들려준다. 312쪽. 1만 3000원.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0) 서울학(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0) 서울학(하)

    ●서울에서 일어나는 모든 도시현상 연구 서울학은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활동과 그 활동에서 파생되는 모든 도시현상 및 도시 관련 문제들을 학문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서울을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도시로 만들도록 서울에 대해 연구하는 학제적인(Interdisciplinary) 성격을 가진 학문(최근희 서울시립대 교수)”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서울은 너무나 거대하고 과밀하며 복합적이지만 축적된 학문적 기초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학문적 적확성이나 방법론적인 정교성에 매달려 답을 구하려면 한계에 부딪힌다.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서울’이라는 지명을 보자. 서울이라는 지명이 언제, 어떤 연유로 생성됐는지 알기조차 어렵다. 서울이라는 말이 역사나 기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얼마나, 어떻게 사용했는지 파악하는 게 지극히 어렵다는 뜻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이 한자 표기가 안 되므로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탓이다. 서울이라는 땅 이름 대신에 수도(首都)를 뜻하는 한성, 한양, 경성, 경도, 경조, 경, 수부, 수선, 도성, 도부, 도읍, 황성, 황도, 왕도, 한도 같은 한자 수도 개념어 10여 가지가 두루 쓰였다. 최근 서울과 수도의 개념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선보이고 있으나 서울이라는 지명의 용례를 다룬 연구는 여전히 드문 것도 자료 부족에 기인한다. 서울지역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기원전 18년 온조가 위례(현재의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에 도읍을 정하면서 역사의 전면부에는 한강 이북보다 한강 이남이 먼저 등장했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 때는 한산(漢山)이라고 호칭했는데 한강(漢江), 북한산(北漢山), 남한산(南漢山)이라는 지명의 생성과 연관성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 때는 남평양(南平壤)이었으며, 6세기 신라 진흥왕(540~576) 때는 북한산주(北漢山州)였다. 통일신라 시대인 757년 경덕왕 때 한양군(漢陽郡)을 두었고 고려 들어 양주(楊州)와 남경, 한양부 등을 오락가락하다가 조선 들어 한성부(漢城府)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서울이라는 말의 어원은 여럿 있지만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어원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서울이란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이지 땅 이름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행정사’에 따르면 신라의 경주, 백제의 소부리(부여), 고려의 송악(개성), 후고구려의 철원 등 일국의 수도 명칭 모두가 서라벌(새벌)에서 나왔다. 수도가 서라벌이고, 서라벌이 서울인 것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강제 격하, 개칭됐다가 광복과 함께 갑자기 새로운 수도의 이름으로 떠올랐다. 해방 후 각계 인사 70명으로 구성된 경성부 고문회의는 “‘한성시’라고 쓰고 ‘서울시’라고 읽는다”는 어정쩡한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미 군정청은 1946년 9월18일 군정법령으로 ‘서울특별시’라는 대한민국 유일 한글 지명을 확정했다. 미 군정은 경성이라는 일제의 잔재도 청산하고, 한성부 혹은 한양이라는 왕조 복고도 거부하는 이중 효과를 거뒀다. 무엇보다 ‘SEOUL’이라는 알파벳 명칭이 그들의 입맛에 맞았을 법하다. 정부 수립 이후 논란이 일었다. 1955년 9월 16일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명칭 개정을 제안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불붙었다. 명칭 개정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서울이란 수도를 나타내는 보통명사이지 땅 이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는 아니라는 것, 둘째 서울이 땅 이름이 된 경위는 외국인의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붙여졌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수도가 어디인지를 물은 프랑스 신부의 질문에 사람들이 ‘서울’이라고 답하자 이를 프랑스 사람이 소리 낼 수 있는 음을 취해서 써넣은 것이 ‘소울’ 또는 ‘솔’ 등으로 잘못 알려졌다는 논리였다. 이때부터 서울의 명칭 개정을 놓고 격렬한 찬반 논쟁이 일었다. ‘해방 직후 수도 명칭의 결정과 1950년대 개정 논의’라는 김제정(서울시립대)의 논문에 따르면 최남선, 이병도, 최현배, 김윤경, 이희승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신문지상 등을 통해 논쟁에 가세했고 찬반 논리를 제공했다. 대개 한양, 한성 등 복고풍이 지배적이었으며 큰 벌판을 뜻하는 우리말 지명 ‘한벌’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급기야 국무위원과 정부위원 등으로 ‘수도명칭 제정연구위원회’가 구성됐고 서울시를 중심으로 수도 명칭 개명에 관한 현상 모집 광고가 신문지상에 게재됐다. ①우남 ②한양 ③한경(韓京) ④한성 등 4가지 명칭을 놓고 여론조사를 한 결과 우남시가 1423표를 얻었다. 한양 1117표, 한경 631표, 한성 353표를 각각 받았다. 초대 대통령이자 이른바 국부(國父)인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이나 아호를 딴 ‘이승만시’ 혹은 ‘우남시’로 하자는 추종자들의 속 보이는 명칭 개정 작업은 격렬한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 대통령은 1957년 1월 19일 다시 담화를 내고 “내가 대통령으로 앉아서 서울의 이름을 내 별호로 짓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우남시 안을 철회했다. 이후 4·19혁명이 일어나 이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서울의 명칭 개정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서울이라는 명칭이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 군정청 관리들에 의해 ‘선물’처럼 주어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 정부 수립 이후 제기된 개칭 추진에서 최고 권력자의 추종세력에 의해 섣불리 추진됐다가 유야무야된 과정도 개운치 않다. 그러나 이후 서울올림픽과 월드컵 개최 등으로 서울이라는 수도명은 ‘코리아’라는 국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빅 브랜드가 됐다. 고유명사를 보통명사화한 선례이자 돌이킬 수 없는 압도적인 우리의 수도명이자 지명이 됐다. ●대한민국의‘ 종주도시’이자 ‘의사이상향’ 14세기 이슬람의 역사학자이자 최고의 사상가인 이븐할둔(Ibn Khaldun)은 “새 왕조가 새 수도를 정하고, 옛 수도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즉시 주민을 새 수도로 이주시켜야 불만 세력을 없애고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통치권의 초점인 수도는 마땅히 왕국의 중앙에 위치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조선의 수도 한성부는 1394년 제국(帝國)지향적 수도인 송악에서 남하해 한반도의 심장부인 한양에서 인구 10만명의 계획도시로 출발했다. 620년이 흐른 지금 면적은 30배, 인구는 100배 이상 급속 팽창했다. 서울은 우리나라 인구 5000만명이 지향하고, 수도권을 포함한 2500만명이 생활하는 대한민국의 종주도시(宗主都市)이자 의사이상향(擬似理想鄕)이 되었다. 왜 이렇게 서울로 몰려든 것일까. 서울학의 연구과제 중 사회학, 도시사회학, 도시행정학의 초점은 인구 집중 및 확장과 관련된 문제에 맞춰진다. 서울로의 인구 집중이 이 모든 현상의 방아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전제군주의 통치 공간이었고, 권력의 핵이기에 기회와 경쟁을 제공했다. 돈을 벌거나, 출세를 원하거나, 학업을 하려거나, 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서울의 도시성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논의되는 것이 인구문제다. 역사적으로 조선 한성부의 인구는 17세기 후반 이미 30만명에 달해 당대 세계 최대급의 인구밀도를 자랑했다. 출산율, 사망률 등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 인구 증감이 좌우되는 향촌과 달리 인구 이동이라는 사회적인 요인의 영향력이 높다는 점이 최근 연구의 성과다. 인구 상황과 호구를 분석한 고동환은 ‘조선후기 인구 추세와 도시문제 발생’이라는 논문에서 서울인구를 1669년 22만명, 1720년대 25만명, 1770년대 30만명, 1820년대 35만명, 1870년1900년 33만 명으로 추정했다. 조성윤은 ‘조선후기 서울의 인구 증가와 공간구조의 변화’라는 논문에서 1663년 한성부 북부의 호적과 한말의 신(新)호적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서울 주민의 신분 구성을 분석한 결과 전국의 농촌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전입인구가 서울의 하층민으로 정착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살펴보면 조선초기 10만명이던 인구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난 이후 4만명까지 떨어졌다가 17세기 후반 현종 때 18만명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후 구한말까지 200년 이상 18만명에서 20만명 사이를 오갔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도성 내 상업 발달이 주원인이었다. 18세기 서울은 16~17세기의 위기를 벗어나면서 성 밖 경강(뚝섬~양화나루까지의 한강구간) 일대에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전국에서 상인자본의 집적도가 가장 높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경강 일대에 상업촌락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서울은 중세 정치·행정 중심도시에서 근대적 상업도시로 옷을 갈아입었다. 서울의 도시발달은 17세기 양난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시기를 거쳐 인구의 증가와 상업의 발달로 사대문 밖으로 공간적 확산이 이뤄지고 신분제의 붕괴 조짐을 나타냈다. 도성 내 인구의 증가는 주택 부족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현상은 도성 밖으로 거주공간이 확장되는 원인이 됐다. 15세기까지 사대문 밖 10리(성저십리)의 민가숫자는 모두 1719호로 한양 인구의 9%에 불과했지만 18세기 전반 한성부의 5부(동-서-남-북-중부) 중 경강에 가까운 서부(용산)와 남부(마포)를 중심으로 촌락이 속속 들어서면서 행정구역의 확대 개편이 촉발된 것이다. 서울은 사대문을 벗어나 한강이라는 새로운 축을 중심으로 확대됐으며 서울 구심점의 한강 이남 이전은 시간문제였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해수면 상승 속도 2배 이상 빨라져

    해수면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14일(현지시간) BBC 등에 따르면 하버드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 1900년부터 1990년까지는 1년에 해수면이 1.2㎜씩 높아졌으나 1990년부터 20년간은 1년에 3㎜씩 높아졌다. 20세기 들어 1990년까지 해수면 수위는 종전에 예측됐던 것보다 30% 낮았지만 이후 상승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는 네이처지에 실렸다. 과학자들은 해수면 상승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지구온난화로 촉발된 그린란드와 남극대륙 서부지역의 얼음층 용융, 줄어드는 빙하 탓이라고 설명했다. 하버드대 지구물리학자로서 이번 연구를 주도한 칼링 헤이는 “최근 수십년간 의미 있는 (수면상승) 가속화 현상을 지켜보고 있다”면서 “세계 평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수면이 상승하고 있는 미국 동부연안 도시가 최대 관심 대상”이라고 말했다. 애리조나대 환경연구소 공동대표 조너선 오버펙은 “이번 연구는 가속화되는 바다 온난화, 얼음층 붕괴 등 골치 아픈 문제들이 앞으로 더욱더 수위 상승을 부채질할 것이고 아마도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면서 “이로 인해 기후변화 적응이 더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인류 재앙’ 누명 쓴 저출산 뒤집어보기

    ‘인류 재앙’ 누명 쓴 저출산 뒤집어보기

    인구 쇼크/앨런 와이즈먼 지음/이한음 옮김/알에이치코리아/660쪽/2만원 ‘저출산은 재앙?’ 자신을 닮은 2세를 낳는 출산의 감소와 그에 따른 고령화. 지구촌 곳곳에선 이 두 개의 복합적 추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드높다. 평균출산율 1.19명으로 세계 최저수준인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출산율이 사망률을 상회, 당장은 인구가 줄고 있진 않지만 머지않아 초고령화에 접어든 일본의 형국을 닮아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우리를 포함해 거개의 나라들이 ‘인구 위기’로 우려하는 저출산은 정말 재앙적인 차원의 악일까? 신작 ‘인구쇼크’는 저출산을 향한 보편의 생각을 뒤집어 저출산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는 길임을 강력히 주장해 눈길을 끈다. 저출산에 대한 그 ‘악에서 선으로의’ 발상 전환은 바로 인구폭발에서 시작된다. 유엔 조사에 따르면 세계인구는 4.5일마다 100만명씩 늘고 있다. 1815년 10억명을 돌파한 세계 인구는 1900년 16억명에서 2011년 70억명으로 급증했고 지난해 72억명을 넘어섰다. 2082년 100억명을 넘어설 것이란 추세 예측이 괜한 게 아니다. 신간은 얼핏 보면 ‘인구의 폭발적 증가세에 비해 식량은 더디게 늘어나는 불균형 탓에 인류는 반드시 기근과 빈곤을 겪을 것’이라고 예언한 맬서스(1798년 ‘인구론’)나 인구폭발 파멸의 시나리오를 제시한 폴 에를리히(1968년 ‘인구폭탄’)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미국 애리조나대 교수인 앨런 와이즈먼은 ‘인구쇼크’에서 이들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인구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 핵심은 이미 지구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고 지금 당장 인구감소를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서 드러나는 시각의 신선함은 저출산에 대한 경제학계의 논리를 아주 극명하게 뒤집는 데 있다. 주류 경제학계는 대체로 출산율 감소를 소비·노동인구 감소로 인한 소비침체, 경제성장 둔화, 복지부담과 같은 선에서 바라본다. ‘저출산=국가적 위기’라는 등식을 적용하는 많은 나라의 시각과 일치한다. 하지만 저자는 인구가 감소해 GDP가 줄어도 국민 1인당 소득이 줄어드는 건 아니라고 반박한다. 일할 사람이 줄면 기업은 임금을 올리고 근무시간 단축 등 복지문제에 더 신경을 쓴다고 설명한다. 인구 감소로 빈 일자리는 여성 경제인구가 상당 부분 채울 수 있고 연금문제도 인구감소에 따라 줄어드는 기반시설 투자금액과 정부예산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촌에 만연한 ‘저출산 망국론’을 보기 좋게 뒤집지만 그 설득의 방식은 아주 부드럽다. 전 세계 20개 나라를 직접 탐사해 세상이 인구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를 읽는 이 스스로가 비교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인구 우위를 점하기 위해 출산경쟁을 일삼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경우부터 이민자들에 대한 배타적 시각이 팽배한 유럽사회, 오랫동안 한 자녀 정책을 시행해 온 중국, 여전히 인구증가를 방관하는 인도와 파키스탄…. 그 다양한 사례에서 환경파괴며 자원고갈, 지구 온난화처럼 한 나라에 국한하지 않은 지구촌 공통의 위기 문제를 곱씹게 만드는 게 책의 특장이다. ‘성장 없는 번영을 가능하게 하는 저출산’ 책을 읽고 나면 머릿속에 진하게 남는 앙금이다. 지속적인 성장을 번영의 평가 척도로 삼아 왔고 여전히 실천하고 있는 주류 경제학이며 나라들의 입장에선 조금 불편할 수 있겠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공통의 ‘글로벌 인구문제’에 대한 관심 유발과 지속가능한 공존의 근본 해법 찾기 측면에선 유의미한 역작임에 틀림없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마야문명 멸망 원인은 100년 간 극심한 가뭄 때문” (美 연구)

    “마야문명 멸망 원인은 100년 간 극심한 가뭄 때문” (美 연구)

    그간 수많은 추측을 불러 일으켰던 마야 제국 멸망의 원인이 드러났다. 최근 미국 라이스 대학 연구팀이 과거 마야문명은 약 100년 간에 걸친 지독한 가뭄 때문에 사라졌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의 이같은 결과는 중미 벨리지 공화국에 위치한 해저동굴 '그레이트 블루홀'의 바위 샘플 침전물을 분석해 얻어졌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현재의 멕시코 남동부, 과테말라, 유카탄 반도 등을 중심으로 약 600년 간 번창한 마야 문명은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해 수준 높은 문명을 자랑했으나 특별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멸망했다. 이에대해 학자들은 전염병과 외부 침입설, 주식인 옥수수의 단백질 부족설, 성행위 부진에 따른 자손번식 실패설, 화산폭발 원인설 등 다양한 이론들을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학자들은 마야 문명 멸망의 '범인'이 '가뭄'이라는 연구결과를 속속 발표해 왔다. 이번에 라이스 대학 연구팀은 '기록의 보고'와도 같은 블루홀 속 침전물들의 성분을 분석해 800-900년 사이 극심한 가뭄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가 마야 문명의 쇠퇴기와 일치한다는 것이 연구팀의 결론. 연구를 이끈 안드레아 드록슬러 교수는 "각 침전물 층은 수세기에 걸친 기후 변화를 과정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면서 "당시 오랜시간에 걸친 극심한 가뭄이 마야 문명에 기근과 사회·정치적인 불안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결과적으로 '물부족' 사태는 왕권을 약화시켜 제국의 붕괴를 앞당겼으며 일부 주민들은 그들의 거주지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마야문명 멸망의 원인이 가뭄이라는 연구결과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2년에도 미국 콜롬비아 대학 연구팀은 마야 제국이 멸망한 이유는 삼림 훼손으로 인한 가뭄때문이라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또한 같은 해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연구팀 역시 마야문명의 발상지인 멕시코 일대 동굴에서 수집한 석순에서 강수량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가뭄이 수백 년간 지속되면서 멸망에 이르게 됐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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