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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층 목탑
    202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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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엑스포공원 21일 전면 개장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이 동절기 휴식을 끝내고 21일 전면 개장된다. 경주엑스포공원은 19일 지난해 호응을 얻었던 프로그램을 보완하고 신규 공연, 전시 등의 행사를 추가해 이날부터 전면 개장한다고 밝혔다.개장일에는 난타 특별공연, 휴일인 22일엔 퓨전 타악 퍼포먼스 잼스틱을 무료로 선보이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문화 프로그램으로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음각으로 재현한 경주타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달빛 레이저 쇼, 신라인의 생활상을 담은 신라문화역사관, 최고급 명화 복제품 52점을 전시하는 세계명화갤러리, 세계화석박물관 등을 준비했다. 특히 삼국유사 내용 중 신라에 관한 이야기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재미있게 표현한 애니메이션 ‘아이 삼국유사’가 올해 처음 선보인다.공원은 평일에는 오전 10시~오후 6시 개방되고, 토·일요일과 공휴일, 여름철에는 오후 7시까지 1시간 연장한다. 요금은 어린이 3000원, 청소년 4000원, 성인 6000원이다.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신라·가야·유교 문화권 특화 개발

    경북도가 3대 문화권 개발사업을 추진한다.경북도는 16일 신라·가야·유교 등 3대 문화권을 체계적으로 개발하는 ‘3대문화권 사업 기본구상안’에 대한 용역 중간보고회를 가졌다.이 안에 따르면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문화권과 고령의 가야문화권, 경북 북부지역의 유교문화권으로 나눠 개발 사업을 한다. 올해부터 추진해 2018년까지 모두 39조 8169억원이 들어간다.신라문화권에는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와 경주의 넓은 들, 동해바다를 최대한 활용해 개발한다. ‘신라문화 뉴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진행해 신라의 문화와 전통을 재현한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복원하고 신라 왕경 문화유적을 정비한다. 경주·영천 일대에는 ‘신 화랑 풍류체험벨트’를 조성한다. 철기시대를 꽃 피운 가야문화는 대가야의 고장 고령을 중심으로 사업이 추진된다. 대가야 고대촌과 대가야 종묘를 조성하고 가야국 뱃길을 재현해 관광명소로 만든다. 고령과 인접한 성주군에는 가야산성을 정비하고 성산고분을 공원화한다.유교문화권은 휴양·웰빙 메카로 육성한다. 2014년까지 봉화 일원에 국립백두대간 고산수목원을 조성하고 영주·예천 일원에 백두대간 요양·치료(테라피)단지를 만든다. 이곳에는 산림치유센터, 약초시험장, 숲속학교, 산림요양 마을 등이 들어선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3D로 되살려낸 황룡사 9층목탑

    지난 여름 방영된 MBC 드라마 ‘밤이면 밤마다’에서는 고미술학자와 문화재청 직원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바 있다.흔히 문화재 복원과 보존 작업은 ‘수술’에 비유되곤 한다.보존처리에서 단 1㎜ 오차라도 발생하면 원형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4일 오후 9시50분에 방송되는 E BS ‘다큐프라임-원더풀사이언스’에서는 문화재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거나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보존과학 기술의 현주소를 다뤄보고,문화재 보존과 복원 안에 숨어 있는 과학기술을 알아본다.문화재 보존이란 현재 상태에서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한 모든 조치를 말한다.효과적인 복원과 보존을 위해서는 유물의 사전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때문에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유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발굴 당시 수분유지나 화학약품 처리 등의 응급처치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과학적 조사방법인 X선 촬영으로 문화재의 제작기법뿐만 아니라 훼손상태를 파악해 보존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기도 한다.최근 문화재의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보존환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고 있다.훼손되기 전에 미리 보호할 수 있도록 하자는 예방 보존활동이 과학의 발전을 통해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보존과학에는 최신기술이 동원된다.벌레와 균에 취약한 문화재의 경우 가스 훈증실을 거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훼손될 정도를 예측해 보는 타임머신 같은 기기도 있다.문화재의 보존복원 과정은 각 특성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재질 특성상 도자기류는 훼손 정도도 심할 수밖에 없다.그래서 도자기의 복원 처리는 대부분 완전한 형태를 만들어주는 복원을 선택한다.이와 달리 서화 문화재의 보존처리는 현 상태를 최대한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문화재의 보존과 복원은 눈에 보이는 유형문화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보존에 한계가 있는 소실된 문화재와 무형문화재 복원에서 ‘디지털 복원’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다. 디지털 복원작업 중 하나인 3D스캔으로 새롭게 탄생한 황룡사 9층목탑의 복원과정과 모션 캡처를 이용한 무예도보통지의 디지털 복원 작업을 통해 보존·복원과학의 밝은 미래를 만나본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황룡사 9층 목탑 조기 복원한다

    황룡사 9층 목탑 조기 복원한다

    세계 최대 높이의 목조 건물로 추정되는 경주 황룡사(皇龍寺) 9층 목탑(높이 82m 추정)의 복원이 770년만에 적극 추진되고 있다. 경북도·경주시와 최대 불교 종단인 조계종이 이 사업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사료 등에 따르면 이 목탑의 높이는 서울 여의도 63빌딩의 3분의1이다. ●1238년 소실… 2015년 마무리 28일 경북도와 불교계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 평화통일과 선진 한국 창조를 위한 범 국민적 염원 결집 사업으로 황룡사 9층 목탑 조기 복원을 추진하기로 했다. 경북도 등은 올해부터 2015년까지 135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한다. 황룡사 9층 목탑 복원은 지난해 7월 참여정부가 국책사업으로 선정한 ‘경주 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에 반영됐으나 지금은 장기 사업(2016∼2025년)으로 분류돼 있다. 국책 사업이지만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 세워지지 않아 경북도와 경주시가 사업 계획 등을 준비하고 있다. 경주 불국사 등 대구·경북 조계종 5대 본사 주지들은 다음 달 회동을 갖고 범정부 차원의 황룡사 9층 목탑 조기 복원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서명운동을 하기로 했다. 조계종 총무원도 제17대 대통령 선거 불교계 공약사업으로 채택된 ‘황룡사 및 9층 목탑 복원사업’을 이명박 정부에서 조기 추진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계획이다. ●복원 서명운동·대토론회 등 추진 경북도와 경주시는 4월 황룡사 9층 목탑 복원을 위한 시민 대토론회를 열고,7월에는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국민적 관심과 동참을 유도하기로 했다. 도는 황룡사 및 9층 목탑 조기 복원을 위해 지금까지 8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를 끝내고 지난해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기본계획 수립 용역에 이어 기본 계획을 수립했다. 오는 6월에는 충남 부여의 국립전통문화학교에서 복원 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정보센터 기본설계 용역을 끝내고 8월과 12월에는 건축 유적의 본원적 연구와 복원 정비기술 사례조사연구, 고대 건물의 평면지 및 구조시스템 조사연구 등 기초 조사 용역을 끝낼 계획이다. ●승방·금당 등 14개 건축물도 복원 방침 경북도 관계자는 “빠른 시일 내에 황룡사 9층 목탑의 조기 복원을 중앙정부에 건의할 계획”이라며 “거대한 9층 목탑이 복원되면 1550억원을 추가 투입해 황룡사지에 목탑, 금당, 강당, 승방, 종루 등 14개 동의 건축물을 복원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에 있던 9층 목탑은 황룡사의 장륙존상(丈六尊像), 진평왕의 옥대(玉帶)와 함께 신라시대의 3대 보물이다. 신라 27대 선덕여왕이 불력(佛力)으로 구한(九韓·왜, 당,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을 물리치고 국론 및 신라 삼국통일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여왕 12년(643년)부터 여왕 14년(645년)까지 3년간에 걸쳐 황룡사 경내에 백제인 아비지(阿非知)의 손으로 건축케 했다. 그러나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년)에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돼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

    경주세계문화행사가 50일간의 일정으로 천년고도 경주에서 개막됐다. 올해 다섯번째이며 역대 최대 규모다. 중국, 일본,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등 72개국 1만여명의 문화예술인이 참가했다. 행사는 6일 오후 7시 개막식을 가진 데 이어 7일부터 10월26일까지 50일간 경북 경주시 엑스포공원 일원에서 열린다. 특히 이번 행사는 최근까지 총 600억원을 들여 완공한 경주타워, 엑스포문화센터, 신라왕경숲 등 예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시설들이 소개된다. ●82m 경주타워 멀티미디어쇼 눈길 개막식에는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관용 경북도지사, 김종민 문화관광부 장관 등 각계 인사와 주민 등 3200여명이 참석, 성공적인 경주 엑스포 개막을 선언했다. 신라 황룡사 9층 목탑을 음각 형상화한 높이 82m의 ‘경주타워’가 경주 보문단지 엑스포 공원 정문에 세워져 경주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등장했다. 타워 옆 엑스포문화센터(지상 3층, 지하 1층)는 알에서 깨어난 신라문화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돔형 지붕과 신라의 역사를 바코드로 새긴 정면 유리벽이 특징이다. 신라 개국설화를 담은 첨단 전시·공연시설로 지어졌다. 역시 공원내 부지 18만㎡에 조성된 ‘신라 왕경숲’은 신라의 숲이 가지는 역사·문화적 이야기를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2만 그루의 나무와 2만 송이의 야생화가 어우러져 있다. 가장 큰 기대를 모으는 것은 ‘경주타워 멀티미디어쇼’. 타워에서 PIGI영상, 조명, 레이저, 불꽃, 입체 사운드가 입체적으로 어우러져 황룡사 9층탑의 탄생과 소실, 그리고 환생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또 저승으로 붙잡혀 간 신라왕과 도공 소녀 유지를 구한다는 내용의 ‘도제기마인물상(국보 제91호)’을 3D 입체 영화화한 ‘토우대장 차차’가 선보인다. ●백남준 특별전 등 40여 프로그램 마련 CT(Culture Technology) 체험관에서는 신라시대의 궁궐, 이승과 저승의 중간계, 지옥세계 등을 실감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공연은 일본, 중국, 캄보디아, 폴란드, 불가리아 등 15개 나라에서 18개 팀이 출연, 정통성 있는 다양한 문화예술 공연을 펼친다. 비보이 세계대회를 석권한 맥시멈 크루, 익스트림, 버스트 갬블러,T.I.P 등이 브레이크 댄스의 진수를 뽐낸다. 전시는 비디오 아트 창시자인 백남준 특별전과 의상과 건축 등 우리 전통 문화를 디지털로 복원한 ‘한국디지털문화원형전’ 등이 마련됐다. 이 밖에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국립 아이스발레단의 발레&쇼와 화장의 문화와 역사, 화장기술의 변천사 등을 전하는 뷰티엑스포가 열린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관계자는 “이번 엑스포는 국내외 다양한 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면서 “기간 중 국내외 관광객 150여만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되며,3100억원의 생산 유발 효과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경주세계문화 엑스포 2007] ‘천년의 빛’ 古都를 깨운다

    [경주세계문화 엑스포 2007] ‘천년의 빛’ 古都를 깨운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07’이 다음달 7일부터 10월26일까지 50일간의 대장정을 시작한다.7일 경주세계문화엑스포조직위에 따르면 ‘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07’은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에서 ‘천년의 빛, 천년의 창’을 주제로 영상, 체험·참여, 공연, 전시 등 4개 부문 13개 중점 테마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4개 부문 13개 테마프로그램 진행 올해 행사에서는 새로운 볼거리들이 관람객을 흥분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가장 기대를 모으는 것은 ‘경주타워 멀티미디어쇼’. 황룡사 9층 목탑을 음각화한 경주타워는 아파트 30층 높이의 규모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 타워를 스크린삼아 첨단 레이저그래픽과 입체사운드 등으로 신라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스펙터클쇼를 연출한다. 또 3D 입체영상관에서는 애니메이션 ‘토우대장 차차’가 상영된다. 신라의 대표적인 문화 아이콘인 ‘토우’가 ‘차차’라는 이름의 무사로 의인화돼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는 내용이다. 관람객이 직접 3D 입체영화 주인공 ‘차차’를 체험할 수 있는 ‘CT체험관’도 올해 첫선을 보이는 것이다. 체험 행사를 늘린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체험관에서 관람객들은 저승세계와 서라벌의 콘텐츠를 만져보고 느낄 수 있다. 국내·외 유명 캐릭터들과 만날 수 있는 ‘캐릭터 판타지 월드’와 2만 그루의 나무와 2만 송이의 꽃을 심어둔 숲에서 관람객이 자연과 하나되는 ‘신라 왕경숲 로하스축제’도 볼거리다. 의상과 건축 등 우리 전통문화를 디지털로 복원한 ‘한국디지털문화원형전’과 비디오 아트 창시자인 고 백남준의 작품들로 꾸민 ‘백남준 특별전’도 열린다. ●‘비보이 페스티벌´등 32개국 공연 선봬 이밖에 ‘세계공연예술축제’와 ‘월드 비보이 페스티벌’ ‘세계꼭두극축제’ ‘러시아 아이스 발레쇼’ ‘지구촌 민속난장’ 등 해외 참가국들의 다양한 공연도 선보인다. 올해 행사에는 중국, 일본,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등 32개국에서 60여개 팀 1000여명이 참가한다. 특히 지난해 열린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로 인연을 맺은 캄보디아는 ‘캄보디아 날’ 행사 때 VIP가 참가할 것으로 알려졌다. 경주엑스포조직위는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 특별기획전’ 코너를 개설해 당시 인기를 끌었던 콘텐츠를 전시한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폐막과 동시에 시설 리모델링에 들어가 내년 3월부터 상시 개장된다. 그동안 시설과 예산 등의 문제로 2∼3년마다 열렸다. 경주엑스포조직위 관계자는 “그동안 경주엑스포 행사가 광장에서 치러졌다면 올해는 전시관과 왕경숲 등 준비된 공간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며 “관람객은 150만명 정도를 예상한다.”고 밝혔다. 경주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경주타워’ 벌써 명물 됐다

    ‘경주타워’ 벌써 명물 됐다

    경북 경주의 랜드마크(상징건물)가 될 ‘경주 타워’가 위용을 드러내면서 벌써부터 국내외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다. 18일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에 따르면 엑스포의 정체성 및 세계적인 문화파크 확보를 위해 엑스포공원 내에 건립 중인 ‘경주 타워(연면적 4000㎡)’가 최근 모습을 나타내면서 하루 평균 수학여행단 등 1000여명이 찾고 있다. ●높이 82m… 경주의 랜드마크로 2004년 공사를 시작한 이 타워의 현재 공정률은 87%로 다음달 중 준공 예정이다. 특히 이날 수학여행 상품개발을 위해 경주를 찾은 서울지역 32개 초·중·고교 관계자와 학부모 등 40명이 경주타워를 둘러봤다. 앞서 17일에는 일본 주요 여행사 관계자 10명이,16일엔 충남도 행정부지사 일행 16명이 경주타워를 찾았다. 또 중국 영하회족 인민대표단 8명과 일본 주요 언론사 기자 15명도 최근 엑스포공원을 방문해 경주타워를 찾는 등 국내외에서 관람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 타워는 현재 내부 마감공사와 멀티미디어쇼를 위한 조명 및 시스템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황룡사 9층 목탑 형상 음각 경주타워 높이는 아파트 30층에 해당하는 82m이다. 삼국유사에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황룡사 9층 목탑을 225척(尺·1척=30.3㎝)으로 기록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타워 외벽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이 음각으로 조각돼 있다. 보문단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경주타워의 꼭대기에는 고공전망대와 디지털문화전시관이 들어선다. 특히 이곳에서는 야간에 신라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환상적인 멀티미디어 쇼가 펼쳐질 예정이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 관계자는 “경주타워는 문화엑스포는 물론 천년고도 경주를 상징하는 하나의 미술품”이라며 “머지않아 문화를 소재로 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관광 명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7은 ‘천년의 빛, 천년의 창’을 주제로 9월7일부터 10월26일까지 50일 동안 영상, 공연, 체험·참여, 전시 등 4개 부문에서 20여개의 행사가 펼쳐진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선생님이 쓰는 신나는 과학] 첨성대·석빙고에 깃든 지혜

    [선생님이 쓰는 신나는 과학] 첨성대·석빙고에 깃든 지혜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는 ‘담 없는 박물관’이다. 유네스코(UNESCO)는 경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 불교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남산 지구, 첨성대와 석빙고 등이 있는 월성 지구, 천마총 등 고분들이 위치한 대릉원 지구,9층 목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황룡사 지구, 명활산성이 있는 산성 지구 등 5개 지구로 나누었다. 이중 신라의 궁궐터인 월성 지구는 산책 코스로 잘 꾸며져 신라인들의 슬기와 얼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따뜻한 봄에는 유채꽃이 가득 피고, 가을에는 코스모스꽃이 장관이다. 특히 어둠이 깔린 뒤 달빛을 받은 첨성대는 운치를 더해준다. 신라 27대 왕인 선덕여왕 시절(서기 632∼647년)에 세워진 첨성대는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전체 높이는 9.17m이며, 전체 27단 중 가장 윗부분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돌을 쌓았다. 둥근 모양의 중간 부분에는 남쪽으로 향한 창이 있는데, 이 창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통로로 추정된다. 창의 위와 아래로 각각 12단의 돌을 쌓아 12달과 24절기를 의미하고,360개의 돌을 사용해 1년의 음력 일수를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첨성대는 동북 방향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으나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보다는 제사를 지내는 첨성단으로 사용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첨성대를 지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신라 궁궐터인 월성으로 들어가는 돌계단이 나온다. 월성은 모양이 반달과 비슷해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서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이듬해 가을까지 보관했다는 냉동 창고인 석빙고를 볼 수 있다.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에 나무로 된 목빙고를 돌로 축조한 것으로 4년 뒤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석빙고의 입구는 바람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냈으며, 입구에서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점 깊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다. 창고 안의 길이는 19m, 폭은 6m, 높이는 5.4m 정도다. 특히 석빙고는 입구에 벽을 만들어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내려가는 대류의 원리를 활용했다. 천장은 아치형으로 5개의 기둥에 장대석이 걸쳐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움푹 파진 곳을 만들어 이 곳에 더운 공기를 모아 환기 구멍으로 빼냈다. 내부는 열 전달률이 높은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외부의 열이 내부로 전달되지 않도록 열 전달률이 낮은 진흙이나 석회 등으로 지붕을 만들었다. 또 석빙고 내부의 바닥 한가운데에는 경사진 배수로를 내어 얼음이 녹은 물이 다른 얼음을 녹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밖으로 빠져 나가도록 했다. 석빙고의 외부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의 복사열을 막고, 수해에 의한 피해를 줄이고자 했다. 전기를 사용할 수 없었던 시절에 냉장고 대신 석빙고를 활용했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가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경은 서울 영동중 교사
  • 황룡사9층탑 ‘빛’으로 다시 선다

    고려시대 때 불에 타 없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이 레이저로 재건될 전망이다. 29일 기획예산처에 따르면 문화관광부는 황룡사 및 9층 목탑 복원사업이 포함된 경주 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을 위해 내년 예산으로 40억원을 요구했다. 문광부 관계자는 “황룡사나 9층 목탑은 고증이 완전하지 않아 당장 복원사업을 하기는 힘든 상황”이라면서 “따라서 9층 목탑의 실체를 가상해 레이저 영상을 제작, 밤에 볼거리로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레이저 영상은 황룡사 9층 목탑 자리에 3차원으로 구현된다. 이 관계자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고증을 재점검하는 등 역사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가 많다.”면서 “전문기관 용역을 통해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643년(선덕여왕 12년)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慈藏)의 요청으로 건조됐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경주 황룡사·9층목탑 복원

    고려시대 때 몽고 침략으로 소실된 신라 최대의 국찰(國刹)인 경주 황룡사(皇龍寺) 및 9층 목탑이 복원될 전망이다. 경주시는 올부터 오는 2034년까지 4단계에 걸쳐 총 사업비 2181억원을 들여 황룡사 복원사업을 추진키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이에 따라 시는 우선 문화관광부ㆍ경북도와 공동으로 1단계(2005∼2009년)로 황룡사복원추진위를 구성해 국제 학술대회 개최 등을 통한 복원 계획을 수립한 뒤 9층탑 레이저영상 개발, 레이저쇼 제작, 황룡사 전시관 건립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2단계(2010∼2014년)로는 레이저쇼를 정기 상영하면서 황룡사 관련 유적 발굴과 원지(園池)유적 복원 , 신라 전통공원 등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어 2015년부터 10년간 3단계로 황룡사 복원사업을 준비ㆍ착수한 뒤 2025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연차적 복원공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경주시 관계자는 “최근 경주시민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 복원이 시급한 문화재로 황룡사 및 9층 목탑이 33.5%를 차지해 1순위로 꼽혔다.”면서 “이번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국책사업 선정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고구려·고려 국보급유물 10점 선봬

    고구려·고려 국보급유물 10점 선봬

    14일부터 경기도 분당 한국토지공사 청사내 토지박물관에서 열리는 공사 설립 30주년 특별전에 문화재 애호가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앞서 공개된 3세기 고구려시대의 벽비(壁碑·서울신문 4월12일자 보도) 이외에도 고구려와 고려시대의 국보급 유물들이 10여점이나 새로 선보이기 때문이다. 이중 가장 눈길을 모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들은 고려시대에 청동으로 제작한 ‘미니어처’ 9층탑과 개성 공민왕릉에서 출토된 금술잔, 고구려시대의 도용(陶俑)과 불상, 인장 등이다. 우선 고려시대 청동 9층탑은 높이가 98㎝에 이르고, 세부묘사가 정밀할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가 매우 정밀하다. 전문가들은 “황룡사 9층목탑이 불타 없어진 것이 13세기 말인 점을 감안할 때 이 청동9층탑이 어떤 방식으로든 황룡사탑의 양식을 반영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등에 ‘晉永和乙巳年’(345년)’의 연대와 ‘大兄’(대형)이란 관직이 새겨진 고구려 도용은 중국 도용들과 달리 속이 꽉 차 있고 등에 명문이 있으며 붉은 색의 고운 점토로 구운 것이 특징이다. 좁은 소매가 달린 점무늬옷을 입고 꿇어앉아 다소곳이 두 손으로 공양물을 받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고구려시대의 부장풍습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진흙을 빚어서 구운 고구려 인장(印章)은 손잡이 부분에 동물문양을 빚어 올렸고 앞뒤 다리 사이로 끈을 매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바닥면에 가로선과 세로선으로 구획을 나누고 ‘高句驪東邑百戶封印’이라고 하는 9자의 명문을 새겼다. 국내성에서 출토된 청동인장 중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 ‘고구려금니여래입상’은 흙으로 만든 불상으로 높이가 13㎝ 정도다. 진흙 표면에 옻을 칠하고 그 위에 금박을 입혀 전체적으로 옻칠한 검은색이 보이는 가운데 상호와 동체, 대좌, 전후면 곳곳에 금색이 보인다. 흙으로 빚은 니조불은 1930년대 평안남도 평원군 덕산면 원오리절터에서 출토된 것이 있으나 이같은 금니불은 삼국 전 시대를 통해 유일한 자료이다. 무덤의 주인공을 위해 부장된 흙베개도 눈길을 끈다. 흙으로 구웠기 때문에 ‘도침(陶枕)’이라고 한다. 붉은색의 니질토로 빚은 이 도침은 비천도와 연화문, 주작도가 음각되어 있고, 청룡과 백호가 부조형태로 양각되어 있다. 전면에 1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서체나 간지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공민왕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순금잔과 고려시대의 범종, 금동 경갑 등은 고려시대 금속공예 기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한편 토지박물관은 지난해 개성공단 발굴조사 내용을 중심으로 북한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100여점도 전시할 계획이다. 단 개성공단 유물의 경우 아직 북한과 대여협상이 끝나지 않아 당분간은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전시는 10월29일까지 계속된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부처님 오신날 연등 3만개등 행사 다채

    불교계가 5월8일 불기 2547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갖는다. 조계종은 ‘가족을 부처님처럼’이라는 표어 아래 다채로운 문화행사와 법회를 준비했다.18일 애기봉 점등식을 시작으로 22일 서울시청 앞 점등식,전통등 전시회(5월2∼8일 봉은사),연등축제(5월4일)를 여는 데 이어 8일 전국 사찰에서 일제히 법요식을 갖는다.오는 22일 오후 7시 시청앞 점등식에서는 법장 총무원장과 이명박 서울시장이 9층 목탑 양식의 ‘평화의 등탑’을 밝혀 이 땅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한다. 새달 4일엔 전국에서 연등축제가 열리는데 서울 조계사 앞과 우정국로,동대문운동장 등에서는 불교문화 마당이 마련돼 각종 문화행사가 열린다.특히 서울에서는 이날부터 20여일간 20㎞에 걸쳐 3만개의 연등불을 밝힌다. 새달 2∼4일 서울 조계사 앞 우정공원에서는 태국대사관 주최로 ‘태국 연등축제’가 열리며 ‘아! 큰스님’전시회(22∼28일 서울 법련사 미술관),연꽃노래잔치(27일 동국대중강당),불교학술세미나(5월2일 동국대 다향관 세미나실),전국 어린이 부처님그리기대회(5월4·5일 화성 신흥사)도 예정돼 있다. 난치병 어린이돕기 일보-백원 모금 3000배 기도정진(26일 봉은사),소외된 이웃을 위한 자비의 종달기(14일∼5월8일 전국 사찰),‘독거 및 저소득 어르신초청 효도큰잔치’(5월2일 의정부시청) 등 자비행사도 적지 않다. 한편 태고종은 22일 오후 7시 육군 모 보병사단 월정리 전망대에서 점등식을 겸한 법회를 연다. 김성호기자
  • 문화재청·박물관등 통합 ‘차관청’으로 승격 추진

    오는 2004년까지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민속박물관,국립국악원 등을 통합, 차관이 기관장을 맡는 차관청으로승격시키는 방안이 추진된다.또 ‘문화재보존관리기금’ 설립,‘문화재종합정보시스템’ 구축 등이 추진된다. 문화재청(청장 盧太燮)은 30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문화재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10개년 기본계획(시안)’을 마련해 발표했다. 문화재청의 차관청 승격 추진은 문화재 업무가 문화재청과 박물관 등으로 이원화돼 효율적 업무수행이 어렵다는 일부여론을 공론화시켰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통합과정에서 각 기관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 있기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관련 기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문화재청은 또 1년 단위로 짜여지는 정부 회계의 제약을극복하고 중장기 계획에 의한 문화재 관리를 위해 ‘문화재보존관리기금’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문화재 관련 정보 및 연구정보 DB,문화재 도난·밀반출방지시스템 등을 포괄하는 ‘문화재종합정보시스템’을 2006년까지 구축키로 했다. 시안은 이밖에 시·도 무형문화재에 대한 국고지원,출토유물 보존처리와 복원을 담당하는 ‘한국문화재보전과학연구원’ 설립,황룡사 9층 목탑·자격루 등 소멸된 문화재 복원,시급 보수정비가 필요한 문화재 135건 선정 및 중점관리등을 담고 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익산 미륵사지 석탑 31일 해체·보수작업

    붕괴위험과 해체 복원을 두고 논란을 빚었던 익산 미륵사지 석탑(서탑·국보11호)이 오는 31일 해체,보수정비 작업에 들어간다.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는 “2년 동안 정밀사진 실측조사와 주변부 발굴조사,가설 덧집공사,보존처리실 설치 등 안전한 해체와 과학적인 보존처리를 위한 준비작업을 해왔다”며 “오는 2007년까지 총 80억원을 들여 전면 해체를 통한 보수 정비공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이에 따라 문화재연구소는 31일 오후 3시 미륵사에서 해체공사를 알리는 고유제를 치른다. 백제 무왕이 세운 국내 최고·최대의 석탑으로 본래 쌍탑이었으나 서탑만 남았으며 ‘목탑 형식의 석탑’으로 큰 가치를 지닌다.원래 9층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6층 옥개석 일부까지만 남아 있다.지난 1915년 일제가 붕괴를 막기 위해시멘트로 보수해 원형을 상실한 데다 부식과 균열이 심해서 98년 전면적인 해체보수를 결정했다. 이종수기자
  • 미륵사터 서탑 어떻게 복원될까

    익산 미륵사터 서탑(西塔)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세우는 것이 바람직할까.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터 석탑을 해체하는 작업이 시작됐지만,어떻게 복원할지에 대해서는 학계 의견이 분분하다.작업을 주도하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측도 탑을 안전하게 해체하고,부재(部材)를 완벽하게보존처리한다는 방침만 세웠을 뿐 복원계획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7세기초에 만든 높이 14.24m의 미륵사터 서탑은 국내 최고(最古)·최대의 석탑.목탑 양식을 충실히 적용함으로써 백제인의 미적 감각과돌을 다루는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 탑은 1914년 붕괴위기에 놓인 것을 일본인들이 임시방편으로 시멘트로 발라놓았지만,최근 안전성이 문제가 되면서 해체복원이 결정됐다.문제는 9층이 완전하게 남은 게 아니라,거의 3면이 무너지고 동북쪽 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 있다는 데 있다. 현재 복원방법을 둘러싼 학계 의견은 크게 ▲시멘트로 바른 부분만걷어내고,새로운 공법으로 현재의 모습대로 다시 세우거나 ▲새로운부재를 사용하여 6층까지만 복원하거나 ▲새로운 부재를 대거 투입하여 9층까지 완전한 형상으로 복원하는 방안으로 나뉜다.그러나 크게이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일 뿐 구체적인 복원방안에 들어가면10인10색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이처럼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는 데는 지난 1993년 동탑을 복원한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동탑복원에는 당초 60억원의 예산이 책정됐지만,막판에 30억원으로 깎여나갔다.따라서 손작업 대신 기계로 깎아 석탑의 정취를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연히 동탑의 불행한 전철을되풀이하지 말자는 이들은 현 상태 복원을 바란다. 문화재청과 유물전시관측은 일단 학계 의견이 모아지기를 기다리는상태.서탑복원을 위해 정부와 전라북도가 책정한 예산은 80억원으로문화재 보수 역사상 가장 많다.다행스럽게 문화재청은 이번에는 “의견일치가 이루어진다면 사업비가 얼마가 더 들든 구애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밝히고 있다. 미륵사터 서탑 주위에는 지난 4월부터 해체·복원하는 데 필요한 가설덧집을 만들기 위해 철골구조물을 세우고 있다.바닥 규모만 500여평으로 멀리서 보면 마치 대형 건물이나 공장을 짓는 것으로 착각할정도이다. 노기환 미륵사지유물전시관 학예연구실장은 “탑을 완전히 해체한 뒤분석이 이루어지고, 내부에서 7층 이상의 부재가 발견된다면 상황은바뀔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해체복원은 2007년까지 마무리짓는다는 계획이었지만,현재 상태라면 기간은 더 늘어날 수도 있지않겠느냐”고 말했다. 익산 서동철기자 dcsuh@
  • 황룡사를 복원하자/김호준 논설위원실장(서울논단)

    신라최대의 가람이었던 경주 황용사는 신라불교의 호국도량으로서 국민통합과 삼국통일을 상징하는 곳이었다.진흥왕 14년(서기 553년)에 절을 처음 짓기 시작하여 4대왕 93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선덕여왕14년(서기 645년)에 마무리한 황룡사는 신라인의 웅장한 기상이 유감없이 표출된 곳이었다.불국사의 8배나 되는 넓은 경내엔 동양최고의 9층목탑이 하늘을 찌를듯 솟아 있었고 남대문의 9배나 되는 거대한 금당엔 서축 아육왕이 보낸 누른쇠와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높이 5m의 장육존상과 두 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새가 앉으려 했다는 솔거의 그 유명한 소나무 벽화가 그려져 있던 곳이 바로 이 황룡사였다.그러나 불행히도 고려 고종25년(서기 1238년)몽고의 병화로 소실돼 폐허만 남긴채 역사의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 황룡사의 복원을 최근 불국사 주지 설조스님이 정부에 청원하였다.그는 청원문에서 『온 국민이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때에 신라인의 호국정신과 통일정신의 요람인 황룡사(와 감은사)의 복원 불사를 성취함으로써 통일의 정신적 기틀을 다져야 한다』고 역설했다.760년전 잿더미로 변해버린 황룡사를 오늘에 다시 살려야 할 이유는 바로 이 황룡사에 각인된 호국이념과 통일정신에 있다. 황룡사가 착공된 서기 553년은 신라가 한반도의 심장부인 한강유역을 장악하여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해였다.황룡사의 중심가람인 9층목탑은 신라에 침범을 일삼던 주변의 아홉 나라를 부처님의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백제멸망 15년전에,고구려멸망 23년전에 완공됐다.당시 건축공사를 지휘했던 아비지라는 백제 공장이는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본국인 백제가 망하는 걸 보고 일을 맡은걸 후회했다고 한다.국찰인 황룡사 강당에서는 자장률사와 원효대사가 강론을 하였으며 나라와 왕실의 태평을 비는 팔관회가 열렸다.국민들의 마음을 불심으로 통합시켜 국력결집과 삼국통일을 이끌어낸 곳이 황룡사였다.고려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9층목)탑을 세운뒤에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라고 적고 있다.황룡사를 복원하자는외침엔 무엇보다도 통일의 영험을 다시 보고자 하는 간절한 기구가 담겨 있다. 황룡사 복원을 바라는 또하나의 사연은 그 규모의 웅장함에 있다.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8천8백평의 경내에 1탑3가람이 들어 앉은 황룡사가 소실될때 그 재가 수십일동안 경주 하늘을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었다고 한다.황룡사 찰주기에 의하면 9층목탑은 높이가 2백25자였다.요새 치수로 환산하면 80.18m,아파트 30층에 해당된다.당시로선 그야말로 아찔한 초고층 건물이었다. 황룡사 9층목탑은 목탑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중국 산서성의 응현목탑(높이 67m)보다 4백여년 앞서 세워졌으면서도 13m가 높은 것이다.또 일본에서 가장 높다는 흥복사 5층탑(높이 50m)보다 30m가 높다. 황룡사의 규모는 목탑과 함께 소실된 종의 크기로도 유추할 수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황룡사의 동종은 49만7천5백근의 구리를 들여 만들었다고 한다.현존하는 우리나라 종 가운데 가장 큰 성덕대왕신종,즉 에밀레종의 4배에 달하는 중량이다.한마디로 말해 황룡사는 우리 건축사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조형물이었다.한반도 동남쪽 구석에 갇혀있다시피한 신라인들이 어떻게 그런 큰 웅지를 품을 수 있었는지 그저 경탄스러울 뿐이다. 중국은 큰 나라였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만해도 스케일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거대한 문화유산이 적지않다.산덩이 같은 천황릉들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5세기때 축조물로 추정되는 인덕천황능은 길이가 4백86m에 달해 피라밋과 맞먹는 세계최대의 분묘로 꼽힌다.서기 752년에 개안된 높이 15m의 동대사 대불은 후대에 여러번 보수되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보잘것 없게 됐지만 그 거대함에 있어서는 세계제일이다. 황룡사가 복원된다면 우리 조상들도 웅혼한 기상의 소유자였음을 실증적으로 확인시켜 줄 것이다.우리 문화재에 대해 후손들이 느끼고 있는 왜소 컴플렉스를 씻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빈약한 불거리로 고전하고 있는 한국관광도 새명소 새활력소를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황룡사 복원은 불교계가 지난 50년대 부터 추진해온 숙원사업이다.그러나 오늘에 재조명되는황룡사는 불교계를 넘어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해야할 과제임을 일깨워 준다.돌이켜 보면 지난해 광복50주년 기념사업으로 일제총독부청사철거와 더불어 황룡사 복원에 눈을 돌렸더라면 「철거와 복원」의 멋진 조화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그렇게 못한건 참으로 아쉬웠다.물론 지금 착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제일 중요한 문제인 경비를 우선 불교계에서 부담하겠다고 자청하고 있으니 말이다.시급한건 황룡사 복원을 국가적 사업으로 확정하고 추진하는 정부의 결단이다.
  • 신라 금동탑·순금불상 공개/경주서 3월 발견

    통일신라시대 사리함에서 목제탑을 그대로 본뜬 것으로 추정되는 소형 금동탑들이 발견돼 당시의 목탑 및 사리봉안방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관리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장경호)는 지난 3월15일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소재 국보 제39호 5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가로·세로·높이 15㎝)에서 ▲높이 10.6㎝의 3층 금동소탑 1점 ▲8.6∼8.8㎝의 9층짜리 금동소탑 3점 ▲4㎝의 순금불상 1점 ▲4.3㎝의 목제소탑 1점 ▲사리 15과와 구슬 5점 등을 수습,21일 공개했다.3층짜리 금동소탑 안에는 왼손은 들고 오른손은 내린 모양(시무외여원인)의 불상이 들어 있으며 이 불상 아랫부분 연화대좌 빈 공간에 사리와 구슬이 봉안돼 있었다. 또 불상주변에는 목제소탑 1점과 목제소탑의 부스러기가 쌓여 있었고 사리함 내부 벽면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보이는 경전의 종이가 일부 붙어 있었다. 연구소 김동현 보존과학실장은 『9층짜리 금동소탑 3개에는 출입문과 기와골이 미세한 선으로 그려져 있어 당시 목탑을 그대로본뜬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이 탑들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목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 경주 황룡사 금동보살상(한국인의 얼굴:34)

    ◎통통한 뺨… 순진무구한 웃음/머리엔 삼보관… 두툼한 눈두덩에 가는 눈/작고 예쁜 입·살짝 패인 보조개 복스러워 신라 제일의 가람은 황룡사다.삼국통일의 원동력을 불어 넣은 대가람으로,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함축했던 명찰이었다.서기553년 새 궁궐을 착공했을 때 황룡이 나타나 불사로 고쳐지었다고 한다.서기562년 불사를 마무리하기까지 17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절터는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있다.본래의 가람은 12 38년 몽고군의 병화로 모두 불타버렸다.지난 19 76년 부터 8년동안 문화재 연구소의 발굴결과 2만여평의 절터가 확인되었다.황룡사를 다 짓고나서 서기 574년 신라 삼보의 하나 장륙상을 세웠다고 하나 역시 몽고침략으로 사라졌다.이를 받치던 석조대좌만이 금당 자리앞에 남아 있다.장륙은 1발(장)6자(척)다.요즘 수치개념으로는 4·5∼5m에 해당한다.「삼국유사」를 보면 장륙상 석가삼존상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신라 보물의 하나 장륙상은 만날 수 없게 되었다.다만 절터에서 웃는 모습으로 출토된 8.3㎝ 높이의 금동보살머리 1점을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본디 반가사유상이었는데,머리만 남고 다른 부분은 모두 떨어져나갔다.이 보살의 머리는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머리와 비슷하다.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 황룡사 출토 보살의 얼굴이 더 아름답다고도 말한다. 이 보살의 아름다움은 미소에 있다.삼국시대 최고의 미소로 평가받아 마땅한 웃음인 것이다.머리에는 지극히 간결한 삼보관을 썼다.이는 국보 83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관과 같다.그러나 이마 한 가운데 표현한 머리카락 묘사가 이 보살에서는 생략되었다. 어떻든 황룡사 출토 보살상의 얼굴은 짧고 둥글다.순진무구한 웃음을 머금었다.눈두덩이 약간은 두꺼워 보이는데 눈은 가늘게 떴다.통통한 코,작고 예쁜 입과 보조개,적당히 살이 오른 뺨 등이 복스럽다.그래서 국보 83호 미륵반가사유상 얼굴에서 마음을 깊이 가라앉혀 생각을 한데 모은 침잠한 모습을 굳이 읽지 않아도 좋다.이 보살에서는 선동의 장난스러운 표정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황룡사 보살상 오른쪽 뺨에는 손가락끝이 닿았던 흔적을 남겼다.이 보살이 오른손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었던 반가사유상임을 단적으로 일러 준다.6세기 후반 걸작의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이 분명하건만,이렇듯 머리만 남아 있다.하지만 황룡사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불보살상이기도 하다. 역사는 황룡사에 전체높이가 자그마치 2백25자(80m)나 되는 거대한 9층 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그 목탑의 존재는 최근 발굴한 기둥자리 주춧돌에서 확인되었다.신라는 이 목탑을 세우는데 백제의 공장 아비지를 초빙했다.그가 목탑을 지을때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그런데 당시 신라의 젊은이들은 9층목탑과 장륙상등 스케일이 큰 황룡사 가람을 바라보면서 기상을 키웠다.그들은 뒷날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으니,역사에는 아이러니한 구석도 있다.
  • 뛰어난 조탑술(백제를 다시본다:21)

    ◎미륵사 9층탑은 삼국최초의 석탑/무왕때 건립… 동·서 2개로 크고 웅장/정림사탑서 단아한 백제양식 완성/익산산 화강암 황등석을 재료로 사용… 석등 조형술도 발달 최근 발견된 금동용봉련래산향로는 백제의 문화가 부드럽고 온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그러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뛰어난 예술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특히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이후는 종래와 다른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탄생시켰고 또 백제의 것으로 완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백제의 문화는 도읍이 위치했던 지역에 따라 나름대로 특성을 가지고 발전을 거듭해 왔다.한강유역에서는 고구려로부터 지니고 온 전통을 바탕으로 독자적 문화창조 노력을 기울인 시험기를 살았다면 금강유역의 웅진(공주)도읍기는 부흥기라 할 수 있다.그 다음 사비(부여)도읍기는 이들 두 시기를 거치는 동안 축적한 문화역량 위에서 가장 백제적인 문화예술을 완성한 동시에 융성의 경지에 다다른 시기일 것이다. ○목탑건축양식 모방 사비시대는 특히 불교미술분야에 해당하는 여러 조형물이 축조되었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형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자료로 화강암이라는 돌을 채용했다는 점이다.그래서 사비시대 백제는 불교미술을 극치로 이끄는 가운데 걸작의 석탑과 석등을 후세에 남겼다.그 대표적 유물이 전북 익산 미륵사터와 충남 부여 정림사터에 있는 석탑이다. 백제인들이 석탑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종래 목탑이 지녔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다시 말하면 화재나 습기에 약한 목재 대신에 석재를 썼다.목재에 비해 다루기가 무척 힘이 드는 돌을 나무 다루듯 매만져 거대한 석탑을 조영했다.고도의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엄두도 못낼 일을 척척 해냈다.그 백제인들이야 말로 지혜로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익산 미륵사는 무왕 재위연간(AD600∼640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다.그 미륵사에 남아있는 거대한 석탑의 잔영은 불가사의한 존재이거니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으로 기록된다.조선시대 저술인 「동국여지승람」은 「유석탑고수장 동방석탑지최」라고 적어 그 규모와 높이가 대단했음을 일러준다.특히 화강암이라는 강한 재질의 석재를 목탑건립 형식에 꿰맞추었다는 사실은 백제인들의 건축기술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륵사 석탑은 목탑양식을 직모내지 번안한 것으로 보면 좋다.그 이유는 우선 낮은 단층의 기단위에 세웠다는 점이 목조건물을 짓는 수법과 같다는데 있다.그리고 초층 탑신에는 엔타시스가 뚜렷한 4개의 기둥을 배치,3칸 규모의 건물을 뚜렷이 재현했다.중앙칸은 내부로 통해 십자로 교차되게 설계했는데 내부에는 방형의 버팀기둥을 세웠다. 목조건물의 의도가 담긴 흔적은 또 있다.2층 이상의 탑신 2칸으로 규모를 축소시킨 가운데 엔타시스가 뚜렷한 동자기둥을 놓았다는 점이 그것이다.덮개돌(옥개석)의 추녀 끝이 반전한 것 역시 목조건축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했다.발굴조사 결과 9층탑이라는 과학적 확신이 나와 동탑은 최근 9층으로 복원되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첫 작품을 9층이라는 높은 규모로 설계한 지혜가 놀랍다.그 높은 건축물을 석재를 써서 재현한 백제인들의 기술이나 수학적 능력,예술적 조형감각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천년을 하고도 수 세기가 지난 후세에 동탑을 복원하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백제인들에게 외경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컴퓨터에 의한 설계와 모든 신장비를 동원한 동탑 복원을 통해 백제를 다시 읽었던 것이다. ○조형감각 놀라워 미륵사터 석탑 건립에서 자신감을 얻은 백제인들은 도읍지 사비도성 한복판 정림사에 오층석탑을 건립한다.이 석탑은 초층 탑신 4면에 음각된 소정방의 공적문 때문에 한때 「평제탑」이란 이름이 붙기도 했다.그러나 1942년 발굴조사 결과 「대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는 새김글씨가 든 기와가 발견되어 탑자리가 정림사 경내였음이 확인되었다.또 1979년 조사에서도 이같은 사실이 다시 확인되어 정림사 오층탑으로 탑이름이 굳혀졌다. 이 정림사 오층석탑은 미륵사터 석탑이 보여준 거대한 규모에서 우선 탈피하고 있다.그래서 안정감을 안겨준다.단아하면서도 정제된 아름다운 자태는 백제석탑의 양식적 완성을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이는 마치 신라가 분황사 모전석탑으로부터 의성 탑리 오층석탑과 감은사터 오층석탑 및 고선사터 삼층석탑을 거쳐 불국사 삼층석탑에 이르러 석탑양식이 비로소 정착되는 것과 같은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나라 석탑양식을 보면 비교되는 측면을 지닌다.시원적 형식의 미륵사터 석탑에 이어 정림사터 오층석탑에서 양식적 완성을 이룬 백제 석탑과 신라 석탑은 사뭇 다르다.왜냐하면 신라는 몇 단계의 실험을 거친 후에 가서야 석탑의 정형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신라보다 한 수가 높은 문화창조의식을 가졌던 것이다.황용사 구층목탑을 건립하는데 백제의 아비지가 초청되었다는 사실도 결국 백제의 우수한 조탑술을 입증하는 예라 하겠다. 이같은 백제의 석탑은 국운이 다 하면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만다.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미륵사터 석탑과 정림사터 석탑 양식에 근원을 둔 백제계석탑이 백제의 옛 영토전역에 건립된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려의 백제문화부흥운동으로 보아도 무방할 석탑양식의 계승은 불과 2기밖에 남지 않은 백제석탑이 우리 석탑발전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고려에 양식 계승 사비시대의 또 다른 독창적 석조미술이 있었다면 바로 석등일 것이다.애석하게도 완형의 석등이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하지만 여러 절터에서 수습된 부재들을 통해 사비시대의 석등 모습을 어느정도 상상할 수는 있게되었다.그 대표적 유물이 익산 미륵사터에서 나온 연화대석,화사석,옥개석이다.연화대석에는 팔각형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으로 보아 석등의 기둥 역시 팔각으로 추정된다.따라서 사비시대 처음 건립된 석등의 평면은 팔각의 구도를 취했다는 결론이 나온다.그리고 우리나라 석등의 시원도 미륵사 석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석탑과 석등은 사원건축물,불상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불가의 조형물이다.지금까지 우리 앞에 우뚝 버티고 있는 까닭은 그 재료가 화강암이라는데 있다.백제인들이 석조미술을 꽃피우기까지는 창의적 예술성이 밑바탕이 된 것은 물론이지만,주변의 자연을 지혜롭게 활용한 것도 큰 보탬이 되었다.지금도 그 유명한 순백의 화강암 황등석이 익산지역 일원에서 채석되고 있거니와 많은석재공장이 산재한다. 어떻든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현은 삼국 가운데 맨 먼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백제문화로서의 석조미술까지를 되돌아 보게했다.이 기쁨이 크다 할 것이다. ◎동탑 복원/돌 2천7백t·인력 4만5천명 동원/컴퓨터 등 첨단기법 이용… 옛보습 찾아 백제문화의 불가사의는 석조미술에서 발견된다.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터에 남아있는 석탑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돌을 다듬고 맞추어 쌓기를 목수가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듯 하였으니,당시 사람들의 사고로는 경이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 미륵사 석탑을 백제 멸망의 비극처럼 허물어진 가운데 서탑 1기만이 잔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현재 6층의 일부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이 서탑은 본래 9층이었던 것으로 학술조사 결과 밝혀졌다.서탑 옆에는 동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학술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동탑의 기단부와 함께 부재들을 찾아낸 문화재관리국은 이를 근거로 지난 93년 초 본래의 자리에 동탑을 복원한 바 있다. 동탑을 새로 복원하면서미륵사 석탑에 대한 신비가 풀리기 시작했다.우선 현존하는 서탑과 헐어져 나뒹구는 부재들의 수치를 기초로 컴퓨터 처리를 했을 때 웅장하고 아름다운 9층탑의 자태가 떠올랐다.그리고 지난 90년 2월 세부설계를 마친뒤 그해 11월 복원공사에 들어갔다.공사에는 불국사 복원공사 등에서 경험을 쌓은 인간문화재급 석수장들이 모두 참여했다. 석재는 이웃 황등돌을 썼다.한국동력자원연구소가 본래의 석재를 분석,황등돌과 일치한다는 통보에 따라 황등돌을 사용한 것이다.탑이 9층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큰 역할을 한 노반석 1개를 비롯,면석·계단석 등 모두 18개는 옛 부재를 그대로 활용했다.이 때에 들어간 돌은 자그마치 2천7백t에 이른다.돌을 다루는 공구는 물론 갖가지 현대장비를 투입하면서도 연인원 4만5천명이 동원되었다.얼마나 큰 대역사인가를 알 수 있다. 새로 복원된 동탑의 높이는 상륜부를 포함,27.8m에 이른다.웬만한 아파트 10층에 해당하는 높이다.47·11평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탑이 건립될 무렵의 영화는 잠시이고,천년이 훨씬 넘는세월을 인고로 버틴 서탑 옆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 불교건축의 특징(백제를 다시본다:16)

    ◎호국사찰 건립 성왕때 본격화/왕흥·미륵사가 대표적… 기술 일에 전수/1사1탑 원칙… 남북축으로 건물 배치/왕권­미륵신안 결부… 통치·호국수단으로 세워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보다 12년이 뒤져 384년인 침류왕원년 동진으로부터 마라난타에 의해서였다.불교가 전래된 이듬해 한산(서울지역)에 불사를 조영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지금까지 서울 근방에서 백제의 사찰터가 확인된바는 아직 없다.백제의 사찰이름이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도읍을 공주로 옮긴 후부터다.즉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대통사라든가 수원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의 사찰 유적이 본격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성왕대 이후인 6세기초 부여시대(사비시대)에서부터라 할수있다.이 시대에는 절 이름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만도 왕흥사를 비롯하여 호암사·칠악사·오함사·도량사·자복사·제석사·오금사·보광사·미륵사·사자사·북부수덕사 등이다.이중에서 도양사·자복사·보광사 등의 위치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그 외는 대체로 위치가 밝혀져 있다. ○한산에 첫불사 지어 특히 왕흥사와 미륵사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에 자세한 기록이 있고 백제의 호국사찰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소개를 한다.먼저 왕흥사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백제 제29대 법왕의 휘(죽은 이를 높여 부르는 이름)는 선인데 혹은 효순이라고도 한다.개황10년 기미년(599년)에 즉위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소를 내려 살생을 금하였다.민가에서 기르는 새나 매 그리고 짐승 등을 풀어주고 고기잡이나 사냥에 쓰이는 기구를 불살라 사냥을 일체 금지시켰다.이듬해 경신년에 30인의 승려를 두어 왕흥사를 사비성에 세웠다.처음 터를 닦을때 왕이 승하하여 무왕이 이를 이었다.아버지가 기초를 놓고 아들이 이루었으니 수십년이 지나 이루어졌다.이 절의 이름도 역시 미륵사라 했다.또 그절은 산을 등지고 물가에 있어 4계절의 꽃과 나무가 수려하여 아름다웠고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갈때 그 경치가 장관을 이루었다』라고 되어있어 익산 미륵사와 창건연대가 비슷하고 이름도 같아 우리에게 혼돈을 일으킨다. 이 사찰 역시 국왕이 세운 호국사찰임이 분명하다.지금 부여의 북쪽 백마강을 건너 규암 왕은리 부락에 이 절터가 있어 초석의 일부가 노출되고 있지만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을 알수없다.익산 미륵사에 대하여도 재미있는 창건설화를 「삼국유사」에 남기고 있다.즉『하루는 무왕(600∼640년)이 부인과 같이 용화산위의 사자사를 가는 길에 용화산밑의 큰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연못 가운데서 출현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하하여 배례를 하였다.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큰 절을 세우기를 원한다고 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연못을 메울것을 물었더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이에 미륵삼존을 법상으로 불전과 탑·낭 등을 세우고 절의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하였다.이에 진평왕(신라)은 백공을 보내어 이를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백제는 왕권과 미륵신앙을 결부시켜 통치와 호국의 수단으로 미륵사를 세웠음을 알수 있다.또 기록으로 보아 절의 가람배치는 3곳에다 불전과 탑,그리고 회랑을 배치한 형식임을 알수있다.이 절터는 1980년부터 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전부터 반파되어 남아있는 서탑을 비롯하여 금당터의 초석 그리고 두곳의 당간지주석이 남아 있었다.실제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로는 3개의 탑이 동서축을 맞추어 나란히 열을 지어 있었음이 밝혀졌는데 그중 중앙의 것은 목조탑이었고 동서양쪽의 것은 석탑이었음이 밝혀졌다. 여기에 곁들여 각 탑앞에 중문터와 뒤에 금당터가 각기 발견되고 회랑도 각 구역마다 이용이 되었음을 알수 있었다.이렇게 세개의 전탑이 병렬로 놓인 예는 아직 다른 곳에는 밝혀진바 없다.또 절터의 지반을늪지를 메워 이루었음도 확인되고 절앞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이러한 사실은 위의 기록의 신빙성을 확인해 주었다. ○목조건물 모두 소실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동탑에 사용했던 탑부재 약2백60편을 비롯하여 건축목재의 일부와 생활용구인 큰 토기항아리,녹청색 유약을 입힌 서까래 장식기와,금동제 판불 등 1만8천여점이나 되어 백제사찰건축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1992년 동탑을 9층으로 고증하여 복원할 수있었다. 이렇듯 백제는 일찍부터 미륵신앙을 발전시켜 왕의 권위를 한층 높이는데 이용한 것이다.불타에는 과거불과 미래불이 있는데 미륵신앙은 인류에게 평안과 희망을 주는 미래불의 도래 사상을 의미하며 미래불은 즉 미륵인 것이다.미륵신앙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미륵하생신앙으로서 석가가 입멸한후 56억7천만년이 지나서 미래불인 미륵불이 도솔천으로부터 중생계로 내려와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성왕이후 부여시대의 백제의 사찰은 기록된 것이외에도 일제시부터 해방후 근래까지 그 터가 많이 조사되어 왔다.부여 군수이와 동남리절터,정림사와 부소산 폐사터,금강사터,용정리절터,구아리절터 등 이외에도 많다. 이들 절터의 조사결과 그 특징은 탑이 하나 있는데 대부분 목탑이었고 그 가람의 배치도 대체로 남북축을 맞추어 남쪽에서부터 중문과 탑·금당·강당을 두고 중문과 강당을양측으로 연결하여 회랑을 돌림으로써 방형의 안뜰을 만들었다.이것은 소위 백제의 전형적인 1탑식 가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일본에 전래되어 대판의 사천왕사식 가람을 형성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가 있어 동남리절터에는 탑자리가 확인되지 않았고 금강사터에서는 동서축에 맞추어 건물배치를 함으로써 가람이 동향을 한 것이다.백제는 538년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고 아울러 경전과 불상은 물론 조불,조사공을 보내어 불사를 조영하는데 기술적으로 큰 몫을 차지하였다.따라서 비조사를 비롯하여 사천왕사·법륭사 등 비조시대(552∼645년)와 나양시대 초기의 불사건축들의 대부분은 백제의 기술에 의존하여 세워졌다고 믿어진다. 한편 백제의 뛰어난 사찰 건축기술은 신라에서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신라의 호국정신이 담긴 황룡사 9층탑은 백제의 아비지의 조탑기술을 빌려 높이 80m나 되는 목조탑을 세우게 됐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다.아비지는 이 거대한 신라의 통일탑을 세우는 도중 어느날밤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고는 공사를 중단하였었다는 기록은 지금 생각하여도 수긍이 갈만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이 찬란했던 건축문화로서 백제사찰의 목조건축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려시대의 건축도 몇동만 남아있음)따라서 백제의 사찰건축을 연구하려면 일본에 남아있는 나라시대의 사찰목조건축을 그 방증자료로 연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우면서도 가슴아픈 일이다.장경호(공박·문화재연구소장) ◎사찰과 미륵신앙/미륵신앙 6세기에 널리 퍼져/“강력한 왕조” 염원서 대가람·불상 세워 사비시대 백제의 대가람은 원찰로 조성되었다.다시 말하면 어떤 간절한 염원을 사찰창건의 동기로 삼은 것이다.이 시대의 대표적 가람은 사비도성 밖 백마강 건너 왕흥사와 익산 미륵사다.이들 가람은 호국과 깊이 연관된 미륵신앙을 담았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가 제자인 미륵에게 장차 성물을 한 뒤에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할 것이라고 예견한 대승적 자비사상에서 비롯되었다.미륵신안의 중심은 미륵(Maitreya)이고 원래 친우를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연유한 말이다.기독교의 메시아(Messiah)와 비유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유토피아적 희망의 신앙이라는 점에서 늘 관심의 대상이 되어온 미륵신앙은 6세기 이후 백제에 널리 퍼졌다. 이는 미륵과 연관한 사차르이 창건과 미륵반가사유상의 조상이 널리 성행한 것을 보아도 알수 있다.글고 위덕왕(재위AD554∼597)때 신라의 승려 진자가 미륵화신을 친견코자 웅진(공주)이 수원사를 찾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비도성 바로 지척에 완공한 왕흥사와 더불어 익산에 미륵사가 창건되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 시기는 무왕의 재위기(AD600∼640년)에 해당한다.법왕이 옥천전투에서 전사한 이른바 옥천회전 패배이후 동요된 백제왕권을 회복한 그는 신라에 설욕전을 폈다.신라를 압박,낙동강까지 진출함으로써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그래서 백제 정치사속에 우뚝한 인물이기도 하다. 무왕의 업적은 국민들이 품고있다 기층적 미륵신앙과도 맞물려 자연스럽게 호국으로 연결되었다.이같은 미륵신앙은 호국사찰을 표방한 대가람창건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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