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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이회창캠프반응/ 한나라 ‘술렁’ 李前총재 ‘‘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법률고문이었던 서정우 변호사에 대한 긴급체포 소식이 전해진 8일 한나라당은 크게 술렁였다.서 변호사가 이 전 총재의 측근 중 측근으로 후원회 상임부회장까지 지냈던 인물인지라,다른 어떤 상황보다 검찰의 칼날을 위협적으로 느끼는 분위기였다.일각에서는 “이 전 총재에 대한 소환조사가 임박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내놓았다. ●이 전 총재측 반응 이 전 총재는 ‘별 말이 없었으며,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좀 더 지켜보겠다는 자세였다.’는 게 이종구 전 특보의 전언이다.서 전 고문과 가까웠던 이병기 전 특보도 “놀랐다.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모르겠다.검찰이 사실에 근거해서 수사하는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이 전 총재의 측근들은 사안을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다.한 측근은 “서 전 고문은 당 안팎에서 전후좌우 행보에 거침이 없는 위치에 있었으며,후원회에도 일정부분 깊숙이 개입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자금 모금의 개연성에 무게를 뒀다.일각에서는 “검찰의 발표대로 100억원대 자금을 모았다면 어디론가 전달하지 않았겠느냐.”면서 불똥이 어디로 튈지 촉각을 곤두세웠다.당내에서는 “검찰이 이 전 총재의 전 특보들 계좌를 뒤지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나돌기 시작했다. ●분개하는 한나라당 당은 서 전 고문에 대한 긴급체포에 앞서 한나라당 불법대선자금이 700억원에 달한다는 검찰발 언론보도가 잇따르자 ‘보복 수사’라며 강력 반발했다.박진 대변인은 논평에서 “검찰의 편파적인 야당탄압 수사가 갈수록 위험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면서 “여권비리는 축소·은폐하고 야당에 대해선 혐의를 극대화하는 정치 검찰의 전형적 수법”이라고 비판했다. 홍사덕 총무는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 토론에서 ‘여당이 100억원 미만의 불법자금을 쓴 데 반해 야당은 훨씬 더 많았다.’고 했는데,이처럼 대통령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수사당국 관계자가 거의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이어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3차례 대선이 갈수록 깨끗해지고 있지만,승자의 태도는 갈수록 더 가혹해지고 있다.”면서 “50여년 헌정 사상어떤 승자도 패자에게 이와 같이 가혹한 보복의 채찍을 든 적은 없었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당 일부에선 “이젠 그야말로 이 전 총재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때가 왔다.”는 주장도 제기됐다.한 핵심관계자는 “지난주에 이미 서 전 고문과 이 전 후보의 후원회장을 지낸 이정락 변호사에 대해 검찰이 출국금지시킨 사실을 알고 있었다.”며 “대선자금 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감을 잡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전 총재,최병렬 대표 방문 이런 가운데 이 전 총재가 지난 5일 오후 단식농성을 마치고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최병렬 대표를 위로 방문,30여분간 가진 밀담 내용에 뒤늦게 시선이 쏠리고 있다. 양측은 이에 대해 “10일간의 단식농성 후 입원한 최 대표에 대한 위로 차원의 방문이었을 뿐”이라며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이지운기자
  • [스포츠 라운지] 돌아온 ‘컴퓨터 세터’ 김호철 감독

    가르마가 잘 타지지 않는 더벅머리에 처진 눈썹,썩 잘 나지 않은 치아를 하얗게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탈리아 배구 코트를 호령하다 16년 만에 돌아온 ‘컴퓨터 세터’ 김호철의 겉모습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컴퓨터의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애써 날카로운 이미지를 찾는다면 신기의 토스를 뿜어낸 손가락일 것이다.앞서가는 그를 보며 오른손등이 자꾸 엉덩이에 붙는 것을 발견했다. “30년 동안 세터를 하면서 얻은 버릇이지요.왜 세터들이 엉덩이에 손등을 붙이고 손가락을 펴 공격사인을 내잖아요.‘직업병’일지도 몰라요.” ●“팀에 도움이 안되는 선수는 떠나라” 지난 24일 귀국과 동시에 친정팀 현대캐피탈의 감독이 된 김호철은 그날로 용인에 있는 팀 숙소로 달려갔다.아침에서야 새 감독이 부임한다는 소식을 접한 선수들은 오후부터 곧바로 시작된 연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김 감독은 26일까지도 짐을 풀지 않고 있었다.“필요한 옷은 그때 그때 꺼내 입으면 그만”이라는 그는 “침체된 팀을 하루 빨리 일으키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간신히 짬을 낸 인터뷰 와중에도 10여차례나 코트로 달려나가 쓴소리를 하고 돌아 왔다. ‘배구 명가’ 현대가 ‘동네북’으로 전락한 지는 오래됐다.라이벌 삼성화재를 언제 이겼는지 가물가물하고,지난달 실업대제전에서는 예선 탈락했다.지난 4월에는 선수들이 반기를 들고 숙소를 이탈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김 감독의 일성은 “수도승이 돼라.”는 것이었다.면벽수련을 하는 수도승처럼 하루에 하나라도 배우기 위해 어깨가 빠지도록,몸이 부서지도록 연습하라는 것. 그는 “배구는 이름으로 하는 게 아니다.”면서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는 누구든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무섭게 몰아쳤다.대선배의 의중을 읽은 듯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주장 후인정은 “제2의 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177㎝ 단신, 세계 배구계 호령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배구를 시작한 김 감독은 중학교에 들어가며 세터로 자리잡았다.중3 때 키(177㎝)가 평생의 키가 돼버린 그는 한밤에 달을 보며 점프 연습을 했다.휘영청 밝은 달은 그가 잡아야할 배구공이자 꿈이었다. 부단한 연습 때문인지 타고난 탄력 때문인지는 모르나 27년 선수생활 동안 그가 블로킹을 잡지 못한 선수가 없다고 한다.전성기 때 서전트점프는 90㎝였다.서전트가 80㎝이면 탄력 좋은 배구선수라는 말을 듣는다.한양대 재학시절인 지난 1978년 김 감독은 강만수 장윤창 등과 로마세계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4강 신화를 일궜다.광복 이후 한국배구가 일본을 꺾은 것도 그때가 처음.김 감독은 최우수 세터로 뽑혔고,당시 이탈리아 언론은 “작은 원숭이가 재주를 넘듯 세계 배구를 농락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더이상 무기력한 패배는 없다” 올해 초 4년 임기의 이탈리아 청소년대표팀 감독에 오른 그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귀국한 것은 현대와의 약속 때문이었다.김 감독은 87년 두번째 이탈리아행 당시 팀이 필요하면 꼭 다시 오겠다고 했다.현대는 7년 전부터 매년 러브콜을 보냈고,김 감독은 더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배구 최강국 이탈리아에서 ‘데이터 배구’를 배웠다.“데이터가 얼마나 중요한지 뼛속 깊이 느꼈다.”는김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활용하던 데이터분석 프로그램을 현대에 적용할 계획이다.일부 선수를 선발해 분석 전문요원으로 양성할 계획도 세웠다.“현대가 무기력하게 지는 모습은 이제 볼 수 없을 겁니다.배구 제대로 한 번 합시다.” 부인(45)과 배구선수인 딸(20),골프선수인 아들(16)을 남겨놓고 바람처럼 돌아온 김호철은 지금 자신에 넘쳐 있다. 글 이창구기자 window2@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 ·1955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 대신중·고,한양대 졸업.대학 1학년 때 국가대표 발탁 ·7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로마세계선수권 4강 ·79년 맥시코시티 유니버시아드 금메달,금성통신(현 LG화재) 입단 ·81년 이탈리아리그 파르마 진출 ·84년 귀국 및 현대자동차써비스 입단,86∼87년 대통령배(현 슈퍼 리그) 우승 ·87년 이탈리아리그 트레비소 입단 ·90년 스키오로 이적,최우수 외국인 선수상 ·95년 은퇴,파르마 감독 데뷔,트레 비소 라벤나 거쳐 2002년까지 트리에스테(98년 리그 우승) 감독 ·2003년 이탈리아 청소년대표팀 감독 ·2003년 11월 현대캐피탈 감독
  • “김민석 前의원 복당 정치윤리상 용납안돼”조순형 관훈토론회

    민주당의 유력한 차기대표 후보인 조순형 비상대책위원장은 6일 “여야가 적당한 선에서 대선자금 내용을 공개하고,정치자금 특별법을 만들어 함께 사면받는 해결방식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일반 사면론에 반대했다. 사면을 포함한 정치자금 특별법을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와 함께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논의가 정치자금 개혁 취지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특히 노 대통령 자신이 관련된 비리의혹의 사면에 반대했다. 그는 이날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이같이 밝히고 “민주당 16대 총선자금 문제는 시효가 지났더라도 자발적으로 조사,공개해야 된다.”고 밝혔다.대선자금 문제가 일단락되면 지난 대선후보 경선자금 문제도 자발적으로 공개,의혹을 해소하겠다는 자성 의지를 피력했다. ●대표경선 기회오면 피하지 않아 추미애 의원이 대표경선 도전을 선언한 뒤 대표경선 불참 의지를 밝혔던 조 위원장은 이날도 경선을 통한 대표직 도전에 부정적인 입장을 거듭 밝혔다.‘쓴소리’‘깨끗한 정치인’의 이미지훼손을 우려하는 분위기였다.하지만 그는 당내 중진 상당수가 자신의 대표경선 출마를 권하고 있다는 점을 들자 “저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상황이 조성되면 나갈 용의가 있다.”라고 말해,‘조순형-추미애’ 대표경선 빅카드가 성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이날 낮 열린 비대위 전체회의에서도 소속 의원들이 조 위원장에게 “당과 국가를 위해 대표경선에 출마해야 한다.”고 적극 권유,대표 경선 출마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지는 기류다. ●민주당은 정통개혁세력 총본산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분당사태를 1987년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보단일화 실패에 비유한 조 위원장은 “정통개혁세력의 총본산인 민주당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국민통합의 정당 구도를 이루는 길이기 때문에 민주당에 남았다.”고 밝히고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분당을 촉발하고 민주당을 탈당한 노 대통령에게 ‘민주헌정에 대한 배신’이라면서 대선자금모금과 집행과정,당선축하금 등을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우리당이 가져간 대선자금 관련자료 일체를 민주당에 반환토록 지시해야 한다고 요구했고,재신임 국민투표를 ‘쿠데타적 발상’이라고 규탄했다.그는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 수용 의지도 밝혔다.김민석 전 의원의 복당 문제에 대해선 “정치윤리상 용납될 수 없다.”고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당세확장보다는 원칙확립이 훨씬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이춘규기자 taein@
  • 盧대통령 ‘재신임’ 선언 / 우리나라 사례

    노태우·박정희 전 대통령도 ‘재신임’을 언급한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 당시 “취임 1년 뒤 국민들의 재신임을 받겠다.”고 공약했었다.물론 그같은 공약은 대통령 당선을 위한 정략적 공약이었던 만큼 실제로 지켜지지는 않았다.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과는 여러모로 성격이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노 전 대통령이 ‘재신임’을 공약으로 내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당시 대선은 노 전 대통령을 비롯,김대중·김영삼·김종필 후보 등 4파전으로 치러졌다.당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당선을 확신할 수 없었다.‘6·29선언의 주역’임을 주장하며 ‘5공 청산’을 약속했지만 지지도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5공 청산’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얻지 못했던 만큼 “약속을 못 믿겠으면 중간평가라도 하겠다.”며 이같은 카드를 꺼냈던 것이다.노 전 대통령이 불과 30% 선의 지지율로 당선될 수 있었던 데는 ‘재신임’ 공약이 크게 작용한 듯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재신임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대신 ‘3당 합당’이라는 정치구도 개편을 몰고 왔다.13대 총선 결과,당시 여당이던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함으로써 여소야대로 재편됐다.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야3당이 정국주도권을 잡게 되자 여당은 그냥 끌려다니는 처지가 됐고,다급해진 여당은 어떤 형태로든 정국안정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물리적 힘에 의한 정계개편보다 3당 합당을 통해 평민당을 고립시키는 방안을 택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 유지를 위해 실시한 국민투표가 노 대통령의 ‘재신임’ 제안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박 전 대통령은 1975년 7월 유신헌법과 자신에 대한 신임을 함께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계속되자 75년 1월 22일 특별담화를 통해 “만일 국민 여러분이 유신체제의 역사적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고 현행 헌법의 철폐를 원한다면,나는 그것을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해 7월 6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박 전 대통령은73.1%의 높은 지지를 받아 유신체제를 공고히 유지했다. 그에 앞서 박 전 대통령은 1969년에도 직접적으로 대통령직을 내걸진 않았지만 신임을 묻는 ‘3선개헌'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도 했다. 전광삼기자 hisam@
  • [시론] 사공 많은 새만금

    농지와 수자원 확보를 목적으로 추진해온 새만금사업이 환경단체의 반대와 정치인들의 동상이몽으로 배가 산으로 가는 모양이 될까 심히 우려된다. 새만금사업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가 추진 배경이다.19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여당 후보의 공약사업으로 낙후된 전북에 대한 정치적 배려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사실은 그렇지 않다.60년대의 극심한 가뭄과 70년대의 세계적 식량파동으로 70년대에 이미 ‘서남해안 간척농지개발계획’이 수립됐고,80년대초 냉해로 인한 쌀 흉작을 계기로 이 계획이 타당성 분석과 관계 부처의 협의를 거쳐 시행에 들어갔다. 지난 91년 착공해 13년 동안 1조 5000억원이 넘는 국가예산을 투입하여 5대 정부에 걸쳐 추진되어온 대규모 국책사업이 방조제 완공을 눈앞에 두고 사업추진 목적이 흔들리고 있다.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 22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무조정실은 “새만금사업의 매립지 면허를 산업·연구·관광단지 등 다른 용도로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고 한다.아마도산업개발을 원하는 전북도민의 희망과 해수유통을 바라는 환경단체의 주장을 모두 만족시키고,법원에서 제기한 수질문제를 비켜가기 위한 그럴듯한 해법인 것 같다. 결국 이것은 이솝우화에서 방앗간 주인이 아들과 함께 당나귀를 팔려고 가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에 이끌려 당나귀를 탔다가 나중에는 당나귀를 어깨에 메고가다 결국은 당나귀마저 잃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새만금사업은 결코 비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해서 풀어갈 것은 아니다.간척사업은 전문성을 요구한다.새만금과 같은 대규모 간척사업은 섣부른 상식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이 사업은 설계에서부터 공사에 이르기까지 당초의 사업목적에 맞게 일관되게 추진돼 왔다.그리고 쌀이 남아 휴경보상을 하는 상황에서 농지조성이 필요 없다는 주장도 새만금사업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우선 새만금의 농지는 지금 당장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10∼15년 이후에나 경작이 가능하다.공장,아파트,도로 등으로 매년 2만㏊ 이상의 농지가 전용되고 있는 현재의 추세라면 머지않아 우량농지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기상이변과 남북문제 등을 고려할 때 집단우량농지 확보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무엇보다도 새만금사업의 친환경적 추진과 활용을 위해서도 농지조성은 필연적이다.간척지의 농지조성은 갯벌을 성토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농지는 식량생산 외에도 자정능력,수자원 보호,생물서식지 제공 등의 환경적 기능이 뛰어나다.최근 국제사회에서는 농지의 식량생산기능보다 오히려 환경적 기능을 더 인정하고 있다.그리고 농지로 활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성이 낮은 것은 아니다.농지에 쌀 외에도 화훼단지와 같은 첨단농업으로 얼마든지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 아울러 담수호 조성도 결코 포기돼서는 안 된다.우리나라는 물 부족국가이다.더구나 새만금 주변지역은 만성적인 물 부족 지역이다.설혹 농지 외의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담수호는 반드시 필요하다.일부에서는 수질에 상당한 문제가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으나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환경처리기술도 91년 환경영향평가서를 만들 당시보다 현저히 발달해 있어 추가적인 수질개선이 가능하다. 농지와 담수호 조성방안에 대해서는 99년부터 2년간 운영된 민관공동조사와 수차례의 공청회,토론회 등을 거쳐 타당성과 경제성,효율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 본래의 사업목적을 변경하면 더 큰 혼란이 빚어진다.거듭 강조하지만 농지가 다른 어떤 토지이용보다 환경 친화적이며,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권 순 국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교수
  • “이데올로기 마지노선 넘었다”/ 87년 필화사건 대서사시 ‘한라산’ 오롯이 복원

    1987년 사회과학 무크지 ‘녹두서평’ 창간호에 실린 대서사시 ‘한라산’이 원래 모습으로 우리 문단에 오롯이 복원됐다. ‘한라산’은 쉬쉬 하던 제주 4·3항쟁의 역사적 의의와 민중의 참상을 전한 장시.87년 당시 그 대가로 시인 이산하가 국가보안법으로 영어의 몸이 됐음은 물론,출판사 대표 등 관련자들이 줄줄이 수배되는 필화사건을 치러야 했다. ●시로 빚어낸 제주 4·3항쟁 진상 “이데올로기의 마지노선을 넘어버렸다.”는 평을 들었던 이 문제작도 실은 작가의 ‘자기 검열’을 거친 작품이었다.출판사와 편집장의 동의는 얻었지만 인쇄소에서 “‘빨갱이’ 아니면 ‘고정간첩’이 썼다.”고 경악하며 작업을 거부하는 바람에 톤을 완화해야 했던 것. 시인 이산하는 “타협해서는 안될 문제를 타협해서라도 풀겠다는 마음의 틈새를 들킨 편치 않음”을 고백하며 복원의 변을 대신한다. 그가 당시 “모가지 걸고 썼다.”는 ‘한라산’은 제주 항쟁의 진상을 노래한다.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 살아남은 자의 증언을 토대로 민중학살의 비극을생생하게 재현한 것이라면,‘한라산’은 사회구조적 모순부터 파헤치며 누가,어떤 이유로 학살을 자행했는지를 밝힌다.시인은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만성을 부각시켰던 원본의 표현을 되살리는 데 애썼다.녹두서평본에는 못썼던 항쟁 당시의 격문이나 “죽창과 총을 든 전사들이/한라산에서 물밀듯이 내려와/정해진 목표물을/하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67쪽) 등의 직접적 표현을 살려냈다. ●‘저자 후기’서 창작비화등 생생히 전해 이 판본을 읽는 다른 감동은 ‘저자 후기’가 주는 생생한 현실감이다.시인은 ‘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 듯’ 장문의 후기를 통해 ‘창작 배경’과 ‘창작 비화’,대선을 염두에 둔 안기부의 음모,‘항소 이유서’ 등 작품에 얽힌 사연을 자세하면서도 극적으로 구성했다.‘한라산’이 4·3항쟁을 시로 탁월하게 빚은 것이라면 작가의 후기는 80년대 민주화·노동운동의 단면을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작가의 다음 말은 동시대에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삶의 무게와 ‘정신의 군살’에 눌려 비판의 무기가 무디어가는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내 지금은 비록 가슴에 폭탄같은 시를 장착하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던 그 분노와 그 노여움은 사라졌지만,그러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천둥 같은 그리움만큼은 여전히 삼엄하고 또 여전히 장렬하다.” 이종수기자
  • 노대통령 재산희혹 해명 / 노대통령 일문일답 “진영땅 형님돈 쓴 대가로 양도”

    노무현 대통령은 28일 기자회견을 갖고,제기된 각종 의혹 등을 직접 해명,국민들에게 이해를 구했다. 진영땅 일부가 대통령 소유가 아니냐. -3사람의 공유다.노건평씨 명의로 돼 있는 것이 120평이다.1989년 연말이나 90년 초에 매수한 것으로 기억한다.부산에 자동차 중고매매상사를 매각해 남은 돈 3억 6000만원 투자했다.그래서 그 재산은 그 이후 재산등록 때마다 명의는 노건평씨 명의로 돼 있지만 내 재산이라고 국회에 등록해왔다.그뒤 장수천 사업으로 제가 형님 돈을 많이 썼기 때문에 ‘이 땅을 가지십시오.’ 하고 그 이후 재산등록에서 뺐다. 장수천 문제해결 시점이 대선 전환시점이라 대선자금 잔여금이 투여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있다. -후보가 되면서 바로 당으로 들어갔다.이후 대선자금은 전부 당에서 관리했다.대선자금은 한푼도 남은 것이 없다.당시 전적으로 돼지저금통에 의존해 선거를 치른 것은 아니지만,선거자금의 절반 이상이 국민들의 돼지저금통을 비롯한 성금에 의해 치러졌다.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푼푼이 국민들이 모아주는 돈을남겨서 개인용도에 쓸 수 있겠는가. 그 다음에 34억원의 부채 중 나머지가 18억원으로 기억하는데 그 18억원이 변제되는 과정은 대선 전에 다 변제가 되고 나머지 3억원 내외의 돈만 대선 이후에 변제됐다.그 돈도 출처가 명백하다.그 전체 변제는 형님이 가지고 있던 구조라리 땅을 경매해서 12억원 정도가 해소되고,공장경매에서 3억∼4억원이 해소돼 결국 18억원이 남았다.18억원의 경우 저의 후원회장이었던 이기명씨가 가지고 있던 용인 땅을 28억원에 팔기로 하고 선 계약금과 중도금을 받아서 고스란히 리스로 변제됐다. 2002년 8월에 시작해 그해 10월,2003년 2월에 변제된 것으로 기억한다.대선자금과 관련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김기호씨 녹취를 보면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개발정보를 입수했다는 말이 나온다. -진영의 신용리에 있는 임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아마 매입시기가 95년 경인데,문민정부 시절에 내가 무슨 개발정보를 가지고 있었겠느냐.형님이 여기저기 흘러다니는 개발정보를 듣고 이게 돈 되는가 싶어 땅을 샀다가 나중에 아니어서 깡통되고 만 것이다. 노 대통령이 97년에 리스측과 접촉해 장수천 대출과 관련해 거치기간을 연장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지난해 5월 관훈토론에서 내 재산은 진영에 있는 땅과 상가 등을 합쳐 8억원 정도라고 했다. -전화를 했는지는 잘 기억에 없지만,간청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실질적으로 채무자이고 신용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 사업인데,좀 믿고 사업 꼭 성공하겠으니 좀 연장해 달라,이런 요청을 했다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97년은 국민회의 입당하기 전이었다.96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97년 11월에 국민회의에 입당했으니까 그 사이에는 사실상 무소속 신분으로 그야말로 백수였다.그때 그만한 부탁 전화했다고 압력이 될 수 있겠느냐. 관훈토론에서 그(진영) 땅이 내 땅이라고 했는지 모르지만,질문에 섞여 나와서 그냥 넘어갔는지는 모르겠다.그 땅에는 아무런 의혹이 있을 수 없다.제 재산이 8억원 정도 돼 있다가 2억 4000만∼2억 5000만원으로 줄어버렸다.제가 장수천에 투자한 많은 금액을 채권으로장부상 기록해두고 있었는데,장수천이 부도상태로 가는데 그것을 재산등록상 보니까 채권으로 기록돼 있더라.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지난해 경선할 때부터 삭제했다. 2002년에 거제 구조라리에 형님 땅을 김해에 있는 박연차씨가 샀는데,87년 경에도 이미 형님이 가지고 있던 임야를 샀던 사람이다.김해에서 친하다.제가 대통령 후보가 됐는데,빚 때문에 대통령 후보로 끝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호의로 사준 것이다.토지의 가격은 13억원을 호가하는 땅이라서 아무 특혜가 없다. 문소영기자 symun@
  • 그린스펀 5번째 연임 수락 / 美금융시장 환영분위기

    16년째 미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는 앨런 그린스펀(사진·77)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다섯번째 연임 제의를 수락했다.그린스펀 의장은 23일 성명에서 “부시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승인할 경우 기꺼이 의장직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하고 “대통령과 이 문제를 상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신임에 대해 크게 감사한다.”고 소감을 밝혔다.부시 대통령은 지난 22일 경제담당 기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그린스펀 의장의 연임 여부를 묻는 질문을 받고 “앨런 그린스펀이 연임해야 한다고 본다.”며 그의 임기만료를 1년 앞두고 재신임을 약속했다. 부시 대통령의 이같은 결정은 2004년 대선을 앞두고 FRB 의장직 후임자와 관련된 각종 루머를 불식시켜 경제에 미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로 풀이된다.2001년 주식시장 거품이 꺼지면서 침체된 경제에 힘을 실어주고 인플레를 억제해 시장 신뢰도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장기집권은 87년 당시 주식시장의 급락사태와 90년 초의 경기 불황을 해결하고 90년대를경기호황으로 이끌었던 저력 때문이다.지난해 증시 버블을 예상치 못해 경기침체로 이어진 것과 공격적인 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회복되지 않고 있는데 대한 비판이 있지만 시장은 그린스펀 의장의 연임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그의 연임이 경제 정책이나 금융시장의 혼란을 줄여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강혜승기자 1fineday@
  • 세상을 뒤집은 이장님...김두관이 누구야?

    ▲출생=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생년월일=1959년 4월 10일 ▲학력=남해제일고-동아대 정외과 ▲취미=천천히 걷기 ▲가족사항=채정자(42)씨와 1남1녀 ▲가훈=먼저 사랑하자 ▲경력=남해농민회 사무국장(1987년) 남해신문 발행편집인(90) 남해군수(95∼2002) ●행자부장관 ‘파격 발탁' 세상이 확 바뀌고 있다. 시민단체를 비롯한 개혁 성향의 소수 진보세력들이 권력의 중심에 진입하고 있다.우리 사회의 세력 판도가 급변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7일 ‘참여정부’ 조각에서 40∼50대를 주축으로 하고,여성 4명을 포함시켜 학력·서열·남성 위주의 관행을 과감히 무너뜨렸다.이런 인사개혁은 앞으로 관료사회는 물론 우리사회 전반에 빠른 속도로 확산될 전망이다. 인사 혁신의 핵심인물은 동네 이장을 지낸 농민운동가 출신의 김두관(金斗官) 행정자치부 장관이다.44세의 젊은 나이에다 이장과 남해 군수를 지낸 그가 새 정부의 핵심 어젠다인 지방분권과 정부개혁의 지휘권을 쥐게 됐다는 점에서 포커스가 쏠릴 수밖에 없다. ●‘사회변혁은 지방부터' 신념 김 장관은 지난 1985년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회부장을 맡아 직선제 개헌 쟁취투쟁에 참여했다가 3개월의 옥살이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낙향을 결심했다.그는 “서울에는 내가 아니라도 운동할 사람이 많으니 고향으로 내려가서 사회변혁을 위한 튼튼한 뿌리를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동네 이장을 맡아 농민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고향인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주민들은 30살의 젊은이가 이장을 맡겠다고 나서자 반대도 적지 않았다.현재 이장인 이형배씨는 “김 장관이 동네 발전을 위해 온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뭉쳤다.”고 회고했다. ‘김 이장’은 이장으로서 농민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88년 진보정당인 민중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하지만 결과는 낙선.그는 지역 도서관인 ‘책 사랑 나눔터’를 만드는가 하면,지역신문인 남해신문을 창간했다.한때는 남해농민회를 조직해 사회운동도 벌였다. ●95년 최연소 군수로 당선 그는 마침내 95년 남해군수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전국 최연소(37세)로 당선돼 지방자치전문가로 발돋움한다.당시 고위관료 출신의 여당 후보에 맞서 ‘해보나 마나였던 게임’을 뒤집는 기적을 이뤄냈다. 남해군수를 연임하는 동안 음식물쓰레기 처리를 위한 지렁이 사육장,수초골재 하수처리장,하천생태복원 정비공사 등 친환경 정책을 폈고,전천후 축구·야구경기장을 건설해 스포츠 마케팅에도 성공하는 수완을 보여줬다. 그는 96년 4월에는 남해대교에서 번지점프를 하기도 했다.남해 노량에서 ‘벚꽃축제’를 개최하기로 했으나 진해 군항제에 눌려 외지 관광객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자 군수가 몸을 날린 것이다.군수의 점프 소문은 빠르게 번져나가면서 벚꽃 축제는 활기를 되찾았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盧대통령 6·13때 삼고초려 노 대통령과의 관계는 지난해 6·13 지방선거에서 맺어졌다.무소속으로 경남지사 선거에 나서려던 그는 노 대통령의 삼고초려 끝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가 한나라당 후보인 김혁규(金爀珪) 지사에게 참패했다.대선에서는 민주당 경남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선거운동을 벌였다. 김 장관이 노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은 결정적인 계기는 면전에서 쓴소리도 서슴지 않는 ‘곧은’ 성격 때문이라고 한다.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노 대통령이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을 찾아가자 “YS와 손잡는 것은 지역주의 청산이라는 대의에 맞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해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는 것이다. 그의 행정 스타일도 주목된다.군수시절 업무 추진과정에서 도청 직원들과 자주 부딪히면서 매끄럽지 못한 관계를 맺기도 했고,군청 기자실도 폐쇄했다.한동안 군내 기관장 모임에 불참해 독선적이라는 평가도 들었다. 김 장관도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실·국장들이 저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연장자분들은 형님으로 모시고,나이가 적은 분들은 (내가)솔선수범,팀워크를 잘 발휘해 나가겠다.”고 부처내 ‘세대화합’을 강조했다.그가 이장으로 일할 때 남해군수였던 정채륭(丁采隆) 차관보와의 ‘뒤바뀐 관계’ 등을 매끄럽게 처리할지 주목된다. 남해 이정규 이종락기자 jeong@
  • 참여정부 첫 내각/화제의 장관 4인

    ◆강금실 법무부장관 첫 여성 법무장관,첫 여성 법무법인 대표,서울지역 첫 여성 형사단독판사,첫 여성 민변 부회장,첫 부장검사급 법무장관.강금실 신임 법무장관에게 따라 다니는 수식어는 여성으로서 남성 중심의 제도권과 투쟁해 얻은 표창과도 같다.참여정부의 개혁을 상징하는 강 장관의 과거는 소수의 인권을 위한 삶이었다. ●93년 사법파동때 평판사회의 설립 지난 93년 ‘제3차 사법파동’때 ‘평판사 회의’ 설립을 주도,당시 김덕주 대법원장에게 ‘사법개혁 건의서’를 전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5,6공화국 때는 형사단독 판사로 재직하며 집시법 위반으로 검거된 대학생들의 구속영장을 잇따라 기각하거나 무죄 석방하기도 했다. 96년 5월 서울고법판사를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강 장관은 개업하자마자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99년 9월 민혁당 사건 변호인을 맡은 데 이어 11월에는 납북 귀환어부 함주명씨를 고문한 혐의로 이근안 전 경감에 대한 고발을 주도하는 등 열성적인 활동 덕분에 2000년 5월 여성으로선 최초로 민변 부회장에 선임됐다. 57년 제주에서 출생해 경기여고 문과를 수석졸업하고,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강 장관은 대학시절 교내 탈춤반 활동을 하면서 사회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81년 사시23회에 합격했고 사법연수원 성적도 7등으로 뛰어났다. 강 장관은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 광화문 민중문화사 서점 주인의 소개로 만난 서울대 철학과 출신 김태경씨와 4년 동안 열애한 끝에 결혼했다.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자주 투옥되던 김씨를 판사의 신분으로 뒷바라지한 일화는 유명하다. ●차세대 한국인 리더 18명에 선정 그러나 김씨가 부도를 내면서 3년전 헤어졌다.그는 2000년초 벤처기업 컨설팅 전문 로펌인 법무법인 지평을 설립해 불과 2년만에 변호사 60여명을 거느린 중견 로펌으로 키워내는 사업수완도 발휘했으며 지난해 8월에는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아시아의 미래를 짊어질 차세대 한국인 리더’ 18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대전고법 김영란 부장판사,민주당 조배숙 의원과 고등학교,대학교 동기동창이다.김 부장판사는 “강 장관은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도 항상 정의로운 길을 선택해왔다.”면서 “뛰어난 판단력과 탈권위주의적 인화력으로 직책을 잘 소화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홍지민기자 icarus@kdaily.com ◆이창동 문화부장관 이창동 신임 문화관광부 장관은 말 그대로 문화예술인이다.이어령(문학비평가)·김한길(소설가) 전장관도 있지만 이들은 임용시 교수·정당인 이미지가 강해 문화현장과는 멀어보였다. 반면 이 장관은 소설가와 영화감독 등 땀냄새 나는 문화현장에서 주로 활동해 업무추진도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할 것으로 보인다.그를 증명하듯 취임 첫날부터 캐주얼풍 양복에 검정색 산타페를 직접 운전해 문화부에 도착,의례적인 취임식도 취소하는 등 잇단 파격행보로 눈길을 끌었다. 그의 삶의 여정을 찬찬히 뜯어보면 노무현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찢어지게 가난한 집안,고비마다 발휘한 뚝심 그리고 잔수보다는 정공법으로 돌파해온 점 등은 그를 임용하는데 큰 요인이 됐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첫번째 도전-전업 작가로 81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경북 영양고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82년 결혼과 함께 서울로 왔다.그리고 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의 문을 두드렸다.유행과는 담을 쌓고 우직스러운 소설을 쓰다 87년 전업작가로 나섰다.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찾아 나선 것이다.이후 작품집 ‘소지’‘녹천엔 똥이 많다’를 내고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해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했다. ●두번째 도전-영화속으로 그러던 그가 93년 ‘그섬에 가고 싶다’의 각색과 조감독이란 타이틀로 영화판에 뛰어들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본인은 연극에 심취했었고 영화감독이 꿈이었다지만 40세라는 나이에 직업을 바꾼다는 것은 웬만한 열정이 아니면 힘든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생 바꾸기’를 감행했고 탄탄한 극적 구성과 짜임새 있는 연출로 나름의 영화세계를 구축해 왔다.작품수는 ‘초록 물고기’(97)‘박하사탕’(99)‘오아시스’(2002) 등 3편에 불과하지만 그 작품성과 작가주의 정신은 비평계의 주목을 끌고도 남았다.“테크닉에 집착할 생각이 없다.”는 그의 정통파식노력은 청룡영화상과 대종상,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등 국내외에서 잇단 수상으로 보상받았다. ●세번째 도전-제도속으로? 그가 펼칠 문화정책의 구체적 청사진은 미지수다.하지만 취임 첫날 “경제·경쟁논리를 떠오르게 하는 문화산업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은 시사적이다.시장주의를 경계하면서 그 토대가 되는 순수예술에도 무게를 둘 것으로 보인다. 이종수기자 vielee@kdaily.com ◆김화중 복지부장관 간호사 출신인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해 대통령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의 보건의료 특보를 맡으면서 해박한 전문지식을 발휘했다.16대 국회에서 전국구로 등원한 간호계의 대부로 온화한 성격이지만 일단 결정된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추진력을 갖고 있다는 평이다. ●시민단체, 개혁성 미흡 지적 대선에서 권양숙(權良淑) 여사의 정무 특보를 맡기도 했다.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시민단체들은 내정설이 나돌 때부터 전문성과 개혁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들어 “건강보험 재정통합 등 난마처럼 얽힌 현안을 풀어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반대해 왔다.임명된 27일에도 국민추천과 검증을 무시한 처사라며 반발수위를 수그러트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김 장관이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데다 보건의료 전반에 대해서 폭넓은 지식을 지녔기 때문에 ‘적임자’라는 평가도 있다.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전부터 (복지부)장관에 임명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며 그의 능력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노 대통령은 김 장관이 권 여사의 추천으로 입각한 게 아니냐는 항간의 소문을 의식한듯 “(김장관 임명이)아내와는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남편은 고현석 전남 곡성군수 그의 입각은 ‘군수·장관 부부’가 처음으로 배출됐다는 점에서 화제다.남편은 고현석(高玄錫) 전남 곡성 군수.분야는 다르지만 남편은 지방자치단체에서,부인은 중앙 부처에서 각각 행정을 책임지는 수장(首長)이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서울대 재학시절 처음 만났다.고 군수가 법대 학생으로 농촌봉사활동모임의 회장을 할 때 간호대에 다니던 김 장관이 모임에 합류하면서 연애감정이 싹트기 시작,결혼에 이르렀다.고 군수는 지난 95년 3월 명예 퇴직할 때까지 만 26년 동안 ‘농협 맨’으로 일해오다 98년 민선2기 군수에 당선됐다.고 군수가 관사에 혼자 살기 때문에 두 사람은 5년째 ‘주말부부’다. 고 군수는 종가집 맏며느리인 김 장관이 70년대 후반 미국 컬럼비아대학으로 아이들을 떼어놓고 혼자 유학을 떠난다고 할 때 “아내는 살림만 할 사람이 아니다.”라며 친척들을 앞장서 설득하기도 했다. 김 장관은 임명통보를 받자마자 휴대전화로 고 군수에게 가장 먼저 ‘기쁜’소식을 전했다.네딸 중 막내(이화여대 의예과 2년)가 김 장관의 뒤를 잇고 있다. 곡성 남기창 김성수기자 sskim@kdaily.com ◆진대제 정통부장관 반도체 신화의 주인공 진대제(陳大濟·사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이 정보통신부장관에 임명됐다. ●장관보다 삼성 사장이 좋다(?) 삼성은 진 장관의 ‘입각 가능성’이 점쳐지자 ‘득실’을 따지느라 분주했다.특히 진 장관이 삼성전자의 ‘차기 전문경영인’으로 이건희 회장의 총애를 받아와 그의 입각에 따른 인적 손실을 우려했던것으로 알려졌다.삼성 내부에서는 입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삼성은 진 장관의 입각에 따른 손해를 고민한 것으로 전해진다.사업상 정통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는데,오히려 ‘역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삼성맨이었던 남궁석(南宮晳)의원의 정통부장관 재직시 통신사업 진출과 관련,불이익을 당한 경험이 있다.그러나 삼성은 새 정부의 재벌개혁 추진 강도가 예상외로 강력하자 자사 출신 인사의 입각이 정책 방향 등을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쪽으로 내부 결론을 내렸다. ●금전적으로 손해 막심 진 장관은 입각으로 60억여원의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 손해를 감수해야 할 처지다.9일을 남겨두고 7만주에 대한 자격이 상실되기 때문.2000년과 2001년 각각 7만주의 스톡옵션을 부여받았는데 이 중 2001년도분은 ‘2년근무’ 조건에 9일 모자라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됐다.행사 가격이 19만 7100원이기 때문에 현재 시가(28만여원)만 계산해도 60억여원이나 된다. 2000년에 부여받은 스톡옵션(행사가 27만 2700원)은 향후 7년동안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기간내에 주가가 지금까지의 최고가(43만여원)까지 오른다면 112억원을 벌 수 있게 된다. 한편 진 장관이 삼성전자 사장때 받은 연봉은 30억여원인 것으로 알려져 장관 연봉이 9600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수입이 30분의1로 삭감당하게 됐다.스톡옵션 포기분까지 합치면 100억원대에 이른다. ●수원시향 지휘봉 잡기도 미국 스탠퍼드대학 전자공학 박사 출신으로 휼렛패커드,IBM에서 반도체를 연구하다 85년 삼성전자에 전격 스카우트돼 ‘세계 최초’의 반도체를 잇따라 개발해낸 주역.별명은 ‘미스터 칩(반도체)’ ‘미스터 디지털’이다.화려한 이력의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제품설명회 때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등장,수원시향 지휘봉을 잡기도 하는 등 ‘이벤트’에도 강하다.부인 김혜경(金惠卿·50)씨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정기홍 박홍환기자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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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표 경제부총리 1963년 서울 경복고에 ‘수원 촌놈’이 들어왔다. 경복고의 일부 학생들은 “촌놈이 유학왔다.”며 놀려댔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김진표(金振杓) 신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친구들을 다독였다.김 부총리가 1급(세제실장) 승진 4년만에 경제좌장에 오르는 데는 무엇보다 부드러운 대인관계가 주효했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이다. 지난 73년 행정고시 13회에 합격해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세제전문가’와 ‘친화력’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대화도 즐겨 기자들과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눈다.금융실명제,금융소득종합과세,연금제도 개선 등 굵직한 세제개혁이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세제통답게 현실적이고 일처리도 매우 꼼꼼하다.‘미스터 튜너(Tuner)’라는 별명은 그의 뛰어난 조정력과 친화력을 단적으로 말해준다.폭탄주 등 술 실력도 남다르다. 그가 넘어야 할 산도 있다.서울 법대 출신으로 공직의 대부분을 재경부 세제실에서 보내 거시경제와 실물금융에 약하지 않으냐는 우려를 씻어야 한다.재경부 세제총괄심의관으로 가기 이전 은행보험심의관과 공보관을 거치면서 거시경제와 금융부문의 눈높이를 높일 기회는 있었다. 바깥에 알려진 것만큼 추진력이 강하지 않다는 공직사회 내부의 분석도 있다. 공정위와 달리 재경부 차관 시절 현실적인 재벌 규제를 주장했다.행시 선배인 건교·산자부장관 등을 아우르는 조정자 역할도 녹록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안미현기자 hyun@kdaily.com ◆정세현 통일 마오쩌둥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공산권·북한 전문가.1977년 이용희 당시 국토통일원 장관이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 제자들을 대거 영입할 때 4급으로 특채됐다.이후 통일부와 민족통일연구원,청와대,국정원 등에서 경험을 쌓은 뒤 2002년 통일부 출신으로는 처음 장관에 올랐다.고집이 세다는 평가도 받는다.부인 김효선(57)씨와 1남 1녀.취미는 독서. ◆박봉흠 예산처 노무현 대통령이 ‘내가 본 가장 유능한 관료 2명’ 중에 한 명으로 꼽을 정도로 업무조정능력과 친화력을 자랑한다.옛 경제기획원 시절 물가와 예산분야에 주로몸담은 ‘예산통’.예산실장을 1년6개월 맡은 뒤 차관,장관으로 수직 승진했다.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널 정도의 신중함이 넘친다는 평. 부인 김혜영(50)씨와 1남. ◆이영탁 국조실장 문민정부 말기 고건총리 아래에서 차관급인 행정조정실장을 지낸 데 이어 이번에는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으로 또다시 고 총리를 보좌하게 됐다.행시7회로 경제기획원 예산실장,교육부차관 등을 두루 거쳤다.내실있게 일하는 스타일이다.하지만 1녀. ◆허성관 해양 고향은 경남 마산이지만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광주에서 졸업한 뒤 대학 때 부산으로 옮겨간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부산 경실련에서 활동하며 각종 모임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자문도 하고 토론하는 관계를 유지해 왔다.16대 대선 때는 노 후보를 지지하는 부산 지역 교수 그룹을 이끌기도 했다. 부인 김경옥(56)씨와 1남1녀. ◆최종찬 건교 행시(10회)에 최연소 합격했다.경제기획원에서 잔뼈가 굵어 조달청 차장,건교부차관,기획예산처차관,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지낸 정통 경제관료.거시경제정책과 경제기획업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직원들의 의견을 많이 듣는 스타일이나 고집이 세다는 말도 듣는다.임광토건 임광수회장의 사위.부인 임재영씨와 2남. ◆지은희 여성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등을 지낸 개혁 성향의 여성·사회문제 운동가 출신. 정신대·노동·남북교류 문제 등에서 활동했고 노사개혁위원을 지냈다.활달하고 솔직한 성격.‘여성문제에 관한 사회구조적 접근’ 등의 저서가 있다.남편 주영길(55·녀. ◆권기홍 노동 18년간 사회정책 분야 연구활동에만 전념해온 전형적인 학자.독일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유럽식 사회정책의 전문가다.지난해 9월 정치개혁시민연대 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 뒤늦게 사회운동을 시작했다.16대 대선 때는 민주당 대구시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대구지역 선거운동 사령탑 노릇을 했다.부인 서정희씨와 1남1녀. ◆한명숙 환경 국민의 정부에서 초대 여성부장관을 지낸 데 이어 새 정부에서도 환경부장관에 임명됨으로써,여성으로는 처음 2개 장관직을 역임하게 됐다.진보적 성향이 강하고 친화력도 좋아 장관감 1순위로 꼽혀 왔다.유신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 2년간 옥살이를 했다.지난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남편 박성준씨와 1남. ◆윤진식 산자 금융정책 부서를 두루 거친 금융 관료 출신.행시 12회로 1997년 청와대 조세금융비서관으로 근무할 당시 외환위기 가능성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보한 것으로 잘 알려졌다.추진력에 강단이 있지만 외골수적인 면도 있어 다양한 산업분야를 관장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부인 백경애(55)씨와 1남1녀. ◆김영진 농림 4선 의원으로 13대 국회부터 농림해양수산위원으로만 활동했다.지난 87년 6·10항쟁 당시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시국토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첫 인연을 맺었다.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농산물 시장개방에 반대하며 제네바에서 삭발투쟁을 벌여 국민들의 눈길을 끌었다.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부인 윤순남(51)씨와 1남2녀. ◆박호군 과기 성격이 원만해 직원들 사이에 신망이 높다.KIST 원장직을 수행하면서 환경보전을 위한 이른바 ‘금수강산’ 프로젝트라는 대형 사업을 추진하는 등 정부 출연연구원의 역할 모델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평이다.30년 이상을 KIST 등에 재직하면서 유기화학 및 정밀화학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꼽힌다.부인 황영애(56)씨와 2남. ◆조영길 국방 영관 장교 시절부터 줄곧 군의 전력증강 분야에 참여,군내 전략기획과 전력증강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전력분야에 오래 관여하면서도 금전문제 등 ‘구설수’에 한번도 오르지 않을 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하다.88년 국방개혁 당시 실무 위원장을 맡아 오늘의 합동군 제도를 정착시켰다. 부인 강숙(58)씨와 1남2녀. ◆윤영관 외교 윤영관 외교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로,노무현 대통령의 ‘자주 외교’노선을 설계한 주역이다.인수위 통일외교안보분과 간사로 새 정부의 통일·외교정책 근간인 ‘평화번영’정책을 입안했다.대등하고 성숙한 대미 외교를 펼쳐야 하지만,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이 갖는 전략적 국가이익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게 지론. 부인 김희선(45)씨와 1녀.
  • 노무현의 사람들/재야·정계 망라 ‘파워그룹’ 형성

    새정부 출범을 앞두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의 인맥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노 당선자의 인맥은 그가 사회적·정치적으로 파란을 겪을 때마다 하나씩 형성됐다.81년 부림사건을 변론,인권변호사로 변신하면서 부산 등 재야인맥이,90년 3당통합 반대와 95년 김대중 정계복귀 반대 활동을 하면서 국민통합추진회(통추) 인맥이 자연스레 형성됐다.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주변에 모여든 시기다.지난해 민주당 국민경선을 거치면서 젊고 개혁적인 ‘민주당의 신주류’들도 결합했다.386그룹,부산 인맥,통추인맥,민주당 신주류,학자 및 시민단체 등 ‘노무현의 사람들’을 심층 해부한다. ★통추 멤버 지난 96∼97년 DJ가 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정계복귀를 하자,민주당에 남아 정치적 운명을 같이했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統推) 멤버로는 김정길·이철·유인태·박석무 전 의원,원혜영 부천시장,민주당 이미경·이호웅 의원,개혁국민정당 김원웅 의원,한나라당 김홍신·김부겸 의원 등이 있다. 이들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대부분 노 당선자를 적극적으로 도왔고,원칙과 일관성을 강조하는 노 당선자의 정치철학과도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새 정부에서 중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통추 대표 출신인 민주당 김원기 고문은 당내 친노(親盧)그룹의 좌장역을 맡아 통추 멤버들과 함께 반노(反盧)·비노(非盧) 그룹의 공격에서 노 당선자를 지켰다.그런 탓인지,노 당선자는 지금도 그를 통추 직함인 ‘대표님’으로 부른다. 통추 마포사무실을 책임졌던 유인태 정무수석 내정자는 지난해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정몽준 후보측에 몸 담았던 이철 전 의원과 물밑 조율을 벌였다.원혜영 부천시장과 박석무 전 의원은 각각 행자부장관과 교육부총리 물망에 올라 있다. 그러나 ‘통추 3인방’ 가운데 하나였던 김정길 전 의원은 ‘대통령 취임 전후 사면·복권이 없을 것’이란 소식에 낙담한 모습이다.더욱이 이 전 의원은 지난해 대선 당시 부산·경남지역에서 노 당선자의 지지 확보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뛴 것으로 알려져고 있다. 홍원상기자 wshong@kdaily.com ★민주당 신주류 당내 대선후보 경선과 대선과정에서노 당선자를 지원,비주류에서 주류로 발돋움한 그룹이다. 이 그룹은 특히 노 당선자가 후보시절 지지율 하락에 따른 후보교체론으로 시달릴 때 곁을 지켰던 인물들이어서 ‘선명성’에 유별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인적 청산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게 특징이다. 대선기획단장을 맡았던 문희상 의원은 이미 비서실장에 내정돼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로 부상했다.김대중(DJ) 정부 출범 초기 정무수석 등으로 활약하다 후반 들어 파워게임에서 밀렸던 그는 일약 주류로 재부상한 셈이다. 대선 때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정대철 의원은 지금 유력한 당권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는 곧 당선자 대미특사로 미국방문에 나선다.오랫동안 DJ와 같이 정치를 해오면서도 동교동계에 밀려 만년 비주류의 길을 걷던 그에게는 지금이 정치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정동영,추미애 의원은 당선자가 차세대로 거론하는 인물들이다. 정동영 의원은 다보스포럼에 당선자 특사자격으로 참가했으며,추미애 의원도 대미 특사로 임명됐다.법무장관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 조순형 의원과 임채정 인수위원장,신계륜 당선자 인사특보,김한길 기획특보 등도 주류의 한축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천정배 의원은 노 당선자가 대선후보가 되기 이전 유일하게 지지를 선언한 당내 최측근 인사다.천 의원과 가까운 신기남 의원은 최근 강성 주류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선대위에서 본부장으로 활동했던 이상수 김경재 이해찬 허운나 의원 등도 당선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룹이다. 김상연기자 carlos@kdaily.com ★부산인맥 노 당선자와 정치적 고비를 함께해왔던 ‘부산 인맥’은 80년대 노 당선자의 부산 광안리 삼익아파트 자택에 모여 노동문제를 토론했던 동년배 그룹과,노 당선자를 ‘노변(노무현 변호사)’이라고 부르며 따랐던 30∼40대 운동권 출신의 참모들로 나뉜다. 부산 인맥의 대표는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내정자다.82년 노 당선자의 변호사 사무실에 합류,정치적 동지가 된 문 내정자는 노 당선자가 급할 때면 1000만∼2000만원씩을 빌려주는 급전 창구로 알려질 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이호철(부산대 법대 77학번)씨는 노 당선자가 재야 운동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던 81년 ‘부림사건’의 주인공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을 맡게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운동을 하다 노 당선자와 인연을 맺은 김재규씨는 지난해 대선 당시 부산 국민참여본부장으로 활약했다. 젊은 참모들은 부산 선대위에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밖에 대선 당시 부산선대위원장을 맡은 조성래 변호사,노 당선자의 부산상고 10년 선배인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부산 ‘가야 성당’의 송기인 신부 등도 노 당선자가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조언 그룹이다. 홍원상기자 ★시민단체 .학계 노무현 당선자 주변에 포진한 학자그룹은 노 당선자의 후보시절 이전부터 정책자문을 맡아온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뤄졌다.이들 대부분은 40∼50대 소장파로,시민단체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해온 참여주의적 성향이 짙다. 노 당선자의 정책 ‘가정교사’들은 상당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정무분과 간사를 맡고 있는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학자그룹의 좌장격으로,경실련 지방자치위원장으로 활동했다.경제2분과 간사인 김대환 인하대 교수,국민참여센터 본부장인 이종오 계명대 교수,이은영(한국외대 교수) 정무분과 위원은 참여연대에서 활동했다.순천대 교수인 박기영 사회문화여성분과 위원과 허성관(동아대 교수) 경제1분과 위원 등도 경실련에 참여했다. 정치·행정분야 전문가인 고려대 임혁백·한림대 성경륭·성공회대 정해구 교수 등은 인수위 정치개혁연구실에서 ‘개혁프로젝트’활동에 참여하고 있다.이주향 수원대 교수,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정대화 상지대 교수,정현백 성균관대 교수,손혁재 성공회대 교수 등 소장파 학자들도 기획·정무분과 자문위원으로 참여,정책제안을 맡고 있다. 외교통일안보분과에는 대북 포용정책 등 정책자문을 맡아온 윤영관 서울대 교수와 서동만 상지대 교수,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서주석 국방연구소 연구위원 등이 의기투합해 새 정부의 통일외교정책을 조율하고 있다.김창수 민화협 정책실장도 외교분과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노 당선자의 대미특사단에 포함된 문정인 연세대 교수도 노 당선자의 핵심 외교브레인이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와 이동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정태인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은 경제1분과에서 금융·재벌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공기업 민영화 등 기업정책은 임원혁·장하원·유종일 KDI 연구위원이,금융정책은 윤원배 숙명여대 교수 등이 자문활동을 한다.박준경 KDI연구위원과 정명채 농촌경제연구원 부원장은 경제2분과에서 신기술·농어업 등 산업정책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전농·WTO반대국민연대 사무총장 출신인 김인식 전문위원은 실질적인 농업정책에 참여한다. 대구사회연구소 출신인 권기홍(영남대 교수) 사회문화여성분과 간사를 비롯,여성민우회에서 활동한 정영애 위원과 민주노총 출신인 김영대 위원,박태주 전문위원 등도 노 당선자의 복지·여성·노동정책을 충실히 뒷받침하고 있다.원용진 서강대 교수는 사회분과 전문위원으로 문화정책을 지원한다.장하진 여성개발원장과 조옥라 서강대 교수,지은희 전 여연 대표는 여성정책을,언개연·민언련 출신인 김주언 언론재단 이사와 김동민 한일장신대 교수등은 언론개혁에 대한 자문활동에 참여한다. 최근 청와대 입성이 확정된 문재인 민정수석과 박주현 국민참여수석도 각각 부산·경남 민변과 참여연대·경실련 출신 변호사로,시민단체에서 많은 활동을 해왔다.노 당선자의 법률특보 출신인 박범계 변호사도 정무분과에서 검·경찰 개혁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김미경기자 chaplin7@kdaily.com ★386세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이른바 ‘386세대 참모’ 핵심은 이광재 기획팀장과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다.안 부소장이 인수위를 떠난 뒤엔 이 팀장이 측근 참모들 사이에서도 ‘핵심 측근’으로 불릴 정도다.이 팀장은 연세대 법학과 83학번.87년 경찰 수배 중에 노 당선자를 만났고,88년 13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함께하다시피 했다.96년부터 1년 반정도 잠깐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의 ‘덕린제’에서 일한 뒤,97년 노 당선자와 함께 국민회의에 합류했다.고려대 철학과 83학번인 안 부소장도 김덕룡 의원 비서로 출발했으나 3당합당에 반대,90년부터 노 당선자와 함께 길을 걸어왔다.안 부소장은 노당선자가 14대 총선 낙선 후 93년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살림을 이끌며,노 당선자의 외곽그룹을 챙겨왔다. 서갑원 의전팀장,황이수 정무비서,천호선 전문위원,배기찬 전문위원,윤태영 공보팀장,백원우 전문위원,김만수 부대변인 등도 386참모 중심권이다.노 당선자의 일정과 경호팀을 관리하는 서 팀장은 국민대 법학과 81학번으로 노당선자 비서,지방자치실무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황 비서는 서울대 인류학과 83학번 출신으로 총학생회장을 지냈다.96년 지방자치연구소에 합류하면서 노 당선자와 인연을 맺었다.천 전문위원은 연세대 사회학과 80학번.노 당선자의 13대 의원 시절 비서관으로,93년 유인태 정무수석 내정자의 보좌관을 지냈다.배 전문위원은 서울대 82학번으로 노 당선자가 해양수산부 장관시절 정책자문관으로 활동했다.‘노무현이 만난 링컨’‘노무현의 리더십’등을 기획했다.윤 팀장은 연대 경제학과 79학번으로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의 보좌관으로 일했고,노 당선자와는 90년 초부터 인연을 맺었다. 문소영기자 symun@
  • 인수위, 경인운하 백지화 요청 안팎/국책사업 환경·경제성 중요변수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24일 요구한 ‘경인운하사업 중단’을 정부측이 받아들임에 따라 적지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무엇보다 이번 조치는 차기정부의 국책사업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현재 환경단체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새만금건설사업·한탄강댐 건설사업 등 다른 대형 국책사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또 환경이나 경제성을 고려하지 않고 사업에 대한 계속성을 내세워 온 정부의 관행도 상당한 탈바꿈이 필요할 전망이다.실제 정부 스스로 사업 계획과 환경영향평가 및 사업타당성 평가를 부인하는 꼴이 됐다. 인수위는 특히 경인운하 건설과 관련,타당성 검토와 신뢰성 제고를 위해 사업시행처와 타당성 검토용역을 분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시행부처가 사업계획과 함께 타당성 검토용역도 동시에 추진하던 기존의 사업 행태에 대해 제동을 걸어 투명성의 제고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아울러 예정에도 없던 국고 투입도 개선할 수 밖에 없게 됐다.경인운하 건설사업은 1조8429억원을 들여 서울 강서구 개화동과 인천 서구 경서동까지 18㎞ 구간을 연결하는 엄청난 국책사업이었다. 더욱이 경인운하사업과 함께 묶어 민자유치로 시행한 굴포천 방수로 건설사업도 정부사업으로 바뀌어 정부 책임으로 되돌아왔다. 정부는 현대건설 등 9개사 컨소시엄인 ‘경인운하 주식회사’에 굴포천 방수로 사업비 1400억원을 지급해야 한다.현대쪽과 일방적으로 공사를 중단할 경우 사업비의 90%를 보상하는 계약을 맺은 탓이다.결국 경인운하사업과 관련해 이미 투입된 예산의 상당액이 헛돈이 된 셈이다. 하지만 인수위의 이같은 결정은 정부 당국자들을 완전히 배제한 채 시민단체에 먼저 통보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불가피할 것 같다. 일단 경인운하 건설사업 백지화를 위한 수도권 시민공대위는 “인수위의 경인운하사업 중단을 환영한다.”면서 “노무현 정부가 21세기 친환경 정부로 가려는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환경정의시민연대측은 “전략환경영향평가제도를 도입,대규모 국책사업에 대해서는 실시단계가 아니라 기본계획 수립단계에서부터 환경에 미치는 중장기 영향을 연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그러나 지난 98년 당시 재정경제원에 의해 본격화돼 지금껏 계속되어 온 사업이 일시에 중단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경인운하 사업이란 지난 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 공약에 포함돼 처음 거론됐다.이후 95년 당시 재정경제원이 민자유치 대상사업으로 지정하면서 건설 계획이 본격화됐다. 인천 서구 시천동(서해)에서 한강을 따라 서울 강서구 개화동 행주대교에 이르는 18㎞ 구간을 폭 100m,깊이 6m의 수로로 연결하는 사업이다.당초 2000년 10월 착공,2007년 완공될 예정이었다.사업비는 총 1조 8429억원이다.정부가 4382억원을 투자하고 민간에서 나머지를 조달할 계획이었다.사업은 한국수자원공사와 현대건설 등 9개 출자사로 구성된 경인운하주식회사가 맡고 있다. 굴포천 유역 임시 방수로사업은 경인운하 사업의 일부로 지난해 6월25일 완공돼 개통됐다.굴포천 방수로는 인천 계양구 선주지동(굴포천)에서 서구 시천동(서해) 구간 폭 20m,깊이 20m,길이 14.2㎞의 배수로이다. 유진상기자 jsr@
  • [노무현시대의 개혁-재벌] ④ 재벌개혁 왜 실패하나

    재벌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 대상 1호’로 지목돼 왔다.그러나 새로 들어선 정권이 곧추세운 재벌개혁의 칼날은 이내 무뎌지고 말았다.그나마 성과물로 여겨지던 것들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당초의 지향점에서 크게 벗어나거나,허울좋은 생색내기에 그친 예가 적지 않았다.‘거대 공룡’에 대한 개혁이 ‘절반의 성공’에 그친 이유는 시장논리보다는 정부 주도의 개입으로 이뤄졌고,이 때문에 재벌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지 못한 탓이 컸다. ●재벌개혁 좌초하는 까닭은 우선 재벌개혁의 목표 설정이 잘못 인식되고 있는 점이다.재벌개혁이 ‘재벌타파’로 비쳐졌다는 얘기다.김영삼(金泳三·YS)정부 때 재벌개혁도 ‘재벌 손보기’로 여겨져 정부와 재벌의 갈등이 심했다.재벌은 버티기로 나섰고,정부는 ‘괘씸죄’로 몰아붙이면서 본질이 왜곡됐었다. 실제 괘씸죄로 곤욕을 치른 예도 있었다.현대그룹은 1992년 대선 당시 오너인 정주영(鄭周永) 전 명예회장이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YS정권 내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현대는 금융권으로부터 자금줄이차단돼 애를 먹었다.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 정부 때는 밀월관계를 유지하긴 했으나,구조조정을 등한시한 채 대북사업 등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결국 좌초했다. 정부의 일관성없는 재벌정책이 국가경제에 가져다 준 폐해는 엄청났다.정부 주도의 시장개입도 재벌개혁에 역작용을 초래했다.DJ정부가 98년 추진한 정유,반도체,항공기 등 9개 업종에 대한 빅딜이 요란한 통·폐합에도 불구하고 알맹이 없는 결과만 낳은 것도 시장논리를 무시한 대가였다. 빅딜 초기에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혔던 LG반도체와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의 결합은 지금도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는 골칫거리다.단국대 강명헌(姜明憲) 교수는 “기업은 스스로의 생존전략을 가장 잘 안다.”며 “정부가 재벌 스스로 개혁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재벌개혁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재계의 공생관계 대기업의 한 고위 관계자는 “재벌들로서는 정치권의 인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또 다른 생존전략”이라며 “정부가 무리하게 재벌개혁을 추진할때 재계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정치권”이라고 말했다.정치권과 재계의 보이지 않는 먹이사슬이 재벌개혁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얘기다.98년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맞교환 논란도 지역이기주의에 얽힌 정치권의 개입이 낳은 해프닝이었다.현 정권하에서 도입하기로 했던 집단소송제 관련법 등이 국회에서 낮잠을 자거나,중도에 흐지부지되는 것도 재계의 정치권 로비가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는 방증이다.특정 재벌들이 정기적으로 정치권에 뒷돈을 댄다는 얘기,심지어 일부 정치권 인사는 ‘○○재벌의 장학생’이라는 얘기도 공생관계를 대변한다. ●나는 로비,기는 제재 재계의 정보와 로비력은 대단하다.대다수 재벌그룹에는 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산업자원부,재정경제부 등 기업의 목줄을 죄는 관련부처 출신의 전직 간부들이 포진해 있다.전직 경제관료 A씨를 고문으로 채용한 모그룹은 A씨 덕분에 자신들의 현안과 관련된 사항들은 미리 파악하는 등 큰 도움을 받고 있다.올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출범한 이후에도 재벌들의 이런 ‘거미줄 포섭’작업은 여전하다.대기업 고위 간부는 “정권이 바뀌면 재벌들은 통상 다른 재벌보다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며 “이는 그동안 정권이 입맛에 따라 일관성없이 재벌들을 쥐고 흔들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재벌들의 ‘방패’에 맞서는 공정거래위원회 등 경제관련 부처들의 ‘창’은 상대적으로 무디다.솜방망이 제재란 얘기다.한 예로 지난해 8월 공정위는 재벌그룹의 부당내부거래 현장조사에 착수한다는 내부방침을 세웠으나 재벌의 로비에 밀려 흐지부지됐다.당시 공정위 고위 간부는 “심지어 친구인 대학교수까지 나서서 ‘정권말기에 왜 무리수를 두느냐.’며 자제를 요청해 온 적도 있다.”며 “재벌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는 것은 정부정책이 일관성을 잃어 재벌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는 데다,이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감독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주병철기자 bcjoo@kdaily.com ◆얼굴이 없는 재벌의 파수꾼 재벌의 파수꾼은 얼굴이 없다.그러나 재벌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단체는도처에 있다.전국경제인연합회,경영자총연합회,자유기업원 등의 단체나 연구원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단체는 설립목적이 기업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것인만큼 활동에 비난만 할 수는 없다.그러나 기업보다는 소유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를 개발하고,이를 마치 기업활동을 위한 전제조건인냥 강변하는 경우도 많다. 재벌의 파수꾼은 사람도 있고 제도인 경우도 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힘은 가히 위력적이다.이런 재벌 원군은 전방위로 포진해 있다. 문제는 이들 원군이 재계 자체에는 물론 정계와 언론계 등에도 숨어있다는 점이다. 한보 등 재벌이 해체되거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재벌과 정·관·언론계와의 유착관계가 드러나기도 했다.1988년 5공 청문회때의 일.당시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은 비자금 문제로 청문회에 나온 증인이었지만 당시 의원들의 일부는 ‘회장님’을 연발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또 90년대 초 YS정권 초기때 정부가 수립 중인 각종 정책이 모 그룹으로 먼저 빠져나가면서 “정부내에 이 기업의 장학생이 숨어있는 것아니냐.”며 당사자를 찾느라 법석을 떨기도 했었다. S그룹의 한 계열사 일화도 대기업이 얼마나 ‘우군 만들기’에 힘을 쏟는지 보여준다.이 계열사는 당시 동종 업계에 출입하는 기자들을 ‘친OO’,‘친OO’식으로 구분,파일을 정리해 뒀다가 이 파일이 노출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재계 출입을 오래한 퇴직 언론기자 Y씨는 “기자가 기업을 오래 출입하다 보면 재벌의 논리에 빠져들고 동화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렇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재벌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옹호하는 파수꾼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현대그룹의 분화 과정에서도 이같은 일면이 잘 드러난다. 당시 현 정몽구(鄭夢九) 현대·기아차 총괄회장과 현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이 그룹의 법통을 이어받기 위해 팽팽히 맞서 있을 때 기자들은 어느 쪽을 출입하느냐에 따라 미묘한 입장차이를 보이기도 했었다. 김성곤기자 sunggone@kdaily.com ◆기업이 주장하는 4대 무분별 규제 재계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무분별한 규제들이 기업의 투자 의욕을 떨어뜨려, 경제 활성화를 가로막는 주범으로 꼽는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해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을 위한 덩어리 규제 개혁방안’ 보고서를 통해 출자총액 제한제도,공정공시제도 등 9개 분야 25개 규제를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한 바 있다.기업 활동과 관련한 주요 제도와 재계 주장을 알아본다. ●출자총액제한제도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막기 위해 다른 회사에 출자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을 제한하는 제도.1987년에 처음 도입됐다. 외환위기 직후 폐지됐다가 99년말 적은 지분으로 다수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가 심화되면서 부활됐다. 지난 해 4월 출자총액제한대상 기업집단을 자산규모 5조원 이상 기업집단으로 줄였고,정보통신,생명공학,대체에너지,환경산업,신기술 등에 대한 출자를 예외로 인정하는 등 예외인정 범위도 크게 확대했다. ●내부거래 공시제도 기업의 부당 내부거래를 예방하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내부거래에 대한 공시를 의무화하는 제도다. 지난 해 10월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LG, SK, 현대자동차 등 공시를 누락하거나 지연한 51개사에게 모두 56억 6700억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재계는 “공시대상 정보의 기준·범위가 광범위하고 불명확해 선의의 위반사례가 나타날 수 있다.”면서 “기준을 구체화하고 제재 조치를 완화해 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집단소송제도 기업의 허위부실 공시나 부당 내부거래,부실회계,주가조작 등 기업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본 투자자들이 대표소송 당사자(주로 대주주나 최고경영자)를 정해 승소하면 집단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다. 지난 해 4월 정부가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재계는 “소송 남발로 기업 부담만 가중된다.”며 반발,국회 법사위에 상정된 채 해를 넘겼다. ●회계제도 개혁안 재계는 올 7월 1일 시행을 목표로 입법화가 진행되는 회계제도 개혁안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전경련 회장단은 지난해 11월 “회계제도 개혁안은 최고경영자(CEO)에게 포괄적 책임을 부과하고,다른 법률에서 규제하고 있는 사항도 중복 규제하는 등 문제가 많다.”고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특히 모회사와 자회사를 하나의 기업으로 간주해 작성하는 연결재무제표를 분기·반기별로 제출하려면 별도의 시스템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업이 수백∼수천억원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은주기자 ejung@
  • [젊은이 광장]수구 물결을 경계한다

    제6공화국의 두번째 대통령인 김영삼(金泳三)씨는 민주화의 발목을 붙잡는 ‘군부 후견주의’를 일소했으나,개발독재의 잔재 청산에는 실패했다.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경제위기와 냉전논리를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였지만,소외계층의 삶을 보장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구현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제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대통령 당선과 진보정당의 성장을 보게 됐다.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해본다.새 정부의 보수화를 부추길 것으로 예상됐던 민주당내 일부 세력이나 정몽준(鄭夢準)씨가 정치무대의 ‘코러스라인’(연극에서 주역 배우만이 넘는 선) 뒤로 일단은 물러났기 때문이다. 예비 정부의 첫걸음은 수구파에 안기거나,그들을 껴안고 정치를 했던 과거 두 전임 정부와 분명 다르다.젊고 신선해보이는 전문가와 지식인이 미래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노 후보의 대선 승리를 ‘87년 6월항쟁의 완성’이라고 찬탄하는 소리에 멈칫하지 않을 수 없다.그의 득표율은 과반에 이르지 못했다.또 진보정치를 이끌고 있는 민주노동당 등도 국회에서 개혁을 주도할 만한 의석을 갖고 있지 않다.때문에 비관적인 전망도 없지 않다. 특히 ‘검열자’들은 큰 불안감을 안겨준다.그중 가장 드센 ‘칼잡이’는 매일 아침 가정을 방문,냉전적인 대북관과 반민주적인 가치관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수구언론이라고 생각한다.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은 ‘사익 추구’와 ‘반대자 탄압'이다.그들은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의견이라도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용인하고 종종 지면에 올린다.반면,좌파라고 규정하기도 힘든 민간정부의 개혁적인 인물들은 서슴없이 ‘빨갱이’로 몰아친다. ‘건전한 보수우파’를 자처하면서도 보수우파의 상식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독재자 찬양이나 재벌체제 비호 등으로 전면 부정하는 수구언론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새 정부의 누군가가,혹은 학계의 개혁적 인물이,노 당선자나 최장집(崔章集) 교수가 당했듯,마녀사냥의 도마 위에 올려질 수도 있다.국가보안법과 그것을 지탱하는 무리들도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국가보안법은 안전과 보호의 미명 아래 개인의 자유를 탄압하는 모든 습속과 제도의 ‘두목’이다. 국가보안법은 5·16,유신,12·12,5·17 같은 쿠데타의 당사자들을 단죄하는 대신,‘불온한 사상’을 신봉하는 소위 ‘반체제 인사들’을 감옥에 가두었다.국가보안법이 ‘구체적인 범죄’가 아닌 ‘사람의 속내’를 주목하는 탓이다.예컨대 ‘한총련 대의원’들은 ‘이적단체’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배와 구속의 대상이 된다.뿐만 아니라,국가보안법의 ‘부하들’이 사회문화 분야에서도 온갖 참견을 일삼고 있는 세상에서,결국 우리는 모두 ‘한총련 대의원’이 될 수 있다. 6월항쟁은 5공의 후임자인 노태우(盧泰愚)씨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져 회한에 찬 뒷말을 남겼다.이번에도 우리는 ‘검열자’들의 포위와 개혁 시도의 좌절로,또다시 회한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그래서 바란다.구시대적 시각을 뚫고 다양한 정치색이 사회에 만개하길.또 여러 정파의 연대를 통한 시민사회의 분투를. 투표용지를 날려 보내고 새 종이에 쓴다.“검열자들을 검열하라!”
  • 인수위원장 임명의미 - 정책·실무중심 정권인수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25일 임채정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에 임명한 것은 인수위를 말그대로 ‘정책실무형’으로 운영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유력하게 거론되던 김원기 정치고문 대신 임 위원장을 발탁한 것은 임 위원장이 두차례나 정책위의장을 맡는 등 탁월한 정책통이기 때문이다.전남 나주 출신인 임 신임 위원장은 이론을 바탕으로 정세를 판단하는 데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어 97년 대선 당시 국민회의 정세분석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2000년 민주당 창당 때에는 당 국가전략연구소장을 맡았다. 이번 대선에서도 선대위 정책본부장을 맡아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 등 참신하고 굵직굵직한 공약을 생산했다.노 당선자가 임 위원장을 선택한 또 다른이유는 이념과 노선이 서로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임 위원장은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민통련 사무처장을 맡아 재야운동에 매진하다 87년 대선에서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에 서면서 평민당에 입당했다. 이날 노 당선자가 인수위의 ‘의원 불포함’ 원칙을 밝힘에 따라 현역 의원은 임 위원장 한사람으로 그치거나,총괄간사 1명 정도가 더 포함되는 수준에서 그칠 것으로 보인다.이에 따라 총괄분과위원장에 이병완 정책위 부의장,정무분과위원장에 김병준 국민대 교수,경제1분과위원장에 김대환 인하대 교수가 유력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그 밖에 정만호 선대위 정책기획실 수석전문위원,조재희 고려대 교수,김용익 서울의대 교수 등이 나머지 분과위원장의 물망에 오르고 있다.인수위원으로는 김영룡·이우철 재경,배철호 기획예산,조기안·박일환 행자,백규태 국방,이현재 산자,서영 건교,구영보 정보통신,조성두 남북관계,채규영 통일외교 수석전문위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국민경선 때부터 노 당선자의 정책보좌를 한 배기찬 전문위원과 곽해곤 수석전문위원도 이름이 오르내린다. 김경운기자 kkwoon@ ★임채정 인수위원장 25일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에 임명된 임채정 의원은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어깨가 무겁다.소박한 심정으로 일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인수위원들은 어떤 인물로 구성되나. 당선자와 상의해 2∼3일 안에 밝히겠다. ◆현역의원도 포함되나. 당선자가 세운 원칙대로 현역의원은 인수위에서 일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당내 인사뿐 아니라 외부인사도 될 수 있나. 배제하지 않고 있다. ◆현 정권의 100대 과제와 연속성을 가져갈 것인가. 새 정부는 현 정부의 연속선 상에 있다.좋은 정책은 현재의 방향을 승계할수 있을 것이다. ◆6개 분과위의 대략적 임무는. 총괄,정무,외교·안보·통일,경제1,경제2,사회·문화 등이다. ◆노무현 당선자가 무슨 부탁을 했나. 인수위 구성 원칙과 실무적 지침을 내려주셨다. 이번 인수위는 실무형이기 때문에 정책 중심의 현안 파악과 비전 정리 등 당선자의 국정철학을 현실화시키는 주춧돌을 마련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행정수도 이전 공약도 다루게 되나. 그렇다.하지만 그것은 매우 큰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절차를 신중하게 밟아나갈 필요가 있다. ◆인수위는 언제부터 활동하나. 신년초가 될 것 같다. 김상연기자 carlos@ ★민주 일부의원””정치인 발탁필요””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대선공로자 및 현역의원 배제’라는 인선원칙이 25일 실제로 확인되면서 민주당 선대위 일부 관계자들은 다소 허탈해 하는 모습이었다. 이날 대통령직인수위원장에 임명된 임채정 정책위의장은 인수위 구성과 관련,“노 당선자가 ‘의원 불포함 원칙’을 밝혔다.”면서 “실무적 성격을가진 팀이기 때문에 정책중심의 현안 파악과 비전 정리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이는 노 당선자가 “욕심 같으면 당의 훌륭한 인재를 많이 참여시키는 게 좋지만,유능한 분들은 당 정비에 힘써달라.”면서 “인수위는 정책·실무 중심으로 할 것”이라고 말한 게 현실화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선대위의 한 관계자는 “현역 의원들이 이렇게 완전히 배제될 줄은 몰랐다.”면서 “이러다가 정말 노무현 정권에서 장관 한 번 못 해보는것 아니냐.”고 푸념했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은 새 정부의 첫 조각(組閣)에 기대를 놓지 않는 모습이었다.선대위 본부장급 20여명은 전날 오후 가진 한 모임에서 ‘내각을 각료와 전문가들에게만 맡기면 개혁 좌초 등 위기상황이올 수도 있어 정치인의입각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노 당선자도 “여러분 뜻이 그렇다면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홍원상기자 wshong@
  • [세대를 넘어 지역을 넘어] ③ 반미.北核 해법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세대간 요구와 우려는 뚜렷이 구분된다.특히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대북 정책,SOFA 개정과 반미 분위기,한·미 관계 재정립 등 외교·안보·통일분야에서 이른바 2030세대(20,30대층)와 그 이후 세대의 시각차는 분명하다.대통령 선거 뒤인 지난 주말에도 촛불 시위는 이어졌다.노 당선자가 “나를 반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겠다.”고 밝혔지만,상충된 각 세대들의 요구를 융화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양측의 목소리를들어본다. ***'2030' 생각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20,30대 젊은세대들의 요구는 간명하다. 2003년 위기설이 팽배한 북·미 관계,남북 관계 등 거시적인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것이다.또한 그들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문제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공개 사과 요구 등을 당당하게외치고 있다.국민적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다.실제 노 당선자는 북핵개발파문의 해결에 있어 한·미·일 공조를 얘기하면서도 남측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을여러 차례 강조했고,젊은 세대들은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종명(金鍾明·34·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씨는 “최근 계속되고 있는 촛불시위는 단순히 효순이·미선이 죽음에 대한 추모행렬만이 아니라 그동안 불평등하게 일그러졌던 한·미관계를 바로잡으려는 요구이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려는 미국에 대한 우리 민족의 경고”라면서 “노 당선자가 이런 국민들의 분노 및 힘을 배경으로 한·미,남북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차용호(車庸鎬·29)씨는 “북핵문제는 우리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가장 첨예한 문제인 만큼 노 당선자는 기존 한·미 관계의 틀을 유지하되당사자인 우리가 주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국민들을 믿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처음의 원칙을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외교력을 통해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남북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최현진(崔鉉鎭·32) 간사는 “북핵 개발 파문의발단과 전개과정을 보면 북한과 대화를 기피한 채 위기로만 몰고 가려는 미국의 태도가 위험수위를 넘었다.”면서 “미 의회와 언론 등에서도 미국의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차기 정부는 더욱 외교력을 키워 국제사회의 양심적 세력들이 미국을 견제,한반도의 평화를 이끌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이수정(李守禎·21)씨는 “6·15선언의 근본정신을 한반도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라면서 “당선자가 6·15선언을 기준삼는다면 북한과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가교 역할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에서는 정치적 문제와 별개로 인도적 차원의 대북 지원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녹색연합 김타균(金他均·35) 정책실장은 “남측이 중심이 돼 국제사회의 대북 식량지원 등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지금 당장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 ***'4050' 생각은 “이념 지상주의가 갖는 위험성을 노무현 당선자가 냉철하게알아야 하는데,걱정이다.” 서울 강동구에서 정형외과를 운영하는 김모(56) 원장은 20,30대 층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인터넷의 힘으로 승리한 노 당선자가 향후에도 이 여론에 의지해 국정을 운영할지가 우려된다고 말했다.김씨는 “20,30대가 국제사회 움직임 등 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하지만,그 정보 자체가 편협되고 경직된 것일 수 있는 만큼 국익을 위한 정책 연결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한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과 관련,SOFA 개정과 부시 대통령에 대한직접 공개사과 요구가 계속되는데 대해서도 이들은 우려한다.지나친 요구가주한미군 철수론으로 이어지고,미국 내의 반한 감정이 대두될지가 걱정인 것이다.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유모(42)씨는 “한·미간 좀더 평등한 관계를 정립해나가야 함은 옳지만,현재처럼 시위가 계속되는 것은 무리한 느낌이 있다.”면서,양국간 현안 협상은 일종의 ‘게임’인데 최근 상황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걱정했다.그는 월드컵에서 우리 팀을 응원하는 것과,정부간 협상 테이블의 측면을 압박하는 대규모 군중시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또 “우리 최대 무역 수출시장인 ‘미국’이라는 실체에 대해 냉정해져야 한다.”면서 “길가던 주한미군을 테러하는 등의 행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이를 미측의 조작이라는 주장이 인터넷에 광범하게 유포되는 것자체가 큰 문제”라고 말했다.그러면서 노 당선자의 상황인식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노 당선자에 대한 우려사항 중 하나는 당선자 외교·안보팀의 진용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고,상당부분 재야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특히여소야대 정국에서 노 당선자가 장외의 힘을 바탕으로 정책을 완수하려 할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있다. 대북 문제와 관련,기성 세대가 우려하는 것은 북한에 대한 인식 문제다.군사적인 남북간 신뢰구축이 전혀 안 이뤄진 상황에서 젊은 세대들이 북한을‘선량한 우리 동포’로만 인식한다는 점이다.북·미간 갈등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남북간 교류·협력을 미국이 방해하는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동작구 김영춘(52·개인사업)씨는 “북한 핵 문제는 우리의 생존과 직면한 문제인데,어쩌다 남의 문제로 여기게 됐는지 모르겠다.”면서 “한반도비핵화 선언 위반에 대한 명확한 입장 해명이 있고 난 다음에 대북 지원이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전문가 해법 이번 대선을 통해 드러난 가장 큰 쟁점이 아마도 대미관계와 남북관계를어떻게 풀어나가느냐 하는 문제였을 것이다.비교적 진보적인 젊은 세대는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과 평등한 한·미 관계를 주장했고,중년 및 노년세대는 북한의 핵개발로 인한 국제적 긴장상황에서 한·미동맹의 훼손을 우려했다. 이러한 두 가지 서로 대립적인 듯한 견해와 주장들을 동시에 아우르는 길은 어떻게 모색되어야 하는 것일까.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미관계의 오늘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진 촛불시위는 물론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과 그후에 미군 당국 측에서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가 한국인의 자존심에 상처를주어 촉발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인 원인의 배후에는 두 가지의 구조적인 원인이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한반도가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현실과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간격이다.우리 사회의 젊은층들은 대부분 대북 포용정책의 지지자들이고,한반도가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탈냉전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한다.그런데 그들의 눈에 비치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너무 냉전·대결적이고,그래서 남북관계까지 꼬이고 있다고 생각한다.결국 노무현정부의 과제는 이러한 격차,즉 한반도 탈냉전화의 당위적 현실과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의 간격을 외교를 통해 좁히는 일일 것이다. 두번째 구조적 원인은 한국정치의 민주화이다.1987년 이후 한국정치는 급속도로 민주화되어 왔다.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은 한국정치가 민주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는 과거 권위주의시대 때의 한·미관계와 별다를 것 없는 평등하지 못한 한·미관계라고 느낀다. 한국의 국민들은 대통령 아들들을 이미 세 명씩이나 감옥에 집어넣을 정도로 민주적 정치의식을 갖게 되었다.그러한 그들이 미군 관련 문제가 온당치못하게 처리될 때 그것을 안보문제라는 이유로 더 이상 눈감고 있지 않을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동안 중년,노년층의 보수적 입장에서는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주한미군과 관련된 문제는 안보문제니까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다.그러나 이제 성공적인 민주화의 역설적인 결과로 그러한 금기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먼저 부시 행정부와 미국의 국민들이 이처럼 구조적으로 변화된 한국의 정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젊은세대가 이번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킨 주역이고,그들이 한반도의 평화적 탈냉전화를 원하고 있으며,민주정부 대 민주정부의 보다 대등하고 성숙한 한·미 관계를 원하고 있다는 구조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유도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 선거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미국의 보수적 정책 결정자들과의다각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해 이같은 한국사회의 변화를 정확히 설명하고 이해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이것이 젊은 계층의 반미감정도 다스리고 한·미관계도 한 차원 높여나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대신 우리 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국민들에게 지금 이 시점에서 한·미동맹과 미군의 주둔이 우리의 국가이익과 전략적 관점에서 왜 필요한지 설명해 주어야 한다.우리가 남북간에 신뢰와 평화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나아가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북간에는 아직도 위험이 존재하고 있고,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아직 남북간에 완전한 평화가 왔다고 믿지 않는다.따라서 이 같은 절반의 평화,절반의 전쟁 상황에서 우리가 필요로 해서 주한미군이 안전판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점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 내부의 중년,노년 보수층의 우려를 잠재워 줘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대간 갈등은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이행해가는 전환기적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미래에 대해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되 그것을 달성할 방안들을 현실적이면서도 신중하게모색해나갈 때 한·미관계를 둘러싼 갈등의 해법들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 당선자 신분과 인수위 구성 안팎/경호등 대통령과 비슷한 예우

    대통령 당선자는 20일 행정자치부 장관으로부터 정부의 행정 일반과 재무현황,당선자 예우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구성 등에 관한 보고를 받는다. 행자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설치에 관한 대통령령’안을 오는 24일 국무회의에 상정할 예정이다. ◆당선자 신분과 예우 새 대통령 당선자는 내년 2월25일까지 두달여간 ‘예비 대통령’으로서 현직 대통령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는다.다만 대통령경호실법에 따른 경호규정이외 당선자에 대한 예우를 종합적으로 명시한 법 규정은 없다. 당선자는 인수위가 구성되면 정부 부처별로 현안 파악에 나선다.그러나 내년 2월25일까지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국정에 대한 최고 권한과 책임을 지기 때문에 당선자가 국무회의 등 공식회의에 참여하는 등 국정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다.다만 인수과정에서 현 대통령과 협의와 조율을 할 수는 있다. 당선자는 숙소로 현 사저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정부가 제공하는 임시 거처에 머물 수도 있다.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은 경호상 편의를 위해 당선 한 달여 뒤 연희동 자택에서 삼청동 안가로 이사했지만,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취임 때까지 상도동 사저에 머물렀고,김대중 대통령은 일산 사저와정부의 임시 거처를 병행해 사용했다. 당선자는 대통령경호실법에 따라 대통령에 준하는 경호를 받는다.중앙선관위가 당선을 확정하면 ‘방탄 승용차’를 제공받으며 청와대 경호실 직원이 경찰과 함께 자택 경호를 맡고 당선자의 외부활동 때는 밀착경호를 한다.당선자의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도 경호대상이다. 한편 총리인사청문회가 한 달여 정도 걸리는 점 때문에 당선자에게 총리지명권 등 실질적 권한을 미리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앞으로 당선자 예우에 관한 법률의 입법화 논의가 본격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인수위 구성 전망 정부는 인수위에 예산과 인력을 지원한다.하지만 인수위의 규모는 당선자측이 정하도록 설치령에 규정되기 때문에 지원 예산과 인력은 가변적이다. 인수위는 지난 1987년 13대 대선 직후 최초로 구성된 이후 97년 15대 대선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구성됐다.13,14대 대선 때는인수위가 당선 이듬해에 구성됐지만 15대에는 IMF의 긴급 상황이어서 12월26일 출범했다. 행자부는 현재 인수위 구성과 활동에 대한 보고서 초안을 마련해 놓은 상태다.초안에는 정부의 조직·기능·예산 등 현황 파악을 비롯해 ▲정부의 인적·물적 자원에 대한 관리계획 수립 ▲국가 주요정책의 분석 및 수립 ▲대통령 취임행사의 준비 등이 포함됐다. 97년 15대 인수위의 경우 위원장실,대변인실,행정실을 비롯해 정책,통일·외교·안보,정무,경제Ⅰ,경제Ⅱ,사회·문화 등 6개 분과위원회를 두었는데이번에도 비슷한 조직으로 구성될 것으로 보인다. 인원은 위원장을 포함해 위원 25명,실장 1명,전문위원 63명,행정관 62명,실무요원 57명 등 총 208명으로 구성됐었다.이중 전문위원과 행정관은 분과별로 관련부처 공무원과 정당에서 파견된 인력으로,실무요원과 기타 직원은 파견 공무원으로 채워진다. 15대 인수위는 운영예산 5억 3161만원과 특별활동예산 2억 1832억원을 포함해 총 7억 4993억원을 사용했다.이번에도 10억원 안팎의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인수위의 설치장소도 관심거리다.13대 때는 한국금융연수원에 입주했고 14대 여의도 새서울주택건설빌딩,15대 교육징계심사위원회 건물을 사용했다.이번에는 최근 문을 연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별관에 입주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종락기자 jrlee@
  • 선택2002정치인 노무현-청문회 스타서 지역통합 기수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는 정치가로서 냉정한 승부사로 비쳐졌다.고비고비마다 특유의 승부수를 던져 유권자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고,이런승부사기질이 가장 돋보인 순간은 지난 11월 국민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와의 후보단일화 과정 때 불리한 조건들을 차례로 모두 수용,마침내 단일후보로 결정될 때로 꼽힌다. 노무현은 이번 대선승리의 원동력이 된 ‘시대정신’을 집요할 정도로 추구했다는 평도 받는다.1990년 3당 합당행을 거부하는 것을 기폭제로 해 이후정치역정 내내 ‘지역통합’‘3김청산’이란 시대정신을 추구했다고 사석에서 회고하곤 했다.결국 부산에서 네번이나 떨어지며 지역통합을 외친 그를위해 2000년 총선 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란 정치인 사상 첫 팬클럽이 탄생한다.노사모와 함께 지역통합이란 시대정신을 추구,맨몸으로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뒤 본선서도 바람으로 거대한 조직을 쓰러뜨렸다. ◆청문회 스타로 등장 노 당선자의 정치인 생활은 15년째이지만 국회의원으로 있던 기간은 5년10개월에 불과하다.88년 13대 총선 이후 줄곧 출마했던 점을 감안해보면 영광의 기간이 너무 짧았다.13,14,15,16대 총선과 한번의 국회의원 보궐선거,부산시장 선거 등 여섯번 출마해 두번만 당선됐다.하지만 기회포착엔 능했다.그는 첫번째로 찾아온 기회인 1988년 청문회를 놀라운 감각으로 활용했다.그해 11월7일부터 9일까지 열린 5공 비리 청문회에서 노무현은 당시 현대그룹정주영(鄭周永) 회장,장세동(張世東)전 안기부장과 안현태(安賢泰)전 청와대경호실장 등의 기를 꺾는 추궁으로 궁지로 모는 데 성공,자서전에서 표현한대로 하루만에 유명인사가 된다. 그러나 89년 3월 노 당선자는 “박해받는 민중들의 이익을 대변해 보겠다고 국회에 들어왔지만 정부·여당은 광주·5공 특위의 증인 출석을 방해하고노동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키로 하는 등 국회를 모욕했다.”면서의원직 사퇴후 잠적해 버린다.하지만 노무현은 당 총재였던 김영삼(金泳三·YS)이 자신의 부인과 형님을 상도동 자택으로 불러 간곡히 철회를 권유해오자 의원직사퇴 의지를 접는다. 노무현은 그해 12월31일엔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全斗煥)전 대통령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의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라고 증언하자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명패를 던졌고 이로 인해 청문회는 무산됐다.노무현은 그러나 후일 “전씨에게 명패를 던진 게 아니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이후 과격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계기가 된다. ◆짧은 영광,긴 가시밭길 90년 1월 노무현은 정치인생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한다.민정당 노태우(盧泰愚)대통령과 YS,공화당 김종필(金鍾泌·JP)총재가 3당 합당을 통해 민자당을 창당하자 YS를 ‘변절자’라고 비난하면서 합류를 거부했다. 이른바 꼬마 민주당에 남은 노 당선자는 91년 김대중(金大中·DJ)총재가 이끄는 평민당과의 야권 통합에 참여했고,통합민주당의 대변인이 된다.물론 이때도 그는 대의원이 호남일색이라며 10억원 가까이 든 전당대회를 관철시켜동교동계 인사들로부터 “꼬장꼬장하다.”는 평을 들었고,이들과 오랜기간불편한 관계를 유지한다.물론 DJ와 관계도 썩 좋지 않게 된다. 특히 노무현이 YS와 헤어진 대가는 혹독했다.부산에서 92년 14대 총선,95년 부산시장 선거에 거푸 도전했지만 거대한 지역벽만 실감했다. ◆DJ와 애증의 세월 96년 총선 직전 DJ가 통합민주당을 깨고 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노 당선자는“신당창당은 전근대적인 정치행태를 답습하는 것일 뿐”이라고 DJ를 비판하고 지역주의타파와 3김 청산을 외치며 왜소해진 민주당에 남는다. 노무현은 이때부터 지역주의 타파와 3김 청산이란 ‘시대정신’을 추구하겠다면서 대통령의 꿈을 가슴속에 품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97년 3월에는노무현이 김정길(金正吉)·이철(李哲)등과 함께 서울 강남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고깃집을 낸 뒤 대통령 출마 얘기가 거론됐다고 한다. 특히 노무현은 그해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인제(李仁濟)가 국민신당을 창당,출마하자 “이인제가 출마하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야권 통합을명분으로 그해말 DJ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해 흐지부지된다. ◆커가는 대권의꿈 노무현은 97년 연말 대선에서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곧바로 DJ를 연구하기 위해 한 책방에서 DJ 전집을 모조리 구입한 다음 정독했다고 한다.본격적으로 대권의 꿈을 가다듬은 것이다.98년 별세한 어머니의 삼우제를 지내기위해 고향에 갔던 그는 친구들이 “와 호남당에 들어갔노.”라면서 걱정하자 “내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영남당 되는 거 아이가.다 뺏어 오면 된다 아이가.”라고 ‘천기’를 처음으로 누설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승부수가 처음으로 부각됐던 때는 2000년 16대 총선이다.그는 98년 7월 종로보궐선거에서 당선,앞날이 보장된 것처럼 보여졌지만 ‘지역통합’을 기치로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부산 북·강서을구 출마를 결단한다.물론 “어쩔 수 없어 부산으로 갔다.”는 이론도 있다.총선서 그는 ‘차기대권에 대한 꿈’을 제시하면서 선전했지만 역시 지역감정의 벽을 못넘는다. 하지만 이게 계기가 돼 이후에 DJ는 노무현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줬고,그의지역통합 추구 투혼에 감명받은 인사들을 중심으로 노사모가 조직돼 대권꿈의 최첨병 역할을 해낸다.폭풍이 휩쓸고 간 거친 땅에 희망의 새싹이 돋아난 형국이었다고나 할까. 부산에서 ‘장렬히’ 떨어진 그에게 DJ는 2000년 8월 해양수산부장관이라는 공직경험을 선물한다.그는 이후 직원들과 격의없고 파격적인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 일화를 양산해내며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다. ◆피눈물로 보낸 한해,환희 속 대미 장식 노무현은 세간의 예상을 비웃으며 지난 4월27일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된다.하지만 이후엔 후보낙마 위기를 여러차례 맞으며 피눈물의 가시밭길을걷는다.오죽했으면 노무현이 지난 11월25일 단일후보로 확정된 뒤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대표가 “노 후보는 여러차례 우리당 후보가 됐지만 이번은 진짜다.”라고 말했을까. 실제로 그는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뒤 YS를 찾아간 뒤 여론의 무차별 난타를 당했다.6·13지방선거 참패 뒤엔 당에서 만신창이가 된 후 후보재신임을받는다.이런저런 설화로 인해 많이 두들겨 맞기도 했다.8·8재보선에서 민주당이 참패,후보사퇴 압력이란 수모도 겪는다. 급기야 재경선용의를 밝히지만 도전자가 없어 무산되고 이후 반노(反盧)·비노(非盧)세력에 공격당해 상처투성이가 됐다가 후보단일화란 일생일대의승부수로 단일후보를 쟁취,일거에 국면을 반전시켜 환희를 맛보게 됐다. 이춘규기자 taein@ ★노무현 당선자 연표 1946년 9월1일 경남 김해 출생 59년 경남 김해 진영 대창초등학교 졸업(2월) 63년 경남 김해 진영중학교 졸업(2월) 66년 부산상고 졸업(2월) 68년 육군 입대 71년 육군 만기제대(상병-을지부대) 73년 권양숙 여사와 결혼 75년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 부임(9월) 78년 변호사 개업(5월) 81년 부림사건변론 계기 인권변호사로 전환 84년 부산 공해문제연구소 이사 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 집행위원장(4월) 87년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9월) 87년 변호사업무 정지처분(11월) 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통일민주당 부산 동구) 88년 5공비리 특별위원회 활동(청문회 스타로 급부상),국회 노동위원회 간사90년 3당합당 거부,민주당 창당 참여 90년 7월 민자당의 법률안 날치기 통과에 항의,이해찬.김정길.이철 의원과함께 의원직 사퇴서 제출 91년 신민-민주 야권통합협상 대표,통합민주당 민생위원장,대변인 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민주당 부산 동구),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청년특위위원장 93년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최연소),부산시 지부장,당무위원 95년 6월 통합민주당 부총재,민선 부산시장 선거 출마,낙선 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민주당 서울 종로),국민통합추진위원회 상임집행위원 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대선직전) 98년 제15대 국회의원 종로보궐선거 당선(7월),국회 예결위원,교육위원 99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경남도지부장 2000년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16대 국회의원 낙선 2000년 8월~2001년 3월 해양수산부 장관 2001년 9월 부산후원회에서 당 대통령후보 경선출마선언 2001년 11월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2002년 2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입후보 2002년 4월27일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당선 2002년 8월8일 새천년민주당 재·보선 참패,민주당 내분 가열 2002년 9월30일 새천년민주당 대통령선거대책위 출범 2002년 11월25일 새천년민주당·국민통합21 대통령단일후보로 확정 2002년 11월27일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등록 2002년 12월13일 정몽준통합21대표와공동유세시작 2002년 12월19일 제16대 대통령 당선 확정
  • 노무현.이회창 후보 표정

    ◆노무현 후보 민주당 노무현(盧武鉉)후보는 19일 밤 당선이 확정되자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 부인 권양숙여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긴장과 피곤에 지쳐보였지만 표정은 한결 여유로웠다. 노후보는 당사 앞에 설치된 대형 이동 전광판을 지켜보며 장외응원전을 펼치던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감사의 뜻을 표시한 뒤 당사 2층 기자회견장에서 '대(對)국민메시지'를 낭독했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제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주신 민주당 당원동지 여러분과 국민들께 거듭 감사드린다””면서 “”앞으로 저를 지지한 분들만의 대통령이 아닌,모든 국민들의 대통령으로서 심부름꾼이 될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린다””고 다집했다. 그는 이어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 의원들을 향해 “”앞으로 대화와 타협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도록 대화를 제의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청하겠다””면서 “”항상 국민을 위해 마음을 모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노 후보는 곧이어 4층에 마련된 개표상황실에 들러 한화갑 대표와 정대철 선대위원장 등 선대위 본부장단, 당직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고마움을 표시했다.노후보는 “”그동안 당을 사랑하시는 분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애간장이 많이 탔는데 모두 제 탓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제 지난 일은 옛날일로 생각하고 새롭게 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또, “”앞으로 모든 것, 많은 것을 배우고 대통령이 된 만큼 무겁게 한발짝한발짝 가겠다””면서 “”마음을 모으고 지혜를 빌려달라””고 덧붙였다. 노후보는 이어 여의도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실과 개혁국민정당 당사를 탖아가 당직자들을 격려했다.특히 개혁국민정당에서는 유시민 대표와 김원웅 집행위원 등과 포옹을 하며 당선의 감격을 함께 나눴다.노 후보는 인사말에서 “”87년 아스팔트위에서 뛰었던 6월 항쟁의 세대가 주역이 될 때 우리 사회가 바뀔수 있다””면서 “”이제 논리와 이념,체계도 좋지만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날 개혁 국민정당 당사 앞에는 500여명의 지지자들이 모여 촛불을 켜들고 노래를 부르고 “”노무현대통령””을 연호하며 축제분위기를 연출했다. ◆이회창 후보 하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는 19일 밤 11시쯤 여의도 당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향후 개인의 진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그저 '당의 진로와 저 자신의 문제는 20일쯤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으면 한다””고만 했을 뿐이다. 그는 97년 패배했을 때는 한동안 휴가를 다녀온 뒤 명예총재로 물러앉았다.그러고는 8개월여만에 전당대회를 통해 다시 총재직에 올랐다. 이번에는 정계은퇴를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다.이후보 역시 그간 이번이 마지막 출마임을 시사하는 말들을 여러차례 해왔다. 한 당직자는 “”이후보의 품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은퇴할 것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두번씩이나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다시 차기 대권에 연연해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어던 이들은 그가 아예 당을 떠날 가능성도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후보가 어떤 식으로든 당을 정리할 때까지는 한나라당을 떠나지는 않을 것””으로도 보고 있다.이 후보가 당장 당을 떠날때는 정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당의 버팀목이 사라지는 것이어서 한나라당이 맞게 될 공황상태는 훨씬 심각할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한나라당이 비록 과반의석을 가진 거대정당이지만 또다시 5년을 야당으로 보낸다는 생각을 하면 당내 구성원들의 동요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따라서 이 후보는 내년 5월 전당대회까지 당과의 끈을 놓지 않고 정치적 재기를 모색할 것이라는 분석도 없지는 않다. 한편 이회창 후보는 이어 밤 11시5분께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에게 전화를 걸어 당선을 축하했다. 이후보는 이날 통화에서 노 당선자에게 “”축하드린다””면서 “”좋은 대통령이 돼 달라””고 말했다고 남경필(南景弼)대변인이 전했다. 이에 대해 노 당선자는 “”나는 절반의 대통령에 불과하며 나머지 절반은 이후보이므로 많은 도움을 받고 싶다””고 화답했고,이후보는 다시 “”아무리 절반이라고 해도 전국민의 대통령이니 좋은 대통령이 돼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이지운기자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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