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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커스 투데이-”돌 女史 내년 美대선 출마”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 남편 못지않은 인기와 명성을 누리고 있는 보브돌 전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의 부인 엘리자베스 돌 여사(62)가 내년 대통령선거전 출마의사를 밝혀 공화당 후보지명전은 물론 대선 본선에서 파란을예고하고 있다. 미 CNN방송과 뉴스위크지는 4일 돌여사가 현재 맡고 있는 미 적십자사 총재직을 사임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할 것이라고 보도했다.적십자사와 주변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돌여사의 출마결심은 확고한 것 같아 보인다. 돌여사의 출마는 민주당후보로 확실시되는 앨 고어 부통령의 인기를 누를인물로 적극 권유된 것으로 알려졌다. 돌여사의 출마의사로 공화당은 당장지난 11월 선거에서의 압승으로 인기가 급상승중인 부시 전대통령의 아들 조지 부시 주지사와의 당내 후보지명전이 볼만하게 됐다.공화당 일각에서는 앞으로 돌여사와 부시 주지사를 내세워 여론몰이를 한 다음 이들로 정·부통령 후보를 정하자는 성급한 의견도 나오고 있다. 돌여사는 지난 91년부터 적십자사 총재직을 맡아 지금까지 훌륭하게 업무처리를 해온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그전에도 83년부터 87년까지 교통부장관,89년부터 90년까지 노동부장관을 맡아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하버드법대출신으로 변호사이기도 한 돌여사는 각종 여론조사때마다 40%이상의 꾸준한인기를 누려왔다.
  • 민주열사열전:17/88년 투신·분신3명의대학생(정직한역사되찾기)

    ◎‘허울뿐인 민주’ 항거… 생명의 불꽃 살라/조성만­민주화운동 통일논의 새장 열어/최덕수­광주항쟁 진상규명 국조권 요구/박래전­“양심수 석방… 죽음 더 없어야” 유서 16년만에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과 함께 1988년 6공화국이 시작되었으나 진정한 민주정부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허탈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직선제란 모양을 갖췄을 뿐 6공 盧泰愚 정권은 5공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인식이었다. 6공은 공식 출범 전부터 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을 구성하며 ‘민주화’ 정책을 차례로 발표했다.군사독재 정권인 5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선언인 셈이었다.그러나 6공 출범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중순부터 20일간에 걸쳐 3명의 대학생들이 ‘노태우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젊은 목숨을 잇따라 내던졌다. 87년 12월 대선 때 문민정부의 도래를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은 체념과 함께 6공 출범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나아가 일말의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80년 5·18 광주학살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민주화추진위에서 증언하기도 했다.그러나6공이 요란한 선전과 함께 내놓은 민주화정책들은 군사정부의 연장이라는 정권의 본질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진정한 개혁이 절실한 때에 어설픈 개랑주의의 깃발만 펄럭이는 모습이었다.세 젊은 학생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대학생의 잇따른 투신·분신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운동권의 좌절감과 방향감각 상실을 웅변해준다며 냉소적으로 바라보았고 정권도 이런 쪽으로 몰고갔다.그러나 수십,수만명의 시민·학생들이 이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세 학생은 직선제 정부의 출현에 만족해하려는 현실순응의 추세를 질타하면서 우리에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해결해야만 하는 민주 현안이 산적해있음을 죽음으로 일깨웠다.이에 많은 국민들이 각성하고 공감을 표한 것이었다. ○시청앞 장례식 노제 30만 인파 운집 88년 5월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가협 등 재야 민주단체 주최로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다른 한쪽에서는 100여명의 청년들이 참가한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명청) 주최 ‘광주항쟁계승 마구달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출발신호를 기다리던 오후 3시38분.서울대생(화학과 2년)으로 명청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장인 趙城晩이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 나타나 핸드마이크로 사이렌을 울린 뒤 “양심수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말이냐” “공동올림픽 개최하여 민족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는 구호를 1분여 동안 외쳤다.이어 흰색 농민복을 입은 조성만은 오른손에 든 칼로 복부를 찌르고 몸을 뒤로 날려 마당으로 떨어졌다.투신 직후 인근 백병원으로 옮겨진 조성만은 이날 저녁 7시쯤 운명했다. 5월19일 낮 서울시청 앞에서 치뤄진 조성만의 장례식 노제에 30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했다.1년전 시민항쟁 당시의 열기가 느껴지는 군중모임으로 4월총선에서 여소야대를 이룬 당시 야당의 金大中 평민당총재와 金泳三 민주당총재도 참가했다.조성만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전주 도심을 지날 때와 망월동 묘역으로 떠나기 전 광주 도청앞에서 노제를 지낼 때도 수만명의 시민들이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전북 김제 농촌에서 하급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조성만은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신부의 길을 걸을 계획이었다.그는 투신 오래전에 일기에서 ‘10년 세월에 휼륭한 사제가 되어 교회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하느냐 한순간에 나의 진실된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자문했다.조성만은 투신 당일 아침 작성한 유서에서 특히 한반도 통일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면서 자유로운 통일 논의를 소리높여 요구했다.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논의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통일 전사’로 불리는 조성만은 유서 말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어머님 얼굴,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가) 고행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오월항쟁 계승 군부독재 타도” 외쳐 조성만의 장례식이 있기 하루전인 5월18일 오전 10시30분 단국대 천안 캠퍼스 시계탑 밑에서 이 학교 법학과 2학년에 다니다 휴학중인 崔德秀가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했다.성명서를 통해 ‘광주학살 비리주범 노태우를처단하자’‘오월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 국정조사권을 발동하라’고 주장한 최덕수는 천안 순천향병원에 이어 서울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분신 9일만인 26일 운명했다. 빈한한 가정사정으로 학교를 쉬고 공장과 고향 농촌을 오르내려야 했던 최덕수가 분신할 당시 정가는 4월 총선후 국회개원을 앞두고 광주항쟁 진상조사 특위구성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그의 30일 서울역 노제에는 1만5,000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가했고 광주도청 분수대 노제에는 3만여명이 모였다. ○“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 호소 그리고 6월4일 오후 4시30분 대학생들의 통일논의가 급피치를 올리고 있는 가운데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朴來佺(국문3)이 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했다.박래전은 이미 분신 이틀전에 작성한 유서에서 ‘학살원흉 노태우 처단’ ‘통일논의 자유보장’ ‘양심수 즉각석방’ 등을 주장했다.그는 특히 학생들과 사회인 모두에게 안일과 무감각 그리고 분열의 씨앗을 제거하고 단결의 투쟁 대오를 갖추어 나갈 것을 호소했다. “저의 뒤로 저와 같은 죽음이 뒤따라서는 안됩니다.이제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손실일 뿐입니다.”“어두운 시대를 열정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한 인간이 여러분의 곁을 떠납니다.87년 6월 투쟁을 기억하십시오.그리고 개량의 환상,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의 대오를 굳게 하십시오.”“지금은 슬프시겠지만 제가 원하는 그날이 오면,두분 부모님,아니 그날이 오기까지 힘드시더라도 눈감지 마세요.” 분신 이틀 뒤인 6일 운명한 박래전의 장례식은 12일 수천명이 참가한 시청앞 노제와 함께 치뤄졌다. ◎박래전의 형 박내군씨/인권운동 사랑방 사무국장 활동/동생보다 먼저 민주화운동 투신/유가협 일맡아 희생자 50여명 처리 인권 ‘지킴이’로 이름높은 인권운동 사랑방의 朴來群 사무국장(37세·연세대 국문과졸)은 분신자살한 숭실대생 박래전의 바로 윗형이다.민주 열사 가족들 가운데 스스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그들이 세상을 뜬 다음이다.그러나 박래군 사무국장은 동생보다 먼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을 의식화(?)한 것은 전연 아니다.그는 “대학 학회장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바빴을 뿐이며 동생은 스스로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두 형제는 수원에서 버스로 한시간 달려가야 하는 남양반도 끄트머리 시골 출신으로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다.어렵게 대학에 보낸 두 아들이 모두 민주운동을 한다면서 감옥에 가고 그러다 끝내 분신하는 아들까지 나오게 된 시골 부모의 마음을 이리저리 헤아릴 필요는 없을 터이다.박래전이 유서에서 염려했던 부모는 지금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박래전이 대학 1학년 때인 82년 가을부터 가두 시위에서 형제는 서로 마주치곤 했다.박 사무국장이 86년부터 2년형을 살고 있던 감옥에서 87년 6월 항쟁으로 석방돼 나온 뒤에 형제는 자취방에서 같이 살았다. “그때 래전이는 특히 몇몇 운동한다는 사람들의 불성실 무책임에 가슴아파했다.” 동생이 죽은 후 그는 유가협 일을 맡아 5년동안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50구가 넘는 민주화 희생자들의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동생의 분신이 갖는 의미에 대해 따로 덧붙일 말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같은 무렵 통일논의에 물꼬를 튼 조성만의 분신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연보 ◆박래전 63년 경기 화성 출생 82년 숭실대 국문과 입학 83년 휴학,입대 86년 제대 87년 복학 12월 민중후보 선거대책위선전국장 88년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 88년 6월4일 학생회관 분신 88년 6월6일 운명 ◆최덕수 68년 전북 정주시 출생 87년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 입학 88년 휴학 88년 5월17일 교내 광주영령 추모식에서 성명서 낭독 88년 5월18일 분신 88년 5월26일 운명 ◆조성만 64년 전북 김제 출생 83년 전주 해성고 졸업 84년 서울대 화학과 입학 85년 군입대 87년 제대,복학,명동성당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 87년 12월 대선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데모 관련 구류 10일 88년 5월15일 명동성당내 교육관 옥상 투신,운명
  • 수사 반발의 빌미주지 말라/李啓弘 논설위원(時論)

    ○당국 절차상 허점 노출 북한군에게 총격요청을 한 사건을 다루면서 불거져나온 고문 주장,안기부가 96년 총선 직전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를 비롯한 여러 북풍사건을 수사하겠다는 발표,국정감사 자료를 통해 국민의 정부 들어 감청이 97년보다 배로 늘어났다는 보도 등과 관련하여 집권 여당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모양새다.이런 내용을 살피면서 당국의 대응능력,철학,원칙이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저항세력의 초점 흐리기 당국이 역공격을 받는 것은 큰 테두리에서 개혁과 사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그리고 비판적 시각으로 보면 수사방법과 절차상의 허점,실수에서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이 때문에 혐의를 받고 있는 수사대상은 초점을 흐리기 위해 이런 실수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역공격을 가해오고 있는 것이다.그 역공격의 선두에 있는 사람들은 지난 정권시절 권력과 재산을 쥐었거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물론 이분법적으로 이렇게 편을 가르는 것이 편협한 생각일지 모르겠다.그러나 가치중립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이들은 권력학은 물론 고문,정보다루는 솜씨,대중조작 기술에 관한한 ‘대선배’들이다.여기에는 일부 언론이 가세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서 정부는 그들에게 역공격을 받는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북풍을 싸잡아 수사하겠다고 발표하자 87년 KAL기 폭파사건을 중점 부각시키면서 무슨 뚱딴지냐는 역공격이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여러 사안중 하나의 예로 흘린 것이라 할지라도 이들은 이런 허점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너 잘 만났다는 듯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동안 선거때마다 불거져나온 국민적 북풍의혹을 형해화시켜버리는 것이다.따라서 ‘정치적 수사(修辭)’라도 자신없는 것은 끄집어낼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 산만하게 조건반사적으로 대응할 필요도 없다.핵심적인 사건 한 두건으로 한정해서 명명백백히 밝히면 된다.그중 단 하나라도 딱부러지게 들추어내면 다른 건에 대해서는 굳이 따질 것 없다는 국민적 컨센서스가 형성되는 것 아니겠는가.그리고 완벽하게 사건내용을 캐낼 때까지는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 중대한 문제를 도중에 공개하면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오해를 사기 알맞다. 정략이 아니어도 진실을 규명할 수 없는가. 통신 감청도 수사의 불가피성 때문에 어느정도 인정한다고 하지만 97년보다 배 이상 늘었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물론 감청대상자들이 교활하게 빠져 나갈 구멍부터 살피기 때문에 불가피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하지만 과학적 수사기법,첨단 정보채취 기술을 익히는 것이 우선 필요한 것이지,그릇된 관행을 계속 활용한다는 것은 국민의 정부에선 있을 수 없다. 정부는 이번 일련의 사건을 통해 저항세력이 노리는 바를 알아야 한다.고문 주장,북풍,감청문제가 한 세트로 묶여서 사정당국을 공격하는 배경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그리고 개혁과 사정의 철학과 비전을 다시한번 추슬러야 할 것이다. ○공정하고 당당한 수사를 이들이 개혁의 본질을 희석시키고 왜곡하고,딴죽을 걸며 시간을 벌어나가는 사이 세월은 흘러가게 되어있다.제2의 金泳三정권처럼 이 정권도 비참하게 몰락하길 바라는 견해도 그런 세월의 체험에서 나올 법하다.얼마나 소모적이고 국가적낭비인가.더욱이 이 정권은 金泳三정권처럼 그들의 비호가 아니라 반대속에 탄생했다.그래서 발목비틀기는 더 거칠고 집요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특정 정당과의 싸움이거나 특정인 몇사람과의 대결이 아니라는 것도 이번 사건을 보며 생각해야 할 것이다.불행히도 이 나라에는 걷어내야 할 ‘어둠의 세력’이 너무나 많다.
  • ‘총격요청’ 희석 안된다(사설)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을 수사하면서 제기된 고문 여부문제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여기서 우리는 총격요청사건과 고문문제에 관해 다시한번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먼저 일부 언론에서 고문문제로 본질을 교묘하게 희석시켜가는 것을 경계한다.말로는 판문점 총격요청사건의 본질을 흐려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지만 실상은 고문에 더 비중을 두어 결과적으로 총격요청사건을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태도는 굳이 들먹일 것없이 이들 언론들이 내막적으로 구지배권력과 동반관계를 유지해온 결과이다.결정적인 순간마다 교묘한 물타기로 본질을 왜곡시키며 구지배권력에 이익을 안겨주었던 것인데,이제는 그러한 방법이 통할 수 없다.나라의 운명을 사물화한 그릇된 권력관을 바로잡는다는 성숙된 시민의식이 이를 결코 용납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고문여부는 명백히 밝혀야 한다.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어정쩡한 신체감정결과를 여야는 아전인수로 활용할 것이 자명하지만,그럴수록 정부는 이에 개의치 말고 고문문제를 분명히가리기를 바란다.한점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해 특별검사제를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그러나 고문주장과 총격요청사건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총격요청은 국기를 뒤흔든 국가반역이었다.자칫 전쟁을 불러와 우리의 귀중한 아들딸을 희생시킬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그리고 국민적 의혹을 살만한 이와 유사한 사건이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번에 시원하게 진상을 밝혀야 한다.경실련등 시민단체들은 최근”이 사건이 여야간의 정치적 절충으로 마무리돼 명확한 진상규명을 통한 유사사태의 재발방지라는 본래 목적을 호도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경고했다.민주노총 등 다른 사회단체들도 “87년 대선때의 KAL기 폭파사건,역대 선거때마다 등장했던 간첩단 사건과 북풍사건,96년 총선때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펼치며 냉전분위기를 고조시킨 사건 등도 정치공작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며 이의 진상조사까지 요구하고 있다.당연히 이 사건들의 내막도 밝혀야 한다.그러나 지금은 수사초점이 흐려질 수있기 때문에 이번 총격요청 사건에 국한해 철두철미 수사하기를 바란다. 총격요청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은 국민의 반공·안보의식의 혼란을 막는 길이며,부정한 권력이 정권유지를 위해 적과 내통하는 민족반역의 범죄사례도 있구나 하는 서글픈 진실을 알게되는 교육도 될 것이다.
  • 구속 3人 누구인가

    ◎吳靜恩­朴寬用 의원 생질… 한때 청와대행정관 선무/張錫重­대북교역가 자처… 옥수수 박사와 함께 방북/韓成基­YS 주치의 알게된 후 의료사업전문가 행세 ‘총격 공작’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 吳靜恩(46)·張錫重(48)·韓成基(39)씨는 친분 관계를 이용,치밀한 계획을 세워 북한측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났다. ◇吳靜恩씨=80년 연세대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유학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한나라당 朴寬用 의원의 생질로 93년부터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해왔다. 韓씨와는 지난해 고려대 언론·정책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만났다. 동기생 50명중 두 사람은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았고 특별한 친분도 없었으나 대선 캠프에 가담하면서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 S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부인 金모씨는 “그런 엄청난 일을 모의했을 리 없으며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張錫重씨=대북교역사업가로 자처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병으로 1년 전부터 입원중인 부인 鄭모씨(48)의 병원비 마련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웃들의 얘기다. ‘옥수수 박사’로 유명한 金順權 경북대 석좌교수와 함께 지난 1월 북한을 방문,슈퍼옥수수 재배를 위한 의향서를 체결했던 인물. 명지대 무역학과를 졸업,93년 서울 제기동에 ‘대호물산’을 설립해 대북교역사업을 해오다 폐업했다. 서울지법 동부지원에서 공갈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경력도 있다. ◇韓成基씨=95년 1월 당시 金泳三 전 대통령의 주치의 高모 박사를 우연히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의료사업 분야의 전문가로 행세하며 (주)포스데이터 비상임 고문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J사 고문,모방송사 PD 등도 사칭하고 다녔다. 포스데이터에서는 96년 1월부터 12월까지 의료분야 소프트웨어 개발의 자문역을 맡았다는 회사측의 설명. 지난해 초에는 진로그룹 회장을 만나 동문 운운하며 포철 상임고문으로 일하고 있다”며 취업을 청탁하기도 했다는 진로측의 설명. 96년 정보통신업체인 P사 등을 상대로 5,400만원을 사취한 혐의로 지난 8월 경찰청에 구속됐다. ◎李會晟씨 누구인가/정세분석팀이끈 대선캠프 ‘실력자’ ‘총격요청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李會晟 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은 李會昌 한나라당총재의 친동생으로 지난해 대선 당시 李후보의 선거캠프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96년 정·관계의 30∼40대 젊은 인사들로 ‘정세분석팀’을 구성해 ‘李會昌 대통령 만들기’에 발벗고 나섰으며,정기적으로 보고서를 만들어 李후보에게 전달했다.당시 李후보는 이 보고서를 상당히 신뢰했다는 것. 때문에 李씨는 대선 캠프에서 ‘실력자’로 통했다. 정치자금 모금 창구역할을 맡았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특히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과정에서 민주당 趙淳 총재의 장남 기송씨와 합당원칙을 논의하는 등 ‘산파역’을 맡았다는 후문이다.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미국 럿거스 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86년부터 95년까지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을 세차례나 역임하는 등 에너지 분야의 국내 선구자로 꼽힌다. □80년이후 각종선거와 북풍의혹◆13대 대선 ·선거일:87년 12월16일 ·사건일:87년 11월29일 ·의혹사건:대한항공기폭파사건 ·주요내용: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항공기 폭파 사건이 일어나 온 국민이 경악, 초대형 북풍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 타격 ◆14대 대선 ·선거일:92년 12월18일 ·사건일:92년 10월 ·의혹사건:남파간첩 이선실 사건 ·주요내용:대선을 2개월을 앞두고 남파간첩 이선실 사건이 터져 김대중 후보 용공시비에 휘말림 ◆6·27지방선거 ·선거일:95년 6월27일 ·사건일:지방선거전 ·의혹사건:대북 쌀지원 ·주요내용:선거를 앞두고 북한 동포를 돕는다는 취지에서 쌀을 지원, 그러나 북한 쌀지원을 선거용으로 무리하게 서둘러 결과적으로 대북정책 실패 ◆15대 총선 ·선거일:96년 4월11일 ·사건일:총선직전 ·의혹사건 ­판문점무력시위:총선직전 여러차례에 걸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중무장 북한군 무력시위 ­8월 남파된 김동식의 체포로 정치인 접촉:95년 10월 체포된 남파간첩 김동식의 야당 정치인 접촉으로 또 한차례 용공시비 ◆15대 대선·선거일:97년 12월18일 ·사건일:대선기간중 ·의혹사건 ­오익제 편지사건:안기부 11월20일 도착한 편지를 12월5일 압수수색, 11월25일 2차 편지공개 ­김병식 편지사건:12월13일 도쿄에서 공개된 북한사민당 위원장이 김대중 후보에게 보낸 편지. ­김장수 편지사건:11월20일 북한인사 김장수가 국민회의 김원길 정책위의장에게 편지를 보내 김대중 후보에게 전달하라고 한 내용 ­윤홍준 기자회견:12월11일 재미실업가 윤이 베이징에서 가진 기자회견. 김정일이 김대중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내용 ­판문점총격유도공작설:12월12일 이회창 후보 비선조직이 북측과 접촉, 북한측에 총격유도를 제의했다는 내용. 검찰수사
  • 建軍 50돌과 DJ의 軍 신뢰(청와대 취재수첩)

    제9호 태풍 ‘얘니’가 물러가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드러낸 1일은 건군(建軍) 5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날 아침 金大中 대통령은 우울함과 기쁨이 교차했다. 남부지방의 태풍피해 소식으로 착잡해하면서도 건군 50주년 행사를 번듯이 치를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무척 기분이 좋아보였다고 朴智元 대변인은 설명했다. 金대통령의 마음 속에는 건군 기념행사를 보기좋게 끝냈으면 하는 바람이 깔려있다. 태풍우(颱風雨)때문에 군부대의 오랜 준비가 무위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50주년 행사를 준비한 장병들의 허탈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아마 지난 사나흘동안 金대통령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고민이었으리라. 작은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군에 대한 金대통령의 신뢰의 싹을 찾을 수 있다. 군은 오래전부터 金대통령과 ‘미묘한 관계’로 인식되어 왔다. 지난 87년 대선 당시 YS(金泳三 전 대통령)와 야권후보단일화 협상 때도 金대통령을 짓누른 것은 군의 향방이었다. 金壽煥 추기경도 군의 반발을 고려,이번에는YS가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낸 적이 있다. 선거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기승을 부리던 ‘북풍(北風)’도 그와 무관치 않은 공작이었다. 심지어 몇해 전 계룡대에서 거행된 3군본부 이전 기념행사 때는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도 단상에 앉지 못한 수모’를 참아야 했던 金대통령이다. 金대통령은 이날 국군 최고통수권자로서 사열과 분열식에서 89차례나 거수경례로 답례했다. 군에 대한 金대통령의 인식 변화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이제 더이상 서울을 쳐다보지 말라”는 언급에서 보듯이 공정한 인사와 정치적 인사 배제 의지만은 분명하다. 지난 28일 육군 모부대 화력시범을 참관하고 난뒤 “정말 든든하다”고 토로했다. 최근 육군 중령과 대령 인사 때도 “千容宅 국방장관과 군 수뇌부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외교안보수석실의 관계자는 “심지어 林東源 외교안보수석에게도 일체의 얘기가 없었다”고 전했다.
  • 통혁당 재건 시도 간첩 둘 구속

    ◎오스트리아서 北에 포섭 2차례 입북/국내 잠입… 통혁당 당수가족 수소문 국가안전기획부는 23일 오스트리아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돼 간첩활동을 해온 李尙珍씨(44·서울 강남구 신사동)와 金英福씨(36·여·인천시 부평구 산곡동)를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혐의로 구속,검찰에 송치했다. 또 강진산업 대표 李基德씨(39·충남 천안시 봉명동)도 국가보안법의 회합 및 편의제공 혐의로 구속했다. 내연의 관계인 李尙珍씨와 金씨는 90년 오스트리아 빈의 ‘평양식당’에서 50대 북한공작원 金철수씨 등에게 포섭돼 93년과 94년 두 차례 입북,노동당에 입당한 뒤 지난해 말까지 7차례에 걸쳐 국내에 들어와 한국기계류 수출입 현황,천안 레이더기지 등 국가기밀을 수집해 북측에 보고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특히 94년 2차 입북 때 지난 64년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으로 처형된 당수 金鍾泰씨(69년 사형집행)의 가족을 찾아 조직을 재건하라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심부름센터를 통해 이들의 소재를 수소문하기도 했다. 조사결과 李尙珍씨는87년 대선 때 모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다 운동권 대학생들과 접촉,주체사상에 빠져들었으며 90년 오스트리아에 ‘주체사상연구소’가 있다는 보도를 보고 ‘주체사상의 대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내연관계인 金씨와 출국한 것으로 밝혀졌다.
  • 농가부채 해결 상환 연기로(사설)

    농가부채 문제를 놓고 정부와 농민들 사이에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정부부처간에도 이견을 보이고 있어 문제해결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농민들은 지난 15일 대규모집회를 갖고 농가부채 상환유예와 이자감면 등 부채탕감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농림부는 농민이 농축협으로부터 빌린 상호금융자금 중에 올해와 내년 중에 갚아야 할 11조원의 금리를 16.5%에서 14.5%로,3조5,000억원의 정책자금 금리는 6.5%에서 5%선으로 인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반면에 예산당국은 정책자금 금리를 현행대로 두되 오는 10월부터 내년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정책자금의 경우 신규대출로 처리,상환기간을 사실상 2년간 연기해주기로 결정했다다. 농민들은 역대 정권의 농정실패가 농촌을 피폐화시키고 빚더미에 짓눌리게한 만큼 농가 부채상환유예와 이자감면 등 부채탕감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정부가 지난 대선에서 농가부채 탕감을 공약사항으로 내건 바 있어 농민들은 ‘공약을 이행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정부는 지난 89년 농가부채를 탕감해준 일이 있지만 더 이상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막기 위해서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농가부채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정부는 지난 87년 농가의 고리사채(私債) 7,700억원을 저리의 금융기관 자금으로 전환해 주었고 89년에는 2조5,000억원의 농가부채를 탕감해 준 바 있다. 농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가 그동안 부실기업과 금융기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수십조원을 지원하면서도 농민들에게는 부채탕감을 하지 않는 것은 형평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농민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사태이후 정부가 부실기업과 금융기관을 지원하면서부터는 지원방법이 달라졌다.부실하게 경영을 한 기업에게 지원을 할 때는 기업주의 경영권을 박탈하고 있다.금융기관에게는 인력을 40% 이상 감축하고 은행자본금을 줄여서 주주들에게도 손해를 보게하고 있다. 또 형평성문제와 관련해서 간과되어선 안되는 계층이 있다.그들은 도시근로자다.많은도시근로자가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렸다가 실직과 감봉바람에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해 집을 경매당하고 있는 실정이다.지금은 정부가 특정집단을 위해 막대한 재정자금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따라서 농가부채문제는 금리의 일부 인하나 상환을 연기하는 선에서 매듭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 林 前 청장 수금 수법/기업사장 직접 불러 현금으로 전달 요구

    ◎자금제공 거부 업체엔 세무조사 위협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38억원의 선거자금을 불법으로 모금해 한나라당에 전달한 혐의로 지난 1일 구속된 林采柱 전 국세청장은 당시 한나라당 대선기획본부장이었던 徐相穆 의원의 부탁을 받고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기업들로부터 돈을 거둬들였다. 특히 지난 달 미국으로 출국한 李碩熙 전 국세청 차장은 林 전 청장과 함께 대선자금 제공을 거부하는 기업에는 세무조사를 하는 등 각종 불이익을 주겠다며 노골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 지난 87년 대선 당시 成鎔旭 전 국세청장이 대상기업을 선정한 뒤 11개 기업으로부터 54억여원을 모금한 수법과 비슷하나 모금과정은 훨씬 노골적이고 강압적이었다는 게 검찰관계자들의 설명이다. 87년 대선에 비해 지난 번 대선은 판세가 훨씬 혼전양상이어서 기업들도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결국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선거자금 모금이 어렵다고 판단한 徐의원은 고교 동창인 李 전 차장을 찾아가 국세청의 ‘위세’를 활용,기업에 압력을 가하도록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林 전 청장이 현대 대우 SK 동아 극동등 5개 기업으로부터 돈을 거둬 徐의원에게 전달하는 수법도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林 전 청장은 지난해 11월18일 동아건설 유성용사장을 청장실로 불러 한나라당에 5억원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이틀 뒤 서울 중구 동아생명 사옥 지하주차장에서 자신이 지정한 승용차 트렁크에 현금 5억원이 든 가방을 넣도록 한 뒤 승용차를 徐의원에게 보냈다. 나머지 기업으로부터도 “자금이 마련됐다”는 연락이 오면 徐의원에게 이 사실을 통보,접선장소를 정했다. 徐의원은 측근을 접선장소에 보내 “여의도에서 왔다”는 말을 암호로 돈을 수금해 갔다.
  • 왜곡보도 50건 선정

    언론개혁시민연대는 한국 언론의 대표적인 왜곡 보도사례 50건을 선정,2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전시실에서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새달 2일까지 계속되는 전시회는 독재권력을 정당화하거나 용공조작·인권유린 등에 앞장섰던 허위 왜곡기사들의 실체를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언개련이 선정한 허위 왜곡보도 사례 50건을 소개한다. □왜곡보도 50건 내용 ▲권력의 정당화­민주화 외면 ­자유당 4사 5입 개헌 정당화(서울 56년 3월) ­이승만 우상 숭배(서울 56년 3월) ­박정희 군부쿠데타 지지(경향,조선 61년 5월) ­10월 유신 지지(조선,중앙,서울,한국 72년 10월18일) ­부마사태 왜곡(경향,서울,중앙,한국 80년 10월) ­전두환의 권력 장악 정당화(서울 80년 4월) ­광주민주화 운동 포고로 매도(조선 80년 5월) ­전두환 미화­‘인간 전두환’(81년 8월) ­4·13 호헌 조치 옹호 ­김대중 친서설(연합 89년 7월) ▲냉전이데올로기 강화와 용공조작 ­이승복군 허위보도(조선 68년 12월) ­경향신문 기자 6명 용공혐의 구속(80년 5월)­김근태 용공조작 사건(경향,중앙 85년 10월) ­‘대학가의 음영’ 시리즈(경향 85년 10월) ­건국대 사태(86년 10월) ­평화의 댐(86년 10월) ­문익환 목사 기자회견(조선 89년 5월) ­북한 핵실험 보도(92년 6월) ­김평일 망명설 보도(94년 8월) ­성혜림 망명 사건(96년 2월) ­북한 공군 이철수 대위 귀순 사건 컬러 조작(96년 5월) ­북한정치범 수용소 보도(97년 7월) ­이석현 의원 명함 파문(97년 8월) ▲민중생존권 외면 인권 유린 ­광주대단지 사건(71년) ­함평고구마 피해보상 요구(76년) ­삼청교육대 왜곡(80년 8월) ­YH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79년 8월) ­권인숙양 성폭행 왜곡(86년 8월) ­노동자 대투쟁(87년) ­김기설 유서대필 논쟁(91년 7월) ­여의도 농민시위(94년 6월) ▲선정주의에 의한 오보 ­김구,이승만 동석 사진 조작 ­중공군 인해전술 사진 ­압록강변 병사 사진 ­일본군 독립군 작두 처형 사진 ­호랑이 출몰 사진(동아 80년 1월) ­김일성 주석 사망설(조선 86년 11월) ­사노맹 백태웅씨 옥중 결혼(중앙 92년 6월) ­서해 훼리호 백두운 선장 생존(한겨레 등 93년 10월) ­육영수 여사 파격 의혹(국민 90년 5월) ­뉴스위크 이대생 ‘돈의 노예들’ 사진보도(91년 11월) ▲언론사의 이기주의에 의한 왜곡 ­신문제작 거부 사태에 대한 견해(조선 75년 3월) ­동아투위에 대한 왜곡(동아 75년 3월) ­류근일 칼럼 ‘정주영 변수’(92년 7월) ­선거유세장 인파 조작(제주신문 92년 6월) ­지역민방 케이블TV 경영 수지 과장(95년 5월) ­중앙일보 대선 편파보도(97년 12월) ­월 펀슨 세계은행 총재 발언(97년 9월) ­재경원 발표(97년 11월) ­한국경제 위기 아니다(97년 4월)
  • 金 대통령과 望月洞/87년 이후 정치적 고비때마다 참배

    ◎이번 방문 국민대통합의 계기 기대 金大中 대통령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방명록에도 ‘대통령 金大中’이라고만 썼다. 굳은 표정으로 제단에 선 金대통령은 향을 피우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제단에는 ‘대통령 김대중’이라고 쓴 조화가 놓여 있었다. 5·18 희생자 영정 261위를 모신 유영봉안소에서는 헌혈하다가 총탄에 맞은 고 박금희양(당시 전남여상 3년)과 어머니와 함께 걸어가다가 숨진 김완봉군(당시 무등중 3년)의 영정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기는 듯했다. 비온 뒤 한껏 푸르른 광주 망월동 5·18묘역은 이 곳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그리고 이제는 대통령이 된 金대통령을 이렇게 맞아 들였다. 金대통령이 망월동 5·18묘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5월16일 5·18묘역 성역화사업 준공식 참석을 겸해 참배했었다. 그때 金대통령은 방명록에 ‘永遠한 勝利’라고 썼었다. 제15대 대선승리를 예감했던 것일까. 이에 앞서서는 87년 6·29선언으로 사면이 된 직후였다. 그러나 모두 야당총재나 지도자 자격이었다.현직 대통령의 5·18묘역 방문은 金대통령이 처음이다. 金泳三 전임 대통령은 취임 후 매년 망월동 묘역 참배를 시도했지만 남총련 학생과 일부 5·18 관련단체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5·18묘역은 金대통령과 숱한 정치적 인연도 맺고 있다. 96년 4·11총선 패배 직후 등 정치적 고비때마다 이곳에 들러 새출발의 결의를 다져왔다. 이번엔 국난극복과 국민통합을 위한 ‘제2건국운동’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들도 용서와 화해의 완결,그리고 사회통합의 첫걸음으로 비쳐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 현대그룹/鄭周永의 現代정신(한국경제를 이끌어온 기업)

    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자이면서 아직도 실질적 오너인 ‘왕회장’. 그를 한마디로 형언하기에는 모자람이 너무 많다. 살아있는 우리나라 경제의 역사이자 증인이랄까. 그는 불모의 땅에 경제기적을 이룬 한국 근대화의 큰 축이다. 朴正熙 전 대통령에 비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가 감히 소떼 방북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경색된 남북협력을 소떼로 뚫어보겠다는 기막힌 발상. 소떼 방북은 불굴의 의지가 얼마나 위대함을 창조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鄭회장의 오늘은 무엇보다 강원도 통천에서 뼈저리게 겪었던 체험을 승화시킨 정신력에서 비롯된다. 그의 행보는 현대정신에 그대로 녹아있다. ‘창조적 예지’ ‘적극 의지’ ‘강인한 추진력’이 바로 그것이다. ◎초인적 의지로 불가능에 도전/황량한 울산바닷가서 중공업立國 바라봐/막힌곳 창조적 예지로 뚫어 경제기적 창조 창조적 예지는 ‘중공업 한국’을 일군 원동력이 됐다. 60년대말 울산의 황량한 바닷가에 수십만t 건조능력의 조선소를 세우리라 생각한 사람은 鄭 회장 밖에 없었다. 71년 사업계획서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1장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차관을 얻으러 간 사실은 차라리 아스라한 추억이다. 서산의 4,700만평에 이르는 대규모 간척지를 옥토로 가꾼 것도 그의 선견지명을 잘 보여준다. 84년 최대 난공사인 최종 물막이 공사를 보자. 그는 대형 유조선을 이용,엄청난 압력의 물 흐름을 막아 둑을 완성하는 기상천외의 기법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초인적 의지와 추진력은 오늘의 ‘현다이’ 명성을 낳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鄭회장을 불세출의 인물로 각인시킨 대역사였다. 68년 2월 428㎞건설에 착공해 2년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기간 완공기록을 세웠다. 76년에는 중동붐을 타고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린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을 9억4,000만달러에 따냈다. 단일공사로 세계 최대 건축공사인 알코바 공공주택사업(6억3,000만달러),젯다 공공주택공사(5억2,000만달러)등도 鄭회장 특유의 돌파력과 추진력,긍정적인 사고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자동차사업 진출도 마찬가지. 76년 포니 출시에 이어 86년엑셀의 미국 진출이라는 신화를 낳았다. 최근에는 첨단 전자산업에 주력하고 있다. 鄭회장은 이제 남북통일의 길을 튼 금강산 개발사업에 필생의 열정을 쏟고 있다. 鄭회장의 성공은 정신력의 승리 외에 다름 아니다. 그는 자서전‘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정치와 경제에 기적이란 없다. 기적이란 인간의 정신력으로 실현한 것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확실히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이것은 바로 정신의 힘이다. 신념은 불굴의 노력을 창조할 수 있다. 진취적인 정신,이것이 기적의 열쇠다” ◎現代의 야심찬 경협계획/소떼로 금강산 가는길 텄다/새달 25일 첫 관광객 출발/44억弗 수출단지도 구상/금강산 광천수 금명 개발 500마리 소떼 방북은 20세기에 마지막으로 연출할 수 있는 장관이었다. 이는 곧 거대한 남북 경제협력사업을 국내·외에 알리는 서곡이기도 했다. 현대는 ‘금강산 사업’에 향후 20억달러를 들여 추진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하일라이트는역시 금강산 관광사업. 오는 9월 25일이면 3만2,000t급 ‘현대금강산호’가 1,000여명의 관광객을 싣고 동해항을 출발한다. 북한측과의 합의와 방북실무단의 협의가 일정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관광객들은 4박5일의 일정으로 해금강 등 4개 관광코스를 둘러보게 된다. 실향민들은 고향땅을 어루만지며 한줌의 흙을 소중히 간직해 올 것이다. 현대는 금강산일대를 등산관광코스,해안관광코스,호수 및 온천관광코스,연안관광코스 4개 권역으로 나눠 개발할 참이다. 호텔 쇼핑센터 골프장 노래방 공연장 등 각종 숙박·위락시설도 마찬가지다. 이곳을 통일된 한국의 최대 관광지로 가꿔 설악산관광과 연계시킨다는 생각이다. 곧 관광객 모집에 나서고 비용도 150만원 선에서 결정할 예정이다. 남북경협은 해주 경공업단지와 자동차조립사업이 핵심을 이룬다. 국내 섬유 신발 피혁 등 유휴설비의 20%를 이전,연간 44억달러를 수출한다는 구상이다. 하루 100t규모의 금강산 광천수도 개발한다. ◎어떻게 성장했나/47년 세운 현대토건,6·25후 최대건설사 발돋움/67년 현대자동차 설립 86년에 美國 처녀수출/73년 조선소 세우기도 전에 26만t 유조선 수주/75년 오일쇼크땐 중동진출해 달러 벌어들여 현대그룹의 역사는 47년 5월 야심찬 강원도 청년 鄭周永이 서울 초동에 세운 현대토건에서 시작한다. 해방의 어수선한 경제상황에서 서서히 명성을 다져가던 鄭회장은 50년 현대건설로 상호를 바꾼다. 같은해 터진 6·25는 오늘날의 현대를 일구는 밑바탕이 됐다. 제1한강교 복구공사를 비롯,수많은 미군 공사를 따내며 급속도로 사세를 확장,60년 국내 건설업계 1위에 오른다. 이후 현대는 ‘최초’ ‘최대’라는 각종 최상급 수식어를 갈아치운다. 65년 국내 최초로 해외 건설시장에 진출했다.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세계 무대에 이름을 내밀었다. 이어 베트남 알래스카 괌 호주 인도네시아 등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67년에는 현대자동차가 세워졌다. 미국 포드자동차와 계약을 맺고 ‘코티나’를 조립생산했다. 7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를 탄생시켰다. 세계에서 16번째,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자체 고유모델 생산국이 됐다. 73년 설립된 현대조선소는 오늘날 현대중공업의 모태. 기술과 자본이 전무하다시피했던 당시 鄭회장은 선진국을 상대로 치열한 외교력을 발휘,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그들을 설득,영국과 스위스 은행에서 1억달러의 차관을 들여왔다. 오일쇼크로 우리 경제가 꽁꽁 얼어붙어 있던 75년,현대는 중동으로 눈을 돌렸다. 미수교국이었던 이라크 리비아에도 현대의 깃발을 꽂음으로써 민간외교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86년에는 국내 최초로 미국에 ‘포니 엑셀’을 수출한다. 4개월만에 5만2,400대를 판매,프랑스 르노가 갖고 있던 수출원년 최다판매 기록을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鄭회장은 87년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鄭世永 회장이 그룹회장에 취임했다. 지금의 금강산개발로 대표되는 현대의 남북경협은 89년부터 시작됐다. 국내 기업인 가운데 최초로 방북한 鄭회장은 이때 이미 금강산 공동개발,시베리아개발 공동참여,원산 철도차량공장 등에 대해 장기적 구상을 세웠다. 96년부터 鄭夢九 회장 체제가 출범했고 지금은 鄭夢憲 회장과의 쌍두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히트상품 2選 ◎현대자동차 아토스/서민을 위한 벤츠A급 ‘서민을 위한 벤츠 A급’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극찬이다. 요즘 각광받는 경차의 대명사다. 4기통 엔진을 장착해 정숙성과 성능이 뛰어나다. 급커브때 안전성도 뛰어나다. 안락한 실내공간과 대형차 못지않은 화물칸을 갖췄다. 초보·여성운전자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됐고 타고내리기가 편하다. 에어백 등 다양한 안전사양을 겸비했다. 올해 열린 제네바 모터쇼에서 가장 실용적인 차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대정공 싼타모LPG/경제성 뛰어난 미니밴 국내 최초 미니밴 싼타모의 후속 제품.5·6·7인승 다양하다. 평일에는 출퇴근,주말에는 레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경제성이 뛰어나 연료비가 휘발유 값의 3분의 1이면 된다. 자동차세도 연간 6만5,000원에 불과하고 구입시 세금도 70만원 절약할 수 있다. 출시 한달여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다. 환경친화적이라는 특장도 갖췄다. 기본가격은 1,313만원. □현대그룹 계열사 현황(*:상장회사) * 1·현대자동차·67.12.29·자동차 제조/판매 2·현대중공업·73.12.28·선박 건조 및 수리업 * 3·현대건설·47.5.25·건설업 * 4·현대전자산업·83.2.23·반도체,정보,산업전자 등 * 5·현대정공·77.7.1·공작기계,철도차량 제조 등 * 6·현대종합상사·76.12.8·종합 무역업 * 7·현대자동차써비스·74.2.26·자동차판매 및 정비사업 * 8·현대상선·76.3.25·해상운송업 * 9·현대산업개발·86.11.29·주택건설,해외건설업 등 *10·인천제철·53.6.10·재강,압 연,주단강 등 제조 11·현대정유·64.11.2·원유정제 12·현대정유판매·73.12.24·석유류 제품 도·소매 13·현대석유화확·88.9.1·유기화학 제품제조 *14·현대리바트·77.7.1·가구 및 목가공품제조업 *15·고려산업개발·76.3.16·건설업,제조업 *16·대한알루미늄공업·73.7.19·알루미늄 및 합금제조업 *17·현대강관·75.3.18·철강제조 *18·현대에베이터·84.5.23·전기산업용 기계*19·현대미포조선·75.4.28·선박수리 및 개조 20·현대엔지니어링·74.2.11·공학관련 써비스업 21·케피코·87.9.3·자동차 부품 제조 22·현대정보기술·93.9.1·정보서비스 등 23·현대중기산업·89.11.1·건설장비 대여업,수리용역 24·금강기획·83.11.1·광고업 *25·현대증권·62.6.1·증권업 *26·현대종합금융·76.12.31·종합금융업 *27·금강개발산업·71.6.15·백화점,호텔업,의류제종 등 28·한보쇼핑·87.3.31·유통업 29·현대알루미늄공업·87.11.1·알루미늄 및 합금제조업 *30·현대해상화재보험·55.3.5·금융보험업(손해보험) 31·현대문화신문·90.8.29·신문발행 32·현대세가엔터테이먼드·96.11.27·게임전문회사 33·티존코리아·97.5.21·컴퓨터 및 주변기기 도소매업 기타 전화기,음향기,서적 도소매업 34·현대경제연구원·86.10.10·경영자문 및 사업서비스 35·현대투자자문·88.3.19·투자전문업 36·선일상선·72.1.18·무역 37·한소해운·90.11.1·해상운송(대극동지역) 38·현대자원개발·90.8.23·자원개발39·동해해운·91.6.5·운수관련써비스업(대극동지역) 40·현대물류·88.6.13·운수관련 써비스업 41·현대우주항공·94.2.23·기계 및 장비제조업 42·현대할부금융·93.12.22·금융써비스업 43·현대유니콘스·87.10.21·프로야구운영업 44·한국물류·90.1.31·보관업,부동산업,도매서비스 45·현대파이낸스·96.2.1·금융업 46·서울프로덕션 47·다이아몬드베이츠·96.7.19·광고업 48·현대선물·97.1.21·금융서비스업 49·현대에너지·96.11.22·민자발전 *50·한국프랜지공업·74.7.15 51·국민투자신탁증권·82.6.22·증권,투자신탁업 52·현대기술투자·97.4.8·창업투자업 53·현대방송·97.5.30·케이블TV 프로그램제작 공급업 및 영상사업(영화제작 배급) 54·인천공항외항터미널·97.5.9·서비스 부동산업 55·서한산업·96.4.3·자동차부품 제조 *56·동서산업·75.9.1·비금속 광물제품 제조 57·동서관광개발·90.2.1·오락,문화 및 운동 관련 58·신대한·93.12.1·절연선 및 케이블 제조 *59·주리원백화점·82.11.26·종합도소매업 60·울산방송·97.9.1 61·국민투자신탁운용·98.2.23·기타 금융업 *62·울산종합금융·81.10.21·기타 금융업
  • 혁명적 정화(金三雄 칼럼)

    단재 신채호선생은 우리는 ‘혁명적 정화’가 없는 민족이라고 아쉬워했다. 혁명 쿠데타 반정 정변 경장 등 정치상의 모든 방법이 나타났지만 한번도 ‘혁명적 정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몇차례 기회가 없지 않았다. 건국과 함께 반민특위에서 친일반역자들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정화의 기회가 있었지만 이승만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4·19혁명후 독재세력을 청산할 혁명재판이 열렸지만 군사 쿠데타에 짓밟히고 말았다. 6월항쟁후 여소야대 국회의 5공청산 작업은 3당야합으로 역전되고,문민정부의 개혁은 역사의식의 부재와 너무 쉽게 부패하여 스스로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金大中 정부의 개혁작업은 지금 심한 도전에 직면했다. 모든 개혁을 좌절 역전시킨 반개혁 수구세력의 도전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최근의 몇가지 사례만 봐도 과연 이들의 도전으로 개혁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다. 첫째,햇볕론에 대한 수구세력의 도전이다. 이들은 동해안 간첩사건을 계기로 햇볕론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과거 햇볕론이 없고 강경일변도로 나갈때도 수차례 공비가 출몰했던 사실을 외면한채 정부의 햇볕 정책때문에 간첩이 나타난 것처럼 비판하면서 왜 응징하지 않느냐고 앙탈이다. 한바탕 붙기라도 하잔 말인지,지난 50년 강풍정책의 결과를 한 번쯤 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국민정신을 반개혁 성향으로 오도한다. 반민주와 쿠데타와 양민학살을 일삼아온 독재자들을 영웅으로 추켜세우면서 국민이 개혁보다 강압통치 시대에 향수를 갖도록 여론을 조성한다. 셋째,‘우파는 사정(司正) 좌파엔 화해’란 도식을 만들어 햇볕정책을 색깔론으로,개혁을 우파 또는 특정지역에 대한 탄압으로 비약시키면서 계층과 지역감정을 조장한다. 명백히 드러난 수뢰 정치인의 사정도 표적수사 또는 지역차별이라고 억지를 부려 정치권의 사정과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군사독재와 부정부패의 늪지대에서 성장해온 남한의 극우세력과 부자 세습체제에서 성장해온 북한의 극좌세력은 평소 가장 적대적 상대인 듯 하지만 비상시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적대적 공조관계’가 유지된다. 예컨대,1972년 朴正熙의 유신헌법과 金日成의 주석제헌법 개정이 거의 동시에 단행되고, 87년 야권의 승리가 보이는 듯 할 때 마유미(김현희)의 대한항공 폭파사건,92년 대선때 이선실의 간첩사건,96년 총선때 판문점 무장북한군 출몰사건,97년 대선때 특정세력과 북측의 내통사실 등 개혁세력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면 북한은 어김없이 안보위기나 공안사건을 만들어 수구세력을 도와주었다. 최근 북한의 잠수정침투사건도 햇볕론이 국민의 관심을 모으면서 소떼입북, 금강산관광등 한창 화해무드가 조성될 때 나타나 수구세력의 입지를 도와준 셈이다. 한국의 수구세력은 민주주의와 반공을 내세울 도덕적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학살해온 독재전위 세력이었으며,반공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방편일 뿐이고, 오늘의 국난을 불러온 중심세력이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영웅시하고 화해정책을 용공시하고 사정을 계층과 지역감정으로 몰아가면서 개혁의 발목을 잡는 수구세력에 대한 ‘혁명적 정화’없이는 국난극복은 불가능하다. 50년만의정권교체는 민족모순과 사회모순을 바로 잡으라는 역사의 뜻이고,색깔론과 지역감정을 뛰어넘으라는 국민의 선택이다. 언제까지 이런 해묵은 ‘악령과 괴담’속에서 우리 정치와 사회가 세월을 보내야 하겠는가. 정부는 더 이상 원칙없는 온정주의와 눈치보기로 개혁에 갈팡질팡해서는 안된다. 좀더 과감한 사정과 개혁으로 5,000년 묵은 역사의 찌꺼기들을 퇴출시켜야 한다. 보수라는 이름 아래 역사의 방향과 전진을 가로막는 기득세력의 ‘여론’을 혁파해야 한다. 金大中 대통령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어려웠던 시절 레닌의 침착함과, 1932년 대공황때 보인 루스벨트 대통령의 밝은 미소,프랑스가 패배한후 국민을 다시 규합한 드골의 리더십,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여유와 지략으로 총체적 개혁을 단행할 때이다. ‘혁명적 정화’를 통해 제2 건국을 이뤄야 한다. “태양이 비칠때 풀(草)을 말리라”는 서양격언이 있다.
  • 현직대통령 첫 대학 강연/金 대통령 30일 高大 인촌강좌 참석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도 함께 받아 金大中 대통령은 오는 30일 고려대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인촌강좌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경제개혁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한다. 두 행사 모두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최근 방미때 金대통령은 조지타운대에서 받은 명예 인문학박사 학위를 포함,이미 9개의 박사학위를 갖고있다. 그러나 경제학 부문 학위는 드물었다. 경희대에서 처음 받은 뒤 이번이 두번째다. 미 하바드대에서 출간한 ‘대중경제론’과 지난 대선때 펴낸 ‘시민경제이야기’ 등의 저서에 비춰보면 적은 감이 없지않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金대통령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정연한 이론을 경제위기 극복의 실천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는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위수여식후 있을 ‘인촌강좌’ 또한 현직 대통령의 첫 대학 강연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학생들의 반대시위로 일부 대학졸업식에 참석하는 일외에는 대학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왔다. 청와대측은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金대통령은 이날 강연에서 총체적 개혁을 통한 ‘새로운 시작’을 제안할 구상이다. 인촌강좌는 지난 87년 고려대가 인촌 金性洙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시작한 특별강좌로,지금까지 12회에 걸쳐 세계적인 석학들과 저명 정치인들이 강연했다.
  • 주범 吳씨 ‘YS퇴임후 강행’ 결심/金賢哲씨 납치미수 전말

    ◎3월부터 공범 4명과 치밀한 준비/현철씨에 수시 면담 요청 무산돼/5,9일 공범 다 안모여 계획 연기 金賢哲씨 납치 사건의 주범 吳順烈씨는 지난 1월 초 범행을 결심했다.범행 시기는 金泳三 전 대통령이 퇴임하는 2월 말 이후로 생각해 두었다.2월 초吳씨는 ‘김영삼정권의 실정에 대해 죽음으로써 국가와 민족앞에 사죄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뒤 100부를 복사해 부인에게 맡겼다. 3월이 오자 吳씨는 본격적인 범행 준비를 시작했다.힘이 센 賢哲씨의 운전기사를 떼어놓기 위해서는 공범을 여러 명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그는 인천과 서울 등지의 다방을 드나들면서 우연히 알게된 李起本씨와 임원택씨,김진구씨 등 30∼40대 남자 4명을 끌어들였다. 吳씨 등은 기회있을 때 마다 인천 주안동 V여관에 모여 치밀한 ‘작전’을 짰다.운전기사는 어떻게 유인할 지,賢哲씨 옆에는 누가 앉을 지 등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이와 함께 吳씨는 4월 중순 임씨에게 10만원을 주며 청계천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사오게 하는 한편,가스총과 전자충격기는 직접신문광고를 보고 구입했다. 같은 기간,吳씨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한편으로는 주 2∼3차례씩 서울 구기동 賢哲씨 집에 찾아가 면담을 시도했다.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결심을 굳힌 吳씨는 공범들과 마지막 ‘예행연습’을 가진 뒤 지난 5일 상오 9시쯤 범행 예정지인 구기동 등산로에 집결하기로 했다.그러나 공범중 김진구씨가 나오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나흘 뒤 같은 시각 재차 범행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임원택씨가 불참했다. 14일 하오 7시 吳씨는 공범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내일은 차질 없도록 하라”고 신신 당부했다. 15일 상오 9시 吳씨 등 일당은 구기동 범행장소에 집결했다.임씨는 범행에 쓸 쏘나타Ⅲ 차량을 끌고 왔다.상오 9시40분쯤 賢哲씨가 탄 차량이 다가오자 이들은 각자의 역할 대로 납치를 시도했으나 결국 賢哲씨가 도주하는 바람에 납치는 실패로 끝났다. 범행에 실패한 吳씨는 賢哲씨의 차를 국립환경연구원 앞에 버린뒤 전철과택시를 번갈아 타고 낮 12시30분쯤 인천 V여관에 도착했다.얼마후 李起本씨등 공범 4명 전원이 합류,대책을 논의한 끝에 잠적키로 하고 하오 6시쯤을 여관을 나와 헤어졌다. ◎주범 吳順烈씨 문답/“납치의도 없어… 얘기만 하려 했다” 金賢哲씨 납치 미수 사건의 주범 吳順烈씨(54)는 16일 상오 서울 서대문경찰서로 압송된 뒤 “이렇게까지 큰 일이 될 줄은 몰랐다.소란을 피워 죄송하고 처벌을 받겠다”고 심정을 밝혔다.다음은 일문일답. ­왜 賢哲씨를 납치하려 했나. ▲납치가 아니다.조용히 얘기만 하려고 했다. ­공범들과의 관계는.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다.같은 지역에서 살고 있고 다방에서 차를 마시다 만났다.공범인 金진구와는 지난 92년 대선 당시 …. ­공범들을 어떻게 모았나. ▲큰 범죄를 모의한 게 아니었다.사건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2억5천만원을 YS측에 선거운동 자금으로 줬다는데. ▲87년 집 한채 팔고 92년 슈퍼마켓을 팔았다. ­賢哲씨가 당신을 모른다고 말했다는데. ▲(웃으면서)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집을 나와 한달동안 여관에서 범행을 모의했다는데.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이 안난다.눈물로 보냈다.야당생활을 피눈물로 보냈는데….
  • ‘대선후 외면’에 앙심 범행/金賢哲씨 피랍

    ◎주범 吳씨 집근처 다방앞서 연행/5인조 군용폭발물·가스총까지 준비/경찰복차림 공범 등산 길목서 차세워/3명은 운전사 끌어내려 딴차로 납치/현철씨 상황 직감… 차문 박차고 탈출 金賢哲씨 피랍 탈출 사건은 사전준비 과정을 거친 조직적인 범행이었다.주범 吳順烈씨는 87년과 92년 대통령 선거 때 물심양면으로 도왔지만 따돌림을 당한데 대한 개인감정 때문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吳씨는 하오 3시45분쯤 경찰에 “인천 경인고속도로 도화인터체인지인데 곧 자수해서 사실을 밝히겠다”고 무선전화를 건 뒤 10시40분쯤 자신의 집 근처인 주안역근처 다방에서 붙잡혔다.이번 사건은 대선과 얽혀 있는 것으로 확인돼 앞으로 상당한 파문이 예상된다. ▷검거◁ 경찰은 吳씨의 가족들을 통해 吳씨가 평소 자주가던 곳을 알아낸 뒤 잠복 근무를 하다 10시40분쯤 주안동 근처 상가의 한 다방에서 나오는 吳씨를 검거했다.吳씨는 검거 과정에서 저항을 하지 않았다. ▷피랍◁ 賢哲씨는 15일 상오 9시30분쯤 등산을 하러 운전사 延濟廣씨(44)와 함께 쏘나타Ⅱ 승용차를 타고 북한산 주차장으로 향했다.9시40분쯤 구기파출소에서 300m쯤 떨어진 건덕빌라 입구에 이르렀을 때 경사 계급장을 단 경찰복장의 범인이 차를 세우고 다짜고짜 延씨에게 “당신은 수배 중이니 조사를 받으러 가자”면서 운전석에서 내리게 했다.이 때 주범 吳씨가 뒷좌석에 앉아 있던 賢哲씨의 오른쪽 옆자리에 올라 탔고 또다른 1명은 운전석에 앉아 구기터널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이기본,임원택,최모씨 등 나머지 범인 3명은 차에서 내린 延씨를 자신들이 타고온 부산27바 5467호 소나타Ⅲ 승용차 뒷좌석에 강제로 태웠다.2명은 延씨 좌우에 앉아 수갑을 채웠고 차는 자유로를 거쳐 일산방향으로 달렸다. ▷탈출◁ 賢哲씨는 범인들에게 “너희들은 누구냐,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서 몸싸움을 했다.이 때 옆좌석에 있던 범인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나 모르겠소.오순열이요”라고 말했다. 이 때 賢哲씨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재빨리 왼쪽 차문고리에 손을대 문을 약간 열었다.운전석의 범인은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것을 알고 문을 닫기 위해 구기터널을 빠져 나와 차를 길가에 세웠다. 이 순간 賢哲씨는 발로 문을 박차고 나와 길 건너 편으로 달렸다.탈출 과정에서 목 부분 두 곳에 직경 2㎝ 가량의 피멍이 들었고 다리에는 찰과상을 입었다.범인들은 賢哲씨를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황급히 녹번사거리 쪽으로 차를 몰아 달아났다.차는 賢哲씨가 내린 지점에서 200여m 떨어진 국립환경연구원 앞에서 발견됐다.賢哲씨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경찰에 신고했다. 延씨를 태우고 일산으로 가던 다른 범인들은 핸드폰으로 “賢哲이가 도망갔으니 운전사를 풀어주라”는 연락을 받고 한 고등학교 근처에서 延씨를 내려주며 “현철이에게 오순열이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전하라”라고 말하고 달아났다. ▷수사◁ 경찰은 나머지 공범 4명도 인천 일대에 있을 것으로 보고 吳씨에게 이들의 소재를 추궁 중이다.이에 앞서 경찰은 범인들이 버리고 간 賢哲씨 승용차에서 가스총과 전자충격기,녹음기,길이 17㎝ 지름 2㎝의 군용 다이너마이트 4개 짜리 두묶음을 발견했다.이와 함께 차에서 지문 18개를 채취,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식을 의뢰했다.
  • 주범 吳順烈 누구/賢哲씨 운전사 친구… 80년대부터 상도동 출입

    【인천=金學準 기자】 金賢哲씨 납치 미수사건의 주범 吳順烈씨의 부인 柳모씨(47)는 “남편이 87년,92년 두차례 대선 때 연립주택과 과일가게를 판 2억5,000만원을 YS선거운동자금으로 냈는데도 賢哲씨가 도와주기는 커녕 만나주기조차 꺼려해 평소 불만을 토로해 왔다”고 말했다. 吳씨가 賢哲씨를 알게된 것은 80년대 중반 賢哲씨의 운전기사 延濟廣씨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吳씨는 87년 대선 때 인천시 남구 주안동의 7,000만원짜리 연립주택을 팔았고 92년 대선 때는 주안역 지하상가에 있는 1억8,000만원짜리 과일가게를 판 것으로 전해졌다. 吳씨 가족에 따르면 이 돈의 일부는 賢哲씨 주변 인물에게 전했고 나머지는 인천지역 선거운동에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吳씨는 대선이 끝난 뒤 賢哲씨가 자신을 잘 만나주지 않자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건설업에 종사하던 吳씨는 건축 공사를 따내려고 도움을 청하기도 했으나 따돌림을 당했다. 吳씨는 최근 가족 등 주변 사람들에게 “賢哲이는 나쁜 놈이다,혼내주고 말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金泳三 전 대통령의 金基洙 비서관은 吳씨가 대선자금으로 2억5,000만원을 낸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 여야 충북지사 후보 비교

    ◎자민련 李元鐘 후보/풍부한 행정경험 장점/탄탄한 조직력이 무기 자민련 李元鐘 후보는 자민련의 텃밭으로 여겨지는 지역구도,여권의 탄탄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자신한다. 최근 朱炳德 후보의 신문광고에 대해 정책대결을 외면한 비열한 인신공격으로 규정,검찰에 고발하는 등 강력 대응하고 있다. 李후보는 친화력을 바탕으로 부드럽고 깔끔한 이미지를 앞세워 전 연령층에 파고드는 전략을 구사한다. 특히 행정고시 출신으로 충북지사·서울시장을 거치면서 쌓아온 풍부한 행정경험과 경륜을 강조한다. 칡뿌리를 캐던 시골소년이 공중전화 수금원에서 출발해 서울시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출세의 과정에서 ‘알차고 야무지다’는 뜻의 ‘알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희망 98,선택 이원종­충북이 바뀝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충북무역투자공사 설립,도민감사청구제 및 도민과의 정례 TV토론 등 지역경제활성화와 열린 도정 추진 등을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선 직후 한나라당을 탈당,당적을 옮긴 후 공천과정에서 홍역을 치렀고 아직도 당 내부와 지역 국민회의측 당원들의 반발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향 제천 등 북부권의 압도적 지지와 함께 대세를 결정할 청주·청원지역은 물론 남부의 보은·옥천·영동 및 朱후보의 고향인 음성까지 전 시·군에서 모두 승리한다는 전략이다. 특히 후보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비는 등 적극적인 선거전을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 朱炳德 후보/“뚝심행정 평가 받을 것”/북부권 집중 공략 총력 한나라당 朱炳德 후보는 선거전 초기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자민련 李元鐘 후보의 우세 분위기가 종반들어 역전됐다고 주장한다. 95년 선거때도 불리하다는 예상을 깨고 당선된 전례와 두 차례 충북지사 재임기간에 보여준 추진력과 뚝심이 긍정 평가될 것으로 기대한다. ‘힘있는 충북 건설’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추진해온 ‘충북도 명예연구소’ 지정 등 농정시책과 65살 이상 노인들에 대한 보건소 무료진료 사업등이 저변표를 끌어모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또 오송 보건의료과학단지조성과 청주공항 개항을 주요 치적으로 홍보하는 한편 충북선 전철화에서 산간 계곡수 보호,노인요양시설과 치매병원 건립까지 다양한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사 재임중 마음에 들지 않는 공무원에게 가차없는 질책과 불호령을 내리는 등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함께 일한 공무원들로부터 후한 점수를얻지 못하는 흠집도 있다.측근들은 이를 ‘솔직함’이라고 옹호한다. 지난 90년 관선 충북지사로 취임한지 6개월만에 단양지역 수재민들에게 “수해가 인재(人災)임을 인정한다”는 각서를 써주고 해임된 전력도 약점이다. 청주중·고 출신으로 청주권 학연을 적극 활용하는 한편 고향 음성을 포함한 북부권을 집중 파고드는 전략을 펴고 있다. 지난 1일엔 李元鐘 후보의 충북도지사 및 서울시장 재직시 우암상가아파트와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비방성 신문광고를 냈다가 고발당했다. 구여권의 남은 조직을 최대한 고수,예상되는 자민련의 텃세와 바람을 뚝심으로 이긴다는 각오로 막판 선거전에 임하고 있다. □여야 충북지사 후보 비교 ◇李元鐘 ·나이:56 ·출생지:충북 제천 ·학력:성균간대 행정학과 ·주요경력:행시 4회(66년)·서울시 기획담당관(75년)·서울시 내무국장(80년)·청와대 내무행정비서관(91년)·충북지사(92년)·서울시장(93년)·청주 서원대 총장(96년) ·가족:부인 金辛子(58)씨와 4녀 ·별명:알쫑이 ·재산:11억4,300만원 ·병역:면제(폐결핵) ◇朱炳德 ·나이:62 ·출생지:충북 음성 ·학력:단국대 정외과 ·주요경력:순경 임용(60년)·해양경찰청장(87년)·감사원 감사위원(89년)·충북지사(90년)·경찰위원회 상임위원(93년)·충북지사(95년) ·가족:부인 金鍾君(56)씨와 2남1녀 ·별명:황소 ·재산:9억5,900만원 ·병역:육군 상병 제대
  • 과거 청산과 미래 개척(대한민국 50년:21·끝)

    ◎이데올로기·개발독재 넘어 통일로/反民특위 “실종”… 건국 최초 과거청산 실패/‘제주 4·3’ ‘거창사건’ 아직도 어둠 속에/지역할거 정경유착 파당정치 악습 깨고 군사정권 시대 숱한 의문사도 밝혀내야 1948년 8월15일 신생정부 출범 당시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약소국이었다.한반도 면적 22만1,487㎢ 가운데 3·8선 이남인 9만9,221㎢만 확보했고 인구도 2,002만명(48년 미군정청 추정치)에 불과했다.또 국민 가운데 80%가량이 농업 등 1차산업에 종사했고,그해 수출액이 2,230만달러에 그칠만큼 경제력도 볼품없었다. 정부수립 50돌을 눈앞에 둔 지금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떠한가.97년 말 현재 인구는 4,666만명,수출액은 1,361억6,430만달러,1인당 GNP는 9,511달러에 이른다. ○‘삶의 질’ 향상되지 않아 지난 50년동안 인구는 2.3배,수출규모는 6,106배로 급증했다.1인당 GNP는,가장 이른 통계치인 53년의 67달러에 비교해도 142배나 늘었다.가히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찬사가 부끄럽지 않은 양적 팽창이었다.그러면 이같은 성장이 우리 사회의 내적(內的) 발전이나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그대로 동반한 것일까.여기서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각을 잠깐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펴낸 책자 ‘South Korea’(92년 간)는 한국의 기본사항을 소개한 데 이어 ‘재벌 중심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독재정권 시대에 고착된 퇴행적인 정치질서에,통제받는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라고 덧붙였다.또 65만의 군대와 한해 100억달러(89년 기준)에 이르는 군사비도 주요항목으로 들었다.다른 나라의 일반적인 한국관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 의회도서관 책자의 표현이 비록 유쾌하지는 않지만,우리 현실을 상당히 정확하게 지적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대한민국 성장의 뒤안길에는 필히 청산해야 할 역사적 잔재가 누적돼 있기 때문이다.이는 정치·경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구조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특정사건의 진상을 은폐·왜곡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치 분야에서의 청산대상은 분단체제에서 파생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악용과 개발독재 논리이다.해방이후 정치의 흐름을 살펴보자.3년동안의 극심한 좌우대립 끝에 남과 북에는 상호 배타적인 정부가 들어선다.2년이 채 못돼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져 분단체제는 더욱 굳어진다.이후 한국에서는 李承晩 정부가 장기집권하고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만연한다. 4·19혁명이 일어나 민주주의가 되살아나는 듯 했지만 곧바로 5·16쿠데타로 무너진다.朴正熙 정권은 개발논리를 앞세워 독재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른다.군사정권은 全斗煥­盧泰愚 시대까지 이어졌지만 80년의 5·18광주민중항쟁,87년의 6월항쟁 등 국민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쳤고 그 결과 93년에 문민정부가,그리고 50주년이 되는 올해 국민의 정부가 탄생한다. 대한민국 50년 정치사를 일별하면,그것은 정치적 억압과 이에 맞서 민주사회를 추구한 국민의 대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그 과정에서 억압적 정권이 양손에 든 무기가 반공이데올로기와 경제개발 논리였다. ○가치관 대혼란 초래 남북이 체제의 존립을 걸고 대립하는데다 6·25라는 비극을 겪은 마당에 반공이데올로기는 필연적인 역사의 부산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문제는 권력이 이를 정치적 대항세력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악용한 점에 있다. 멀게는 한국전쟁 전의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서 가깝게는 지난 대선의 ‘吳益濟 월북 및 편지사건’‘흑금성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집권세력은 늘 ‘용공조작’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려고 시도했고 대부분 목적을 달성했다. 朴正熙 정권이 들어서서는 경제성장을 내세운 개발독재 논리가 못잖게 위력을 발휘했다.국민 대다수가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추상적 가치는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쉽게 먹혀들어갔다.시민의식이 어느정도 성숙하기 전까지 ‘중단없는 전진’과 ‘잘 살아 보세’는 국민적 합의처럼 보였다. 이같은 정치적 적폐(積弊)는 지금도 파당정치·지역할거주의·정경유착 등 여러 유형의 악습으로 고착됐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의식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전통을 잇는 문화와 사상은 ‘전근대적’이거나 ‘비효율적’이란 이유로 외면받는 대신 출세지상주의·이기주의가 넘쳐나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재벌의 소유 집중,극심한 빈부격차 등 경제 분야의 해묵은 과제도 해결이 쉽지 않은 부분이다. 정치사의 굴절이 가져온 또다른 폐해는 역사적 진실의 은폐·왜곡이라 할 수 있다.대한민국 최초의 ‘과거청산 실패’사례로는 48∼49년에 걸친 ‘반민특위 사건’이 꼽힌다.일제강점기에 친일과 반민족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고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한 제헌국회는 곧이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 305명을 검거하지만 참다운 활동을 벌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만다.친일파에 권력기반을 둔 李承晩 행정부의 반발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나쁜 선례는 길이 남게 마련인가.해방정국에서 수차례 벌어진 정치지도자 암살사건,6·25를 전후해 빚어진 ‘제주 4·3’이나 거창사건을 비롯한 양민학살,군사정권에서 발생한 민주인사·학생들의 숱한 의문사와 실종들이 아직껏 그 실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어둠에 묻혀 있다. 사건 발생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례도 있다.예컨대 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군에서 일어난 국군의 양민학살 건이다.미국 국립공문서 보존관리청(NARA)에서 최근 발굴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나타난 실상은 이렇다. 육군 25연대 7중대 병력이 석달이라는 산간벽지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모은 다음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무차별 살해한다.보고서는 “(주민들이) 도발하지도 않았는데 카빈 소총·수류탄·바주카포 등으로 공격해 성인 86명,학생 9명,어린이 3명이 숨졌다.또 집 27채 가운데 23채를 불태웠다”고 밝혔다.이 사건이 세상에는 빨치산의 만행으로 알려졌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민족의 성지’국립묘지에도 존재한다.문민정부 출범 초기인 93년 7월 국가보훈처가 金性洙·李甲成·尹致暎·李殷相·徐椿·李鍾郁·尹益善·全協 등 8명에 대한 친일행각을 조사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이들은 모두 독립유공자로서 각종 훈·포장을 받았고 사회의 지도층인사로 행세했다.이 조사 역시 결말없이 끝났고 뒤이은 문민정부의 ‘역사바로 세우기’도 정치적인 의도라는 오해만 샀을 뿐 결실을 맺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 특별한 책무 한민족이 빛나는 21세기를 향해 전진하려면 두가지 전제조건이 이뤄져야 한다.하나는 물론 통일이요,또 하나는 역사에 덕지덕지 낀 찌꺼기를 걷어내는 일이다.통일은 북한이라는 상대와 더불어 장기간에 해결해야 할 민족의 숙원이지만 잔재 청산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국민의 정부는 우리 현대사를 정화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 특별한 책무를 안고 있다.
  • 李義翊·文憙甲·兪成煥/여·야 대구시장 후보 비교

    ◎자민련 李義翊/대구 경제 살릴수 있는 여 후보 부각 【대구=黃暻根 기자】 자민련 李義翊후보는 말단 서기보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대구시장까지 지낸 직업관료 출신 정치인. 李후보는 여당후보를 당선시켜야만 대구경제를 살릴 수 있다며 힘있는 여당 후보론을 부각시키고 있다. 중앙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낼 자신만이 위기에 빠진 대구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이다. 9개월간(93년 3월∼12월)의 짧은 대구시장 재임시절에도 삼성자동차 대구유치,대구선 이설계획 확정 등 굵직굵직한 숙원사업을 해결,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국회 건교위 시절에는 경부고속철도 문제점을 끈질기게 파헤치기도 했다. 30년간의 공직경험은 그가 내세우는 강점으로 개발행정 분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이다. 마산시장 재직시 국제무역항 개발을 위한 대규모 매립사업을 착공하는등 李후보가 가는 곳마다 개발의 망치소리가 높았다. 대선을 앞둔 지난해 11월 한나라당으로 옮겼다가 다시 자민련으로 복귀하는 등 ‘철새시비’와 지역정서를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한나라 文熹甲/지역정서 편승 선두… TV토론 기대 한나라당 文熹甲후보는 대선 당시 72·6%의 지지를 보냈던 지역정서를 바탕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대구지하철 1호선 개통과 대구공항 국제화사업,해외시장 개척활동,중소기업 자금난 해소를 위한 대구신용보증조합 설립 등은 文후보가 내세우는 성과. 그러나 최대 공약사업이었던 3억달러 외자유치가 IMF사태로 인한 중도상환으로 환차손 시비를 불러 일으키는 등 상처를 받았다. 버스출퇴근과 함께 관용차를 대형에서 중형으로 교체하고 딸의 결혼식을 비서실 직원조차 모르게 치르는 등 공직자로서의 깔끔한 처신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文후보는 예산확보를 위해 최근 중앙부처를 방문,로비활동을 벌이는등 李후보의 힘있는 여당후보론을 경계하는 눈치. 논리정연한 말솜씨는 文후보가 내세우는 또 다른 강점으로 TV토론에 큰 기대를 걸고있다. 늘 독선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지만 일욕심 때문이라며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이다.이 때문에 지역언론과 한때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고 일부 경제계 인사들과 마찰을 빚는 등 화합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국민신당 兪成煥/국시파동 주역… ‘티코행정’ 공약 국민신당 兪成煥후보는 30여년간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야당정치인. 12대 의원시절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는 국회발언으로 옥고를 치러 화제를 모았던 주인공이다. ‘서민들의 눈물을 딱아 줄 수 있는 정치가 출신의 시장론’이 그의 출마의 변. 행정관료보다 결단력등 정치력이 뛰어난 정치인출신 시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YS를 따라 3당합당 때 여권에 몸담아 14대 전국구 의원을 지냈고 대선때 李仁濟후보를 지지,국민신당으로 말을 바꿔탔다. 최근 티코승용차를 구입한 兪후보는 ‘거품없는 티코행정’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당선되면 시장관용차를 티코로 바꾸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행정경험이 전무한 데다 조직력이 취약하고 개혁에 걸맞지 않는 구시대 정치인이라는 지적이 최대 약점. 이번 시장선거보다 차기 국회의원 선거를 의식,출마했다는 관측도 있다. □여·야 대구시장 후보 비교 ◇이의익(자민련) 나이:58 출생지:경북 안동 학력:영천고,국학대 경제학과 주요경력:경기도 기획관리실장(82∼83년) 창원·마산시장(83∼86년) 경기,경남부지사(88∼92년) 대구시장(93년) 15대 국회의원(96∼98년) 가족:부인 곽정애씨와 1남1녀 별칭:황소 재산:16억4천만원 병역:육군 의무병 하사제대 ◇문희갑(한나라) 나이:61 출생지:대구 달성 학력:경북고,국민대 법학과 주요경력:경제기획원 예산실장(82년) 경제기획원 차관(85∼93년) 12·13대 국회의원(85∼93년) 남북경제회담 수석대표(86년) 청와대 경제수석(88∼90년) 대구시장(95년∼현재) 가족:부인 정송자씨와 3녀 별칭:문핏대 재산:7억6천만원 병역:공군 중위예편 ◇유성환(국민신당) 나이:67 출생지:경북 성주 학력:성주농고,영남대 법학과 주요경력:경북도의원(60년) 민주당 청년위원장(87년) 12대 국회의원(85∼88년) 14대 국회의원(93∼96년) 국민신당 최고의원(98년) 가족:부인 남영자씨와 1남1녀 별명:등소평 재산:4억원 병역:6·25 당시 학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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