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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청자 여러분 영원한 이별입니다”

    ‘ABC 뉴스의 얼굴’ 피터 제닝스가 7일(현지시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67세. 제닝스는 지난 4월 폐암에 걸렸음을 뉴스시간에 밝히면서 앵커에서 물러나 뉴욕 자택에서 지내 왔다고 AP통신 등이 전했다. 제닝스는 방송 뉴스의 탄생부터 인터넷이 인기를 얻기까지 20여년 동안 뉴스를 진행하며 NBC의 톰 브로커,CBS 뉴스의 댄 래더와 함께 앵커의 삼두마차로 불렸다.이들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마이크를 놓아, 인터넷의 부상으로 인한 방송 뉴스의 위기를 보여준다는 해석도 낳았다. 뉴스 진행은 제닝스가의 가업이었다. 제닝스의 아버지는 캐나다에서 전국 저녁 뉴스를 최초로 진행했다.9살 때 처음 마이크를 잡은 제닝스는 고등학교를 중퇴했다.은행에서 잠시 일하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라디오 방송국 뉴스 리포터로 시작, 곧 캐나다 텔레비전에서 앵커직을 얻었다. 잘 생기고 생기있던 제닝스는 ABC뉴스 사장의 눈에 띄어 1965년 26살의 나이로 미국 저녁 뉴스의 앵커로 데뷔한다. 캐나다식 발음과 미숙한 경험 등으로 3년 만에 앵커직에서 물러나 레바논 베이루트 등지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며 중동 전문가가 된다.1972년 뮌헨 올림픽때는 선수들의 숙소에 숨어 있다가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 선수를 인질로 삼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도했다.78년 ABC의 ‘월드 뉴스 투나이트’로 앵커직에 복귀,83년부터 단독 진행을 맡으면서 그의 특파원 경험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월드 뉴스 투나이트란 이름에 걸맞게 어떤 앵커보다도 세계적인 관점의 뉴스 진행을 했고, 팬들은 그의 세련되고 절제된 진행을 좋아했다. 워싱턴 저널리즘 리뷰로부터 3년 연속 최고의 앵커로 뽑혔고,14번 에미상을 수상했다. 캐나다에서 태어났지만 9·11테러 이후 2003년 미국 시민이 됐다.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X마스 카드 12만장을 그린 인간 옵세트

    X마스 카드 12만장을 그린 인간 옵세트

      『인간이란 초극(超克)되지 않으면 안될 그 무엇이다』란「니체」의 말에 심취, 바로「초극」을 위해 만 1년 동안에 정확히 12만 3천 장의「크리스마스·카드」를 그려낸 사나이가 있다. 그러니까 하루 평균 337장의 그림을 그려낸 셈. 가위「니체」도 혀를 내두를 만한 초인적 작업량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서 선을 하는 자세로 그려 이 초인의 이름은 한 국(韓 國)(30) - 본명은 봉호(鳳浩)였으나「세상에 나와보니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아예 한 국으로 고쳐버렸다는 이 초인의 고향은 전북 완주군 용진면 산정리. 지금도 어머님이 고향에 계시다. 딸 없는 5형제 중 넷째. 국민학교 5학년 때 만화를 그려 친구들에게 회람을 시키고 학교 환경정리를 도맡을 만큼「그림 재주는 남에게 알려진 것」이란다. 그러다 철이 들면서부터는「동서고금, 각종각색의 만권서적」을 독파하고 비로소「문학이란 신천지가 눈앞에 보여」시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을 빌면「일찍이 19살 때 전북대에서 특강을 한 바 있으며 지방방송국에서 장자(莊子), 노자(老子), 논어(論語) 등을 강론」했다는 것. 그리고 전주에서 20세 전후 해 시화전을 두 번 가졌다고. 『지금도 시작(詩作)은 계속하고 있다』며 빽빽이 앞뒤로 시가 쓰여진 대학「노트」10여권을 풀어 내놓는다. 나이가 들면서부터 동양철학에 깊은 흥미를 느껴 법혁경(法革經), 열반경(涅槃經), 화엄경(華嚴經) 등 불경을 읽고 다음엔 노·장 철학, 그러다 27세 되던 해 달마선사(達磨禪師)가 소림사(小林寺)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하고 난 후에 쓰여진「선문염령(禪問拈領)」을 읽고 선(禪)에 심취하게 됐다고. 그림 그리는 자체가 선(禪), 하루에 10시간씩 작업 「정신과 육체의 고도의 조화」가 즉 선이라는 이 청년은 이때부터「무념무상의 경지에서」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좌선(坐禪)이 앉아 견디는 것」이듯「선화(禪畫)란 그림 그리는 자체가 선」이라는 것. 12만 3천 장이란 어마어마한 양의 그림을 그려내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지난해 모 주간지에 4만여 장의「크리스마스·카드」를 손수 그려냈다는 사람의 기사를 읽고 나서부터. 새벽 4시쯤 일어나 호롱불 밑에서 시작, 5시간 그리고 아침을 먹고 나서 10시부터 12시까지 2시간, 낮에는 충분히 쉰 뒤 밤 9시부터 시작, 12시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하루에 10시간을 그림 그리기에 소비한 셈. 최고로 많이 그려 본 것은 하루 820장. 좀「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3, 4백장을 그렸단다. 물론 가끔 쉬는 날도 있지만. 이렇게 해서 서울, 전주, 산정, 세 곳을 1년 동안 전전하며(장소를 옮긴 건 새로운 분위기를 위해서) 그려낸 그림이 모두 12만 3천 장. 가위「인간 옵세트」라 불릴 만하다. 몸엔 온통 채색 투성이고 여름이면 손바닥에 물집이 생겨 한지(韓紙)를 손바닥에 붙이고 그려야 했다. 붓을 쥔 손가락마다 굵은 못이 박히고 온몸이 돌덩이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래도 새 기록을 세우고 싶어 작업을 계속했다. 붓을 놓은 건 11월 초순. 한간방 가득히 그림이 쌓이고서야 붓을 멈췄다. 세어보니 12만 3천 장. 처음엔 흰 종이에 동양화 소재들을 골라 그리고 때때론 추상화나 구상화도 그렸다. 그러나 묵화(墨畵)로 돌아 매란국죽(梅蘭菊竹)만 그렸다. 물론 그림마다 전혀 다를 수야 없고 비슷하게 50~60점. 그러나 가다 싫증나면 또 바꾸곤 했다.「동양화에 입체감을 준 건 내가 사상 최초」라는 이 사나이는『죽(竹)은 곧고 바른 애정의 불변성, 란(蘭)은 유현한 우정과 깨끗한 사랑, 국(菊)은 서릿바람에도 싱싱·굳은 절개, 매(梅)는 눈 속에서도 피는 깊고 높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한바탕 자랑. 「동양화에 입체감」이란 건 매(梅)에 붙은 눈송이를 짙은「화이트」로 점묘(點描), 양감(量感)을 주었다는 얘기. 게다가 이 사나이는「창조만이 예술이라고 할 때 올 데까지 다 온 현대 미술의 마지막 탈출구는 양(量)의 미학」이라며 인간「옵세트」화가 지상의 미학임을 주장하기도. 어쨌든 엄청나게 그려놓고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이것들을 상품화해 볼 생각이 난 거다. 그래서 시골처녀 20명을 40여 일간 동원해「예쁘게 상품화」했다.「크리스마스·카드」로 판매하겠다는 것. 이래서 4만 7천 장의「카드」가 모여졌다. 나머지 것들을 모두「카드」화 하고 싶었지만「돈이 모자라서」고향인 산정에 남겨두었다. 머리 뜨거워 쇠베개 베고 선화(禪畵)라면 그림 그린 것으로 족하지 판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으냐니까. 『그림 팔아 공공사업에 쓸 수 있지 않느냐?』며 이익금으로 고향에 도서관을 마련하고픈 게 현재로선 지상의 욕심이라고. 자신을 평해「비비파(非非派)」라고 부르는 이 인간「옵세트」는 아직 미혼-. 『현실세계에 처음 부딪쳐 본 것이 첫 사랑이었는데 결국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결혼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노라고. 학력을 밝히길 굳이 거절하는 이 청년은『「사르트르」가「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것과 같이 그런 류의 권위를 인정하기 싫어』안 밝히는 것이라고.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니까『어렸을 땐「예수」가 되고 싶었는데 이젠 한국의 장자(莊子)가 되고 싶다』 한시(漢詩)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황혼녘의 산책을 좋아한다. 체중 57kg, 키 172cm. 다소 마른 편인 이 인간「옵세트」는 뒷머리가 뜨거워 베개를 베고 자지 못하고 칼등이나 쇠붙이를 베고 자야만 잠이 든다는 괴짜. 그래도 잠이 오느냐니까『그래야만 잠이 온다』며 아예 베개마저 철제(鐵製)로 특별주문해 만들어 두었으니 올 겨울부턴 푹 단잠을 자게 되었다고-. 이 괴짜의 정신세계를 엿보기 위해 자작시 일부를 소개하면-. 심측(深測)으로 매혹(魅惑)하는 그대 눈 바라보면 악마(惡魔)도 뉘우치게 할 어떤 힘에 이끌려 아름다히 만물(萬物)을 치장하는 맑은 햇살 대하듯 천심(天心)의 원광(元光) 사위게 할 가슴속 진홍(眞紅)의 장미(薔薇)! …… 죽은 자를 되살리고 간 자 죽이던 가이없는 사랑이여! 그 고운 눈의 비밀(秘密)이란 색채(色採)짙은 내 환상(幻像) 빼고나면 그 미쳐난 화인(畵人)이여! 해골(骸骨)쪽들 어수선히 웃고 있을 뿐인가? (『반역자(叛逆者)』첫 연(聯)과 마지막 연 ) [ 선데이서울 68년 12/15 제1권 제13호 ]
  • “독후감 숙제는 어떻게 쓰죠?”

    “독후감 숙제는 어떻게 쓰죠?”

    “선생님, 생활수기는 어떤 종이에다 써 와요?” 29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 양원초등학교 1학년 2반 교실. 고예곤(57) 담임교사가 방학 숙제를 설명하자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진다. 학생들은 모두 60대 전후의 ‘늦깎이’들이지만 방학식을 맞아 들뜬 분위기는 여느 초등학교 교실과 다르지 않다. 지난 3월 국내 최초의 성인 대상 학력인정 초등학교로 문을 연 이 학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가진 방학식이 열렸다.4년 12학기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17일간의 짧은 방학이지만,1학년 학생 280명은 “평생의 첫 여름방학”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방학숙제는 크게 3가지. 일기와 독후감 쓰기, 구구단 3번 쓰고 외우기 및 1∼100까지 숫자 2번 쓰기,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 온 내용을 글로 정리하는 생활수기 쓰기다. 대부분 한글을 처음 배운 학생들이라 아직 서툴지만 그래도 한학기 동안 써 온 일기는 자신있다는 눈치다. 문제는 난생 처음 쓰는 독후감 쓰기.28일 미리 나눠준 ‘이솝이야기’‘1학년 그림동화’‘우리나라 옛날이야기’ 중 한 권을 읽고 써야 한다. ●“글쓰기 잘 익혀 살아온 얘기 시로 쓰고파” 시키지도 않은 이솝우화의 ‘시골쥐와 서울쥐’ 얘기를 줄줄 늘어놓던 변두리(65·여)씨는 “수학 숙제는 어제 다 해치웠다.”고 말한다. 그는 “글을 쓰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는데 너무 행복하다.”면서 “대학도 꼭 가고싶고, 그동안 내가 살아온 얘기를 글로 쓰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김전순(57·여)씨는 “평생 학교에 가 본 적이 없어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도 쓰지 못해 답답했는데, 이번 방학에는 바닷가에 가서 그림도 그리고 시랑 일기도 쓸 것”이라면서 “언젠가 내가 책도 낼 날이 올 것이니 기대하라.”며 활짝 웃었다. 최고령 학생인 박중은(80·여)씨도 방학이 설레긴 마찬가지다. 짐짓 “애들도 아닌데 방학이라고 들뜨기야 하겠느냐.”면서도 “틈틈이 보고싶은 책을 볼 생각을 하니 행복하다.”고 좋아했다. ●“한글 깨쳐 운전면허 꼭 따야지…” 매일 밤새 청소원으로 일하고 바로 등교했다는 하종심(58·여)씨는 “방학 숙제도 열심히 하고 손자도 실컷 볼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본에서 살다가 9살 때 돌아와 말이 안통하는 바람에 배움의 기회를 놓친 박동섭(69)씨는 “아들이 면허만 따면 그 날로 차를 사준다고 했다.”면서 “이번 방학 때는 한글을 완벽하게 익혀 꼭 운전면허를 딸 것”이라고 말했다. 이선재 교장은 “평생 한글도 깨치지 못하고 살아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면서 “개학 뒤에는 동화구연대회도 열 것”이라고 말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포르노 아닌데 왜 부끄럽죠?”

    미국 영화배우 카메론 디아즈가 10대 모델 시절 촬영한 가슴 노출 사진을 미끼로 돈을 뜯어내려 한 사진작가와의 소송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BBC인터넷판은 27일 그녀의 성공 비결을 재조명했다. 작가 존 러터는 디아즈가 유명해지기 전인 19살 때 사진 촬영 계약을 맺고 망사 스타킹을 신고 가슴을 드러낸 다소 야한 사진을 낡은 창고에서 찍었다. 그 뒤 디아즈가 유명해지자 러터는 이 사진을 미끼로 디아즈에게서 돈을 뜯어내려 했고 지난 26일 미 법원은 러터에게 유죄 평결을 내려 그는 징역 6년을 선고받을 위기에 몰렸다. 디아즈는 “옷을 파는 그냥 모델이 아니라 굉장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어 사진을 찍었다.”며 “그 사진들은 포르노가 아니어서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6살 때 파티에서 모델로 뽑힌 뒤 5년 동안 세계를 돌며 모델 활동을 했다.1994년 첫 출연한 영화 ‘마스크’가 3억달러를 벌어들였지만 그녀는 블록버스터나 ‘머리가 빈’ 금발 미녀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내 남자친구의 결혼식’‘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등의 히트작을 골라내는 안목으로 줄리아 로버츠에 버금가는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BBC는 디아즈가 진지한 여배우와 미녀 스타 사이에서 확실한 지위를 구축하는 똑똑한 선택을 했기에 데뷔한 지 11년 만에 편당 2000만달러를 받는 할리우드 최상급 여배우가 됐다고 평가했다. 말괄량이 소녀가 어느날 모델 에이전시의 눈에 띄어 인기 배우로 변신했지만, 그 이면에는 본인의 성공을 행운이라 웃어넘기면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있었다고 BBC는 평가했다.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이사람] 해마다 해외의료봉사 실천 홍경섭 원장

    [이사람] 해마다 해외의료봉사 실천 홍경섭 원장

    자고로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다. 있는 사람들이 베풀 줄도 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부자들이 베푸는 삶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도 있다. 서울 신촌의 의춘당한의원 홍경섭(70) 원장. 그는 돈을 벌 만큼 벌었다고 밝혔다. 신촌에서 30년 동안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고, 부인은 바로 옆에서 약국을 했었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한 끝에 서울 신촌에 5층짜리 건물도 소유하고 있다. 한의원도 그 건물 3층에 있다. 걱정거리라고는 없어 보이는 홍 원장은 매년 국내외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가진 자들의 베푸는 삶 정도로 치부될 수 있다. 그가 인터뷰 도중 부인과 자식에게 평생 숨겨왔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 전까지는 흔한 미담의 주인공 가운데 한사람 정도로 생각되어졌다. ●”식후 3번 복용이라는 말을 이해못해” 홍 원장은 해외봉사활동으로 말문을 열었다.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2000년부터 중국·베트남·캄보디아·방글라데시의 오지로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국내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의술을 접할 기회라도 있지만 이들 나라의 오지에 있는, 평생 약이나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해 도움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홍 원장은 지난해 네팔에서 만난 한 환자의 기억을 떠올렸다. “진료를 마친 뒤 하루 식후 3번 약을 먹으라고 처방을 해줬습니다. 그랬더니 식후 3번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하루에 한끼조차도 먹기 어려운데 식후 3번 복용이란 개념이 와닿을리 없죠.” 홍 원장은 이같은 환자들이 눈에 밟혀 의료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겠다는 각오다. 하지만 그 역시도 뇌경색증이 있는 등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가족들은 의료봉사활동을 그만두라고 성화다. 하지만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년 보름 가까이 해외 의료봉사활동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선친 때문이다. ●작고하신 부친 때문에 의학공부 시작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무슨 이유로 돌아가셨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인이 궁금해서 의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병명도 모른 채 돌아가셔 가족들의 슬픔도 배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의학을 공부하겠다는 목표는 쉽게 세웠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어머니로서는 누나와 10살 아래 동생 등 3남매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조차 역부족이었다. 홍 원장은 1956년 경북 상주농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의학을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4∼5년 동안 가정교사 등 온갖 일을 한 뒤 동양의학대학(경희대 의대 전신)에 입학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20대 중반에서야 의대에 진학한 것. 늦은 만큼 세월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만 했다. 그러나 홍 원장의 기쁨도 잠시. 입학 1년여 만에 동양의학대학이 재정적인 이유 등으로 폐교됐다. 그로서는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인생의 계획을 조금 수정하면 된다. 늦더라도 조금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자위하며 재도전에 나섰다. 그는 야간대학 상업과에 다시 진학했다. 상업과에 다니면서 중등교사 자격증을 따냈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돈을 번 뒤 의학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생각에서 교사 자격증을 딴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홍 원장에게 의학을 전공할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30살이 되던 해 경희대 한의대 편입학에 성공한 것이다. 한의대에 편입학했을 때는 이미 지금의 부인 전정숙씨를 만나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 그는 학부 졸업 후 석사, 박사과정도 마쳤다. 다만 석사와 박사과정은 한의학이 아닌 양의학을 택했다. 석사학위는 연세대 보건대학원에서, 박사학위는 일본 도호대학에서 예방의학을 전공했다. 한의원을 개업한 것은 40살이 돼서다. ●“평생 숨겨왔던 비밀, 이제는 공개하고 싶어” 홍 원장은 인터뷰 도중에 불쑥 부인과 자식에게 숨겨왔던 비밀 한 가지를 털어놓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갑속에 감춰놨던 시각장애 6급이라고 적힌 복지카드를 빼냈다. “중학교 때 사고로 왼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부인과 자식들에게 괜한 짐을 안기기 싫어서 이제껏 말을 안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는 가족들에게 떳떳하게 밝혀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한쪽 눈이 실명된 이후 여러 차례 좌절도 겪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의대에 진학하겠다고 했더니 담임선생님이 문학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더군요. 담임선생님은 내가 사고로 한쪽 눈이 실명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집을 부려 결국 경북대 의대에 지원했습니다. 결과는 신체검사에서 탈락이었습니다.” 홍 원장은 그때도 의학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다. 언젠가는 기회가 다시 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쪽 눈이 안 보이니까 책을 오랫동안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한의대에 입학한 뒤에도 남들보다 2배 이상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 눈으로는 현미경을 통해 세포를 관찰하면서 다른 한쪽 눈으로는 세포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면 정말이지 공부를 포기하고 싶을 때도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한의원을 물려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홍 원장은 중매로 부인을 만나 29살 때 결혼했다. 부인은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재원이었지만 결혼 당시만 해도 홍 원장은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었다. 주변에서 홍 원장의 성실함을 알아줘 부인과 결혼까지 하게됐다고 자랑했다. 3남매 중 큰아들 영준(40)씨는 원자력병원 의사다. 둘째딸 영선(39)씨는 이화여대 의대 교수다. 사위 역시 정형외과 개업의사로 가족 모두 의료인이다. 막내 영모(36)씨는 신학을 전공했다. 홍 원장은 “내심 자식 중 한 명은 한의학을 전공해 내가 갖고 있는 서적이나 의술을 물려주고 싶지만 뜻대로 안 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임수경씨 9살 아들 필리핀서 익사

    지난 1989년 방북, 평양축전에 참석해 세간에서 ‘통일의 꽃’으로 불리던 임수경(37)씨의 아들 최모(9)군이 21일 필리핀의 한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 숨졌다고 외교통상부 관계자가 22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최군은 최근 같은 또래의 학생 30여명과 함께 필리핀 세부 리조트에서 열린 영어연수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었으며, 이날 오후 2시쯤 리조트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다 익사했다.”고 밝혔다. 필리핀 주재 우리 대사관은 사고 당일 오후 5시쯤 이 같은 소식을 접하고 22일 새벽 사고 현장에 영사를 파견했다. 임씨의 친구 김모씨는 “수경이가 사고 소식을 들은 즉시 현지로 갔다.”고 전했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기고] 공기업 취업 성공기-회사 정보 ‘좔좔’… ‘늦깎이’ 벽 뚫었다

    코끝으로 제법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던 2003년 늦가을. 학부 졸업 후 1년 남짓 다니던 도시가스회사를 그만두고 29살이라는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했다.31살 돼서야 비로소 취업에 본격적으로 나섰지만 나이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틈나는 대로 취업사이트를 방문하면서 ‘한국가스안전공사’ 공채소식을 듣고 원서를 접수했다. 전공지식을 묻는 1차 시험을 통과한 후 인터넷과 예전에 근무하던 회사 선배 등을 통해 공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 면접에 대비했다. 1·2차 면접을 끝내고 기다리는데 합격통보를 받았다. 발령부서는 기획조정실 기획부. 가끔 주위에서 신입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늦은 나이에 어떻게 공사에 입사하게 됐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조금이나마 참고가 됐으면 좋겠다. 가스공사의 채용절차는 서류전형과 필기·면접시험으로 이뤄진다. 서류전형은 외국어와 전공중심으로 평가하고 자격증 소지자는 가점이 주어진다. 서류전형 통과자에 한해서 전공지식을 묻는 필기시험을 본다. 필기시험 통과자를 대상으로 마지막 실무면접과 인성면접을 거쳐 채용이 결정된다.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틈틈이 영어와 상식, 논술 등을 준비해 서류전형 및 필기시험에 대비했다. 면접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변 선배와 인터넷 등을 통해 공사에 대한 정보를 구하고 이를 정리했다. 모든 회사가 그렇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전공, 외국어 점수도 중요하지만 여러 가지 경험과 독서 등을 통한 상식과 판단력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피터 드러커 교수의 ‘영리함은 오늘을 움직이지만 지혜가 모든 것을 견디게 했다.’라는 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가스 안전사고는 사용자의 부주의로 인해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가스사고 예방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롯데그룹(1)-신격호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롯데그룹(1)-신격호 회장家

    신격호 롯데 회장은 빚을 몸속의 열에 비유하곤 한다. “몸에 열이 오르면 병이 나고 심하면 목숨이 위태롭다. 과다한 차입금은 만병의 근원이다. 특히 잘하지도 못하는 업종에 빚을 내 사업을 벌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죄를 짓는 일이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과다한 차입경영이 논란이 되고 있는 요즘, 신 회장의 말은 울림이 크다. 일각에서는 “껌 팔아 부자됐다.”며 롯데의 국가경제 기여도를 얕잡아 보기도 하지만, 기여도가 높다는 삼성·현대·LG 등이 저마다 골칫덩이 자식 한두 개 때문에 국가경제에 고통을 줄 때도 롯데는 어느 계열사 하나 그런 곳이 없었다.“실패하더라도 빚을 돌려줄 수 있는 범위에서만 투자한다.”는 신 회장의 무차입 경영 덕분이다. 롯데그룹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말 현재 70.3%. 삼성(50.0%) 다음으로 재무구조가 튼실하다.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땅에 건너가 ‘조센징 장사꾼’이라는 멸시를 받아가며 부(富)를 일군 신 회장. 그렇게해서 번 돈으로 고국에서 다시 기업을 일으킨 그는 한·일 양국에 사업체를 갖고 있지만 지금껏 과실송금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번 돈은 고스란히 한국에 재투자하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중후장대 기간산업을,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경박단소 첨단산업을 일으켰다면, 신 회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서비스산업을 개척한 선구자다. 몇 안되는 생존 창업주인 그는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에도 여전히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셔틀경영’을 하고 있다. ●또다른 이름 시게미쓰상 그는 홀수달에는 신격호, 짝수달에는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가 된다. 홀수달에는 한국에서, 짝수달에는 일본에서 일한다. 그의 셔틀경영이 언제쯤 시작됐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주위에서는 모국 투자가 시작된 1960년대 말부터라고 짐작한다. 벌써 30년째다. 월말이 되면 수행원도 없이 혼자 공항에 나가 훌쩍 비행기를 탄다. 생활철학인 거화취실(去華就實·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이 엿보이는 단면이다. 한국에 머무를 때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을 쓴다. 집무실 겸 숙소다. 외출은 거의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바로 옆의 롯데백화점 매장을 둘러보는 정도다. 올빼미족에게 반가운 얘기 한가지. 신 회장은 창업주 총수로는 드물게 ‘새벽형 인간’이 아니다. 오전 8시쯤 일어나 9시에 호텔방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임원들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말수가 적다. 칭찬에도 인색하다.“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지론”이라고 스스로 말할 만큼 완벽주의자다. 타고난 내성적 성격에 오랜 일본생활까지 겹쳐 웬만해서는 ‘혼네’(속내)를 내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때로 냉정하다는 얘기도 듣는다. 둘째아들인 신동빈 롯데 부회장이 “결단코 자상한 분은 아니다.”라고 했을 정도다. 언론에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단돈 83엔 들고 일본으로 신 회장은 1922년-원래는 1921년생이지만 호적에 1년 늦게 올랐다-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울산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경남도립 종축장에 기수보로 취직했지만 “박봉의 삶이 싫어” 1941년 일본행 관부연락선을 탔다. 이 때가 열아홉살. 고향친구 자취방에 얹혀 살며 신문·우유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잡일을 했다. 돈이 모이면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작가 지망생의 꿈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문학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기술을 배워야 했다.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 이학부) 화학과에 입학했다. 일본 패전의 기색이 짙어가던 1944년 어느날, 조선인 청년의 성실성을 평소 눈여겨보던 한 일본인 노인이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사업을 해보라.”며 선뜻 6만엔을 내놓았다. 그러나 첫 사업체는 공습을 맞아 완전히 불타버렸다.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친구들은 “귀국선을 타자.”고 종용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는 살 수 없는 게 그였다. 빚을 갚으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區)의 낡은 창고에 가마솥을 내걸었다. 그럴 듯한 간판(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도 달았다. 커팅오일을 응용해 만든 비누와 크림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1년반만에 노인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다. 내친 김에 비누를 만들던 가마솥과 국수를 뽑아내던 기계로 껌을 만들었다. 또다시 대박. 신주쿠 허허벌판에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가 탄생했다. 껌회사에 소설 여주인공(‘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샬로테) 이름을 붙인 발상이 생뚱맞아 보이지만, 못다한 문학청년의 꿈은 그렇게 해서 다소 풀렸다.1948년 6월28일의 일이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그가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했을 때, 일각에서는 “고국에 대한 첫 투자가 겨우 소비재 사업이냐.”며 비판했다. 신 회장은 이렇게 항변한다.“한·일 수교로 모국 투자길이 열리자 당시 정부는 내게 종합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후지제철소(현 신일본제철)의 도움을 받아 설계도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직접 제철소(포항제철)를 짓겠다고 했다.” 어찌됐든 그렇게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로 고국에 진출한 그는 한국롯데를 국내 재계서열 5위의 ‘유통 명가’로 키워냈다. 지난해 말 현재 자산 29조 7000억원, 계열사수 41개, 종업원수 3만 5000명이다. 일본롯데에 비교도 안됐던 매출액(26조원)은 7대3 규모로 역전됐다. ●일본인 아내와 재혼 신 회장은 조혼 풍습에 따라 1940년 둔기리의 고향처녀(노순화)와 결혼했다. 신혼생활은 신 회장의 일본행 가출로 1년여만에 끝났다. 노 여사는 남편의 금의환향을 끝내 보지 못하고 1951년 29살에 요절했다. 신주쿠 허허벌판에서 일본 1위의 껌업체 하리스와 10년 상전(商戰)을 벌이는 동안, 신 회장에게 큰 힘이 돼준 이는 1952년 재혼한 일본인 아내 다케모리 하쓰코(竹森初子·78)씨였다. 결혼후 남편성을 따 시게미쓰로 바꿨다. 당시 일본 외무성 대신의 여동생이었다. 경영에 일절 참여하지 않는 시게미쓰 여사는 성품이 온화하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우리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알아듣기는 한다. 신 회장은 노 여사와의 사이에 맏딸 영자씨를, 시게미쓰 여사와의 사이에 동주·동빈 두 아들을 두었다. 롯데가의 한 인사는 “동주와 동빈이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집안에서는 히로유키, 아키오라는 일본이름으로 더 친숙하게 불렸다.”고 전했다. ●백화점 주역 신영자 부사장 모녀 신 회장의 맏딸 영자(63)씨는 롯데쇼핑 총괄 부사장 겸 호텔롯데 면세점 총괄 부사장을 맡고 있다. 부산여고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나왔다. 유통업계의 라이벌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는 대학 동창이다. 지난해 말 롯데면세점 모델인 ‘욘사마’ 배용준씨의 사진전에 직접 참석했을 만큼 회사일에 적극적이다. 유통 사업가답게 의상과 화장이 화려하다. 다소 깐깐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새어머니인 시게미쓰 여사와는 팔짱을 끼고 다닐 정도로 사이가 좋다. 1967년 장오식 전 선학알미늄 회장과 결혼해 1남3녀를 두었으나 지금은 독신이다. 가장 눈에 띄는 자녀 혼사는 막내딸 정안(31)씨. 지난해 5월 영국계 로펌 클리포드&챈스의 이승환(37) 변호사와 결혼했다. 이 변호사는 한국케이블TV 대구방송 회장과 영남일보 주필을 지낸 이종명씨의 아들.‘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의 회원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지만씨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잡화 바이어(차장)로 일하던 정안씨는 결혼후 휴직, 남편과 함께 해외에 머무르고 있다. 친구 소개로 이 변호사를 만나 2년간 연애했다. 주례는 시아버지의 절친한 ‘지기’ 한완상 한성대 총장이 맡았다. 한 총장과 이 전 회장은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함께 하기도 했다. 신 부사장이 사업적으로 가장 의지하는 이는 둘째딸 선윤(34)씨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를 나와 97년 롯데쇼핑에 입사, 올해 초 이사로 승진했다. 명품관 ‘에비뉴엘’ 개관의 일등공신이다. 외할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다. 성격도 소탈해 직원들 사이에 평이 좋다. 인테리어 회사 사장과 결혼했으나 지금은 독신이다. 외아들 재영(38)씨는 롯데에 포장지를 납품하는 인쇄업체 ‘재영상공’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맏딸 혜선(36)씨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선윤씨처럼 독신이다. ●일본롯데 이끄는 큰아들 동주 동주(51)씨는 일본롯데 부사장이다. 결혼이 다소 늦었다. 서른여덟살이던 92년 3월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재미교포 사업가 조덕만씨의 둘째딸 은주(41)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동주씨가 일본롯데의 미국법인 지사장으로 발령나면서. 아버지를 닮아 내성적인 그는 의외로 열살 연하의 거래처 여직원에게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남덕우 전 경제부총리가 주례를 본 두 사람의 결혼식은 이례적으로 언론에 공개됐다. 아들(정훈·12)만 하나다.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동주씨는 아오야마(靑山)학원과 같은 대학원에서 경영공학을 전공했다. 롯데와 무관한 미쓰비시 상사에서 10년간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 87년 한국롯데에 입사했다.“순수하고 학자 같다.”는 게 주위의 공통된 평가다. ●한국롯데 이끄는 둘째아들 동빈 동빈(50)씨는 형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역시 형이 다닌 아오야마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받았다.88년 일본 롯데상사의 이사로 롯데에 합류하기까지,8년을 다른 회사(노무라증권)에서 일한 것도 형과 같다. 한국무대에 데뷔한 것은 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를 맡으면서. 증권사에 오래 있어서인지 수치에 매우 밝다.97년 2월 한국롯데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이중국적자이던 그는 한국생활을 시작하면서 일본 국적을 정리했다. 처음엔 우리말이 서툴렀으나 지금은 발음이 조금 어색할 뿐, 대화를 주고받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와인을 즐기지만 폭탄주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문학 기질을 이어받아 사석에서 가끔 괴테의 시를 영어로 읊기도 한다. 이승엽 프로야구 선수가 뛰고 있는 일본 롯데 지바 마린스의 구단주 대행도 맡고 있다. 세간에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나 집안 인사의 얘기는 다소 다르다.“형인 동주보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다. 원래 신씨 집안 남자들이 활달한 편은 못된다.” ●한·일 넘나든 현해탄 혼맥 롯데가는 물론 재벌가를 통틀어 화려한 혼맥의 정수로 꼽히는 게 동빈씨의 결혼이다.85년 형보다 먼저 일본에서 다섯시간에 걸친 일본전통 혼례식을 치렀다. 신부는 일본의 대형 건설사 다이세이의 오고 요시마사 부회장의 둘째딸 마나미(眞奈美·46)씨. 일본 귀족학교인 가쿠슈잉(학습원)을 졸업한 재원이다. 일본황실의 며느리감 후보로도 거론됐다.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가 중매를 서고 주례까지 맡았다. 결혼식에 나카소네 당시 총리를 비롯해 전·현직 일본 총리가 세 명이나 참석해 한·일 양국에서 떠들썩한 화제가 됐다. 마나미씨를 만나본 한 인사는 “평범하고 참한 인상”이라고 전했다. 아들 유열(19)군과 규미(17)·승은(13) 두 딸을 두고 있다. 부인과 자녀들은 일본에 살고 있다. 한달에 두세번 신 부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신 회장이 ‘셔틀 기업경영’을 하고 있다면, 신 부회장은 ‘셔틀 가족경영’인 셈. 수행원 없이 다니는 것은 부자(父子)가 똑같다. ●남다른 고향사랑과 초고층 건물에의 꿈 해마다 5월이면 신 회장은 울산시 울주군 둔기리 호숫가의 너른 잔디밭에서 사재를 들여 잔치를 벌인다.69년 대암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물에 잠기자 전국에 흩어진 고향사람들을 수소문,1971년 5월 돼지머리에 막걸리를 기울인 것이 시초가 됐다. 이후 지금껏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있다. 모임 이름도 고향에서 따 ‘둔기회’라고 지었다. 처음엔 수십명이던 회원수가 아들·며느리·손자의 가세로 지금은 수백명으로 불어났다. 고향 못지 않게 신 회장에게는 애틋한 대상이 있다. 파리 에펠탑 같은 세계 최고층 건물이다. 여든살이 되던 해인 2002년,112층 건물 청사진을 내보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언제까지나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교통영향 평가 등에 걸려 지금껏 삽도 떠보지 못했다. 신 회장은 ‘건설통’ 서울시장에게 기대를 걸며 초고층 건물을 재추진하고 있다. ●유통명가 떠받치는 롯데맨들 롯데에는 사장단 회의가 따로 없다. 지난해 신설된 정책본부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계열사간 조정자 역할을 한다. 호텔롯데 소속의 김병일(62) 사장이 신동빈 부회장(본부장)을 도와 부본부장을 맡고 있다.73년 호텔롯데 경리부장으로 입사해 81년 그룹 기획조정실 이사를 시작으로 20년 이상 신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신 회장 부자의 심중을 가장 정확히 읽어낸다는 핵심참모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 그룹 내 손꼽히는 재무전무가로 말수가 적다. 그룹의 모태인 롯데제과는 경리분야에서 20년 잔뼈가 굵은 한수길(64) 사장이 맡고 있다. 자일리톨껌 등 ‘연타석 홈런’으로 경영성과를 끌어올렸다.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은 삼성 출신의 장경작(62) 사장과 ‘젊은’ 이인원(58) 사장이 각각 이끌고 있다. 신세계백화점과 조선호텔 사장을 지낸 장 사장은 올 2월 롯데맨으로 변신했다. 수익사업의 귀재라는 수식어를 달고다닌다. 평균 연령이 60대인 롯데 경영진 사이에 드물게 50대인 이 사장은 97년 CEO(최고경영자)로 파격 발탁돼 8년간 장수하고 있다. 관리·영업·매입 등 백화점 3대 요직을 모두 거쳤다. 의심나면 끝까지 파헤친다. 할인점 업계 최초로 중소기업 박람회를 연 롯데마트 이철우(62) 사장과 정통 엔지니어 출신으로 현대석유화학 인수 주역인 호남석유화학 이영일(64) 사장도 눈에 띈다. 신 회장의 가족 가운데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이는 친동생인 신준호(64) 롯데햄·우유 부회장과 5촌조카 신동인(59) 롯데자이언츠 구단주 대행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의 롯데를 일구는데 일조했으나 지금은 한발 물러나 있다. 음료업계 최초로 순 매출액 1조원 돌파의 대기록을 세운 롯데칠성음료 이종원(61) 대표이사 부사장, 스피드 경영으로 유명한 롯데건설 이창배(58) 대표이사 부사장, 워커홀릭(일중독자)으로 불리는 롯데삼강 이광훈(57) 대표이사 전무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롯데맨이다. 황각규(51) 롯데쇼핑 상무와 강현구(45) 롯데닷컴 상무 등은 신 부회장의 관심사업을 보좌하고 있다. ●“평창면옥에 해답이 있다” 이철우 사장의 회고다. “잠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백화점을 짓기는 했는데 신세계의 세 배인 드넓은 매장을 채울 일이 걱정이었다. 회장님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타박하시더니 평창면옥에서 해답을 찾으라고 했다.” 당시 서울 평창동에 있던 평창면옥은 5000원짜리 밥맛이 워낙 좋아 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사람들이 왜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그곳까지 가겠는가.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상품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고객에게 꼭 필요하고 훌륭한 상품을 만들면 문제는 절로 해결되기 마련이다.” 신 회장의 이 얘기는 지금도 롯데 임직원들 사이에 자주 회자된다. hyun@seoul.co.kr ■ 절친했던 신격호·정주영 회장 신격호 회장은 생전의 정주영(왕회장) 현대 창업주와 절친했다. 왕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직접 추도사를 쓰기도 했다. 신 회장이 일곱살 아래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매우 닮았다. 우선 대가족의 장남이다. 신 회장은 동생이 9명, 왕회장은 7명이다. 중농·빈농의 아들로 농사규모는 달랐지만 식솔이 워낙 많아 삶이 퍽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공 신화의 시작이 가출이라는 것도 같다. 두 사람 모두 열아홉살 때 “앞이 안보인다.”며 집을 뛰쳐나왔다. 사업 시작후 최대의 시련도 ‘불’이었다. 신 회장은 처음 차린 커팅오일 공장이 불에 몽땅 타버려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 왕회장도 첫 사업인 자동차수리공장이 불에 타는 바람에 고초를 겪어야 했다. 신 회장은 이 때문에 지금도 임직원들에게 자나깨나 불조심을 외친다. 롯데호텔 준공 때 멀쩡한 새 건물의 복도 천장을 뜯게 한 뒤 손전등으로 직접 방화 장치를 확인한 일화는 유명하다. 공교롭게도 죽을 고비도 한차례씩 넘겼다. 여든이 다 될 때까지 직접 운전을 하고 다녔던 신 회장은 언젠가 밤길에 귀가하다가 트럭과 정면으로 부딪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왕회장도 새벽에 울산공장을 시찰하러 직접 운전하고 가다가 차가 바닷물에 빠져 죽을뻔 했다. 발상도 기발하다. 신 회장은 풍선껌에 대나무 대롱을 함께 포장해 장난감처럼 불 수 있게 했다. 왕회장은 겨울 골프에 빨간 골프공을 도입한 주인공이다. 이 유명한 빨간공 일화를 남긴 1970년 초봄 라운딩의 동반자가 바로 신 회장이었다. 신 회장은 훗날 “폭설이 내려 (하얀 골프공을 찾을 수 없는 만큼)의당 약속이 취소된 것으로 여겨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고 회고했다. M&A(인수합병)보다는 직접 공장말뚝 박기를 즐겼던 것이나 귀향잔치(둔기회·소떼방북)를 벌인 점도 똑같다. 다만, 신 회장은 언제나 소리가 나지 않았고 왕회장은 늘 요란했다. 대선 출마 등 말년에 한눈을 판 왕회장과 달리 신 회장이 사업에만 전념하는 것도 결정적 차이다. hyun@seoul.co.kr ■ 신동빈 부회장 ‘큰어머니’ 제사 해마다 직접 지내 지난달 21일 저녁 서울 성북동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의 자택. 검정 옷차림의 신씨가문 후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 날은 종손인 신격호 회장의 첫 부인 노순화 여사의 기일이었다. 신동빈 부회장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어머니’의 제사를 주관했다. 누나인 신 부사장은 말없이 ‘생모’의 제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느 재벌가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신 회장이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동빈씨는 한국에 정착한 이후 노 여사의 제사를 꼬박꼬박 지내고 있다. 집안에서나, 그룹에서나,‘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빠르게 굳혀가고 있는 모습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후계구도와 관련해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언급을 회피하던 그룹측은 이제 공공연하게 “후계구도 작업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신 부회장이 일본인 아내를 맞은 점 등을 들어 일본롯데를, 신동주 일본롯데 부사장이 장남인 점 등을 들어 한국롯데를 맡을 것이라는 분석이 한때 유력했지만 현재로서는 뒤집힌 셈이다. 신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신설된 정책본부의 장(長)을 맡으면서 후계자 논란을 확실하게 잠재웠다. 재계는 “그룹 대권을 둘째아들에게 넘기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로 해석했다. 신 부회장은 온라인쇼핑몰·편의점 사업 등에서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했지만,KP케피칼·현대석유화학 등을 성공적으로 인수함으로써 아버지의 신임을 굳혔다. 현장을 중시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지난 4월에는 롯데마트 금천점에 불쑥 나타나 한 시간 동안 매장을 둘러보기도 했다. 현장에서 지시한 내용은 나중에 꼭 확인한다. 상장(6개사)에 인색한 기업 문화와 보수적인 토양을 어떻게 바꿔나갈지 주목된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재혼뒤 제2 반상인생 ‘토종바둑’ 서봉수 9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재혼뒤 제2 반상인생 ‘토종바둑’ 서봉수 9단

    삼라만상의 우주와 희로애락의 인간세계를 한곳에 축소시킨다면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가로·세로 42×45㎝에 불과한 나무판이 있다. 그 위에는 가로·세로 19×19줄이 교차되면서 361개의 점이 그어진다. 가운데 점은 천원(天元)이다. 지구 공전 주기가 365.25일이고 보면 절묘한 맞춤형이 바로 바둑판이다. # 1972년 최저단·최연소 명인전 타이틀 바둑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취미였다. 지난해 한 여론조사에서 성인 남성 5명 중 2명이 바둑을 즐긴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동격서(聲東擊西)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소탐대실(小貪大失) 등 생존경쟁에서 보약처럼 응용되는 수많은 격언들을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반상이다. 공자도 바둑을 좋아했던지라 ‘논어’에서 ‘바둑 두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다(以奕爲爲之猶賢乎己).’라고 했다. 서봉수(53) 9단. 요즘에는 이세돌 이창호 최철한 등 젊은피에 한발 밀려나 있지만 ‘서봉수류(類)’는 여전히 바둑팬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왜일까. 야전사령관, 야생마, 매운 고추장, 토종바둑, 오뚝이 등으로 불려온 그는 순수 ‘국산품’이기 때문이다. 서 9단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한국 바둑계의 정상은 일본 ‘유학파’들의 차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순수 국내파인 서봉수가 혜성같이 등장하면서 매운 고추장 맛을 보여줬다. 특히 ‘조훈현 서봉수 백년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둑계를 주거니 받거니 평정했다. 특히 반상 위를 마구 헤집는 전투 지향적인 기풍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팬들에겐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 1972년 ‘명인’ 타이틀을 땄을 때 최저단(2단), 최연소(19세)라는 기록을 세웠다. 명인전을 주최한 신문사는 1면 머리기사로 다룰 정도였다. # 29살 연하 베트남 여성과 지난해 재혼 서 9단은 올해로 입신의 경지(9단)에 이른 지 20년째. 아울러 70년에 프로입문했으니 바둑인생 35년이 된다. 휴전협정이 한창이던 53년에 태어난 그는 개인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난해 12월 29세 연하의 베트남 여인과 재혼해 새 삶을 살고 있다. 결혼 당시 일부에서는 곱지 않은 오해의 시선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제2의 바둑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 평촌동 자택 인근의 커피숍에서 서씨를 만났다. 먼저 근황을 물었더니 “프로기사가 달리 할 것이 뭐 있겠느냐.”면서 “6개월 전부터 일주일에 3일은 서울 반포에 있는 ‘권갑용 바둑도장’엘 나간다.”고 했다. 권갑용씨는 프로 7단으로 이세돌과 최철한 등을 배출해 바둑 스타의 제조기로 알려져 있다. 서씨는 이 바둑도장에서 예비프로들과 대국을 하면서 장차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갈 후배들을 지도해주고 있다. 아울러 잡지와 컴퓨터 바둑코너 등에 기보해설을 해주고 가끔 지방 초청강연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시합이 우선이기 때문에 하루종일 잠 자는 시간만 빼놓고 늘 바둑과 함께 지낸다. 바둑 외에 다른 취미는 없느냐고 하자 “학창시절 탁구 당구 등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즐겼다.”면서 지금은 관전하는 정도로 멀어졌다고 대답했다. 다만 3년 전 골프를 배워 지인들이 불러주면 같이 라운드한다고 말했다. 부인의 안부를 물었다. 약간 주저하더니 “평범한 가정주부로 빨리 적응해 잘 살고 있다.”면서 “(부인은)사고방식이 건전하고 착하다. 명랑한 성격이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고 자랑했다. 어울러 “(베트남에서)고생을 하며 자라서 그런지 참을성이 많고 어려움도 잘 견딘다.”고 부연했다. # “먹고자는 시간 외엔 오로지 바둑만” 서로의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느냐고 하자 “집을 나설 때 아내에게 ‘굿바이’ 하면서 손을 흔들고 집에 돌아오면 웃으며 손을 잡는다. 또 시장하면 ‘배고프다.’는 눈짓을 한다.”면서 “같이 지내다 보니 굳이 많은 얘기가 필요하지 않다.”고 웃었다. 가끔 주말에 함께 나들이도 한다. 인근 관악산 주변을 산책하고 기분 내키면 산 중간까지 오른다. 늦은 밤 집앞 24시간 할인매장에서 시장을 같이 보는 것도 재미란다. 최근에는 부인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컴퓨터 한대를 사주었다고 귀띔했다. 서 9단의 각오가 사뭇 비장해 보인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베트남 신부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겠다고 몇 차례 다짐했다. 아울러 재혼 이후 물욕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에 서로 의지해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평범한 진리도 깨달았단다. 서 9단이 베트남 신부를 맞게 된 것은 지난해 여름 지인으로부터 소개받고 몇 차례 베트남을 오고가면서였다. 결혼식 때에도 “신부는 비록 배운 건 없지만 순수하고 진실한 여자”이며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나는 그를 사랑하며,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지난해 서씨의 성적은 37전 23승 14패로 여전히 부진한 편이다. 그러나 자신 하나를 믿고 머나먼 이국 땅에 온 신부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돈도 벌고 더욱 열심히 살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제 자신이 틀에 박힌 ‘기풍’이란 말을 쓰고 싶지 않아요. 이젠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져야 합니다. 또 공부하고 변하지 않으면 안 돼요. 요즘에는 승부가 너무 치열합니다. 갈수록 수준이 높아지고 강해져요. 이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더욱 재미가 있지요. 엣날에는 고수들끼리 타협도 가끔 했는데…. 제 인생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직 바둑밖에 없어요, 밥먹고 자는 시간 외엔 오로지 바둑 공부만 하지요.” 세상살이가 아무리 치열하다고 해도 바둑처럼 극명한 인생살이는 없다고 했다. 프로기사들은 한미디로 피말리는 토너먼트라고 했다. 지면 인생에서 탈락이란다. 조치훈씨의 경우 울면서 밤길을 걷다가 몇번이고 자살 직전까지 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친구들도 한번 패할 때마다 견디기 힘들 만큼 큰 충격 속에서 방황하고 헤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같은 아픔을 이기는 방법은 그저 즐기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춘향이가 이도령 생각하듯이 늘 그리워하고 ‘올인’의 각오로 무장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대국에서 질 때마다 괴로워하다 보면 병이 생겨 인생끝장은 금방이란다. 또 바둑은 결국 체력싸움이라고 강조한다. 복서도 라운드가 계속될수록 펀치가 약해지듯이 바둑 고수도 초읽기에 몰리면 쉬운 수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 반상의 행마가 곧 인생이듯 늘 상대의 괴롭힘을 견뎌내야 하는 전쟁이라고 역설한다. “욕심없이 살아가려고 합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타이틀 하나 정도 따면 좋겠지요.” 서 9단은 오뚝이라는 별명답게 여전히 역동성을 간직하고 있다.80년대 후반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93년 제2회 응창기(應昌期)배 우승,97년 진로배에서 바둑사상 9연승 싹쓸이 신화,2000년 시즌 국내 최대 타이틀 LG정유배 우승 등 3∼4년 주기로 일을 내고 있다. # “나이 먹어도 새로운 바둑수는 생겨” 바둑계에서 50대는 분명 노장이다. 하지만 준비된 자의 미소는 늘 아름다운 법. 일본의 구토 9단은 나이 60에 천원전 타이틀을 차지했고, 후지사와는 66세에 왕좌전을 제패했다. 사카다는 80세에 은퇴했다. 또 얼마 전에 별세한 김수영 7단은 췌장암 판정을 받고서도 ‘아직 인생의 대마는 살아 있다.’며 공식대국을 7판이나 두었다. 원로 조남철씨는 60세에 9단 승단을 했고,82세에 ‘세번의 눈물’이라는 회고록을 펴내 바둑팬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무덤덤한 성격의 서 9단은 “바둑에서 똑같은 판은 하나도 없다.”면서 “승부란 늘 새로 시작하는 것이고 또 나이를 먹어서도 새로운 바둑 수는 생겨나는 법”이라고 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3년 대전 출생 ▲71년 배문고 졸업 ▲70년 프로입단 ▲71년 명인전 우승 ▲74년 제1기 국기전 우승 ▲75년 제10기 왕위전 우승 ▲76년 명인전 우승 ▲80년 국기전, 왕위전, 최고위전 우승▲83년 바둑왕전, 제왕전, 명인전, 기왕전 우승 ▲86년 제30기 국수전 우승 ▲87년 명인전, 제왕전, 국수전 우승 ▲86년 9단 승단 ▲88년 국기전, 기왕전 우승 ▲91년 동양증권배 우승 ▲92년 국기전 우승 ▲93년 제2회 응창기배 우승 ▲95년 제1회 신사배 우승 ▲97년 제5기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 9연승 기록 ▲99년 LG정유배 프로기전 우승, 제1회 프로시니어기전 우승 ▲2003년 제3회 돌씨앗배 프로시니어기전 우승 ▲2005년 제6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4강. ■ 상훈 바둑문화상 수훈상 수상 4회(80,81,82,93년). 통산 1000승 달성(94년).
  • Q여사에게 물어보셔요 (8)

    사연 : 여섯 번 퇴짜맞은 중매, 부모 고집 꺾으려면… 저는 올해 28세로 집안일을 책임지고 있는 장남입니다. 불행히도 다섯 여동생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결혼문제가 우리 가정의 큰 문제로 등장하여 선을 열심히 보았습니다. 우리집은 전혀 부모의 뜻대로만 일이 주관되고 있는데 만나는 색시마다 이쪽에서 거절하지도 전에『시누이가 많다』『생활이 넉넉지 못하다』『월수가 적다』등의 조건으로 거절해 옵니다. 자그마치 여섯 번이나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모욕감, 불쾌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여성을 저 자신이 물색해서 결혼하고픈 마음 간절한데 장차 결혼 후에 오는 부모들의 문책 또는 가정적인 분위기가 염려되어 고집할 수가 없어요. 부모의 고집을 완화시키고 설득시킬 수 있는 묘한 수단 방법은 없을까요! <경북 의성읍 동산동 김재환> 의견 : 그런 색시 생각 마셔요, 1년쯤 참으며 꾸준히 『불행히도 다섯 여동생』이라니 그런 실례의 말씀도 있습니까. 얼마나 다행이세요. 아마도 장남이신 오빠를 다섯 공주가 다투어 가며 위할 테니. 시누이들이 많다고 싫다는 색시들은 거절 당하기 전에 당신이「딱지」를 놓을 걸 그랬어요. 어머니와 다섯 누이동생의 살뜰한 위함을 받던 당신을 그만큼 살뜰하게 위해 줄 자신이 없다는 것이 그 색시들의 속셈이니까요. 결혼을 그렇게 거저 먹기로, 편한 취직쯤으로 생각하는 색시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마세요. 부모님들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앞으로 1년쯤만 참고 선을 보세요.「시누이」「생활」문제로 거절 당하다 보면 그 어른들도 손을 들겠죠. 그러면 29살 노총각이 되시죠. 그때 마음에 맞는 처녀를 찾아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요. <Q>
  • [儒林 속 한자이야기] (76)英才(영재)

    儒林(유림) (362)에는 ‘英才’(빼어날 영/재주 재)가 나오는데, 이 말은 ‘뛰어난 재주’, 혹은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英’자는 意符(의부)인 ‘艸’(풀 초)와 音符(음부)에 해당하는 ‘央’(가운데 앙)이 합쳐진 形聲字(형성자)이다.用例(용례)에는 ‘英明(영명:영민하고 총명함),英雄(영웅:재능과 담력이 탁월한 인물),育英(육영:영재를 가르쳐 기름. 교육을 이르는 말)’ 등이 있다. ‘才’자의 字源(자원)에 대해서는 ‘새싹이 땅 위로 돋아나는 모양’의 象形(상형)으로 ‘돋아나는 모양’이 본래의 의미라는 설,‘才’가 ‘在’(있을 재)의 본디 글자라는 점에 착안하여 ‘어떤 지점이나 범위를 나타내기 위한 標識(표지)’라는 설 등의 의견이 紛紛(분분)하다.‘多才多能(다재다능:재주와 능력이 여러 가지로 많음),才幹(재간:솜씨),才談(재담:재치있게 하는 재미있는 말),才勝德薄(재승덕박:재주가 있으나 덕이 적음)’ 등에 쓰인다. 흔히 知能(지능)이 優秀(우수)한 아이들을 英才(영재)라고 생각하지만 知能은 問題解決(문제해결) 및 認知的(인지적) 反應(반응) 정도를 설명하는 하나의 지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에디슨은 일생 6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으며, 노벨상 授賞式(수상식)에도 시간이 없다고 參席(참석)하지 않았고,‘천재는 99%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였을 만큼 徹頭徹尾(철두철미)한 노력파였다.英才, 혹은 天才는 타고난 才能(재능), 적절한 環境(환경), 그리고 努力(노력)에 의해서 길러지는 것이다.孟子(맹자)는 人材育成(인재육성)을 위한 文化(문화) 傳授(전수) 사업에 종사하는 일을 일러 ‘得天下英才 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라고 일러 천하를 號令(호령)하는 왕노릇도 이에 미칠 수 없는 큰 즐거움이라고 하였다. 전통적 입장에서 본다면 학생이 스승을 찾아가서 배우는 것이지 선생님이 가르칠 학생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스승은 문화를 전도(傳道)하고, 학생의 適性(적성)과 素質(소질)에 맞는 課業(과업)을 찾아주고(授業, 수업),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주는(解惑, 해혹)사람이다. 배우기 위해 누가 나를 찾아온다는 것은 이미 나의 존재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世間(세간)에 ‘실패한 기업인’이라는 말이 나돈다. 불우한 幼年(유년) 時節(시절)을 克服(극복)하고 구멍가게 水準(수준)의 작은 店鋪(점포)에서 출발하여 세계적인 多國籍(다국적) 企業(기업)을 일구고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을 設立(설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와, 일평생 모은 財産(재산)을 모두 사회에 還元(환원)한 故(고) 柳一韓(유일한) 博士(박사)의 삶과 대비를 이룬다. 유 박사는 1895년 平壤(평양)에서 태어나 9살의 어린 몸으로 美國(미국)에 건너가 苦學(고학)으로 大學(대학)을 마치고, 그곳에서 기업을 일으켜 成功(성공)한다.“건강한 국민만이 잃어버린 主權(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信念(신념)을 갖고 있었던 그다. 그가 경영하던 기업은 政經(정경)癒着(유착)의 誘惑(유혹)을 거부한 대가로 稅務調査(세무조사)를 받았으나 오히려 모범적인 납세 사실이 밝혀져 産業勳章(산업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땅투기 5만4966명 적발

    땅투기 5만4966명 적발

    수도권과 충청권, 기업도시 후보지에서 땅 투기혐의가 있는 특이거래자 5만 4966명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서울의 6세짜리 어린이가 충남 보령 일대 임야 3만 5000평을 사들였는가 하면, 기업도시 후보지인 무안에서는 5만 7000여평의 땅을 200여차례에 걸쳐 쪼개 판 사례도 있었다. 건설교통부는 지난해 7월부터 올 3월까지 수도권과 충청권, 기업도시 후보지에서 이뤄진 논, 밭, 임야, 나대지 등의 토지거래 내역을 분석한 결과 5만 4966명,6만 3811건의 특이거래를 적발해 명단과 거래내역을 17일 국세청에 통보했다. 또 증여거래자 명단은 각 지자체에 통보, 토지거래허가제 위반여부를 조사토록 했다. 건교부는 허가제를 피하기 위한 위장증여로 판단될 경우 사법당국에 고발키로 했다. 조사대상지역은 서울, 인천, 경기, 대전, 충남, 충북지역 전역과 기업도시 후보지인 전남 해남·영암·무안·광양, 경남 하동·사천, 강원 원주, 전북 무주 등으로 땅값 상승세가 두드러지고 투기 성행이 우려돼 온 곳이다. ●6300명은 2년 연속 적발 유형별로는 ▲2회 이상 매입 2만 8860명 ▲3000평 이상 매입 1만 2216명 ▲미성년 328명 ▲2회 이상 증여취득 1693명 ▲증여행위 2801명 ▲26개 개발사업지역에서 2회 이상 매도 1만 1597명이다. 특히 지난해 조사받은 사람 가운데 이번에 또 적발된 사람은 6316명이나 됐다. 조사기간 해당지역에서 토지를 매입한 개인은 17만 4829명,16만 972건, 규모는 2억 581만평이었다. ●1필지를 200번 쪼개 팔기도 이번 조사에서는 우리 사회에 성행하고 있는 편법거래 수법들이 낱낱이 드러났다. 지난해 7월부터 올 3월까지 땅을 사들인 미성년자는 모두 328명, 거래 건수는 364건, 매입 규모는 39만평으로 한 사람당 1189평이었다. 특히 서울의 6세 어린이는 충남 보령 일대 임야 3만 5000평을 6800만원에 매입했다고 신고했다. 건교부 등 관계당국은 신고가가 허위인지 여부와 세금 탈루여부를 조사 중이다. 부산의 8세짜리는 기업도시 후보지역인 경남 사천의 임야 1만평을 사들였다. 쪼개팔기도 성행했다. 전남 무안의 68세 노인은 무안 일대 농지 5만 7000평을 9개월 동안 200회에 걸쳐 쪼개 팔았다. 건교부는 이 가운데 상당수는 기획부동산이 땅을 덩어리로 사서 잘게 쪼개 팔아 차익을 낸 것으로 보고 추가 조사 중이다. 서울의 30대 A씨는 전남 무안과 영암 일대 임야 등 1만평을 22차례에 걸쳐 사들였고,50대 B씨는 21회에 걸쳐 김포 일대 농지 1만 6000평을 사 모았다. 증여를 가장한 탈법거래 혐의도 많았다. 충북 옥천의 80대 노인은 보은과 옥천 일대 농지, 임야 등 8만 8000평을 16차례에 걸쳐 증여했다. 반면 경기 양평의 29살 K씨는 양평 일대 농지와 임야 1만 5000평을 12차례에 걸쳐 증여받았다. ●최고 토지가격의 30% 벌금 이번에 통보된 사람 가운데 양도세와 취득·등록세 등 관련 세금을 제대로 내고 정상적인 거래를 했다면 제재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거래가격을 낮춰 신고했거나 위장 증여를 한 경우는 무거운 세금이 부과된다. 특히 토지거래허가지역 내에서 허가제를 위반했거나 위장증여시 2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토지가격의 최고 30%까지 벌금이 부과된다. 농지거래허가 없이 논을 취득하거나 위장전입 또는 남의 명의로 땅을 사들였을 때도 처벌 대상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땅값은 최고 10배 이상 오른 곳이 많아 세금을 추가로 물리더라도 차익을 남길 수 있어 벌금을 더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儒林(36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김성일이 기록한 대로 퇴계는 혼자 말을 타고 소백산에 올랐다가 여러 날 만에 돌아올 만큼 소백산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어찌하여 소백산을 그토록 좋아하였을까. 그것은 김성일의 표현처럼 ‘남악(南嶽)의 흥’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악의 흥. 이는 일찍이 주자가 남악에 올라 속세를 떠날 뜻을 시로 읊은 사실을 의미한다. 남악은 형산(衡山)의 별칭으로 중국 오악(五岳) 중의 하나이다. 호남성에 있는 명산으로 주자는 29살 때부터 33세 때까지 남악에 살면서 사묘(祠廟)를 관장하는 벼슬을 지냈다. 이때 주자는 남악에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공부의 본령(本嶺)’임을 깨닫고 세속을 떠날 결심을 하는 것이다. 형산에는 72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높고(1290m),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봉우리는 축융봉(祝融峯)이었다. 주자는 축융봉에서 산의 본령을 본 것이 아니라 학문의 본령을 본 것이었다. 학문의 본령이야말로 마음을 어지럽히는 세속을 떠나는 길임을 깨달은 주자는 축융봉에서 ‘축융봉을 내려오며 쓴 시(醉下 祝融峯 作時)’란 제목의 시를 짓는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만 리를 와서 기(氣)바람을 타니/끊어진 계곡, 겹친 구름에 가슴이 호탕해지네. 막걸리 석 잔에 호기가 일어/멋대로 읊조리며 축융봉을 날아서 내려온다.” 주자가 28살 때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남악에 칩거한 이후로 오직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듯이 퇴계 역시 48살 때 죽령고개를 넘은 이후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단호히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퇴계에 있어 소백산은 주자의 남악과도 같은 인생의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죽령 고갯마루에 앉아서 묵묵히 마음을 다잡아 결심하였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벼슬길에 올랐던가.34세의 늦은 나이로 첫 출사한 뒤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4개 아문(衙門)에서 총 29종의 벼슬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주자는 28세의 나이 때 과감히 퇴직하여 남악의 형산으로 올라가 속세를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주자에 비하면 나는 이미 15년이나 늦은 것이다. 아득한 시야 저편으로 굽이쳐 흘러내린 소백산은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휘황찬란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순간 퇴계의 머릿속으로 주자의 목소리가 천둥이 되어 울려 퍼졌다. “도가 있으면 반드시 완전히 태평해지기를 기다려서 나아갈 것이 아니오. 도가 없으면 또한 반드시 어지러워지기를 기다려서 숨는 것이 아니다. 도가 있다 함은 마치 하늘이 곧 새벽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아주 밝지는 않았어도 지금부터 밝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도가 없다 함은 마치 하늘이 곧 밤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아주 어둡지는 않았어도 지금부터 어둠을 향해 가는 것이니 모름지기 기틀을 보아서 행동하여야 한다.” 퇴계의 존경하는 스승 주문(朱門)의 육성은 사자후가 되어 퇴계의 뇌리에 내리 박혔다.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퇴계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주문의 말처럼 하늘이 새벽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아직 밝지는 않았어도 밝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더 이상 늦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차피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퇴계는 종자가 준 냉수를 단숨에 들이켜면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순간 퇴계는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 Q여사에게 물어보셔요 (4)

    사연 : 미스 K가 미워… 직원 40명쯤의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노총각「샐러리·맨」입니다. 내가 있는 사무실은 열 명쯤 직원이 있고 여자는「미스」K라고 하나 뿐입니다.「미스」K는 이 회사의 터줏대감 격인 모양인데 이 방 안에서는 과장 다음쯤으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29살이래요. 외모만 보아서는 별로「올드·미스」티가 나지 않는 이 여자가 하는 짓만은 여간「올드·미스」가 아닙니다. 나이는 나보다 겨우 한 살 더 먹은 처지에 어른 행세가 대단하거든요. 전화를 실수로 잘못 받는다든지 장부정리에「미스」가 있으면 일일이 타내서 망신을 주는 겁니다. 아무리 직위는 위라지만 그래도 여자인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요즘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도 싫고 그 여자만 옆에 있으면 가슴이 답답할 지경입니다. 속 시원하게 분을 풀어 볼 길은 없을까요. <서울 태평로 박생(朴生)> 의견 : 욕을 마구 해대세요 얼마든지 있지요. 「미스」K가 듣는 앞에서 욕을 마구 해대는 것은 어떨까요. 이를테면『내 친구 녀석의 사무실에는 말야 되게 똑똑한 여자가 한 명 있는데 말야』로 시작해서 그 여자의 죄상을 낱낱이 들어가며 빈정거리는 겁니다. 유치하다구요? 이런 때는 한껏 유치해져야 합니다. 게다가「올드·미스」아가씨 하나쯤 매혹시켜 꼼짝 못하게 하는 솜씨도 없는 당신이라면 그런 유치한 짓이 썩 잘 어울릴 것만 같은데요. 좀 덜 유치한 방법도 있지요. 수첩 하나를 마련하세요. 그리고 틈틈이 그 수첩에다가「미스」K의 욕을 잔뜩 써대 보시죠. 속이 좀 후련해질 걸요. 당신이 다른 곳에서 분을 풀고 나면「미스」K가 좀 덜 미워질 게고 또 그러면「미스」K의 태도도 조금은 달라지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안 그럴까요. <Q> [ 선데이서울 68년 10/13 제1권 제4호 ]
  • 암스트롱 “내 머리카락 몰래 팔다니”

    “감히 달에 인류 최초의 발자국을 남긴 사람의 머리를 훔치다니….” 미국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75)은 본인의 머리카락을 몰래 3000달러에 판 이발소 주인을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머리카락을 산 사람은 1일(현지시간) 머리카락을 돌려주지 않는 대신 구입 금액인 3000달러를 기부할 뜻을 밝혔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암스트롱은 오하이오주의 작은 마을 레바논에 있는 막스 이발소를 한 달에 한 번씩 이용했는데, 주인인 막스 시즈모어(오른쪽 큰사진·36)가 머리를 깎은 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모아 2004년 5월 3000달러에 판 사실을 알아내고 이발소 출입을 중단했다. 그의 머리카락을 산 존 레즈니코프는 유명 인물의 머리카락을 가장 많이 모은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레즈니코프는 자신이 소장한 에이브러햄 링컨, 마릴린 먼로, 아인슈타인, 나폴레옹 등 유명인의 머리카락에 100만달러의 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는 “내가 9살 때 암스트롱이 1969년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첫 발자국을 내디뎠던 감동을 기억한다. 암스트롱은 항상 나의 영웅 중 한 명이었다.”고 말했다. 이발소 주인 시즈모어는 머리카락을 판 사실을 인정했으며 암스트롱이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머리카락을 산 레지니코프는 반환을 거부했다. 이후 시즈모어는 암스트롱의 변호사로부터 머리카락을 판 것이 유명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오하이오주 법률을 어겼다고 주장하는 편지를 받았다. 암스트롱측은 이 편지에서 시즈모어가 머리카락을 돌려주거나 머리카락을 판 대가로 받은 금액을 기부하지 않으면 법적 행동을 취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이발소 주인은 이미 3000달러를 다 써버렸다고 밝혔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눈에 띄네~ 이 얼굴] ‘안녕, 형아’의 박지빈

    지난달 27일 개봉한 영화 ‘안녕, 형아’(감독 임태형ㆍ제작 MK픽쳐스)는 이 쬐그만 아이에 의한, 아이를 위한, 아이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아이의 시선을 따라 비로소 영화는 숨을 쉬고 생기를 찾는다. 박지빈(11). 초등학교 5학년짜리 이 꼬마 배우가 영화 개봉 첫 주 전국 31만 6705명(전국 194개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당당히 박스오피스 2위. 화제작인 송강호·유지태의 ‘남극일기’도, 연정훈·박진희의 ‘연애술사’도 이 꼬마의 눈물 연기에 무릎을 꿇었다. 박지빈은 어른 배우 뺨칠 만한 인상 깊은 연기로 작품 전체를 이끌었다. 갑작스레 형이 소아암에 걸리는 시련 앞에서 형과 또래의 다른 암투병 환자를 통해 새로운 ‘성장’을 경험하는 9살 말썽꾸러기 동생의 진심어린 고군분투를 실감나게 연기했다. 때문에 아역 배우가 주인공을 맡으면서 통상 생겨나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분위기는 이 영화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박지빈은 연기경력으로 봐도 ‘탈 어린이급’이다.2001년 뮤지컬 ‘토미’를 통해 데뷔, 악극 ‘모정의 세월’에 출연했으며, 지금까지 최진실 등 기성 톱스타들과 함께 스무 편이 넘는 CF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특히 SBS 드라마 ‘완전한 사랑’에서 불치병에 걸린 김희애의 아들로 출연,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기를 통해 아역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儒林(350)-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0)-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의 이 시는 일종의 선시(禪詩)이다. 퇴계가 노래한 대로 ‘다름없는 한 생각’이란 12살 때 발견한 ‘이’의 화두임을 알 수 있으며,‘이를 깨달아야만 마침내 성리학의 공부를 이룰 수 있다.’는 퇴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10년 동안 퇴계는 한결같이 ‘이’의 한 생각에 전념하며 비로소 근원과 마주쳤음을 노래하였는데, 노래 중에 나오는 태허(太虛)란 용어는 북송의 학자였던 장횡거(張橫渠·1020~1077)가 주장하였던 ‘기일원(氣一元)’사상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상적으로는 불교를 배척하였으며, 우주의 만유(萬有)는 기(氣)의 집산에 따라 생멸, 변화하는 것이며, 기의 본체는 태허로서 태허가 곧 ‘기’라고 설법하였던 송나라 유학의 기초를 세운 사상가였다. 장횡거의 ‘태허는 곧 기’라는 사상은 소강절(邵康節·1011~1077)의 태극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교의 역철학을 발전시켜 역(易)은 음과 양의 이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음과 양의 태극(太極)으로 주장하였던 수리철학(數理哲學)의 대가였던 것이다. 퇴계가 유교의 도를 깨달아 태허를 알아보았다고 노래한 것은 이미 19살 때 이들의 철학에 깊이 빠져 음과 양, 그리고 강(剛)과 유(柔)의 사원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이에서 파생되는 기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퇴계는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통해 이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때 심경을 퇴계는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가 19살 때 처음으로 ‘성리대전’의 첫 권과 끝 권 두 권을 얻어 시험 삼아 읽어 보았더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듯하여 숙독(熟讀)하기를 오래하여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비로소 학문의 길을 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학문의 길. 퇴계는 비로소 학문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찍이 공자가 논어에서 ‘아침에 도에 대해서 들어 알게 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자신이 득도(得道)하였음을 드러낸 말이었다. ‘성리대전’은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의 명을 받아 호광(胡廣) 등 42명의 학자가 편찬한 책으로 송나라와 원나라의 성리학자 120여명의 학설을 집대성해 놓은 것이었다. 퇴계는 장횡거와 소강절과 같은 성리학자들을 바로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은 일종의 성리학 대백과사전이었는데, 퇴계는 이 책을 통해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심안(心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얼마만큼 공부에 열심이었던가는 이 무렵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이 학문에 뜻을 두고 낮에는 쉬지 않고 밤에는 자지도 않고 공부를 하다가 드디어 고질을 얻어 지금까지 병폐(病廢)한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하였다. 학자들은 나를 따라올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의 기력을 헤아려서 잘 때는 자고 일어날 때는 일어나며, 때와 곳을 따라 자기 마음을 살피고 헤아리며, 이 마음으로 하여금 방일(放逸)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나처럼 병이 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 [어떻게 지내세요] 새앨범 선보이는 ‘수덕사의 여승’ 가수 송춘희씨

    [어떻게 지내세요] 새앨범 선보이는 ‘수덕사의 여승’ 가수 송춘희씨

    “이르면 다음달 중 새 앨범으로 팬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수 송춘희씨.‘인적없는 수덕사의 밤은 깊은데∼’로 시작되는 가요 ‘수덕사의 여승’으로 유명하다. 또 ‘할아버지 쌈짓돈’‘노랫가락 차차차’‘영산강처녀’ 등은 40대 이상에게는 추억의 가요로 불려진다. 아울러 현역 가수로 20년 넘게 ‘찬불가’를 부르고 있다. ●소년·소녀가장 돕기등 선행에도 앞장 가수활동 외에도 평소 남모르는 선행에 앞장서왔다. 우선 백련장학회(白蓮奬學會)를 14년 동안 이끌면서 소년소녀가장과 불우학생 등 5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지난해에는 한 불우학생을 서울대에 진학시키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두번째는 전국의 교도소와 군부대를 찾아다니며 교화활동과 가요보급을 수십년째 해오고 있다. 서울 중구 태평로의 프레스센터에서 송씨를 만났다.70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훨씬 건강해 보였다.“지난해 2월 위암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면서 때문에 작년 한해는 활동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건강을 회복한 올봄부터는 새로운 기분으로 활동을 재개했다고 부연했다. 특히 ‘아름다운 상주’(김점도 작사·작곡)라는 신곡을 녹음 중에 있어 6,7월쯤이면 팬들에게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새 앨범은 2년여 만이다. “군부대는 일요일마다 가고 있어요. 최근에는 백마부대와 기갑부대를 다녀 왔지요. 연등 만드는 법을 배워주고 재미있게 노래부르기 등 장병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버이날에는 서울 인근의 사찰에서 불우 노인들에게 무료로 점심식사를 제공했다. 송씨는 한때 소녀 가장으로 부모와 동생 7남매의 뒷바라지를 했으며 그러다 보니 결혼도 하지 못했다. 평북 영변에서 8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그는 해방직후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경기도 수원여고 재학시절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부모가 화병으로 병원에 나란히 입원해 집안사정은 더욱 어려웠다. ●“지난해 2월 위암수술… 새달 신곡 발표할 것” 이때부터 소녀가장이 됐다. 대학진학도 포기한 그는 19살때인 1956년 악극단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 위문공연도 65년부터 모두 네차례나 다녀 왔다. 이때 받은 출연료를 한푼도 쓰지 않고 지금의 서울 신촌집을 장만하는데 보탰다. 오로지 집안을 일으키는데 청춘을 다 보낸 셈.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한명은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치원 원장인 동생도 있고요. 막내 남동생은 탁구 국가대표 선수를 지내기도 했어요. 다들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 뿌듯합니다. 요즘에는 부모님이 동생들에게 ‘큰누나의 고희잔치는 너희들이 꼭 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송씨는 76년 미국 이민을 갔다가 83년 다시 귀국했다. 이때 미국 시애틀에서 반년넘게 행자생활을 했지만 너무 힘들어 다시 속세로 나왔다고 토로했다.83년부터 찬불가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단다. ‘수덕사의 여승’ 소재와 관련,“한 작가가 수덕사에 잠시 들렀다가 비구 주지 스님을 비구니로 착각해 글을 쓴 데서 비롯됐다.”고 귀띔했다. 지금도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그는 건강을 위해 매일 수영을 하며 일주일에 한번 정도 산을 오른다고 했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儒林(340)-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40)-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그러나 퇴계가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들러 아버지의 신위 앞에 홍패를 올리고 인사를 올린 다음 어머님 앞에서 큰절을 올리자 박씨부인은 이제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나라의 공복이니 받을 수 없다고 서로 맞절하여 예의를 갖춘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언행록은 기록하고 있다. “너의 벼슬은 주나 현과 같은 지방이 마땅하니 절대로 높은 벼슬에 나아가려 하지 마라.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않을까 두렵다.” 일찍이 퇴계는 젊은 시절 성균관에 유학을 하였던 적이 있었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이라 하여 그 무렵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퇴계는 23세 때인 청년시절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또다시 33세 때에도 잠깐 동안 성균관에서 주로 수행론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당시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극도의 혼란기였으므로 어지러운 정치의 영향으로 성균관에서까지도 도학을 기피하는 풍조가 생겨 소학(小學)과 같은 도덕적인 기초학문을 무시하고 사장(詞章)만 숭상하는 경박한 사습(士習)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장이란 ‘시가와 문장’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근본도리를 탐구하는 도학보다는 현란한 기교에 치우치는 일종의 수사학이었던 것이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옛 성현의 도학보다는 시를 짓고 문장을 놓는 풍류에만 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이러한 풍조에 물들지 않고 일상의 언어와 행동을 소학의 규범에 벗어남이 없게 하니 그 당시 동료학생들 가운데에는 퇴계를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만 퇴계보다 9살이나 연하인 김인후(金麟厚)만이 퇴계를 존경하고 상통하여 친하게 지낼 뿐이었다. 훗날 문과에 급제하여 뛰어난 문인이 되었던 김인후는 일찍이 퇴계의 사람됨을 꿰뚫어보며 퇴계를 부자(夫子)로까지 칭송하였다. 부패한 그 선비사회에서도 드물게 군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퇴계야말로 덕행이 높아 만인의 스승이 될 만한 부자라고 칭송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선생은 영남에서 빼어난 분이시다. 문장은 이백과 두보와 같으시며 글씨는 왕희지와 조맹보를 비긴다.” 김인후의 시처럼 퇴계는 마침내 등용문에 오름으로써 ‘영남에서 빼어난 사람(夫子嶺之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퇴계 자신이 고백하였던 ‘집안의 곤궁을 타파하는 유일한 생계책이었으며, 특히 늙은 어머니의 권유’때문이었지 그 자신이 원하던 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퇴계는 혼란한 정치와 부패한 관료들의 어지러운 정계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평소에 조광조를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조광조는 퇴계보다 19살 연상으로 퇴계가 19세 때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사림파의 거두였다. 퇴계는 행동하는 정치가로서의 조광조와는 달리 현실의 부정과 부조리에 정면으로 도전, 대결하는 개혁가가 아닌 정치란 제왕의 수덕에 의한 위민정치여야 한다는 유가 본래의 덕치, 즉 국민을 중심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주장하면서 임금의 모범적인 정심수기(正心修己)를 강조하고 있는 소극적인 경세론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퇴계는 정치가가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학문의 진리를 탐구하는 선비의 표상이었다.
  • [生生인터뷰] 예술의전당 공모 뽑힌 신진연출가 서재형 씨

    [生生인터뷰] 예술의전당 공모 뽑힌 신진연출가 서재형 씨

    올 들어 가장 주목받는 신진 연출가를 꼽으라면 단연 서재형(34)이다. 독특한 형식의 연극 ‘죽도록 달린다’(이하 ‘죽다’)가 지난 1월 문예진흥원 기획공연을 통해 연극계의 거목 오태석 연출가의 작품과 나란히 올라갔고,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에서 신개념 연극상을 수상했다. 앞서 지난해 12월에는 문예진흥원 지원 신진예술가에 선정되기도 했다. ●‘퓨전사극, 왕세자 실종사건’ 10월 공연 최근엔 예술의전당이 기획한 ‘자유 젊은연극 시리즈’에 ‘퓨전사극, 왕세자 실종사건’이 뽑혀 ‘연타석 홈런’을 날리고 있다. 더구나 예당측이 지금까지 연출가를 지명해 오던 것과 달리 처음으로 공모 형식으로 전환해 엄격한 심사를 거쳐 그의 작품을 선정했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그는 소감을 묻자 “얻어 걸렸다.”라는 표현을 썼다.‘죽다’의 공연 시기와 겹쳐 연습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이 선정돼 송구스럽다는 것.“대단히 감사한 일인데도 한쪽 구석에는 미안한 마음도 있어요. 딱 3초 좋았습니다. 일단 올 한 해 백수로 안 지내도 되니까.(웃음)” 하지만 뽑아준 심사위원들과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만만찮다. ‘퓨전사극-왕세자 실종사건’은 조선 아무 왕조 때를 배경으로 왕세자가 없어졌을 때 기뻐할 사람들이 누구냐는 가정에서 출발한 작품. 단짝인 한아름 작가가 썼다.‘죽다’에 이어 한 작가가 염두에 두고 있는 왕비 이야기 3부작 가운데 그 두 번째에 해당한단다. 극의 얼개를 20분으로 압축한 맛보기 공연은 강렬한 인상으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연출가에게는 생각과 실전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됐다.“‘퓨전사극’이라는 말은 지워야 될 거 같아요. 무대에 올려놓고 보니 상상력에 제한이 될 거 같더라고요. 가능한 한 극의 형태를 열어놓고 준비하고 싶습니다.” 오는 10월 11일부터 23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올려질 그의 작품은 가장 ‘모던한 사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요즘 사고를 하는 왕을 그려보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천성적으로 무거운 템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역동적인 음악과 움직임을 시도할 계획이다.“내관의 움직임을 생각하다 집에서 두 번 걷다가 한 번 쉬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힙합춤이 되더라고요.” 힙합춤 경연대회, 디제이들의 공연에도 가는 등 최신 트렌드 습득에 열심이다.“지금 연극 보는 사람들이 무엇에 열광하는지 알고 싶어요. 그래서 ‘젊은 연극’이란 타이틀에 맞는 작품을 올리고 싶고요.” ●29살 늦깎이로 연극계 진출 그는 29살 늦은 나이에 서울예대를 졸업해 중견 연출가 한태숙이 이끄는 극단 물리에서 실력을 쌓아왔다. 척박한 연극 환경에서 배고픔은 당연한 통과의례. 단돈 1만원이 없던 시절에도 ‘죽다’를 번듯한 극장에 올리고 싶은 마음만은 간절했다.“비싼 대관료에도 불구하고 아롱구지에 올렸어요. 한번은 관객이 67명이었는데 그 중 66명이 초대 손님이었던 적도 있었죠.” 엄청난 출혈이 있었지만 스스로 활동 이미지극이라 명명한 이 작품을 대중은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이것이 연극적 희망인가’ 등 평론가들의 찬사는 “우리가 이상한 걸 하고 있구나. 하지만 계속 이렇게 해도 되겠구나.” 하는 용기를 갖게 했다. ●무대올리는 작품마다 새로운 시도 “연습실이든 공연장이든 항상 어두운 곳에만 있어 실정을 잘 모른다.”고 빼던 그는 지금 연극계 침체에 대해 “현재 대중의 코드를 읽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자기 것을 하는데 항상 같은 방식으로만 하지 않았나 싶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연출 시절까지 합하면 지금까지 40여편의 작품을 했다. 어떤 작품이든 다시 무대에 올릴 때 한번도 이전의 것을 답습한 적이 없다.“‘죽다’도 한 5년쯤 뒤에는 안 띌 수도 있겠죠. 취향이 계속 바뀌니까. 앞으로 10∼15년간은 제 화법을 찾는 시간이 될 거 같아요.” 글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사진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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