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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개헌과 단일화/이목희 논설위원

    얼마전 정치권에서 ‘바둑논쟁’이 벌어졌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9급 짜리 세명이 힘을 합친다고 1급이 되겠느냐.”고 말한 게 빌미가 되었다. 경제정책을 얘기한 것이었으나 범여권 후보단일화 비판으로 비쳤다. 범여권 후보 세명이 단일화해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하지만 정치, 특히 대선판은 패거리 다툼이다. 목소리 큰 집단이 주목받는다. 바둑 9급 짜리 여러 명이 박박 대들면 9단 프로기사가 밀릴 수 있다. 이전 선거에서 절대 강자였던 대선후보들이 작은 세력까지 영입하려고 물심양면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이 후보는 지지율 고공행진에 방심했던 것일까. 외연확대는커녕 이회창 전 총재, 박근혜 전 대표 등 내부가 분열하는 위기를 맞고 있다. 독야청청 앞서가던 이명박 후보가 연대와 단일화에 나서야 할 상황이 새로 만들어졌다. 한나라당의 분열에도 불구, 오히려 지지도가 내려앉은 범여권 대선주자들에게도 후보단일화는 발등의 불이다. 어떤 식으로든 힘을 모으지 않으면 군소후보로 위상이 고착된다. 이번 대선 역시 여야 모두 정치세력 연합에 의해 결과가 좌우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후보단일화가 이뤄지려면 누군가 양보해야 한다. 대권도전을 포기하는 양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단한 반대급부가 필요하다. 대권과 당권 분리로 공천권 등 당내 지분을 대폭 넘겨주는 것은 고전적인 연대다.1987년 직선제 개헌 후에는 헌법을 고쳐 국정운영권을 나누거나, 차기 대통령 혹은 내각제총리로 밀어주겠다는 연정·연합 약속이 수시로 이뤄지고 있다. 공개적인 합의문으로 미진하면 비밀각서가 오가기도 한다. 후보단일화를 위한 개헌·연정 포문은 범여권에서 먼저 열었다.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가 대통령 중임제 개헌과 연정을 단일화 의제로 제안했고,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측이 받을 태세다. 한나라당은 아직 대권·당권 분리 논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회창 전 총재의 지지율이 만만치 않게 유지되면 후보단일화 요구가 커질 것이다. 조만간 분권형 국정운영과 권력구조개편 개헌을 통한 지분나누기 논의가 본격화할 여지가 다분하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李 실용보수 vs 昌 원조보수

    李 실용보수 vs 昌 원조보수

    17대 대선이 사상 처음으로 보수진영간 대결구도로 흘러가는 양상이다.44일을 남겨둔 시점에서 지지율 1위인 이명박(얼굴 왼쪽) 한나라당 대선후보에 이어 이회창(오른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제치고 당당히 2위로 질주하고 있다. 실용주의를 앞세운 이 후보가 ‘실용보수’라면 이 전 총재는 ‘원조보수’라 할 수 있다.4일 이 후보는 이 전 총재 출마설로 지지율이 계속 하락하자 측근들을 동원, 이 전 총재측과 잇단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이재오, 昌 자택 한밤 방문… 면담 불발 이날 밤 이재오 최고위원은 이 전 총재의 서빙고동 자택으로 갑자기 찾아와 “당 최고위원 입장에서 이 전 총재의 말을 들어보려고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총재측은 지방 출장을 이유로 면담을 기피하고 있다. 이 전 총재는 지난 2일 집을 나가 경기도 외곽에서 장고 중이며 5일 귀가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흥주 특보는 이 전 총재 출마와 관련,“아주 새로이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로 지지층이 늘고 있음을 시사한 뒤,“오늘이나 내일 이 전 총재가 결심을 주면 전광석화와 같이 (대국민 입장발표 장소를) 구할 것”이라고 말해, 이 전 총재의 입장 발표가 이르면 6·7일로 빨라질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후보측 한 핵심인사는 이와 관련,“강재섭 대표가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나 이 전 총재의 출마를 만류할 방안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며 박 전 대표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은 이같은 이 후보측 움직임에 진정성이 부족하다며 시큰둥한 반응이다. ●李 전 총재 이르면 내일 입장 발표 정 후보측에서도 이 전 총재 출마로 이번 대선전이 보수대결 구도로 흘러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4일 대통합신당의 가족행복위원회 출범식에서는 이 전 총재와 이 후보를 각각 “차떼기의 추억”과 “모래성 위의 국민성공”이라는 말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편 이 전 총재는 다소 느긋한 상황이다. 지난 3일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에 이어 정근모 명지대 총장이 후보로 나선 참주인연합도 5일 이 전 총재에게 보수대연합을 제안할 예정이어서 출마 초읽기에 들어간 이 전 총재의 행보가 탄력을 받고 있다. 올 대선에서의 보수 우위 현상은 1987년 이후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보수화 기운이 사회 전반적인 트렌드로 자리잡았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그간 선거 당락을 좌우했던 30∼40대 유권자들이 상당수 보수화됐다고 볼 수 있다. 정치평론가 김윤철씨는 “이른바 진보·개혁진영으로 분류돼 온 범여권 후보들의 낮은 지지율은 이같은 정치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유권자들의 지지성향은 새로운 프레임을 요구하고 있다. 미래권력의 모델을 이념과 노선보다는 ‘국익’ 중심의 실용적 관점에서 찾고 있다. 정치 컨설턴트 이경헌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 중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33%대라는 정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념과 노선 차이와는 별개의 새로운 트렌드인 셈이다. 이쯤되면 이번 대선에서 보수대연합에 맞서는 진보대연합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예단은 이르다. 공교롭게도 이 전 총재의 출마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정통 보수진영의 대변자를 가리는 과정에서 보수 진영이 분열될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범여권 내부적으로는 후보단일화 이외에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시사평론가 유창선씨는 “후보 개인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미 지지율로 드러났다. 빨리 진영을 짜고 최소한 이번주에는 단일화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고 충고했다. 구혜영 김지훈기자 koohy@seoul.co.kr
  • ‘심야토론’ 진행 정관용이 말하는 토론문화

    ‘심야토론’ 진행 정관용이 말하는 토론문화

    대통령선거가 5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바쁜 곳은 정치계뿐만이 아니다. 방송 토론 프로그램들도 연일 촉각을 곤두세우고 대선 후보와 시청자들을 만나느라 여념이 없다. 이런 시점에 KBS 1TV ‘생방송 심야토론’이 방송 20주년을 맞은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국내 최초의 정규 토론프로그램으로 1987년 10월17일 첫 방송을 시작한 ‘생방송 심야토론’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와 궤적을 함께해 왔다. 지난 24일 오후 2004년 이후 4년째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는 정관용씨를 KBS 본관 시청자광장에서 만나 심야토론 20주년의 의미와 우리나라 토론문화 등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요즘은 가는 곳마다 대선에 관한 살아있는 촌평들을 들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보다 검증된 공론의 장을 갈구하는 것 같습니다. 방송 토론은 바로 이같은 욕구를 충족시키지요.” 시사평론가 정관용(45)씨는 이렇게 서두를 뗐다. 현재 라디오 ‘KBS 열린 토론’(월∼토요일)과 KBS 1TV ‘생방송 심야토론’(일요일) 두 가지를 맡고 있는 정씨.1년 365일 그의 목소리는 전파를 탄다. “1996년에 처음으로 SBS 라디오 뉴스대행진 MC를 맡았으니, 시사프로 방송진행자 생활만 벌써 11년째네요. 그 중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는 2003년 봄부터 맡은 KBS 일요진단이 처음이었고요.” 라디오와 TV를 오가면서 1500여회에 달하는 토론 진행을 맡은 그는 자타공인 ‘대한민국에서 토론 사회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이다. 그런 활동을 인정받아 정씨는 올해 34회 한국방송대상 진행자상,2007년 한국PD협회 라디오 진행자상을 한꺼번에 수상하기도 했다. “바람직한 토론은 3박자를 갖춰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자기 논지를 일목요연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엔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하죠. 논의 흐름에 잘 맞춰서 자기 논리를 전개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하지만 우리의 토론문화는 아직 갈길이 멀었다고 진단한다. 국정감사 때만 되면 국회의원 사이에 막말과 멱살잡이가 오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상대의 의견은 무조건 면박부터 주고 보는 습성을 버려야 합니다.” 그는 언론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불과 20년 사이 민주주의와 맥을 같이하며 언론의 정치적 자유·비판 기능·사회감시 기능 등도 급격히 향상했지만, 내적인 깊이를 갖추는 데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이제는 언론이 질적으로 더 성숙해야 한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기도 하다. 방송 진행 외에도 경희대와 동국대에서 강의를 맡고 있고, 전국의 부장검사를 대상으로 하는 ‘설득스피치의 이론과 실습’ 교육에도 강사로 나선다. 네이버 이용자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인터넷 칼럼도 쓰고 있다. 혹시 지금까지 많은 토론을 거치면서 좋아하는 패널이나 싫어하는 패널이 있는지 물어봤다. “저도 사람인 이상 없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패널들이 저에게는 다 소중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도 들을 수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좋아하는 언론 매체가 무엇이냐, 대선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대신 허를 찌르는 대답으로 우문에 대해 현답을 선사했다. “토론의 중립성과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시사 현안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은 사석에서도 절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의견을 표명할 ‘나만의 언론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웃음)” 어쩌면 언론 자유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다고 말할 수 있는 토론 프로그램의 사회자에게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는 이조차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앞으로 한 20년만 더 토론 진행을 맡고 싶습니다. 시사프로그램의 성숙을 돕는 동시에 그 속에서 저 또한 더 성숙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글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朴대통령 묵시적 승인”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朴대통령 묵시적 승인”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DJ)납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국가정보원 전신) 지시로 실행됐고, 사건 이후 중정이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24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6권짜리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진실위의 보고서는 ‘DJ 납치사건’과 관련, 증언이 엇갈리고, 중정이 작성한 핵심자료인 ‘KT공작계획서’가 발견되지 않아 의혹 해소에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진실위는 그럼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 이유로 이 전 부장이 공작추진에 반대하는 이철희 정보차장보에게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며 역정을 냈고, 주일대사관 김 모 공사가 “박 대통령의 결재를 확인하기 전에는 공작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버티다 곧 적극 협조했다는 등의 정황을 들었다. 정황 제시로 결론을 내린 것은 당시 박 대통령의 불신을 받던 이씨의 과잉충성에 의한 단독 범행이라는 주장과 유신체제하에서 박 대통령이 모르게 중대한 공작이 진행될 수 없다는 증언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진실위는 어느 쪽 주장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자 “박 대통령의 사전인지 여부 문제와는 별도로 대통령직속기관인 중정이 납치를 실행하고 사후 은폐까지 기도한 사실에 비추어 통치권자로서의 정치적·법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납치사건의 목표가 DJ의 ‘단순납치’인지,‘살해’였는지에 대해서는 “공작계획 단계에서 살해안이 논의됐지만 납치 실행단계에서 단순납치 방안이 확정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양쪽의 증언을 다 수렴한, 중간적인 입장을 취했다. 과거사위는 또 박정희 정권이 중정을 통해 제5대 대선(1963년 10월)과 7대 대선(71년 4월), 제7대 총선(67년 6월) 등에 개입했다고 밝혔다.10월 유신으로 가는 마지막 대통령 직선제 선거였던 제7대 대선에서 중정은 ‘풍년사업’이라는 공작명 아래 김대중 후보의 낙선을 위해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7년 KAL기 폭파사건에 대해서는 이 사건의 실체가 북한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을 확인했다. 진실위는 그러나 “당시 안기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협이 되는 사건인데도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 검증 없이 서둘러 발표함으로써 수사결과에 일부 오류가 발생했고, 이것이 (기획 조작 등)불필요한 의혹을 유발하는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노동당, 민주당은 DJ납치사건과 관련,“당시 정권의 후예인 한나라당이 공식사과하고 현 정부 차원의 사과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역사적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면밀한 사실 확인이 더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단일화의 추억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단일화의 추억

    우리 정치에서 후보 단일화의 유혹은 쉽게 떨치기가 어렵다. 대선 구도를 일거에 뒤집는 마력이 있다고 믿는 걸까. 일각에서는 무조건 대선 승리를 위한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한다. 올해는 과거 어느 때보다 이런 징후가 더 심하다. 원내 제1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후보가 결정되기 전부터 범여권의 후보단일화는 더 큰 어젠다였다. 까닭에 신당의 대선후보 경선은 준플레이오프 정도로 여겨졌다. 경선의 낮은 투표율도 이런 측면이 감안된 것일 게다. 후보 단일화는 코끝을 찡하게 하는 노스탤지어일까, 아니면 때 되면 되풀이되는 타령일까. 단일화 문제가 주요 이슈로 처음 등장한 때는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영삼(YS)·김대중(DJ) 두 후보는 단일화를 바라는 민주진영의 여망을 외면하고 각자 출마, 노태우 정권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과는 실패였지만 이때가 단일화 논의의 시발점이다. 92년 YS의 대선 승리는 3당 합당 때문이다.3당 합당 역시 보수세력의 통합을 거친 후보 단일화이다.97년 DJ의 국민의 정부 탄생은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의 DJP공조에 기인한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기치로 내건 선거 연합 성격의 단일화였다.2002년의 후보 단일화는 이전보다 드라마틱하다. 여론조사로 단일후보를 결정해서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는 이회창 대세론을 일거에 뒤엎고 보수세력의 정권탈환 의지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5년 후 단일화는 여지없이 대선 정국의 핫이슈가 되고 있다. 한데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정권 쟁취에만 지향점을 두는 기계적 단일화에 그치는 느낌이다. 단일화 세력이 정권을 잡아야 하는 당위성이나 역사성, 가치와 비전은 제쳐두고 오로지 반(反)한나라당과 ‘이명박 집권 저지’가 목표다. 이념과 가치의 공유 없는 단일화는 국민들에게 감흥을 주기 힘들다. 정당정치를 크게 왜곡하는 길이기도 하다. 또 그런 단일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지 않는다.DJP 공동정권 붕괴나 대선 전야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파기가 좋은 예다. 그럼에도 단일화에 목숨을 건다. 대선 이후 단일화 유지 여부는 뒷전이다. 이쯤 되면 단일화가 5년 주기로 나타나는 고질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권은 5년마다 단일화 홍역을 치르는 셈이다. 이번에는 단일화 대상이 많아졌고 단일화를 포장하는 수사(修辭)가 현란해졌다.‘문국현 신당’의 영향 탓이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도 가치 연대를 내세우며 단일화에 자락을 깔고 있다. 정동영·이인제·문국현 후보 저마다 지지율 제고에 혈안이지만, 올해 단일화 환경은 2002년과는 다른 점이 많다. 첫째, 단일화 효과가 보장되기 힘들다는 점이다. 당시 노무현과 정몽준의 지지율을 합치면 1위인 이회창을 앞질렀고,‘이회창 집권 저지’가 목표였지만 세대교체와 변화·개혁을 내세운 명분도 국민들에게 어필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세 사람의 지지율을 합쳐도 이명박의 절반가량밖에 안 된다. 내세울 명분도 마뜩하지 않다. 반복되는 단일화 논의에 국민들도 감흥을 덜 받는 것 같다. 총선이 곧바로 이어지는 정치일정은 그때와 사뭇 다르다. 단일화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다. 둘째, 지금은 전·현직 대통령의 개입을 비롯한 복잡한 양상으로 단일화 협상이 전개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그때와 다르다. 단일화가 쉽지 않은 이유다. 단일화의 성공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단순한 선거 연합이 아니라 핵심 가치 중심의 정책 연합이 되어야 한다. jthan@seoul.co.kr
  • “금산법 완화” vs“기업규제 유지”

    “금산법 완화” vs“기업규제 유지”

    대선 최대 이슈인 ‘경제’를 놓고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본격적인 선점 경쟁에 돌입했다. 이 후보와 정 후보는 18일 오후 서울 광장동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매일경제신문 주최 세계지식포럼 강연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경제 정책을 역설했다. 두 후보 모두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강조했지만 세부적인 실행방향에서는 차이점을 보였다. 정 후보가 ‘함께하는 성장’을 강조,‘분배’에 힘을 실었다면 이 후보는 ‘친시장·친기업 지도자’를 주장하며 ‘성장 중심’의 기조를 유지했다. 특히 금융정책인 ‘금융산업 분리법’ 규제 완화와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정책에서 이견을 드러냈다. 먼저 연설을 한 이 후보는 “1987년 민주화에서 이정표를 만들었듯이 ‘2008년 신발전체제’를 통해 세계일류 국가의 비전을 실현해야 한다.”며 기업 규제 완화와 ‘인재 대국’을 위한 특성화 교육을 주장했다. 이 후보는 ‘금산법’에 대해 “(정부는)너무나 경직적인 원칙을 갖고 있다.”면서 “산업자본의 참여를 원칙적으로 봉쇄할 필요는 없고 감독을 철저히 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완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 “정부 기능이 상실된 국책은행은 민영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해 집권시 금융분야에 대한 일대 개혁이 있을 것임을 시사, 주목됐다. 이 후보에 이어 연설에 나선 정 후보는 “투자 마인드가 살아날 수 있도록 기업가 정신을 북돋우겠다.”면서도 “공정경쟁을 위한 최소한의 규제는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의 기업규제 완화 정책이 가져올 문제점을 겨냥한 발언이다. 정 후보는 이어 “세계적 금융강국인 영국과 미국도 금산분리 원칙을 지키고 있다.”면서 “금융강국이 되려면 ‘정글 자본주의’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견제와 균형의 건강한 경쟁질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관 차이는 교육분야에서도 나타났다. 정 후보는 “자율형사립고 100개 등 300개 특별고교를 만드는 것은 고교 입시의 부활”이라며 이 후보의 특성화 고교 설립 정책을 비판했다. 특성화 고교 300개 육성을 주장한 바 있는 이 후보는 이날도 “고액의 등록금을 받는 대신 저소득층의 우수한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학의 학생선발 자율권과 함께 고교 교육의 다양화를 추구해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는 논리다. 정 후보는 이에 대해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는 입시지옥으로 변해 사교육비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반박 논리를 펼쳤다. 한편 이날 주최측이 두 후보의 ‘어색한 조우’를 막기 위해 30분 간격의 연설 시간을 배정했으나 두 사람은 행사장 입구에서 맞닥뜨렸다. “어이구, 나중에 봅시다.”라는 이 후보의 인사에 정 후보는 “건강 조심하십시오.”라고 짧게 답했다. 한상우 박창규기자 cacao@seoul.co.kr
  • 이인제 “신당 후보 아닌 내가 단일화 중심”

    이인제 “신당 후보 아닌 내가 단일화 중심”

    민주당 이인제 후보가 16일 고양 대화동 킨텍스에서 열린 17대 대통령 후보 최종 선출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대권 도전 3수’가 공식화된 것이다. 이 후보는 이날 대의원 현장 투표 및 우편 투표에서 유효득표 1259표 중 843표를 얻고 여론조사에서 56.8%(5158표로 환산)의 지지를 얻어 총누적득표 수 3만 4176표(56.4%)로 경선에서 1위를 차지, 압도적인 표 차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됐다. 김민석 후보는 누적 1만 4641표(24.2%)로 2위에 머물렀고 신국환·장상 후보는 각각 3175표(5.2%)와 2984표(4.9%)를 최종 기록했다. 이 후보는 수락 연설에서 “개혁세력 분열로 정권이 한나라당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고 계신 것을 잘 안다.”면서 “중도개혁 정권의 탄생을 위해 국민의 뜻을 받들 것”이라면서 후보 단일화 의지를 강조했다. 그는 “대통합민주신당은 시대에 뒤떨어진 노선과 가치를 추구하는 개혁으로 국정을 파탄에 몰아넣고 국민에게 실망과 분노만을 안겨주었다. 그런 신당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를 누를 수 있다고 누가 믿겠느냐.”며 자신이 단일화의 중심이 돼야 함을 주장했다. 향후 단일화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단일화 시기와 관련,“한나라당 후보를 이길 수 있는 후보한테 여론이 한 달 이내 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천 대표가 “11월 하순으로 최대한 늦추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대상은 일단 통합신당 정동영 후보다.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에 대해서는 “만나 본 적도 없고 정치적 실체를 잘 모르겠다. 국민들이 판단하실 것”이라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 후보도 통합신당 정동영 대선 후보와 마찬가지로 단일화에 앞서 당내 갈등 봉합이 우선이다.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이 조순형 후보가 사퇴로 이어지고 끝내 법정 싸움으로 비화됐기 때문이다. 4선 의원인 이 후보는 1948년 12월11일 충남 논산 연산면 송산리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아홉 살이 돼서야 들어갈 정도로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그는 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졸업할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사시 21회에 합격,83년까지 판사생활을 하고 이후 변호사로 활동했다.87년 정계에 입문,88년 경기도 안양갑구(현 안양만안)에 출마해 만 39세에 국회의원이 됐다. 문민정부 최연소 노동부 장관, 초대 민선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도지사 재직 중 일자리 증가 비율은 26%로 임창렬·손학규 전 지사보다 앞선다. 대선 도전은 97년,2002년에 이어 세 번째다. 한번은 본선에서, 한번은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번에는 압도적인 표 차로 민주당 대선 후보로 당선되면서 ‘경선 불복종’이라는 꼬리표 떼기의 첫 단계를 넘어섰다. 이날 수락연설에서는 “지난 20년의 정치 역정에서 국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들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다.”며 처음으로 경선 불복종에 대한 사과도 했다. 불명예를 완전히 씻고 고집스러운 이미지를 벗고 리더십과 추진력, 풍부한 경험, 정책에 대한 깊이 등 장점을 부각시켜 지지도를 인지도 못지않게 끌어올리는 것은 대선 주자로서 풀어야 할 숙제다. 고양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이용원 칼럼] 鄭·孫·李 세 후보, 죽어야 산다

    [이용원 칼럼] 鄭·孫·李 세 후보, 죽어야 산다

    유권자로서 또 기자로서 대통령선거를 여러차례 겪어봤지만 올해처럼 재미없는 대선은 정말 처음이다. 1987년 대선부터 되돌아보자. 군부정권의 후계자인 노태우와 민주화투쟁 지도자인 김영삼·김대중 후보 등 3명은 개표가 끝날 때까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승부를 벌였다. 1992년 대선은 김영삼·김대중 양김이 다시 맞붙는 빅 매치에, 정주영 현대그룹 총수가 가담해 박진감이 넘쳤다.5년 후에는 집권당의 후계자 다툼이 치열하더니, 여야 대표인 이회창·김대중에 범여 성향인 이인제 후보간 3파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지난번 대선에서는 노무현·이회창·정몽준 후보의 3자 대결에 막판 ‘단일화 변수’가 개입해 지지자들을 끝까지 조마조마하게 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어떠한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홀로 여론조사에서 50%대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고공비행할 뿐 그 대항마는 아직 보이질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 후보와 대적할 대표선수가 끝내 떠오르지 않아 이번 대선은 거인 하나에 여러 난쟁이가 뒤섞인 볼품없는 대결로 끝날지도 모른다. 만약 그리 된다면 그 책임은 일단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손학규·이해찬 세 경선후보가 져야 한다. 진보·개혁을 내세운 범여권의 통합체로 자처하는, 원내 제1당인 통합신당에서는 앞으로 경선이 계속될지조차 예상하기 힘들 만큼 이전투구가 벌어지고 있다. 손학규·이해찬 두 후보는 정동영 후보 측의 동원선거·돈선거를 규탄하며 경선일정 연기를 요구했고 정 후보 측은 그같은 요구에 당연히 반발했다. 지도부는 어제 ‘원샷 경선´을 결정했지만 근본적으로 위기를 수습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이같은 현실에서 정동영·손학규·이해찬 세 경선후보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신당 경선이 계속되건, 판이 깨지건 지금과 같은 흐름이 이어지면 그들 앞에 기다리는 건 공멸뿐이다. 경선이 무산돼 각자 대선에 나가면 군소후보로 전락할 테고, 이 추악한 경선에서 이겼다고 대선에 나가봐야 승리는커녕 참패의 덤터기만 뒤집어쓸 테니까 말이다. 대선 승패를 가름하는 계산법은 단순하다. 세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명박 대항마’로 자리잡으려면 먼저 경선에 패한 다른 두 후보의 지지자들을 흡수해야 한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바탕 위에, 이미 50%를 넘어선 이명박 후보 지지층 가운데 일부를 빼앗아 와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 후보에 대적할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밖에 없다. 경선 과정이 공정하고 아름답고 희망적이어서 당원은 물론이고 국민 일반에게 비전과 감동을 선사해야 한다. 그래서 세 후보에게 당부한다. 먼저 자신을 죽여라. 내가 대선에 나가야만 한다는 아집을 버리고 당과, 진보·개혁 세력을 살리는 데 주력하라. 정치권 일각에서 의심하듯, 경선 승리의 목적이 대선에 있지 않고 그 뒤에 전개될 당권 잡기에 있다면 그 무모한 꿈을 당장 버려라. 대선에서 참패한 후보에게 대표성을 부여할 만큼 진보·개혁 세력이 어리석지는 않다. 그에 앞서 대선에서 참패하면 통합신당은 공중분해되거나, 아니더라도 국민에게 철저히 외면당할 것이다. 거듭 세 경선후보에게 당부한다. 먼저 죽어라. 그래야 당신들은 진보·개혁 세력의 지도자로 되살아난다. 선거는 올해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내년에 총선이,5년 후엔 대선이 또 찾아온다. 이용원 수석 논설위원 ywyi@seoul.co.kr
  • 대권 3수…진보 터줏대감

    민주노동당의 17대 대선후보로 선출된 ‘창업주´ 권영길 후보는 조직력과 경륜으로 험난한 ‘경선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권 후보는 스스로를 민노당의 주춧돌이라고 평한다.1988년 언론노조 초대 위원장,1996년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2000년 민주노동당 초대 당 대표 등 그가 걸어온 길은 진보진영의 토대가 됐다. 그는 이번 만큼은 대선 승리가 목표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경선 기간 내내 ‘전략적 선택´을 강조했다. 심상정·노회찬 두 후보에 비해 출마 선언도 늦었지만 당 경선보다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대항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조직력·경륜으로 승리 이끌어 후보로 선출되자마자 100만 민중대회를 열어 강고한 진보대연합을 구축, 내년 총선까지 연계하겠다는 복안을 냈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와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쥐고 선명한 정책 대결로 승부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대권 삼수의 길은 만만찮다. 경선에서의 ‘조직력의 승리´가 오히려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경선에서 당내 최대 정파가 권 후보를 공개 지지한 탓에 심·노 후보의 ‘정파 담합´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아깝게 탈락한 심·노 후보에게 대선과 내년 총선에서의 역할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이들 지지자까지 규합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로 꼽혀진다. ●기자에서 노동운동가로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난 권 후보는 부인 강지연(64)씨와의 사이에 딸 혜원(38·미 코넬대 박사과정)씨, 아들 호근(37·건축가)·성근(35·번역가)씨를 뒀다. 서울신문 기자와 파리특파원(1980∼1987년)을 거쳐, 언론노조와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2002년 민노당 초대 당 대표를 역임했다.1997년(국민승리21)과 2002년 민노당 대선후보로 선출됐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하) ‘생활정치’ 꿈꾸는 20대 당원들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하) ‘생활정치’ 꿈꾸는 20대 당원들

    정당은 시민사회의 다양한 견해와 요구를 정치로 이어주는 민주주의의 생명줄이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정치학)는 저서 ‘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 “사회의 요구로부터 괴리된 정당체제를 개혁해 정치와 대중사회가 소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들은 권력자와 지역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고, 정당의 주인이어야 할 당원들은 표를 모으기 위한 동원용 도구에 불과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정당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각 정당에서 나오고 있다. 당원 요구를 묵살하는 기성 정당을 뛰어넘어 새 정당을 만들려는 실험도 계속되고 있다.‘생활정치’를 꿈꾸는 20대 젊은 당원들을 만나본 결과 한결같이 “소통이 원활한 정당을 원한다.”고 말했다. ●“보수도 개혁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중장년층의 지지를 받아온 한나라당은 요즘 대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이런 현상을 놓고 일각에서는 대학생들의 보수화를 우려하고 있으나 정작 한나라당 대학생 당원들은 “건강한 보수정당의 기틀을 우리가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백길현(28·경기대 4학년)씨는 “청년당원으로서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 입당했다.”면서 “한나라당을 아래로부터 의견이 수렴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며, 생명력이 영원한 수권정당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인하대 재학 당시 한총련 활동을 했던 이재양(26)씨는 “한국 사회에서 이념 논쟁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좌파나 우파를 떠나 구체적인 정책입안 과정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자체를 잘 몰랐다는 이인규(23·한국기술교육대 4학년)씨는 지난해 당의 대학생 캠프에 우연히 참가했다가 입당했다. 이씨는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는 소통과 공감의 분위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중앙당의 대학생 조직인 ‘2030위원회’ 위원장인 권용태(27)씨는 “보수는 변화와 개혁을 무조건 거부한다는 통념을 깨고 싶다.”면서 “나이 지긋한 당 선배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정당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개혁당에서 활동하다가 열린우리당 기간당원으로 활약했던 김선진(29·서울시립대 4학년)씨는 기간당원제의 실패를 무척 안타까워한다. ●“당원혁명 끝나지 않았다” 김씨는 “국회의원들이 개혁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기간당원제를 찬성하다가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돌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멸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소선거구제가 중대선거구제로 바뀌고, 비례대표를 대폭 늘리면 동원당원이 아닌 기간당원들이 설 자리가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이 원활한 정당을 찾다가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던 서명숙(29)씨는 “기간당원제가 실패했지만 우리는 당내 민주주의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런 문제의식은 당원들의 가슴속에 계속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보진영의 집권을 꿈꾼다” 2000년 창당과 동시에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명재석(28)씨는 당원이 주인인 민노당을 자랑스러워한다. 아직 소수정당이긴 하지만 언젠가는 다수당이 되고 집권까지 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명씨는 “여전히 계파별 과두체제 형태인 중앙당의 개혁이 시급하다.”면서 “지역 모임도 주거지 기준을 고집하지 말고, 직장이나 관심 분야가 비슷한 소모임 형태로 개편해야 더 많은 대중들의 참여를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김희선(23·서울대 4학년)씨는 민노당과 비슷한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사회당에서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씨는 “과거 대학생들의 정치적 요구는 한총련과 같은 운동권 조직으로만 수렴됐지만 이젠 정당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사회당원의 이름으로 장애인, 비정규직, 여성 등 사회적인 이슈는 물론 학내의 세세한 문제까지 친구들과 토론하고 행동한다.”고 덧붙였다. 다음달 20일 초록당 창당을 준비중인 초록정치연대의 김경미(25)씨는 자동차를 갖지 않고도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 농업을 파산시키지 않아도 잘사는 나라를 꿈꾼다. 김씨는 “정치는 항상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생각했다.”면서 “내 삶을 변화시키는 작은 동력을 만들기 위해 녹색정치에 뛰어 들었다.”고 말했다. 이창구 유지혜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 “인물 아닌 정책 중심 재편 바람직” 전문가들은 한국 정당정치의 후진성이 여야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고 진단한다. 여론조사 방식을 도입하는 바람에 1인 1표의 등가성이 생명인 평등선거 원칙이 무너졌고, 보통·직접·비밀 선거의 원칙도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을 계기로 새로운 정당체계를 고민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유럽식 계급(대중)정당이나 미국식 포괄정당 중 하나를 선택할 게 아니라 우리 정치 현실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면서 “인물 중심의 정당이 아니라 환경이나 평화와 같은 정책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무소속 임종인 의원은 “당원의 뜻에 따라 후보가 결정되고, 당원들이 지지층을 확대시켜 나가며, 당원과 지지자의 힘으로 당선된 다음에는 전체 국민의 이익과 당원의 이익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대의민주주의 기본이 바로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열린우리당의 실패로 갈 곳을 잃은 중도개혁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서민적 진보정당이 출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상환 경상대 교수(경제학)는 “우파 헤게모니를 한나라당이 완벽하게 장악했기 때문에 이와 경쟁할 수 있는 튼튼한 중도개혁 정당이 나와야 하고, 민주노동당도 지금보다 더 대중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컨설팅업체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 역시 이념과 정책에 따른 정당 분화가 필요하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박 대표는 “지역구도가 약화됨에 따라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진보세력이 등장할 수 있다.”면서 “산업·외교·교육·조세·부동산·복지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을 둘러싸고 정치세력이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인터넷 정당’을 주장하고 있는 김두수 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은 “사회 자체가 인터넷을 통해 재편되고, 인터넷이 기존 정당보다 더 강력한 정치적 의사 표출의 수단이 됐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면서 “후보 선출과 주요 정책결정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직접민주주의가 대폭 강화된 인터넷 정당이 조만간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한국정당 오욕의 역사 해방 이후 60년간 수많은 정당이 만들어지고 해체돼 왔지만 제대로 운영된 정당은 찾아보기 어렵다. 핵심 지지층을 확보하지 못한 채 표면적으로 ‘모든 국민’의 이익을 내세우는 포괄정당, 대중적 기반이 허약한 간부정당, 선거에서 이기는 것만 목적으로 하는 선거전문 정당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시작부터 파행이었다. 미군정 법령 제55호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자유당은 이 전 대통령이 하야하자 바로 스러졌다. 애초에 우리나라 법으로 정당을 만들지 못한 ‘정통성의 부재’도 문제지만, 정당이 정책이나 비전이 아니라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며 ‘무원칙한 인맥집단’으로 전락하는 전범(典範)이 된 게 더 큰 문제였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을 거치며 우리나라 정당은 ‘권력자 정당’의 면모를 띤다. 가장 수명이 길었던 민주공화당은 박 전 대통령이 5·16쿠데타 뒤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만들었다. 이를 해체한 전 전 대통령 역시 12·12와 5·17을 거치고 나서 1980년 민주정의당을 창당해 정권의 정통성을 도모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하고 나서도 구태를 벗지 못한다. 이 시기의 정당은 ‘1인 사당(私黨)’,‘지역주의 정당’으로 규정된다.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창당한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자유민주연합 등이 그렇다. 2000년 탄생한 민주노동당,3년 뒤 만들어진 열린우리당은 우리나라에 정당법이 도입된 지 40년 만에 처음으로 근대적 정당의 형식과 내용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당원이 당비를 내고, 상향식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지구당을 법적으로 폐지해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을 만들려는 것이 두 정당의 목표였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기간당원제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정당 개혁은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손혁재 경기대 정치교육원장은 “우리나라 정당은 대중정당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간부정당”이라며 “아직은 당원 문화가 뿌리 내리지 못해 유권자나 당원이 시대 요구에 맞는 의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회견서 드러난 전략

    회견서 드러난 전략

    당내 경선에서는 지지층의 표심을 겨냥해 좌우로 치우치는 노선을 걷다가도 후보로 뽑힌 뒤에는 전체 국민을 향해 중도로 이동하는 게 대통령 선거의 속성이다.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도 이런 전형(典型)을 따르기로 했음을 9일 기자회견에서 드러냈다. 이 후보는 영남·보수층이라는 한나라당의 ‘집토끼’에 만족하지 않고 ‘산토끼’를 잡으러 과감히 집을 나서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념적으로는 중도·실용, 지역적으로는 호남, 연령적으로는 젊은층이 표적이다. 이 후보가 이날 언급한 “지역주의 의존 세력을 국민통합 세력으로 바꿔야 한다.”는 표현은 범여권 쪽에서 주로 해 온 말이다.“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복지체제를 실현해야 한다.”는 언급 역시 썩 한나라당다운 것은 아니다. 이 후보 스스로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실사구시를 앞세우는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는 말로 궁금증을 해소시켰다. 그는 아예 “반테러, 휴머니즘, 빈곤 퇴치, 평화, 공동안보가 세계의 보편적 원칙으로 자리잡았다.”고 선언, 진보와 보수의 어젠다를 한 데 묶어 버렸다. 이 후보는 이것을 가리켜 ‘제3의 길’ 운운하는 대신 “문명사적 전환”이라고 언명했다.“더 많은 자유, 더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3의 길이란 샛길 대신 진보와 보수를 모두 싣고 가는 고속도로를 뚫겠다는 의미에 가깝다.‘잡탕’을 우려하는 한나라당내 강경 보수파로서는 달갑지 않은 노선일 수도 있다. 이 후보가 이날 새로 내놓은 ‘2008년 체제’라는 용어도 ‘이념 파괴형’이다.6·10민주항쟁 이후 올해까지를 민주화시대로 규정하면서 2008년부터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정신, 즉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체제는 선진국 진입을 가져올 신(新)발전체제”라는 이 후보 자신의 말에서 어쩔 수 없이 ‘산업화’ 쪽에 가깝다는 냄새가 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후보가 ‘국민통합’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전매특허’를 시대정신으로 언급했다는 점이다. 중도층 유인용으로 해석된다. 다음은 일문일답. ▶2008년 체제란 민주화체제인 1987년 체제와의 단절을 의미하나. -세대 단절은 없다.63년 이후의 산업화와 87년 이후의 민주화를 뛰어넘어 동시에 이루겠다는 것이다.2008년엔 새로운 발전으로 그 성과가 서민들에게 돌아가는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와의 구체적인 화합 방안은. -정권교체라는 데 강한 합의를 했다. 그렇기에 특별한 비율로 배려한다는 게 아니고 유능한 사람은 언제라도 함께할 것이다. ▶청와대 고소에 대해 검찰이 실제 수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검찰이 조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응하겠다. 이런 개인의 생각을 갖고 있지만 당과 필요하다면 의논해 조치를 취하겠다. ▶범여권 후보가 정해져도 호남에서의 지지도가 유지되리라 보나. -호남 분들도 실용적 사고를 하고 있기에 지지율에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2차 남북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입장은. -남북정상회담에서 떠나는 대통령이 차기 정부와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합의를 할까봐 걱정된다. 평화협정 문제엔 동의한다. 김상연 한상우기자 carlos@seoul.co.kr
  • 李 “성장·분배 동시구현…서민에 혜택가게 2008 新발전체제 구축”

    李 “성장·분배 동시구현…서민에 혜택가게 2008 新발전체제 구축”

    한나라당 이명박(얼굴) 대선후보는 9일 “정권교체를 통해서 대한민국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을 것”이라며 “1987년 체제를 넘어 2008년 체제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는 또 청와대가 명예훼손 혐의로 자신을 고소한 데 대해 “검찰이 조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응하겠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는 대통령선거를 100일 앞두고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권 교체냐, 정권 연장이냐. 이것이 이번 대선의 기본 구도”라고 밝혔다. 그는 “2008년 체제는 선진국 진입을 가져올 신(新)발전체제”라면서 “성장의 과실이 서민에게 가장 큰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체제”라고 설명했다. 이 후보는 또 “이번 대선의 시대 정신은 발전과 통합”이라면서 “국민이 바라는 변화는 경제살리기와 국민통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권자들의 합리적 선택이 지역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지금 유권자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저는 실사구시를 앞세우는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남은 100일 동안 정권교체에 동의하는 모든 분들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 외연 확대 방침을 천명한 뒤 “시민단체나 정치권 누구나 함께 하고, 누구나 기회를 갖고 있다. 나름대로 그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고 했다. 김상연 한상우기자 carlos@seoul.co.kr
  • [김형준 정치비평] 한나라당 경선 승자의 과제/명지대 정치학 교수

    [김형준 정치비평] 한나라당 경선 승자의 과제/명지대 정치학 교수

    한나라당 경선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경선 막바지에 이명박 후보 검증의 핵심 쟁점인 ‘도곡동 땅’이 “제3자 차명 재산으로 보인다.”는 검찰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는 경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누가 대선후보로 선출되든 한나라당은 엄청난 내홍을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한나라당 빅2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피 터지게 싸우고 상대방을 증오하면서 줄기차게 ‘이별 연습’을 하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한나라당은 경선 후 분열할 위험 요인을 많이 갖고 있다. 첫째, 대선과 총선이 맞물려 있어서 경선에서 패배한 측이 총선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 대선이 끝나면 바로 총선을 치러야 하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패배한 측은 경선 승리 후보가 차라리 대선에서 패배하는 것이 낫다는 불순한 의도를 실행에 옮길 개연성이 있다. 1987년 대선에서도 정권교체 세력으로 급부상한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에서 선거 두달을 남겨놓고 김대중(DJ)씨가 탈당해 평민당을 만들면서 민정당·통일민주당·평민당·공화당 등 다당체제가 구축되었다. 특정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 세력이 88년 4월 총선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다. 둘째, 범여권이 한나라당 분열을 전제로 한 선거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 한국 대선에서는 3당 합당,DJP 연대 등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정치실험을 한 세력이 승리했다. 그런데 한국 대선에서 지금까지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정치 실험은 단연코 영·호남 연대이다. 범여권은 우여곡절 끝에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 한나라당과 일대일 양자구도를 만드는 데 성공하더라도 영남에서 30%가량 표를 잠식하지 못하면 승리하기 어렵다.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이인제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영남에서 각각 127만 9449표(30.0%)와 120만 1172표(29.4%)를 획득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범여권은 대선 승리를 위해 남북정상회담 이후 선거구도를 평화 대 냉전 구도로 전환하려 노력할 뿐만 아니라 여의치 않으면 새로운 정치실험을 단행할 가능성이 있다. 영남 표를 잠식하기 위해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배한 진영과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영·호남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핵심 지지계층이 중첩되지 않는 것도 불길한 징조이다. 경선에서 패배한 측은 자신의 지지만을 믿고 독자적으로 행보할 위험성이 크다. 실제로 한국리서치(7월27일)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 빅2 지지자의 20%가량은 상대가 경선에서 이기면 ‘본선에서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응답했다. 코리아리서치(8월11일)조사에서도 한나라당 대의원의 17.1%, 당원 25.3%가 ‘패배한 후보가 경선 결과에 순순히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잠재적 분열 요인들 때문에 경선 승리 후보가 진정성을 갖고 패한 후보를 끌어안지 못하면 대선 승리를 결코 장담할 수 없다. 한나라당이 경선 후 분열하지 않고 화합하려면 적어도 빅2가 경선 결과에 무조건 승복하고, 승리 세력이 2008년 총선에 절대로 개입할 수 없도록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만약 승자가 살생부를 만들어 상대 진영 핵심 인사들을 공천에서 배제할 경우 당은 분열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나라당의 중립성향 인사들의 모임인 ‘중심모임’이 “당의 실력자로부터 공천을 독립시키고 줄서기 폐단을 근절할 수 있도록 ‘공직후보심사단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한 제안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제안이 실질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승자가 ‘경선에서만 이기면 다른 후보 도움 없이도 본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오판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불어 ‘오만과 분열은 패배를 낳고 포용과 화합은 승리를 잉태한다.’는 철칙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명지대 정치학 교수
  • [서울광장] 대선, 팬티까지 벗긴다지만/이목희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선, 팬티까지 벗긴다지만/이목희 논설위원

    1987년 직선제 도입 후 대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있다. 유력후보의 혼외자식설이다.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차례로 구설수를 탔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사람의 당선에 결정적 걸림돌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선거 한참 뒤에 문제가 더 불거졌고, 노 대통령은 재판을 통해 허위임을 입증받아 명예회복을 했다. 지금 이명박·박근혜 양 진영이 지독하게 붙은 것은 차명재산 의혹과 최태민 목사 의혹이다. 물밑에서는 사생활 공방이 만만찮다. 공방의 핵심은 혼외자식설.YS·DJ·노 대통령이 시달린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한나라당 경선전이 치열해지면서 양 진영에서 이를 ‘한방거리’로 여기는 분위기가 과거에 비해 훨씬 강한 편이다. 이 후보는 존비속 모두 소문에 휩싸이는 괴로움을 겪었다. 모친이 일본인이라는 의혹 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검찰의 DNA 검사까지 응했다. 혼외자식 부분은 측근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못 믿느냐.”고 일갈하면서 결백을 주장했다고 한다. 박 후보는 검증 청문회에서 시중의 소문에 대해 DNA 검사를 받을 용의가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럼에도 양쪽 인사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아직도 의문을 제기한다.“모 후보와 똑같이 닮은 혼외자식을 파악하고 있다.” “모 후보가 딸을 낳아 측근에게 입적시켜 길러 왔다.” 관련 자료와 증언을 확보하고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진실 여부를 떠나 사생활 논쟁을 일반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흥미있어 하지만 결론에선 견해가 제각각이다.“국정수행 능력과 별개”,“사생활이 정상이지 않으면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의견이 갈린다. 선진국에서도 이 문제는 논란거리다. 비교적 관대한 나라는 프랑스. 미테랑의 혼외자식, 시라크의 바람기, 사르코지의 사생활 문란이 대선전이나 국정운영에서 별로 이슈가 되지 않았다. 특히 시라크는 바람기를 국민들에게 친근한 이미지 구축용으로 활용했다. 시라크가 확산을 꺼린 부분은 정력 논란.‘샤워 포함 3분’이란 별명을 극히 싫어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미국은 좀 달랐다. 초대 워싱턴부터 39대 카터까지 이혼한 경력이 있는 대통령이 없었다.1988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주자 중 한명이었던 게리 하트가 모델과 염문으로 중도하차했다. 그러나 이는 겉모습일 뿐이다. 언론인 출신 셸리 로스는 ‘대통령의 스캔들’이란 저서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의 3분의1이 바람둥이였다고 분석했다. 케네디를 비롯해 워싱턴, 제퍼슨, 윌슨, 프랭클린 루스벨트, 아이젠하워 등은 혼외정사, 사생아 출산 등 여성편력이 화려한 대표선수들이었다. 부도덕성이 명확히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프라이버시로 여겨 상대 진영에서 악착같이 캐고 늘어지지 않았던 듯싶다. 이·박 후보의 혼외자식설이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국가 최고지도자를 목표로 한다면 사생활이 깨끗해야 한다. 홍준표 의원은 “대선은 팬티까지 벗기는 게임”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벗기더라도 예의를 지켰으면 한다. 뚜렷한 증거없이 소문으로 흘려 상대를 흠집내서는 안 된다.DNA 검사를 후보검증 필수항목으로 만들 수 없지 않은가. 자료가 있다면 공개하고, 공식해명을 들은 뒤 국민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후보의 사생활 논란과 관련해 우리 국민의식이 미국·프랑스보다 못할 것 없다고 본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경찰, 92년까지 선거 개입”

    “경찰, 92년까지 선거 개입”

    경찰이 정부 수립 이후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92년까지 선거운동 방해와 금품매수, 후보자 비방, 공안사건 조작 등으로 각종 선거에 불법 개입을 했거나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종수 한성대 교수)는 1일 ‘불법 선거개입 의혹’과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용공조작 의혹’ 등 3개 분야에 대한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올 연말로 시한이 끝나는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는 의혹을 일부 확인하는 차원에 머물렀을 뿐, 부끄러운 과거를 낱낱이 드러내는 데는 미흡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고문·용공조작 반성을” 이종수 위원장은 이날 “관련 재판기록과 전직 경찰간부들의 증언 및 비망록 등을 확인한 결과 경찰이 54년 제3대 민의원선거부터 87년 대선까지 광범위하게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87년 대선까지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의 광범위한 불법 개입이 판을 쳤지만,88∼92년에는 민주화의 점진적 진행에 따라 노골적인 개입보다는 치안정보 불법 이용 등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 87년 강원도 모 지역의 경찰서장을 지낸 이모씨로부터 “정부·여당이 도지사를 통해 활동비를 내려보낸 기억이 있다. 이 돈을 정보과장에게 줘 활동비로 사용하게 했다.”는 증언을 처음으로 확보해 80년대 말까지 경찰이 정부 지원금으로 선거에 불법개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과거사위는 또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보안경찰의 사찰 활동인 ‘요시찰(要視察) 카드’가 적어도 94년말까지 공식적으로 존재했으며, 이 지침을 승계한 대공관리지침이 참여정부 출범 이후인 2004년 1월까지 존속됐다고 밝혔다. 아울러 인물존안자료는 99년초 폐기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용공조작 의혹과 관련, 과거사위는 부정선거 시비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경찰이 공안사건을 발표해 무더기로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을 잡아들인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67년 6·8선거 부정 규탄 시위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그해 316건에 그쳤던 국보법 위반 송치 건수가 68년과 69년에는 각각 950건,801건으로 급증했고, 유신이 선포된 72년과 민주화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86∼90년에도 송치 건수가 급증했다는 것이 과거사위의 판단이다. 과거사위는 “과거 정치 권력이 정권 연장의 목적을 위해 경찰을 이용했고, 권력으로부터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경찰 또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 “고문과 용공조작 등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을 반성하고 중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고된 미완의 진상 규명 이날 발표된 결과는 대부분 그동안의 의혹을 정리한 뒤,“정황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는 수준에 머물러 과거사 규명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2005년 3월 출범한 과거사위에는 14명의 위원 가운데 경찰청 치안감 이상 간부가 5명이나 포함돼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는 지적이 일찍부터 제기돼 왔다. 이종수 위원장은 “선거에 경찰이 개입했다는 관련 자료가 공식적으로 남아 있기 힘들다. 관련 증언들을 폭넓게 청취해 진상을 밝히려 노력한 것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박병섭 위원도 “3대 분야에 대한 포괄 조사를 시작할 때부터 한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위원회의 목적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경찰이 이를 침해했던 과거를 밝히고 신뢰받는 계기로 삼자는 의도였다.”고 해명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미진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대선 일정을 감안해 11월 말까지 활동을 마무리짓는 것으로 국방부, 국정원 등 과거사위를 둔 기관들과 조율이 끝난 상태”라면서 “이의 제기가 들어온 청주대 자주대오 및 나주부대 민간인 학살사건을 보완 조사하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조사는 끝났으며 백서를 준비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정책선거 원년으로] ‘구체성 공약’ DJ 34%-YS 31%-노무현 29% 順

    [정책선거 원년으로] ‘구체성 공약’ DJ 34%-YS 31%-노무현 29% 順

    노태우 전 대통령은 13대 대선에서 ‘집권 기본강령 10장’을 집권 철학으로 제시하고 10개 분야 571개 공약을 내놓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4대 대선에서 ‘신한국 창조를 위한 김영삼의 실천약속’이란 제목 아래 10대 과제,738개 공약을 제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에서 ‘국난 극복과 내일의 번영을 위한 당신과 나의 약속’이란 공약집에서 170개의 목표를 열거하고,1016개의 공약을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4대 비전,20대 정책목표,150대 핵심과제를 내놓았다. 공약수는 1397개(서울신문과 대선평가교수단 공동집계 결과)였다. ●역대 정부 공약 구체성 미흡 역대 대통령들이 집권 직전 대선에서 내놓은 공약을 분석한 결과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인식 가능한 공약은 20∼3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지방자치제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세제를 개편해 국세의 일부를 지방세로 한다.’(노태우 전 대통령)는 공약은 세제를 어떻게 개편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대외무역법을 개정해 수출입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무역업무 자동화사업을 추진해 서류 없는 무역행정을 실현한다.’(김영삼 전 대통령)는 공약도 무슨 절차로 어떻게 간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없다. 이와 반대로 ‘제2의 중소기업은행을 신설해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공급을 확대한다.’(노태우 전 대통령)는 공약이나 ‘국민연금기금운영위원회를 상설화 하겠다.’(노무현 대통령)는 공약은 은행 신설과 위원회 상설화라는 구체성을 띠고 있어 유권자들의 판단이 가능했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알 수 있는 공약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비교적 많이 나왔다. 김 전 대통령의 1016개 공약 가운데 349개(34.4%)가 구체성을 갖춘 공약이었다. 다음은 김영삼 전 대통령(31.3%), 노무현 대통령 29.1%, 노태우 전 대통령 23.1% 등의 순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고 밝힌 뒤 기한이나 예산까지 명시하면 공약은 더욱 분명해진다.‘농어업 분야의 연구개발비를 현재 700억원 수준에서 1998년까지 2000억원 수준으로 확대한다.’(김영삼 전 대통령)는 공약이 여기에 해당된다. 기한이나 예산까지 명시한 공약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약에서 많이 나타났다. 김 전 대통령의 공약 738개 가운데 84건(11.3%)이 기한이나 예산을 명시했다. ●실현 방식도 정권마다 달라 공약의 실현 수단을 법제정, 제도 도입, 계획수립, 기구설치, 기관설립, 예산, 세제, 폐지·금지 등으로 구분해 봐도 각 정권별 특징이 나타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약 가운데 제도도입을 밝힌 공약이 24건으로 가장 많았고, 기관설립을 밝힌 공약은 17건으로 뒤를 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약에서는 기관설립이 26건, 예산 배정이 22건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도도입이 72건, 기구설치가 47건이었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제도도입 84건과 기구설치 32건을 제시했다. ‘사학진흥법을 제정하겠다.’(김대중 전 대통령)는 공약처럼 새로운 법을 제정하겠다는 공약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36건이었다.‘자치경찰제를 도입하겠다.’(노무현 대통령)는 공약처럼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방식은 노무현 대통령이 주로 활용했다. ‘낙도개발 5개년 종합계획을 수립하겠다.’(노태우 전 대통령)는 공약처럼 해당 정책의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는 계획수립 방식도 있다.‘국무총리 산하에 환경영향평가위원회를 설립하겠다.’(김대중 전 대통령)는 공약처럼 정부기구나 각종 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47개의 기구나 위원회 설치를 약속해 가장 많이 활용했다. 기관설립은 ‘해외과학기술정보센터를 설립·운영하겠다.’(김영삼 전 대통령)는 공약처럼 정부기구 외의 공공기관을 설립하겠다는 것이다.‘1998년까지 1조원의 신제품개발자금을 확보, 지원하겠다.’(김영삼 전 대통령)는 공약처럼 직접적인 예산 지원 의지를 밝히는 방식도 활용됐다. ●경제 공약이 가장 많아 역대 대통령들의 공약을 20개 분야로 나눠 본 결과 경제공약을 가장 많이 내놓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체 571개 공약 가운데 경제 공약이 87개(15.2%), 교육 분야 67개(11.7%), 농어업 분야 60개(10.5%) 순으로 분석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체 738개 공약 가운데 교육이 82개(11.1%), 농어업이 78개(10.6%), 경제 분야가 73개(9.8%)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경제 129개(12.7%), 여성·청소년 93개(9.2%), 교육 82개(8.1%) 순이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 180개(12.9%), 보건·복지 분야 177개(12.7%), 농어업 분야 142개(10.2%) 순으로 공약을 제시했다. 대표집필 오수길 한국디지털대 교수 ■ 공약도 ‘확대 재생산’ 공약에도 생명 주기(라이프 사이클)가 있다. 과거에 공약으로 채택된 종책방안이 여러 정당과 후보들의 공약에서도 시기를 달리하면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주택보급률 공약의 경우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8년에 90%,2000년에 100% 달성을 내세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에 2002년까지 100% 달성을,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까지 110% 달성을 내놓았다. 공공임대 주택은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약에서 50만호 이상 건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는 30만호 내외 건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만호 건설을 약속했다. 작전지휘권 재조정(노태우 전 대통령), 상호출자금지 및 출자총액제한(〃), 공공기관 지방이전(김영삼 전 대통령), 전시작전권 환수(〃) 등의 정책은 참여정부 들어서까지 논란이 됐다. 이처럼 공약이 생명력을 갖는 것은 처음 제시된 당시에는 여론이 무르익지 않고 갖가지 저항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후보가 정책으로 이어받고 일정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맞는다면 탄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표심을 다지는 과정에서 제시된 공약은 선거를 거듭하며 확대 재생산되기도 한다. 표를 가진 집단은 다음 선거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음 후보들은 이전 정부의 공약을 참조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당선자의 공약에 대해서는 국민적 평가가 따라야 한다. 제시된 공약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야당의 반대가 심했다.’ 등의 변명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목표, 우선순위, 절차, 재원, 기한이 체계적으로 제시됐다면 어떤 시기에 공약이 성숙되지 못했고, 어떤 측면에서 반대가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해 다음에는 실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한 줄짜리 공약을 수백개씩 묶은 공약집을 발간할 게 아니라 분명한 철학, 비전, 목표 속에 각 분야별 정책들의 ‘인과(因果) 지도’를 그리는 방식으로 공약을 마련한다면 공약집은 유권자들에게 꿈을 이뤄가는 이정표가 될 수 있으며,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 [씨줄날줄] 필승론과 필패론

    정주영씨가 1992년 대선에서 당선될 듯싶지 않았다. 국민당 고위인사에게 “뭘 믿고 그렇게 올인하느냐.”고 물었다. 고위인사는 ‘정주영 필승론’이란 내부보고서를 보여줬다. 현대 및 협력업체 직원과 가족, 영남·강원 표를 합쳐 무난히 당선된다고 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니 그는 국민당 산하 연구소의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정 후보 지지가 김영삼(YS)·김대중(DJ) 후보와 박빙으로 집계돼 있었다.“대상이 현대 직원이냐. 이런 자료로 왜 정 회장 같은 전문 기업인을 현혹하느냐.”고 했는데도 그 인사는 ‘정주영 필승론’을 종교처럼 되뇌었다. 대선필승론의 대표 사례는 1987년 DJ의 4자필승론이다. 노태우 후보와 YS가 영남표를 갈라먹을 때 호남표를 지키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봤다. 사실 4자필승론은 DJ만 의존한 게 아니다. 노태우 후보측은 막강한 정보력으로 전국의 표를 한표한표 세다시피 했다. 양김씨가 동시출마하면 당선된다는 확신을 갖고 직선제를 수용한 것이다.YS도 마찬가지. 부산·경남의 열렬한 지지에 도취해 4자구도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97년 대선부터는 네거티브가 강해지면서 필패론이 많아졌다. 이인제씨가 신한국당을 뛰쳐나간 명분이 ‘이회창 필패론’이었다.2002년 대선에서는 역으로 노무현 후보가 ‘이인제 필패론’을 내세워 민주당 후보를 따냈다. 올해 대선은 그야말로 필승론과 필패론의 홍수다.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가 ‘이명박 필패론’을 제기하자 이 후보는 ‘이명박 필승론’으로 맞받고 있다. 군소후보가 난립한 범여권에서는 여론조사 지지율 1∼2%를 갖고도 필승론의 외침이 우렁차다. 필승론과 필패론은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적당한 선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선거전이 가열되면서 자기최면에 걸리는 게 문제다. 내가 아니면 안 되고, 상대 후보가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한발만 물러서면 정치전문가가 아니라도 보이는 것이 콩깍지가 살짝 덮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안 될 후보는 아무리 필승론을 주장해도 안 된다. 한방에 갈 후보는 필패론으로 헐뜯지 않아도 간다. 변수가 많은 미래를 놓고 ‘반드시 필(必)’자에 집착해 대선판을 살벌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정책선거 원년으로]공약을 보면 시대상이 보인다

    [정책선거 원년으로]공약을 보면 시대상이 보인다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제시된 공약의 대부분은 엇비슷할 뿐만 아니라 장밋빛 일색이다. 이전 정부에서 이루지 못한 정책을 계속 가져다 썼고, 선심성 공약을 마구 베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약에서 당시 시대 흐름과 후보의 철학을 찾을 수 있다. ●의외로 진보적인 노태우 공약 1987년 6월 항쟁으로 어쩔 수 없이 직선에 나선 노태우 후보의 공약은 상당히 진보적이다. 비록 김영삼 정부에서 실현됐지만 전면적인 지방자치제 실시를 약속한 이는 노태우 후보였다. 밀폐수사 금지, 토지공개념 확대, 출자총액제한, 재벌의 소유·경영 분리, 작전지휘권 재조정 등이 진보적 공약으로 꼽힌다. 1987년 대선에서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을 맡아 공약 전반을 기획했던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는 “당시 여당은 일단 정권을 연장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와 인권 관련 공약이 우선시됐다.”고 회고했다. 인천국제공항, 경부고속철도, 서해안고속도로 등 굵직한 사회간접자본(SOC) 계획의 대부분도 이때 나온 공약이다. 동해안 국제공항, 서울~영동 고속철도 건설과 같은 무모한 공약도 나왔다. 당시 공약 개발의 기획자였던 전병민(현 한국정책연구원 고문)씨는 “전두환 정권은 물가를 잡느라 SOC 투자를 하지 못했다.”면서 “노태우 후보는 정부와 공무원의 역량을 총동원해 건설 공약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농촌에 발목잡힌 김영삼 공약 1992년 집권 여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개혁’에 초점을 맞췄다.‘후보자 본인 및 배우자 직계존비속 재산공개’를 첫번째 공약으로 내세울 만큼 강한 의욕을 보였다. 집권 이후 이 공약을 지켰고, 대통령의 재산공개는 현재 1급 이상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영삼 후보는 특히 농촌 공약에 많은 신경을 썼다. 당시 농촌은 우루과이라운드(UR)의 거센 쌀 시장 개방요구에 직면해 있던 터였다. YS는 공약집에 ‘쌀은 수입하지 않는다.’고 공언했고, 노태우 정부가 말기에 추진했던 10년간 42조원이 투자되는 농어촌구조개선 사업을 공약으로 계승했다. 그러나 결국 1995년 12월 UR협상이 타결돼 야당과 농민으로부터 ‘정권퇴진’의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IMF·자민련 변수에 얽매인 김대중 공약 김영삼 정부 막판에 터진 외환위기 사태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의 꿈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가 됐지만, 자신의 경제철학이었던 중산층·서민을 위한 ‘대중경제론’을 접어야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금융실명제 유보와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제한적 적용 등 이전 정부보다 후퇴한 경제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대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 의장이었던 김원길 한국여자농구연맹 총재는 “악마의 돈도 마다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보수적인 자민련과 ‘후보 단일화’를 약속하는 바람에 내각제 개헌을 공약에 포함시켜야 했다. 김대중 후보가 가장 자신감을 보였던 통일공약보다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억제’와 같은 안보공약이 우선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는 공약집 끝머리 항목 ‘남북기본합의서에 기초한 남북관계 개선’의 괄호 속에서 겨우 찾을 수 있을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분배·성장이 충돌한 노무현 공약 노무현 후보의 공약은 토론의 산물이다. 공약 입안에 가담했던 브레인들은 “정책 브레인 사이에 치열한 논쟁을 거쳐 공약이 완성돼 갔다.”고 전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정치인 위주로 꾸려졌던 이전 정부와 달리 모두 진보적인 학자로 채워진 데서도 정책에 대한 참여정부의 깊은 관심을 찾을 수 있다. 처음 공약을 입안했던 장하원·유종일·서동만·정해구·유시민·정태인 등 진보적인 학자들은 북유럽형 사민주의와 사회대타협, 차별철폐, 분배에 무게를 뒀다. 역대 후보들의 단골 공약인 ‘작은 정부’는 신자유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배제됐다. 부동산 개발을 통한 경기 부양책도 언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장정책이 추가됐다. 연 7% 성장이 공약으로 나오자 일부 학자는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성공회대 교수는 “선거가 가까워지고, 야당의 이념공세가 거세지면서 성장형 공약이 많이 개입됐다.”고 소개했다. 노 대통령의 전매특허인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공약도 처음에는 동북아 국가간 연대에 무게중심을 뒀다. 하지만 물류허브(중심), 금융허브 등 경쟁·성장정책이 끼어들면서 ‘동북아 중심국가’로 변해 갔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 등이 현 정부 비판의 선두에 선 것도 노 대통령의 공약과 정책이 그만큼 논쟁적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창구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 조석래 전경련회장 발언 파문

    조석래 전경련회장 발언 파문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25일 “다음 대통령은 경제대통령이 돼야 한다.”며 “그것이 바로 국민의 뜻”이라고 잘라말했다. 조 회장은 이날 제주 서귀포시 신라호텔에서 열린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한 ‘2007 전경련 하계포럼’에서 이같이 말했다. 조 회장은 ‘미래 한국 비전과 차기 지도자에게 드리는 제언’이라는 제목의 특별강연에서 정치권과 정부를 향해 강도높은 비판을 쏟아내 파문이 일고 있다. ●“무균으로 자란 사람 있나” 조 회장은 먼저 차기 대통령의 자격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국가 지도자는 시장경제를 잘 알고 경제 제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차기 지도자는 세계시장을 잘 알고 글로벌 경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회장은 한나라당 이명박·박근혜 후보간의 검증공방과 관련,“외국사람에게 물어보니까 ‘무균(無菌)으로 자라온 사람이 있겠느냐.’고 했다.”면서 “(검증공방을)졸업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명박 후보에게 유리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다. ●동생 조양래씨 이 후보와 사돈 조 회장의 친동생인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과 이명박 후보는 사돈관계다. 조 회장은 범(汎) 여권에 대한 비판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탈당, 합당 등을 보면 국민들은 혼란스럽다.”면서 “정치인들이 정책중심으로 가줘야 국민들이 안심하고 따라갈 수 있는데 자기네들 앞날을 위해 왔다갔다하는 것 같다.”고 원칙에서 벗어난 듯한 이합집산을 비판했다. 전경련 회장이 대선이 불과 5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민감한 얘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 전경련 회장이 CEO포럼에서 1시간을 강연한 것은 지난 1987년 포럼이 생긴 이후 조 회장이 처음이다. 조 회장은 작심한 듯 정부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조 회장은 노사 문제와 관련,“불법을 엄단하겠다고 해놓고 결국 흐지부지한다.”면서 “이랜드 사태가 좋은 예”라고 말했다. 그는 또 “수도권 규제와 아파트 원가공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서 “시장원리에 맞는 게 국민의 뜻이고 이에 반하면 독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귀포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정책선거 원년으로] 대선정책 평가교수단 역대 공약 점검

    [정책선거 원년으로] 대선정책 평가교수단 역대 공약 점검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의 역사에서 본격적인 공약대결이 시작된 것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쟁취한 13대 대선부터다. 이전에는 ‘사사오입’ ‘부정선거’ ‘유신’ ‘체육관선거’라는 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약은 철저히 무시됐다. 민주화 이후의 대선 공약도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과의 약속은 아니었다. 공약이 선거의 장식품으로 전락해 유권자의 선택기준으로 기능하지 못한 탓이다. 지역주의가 선거를 지배하는 구도가 계속되면서 정책공약은 유권자를 동원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후보나 정당은 실천 가능한 정책공약을 개발해 유권자들의 표를 얻으려는 노력보다는 뭐든지 다 해 주겠다며 백화점식으로 나열하거나, 장밋빛 공약만 형식적으로 내놓았다. 막상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공약 이행에는 관심이 없고, 백지위임을 받은 것처럼 통치해 왔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유권자는 대통령과 정부를 불신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다행히 2002년 16대 대선부터 3김의 퇴장과 함께 지역주의가 완화되고, 이념적 경쟁이 자리잡으면서 정책공약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보를 강조한 노무현 후보와 보수를 강조한 이회창 후보가 원심적 대결을 펼치면서 공약의 차별화가 이뤄진 것이다.15대 대선부터 도입된 TV토론은 후보자간 정책 차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2002년 대선도 과거의 구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주먹구구식 공약 역대 대선 공약을 살펴보면 우선 매니페스토(참공약 실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슬로건이나 구호로 끝난 게 대부분이다. 정당과 후보는 그럴싸한 수사로 공약의 기조를 제시했으나 구체적 실현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특히 재원과 추진일정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공약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넉넉하고 고른 경제’,‘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계층간 갈등을 해소해 균형잡힌 사회를 이룩한다.’는 등의 약속은 장밋빛이었지만, 실천방안은 회색빛이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는 신한국창조를 위한 10대 과제,77개 공약을 발표했다.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도 100대 중점공약을 제시했다.2002년 노무현 후보도 21세기 국가발전을 위한 전략으로 4대 비전과 20대 정책목표,150대 핵심과제를 제시했으나 모두 실천방안이 결여됐다. 진정한 의미의 매니페스토 공약은 아니었던 셈이다. 구체적인 수치가 제시된 공약도 주먹구구식이 많았다.1987년 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제시한 물가상승률 2∼3% 유지 공약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게 뻔한 주택 200만호 건설과 숱한 개발공약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1997년 김대중 후보가 내놓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의 세계 5강 진입’ 공약은 외환위기 체제에서 어떻게 이루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2002년 노무현 후보의 경제성장률 연 7% 달성 공약은 이회창 후보의 6% 성장 공약에 대응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우선순위 없는 망라형 공약 제한된 예산을 갖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효과적으로 집행하겠다는 우선순위가 제시된 공약도 별로 없었다. 공약의 기조와 10대 과제,100대 과제 등은 나열에 불과하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교육 총리’가 되겠다고 선언한 뒤 교육공약을 집중적으로 강조한 것과 대조적이다. 정책은 기본적으로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역대 대선공약은 각계각층의 모든 유권자를 다 만족시키려고 했다. 우선순위를 부여하면 특정계층에 치우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래서 고른 득표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밝히기를 꺼린 것이다. 예산의 뒤에는 이해관계자가 있고 이들의 표를 의식하는 후보로서는 모든 부문의 예산을 증액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감내할 수 있는 예산규모는 한계가 있다. 주어진 예산추계의 틀 속에서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를 애써 모른 체하면서 유권자를 속여 온 셈이다. 역대 대선에서는 실현가능성과 우선순위는 무시되고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진 공약들이 망라돼 제시됐다. 뿐만 아니라 선거 막판에 ‘깜짝 공약’이 등장해 선거판을 뒤흔들기도 했다. 정책공약보다는 정치공세가 주류를 이뤄 혼탁해진 경험도 많다. ●비전 아닌 선심경쟁 역대 대선공약은 ‘비전경쟁’이 아닌 ‘선심경쟁’이었다.1987년 13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농가부채 전면탕감을, 김영삼 후보는 그린벨트 해제를 내걸어 공약(空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4대 대선에서는 정주영 국민당 후보가 제시한 ‘아파트 반값 공급’ 공약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젊은 층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군복무기간 단축, 예비군 복무기간 단축은 선심성 공약의 단골메뉴다. ●깜짝공약·위헌공약으로 당선 돌발적인 ‘깜짝공약’이 선거판세를 좌우한 경우도 많다.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막판 선거 유세중 ‘88올림픽을 치른 후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공약을 갑자기 발표했다. 중간평가 공약은 6공화국의 족쇄가 됐으며, 결국 야당과 적당히 타협해 없었던 일로 처리됐다. 15대 대선의 깜짝공약은 내각제 개헌이었다.1997년 11월3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대통령후보는 김대중, 총리는 김종필이 맡도록 하는 야권후보단일화에 합의했고, 내각제 개헌을 대선공약으로 채택했다.1999년말까지 개헌을 완료한다고 했으나 이 공약은 실현되지 않았다.16대 대선의 깜짝공약은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라고 할 수 있다. 실행계획과 재원조달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발표된 것이다. 한나라당은 “행정수도를 이전하려면 40조원이 든다.”고 반박했지만, 노무현 후보 측은 “4조 5000억원이면 충분하다.”고 맞받아쳤다. 결국 행정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결정이 내려졌다. ●정치공세에 눌린 정책대결 대선공약은 정치공세에 눌려 빛을 발할 수 없었다.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가짜 보통사람’,‘쿠데타의 주역’으로,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당을 깨고, 거짓말을 일삼는 후보’로 매도됐다. 14대 대선 초반부터 색깔론 시비, 현대그룹을 동원한 금권선거 시비, 초원복집 사건 등이 쟁점으로 부상해 지역주의가 극에 달했다.15대 대선의 이슈는 정권교체,3김 청산, 세대교체 등이었다. 내각제도 정권교체와 맞물린 이슈였다.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문제,DJ 비자금 사건, 경제파탄 책임론과 IMF 재협상론 등도 쟁점이었다.16대 대선에서는 여권의 대선후보 국민경선과 후보단일화 등이 주된 이슈가 돼 정책대결을 사실상 가로막았다. 월드컵 열풍과 미군 장갑차 사건,DJ정부 말기에 터진 각종 게이트, 서해교전 등도 정책 선거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매니페스토 검증이 우선돼야 공약 입안과 집행과정의 폐쇄성도 문제다. 많은 학자와 당 관계자가 참여했다고는 하나 공론화 과정은 없었다. 공약이행 평가도 공개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심지어 정권 인수위 등에서 공약이행계획을 작성하면 이것이 대외비 문서로 관리되거나, 기록조차 남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구체적인 매니페스토식 공약이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선공약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길은 매니페스토 요건을 갖춘 공약을 제시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먼저 후보자와 정당이 목표, 우선순위, 절차, 기한, 재원 등 매니페스토 요건을 갖춘 공약을 제시하고, 이를 유권자 앞에서 공개해 토론을 통해 검증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래야 선거캠페인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공약이 제기능을 다할 수 있다. 이현출 국회입법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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