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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주부 트렌드 ‘틴케이스’ 모으기

    요즘 주부 트렌드 ‘틴케이스’ 모으기

    주부 김미라(38)씨는 틴케이스 마니아다. 양철로 된 원통이나 각진 깡통에 필기구와 아이들 색연필을 담아 수납하고, 높이가 낮은 쿠키통엔 액세서리와 색조 화장품을 담아 둔다. 김씨는 “모양이 예쁜 틴케이스는 인테리어 효과가 좋고 수납에 활용할 수 있어서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사게 된다”고 말했다. ●시리얼·팝콘 등 담은 양철통… 디자인 예뻐 인기 깡통을 모으는 사람이 늘었다. 틴 컬렉터(수집가)라는 말도 있다. 솜씨 좋은 주부가 다 쓴 통조림에 헝겊을 덧대거나 페인트를 칠해서 알뜰히 쓰는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요새는 리폼 실력이 필요 없다. 자체 디자인이 예쁜 틴이 수두룩하다. 식품, 생활용품 업체가 제품과 틴케이스를 묶어 한정 판매도 한다. 틴을 모으려고 그다지 필요 없는 제품을 사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소비도 나타난다. 지난 7월 대형마트마다 시리얼이 동나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켈로그가 시리얼을 담을 수 있는 틴케이스를 13만개 풀었는데 3주 만에 모두 팔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구매 인증 사진’이 퍼지면서 주부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1900년대 초·중반 켈로그가 실제 썼던 빈티지 홍보 포스터로 디자인해 수집욕을 자극했다. ●켈로그 한정품 입소문나 3주 만에 13만개 모두 팔려 켈로그 관계자는 “7월에는 동남아시아 지사에서 판매했던 제품을 가져왔는데 이달 새로 출시한 틴은 한국 지사가 직접 고른 이미지로 제작했다”고 말했다. 켈로그의 신제품은 이마트에서 7만 5000개 한정 판매 중이다. 시리얼 상자와 비슷한 크기의 틴은 스파게티나 국수를 넣거나 캡슐커피를 보관하기 적합하다. 미국 시카고에서 출발한 가렛팝콘샵은 팝콘을 담는 틴케이스가 유명하다. 진출한 국가의 특징을 담거나 계절이나 명절에 맞는 디자인의 틴을 선보였다. 국내에서는 오방색을 사용한 코리아 틴, 검정과 주황 줄무늬로 디자인해 핼러윈 분위기를 낸 가을 틴 등이 인기였다. 가장 큰 4ℓ(1갤런) 용량의 틴은 와인을 차갑게 하는 아이스버킷으로 활용하거나 아이들의 자석 블록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면 좋다. 작은 통은 바닥에 구멍을 뚫어 화분으로 활용할 수 있다. 애경은 이달 초 2080 재스민향 치약을 새로 출시하면서 모바일메신저 캐릭터인 라인프렌즈를 프린트한 틴케이스를 선보였다. 명함이나 머리핀 등을 담기 좋은 사각 케이스로, 치약 3개(9900원)를 사면 사은품으로 준다. 틴 컬렉터 사이에서 스타벅스의 코인초콜릿 케이스는 활용도 높은 수집품으로 꼽힌다. 손바닥 크기의 원통으로 이어폰이나 충전기를 보관하기 알맞다. 천연양초(소이캔들)를 만들어 담는 용기로 쓰기도 한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중국의 비뚤어진 역사관/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중국의 비뚤어진 역사관/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11월 9일은 중국에 ‘매우 뜻깊은 날’이다. 2000년 사마천의 역사기원을 단숨에 1229년이나 앞당긴 ‘하상주연표’를 공식 확정한 날이다. 고고학 등 전문가 170여명이 5년간 천착해 만든 이 연표는 사마천이 엄두도 못 낸 하(夏·기원전 2070~1600년)·상(商·기원전 1600~1046년)·서주(西周·기원전 1046~771년)의 세 왕조 연표를 확정해 신화를 역사로 복원해 냈다. 지금까지 중국사 연대기의 가장 이른 시기는 서주 말의 기원전 841년. 이전의 일은 신화이다. 연표 확정이 핵심인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이 전설 속의 하·상·주 왕조를 역사로 끌어들인 것이다. 역사시대가 기원전 207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요·순임금도 역사 속 인물로 변신했다. 하지만 15주년을 맞은 올해까지 관련 유물·유적이 대량 출토됐다는 소식이 없는 데다 중국 내에서도 진위 논란이 식지 않는 걸 보면 사실(史實)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문제는 중국의 ‘단대공정’이 단순히 ‘뿌리 찾기 작업’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웃 나라의 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해 버린 까닭이다. 중국의 ‘역사굴기’는 ‘단대공정’과 ‘동북(東北)공정’, 중화문명의 기원을 무려 1만년까지 끌어올리겠다는 ‘탐원(探源)공정’ 등 3대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이들 공정은 ‘과장과 왜곡’이라는 뒤틀린 모습으로 나타난다. 역사기원을 앞당긴 일은 전자,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은 후자에 속한다. 중국은 단대공정에서 ‘고구려 민족은 기원전 1600~1300년에 은상(殷商)씨족에서 분리됐다’고 강변한다. 고구려가 상나라에서 갈라졌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국 고대사를 대변하는 기원전 8000~1500년의 빗살무늬토기·비파형동검 등 유물·유적이 대거 발굴됐다. 고조선의 랴오허문명이 중국사의 출발점인 황허(黃河)문명(기원전 4000~2000년)보다 앞섰다는 얘기다. 때문에 중국은 3대 역사 공정을 통해 한국 고대사의 뿌리인 랴오허문명을 중국사에 편입해 고조선과 고구려사, 발해사 등 한민족 문명의 기원을 깡그리 부정해 버린 것이다. 어느 나라든 역사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지만 이같이 맹목적이지는 않다. 중국의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공자의 춘추필법’, ‘동호(董狐)의 직필’, ‘병필직서’(秉筆直書·직언을 꺼리지 않음) 고사에서 보듯 목숨을 내놓고 팩트(사실) 이상을 추구했다. 그러나 1900년 서양 제국주의에 베이징이 함락당하자 청나라 광서제가 시안(西安)으로 도망간 것을 ‘서쪽으로 사냥갔다’, 신화를 근거로 이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근현대 들어 이 같은 경향이 본격화됐다. 사마천은 기원전 3076~2029년을 다룬 ‘오제본기’(五帝本紀) 후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학자들이 오제(五帝)에 대해 많이 얘기하지만 아득히 먼 일이다. 상서(尙書)도 요임금 이후만 기록하고 있고, 백가(百家)들이 황제(黃帝)를 많이 얘기하지만 문장이 우아하지도 온당하지도 않아 학자들은 말하기를 꺼린다.” 조상의 역사라 기록은 하지만 믿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2100여년이 지난 오늘도 사마천을 ‘최고의 역사가’로 추앙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khkim@seoul.co.kr
  • [글로벌 인사이트] 700년간 귀족 증세 반대한 상원… 왜 저소득층 증세 막았나

    [글로벌 인사이트] 700년간 귀족 증세 반대한 상원… 왜 저소득층 증세 막았나

    ‘307대277.’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영국 상원이 부결시킨 보수당 정부의 저소득층 증세안은 끝없는 파문을 몰고 왔다. ‘하원 우위의 원칙’이 확고한 영국에서 상원은 법안을 수정하거나 입법을 지연하는 권한만 갖고 있어 관습법(헌법)에 대한 ‘이례적’ 도전이자 용기로 받아들여졌다. 증세안 부결로 굴욕을 당한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이튿날 상원에 대대적인 ‘칼 대기’를 단행하겠다며 정략적 선언을 했다. 조지 오즈번 재무장관도 “선거를 통해 선출된 하원이 입법한 세금 관련 재정 조치를 임명직에 불과한 상원의 야당(노동당·자유민주당) 의원들이 부결시켰다”면서 불만을 표출했다. 캐머런 내각은 주요 결정과 관련해 보수당이 장악한 하원의 영향력을 상원보다 앞세우는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8일(현지시간) 전했다. 이는 장기적 청사진을 갖고 꾸준히 추진해온 기존 ‘상원 개혁’과는 다른 모습이다. 당파성을 앞세운 캐머런 총리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국민적 동의를 끌어낼지도 알 수 없다. 보수당 지도부가 공공연히 상원 개혁을 외치는 배경에는 과거 노동당 정권이 주도한 개혁으로 수백년간 기득권을 유지해온 상원을 송두리째 빼앗긴 쓰라린 경험이 자리한다. 상원은 이제 귀족들의 사교장이라기보다 국가의 중심을 잡는 비정파적 성격의 원로원 성격이 더 강하다. 내각 책임제인 영국에서 실질적 통치자인 총리와 총리를 배출한 집권당이 하원을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보루이기도 하다. 앞서 1911년과 1949년 잇따라 개정된 의회법은 모든 법률안이 원칙적으로 상하 양원을 거치도록 했다. 다만 조세와 재정 지출 관계 법안(Money Bill)은 예외가 인정된다. 상원의 동의를 얻지 못하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왕의 재가를 받아 곧바로 시행할 수 있다. 하지만 상원은 정부의 세금 감면 철회안을 일반 법안이 아닌 위임안으로 해석해 부결시켰다. 상원의 정식 명칭은 ‘귀족원’이다. 이런 측면에서 세습 귀족들의 모임에서 유래한 상원이 저소득층의 세금 감면 혜택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과거 의회가 왕과 갈등을 빚을 때 쟁점 역시 세금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특권층에 대한 ‘부자 증세’가 문제였다. 이번 세금 감면 철회안을 놓고 상원은 4시간 넘는 토론을 벌였다. 복지를 둘러싼 기득권층과 젊은층의 세대 간 전쟁으로 비화된 정부안을 놓고 원칙을 강조하며 약자의 편을 들었다. 보수당 내부에서조차 이견이 분분한 세제 개편안을 밀어붙인 캐머런 총리의 폭주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이는 앞선 노동당 정부(1997~2010년)의 상원에 대한 체질 개선 덕분이다. ‘영악한’ 토니 블레어 총리는 1330명에 이르던 세습 귀족 의원들을 단 92명만 남겨 놓고 퇴출시켰다. 이들은 대부분 보수당 지지자들이었다. 세습 귀족을 몰아낸 빈자리는 총리의 제청을 받아 여왕이 임명한 종신직 의원들로 야금야금 채워졌다. 이는 상원이 보수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는 “과거 보수당이 (정당한) 상원 개혁을 미뤄왔던 점에서 자업자득”이라고 평가했다. 미리 상원 개혁의 고삐를 잡았더라면 뒤통수를 맞는 일이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증세 문제 때마다 갈등 빚어 영국 정치권에서 상원 개혁이 화두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세기 들어 국민 여론은 세습과 특권을 인정받는 상원에 부정적으로 기울었다. 미국처럼 선거를 통해 상원을 구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9일 현재 상원에 등록된 정식 의원은 819명에 이른다. 이 중 의원직이 세습되는 귀족이 88명, 성직자가 25명이며 나머지는 종신직(706명)이다. 성직자인 대주교·주교 등은 자리에서 물러날 때 의원직을 상실한다. 정치 성향별로는 여당인 보수당 당적을 지닌 의원은 249명에 불과하다. 오히려 야당인 노동당(212명)과 자유민주당(112명)이 우위를 점한다. 이 때문에 상원은 하원에 비해 정파성이 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세습 귀족이 대거 퇴장하면서 중도세력이 늘어난 덕분이다. 당적도 고정적이지 않다. 보수당에서 자유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 개혁을 추진한 처칠 전 수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게다가 1910년대까지도 영국 유권자들은 ‘비국교도=자유민주당’, ‘국교도=보수당’이란 등식 아래 종교적 성향에 따라 투표했다. 영국 의회 홈페이지(www.parliament.uk)는 상원이 의학, 법률, 예술, 경영, 과학, 스포츠, 교육 등 각 분야의 대표성을 갖는 존경받는 직업인들로 구성됐다고 기술했다. 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등 영국 연합왕국에 속한 성인이면 누구가 상원 의원이 될 자격을 갖는다고 명기했다. 1295년 완전한 모습을 갖춘 과거의 상원은 귀족과 성직자, 법률가 등이 주축이었다. 17세기 청교도혁명을 이끈 크롬웰이 공화정을 선포해 잠시 폐지되기도 했으나 20세기 초까지 수백년간 예산 결정과 법률 제정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백발의 가발을 뒤집어쓴 채 망토를 착용한 예전 의원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의회법 개정 뒤 실질적 권한 빼앗겨 1900년대 초반부터 잇따라 이뤄진 의회법 개정은 실질적 권한을 대부분 하원에 넘겼다. 의원들의 구성도 귀족보다 전문 직업인에 초점을 맞춰 점차 바뀌었다. 현재 상원은 주요 법안에 대한 토의와 국가 중대사에 대한 위원회 구성 등의 역할을 맡고 있다. ‘드레스코드’도 변화했다. 의원들은 특별한 행사 때가 아니면 일반적인 정장 차림으로 등원한다. 홈페이지의 갤러리에는 평상복 차림으로 토론에 나선 의원들의 모습과 이를 지켜보는 방청객들이 모습이 담겨 있다. 이곳에는 또 신규 의원, 자격 정지 의원, 사망한 의원 등으로 세분화된 신상 정보가 매일 업데이트된다. 지난달에만 41명의 신규 의원들이 임명됐고, 각기 2명의 의원이 사망하거나 은퇴했다. 신규 의원의 당적을 살펴보면 과반이 넘는 21명이 보수당 소속이다. 야당인 노동당과 자유민주당은 각각 7명, 11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중립이거나 전문직 할당자다. 보수당 정권이 노골적으로 상원에서 세 불리기에 나섰다는 뜻이다. 과거 영국 언론은 노동당 정부의 상원 개혁도 정파적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당시 개혁은 장기적 로드맵을 갖고 이뤄졌다. 어느 정도 보수당과 정치적 합의도 이뤄냈다는 점에서 지금과 달랐다. 영국은 2007년 집대성한 ‘상원 개혁에 관한 백서’에 근거해 꾸준히 개혁을 이어오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2010년 합의안에 따라 상원의 의석 수를 300석까지 줄이고 80% 이상을 선출직으로 바꾸는 일이다. ●상원의 뿌리 깊은 반정부 정서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로드맵에는 세습 귀족 의원뿐 아니라 종신 의원 폐지까지 담겨 있다. 매번 선출되는 의원의 임기는 10~15년으로 5년마다 3분의1을 선거로 물갈이한다. 임명직도 총리의 제청이 아닌 상원 임명 위원회의 제청을 따르도록 했다. 또 무보수 명예직이었던 의원에게는 연간 약 6만 4000파운드(약 1억 1245만원)에 이르는 세비도 지급될 예정이다. 이를 추인할 마지막 선택은 국민 여론에 달렸다. 700년 전통의 귀족원이 ‘원로원’으로 개칭되는 순간이다. 일각에선 이 같은 변화가 자칫 총리·상원·하원을 단일 정당이 독식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걱정한다. 견제와 상생이란 영국 정치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앵글로·색슨족의 왕국이던 영국은 8세기 말부터 노르만인에게 정복당하면서 차츰 서유럽화했다. 노르만왕조의 혈통이 섞인 프랑스 귀족이 왕위를 이어받았고 존 왕에 이르러선 과도한 세금 부과로 귀족 계층과 대립했다. 이때 존 왕은 귀족들이 강요한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는 의회 정치의 효시이기도 하다. 최근 수년간 상원은 정부 정책을 견제하며 존재감을 과시해 왔다. 정부 정책의 균형을 잡아줬다는 평가도 듣는다. 2002년 정부의 인간배아 복제 법안, 2006년 안락사 허용 법안, 2008년 테러용의자 구금연장 법안에 각각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 6월 하원이 압도적 표 차이로 승인한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 시행안도 상원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해외여행 | 다시 피가 돈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해외여행 | 다시 피가 돈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수까지

    ‘러시아’라는 세 글자가 내 속에서 퍼 올리는 건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음습하고 도덕적인 문학적 상념, 아침이면 의례처럼 볼륨을 높이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2번,축축한 자조에 딱 들어맞는 ‘안나 게르만’의 로망스, 시적인 위로를 주는 ‘샤갈’의 그림들, 어감마저 차가운 ‘소련’이라는 이름, 저항의 로커 ‘빅토르 최’ 그리고 뜻도 모른 채 외던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과 무자비한 해체의 역사…. 그 거대한 땅덩이의 체취를 맡고서야 알았다. 러시아의 실체는 도표화된 관념보다 몽롱하고, 드물게 아름답다는 것을. 편협한 인식을 뒤로한 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심장 뛰는 일인지를.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아시아도 유럽도 아닌, 러시아 “‘스파시바спаси?бо’라고 해요!”블라디보스토크 도착 사인이 떴을 때, ‘고맙습니다’가 러시아어로 무엇이냐고 묻는 타이완 승객에게 스튜어디스가 말했다. 그녀는 친절하게 ‘시’에 강세를 줘야 한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스파시바’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를 거쳐 이르쿠츠크를 지나 바이칼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는 유일한 러시아어가 되었다. 지도 위에서만큼 러시아연방이 기세등등해 보일 때도 없다. 호주보다 두 배 이상 큰,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이 나라에서 프리모르스키 지방을 찾을 때는 손가락 방향을 오른쪽으로 한참 이동시켜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중심도시다. 분명 이국인데, 거리에는 늘씬한 금발의 미녀들이 넘치는데,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건 아마 DNA에 박힌 기억 때문일 게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시대를 지나고 1900년대 초 민족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도 여기니까.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에서 짐작하듯 작은 변방도시에 불과했던 블라디보스토크에 러시아가 부여한 의미는 노골적이다. 겨울에도 연안이 심하게 얼지 않는,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는 1년 내내 항만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어 전략적 항구도시와 군항으로는 적격이었다. 극동함대 사령부 등 해군기지가 주둔하고,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원조물자가 옮겨지는 거점이기도 했으며, 극동 지역 외교와 상업의 중심지로도 활약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함정 10여 대를 격침시켰다는 잠수함 C-56(‘C’는 러시아어로 ‘에스’라고 읽는다. ‘중형급’이라는 표시)은 찬란했던 전장을 회고하는 구소련의 늙은 해군처럼 해양공원 앞 뭍에서 긴 휴식에 들어 있었다. 길이 77m의 이 강철 영웅에겐 엔진을 돌리던 승조원들의 함성은 사라지고 그들이 남긴 훈장과 어뢰, 기관총을 자랑하는 게 유일한 일과가 되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6.5m 좁은 폭, 그 안의 희박한 공기 탓인지 머리가 띵해져 잠수함에서 나왔다. 옆으로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영원의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붉은 카네이션을 놓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마침 뒤편 기도소에서 종이 울린다. 1941년과 1945년을 오르내리던 그 소리는 전쟁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 평화로웠다. 1891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2세의 황태자 시절, 그의 방문을 기념해 세웠다는 개선문은 불과 몇 걸음 뒤다. 왜소한 풍채를 화려하게 치장한 그 건축물은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천성을 숨기고 자신만만한 ‘척’했다는 황제의 운명과 닮아 보였다. 혁명 후 파괴된 것을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 해도 원형을 되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제정러시아의 문장이던 쌍두 독수리는 개선문 꼭대기에서 볼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세련되고 번화한 스베트란스카야 거리Svetlanskaya Street. 횡단보도의 초록 불은 바뀌는 순간 이미 9를 세고 있다. 으름장 놓는 선생님 같은 신호등을 째려보며 잰 발길을 놀려야 하는 일이 잦았다. 100년도 넘는 바로크양식의 건물들이 자리한 가로수 길을 걷고 있자니 막연히 ‘여긴, 유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거만하리만치 딱딱한 표정의 러시아인들을 보고 그 생각은 접기로 한다. 유라시아주의를 바탕으로 강대국을 재건한다는 국가의 외교정책에 이바지하듯, 아시아도 유럽도 아닌 이곳은 오로지 극동 러시아라는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다. 스베트란스카야로부터 두 블록 떨어져 자리한 중앙광장은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위해 싸운 병사들을 기리는 동상만이 생생할 뿐, 혁명전사광장이라는 옛 이름은 의미 없어 보였다. 금요일이면 주말시장이 열리고 신년축제와 기념일 퍼레이드 등 이벤트의 무대가 된 지 오래다. 과거에도 지금도 이곳에서 집회는 계속되지만 혁명에서 놀이로 그 주제는 완전히 바뀌었다. 전설만 남은 영웅들의 흔적 블라디보스토크 둘째 날, 신한촌부터 찾았다. 신한촌은 일본에 의해 침탈된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외 지식인들이 모여 결의를 다졌던 장소다.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인 이상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 전설의 의병장이었던 홍범도를 비롯해 신채호, 안중근, 안창호 등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아파트촌 어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이 신한촌 터라는 것을 눈치 챌 길은 보호 철책에 둘러싸인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이 전부였다. 한인들이 살길을 찾아 연해주 땅을 처음 밟은 것이 1863년. 블라디보스토크가 극동 해군기지로 부상하면서 그들은 군항에서 작업인부로 일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시내 중심부였다. 하지만 콜레라가 발생하자 시당국은 1893년 서쪽 아무르만 해안가로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그곳을 ‘까레이스카야슬라보드카한인촌’, 우리말로는 개척리開拓里로 불렀다. 이후 1911년, 또 한 번의 위생 문제로 북쪽 2km 떨어진 라게르 산비탈로 이주한 한인들은 ‘노바야까레이스카야슬라보드카신한촌’를 형성했고, 이전의 거주지는 구한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1914년, 신한촌은 3,000명이 거주하며 점차 자리를 잡아 갔지만 1937년, 스탈린이 극동에 살던 한인 17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면서 신한촌의 한인들 역시 카자흐스탄 등지로 이송되고 그 자리는 유럽과 러시아 노동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길이가 다른 커다란 세 개의 석조물. 가운데는 한국, 왼쪽은 북한, 오른쪽은 고려인을 포함한 해외 한민족을 상징한다는 기념탑 앞에서 조국의 미래를 밤새워 고민했을 독립 영웅들의 절절함을 가늠해 보기란 쉽지 않았다.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라는 기념탑의 글귀는 길 잃은 아이처럼 애처롭고 속상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블라디보스토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독수리 둥지’라는 뜻의 오리노예 그네즈도 산 정상은 214m에 불과하지만 도시에서 가장 높다. 계단을 올라서니 러시아의 키릴문자를 만든 아우 키릴로스와 형 메소디오스 형제의 동상이 십자가를 들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바다 위에는 2012년 APEC 정상회담에 맞춰 완공한 루스키섬까지 이어진 금각만 대교가 장쾌했다. 서울 남산에서처럼 연인들이 자물쇠를 걸며 사랑을 맹세하는 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촬영이 한창인 신랑신부가 난간 틈을 비집고 자물쇠를 채우는 동안 신부보다 예쁜 들러리는 뭇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무르만 해변공원까지는 걸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명물인 메드베드카곰새우를 주문했다. 비릿하고 고소한 맛이 찬 맥주와 묘하게 어울렸다. 체 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에 네덜란드 맥주를 마시는 청년들,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서 CF의 한 장면처럼 등장한 처녀들, 낚시를 즐기는 부부…. 히죽대며 그들의 모습을 훔치는 사이 새우껍데기만 자꾸 쌓여 갔다. ●하바롭스크Khabarovsk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의 하룻밤 하바롭스크까지 가는 열차 출발 시간은 저녁 9시. 서둘러 짐을 챙기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향한다. 지는 해에 순종하며 기차역이 차분히 물들고 있었다. 1907년부터 5년에 걸쳐 지어졌다는 기차역은 제정 러시아의 건축양식으로 제법 낭만적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다. 이곳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9,288km. 플랫폼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철로를 달렸다는 증기기관차도 보였다. 출발은 저녁 9시인데 플랫폼의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킨다. 철도역의 모든 시간표는 모스크바가 기준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난민처럼 바닥에다 가방을 열어 젖히고 주섬주섬 필요한 물건만 미리 챙겼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승무원은 여권과 승차권을 확인하고 탑승을 종용했다. 9번 칸, 객실번호 6호 23번. 4인 1실, 양쪽으로 2층 침대가 놓인 객실 ‘쿠페’는 좁았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서서히 열차가 움직이고, 시간이 지나야 시원해질 것이라는 차장의 말처럼 에어컨은 30분이 지나서야 제 기능을 발휘했다. 하바롭스크 도착은 내일 아침 8시. 무궁화호보다 더 느린 기차를 타고 밤새 11시간을 달려야 한다. 하얀 자작나무숲,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올 법한 눈보라, 잠들지 않는 백야.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엄청난 로망을 품은 사람들은 흔히 이런 것들을 상상한다. 러시아에 오기 전, 몽골을 거쳐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다는 친구는 말했다. “러시아 애들은 책만 읽고 얘기도 가족들끼리 소곤소곤. 같이 보드카 마시자던 러시아 아저씨 아니었으면 심심해서 아마 미쳐 버렸을 걸!” 모스크바까지 꼬박 달리는 이들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열차에서의 하룻밤만으로 그 기분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낮도 아닌 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래야 반사되는 객실 내부가 전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산 가이드북을 뒤적이다 음악을 듣고, 러시아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 복도를 기웃대다가, 키릴문자가 새겨진 맥주를 마시고 남은 소시지 3개를 승무원에게 내미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은 없었다. 다행히 수다 떨 일행들이 있어 시간은 잘 갔다. 잠자리는 생각보다 아늑했다. 꺾이는 철로마다 침대가 심하게 덜컹대긴 했다. 하지만 낮에 흘린 땀이나 미처 못 지운 바지의 소스 자국, 떡진 머리도 문제될 게 없는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잠결에 2층 침대로부터 커튼콜처럼 내려왔다 올라가는 이불에 깜짝깜짝 놀라거나, 변기가 막힌 줄도 모르고 30분을 화장실 문 앞에서 참던 일만 빼면. 창문 너머 흘러가는 자작나무 사이로 스미는 햇빛을 보고 잠에 빠졌는데, 곧 정차한다는 소리에 허둥지둥 이불을 박차고 객실 문을 열어젖힌다. 열차가 멈춘 곳. 하바롭스크였다. 조금 더 머물고 싶던 도시 하바롭스크는 1991년 블라디보스토크가 개방되기 전까지 극동지역의 중심지였다. 이제는 그 영광을 물려줬지만 하바롭스크는 마치 권세를 내려놓은 자가 여유를 즐기듯 유유자적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레닌광장 북쪽에 자리한 청동 레닌상이다. 레닌이 사망한 이듬해인 1925년에 세워졌다는데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레닌의 동상이 철거된 데 반해 블라디보스토크와 이곳에서는 아직 건재하다. 레닌이 굽어보고 있는 광장은 하바롭스크의 행정 중심지다. 동쪽으로 하바롭스크주 정부청사가 보였다. 아침을 맞은 광장에는 벤치에서 조용히 휴식을 즐기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둘기가 사람보다 많았다. 레닌광장 아래로 아무르스키 거리를 쭉 따라가면 길은 아무르 강변의 콤소몰 광장까지 잇닿는다. 콤소몰은 구소련 시절 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의 이름이다. 광장에는 혁명 전사들의 모습이 조각된 오벨리스크가 굳건하고, 꼭대기에 소비에트를 상징하는 별이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광장 위 우스벤스키 성당이다. 성모승천성당으로 불리는 그곳은 소비에트 시절 파괴된 후 2001년 다시 동화 같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아무르강이 눈앞인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걸음을 재촉했다. 총 길이만 2,800여 킬로미터. 몽골에서 발원해 하바롭스크를 거쳐 오호츠크해로 흐르는 아무르강은 중국에서는 흑룡강이라 부르는 그 강이다. 전망대 앞에는 강에 이름을 제공한 시베리아 초대 총독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의 동상이 있는데, 여행지에서 만난 아무르라는 이름들은 죄다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향토박물관은 잠시 비를 피하기에는 맞춤이었다. 연해주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박물관으로 본래 이름은 ‘그라제코프 주립 자연사박물관’. 이 역시 설립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122년의 전통이 축적된 내부에는 시베리아 메머드, 아무르 호랑이, 원주민인 나나이족과 우데게이족의 생활모습 등 하바롭스크주의 역사와 자연, 민속 등 자료 15만 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구관에는 소비에트 시절과 관련한 물품들만 전시되어 있는데, 포스터부터 장신구까지 세월의 때가 묻은 낯설고 이색적인 소소함이 눈길을 끌었다. 강을 따라 북쪽에 다다르니 또 다른 아름다운 러시아정교회 성당이 자리했다. 프레오브라젠스키 성당은 황금색 돔과 새하얀 성당이 질서정연했고 내부는 황홀했다. 천장에 그려진 그리스도와 네 명의 사도, 정면 6층 제단의 성모와 성인들의 모습을 새긴 이콘(성상화)은 다른 세상의 것인 듯 신비롭고 이질적이었다. 이콘에 향했던 눈길은 머리를 가리고 촛불을 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 한참을 머물렀다. 진지하고 경건했다. 그 경배의 몸짓 뒤에서 할 것이라고는 숨소리를 죽이는 것 외에는 없었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 Trans Siberian Railroad시베리아횡단철도는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하는, 총길이 9,288km의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다. 1891년에 착공해 1916년에 완공됐다. 90여 개의 도시를 거치는 동안 시간대만 7번이 바뀌고, 지나는 역만 60여 개다. 급행열차를 타면 일주일이 걸린다. 열차의 출발과 도착시간은 모스크바가 기준이다. 열차의 객실 등급은 1등석인 2인 1실의 ‘룩스Lyux’, 2등석 4인 1실의 ‘쿠페Kupe’, 3등석 6인실의 ‘플라츠카르타Pratskartny’와 지정 번호가 없는 8인 좌석의 ‘옵스치Obschy’로 나뉜다. 룩스와 쿠페는 객실이 분리되어 있지만 3등석은 객실 구분 없이 개방되어 있다. 콘센트가 있는 것은 1등석 객실뿐이다. 2등석은 객실 내부 말고 복도에 네 개, 화장실 밖과 안에 각 한 개씩 있다. 멀티 탭을 가져가면 도움이 된다. 열차 칸마다 뜨거운 물이 비치되어 라면이나 커피를 먹을 수 있다. 열차 한 칸당 두 명의 승무원이 교대근무하며 객실을 살피고 간단한 먹을거리도 판매한다. 술과 담배는 규정상 금지되어 있지만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흡연자들은 보통 역에 정차할 때마다 내려 담배를 피우고 재빨리 오른다. 러시아 철도청 www.rzd.ru 러시아정교회 러시아정교회는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에 의해 비잔티움의 동방정교를 받아들여 민족신앙과 결합한 종교다. 러시아정교회 건축양식의 가장 큰 특징은 독특한 양파 모양의 돔 ‘루꼬비짜’다. 눈이 많이 오는 러시아에서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 외에도 기도가 하늘에 닿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흰색과 황금색은 러시아정교회 초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색채로 흰색은 평화와 순결, 황금색은 신성을 상징한다. 예배는 사제는 있지만 설교는 하지 않고, 의자 없이 서서 참여한다. 또 악기의 반주 없이 오로지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성가를 부른다. 러시아정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은 고르바초프에 의해 1990년 소련 최고회의에서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법을 의결한 후부터다. ●이르쿠츠크Irkutsk 아! 바이칼 비행기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 무렵이었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수를 가기 위한 관문. 둘러 볼 겨를 없이 아침이면 또 길을 떠나야 한다. 설렘과 염려를 교차시키느라 잠은 쉬 들지 못했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호의 들머리까지는 버스로 3시간 반. 부리야트족 자치구인 우스찌아르다를 스치는 동안에는 가을을 준비하는 스텝짧은 풀로 뒤덮인 초원이 길게 이어졌다. 어렴풋이 호수가 시야에 들어올 무렵 버스가 멈춘 곳은 사휴르따 선착장이다. 목적지인 알혼섬을 가기 위해 철부선에 올랐다. 배는 물살을 가른 지 30분도 되지 않아 사람들과 자동차를 섬에 부려놓았고, 세상사 다 겪은 아이처럼 옹골찬 ‘우아직러시아 군용차량을 개조한 4륜 승합차’이 벌써 마중 나와 있었다. 운전기사 안톤은 숙소가 있는 후지르 마을까지 한 시간을 달려야 한다며 돌투성이 길을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요란한 진동 모터 위에 앉은 듯 엉덩이는 시종 덜덜거렸다. 바이칼 호수가 품은 22개의 섬 중 알혼은 가장 크고,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섬이다. 거제도의 두 배쯤 되는데, 다섯 개 마을의 주민 1,500명 가운데 대부분은 후지르 마을에 모여 산다. ‘알혼’은 부리야트 원주민어로 ‘태양이 비추는 땅’이라는 뜻이다. 연 강수량이 200mm에 불과해 스텝과 사막 그리고 화강암과 침엽수림이 전부다. 그 황량함을 심장처럼 품은 바이칼호수를 향해 원주민들은 ‘바이칼은 서 있는 불. 아직도 그 불은 식지 않고 있다’며 경외심과 두려움을 표현해 왔다. 숙소에 짐을 내리고 부르한Burkhan 바위가 보이는 언덕으로 갔다.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13개의 세르게 신목. 조상신들이 모이는 곳을 지나니 검푸른 호수 앞으로 정좌한 두 개의 지엄한 바위가 보였다. 샤머니즘의 성지로 알려진 바로 그 자리다. 주위에는 히말라야에서 방금 내려온 성자 같은 복장을 한 외국인들이 손을 맞잡고 명상에 잠겨 있었고, 가부좌를 튼 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이도 보였다. 무엇이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건지 모르겠지만 초자연적 존재와의 교류도, 북방 몽골인종의 시원이 서린 곳이라는 학설도, 부리야트인의 피를 이어받은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도,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바이칼 호 자체보다 신성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아직은 섬의 가장 북쪽 하보이곶으로 달렸다. 날카로운 송곳니 모양을 한 절벽. 그곳에서 보는 바이칼은 호수가 아니라 바다, 그것도 대양이었다. 경계도 모른 채 펼쳐진 호수는 텅 빈 채 근원에 닿을 듯 아스라해서, 차라리 공허했다. 그날 밤, 호숫가에 앉아 마신, 수심 200m의 바이칼호 물로 만들었다는 보드카는 파도소리와 함께 목젖을 뜨겁게 타고 흘렀다. 떠나기 전 호수를 꼭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새벽 5시 혼자 숙소를 나섰다. 인기척 없는 마을을 두리번대며 방향을 가늠하고는 그 언덕에 다시 올랐다. 부르한 바위 앞, 잠이 덜 깬 호수는 몸을 뒤척였고 바람은 초연했다. 그리고…. 영원한 작별인 양 호수에 건넨 말은 이것뿐이었다. “스파시바… 바이칼.” ▶travel info AIRLINE대한항공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이르쿠츠크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노선의 출발편은 매일 인천에서 오전 10시10분에 출발해 오후 1시50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고, 귀국편은 오후 2시50분에 출발해 오전 7시10분에 인천에 도착한다. 이르쿠츠크 노선은 12월25일부터 1월15일까지 동계노선을 주 2회(월·금요일)씩 총 6회 운항할 예정이다. 출발편은 저녁 8시50분 인천에서 출발, 밤 12시5분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고, 귀국편은 새벽 2시30분 출발, 오전 7시10분 인천에 도착한다.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2시간 10분, 이르쿠츠크까지는 3시간 40분이 소요된다. SHOPPING알까기 인형 ‘마트료시카’19세기 말에 탄생한 나무로 만든 러시아 인형으로 엄마를 뜻하는 러시아어 ‘마티’에서 유래했다. 일본 전통인형인 ‘다루마’에서 영감을 얻어 1891년 러시아 민속공예화가 세르게이 말루틴이 처음 디자인했다고 전해진다. 둥근 몸통 안에는 작은 인형들이 겹겹이 들어 있는데, 일본정부에 선물하려고 만든 1세트 72개가 들어있는 대형 마트료시카는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시대에 따라 외형도 변해서 만화영화의 캐릭터나 대중음악가, 스포츠 스타나 정치인의 얼굴을 담은 마트료시카도 볼 수 있다. 가격은 싼 것은 대개 400~700루블 정도이지만 디자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FOOD국민음식 ‘보르쉬’와 ‘샤슬릭’ 러시아의 음식은 슬라브 전통에 서유럽과 몽골,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스지역의 영향을 받아 대개 짜고 달고 신, 자극적이고 복합적인 맛이다. 대표적인 슬라브 전통음식인 ‘보르쉬’는 감자, 당근, 양배추에 비트와 토마토로 색을 낸 스프다. 샤슬릭은 러시아어로 ‘꼬치구이’라는 뜻이다. 이름보다는 맛 ‘오물‘오물은 바이칼호에서만 서식하는 토착 물고기다. 생긴 것은 우리의 청어와 닮았다. 회나 탕, 튀김, 샐러드 등 다양하게 먹는 방법이 있는데 자작나무에 훈제한 오물이 가장 인기다. 이르쿠츠크에서 바이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항구 마을 리스트비얀카에는 오물을 파는 가게들이 잔뜩 있다. 가시가 적고 비리지 않아 담백하다. 39°도 41°도 아닌 40° ‘러시안 보드카’러시아를 대표하는 술, 보드카Vodka는 러시아어 ‘물voda’에서 유래되었다. 감자나 옥수수, 보리 등을 원료로 한 증류수로 무색, 무취, 무미다. 러시아 속담에 ‘4,000km는 길도 아니고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며 40도가 아니면 술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19세기 후반,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가 가장 입맛에 잘 맞고 숙취를 일으키는 불순물이 제일 잘 걸러지는 최상의 알코올 도수가 40%라는 것을 발견했다. 보드카의 나라 러시아에서도 밤 11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공공장소에서의 음주를 금지하고 있으며, 밤 10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도수 15% 이상의 주류 판매도 금하고 있다. MUSEUM연해주의 모든 것 ‘아르세니예프 향토박물관’1890년 개관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이다. 1906년 구시베리아 상업은행 건물로 옮겨졌는데, 아르세니예프는 연해지방을 서방에 알린 탐험가의 이름이다. 3층 건물 안에 연해주의 자연과 지리, 민속학, 고고학 사료들과 동식물 표본집, 화폐 등 약 20만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주제가 딱히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한국관에서는 지역에서 발굴된 발해의 유물을 볼 수 있다.20 Svetlanskaya Str. Vladivostok +7 4232 414 082 100루블평일 09:00~18:00, 토·일요일 09:00~17:30 HOTEL바이칼호 바로 옆 ‘바이칼로프 오스트록’알혼섬의 후지르 마을 입구에 있는 나무로 된 시베리아 전통가옥 형태의 숙소다. 2013년 문을 열었는데 114개의 객실에 250명을 수용할 정도로 알혼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깔끔하다. 특히 바이칼 호수 바로 앞에 위치해서 객실과 레스토랑에서 호수가 보이고 새벽에도 밤에도 산책을 할 수 있는데다, 부르한 바위까지도 도보로 20분 거리다. 7, 8월 성수기 스탠다드 트윈룸의 경우, 아침식사 포함 1박에 4,500루블(약 8만원), 화장실과 샤워실은 객실 3개가 있는 한 층에서 공동으로 사용한다. 욕실용품은 비치되어 있지 않다. 호숫가에서 바비큐를 할 수 있도록 그릴과 장작, 숯 등 일체의 도구도 대여해 준다. 666137, Russia, Irkutsk Region, Olkhonskyi District, Village Khuzir, Street Pribreznaya, 3+7 3952 404 202 www.baikalovostrog.ru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취재협조 대한항공 www.koreanair.com 참좋은여행 www.verygoodtour.com
  • 인간은 두뇌 10%만 사용?…뇌에 관한 6가지 흔한 오해

    인간은 두뇌 10%만 사용?…뇌에 관한 6가지 흔한 오해

    지난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루시’는 ‘인간의 평균 두뇌 사용량은 10%에 불과하다’는 가정을 기본 전제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처럼 인간 두뇌에 대한 ‘속설’을 사실로 가정하는 사례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과학전문지 ‘파퓰러사이언스’는 2일(현지시간), 많은 이들이 사실로 믿고 있지만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뇌에 관한 오해’ 몇 가지를 해명했다. 그 중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1. 인간은 두뇌의 일부만을 활용할 수 있다.앞서도 언급된 이 유명한 속설의 ‘발단’이 된 사람은 1900년대에 활동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다. 1907년에 그는 “인간은 주어진 정신적·신체적 역량의 극히 일부만을 활용하고 있다”고 발언했는데, 이후 한 기자가 이 말을 ‘평범한 인간은 전체 정신 능력의 10%만을 개발할 수 있다’고 와전한 이래 이러한 오해가 널리 퍼지게 됐다. 그러나 현대 의학 장비를 이용해 개인의 두뇌 활동을 조사해보면 인간이 자기 두뇌의 전 영역을 고루 활용한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두뇌의 일부분만 손상돼도 전반적 정신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2. 클래식 음악은 자녀 두뇌 발달에 좋다이러한 믿음은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 캠퍼스 연구팀이 진행했던 실험에서 비롯됐다. 당시 연구팀은 대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각각 모차르트 음악을 듣거나 긴장완화 체조를 실시하거나 침묵 속에서 대기하도록 한 뒤 IQ 테스트를 치르도록 했다. 연구팀은 실험결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청취한 학생들의 점수가 가장 높다는 점을 들어 이 같은 이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후 여러 과학자들이 이 실험을 반복해 보았지만 이 중 동일한 연구 결과를 얻었던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오히려 1999년 하버드 대학교의 한 연구팀은 유사 연구 16건을 분석한 뒤 이른바 ‘모차르트 효과’가 거짓에 해당한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3. 성인이 되면 뇌세포 성장이 중단된다1998년, 스웨덴 과학자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장기기억을 관장하는 두뇌영역인 ‘해마’에서 새로운 뇌세포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최근 2014년에도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운동능력 및 자의식에 관여하는 신경조직인 ‘선조체’가 평생에 걸쳐 새로운 뉴런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4. 남녀의 특기가 다른 이유는 두뇌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남녀가 서로 다른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는 생물학적 이유보다는 사회적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이를 잘 드러내는 예시로 1999년 워털루대학교 사회심리학자들이 진행한 실험이 있다. 이 실험에서 연구팀은 남녀 집단에게 동일한 고난도 수학문제를 풀도록 했다. 이 때 첫 시험에서는 여성 참가자들의 성적이 남성들보다 낮았다. 그러나 두 번째 시험에서는 시작 직전 참가자들에게 ‘과거 동일 시험을 진행한 결과 남녀들 사이에 성적차이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언급했고, 그러자 여성들의 성적이 남성들과 동일해지는 현상이 관찰된 바 있다. 5. 술을 마시면 뇌세포가 파괴된다.과거 덴마크 바톨린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사망한 알코올중독자들의 뇌와 일반인들의 뇌를 서로 비교, 그 뉴런 수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물론 과다하게 복용했을 경우 알코올이 뇌세포를 어느 정도 파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화학물질의 경우도 마찬가지며, 적당량의 음주는 뇌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6. 좌뇌가 우세하면 논리적 사람, 우뇌가 우세하면 창의적 사람이 된다좌·우뇌 중 더 우세한 쪽에 따라 개인의 성향이 논리적, 혹은 창의적으로 굳어진다는 믿음은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이를 명확히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는 현재까지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부인하는 결과가 종종 발표되는데, 일례로 2012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연구팀은 창의적 사고에 있어 좌·우 중 어느 한쪽이 아닌 두뇌 전체의 신경계가 활용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진=ⓒ포토리아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 흉상 서울대에서 제막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 흉상 서울대에서 제막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한국통사 등을 저술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1859~1925) 선생의 흉상이 30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사범대학 역사관 앞에서 제막됐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박은식 선생은 1900년부터 서울대 사범대학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에서 교관으로 재직하며 서양식 교육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할 것을 주장한 교육가이기도 하다. 1905년에는 서울신문의 모태인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을 펼쳤다. 전태원 서울대 사범대학장은 “땅은 빼앗겼어도 국혼이 살아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박은식 선생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때”라고 말했다. 흉상 건립은 박은식 선생 타계 90주년에 맞춰 지난해 4월부터 서울대 사범대학 주도로 추진됐다. 실제 제작은 올 4월 시작돼 10월에 완성됐다. 제작은 서울대 조소과 전준 명예교수가 맡았다. 전 교수는 “독립운동가인 박은식 선생의 내면을 표정에 담아내는 작업이 쉽지 않아 제작 기간이 다소 길어졌다”며 “선생의 인생이 응축돼 있는 노년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밝혔다. 흉상 앞에는 “국교(國敎), 국사(國史)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한국통사의 결론 부분을 새긴 화강석을 세웠다. 제막식에는 박은식 선생의 손자인 박유철 광복회장을 비롯해 이수성 전 국무총리, 성낙인 서울대 총장,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독도의 날’ 1000명의 합창

    ‘독도의 날’ 1000명의 합창

    ‘제115주년 독도의 날’인 25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기념식을 겸해 열린 독도문화국민축제에서 독도합창단 1000여명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독도의 날은 1900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칙령 제41호로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명시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2000년 민간단체인 독도수호대가 제정했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다케시마라 불려서 속상했지?” 독도 생일파티 나선 중학생들

    “다케시마라 불려서 속상했지?” 독도 생일파티 나선 중학생들

    “독도야 115번째 생일 축하해. 다케시마라 불려서 속상했지? 앞으로 우리가 지켜줄게.” 오는 25일 ‘독도의 날’을 맞아 중학생들이 직접 독도 알리기에 나섰다. 서울 강동구는 23일 지역의 18개 학교에서 학생들의 손으로 만든 ‘독도 사랑’ 동영상을 방송하고 관련 이벤트를 진행한다고 22일 밝혔다. 독도의 날은 2000년에 지정됐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칙령 제41호에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규정한 1900년 10월 25일을 기념하는 의미다. 올해는 독도칙령이 반포된 지 115주년 되는 해다.강동지역 18개 중학교 학생회 임원들로 구성된 ‘강동 학생 자치활동 네트워크’는 독도의 날을 맞아 이달 초 ‘독도 사랑’ 동영상(UCC)을 제작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든 플래카드 등을 들고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알리는 내용이다. 독도캠페인 총괄팀장을 맡은 김아연(성덕여중 3학년)양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모든 학생들이 독도의 날을 재인식하고 애국심을 갖자는 취지로 지난 9월 회의에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영상은 23일 오전 아침조회 시간에 학교마다 전 학급에 방영된다. 각 교실에서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외워 부르는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아울러 이달 말까지 학교별로 ‘독도지킴이 서약’ 등 독도와의 약속 캠페인과 ‘독도 바로 알기 OX 퀴즈’ 이벤트도 할 계획이다. 이동호 상일여중 교사는 “학생들은 교복을 입은 시민”이라면서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통해 학생이 배움의 주체로서 스스로 주인이 되는 문화가 뿌리내리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동정] 안양옥회장, 김주연 한국P&G사장, 이길여총장, 김현웅장관, 권동칠대표

    [동정] 안양옥회장, 김주연 한국P&G사장, 이길여총장, 김현웅장관, 권동칠대표

    ●안양옥(사진) 한국교총 회장은 22일 오전 11시 서울교대 종합문화관(서울 서초구 서초중앙로 96)에서 2015년 독도의 날 기념식을 개최한다. 이날 기념식에는 박주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 이주영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장, 홍사덕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신용하 독도학회장, 김경성 서울교대 총장 등 정·관·학계 및 교육계,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500여명이 참석한다. 독도의 날은 1900년 10월25일 고종황제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공표한 대한칙령 41호를 제정한 날을 기념해 한국교총이 전국단위 최초로 2010년부터 독도의 날로 지정해 기념식 및 독도특별수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P&G는 김주연 P&G 아시아 태평양 지역 베이비케어 부문 전무를 2016년 1월 1일자로 한국P&G 사장에 선임한다고 22일 밝혔다. 1995년 한국P&G에 사원으로 입사한 김주연 신임 사장은 SK-II, 오랄비, 질레트, 페브리즈, 팬틴, 위스퍼 등 다양한 브랜드를 담당해 왔으며 특히 SK-II 브랜드의 성장을 이끌어 한국P&G의 프리미엄 뷰티 사업 확대에 기여한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김 사장은 2011년 한국인 가운데 처음으로 P&G 글로벌 브랜드 프랜차이즈 리더에 발탁된 바 있다. ●가천대학교 이길여(사진) 총장은 오는 23일 오후 대학 컨벤션센터에서 “미래기술 및 인재양성의 발전 방안”을 주제로 가천미래기술전략포럼 창립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날 창립세미나는 미래창조과학부 강성주 인터넷융합정책관의 ‘미래 창조인재 양성방안’을 시작으로 김성태 융합산업연합회 회장의 ‘융합혁신경제를 향하여 : 융합산업 확산을 위한 융합디자인 리더 양성 전략’, 유동영 인터넷진흥원 사이버보안 인재센터장의 ‘정보보호 인력양성 현황과 전망’, 한정길 경기도 과학기술과장의 ‘스타트업 캠퍼스 운영’ 등 4개 주제발제에 이어 대학, 정부, 지자체 등을 대표하는 토론자들의 패널토의로 진행된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은 23일 오후 청주여자교도소를 방문해 직업훈련 등 수형자 교정교화 프로그램 현장을 점검한다. 이날 김 장관은 집중인성교육생에게 ‘타인을 위한 배려’를 주제로 특강을 하고, 청주여자교도소 ‘하모니 합창단’ 공연에서 합창단·관객과 함께 노래도 부른다. ●한국 아웃도어 브랜드 트렉스타(대표 권동칠, http://www.treksta.co.kr)는 오는 11월5일부터 7일까지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 34회 국제신발콘퍼런스(International Footwear Conference: IFC)에서 한국신발협회의 회장을 겸임하고 있는 권동칠 트렉스타 대표가 개최국 의장으로 나선다고 밝혔다. 국제신발콘퍼런스는 매년 12개 가입국을 순회하며 개최하고 있어 한국은 2003년 이후 12년 만에 개최국이 됐다. 현재 한국신발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권동칠 대표가 이번 콘퍼런스를 시작으로 개최국의 의장으로서 1년 간 활동하게 된다. 이명선 전문기자 mslee@seoul.co.kr
  • [현장 행정] 시월의 마지막 밤, 정동길 따라 걸어요

    [현장 행정] 시월의 마지막 밤, 정동길 따라 걸어요

    도시 자체가 거대한 문화유산으로 불리는 프랑스 파리는 매년 9월 셋째주 토·일요일을 ‘문화유산의 날’로 지정했다. 이날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엘리제궁을 비롯해 평소 접하기 어려운 문화시설을 개방한다. 파리 곳곳에서 다양한 공연과 행사도 펼친다. 서울 중구 정동에서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 오는 29~31일에 ‘정동야행’에서다. 지난 5월에 이어 두 번째 마련한 이번 ‘정동야행’에서는 성공회성가수녀원과 경운궁 양이재, 영국대사관과 캐나다대사관 등을 새롭게 추가해 27개 기관을 오후 10시까지 개방한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20일 “낮의 모습만 익숙했던 정동을,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는 가을밤에도 볼 수 있는 기회”라면서 “다양한 문화시설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줘 더 풍성한 볼거리, 즐길 거리로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정동은 우리의 화려한 문화와 뼈아픈 역사가 녹아 있는 곳”이라고 한 최 구청장은 “근대문화유산이 몰려 있는 정동에서 역사를 익히고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정동야행’에서는 성공회성가수녀원과 경운궁 양이재를 눈여겨볼 만하다. 내부가 공개되는 일이 드문 성공회성가수녀원은 오는 30일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아름다운 정원을 개방한다.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에서는 1900년대 초반에 만든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배당과 비잔틴 양식으로 장식한 제단화, 영국식 파이프오르간 등을 만난다. 1906~1910년에 귀족 자제 교육기관이었던 경운궁 양이재도 들어갈 수 있다. 양이재 건립 당시 덕수궁은 경운궁으로 불렸기 때문에 옛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영국대사관과 캐나다대사관도 일부 공개된다. 19세기에 지은 근대건축물인 영국대사관은 신청을 받아 선정된 80명에게 내부를 보여주고, 캐나다대사관은 29~30일 지하 1층 도서관의 문을 연다. 전문해설사에게 정동 이야기를 듣는 정동탐방프로그램 ‘다 같이 돌자 정동 한 바퀴’를 29~31일에 7차례로 확대했다. 공연도 다양하게 준비했다. 덕수궁 중화전에서는 고궁음악회(30일 오후 5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갈라쇼’(31일 오후 6시)를 연다. 서울시청 별관에선 마당극 ‘점돌이의 진실게임’을 진행한다. 사설 문화시설은 관람료를 50% 안팎으로 할인하면서 ‘정동야행’에 동참한다. 세실극장은 뮤지컬 ‘파이어맨’의 30일 공연 입장료를 1만 3000원으로 정했다. 밀랍인형 박물관 ‘그레뱅 뮤지엄’과 피규어·장난감 박물관 ‘토이키노’는 성인 입장료가 각각 1만 5000원, 6000원이다.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한지축제’가 열려 한지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세부 프로그램 확인과 신청은 정동야행 홈페이지(culture-night.junggu.seoul.kr)에서 할 수 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씨줄날줄] 길고양이 갈등/이동구 논설위원

    사람과 고양이의 공존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추정이긴 하나 약 5000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이 곡물 창고를 습격하는 쥐를 잡으려고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게 됐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태국에서는 오직 왕족만이 고양이를 기를 수 있었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오곡을 풍성하게 하는 동물’이라 부르며 귀하게 대접했다. 우리 국민도 쥐 잡는 동물로서 고양이를 오래전부터 사랑해 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양이가 134번 언급돼 있다. 제 역할을 못 하는 관리들을 ‘쥐를 잡지 못하는 고양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동서양 모두가 곡식이나 누에고치를 공격하는 쥐를 퇴치하는 역할로서 고양이를 좋아했던 것이다. 반면 수호자, 상징물 등으로 신격화되면서 고양이에게 재앙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고양이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풍요와 다산의 여신이자 여성의 보호자인 바스테트로 숭배했다. 이로 인해 고양이를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는 등 고양이로 인한 재앙이 시작됐다. 기르던 고양이가 죽으면 그 주인은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자신의 양 눈썹을 면도해 슬픔을 표시해야 할 정도까지 됐다고 한다. 기원전 900년경 로마로 건너갔을 당시에도 고양이는 가정과 사회를 지켜 주는 동물로 대접받으며 전 유럽으로 퍼져 갔다. 하지만 13세기 초 교회가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데 고양이를 이용하면서 다시 엄청난 수난을 겪게 된다. 이교도인 이집트인과 이교도 로마인들을 처단하기 위해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악마는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로 마녀사냥에 불을 붙였다. 이후 마녀로 지칭되면 으레 주변의 고양이와 함께 화형 등의 극형에 처해졌고, 씨가 마를 정도의 무수한 고양이들이 살육당했다. 이것이 또 다른 재앙의 불씨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고양이들이 사라진 거리는 쥐를 비롯해 설치류들의 세상이 됐고, 이들에 기생하는 벼룩과 쥐들은 사람까지 공격하게 됐다. 1348년부터 1350년 사이 유럽인의 절반이 희생됐다는 전염병인 흑사병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어쩌면 유럽인들은 고양이가 없는 세상의 대가로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의 목숨을 내줬는지도 모른다. 최근 우리 사회도 고양이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다. 얼마 전에는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던 50대 여성(캣맘)이 같은 아파트의 주민이 던진 것으로 여겨지는 벽돌에 맞아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개와 고양이 등 각종 반려동물들로 인한 이웃 간의 갈등이 법정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다반사가 됐다. 동물의 세계는 항상 천성 그대로인데 인간의 마음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와 고양이 등을 반려동물이라 부르는 이유를 되새겨 봤으면 한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을미사변의 치욕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을미사변의 치욕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을미년 8월 20일 일본인이 우리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니 그 사건의 대략적인 전말은 다음과 같다.(중략) 새벽녘에 서문에 이르러 훈련대와 일본군이 서로를 앞뒤로 호위하며…(중략) 광화문에 도착해 바로 근정전으로 들어가니,…(중략) 연대장 홍계훈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궁궐로 난입한 훈련대를 큰소리로 꾸짖다가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 또한 일본 병사의 칼에 죽었다.”(박은식의 ‘한국통사’ 중에서) 1900년 9월 남산 아래 장충단이 생겼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 당시 순국한 홍 장군과 이 대신, 부령 염도희, 영관 이경호 등을 배향해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5년 뒤 을사늑약이 체결됐고 1908년 8월 일제에 의해 장충단이 폐사되면서 제향도 맥이 끊겼다. 이것을 1988년에 중구가 복원해 매년 추모제향을 올리고 있다. 8일 중구는 남산공원 장충자락(옛 장충단공원)에서 120주기 추모제향을 거행했다. 이날 최창식 구청장이 초헌관을, 이경일 중구의회 의장이 아헌관을, 이도철 참령의 증손인 이해권 제천문화원장이 종헌관을 각각 맡아 봉향했다. 제례위원은 후손들과 15개 동 자치위원장으로 구성했다. 이날 장충단제는 추모제향에 이어 추모시 낭송, 한국무용, 추모곡 및 판소리 연주 등으로 진행됐다. 마지막 헌화에는 선열의 후손들과 일본인 등이 참석했다. 수염을 붙이고 제관복을 갖추며 초헌관을 충실히 재현한 최 구청장은 “추모제향은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고 애국애족의 마음을 다지는 소중한 기회”라며 “역사는 항상 반복된다. 과거 뼈아픈 역사를 잊으려 하지 말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해외여행 | Shalom, Israel 샬롬, 이스라엘④잠들지 않는 도시, 텔아비브Tel Aviv

    해외여행 | Shalom, Israel 샬롬, 이스라엘④잠들지 않는 도시, 텔아비브Tel Aviv

    ●Tel Aviv·Jaffa 텔아비브·야파 잠들지 않는 도시, 텔아비브Tel Aviv 텔아비브에 오기 전까지 이스라엘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다시 온다 하면 그때는 가자나 서안지구를 보고 싶었지 이스라엘을 더 보고 싶은 마음은 별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텔아비브에 와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선 좀 살아 봐도 좋겠구나.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국제도시다. 지중해를 따라 남북으로 14km에 걸쳐 아름답게 펼쳐진다. 딱히 내가 아니더라도 분위기만으로 텔아비브에 홀리는 여행객은 적잖을 게 분명하다. 지중해의 하얀 햇빛은 텔아비브 어디서나 찬란하게 빛났다. 색색의 파라솔이 가득한 텔아비브의 비치는 지중해의 여느 휴양지 같다. 외양만 보면 여기를 하와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북쪽의 야르콘강에서 출발해 비치를 따라 남쪽의 야파까지 두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텔아비브 여행을 시작했다. 카르멜 시장과 야파의 벼룩시장을 구경하고 바닷가를 산책했다. 인터콘티넨탈 호텔 뒤편, 네베 쩨덱Neve Tsedek은 1887년 고대 항구인 야파를 벗어나 유대인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곳이다. 텔아비브는 바로 네베 쩨덱에서 시작됐다. 텔아비브가 이스라엘의 뉴욕이라면 네베 쩨덱은 텔아비브의 소호다. 1900년대 초반부터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슈무엘 아그논Shmuel Agnon, 1888~1970년같은 노벨상 수상 작가도 있었다. 뉴욕의 소호나 이스트 빌리지 같은 분위기를 간직한 네베 쩨덱은 텔아비브에서 가장 세련되고 활기찬 거리다. 유명한 문화 학회, 디자이너 부티크, 갤러리, 숍, 카페와 레스토랑을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텔아비브 남쪽은 고대 도시 야파Jaffa다. 야파의 옛 이름은 욥바Joppa. 야파의 역사는 3,000년 전 시작된다. 1909년 야파에 살던 유대인들이 현재의 텔아비브 지역으로 이주해 살기 시작하면서 텔아비브란 도시가 탄생했다. 백색의 도시, 텔아비브는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50년 텔아비브와 야파는 통합되어 텔아비브-야파로 이름을 바꾼다. 텔아비브에 머무는 동안 느닷없이 나이트클럽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미국에서 온 ‘나이트 라이프 전문’ 여기자, 그리고 ‘텔아비브 나이트 라이프’ 담당 공무원과 함께 텔아비브의 각양각색 클럽을 돌아다녔다. 유흥과는 담쌓고 지낼 것 같은 이스라엘에 와서 클럽 호핑을 할 줄이야! 테이블에 올라가 춤을 추는 건 여기도 예외가 아니다. 텔아비브의 밤은 뜨겁고, 아주 유혹적이다. 벤구리온 공항에 내릴 때 잠시나마 가졌던 긴장이 새삼스럽다. 텔아비브를 싸돌아다니다 보니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이 되어 폭탄 테러를 돌이켜 생각하게 됐다. 여느 지중해의 휴양지 같은 이곳에도 분쟁의 흔적과 기억은 남아 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이 땅은 ‘팔레스티나’라고 불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땅을 여전히 팔레스티나라고 부를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는 복잡하다. 10년 전 일이라곤 하나 인터콘티넨탈 호텔 근처 바닷가의 나이트클럽에서 자살폭탄테러가 있었다. 어제 오늘 내가 산책을 하며 오갔던 곳이라는 게 좀처럼 실감나지 않는다. 1948년 5월14일 다비드 벤 구리온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한 곳도 텔아비브이고, 1995년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모색하던 전 이스라엘 총리 라빈이 극우 유대 청년인 아미르에게 희생된 곳도 텔아비브다. 여담이지만 현재 아미르는 감옥에서 풀려나왔고, 자신의 변호사와 결혼해 잘 살고 있다고 한다. 135개국 사람들이 사는 나라 우리나라 경상도 크기의 이스라엘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135개국 사람들이 살고 있다. 국가의 존재 자체가 다문화국가이니 생활환경도 국제적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에서도 텔아비브는 이런 국제적 분위기의 정점에 놓인 도시다. 게다가 평균연령 28.3세의 매우 젊은, 어쩌면 청춘의 도시다. 팔레스타인 문제만 없다면, 문화적 다양성만으로 보면 텔아비브는 ‘리틀 뉴욕’ 같다. 텔아비브는 뉴욕처럼 ‘잠들지 않는 도시’다. 금년에는 동성애자 축제인 ‘마디 그라 텔아비브’ 페스티벌이 처음으로 열렸다. ‘하느님의 나라’, 이스라엘에서 동성애자들의 축제가 열렸다는 게 나로선 무척 신기하다. 미국이 그렇듯 이스라엘 역시 국내적으론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중요하다. 그러나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유대인들은 텔아비브 시청사 앞에서 “인종차별을 하지 말라”고 시위한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 비슷한 처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유럽의 백인 출신 유대인과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출신 흑인 유대인의 생활수준은 완전히 다르고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은 어떤 식으로든 분출되기 마련이다. 이스라엘에는 아랍계 이스라엘 국민도 적지 않다. 이스라엘 인구 740만 중 20%는 아랍인이다. ‘아랍계 이스라엘 국민’이란 모순을 안고 사는 이들이다. 이스라엘의 공식 언어는 히브리어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름 아닌 아랍어다. 전 세계 이슬람 국가들과 늘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인터콘티넨털 호텔 바로 옆에 이슬람 사원이 있다. 이스라엘 국민 중 유대교를 믿는 사람은 20%밖에 되지 않는다. 유대교도 중에서도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정통 유대교도’는 겨우 5%에 불과하다. 아랍인은 무슬림, 기독교, 드루즈파로 나뉘고 이스라엘의 분류법에 따르면 기독교도마저 아랍인으로 간주된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성서는 구약만을 뜻하며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예수는 여러 선지자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 이 모든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제가 혼재되어 있는 곳이 이스라엘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사막과 사해, 지중해, 갈릴리 그리고 텔아비브까지 국토는 작으나 이스라엘의 지형과 기후, 문화는 매우 다채롭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분쟁만 없다면 이스라엘은 완벽한 여행지다. 텔아비브에서 만난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해외여행을 갈 필요가 없어요. 이스라엘에는 지중해가 있고 사해가 있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사막이 있고 바다 같은 갈릴리 호수가 있어요. 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탈 필요가 없는 거죠. 예루살렘에서 두 시간이면 이 모든 곳에 갈 수 있거든요.” 그렇다. 이스라엘을 3일간 여행한다면 하루는 지중해, 하루는 사해, 하루는 사막에 갈 수 있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는 없다. 이스라엘에서 사람을 만날 때 건네는 인사는 ‘샬롬’이다. 샬롬은 히브리어로 평화를 의미한다. 일주일간의 이스라엘 여행을 마치고, 모두가 자유롭게 될 그날을 위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 샬롬, 이스라엘. 샬롬, 팔레스티나. ▶travel info Israel ISRAEL 인구는 724만. 아랍 이슬람, 아랍 기독교, 두르즈, 베두인, 체르체스키, 사마리아, 유대 디아스포라 출신이 모여 산다. 천연 자원은 거의 없지만 개인당 GDP는 2만7,300달러에 달한다. 세 개의 대륙과 두 개의 바다가 만나는 곳에 세워진 이스라엘은 매우 복잡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가진 나라다. AIRLINE 화·목·토요일 운행하는 대한항공의 경우 인천에서 텔아비브까지 약 11시간 걸린다. 이스라엘항공의 경우 베이징을 경유한다. 우즈벡항공이나 타이항공을 이용할 수도 있다. transportation 이스라엘은 국토 면적이 작아 버스나 기차로 이동하기에 편리하지만 국내 항공편은 비싸다. 기차 | 편리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안식일과 유대교 휴일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쉐루트(합승택시) | 버스 노선과 같은 구간을 운행한다. 대개 버스 요금과 비슷하거나 저렴하다. 쉐루트가 아닌 보통 택시의 경우 야간, 휴일 그리고 안식일에 25% 할증된다. food 팔라펠felafel |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거의 모든 거리에서 볼 수 있다. 이집트 콩을 저며 양념과 함께 둥글게 빚어 튀겨 만든다. 동그란 피타 빵 안에 넣어 먹는다. 호무스Hummus | 으깬 병아리 콩을 참깨와 함께 반죽해 만든다. 올리브 오일, 파슬리, 피타 빵 등 다른 사이드 메뉴와 함께 먹는다. 코셔Kosher 음식 | 유대교 율법에 의해 먹어도 좋다고 허락된 음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우유와 육류를 함께 먹거나 굴을 먹는 것은 금지된다. 코셔 식당에는 그 지역 랍비가 인증한 증명서가 진열돼 있다. immigration 출발 3시간 전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탑승할 항공사 카운터로 가기 전 보안 검사를 받는다. 두 명의 보안 요원은 다음 같은 질문을 번갈아 가며 되풀이한다. “이스라엘에 며칠 있었죠? 이스라엘에 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누가 짐을 쌌습니까? 어디서 짐을 쌌습니까? 어디를 방문했습니까? 어느 호텔에서 잠을 잤죠? 일주일 동안 잠을 잔 호텔 이름을 전부 말하세요.” 경우에 따라선 20가지 정도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전에 이스라엘관광청을 통해 질문 내용을 인지하고 답변을 미리 준비하면 덜 당황할 것이다. 수하물로 부치는 짐은 잠그지 않는 게 좋다. 잠겨 있을 경우 보안 검색 과정에서 보안요원에 의해 파손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선 입출국 때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 주지 않는다. 대신 얼굴 사진이 들어간 스티커 같은 종이를 여권과 함께 건네준다. 이스라엘에 왔다는 흔적은 별지의 스티커 외 여권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SABBATH안식일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대개 금요일 오후에서 일요일 해가 질 때까지를 하루로 계산해 ‘안식일’이라 부른다. 관광객에게 안식일이 중요한 이유는 안식일에 거의 모든 가게, 식당이 문을 닫고 지역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지만 버스와 기차 같은 대중교통조차 운행을 멈추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안식일은 1년 중 50일 정도라고 하지만 안식일이 금요일 오후에 시작되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는 100일에 가깝다. money 뉴 이스라엘 쉐켈shekel 또는 줄여서 쉐켈이다. 지폐 단위는 20, 50, 100, 200이다. 1 쉐켈은 310원. 달러를 받는 곳도 많지만 어느 정도 쉐켈을 준비하는 게 좋다.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박준 취재협조 이스라엘정부관광청 www.goisrael.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서울 핫 플레이스] 요리 보고~ 조리 보고~ ‘둘리’ 집에 놀러와요

    [서울 핫 플레이스] 요리 보고~ 조리 보고~ ‘둘리’ 집에 놀러와요

    서울의 최북단 도봉구. 도봉에는 연간 1000만명이 찾는 도봉산이 있다. 도봉구에는 ‘도봉산이 있고, 도봉산이 있고, 도봉산이 있다’고 할 만큼 도봉산만 있었다. 이 때문에 ‘도봉산을 타고 내려와 막걸리 한잔하고 돌아서면 땡인 동네’였다. 그러나 이동진 도봉구청장이 2010년 7월 취임한 뒤 구에 꼭꼭 숨어 있던 근현대 역사·문화 자원을 차근차근 발굴해 개발하면서 도봉은 온 가족이 즐길 만한 동네로 변모했다. ●‘조선 최고 부자·문화재 지킴이’ 간송 전형필 가옥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산도 타고 아빠·엄마의 어렸을 적 이야기도 들려주고 근현대사에 대한 교육도 하고 싶다면 ‘도봉역사관광문화벨트’를 추천한다. 먼저 북한산 둘레길을 가볍게 산책한 뒤 도봉산 옛길과 방학동길을 따라 쭉 내려오면 처음 만나는 곳이 간송 전형필의 가옥(시루봉로 149-18)이다. 간송은 1906년 종로4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인 전계훈이 종로4가의 거의 모든 상권을 장악했고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까지 확장한 덕에 말 그대로 ‘금숟가락을 물고 나온 아이’였다. 일본 와세다대 유학생이던 그는 23살의 나이에 당대 최고 한학자로 불리는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나 민족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24살 때 막대한 유산을 받은 뒤로 헐값에 일제로 흘러가던 우리 문화재를 사 모으게 된다. 간송이 사재를 털어 지킨 문화재는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 등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기와집 10채 값을, 고려청자 20여 점은 기와집 400채 값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복원된 가옥 옆에는 간송과 그의 아버지 전영기의 묘가 나란히 있다. 1900년대 초반 지어진 뒤 제대로 개·보수가 이뤄진 적 없었던 이 집은 2011년 이동진 도봉구청장이 산행 중 주민들과 함께 발견했다. 이후 구가 유족 등과 함께 문화재청에 문화재 지정신청을 한 뒤 최근에야 제 모습을 되찾았다. 간송 가옥의 첫인상은 “애걔”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별 볼일이 없다. 조선 최고 부자가 살았다고 하기에는 안방과 마루, 사랑채로 구성된 구조가 너무 단출하다. 간송의 본가는 서울 종로이고 도봉의 집은 땅을 관리하기 위해 전국에 지어 놓은 집 중 하나였다고 한다. 간송 시절에 도봉은 경기도 땅이었다. 종로 본가와 다른 가옥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다 소실됐고 현재 이 집만 남았다. 규모는 작지만 향나무와 소나무, 자작나무를 재료로 ‘한 일(ㅡ)’ 자로 지어진 집은 명문가답게 고풍스럽다. 간송 가옥 보수에 참여한 목수는 “돌을 놓는 방법은 물론 문 크기, 빛이 들어오는 방향 등이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된 집”이라면서 “서울 명문 가옥의 축소판”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1일 정식 개관한 간송 전형필 가옥에선 앞으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재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될 예정이다. ●‘불온한 시인’ 김수영문학관선 낭독의 체험 전형필 가옥을 나와 정의공주와 연산군묘, 원당샘공원을 지나면 ‘불온한 시인’ 김수영의 문학관이 나온다. 김수영이 도봉 쪽에 살았나 갸웃할 것이다. 김수영은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징집돼 북으로 끌려간 탓에 1952년까지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54년 부인 김현경씨 등 가족과 재회한다. 이때 새 삶의 터전이 도봉동이다.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김수영문학관은 전시실과 수장고, 도서관, 동아리방 등으로 구성됐다. 전시실에서는 그가 펴낸 시집을 비롯해 작품 초고, 산문 원고, 번역서, 펜과 수첩, 서재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김수영 시인의 시를 직접 낭독하고 들을 수 있는 체험관이 있어 눈길을 끈다. ●책 보고 노래하고… 엄마·아빠·아이들의 놀이터 ‘둘리 뮤지엄’ 이쯤 되면 아이들 입에서 “이게 뭐야! 하나도 재미없어” 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가능성이 99.99%다. 이때 눈앞에 둘리와 도우너, 또치, 마이콜, 희동이가 짠! 하고 나타난다. 바로 지난 7월 개관한 둘리뮤지엄이다. 도봉구가 ‘둘리 아빠’ 김수정 작가와 힘을 합쳐 만든 이곳은 한국 최대의 캐릭터 박물관이다. 둘리가 살았던 고길동의 집이 도봉구 쌍문동이라는 점에 착안해 만든 어린이 문화시설이다. 1층에 들어서 아이들이 “둘리야”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면 빙하 속에 잠자는 둘리가 눈을 뜨면서 모험이 시작된다. 1층에서는 둘리의 극장판 ‘얼음별 대모험’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도우너의 시간 여행 미끄럼틀과 우주버스 타기, 우주의 적 바요킹과의 대결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바요킹을 무찌르고 나면 스튜디오에서 둘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2층은 둘리 연재 만화를 보고 자란 어른들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2층은 2009년 새로 제작된 ‘고길동의 아마존 표류기’와 ‘둘리와 친구들의 저승행차’ ‘마법의 피라미드 여행’ ‘유령선 탈출기’ ‘알 수 없는 나라’ 등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각각 포토존이 있다. 캐릭터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둘리 소시지, 둘리 책가방, 둘리 필통, 둘리 물감 등 엄마·아빠가 초등학생 때 썼던 물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둘리뮤지엄의 수장고에는 이런 물품 1000여점이 보관돼 있다. 시설 관계자는 “키덜트들이 특히 좋아하는 공간”이라면서 “이곳을 보고 마이콜 뮤직스테이지로 가면 엄마와 아빠가 손을 잡고 ‘요리 보고~ 저리 보고~’ 하며 둘리 주제가를 열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3층으로 올라가면 시계 그네와 정글짐 등 아이들이 몸으로 놀 수 있는 키즈카페가 마련돼 있다. 1, 2층에서 꼬마들을 데리고 다니느라 진을 뺀 부모를 위한 커피숍도 이곳에 있다. 몸으로 뛰놀기에 체력이 달리는 아빠들은 근처 어린이 도서관을 이용해도 좋다. 어른 5000원, 어린이 7000원을 받는 뮤지엄동과 달리 도서관은 ‘공짜’다. 현재 5000여권의 책을 소장한 어린이 도서관은 ‘숲속의 둘리’라는 주제로 꾸몄다. 아이들이 뒹굴면서 책을 볼 수 있다. 책의 종류도 둘리 성격에 맞춰 ‘공부’보다는 ‘놀이’와 ‘친구들과 잘 지내는 법’ 등에 맞춰 구비됐다. 어른들을 위한 만화책도 있다. 학교 때 만화방을 들락거렸다면 부모들도 심심하지 않다. 앞으로는 구연동화와 종이접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할 예정이다. ●한적한 골목엔 ‘한국의 간디’ 함석헌 선생의 흔적 가득 둘리뮤지엄을 나와 정의여고 방향으로 걸으면 한적한 주택가가 나온다. 이 골목 한쪽에 ‘한국의 간디’ 함석헌 선생 기념관(쌍문동 도봉로 123길 33-6)이 있다. 생의 마지막 7년을 보낸 집을 수리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이자 시인이자 철학자이자 종교인이다. 기념관에선 그의 책과 저서, 생활용품 등 유품 400여점과 생전 육성이 담긴 강의 테이프, 동영상 등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지하 1층 세미나실은 게스트룸으로 이용할 수 있다. 함석헌기념관을 다 봤다면 주변 주택가를 한번 휙 둘러봐도 좋다. 기념관을 주변으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전태일 열사 등 한국 근현대사를 빛낸 쟁쟁한 인물들의 집터가 남아 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알쏭달쏭+] 10cm ‘발’의 역사… ‘전족’을 아시나요?

    [알쏭달쏭+] 10cm ‘발’의 역사… ‘전족’을 아시나요?

    최근 영국 BBC가 중국에서 사라져 가는 ‘전족 여인’들의 일상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예고편을 공개했다. 전족은 과거 중국 여성들의 ‘미의 상징’이자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송나라 시기인 10세기에 처음 탄생한 이 전통은 190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여성들은 가능한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해 5세 정도부터 헝겊으로 발을 단단하게 동여맸다.여기에 구부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은 뒤 5년 동안 사이즈를 늘리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길이 10㎝ 안팎 정도밖에 발이 자라지 않는다. 후대에 들어서 ‘악습’으로 불릴 만큼 고통스러웠던 이 전통은 단순히 발의 변화만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발은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수축되면서 흉측하게 변했고, 통증과 외형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세가 이어지면서 등도 기형적으로 변해갔다. 1902년 전족의 악습이 법적으로 금지되면서 점차 여성들의 발도 해방을 맞았지만, 현재까지 고통스러운 전통을 고스란히 가진 채 살아가는 할머니들이 소수 남아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여성은 올해 84세인 왕후이위안 할머니다. 윈난성에 사는 그녀는 1930년대에 전족을 가지게 됐다. 법으로 금지된 지 한참 지난 후였지만 여전히 당시 사회는 작은 발을 ‘아름다운 발’이라고 여겼다. 왕 할머니는 “꽉 묶은 발은 당시에도 매우 유행했고 모두가 그렇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웃음거리가 됐다. 큰 발을 가진 여성들을 손가락질하며 ‘저 발 좀 봐’라고 말했다”라면서 “나 역시 처음에는 발을 묶지 않았는데, 이런 놀림을 받은 뒤 결국 전족 풍습을 따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5살인가 6살 때부터 발을 묶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이를 도와주셨다. 처음에는 너무 아파서 안하겠다고 소리도 치기도 했고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기도 했다”면서 “그 과정은 매우 괴로웠다. 많은 엄마들은 딸의 발 뼈를 반으로 부러뜨려서라도 딸들의 발을 전족으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전족은 중국 여성의 상징성을 가지는 동시에 결혼을 위한 ‘사회적 도구’로 여겨졌다. 더 작은 발을 가질수록 더 매력적인 여성으로 평가됐기에 여성들은 고통과 장애, 그리고 불법행위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고서라도 전족을 행해야 했다. 왕 할머니는 “정부에서 사람들이 나와 전족 풍습을 여전히 따르고 있는지 감시했다. 만약에 그것이 걸리면 벌금을 내야 했고 나는 그것이 두려워 숨어 다녔다”고 말했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전족의 전통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현지시간으로 10일 저녁 9시 BBC2 채널에서 방송될 예정이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나우! 지구촌] 일그러진 발의 역사…‘전족’을 아시나요?

    [나우! 지구촌] 일그러진 발의 역사…‘전족’을 아시나요?

    최근 영국 BBC가 중국에서 사라져 가는 ‘전족 여인’들의 일상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예고편을 공개했다. 전족은 과거 중국 여성들의 ‘미의 상징’이자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송나라 시기인 10세기에 처음 탄생한 이 전통은 190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여성들은 가능한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해 5세 정도부터 헝겊으로 발을 단단하게 동여맸다.여기에 구부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은 뒤 5년 동안 사이즈를 늘리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도 길이 10㎝ 안팎 정도밖에 발이 자라지 않는다. 후대에 들어서 ‘악습’으로 불릴 만큼 고통스러웠던 이 전통은 단순히 발의 변화만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발은 뼈가 부러지거나 근육이 수축되면서 흉측하게 변했고, 통증과 외형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세가 이어지면서 등도 기형적으로 변해갔다. 1902년 전족의 악습이 법적으로 금지되면서 점차 여성들의 발도 해방을 맞았지만, 현재까지 고통스러운 전통을 고스란히 가진 채 살아가는 할머니들이 소수 남아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여성은 올해 84세인 왕후이위안 할머니다. 윈난성에 사는 그녀는 1930년대에 전족을 가지게 됐다. 법으로 금지된 지 한참 지난 후였지만 여전히 당시 사회는 작은 발을 ‘아름다운 발’이라고 여겼다. 왕 할머니는 “꽉 묶은 발은 당시에도 매우 유행했고 모두가 그렇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웃음거리가 됐다. 큰 발을 가진 여성들을 손가락질하며 ‘저 발 좀 봐’라고 말했다”라면서 “나 역시 처음에는 발을 묶지 않았는데, 이런 놀림을 받은 뒤 결국 전족 풍습을 따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5살인가 6살 때부터 발을 묶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이를 도와주셨다. 처음에는 너무 아파서 안하겠다고 소리도 치기도 했고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기도 했다”면서 “그 과정은 매우 괴로웠다. 많은 엄마들은 딸의 발 뼈를 반으로 부러뜨려서라도 딸들의 발을 전족으로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전족은 중국 여성의 상징성을 가지는 동시에 결혼을 위한 ‘사회적 도구’로 여겨졌다. 더 작은 발을 가질수록 더 매력적인 여성으로 평가됐기에 여성들은 고통과 장애, 그리고 불법행위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고서라도 전족을 행해야 했다. 왕 할머니는 “정부에서 사람들이 나와 전족 풍습을 여전히 따르고 있는지 감시했다. 만약에 그것이 걸리면 벌금을 내야 했고 나는 그것이 두려워 숨어 다녔다”고 말했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전족의 전통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현지시간으로 10일 저녁 9시 BBC2 채널에서 방송될 예정이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문화 지킴이’ 간송의 혼 되살아난다

    2011년 10월. 주민들과 서울 도봉산 둘레길을 걷던 이동진 도봉구청장의 눈에 한옥 한 채가 들어왔다. 담장 위의 기와는 깨져 있고 훼손 부위가 많아 파란 천막으로 덮어 놨지만 그 생김 자체는 근엄하고 기품이 있었다. 이 구청장이 이상하다 싶어 어떤 집인지 물으니 지역 토박이 주민이 “간송 전형필 선생의 집인데 모양이 저렇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간송 전형필. 조선 말 당대 최고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사재를 털어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청자,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 등 국보급 문화재를 일제가 강탈하는 것을 막았다. 이 구청장은 “문화재를 통해 민족의 정신을 지킨 간송의 가옥이 저렇게 방치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구는 먼저 유족과의 협의 과정을 거쳐 간송의 가옥을 문화재청에 문화재 지정·신청을 했고 2012년 12월 14일 국가문화재 521호로 지정됐다. 이어 1900년대 초 지어진 뒤 한번도 제대로 수리가 안 된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전쟁 때 소실된 대문과 일부 담장은 개보수가 시급했다. 이 구청장은 “본채와 부속 건물, 주변 담장의 원형을 되찾는 데 중점을 뒀다”면서 “주변은 공원으로 정비해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전형필 가옥에선 문화재청 문화유산 체험 교육 프로그램인 ‘생생문화재 사업’과 ‘도봉 역사문화 탐방길’ 등이 운영된다. 또 지역 주민과 시민을 위한 열린 문화 공간으로 개방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구는 11일 오전 10시 30분에 간송 전형필 가옥 개관식을 연다고 7일 밝혔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美선교사 ‘알렌 훈장’ 문화재 된다

    美선교사 ‘알렌 훈장’ 문화재 된다

    고종 황제가 1904년 미국인 의료선교사이자 외교관이던 알렌(1858~1932)에게 수여한 훈장이 문화재로 등록될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알렌 수증 훈공일등 태극대수장’을 문화재 등록 예고했다고 19일 밝혔다. 훈장이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건 처음이다. ‘알렌 훈장’은 정장(正章·약식이 아닌 정식으로 된 훈장 등을 통칭), 부장(副章·끈이 없는 메달로 정장과 함께 가슴에 다는 표지), 대수(大綬·정장을 달기 위해 어깨에서 허리에 걸쳐 드리우는 큰 띠)로 이뤄져 있다. 정장 위쪽은 대한제국 상징인 이화꽃 문양으로 표현돼 있으며, 꽃잎 뒷면엔 한자로 ‘훈공일등(勳功壹等)’이 새겨져 있다. 부장도 태극장 형태이며, 정장과 함께 대수 윗부분에 꽂을 수 있도록 제작됐다. 대한제국기 훈장 제도는 1900년 정치·외교적 공로를 인정하기 위해 도입돼 1910년까지 시행됐다. 알렌이 훈장을 받은 1904년까지 태극장을 수여받은 사람은 100여명이며, 정장·부장·대수가 모두 남아 있는 예는 드물다. 문화재청은 “알렌 훈장의 역사성과 희소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문화재 등록 예고했다”고 설명했다. 알렌은 1884년 의료선교사로 입국해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1905년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훈장을 가져갔다. 그의 사후 유가족이 지난 4월 연세대 의과대학에 기증했다. 현재 연세대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털매머드 멸종 이유는 고대 인류의 사냥 때문”

    “털매머드 멸종 이유는 고대 인류의 사냥 때문”

    한 때 유럽에서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살았던 전설의 동물이 있다. 바로 긴 털과 거대한 엄니를 자랑하는 털매머드다. 시베리아에서는 약 1만 년 전, 북극해의 한 섬에서는 약 3,700년 전 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매머드는 그러나 어느순간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멸종동물에 이름을 올렸다. 그간 학계에서는 매머드의 멸종 이유를 놓고 다양한 이론이 발표됐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학설은 당시 인류가 매머드를 사냥해 ‘씨’가 말랐다는 것.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운석 충돌의 영향으로 매머드가 멸종했다는 이론이 학계에서 힘을 얻어왔다. 이 가설을 세운 대표적인 학자가 캘리포니아 대학 제임스 케네트 교수. 그는 혜성 충돌의 영향으로 지구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매머드를 비롯한 거대 동물 멸종, 인류 문명이 소멸됐다는 이른바 ‘영거 드라이아스기 충돌 이론’(Younger Dryas impact theory)을 펼쳐왔다.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알렉산더 심스 교수 역시 약 1만 2900년 전 북미에 거대한 혜성 파편이 떨어져 매머드, 세이버투스(검치호·윗니 두 개가 휘어진 칼처럼 생긴 호랑이)등이 멸종된 것으로 보인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번에는 다른 각도의 연구방법으로 매머드 멸종 이유를 분석한 흥미로운 논문이 나왔다. 최근 영국 엑시터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팀은 매머드의 멸종 이유를 밝히기 위해 통계 분석을 이용했다. 그 결과 고대 인류가 각 대륙과 섬으로 퍼져나가는 것과 맞물려 그 지역에 사는 매머드가 급격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곧 고대 인류가 매머드를 식량으로 사냥해 씨가 말랐다는 이론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 연구를 이끈 엑시터 대학 루이스 바렛 박사는 "마치 50년 논쟁에 못 질을 한 기분" 이라면서 "인류가 매머드 멸종의 주요한 원인이며 기후 변화 등은 이를 악화시킨 요인으로 보인다" 고 주장했다.   이어 "당시 인류가 매머드 등과 서식지를 공유하며 평화롭게 살았다는 일각의 주장은 그야말로 신화" 라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해외여행 | 서정으로 빚어낸 땅 Norway노르웨이①아르누보의 꽃이 피다 Alesund올레순

    해외여행 | 서정으로 빚어낸 땅 Norway노르웨이①아르누보의 꽃이 피다 Alesund올레순

    새였다면 좋았을 텐데. 우렁찬 산의 높이와 고요한 물의 깊이 그리고 피오르를 감싸던 바람의 너비 사이에서 유영하고 싶었다. 예술을 품은 도시도 마찬가지. 노르웨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은 평화. 그리고 그것만으로 완벽한 세상. ●아르누보의 꽃이 피다 Alesund올레순 불길이 지나간 자리, 동화가 되었다 책 한 권 펼쳐 들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랜딩 사인에 눈을 떴다. 오슬로에서 2시간, 달콤한 잠 한숨 거리에 올레순이 있다. 손바닥만한 공항을 나와 3개의 해저 터널을 지나면 도심에 도착한다. 공항이 도심에서 1시간 거리에 자리한 비그라Vigra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데 유명한 오슬로나 베르겐을 제쳐 두고 올레순이라니. 이름조차 낯선 이곳에 ‘왜’ 왔는가. 남서부 해안가에 자리한 올레순은 인구 4만여 명의 작은 소도시다. 이를 증명하듯, 도시 한가운데에 들어서도 한적하기만 하다. 빽빽한 것은 건물이요, 드문 것은 사람이다. 여행의 재미 중 8할은 사람이 주는 것이라지만 올레순은 아니다. 도심 곳곳 발길 가는 어느 곳에서건 고개를 들어 건물의 벽과 문, 창문과 지붕을 볼 것. 감탄사는 미리 준비해 두시라. 올레순은 ‘아르누보Art Nouveau’의 옷을 입은 도시다. ‘새로운 예술’이란 아르누보는 1900년대 초반, 유럽을 중심으로 유행한 건축양식인데 사실 단순 명료하게 설명하긴 어렵다. 자연의 것에서 모티브를 얻기도 하고, 일본 판화 양식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는 등 발상과 표현을 자유롭게 한, 그야말로 ‘새로운’ 모든 양식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애매모호할지라도 걱정하지 말길. 올레순에 들어서는 순간, 무엇이 아르누보인지 당신의 눈이 먼저 깨달을 것이다. 건물을 휘감은 넝쿨 장식, 아치형 창틀, 둥글거나 뾰족한 지붕 등은 섬세한 감성을 가진 누군가가 꼼꼼히 손본 삽화 속 동화마을 같다. 올레순을 관통하는 브로순뎃Brosundet 바닷가의 여유로운 풍경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올레순의 낭만적인 풍경은 비극에서 비롯된 것이다. 1904년 마을 서쪽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는 바닷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져 온 도시를 불태우고 말았다. 나무 건물이 대부분이었던지라 속수무책으로 화마에 휩싸였고, 단 한 채만을 남기고 850여 채의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됐다. 이 소식을 듣고 곳곳에서 젊은 건축가들이 찾아와 마을을 다시 살리는 데 손을 더했다. 마을은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스타일로 3년 만에 재건됐다. 벽돌 건물이 대부분인 것도 그때의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마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미라클 하우스’는 지금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파란만장한 올레순의 역사는 아르누보 센터에서 영상과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역사를 알고 나면 걸어 다니며 보이는 마을의 풍경이 새롭게 다가온다. 시련이 올레순에 깊이를 더해 준 셈이다. 물론 이런 풍경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은 시의 허가가 없이는 함부로 새로 짓거나 디자인을 변경할 수 없고, 색을 새로 칠할 수도 없다. 덕분에 건물 내부는 현대식으로 바뀌더라도 외형만큼은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건물 하나하나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아르누보를 만날 수 있으니 올레순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걷기’다. 그리고 악슬라Aksla 전망대에 올라 전체를 조망하는 기쁨도 놓칠 수 없다. 마을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악슬라 전망대는 418개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이 있고, 차를 타고 산을 빙글 돌아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전망대에 서면 마을은 미니어처가 된다. 건축양식 덕분인지 더욱 아기자기하다. 색색깔의 건물, 멀리 보이는 섬을 오래 기억하려면 가만히 서서 여유롭게 바라볼 일이다. 볕이 좋은 날이면 이곳 주민들도 악슬라산을 오르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고. 노르웨이 바다 생태를 한눈에 아틀란틱 씨 파크Atlanterhavsparken 물개가 바다와 연결된 야외 연못에서 고개를 쏙 빼어 들고 사육사에게 먹이를 달라고 다리로 수면을 팡팡 친다. 아틀란틱 씨 파크는 노르웨이 바다에 살고 있는 어종을 관찰할 수 있는 해양 테마파크다. 물개와 펭귄이 살고 있는 야외 연못, 자연광을 이용한 내부 수족관 등으로 이뤄져 있다. 앞 바다의 물을 그대로 수족관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게를 낚거나 멍게나 불가사리를 직접 만져 볼 수 있는 체험형 공간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일 때 더욱 즐겁다. 9~5월 | 월~토요일 11:00~16:00, 일요일 11:00~18:00, 6~8월 | 토요일 10:00~16:00, 월~금요일 및 일요일 10:00~18:00 170크로네, 3~15세 아동 75크로네, 3세 이하 무료 Atlanterhavsparken, Tueneset, N-6006 Alesund +47 70 10 70 60 www.atlanterhavsparken.no 글·사진 차민경 기자 취재협조 노르웨이관광청 www.visitnorway.co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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