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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남시대를 연 제3한강교… 서울의 생명줄이 흐른다

    강남시대를 연 제3한강교… 서울의 생명줄이 흐른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5회 한강 밤마실(동호에서 반포까지)’ 편이 지난 3일 한강공원 잠원 및 반포지구에서 열렸다. 장마와 불볕더위를 피해 오후 6시부터 진행하는 혹서기 야간투어 프로그램의 두 번째 순서였다. 폭염과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40여명의 참석자는 압구정역 6번 출구에 어김없이 집결했다. 시위대가 진을 치고 있어서 집결 장소를 지하역사 안으로 변경한 데다 3호선 전철이 신호장애로 연착해 일부 참가자가 지각하는 소동이 빚어졌지만 무사히 함께 모여 출발할 수 있었다. 투어는 압구정 현대백화점과 동호대교 사이 육교를 타고 올라가 동호대교 아래에 이르는 아슬아슬한 다리 체험으로 시작됐다. 동호대교~한남대교를 거쳐 반포대교와 잠수교로 이어지는 야경을 바라봤다. 달빛무지개분수쇼는 장관이었다. 한강공원 잠원~반포지구에서 강 건너 남산과 한남동 일대에 펼쳐진 한강 북쪽의 경관을 즐겼다. 해설을 맡은 이준섭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강과 한강다리에 얽힌 스토리를 꼼꼼하게 짚었다. 사전에 보내 준 답사노트는 호평을 받았다.서울 강북 사대문 안이 ‘조선의 수도’였다면 강남은 ‘대한민국의 수도’라고 말할 수 있다. 제3한강교(한남대교)는 강남 탄생을 알린 기념비적인 다리다. 1969년 12월 25일 이 다리가 준공되면서 서울의 폭발적 확장을 예고했다. 제3한강교는 경부고속도로·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함께 강남시대를 연 ‘삼총사’였다. 1985년 한남대교로 이름을 바꾼 이 다리는 본래 한강대교라고 명명해야 옳았다. 다리가 놓인 조선시대 나루가 한강나루~새말나루(사평나루) 구간의 한강진(한강나루)이기 때문이다. 한강나루는 조선시대 한강에 있던 20여개의 나루 중 ‘서열 1위’였다. 1900년에 건립된 인천~서울역 간 한강철교와 1917년 일제 경제 침탈용으로 지어진 제1한강교(한강대교)가 이름을 선점하는 바람에 쪼그라들었다. 왜곡된 지명의 역사를 다시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면 한강대교는 노량대교, 한남대교는 한강대교라고 제 이름을 찾아 줘야 한다. 용산구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을 연결하는 한남대교는 지금도 한강의 모든 다리 중 하루 평균 자동차 통행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한남대교 남단 새말나루는 한양과 삼남(충청·전라·경상)지방을 연결하는 선상에 위치한 수상과 육상의 교통 요충지였다. 고산자 김정호의 ‘경조5부도’를 보면 한양의 각 나루에서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여러 길 중 도성에서 강남을 거쳐 용인으로 통하는 길은 두 갈래였다. 광희문~한강나루~사평리~양재거나 광희문~서빙고나루~사평리~양재였다. 두 길 모두 사평리(새말나루)를 통한 것을 알 수 있다. 한양의 한강나루나 서빙고나루를 출발한 나룻배는 강을 건너 경기도 광주 사평리에 도착한 뒤 양재와 용인을 거쳐 청주나 충주로 하향 길을 떠났다. 사평리에는 길손들이 쉬어 가는 사평원이라는 숙소가 있었다. 이곳에 주막과 장터가 섰다. 지금의 신사동 간장게장골목을 비롯한 먹자골목 기원이 사평원에서 시작됐다. 9호선 사평역과 6호선 녹사평역이라는 명칭 역시 사평나루와 사평원에서 땄다. 경조5부도에 새말나루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새말나루가 신생마을이기 때문이다. 서울지명사전에서 ‘새말’이라는 동명을 찾아보면 무려 26개의 동일한 지명이 등장한다. 동대문구 신설동, 서대문구 신촌 또한 신생마을 즉 새말이다.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진 1914년 이후 새말나루와 사평나루가 신사도선장으로 통합됐다. 새말나루가 있던 곳은 한남대교 남단 아래고, 사평리는 지하철 3호선 신사역 근처다. 1970~1980년대 두 차례 한강종합개발계획 때 강을 메워 아파트를 지어 엄청난 지형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려우나 한강나루와 사평나루가 직선상에 위치한 것은 분명하다. 신사동이라는 동명은 새말의 한자지명 신촌의 신(新)자와 사평리의 사(沙)자를 각각 따서 만든 합성지명이다. 한남대교 남단에 세워진 새말카페는 한때 번성했던 새말나루터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애초에 ‘레인보우 카페’라는 국적불명의 이름을 사용하다가 옛 지명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바꿨다. 본래 한강나루(한강진)는 한강진에 강남 쪽 새말나루와 사평리를 합친 개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강북 쪽 나루만 인정했을 뿐 강 건너 강남 쪽 나루는 부속품으로 여겼다. 18세기 이후 한강이 기존의 5강 체제에서 8강, 12강으로 분화·확장하는 과정에서 ‘조선 제일 나루’의 위상이 다소 위축됐다. 18세기 이전까지 3강(한강, 용산강, 서강) 체제를 유지했지만 상업 발달에 따라 18세기 중엽에는 5강(3강+마포, 양화진)으로, 18세기 후반엔 8강(5강+두모포, 서빙고, 뚝섬)으로 분화됐기 때문이다. 19세기 이후 12강(8강+연서, 왕십리, 안암, 전농)까지 뻗어 나갔다. 강남은 경부고속도로와 제3한강교의 개설로 말미암아 갑자기 솟아난 도시가 아니다. 고속도로 노선이 이곳을 통과하게 된 것이나 ‘말죽거리신화’라는 강남발 부동산 신화가 양재에서 불붙은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수로의 중심 새말나루터는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잇는 최단거리 지름길 한남대교가 됐고, 육로의 중심 양재역은 서울과 지방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이 됐다.오늘의 강남 지형을 만든 ‘요술 방망이’는 공유수면매립과 아파트지구 지정 두 가지였다. 우리가 올림픽대로(88도로)와 강변북로라고 부르는 한강 남쪽과 북쪽의 강변도로는 1970년부터 16년에 걸쳐 구간별로 쪼개 만든 뒤 붙인 수해 방지 목적의 제방도로였다. 제1한강교에서 여의도 입구~영등포 서울교 남단까지 3720m 길이의 강변1로가 우리나라 최초 자동차전용도로이자 유료도로였다. 이후 제방 건설과 매립, 도로 건설과 병행해 강변2로부터 강변8로까지 부분적으로 지은 도로를 통합해 강남 쪽은 올림픽대로, 강북 쪽은 강변북로라고 각각 명명한 것이다. 제방과 도로 건설을 위해 1962년 법률로 제정, 공포된 공유수면매립법이 오늘의 압구정, 반포 아파트지구를 만든 일등공신이다. 한강의 섬과 백사장을 메워 아파트 택지로 둔갑시켰다. 1976년 건설부 고시 제131호에 따라 반포지구와 압구정동지구, 청담지구, 도곡지구, 잠실지구, 이수지구 등 강남권 6개 지구를 포함한 서울 11개 지구에는 아파트와 부속건물밖에 지을 수 없게 됐다.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의 ‘아파트지구 지정’이 오늘날 아파트 40만 가구, 거주율 80%를 자랑하는 강남아파트 시대의 닻을 올렸다. 진정한 강남시대의 개막은 ‘강남 삼총사’ 중 막내인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 완공된 1981년 10월 20일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1973년 호남고속도로,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속속 개통했지만 터미널은 1978년 호남선과 영동선, 1981년 경부선터미널이 따로 지어졌다. 1985년 3호선 고속터미널역이 생길 때까지 대중교통이 없는 ‘불구’ 터미널이었다. 지난해 말 기준 서울 한강 수계에 있는 다리는 모두 28개다. 1900년 한강철교가 처음 준공된 이래 1950년대까지 한강대교와 광진교 등 3개밖에 없었다. 1970~198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14개 다리가 집중 건설됐고, 2000년 이후 9개가 추가됐다. 구리암사대교가 가장 최근인 2014년 준공됐다. 상암동~양평동 구간 월드컵대교와 노량진~노들섬을 잇는 보행 전용교 백년다리가 2021년 개통될 예정이다. 한강나루의 대를 이은 한강다리가 서울의 생명줄 노릇을 하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여기는 남미] 아르헨 119세 할머니, 비공인 세계 최장수 노인

    [여기는 남미] 아르헨 119세 할머니, 비공인 세계 최장수 노인

    세계 최장수 할머니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다고 현지 언론이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카니발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엔트레리오스주의 괄레과이추에 살고 있는 할머니 나탈리아 레이노소는 이날 생일을 맞았다. 1900년 7월27일생인 레이노스 할머니의 나이는 올해로 만 119세. 기네스가 공인한 세계 최장수 다나카 카네(일본, 116세)보다 3살이나 많은 비공인 세계 최장수 노인이다. 엔트레리오스주의 메다노스라는 곳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농장에서 가축을 돌보며 평생을 보냈다. 20대 초반에 결혼한 할머니는 36살 때 남편이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면서 홀몸이 됐다. 그때까지 가진 자식은 모두 9명, 이 가운데 생존하는 자식은 83살 된 아들 마리오 훌리오뿐이다. 아들 마리오 훌리오는 "어머니가 아직 건강하시고, 정신도 또렷하시다"면서 "비록 말은 적어지셨지만 무엇을 물어봐도 100% 이해하시고 답을 주신다"고 말했다. 할머니에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장수 DNA(유전자)가 흐르는 것 같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할머니의 부친 페드로 레이노소는 112살, 모친 파울라 구티에레스는 120살까지 천수를 누렸다. 물론 할머니의 노력도 장수의 비결로 꼽힌다. 할머니는 "낙천적으로 행복하게 살면 누구나 오래 살 수 있다"고 장수의 비결을 소개하기도 했다. 100세를 훌쩍 넘겼지만 할머니는 2017년까지 혼자서 걸을 정도로 운동을 즐겼다. 아들 마리오 훌리오는 "안타깝게도 2017년부터 휠체어에 앉아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전까진 혼자 걷는 데 문제가 없었다"면서 "어머니가 매일 집에서 걷기운동을 하셨다"고 말했다. 할머니에겐 자손이 많다. 자식, 손자, 증손에 이어 현손과도 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워낙 자손이 많다 보니 정확한 수를 확인할 수는 없다고 한다. 아들 마리오 훌리오는 "이젠 연락이 끊긴 현손도 있지만 아마도 자손이 족히 1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생일을 맞아 할머니의 동네엔 119세를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사진=크로니카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임지연의 내가 갔다, 하와이] “우리도 노노재팬!”…하와이 교민도 참여 분위기 확산

    [임지연의 내가 갔다, 하와이] “우리도 노노재팬!”…하와이 교민도 참여 분위기 확산

    하와이 주에서도 ‘노노재팬'(NONO JAPAN) 움직임이 시작된 분위기다. 하와이주 거주 교민 커뮤니티 사이에 일본 제품 ‘보이콧’에 대한 움직임이 감지된 것. 최근 한일 갈등과 관련, 국내에서 불고 있는 일본 제품에 대한 거부 분위기가 교민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불고 있는 양상이다. 특히 한인 교민 거주 비율이 높은 하와이 주에서 일본 브랜드 상품 대신 한국 상품을 팔아주자는 뜻 있는 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이는 일본인의 거주 비율이 높은 이 일대에서 일본 제품의 유통 규모 역시 상당하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하와이 주 거주민의 약 28%는 일본계 미국인이다. 지난 1900년대 초반 농장 노동자 인력 조달 등을 이유로 시작된 일본인 이주 역사를 계기로 현재 하와이 주에 거주하는 일본계성(姓)을 가진 이들의 수는 약 4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전체 하와이 거주 인구 144만 명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수준이다. 반면 8곳의 크고 작은 하와이 주 섬에 분포, 거주하는 한국인의 수는 약 3~5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에 하와이는 미국 대륙을 포함, 가장 일본인들이 이주하기 용이한 지역으로 꼽힌다. 실제로 매년 많은 수의 일본인 여행자들과 현지 일본계 미국인들의 친(親) 일본적인 성향 탓에 현지에는 다수의 일본 브랜드 상점과 대형마트를 찾아볼 수 있는 형편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일본 대형 유통 업체로는 ‘돈키호테’와 ‘다이소’ 등이 꼽힌다. 이들 업체들은 주차장을 포함, 호놀룰루 시 중심에 입점해 운영 중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쇼핑몰로 알려진 ‘알라모아나'(Alamoana)에서도 다수의 화장품 브랜드와 의류, 먹거리 등 일본계 브랜드 상점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상황이다.특히 호놀룰루 도심에 입점한 대형 마트 ‘돈키호테’ 매장의 경우 일본 본토에서 운영 중인 상점의 규모보다 더 큰 규모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져 일찍이 화제가 된 바 있다. 또한 올 상반기, 대표적인 일본 우익 기업으로 알려진 ‘다이소’가 호놀룰루 중심에 입점하는데 성공한 바 있다. 해당 매장 역시 대형 주차장시설을 갖춘 대규모 형태로 운영 중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에 구매할 수 있는 다양한 물건이 진열돼 있다는 점에서 다이소의 하와이 진출 소식은 현지 일본계 주민은 물론이고 한인 교민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에는 한일 무역 갈등이 고조되기 이전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들 매장에는 한국 교민과 한국에서 여행 온 관광객을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다. 과거 현지 교민은 물론 하와이 여행 중 기념품을 구매하기 위해 이들 매장을 찾았던 다수의 한국인들 덕에 매장 내에서 ‘우리말’로 대화하는 고객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것과 크게 달라진 점이다. ‘노노재팬’ 움직임이 국내에서 시작된 이후 하와이 주에 거주하는 우리 교민들 사이에서도 일본 브랜드와 상점을 찾지 않겠다는 한인 교민들의 뜻 있는 목소리가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 상당수 교민들은 평소 애용했던 일본 브랜드 대신 한국에서 수입된 한국 브랜드 제품으로 대체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지금껏 일본 자본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진 제품 중 일부를 수입, 판매해 왔던 한인 마트들 중에서는 최근 일본 제품을 찾는 교민들이 크게 줄었다는 체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해부터 한인 마트에서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근무하는 근로자 이성한 씨. 이 씨는 이 같은 분위기에 대해 “지금껏 진열장에 올려놓자마자 바로 판매가 됐던 일본 브랜드 과자와 음료 등을 찾는 교민들의 수가 크게 급감했다”면서 “식품류의 제품 특성상 유통 기한이 있는 탓에 급작스럽게 판매가 저조한 일본 브랜드 제품 재고들은 반값으로 내려 파는 방식 또는 반품 처리까지 고려해야 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지에서 중고차 딜러로 근무 중인 김상진 씨 역시 최근 일본 브랜드 자동차 대신 국산 브랜드를 찾는 교민들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하와이의 경우 3개월 장단기로 거주하러 오는 한국인 관광객들과 1~2년 어학연수, 유학 등을 목적으로 오는 분들이 유독 많은 지역”이라면서 “이런 지역적 특성 덕분에 새 차 대신 중고차에 대한 거래가 비교적 활발한 지역 중 한 곳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와 중고차를 거래하려고 하는 고객들 사이에서도 국산차를 찾는 분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비록 신차를 구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가격대라면 일본차 대신 국산차를 사겠다는 고객이 늘고 있다는 것. 김 씨는 이에 대해 “동일한 가격이면 일본차 등 외제차를 선호했던 과거 현상과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하와이에 거주하는 20~30대 청년들 역시 ‘노노재팬’ 움직임에 힘을 보태겠다는 모습이다. 현지에 거주하는 한인 2세 정주영 씨(39)는 “얼마 전부터 주말에 교회 등에서 만남을 가질 때마다 고국에서 부는 ‘노노재팬’에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한다는 친구들이 많아졌다”면서 “특히 주말 모임 때마다 교민들이 먹고 마시기 위해 준비했던 먹거리를 구매할 때에도 일본 마트 대신 한인 마트를 찾고, 우리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는데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비록 작은 힘이지만, 뜻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모이면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현지 거주민 강지현(33) 씨는 “일본 마트를 가지 않은 지 4주 정도 됐다”면서 “평소 일주일에 한 두 차례 먹거리를 사러 다니곤 했는데 ‘노노재팬’ 움직임이 있고 나서부터는 작지만 힘을 보태기 위해 일본 제품 안 사고 안 먹기를 실천 중이다. 얼마나 힘이 될지 알 수 없지만 해외 교민들 중에도 뜻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더 많은 분들이 뜻을 모아주실 것을 믿는다”고 했다. 호놀룰루=임지연 통신원 808ddongcho@gmail.com   
  • ‘랭킹 싸움’ 도쿄 그린 누빌 120명 누굴까

    ‘랭킹 싸움’ 도쿄 그린 누빌 120명 누굴까

    지난 24일 도쿄올림픽 개막이 D-365 카운트다운에 돌입하면서 3년 전 리우에서 부활한 골프 티켓 경쟁이 일찌감치 시작됐다. 골프는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남자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대회 이후 112년 만에, 여자는 1900년 파리대회 이후 116년 만에 올림픽에 복귀했다. 세계 남자 톱랭커들이 지카 바이러스를 이유로 리우올림픽에 대거 불참했지만 예상과 달리 ‘흥행 대박’을 터뜨린 골프는 일단 2024년 파리올림픽까지 잔류를 보장받았다. 도쿄올림픽 골프에는 각 60명의 남녀 선수가 출전한다. 출전 자격은 세계 랭킹을 잣대로 주어지는데 남자는 2020년 6월 22일, 여자는 1주일 뒤인 29일 기준 세계랭킹 상위 60명이 올림픽에 나가게 된다. 다만 상위 15위에 포함된 선수가 많을 겨우 한 나라당 최대 4명까지, 16위부터는 국가당 최대 2명만 올림픽 출전권을 가져갈 수 있다.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은 리우 때와 동일하게 여자 선수 4명, 남자 선수 2명이 출전권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여자 선수는 7월 말 현재 세계랭킹 15위 안에 6명이 몰려 있다. 내년 기준 시점까지 랭킹 상위 4명이 대표팀으로 발탁된다. 현재 50∼70위에 포진한 남자는 상위 2명만 추려질 전망이다. 남자는 메달권에 들면 병역 혜택도 주어진다. 지난 22일자 세계 랭킹을 보면 남자는 안병훈(28)이 55위로 가장 높고 임성재(21·63위), 강성훈(32·69위), 김시우(24·71위)가 뒤를 잇고 있다. 리우에서 박인비(31)가 금메달을 획득한 여자 대표는 현재 기준이라면 1위 박성현(26), 2위 고진영(24), 5위 이정은(23), 7위 박인비까지 올림픽 출전이 가능하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홍태경의 지구 이야기] 보이지 않는 것, 알지 못하는 것

    [홍태경의 지구 이야기] 보이지 않는 것, 알지 못하는 것

    우주에는 존재하지만 확인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블랙홀은 1915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존재가 예견된 이래 그 모양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강한 중력으로 시공간마저 크게 휘어 빛도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블랙홀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존재로 생기는 여러 현상을 관찰한 까닭이다. 블랙홀 뒤에 가려진 별을 블랙홀 주변에서 굴절된 빛을 통해 관찰한 것도 그 예 중 하나다. 지난 4월엔 지구 곳곳에 설치된 8개 전파망원경으로 예측 104년 만에 블랙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구도 마찬가지다. 지구는 반지름이 6400㎞에 이르기 때문에 직접 조사 대신 다양한 간접적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지구 내부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핵은 밀도가 높은 철과 니켈을 주성분으로 하며, 방사성 동위원소 붕괴와 지구 생성 초기에 쌓인 에너지로 인해 늘 많은 열을 배출한다. 이 때문에 고체 상태의 내핵과 액체 상태의 외핵으로 구분돼 있다. 외핵과 내핵의 물성 차이는 이미 1900년대 초반 지진학적 관측으로 확인됐다. S파가 외핵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관측으로부터 외핵이 액체임이 확인됐고 외핵과 내핵의 경계에서 반사된 지진파를 통해 고체 상태의 내핵의 존재를 알게 됐다. 액체 외핵의 발견으로 지구 자기장이 만들어지는 원리와 지구의 운동도 설명이 가능해졌다. 내핵과 맨틀 사이에 자리잡은 액체 외핵으로 인해 지구는 작은 공을 내부에 갖고 있는 공 모양을 띠게 된다. 바깥 공이 구를 때 두 공 사이의 공간이 액체로 채워져 있으므로 안쪽 공은 바깥 공과 동일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초기 지구 내부는 불균질한 물질들로 서로 뒤섞여 있는 거대한 고체 덩어리였다. 이후 지구 내부 구성 물질의 밀도에 따라 분화가 일어나며 현재와 같은 지각, 맨틀, 외핵과 내핵을 가진 층상 구조로 성장했다. 외핵이 액체 상태로 발달함에 따라 지구 전체적으로 하나였던 자전운동이 외핵을 기준으로 둘로 나뉜 상태가 된 것이다. 밀도가 높고 부피가 작은 내핵에서의 자전 속도보다 맨틀과 지각에서의 자전 속도는 더 느리다. 만약 외핵이 고체라면 지표에서 관측되는 지구의 자전 속도는 지금보다 빨라져 하루도 지금보다 더 짧아졌을 것이다. 지구 내부를 직접 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맨틀과 내핵 간의 자전운동 차이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지구핵과 맨틀에서 자전운동의 차이는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광물의 정렬로 나타나는 광물의 물리학적 비등방성 성질을 활용해 측정이 가능해졌다. 동일한 암석이라도 광물이 정렬된 방향에 따라 암석의 강도와 지진파 전파 속도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수십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동일한 위치에서 발생한 지진의 지진파를 비교해 내핵을 통과하는 지진파 속도가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를 통해 내핵이 비등방성 성질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내핵이 맨틀과 서로 다른 각속도로 자전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만약 내핵이 비등방성을 띠지 않았다면, 맨틀과 내핵의 자전운동 차이는 아직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에는 아직 알지 못하는 많은 부분이 남아 있다. 자연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단지 볼 수 있는 적절한 눈과 도구를 가지지 못했을 뿐이다.
  • 우아하게 울타리 넘는 히말라야 고양이

    우아하게 울타리 넘는 히말라야 고양이

    고양이의 우아한 점프 영상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5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은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의 1살짜리 고양이 조지(George)의 페이스북 영상을 소개했다. 짧은 영상 속, 초콜릿색 히말라야 고양이 조지가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설치한 울타리 너머에 앞발을 들고 서 있다. 잠시 뒤 조지는 두세 차례 발을 구른 후, 우아하게 점프해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해외 온라인 미디어 ‘래드 바이블’(LAD bible) 페이스북에 게재된 해당 영상은 현재 1930만여 조회수, 댓글 42만 개, 공유 34만여 개를 기록 중이다.한편 고양이는 보통 몸길이의 약 6배 길이인 8피트(약 2.4m) 높이까지 점프할 수 있다. 히말라야 고양이는 1900년대 초반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유전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개량종으로 1957년 미국에서 정식으로 ‘히말라야’라는 품종으로 인정받았다. 사진·영상= LAD bible 페이스북 영상부 seoultv@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뜨겁던 청춘의 발바닥을 위하여…부산 한국신발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뜨겁던 청춘의 발바닥을 위하여…부산 한국신발관

    # 고무신, 1920년대부터 우리 민족의 신발로 “고기잡이할 때는 그물이 되었다가 모래밭을 달릴 때는 자동차가 되고 허공을 내지를 때는 비행기가 되는 검정 고무신의 그 가변의 세계는 아직도 내겐 그리움의 세계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정호승 산문집. 2014>고무신. 이제는 생활사 박물관이나 ‘엄마 아빠 어릴 적에는’과 같은 작은 간판 달고 동네 구청 옆 전시실 한 켠에서나 간간히 볼 뿐이다. 고양이 코 같이 뾰족하게 뛰어나온 새색시 코고무신, 넙데데한 큰아버지 진양고무신, 해거름 장날 간고등어와 함께 아버지의 손에 들려온 7문 반짜리 흰 고무신을 안고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하던 시간을 만나러 간다. 부산에 위치한 한국신발관이다. 우리나라의 신발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1900년대까지 양반들의 경우 당혜(唐鞋), 운혜(雲鞋)니 하여 가죽이나, 비단, 삼베 등으로 만든 신발을 신었지만 평민들은 주로 짚신이나 미투리, 나막신을 등을 신고 다녔고 여염집 아이들은 맨발이나 감발이 태반이었다. 191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일본에서 건너온 고무신이 고무화, 호모화(護謨靴)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1919년에는 경성 종로에 대륙고무공업소라는 최초의 고무신 공장이 생기고 1923년에는 수입 혹은 조선에서 생산된 고무신이 1100만 켤레나 될 정도로 고무신은 민족의 대표적인 신발이 된다. # 한국 신발의 메카 부산,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OEM(주문자생산방식)으로 부산의 경우 1926년에 도변(渡邊) 고무공장이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 신발 산업의 메카로 자리잡게 된다. 이는 고무를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하고 고무 원료의 특성상 빠른 시기에 제화(製靴)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는 우리나라 대표 고무신을 만들던 신발 회사 6개가 부산에 몰려 있었고, 고무신을 만들던 기술을 기반으로 합성 피혁 신발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신발은 내수를 넘어 해외 수출 상품으로 효자로 등극하였다. 1962년 첫 신발을 수출한 이래 1971년에는 5000만 달러, 1975년에는 1억 9000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하기도 하였다.1980년대부터는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OEM(주문자생산방식)을 통하여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등의 세계적 브랜드 신발을 생산하면서 1990년 신발 수출로만 43억 달러를 벌어들일 정도로 신발 산업은 급성장한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보다 더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OEM방식의 신발 생산이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이루어지면서 자연히 부산의 신발 산업은 힘든 시기를 겪게 된다. 2000년대에 들어 부가가치 신발, 기능성 신발 시장을 목표로 하여 부산은 신발 산업의 부흥기를 맞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신발 수출 규모는 총 4억 8500만 달러에 달하며 이중 절반 정도의 성과가 부산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바로 이러한 한국 신발 1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부산 진구의 신발 박물관인 한국신발관이다. 이곳은 2018년 2월 26일 옛 LH(한국토지주택공사) 사옥을 리모델링하여 대지 2644.6㎡, 연면적 4141.4㎡,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로 건립한 곳이다. 현재 1, 2층에는 한국 신발 산업의 역사를 대형 DID(디지털정보디스플레이)와 키오스크 등 각종 멀티미디어 장비를 이용해 관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운동선수, 연예인, 영화 속 신발 등 특별한 신발도 전시되어 있어 관람객들의 관심을 끈다. 특히 4층부터는 신발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실습장 및 신발 업체들이 입주해 있을 뿐만 아리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현장 체험학습 프로그램도 실시 중이어서 신발에 관심이 있는 관람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신발관에 대한 방문 10문답> 1. 방문 추천 정도는? - ★★☆ (★ 5개 만점) - 신발 관련 업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만족감이 높을 듯하다. 전시규모가 크지는 않다. 2. 누구와 함께? - 부산 진구에 살고 있는 주민이라면 부담없이. 3. 가는 방법은?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백양대로 227 - 지하철 2호선 개금역(2번출구)에서 도보 7분 - 버스 : 129-1, 138-1, 160, 167, 169, 169-1(한국신발관 정문 버스정류장) 4. 특징은? - 한국 신발의 역사를 잘 살펴볼 수 있다. 구입할 수 있는 신발의 종류는 많지 않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잘 알려져 있지도 않으며 관람객들도 많지 않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영화 ‘1987’에서 배우들이 신던 신발, 신발의 역사관. 7. 관람시 주의사항은? - 찾아가기가 힘들다. 전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 많은 기대를 하지는 말기를.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k-shoes.kr/kr/ 9. 부산 진구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어린이 대공원, 부산 서면 1번가, 삼광사, 전포카페거리 10. 총평 및 당부사항 - 한국신발관은 작은 박물관이지만 신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전시관이다.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우리나라 수출 효자 상품이었던 신발에 관한 뜨거운 시간이 기록된 곳.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황제의 옥새3] 조선 찾아온 40대 백인 여성의 정체는

    [황제의 옥새3] 조선 찾아온 40대 백인 여성의 정체는

    올해는 3·1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서울신문은 100주년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국인 독립운동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을 주인공으로 한 해외소설 두 편을 발굴했습니다. 글쓴이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웰스 리치(1879~1942)입니다. 100여년 전 발간된 이들 소설은 일제 병합 직전 조선을 배경으로 베델이 조선 독립을 위해 모험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거의 유일한 해외 소설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서울신문은 ‘황제 납치 프로젝트’(1912년 출간·원제 The cat and the king)에 이어 ‘황제의 옥새’(1914년 출간·원제 The Great Cardinal Seal)를 연재 형태로 소개합니다.6월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제물포항에서 기차(1900년 개통된 경인선)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기차가 남대문정거장(남대문역)에 들어섰다. 한 여성이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문 백인이었다. 이 불안한 곳에 혼자서 여행하려고 오다니. 내 마음 속에서 신사도 정신이 피어 올랐다. 그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플랫폼에서 내려 오지 않고 그녀가 짐꾼, 인력거꾼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살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짐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졌다. 삮꾼들이 이 영국인 여행자에게서 서로 짐을 가져가겠다고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는 듯 했다. 이때 내가 개입했다. 일꾼들을 제지하고 그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이 낯선 동북아시아 한 가운데서 나같은 백인 남자를 만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를 보자 어찌나 반가웠던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껑충 껑충 뛰었다. 나는 통역인 겸 관광 가이드 역할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걸었다. 약간 기묘한 느낌을 풍기는 한마리 새 같았다. 금발에 간간히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흰색 말에 회색 줄무늬를 넣은 듯 했다. 초췌한 얼굴에 흰색 도료를 바른 것처럼 웃을 때마다 화장이 갈라졌다. 다소 넓게 퍼진 입술에는 간단히 립스틱을 발랐다. 다만 짙게 분칠한 얼굴과 달리 보라색 눈빛만은 젊은이의 그것처럼 밝게 빛났다. 비극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젊음을 잃어 버린 여인 같다고나 할까. 아직 남아있던 젊음의 매력이 눈 속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그녀는 11월에 피어난 마지막 과꽃 같았다. 다가오는 겨울을 앞두고 줄기는 시들었지만 꽃 속 두 개의 보라색 점만큼은 별처럼 반짝였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녀는 남성들이 입는 여행용 코트 같은 플라운스 스커트를 입었고 척탄병(수류탄을 던지는 병사)이 입는 낡은 자켓을 걸쳤다. 그리고 도요새의 날개처럼 거친 재료로 만든 스코틀랜드 모자도 쓰고 있었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영국인 전사들의 그림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그녀는 젊을 때부터 남자에게 한번도 기대본 적이 없거나 자신의 의지를 단 한 번도 굽히지 않은 급진적 여성단체 회원 같았다. 독신으로 살면서 우간다(당시 영국의 식민지) 소요 사태에 헌신하거나 네팔의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을 전파하는 일도 잘 할 듯 싶었다. 사실 이런 일을 하는 영국인 여성들은 자국보다는 극동 지역에서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이 40대의 고상한 영국 여인에게 마차를 함께 타자고 권했다.”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녀는 영국 특유의 높은 톤의 갈라진 어조로 말했다. “서울은 새로온 외국인을 환영하는 방식이 꽤 독특하네요. 삯꾼들이 서로들 내 짐을 가져가려고 하는 걸 보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이제 긴장을 풀라고 말하며 내 손을 뻗었다. 우연히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내 손등에 닿았다. 만약 그녀가 이상한 화장으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았다면 이 느낌은 나에게 더 큰 떨림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황제의 옥새’는 4회로 이어집니다. 번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복숭아 ‘유미’를 그리며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복숭아 ‘유미’를 그리며

    여름을 앞두고 더위에 걱정이면서도 한편 이 더운 여름이 기다려지는 건 이때만 먹을 수 있는 과일 때문이 아닐까? 수박과 자두, 살구, 블루베리, 그리고 복숭아. 여름이면 이 많은 과일들이 줄지어 우리를 기다린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내 작업실 근처에는 복숭아 농장이 있었고, 복숭아 수확철이면 농장주가 까만 봉지에 흉터가 조금씩 있는 복숭아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 흉터가 있다곤 해도 달기는 무척 달아 반나절이면 금방 먹게 되던 그 복숭아. 복사나무가 있던 땅에는 지금 거대한 컨테이너가 서 있지만 여름이면 여전히 그 달콤한 복숭아 맛이 생각난다. 복숭아는 복사나무의 열매고, 복사나무의 꽃은 ‘복사꽃’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예전엔 봄이면 일부러 복사꽃을 보러 그 복사나무 농장을 지나곤 했다. 복사나무와 같은 프루누스 가족인 벚나무의 벚꽃과 버찌, 매실나무의 매화와 매실처럼 열매를 부르는 말과 꽃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는 건 열매만큼 꽃도 오랫동안 관상식물로서 유용하게 이용됐기 때문이다.복숭아의 재배 역사는 길다. 이들의 기원은 곧 인류의 농업 기원과 같다고 할 정도로 인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해 온 과일 중 하나다. 학명의 종소명이 ‘페르시카’라 페르시아 원산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페르시아에서 재배를 많이 해왔을 뿐 중국 원산이다. 미국의 식물학자인 메이어가 중국에서 복사나무 원종을 발견하면서 이들이 중국 원산임이 밝혀지게 됐는데, 메이어가 처음 복사나무를 발견하고 미국 농무성에 보낸 서안에는 이들 원종의 생김새가 잘 표현돼 있다. ‘나는 처음으로 황토 절벽 바다 위 4000피트 고도에서 복사나무를 보았다. 원주민에 따르면 이들은 핑크색 꽃을 피운다고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재배 복숭아보다는 크기가 작고 나무 수형도 작다.’ 원산지면서 복숭아를 가장 많이 육성해 온 나라는 중국이지만, 막상 복숭아를 가장 많이 홍보하는 건 미국이다. 미국은 8월을 복숭아의 달로 지정해 이들을 기념하는데, 작년 8월에도 ‘뉴욕의 복숭아’란 책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디지털 도서관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 책은 1917년 미국 농무부의 뉴욕 농업 실험소에서 제작한 것으로,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재배, 유통되는 복숭아 품종을 그림과 글로 엮은 복숭아 도감이다. 미국 농무부에서는 약 100년 전 당시 인기 있던 과일들을 꾸준히 기록해 엮어 간행물로 출간했고, 첫 번째로 사과, 그리고 포도, 매실, 버찌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이 복숭아가 주제가 됐다. 복숭아 책이 공개된 후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책을 봤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지구 반대편에 존재했던 복숭아를 식물세밀화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귀한 기록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한 것에 고마운 마음도 더했다. 한 품종씩, 열매가 가지에 달린 모습과 열매를 반으로 자른 해부도, 그리고 종자 그림도 따로 그려져 있다. 인상적인 건 이 그림이 실물 크기로 그려져 인쇄까지 됐다는 것이다. 복숭아를 책 그림에 하나하나 대고 열매 크기로 품종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것, 당시에도 획기적인 실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만 나는 이 책을 컴퓨터 화면상으로밖에는 볼 수 없기에 실물 크기를 대조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현대 식물세밀화가 디지털 데이터로서 보존, 활용되는 이상 실물 크기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스케일바를 다는 것이 더 효율적인 기록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디지털 도서관에서는 이 복숭아책 데이터를 올리며 ‘이 책에 기록된 복숭아 대부분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느 과일과 채소처럼 복숭아 역시 생기기도, 사라지기도 하기 때문이다.작년 여름엔 나도 복숭아 하나를 그렸다. 우리나라 농촌진흥청에서 육성한 ‘유미’라는 이름의 신품종 복숭아. 초여름에 수확하는 조생종으로 크기가 크고 당도도 높은 데다 재배할 때 봉지를 씌우지 않아도 착색이 잘 되고 병해충 피해가 적은 종이다. 복숭아 농장에 가면 병해충을 피하고 색을 잘 내기 위해 열매마다 노란 종이가 씌워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걸 모두 사람이 씌워야 하다 보니 봉지 씌우는 데도 인력이 필요하지만 이 유미는 이 부분에 소모가 없다. 이 복숭아 역시 ‘뉴욕의 복숭아’ 책에 있는 이들처럼 사람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금방 사라질 수도, 혹은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를 그리는 나의 마음은 이왕 태어난 거라면 사람들에게 널리 이용되고 사랑받는 복숭아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 바다 위·농구코트·하늘에서… 17일 동안 멈출 수 없는 도전

    바다 위·농구코트·하늘에서… 17일 동안 멈출 수 없는 도전

    국제수영연맹(FINA) 세계선수권대회가 다음달 12일 ‘빛고을’ 광주에서 개막한다. 수영은 육상과 함께 근대올림픽이 태동할 때부터 인간의 질주 본능을 표출하고 체력의 한계를 가늠하는 기초 종목이었지만 쉼 없이 진화해 왔다. 흥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그리고 극한의 한계치를 시험하며 새로운 종목이 태어났고, ‘양성 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도 포말 속에 녹아들었다. ‘평화의 물결 속으로’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의 6개 종목을 톺아 봤다.●경영 ‘수영의 꽃’ 경영은 7월 21일부터 28일까지 8일 동안 남부대 시립국제수영장에서 자유형, 배영, 평형, 접영, 혼영, 자유형 릴레이 등 세부 종목으로 진행된다. 50m 단거리부터 1500m 장거리까지 세계 최고 선수들이 42개 메달을 놓고 물속에서 가장 빠른 자가 누구인지를 가린다. 한국의 유일한 올림픽 메달리스트 박태환은 출전하지 않지만 2017년 부다페스트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안세현과 김서영이 개최국의 자존심을 지킬 선수들로 꼽힌다. 안세현은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의 접영 100m와 혼성 혼계영 4×1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김서영은 최근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FINA 챔피언스 경영 시리즈 2차대회 개인 혼영에서 리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카틴카 호스주(헝가리)에 이어 은메달을 따냈다. ●다이빙 ‘찰나의 승부’ 다이빙은 2초 이내 승부가 결정되는 ‘찰나’의 경기다. 다이빙은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올림픽 종목으로 선보였다. 여자 다이빙 종목은 1912년 스웨덴 스톡홀름올림픽에서 추가됐다. 역대 다이빙종목 금메달은 중국이 158개로 가장 많고, 러시아 46개, 미국 42개 순이다. 스프링보드, 플랫폼, 싱크로나이즈드 스프링보드, 싱크로나이즈드 플랫폼 등 13개 세부 종목이 펼쳐지는 다이빙은 특히 북측 선수단이 극적으로 참가할 경우 메달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종목이기도 하다. 경기장은 대회 주경기장인 남부대 시립국제수영장. 이 수영장은 기존 한쪽 벽의 가림막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1만 648석 규모의 관중석을 만드는 대규모 공사를 벌여 새롭게 단장됐다. ●수구 ‘물속에서 하는 핸드볼’ ‘수중 핸드볼’로 불리는 수구는 유일한 단체경기로 남녀 총 2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1900년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수구는 골키퍼를 포함해 한 팀 7명이 상대쪽에 골을 넣어 득점을 겨루는 경기다. 룰은 간단하지만 대신 격렬하기 그지없다. 몸싸움이 워낙 심한 탓에 수영복이 찢어지거나 벗겨지는 사례가 빈번해 여자 수구는 TV 생중계를 하지 않는다. 수구는 북측이 참가하면 남북 단일팀 구성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번 대회에서 주목받고 있다. 경기는 7월 14~27일 14일 동안 남부대 종합운동장 임시풀에서 열린다. 임시풀에는 경기풀(35×25×2m), 훈련풀(50×25×2m) 2개가 설치되며, 관람석 5000석이 들어선다. 한국 남자 수구는 1986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 1990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낸 바 있다. ●아티스틱 수영 ‘수중 발레’ 수영과 무용이 어우러져 ‘수중 발레’로 불리는 아티스틱 수영은 싱크로나이즈드 수영으로 불리다 부다페스트 대회부터 명칭이 바뀌었다. 20세기 초 장거리 수영 선수이자 다이버 겸 발레리나였던 아네트 켈러만(호주)에 의해 시작됐다. 1973년 FINA 정식 종목이 됐다. 솔로와 듀엣, 팀, 프리콤비네이션, 하이라이트 루틴 경기로 나뉘는데 2015 카잔 세계대회에서 남녀 혼성 2인조 경기인 ‘혼성 듀엣’이 추가됐다. 각각 지정 종목인 ‘테크니컬 루틴’, 자유 종목인 ‘프리 루틴’으로 치러진다. 경기장은 농구장으로 쓰이던 염주종합체육관을 개조해 만들었다. 기존 농구 코트의 마루를 뜯어내고 그 위에 관중석 높이까지 차오르는 가로, 세로 각 20m, 깊이 3m의 풀을 만들었다.●오픈워터 ‘물속의 마라톤’ ‘물속의 마라톤’으로 불리는 오픈워터 수영은 폐쇄된 수영장이 아니라 강과 바다에서 파도를 이겨내고 물속에서 장거리를 이동하기 때문에 강한 정신력과 체력을 필요로 하는 종목이다. 7월 13일, 15~19일 6일 동안 여수엑스포해양공원에서 열린다. 5㎞, 10㎞, 25㎞ 코스에 7개 금메달이 걸려 있다. 파도와 기상 상태뿐만 아니라 해양생물을 비롯한 다양한 외부 요인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빨리 수영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자연 속에서 수영하기 위한 지식과 경험이 요구된다.오픈워터 수영은 1810년 5월 3일 로드 바이런이 헬레스폰트(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기 위해 수영을 한 것에서 유래됐다. 경기 중 모든 영법이 가능하지만 통상 자유형으로 진행된다. 2.5㎞ 순환코스를 지정된 반환 부표와 코스 경계선을 지키면서 마쳐야 한다.●하이다이빙 ‘절벽 다이빙’ 이번 대회 6개 종목 중 국내에서 처음 선보인다. 남자는 27m 높이, 여자는 20m 높이의 타워에서 자유 낙하해 3초 이내에 발로 수면에 닿아야 하는 경기다. 짜릿한 익스트림 스포츠를 연상시키는 하이다이빙은 암벽이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절벽 다이빙에서 유래했다. 시속 90㎞ 속도로 낙하하기 때문에 18세 미만은 출전할 수 없다. 7월 22일부터 사흘 동안 펼쳐질 하이다이빙을 위해 조직위는 조선대 축구장에 30m 높이의 다이빙 타워와 지름 15m, 깊이 6m의 수조 경기풀 1개를 설치해 21일 현재 96%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관람석은 3027석이다. 우리나라에는 하이다이빙 선수가 없어 전체 6개 종목 중 유일하게 한국 선수가 출전하지 않는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부흥 기폭제 ‘춘향전’ 멜로 이끈 ‘자유부인’… 장르의 신세계 열었다

    부흥 기폭제 ‘춘향전’ 멜로 이끈 ‘자유부인’… 장르의 신세계 열었다

    지금까지의 연재를 통해, 1900년대 초입 한국에 처음 영화가 들어온 시점부터 6·25 전쟁이 끝나고 재건을 시작한 1954년 시점까지 약 50년 동안의 영화사를 살펴봤다. 1901년 미국인 여행가 버턴 홈스 일행이 대한제국기 서울의 풍경을 촬영해 왕실에서 상영회를 개최한 것과 1903년 동대문활동사진소에서 표를 사고 입장한 대중 관객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한 것이 한국에 영화가 소개된 가장 앞선 기록이었다. 또한 1919년 단성사에서 조선인 신파극단의 제작으로 연극 무대와 영화가 결합한 연쇄극을 상연한 것은 한국영화 100년의 출발로 기록된다. 이후 일제강점하 조선영화계는 무성영화와 발성영화시기를 개척해 가며 조선인 관객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고, 일제 말기에는 국책선전영화로 명맥을 이어가기도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영화 제작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의 열정은 1945년 8월 이후 해방 정국과 1950년 6·25 전쟁 시기에도 꾸준히 극영화를 만들고 관객들과 만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는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산업이 급격히 성장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이제부터의 연재는 1955년 이후 한국영화계가 어떻게 국가 정책 그리고 제작 자본과 협상하며 ‘한국’ 영화를 만들어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번 지면은 우선 1950년대 중후반까지의 상황을 알아볼 것이다.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 전후 한국 사람들의 깊은 상처를 위로한 것은 역시 영화였다. 전쟁 중에도 영화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폐허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곧바로 상업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1954년 18편, 1955년 15편을 기록한 한국영화 제작 편수는 1956년 30편, 1957년 37편으로 늘어나더니, 1958년 74편으로 전 해보다 두 배가 증가했고, 1959년에는 111편으로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에 진입하게 된다. 한국영화산업이 휴전 후 불과 6년 만에 이 정도의 급성장을 이룩한 배경은 역시 인력이었다. 영화에 대한 한국영화인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했던 것일까. 가장 대중적인 예술에 참가한다는 개인 창작자로서의 욕망, 자본을 투여한 것 이상으로 수익을 내야 하는 상업영화 셈법의 확고한 인식, 또 직업으로서 계속 영화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국영화를 기다리고 지지하는 관객들의 존재가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 매체는 대중과 만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도한 이승만 정부도 이러한 한국영화의 역할을 인식하고 영화계의 의견을 반영해,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 1959년 ‘국산영화 장려 및 영화오락 순화를 위한 보상특혜실시’라는 과감한 지원책으로 한국영화 진흥을 도모한다.전후 한국영화 부흥의 기폭제가 된 작품은 이규환이 연출하고 배우 조미령과 이민이 주연한 ‘춘향전’(1955)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전 소설 ‘춘향전’은 1923년 한국 최초의 상업영화, 1935년 최초의 발성영화로 만들어지는 등 이후 한국영화산업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영화화되었다(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까지 모두 17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1955년 벽두에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이규환의 ‘춘향전’ 역시 몰려드는 관객들로 대성황을 이뤘고, 2주간 상영에 10만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들며 제작사에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단 하나의 프린트로 전국 상영을 하던 시절, 서울 상영 이후 지방 각 도시의 상영관에서도 열띤 흥행은 계속되었고, 영화는 2년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관객들과 만났다. 춘향 역의 조미령과 이몽룡 역의 이민이 이 영화 한 편으로 일약 스타가 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롭게 출발한 한국영화계는 이 영화 덕분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한국영화로는 제작비 회수도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지만, 채산을 맞추는 것을 넘어 큰 수익도 올릴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잘 만든 한국영화라면 언제든 뜨거운 지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들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영화의 효과였다. ‘춘향전’의 성공은 이후 사극영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1956년에 제작된 30편 중 무려 16편이 사극 혹은 시대극 장르일 정도로 인기를 구가한다.●사극에서 멜로드라마로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의 또 다른 축은 바로 현대극 장르였다. 관객들이 시대극 장르에 싫증을 내기도 전에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가 흥행 전선에 나선 것이다. 이 경향을 주도한 것이 바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이다. 영화는 대학교수와 교수 부인 각각의 연애를 다뤄 전후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원작은 작가 정비석이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해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소설로, 연재 당시에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며 중공군 50만명과 맞먹는 국가의 적이다”는 격렬한 비난을 받으며 화제가 되었다. 1950년대 중반 한국 사회를 휘몰아치던 계, 댄스, 사치라는 세 가지 바람을 시의성 있게 소설화한 원작이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한형모는 영화로까지 여세를 몰아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한편 영화에 등장한 “뭐든지 최고급품으로 주십시오, 최고급입니까”라는 극 중 백사장(주선태)의 대사는 당시 “최고급”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자유부인’은 195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이자,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되었다. 이듬해 1957년에는 홍성기의 ‘애원의 고백’, ‘실락원의 별’, 김성민의 ‘처와 애인’, 김기영의 ‘여성전선’, ‘황혼열차’, 이용민의 ‘산유화’, 한형모의 ‘순애보’, 유현목의 ‘잃어버린 청춘’ 등의 멜로드라마가 전후 사회의 정서와 시대상을 반영하며, 여성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가주의적 미장센(화면 구도)이 유려한 유현목 감독의 ‘그대와 영원히’(1958), 박종호의 감독 데뷔작이자 배우 김지미의 청초한 매력이 돋보이는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1959), 조긍하 감독의 대표작 ‘육체의 길’(1959)도 빼놓을 수 없다. 1950년대 후반의 멜로드라마 지형은 홍성기·김지미 콤비의 영화가 주도하는 가운데,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작품이 경쟁 구도를 그리며, 한국 대중영화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전자는 ‘별아 내 가슴에’(1958), ‘산 넘어 바다 건너’(1958), ‘별은 창 너머로’(1959), ‘자나깨 나’(1959)가 대표적이고, 후자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1959) ‘동심초’(1959) ‘자매의 화원’(1959) 등을 들 수 있다. 신상옥 감독이 이 영화들의 성공을 발판으로 ‘신필름’을 설립,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계를 주도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적 증가 넘어 영화 문화·산업 전반으로 성장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의 성장은 제작편수로 대변되는 양적 증가뿐만 아니라, 영화문화와 산업 전반이 확장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전후 사회적, 개인적 악조건 속에서 ‘미망인’(1955)을 연출한 박남옥은 한국영화사의 첫 번째 여성감독으로 기록되며,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1956)은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특별희극상을 받으며 한국영화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 되었다. 이 시기 한국영화의 중요한 특징은 다양한 장르가 시도된 점이다. 멜로드라마와 스릴러를 혼합한 ‘운명의 손’(1954)의 한형모는, 악극 요소를 가미한 코미디 ‘청춘쌍곡선’(1956), 탐정영화 ‘마인’(1957), 가요를 극 속으로 녹여낸 멜로드라마 ‘나 혼자만이’(1958) 등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는 야심 찬 행보를 보였다. 노필 감독 역시 극 중 등장인물의 노래 장면이 삽입된 멜로드라마 ‘꿈은 사라지고’(1959), ‘사랑은 흘러가도’(1959) 등을 연출했다. 이 영화들은 미리 녹음한 음악을 촬영현장에서 틀면서 입 모양을 맞추는 ‘플레이백’ 녹음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음악영화들이 시도된 이유는, 뮤지컬 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기재와 기술력이 부족했던 당시 한국영화계가 절충적 제작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화기술에의 도전과 이를 뒷받침한 물적 기반도 검토해 봐야 한다. 해방기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서 도전했던 컬러영화 제작도 다시 시도되었다. ‘선화공주’(1957, 최성관)를 시작으로 ‘사랑의 길’(1958, 장황연), ‘춘향전’(1958, 안종화), ‘콩쥐팥쥐’(1958, 윤봉춘)가 컬러영화로 관객들을 만났다. 한편 홍콩과 합작한 ‘이국정원’(전창근·도광계·와카스기 미쓰오, 1957)은 해외 기술을 빌어 안정적인 컬러 색감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한홍 합작영화로 기록되는 ‘이국정원’은 임화수의 한국연예주식회사와 홍콩 쇼브라더스사가 공동 제작했고, 김화랑 감독의 ‘천지유정’(1957)이 그 뒤를 이었다. 두 영화는 1958년 한국 관객들과 만난다. 2.35:1의 시네마스코프 포맷을 통해 넓고 긴 화면 즉 와이드스크린도 선보였다. 그 첫 번째 작품은 수도영화사 대표 홍찬이 건설한 안양촬영소의 창립작 ‘생명’(이강천, 1958)이다. 영화는 미첼 카메라에 비스타라마 렌즈를 달아 촬영했고, 오프닝 크레디트와 포스터에는 수도영화와 시네마스코프를 합친 ‘수도스코프’라는 명칭을 내세웠다. ●정릉·삼성·안양 등 영화 전문 스튜디오 등장 컬러와 와이드스크린 등 1950년대 후반의 기술 시도는 영화촬영소라는 공간과 연동된 것이었다. 한국영화문화협회의 정릉촬영소, 삼성영화사의 삼성스튜디오,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등 본격적인 스튜디오 세 곳이 등장해 한국영화의 새로운 제작 기반이 되었다. 사실 스튜디오라는 공간은 선진 영화제작 시스템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주먹구구식 수공업적 제작을 벗어나 할리우드식의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한국영화인들의 오랜 꿈이었다. 스튜디오 시대의 첫 주자는 1957년 1월 개소한 정릉촬영소였다. 120평의 촬영장과 100평 규모의 현상소에 미국의 민간원조기구 아시아재단이 기증한 미첼 카메라, 휴스턴 자동현상기 등이 설비되었다. 촬영소를 건립한 한국영화문화협회는 아시아재단으로부터 기증받은 영화기자재를 관리하기 위해 1956년 7월 설립한 단체다. 한편 ‘자유부인’으로 큰 수익을 거둔 삼성영화사는 1957년 7월 군자동에 삼성스튜디오를 만들어 권영순의 ‘오해마세요’(1957), 유현목의 ‘그대와 영원히’, 한형모의 ‘나 혼자만이’(1958)를 제작했다. 규모나 내용에 있어 가장 주목할 곳은, 평화신문사와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이 이승만 정권의 특혜를 받아 1958년 6월 개소한 안양촬영소이다.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본떠 본격적인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했고 자신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안양촬영소는 3만 3500평의 부지에 총건평 1975평으로 9개의 건물이 자리잡은 그야말로 ‘영화공장’이었다. 미첼 카메라 3대, 웨스트렉스 녹음 시설 등 미국의 최신 기재들도 들여왔다.하지만 수도영화사의 홍찬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과 두 번째 작품 ‘낭만열차’(1959)의 흥행 실패로 수십억원의 부채를 졌고, 결국 촬영소는 1959년 10월 부도 처리되며 산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갔다. 1966년 9월 박정희 정권의 지원하에 신필름에 인수될 때까지 애물단지로 방치되었던 안양촬영소는 영화산업의 근대화가 산업 내부의 동력 없이 국가의 정책적 지원만으로 완성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1950년대의 다양한 시도와 노력들이 1960년대 한국영화가 중흥기를 맞고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을 들어서는 기반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예멘 청년의 삶이 담긴 모카커피 한 잔

    예멘 청년의 삶이 담긴 모카커피 한 잔

    취향 따라 즐기는 커피의 종류와 가격도 천차만별. 주변에선 상당한 지식을 갖춰 풍미를 즐기는 마니아도 적지 않다. 그 ‘커피의 세계’에선 여전히 비싸다는 푸념이 흔하다. 신간 ‘전쟁 말고 커피’는 아무 생각 없이 손에 드는 커피 값의 가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넌픽션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스타트업인 모카항 커피회사 대표 목타르 알칸샬리가 파란만장한 이야기 속 주인공이다. 샌프란시스코 빈민가에서 마약과 술에 절어 살던 예멘 이민자 청년. 그는 어떻게 ‘세계 3대 스페셜티 커피 로스터’ 블루 보틀의 파트너가 됐을까. 책은 목타르 알칸샬리의 모험담을 씨줄로, 커피와 예멘을 날줄로 엮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커피 시장이 방대한 규모로 성장하기까지는 세 단계의 역사를 거쳤다. 1900년대 초 진공포장 기술과 인스턴트커피 제조공법 발달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지만 맛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커피의 산지와 고유의 풍미를 살린 로스팅법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어 종전의 대기업 체인점이 아닌 독립적인 가게 형태를 띤 로스터 물결이 커피 시장을 대체했다. 예멘은 최초로 야생커피를 재배하고 지금 우리가 즐기는 형태로 우려내고 수출한 커피의 본향이다. 하지만 잇따른 내전과 외교적 혼돈 탓에 예멘은 커피 본향에서 멀어지고 철저하게 잊혀져 갔다. 우연히 자신의 고향 예멘이 ‘원조’ 커피 수출국이었음을 알게 된 목타르 알칸샬리. 예멘산 커피 수입상으로 변신한 그는 내전이 한창인 예멘으로 떠났다. ‘예멘의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예멘의 명품 커피를 팔겠다’. 그 원대한 꿈을 키워 세운 모카항 커피회사의 커피는 2016년 미국 전역의 블루 보틀 매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2017년에는 ‘커피 리뷰’로부터 21년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인 97점을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불황을 모른다는 커피산업에서 제외됐던 예멘 커피에 모카라는 이름을 되찾아 준 주인공 목타르 알칸샬리. 이 넌픽션은 그의 성공담 전개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블루보트 창업자 제임스 프리먼으로부터 ‘천사가 노래하는 듯한 맛’이라는 극찬을 받은 그의 예멘 모카커피. 저자는 그 커피를 이렇게 정의한다. ‘예멘과 세계 다른 국가들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촉매제로, 예멘의 문화는 물론 커피의 역사와 문화를 온전히 담아낸 문화상품.’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미국적 풍경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미국적 풍경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경제의 선두에 나섰다. 1920년대 미국의 경제적 번영을 이끈 것은 자동차 산업과 전기제품 산업이었다. 자동차 생산은 1900년 미국에서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됐는데 불과 30년 만에 제조업 1위로 올라섰다. 전기제품 산업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전기가 가정의 동력이 되면서 이전 세기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라디오, 전기 청소기, 냉장고 같은 제품들이 가정에 침투했다. 대중은 소비문화로 달려갔고 자동차, 재즈, 영화, 단발머리 신여성으로 상징되는 ‘광란의 20년대’를 낳았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갑작스런 부에 도취해 비틀거리는 사회에 대한 환멸을 드러낸다. 미술가들도 당대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거대한 공장과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기계, 마천루가 빚어낸 인공적 풍경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찰스 데무스는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다. 꽃 정물, 서커스 장면 같은 감각적 소재를 수채화로 그리던 세련된 아방가르드는 사십 줄에 접어들자 좀더 묵직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데무스는 1935년 쉰두 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십 년 남짓 자신의 고향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의 모습을 그리는 데 힘썼다. 랭커스터는 19세기 후반부터 철강, 주물 산업이 발달한 공업도시였다. 이 그림은 공장 건물을 소재로 한 일곱 점의 연작 가운데 하나다. 벽돌 빌딩 위에 검은 수조가 있고, 앞쪽에도 빨간 저장 탱크가 서 있다. 로켓 형태의 수조와 저장 탱크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치솟은 모습은 미래적인 느낌을 준다. 구조물들은 단일한 색의 평면이 아니라 농담이 다른 여러 조각의 도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도형들이 구조물의 세부와 음영을 표현한다. 큐비즘도 이처럼 조각난 도형을 사용하지만, 큐비즘의 도형은 사물을 해체하는 데 반해 이 그림의 도형은 사물을 더욱 견고하고 매끄럽게 만든다. 데무스의 그림은 오랫동안 미국의 산업 발전에 대한 찬가로 해석됐지만, 과연 그럴까? 이 그림 속 공간은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적 없는 건물 사이로 탐조등이 어지럽게 방향을 바꿀 뿐이다. 한 치도 빈틈없는 풍경이 풍기는 냉랭한 아름다움.
  • [서울광장] 기생충 자본주의/이두걸 논설위원

    [서울광장] 기생충 자본주의/이두걸 논설위원

    부스스한 머리에 세파에 찌든 표정의 부부. 남루한 집구석 벽에 액자로 걸려 있는 사자성어가 눈에 들어온다. 안분지족(安分知足).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한다’는 뜻이다. 최근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의 기택(송강호)네 가정 가훈이다.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은 한국적 배경이 짙게 깔려 있다. 서민 아파트 지하실(플란다스의 개)이나 군사독재 시절 도농 복합도시(살인의 추억) 등의 이해 없이 그의 영화를 온전히 즐기기는 쉽지 않다.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작품이라 해외 관객들에게 공감을 사기 어려울 것”이라고 봉 감독이 직접 밝힌 이유다. 하지만 빈부의 극단 대비라는 영화 속 구도는 영화제에 모인 각국 전문가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 양극화 심화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 공통의 문제라는 비극적인 현실을 웅변하는 까닭이다. 빈부격차의 확대는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숙제다. 세계은행(WB) ‘빈곤보고서’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 프랑스의 상위 1%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00년대 초반 10% 후반대를 기록하다가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미국의 수치는 오름세로 반전해 2010년대에는 20% 언저리까지 치솟았다. 일본과 프랑스 역시 두 자릿수를 회복했다. 한국과 대만의 상위 1%의 전체 소득 비중은 1980년 각각 7%, 6% 수준이었다가 2010년 12%로 뛰어올랐다. 미국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도 1988년부터 2008년 전 세계 1인당 실질소득 증가액의 소득분위별 수취 비중 분석을 통해 세계의 상위 10%가 전체 소득 증가액의 68%를 가져갔다는 결론을 내린다. 최상위 2~5%는 25%, 1%는 19%를 쓸어 담았다. ‘임금 소득의 비중이 낮아지고 자본 소득 비중이 커지면서 상위 1%의 부를 소유한 부자들의 부가 1980년대 이후 급격히 높아졌다’는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의 분석과 일맥상통한다. 빈부격차 면에서 한국도 세계 최선두권이다. ‘세계불평등 데이터베이스’(WID)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한국의 상위 10%는 전체 소득의 43.3%를 차지하고 있다. 47.0%인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극심한 양극화는 중산층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위축된 중산층’ 보고서는 전 세계 주요국 중산층(중위소득의 75~200%)의 총소득이 1985년 부유층의 3.9배에서 2015년 2.8배로 크게 줄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OECD 회원국의 중산층 인구 비율은 같은 기간 64%에서 61%로 떨어졌다. 중산층의 붕괴는 글로벌 경제에 직격탄이 된다. 대규모 소비 여력을 지닌 중산층이 감소하면 소비 및 투자 위축과 소득 감소, 그에 따른 중산층의 추가 감소라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OECD에 따르면 지니계수가 0.03포인트 악화되면 경제성장률도 0.35% 포인트씩 떨어진다. 불평등은 사회를 병들게도 한다. 리처드 윌킨슨 영국 노팅엄대 명예교수는 저서 ‘더 스피릿 레벨’(평등이 답이다)을 통해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기대수명이 낮아지고 우울증과 정신질환 유병률이 높아진다고 분석한다. 불평등지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확산된 1980년대 이후 악화됐다. 개별 국가로서는 세계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 대안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다. 성장은 불평등 해소의 특효약이지만 1950~1970년의 예외적 시기를 지난 뒤에는 글로벌 성장률이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불평등 완화를 위한 답을 알고 있다. OECD 등은 소득세 및 법인세 최고세율의 인상과 감세 폐지, 교육 및 복지정책 강화 등을 권고했다. 한국 등 재정 여건이 양호한 국가는 재정지출 확대도 필수적이다. 최고임금 제도도 고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모두 중산층 이하의 실질소득을 끌어올리는 조치다. 관건은 실천을 위한 의지다. 빈부격차 확대를 더이상 방치했다가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필수적이다. 여기에는 이념도 성향도 관계없다. 파국적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혁명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생충은 혐오의 대상이다. 숙주의 영양분을 빨아먹는 속성 때문이다. ‘기생충 같은 놈’이라는 욕설도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기생충의 대표적인 생물학적 특성은 공존이다. 숙주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채 몰래 기생을 해야 자신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 온전히 뺏는 대신 나누는, 파멸 대신 공존을 선택하는 ‘기생충 자본주의’를 상상하자. douzirl@seoul.co.kr
  • 美 육사 졸업식, 5000번째 여성·1000번째 유대인…기록 풍년

    美 육사 졸업식, 5000번째 여성·1000번째 유대인…기록 풍년

    오는 25일(현지시간) 미국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의 졸업식에서 각종 기록이 깨질 전망이다. 웨스트포인트 측은 올해 5000번째 여성 졸업생이 탄생한다고 밝혔다. 지난 1980년 첫 여성 졸업생이 나온 이후 40여 년 만이다. 졸업생에 포함된 흑인 여성 역시 34명으로 역사상 최대 규모다. 프랭크 데마로 미 육사 대변인은 “오는 25일 졸업식에서 5000번째 여성 생도가 배출된다. 지난해 27명이던 흑인 여성 졸업생 역시 올해는 34명으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데마로 대변인은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다양한 학생들이 졸업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22일 ‘CBS 오늘 아침’에 출연한 4명의 생도는 웨스트포인트에 확산되고 있는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흑인 여성 생도 가브리엘 알포드는 “운 좋게도 다른 33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과 졸업하는 영광을 안게 됐다”고 밝혔다. 그녀는 “이제 웨스트포인트에는 성별, 인종, 성적 취향과 관계없이 여러분을 도울 사람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번 졸업식에서는 1000번째 유대인 졸업생도 나온다. 노아 칼렌은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는 1000번째 유대인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누구든 유대인이면서 미국인일 수 있다. 두 가지를 분리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백인 대위 데이비드 빈든은 CBS에 “생도 모두가 백인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양한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훨씬 도움이 된다. 나와 다른 접근 방식에서 새로운 관점을 배운다”고 설명했다. 멕시코계 미국인 여성 생도 마리나 카마초 역시 “다양성이 확보될수록 웨스트포인트의 포괄성이 높아진다. 그렇다고 수준을 떨어뜨리는 건 절대 아니”라고 역설했다.미국 육군사관학교는 다양성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2017년에는 시몬 애스큐가 흑인 여성 사상 최초로 생도 대표로 선출돼 4400명 사관생도를 아우르는 최고 지휘권을 거머쥐었다. 지난해에는 대럴 A. 윌리엄스 중장이 미 육사 사상 최초의 흑인 교장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CNN은 웨스트포인트가 지난 2014년 생도의 다양성 확보를 위한 전담 사무소를 설립하면서 흑인 재학생이 전체의 10%까지 늘어났다고 전했다. 이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20% 정도다.1900년대만 해도 웨스트포인트는 백인 남성 중심이었다. 1802년 설립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1877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헨리 O. 플리퍼라는 흑인 졸업생을 배출했다. 여성 입학은 1976년 허용됐으며, 1980년 첫 여성 졸업생이 나오기까지는 180년 가까이 걸렸다. 최근 들어 흑인과 히스패닉계 등의 비율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학교 내 인식 수준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CBS는 지난 2016년 흑인 여성 생도들의 졸업사진 논란을 상기시켰다. 당시 졸업을 앞둔 흑인 여성 생도들은 다 같이 주먹을 쥐고 사진을 찍었는데, 여기에 정치적 의도가 포함된 거라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웨스트포인트는 이들이 품위유지 규정을 위반하지는 않았는지, 또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국방부 규정을 어기지는 않았는지 조사에 착수했다.가브리엘 알포드는 “내가 웨스트포인트에 대한 최악의 인상을 받은 첫 번째 사례”라고 밝혔다. 그녀는 "나는 그 사진이 자긍심과 통합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먹은 그저 힘의 상징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 “단순한 포즈 하나에도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는 것에 놀랐다”고 덧붙였다. 해당 사진에 대해 당시 같은 웨스트포인트 생도들조차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졸업생들은 5000번째 여성 졸업생, 1000번째 유대인 졸업생, 사상 최대 규모의 흑인 여성 졸업생(34명)과 히스패닉계 여성 졸업생(19명)을 배출하는 올해를 기점으로 웨스트포인트가 한발 더 나아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편 오는 25일 열리는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의 졸업식에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참석해 축하 연설을 할 예정이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이날 950여 명의 생도가 학교를 떠나 미 육군 소위로 임관할 것이라고 밝혔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5000번째 여성·1000번째 유대인…기록 쏟아지는 美 육사 졸업식

    5000번째 여성·1000번째 유대인…기록 쏟아지는 美 육사 졸업식

    오는 25일(현지시간) 미국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의 졸업식에서 각종 기록이 깨질 전망이다. 웨스트포인트 측은 올해 5000번째 여성 졸업생이 탄생한다고 밝혔다. 지난 1980년 첫 여성 졸업생이 나온 이후 40여 년 만이다. 졸업생에 포함된 흑인 여성 역시 34명으로 역사상 최대 규모다. 프랭크 데마로 미 육사 대변인은 “오는 25일 졸업식에서 5000번째 여성 생도가 배출된다. 지난해 27명이던 흑인 여성 졸업생 역시 올해는 34명으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데마로 대변인은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다양한 학생들이 졸업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22일 ‘CBS 오늘 아침’에 출연한 4명의 생도는 웨스트포인트에 확산되고 있는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흑인 여성 생도 가브리엘 알포드는 “운 좋게도 다른 33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과 졸업하는 영광을 안게 됐다”고 밝혔다. 그녀는 “이제 웨스트포인트에는 성별, 인종, 성적 취향과 관계없이 여러분을 도울 사람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번 졸업식에서는 1000번째 유대인 졸업생도 나온다. 노아 칼렌은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는 1000번째 유대인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누구든 유대인이면서 미국인일 수 있다. 두 가지를 분리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백인 대위 데이비드 빈든은 CBS에 “생도 모두가 백인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다양한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훨씬 도움이 된다. 나와 다른 접근 방식에서 새로운 관점을 배운다”고 설명했다. 멕시코계 미국인 여성 생도 마리나 카마초 역시 “다양성이 확보될수록 웨스트포인트의 포괄성이 높아진다. 그렇다고 수준을 떨어뜨리는 건 절대 아니”라고 역설했다.미국 육군사관학교는 다양성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2017년에는 시몬 애스큐가 흑인 여성 사상 최초로 생도 대표로 선출돼 4400명 사관생도를 아우르는 최고 지휘권을 거머쥐었다. 지난해에는 대럴 A. 윌리엄스 중장이 미 육사 사상 최초의 흑인 교장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CNN은 웨스트포인트가 지난 2014년 생도의 다양성 확보를 위한 전담 사무소를 설립하면서 흑인 재학생이 전체의 10%까지 늘어났다고 전했다. 이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20% 정도다.1900년대만 해도 웨스트포인트는 백인 남성 중심이었다. 1802년 설립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1877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헨리 O. 플리퍼라는 흑인 졸업생을 배출했다. 여성 입학은 1976년 허용됐으며, 1980년 첫 여성 졸업생이 나오기까지는 180년 가까이 걸렸다. 최근 들어 흑인과 히스패닉계 등의 비율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학교 내 인식 수준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CBS는 지난 2016년 흑인 여성 생도들의 졸업사진 논란을 상기시켰다. 당시 졸업을 앞둔 흑인 여성 생도들은 다 같이 주먹을 쥐고 사진을 찍었는데, 여기에 정치적 의도가 포함된 거라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웨스트포인트는 이들이 품위유지 규정을 위반하지는 않았는지, 또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국방부 규정을 어기지는 않았는지 조사에 착수했다.가브리엘 알포드는 “내가 웨스트포인트에 대한 최악의 인상을 받은 첫 번째 사례”라고 밝혔다. 그녀는 "나는 그 사진이 자긍심과 통합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먹은 그저 힘의 상징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 “단순한 포즈 하나에도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는 것에 놀랐다”고 덧붙였다. 해당 사진에 대해 당시 같은 웨스트포인트 생도들조차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졸업생들은 5000번째 여성 졸업생, 1000번째 유대인 졸업생, 사상 최대 규모의 흑인 여성 졸업생(34명)과 히스패닉계 여성 졸업생(19명)을 배출하는 올해를 기점으로 웨스트포인트가 한발 더 나아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편 오는 25일 열리는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의 졸업식에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참석해 축하 연설을 할 예정이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이날 950여 명의 생도가 학교를 떠나 미 육군 소위로 임관할 것이라고 밝혔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아카시아와 아까시나무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아카시아와 아까시나무

    어릴 적 우리 집 뒤엔 관악산이 있었고 주말이면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산에 올랐다. 너무 어릴 때의 기억이라 그저 아버지와 관악산에 자주 갔었다는 것과 아버지와 손을 잡고 내려오던 산에선 향기로운 꽃향이 났었다는 것, 그 산에는 동그란 잎이 여러 개 달린 가지의 나무가 많았다는 기억만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초등학교 때 이사 가기 전까지 종종 우리 가족은 산에 올랐고, 부모님은 내가 기억하는 그 나무를 아카시아라고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먹는 꿀이 바로 이 아카시아로부터 나는 것이라는 것까지도. 그때 왜 그렇게 산에 아카시아가 많은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던 것이겠지. 생물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은 의미 없다 생각했다. 아카시아 이름에 관한 의문도 품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해 수목학 수업을 들으며 1900년대 초에 도입돼 1970년대까지 전쟁이 끝나 황폐해진 산을 복구하기 위해 자라는 속도가 빠른 아카시아를 도심의 산에 심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무엇보다 그 나무의 이름이 내가 부르던 아카시아가 아닌 아까시나무라는 것은 꽤나 충격이었다.아까시나무. 관악산을 뒤덮고 있던 향기로운 그 꽃향의 나무는 아까시나무였고 아카시아는 전혀 다른 식물이었다. 둘 다 콩과이긴 하지만 우리 산에 많은 아까시나무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흰 꽃을 피우는 식물이고, 아카시아는 호주와 아프리카 원산의 노란 방울 모양의 꽃이 핀다. 요즘 플라워 디자인용 절화로 많이 이용하는 미모사나무가 바로 아카시아속 식물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이름부터 잘못 불린 아까시나무는 1891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와 100년이 넘는 지금까지 많은 오해와 편견 속에 지내왔다. 해방 이후 산에 나무가 없어 흙만 보여 붉은 산이라 불리던 우리나라의 산에 1970년대까지 생장 속도가 빠른 이들을 식재해 왔으나 1980년대 이후에 일제의 잔재라거나, 다른 식물의 생육을 방해한다거나, 뿌리가 관을 뚫고 들어간다는 등의 잘못된 이론으로 한동안 우리 숲에 유해한 나무로 인식돼 왔다. 오해를 풀자면, 이들은 일제 식민지 정신을 새기기 위해 심어진 식물도, 일본 원산의 식물도 아니다.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세계적으로 이미 관상용이나 사방 조림용으로 많이 식재되던 종이다.그리고 햇빛을 좋아해 이미 숲을 이룬 곳은 들어가지 못하고, 콩과 식물에 있는 뿌리혹박테리아가 땅에 질소를 공급해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다른 나무의 생육을 방해한다는 건 틀린 이야기이고, 뿌리가 땅속으로 얕게 퍼져나가는 형태라 묘지의 관 깊이까지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관을 뚫는다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뿌리가 왕성하게 자라 토양을 잡아주면서 산사태를 막아준다. 게다가 이들은 꿀을 만들어 주는 대표적인 밀원식물이다. 우리나라 꿀의 80%가 아까시나무 꿀인데, 그동안의 오해로 아까시나무 개체수가 줄면서 우리나라 양봉업계에 위기가 불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산림청은 2016년부터 아까시나무 조림 사업을 다시 시작했고, 이들 기능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에도 애쓰고 있다. 불과 수십년 만에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실현시킨 우리나라 곳곳의 아까시나무, 그 외의 또 다른 식물들, 산림 인재와 기술 등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 곳곳에 나무를 심고 있다. 몽골, 중국, 카자흐스탄 등 세계의 산림 관계자들이 우리나라에 와 사막과 도시를 숲으로 만들 기술을 배우고자 하고, 우리는 북한과 협력해 북한 산림을 푸르게 만들 계획도 갖고 있다. 격년 주기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산림 관계자들이 모여 산림 과제와 해결 방안을 도모하는 회의인 아태산림주간이 올해 우리나라에서 열린다는 건 그래서 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주 이 회의에서 진행할 세밀화 강의를 위해 들렀던 산림청에서 직원 중 한 분이 몽골 사막 조림 사업 이야기를 하며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식물, 동물과 같이 살아 있는 생물을 다루는 일이란 국경을 넘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로 우리와 이어진 어느 땅이 푸르러진다면 그보다 더 값진 일이 있을까. 먼 훗날 사막에서 숲으로 변할 몽골에서, 미래의 어느 아이가 이 숲의 나무는 언제 누가 심었는지 궁금해한다면 좋겠다. 그러면 누군가 아이에게 먼 옛날 어느 먼 곳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 나무를 심어 주었다고 이야기하겠지. 지금 우리가 보는 저 산의 아까시나무도 수십년 전 누군가 심은 수고와 희망의 씨앗이었음을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한다.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페더 세베린 크뢰이어는 1888년 파리에 갔다가 같은 덴마크 화가인 마리 트리페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크뢰이어는 서른여덟 살, 트리페크는 스물두 살이었지만 두 예술가에게 나이 차이는 문제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음해 결혼식을 올리고 유틀란트반도 끝에 있는 스카겐에 자리잡았다. 한적한 어촌 스카겐은 19세기 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화가들이 모여들면서 북구 인상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인상주의의 핵심 개념인 근대성과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생’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1874년 파리에서 열린 첫 번째 인상주의전은 악평과 조롱 속에 끝났지만 젊은 화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인상주의의 목표는 역사, 신화, 종교 같은 낡은 주제에서 벗어나 당대 현실의 단면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화가들은 바깥에 나가 거리, 일터, 카페, 기차역에서 소재를 찾았고, 즉석에서 그림을 마무리함으로써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일상생활의 역동성을 포착하려 했다. 북구 화가들은 스카겐에서 삶의 현장을 발견했다. 크뢰이어는 1882년부터 매년 스카겐을 방문했고, 결혼한 뒤에는 아예 이곳에 정착했다. 두 사람은 행복했다. 크뢰이어는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이 시기 그는 덴마크 인상주의의 기념비로 남게 될 그림들을 그렸다. 해변에 나가 일하는 어부들을 그렸지만, 사랑스런 아내도 여러 점 그렸다. 코펜하겐에서 손꼽히는 미인이었던 트리페크는 행복과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장미’는 신혼 시절 찍었던 사진을 서너 해 뒤에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꽃이 만발한 장미나무가 뒤편 집채를 가리고 있다. 트리페크는 야외용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발치에는 애완견이 웅크리고 있다. 행복은 짧았다. 1900년대 초 정신질환이 크뢰이어를 덮쳤고 시력까지 약해졌다. 치료를 받느라고 부부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트리페크는 스웨덴 작곡가 후고 알벤과 사랑에 빠졌다. 크뢰이어는 트리페크를 놓아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05년 트리페크와 알벤 사이에 아이가 생기자 더이상 어쩔 수 없었다. 크뢰이어는 1909년 스카겐에서 눈을 감았다. 변덕스런 운명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운 자, 어디 있으랴. 미술평론가
  • [남순건의 과학의 눈] 노트르담 대성당의 비밀

    [남순건의 과학의 눈] 노트르담 대성당의 비밀

    900년 가까이 온갖 전란에도 굳건히 버티던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에 지난달 15일 큰 화재가 났다.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소실되는 것을 뉴스로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큰 슬픔에 잠겼다. 파리에 가 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렀을 노트르담 대성당은 서쪽에 매우 화려한 입구가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스테인글라스 창들과 높은 천장이 있는 실내 분위기에 압도돼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그뿐만 아니라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고딕식 높은 첨탑들은 하늘을 향한 믿음의 표현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구석구석 작은 조각들은 스토리텔링의 매개체로서 멋진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노트르담 대성당에는 12세기 초 등장한 고딕 양식에 필요한 당시의 과학기술이 집대성되어 있다. 높다란 천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벽을 높게 쌓아야 하는데 돌이나 벽돌로 높이려면 벽이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또 어둑한 실내에 빛이 들어오게 곳곳에 유리창을 만들다 보면 벽은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쌓아 놓은 돌의 특성상 누르는 힘에는 강하지만 옆으로 밀리면 쉽게 무너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벽날개’라는 독특한 구조가 등장했다.초기 고딕 건축물에서는 벽이 옆으로 밀리는 것을 막기 위해 벽의 외부에 기둥을 덧댄 부벽을 만들어 구조를 튼튼하게 했다. 그러나 부벽을 만들다 보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가로막히게 되어 스테인글라스의 효과가 떨어진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부벽을 건물의 벽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면 된다. 이때 벽과 부벽들을 연결하는 공중에 있는 아치형 날개들로 벽을 버티게 한 것이다. 그리고 부벽 위에 뾰족한 탑들을 올려놓아 멋을 더한 것이다. 당시의 건축가들은 이러한 구조를 시행착오로 찾았을 것이고 아치형 날개의 모양도 현대 건축공학에서와 같이 정확한 수학계산에 의한 것이 아닌 많은 실패를 한 후에 쌓인 경험에 의해서 완성했을 것이다. 멋진 문화 유산을 감상할 때 흔히 놓치는 것이 이 같은 숨은 과학 기술들이다. 벽날개 공법으로 지어진 수많은 고딕 성당들은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가면서 15세기 초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완성된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거대한 돔 구조로 바뀌게 된다. 역학적으로 안정된 돔 구조가 만들어 내는 웅장함은 이후에 계속돼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이나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에도 적용됐다. 20세기 초 도입된 철근 콘크리트 기법은 마천루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의 삶의 행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현대 과학기술에서 사용되는 각종 수식과 기법들은 사실 인류의 오랜 경험의 집약체이다. 컴컴한 동굴 속에서 두려움에 떨던 인간이 중력을 이겨 내는 구조물을 만들고 나아가 원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수학식이다. 아마도 이런 지혜를 구비문학 방식으로 전달하려 한다면 적어도 수백년 동안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집약된 지식의 전달 체계를 갖추어 자연을 극복한 인간의 노력이야말로 노트르담 대성당의 비밀의 일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국 전통 건축을 이야기할 때는 숨어 있는 과학기술이 아닌 `장인 정신’만 강조된다. 누구에게나 객관화할 수 없는 기술이라면 그것은 비과학적이고 인류의 진정한 유산이 될 수 없을 것이다.
  • [김 태의 뇌과학] 망상의 뇌과학

    [김 태의 뇌과학] 망상의 뇌과학

    ‘이치에 맞지 않는 망령된 생각.’ 국어사전은 ‘망상’을 이렇게 규정한다. 일상적으로 쓰는 망상이라는 말과 정신의학 용어로서의 망상은 개념이 비슷하나 심각도가 상당히 다르다. 정신의학 증상의 망상은 ‘이치에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UFO(미확인비행물체)가 나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처럼 그 내용이 현실과 심각하게 동떨어져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것은 망상이 시작되고 체계화되면 그 생각이 잘못됐음을 확증하는 증거를 제시해도 망상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더욱 공고해진다는 점이다. 약물치료로 증상을 조절할 수 있지만 완벽하지 않다. 망상이 형성되는 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1900년대 초 철학자이자 정신의학자였던 카를 야스퍼스는 망상이란 개인의 살아온 과정, 동기, 역사·문화적 맥락을 모두 동원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며, 개인 성격 발달의 과정을 방해하는 어떤 신경생물학적인 과정에 의해 발생했으리라 추측했다. 망상은 조현병, 망상 장애, 양극성 장애 등 다양한 질환에서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뇌에는 눈에 띄고 중요한 자극을 감지하는 ‘현저성 네트워크’가 존재하는데 중뇌 도파민 뉴런, 선조체, 전대상피질, 전섬엽 등이 그 주요 뇌 부위이다. 도파민 뉴런의 이상으로 네트워크 기능에 이상이 발생하면 결국 부정확한 주관적 경험이 일어나고 이를 부정확하게 해석해 일차 망상에 이르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저성 사건’에 대한 학습 능력이 손상돼 일차 망상이 반복적으로 공고화된다. 최근 미국 컬럼비아의대 정신과의 기예르모 홀가 교수는 망상의 정도와 추론과의 상호작용을 추정하는 정교한 실험을 했다. 청색 그릇에는 청색 구슬과 녹색 구슬을 75대 25의 비율로 놓고, 녹색 그릇에는 녹색과 청색 구슬을 75대 25의 비율로 놨다. 환자에게는 각각의 그릇에 청·녹색 구슬이 어떤 비율로 담겼는지를 알려준 다음 그릇을 가리고 구술을 하나씩 받게 했다. 그러다 확신이 들면 2개 그릇 중 어떤 그릇에서 구슬을 뽑았는지 답하는 게임을 했다. 청색 그릇에 청색 구슬이 많으므로 청색 구슬을 많이 받았다면 보통 청색 그릇에서 이 구슬이 나왔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지만, 망상이 심한 환자일수록 결론을 내리기 위해 더 많은 구술을 받길 원했다. 판단을 쉽게 내리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망상 환자들이 ‘속단’을 내린다고 믿었던 기존의 가설을 뒤엎는 결과였다. 망상의 중심에는 경직된 사고가 있고, 그 과정은 매우 천천히 일어난다는 사실 또한 컴퓨터 모델링을 통해 밝혀졌다. 환자가 망상을 행동으로 표출하면 가족과 사회에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 있다. 희망적인 것은 이러한 망상이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약물치료를 통해 근본 원인인 도파민 과다를 조절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빨리 조기 발견과 조기 중재를 통해 망상을 예방할 방법이 개발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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