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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회복국면 “찬물” 우려/현대그룹 분규

    ◎타업계 파급 불보듯… 쟁의 확산 “불씨”/자동차만 하루 매출손실 1천억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일기 시작한 노사분규의 회오리가 새정부 출범이후 모처럼 형성되기 시작한 업계의 고통분담 분위기를 한꺼번에 휩쓸 기세를 보이고 있다.16일 현대정공 창원공장과 현대중장비,현대중전기가 쟁의행위를 결의한데 이어 현대강관,인천제철,현대종합목재,현대케피코 등 현대 계열사들이 속속 분규에 합류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대우자동차와 대우조선도 조만간 쟁의발생 신고를 낼 움직임이고 19일에는 「대우노조협의회」제2기 출범식이 예정돼 있어 사업장간 연대투쟁의 소지마저 높아지고 있다. 때문에 현대차의 쟁의는 그동안 어렵사리 유지돼온 산업현장의 노사균형을 깨뜨려 80년대 후반의 노사대치 국면으로 몰고갈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엔고의 어부지리에 힘입어 모처럼 살아나기 시작한 자동차 수출에 타격을 주고 하청기업에 연쇄 조업중단의 위기를 불러옴으로써 가까스로 살아나려는 경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울산사태의 배경은 해고근로자의 복직문제나 「무노동 부분임금」등 정부의 노동정책이 오락가락해 증폭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여기에 노총이 노동계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고 경총과 임금협의를 마친 것이나 연례행사로 반복되는 정부의 한자리수 임금억제책이 가세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특히 현대 계열사가 쟁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대해 일각에서는 정주영 전 회장의 대선출마때 근로자들이 보내준 지지에 대한 현대 경영진의 무성의를 규탄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분규의 원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분규가 몰고올 경제적 파장이 크다는데 심각성이 있다.현대차만해도 하루 조업중단시 4백75억원의 매출손실(부품업체손실 포함)이 발생한다는게 상공자원부 분석이다.임직원 4만명은 물론,2천6백여 협력업체와 구매업체 16만명의 고용도 불안해진다.부품업체의 조업중단은 다른 자동차업체에까지 파급효과를 줄게 자명하다.자동차업계가 하루 조업을 중단하면 완성차업계는 하루 6백억원(8천대),부품업계는 3백억원의 매출손실을 보게 된다. 자동차 생산과 수출 차질은 엔고로 고전하는 일본업체에 다시없는 시장탈환의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실제 현대차는 86년 미국에 포니 엑셀을 처녀 수출,88년에는 57만5천대의 수출실적을 올렸다.그러나 87년 이후 지속된 노사분규에 따른 품질저하와 가격경쟁력 상실로 대미 자동차수출이 90년에는 34만6천대로 격감했다.91년이후 수출이 회복됐지만 지난해 수출은 45만6천대로 여전히 88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올들어 그나마 수출이 되는 제품이 자동차다.4월까지 중국특수와 엔고 덕분에 무려 1백7%라는 수출증가율을 기록,전체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그러던 것이 지난달 범퍼제조업체인 아폴로산업의 조업중단사태 하나로 수출증가율이 46.5%로 뚝떨어지기도 했다. 현대자동차의 노사분규는 자동차산업,나아가 국가경제의 사활과 직결돼 있어 신경제의 시험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 「떠오르는 태양」서「사정낙엽」으로/「6공 황태자」박철언의원의 성쇠

    ◎인사·북방정책·합당과정 “실세중 실세”/“권력지향… 노 정권 망쳤다” 비난 받기도 박철언의원이 21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사와 마주 앉았다.단지 조사를 받는다는 차원을 넘어 사법처리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검찰 고위직 인사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몇년 전을 생각하면 그로서는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6공초·중반 정확히 3당합당직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권력의 황태자」였다.주변의 모 인사는 「떠오르는 태양」이라고까지 치켜세웠다.정상급 인사들까지 그의 눈치를 살폈고 권력지향의 사람들은 그에게 줄을 대려고 애를 썼다.노태우전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그는 주요 인사와 정책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그의 힘은 말 그대로 「무소불위」였다. 힘이 지나치면 부작용도 클 수 밖에 없다.그는 권력핵심부에서 독주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었다.가까울 수 밖에 없었던 인사들도 어느 순간 그에게 등을 돌렸다.그는 자신의 몰락에 대해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그를 아는 상당수 사람들은 「자업자득」「사필귀정」이라고 평가했다.방자하다고까지 비친 독선적 행동이 부른 당연한 결과라는 시각이다.한 여권인사는 그가 철저하게 권력지향적이었고 지나치게 권력을 즐겼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80년 국보위 법사위원으로 차출되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서울지검 평검사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당시 국보위에 참여한 검사는 불과 3명 뿐이었다.발탁의 배경에는 노전대통령의 처고종사촌이라는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공이 출범하면서 그는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들어갔고 얼마후 법무비서관을 맡았다.당시 정치풍토쇄신법·학원안정법등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법안을 구상하는데 이론적 기초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장세동 전청와대경호실장이 안기부장에 임명되면서 전두환전대통령에게 특별히 요청,그는 안기부장특보로 자리를 옮겼다.5공 핵심부의 두터운 신임에 따른 결과였다.검찰에도 적을 두고 있던 그는 얼마후 검사장급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그는 사시 8회 출신으로 동기들은 아직 한사람도 검사장에 오르지 못했다.안기부에 재직하면서 그는 권력의 주요정보를 당시 민정당대표이던 노전대통령에게 전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그는 87년 대선 당시 월계수회를 구성,노전대통령의 당선에 큰 기여를 했고 노전대통령의 핵심참모로서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6공출범과 함께 청와대정책보좌관을 맡은 그는 노전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속에 국정전반을 주도했다.13대 전국구 의원을 겸직한 그는 89년에는 정무제1장관에 취임,당정업무 전반을 장악했다.그는 각종 인사에 관여했고 특히 서열을 중시한 검찰등 권력기관의 인사에 깊이 개입,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13대 공천에서의 5공인사 대거 탈락,뒤이은 5공청산,정호용의원파동에 막후역할을 한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그는 전전대통령이 말한 『손좀 봐야 할 사람』가운데 첫 손가락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3당통합 직후까지도 막강한 위치에 있었다.이른바 「신TK」의 중심으로 한때 그의 주변에는 30∼40여명의 의원들이 모였다.차기대권후보로 까지 거론되기도 했다.그의 정치적 야망은 노전대통령이 사조직인월계수회를 관리하라고 지시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민자당대표이던 김영삼대통령과의 대립은 그의 정치적 위상을 급전직하시켰다.그는 90년 3월 김대통령의 구소련행을 수행하고 귀국,『내 한마디면 정치생명을 끊을 수도 있다』고 말해 김대통령과의 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었다.그 여파로 그는 정무장관에서 물러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91년 4월에는 월계수회에서도 손을 떼야만 했다.이후 민자당 대권경선에서 반YS노선을 걸으며 재기를 노렸지만 실패를 거듭하다 지난해 10월 민자당을 탈당,국민당에 입당했다.6공후반 그는 노대통령으로부터도 따돌림을 받는 처지가 됐다.아직도 민자당의 많은 민정계 의원들과 6공시절의 각료들은 『노대통령의 초반은 박철언씨가 망쳤다』고 비난하고 있다.
  • 「반란」에서 명예회복까지/13년만에 제자리찾은 「광주민주화운동」

    ◎80년 5월18일 「광주소요사태」로 발표/85년 2·12총선때 신민당서 쟁점화/5공때 특사 등 미봉책… 진상규명 숙제로 80년 5월18일. 광주일원에서 시작된 학생·시민들의 시위는 「광주소요사태」→「광주폭동」→「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13년의 세월이 흘렀다.긴세월동안 광주문제는 「반란」에서 「명예회복」까지 숱한 변천을 거듭해온 것이다. 그동안 당사자는 물론 전국민들의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있던 「5·18광주」문제.어떠한 성격규정의 변화와 해결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가. 당시 계엄당국은 광주시위를 「소요사태」로 표현했다가 유혈사태로 확대되자 「무장시민폭동」이라고 규정했다. 5·18이후 출범한 제5공화국은 정권 내내 광주관련단체와 재야·학생들의 「진상규명및 명예회복」요구에도 불구하고 「광주폭력시위」「시민폭동」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다만 상처를 치유하고 국민적화합을 한다는 명분으로 사태관련자에 대한 특별사면과 장례비·치료비 수준의 보상에 문제해결의초점을 맞추었다. 당시 정부는 81년 3월3일과 4월4일 두차례에 걸쳐 3백89명의 사태관련자 전원을 특별사면및 감형조치했다. 국민들은 당시 정확한 진상을 모른채 엄청난 시위와 진압,총격전으로 인한 사상자를 남긴 사건으로만 전달받았다. 광주사태에 대한 성격규정이나 진상조사문제는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5공당시에는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광주의 한」은 내연하고 있었다.해마다 5월이 오면 광주는 물론 전국의 학생·재야들이 술렁거렸고 간단없이 시위가 이어졌다. 「5월문학」이나 「5월시」라는 문학용어가 새로 탄생했고 「5월의 노래」등 광주와 관련한 수많은 시위노래도 등장했다. 광주진상규명문제가 최초로 정치쟁점화한 것은 신민당돌풍을 몰고온 85년 2·12총선때였다. 이어 87년 1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당시 노태우후보에 맞선 김영삼·김대중후보가 각각 정승화·정웅씨를 끌어들여 광주문제를 최대선거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이때부터 광주문제는 가장 큰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따라서 당선된 노후보는 광주문제 해결을 위해 취임전에 「민주화합추진위원회」(위원장 이관구)를 발족시키게 됐다. 「민화위」에서는 광주문제 성격규정을 놓고 진압당사자·피해당사자간의 뜨거운 논쟁이 오갔다. 「과잉진압에 따른 시민무장」이 시민들의 주장이었고 「폭도를 진압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군당사자들의 주장이었다. 과격시위와 과잉진압이라는 양비론과 당시 상황이 서로를 어쩔수 없는 국면으로 몰아갔다는 양시론이 적당히 조화를 이뤘다. 결국 「민화위」는 그동안의 「광주사태」로 표현되어오던 것을 처음으로 「광주학생·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성격을 긍정적으로 규정하고 정부차원의 사과와 보상을 노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광주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명명된 것은 88년 11월 여소야대상황에서 발족된 「광주특위」에서였다. 광주특위는 13회의 「광주청문회」를 통해 66명의 증인들을 출석시켜 과잉진압여부·발포책임·양민학살에 대해 진상규명작업을 벌였고 그해 12월31일 전두환전대통령까지 증언대에 세웠다.비로소 역사에 「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에 6공정부와 국회는 민주화운동에 상응하는 피해자보상을 위해 「광주민주화운동 보상법」제정에 착수,90년 7월 법률공표에 이어 91년 3월 피해대상자에 대한 보상금지급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국민일각에서는 보상금지급과 기념사업만으로는 광주문제에 대한 원천적 치유는 안된다는 여론이었다. 광주문제에 대한 성격규정과 물질적보상 이외에도 명예회복 역사정립등 국가적차원의 해결이 필요하다는 것이 13년이 지난 오늘까지의 숙제였다. 결국 김영삼대통령의 13일 광주특별담화는 이같은 풀리지 않는 숙제에 대한 역사적 해법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 「12·12」 공개질의서 제출/민주,청와대에

    ◎「쿠데타」 규정여부 등 6개항/“「헌정사의 오점」 이미 평가” 박관용실장 민주당은 12일 황인성국무총리의 12·12사태 발언과 관련,김영삼대통령의 견해를 묻는 공개질의서를 청와대에 전달하고 13일까지 답변해줄 것을 요구했다. 민주당은 이날 상오 국회에서 당무위원·의원 연석회의를 갖고 『문민정부를 열었다는 현 정부의 초대총리가 국민의 기대에 반하고 역사를 왜곡한 발언을 서슴지 않은데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면서 6개항의 공개질의서를 채택했다. 민주당은 이 공개질의서에서 ▲김대통령이 87년 대선 당시 「12·12사태는 불법쿠데타」로 규정한 견해는 아직도 유효한지 여부와 ▲현정권은 12·12사태를 계승한 정부인지 ▲「12·12사태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청와대 이경재공보수석은 공적발언인지 아니면 개인적 견해인지 등을 물었다. 민주당은 또 물의를 일으킨 황총리의 사임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를 질의했다. 이자리에서 박실장은 『12·12에 대한 김영삼대통령의 평가는 모든 국민이 잘 알고 있으며 그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하고 『특히 청와대대변인이 성명을 통해 헌정사의 씻지 못할 오점』이라고 규정한 것은 실정법을 뛰어넘는 평가를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
  • 「황 총리 발언파문」 여야의 입장

    ◎공식사과로 매듭… 현안 처리하자/민자/돌출 호재… 해임요구 등 정치공세/민주 황인성국무총리가 지난 8일 국회본회의에서 『12·12사태는 불법이 아니다』라고 답변한 것과 관련,달아오를 듯하던 정국은 황총리가 9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사과발언을 하고 10일의 여야 총무회담에서 이문제를 국회운영과 연계시키지 않기로 합의를 봄에 따라 일단 위기국면은 넘긴 것으로 보인다. 민자당은 이날 고위당직자회의를 열어 황총리의 발언을 불문에 부치기로 입장을 정리했다. 민주당도 10일 최고위원회의와 의원총회를 잇따라 열고 「김대통령의 입장표명」「황총리해임촉구」등의 당론을 결집했지만 당초 이의 관철을 위해 고려했던 상임위활동거부,황총리해임권고결의안 제출등의 강경방안은 유보하기로 했다. 민주당의 이같은 결정은 상임위활동을 거부했을 경우 공직자윤리법개정등 당면한 과제를 정적이해에 매달려 외면했다는 국민적 지탄이 두렵고,또 부결될 것이 뻔한 해임 권고결의안을 서둘러 상정할 경우 더 이상의 정치공세도 무의미하게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민자당◁ 황총리가 기자회견을 자청,공식사과를 한만큼 더이상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고 일단락짓자는게 민자당의 대체적인 기류이다. 이날 상오 국회에서 김종필대표주재로 열린 고위당직자회의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당론으로 이어졌다. 특히 민자당은 총무회담에서도 황총리사퇴를 요구한 민주당측 주장에 분명한 반대입장을 전달했다. 결과적으로 민자당은 민주당측이 당장 이문제로 대여공세의 고삐를 죄고있지만 대형쟁점으로 비화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않을 것으로 보고있다. 공직자윤리법등 중요현안을 처리해야 할 이번 임시국회가 예전처럼 파행운영돼서는 안된다는 「당위성」을 민주당측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황총리발언을 상위활동과 연계시키지 않겠다는 민주당측 입장도 이같은 대목을 감안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황총리발언에 사견을 전제,아직도 문제점을 지적하는 인사들도 적지않다.이들은 12·12사태에 대한 김영삼대통령의 시각을 거론하며 「부적절한 시기에 적절치 못한답변」등의 표현으로 황총리의 돌출행동에 불쾌감을 나타냈다. 또 김대통령의 입장을 밝히라는 민주당측 요구에 대해서도 『기록을 찾아보면 나올 것』이라며 과거 야당총재시절 김대통령이 「군사반란」으로 규정했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편 김대표는 지난8일 본회의산회직후 국무위원들과 만찬을 가진 자리에서 황총리가 해명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으며 황총리도 9일저녁 이성호의원등 일부당무위원들과 만나 당측의 분위기를 전달받고 협조를 당부했다는 후문이다. ▷민주당◁ 이날 최고위원회의와 점심까지 회의장에서 도시락으로 때운 의원총회에서 황총리의 해임을 김영삼대통령에게 촉구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황총리에 대한 해임요구를 좀더 강력하게 포장하기 위해 황총리의 발언을 「김영삼정권의 공식적 견해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김대통령까지 파문의 당사자로 지목했다. 특히 과거 87년 대선때 당시 김영삼 민주당후보가 12·12사태를 「군사반란」으로 집중부각시켰던 점을 상기시키며 황총리의 발언을 이에 연계시켜 청와대·정부간의 불협화음을 조장하려는 듯한 인상도 노출시켰다. 이날 채택된 결의문도 황총리보다는 김대통령을 겨냥해 『황총리 해임이라는 대통령의 확고한 조치가 없다면 김대통령 스스로가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적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면서 『김대통령의 확실한 입장천명과 황총리의 즉각해임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12·12사태라는 미묘한 사안에 대한 황총리의 발언은 새정부출범이후 무기력증세마저 보이던 민주당에게 모처럼만의 호재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민주당은 이를 「민주발전」과 「역사성」측면으로까지 연결시켜 정치공세를 펼치는등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도 대응수위에 대해서는 다소간 의견차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날 최고위원회의가 상임위활동과 황총리 발언파문을 연계시키지 않기로 한 것이나 황총리해임요구에 대한 김대통령의 태도를 며칠간 주시한뒤 해임권고결의안제출및 상임위활동보이콧을 결정키로 한 것은 정치공세의 한계에 대한 민주당의 고민을 드러낸 것이다. 결국 황총리발언파문은 민주당에게는 정치공세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되었지만 이 발언파문이 민주당의 극한투쟁상황까지 몰고 갈지의 여부는 임시국회회기중 여야가 막닥뜨려야하는 공직자윤리법개정 등 정치관련입법협상 절충과정에 달려있다고 보여진다.
  • 빠찡꼬 정씨 3형제

    ◎도부의장 “방패역”/형 덕중씨/4호텔 맡아 돈 관리/동생 덕일씨 검찰이 슬롯머신업계를 둘러싼 정·관계 비호세력의 정체파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구속된 정덕진씨의 동생 덕일씨(44)와 형 덕중(55)의 소환을 서두르고 있어 이들의 역할을 놓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덕중씨는 현재 강원도의회 부의장으로서 일찍이 뛰어난 사교술로 여권내 실력자들과 두터운 교분을 맺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덕중씨는 아우 정씨가 70년대말부터 터를 닦아놓은 슬롯머신업계가 사행업종으로 분류돼 당국의 규제·단속대상이 되기 직전인 90년까지 슬롯머신협회장직을 맡아 고아원방문·군부대위문품전달등 사회봉사활동으로 슬롯머신업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를 관리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당국이 슬롯머신업소들의 각종 불법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91년3월 사행행위단속법을 개정하자 덕중씨는 미련없이 회장직을 내놓고 정씨의 카지노사업으로 연고를 맺은 강원도 도의회부의장에 출마,당선된뒤 표면상 슬롯머신업계 활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에앞서덕중씨는 87년 대선당시 노태우후보의 사조직인 「태림회」영등포지부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2백억원의 정치헌금을 했다는 소문도 있어 정치자금법위반 혐의로 검찰의 내사를 받기도했다. 덕중씨는 이 과정에서 박철언의원등 노후보의 사조직을 이끌던 여권내 실세들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이밖에도 덕중씨는 유기장업법위반 혐의등으로 5차례나 입건됐음에도 불구하고 벌금형이외에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고 특히 89년 10월21일 제44회 경찰의날에는 당시 김태호내무부장관의 감사패를 수상하는등 뛰어난 수완으로 슬롯머신업계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온 것으로 검찰은 보고있다. 검찰이 덕중씨보다 정씨의 슬롯머신사업에 깊숙이 간여해온 것으로 보고 있는 인물은 동생 덕일씨(44). 그는 정씨가 인수한 7개의 관광호텔 가운데 인천과 서울 석촌동·화곡동·상봉동등에 4개의 뉴스타관광호텔을 경영하면서 정씨의 자금관리를 맡아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덕일씨는 89년 동양상호신용기금으로부터 7개 사업체 운영자금으로 20억원을 대출받으면서 사업자등록증등 관계서류를 위조한 혐의등으로 정씨 소환에 앞서 검찰의 수사대상에 올랐으나 뚜렷한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출국금지만 된채 소환이 미루어져왔다. 덕일씨는 나아가 2백70여개로 추정되는 정씨의 가명·실명계좌 가운데 1백여개를 관리하면서 정씨가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등 조직폭력배들과 업소확장을 둘러싸고 생기는 마찰에 대한 조정역할을 맡아온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 정덕진·안영모씨 사건 파문 확산

    ◎“빠찡꼬 태풍 오나” 정치권 초긴장 ◎“검은돈·비자금 흘러들었다” 분분한 주장/청와대선 “불법유착의 상징… 발본하겠다” 정치권에 다시 사정바람이 일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안영모동화은행장의 비자금조성의혹과 「빠찡꼬의 대부」정덕진씨 사건은 정가에서도 「태풍의 눈」이다.상당수 정치인들이 연루됐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두 사건이 「온대성 저기압」으로 바뀌어 정치권을 비켜갈지,재산공개파문처럼 「A급 태풍」이 될지,속단하기는 어렵다.다만 검찰수사 과정에서 단편적으로 흘러나오는 얘기와 떠도는 풍문이 심상치 않아 모두들 긴장하고 있다. 안행장 건과 정씨 건은 성격이 다르다.안행장건은 동화은행설립과정을 전후,6공 실세들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주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정씨건에 대해서는 여야를 막론,다수 정치인들이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안행장건은 6공청산에 국한되어 있지만 정씨건은 여야 정치권 전체의 물갈이까지도 예상할 수 있는 심각한 사건이라는데 대부분 인식을 같이한다. ○…정씨사건이 공개되자 여야 의원들은 『올 것이 왔다』며 그 파장의 엄청남을 우려하고 있다. 민자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정치권에 연루된 인사가 너무 많아 이제까지 손도 못댄 사건으로 알고 있다』며 『정부가 정씨사건 수사에 본격 착수한 것을 보면 신여권 실세들은 정씨건에 관한한 결백한 것같다』고 관측했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도 『정씨 수사가 착수단계이지만 벌써 의미있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말해 정치권 연루자명단이 드러나고 있음을 시사했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정씨는 빠찡꼬 사업을 늘려가면서 한 업소당 정치인은 물론 경찰·검찰 고위간부들을 주주로 초빙했다는 것이다.1억원 쯤의 자본금을 받아 월1천만원 정도의 수익을 돌려주는 수법을 썼다는 전문이다.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씨가 전국에 수백개의 빠찡꼬업소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연관 인사가 얼마쯤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야권에서는 정씨가 지난 87년 대선시 구 민정당선거사조직으로 알려진 태림회에 참여했던 사실을 들어 정씨에 대한 조사가 전직 대통령가족이나 P의원 등을 겨냥한 것이라고 풀이한다.또 L의원 등을 통해 정씨 자금이 최근까지 여권정치자금으로 공급됐다는 주장도 한다. 이에대해 여당측에서는 야당 의원도 관련인사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야당 전국구 공천헌금에 빠찡꼬자금이 유입됐다는 소문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선·총선자금 일부가 빠찡꼬자금으로 쓰여졌다는 의혹까지 제기한다. 정가 일각에서는 정씨 사건이 미칠 파장을 우려,극소수 정치인·정부인사처리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으리라는 전망도 있다.그러나 청와대측의 의지는 확고한 것으로 관측된다.다른 비이도 그렇지만 정씨 사건을 정·관과 불법사업유착의 상징으로 인식,발본색원하겠다는 태도이다. ○…안행장사건은 그가 조성한 비자금이 정치권에 「뇌물성」으로 흘러들었느냐가 관심이다.동화은행 내부투서나 검찰주변 얘기로는 6공 핵심으로 분류되는 L·K의원이 안행장으로부터 수억원 씩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앞서 정씨 사건에서 거론된 P의원이나 안씨 사건의 L·K의원 등은 모두 『정치자금을 받은 바 없다』고 잘라 말한다.소문에 근거한 「상처내기」「여론재판」으로 정치적 고사를 노리고 있다는 반박이다.일부에서는 이들 6공 핵심들이 「폭탄성 비밀」을 알고 있어 사법처리는 안되리라는 예상도 대두된다. 강재섭 민자당대변인은 『이같은 사건에 대해 검찰수사를 지켜볼 뿐 미리 알아볼 의도는 없다.따라서 정치적 처리방향도 아직 정해진 바 없다』고 밝혔다.공식적으로는 아직 「무대응」이지만 내부 고심은 상당할 것이 틀림없다.
  • 김 대통령­언론사 사회부장단 대화 내용

    ◎“사정속도 지금이 적당하다”/청와대선 원칙만 제시… 획일사정 안해/군은 명령 따라야… 반발은 있을수 없어 김영삼대통령은 4일낮 중앙언론사 사회부장들을 초청,점심을 함께 하며 사정·군인사비리수사·경제문제등 국정 현안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요즘같은 개혁 드라이브는 언제 계획한 것인가. ▲집권하기 전부터 깨끗한 정치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재산공개등은 그때부터 구상한 것이다.깨끗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은 나의 신념이자 국민과의 약속이다. ­중복사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각 사정기관의 사정활동은 각기 별개의 차원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사정문제를 놓고 청와대에서 지시를 하거나 획일적인틀에 맞추어 진행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자꾸 사정진행에 문제가 있는양 보도하는데 언론이 30여년간의 타성에 젖어 사안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과거에는 사정을 지시에 의해 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원칙을 제시할 뿐이며 성역없이 하는 것이 사정의 취지이다. ­사정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지적이 있는데 ▲지금의 속도가 적당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더 많다. 94%의 국민이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지금같은 사정활동이라면 세금을 더 내도 좋다는 국민이 51.6%나 된다는 사실은 외국의 어느 나라에서도 예를 찾아 볼 수없는 현상이다. 국민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변화와 개혁은 꼭 우리가 가야할 길이고 이 시대의 대안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정은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우리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야한다.과거를 들추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그러나 과거의 너무 큰 부정을 덮어두고 나가면 국민들이 용납을 하지 않을 것이다.곪은 것은 절대 살이 될 수 없다.도려내야 한다.부정부패는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사회기강을 바로 잡겠다는 것은 선거공약이기도 하다. ­육군에 대한 인사비리수사는 안할 것인가. ▲그것은 조사중에 있으니 잘모르겠다.지난번 육군수뇌부인사는 대담한 것이었다.잘못된 것을 완전히 바로 잡았다. ­군인사비리 수사문제에 대해 반발움직임이 있다는보고는 못받았나. ▲솔직히 군에서 누가 반발하는가.「제복」들은 명령이면 그만이고 옷벗기면 그만이다.딱 명령이 떨어지면 죽기아니면 살기다. 군인사문제는 취임하기전부터 대통령 또는 군통수권의 차원에서 과거 사람을 두고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해왔다.문민시대가 그런 사람들과 적당히 타협해나간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 ­광주문제의 해법은 무엇인가. ▲해결방안을 가지고 있지만 미리 얘기해서는 안된다.광주문제는 나자신이 엄청난 피해자라는것을 인정해 주면된다(광주사태와 연금 단식때 핍박받은 일들을 자세히 설명). ­골프에 대하여 ▲해라 하지말라고 직접 얘기한적이 없다. 상당히 오래전에 골프를 했으나 지금은 할 생각이 없다. 전에 골프장 사장이 회원으로 들라고해서 돈이 없다고 했더니 조그만 내고 이름만 등록하라고 하여 회원이 됐었다.그러나 국회에서 제명이 되어 골프를 할 시간도 없었고 10년동안 안했다. 그러다가 87년선거때 돈이 필요해 회원권을 5천만원에 팔아 잘 썼다.골프회원권이 그렇게 금방 돈이 되는줄도몰랐었다. 13대 국회때 몇번 나갔는데 그때마다 신문에 나고해서 대통령이 돼도 안치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나는 골프를 안치겠지만 누굴보고 치지말라고 강요하는게 아니고 나의 임기5년동안 모든 정성을 바쳐 성실한 대통령으로 남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대통령령이 골프를 안한다는 것은 공직자들에게 하지말라고 하는 것 아닌가. ▲(너털웃음으로 대답을 대신) ­두달쯤 해보니 대통령이 할만하다고 생각하는가. ▲별것을 다묻네.대통령은 책임이 너무 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십이다. 이번 개혁도 국민과 함께 하는 것이다.그리고 언론,특히 사회부기자들과 같이하는 것이다. ­육군인사비리와 삐찡꼬수사에 대한 가장 최근의 보고는. ▲사정엔 성역이 없다.이거해라 저것을 해라 하는 식의 사정은 없다.사정당국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선택해서 하는 것이다. ­사정 때문에 재벌들이 긴장하고 있다는데. ▲왜 긴장하는가.돈 갖다줄데도 없고 받을 사람도 없는데.진실되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동화은행에서 돈먹은 6공인사들의 명단을 밝힐수 있는지. ▲그런 것은 묻지 말아달라. ­언론사에 대한 세무사찰이야기도 있는데. ▲다시 이야기하지만 사정에 성역은 있을 수 없다.신문들은 남의 탈세사실을 크게 쓰더니만….
  • 부정입시의 도덕불감증이 문제다(사설)

    대학의 부정입학 파동은 지나간 것으로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오히려 종전의 그것에 비길수 없을 정도로 큰 파란이 일고 있다.경원대 입시부정사건이 그것이다. 진작부터 나돈 투서와 제보가 발단이 된 이 사건은 불이익 받은 쪽에서의 상대방에 대한 음해가 목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그래서 이 사건이 보도되기 시작하자 「경원대학교·경원전문대학 교수일동」명의의 『무기명 투서에 의존한 일부신문과 방송의 보도 태도를 개탄』하는 성명서가 일부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또 연행되어간 교수들이 제보내용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그러나 경찰조사에서 교학처장·전산실장등이 부정사실을 시인함으로써 투서·제보 내용이 조작만은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아직 수사가 진행중인 시점이긴 하다.하지만 구체성을 띠고 있는 제보내용에서 먼저 우리를 놀라게 하는 대목이 부정입학의 규모이다.입시자료를 소각하여 확인할 수 있을 것인지 어쩐지는 알수 없으나 최근 3년 사이 6백여명이 부정입학했다고 한다면 그건 학원이 아니라 복마전이었다고 할 것이다.거기에 교수채용에 있어서의 금품수수 부정사건까지 가세하고 있다. 경원대의 부정사건은 이 대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게도 한다.재단설립 15년만에 대학과 전문대,3개대학원 1만 3천여명 재학생을 갖춘 사학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것은 그 과정에 비정상이 개재했던 것임을 말해 주고도 남는다.교육부(당시의 문교부)의 눈가림 감사는 김전총장이 87년의 대선때 여권의 자금책으로 활약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부정입학을 적발하고도 유야무야해버린 감사나 입학청탁에 연루되는 이름들 가운데 지난날의 고위직 공직자등 각계각층의 유력인사가 끼여있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불정공생의 사슬관계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교육이라는 이름아래 자행된 양두구육의 불법·비리라는 점이 우리를 더욱더 악연하게 하고 처연하게 한다.사회정의의 불재와 총체적 도덕불감증의 비애를 거푸거푸 곱씹어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비단 경원대에 국한되지 않는,그런 유형의 교육기관에서 어떤 교육이 이루어져 왔을까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그 동안 학원이 시끄러웠던 이유의 상당부분이 그런 데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시비곡직이 어서어서 분명히 가려져야겠다.선의의 교직자와 학생들이 받는 고통을 생각할 때도 그렇고 국민들의 정신위생을 생각할 때도 그렇다.제보자도 더이상 얼굴을 감추지 말고 당당하게 사건 앞으로 나와서 수사에 협조할 것을 당부한다.
  • 선관위의 올해 10대과제와 공명대책(국정탐방)

    ◎능동·전향적 기구로/“보선과열 차단”… 초동활동 강화/공공단체·노조 등 선거관리 첫 지원/통일대비 북한선거제도 능동 연구 중앙선관위가 바빠졌다.오는 23일의 보궐선거 탓만은 아니다. 과거처럼 선거때만 잠시 활동했다가 동면에 들어가는 한시적인 기구라는 부끄러운 이미지를 벗고 상시활동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주위 비난도 사라져 때문에 「선거때만 아니면 놀고 먹는 곳」이라는 주위의 비난도 이제는 사라졌다. 30살을 맞은 선관위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 경기도 선관위는 광명시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한달남짓 앞두고 금품 향응제공 등 불법사전선거운동의 혐의가 있는 차모씨(52)등 10여명을 수원지검에 고발했다. 불법타락선거운동에 대해서는 더이상 과열되기전에 초동단계부터 강력히 차단하겠다는 의지에서다. 선관위는 올해 「돈 안드는 선거」「깨끗한 선거」풍토를 이 땅에 뿌리내리려는 의욕에 넘쳐있다. 선관위가 올해 추진하고 있는 10대 과제는 이런 의미에서 예년에 비해 능동적이고 전향적이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지방자치관련 선거 등 분리돼있는 각종 선거법을 하나로 묶는 통합선거법제정이 그렇고 통일에 대비한 선거제도 마련을 위한 북한선거제도 연구가 또한 그렇다. 정부나 정당이 추진하는 정당법 및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 개정에 대해서도 비록 고유업무는 아니지만 효율을 높이기 위해 자체에 의견을 낼 계획이다. 특히 공공단체나 노동조합·학교·사회단체 등 선거를 치르는 모든 단체를 대상으로 선거지원 활동을 처음으로 벌이는 것도 눈에 띈다. 각급 학교의 교과서 개편시에 선거관련부분을 강화해 어린 학생들에게 공명선거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선거교육을 추진하고 있다. 이밖에 공공단체의 선거를 위탁받아 관리하고 선거정치관련 순화용어집 발간「선거연수원 실시」투개표 관리사무의 실질적 개선등을 계획하고 있다. ○높아진 위상을 실감 선관위는 창설이래 끊임없이 공정성 시비에 휘말려 왔다. 지난 61년 발족이후 6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비롯해 각종 선거를 24번이나 치렀지만 불법타락선거를 감시하는 파수꾼 역할에는 미흡했다는 비난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해 대선이후의 선관위는 확실하게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대선후보들이 승패에 관계없이 윤관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처음으로 노고를 치하한 것만 보더라도 높아진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있은 국회의 선관위법 개정에서는 선관위 사무총장의 직급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시켰다. 선관위는 스스로의 활동상을 「태동기」「발전기」「성숙기」로 구분짓고 있다. 지난 61년 발족 첫해부터 지난 80년까지인 「태동기」는 단순화된 계도활동에 국한됐고 81년부터 90년까지의 「발전기」에는 선거계도의 기법이 본격 개발된 시기였다. 90년부터의 성숙기는 선거관리 기능을 실질적으로 강화하고 선거개혁을 이뤄내는 역사적 전환기인데 이의 시발은 89년 12월의 동해시 재선거때부터이다. 동해시 재선거 이전까지의 선관위는 투개표 관리에만 주력해 왔을뿐 불법 타락선거운동의 억제나 단속은 사법기관의 소관사항으로 미루고 묵인·방치해온게 사실이다. 선관위는 당시 후보자 전원 고발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동원한 것을 시작으로 91년 기초·광역 지방의회 선거와 92년 총선·대선을 거치는 동안 변신을 거듭해 왔다. ○직원 1천8백여명 불과 2년전인 91년 1월 선관위가 자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선관위가 「행정부의 부속기관」이라는 응답자가 16%에 이르러 국민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던 사실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지난해 대통령선거가 끝난 시점에 한국선거연구회가 실시한 국민면접조사 결과 79.1%가 선관위의 선거감시활동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중앙선관위는 현재 윤관위원장을 필두로 1실 4국 4담당관 8과로 구성돼 있고 직원은 모두 1천8백42명,그리고 산하에 각 3백8개 시·도·군·구 위원회를 둔 방대하고도 중요한 조직으로 발전했다. 지난 89년이후 열악한 근무환경속에서 선거감시 활동을 펴다 순직한 선관위 직원들은 모두 7명. 더 이상 「놀고 먹는 곳」이 아닌 선관위의 현재 모습이다. ◎역대 위원장 뒷얘기/초대 고 사광욱씨 헌법기관 위상세운“대쪽”/현감사원장 이회창씨는 최단명 용퇴기록 역대 중앙선관위 위원장가운데는 대법원장을 지낸 경우가 없다. 운이나 능력탓이 아니라 정치적 외풍에 항상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대법관이나 대법원 판사 출신이 맡아온 중앙선관위 위원장을 두고 「잘해야 본전」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온게 지금까지의 현실이다. 그러나 서슬 시퍼런 독재정권하에서도 「대쪽」같은 업무처리로 공명선거를 정착시키는데 앞장서온 위원장도 많다. 선관위는 지난 63년 출범 첫해부터 5년간 재직한 사광욱씨(작고)를 시작으로 9대인 지금의 윤관위원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위원장은 갓 태어난 선관위가 명실공히 헌법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세울 수 있도록 권력에 굴하지 않은 숱한 일화를 많이 남긴 인물. 그는 64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각 부처 연두순시때 『헌법기관인 선관위를 행정부의 장인 대통령이 어떻게 순시할 수 있느냐』며 정면으로 거부한 장본인이다. 또 67년 국회의원 선거때는 대통령의 선거지원 유세를 놓고 법률적인 논쟁이 벌어지자 『대통령은 공무원의 신분이므로 선거지원 활동을 할 수 없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당시 박대통령이 선관위 위원장에게 압력을 가해 유권해석을 번복시키고 선거법시행령을 개정,대통령의 선거지원활동을 가능하게 하자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맞서기도 했다. 사위원장의 뒤를 이은 주재황씨는 2,3,4대 위원장으로 무려 13년 2개월간을 재직해 최장수기록을 남겼다. 그는 대통령선거 1회,국회의원 선거 4회,3선개헌,5공 헌법개정 국민투표 등 모두 12차례의 각종 선거를 대과없이 마무리했으나 정치환경 등으로 독립기관으로서의 노력은 다소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5대 위원장을 지낸 김중서씨는 재임기간중 단 한번의 선거도 치르지 않은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강우영6대 위원장은 신당돌풍이 몰아쳤던 2·12총선 당시 정치규제로 묶여 있던 김영삼·김대중 양 김씨의 이름을 야당 후보들의 벽보문안에서 삭제토록 지침을 시달한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6·29이후 민주화과정에서 대통령선거와 총선을 치러낸 윤일영 7대 위원장은 선관위 창설이후 처음으로 불법 벽보와 현수막을 철거하는 등 물리력을 동원하는 단호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새 정부의 감사원장으로 추상같은 사정의지를 천명하고 있는 이회창 8대위원장은 1년 3개월의 가장 짧은 재임기간과 스스로 사퇴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두가지 기록을 남겼다. 그는 당시 노태우대통령이 유권자들에게 민정당의 나웅배후보를 지지해달라는 서한을 발송한데 대해 위법소지가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려 불법선거 감시에 성역이 없음을 보여줬다. 동해·영등포 을 재선거때 불법타락 선거의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 그는 89년 당시 선관위원장의 국회출석 답변을 잘못된 관행이라고 지적,91년부터 사무총장이 국회 상임위 출석답변을 맡도록 하기도 했다. ◎“각종 선거법 통합 추진”/각급 교과서에 「공명」교육내용도 보강/김봉규 선관위사무총장(인터뷰) 『지난해 12월 실시한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공명선거가 정착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올해로 창설 30주년의 청년기를 맞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김봉호사무총장은 앞으로 정책경쟁 중심의 선거풍토가 자리잡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창설때부터 이곳에 몸담아온 김총장은 지난해 차관급이던 직책이 국무위원급으로 격상된 것을 두고 선관위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탓이라고 말했다. ­창설 30주년을 맞은 소감은. ▲태동기부터 일해온 저로서는 누구보다 감회가 큽니다.무엇보다 지난 대선이후 공명선거가 뿌리내리고 있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는게 더없이 값진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선관위를 헌법상 독립기관으로 설치하는 것은 외국에서도 예가 드문데 그 배경은. ▲광복이후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날때까지 자행된 선거양태로 보아 일반 행정기관이 공정성을 갖고 선거를 관리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공명선거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선거관리기관을 두게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내무부 산하에 선거위원회라는 기구가 있었으나 4·19혁명을 계기로 헌법상 독립기구로 됐다가 5·16혁명으로 해체된뒤 3공화국이 출범한 지난 63년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났지요. ­30년동안 선관위가 걸어온 발자취는. ▲3·15부정선거로 인해 헌정이 중단되는 극심한 혼란을 겪은 국민들은 선관위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지금까지도 공명선거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데 대해 국민들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선관위는 지난 87년 13대 대통령선거때만 하더라도 투개표 관리등 행정사무에만 주력했을뿐 불법타락 선거운동의 단속을 사법기관에 미뤄 왔습니다. 87년 대선,88년 총선,89년 동해 재선거를 거치면서 공명선거 분위기의 유도와 국민들의 의식개혁운동의 전개,단속활동의 강화 등을 통해 새로운 선거문화 창조에 중추적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특히 획기적인 계획이 많다는데. ▲먼저 선거마다 단행법으로 돼있는 선거법 체계를 한데 묶는 선거법 통합작업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또한 각종 기관‘단체가 선거관리를 의뢰해올 경우 위탁 선거준비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선거에 관한 의식개혁이지요.선관위는 이를 위해 초·중·고교의 교과과정에 공명선거에 관한 내용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공명선거 구현은 국민적 염원이자 시대사명인 만큼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 「김재순·박준규씨 처리」 청와대의 분위기

    ◎사적 아쉬움 공적 개혁행보에 묻고…/“40년 친구로 가슴아프나 어쩔수 없는 일”/「토사구팽」도 아닌 섭섭함으로 이해 정부와 여당의 재산공개 파문은 일단락됐다.그러나 여진은 남아 있다.공직을 떠나는 등 징계를 받은 인사들 가운데는 분하고 억울해 하는 대목도 있을 수 있다.징계를 가한 입장에서도 사태의 본질에 상관없이 마음이 개운치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청와대는 이번 파문으로 김영삼대통령과 김재순 전국회의장,박준규국회의장 등 세사람의 「40년 인연」이 종지부를 찍은데 대해 아쉬워하는 분위기이다. 김전의장은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토사구팽」(토사구팽·토끼사냥이 끝나니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노골적으로 섭섭한 심정을 나타냈다.박의장은 『본인이 걸어온 길과 원칙에 대해 당으로부터 동지적인 해명과 정다운 비판을 고대한다』는 우회적인 말로 불만을 표출했다. 김대통령을 겨냥해 한마디로 『인간적으로 이럴 수가 있느냐』는 섭섭함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두사람에 대한 청와대의 반응은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김대통령은 김전의장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몇십년 친구로서 가슴 아프다』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하지만 박의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오히려 사법처리 검토 움직임까지 감지될 정도이다. 단편적 시각에서 보면 이같은 차이는 두사람의 처신방법이 달랐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김전의장은 정계은퇴를 선언,결과적으로 김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했다.박의장은 의원직 사퇴 요구에 불복,탈당의 길을 택해 김대통령에게 저항한 셈이 됐다. 그러나 청와대관계자들은 김대통령이 김전의장에게 훨씬 더 큰 인간적인 짐과 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해석했다. 김대통령은 30일 새벽조깅을 끝내고 한 측근인사에게 김전의장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밝히며 다음과 같은 일화까지 소개했다는 것이다. 『지난 87년 대선에서 패배했을 때 이 양반이 제일 먼저 상도동 집에 찾아와 나를 위로했다.당시 김전의장은 「다음에는 김총재에게 기회가 올 것이다.이는 역사적인 필연으로 본다.실망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며 나를 격려했다』 이경재 청와대대변인은 『김대통령이 김전의장의 정계은퇴 선언에서의 비난발언(토사구팽)에 대해 도전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개인적인 섭섭함으로 이해하는 것같았다』고 전했다. 김대통령은 이 측근인사에게 『친구라고 해서 이미 보도되고 실사과정을 통해 나타난 문제사실을 눈감아 주면 문제를 일으킨 다른 어느 누구도 승복하지 않을 것 아니냐』면서 공과 사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또 『나 스스로도 눈물을 흘릴 정도이며 김전의장의 사퇴성명은 듣기에도 가슴 아프다』고 심경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박의장에 대해서는 『김대통령과 5대 국회때부터 친구』라는 정도로만 언급했다.박의장에 대한 사법처리와 관련해서는 『법률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문제 삼는 것 아니냐』는 원칙론만을 얘기하면서 『재산공개가 처벌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닌만큼 꼭 처벌위주는 아니다』라고 여운을 남겼다. 김대통령과 김전의장,박의장은 지난 50년대 야당인 민주당에서 정치적 동지로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김대통령과 박의장은 유석 조병옥박사가 이끌었던 구파소속으로 4·19이후에는 당내소장파 모임인 「청조회」를 주도하며 함께 활동했다.그러나 5·16이 나면서 김대통령은 야당의 핵심 멤버로 계속 남은 반면 김,박 두사람은 공화당에 들어가 노선을 달리했다.이후 김대통령은 야권의 최고지도자로 성장했고 김전의장과 박의장은 여당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세사람은 90년 3당합당으로 정치적 동지로서 다시 만났다.김전의장은 특히 민자당대통령후보 경선을 앞두고 「YS대세론」의 선봉역할을 하며 민정계 인사들을 김대통령의 진영으로 끌어들였다.이에 비해 박의장은 친YS 움직임에 동조는 하면서도 현직 국회의장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소극적이었다.김대통령을 후보로 옹립하는 과정에서도 기여도 측면에서 차이가 났던 것이다. 재산공개 파문이 의도된 시나리오가 아니었다고 강조되듯이 사퇴대상에 김전의장과 박의장이 포함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도 전혀 예상밖이었다고 청와대측은 밝히고 있다. 결국 김대통령과 김전의장,박의장의 결별은 「개혁 드라이브」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해되고 있다.여기에는 김전의장,박의장 두사람이 문제를 자초한 부분을 우선시 해야함은 물론이다.재산내역에서 나타난 의혹부분만을 놓고볼때 두사람은 결코 역사발전의 「희생자」로 간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 재산공개의 큰뜻 바로새겨야(최택만/경제평론)

    국회의원의 재산공개이후 갖가지 가십성 기사가 난무하고 있다.요즘 어떤 의원이 얼마의 재산을 갖고 있다느니,의외로 재산규모가 많다느니,줄인 흔적이 역력하다느니 등 매스미디어가 보도하고 있는 칼럼과 해설기사를 보면서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물론 일부 언론은 의원들의 재산공개가 정당사상 처음있는 일이라고 비중있게 평가하고 있기는 하다. 재산공개의 진정한 의미는 지하경제를 지상으로 끌어올리자는 데 있다.지하경제는 탈세·수회 지하에서 돌아가는 돈을 말한다.일반적으로 지하경제에서 탈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70%,수회등이 30%로 알려지고 있다.우리나라의 지하경제규모는 지난 86년에 7조원대 였는데 87년 20조원대를 넘었고 88년에는 23조원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87년이후 지하경제 규모가 급증한 이유는 87년이후 증시활황으로 금융자산의 규모가 4배나 증가한데다 그해 대통령선거 등으로 음성·불법자금이 크게 늘어난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이 지하경제 규모는 90년도 정부예산규모와 맞먹는다.지하경제가 앞으로 지속적으로 커진다면 국민경제를 크게 교란시킬 우려가 있다. 정경류착에 의한 정치자금은 엄밀히 말하면 수회이고 수회는 지하경제이다.국회의원들의 일부는 정경유착에 의해 부를 축적했는지도 모른다.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의 재산공개는 향후 정경유착에 의한 치부를 단절하자는데 참뜻이 있다.현재 누가 얼마를 가졌느냐를 흥미본위로 공개하자는 것이 아닐 것이다.향후 정경유착에 의해 부를 축적하지 못하게 하자는 큰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이번에 공개된 재산은 최소한 적법한 절차를 통하지 않고 자녀에게 상속 내지는 증여될 수가 없다.한마디로 지금까지 탈법적인 방법에 의해서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상속세나 증여세를 탈루하던 일이 어렵게 된다.고위공직자나 국회의원이 공개된 자산을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탈법적인 방법으로 부를 세습화시켰다가 적발될 경우 공직생활이나 정치생명이 종말을 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재산공개의 또 다른 의의는 재벌이나 대기업이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에게김품을 제공하고 특혜나 이권을 따내는 일이 힘들게 된다는 점이다.고위공직자나 정치인이 정경유착에 의해 앞으로 사재를 늘릴 경우 재산이 불어나게 될 것이다.불어난 재산은 언젠가는 다시 공개될 가능성이 충분이 있다.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정경유착에 의해 치부를 할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되겠는가. 재벌이나 대기업은 지금까지 합법적인 정치헌금이 아닌 불법적인 정치자금은 비자금으로 충당했다.이 비자금은 지난번 대선에서 문제가 크게 된바 있어 국민들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고 하겠다.비자금은 기업이 외형금액을 누락시키거나 분식결산을 해 조성한다.예컨대 탈세를 통해 비자금이 조성된다.비자금은 탈세로 조성되기 때문에 지하경제이다.고위공직자나 의원들이 재산공개이후 정경유착을 단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기업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비자금을 조성하는 일이 줄 것이다. 재벌이나 대기업이 비자금을 조성하는 일이 없어지게 되면 정부가 지향하고 있는 「깨끗한 정치」풍토가 자연히 조성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여기에다 내년쯤해서 김융실명제가 실시되면 불법적인 정치자금 수수는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재산공개와 비자금,그리고 금융실명제를 하나의 연장선에 놓지 않고 재산공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각장애자의 코끼리 더듬기」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문민정부가 정부고위층과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재산공개를 시킨 것 자체만도 개혁이다.재산공개로 일부 인사는 사회규범적인 면에서,도덕적인 면에서 응징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일부에서 공개된 자산에 대해 사회환원 등을 거론하는 것은 도덕적 응징에 이어 경제적 응징을 하자는 것이다.경제적인 응징은 화합적 차원에서 접어두는 것이 어떨까 한다. 재산공개는 우리 국민 모두가 원하고 있는 「깨끗한 정치」,「깨끗한 정부」,「깨끗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개혁의 시동이다.이처럼 중차대한 문제를 사시적감각이나 흥미본위의 사고와 인식에 입각해서 보는 것은 개혁을 반대하는 기득계층 또는 수구세력을 돕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연극배우 최종원씨(이세기의 인물탐구:20)

    ◎혼신다해 역동적 연기하는 “진짜 배우”/주어진 역할에 정열바쳐 특유의 개성표출/「리어왕」서 고뇌하는 내면연기로 주목받아/갖가지 삶의 모습 소화해내며 끝없는 연기변신 시도 거칠고 투박하다.솔직하고 꾸밈이 없다.불같고 칼같은 그의 성격상 중용과 중도를 지키는 모호한 태도는 맞지않는다.기백과 의리,정의감과 정열로 뭉쳐진 연극배우가 최종원이다. 아직은 들판에 풀어논듯한 포효와 폭만이 도사려보인다.그러나 탁탁 부러지기보다 불에 달군 쇠처럼 강인함이 돋보인다.부러지는듯 휘어지고 휘어졌다가도 제자리에 돌아와 설줄아는 투지,꿋꿋한 자존심이 그의 대명사다.만사에 주저함이 없다.한다면 한다.연기를 할때도 몸을 사리지않고 전신을 던진다. TV출연 때문에 연극연습에 소홀한 선배나 후배를 보면 연극만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연극을 그만두어 줄것을 당당히 요구한다.TV인기,연기보충처럼 연극에 참여하는건 연극모독이자 관객모독,처럼부터 연극할 자격도 없다고 못박는다. 또 연출자나 제작자에겐 배우들의 좋은 연기를 끌어낼수 있을만큼 완벽하고도 만족한 여건을 갖춰달라고 말한다.그는 언제 어디서나 연극배우의 입장에서 배우의 권한을 옹호하고 주장한다. 한때는 연기자그룹을 발족하고 초대회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배우들의 출연료 계약문제를 연극계에 제기한적도 있었다. 91년 연극의 해를 위한 모임에서는 그동안 창작극 활성화와 극단 지원 결과 과연 그 성과가 어땠는가를 따져 관계자들을 긴장시켰다.그때도 그자리에서 막연하게 단체를 지원하여 지원금의 효력을 희석시키기보다 한사람의 연기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해보는 방법을 고려해보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이런식으로 열성적으로 연극무대를 지켜왔다.20년간 1백여편,아마도 그처럼 많은 연극에 출연한 배우도 드물 것이다.최종원이 끼지 않으면 연극이 안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주어진 무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밀착하여 그는 이미 「최종원 특유의 색깔과 체취가 물씬 풍기는 살아있는 연기」를 구사한지 오래다. 최종원의 출생과 성장기는 마치 일부러 설정해놓은 무대와 인물구성처럼 파란만장으로 점철되어있다.그것은 어쩌면 소설이나 연극보다 더 가파른 삶의 진실이라 할수 있다. ○탄광촌서 유년기 보내 강원도 태백,광부의 8남매중 막내.태백공고 졸업후 그는 그의 부친이나 형들처럼 함태 탄광에서 탄분석기사로 일한적이 있다. 이 일을 하기위해 3개월동안 갱(갱)속에서 생활하는 연수기간을 거쳐야했다.그리고 3개월 연수를 끝내고 갱속에서 나오던날,동료중의 하나가 지하로 떨어져 죽는 슬픔을 눈앞에서 겪었다.그는 동료의 시체를 찾아내겠다고 울부짖었다.그러나 수직 6백m 지하로 떨어지면서 비좁은 갱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을 시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낼수 없었다. 동네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이 죽어나갔다.곡소리가 그칠날이 없었다.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부인네들의 통곡소리,이런 생활에 지쳐 걸핏하면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치는 가족들,남자들은 대낮부터 술상에 둘러앉아 탄가루에 찌든 목을 술로씻어 내렸다.슬픔은 차라리 사치임을 그는 어린시절에 진작 터득하고 있었나보다.어머니에게 손목을 잡혀초상집에가면 어른들은 술마시고 어린애들은 떡이나 국수를 얻어먹는다.청소년기에는 남의 상가에 가서 상여메는 일을 도맡다시피했다.상여를 멨던 광목한필을 얻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도 나무도 심지어는 빨래줄에 널린 빨래까지도 온통 검은색 뿐인 묵화같은 탄광촌,그는 둘째형이 메탄가스로 질식사하는 사고를 겪은후 더이상 참지못하고 고향을 탈출했다.술집외상,싸움질,비통,울분,가난과 무기력이 집합된듯한 극지의 땅을 떠나지않는한 타고 태어난 운명적 비극을 모면할수 없을것 같았다. 그는 집을 떠나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던 손위 누이의 자취방에 얹혀살았다.농무가 눈앞에 쌓인것처럼 막막할뿐,대책도 목적도 없었다.평소 연극을 좋아하던 누이가 갑자기 「연극을 해보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연극이라면 고등학교때 박종화원작의 「금삼의 피」를 해본적이 있었다.그때 맡았던 「연산군」이 미련처럼 내면에서 꿈틀거렸다.그러나 배고픈 그에겐 연극은 너무나 한가한 소리였다.몇달을 빈둥거리다가 서울연극학교(현 서울예전)에 입학원서를 냈다. 면접하는 날 동랑 유치진선생이 『자네는 왜 연극을 하려는가』고 물었다.그는 대뜸 「연극을 위해서」라고 대답했다.연극을 위해서 왠지 자기자신이 필요한 존재일 것 같았다.남다른 경험을 요구하는 연극무대에서 그는 끝내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70년,전국대학생극협의회가 주최하는 연극 「콜렉터」로 정식 데뷔,그때 협의회 자문으로 있던 유현목 하길종감독이 그의 연기의 가능성을 인정해주었다.그는 차츰 연극무대에 침몰되어갔다.의사 형사 주정뱅이 농부 공사판 감독에서 백만장자 워벅스,무기력한 세일즈맨,에쿠우스와 햄릿,방화범에 이르기까지 그는 수많은 연기변신을 시도해나갔다.연극평자들로부터 「좋은 재목」「탄탄한 연기자」「능란하고 현란한 연기구사」로 평가되기도 했다. ○70년 「콜렉터」로 데뷔 그러나 모든 역할이 그때마다 절실하게 밀착되는건 아니었다.전혀 엉뚱하고 생소하여 접근이 불가능한 역할은 얼마든지 있었다.83년 안민수연출의 「리어왕」이 그랬다.오랜만에 동랑의 연극에서 타이틀 롤을 맡게됐으나한달반의 연습이 지났는데도 도무지 연기 이미지가 포착되지 않았다.하나의 역할을 끝내고 또다른 새로운 성격을 몸속에 채워야한다.그러나 리어의 모습은 아득한데서 맴돌뿐 이에 탐닉되지 않았다.그는 이 역할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최종원의 잠재된 수많은 가능성을 간파하고있던 연출자는 오히려 그에게 1주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리어는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한 가정에 가장이 있고 회사에는 사장이 있듯이 그는 한나라의 왕이다.너무 부담갖지 말라』고 위로했다.리어왕의 고뇌와 갈등이 전광처럼 뇌리를 스쳤다.결국 「리어왕」은 최종원의 내면연기를 끌어낸 화제작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무슨일에든 망설이는 법이 없다고 했으니 시시때때로 연극이냐 생활이냐,연극에 대한 회의에 시달렸다.연극의 열성만큼이나 다른 일을 했다면 그도 남들처럼 풍요롭게 살수 있었을 것이다.아무리 온몸을 던져 무대를 지켜도 느는건 눈덩이처럼 커지는 빚뿐이었다.연극을 할수록 가난의 공동은 깊이 패어갔다. 연극초기때부터 줄곧 살고있는 명륜동3가 언덕바지에서 부부(부인 정영애씨)와 딸 둘(고1,중3)네식구가 전셋집을 전전하면서 그는 10원을 아끼기 위해 연탄을 직접 날라다 쓴적도 있다.생활때문에 어쩌다 1년에 한두편 TV베스트셀러극장이며 「마유미」등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가족들이 그의 연극보다 TV나 영화출연을 더 좋아하는 것에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당신은 연극배우의 아내다.나는 처음부터 연극배우였다.이를 전제하고 결혼했었다』고 단호하게 못박았다. 가족들이 불편해 하더라도 그는 연극을 포기할 순 없었다.다른 동료들처럼 TV나 영화로 돌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다.연극은 천직이고 다른일은 생계수단에 지나지 않았다.85년이후 TV출연을 일체 끊어버렸다. 연극무대를 지키는 배우는 드물다.자신의 직업에 자랑스러움과 긍지를 갖게된 그로서는 이런 현실이 안타까웠다.관객들이 두시간전부터 극장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일본 연극계가 부러웠다.그는 뜻맞는 동료를 만나면 배우들의 의식개혁을 부르짖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갖가지 삶을 다양하게 비쳐보는 연극의 매력,어떤 예술과도 견줄수 없다.인간이 전신으로 할수 있는 총체예술은 연극의 수단을 능가할 수 없다고. ○작년 「극발전연」 발족 지난해 그는 연극계의 선배이자 존경해온 연기자인 전무송과 의기투합,순수연극을 지향하는 극발전연구회를 발족하여 첫무대로 이강백작 김광림연출의 「북어대가리」를 동숭동 성좌소극장에 올렸다. 자신의 주어진 삶을 한치의 오차없이 지키려는 창고지기 전무송과 갇혀진 창고속의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을 꾀하려는 최종원의 거칠고 절박한 모습에는 그 옛날 탄광촌을 벗어날 때의 몸부림이 실려있어 보는이의 가슴에 전율같은 감동을 흐르게 한다. 더구나 23년간 기다려온 대선배 전무송과의 연기대결은 「연염의 조화」에 비유될만큼 그의 성숙을 확인시켜주었다. 이제 어떤 역할에든 책임져야 하는 위치. 심장의 고동소리까지도 생생하게 객석에 전달하고 싶어하는 그의 정열은 모든 고통과 시련을 딛고 이긴 투지의 결정에 틀림없다.머리카락 한올 까지도 혼신을 다해 역동적으로 연기해내는 배우가 우리에게도 있음을 연극계는 물론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 모두는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연보 ▲1949년10월 강원도 태백 출생 최석담씨(84)와 김옥녀여사(85)의 4남4녀중 막내 ▲67년 태백공업고 광산과 졸업 ▲68년 함태탄광 탄분석기사 ▲69년 상경,서울 연극학교 (현 서울 예전)연극영화과 입학 ▲70년 서울연극학교 학생회초대회장 ▲〃 전국 대학생 극 협의회 주최 연극 「콜렉터」로 데뷔 ▲〃 수재민 돕기 지방공연 「점을칩니다」 1팬,「교행」 「춘향전」 ▲71년 재경 강원도 학우회주최 연극 「형제」로 강원도 일원 공연 ▲77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공연(이진순연출 「북벌」) ▲83년 연기자그룹창립(초대·2대·8대 회장역임) 85년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연극영화과 졸업 87년 극단 부활과 이재한작·연출 「배비장전」 미국지역 45일간 순회공연 89년 영화 「마유미」 촬영차 도미 ▲90년 서울연극제 「아버지바다」 개인연기상 수상기념 뉴욕 연수 ▲91년 「연극의해」 기획위원▲〃 배우협회 창립(창립기념공연 윤대성작·정일성연출 「출세기」) ▲92년 일본동경 다이니아이리스 페스티벌 참가(김상열작 「길」) ▲현재 한국연극협회이사·극예술발전연구회 창립멤버(전무송과 발족) 「거룩한 직업」「어린왕자」「달집」「우회」「베니스의상인」「방화광」「노부인의 방문」「날개」「동물원이야기」「그리고 리어든양은 마시기 시작했다」「탱고」「검찰측증인」「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리어왕」「내·물·빛」「에쿠우스」「햄릿」「밤의묵시록」「신화1900」「욕망이라는이름의전차」「꽃을 사절합니다」「지금은 부재중」「티타임의 정사」「세일즈맨의 죽음」「환타스틱」「심판」「출구없는방」「애니」「만리장성」「아가씨와 건달들」「매춘Ⅱ」「헬로 미스터후라이데이」「하나를 위한 이중주」「기막힌 사내들」「아버지바다」「토선생전」「살로메」「누가 버지니아울프를 두려워하랴」「락스트리트」「그리운 앙트완느」「마네킹의축제」「변신」「격정만리」「길((욕)」「아침부터 자정까지」등 앙코르공연외 초총공연만 100여편이상,현재 「북어대가리」공연중.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마유미」「꿈」「나의아내를 슬프게 하는것들」등…. 영화연극상·서울연극제개인연기상·동아연극상대상·서울극평가그룹상
  • 실명제가 주가에 악재아니다/주식시장에 미칠 영향을 보면

    ◎3단계실시로 자금이탈 등 충격 완화/「큰손」들 조작 줄어 장기적으론 “호재” 신정부의 출범과 함께 금융실명제실시가 증권가의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증권가에는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 주가는 폭락을 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실명제얘기만 나오면 주가가 내리고 있다.경제정의를 실천하고 조세평등에 의한 부의 공정한 분배를 위한 금융실명제가 자본주의 경제의 꽃이라고 하는 증시에 과연 악영향만 주는 것인가. 금융실명제 실시가 얘기된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가깝게는 지난해말의 대선을 앞두고 3당후보모두 당선되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지난 87년의 대선때도 마찬가지였다.지난 82년5월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을 계기로 본격화된 금융실명제실시문제는 지난 10여년간 계속돼 왔던 셈이다. 정부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더라도 파급효과를 고려해 3단계로 나누어 실시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충격을 줄이기 위해 자금출처조사를 면제하는등 과세특례를 인정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러한 범위내에서 금융실명제가주식시장에 미칠 영향을 알아보면 일반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악재만은 아니다.오히려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인 요인이 많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또 그동안 금융실명제에 대한 논의를 통해 면역성도 생긴데다 지난달말현재 비실명화율이 2%정도(금액으로는 3.5%)에 불과하는등 사실상 비실명률이 계속 줄어들고 있고 실세금리도 하향안정세를 보이는등 경제및 주식시장의 상황도 개선되고 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 자금이 주식시장에서 이탈하고 부동산 골동품등 실물자산에 대한 투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자금이 해외로 도피할 위험도 있다.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 큰 손등 거액투자자들의 검은돈이 증시를 빠져나가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그러나 그동안 금융실명제의 실시와 관련된 주식시장의 모습을 보면 예상보다는 금융실명제의 악영향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금융실명제를 전면실시하겠다고 처음 발표했던 지난 82년의 7·3조치직후 주가는 내렸으나 1개월후에는 오름세로 돌아섰다.또금융실명제의 실시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한 지난 90년4월4일직후 주가는 올랐으나 1개월후에는 오히려 내림세를 보였다.금융실명제와 주가와의 관계가 밀접하지 않았다는 얘기다.고객예탁금은 7·3조치후 2개월뒤에는 45·8%가 줄었다.91년부터 금융실명제를 전면실시하기로 발표한 88년7월29일이후 2개월뒤에는 28·2%가 줄었다.점차 금융실명제에 대해 면역성이 생긴데다 비실명화율도 줄어드는 등 상황이 호전되어 시간이 갈수록 자금이탈이 줄어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진투자증권은 80년대말보다 최근 가명계좌의 자금과 실질투자인구가 줄어들고 있는데다 외국인및 기관투자가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기때문에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더라도 고객예탁금은 과거보다는 감소폭이 줄어들것으로 전망했다.한진투자증권은 약5천억원정도가 줄어들 것으로 추정했다.한진투자증권은 금융실명제가 3단계로 나뉘어 실시될 경우 1단계에서 은행예금및 제2금융권의 실명화를 하게되면 오히려 주식시장으로 1조원의 자금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대부분의 증권사들은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더라고 정부가 부동산투기에 대해 규제를 하고 있어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릴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우리나라의 금리가 높기때문에 해외로 자금이 빠져나갈 가능성도 적다는 분석이다.따라서 대부분의 증권사들은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 큰 손들의 주가조작이나 내부자거래등이 줄어들어 장기적으로는 호재가 될것으로 보고있다.
  • 김영구 원내총무(민자 새 당직자의 면모와 포부)

    ◎뚝심의 4선의원 “대화로 대야협상” 『김영삼대통령이 주창하는 변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건설에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당사무총장에 이어 집권여당의 원내사령탑이라는 중책을 또다시 맡게된 김영구신임원내총무(53)는 3일 아무런 휴식기없이 당3역에 중임돼 다소 지친 표정이 엿보였으나 향후 국회대책등을 밝히면서 여지없이 당찬 모습을 띠었다. 김총무는 『우리 국회도 이제 신한국건설에 큰 역할을 해야하며 그렇게 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김총무는 앞으로의 대야전략에 대해서도 『야당과 충분히 토론하고 협상을 통해 원만한 운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의회민주주의 원칙을 앞세웠다. 김신임총무는 이날 콜독일총리의 국회연설때문에 서둘러 기자회견을 끝냈으나 『아직 소속의원들의 임명동의절차를 남겨놓고 있어 더이상 얘기하기가 곤란하다』고 겸손해 하면서도 『맡은바 직무를 열과 성을 다해 수행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총무는 평소 의리와 충성이라는 말이 꼭 따라 붙는 뚝심의 4선의원이다. 그가 다시 중임된 것은 지난해 5월 사무총장을 맡은 뒤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계파 싸움으로 흔들리던 당조직을 잘 수습하고 대선때도 선거대책 본부장으로 활약한 공로등이 감안됐다는 후문이다. 경남 함양출신으로 동국대 경제과를 졸업했으며 우람한 외모로 우직한 행동파라는 인상을 주고 있으나 정치력도 겸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87년 당시 민정당 노태우후보의 청년자원봉사단 단장을 맡았으며 총재비서실장·국회재무위원장등 당과 국회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공화당시절부터 중앙위청년분과위원장을 맡는등 당청년조직과 운영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정평나 있다. 최광수 전외무장관의 손아래 동서.부인 오경자여사(53)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두고있다.
  • 강재섭 대변인(민자 새 당직자의 면모와 포부)

    ◎소탈한 검사출신 “여야성명전 자제” 강재섭신임대변인(45)은 『대변인은 당의 진솔한 모습과 의지를 국민에게 정확히 알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대변인관을 피력했다. 강대변인은 그러나 『아스팔트위에 삽을 끌고가듯 소음을 냄으로써 국민의 귀를 시끄럽게 하고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국민을 도외시한 여야간 성명전은 가급적 자제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대변인으로 발탁된 소감은. ▲당의 모습을 국민에게 알리는 역할을 맡게 되어 기쁘다.형식보다는 실상을 떳떳이 제대로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겠다. ­대변인실 운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정기적인 브리핑제도가 필요한 것인지 잘 연구검토해 보겠다.새로워진 당의 모습에 맞게 대변인실의 분위기도 쇄신하겠다. 5공이후 집권당 최연소대변인으로 발탁된 강의원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분석력을 갖춘 검사출신의 재선의원. 누구에게나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하며 합리적이고 소탈한 성품으로 당내외 선후배들과 두터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노태우전대통령의 6·29선언당시 막후실무자 역할을 했으며 87년 대선때는 박철언의원과 함께 월계수회를 만들어 노후보를 당선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강의원은 지난해 대선후보경선때 자신의 정치적 소신에 따라 중립적 입장을 지켰으며 박철언의원 등이 민자당을 탈당할때도 『의리보다는 소신을 택하겠다』며 당잔류를 선언한 소신파로 불린다. 그러나 강의원은 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아픔」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다고 훗날 밝히기도 했다. 지난 대선때는 김영삼후보를 말없이 도와 지역구인 대구서을에서는 대구지역 최다득표율을 기록하는 성과도 올렸다. 이번 대변인기용은 김영삼대통령이 강의원의 결단력과 생색내지 않는 노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부인 민병란씨(44)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취미는 테니스와 독서. ▲경북 의성·44세 ▲서울대 법대 ▲지검검사 ▲대통령정무·법무비서관 서울고검검사 ▲민자당청년자원봉사단총단장 ▲민자당기획조정실장 ▲13·14대의원
  • 베일벗는 전병민 정책수석/경력·발탁배경 털어놔

    ◎66년 홍성고졸… “학력사회속 능력배려”/현철씨와 사연설부인… “공약 관계일뿐” 17일 단행된 청와대비서실 인선에서 일약 정책수석으로 발탁돼 주목을 끌고있는 전병민씨는 공조직보다는 사조직에서 더 알려진 인물이다.그는 아이디어개발과 기획능력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 이미 87년 대선때에는 노태우후보 진영에서,지난해 대선때는 김영삼후보 진영에서 기획일을 보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학력과 경력등이 베일에 싸여 있다.항간에서는 「통치기술자」라는 평까지 받고있어 더더욱 궁금증을 더해왔다.또 인선배경과 관련,김영삼차기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와 깊은 관계라는 설이 나돌아 이번 인사의 「옥의 티」라는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일 기자들에게 자신의 학력과 경력,현철씨와의 관계,발탁배경등을 털어 놓으며 베일속으로부터 자신을 노출시켰다.그는 이날 『66년 충남 홍성고를 졸업했으며 졸업후에는 형님이 운영하던 문예출판사에서 2년간 일했다』고 밝혔다.그는 그후 68년부터 72년까지 1사단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72∼77년 북한연구소 ▲78∼80년 동경대 신문연구소 수학 ▲80∼87년 현대사회연구소 ▲87년 한가람기획단 ▲88∼90년 한국정책연구원 기획실장 ▲90년 6월 임팩트코리아 등에서 근무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철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임팩트코리아에서 처음 만나 그동안 정치상황을 분석·보고하는 일을 맡아 급할 경우 현철씨를 불러 이야기하곤 했다』면서 『현철씨와는 공식적인 관계』라고 밝혔다.이어 김차기대통령과는 『김차기대통령이 대통령후보로 선출된뒤 당선에 대비한 준비작업을 시켜 그 내용을 보고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파격적」으로 발탁된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학력위주의 사회에서 능력만으로도 살수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일 것으로 추측한다』면서 『과거의 개혁이 실패한것은 과제의 선정이 잘못됐다기 보다는 추진방법이 잘못됐던 만큼 앞으로 김차기대통령의 뜻을 받드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동경대수학시절 만나 결혼한 한살 연상의 부인 한영구씨는 외교안보연구원교수로 독도문제를 비롯한 일본 문제전문가로알려져 있다.
  • 박관용 비서실장(차기정부 청와대 참모진 프로필)

    ◎정연한 논리… 정치감각 빼어난 4선의원 정치감각과 논리를 두루 갖춘 대기만성형정치인이라는 평을 듣고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면서도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로 매사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솜씨가 돋보인다. 김영삼차기대통령이 핵심요직인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한것은 4선의원으로 민심을 꿰뚫고있다는 정치적 경륜과 무리없이 국정개혁작업을 지휘할 수 있는 그의 합리적 사고를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또 김차기대통령의 개혁의지와 속뜻,국회와 여야정당을 두루 잘알고 있는 적임자라는 것이 발탁배경으로 작용했다. 지난 대선때는 선거대책위 홍보위원장으로서 홍보업무를 총괄지휘,김차기대통령 압승의 견인차 역할도 했다. 김차기대통령과의 첫인연은 부산 동아대 정치학과 재학시절 민족문제연구소 경남지부장을 맡으며 비롯됐다.4·19때는 부산지역학생대책위원장으로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차기대통령을 가끔 찾아가 시국담을 나누기도 했다. 부산중 1년선배인 이기택의원(현민주당대표)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민주전선편집위원과 신민당원내총무실 전문위원등을 거쳐 11대때 정치규제에 묶인 이대표의 지역구인 부산 동래를 물려받아 민한당소속으로 원내에 진출했다. 지난 84년 신당인 신민당출범때 민한당탈당을 주도,2·12총선때는 신당돌풍주역 가운데 한사람이 되기도 했다.87년 통일민주당 창당때 계파보스인 이대표와 결별하고 김차기대통령의 상도동진영에 합류,측근참모대열에 올랐다. 내리 4선을 기록하며 남북국회회담대표로 평양회담에도 참석했고 국회통일특위위원장을 맡는등 통일문제에 많은 관심과 탁월한 지식을 겸하고있다. 부인 정순자여사(50)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있으며 매일 30여분간 걷기운동을 하며 건강을 유지한다.
  • “총액임금제 당분간 계속 추진”/16일 본회의(의정중계)

    ◎사면복권 대상 선정원칙·범위 밝혀라/95년 지방까지 청정연료사용 의무화 ▷답변◁ ◇현승종국무총리=지난 대통령선거 당시 발생한 용공시비는 후보자간의 문제인 만큼 개입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본다. 부산기관장모임사건과 관련,정부는 관계공직자들을 인사조치 하는등 적법한 조치를 다했다. 정부조직개편은 현재 의원입법으로 진행중이며 정부조직체계 전반의 개편은 차기정부에서 보다 심도있게 연구검토될 것이다. 정부는 환경문제에 대해 지난해 6월 리우환경회의를 계기로 7월에 지구환경장관 대책회의를 설치하고 현재 지구환경 종합대책을 추진중이다. 태평양전쟁희생자 문제와 관련해선 정신대 피해자신고접수를 바탕으로 일본에 응분의 보상을 촉구할 방침이다.한일양국 정부가 긴밀히 논의하고 있는 만큼 남북한이 공동대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필요할 경우 유엔 인권위를 통해서라도 대처할 것이다. 공직자 부조리 추방을 위해 정부는 사정체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각종제도와 관행을 과감히 개편하겠다. 금년에도 안정기조 정착과 기업경쟁력 제고를 위해 임금안정이 불가피하다.임금결정은 노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유도하겠다. ◇이수정문화부장관=홍란파는 1922년 이래 봉숭아등 많은 노래로 암울한 시대에 민족혼을 고양해 각계의 추천으로 지난해 8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다만 그의 행적에 대한 친일시비가 이는데 대해서는 유감이다. 내년 동학혁명 1백주년을 맞아 지난87년부터 17억원의 예산으로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동학사상의 재조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역사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힘쓰겠다. ◇이진삼체육청소년부장관=청소년의 국가관 확립을 위해 독립기념관 방문기회를 늘리겠다. ◇백광현내무부장관=안기부 직원이 부정입학을 알선한 학부모는 광운대 후기 전자공학과에 응시한 김모군의 아버지로 현재 무역협회 감사역으로 근무중인 김모씨와 염색공장인 아진실업의 대표인 김모씨등 두명이다. 「고문」혐의로 수배중인 이근안은 연고지 은신처등을 다각적으로 수사하고 있으나 아직 검거하지 못해 송구스럽다.공소시효는 그잔여시효가 5년8개월이 남아있다.현재 항소심에 계류중으로 형 확정때까지 공소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 현재 시국치안 경찰관은 전체 경찰의 4.7%에 불과하다.문민정부 출범에 따라 각종 불법집회나 시위가 감소할 것이므로 시국경찰의 업무를 민생치안으로 더욱 확대해 나가겠다. ◇안필준보사부장관=도농간 의료불균형의 해소를 위해 농촌지역에 대학병원의 분원설립을 촉진하고 1·2차 의료기관의 육성을 위해 의료전달체계의 확립을 강력히 추진하겠다. 질병치료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양·한방 복합진료체계를 연구하고 있다. ◇이연택노동부장관=노조신고 때 상급단체를 기입하도록 계속 지도하겠다.이는 노조법상 우리노조가 총연합단체·산별·단위노조등 3단계 기본조직으로 돼 상급단체에 가입하지 않으면 노조체계가 혼란되고 단위노조의 난립으로 오히려 노조의 단결력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총액임금제는 당분간 계속 추진할 계획이며 이를 금융실명제와 연계하면 곤란하다. ◇이문석총무처장관=최근 3개월간 대통령실에서 전출된 인원은모두 11명이며 이 가운데 2명은 승진,9명은 같은 직급으로 이동했다.승진한 2명은 해외공관장 발령을 받았기 때문에 관례에 따라 한 직급 올린 것이다. ◇이재창환경처장관=환경규제 차이에 의한 상계관세도입은 그린라운드라는 형식으로 선진국에서 논의되고 있으나 가까운 시일내에 구체화되기는 힘들다. 대기보존 대책은 에너지 정책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만큼 95년까지는 청정연료사용의무화를 지방까지 확대하겠다. 폐기물관리의 효율성을 위해 1회용품에 대한 폐기물 부담금을 도입하도록 할 방침이다. ◇이정우법무부장관=14대 대통령의 취임을 맞아 갈등의 해소와 대화합의 차원에서 취임직후 대사면이 실시될 것이다.그러나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므로 여기서 사면의 기준 폭을 말씀드리기 힘들다. 사면을 제청할 장관으로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실시되도록 건의하겠다.민주화운동과정에서의 학생및 공안사범,노동쟁의과정에서의 근로자,일반형사범 등 대상범위를 확대하도록 건의할 방침이다. ◇유혁인공보처장관=지금까지 각 종교방송국으로부터 36개의 지방국신설 신청을 받았으나 공보처로서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의 증설계획을 현재로서는 갖고 있지 않다. 종합유선방송은 지적소유권문제와 같은 장애요인이 있더라도 방송문화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시행돼야할 것이다. 또 방송구역분할과 채널구성방안등의 구체적인 준비작업은 새정부출범후에 본격화되리라 본다. ▷질문◁ ◇장영달의원(민주)=총리는 지난 대선관리를 총책임진 장본인으로서 김영삼당선자가 25일 취임하기에 앞서 자신의 동지에 대해 용공매도한 행위를 공식사과하도록 요청할 의향이 없는가.지역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호남지역의 숙원사업에 대해 예산을 대폭 지원하고 부산기관장 모임에 참석했던 관계자 전원을 구속처벌할 용의는 없는가. 새정부 출범에 맞춰 추진중인 사면 복권대상자 선정원칙과 그 폭을 밝히라. ◇송두호의원(민자)=사회지도층을 중심으로 재산공개등 「윗물맑기운동」을 전개해야 하며 이러한 운동이 사회전체의 범국민 정신운동으로 확산될 때 이 땅의 부정부패를 척결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에대한총리의 견해는. ◇김진영의원(국민)=이번에 청와대 비서실및 경호실 간부 23명에 대한 훈장수여 결정이 알려졌다.사전에 국무총리,총무처와 상의가 있었는가. ◇조진형의원(민자)=이번 입시부정은 사학의 재정이 부실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본다. 기여금 입학제를 도입하거나 재정이 빈약한 사학재단을 과감치 처리하든지 아니면 정부의 재정지원을 늘려주어야 한다고 보는데 이에대한 견해는. 또한 대학정원을 늘려 수요를 충족시키는 대신 엄격한 졸업정원제를 실시할 생각은 없는가. ◇원혜영의원(민주)=6공하에 있었던 각종 권력형 비리의혹 사건과 관련,노대통령은 퇴임전에 「6공하 비리의혹청산 선언」을 하여 자신의 재임기간중에 있었던 모든 의혹사건들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용단을 내려줄 것을 촉구한다. ◇최상용(민자)=신한국건설의 중점과제중 하나인 경제활성화를 위해서는 노사관계에 관한 제도개혁이 선결과제라고 보는데 노조조직 체제의 산별체제전환과 노조의 정부정책참여및 경영참가등을 새정부의 주요과제로 선정,추진할 용의는 없는가.
  • 한국무용가 최현씨(이세기의 인물탐구:14)

    ◎절제된 몸짓… “여백의 미” 표현 일품/고고한 기품 넘치는 타고난 재능의 예인/김해랑문하서 승무·태평무 등 두루 이수/완벽주의적 성격… 대선배와의 불화 “천추의 한”으로 갓쓰고 도포입고 부채들고 최현이 무대에 나타나면 이도령이 광한루에 나선듯 화사하고 눈부시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헌칠하고 단정한 매무새,운신의 폭이 조용하면서도 민첩하다.삭풍이 이는 한겨울에도 그의 분위기에는 오월 단오같은 싱그러운 신록이 묻어있다. 부채끝으로 오작교(오작교)를 가리키고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리면 그때마다 한양의 풍류와 선비의 기품이 동시에 엇갈린다. 무용계에서 「푸르름을 몰고다니는 예인」으로 불리는 것처럼 그는 20대 미장부의 멋과 미를 변치않는다.나이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젊고 기개에 넘쳐있다.언제 어디서나 누구앞에서나 당당하다. 우선 그의 춤솜씨부터가 그렇다.타고난 재능과 기량으로 그는 빠르고 느린 어떤 곡조에도 절묘한 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중동이 절제된 그의 「승무」나 「살풀이」등 그의 춤의 매력은 그 움직임마다에 여백의 미를 살리는데 있다.뿌리치고 내뻗는 손짓하나에도 선과 배경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마치 한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듯 하다.힘이 들어가지 않은,몸속으로부터의 흥취가 절로 살아나 어느땐 멈추고 어느땐 다시 흐른다.그리고 조각처럼 푸르고 흰 얼굴에는 한과 슬픔을 자제한 인고가 담겨있다. 그는 춤뿐아니라 춤과 관련된 영화와 연극,창극과 뮤지컬을 두루 섭력한 예술가다. ○춤관련 영화·연극 출연 완벽주의자인만큼 한가지를 알아도 끝까지 파고들어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쌓고있다.대강대강 그럭저럭은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사람을 사귀어도 한번 사귄 사람은 절대로 놓지않는다. 이렇게 흑백이 분명하기때문에 무용계에서의 그의 위치는 자칫 외롭기 십상일수가 있다.그러나 서로서로 인맥·학맥,제자 스승으로 얽히고 설킨 속에서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타고난 재능,탁월한 춤솜씨 하나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춤추는 사람이 춤잘추는데야 누가 뭐라하겠는가.위로는 막강한 선배들이 기라성처럼 좌정하고 이리저리 끈이 닿는 무용풍토에서 최현자신은 그런 자부심과 오기 하나만으로 고고하게 버티어왔다 할수 있다. 그가 춤으로 무용계에 어필하기 시작한 것은 65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초라니」에서다.조택원이후 송범 김진걸 이매방으로 이어지는 남자무용수중 수려한 춤과 미모마저 갖춘 그의 출현은 무대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51년이후 한때 영화에 심취하여 조미령 김승호 허장강 등 당대 스타들과 영화 「춘향전」「시집가는날」등에서 주연,이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춘향전」「마의태자」「황진이」등은 노련미 넘치는 춤기교와 함께 영화에서 닦은 연기솜씨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작품들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비상」은 그 자신이 끊임없이 추어왔고 지금도 무용인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다. 소매가 긴 백삼에 상투관 차림,부채 하나만으로 무대를 누비는 이 「비상」은 희로애락의 일상사를 살고있으나 저 하늘을 향한 끝없는 의지,꿈을 잃지않으려는 인간의 끈질긴 열망이 춤속에 담겨져 「마음을 비운 춤」「생의 환희와 승리를 득도의 경지로 이끈 춤」「아무도 비상을 최현만큼 출수 없다는 경계선을 확실하게 그을수 있다」고 시인이며 무용평론가인 김영태가 쓴적이 있다. 영화·연극 못지않게 그의 음악취미또한 광적이다. 76년 호암 이병철회장의 도움으로 독립문쪽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최현무용단을 창단했을때 그의 연구소는 무용연구소라기보다는 마치 음악연구소처럼 사방벽이 온통 오리지널 디스크로 둘러싸여 있었다.그의 오디오 취미는 「마니아」급으로 오디오전문지들은 걸핏하면 드보르자크에서 수재천에 이르는 그의 음악취미·오디오기기들을 탐방취재하고 있다.이 방면에서는 특히 김영태와 의기투합하여 두사람은 충무로에서 용산전자상가를 곧잘 기웃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취미도 “광적” 최현은 마산에서 성장했지만 본래 부산사람이다.본명은 최윤찬,후에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최현이란 예명을 가졌다. 16세때 전국가요경연대회에서 특상한 것을 계기로 「천재소년가수」가 되어 지평선 가극단을 쫓아 마산에 정착,마산의부호이자 한량으로 소문난 김해낭문하에 입문하여 그곳에서 궁중무에서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를 고루 이수했다. 그러나 스승이 초기엔 장작이나 패게하고 집안청소를 하게 할뿐 도무지 춤을 가르쳐주지 않아 그때도 당돌했던 그는 『왜 춤을 가르쳐주지 않느냐』고 스승에게 항의하곤 했다. 『예술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네가 보고 느끼고 깨달아라』그는 머리속에 꽉 찼던 안개가 걷힌 듯 스승의 이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때부터 춤이 몸속에서 피돌기처럼 돌고 흥이 기운처럼 솟구치기를 기다렸다.스승은 그제서야 그에게 춤 한자락씩을 지도해나갔다. 예술의 겸손을 엄숙하게 익히고도 인격수양이 덜 됐거나 춤을 잘 춘다는 주변의 칭찬에 우쭐한 나머지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잊히지 않을 큰 「잘못」을 하나 저지른 적이 있다. 58년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스승 김해랑 안무로 「독무」를 출때였다. 당시 명고수인 지영희씨가 장단,그의 부인인 성금련씨가 가야금을 연주,진양조에서 중머리 중중머리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영희씨가 그만 잦은몰이 장단을 잘못친 것이다. 박자와 호흡,시간조절에 의해 손의 움직임을 감을 수도 펼수도 있는 그로서는 리듬이 맞지않아 크게 당황했고 무대는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지영희씨에게 덤벼들었다. 『무대는 생명입니다.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선 안돼요.관객에게 손가락질 받으면 나는 이것으로 끝납니다』 지영희씨는 『최선생 내가 정말 잘못했네.큰 실수였다』고 백배사죄했으나 그로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망발.당대의 명인이자 대선배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자신의 방만함을 후회했다고 탄식한다. 이제 그는 참다운 예술가가 되고 싶다.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고 진지하게 나를 점검하여 「몸짓」하나 「소리」하나에도 자연의 질서가 깃든 지혜와 노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그리고 내 춤속에 관객을 끌어들여 나의 한과 정취와 풍류의 빛,내가 살아온 춤의 굽이굽이를 함께 향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최현의 많은 이야기중에서 그가 54세때 27세 연하의 신부를 맞아들인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제중 하나다. ○54세때 27세 신부 맞아 84년 12월,일밖에 모르던 까다로운 성품의 최현이 갑자기 결혼을 발표,더구나 신부는 서울예고를 졸업,그가 지도위원으로 있던 국립무용단 단원이라고 해서 주변의 놀라움은 한층 컸다. 신부인 원필녀씨는 나이보다 깊고 의젓한 성품으로 춤추는 스승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혼자서 그를 사모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두사람의 결혼은 올해로 만 9년.제자로서 스승으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결혼초기때의 사랑과 정성과 존경을 변함없이 나누고 있다. 최현씨는 그동안 부인을 한성대와 이대대학원에 다니게 했고 지금은 한성대에 출강.『내가 아프면 밤새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지켜준다』고 자랑한다. 지난해 6월엔 제1회 원필녀개인무용발표회를 주선해 주었다.그리고 그가 사랑해마지않던 그의 춤 「비상」을 부인에게 추게 했다. 그는 88올림픽 폐막식때는 10만군중과 수천명의 출연자들에게 청사초롱 「안녕!」을 추게 하여 방대한 스케일로 각계의 시선을 모았었다.지난해엔 청소년예술제에 「파란풍선」에 이은 「비단안개」를 안무,서울예고 무용단을 이끌고 일본 도쿄 무장야시민문화회관에서 「시집가는날」을 공연,올해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기금을 받아 그의 개인발표회를 준비중이다.작품은 정철의 「사미인곡」. 차범석극본·최종원음악의 이 작품은 그의 춤 60평생을 정리한 집대성의 일환으로 그의 특기인 「춤에서의 여백의 미」를 유장하게 전승시킨다는 집념을 담고 있다. 그는 아무리 춤을 잘추어도 훈련된 춤,숙련된 춤은 단호하게 부정한다.긴 세월 스스로 깨달아 마음속에서 몸속에서 자연스러운 율동으로 우러나오는 극미(극미)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기를 축적시키면서 이를 어느 한순간 우주의 무한한 공간속에 힘차게 내뿜는다.장삼자락을 낙화로 흩날리며 탄식의 숨결을 하공에 흩뜨려놓듯,그래서 그의 춤의 한끝은 결국 끝없는 비상임을 그는 알고 있다. □연보 ▲1929년12월 부산 영도 출생.최재용씨와 이말념씨의 2남5녀중 장남 ▲1946년 마산으로 이사 ▲1953년 마산상고졸업 ▲1959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 졸업 ▲1988∼1990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예술학과 수학 ▲1946∼1953년 마산 김해랑 무용연구소 입문 전통무용 유형과 기법사사 ▲1953년∼ 오광대일인자 장재봉,민속춤의 김숙자씨등에게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 등 이수 ▲1955년 최윤찬무용연구소 개설 ▲1961∼1962년 서울대 음대 무용강사 ▲1965∼1985년 서울예고 강사 ▲1967∼1974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강사 ▲1976년 최현 무용단 창단 ▲1980∼1981년 중앙대 예대 무용과 강사 ▲1981∼1985년 서울예전 무용과 주임교수 ▲1982년 최현 무용연구실 개설,한국무용협회이사,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예총)이사,문공부 문화재 전문위원,국립무용단지도위원,한국무용협 부이사장,대한민국 무용제 심사위원 문예진흥원 지원기금 심사위원역임 (영화)「삼천리의 꽃다발」 「시집가는날」 「춘향전」 「불멸의 성좌」 (무용·안무출연)무용극 「초라니」 「춘향전」 「시집가는날」 「마의태자」 「황진이」국립창극 「심청가」 「강릉매화전」 「광대가」 「변강쇠타령」 「시집가는날」 「대춘향전」 「허생전」 「심청」 「서동가」 「이춘풍전」 「놀부전」 「소태산」 「아리랑」 ▲1970년 일본 EXPO70 한국의날 안무·출연 ▲1971년 국립무용단 유럽지역 10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5년 국립무용단 일본 10개도시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 「녹」 「비상」안무·출연 ▲1980년 국립무용단 동남아 9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82년 시립무용단 「한국 명무전」에 「비상」출연 ▲1985년 호암아트홀 개관 초청공연 「헌화가」안무·출연 ▲1987년 88서울예술단 창단공연 「새불」구성·안무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안무총괄 「안녕」 ▲1990년 국제문화협 주최 일본 지역 공연 창극 「심청전」안무 ▲〃 동아일보창간70주년기념 모스크바지역등 5개국 순회공연 창극 「아리랑」안무·출연 ▲1991년 국립극장주최 청소년예술제 「파란풍선」안무 ▲1992년 국립극장주최 「비단 안개」안무 ▲〃 서울시립무용단 무용극 「춘향전」객원안무 ▲현재 문화부 문화재 보호협회 「한국의집」예술총감독,서울예고 무용과장 서울올림픽 안무총괄 공로 대통령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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