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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태평양그룹 창업주 고 서성환(1924∼2003) 회장은 화장품업계의 신화가 됐다.‘미와 향을 파는 마케팅의 귀재’인 서 창업주는 어려서부터 개성에서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후 기업경영에서 개성상인의 맥이 면면히 흘렀다. 서 창업주는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태평양이 직접 운영하는 비영리 재단이 3개이며 후원 단체는 셀 수없이 많다. 신용과 근검절약을 가장 큰 밑천으로 삼는 개성상인의 기질,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윤리는 2세 경영으로 넘어온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업 태평양은 1945년 9월5일 창립됐지만 연원은 좀 더 거슬러올라간다. 태평양의 역사를 알려면 서성환 회장의 가족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서 회장은 1924년 7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부친 서대근(1890∼1973)씨와 모친 윤독정(1891∼1959)씨의 3남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 창업주 가족은 소학교 시절인 1930년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사를 했다. 개성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인 동현동에 정착했다.‘상인의 도시’ 개성 생활은 소년 서성환에게 이후 기업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개성에 정착한 가족들의 생계는 어머니 윤 여사가 책임졌다. 전 재산을 털어 조그마한 상점을 열고 잡화를 취급하다가 화장품 제조에 눈을 돌렸다. 윤 여사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 이웃으로부터 ‘여중군자’라고 불릴 만큼 활동적이고 사교적이었다. 인삼 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개성지방은 소득수준이 높아 우수한 품질의 동백기름이 잘 팔린다는 것을 간파한 윤 여사는 직접 동백기름을 짜 만든 머릿기름을 팔았다. 당시 서민들은 피마자 기름을 썼지만 상류층은 고가의 동백기름을 애용했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진 머리에 머릿기름을 자르르 바른 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이도록 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태평양 모체는 어머니의 ‘창성상점’ 동백기름에서 자신을 얻은 윤 여사는 차츰 사업영역을 확대했다.1932년부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미안수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어 판매를 시도했다. 또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혔다. 소년 서성환도 물건을 도매상에 배달해주는 등 잔심부름을 하며 가업에 참여했다. 당시 제조방식은 물론 가내 수공업이었다. 솥을 걸어놓고 그안에 물과 기름을 섞어 손으로 직접 젓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품질은 우수하다는 평을 얻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자신감을 얻은 윤 여사는 ‘창성상점(昌盛商店)’이라는 생산자 명칭을 표기했다.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 상품에 ‘창성당제품’‘오리지날’ 등을 표기했다. 가업에 참여한 소년 서성환의 경영 수업은 계속됐다. 보통학교시절부터 소년 서성환은 하루 끼니인 도시락 세개를 자전거에 싣고 해뜨기 전에 개성을 출발, 화장품 제조에 필요한 물건을 사오곤 했다.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1939년부터 화장품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거래 도매상에게 물건을 납품하거나 예성강 20리를 따라 형성된 상로(商路)를 따라 직접 팔기도 했다. 자전거로 화장품을 팔러 다니면서 유통에도 눈을 떴다.10대 소년 서성환은 개성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글리세린과 향료, 빈 병을 사는 일을 도맡았다. 창성상점의 제품은 1941년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3층 양옥의 김재현백화점에도 들어갔다. 백화점에 작은 코너를 개설, 자사의 제품뿐만 아니라 인기가 높던 다른 회사의 제품도 위탁 판매했다. 제조와 판매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제품도 함께 판다는 서성환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면서 화장품 제조법도 어머니 윤 여사로부터 직접 배웠다. 물과 기름의 혼합비율, 열을 가하는 강약 정도,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의 비율 등에 따라 화장품의 품질은 천차만별이었다. 화장품 유통에 이어 제조까지 현장 경험을 쌓았지만 스물한살이던 1944년 강제징용되면서 그의 화장품 수업은 중단됐다. ●‘블루오션’ 태평양으로 광복을 맞아 다시 개성으로 돌아온 청년 서성환은 화장품에 집중했다. 어머니가 세운 창성상점을 ‘태평양상회’로 이름을 바꿨다. 태평양만큼이나 큰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웅지와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도전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광복정국의 혼란속에서 서성환은 1947년 개성을 떠났다. 서울로 이주, 회현동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청년 서성환은 당시 누님 한분이 내려오지 못한 이산가족의 한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했다. 이 즈음 부인 변금주(77)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모조품과 위조 화장품이 기승을 부리던 50년대 서성환은 “남보다 월등한 제품을 만들어야 제 값에 팔 수 있다.”며 시종일관 품질을 강조했다. 이때 내놓은 메로디크림은 태평양 1호 제품의 영예를 안았다.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했지만 6·25가 터졌다. 그는 피란길에도 화장품 원료를 싣고 부산으로 내려갈 정도의 집념을 보여줬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1951년 순식물성의 ABC포마드를 시장에 내놓았다. 대단한 인기를 끌며 화장품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다. 서성환 회장이 직접 작명한 ABC포마드는 60년대까지 대히트 브랜드로서 태평양의 성장 기틀이 됐다. 청년 서성환은 환도 이후 1954년 후암동시대를 열면서 기술력에 대한 갈증에서 장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었다.1953년 처음 열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등을 통해 화장문화가 태동한 것도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향기나는 밥, 그리고 최초의 연속… 서성환은 후암동 시절 잘 팔리던 화장품을 구해 직원들과 함께 실험을 거듭했다. 생산직 여종업원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었다. 가내 수공업에 실험기구가 부족한 것은 당연지사. 향료가 밴 솥과 물바가지를 이용해서 밥을 하면 향내 나는 밥이 되고, 크림을 만들었던 도구를 쓰면 구리무 향밥이 됐다고 한다. 56년 용산으로 이전한 이후 성장가도에 들어섰다. 서성환은 57년부터 해마다 기술자들을 독일과 일본에 유학시켰고,58년엔 동양 최초로 고성능 미분기를 도입했다.59년 주식회사 체제로 출범했고 프랑스 코티사와 기술제휴를 통해 장업사의 새 장을 열었다.60년 장업계 최초의 해외방문,64년 오스카 브랜드로 최초의 화장품 수출, 당시 획기적인 방문판매제와 아모레화장품 개발 등에 힘입어 급신장했다.68년 매출이 14억 2800만원으로 창업 이후 처음 10억원대를 돌파했다. 당시 태평양의 품질은 어느 정도였을까?지난 71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화장품 콘테스트에서 3개의 금상을 수상했다. 화장품 제조 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74년 장업계 최초의 소비자과를 신설, 정부의 소비자 기본법안보다 3년 빨리 소비자 중심을 지향했다. 순항하던 태평양은 90년대 들어 무한경쟁시대를 맞았다. 서 창업주는 창업 50년을 맞은 95년을 ‘세계화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을 다짐했다. ●태평양에 순항중인 2세 경영 서 창업주는 개성상인 특유 기질을 두 아들에게 물려줬다. 서 창업주는 지난 82년 장남 영배(49)씨를,87년 차남 경배(42)씨를 입사시키면서 2세들에게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영배씨는 태평양화학에 입사해 도쿄 및 뉴욕 지사를 거쳐 태평양증권 부사장 태평양종합산업의 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태평양개발 회장으로 기업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영배씨는 태평양개발을 연매출 1000억원대의 중견 건설업체로 키웠다. 차남인 경배씨는 재경본부를 시작으로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과감한 구조조정을 지휘했다. 태평양증권·태평양패션·프로야구단 돌핀스·여자농구단 등 계열사를 정리했다.97년 3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태평양에 2세 경영의 배를 띄웠다. 지난해 매출은 1조 1053억원. 후계작업이 부드럽게 진행되던 2003년 1월 장원 서성환 회장은 영면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기업가 태평양은 해마다 50억원 가량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여성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여성에게 되돌려준다.’는 취지에서 주로 여성의 삶의 질 향상에 집중하고 있다. 이윤의 사회환원은 기업윤리 이전에 창업주 서성환 회장의 소신이라는 게 한 측근의 설명이다. 그는 “창업주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돈을 버는 게 바로 우량기업’이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말했다.‘불쌍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후덕함도 있었다. 그러나 창업주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는 개성상인의 ‘짠돌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서 창업주는 지난 63년 중앙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성환 장학금’을 만들었다. 중앙대 최초의 외부장학금이다. 당시의 기업가치고는 사회적 책무를 빨리 깨달은 편이었다. 첫 수혜자는 리대룡(64)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이후 75년부터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학업 성적이 좋은 여고생 9700여명에게 17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지난 9월부터 태평양학술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꿔 학술연구사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성들에게 유방은 모성의 상징이자 여성답게 해주는 상징적인 기관이다. 여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태평양은 2000년 9월 한국유방건강재단을 만들었다. 태평양이 전액 출자한 재단은 국내 최초의 유방암 전문 비영리 공익재단이다. 지금까지 1만 2000여명의 여성들에게 수술비를 지원하거나 무료로 검진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회 환원은 태평양이 출연한 재단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2003년 6월 서 창업주가 타계한 다음 태평양 주식 7만 4000주와 이익배당금 전액 등 50억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전달했다.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아들 서경배 사장으로 이어졌다. 서 사장은 선친의 고향이 북한인 것을 감안, 북한 어린이와 여성을 돕기 위해 유니세프에 지난해와 올해 각각 1억원을 기부했다. ■ 오늘의 태평양 일군 3인방 오늘날의 태평양을 일군 데는 창업주 서성환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한 3인방이 있다. 태평양의 사사에 남을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들은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재인식시키고, 국민 생활양식을 한층 높인 신화 창조의 주역이다. 오원식(69)전 부사장은 40년이 넘게 입에 오르내리는 브랜드 ‘아모레’를 1961년 작명했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가곡 ‘아모레미오(난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따왔다. 상금으로 당시 거금인 1만원(당시 월급 7000원)을 받았다. 오 전 부사장은 1967년부터 한방미용법을 연구, 지난 73년 인삼 사포닌을 이용한 화장품 아모레 진생삼미를 탄생시켰다. 진생삼미는 브랜드 진화를 거듭하다가 가장 한국적인 명품 ‘설화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설화수는 단일 브랜드로 매출이 2000년 1000억원을 달성했으며, 지난해에는 국내 최초로 3000억원을 돌파했다. 화장품 사상 유래가 없는 기염을 토했던 브랜드다.82년 대한화장품학회 회장을 지낸 오 부사장은 87년 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 기술개발에 힘썼다. 이후 90년대 초까지 연구부문을 총괄하면서 태평양 40년 연구와 생산 분야의 산증인으로서 화장품 기술의 과학화에 큰 획을 그었다. 그 어렵던 50년대의 태평양 생존 기틀을 닦은 데는 구용섭(81)초대 연구실장의 공을 빠뜨릴 수가 없다. 좋은 원료 확보를 위해 암거래 시장에서 발품을 팔았다. 서울 환도이후 후암동의 가내 수공업 시절의 ‘향기나는 밥’과 ‘구리무밥’을 먹으면서도 제품개발을 진두 지휘했다. 이같은 노력 덕분에 태평양은 독자적인 기술 개발과 화장품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발판을 마련했다.68년 한국화장품 화학자회 창립회장에 취임,80년까지 회장을 지내면서 한국의 화장품 발전에도 공이 크다. 머리를 감을 때 비누에서 샴푸로 바꾸게 한 사람이 김창규(66) 고문이다. 프랑스 파리 이과대학 연구소의 실장으로 재직중 태평양에 스카우트됐다. 그가 73년 개발한 브랜드 ‘타미나’는 7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 상품이 됐다.78년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화장품학회 국제회의에서 인삼사포닌이 모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논문을 발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김 고문은 80년대 태평양의 생활용품 사업을 일궜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리도 푸로틴 샴푸는 시장 점유율 70% 이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비누로 머리를 감던 국민들의 생활양식을 샴푸로 머리를 감게 바꿨다.88년 가정용품을 연구하는 기술연구소장과 92년 태평양중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91년부터 대한화장품학회장을 연임하면서 화장품학계 발전을 위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chuli@seoul.co.kr ●정·관·재계로 연결된 화려한 혼맥 창업주 서성환 회장은 1947년 변금주씨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 4녀, 송숙(58), 혜숙(55), 은숙(52), 영배(49), 미숙(47), 경배(42)를 두고 모두 성혼시켰다. 서 창업주의 사돈가는 한마디로 쟁쟁한 집안들이다. 정·관계를 비롯해 기업인과 언론인으로 인연이 이어진다. 방우영(77)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비롯해 신춘호(73) 농심그룹 회장, 최두고(84) 전 국회의원 등의 기업인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을유문화사 정진숙(93) 회장, 최주호(작고) 전 우성그룹 회장, 박세정(88)대선제분 회장과는 혼맥을 쌓았다가 끊어졌다. 서 창업주는 또 사돈가의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통해 정재문(69) 대양산업 회장(전 의원), 신춘호 농심 회장을 통해 서봉균(79) 전 재무장관과는 ‘사돈의 사돈’으로 간접 혼맥을 이루고 있다. 김치열(84) 에이오에스 회장(전 법무·내무장관)과는 신춘호 농심 회장을 거쳐 박남규(85)조양상선 회장을 통해 연결된다. 서 창업주는 이같은 순환 혼맥을 통해 김일환(작고) 전 내무장관, 정운갑(작고) 전 농림부 장관, 김영생(작고) 전 의원, 김도창(작고) 전 법제처장 등 정·관계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이같은 현상은 서 창업주 특유의 신중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는 자녀 혼사를 사람됨됨이를 중시하여 중매 형식을 택한 서 창업주의 성격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돈가의 ‘유명세’와 관련해 정략적이라는 세인의 오해를 받기 쉬우나 태평양측은 이를 극구 부인한다. 정관계의 발판을 만들 필요도 없었거니와 ‘정경유착’의 시선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서 창업주 측근의 설명이다. 관계(官界)의 집안과는 모두 현직에서 물러난 뒤 맺어졌고, 재계 인사들과는 업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대부분 양쪽 집안 가장들의 친분으로 혼사가 이뤄졌다고 전한다. 혜숙씨는 이화여대 사회생활과 출신으로 김일환씨의 3남인 의광(56)씨와 지난 74년 결혼했다. 김일환씨는 6·25전쟁 당시 국방차관을 역임한 전형적인 무관 출신으로 상공·내무·교통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의광씨는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태평양 계열사의 장원산업 회장으로 활동하다 물러났다.4명의 사위 가운데 유일하게 장인 회사의 경영에 참여했다가 서울 인사동에서 목인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공부하고 있는 근종(29)씨와 LG전자에 다니는 우종(27)씨를 두고 있다. 3녀 은숙씨는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씨의 차남인 상용(53)씨와 지난 77년 결혼했다. 상용씨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은숙씨와 결혼, 미국에서 7년간 수련의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현재 고려대 의과대학장으로 재직중이다. 부부에겐 ㈜태평양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환석(27)씨와 미국에서 학업중인 양희(23)씨 등 1남1녀가 있다. 서 창업주의 두 아들인 영배씨와 경배씨의 혼사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장남인 영배씨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기 직전에 이미 그룹경영에 참가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수료한 후 증권회사로 자리를 옮겨 90년도 태평양증권 부사장을 거쳐 태평양개발 회장을 맡고있다. 영배씨는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의 1남3녀 가운데 장녀인 혜성(45)씨와 지난 83년에 결혼했다.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재원인 혜성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마친 후 조선일보에 입사,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서씨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혜성씨는 태평양학원(성덕여중·성덕여상)의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영배씨 부부는 2남1녀를 두고 있는데 모두 학생이다. 차남인 경배씨는 지난 90년 11월, 농심 신춘호 회장의 막내딸인 윤경(37)씨와 화촉을 밝혔다. 서 창업주와 신춘호씨는 같은 용산구 관내에서 평소 자주 만나 인사를 나누던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이 훗날 사돈으로 연결된 것. 경배씨는 경성고·연세대 경영학과를 마친 뒤 미국 코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수재로 87년 태평양화학 과장으로 그룹에 첫발을 내디뎠다.90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 실장을 지내는 등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및 대한화장품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경배씨는 학생인 두딸 민정(14), 호정(10)을 두고 있다. chuli@seoul.co.kr ■ 故서성환 회장의 차사랑 “기다리는 시간의 맛도 있고, 잔의 맛도 있고, 차 맛도 있다.”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을 모신 회의에서 손수 차를 우려드렸던 서경배 사장의 회고담이다. 요즘 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전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상상력을 뛰어넘는 초스피드 시대에서 여유를 찾아주는 음료이다. 철학이 담긴 고급 문화로 이해된다. 이런 차가 화장품 회사 태평양과 어떻게 이어졌을까? 서 창업주는 60년대 일본 등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 나라 고유의 차를 대접받았다. 일본 거래처를 찾았을 때 가루차가 늘 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가 고작이었다. 특히 서 창업주는 일본 거래처 사람들이 고려·조선왕조의 다구(茶具)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에 차에 관심을 기울여 70년대 후반부터 녹차사업을 시작했다. “차밭을 조성하되 반드시 불모지를 개간해야 한다.”80년 녹차밭을 구상하면서 서 창업주는 이렇게 마음먹었다. 당시 차밭 개간은 무모한 사업으로 비쳐졌다. 80년대 초 우리나라는 차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부족한 전문인력과 제주도 땅의 척박함 등 그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았다. 골프장을 짓는다거나 땅투기를 한다는 등의 오해까지 받았다. 축적된 기술과 자료도 없었다. 주위에서는 회사 전체가 어려워질 것이라며 모두 만류했다. 그러나 서 창업주는 뚝심을 발휘해 밀어붙였다. 대한농구협회 회장 시절인 80년 중국을 방문, 공안(公安)을 설득해 황제차로 유명한 용정차(龍井茶)의 고향 항저우를 둘러봤다. 차가 거대한 산업임을 확인했지만 차 박물관은 그저 형식만 갖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해결의 실마리는 우연히 풀렸다.90년대 초 사업을 위해 찾았던 그는 미국 하와이의 파인애플농장 안에 있는 돌(Dole)사의 파인애플하우스, 즉 파인애플박물관에 들렀을 때 무릎을 탁 쳤다. 그러나 겨우 손익분기점에 도달할까말까 하던 차사업을 차박물관으로 견인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차박물관은 가슴에 고스란히 묻어두었다. 말년, 몸이 쇠약해진 서 창업주는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머물면서 파인애플하우스를 가보곤했다. 지난 99년 아들 서경배 사장이 부친 문병을 위해 하와이에 들르자 그는 짐을 풀던 아들을 다짜고짜 차에 태우고 돌사의 파인애플농장으로 데려갔다.“바로 이거야, 이렇게 만들어봐라.”와병중이던 아버지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이렇게 해서 설록차박물관 오’설록이 탄생했다. 지난 2001년 9월 남제주군 안덕면 서광리에 문을 연 오’설록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찻잔 등 다구가 잘 진열되어 있다. 차에 관한 명상의 최적 공간으로 소문나면서 연간 30여만명이 찾는다. 장원 서성환의 정성과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chul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뉴라이트 본류, 한나라와 거리”

    “뉴라이트 본류, 한나라와 거리”

    최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뉴라이트의 한 축에 있는 자유연대의 신지호 대표는 10일 “뉴라이트의 본류는 한나라당과 거리를 두고 때로는 매서운 비판도 할 것이다.”고 밝혔다. 신 대표는 이날 한나라당 ‘새정치수요모임’이 주최한 ‘한국 정치의 새로운 비전을 찾는다.’라는 토론회에 참석, 이같이 말하고 “정당은 가치집단이어야 하는데 한나라당은 이익집단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 유력 대권 주자인 박근혜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등이 최근 뉴라이트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언급이 나와 주목된다. ●참여정부 정책중심 국정미숙 지적 이날 토론회는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제안 이후 화두로 급부상한 ‘87년 체제’와 이후 정부의 성격 규정, 지역주의·개헌·선거구제 개편 등 우리 정치의 굵직한 사안을 조망한다는 의미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87년 이후 한국 정치는 절차적 민주화는 이뤘지만 권위주의적 국정 운영, 정치부패 온존, 분열적 지역주의 등이 한계였다.”며 “반면 참여정부는 민주·수평적 국정운영으로 발전했지만 정책중심의 국정운영에서는 부진했다.”고 평가했다. ●개혁지상주의서 실용주의로 전환 촉구 이내영 고려대교수는 “역대 정부는 ‘열망과 실망’사이클이 반복돼 레임덕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한 뒤 참여정부에 대해서 ‘모험주의’라고 규정한 뒤 “탈권위주의, 깨끗한 정치 정착 등의 성과에도 불구, 지나치게 급진적 개혁목표 제시와 실현 전략 부재, 국정운영 우선순위 잘못 설정 등으로 민심을 잃었다.”며 개혁지상주의 대신 실용주의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는 “지역감정의 원조는 87년 대선에서 호남표만 모으면 당선된다는 ‘4자 필승론’을 주창한 김대중 선생”이라고 지적했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부처님 손가락뼈사리 국내 첫 공개

    부처님 손가락뼈사리 국내 첫 공개

    지난 1987년 중국 법문사에서 발견된 세계 유일의 부처님 손가락뼈 사리인 ‘불지사리´가 한국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중국과 타이완·홍콩 등 중화권이 아닌 해외에서 열리는 첫 일반 친견행사다. 불지사리 한국이운 봉행위원회는 최근 중국불교협회와 ‘부처님 진신지골사리 친견 및 지하궁 유물 한국 특별전’조인식을 갖고, 서울 올림픽 펜싱경기장(11월11∼12월3일)과 부산 BEXCO 제1전시장(12월8∼20일)에서 일반인들이 직접 부처님 불지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행사를 마련했다. 봉행위원회 관계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9대 기적이자 중국 최고 국보인 불지사리를 한국으로 이운, 일반인들이 볼 수 있게 됐다.”면서 “구슬 같은 일반 사리와 달리 2549년 전 부처님 진신이 한국을 찾아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불지사리는 기원전 485년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7일간 다비식에서 남은 손가락뼈로, 제자들이 불법을 전하러 중국에 갈 때 함께 옮겨진 뒤 법문사 터에 묻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후한 환제가 불탑과 함께 지하궁전을 짓고 불지사리를 보관하다가 1987년 탑이 무너져 보수하는 과정에서 1000여점의 지하궁 보물과 함께 발견됐다. 중국 황실·지도층 인사들만 친견하다가 2002년과 2004년 타이완·홍콩에서 첫 일반 친견이 이뤄졌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노혜경 ‘노사모’대표“집권욕보다 정파 정체성 찾길”

    노혜경 ‘노사모’대표“집권욕보다 정파 정체성 찾길”

    “재야파, 안개모(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에 부탁한다. 책임을 대통령에게 돌리지 말고 국회에서 의원들이 할 일이나 해달라.” 10·26 재선거 전패 이후 열린우리당 내 계파들이 친(親)노무현 대통령파와 반노(反盧)파로 나뉘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1일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의 노혜경 대표가 최근 정국을 보는 노사모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최근 노 대통령을 거세게 몰아붙인 재야파와 안개모를 비판했다. 다음은 노 대표와의 전화인터뷰 일문일답 요지. 최근 여당 계파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당이 혼란스럽고 합의 안 되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 필연적으로 가야 할 단계라고 본다. 진통도 필요하다. 정파 갈등이나 계파 갈등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처리 방법이 세련되지 못한 것은 아쉽다. 각 정파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을 좀더 선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차기 대권에서 승리하겠다면 ‘왜 이겨야 하는지’ ‘자신들이 정권 잡는 것이 어떻게 국가에 이익이 되는지’ 등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영남쪽 선 표 늘어… 의원들 연정 인식부족 안영근 의원의 ‘대통령 탈당’ 발언 등 대통령에 대한 최근의 비판 움직임을 어떻게 보나. -동의할 수 없다. 안 의원은 대연정 때문에 (재선거에서) 열린우리당 지지도가 떨어졌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데이터로 보면 영남쪽에서는 표가 늘었다. 대연정 제안이 밑바닥 민심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했다.4대0 패배는 온 국민이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재·보궐 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하기 쉽다는 것은 1987년 선거 이후 증명된 것이었다. 그런 시스템을 바꾸려는 노력에서 대통령은 대연정을 제안하고 선거구제를 바꾸자고 했는데 당내의 인식 공유가 부족했다. 재야파와 안개모에 대한 비판 성명이라도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노사모 내부에서 나오는데.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아직까지 성명 낼 정도는 아니다. 재야파와 안개모에 부탁한다. 국회에서 의원들이 할 일이나 해달라. 책임을 대통령에게 돌리지 말라. ●노대통령 위임받은 것 잊지 않았으면 대통령이 내년 초 ‘내 진로’에 대해 밝히겠다고 했는데. -진로라는 것을 확대해석 안 했으면 좋겠다. 자리 내놓느냐는 것이 아니라 국가 진로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 대통령은 물러나라는 말에 흔들리지 말고 ‘언론에 맞서고 인습과 관행에 맞서 어젠다를 이끌 수 있는 정치세력이 대통령이라는 것, 대통령은 포괄적으로 위임받은 것이 있다는 점’ 등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시론] 상수원 수질기준 다시 조정을/전상호 강원대 환경학 교수

    [시론] 상수원 수질기준 다시 조정을/전상호 강원대 환경학 교수

    그동안 정부는 수도권 상수원인 팔당호 수질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1998년 ‘한강수질개선대책’ 수립시 팔당호의 2005년도 목표수질은 생물화학적 산소요구량(BOD) 1ppm으로 정하였으나, 현재의 수질현황으로 미뤄볼 때 이 목표는 달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BOD란 물에 들어 있는 유기물질을 미생물이 분해시킬 때 소비하는 산소의 양으로 이 수치가 높으면 그만큼 오염도가 높다는 말이다. 하천수에서 BOD 1ppm이란 인간에 의해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자연적인 조건에서 관찰되는 유기물의 자연함유량 지표로 사용되는 수치이다. 그런데 우리는 팔당호의 수질관리 목표를 BOD 1ppm 이하의 자연조건에 가까운 수질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천 유역에 인구가 많고 고랭지농업 등 집약적 농업이 발달한 팔당호의 현황을 감안할 때 목표수준을 너무 높이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뿐만 아니라 BOD 1ppm을 상수원수 1급으로 설정하여, 그 외의 물은 상수원으로 부적합하거나 상수원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물로 잘못 인식될 뿐 아니라 양질의 물을 보유한 지역도 수질개선에 과잉 투자를 유발함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수자원의 질을 등급으로 표현하는 국가도 여럿 있지만 BOD 1ppm까지를 단일 등급으로서 1등급으로 지정된 사례는 볼 수 없다. 영국은 2ppm까지를 1등급, 프랑스는 3ppm까지, 일본은 자연수의 개념으로 1ppm까지를 1-A 등급,2ppm까지를 1-B등급으로 설정하였다. 독일은 BOD 대신 총유기탄소량을 도입하여 2ppm까지를 1등급으로 하고 있다.1990년대 초에 일어난 여러 수질오염 사고는 국민들의 환경의식을 높이고, 정부의 환경보전기능을 강화하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수질관리 목표를 제시하여 다른 나라에서는 1등급의 양질로 분류되는 물을 보유하고도 수질에 대해 불신하거나 불안해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수질등급 기준은 1987년 제정되어 일부 수정되었으나 아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는 산업화 초기 단계로 오염물질의 종류와 특성이 지금보다 단순하여 BOD 중심의 상수원수 관리가 정당하였을 수도 있고, 실제적으로 당시 BOD 1ppm 수준의 물이 상당부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BOD 1ppm의 물이 1급수로 지정된 이후 30여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 사회는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오염물질은 BOD와 관련이 큰 생활계 유기물뿐만 아니라 산업시설에서 유래되는 유해화학물질, 즉 인체에 직접 해를 미치는 물질이 급격히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BOD 중심의 수질기준등급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1등급의 물만 상수원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고,2등급의 물은 무언가 오염물질이 많이 들어있는 나쁜 물로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3등급의 물은 수돗물의 원료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 현재의 팔당호 물은 지금보다 BOD가 1.5배쯤 높아져도 영국·독일·일본·프랑스에서는 1등급의 물이다. 한국인의 높은 환경인식과 다수의 전문가를 확보한 시민단체의 전문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문제 인식은 큰 공감을 얻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고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BOD 1ppm 달성에 노력할 것이 아니라 생태계와 인간의 건강을 우선하는 상수원 관리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그 첫 과제로 수질환경기준에 건강관련 항목을 확대하고, 생태계의 건강성을 평가하는 종합적 기준을 마련하여 이를 국민이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하고 홍보하여야 할 것이다. 전상호 강원대 환경학 교수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원그룹-김재철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원그룹-김재철 회장家

    “김재철(70) 회장은 자신을 장보고라고 생각하는 몽상가였다. 김 회장이 서울 농대를 포기하고 부산수산대를 지원한 것은 어쩌면 바다에 대한 동경이 아니면 힘든 선택이었을 것이다. 거칠고 험한 바다를 꿈의 대상으로, 기업의 대상으로 삼은 기업인은 우리 사회에 드물다.”소설가 최인호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 원양어선을 타고 5대양을 주름잡던 마도로스 출신의 김 회장에 대해 건전하고 꿈이 있는 몽상가라고 평했다.2000년 당시 해상왕 장보고기념사업회를 이끌던 김 회장은 최인호씨에게 장보고를 소설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최인호씨는 장보고가 흥미있는 인물이지만 권력을 꿈꾸다 암살(삼국사기)당했던 만큼 내키지 않았지만 김 회장의 설명을 듣고 장보고에 깊이 빠져 소설 ‘해신(海神)’을 쓰게 됐다. ●바다와의 인연…장보고를 꿈꾸며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벤처 비즈니스맨의 전형이다. 서울대 입학을 마다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좇아 바다 인생을 택했기 때문이다. 성실과 불굴의 투지, 그리고 개척자 정신으로 바다와 싸워 성공을 거뒀고 식품가공업과 금융부문 등으로 그룹을 키워내며 자신의 꿈을 이뤘다. 김 회장의 삶은 이처럼 바다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1935년 전남 강진 농촌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큰아들이 잘 돼야 한다는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에 따라 동생들 대신 학교를 다닌 셈이다. 어린 동생들은 후에 김 회장이 학비를 대주었지만 기대와 책임감을 한몸에 안고 유년시절을 보냈다. 걸어서 두 시간이 족히 걸리는 강진농고를 결석 없이 다니면서 우등생 자리도 놓치지 않았다. 진로를 고민하던 고3 시절.“바다는 무진장한 자원의 보고다. 우리 젊은이들이 무궁무진한 자원의 보고인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이끌려 망망대해로 인생의 나침반을 돌렸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계기로 그는 수산대에 진학해 바다로 나가기로 했다. 당시 서울대 농대에 장학생으로 입학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김 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시골 학교에서 서울대에 들어간다면 큰 경사인데 갑자기 지방에 있는 뱃사람 학교에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에서 반대가 많았습니다. 또 졸업하고 나서 배를 탈 때도 장애가 많았습니다. 정식 학부 졸업생이 배를 탄 것은 제가 처음이었거든요. 당시 수산대 졸업생들은 수산청이나 수산업협동조합 같은 관계기관에서 근무하거나 교사가 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때 저도 여수수산고 교장으로 계시는 고등학교 은사로부터 교사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양어선을 타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백면서생의 객기쯤으로 받아들이는 듯했습니다. 결국 항해중에 사고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겨우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참치 잘 잡는 마도로스’ 1958년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원양어업을 시작한 뜻깊은 해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 첫 원양어선인 ‘지남호’의 승선자이기도 하다. 기업가로 변신하기 전 김 회장은 8년간 실제로 마도로스 생활을 했다. 항해사로 시작한 뱃사람 생활에서 곧 능력을 인정받아 3년 만에 ‘지남2호’의 선장이 됐다. 파격적인 승진이다. 다른 배보다 빨리 만선을 기록한 데 대한 보상이었다. 그때부터 국내외 원양어선 업계에서 그는 ‘참치 잘 잡는 선장’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나라 수산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각오로 배를 탔고 한 마리라도 더 잡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출어에 나섰다.”면서 “고기떼를 찾아 바다를 헤맬 때나 조업을 앞둔 새벽이면 목욕재계를 하고 기도를 드리곤 했다.”고 강조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뒤의 일은 신의 섭리에 맡긴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신조로 삼았던 마음 가짐 때문인지 승승장구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대충대충’‘괜찮아’다. 1964년 고려원양 수산부장으로 스카우트돼 물품판매, 차관업무, 선박도입 등 수산업 관련 업무를 익혔다. 당시 원양어선이 잡은 참치는 대부분 현지에서 수출됐는데 그때 외국상선들과 거래하며 쌓은 신용은 나중에 창업할 때 큰 도움이 됐다. 1969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조업과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동원 산업을 창업했다. 당시 사업 밑천은 1000만원. 배는 일본 기업에서 공짜로 빌렸다. 일본에서 어선 구입비로 37만달러의 차관을 도입했는데 담보나 정부·은행의 지불보증 없이 신용만으로 빌린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10여년간 쌓아온 신용의 결과였다. 사장이 된 뒤에도 그는 직접 배를 몰고 고기잡이에 나섰다.‘참치 잘 잡는 선장’이라는 별명이 무색치 않게 동원산업의 원양어선은 월등한 어획고를 기록했다. 창업 2년만인 1970년 외화 획득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과 수산청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70년대 초 몰아닥친 1차 석유파동은 동원산업을 비롯해 모든 원양어선 업계에 타격을 주었다. 불황으로 도산하는 기업체가 속출하는 가운데 감원·감량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동원은 오히려 투자를 늘리는 등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일본에서 4500t급 초대형 트롤어선을 구입했다. 당시로서는 큰 모험이었지만 그는 바다생활을 통해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배를 타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만 해도 기상정보가 정확지 않아 예보없이 폭풍우를 만나는 일도 많았지만 바람이 온다고 일일이 피해 다니다보면 고기를 잡을 수 없다. 배를 삼킬 듯한 거대한 파도와 싸워 이기고 났을 때처럼 감격스럽고 벅찬 희열도 없다. 폭풍우와 맞서 싸운 경험들이 인생을 성장시켰고 여물게 해준 것 같다.” 그는 해양에 관한 풍부한 경륜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85∼91년 한국수산업 회장,90∼92년 원양어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식품과 금융업으로의 확장 다른 원양회사들이 낡은 배를 가지고 ‘본전뽑기’식 조업을 하는 동안 동원은 조업을 끝낸 선박은 현지에서 매각하고 최신형 장비를 갖춘 선박을 구입하는 공격적인 경영으로 업계 선두주자가 됐다.30여척의 원양어선과 함께 연간 10만t의 어획량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 수산업체로 키운 것이다. 동원산업에서 참치캔을 내놓으며 식품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2년. 다랑어란 본명을 가진 참치는 참치의 일본명인 ‘마권(眞黑)’에서 ‘참(眞)’을 따고 우리나라 생선 대부분의 이름처럼 끝에 ‘치’를 넣어 참치로 부른 것이 유례가 됐다. 참치잡이는 그가 배를 타던 지난 1958년부터 시작됐지만 참치 가격이 비싸고 일반인들에게 낯선 고기여서 전량 수출됐다. 그는 “1981년 하버드대학 최고경영자 코스에서 몇달 공부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가 되면 참치통조림을 먹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그럼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참치통조림을 먹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참치캔을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당시 어획고 전량을 일본·태국 등 외국에 전량 수출하다 보니 가격 결정권이 전혀 없었다. 한국에서 소비가 된다면 동원의 힘을 키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내 다른 업체들이 참치통조림을 만들어 팔다 실패한 뒤의 도전이었지만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참치가 원래 우리나라 근해에서 잡히지 않는 고기라 낯설기 때문에 통조림에 참치 모양을 그려 넣고 텔레비전 광고를 시작했다. 등산로 입구에서 참치통조림 시식회를 하는 등 참치를 알리는 데 총력을 쏟았다. 출시 이후 4∼5년간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88올림픽과 함께 국민 식품으로 자리잡으면서 동원은 명실공히 식품 업계 강자로 부상했다. 동원 참치캔은 국내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식품업을 시작한 1982년. 김 회장은 증권업에도 뛰어들었다. 역시 하버드대학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공부하며 들었던 얘기가 동기가 됐다. 하버드대학 MBA출신들이 어떤 분야에 주로 취업하는가를 조사해 봤더니 우수한 사람들이 증권회사나 투자은행을 선호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라는 것이다. 그는 어선을 더 사려고 준비했던 돈으로 증권회사를 샀다. 당시 국내 증권회사의 인식이 좋지 않아 원양어선 한 척 값(80억원대)으로 중견 증권회사인 한신증권을 살 수 있었다. 한신증권을 낙찰받으면서 김 회장은 본격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신증권은 1996년 동원으로 개명했다. 지난 2004년 12월에는 아예 동원그룹에서 분리되어 한국투자증권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투자금융지주로 재탄생했다. 99년 무역협회 23대 회장에 취임한 이후 그룹의 일들은 주요 사항만 보고받고 있다. 무협 직원 절반가량을 줄이는 등 조직 슬림화를 단행하는 한편 전자무역 인프라 구축, 세계적인 전시 컨벤션 육성, 수출입물류비개선 , 국제물류센터 추진 등을 위해 총력을 쏟고 있다. ●아들들에 밑바닥부터 경영수업 김 회장은 부인 조덕희(67) 여사와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선장시절인 1962년 당시 초등학교 동창이던 조 여사의 오빠 조영채(70)씨의 소개로 만나 6개월 만에 결혼했다. 조 여사의 아버지는 김 회장이 졸업한 군동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낸 분으로 김 회장을 사위로 맞는 것에 대해 매우 흡족해했다. 김 회장은 2004년 12월 그룹을 각각 금융과 식품의 양대 지주회사로 분리하면서 큰아들에게는 금융을, 작은아들에게는 식품을 맡도록 했다. 장남인 김남구(42)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장은 2004년 3월 동원증권 대표이사 사장이 되면서 경영 전면에 나섰다. 이듬해인 지난 6월 자사보다 덩치가 훨씬 큰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하며 기존 동원금융지주보다 시가총액이 두배나 많은 1조원대의 한국투자금융지주를 설립했다. 고려대 경영학과(83학번)를 졸업하고 1987년 동원산업 사원으로 입사한 후 91년 동원증권 대리, 기획담당 상무, 부사장을 거쳐 2003년 동원금융지주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금융지주 지분 33%를 소유하고 있다. 동원F&B 등 식품 계열의 지주회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는 김 회장의 차남인 김남정(32) 경영지원실장(직급 차장)이 물려받았다. 고려대 사회학과 92학번인 김 실장은 회사 지분 44.98%를 갖고 있다.97년 동원산업에 입사, 동원엔터프라이즈 과장 등을 거쳤다. 아버지가 만든 참치캔 이후 업계를 선도할 새 베스트셀러를 내는 게 목표다. 동원그룹 관계자는 “장남 김 사장은 입사하기 앞서 6개월간 남태평양과 베링해에 나가 참치배를 타며 동원을 이해하기 위한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쳤다.”면서 “하루 16시간 중노동을 하면서 그물을 던지고 참치를 잡는 한편 참치를 삶고 냉동시키는 과정에서부터 갑판청소 등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차남 김 실장 역시 1997년 경남 창원 참치통조림 공장에서 생산직 근로자로 시작, 동원산업 영업부 평사원으로 시내 백화점에 참치제품을 배달하는 등 밑바닥부터 배웠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를 닮아 체구가 좋고 남들이 보면 구두쇠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근검절약 정신이 투철하다는 평이다. ●정·관계로 이어지는 화려한 혼맥 건설교통부 장관부터 국정원장까지 동원가의 혼맥은 화려하다. 큰 아들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사장은 집안끼리 알고 지내던 고병우(72) 28대 건교부 장관의 딸인 고소희(37·이대 전산학과 86학번)씨와 1992년 4월 공항터미널 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고려대 김동기 교수가 주례를 섰다. 두 사람 사이에 동윤(12)과 지윤(7) 1남1녀가 있다. 고 전 장관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동아건설 회장 등을 역임하다 현재 한국경영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재철 회장과 같은 호남 출신. 쌍용증권 회장 재직시절부터 김 회장과 가깝게 지냈다. 김남구 커플은 ‘괜찮은 사람이니 한 번 만나보라.’는 양가 어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8개월간 연애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이대 서양학과 84학번인 첫째 딸 김은자(40)씨는 1989년 서울지검에 재직중이던 정택화(44·고대 법대 79학번) 검사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은자씨는 내성적이고 일 욕심이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남구 대치동에서 초등학생을 겨냥한 사설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정 검사는 광주지검 부부장검사, 대구지검 안동지청장, 부산고검 부부장검사, 의정부지검 형사1부 부장검사 등을 역임한 뒤 현재 대구 고검 검사로 재직하고 있다. 올해 열두살된 외동아들 연욱이 있다. 둘째 딸 김은지(37·이대 정외과 87학번)씨는 고 김택수 전 의원의 4남인 서울 법대(81학번) 출신의 김중성(43)씨와 지난 1992년 10월 김상협 전 국무총리의 주례로 식을 올렸다. 성격이 명랑하고 친정과 시댁의 집안 대소사를 두루 잘 챙겨 어머니 조덕희씨의 자랑이 자자하다. 두 사람은 김 회장과 평소 친분이 있는 천신일 세중여행사 회장이 1988년 여행사에서 어린이들을 인솔하고 외국으로 떠나는 프로그램(CISV)의 대학생 리더로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나라종합금융 상무이사를 지낸 김씨는 지난 2001년 미국 뉴저지로 건너가 투자관리회사인 세인투자관리를 설립,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민선(12)과 현선(6) 두 딸이 있다. 막내 김남정(32) 실장의 아내는 33대 법무부 차관과 25대 국정원장을 지낸 신건(64) 세계종합법무법인 변호사의 셋째 딸 신수아(33·이대 장식미술학과 91학번)씨. 대학교 4학년 때 동아리 선배의 소개를 통해 누나-동생 사이로 만난 뒤 6개월만에 연인 사이로 발전,3년 열애끝에 결혼했다. 김상하 삼양사 회장 주례로 지난 1998년 10월 워커힐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동찬(5)과 서연(2) 남매를 두고 있다. 사돈인 신건 전 국정원장은 김 회장의 셋째 동생인 김재국(63) 전 동해하이테크 사장의 친구이기도 하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뛰어난 문장가’ 김재철 회장 “재웅아! 우리는 드디어 만선(滿船)을 했다. 우리 배는 지금 어창(魚倉)마다 고기를 가득 싣고 사모아로 돌아가는 길이다. 푸른 하늘엔 흰 구름 떠가고 바다엔 새하얀 우리 배가 물결을 가르면서 달린다. 물위에 떼를 지어 놀던 고기들이 놀라서 달아나고 한가로이 물에 떠 있던 고래도 배를 피해 점잖게 물 속으로 자맥질을 한다. 엊그제까지도 바다는 성난 파도로 꿈틀거렸는데 오늘은 우리의 만선귀항을 축하라도 하는 듯 잔잔하구나.”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소개된 김재철 회장의 ‘남태평양에서’의 한 구절이다. 김 회장은 책을 많이 읽는 독서광으로 유명하지만 문장가로서도 이름이 높다. 젊은 시절 바다에서 생활하면서 간결하고 생동감 있는 글을 많이 썼다. 이밖에 ‘바다의 보고’,“거센 파도를 헤치고’ 등 그의 글은 초·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소설가 정비석씨는 ‘사상계(思想界)’에 발표한 김 회장의 글을 보고 “이 정도 글 솜씨라면 작가로 데뷔해도 좋겠다.”고 평했다. 김 회장 스스로도 기업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문인이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서로는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가 있다. 그는 원양어선 선장시절 선용품을 사기 위해 시모노세키 등의 항구에 기항하면 책방에 가서 헌책들을 무게로 달아 구입해 배 안에서 끊임없이 읽었다. 덕분에 김 회장은 문학적 표현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만큼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다. 지난 2004년 일본 미쓰비시 그룹 회장·사장단으로 구성된 모임인 ‘금요회’에서 ‘나의 인생과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주제로 일본어 특강을 했다. 요즘도 월 평균 10∼20권의 책을 읽는다. 경제·경영·역사·심리 등 분야가 다양하다. 회계학도 독학으로 배워 재무제표도 꼼꼼히 본다. 직원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동원산업 사내 게시판에는 책 요약 서비스까지 제공된다. 처남인 박인구 동원F&B 사장도 국내 출장이나 여행 때는 반드시 KTX를 탄다.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자식들에게도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강조했다.1주일에 적어도 한 권씩은 읽도록 했다. 정독이 안되면 통독을 하라고 가르쳤다. 책을 주고 A4용지 4∼5장 분량의 독후감도 받았다. 내용이 부실하거나 느낀 점이 부족하면 느껴야 될 점과 핵심 등을 설명해 주었다. 장남인 김남구 사장은 오래전에 독후감 제출을 졸업했지만 김 사장보다 열살 어린 동생 김남정 실장은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독후감 제출 대상이었다. 김 실장은 “일본 대하소설 ‘대망’을 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얼마나 고생해 지도자 자리에 올랐는지 토론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서 “최근에는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를 추천받았는데 유익했다.”고 말했다. jhj@seoul.co.kr ■ 동원출신 CEO들 ‘반짝반짝’ 김재철 회장은 소식·금연·절주 등 절제된 생활로 유명하지만 인재 욕심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좋은 인재=좋은 실적’이란 생각에서 1980년대 후반 증권업계 최초로 성과급제를 도입했고 금융권 최초로 스톡옵션제를 실시했다. 동원이 인수한 한신증권은 90년대 한번에 특별성과급을 400%씩 지급, 업계의 부러움을 샀다. 참치를 많이 잡으면 선장에게 돌아가는 몫이 많듯 선장을 지낸 그의 삶에 성과주의가 깊이 배어있는 것이다. 때문에 동원증권 출신들 중에는 스타급 인사가 많다. 동원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CEO(최고경영인)는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 대신증권에서 김 회장에게 한신증권으로 스카우트된 그는 1998년 동원증권 사장 재직 당시 금융권 최초로 10만주의 스톡옵션을 받았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주택은행장으로 영전돼 권리 행사는 하지 못했다. 오너와 전문경영인이 즐겁게 일한 뒤 행복하게 헤어진 모범 케이스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동원이 놓아주지 않으려 애를 먹은 것으로 유명하다. 나이 마흔이 되면 창업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이사 재직 시절인 서른 아홉이 되던 해에 동원증권을 나왔다. 그를 놓아줬다는 이유로 화가 난 김 회장이 김 전 행장과 무려 6개월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지낸 일화는 아직도 금융권에서 회자되고 있다. 김 전 행장은 한신증권 이사로 일하면서 박 회장을 동원에 영입했다. 두 사람은 절친한 광주일고 선후배 사이다. 재경부 공무원 출신의 정태석 광주은행장(전 동원증권 상무), 장인환 KTB 자산운용 사장(전 동원증권 차장), 송상종 피데스 투자자문 사장(전 한신증권 대리), 조승현 전 교보증권 사장(전 동원창업투자 사장)도 모두 한때 동원증권에 적을 뒀다. 지금도 동원에 몸담고 있는 스타 CEO들이 많다. 서두칠 동원시스템즈 사장은 2002년 초 김 회장의 영입제의를 받고 통신장비업체인 이스텔시스템즈(옛 성미전자) 사장으로 왔다. 동원시스템즈는 지난 3월 이스텔시스템즈와 동원EnC가 합병한 회사다. 그는 1997년 말 한국전기초자의 전문경영인으로 부임해 수백억원의 적자를 내 퇴출위기에 몰렸던 회사를 3년만에 우량기업으로 변신시킨 주인공. 김범석 한국투자신탁운용 사장은 금융관료 출신으로 2002년 합류했다. 금융감독위원회에서 은행구조조정팀장과 구조개혁기획단 은행팀장을 지냈다.2000년 초 키움닷컴 사장을 지냈다. 김 회장의 두 아들을 제외하고 동원에서 일하는 인척은 김 회장의 셋째 동생 김재운 동영콜드프라자 대표이사 회장, 둘째 처남인 동영콜드프라자 최재열 상무와 셋째 처남인 동원F&B 박인구 사장 등이다. 박 사장은 1997년 산자부 상무관 시절 동원정밀 부사장으로 동원에 합류했다. 외환위기 당시 이익을 낸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동원F&B 사장이 됐다. 박 사장은 “김 회장은 항상 동생들과 가족들에게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우리가 희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말했다. 박 사장의 부인이 아직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없이 사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라고 덧붙였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첫 ‘국새’ 미스터리

    첫 ‘국새’ 미스터리

    정부수립 후 최초로 사용된 나라 도장인 국새의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정부가 분실됐다고 밝힌 국새의 사진과 기록·증언 등을 통해 확인된 것과는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정부가 분실됐다고 주장하는 국새가 첫 국새인지 여부에 대한 확인작업이 필요한 상황이다. 박찬우 국가기록원장은 28일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첫 국새의 사진과 국새를 만들었다고 밝힌 당사자의 그림을 확인한 결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첫 국새의 모습은 1958년 문화공보부가 찍은 11장의 사진이 전부”라며 “사진의 인뉴(손잡이)부분은 삽살개 같기도 하고 ‘상상의 동물’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또 “보관 중인 관인대장으로 최초 국새의 글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1954년(단기 4287년) 11월1일 관인대장에 국새를 재등록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국새의 글자체(印文)는 ‘大韓民國之璽’(대한민국지새)라는 전서체로 돼 있다. 이 국새는 1948년(단기 4281년) 8월 서울 충무로 2가 천상당에서 만들었으며, 크기는 2치(寸)의 정방형이라고 기록돼 있다. 천상당은 이후 탑골공원 근처로 이전했다가 1962년 이 지역 재개발 때 문을 닫았다. 박 원장은 “국새에 관한 기록은 1954년 11월1일 재등록됐으며, 최초 국새를 등록한 관인대장은 6·25때 없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문공부가 찍었다는 사진의 진위여부다. 당시 대표적 옥새전각장인으로 알려진 정기호 선생은 ‘고옥새간회정도’(古玉璽看繪鄭圖)라는 기록집에서 “최초의 국새는 1948년에 제작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그의 책에 나온 국새 그림은 국가기록원의 사진과 달리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의 사진에 나온 국새가 진짜가 아닐 가능성을 높여주는 증언도 나왔다. 기록원은 1952∼1956년에 국새를 담당했던 노모(84·서울 북가좌동)씨를 통해 “당시 사용하던 국새는 용의 모양이었다.”는 주장을 얻어 냈다. 기록원은 이에 따라 추가 증언자를 찾고 있으며 사진의 국새가 진짜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허수경 지음

    독일 뮌스터대에서 고고학을 공부중인 시인 허수경(41)이 네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동서문학상을 수상한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이후 4년 만이다. 시집에 실린 시의 태반은 ‘반(反)전쟁시’들이다. 중동 고대유적 발굴현장에서 아득한 시간의 지층을 파내려 갈수록 시인의 의식은 오히려 전쟁의 포성이 끊이지 않는 지상의 현실로 향했던가 보다.‘엄마/대포 소리가 저리도 가까운데/꽃피는 소리가 들려요.’(‘엄마’중)라거나 ‘낯선 이들이 이곳으로 들어와서 퍼런 큰 새를 타고 다니는 동안, 아이들은 폭탄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중) 등의 시구는 전쟁과 파괴의 역사를 반복해온 인류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표제작격인 ‘물 좀 가져다 주어요’에서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라고 노래하던 시인은 ‘물 좀 가져다 주어요/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물을 마시기에는/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라며 연민과 사랑을 호소한다. 현실인식은 냉철하지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시인은 시집 말미에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고 썼다. 문학평론가 성민엽은 “고고학적 상상력의 비관주의가 여성성과 결합하여 빚어낸 희망의 언어”라고 평했다.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집’ 등을 낸 시인은 지난 92년부터 독일에 머물고 있다.6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열린세상] 노동운동과 폭력,그리고 금품수수/이광호 전 ‘진보정치’ 편집위원장

    폭력과 금품 수수. 어느 누가 민주노조 운동이 이런 죄목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감옥까지 갈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었을까. 상상 자체가 불가능했던 일이 발생했다.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의 폭력사태와 기아자동차 노조 등의 취업 비리 사건에 이어 터진 민주노총 수석 부위원장의 금품수수 사건은 우리를 참담하게 만든다. 19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이 본격화된 지 20년이 다 돼간다.80년대 후반 노동자들은 ‘전노협 결성’을 ‘비원’처럼 외치며, 그렇게만 되면 ‘노동해방’이 이뤄질 거라는 희망을 갖고 권력과 자본의 엄청난 탄압에 맞서 싸웠다. 그 이후 노동자들은 “민주노총만 결성되면, 민주노총이 합법화만 되면, 노동자가 정치세력화만 되면…” 등등의 ‘역사적 과제’를 조건절로 제시하면서,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들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걸로 믿고 이를 위해 싸워왔다. 민주노총이 출범한 지 10년이 다 됐으며, 합법화된 지도 오래다. 민주노동당도 10명의 의원을 국회에 보냈다. 그러나 조건은 풀렸는데, 괄호 안에 갇혀 있었던 과제와 희망은 풀리지 않았다. 조직력은 8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줄곧 떨어지고 있으며, 고용 조건은 비정규직 숫자에서 보듯이 더 열악해졌다. 노동운동은 스스로 자신들을 규정하듯 우리 사회 전체 모순을 해결해주는 신뢰받는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저 힘이 센 이익 집단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우선 노동운동이 스스로 설정한 과제와 희망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에서 가장 강조되는 가치와 전략은 ‘단결과 연대’다. 노동운동은 스스로 힘을 키우고 연대의 폭을 넓혀가면서 우리 사회를 진보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자기 임무이며 존재 의의라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노동계급을 넘어서는 연대의 광역화에 실패하고 오히려 노동운동 안에서도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민주노총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은 올해 초에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 50억원을 모으기로 결의했다. 현재 5억원에 못 미치는 돈이 모였다. 그런데 돈을 낸 곳은 주로 상대적으로 조건이 열악한 중소규모 노조나, 청소 용역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인 여성연맹 같은 곳이다. 대기업 노조는 한 군데도 돈을 내지 않았다. 신영복 선생은 ‘아래를 향한 연대’를 강조한다. 노동운동은 이에 관한 한 실패하고 있다. 노동운동은 또 외형적인 조직 형식에서 발전했지만, 주체의 성장과 조건의 변화에 부응한 목표를 설정하고 공유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변해가는 상황에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운동’하지 못하고 ‘정체’돼 있다. 정체된 조직에서 활성화된 것은 내부 권력 투쟁이다. 지도부나 활동가라는 자리가 고난의 자리에서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공간으로 변질됐다. 물론 부분적인 현상이지만 부정적 영향은 전체적이다. 이와 함께 기동전 마인드의 상대적 과잉도 지적될 수 있다. 바리케이드를 가운데 두고 벌이는 가두 투쟁만으로는 성취하기 어려운 과제를 가지고 있는 노동운동이, 대안 정책 개발과 이를 대중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고 있다. 장기적인 투쟁을 위한 다양하고 견고한 진지 구축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해야 할 역할은 아직도 너무나 많다.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고, 민중복지를 실현하는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운동은 아직 우리에게 희망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뻔하고 재미없는 결론이지만, 노동운동 진영이 최근의 불미스러운 사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지혜를 모아낼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대해본다. 이광호 전 ‘진보정치’ 편집위원장
  • 평화의 댐 18년만에 완공

    평화의 댐 18년만에 완공

    평화의 댐이 18년 만에 완공됐다. 건설교통부는 “1987년 시작된 평화의 댐 1단계 공사에 이어 2단계 사업을 완공했다.”고 18일 밝혔다.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에 만들어진 평화의 댐은 콘크리트 표면차수벽형 석괴댐으로 높이 125m, 길이 601m, 저수 용량 26억 3000만t에 이르는 대형 댐이다.1단계(1987∼1989년)와 2단계(2002∼2005년)로 나눠 공사가 이뤄졌다.1단계 공사는 높이 80m, 저수 가능량 5억 9000만t으로 축조됐다. 이후 북측 임남댐의 갑작스러운 방류로 댐 일부가 훼손돼 2단계 공사를 시작, 높이를 45m 증축했다. 사업비는 1단계 1666억원,2단계 2329억원 등 3995억원이 투입됐다. 건교부는 “북측 임남댐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만일의 사태와 북한강 상류지역의 집중 홍수에 따른 홍수피해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아리랑국제방송 3부작 다큐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을 앞두고 사상 첫 한국인 수상이라는 쾌거가 기대됐으나, 아쉽게도 바람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문단에서는 섣부른 기대를 품기에 앞서 번역 등을 통해 꾸준히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아리랑국제방송은 19일부터 3일 동안 매일 오후 9시30분에 3부작 다큐멘터리 ‘한국 문학 60년사’를 내보낸다. 이번주 독일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주간을 맞이하여 마련한 특집 다큐멘터리다. ‘한국’가 주목되는 이유는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주관 방송사인 독일 헤센방송국(HR)도 행사 기간 동안 이 다큐멘터리를 동시에 방영하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북페어는 출판 올림픽으로 꼽히는 세계 최대 도서전.15세기에 시작됐을 정도로 전통이 있고, 매년 110여 개국 6700여 출판사가 참여해 도서전을 펼친다. 올해 북페어 주빈국으로 초청된 나라는 바로 한국. 이미 지난 3월부터 국내 대표문인들이 독일을 찾아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최근 4년 동안 한국 문학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100회 가까이 제작했던 아리랑국제방송은 ‘한국’를 통해 해방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움트기 시작한 한국 문학을 총정리했다. 소설가 박완서 김주영 조정래 이문열 김훈 공지영 조경란, 시인 고은 신경림 김지하, 평론가 이어령 김윤식 백낙청 김화영 정과리 등 문단을 빛낸 우리 문인들을 통해 자신의 작품이나 글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 해방 직후부터 4·19혁명기를 다루는 1부 ‘환희와 극복의 시대’에서는 반전시 박봉우의 ‘휴전선’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그린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그리고 최인훈의 소설 ‘광장’ 등을 살피며,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을 걸었던 작가들의 발자취를 돌이켜본다. 2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상실과 격동의 시대’는 5·16혁명에서 출발해 87년 6월까지 기나긴 군사정권 시기를 담았다. 이 시기의 생명파와 해체문학으로 대표되는 순수 문학과 암흑기에 민중에게 등불이 되고자 했던 참여문학을 비교하는 시간이다. 요절 시인 김수영과 이와 관련한 논쟁을 벌였던 평론가 이어령 교수나, 저항문학의 선두에 섰던 고은, 김지하 시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마지막 3부는 ‘다양성의 시대’. 거대 담론의 시대가 끝나고 젊은 작가군이 쏟아져 나왔다.90년대 들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신경숙 은희경 등 여성작가들을 비롯해 독특한 개성을 뽐내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현주소를 점검한다. 또 ‘퇴마록’ 등 하이퍼텍스트 인터넷 문학의 발전상도 알아본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피마르는 혈우병 환자

    피마르는 혈우병 환자

    아들 둘이 혈우병을 앓고 있는 김선영(44·여·가명)씨는 걱정이 태산이다. 큰아이(18)가 혈액제제 투여를 거부하고 있어서다. 지난달 5일 일부 혈우병 치료약이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 혈액으로 만들어졌던 사실이 밝혀진 데 따른 것이다. 냉장고에 보관 중이던 약 중에서 문제의 약이 발견됐다. ●감염 공포 속 치료 거부 확산 정재훈(36·대구·가명)씨도 치료를 거의 포기한 상태다. 문제가 된 약을 모두 12회 투여했던 사실을 알게 됐다. 이로 인해 아내와의 관계도 서먹해졌다. 다행히 에이즈 음성 반응이 나오면서 관계는 회복됐지만 더 이상 약을 믿을 수 없다. 내부출혈로 온몸이 퉁퉁 부어서야 한 대씩 맞으면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 혈액으로 만들어진 혈우병 치료제 파문 이후 많은 환자들이 투약을 거부하는 등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나고 있다. 전국 혈우병 환자의 70%가 처방을 받고 있는 서울 서초동 한국혈우재단의원의 경우 지난달 9월 내원 환자는 1299명으로 7월 1383명에 비해 100명 가량 줄었다. 문제의 혈액제제를 맞은 120명이 에이즈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것을 감안하면 처방만을 위한 내원 환자의 감소폭은 이보다 훨씬 크다. ●1988년 이전에 태어난 게 죄? 파문 이후 많은 혈우병 환자들은 ‘혈액제제’는 못 믿겠다며 상대적으로 감염에서 안전한 ‘유전자제제’를 찾고 있다. 그러나 유전자제제는 건강보험 적용이 한정돼 있다. 국내에 2000년부터 수입된 유전자제제는 지난해 7월부터 ▲HIV 감염자 ▲처음으로 혈우병 치료를 받기 시작한 사람 ▲1988년 1월1일 이후 출생자에 한해 보험이 적용되고 있다. 이런 탓에 현재 한국혈우재단에 등록된 환자 1700여명 중 40%는 유전자제제가 아닌 혈액제제만을 무료로 처방받을 수 있다. 보험적용 제한에 따라 김선영씨의 경우 87년생인 큰아들은 혈액제제,92년생인 작은아들은 유전자제제를 맞는다. 김씨는 “한번은 몰래 큰애가 동생 약을 맞아 ‘둘다 죽을 거냐.’고 다그쳤지만 그렇게 말하는 내 심정이 오죽했겠느냐.”면서 “정부에서 유전자제제에 대해 전면적인 보험적용을 하지 않는 것이 혈액제제를 만드는 국내회사를 배려하기 위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가슴을 쳤다. ●보건복지부 “비용 감당 못해 전면 확대 어려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환자들은 다른 사람이 처방받은 약을 쓰기도 한다. 한상현(39·가명)씨는 아들(11)의 유전자제제를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아들은 한 달에 5∼6회 정도 약을 맞으면 되지만 환자 1인당 한 달에 최대 10회분을 처방 받을 수 있어 남는 약은 혈액제제만 처방받는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 한씨는 “엄연한 불법이지만 불안해하면서 혈액제제를 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면서 “그나마도 넉넉하지 않아 다들 참다참다 정 힘들 때 한 번씩 약을 맞으며 연명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는 비용을 이유로 보험적용 전면 확대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지난해 유전자제제를 처방 받은 환자 가운데 약값이 18억원이 나온 예가 있다.”면서 “그만큼 비싼 약이기 때문에 기준을 두고 제한적으로 보험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는 환우회와 합의된 것인데 지난달 문제가 터지니까 이제 와서 전면 확대를 요구하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면서 “더구나 전문가들은 혈액제제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데도 유전자제제만 맞겠다는 것은 무리”라고 덧붙였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 별세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 별세

    개발 시대를 대표하는 경제 원로 가운데 한 사람인 정순영 현대시멘트(성우그룹) 명예회장이 13일 오전 11시3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83세. 현대시멘트측은 “정 명예회장이 노환과 함께 최근 췌장암이 발견돼 입원치료를 받던 중 건강이 악화돼 운명했다.”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둘째동생으로 현대가 1세대의 6남 1녀 가운데 3남이다. 이로써 현대가(家)의 ‘영(永)’자 돌림은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 정상영 KCC 명예회장만 생존하게 됐다. 유족은 부인 박병임씨 사이에 장남 정몽선 현대시멘트 회장과 몽석(현대종합금속 회장), 몽훈(성우전자 회장), 몽용(성우오토모티브 회장), 딸 정숙씨 등 4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17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유정리 선영. 장남 몽선씨는 미국 출장 중이서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이날 빈소에는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녀간 것을 비롯, 정상영 KCC 명예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회장 등 현대가 임직원들이 찾아와 애도했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 등 재계 인사들은 조화를 보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정순영 명예회장은 어떤 사람 고인은 현대시멘트를 모태로 성우그룹을 키운 경제인.1970년 1월 현대건설 부사장으로서 ‘왕회장’(정주영 창업주)을 돕다가 현대건설에서 떨어져 나온 현대시멘트 사장을 맡으면서 분가했다. 단양 공장을 비롯, 현재 연간 400만t 규모의 시멘트 생산 공장을 키운 개발 역군으로 평가받는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건설 분리 이후 5년동안 시멘트 단일 품목에만 손을 댔다가 75년 현대종합금속을 세우면서 그룹의 덩치를 키웠다. 사업 영역을 넓히기 위해 87년 자동차 부품회사인 성우오토모티브를 설립했다. 95년에는 성우종합레저를 설립, 강원도 둔내에 대규모 레저단지를 조성하면서 ‘성우그룹’을 이뤘다. 92년에는 성우종합건설을,96년에는 성우전자를 잇따라 그룹사로 편입시키면서 그룹을 불렸다. 그러나 시멘트와 자동차 부품 등을 뺀 다른 업체들의 경영실적은 신통치 않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몇몇 업체가 부도를 맞기도 했으며 이를 계기로 경영권 이양이 본격화됐다. ●성우그룹 향후 구도 바뀌나 다른 그룹과 달리 일찌감치 경영권 이양작업이 이뤄졌다.97년 1월 장남 몽선씨에게 그룹의 주력 기업인 현대시멘트와 성우종합건설을 넘겨줬다. 둘째 몽석씨는 현대종합금속을 받았고 3남 몽훈씨는 성우전자와 성우캐피탈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물러서 있다. 막내 몽용씨는 성우오토모티브와 현대 에너셀을 경영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가급적 자식들에게 경영 수업을 시킬 때 맡았던 분야를 떼어주면서 자연스럽게 2세-형제간 경영권을 이양했고 그룹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4형제는 성우그룹에서 계열 분리를 통해 각자 경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경영권을 둘러싼 잡음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성우그룹의 모태인 현대시멘트는 성우e컴, 성우종합건설, 하나산업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정 회장은 특수 관계인까지 합쳐 33.8%의 지분을 갖고 있으며, 자사주 지분 40%를 더해 실질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지분이 72.68%에 이른다. 다른 형제들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도 모두 비상장이고 실질적인 오너라서 경영권 위협과는 전혀 무관하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스포츠 라운지] 3박자 갖춘 ‘코트의 박주영’ 이영준

    [스포츠 라운지] 3박자 갖춘 ‘코트의 박주영’ 이영준

    배구는 1980년대 대학, 실업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종목. 그러나 이후 내리막길을 걸어온 2005년 현재 배구계는 그 함성 가득한 코트를 씁쓸한 옛 기억으로 간직한 채 영광 부흥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18살 더벅머리 한 고교선수가 이런 배구계에 오롯한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초고교급 레프트’ 이영준(18·문일고 3년)이다. 올해 문일고를 전국대회 2관왕으로 이끈 그는 봄철연맹전 최우수선수(MVP), 중고연맹회장배에서 우수공격수상을 받았다. 또 유스(17세 이하)국가대표팀 주장을 맡아 지난 5월 아시아유스대회에서 준우승을 견인, 차세대 간판스타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나의 우상은 석진욱 문일고는 14일 개막하는 울산 전국체전에 남고부 서울대표로 출전, 최강임을 다시한번 뽐내게 된다. 내년 한양대 진학 예정인 이영준으로서는 이번 체전이 고교 마지막 무대인 셈. 이영준은 “반드시 우승해 고교무대를 멋지게 마무리하고 싶다.”면서 선한 눈빛을 매섭게 번뜩였다. 중학교 때 그의 진가를 알아본 이순식 문일고 총감독은 “공격, 수비, 서브리시브 등 종합적인 면에서 비슷한 나이 때의 신진식·이경수보다 오히려 낫다.”고 칭찬한다. 블로킹 능력만 가다듬으면 한국 최고의 왼쪽 공격수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정작 이영준은 “화려한 선수보다 팀에 도움이 되는 알찬 선수가 되고 싶다.”면서 “그런 면에서 삼성의 석진욱 선배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승부욕은 나의 힘 대학에 가서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을 꼽아보라니 이영준은 대뜸 “미팅”이란다. 하지만 그는 내년 형들 틈에서 주전 경쟁은 물론, 대학 최고의 레프트 문성민(경희대 1년), 김요한(인하대 2년)과 가질 대결에 대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당찬 각오다. 이영준은 “성민이형은 고교 때 만나 이긴 적이 있고, 요한이형은 맞서보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며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같은 자신감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 하는 그의 타고난 승부욕에서 비롯된다. 이영준은 ??신강초교 4학년 때 육상을 시작했다가 6학년 때 배구부 코치의 강력한 권유로 코트를 밟았다. 육상으로 다져진 강한 체력이 그의 또다른 원동력인 것이다. 미래에 대한 준비도 야무지다. 올해 국제대회를 다니면서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했단다. 국제대회에서 심판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도, 향후 지도자나 스포츠 행정가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도 틈틈이 영어공부를 한다. 선배들을 무색케 할 정도로 어른스러운 대목. 이영준은 수업을 빼먹기 일쑤지만 학급 성적은 평균 이상이라는 총감독의 귀띔이다. ●곧바로 프로에서 뛰었으면 최근 드래프트제를 둘러싼 대학연맹과 한국프로배구연맹(KOVO)의 갈등에 대해서도 나름의 의젓한 대안을 내놓았다. 이영준은 “배구의 인기도 침체돼 있는데 서로 갉아먹는 것은 도움이 안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어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에 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이영준이 ‘배구계의 박주영’으로 자리매김하며 침체된 배구계에 활력소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이영준은 ▶생년월일 1987년 5월20일생 ▶출신교 서울 신강초-문일중-문일고-한양대 진학 예정 ▶신체조건 190㎝,76㎏ ▶주요 경력 2002년 중·고배구협회 선정 중등부 최우수선수,2005년 봄철배구연맹전 MVP,2005년 중·고배구연맹회장배 우수공격수.2005년 아시아유스대회 준우승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벤츠 ‘추락’ 수입차 9월 판매량 5위로 처져

    고급수입차의 대명사였던 벤츠의 위상이 약화되고 있다. 여전히 수입차 가운데 가장 고가이면서 꾸준히 팔리고 있지만 판매대수에서 5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6일 한국수입자동차협회의 9월 수입차 신규등록대수에 따르면 메르세데스-벤츠는 312대가 등록돼 BMW(508대), 렉서스(453대)는 물론 근소한 차이긴 하지만 아우디(317대)와 혼다(314대)에도 밀렸다. 벤츠가 5위로 내려앉은 것은 국내 판매를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자동차 수입자유화가 시작된 1987년 유일하게 10대를 팔며 자리를 잡은 벤츠는 88년에도 94대로 압도적인 1위를 지켰다. 이후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차에 밀렸지만 2∼4위를 오르내렸고 미국차의 거품이 빠진 2001년에는 BMW에 이어 2위를 되찾았다. 하지만 2001년 국내시장에 뛰어든 렉서스에 2002년부터 2위 자리를 내주면서 3위를 유지해왔다. 벤츠측은 5위는 일시적인 현상이라며 연연하지 않겠다는 분위기지만 8월에 비해 아우디가 22.9%, 혼다가 71.6%나 판매량이 증가한데 반해 벤츠는 오히려 10.6% 줄어드는 등 나머지 업체들의 추격이 무섭다. 9월까지 누적 판매량에서는 2788대로 3위를 유지했지만 아우디(2788대)의 판매증가율이 315%, 혼다가 147%에 달한 반면 벤츠의 증가율은 18%에 머물렀다. 이는 판매량이 감소한 BMW나 렉서스에 비해서는 사정이 나은 것이지만 수입차 전체 증가율 26.44%를 밑도는 것이다. 벤츠코리아 관계자는 “9월에는 재고물량이 거의 소진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판매량이 줄어든 것일 뿐 꾸준히 판매가 늘고 있다.”면서 “또 프리미엄 브랜드인 벤츠가 중저가 브랜드와 판매대수 경쟁을 벌일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YS 숨겨진 딸’ 친자소송 제기

    자신의 딸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혼외자라고 주장해 온 이경선(70)씨가 김 전 대통령을 상대로 친생자 확인 및 1억원의 위자료 청구소송을 27일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이씨는 소장에서 “1961년 군사혁명 발발 직후에 김 전 대통령을 만났고, 이듬해 둘 사이에 딸이 생겼다.”면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를 간직해온 김 전 대통령이 여식에 대한 인지를 미뤄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딸 가네코 가오리(金子香織·43)씨는 대통령의 사생아라는 이유로 타이완인의 딸로, 일본인의 양녀로 신분과 이름을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고 덧붙였다. 김 전 대통령에게 숨겨진 딸이 있다는 소문은 1987년과 1992년 등 대선이 있는 해마다 ‘지라시’ 등을 통해 퍼졌다.2000년에는 이씨 측에서 강금실(전 법무부장관) 변호사 등을 대리인으로 선임해 상도동측에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다. 이씨는 이후에도 소송을 내기 위한 시도를 두 차례 정도 했지만, 대리인들이 나서지 않아 소송을 포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가 친자확인 등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고측 용태영 변호사는 “이씨의 딸 가오리씨는 미국에 체류중”이라면서 “가오리씨가 인지 소송에 대한 위임장을 보내면 김 전 대통령을 상대로 인지 소송을 추가로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용 변호사는 “이씨가 김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5∼6차례에 걸쳐 23억원을 현금으로 받았다고 털어놓았다.”면서 “그 돈은 가오리씨에 대한 양육비 차원으로 볼 수 있고 이번 소송은 이씨에 대한 위자료 청구의 의미를 갖는다.”고 덧붙였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연기인생 30년 배우겸 교수 장미희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연기인생 30년 배우겸 교수 장미희

    와인은 숙성이 오래될수록 맑아진다고 한다. 꼭 30년이 됐다. 그만큼 맑음이 더해진다. 한 여인이 있다. 우선 영화 ‘겨울여자’에서 ‘이화’로 생생히 추억된다. 스치는 바람, 야리야리하다. 울음 머금은 가냘픈 목소리, 애틋함으로 버무려진 ‘공주과’의 청순가련한 여인, 수많은 청춘이 그 앞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또 있다.‘이화’가 노래한다.‘가을에도 우린 겨울 얘기를 했죠/우리들의 겨울은 가을에 벌써 다가왔다고/겨울엔 우린 겨울을 모르죠/우리들의 겨울은 너무나 추운 생각 뿐이죠/가을에도 우린 겨울 얘기를 했죠/우리들의 겨울은 가을에 벌써 다가왔다고’ ‘겨울여자’(조해일 원작 김호선 감독)는 서울의 인구가 600만이던 지난 1977년 당시, 단성사 극장에서만 58만 6000명의 관객을 불러들인 공전의 히트작. 주인공 ‘이화’가 여인으로 성장하면서 만나는 여러 남자들을 통해 한국사회의 갈등과 대립을 투시해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 기록은 90년 ‘장군의 아들’이 개봉되기 전까지 전무후무했다. 교수이자 중견 여배우 장미희. 어느날 ‘겨울여자’의 ‘이화’로 대스타가 됐다. 때문에 40대 이후의 팬들에겐 늘 ‘이화’처럼 고고하면서 지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맞다. 배우 장미희는 분명 70∼80년대의 흥행 메이커로 한국 영화를 대표했다. 오는 백발 어떻게 막고, 가는 세월 어찌 잡을 수 있으랴. 하지만 이런 말이 무색해진다. 장씨는 올해로 연기인생 30년을 맞는다. 얼핏 40대 중반쯤으로 판단되지만 여전히 청순가련의 이미지와 소녀같은 맑은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정확한 나이를 물었더니 “남자 배우들의 나이는 잘 안 밝히면서 왜 여배우들한테만 민감하느냐, 만으로 적어주지도 않고. 여자 나이를 무슨 생리적 한계로 판단하려는 습성이 있다.”며 쏘아붙인다. 장씨는 열일곱 살에 TBC 탤런트로 데뷔했으며,76년 영화 ‘성춘향’으로 스크린에 첫발을 내디뎠다. 연기자로서 30년이 되기도 하지만 17년째 대학강단에서 열심히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다. 요즘들어 영화출연이 뜸해졌지만 가끔 TV드라마에 출연해 여전히 존재의 이유를 알리고 있다. 내년에는 오랜 만에 스크린에서 팬들과 만난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위치한 명지전문대의 ‘장미희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때마침 10일간의 유럽 나들이에서 막 돌아온 직후였다.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연구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외유에 대해 궁금한 표정을 짓자 “베니스영화제에도 잠깐 들렀고, 자료 수집 등을 위해 몇군데 겸사겸사 다녔다.”고 설명했다. 장씨는 까만 남방셔츠에다 청바지 차림이었다. 나이 서른아홉일 정도로 젊게 보인다고 하자 “감사합니다. 기사 쓸 때에도 꼭 그렇게 써주세요.”라며 수줍게 웃는다. 먼저 근황을 물었다. 얼마전 명지전문대의 연극영상학과 학과장을 그만 두고 일주일에 9시간 강의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과목은 영상연기. 그러는 한편 자신의 공부에도 열중해 최근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거의 마무리했다. 또한 문화관광부의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을 맡아 관련 회의와 기타 행사에도 자주 참석한다. 이래저래 일주일이 후딱 지나간다고 했다. 애제자가 몇명쯤 되느냐고 하자 “여제자들은 시집가고 그런지 남자 제자들로부터 연락이 자주 온다.”면서 “다들 연극·영화·방송국 스태프 등으로 맡은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체 홍보팀에도 여럿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씨는 제자들에게 인성교육을 강조한다고 했다. 자신의 존재와 장래의 꿈, 이를 위한 여러가지 마음 가짐 등등. 아울러 제자들은 자신을 연기자로 보지 않고 그냥 교수님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가끔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랬다며 사인을 요청하는 제자들이 있을 경우 “내가 왕년의 배우인가.”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최근에 드라마에 출연했더니 제자들로부터 “교수님의 연기력에 새삼 감동했어요.”라는 얘기를 전해 들어 모처럼 연기자로서의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평소 독서량이 풍부해 한번 얘기하기 시작하면 동서고금을 휘젓는 달변으로 통한다. 이런 얘기를 하자 “송구스럽습니다. 요즘에는 철학이 없어요,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지요. 영상시대입니다. 알기 쉽게 풀어서 제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라며 자신의 강의철학을 피력했다. 이어 요즘 영화의 흐름에 대해 나름대로의 비판을 토해낸다.“사랑이 무슨 종교처럼 신봉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사랑을 할 수 있는 나이, 즉 20대에서 30대 초반정도로 국한돼요. 성숙된 사회란 40∼50대의 사랑도 그려져야 해요. 왜 40대만 되면 사랑도 없고 그저 생계에만 매달려야 하는 사람으로, 밥 먹었니, 학교에 가라, 공부는 왜 안하니 등등의 얄미운 역할만 해야 합니까.20대의 욕망과 야망 앞에 늘 피곤한 들러리 존재라고나 할까요. 40대 이상에도 야망이 있고 관능이 있어요. 영화계에서 어느새 중견배우라는 말도 사라졌어요.” 또한 사랑은 20대의 전유물로 그려지고 있으며 40대 이상은 욕망을 가져서도, 일탈해서도 안되는 것처럼 늘 제외돼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영화 ‘타인의 취향’(아네스 자우이 감독)인 경우 중년의 사랑과 관능, 자존심 등을 아주 담담하게 그렸지만 명화로 널리 대접받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40대를 포옹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영화 출연 제의가 오느냐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도 시나리오를 받아 놓고 고민 중이라고 했다. 역할도 중요하지만 관객들의 호응과 극장의 배급망 등을 계산하다보니 자꾸 망설여진다고 고백했다. 특히 ‘배우 장미희’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실망을 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도 뒤따라 쉽게 결정을 못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년에는 영화 한두편정도에 출연해 팬들에게 보답할 예정이라고 했다. 최근 프랑스에 갔을 때 60년대 후반에 선보인 영화 ‘남과 여’의 주인공 아누크 에메가 ‘남과 여’ 포스터를 아직도 그대로 붙여놓고 극장에서 연극을 하는 것을 보고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어떤 역할을 맡고 싶느냐는 질문에 “병적으로 따라다니는 스토커나, 이승과 저승을 경험하는 진지한 연기, 아름다운 중년의 모습, 또 기회가 주어지면 자객이나 검객역도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영화배우로서 정년은 관객이 찾아주지 않을 때가 아니냐면서 사랑해주는 팬들이 있는 한 연기를 계속할 것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연기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끼는 작품을 꼽아달라고 하자 ‘사의 찬미’‘황진이’‘적도의 꽃’‘겨울여자’ 등을 열거했다. 독신으로 사는 이유를 물었다.“혼자 살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다. 이성과 만나면서도 둘이 되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고 솔직히 배려도 못했다. 스캔들도 부담스러웠다. 이제와서 생각이지만 결혼을 하든 안하든 배려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좋은 친구, 즉 지혜로운 친구, 와인을 같이 마실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심경을 고백했다. 집에는 일흔 다섯 살의 어머니, 그리고 고양이(미미)와 삽살개(양배추) 등이 함께 산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 “채식 위주의 소식, 요가를 자주 하며 가끔 산책과 헬스클럽에 나가 가벼운 운동을 한다.”면서 한달에 한번 주치의를 만나고 6개월에 한번 건강검진을 받는다고 귀띔했다. 어릴 적부터 선생님이 꿈이었다는 장씨. 배우로서 회의를 느껴본 적이 있지만 교수가 된 이후에는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꿈을 이루어 행복과 정신적 안정감을 만끽하고 있다는 것. 연기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에 지체없이 “자기자신을 알아라, 인간이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지, 여러 체험을 통해 겸허해지는 것.”이라고 답했다. 가을을 타느냐고 하자 “작년까지는 계절을 안 탔는데 올해들어서 느낌이 약간 달라지고 있다.”고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아울러 “오래 숙성된 와인일수록 더욱 맑아지고 찌꺼기는 가라앉는 법”이라며 집에서 와인을 마실 때가 가장 즐겁다며 활짝 웃었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부산 출생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1975년 TBC탤런트 데뷔. ▲76년 영화 ‘성춘향’ 데뷔 ▲77년 영화 ‘겨울여자’에서 이화역을 맡아 대스타가 됨. ▲82년 조계사 합창단 단장 ▲89년 명지 전문대 출강 ▲99년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심의위원, 명지전문대 연극영상과 전임교수 ▲2005년 문화관광부 제3기 영화진흥위원(임기3년) ■ 주요 출연작품 영화와 드라마를 합쳐 80여편 출연. ▲영화 애인(82년), 사의 찬미(87년), 불의 나라(89년), 애니깽(94년), 아버지(97년), 보리울의 여름(2002년), ▲드라마 타인(87년), 잠들지 않은 나무(89년), 엄마야 누나야(2000년), 흥부네 박터졌네(03년), 황태자의 첫사랑(04년), 그 여름의 태풍(05년). ■ 저서 내 삶은 아름다워질 권리가 있다(98년) 외. ■ 상훈 신인상 제11회 핑크리본상(76년), 여우주연상 은곰상(77년), 최우수 여자연기상(79년), 제37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여우주연상(92년), 대종상 여우주연상(92년), 제12회 청룡상 여우주연상(92년) 등.
  • [M&A시장의 ‘큰 손’들] (1) ‘커튼 밖의 재벌’ 군인공제회

    [M&A시장의 ‘큰 손’들] (1) ‘커튼 밖의 재벌’ 군인공제회

    기업·금융 투자시장에 일반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큰손’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공제회 등 보수적인 연기금이 적극적인 기업 인수·합병(M&A)에 나서 외국 금융자본들도 깜짝 놀라는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외환은행, 하이닉스반도체,LG카드, 대우건설 등 2년 안에 매각이 예정된 13개 기업의 가치는 모두 45조원에 이른다. 외환위기 이후 최대의 M&A시장이 형성된다. 부도난 기업들을 인수, 정상화시키는 등 기업들을 도우며 투자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토종자본의 큰손들을 5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2년 수익 1438억원 12일 오전 군인공제회(이사장 김승광)가 ‘대박 신화’를 만들었다. 주식시장 개장 전 시간외매매에서 금호타이어 지분 1001만주를 모두 매각,620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렸다. 군인공제회는 2003년 7월 금호타이어 1750만주(지분 50%)를 매입한 뒤 금호타이어의 증시상장을 앞둔 지난 2월 749만주를 팔아 이미 348억원을 남겼다. 금호타이어의 주식을 주당 1만원씩에 샀으나 매각시점에는 각각 1만 4600원,1만 6200원으로 뛰었다. 투자원금 2500억원은 2년여 만에 차익과 배당금을 합해 3938억원으로 불어났다. 수익률은 무려 57.2%나 된다. 군인공제회는 또 크라운제과 등이 참여한 컨소시엄을 통해 700억원을 들여 법정관리 중이던 해태제과의 지분 32.9%를 확보했다. 내년 초 해태제과의 상장을 앞두고 두 번째 대박을 기다리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 대우건설, 우리금융지주, 대우인터내셔널, 대한통운 등 웬만한 매물 기업에는 대부분 M&A 참여자로 이름을 올려놓았다. ●아마추어의 놀라운 반란 군인공제회의 성공 비결은 투자 대상의 옥석(玉石)을 가리기 위한 치밀한 분석과 리스크(위험)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투자에서 찾을 수 있다. 작전은 신중하고 빈틈없이 짜지만, 공격이 시작되면 신속하고 과감하게 해치운다. 금호타이어의 경우 무려 10개월 동안 인수 검토작업을 했으나, 결정이 내려지자 거금 2500억원을 한꺼번에 쏟아부어 JP모건, 칼라일 컨소시엄 등 쟁쟁한 외국자본들을 따돌렸다. 준비에 많은 품을 들이는 이유는 전·현직 군인공무원 등의 생활안정자금 마련을 위해 기금운용에 안정성이 필요하면서도 목표수익률을 시중금리의 두배 가까운 연 8.0%로 못박았기 때문에 높은 수익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백억원, 수천억원의 수익을 뚝딱 만들어내는 인력은 공제회 기업금융팀 16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몸값이 억대에 달하는 화려한 경력의 펀드매니저가 아니다. 군 경리장교 출신 등으로 월급도 현역 시절의 80% 수준에 불과하다. 공제회 김후윤 과장은 “프로젝트에 따라 팀원을 쪼개 아웃소싱함으로써,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부 분석과 시장의 판단을 믿고 투자하고 있다.”면서 “만약 투자팀들이 성과급을 받았다면 아마 과잉투자 등의 문제도 생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자본과 맞선 토종자본 군인공제회의 자산 규모는 1984년 설립 당시 223억원에 불과했으나 21년 만인 올해에는 200배 증가한 4조 8025억원으로 불어났다. 군인공제회는 지난 87년 덕평골프장을 인수하면서 M&A시장에 뛰어들었다.88년 제일식품,98년 고려물류,2001년 대한토지신탁 등을 잇달아 인수했다. 그 결과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군인공제회의 계열법인체는 14개에 이른다. 군인공제회는 전체 자산의 33.6%를 기업·금융에,57.9%를 건설사업에 각각 투자하고 있다.86년 서울 상계동 아파트 개발을 시작으로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옆에 밀레니엄빌딩(공제회관)을 지었다. 종로구 경희궁의 아침, 여의도 리첸시아, 마포 오벨리스크 등 주상복합아파트를 연이어 건설, 손대는 곳마다 큰 돈을 벌었다. 이 때문에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통해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 손을 뻗친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국정감사, 국방부 감사 등 겹겹이 견제를 받으면서도 과감한 투자를 통해 회원 이익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20대 취업 ‘뒷걸음질’

    고령화에다 청년 취업난 등이 겹치면서 20대 취업자 수가 17년 전인 지난 1988년 수준으로 줄었다. 8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들어 7월까지 20대(20∼29세) 취업자는 월평균 424만 7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34만 4000명)보다 9만 7000명(2.2%) 줄었다. 이는 지난 1988년 같은 기간의 426만 4000명과 비슷한 수준이다. 1∼7월 월평균 기준으로 20대 취업자는 지난 1984년 396만 7000명이었으나 1987년 430만 9000명,1990년 441만명,1993년 478만 4000명으로 계속 늘어 1995년에는 501만 4000명으로 최고에 달했다. 1997년까지 500만명선을 유지하던 20대 취업자는 1998년 446만 7000명,1999년 427만 8000명,2000년 448만 1000명,2001년 446만 4000명,2002년 450만 6000명 등으로 등락을 하다 2003년 435만 9000명으로 크게 줄었다.7월 한달 통계상의 20대 취업자는 427만 7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의 440만 6000명보다 12만 9000명(2.9%)이 줄었다. 이는 1986년 7월(428만 3000명) 이후 가장 적은 숫자다.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99회째 하우스콘서트 여는 작곡가 박창수씨

    99회째 하우스콘서트 여는 작곡가 박창수씨

    웬만하면 정장을 입고 가야 하는 클래식 연주회를 마룻바닥에서 뒹굴며 본다면 어떨까. 엎드리면 코가 닿을 곳에서 연주자의 거친 숨소리까지 들린다면 더욱 좋고. 더군다나 공연이 끝난 뒤 연주자와 와인을 기울이며 말을 틀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클래식 공연에 대한 통념을 뒤집고 2002년 국내에서 처음 시작된 ‘하우스 콘서트’가 어느새 99번째 공연을 갖게 됐다. 공연일자도 마침 9월9일이다. 하우스 콘서트를 꾸리는 음악가 박창수(41)씨를 만나봤다. 박씨가 하우스 콘서트를 구상한 것은 서울예고에 재학중이던 1980년대 초반. 친구 집에서 악기를 연습하는 일이 많았던 박씨는 아담한 집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너무나 좋았다. 격식있는 무대보다는 집처럼 소박한 곳에서 공연을 해보는 게 어떨까라고 상상해 봤다. 그로부터 20여년 뒤. 박씨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낡은 자택을 개조해 1층은 주방·침실로 쓰고 2층의 벽을 터서 30여평의 콘서트 공간을 만들었다. 소년시절의 꿈이 이뤄졌다. 한달에 두어번씩 공연을 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알음알음 찾아오는 관객만 평균 30∼40명이나 된다. 하우스 콘서트의 큰 특징은 연주자와 관객의 거리뿐 아니라 의자까지도 없앴다는 점. 관객들은 마룻바닥 자신이 앉고 싶은 곳에 방석을 깔고 앉아 몸으로 음악을 느낀다. “관객들이 가까이 있다 보니까 연주자의 표정, 땀방울, 손떨림까지도 보입니다. 작은 공간에서 악기 소리가 몸을 타고 울리면서 음악을 오감(五感)으로 느끼게 되지요. 어떤 의미에서 연주자들은 관객들과 달리 큰 무대에 설 때보다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단골 관객인 1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은 그동안 다녀간 관객 2000여명에게 공연일정을 이메일로 보내주고, 공연일에는 관객들을 안내하곤 한다. 하우스 콘서트는 동네에서도 유명해져 인근의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갑자기 나타나 모두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그동안 하우스 콘서트장에서 선보인 장르를 추려보니 절반은 클래식이고 절반은 프리뮤직(즉흥음악), 재즈, 국악, 무용, 마임 등이었다. 아마추어 뮤지션도 간간이 참여했다.160인치 스크린에 단편영화를 상영하거나 음악에 대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박씨의 집은 문화를 전방위적으로 체험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지난해 타계한 북과 드럼의 대가 김대환씨가 세상을 뜨기 전 이곳에서 마지막 무대를 가졌다. 피아니스트 임미정씨는 북한 작곡가의 곡을 연주해 이 집을 찾은 탈북자들이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기타리스트인 이병우씨, 가수 강산에씨, 중국 전통악기인 구젱의 권위자인 펭시아 주, 프리뮤직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본인 하라다 요리유키 등이 이곳을 다녀갔다. 하우스 콘서트가 처음부터 순항을 한 것은 아니었다. 국내에서 개념이 생소했던 당시 연주자들로부터 공연요청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의미에서 저명한 음악인인데도 연주를 흔쾌히 승낙한 콘트라베이스 클라리넷 연주자 볼프강 스트라이(독일)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단다. 그렇다고 하우스 콘서트가 유명한 사람들에게 공연비를 더 얹어주는 것도 아니다. 관람비 2만원 가운데 반은 연주자에게, 반은 뒤풀이에 필요한 와인·치즈·과자를 사는 데 사용된다. 연주비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관객이 많을수록 연주자 연주비도 많아 진다. 하우스 콘서트에서는 관객의 수가 적더라도 정말로 공연을 보고 싶어서 오는 자발적인 관객들만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하는 사람들도 관객들의 반응에 다시 감동을 받곤 한다. 연주가 끝난 뒤 이어지는 뒤풀이도 볼거리다. 와인과 치즈를 먹으면서 연주자와 함께 어울리면서 연주자와 관객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박씨는 공연자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그룹으로 카이스트 공학도 음악동호회인 ‘뮤지카´를 꼽았다. 보통 오후 5시쯤 와서 리허설을 하기 일쑤지만 이들은 대전에서 오전 9시부터 오겠다고 성화였다. 매일 야간작업을 하느라 오후에 일어나는 박씨도 두손을 들었다.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프로도 본받아야 한다고 일침한다. 박씨는 스스로 삐딱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한다.6살때 피아노를 배우기 전 스스로 작곡을 시작했다. 이후 어머니를 졸라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고 혼자서 공부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이기도 했지만 그때부터 무언가에 길들여지기를 원치 않았다. 서울예대 졸업이후 명문대 작곡과에 수석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틀에 짜여진 작곡보다는 퍼포먼스의 길을 택했다.1987년 행위예술협회의 발기위원으로 참여했고, 여기서 동반자인 김영희(이화여대 한국무용 교수·김영희무트댄스 예술감독)씨도 만났다. 이들 부부는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즉흥공연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집에서 나오는 길. 현관 입구에서 송아지만한 개가 개집에서 중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나와서 꼬리를 흔든다. 개 ‘레트’는 하루에 1시간 이상씩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개주인 박씨는 역시 즉흥 문화연출가답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오는 23일의 100번째 하우스 콘서트는 어떻게 꾸며질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그의 홈페이지는 http:///free-piano.com(개설예정). ■ 프로필 ▲64년 서울생 ▲80년 서울예고 입학 ▲83년 서울대 입학 ▲86년 퍼포먼스 활동 시작, 이후 ‘호흡 시리즈´ ‘레퀴엠 시리즈´ 등을 독일·일본 등 17개국서 공연 ▲87년 한국행위예술협회 발기인으로 참여, 협회 사무국장 ▲99년 프리뮤직(즉흥음악) 본격적으로 시작 ▲2002년 7월 국내 최초로 하우스콘서트 시작 ▲2005년 9월23일 하우스콘서트 100회(예정)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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