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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 “성장·분배 동시구현…서민에 혜택가게 2008 新발전체제 구축”

    李 “성장·분배 동시구현…서민에 혜택가게 2008 新발전체제 구축”

    한나라당 이명박(얼굴) 대선후보는 9일 “정권교체를 통해서 대한민국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을 것”이라며 “1987년 체제를 넘어 2008년 체제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는 또 청와대가 명예훼손 혐의로 자신을 고소한 데 대해 “검찰이 조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응하겠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는 대통령선거를 100일 앞두고 이날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권 교체냐, 정권 연장이냐. 이것이 이번 대선의 기본 구도”라고 밝혔다. 그는 “2008년 체제는 선진국 진입을 가져올 신(新)발전체제”라면서 “성장의 과실이 서민에게 가장 큰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체제”라고 설명했다. 이 후보는 또 “이번 대선의 시대 정신은 발전과 통합”이라면서 “국민이 바라는 변화는 경제살리기와 국민통합”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권자들의 합리적 선택이 지역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지금 유권자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저는 실사구시를 앞세우는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남은 100일 동안 정권교체에 동의하는 모든 분들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 외연 확대 방침을 천명한 뒤 “시민단체나 정치권 누구나 함께 하고, 누구나 기회를 갖고 있다. 나름대로 그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고 했다. 김상연 한상우기자 carlos@seoul.co.kr
  • [김형준 정치비평] 한나라당 경선 승자의 과제/명지대 정치학 교수

    [김형준 정치비평] 한나라당 경선 승자의 과제/명지대 정치학 교수

    한나라당 경선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경선 막바지에 이명박 후보 검증의 핵심 쟁점인 ‘도곡동 땅’이 “제3자 차명 재산으로 보인다.”는 검찰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는 경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누가 대선후보로 선출되든 한나라당은 엄청난 내홍을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한나라당 빅2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피 터지게 싸우고 상대방을 증오하면서 줄기차게 ‘이별 연습’을 하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한나라당은 경선 후 분열할 위험 요인을 많이 갖고 있다. 첫째, 대선과 총선이 맞물려 있어서 경선에서 패배한 측이 총선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 대선이 끝나면 바로 총선을 치러야 하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패배한 측은 경선 승리 후보가 차라리 대선에서 패배하는 것이 낫다는 불순한 의도를 실행에 옮길 개연성이 있다. 1987년 대선에서도 정권교체 세력으로 급부상한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에서 선거 두달을 남겨놓고 김대중(DJ)씨가 탈당해 평민당을 만들면서 민정당·통일민주당·평민당·공화당 등 다당체제가 구축되었다. 특정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 세력이 88년 4월 총선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다. 둘째, 범여권이 한나라당 분열을 전제로 한 선거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 한국 대선에서는 3당 합당,DJP 연대 등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정치실험을 한 세력이 승리했다. 그런데 한국 대선에서 지금까지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정치 실험은 단연코 영·호남 연대이다. 범여권은 우여곡절 끝에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 한나라당과 일대일 양자구도를 만드는 데 성공하더라도 영남에서 30%가량 표를 잠식하지 못하면 승리하기 어렵다.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이인제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영남에서 각각 127만 9449표(30.0%)와 120만 1172표(29.4%)를 획득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범여권은 대선 승리를 위해 남북정상회담 이후 선거구도를 평화 대 냉전 구도로 전환하려 노력할 뿐만 아니라 여의치 않으면 새로운 정치실험을 단행할 가능성이 있다. 영남 표를 잠식하기 위해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배한 진영과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영·호남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핵심 지지계층이 중첩되지 않는 것도 불길한 징조이다. 경선에서 패배한 측은 자신의 지지만을 믿고 독자적으로 행보할 위험성이 크다. 실제로 한국리서치(7월27일)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 빅2 지지자의 20%가량은 상대가 경선에서 이기면 ‘본선에서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응답했다. 코리아리서치(8월11일)조사에서도 한나라당 대의원의 17.1%, 당원 25.3%가 ‘패배한 후보가 경선 결과에 순순히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러한 잠재적 분열 요인들 때문에 경선 승리 후보가 진정성을 갖고 패한 후보를 끌어안지 못하면 대선 승리를 결코 장담할 수 없다. 한나라당이 경선 후 분열하지 않고 화합하려면 적어도 빅2가 경선 결과에 무조건 승복하고, 승리 세력이 2008년 총선에 절대로 개입할 수 없도록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만약 승자가 살생부를 만들어 상대 진영 핵심 인사들을 공천에서 배제할 경우 당은 분열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나라당의 중립성향 인사들의 모임인 ‘중심모임’이 “당의 실력자로부터 공천을 독립시키고 줄서기 폐단을 근절할 수 있도록 ‘공직후보심사단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한 제안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제안이 실질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승자가 ‘경선에서만 이기면 다른 후보 도움 없이도 본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오판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불어 ‘오만과 분열은 패배를 낳고 포용과 화합은 승리를 잉태한다.’는 철칙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명지대 정치학 교수
  • [서울광장] 대선, 팬티까지 벗긴다지만/이목희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선, 팬티까지 벗긴다지만/이목희 논설위원

    1987년 직선제 도입 후 대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있다. 유력후보의 혼외자식설이다.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차례로 구설수를 탔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사람의 당선에 결정적 걸림돌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선거 한참 뒤에 문제가 더 불거졌고, 노 대통령은 재판을 통해 허위임을 입증받아 명예회복을 했다. 지금 이명박·박근혜 양 진영이 지독하게 붙은 것은 차명재산 의혹과 최태민 목사 의혹이다. 물밑에서는 사생활 공방이 만만찮다. 공방의 핵심은 혼외자식설.YS·DJ·노 대통령이 시달린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한나라당 경선전이 치열해지면서 양 진영에서 이를 ‘한방거리’로 여기는 분위기가 과거에 비해 훨씬 강한 편이다. 이 후보는 존비속 모두 소문에 휩싸이는 괴로움을 겪었다. 모친이 일본인이라는 의혹 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검찰의 DNA 검사까지 응했다. 혼외자식 부분은 측근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못 믿느냐.”고 일갈하면서 결백을 주장했다고 한다. 박 후보는 검증 청문회에서 시중의 소문에 대해 DNA 검사를 받을 용의가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럼에도 양쪽 인사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아직도 의문을 제기한다.“모 후보와 똑같이 닮은 혼외자식을 파악하고 있다.” “모 후보가 딸을 낳아 측근에게 입적시켜 길러 왔다.” 관련 자료와 증언을 확보하고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진실 여부를 떠나 사생활 논쟁을 일반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흥미있어 하지만 결론에선 견해가 제각각이다.“국정수행 능력과 별개”,“사생활이 정상이지 않으면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의견이 갈린다. 선진국에서도 이 문제는 논란거리다. 비교적 관대한 나라는 프랑스. 미테랑의 혼외자식, 시라크의 바람기, 사르코지의 사생활 문란이 대선전이나 국정운영에서 별로 이슈가 되지 않았다. 특히 시라크는 바람기를 국민들에게 친근한 이미지 구축용으로 활용했다. 시라크가 확산을 꺼린 부분은 정력 논란.‘샤워 포함 3분’이란 별명을 극히 싫어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미국은 좀 달랐다. 초대 워싱턴부터 39대 카터까지 이혼한 경력이 있는 대통령이 없었다.1988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주자 중 한명이었던 게리 하트가 모델과 염문으로 중도하차했다. 그러나 이는 겉모습일 뿐이다. 언론인 출신 셸리 로스는 ‘대통령의 스캔들’이란 저서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의 3분의1이 바람둥이였다고 분석했다. 케네디를 비롯해 워싱턴, 제퍼슨, 윌슨, 프랭클린 루스벨트, 아이젠하워 등은 혼외정사, 사생아 출산 등 여성편력이 화려한 대표선수들이었다. 부도덕성이 명확히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프라이버시로 여겨 상대 진영에서 악착같이 캐고 늘어지지 않았던 듯싶다. 이·박 후보의 혼외자식설이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국가 최고지도자를 목표로 한다면 사생활이 깨끗해야 한다. 홍준표 의원은 “대선은 팬티까지 벗기는 게임”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벗기더라도 예의를 지켰으면 한다. 뚜렷한 증거없이 소문으로 흘려 상대를 흠집내서는 안 된다.DNA 검사를 후보검증 필수항목으로 만들 수 없지 않은가. 자료가 있다면 공개하고, 공식해명을 들은 뒤 국민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후보의 사생활 논란과 관련해 우리 국민의식이 미국·프랑스보다 못할 것 없다고 본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경찰, 92년까지 선거 개입”

    “경찰, 92년까지 선거 개입”

    경찰이 정부 수립 이후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92년까지 선거운동 방해와 금품매수, 후보자 비방, 공안사건 조작 등으로 각종 선거에 불법 개입을 했거나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종수 한성대 교수)는 1일 ‘불법 선거개입 의혹’과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용공조작 의혹’ 등 3개 분야에 대한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올 연말로 시한이 끝나는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는 의혹을 일부 확인하는 차원에 머물렀을 뿐, 부끄러운 과거를 낱낱이 드러내는 데는 미흡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고문·용공조작 반성을” 이종수 위원장은 이날 “관련 재판기록과 전직 경찰간부들의 증언 및 비망록 등을 확인한 결과 경찰이 54년 제3대 민의원선거부터 87년 대선까지 광범위하게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87년 대선까지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의 광범위한 불법 개입이 판을 쳤지만,88∼92년에는 민주화의 점진적 진행에 따라 노골적인 개입보다는 치안정보 불법 이용 등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 87년 강원도 모 지역의 경찰서장을 지낸 이모씨로부터 “정부·여당이 도지사를 통해 활동비를 내려보낸 기억이 있다. 이 돈을 정보과장에게 줘 활동비로 사용하게 했다.”는 증언을 처음으로 확보해 80년대 말까지 경찰이 정부 지원금으로 선거에 불법개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과거사위는 또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보안경찰의 사찰 활동인 ‘요시찰(要視察) 카드’가 적어도 94년말까지 공식적으로 존재했으며, 이 지침을 승계한 대공관리지침이 참여정부 출범 이후인 2004년 1월까지 존속됐다고 밝혔다. 아울러 인물존안자료는 99년초 폐기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용공조작 의혹과 관련, 과거사위는 부정선거 시비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경찰이 공안사건을 발표해 무더기로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을 잡아들인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67년 6·8선거 부정 규탄 시위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그해 316건에 그쳤던 국보법 위반 송치 건수가 68년과 69년에는 각각 950건,801건으로 급증했고, 유신이 선포된 72년과 민주화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86∼90년에도 송치 건수가 급증했다는 것이 과거사위의 판단이다. 과거사위는 “과거 정치 권력이 정권 연장의 목적을 위해 경찰을 이용했고, 권력으로부터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경찰 또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 “고문과 용공조작 등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을 반성하고 중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고된 미완의 진상 규명 이날 발표된 결과는 대부분 그동안의 의혹을 정리한 뒤,“정황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는 수준에 머물러 과거사 규명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2005년 3월 출범한 과거사위에는 14명의 위원 가운데 경찰청 치안감 이상 간부가 5명이나 포함돼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는 지적이 일찍부터 제기돼 왔다. 이종수 위원장은 “선거에 경찰이 개입했다는 관련 자료가 공식적으로 남아 있기 힘들다. 관련 증언들을 폭넓게 청취해 진상을 밝히려 노력한 것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박병섭 위원도 “3대 분야에 대한 포괄 조사를 시작할 때부터 한계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위원회의 목적이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경찰이 이를 침해했던 과거를 밝히고 신뢰받는 계기로 삼자는 의도였다.”고 해명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미진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대선 일정을 감안해 11월 말까지 활동을 마무리짓는 것으로 국방부, 국정원 등 과거사위를 둔 기관들과 조율이 끝난 상태”라면서 “이의 제기가 들어온 청주대 자주대오 및 나주부대 민간인 학살사건을 보완 조사하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조사는 끝났으며 백서를 준비하는 단계”라고 밝혔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정책선거 원년으로] ‘구체성 공약’ DJ 34%-YS 31%-노무현 29% 順

    [정책선거 원년으로] ‘구체성 공약’ DJ 34%-YS 31%-노무현 29% 順

    노태우 전 대통령은 13대 대선에서 ‘집권 기본강령 10장’을 집권 철학으로 제시하고 10개 분야 571개 공약을 내놓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4대 대선에서 ‘신한국 창조를 위한 김영삼의 실천약속’이란 제목 아래 10대 과제,738개 공약을 제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에서 ‘국난 극복과 내일의 번영을 위한 당신과 나의 약속’이란 공약집에서 170개의 목표를 열거하고,1016개의 공약을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4대 비전,20대 정책목표,150대 핵심과제를 내놓았다. 공약수는 1397개(서울신문과 대선평가교수단 공동집계 결과)였다. ●역대 정부 공약 구체성 미흡 역대 대통령들이 집권 직전 대선에서 내놓은 공약을 분석한 결과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인식 가능한 공약은 20∼3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지방자치제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세제를 개편해 국세의 일부를 지방세로 한다.’(노태우 전 대통령)는 공약은 세제를 어떻게 개편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대외무역법을 개정해 수출입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무역업무 자동화사업을 추진해 서류 없는 무역행정을 실현한다.’(김영삼 전 대통령)는 공약도 무슨 절차로 어떻게 간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없다. 이와 반대로 ‘제2의 중소기업은행을 신설해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공급을 확대한다.’(노태우 전 대통령)는 공약이나 ‘국민연금기금운영위원회를 상설화 하겠다.’(노무현 대통령)는 공약은 은행 신설과 위원회 상설화라는 구체성을 띠고 있어 유권자들의 판단이 가능했다. 구체적으로 내용을 알 수 있는 공약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비교적 많이 나왔다. 김 전 대통령의 1016개 공약 가운데 349개(34.4%)가 구체성을 갖춘 공약이었다. 다음은 김영삼 전 대통령(31.3%), 노무현 대통령 29.1%, 노태우 전 대통령 23.1% 등의 순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고 밝힌 뒤 기한이나 예산까지 명시하면 공약은 더욱 분명해진다.‘농어업 분야의 연구개발비를 현재 700억원 수준에서 1998년까지 2000억원 수준으로 확대한다.’(김영삼 전 대통령)는 공약이 여기에 해당된다. 기한이나 예산까지 명시한 공약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약에서 많이 나타났다. 김 전 대통령의 공약 738개 가운데 84건(11.3%)이 기한이나 예산을 명시했다. ●실현 방식도 정권마다 달라 공약의 실현 수단을 법제정, 제도 도입, 계획수립, 기구설치, 기관설립, 예산, 세제, 폐지·금지 등으로 구분해 봐도 각 정권별 특징이 나타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약 가운데 제도도입을 밝힌 공약이 24건으로 가장 많았고, 기관설립을 밝힌 공약은 17건으로 뒤를 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약에서는 기관설립이 26건, 예산 배정이 22건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도도입이 72건, 기구설치가 47건이었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제도도입 84건과 기구설치 32건을 제시했다. ‘사학진흥법을 제정하겠다.’(김대중 전 대통령)는 공약처럼 새로운 법을 제정하겠다는 공약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36건이었다.‘자치경찰제를 도입하겠다.’(노무현 대통령)는 공약처럼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방식은 노무현 대통령이 주로 활용했다. ‘낙도개발 5개년 종합계획을 수립하겠다.’(노태우 전 대통령)는 공약처럼 해당 정책의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는 계획수립 방식도 있다.‘국무총리 산하에 환경영향평가위원회를 설립하겠다.’(김대중 전 대통령)는 공약처럼 정부기구나 각종 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47개의 기구나 위원회 설치를 약속해 가장 많이 활용했다. 기관설립은 ‘해외과학기술정보센터를 설립·운영하겠다.’(김영삼 전 대통령)는 공약처럼 정부기구 외의 공공기관을 설립하겠다는 것이다.‘1998년까지 1조원의 신제품개발자금을 확보, 지원하겠다.’(김영삼 전 대통령)는 공약처럼 직접적인 예산 지원 의지를 밝히는 방식도 활용됐다. ●경제 공약이 가장 많아 역대 대통령들의 공약을 20개 분야로 나눠 본 결과 경제공약을 가장 많이 내놓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체 571개 공약 가운데 경제 공약이 87개(15.2%), 교육 분야 67개(11.7%), 농어업 분야 60개(10.5%) 순으로 분석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체 738개 공약 가운데 교육이 82개(11.1%), 농어업이 78개(10.6%), 경제 분야가 73개(9.8%)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경제 129개(12.7%), 여성·청소년 93개(9.2%), 교육 82개(8.1%) 순이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 180개(12.9%), 보건·복지 분야 177개(12.7%), 농어업 분야 142개(10.2%) 순으로 공약을 제시했다. 대표집필 오수길 한국디지털대 교수 ■ 공약도 ‘확대 재생산’ 공약에도 생명 주기(라이프 사이클)가 있다. 과거에 공약으로 채택된 종책방안이 여러 정당과 후보들의 공약에서도 시기를 달리하면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주택보급률 공약의 경우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8년에 90%,2000년에 100% 달성을 내세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에 2002년까지 100% 달성을,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까지 110% 달성을 내놓았다. 공공임대 주택은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약에서 50만호 이상 건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는 30만호 내외 건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만호 건설을 약속했다. 작전지휘권 재조정(노태우 전 대통령), 상호출자금지 및 출자총액제한(〃), 공공기관 지방이전(김영삼 전 대통령), 전시작전권 환수(〃) 등의 정책은 참여정부 들어서까지 논란이 됐다. 이처럼 공약이 생명력을 갖는 것은 처음 제시된 당시에는 여론이 무르익지 않고 갖가지 저항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 후보가 정책으로 이어받고 일정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맞는다면 탄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표심을 다지는 과정에서 제시된 공약은 선거를 거듭하며 확대 재생산되기도 한다. 표를 가진 집단은 다음 선거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음 후보들은 이전 정부의 공약을 참조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당선자의 공약에 대해서는 국민적 평가가 따라야 한다. 제시된 공약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야당의 반대가 심했다.’ 등의 변명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목표, 우선순위, 절차, 재원, 기한이 체계적으로 제시됐다면 어떤 시기에 공약이 성숙되지 못했고, 어떤 측면에서 반대가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해 다음에는 실현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한 줄짜리 공약을 수백개씩 묶은 공약집을 발간할 게 아니라 분명한 철학, 비전, 목표 속에 각 분야별 정책들의 ‘인과(因果) 지도’를 그리는 방식으로 공약을 마련한다면 공약집은 유권자들에게 꿈을 이뤄가는 이정표가 될 수 있으며,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 [씨줄날줄] 필승론과 필패론

    정주영씨가 1992년 대선에서 당선될 듯싶지 않았다. 국민당 고위인사에게 “뭘 믿고 그렇게 올인하느냐.”고 물었다. 고위인사는 ‘정주영 필승론’이란 내부보고서를 보여줬다. 현대 및 협력업체 직원과 가족, 영남·강원 표를 합쳐 무난히 당선된다고 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니 그는 국민당 산하 연구소의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정 후보 지지가 김영삼(YS)·김대중(DJ) 후보와 박빙으로 집계돼 있었다.“대상이 현대 직원이냐. 이런 자료로 왜 정 회장 같은 전문 기업인을 현혹하느냐.”고 했는데도 그 인사는 ‘정주영 필승론’을 종교처럼 되뇌었다. 대선필승론의 대표 사례는 1987년 DJ의 4자필승론이다. 노태우 후보와 YS가 영남표를 갈라먹을 때 호남표를 지키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봤다. 사실 4자필승론은 DJ만 의존한 게 아니다. 노태우 후보측은 막강한 정보력으로 전국의 표를 한표한표 세다시피 했다. 양김씨가 동시출마하면 당선된다는 확신을 갖고 직선제를 수용한 것이다.YS도 마찬가지. 부산·경남의 열렬한 지지에 도취해 4자구도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97년 대선부터는 네거티브가 강해지면서 필패론이 많아졌다. 이인제씨가 신한국당을 뛰쳐나간 명분이 ‘이회창 필패론’이었다.2002년 대선에서는 역으로 노무현 후보가 ‘이인제 필패론’을 내세워 민주당 후보를 따냈다. 올해 대선은 그야말로 필승론과 필패론의 홍수다.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가 ‘이명박 필패론’을 제기하자 이 후보는 ‘이명박 필승론’으로 맞받고 있다. 군소후보가 난립한 범여권에서는 여론조사 지지율 1∼2%를 갖고도 필승론의 외침이 우렁차다. 필승론과 필패론은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적당한 선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선거전이 가열되면서 자기최면에 걸리는 게 문제다. 내가 아니면 안 되고, 상대 후보가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한발만 물러서면 정치전문가가 아니라도 보이는 것이 콩깍지가 살짝 덮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안 될 후보는 아무리 필승론을 주장해도 안 된다. 한방에 갈 후보는 필패론으로 헐뜯지 않아도 간다. 변수가 많은 미래를 놓고 ‘반드시 필(必)’자에 집착해 대선판을 살벌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정책선거 원년으로]공약을 보면 시대상이 보인다

    [정책선거 원년으로]공약을 보면 시대상이 보인다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제시된 공약의 대부분은 엇비슷할 뿐만 아니라 장밋빛 일색이다. 이전 정부에서 이루지 못한 정책을 계속 가져다 썼고, 선심성 공약을 마구 베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약에서 당시 시대 흐름과 후보의 철학을 찾을 수 있다. ●의외로 진보적인 노태우 공약 1987년 6월 항쟁으로 어쩔 수 없이 직선에 나선 노태우 후보의 공약은 상당히 진보적이다. 비록 김영삼 정부에서 실현됐지만 전면적인 지방자치제 실시를 약속한 이는 노태우 후보였다. 밀폐수사 금지, 토지공개념 확대, 출자총액제한, 재벌의 소유·경영 분리, 작전지휘권 재조정 등이 진보적 공약으로 꼽힌다. 1987년 대선에서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을 맡아 공약 전반을 기획했던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는 “당시 여당은 일단 정권을 연장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와 인권 관련 공약이 우선시됐다.”고 회고했다. 인천국제공항, 경부고속철도, 서해안고속도로 등 굵직한 사회간접자본(SOC) 계획의 대부분도 이때 나온 공약이다. 동해안 국제공항, 서울~영동 고속철도 건설과 같은 무모한 공약도 나왔다. 당시 공약 개발의 기획자였던 전병민(현 한국정책연구원 고문)씨는 “전두환 정권은 물가를 잡느라 SOC 투자를 하지 못했다.”면서 “노태우 후보는 정부와 공무원의 역량을 총동원해 건설 공약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농촌에 발목잡힌 김영삼 공약 1992년 집권 여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개혁’에 초점을 맞췄다.‘후보자 본인 및 배우자 직계존비속 재산공개’를 첫번째 공약으로 내세울 만큼 강한 의욕을 보였다. 집권 이후 이 공약을 지켰고, 대통령의 재산공개는 현재 1급 이상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김영삼 후보는 특히 농촌 공약에 많은 신경을 썼다. 당시 농촌은 우루과이라운드(UR)의 거센 쌀 시장 개방요구에 직면해 있던 터였다. YS는 공약집에 ‘쌀은 수입하지 않는다.’고 공언했고, 노태우 정부가 말기에 추진했던 10년간 42조원이 투자되는 농어촌구조개선 사업을 공약으로 계승했다. 그러나 결국 1995년 12월 UR협상이 타결돼 야당과 농민으로부터 ‘정권퇴진’의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IMF·자민련 변수에 얽매인 김대중 공약 김영삼 정부 막판에 터진 외환위기 사태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의 꿈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가 됐지만, 자신의 경제철학이었던 중산층·서민을 위한 ‘대중경제론’을 접어야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금융실명제 유보와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제한적 적용 등 이전 정부보다 후퇴한 경제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대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 의장이었던 김원길 한국여자농구연맹 총재는 “악마의 돈도 마다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보수적인 자민련과 ‘후보 단일화’를 약속하는 바람에 내각제 개헌을 공약에 포함시켜야 했다. 김대중 후보가 가장 자신감을 보였던 통일공약보다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억제’와 같은 안보공약이 우선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는 공약집 끝머리 항목 ‘남북기본합의서에 기초한 남북관계 개선’의 괄호 속에서 겨우 찾을 수 있을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분배·성장이 충돌한 노무현 공약 노무현 후보의 공약은 토론의 산물이다. 공약 입안에 가담했던 브레인들은 “정책 브레인 사이에 치열한 논쟁을 거쳐 공약이 완성돼 갔다.”고 전한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정치인 위주로 꾸려졌던 이전 정부와 달리 모두 진보적인 학자로 채워진 데서도 정책에 대한 참여정부의 깊은 관심을 찾을 수 있다. 처음 공약을 입안했던 장하원·유종일·서동만·정해구·유시민·정태인 등 진보적인 학자들은 북유럽형 사민주의와 사회대타협, 차별철폐, 분배에 무게를 뒀다. 역대 후보들의 단골 공약인 ‘작은 정부’는 신자유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배제됐다. 부동산 개발을 통한 경기 부양책도 언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장정책이 추가됐다. 연 7% 성장이 공약으로 나오자 일부 학자는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성공회대 교수는 “선거가 가까워지고, 야당의 이념공세가 거세지면서 성장형 공약이 많이 개입됐다.”고 소개했다. 노 대통령의 전매특허인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공약도 처음에는 동북아 국가간 연대에 무게중심을 뒀다. 하지만 물류허브(중심), 금융허브 등 경쟁·성장정책이 끼어들면서 ‘동북아 중심국가’로 변해 갔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 등이 현 정부 비판의 선두에 선 것도 노 대통령의 공약과 정책이 그만큼 논쟁적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창구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 조석래 전경련회장 발언 파문

    조석래 전경련회장 발언 파문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25일 “다음 대통령은 경제대통령이 돼야 한다.”며 “그것이 바로 국민의 뜻”이라고 잘라말했다. 조 회장은 이날 제주 서귀포시 신라호텔에서 열린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한 ‘2007 전경련 하계포럼’에서 이같이 말했다. 조 회장은 ‘미래 한국 비전과 차기 지도자에게 드리는 제언’이라는 제목의 특별강연에서 정치권과 정부를 향해 강도높은 비판을 쏟아내 파문이 일고 있다. ●“무균으로 자란 사람 있나” 조 회장은 먼저 차기 대통령의 자격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국가 지도자는 시장경제를 잘 알고 경제 제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차기 지도자는 세계시장을 잘 알고 글로벌 경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회장은 한나라당 이명박·박근혜 후보간의 검증공방과 관련,“외국사람에게 물어보니까 ‘무균(無菌)으로 자라온 사람이 있겠느냐.’고 했다.”면서 “(검증공방을)졸업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명박 후보에게 유리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다. ●동생 조양래씨 이 후보와 사돈 조 회장의 친동생인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과 이명박 후보는 사돈관계다. 조 회장은 범(汎) 여권에 대한 비판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탈당, 합당 등을 보면 국민들은 혼란스럽다.”면서 “정치인들이 정책중심으로 가줘야 국민들이 안심하고 따라갈 수 있는데 자기네들 앞날을 위해 왔다갔다하는 것 같다.”고 원칙에서 벗어난 듯한 이합집산을 비판했다. 전경련 회장이 대선이 불과 5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민감한 얘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 전경련 회장이 CEO포럼에서 1시간을 강연한 것은 지난 1987년 포럼이 생긴 이후 조 회장이 처음이다. 조 회장은 작심한 듯 정부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조 회장은 노사 문제와 관련,“불법을 엄단하겠다고 해놓고 결국 흐지부지한다.”면서 “이랜드 사태가 좋은 예”라고 말했다. 그는 또 “수도권 규제와 아파트 원가공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서 “시장원리에 맞는 게 국민의 뜻이고 이에 반하면 독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귀포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정책선거 원년으로] 대선정책 평가교수단 역대 공약 점검

    [정책선거 원년으로] 대선정책 평가교수단 역대 공약 점검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의 역사에서 본격적인 공약대결이 시작된 것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쟁취한 13대 대선부터다. 이전에는 ‘사사오입’ ‘부정선거’ ‘유신’ ‘체육관선거’라는 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약은 철저히 무시됐다. 민주화 이후의 대선 공약도 진정한 의미에서 국민과의 약속은 아니었다. 공약이 선거의 장식품으로 전락해 유권자의 선택기준으로 기능하지 못한 탓이다. 지역주의가 선거를 지배하는 구도가 계속되면서 정책공약은 유권자를 동원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후보나 정당은 실천 가능한 정책공약을 개발해 유권자들의 표를 얻으려는 노력보다는 뭐든지 다 해 주겠다며 백화점식으로 나열하거나, 장밋빛 공약만 형식적으로 내놓았다. 막상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공약 이행에는 관심이 없고, 백지위임을 받은 것처럼 통치해 왔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유권자는 대통령과 정부를 불신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다행히 2002년 16대 대선부터 3김의 퇴장과 함께 지역주의가 완화되고, 이념적 경쟁이 자리잡으면서 정책공약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보를 강조한 노무현 후보와 보수를 강조한 이회창 후보가 원심적 대결을 펼치면서 공약의 차별화가 이뤄진 것이다.15대 대선부터 도입된 TV토론은 후보자간 정책 차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2002년 대선도 과거의 구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주먹구구식 공약 역대 대선 공약을 살펴보면 우선 매니페스토(참공약 실천)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슬로건이나 구호로 끝난 게 대부분이다. 정당과 후보는 그럴싸한 수사로 공약의 기조를 제시했으나 구체적 실현 방안은 제시하지 않았다. 특히 재원과 추진일정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공약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넉넉하고 고른 경제’,‘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계층간 갈등을 해소해 균형잡힌 사회를 이룩한다.’는 등의 약속은 장밋빛이었지만, 실천방안은 회색빛이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는 신한국창조를 위한 10대 과제,77개 공약을 발표했다.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도 100대 중점공약을 제시했다.2002년 노무현 후보도 21세기 국가발전을 위한 전략으로 4대 비전과 20대 정책목표,150대 핵심과제를 제시했으나 모두 실천방안이 결여됐다. 진정한 의미의 매니페스토 공약은 아니었던 셈이다. 구체적인 수치가 제시된 공약도 주먹구구식이 많았다.1987년 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제시한 물가상승률 2∼3% 유지 공약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게 뻔한 주택 200만호 건설과 숱한 개발공약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1997년 김대중 후보가 내놓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의 세계 5강 진입’ 공약은 외환위기 체제에서 어떻게 이루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2002년 노무현 후보의 경제성장률 연 7% 달성 공약은 이회창 후보의 6% 성장 공약에 대응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우선순위 없는 망라형 공약 제한된 예산을 갖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효과적으로 집행하겠다는 우선순위가 제시된 공약도 별로 없었다. 공약의 기조와 10대 과제,100대 과제 등은 나열에 불과하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교육 총리’가 되겠다고 선언한 뒤 교육공약을 집중적으로 강조한 것과 대조적이다. 정책은 기본적으로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역대 대선공약은 각계각층의 모든 유권자를 다 만족시키려고 했다. 우선순위를 부여하면 특정계층에 치우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래서 고른 득표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밝히기를 꺼린 것이다. 예산의 뒤에는 이해관계자가 있고 이들의 표를 의식하는 후보로서는 모든 부문의 예산을 증액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감내할 수 있는 예산규모는 한계가 있다. 주어진 예산추계의 틀 속에서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를 애써 모른 체하면서 유권자를 속여 온 셈이다. 역대 대선에서는 실현가능성과 우선순위는 무시되고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진 공약들이 망라돼 제시됐다. 뿐만 아니라 선거 막판에 ‘깜짝 공약’이 등장해 선거판을 뒤흔들기도 했다. 정책공약보다는 정치공세가 주류를 이뤄 혼탁해진 경험도 많다. ●비전 아닌 선심경쟁 역대 대선공약은 ‘비전경쟁’이 아닌 ‘선심경쟁’이었다.1987년 13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농가부채 전면탕감을, 김영삼 후보는 그린벨트 해제를 내걸어 공약(空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4대 대선에서는 정주영 국민당 후보가 제시한 ‘아파트 반값 공급’ 공약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젊은 층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군복무기간 단축, 예비군 복무기간 단축은 선심성 공약의 단골메뉴다. ●깜짝공약·위헌공약으로 당선 돌발적인 ‘깜짝공약’이 선거판세를 좌우한 경우도 많다.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막판 선거 유세중 ‘88올림픽을 치른 후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공약을 갑자기 발표했다. 중간평가 공약은 6공화국의 족쇄가 됐으며, 결국 야당과 적당히 타협해 없었던 일로 처리됐다. 15대 대선의 깜짝공약은 내각제 개헌이었다.1997년 11월3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대통령후보는 김대중, 총리는 김종필이 맡도록 하는 야권후보단일화에 합의했고, 내각제 개헌을 대선공약으로 채택했다.1999년말까지 개헌을 완료한다고 했으나 이 공약은 실현되지 않았다.16대 대선의 깜짝공약은 노무현 후보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라고 할 수 있다. 실행계획과 재원조달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발표된 것이다. 한나라당은 “행정수도를 이전하려면 40조원이 든다.”고 반박했지만, 노무현 후보 측은 “4조 5000억원이면 충분하다.”고 맞받아쳤다. 결국 행정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결정이 내려졌다. ●정치공세에 눌린 정책대결 대선공약은 정치공세에 눌려 빛을 발할 수 없었다.13대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가짜 보통사람’,‘쿠데타의 주역’으로,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당을 깨고, 거짓말을 일삼는 후보’로 매도됐다. 14대 대선 초반부터 색깔론 시비, 현대그룹을 동원한 금권선거 시비, 초원복집 사건 등이 쟁점으로 부상해 지역주의가 극에 달했다.15대 대선의 이슈는 정권교체,3김 청산, 세대교체 등이었다. 내각제도 정권교체와 맞물린 이슈였다.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문제,DJ 비자금 사건, 경제파탄 책임론과 IMF 재협상론 등도 쟁점이었다.16대 대선에서는 여권의 대선후보 국민경선과 후보단일화 등이 주된 이슈가 돼 정책대결을 사실상 가로막았다. 월드컵 열풍과 미군 장갑차 사건,DJ정부 말기에 터진 각종 게이트, 서해교전 등도 정책 선거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매니페스토 검증이 우선돼야 공약 입안과 집행과정의 폐쇄성도 문제다. 많은 학자와 당 관계자가 참여했다고는 하나 공론화 과정은 없었다. 공약이행 평가도 공개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심지어 정권 인수위 등에서 공약이행계획을 작성하면 이것이 대외비 문서로 관리되거나, 기록조차 남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구체적인 매니페스토식 공약이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선공약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길은 매니페스토 요건을 갖춘 공약을 제시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먼저 후보자와 정당이 목표, 우선순위, 절차, 기한, 재원 등 매니페스토 요건을 갖춘 공약을 제시하고, 이를 유권자 앞에서 공개해 토론을 통해 검증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래야 선거캠페인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공약이 제기능을 다할 수 있다. 이현출 국회입법연구관
  • [정책선거 원년으로] 4개 정부 공약입안·집행 핵심 4인 대담

    [정책선거 원년으로] 4개 정부 공약입안·집행 핵심 4인 대담

    서울신문 취재팀은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 마련의 핵심역할을 했던 13명과 심층 인터뷰를 했다. 이들은 후보의 선거 캠프에서 핵심브레인 역할을 했으며, 집권 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나 청와대·여당·내각 등에서 요직을 거쳐 공약 입안과 실행 과정을 꿰뚫고 있는 인물들이다. 13명 가운데 노태우 정부의 김종인(현 통합민주당 의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영삼 정부의 이원종(현 우리누리재단 이사장) 전 청와대 정무수석, 김대중 정부의 김원길(현 한국여자농구연맹 총재) 전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의장, 노무현 정부의 김병준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 등 4명의 발언을 지상 대담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다른 이들의 증언은 괄호에 담았다. 김종인 의원은 1987년 대선에서 민정당의 태스크포스팀(TFT)이었던 국책연구소에서 최병렬(전 한나라당 대표) 정세분석실장, 현홍주 의원 등과 함께 공약을 개발했다. 지금의 인수위격인 제13대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 경제 담당 위원을 거쳐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이원종 이사장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의 공보특보와 청와대 정무수석을 거쳤다. 김원길 총재는 국민의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김병준 위원장은 오래 전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 설계에 참여했고, 집권 후 인수위 정무분과 간사, 청와대 정책실장, 교육부총리를 지낸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다. ▶공약 입안 당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나. ●김종인 민주화 요구가 뜨거웠던 1987년에는 당연히 중산층 이하를 대상으로 한 공약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위헌 요소가 짙었던 토지공개념 확대와 상호출자금지, 출자총액제한,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조치와 같은 재벌개혁들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원종 1992년 대선의 화두는 문민화와 부패 척결, 개혁이었다.(지역감정 해소도 큰 비중을 뒀으나 대선을 거치면서 골이 더 깊어졌다.-황인성 전 국무총리, 대선 당시 민자당 정책위의장) ●김원길 1997년 대선은 당연히 외환위기 극복이 가장 큰 변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약집 제목이 ‘국난 극복과 내일의 번영을 위한 당신과 나의 약속’이었고, 외환위기 체제를 1년 반 내에 극복하겠다는 것이 제1공약이었다. ●김병준 2002년 노무현 후보는 ‘국가-시장-공동체’의 상생구조를 다시 짜는 게 목표였다.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라는 3대 국정목표도 이 틀 속에서 나왔다.(애초에는 서민 대통령과 북유럽형 사회대타협이 핵심이었지만 당과 정부 관료들이 가세하면서 퇴색했다.-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선거 당시 경제공약 브레인) ▶공약에 후보의 철학과 비전이 얼마나 반영됐나. ●김종인 역대 대통령 가운데 솔직히 대단한 철학과 공약으로 당선된 사람은 없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성격이 꼼꼼해서 그런지 당선 후 공약진척도를 일일이 체크했다. ●이원종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에서도 군정종식을 주장했고,1992년에도 군이 다시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언제 어떤 개혁을 한다고 구체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하고 싶은 개혁은 다 했다.(‘변화와 개혁’이라는 표어만 내걸었고, 실제 개혁 프로그램은 철저히 감췄다.-전병민 한국정책연구원 고문,1992년 대선 당시 선거 공약 기획) ●김원길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 출마 이후 옥중에서도, 해외 망명 중에서도 대통령을 준비해 왔다.1997년에도 모든 세부 공약을 대학노트에 빼곡하게 기록하며, 공약 입안 과정을 주도했다. 공약이 지역주의를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수십년간 발전시킨 정책 때문에 믿음을 살 수 있었다. ●김병준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시절부터 대통령과 함께했는데 지방분권, 분배를 통한 성장 등의 신념에 변함이 없었다. 공약의 이행여부를 계속 체크해 왔으며,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길 것이다.(전시작전권 환수는 공약에 없었는데, 인수위에서 전작권 환수문제가 느닷없이 나왔다.-한 외교안보전문가) ▶공약 작성시 예산 등 실현가능성을 염두에 뒀나. ●김종인 예나 지금이나 실현가능성을 생각하고 내놓는 공약은 별로 없다고 본다. 백화점식 나열이 많았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핵심 공약 1∼2개로 승부 거는 선거문화가 돼야 한다. 공약 자체가 급조된 측면이 많기 때문에 대통령이 너무 공약에 집착하다가는 나라가 거덜날 수 있다. ●이원종 핵심적인 공약 몇 개를 빼면 어차피 다 짜깁기한 것이다. 표가 된다 싶으면 공약집에 다 끌어 모은다. 정권별, 후보별 공약에 큰 차이가 없는 게 이 때문이다.(세금은 줄이면서 돈은 많이 쓰겠다는 게 제대로된 공약인가.-황인성 전 총리) ●김원길 공적연금 통합, 의약분업 등과 같은 공약은 사실 준비가 부족했다. 예산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행과정에서 큰 혼란을 겪었다.(공약은 선거 초기에나 관심을 갖는다. 선거 국면이 깊어지면 이슈 파이팅만 남는다. 유권자도 공약보고 투표하지 않는다.-이강래 의원, 대선 당시 DJ 정무담당특보) ●김병준 예산을 고민하지 않은 공약은 없었다. 연구개발 투자 공약을 늘리기 위해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대폭 축소하기도 했다.7% 성장 공약은 정치적인 판단이 강했다. 이회창 후보 측이 먼저 6% 성장을 내놓아 그보다 더 올려 논쟁해 보자는 측면이 컸다. ▶아쉽거나 실패한 공약은? ●김종인 ‘중간평가’ 공약을 끝까지 반대했는데, 후보가 초조함을 못 이기고 마지막 여의도 집회 때 덜컥 내놓았다. 그게 계속 발목을 잡았다. 의약분업과 전작권 이양, 재벌의 소유·경영 분리 등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할 뜻은 없었다. ●이원종 김영삼 정부는 외환위기 구제금융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쌀은 한 톨도 수입하지 않겠다고 공약했지만 결국 개방했고, 성급하게 세계화를 추진한 면이 아쉽다. 취임사에서 ‘민족에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고까지 했는데 남북관계가 위기로 치달은 것도 문제였다. ●김원길 외환위기 사태로 경제 운용의 제약이 컸다. 파국을 면하기 위해서는 기업을 내다 팔아야 했다. 오죽하면 금융실명제 유보 공약까지 했겠는가. 정권 막판에 신용카드 부양책을 써 경제가 망가진 것도 문제다. ●김병준 분권정책이 완벽하게 실현되지 못했다. 지방분권, 균형발전, 수도권 규제 완화, 서비스산업 육성이 한 패키지로 돌아가야 했는데 걸림돌이 많았다. 행정수도 이전이 위헌판결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가장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인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로 노무현 정부의 사민주의적 공약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정태인 전 비서관) ▶성공한 공약은? ●김종인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으로 6공화국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경부고속철도, 인천신공항, 서해안고속도로 등 최근 완공된 대규모 사회간접자본이 대부분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약에서 나왔다. 당시에는 선심성 공약이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개발정책이었다. 투자효과가 기대되지 않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중, 한·소 외교수립과 같은 북방외교정책도 평가돼야 한다. ●이원종 하나회 척결과 같은 군 개혁,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금융실명제 실시 등 한국의 부패구조를 전면 개혁한 것은 엄청난 성과다. 이 공약들은 예전부터 나온 것이었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금융실명제 실시는 청와대 경제수석도 몰랐을 정도로 기습적이었다. ●김원길 대선 1년여 전부터 공약을 준비하다 보니 우리나라에 곧 경제위기가 닥칠 것이 느껴졌다. 당시 정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위기가 오면 어떻게 극복하겠다는 계획을 짜게 됐다. 이런 준비 때문에 집권 후 외환위기 체제를 조기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김병준 현 정부 들어 정경유착과 부패구조가 사라졌다. 선거도 과거에 비해 몰라볼 정도로 투명해졌다. 국가 균형발전과 종합부동산세, 포괄적 상속증여세 등은 어떤 정권이 들어와도 되돌릴 수 없도록 할 것이다. 이창구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 유시춘씨 이해찬 캠프행 왜?

    유시춘씨 이해찬 캠프행 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친누나인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이 최근 범여권 대선주자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캠프에 홍보위원장으로 합류한 것으로 19일 밝혀졌다. 유 전 상임위원의 ‘이해찬 캠프행’은 이 전 총리의 부탁과 유 전 장관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루어졌다는 후문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사건’을 이 전 총리와 유 전 장관의 정치적 우정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친노 후보의 지지율 제고를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하는 기류도 있다. 유 전 상임위원은 동생인 유 전 장관, 자유 기고가인 유시주씨와 함께 이 전 총리의 정치 철학을 담은 책을 쓰기로 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출마가 임박한 것으로 알려진 유 전 장관의 최측근 인사가 이 전 총리의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맡게 되자 일각에서는 유 전 장관이 대선 출마를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유 전 상임위원은 “(이 전 총리를 지원하기로 한 것은)25년간 맺어온 인연 때문”이라면서 “유 전 장관이 출마해도 이 전 총리 캠프에서 활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 전 상임위원은 6월항쟁 2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재야의 홍보전문 일꾼으로 손꼽힌다. 유 전 상임위원과 이 전 총리는 1984년 유 전 장관이 ‘서울대 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함께 구명운동을 벌이며 인연을 맺었다. 이후 두 사람은 민가협과 민통련,6월항쟁 국본 지도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동지였다. 1987년 대선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판적 지지운동과 평민연 활동을 거치며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도 끈끈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유 전 상임위원의 선택은 범여권의 대통합이 급박하게 전개되는 정국에서 친노 후보의 대표주자인 이 전 총리의 지지도가 ‘뜨지’ 않는 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통합신당에 친노 진영이 결합하더라도 정국 주도력을 갖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유 전 장관으로서는 출마 이후 예상되는 비노 진영의 집중 공격에 이 전 총리가 완충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친노 진영의 전략적 배치로 해석되는 배경이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정책선거 원년으로] 역대 대선공약 대해부

    [정책선거 원년으로] 역대 대선공약 대해부

    ■ 김형준 명지대 교수가 본 ‘대선공약’ 대공황 시기에 치러진 1932년 미국 대선은 정초선거(foundation election)의 원형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15개의 혁명적인 법안을 통과시켜 경기부양과 실업대책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가 국가재건을 위한 이러한 과감한 변혁 조치를 신속하게 취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간단하다. 대선 기간 동안 국민에게 약속한 국가 발전 철학과 비전이 담겨 있는 공약을 실천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정초선거는 결코 공약(空約)에 바탕을 둔 구호가 아니라, 국민을 설득시키고 나라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참 공약(公約)에서 나온다. ●美루스벨트, 국가비전 공약에 담아 한국의 민주주의는 1987년 민주화운동이후 동일한 헌법에서 4차례의 대선을 치를 정도로 절차적 민주주의는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대선 공약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경제전반에 대한 영향이나 재원마련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표만 된다면 무조건 남발하는 ‘선심성 공약’, 정부지출의 확대를 약속하면서 오히려 세금을 깎겠다는 ‘허황된 공약’, 정책을 집행할 때 생길 수 있는 효과가 무엇인지에 대한 평가가 배제된 ‘한 줄짜리 부실공약’ 등이 한국 대선판을 요란하게 장식했다. 결과적으로 대선 공약은 유권자의 선택 기준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선거가 끝나면 애물단지가 되거나 금방 잊혀버리는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안정된 정당체계 속에서 정당들이 공약 개발에 치중하기보다는 기존 정당을 깨고 신당을 만드는 이합집산에만 매몰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념과 노선이 다른 정당과 후보들이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무모한 ‘한탕주의식 선거연합’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는 정책보다 지역과 인물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2007년 대선에서 그동안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책선거가 실종되는 위기를 넘어, 어렵게 쌓아올린 선거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퇴보하는 불행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선거가 5개월밖에 남지 않았는 데도 이른바 범여권은 ‘대통합 신당창당’ 타령만 하고 있고, 대선 후보 윤곽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민주성장 불구 허황된 공약 남발 야당인 한나라당 경선은 ‘상생, 정책, 공정’이라는 구호가 무색할 정도로 정책공약에 대한 진솔한 검증은 없다. 금도가 실종된 상대방 죽이기식 네거티브 공방에만 매몰되어 있다. 정책은 없고 네거티브만이 판을 치는 진흙탕 선거에서는 포퓰리즘에 입각한 선심성 깜짝 공약이 부상되게 마련이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이러한 기우가 현실화될 개연성이 크다. 과거에는 보통 대선 7개월 전에 후보를 선출해서 공약을 준비했지만 부실 덩어리였다. 하물며 선거를 2∼4개월 남기고 선출된 후보들이 내실 있는 공약을 제시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하다. ●정책선거가 민주발전 지름길 매니페스토 정책선거를 정립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후보자와 정당이 목표, 우선순위, 절차, 기한, 재원 등 매니페스토 요건을 갖춘 공약만을 제시하도록 하고, 이를 철저하게 검증할 수 있는 절차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는 언론의 사명·역할과도 부합된다. 언론은 선거 결과보다는 선거 과정을 아름답게 하고, 유권자들에게 올바른 지식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 역대 대선공약 탄생의 비화 서울신문 취재팀은 역대 대통령 후보의 공약을 만든 핵심 브레인을 인터뷰해 공약이 나오기까지의 숨은 얘기를 들어봤다. ●친구들과 주고받은 농담이 공약으로 “뭘 그리 고민해. 일단 뽑아달라고 하고, 국민들이 일 못한다고 하면 그만둔다고 해.” 술자리에서 툭 던진 친구의 농담이 귓속을 파고 들었다.1987년 노태우 후보의 선거팀 ‘한가람기획’에서 일하던 전병민(현 한국정책연구원 고문)씨는 여기서 ‘중간평가’ 아이디어를 얻었다. 서울대 법대 교수 두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헌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맥이 풀렸다. 잠을 청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교수 중 한 명이 “헌법적으로는 안 되지만 정치적으로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동이 트자마자 기획안을 만들어 당시 민정당 정세분석실장이었던 최병렬 의원에게 넘겼다.1987년 10월30일의 일이다. 노태우 후보는 선거 1주일 전 여의도 ‘100만명 집회’에서 중간평가 공약을 불쑥 내놨다.36.7%의 득표율로 아슬아슬하게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중간평가’ 공약으로 톡톡히 곤욕을 치른다. 전병민씨는 ‘중간평가대책단장’을 맡은 박철언씨를 비롯한 참모들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어야 했다. 전병민 고문은 “박철언 주도의 3당합당이 성사되고,DJ의 20억원 수수설이 불거지면서 중간평가 논란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우리가 남이가”에 한 숨 돌린 YS 1992년 민자당 김영삼 대통령 후보는 검증된 ‘선거 기술자들’인 전병민 임팩트 코리아 대표와 최병렬 의원을 선거 캠프에 기용했다.YS 선거기획팀인 ‘동숭동팀’의 전병민씨는 “정주영 국민당 후보는 ‘주책없는 할아버지’로 몰아 세웠고,DJ와는 지역대결로 승부했다.”고 전했다. 대선 직전에 터진 ‘초원복집’ 사건은 YS 캠프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 부산시장 등 지역기관장을 부산의 음식점 초원복집으로 불러 가진 대선 대책회의 내용이 정주영 후보 측의 도청으로 공개된 것이다. 최병렬 당시 선거대책위 기획위원장은 “유세를 마치고 돌아온 YS가 고래고래 소리치며 김기춘 장관을 욕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했다.”고 전했다. 그는 YS를 63빌딩으로 데려가 “결코 불리한 사건이 아닙니다. 두고 보십시오.”라고 위로했다.YS도 빙그레 웃었다. 다음날부터 경상도 민심은 ‘우리가 남이가’로 모아졌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부터 검토됐던 금융실명제는 YS의 단독 작품이었다. 황인성 전 총리는 “대통령에게 ‘언제 하실 겁니까.’라고 물으면 ‘하긴 합니다.’라는 대답만 했다.”고 회고했다. ●문구까지 감수한 ‘꼼꼼한 DJ’ 1997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의 ‘준비된 대통령’론은 빈말이 아니었다.DJ는 1971년 처음 대선에 나간 이후 자신의 철학과 비전을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DJ의 측근인 고재득 통합민주당 사무총장은 “DJ는 공약집 문장의 조사와 부사까지 바로잡고,500여개의 세부공약을 빠짐없이 외울 정도였다.”고 말했다.DJ는 전자정부 실현, 정보통신벤처기업 1만개 육성 등 정보통신국가로의 리모델링을 강조했다. 당시 정무담당특보였던 이강래 의원은 “IT강국은 DJ의 오랜 신념이었다.”고 말했다. 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이었던 김원길 한국여자농구연맹 총재는 “당시 세종대 재단이사장이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제안해 왔으나, 토목사업보다는 IT 육성이 더 시대에 맞는다고 판단해 공약으로 채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로드맵’속에서 길 잃은 참여정부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가장 중점을 뒀던 것은 ‘행정수도 이전’. 김병준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은 “‘균형발전’이라는 대통령의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공약 구상 단계에서는 깊은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브레인들은 ‘평화번영의 동북아시대’라는 공약에 무게를 뒀고,FTA의 대상을 아세안 국가나 일본으로 한정했으나 2005년 8월 갑자기 한·미 FTA가 핵심 정책으로 대두됐다고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전한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나 정 전 비서관 등 초기 브레인들이 청와대를 떠난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이창구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 [열린세상] 제헌절의 주인공은 도덕적 국민/강경근 숭실대 헌법학 교수

    [열린세상] 제헌절의 주인공은 도덕적 국민/강경근 숭실대 헌법학 교수

    대한민국을 건국한 제헌헌법이 제정된 지 올해로 59주년이다. 그 세월, 헌법에 담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법치주의는 간난을 겪으면서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7월17일 제헌절을 기리는 이유가, 거기에 우리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 기리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입법부·행정부 그리고 사법부의 주요한 자리를 차지한 공직자들이 단상을 빛낸다. 하지만 헌법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국가 기능을 이끌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준 이 헌법에 좋은 영향을 미친 이들은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이었다는 점이다. 제헌이후 9차례의 헌법개정사를 보면, 헌법의 가슴과 팔과 다리에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사람들이 바로 권력의 자리에 있거나 그 과정에 참여한 일부이었기 때문이다. 건국과 부국(富國)의 공은 인정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 및 초대 대통령에 한한 3선연임제 개헌이나 박정희 정부의 대통령 3선연임제 개헌이 그 범주에 속한다. 심지어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 인사들이 뽑은 유신 대통령, 대통령선거인단이 선출토록 한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구성된 전두환 정권도 있었다. 그 곡절 끝에,1987년 6월 시민항쟁으로 제정된 현행 헌법에 의하여 국민 직선으로 뽑힌 단임 대통령인 노태우·김영삼·김대중의 정부에 이어 지금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 있다. 이를 보면 우리 헌정사는 헌법을 무시한 권력자들의 공적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를 징벌한 도덕적 국민의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월 대통령 4년연임제 개헌 의사를 밝히면서 헌법을 시대정신의 표현이라고까지 말한 노 대통령이 반년도 되지 않아 ‘이놈의 헌법’이라고 한 말은, 그래서 의외였다. 헌법이 곧 시대정신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 헌법이 표출하는 시대정신은, 권력자가 일방적으로 헌법 정신을 재단 또는 훼손하는 일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국민 의지임을 노 대통령은 정녕 몰랐던 것인가. 헌법은 국민 전체가 만들고 형성하는 규범이지 권력자가 재단하고 자르는 옷감이 아니다. 그래서 그 국민을 노동자·농민 등에 한정하고 그들을 민중 내지 프롤레타리아로 부르면서, 그들에게만 주권이 있으며 나머지 국민에게는 주권자가 아닌 현대판 농노 내지 신민으로 남게 하는 인민독재의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한국헌법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북한의 이른바 사회주의헌법조차도 무시하고 아버지의 피로 권력을 승계 받아 북한 인민들을 아사시킨 김정일 체제를 우리 헌법 제3조는 명확히 부인하는 것이다. 그런 헌법 원칙을 지키면서 북한 인민을 위한 대북정책을 펴는 일이야말로 국민을 위하는 위민(爲民)의 헌법정신이다. 제헌절은 권력자들이 새삼 옷깃을 여미고 가슴에 손을 얹어 이를 살피도록 하여 헌법 제정일이 대한민국을 억만년의 터로 만든 날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명박·박근혜로 대표되는 한나라당의 제17대 대통령선거 후보자를 추천하기 위한 당내경선 레이스가 한국 사회를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 관련 발언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경고를 받고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국가정보원은 대선 주자의 부동산 관련 정보를 불법으로 열람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예상되는 대선주자들의 부동산 점유, 사생활 소문, 정당 바꿔치기 등의 헌법부적합 행태, 김정일의 노골적 헌정 개입이 우려된다. 우리는 5년에 한번 찾아오는 이 대통령선거가 한국사회를 위헌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하면서 헌법을 블랙홀로 몰고 가는 일만은 절대 헌법의 정신으로 막아야 한다. 그래야 오늘의 제헌절 기념식이 그 노래가 말하듯, 헌법이 ‘삼천만 한결같이 지킬 언약’임을 확인하여 내년 헌법 제정 60주년을 맞이하게 하는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강경근 숭실대 헌법학 교수
  • 李의 두형 땅60만㎡ 보유 논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의 가족과 관련된 부동산 의혹이 또다시 불거졌다. 이 후보의 큰형 이상은(74)씨와 둘째형 이상득(72) 국회부의장이 전국 18곳에 각각 50만 6845㎡와 10만 2819㎡ 등 총 60만 9664㎡의 땅을 소유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9일 경향신문이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이씨 형제가 갖고 있는 이천군 일대 땅 54만 4526㎡ 중 48만 6023㎡는 1972∼73년에 집중적으로 매입됐다. 현대전자의 전신인 국도건설이 인근 부발음 아미리 땅을 대량으로 매입하기 직전이다. 이 과정에서 이 부의장은 부인 최모씨 명의로 72년부터 86년까지 호법면 일대 논, 밭 6만 3655㎡를 샀다. 최씨는 외지인의 논, 밭 매입을 금지하고 있는 농지법을 피하기 위해 이천시 호법면 송갈리 산34로 주소를 옮기기도 했다. 이상은씨는 2004년에 이천 땅 전부를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이 부의장의 장남 지형씨에게 양도했다. 이 부의장측은 “이명박 후보 아버지와 상은씨가 73년 낙농 육성정책에 따라 이천군으로부터 불하받아 산 땅이며 팔아 이득 본 게 전혀 없다.”면서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여 팔리지 않자 동생 아들인 지형씨에게 증여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상은씨가 77년에 산 제주 서귀포시 상효동 과수원 6013㎡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다.78년 중문관광단지 개발이 시작되면서 1년 만에 땅값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90년대 말까지 이 땅의 관리비를 동생인 이상득 부의장이 내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이 부의장측은 “80년대 말 큰형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지원한 것뿐”이라며 “지원액도 매월 25만원에서 50만원 정도였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상은씨는 87년에 이명박 후보의 처남인 김재정씨와 함께 도곡동 땅을 사들이고 현재 다스의 전신인 대부기공을 설립했다. 한상우기자 cacao@seoul.co.kr
  • “박대통령이라면 대운하 찬성”vs“오염 우려에 말바꿔”

    “박대통령이라면 대운하 찬성”vs“오염 우려에 말바꿔”

    28일 열린 한나라당 대선경선 후보의 4차 토론회에서는 이명박-박근혜 후보간 물고 물리는 신경전이 긴박하게 펼쳐졌다. 앞서 3차례 토론회에서 다른 후보를 통해 우회공격하던 전략과 대비됐다. 이 후보는 박 후보의 ‘16개 시·도 평준화 자율 선택’ 공약을 도마에 올렸고, 박 후보는 이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 정책을 걸고 넘어졌다. 원희룡·홍준표·고진화 후보도 이·박 후보에게 날을 세웠다. 쟁점별 질의·응답을 정리해 본다. ●한반도 대운하 공방 ▶고 후보 대운하 정책 논란을 보면 지도자의 잘못된 정책 하나가 나라를 절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약을 철회할 생각 없나. -이 후보 같은 당 후보의 공약을 ‘몹쓸 공약’이라고 단정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국내외 현장을 가 보지도 않고 비판하는 태도 때문에 우리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결정했다면 효율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 후보 박 후보가 대운하 공약을 반대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아 계셨다면 찬성했을 것이다. 저는 정치인과 전문가, 국민이 반대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사람이다. 낙동강 수질이 오염됐는데, 대운하를 반대하는 박 후보는 개선책을 갖고 있나. -박 후보 낙동강 수질은 그동안 많이 개선됐다. 대운하 때문에 수질이 오염된다는 말은 들었지만 수질이 살아난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10년 동안 운하를 연구했다는 이 후보가 식수오염 우려가 제기되자 말을 바꾸었다. 이중수로를 만든다고 했고, 그게 다시 문제가 되자 강변여과 방식을 내놓았다. 강변여과수는 건설 비용만 10조원으로 추산되는데도, 추진할 생각인가. 한강과 낙동강에 설치한 다리 철거비용은 계산에 넣었나. ▶이 후보 박 후보는 인터넷에서 저를 반대하려는 세력이 내놓은 자료를 보고 지적했다. 강변여과수에 10조원이 드는 것은 부지매입 비용 때문인데, 강변여과수 개발은 하천부지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돈이 들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면 민자사업 받아서 정부가 검토하고, 국민 지지 받아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하겠다. ▶이 후보 홍 후보는 2005년 10월 운하야말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21세기 물류 정책이라고 하지 않았나. -홍 후보 직접 인터뷰를 했는지, 서면 인터뷰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주간신문에 그렇게 실렸다. 만약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서울시장이 되고 싶어 시장님에게 잘 보이려고 했을 것이다. ●이명박 후보의 ‘747’ 공약 ▶박 후보 정책의 기본은 신뢰와 약속이다. 이 후보는 747 공약, 북한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 달성, 신혼부부 아파트 1채씩 공급 등의 공약을 내놓았지만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국민과의 약속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이 후보 7% 성장과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 세계 7대 강국 진입 등 (세 가지)공약 가운데 7대 강국 진입이 문제가 된다. 이탈리아가 1년에 0.5% 성장을 하고 있다. 우리 경제가 7%씩 성장하면,7대국이 될 수 있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검증논란 ▶홍 후보 97년 이회창 전 총재가 네거티브 공세를 받고 지지율이 떨어졌는데, 이 후보를 향한 공세에 대한 대비책이 있나. -이 후보 네거티브 공세는 부당하고 억울하지만, 해명할 자료와 법률적 문건을 갖고 있다. 일찍 제기돼서 해명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원 후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성공신화 주인공이라고 대통령이 될 이유는 없다. 이 후보의 모습은 너무 상류층 같다. 본인이 1등 부자이고 자녀들은 모두 위장전입해 사립초등학교를 갔다. 결혼도 재벌가와 했다. 우리는 87년이 아닌 2007년 대선을 준비한다. 개발시대 때 도덕성은 너무 낮았다. 혜택만 누린 이 후보가 국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할 수 있나. -이 후보 어렵게 공부해 아이만은 고생 안 하고 공부하게 하고 싶어서 전입했던 것 같다. 그때 대통령이 될 생각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 도덕적으로 욕 먹을 일을 하지 않았다. 험한 세상 험하게 살면서 나름대로의 도덕적 기준은 지켜왔다고 말씀 드린다. 저는 서민,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2007년 대통령 되려고 나왔다. ●박 후보 지지율 ▶홍 후보 박 후보 지지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층이 대부분이다.21∼25% 사이 지지율이 유지되고 있는데, 외연을 확대할 방안은 어떤 것인가. -박 후보 최근 조사에서 30%대 넘은 조사가 있었다. 외연이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다. 현 정권은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만들어 탄생했지만, 국민에게 보여준 결과가 없다. ●과거사 인식 ▶고 후보 박 후보의 과거사 극복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박 후보는 자신이 ‘중도’라고 주장하지만 서울에서는 ‘중도’, 대구에서는 ‘보수’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박 후보 진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권이 나서서 역사를 재단하겠다고 하면 정략적인 생각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과거사 문제는 국민과 역사에 맡겨야 한다. ●16개 시·도 평준화 자율결정 공약 ▶이 후보 16개 시·도가 투표해 자율적으로 평준화·비평준화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투표하면 평준화하자는 의견이 60% 이상 나온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오히려 후퇴하는 교육정책 아닌가. 철회할 것인가. -박 후보 중앙에서 획일적으로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평준화 존속 여부를 광역시·도에서 투표로 정할 수도 있고 교육감이 출마하며 공약으로 내세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경남에서 평준화 존속 여부를 물을 때 전부 다 할 수도 있지만, 특히 마산이라는 곳에서 비평준화를 원한다면 그곳만 투표에 부칠 수도 있다. ▶이 후보 묻는 요점과 답변이 다르다. 공약집을 보면 16개 시·도에서 평준화 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박 후보 말대로라면 서울시는 구별로 투표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박 후보 그럴 수 있는 권한을 교육자치 기본 단위인 광역시·도에 주겠다는 말이다. ●이라크 파병 연장 여부 ▶고 후보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들이 이라크 철군을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파병 연장안을 내면 어떻게 하겠는가. -박 후보 이라크 파병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다. 이라크 평화를 재건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해 우리의 국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들이 어느 정도 달성됐는지 보고 판단하겠다. ●민주화 세력 탄압 공방 ▶원 후보 박 후보는 진정한 민주세력과 민주세력의 탈을 쓴 좌경세력이 있다고 했다. 이들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구분해야 한다면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박 후보 당연히 구별해야 한다. 그것은 법에서 가려야 할 것이다. 다만 부작용은 없도록 해야 한다. 정리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토론회 이모저모 ‘장외에선 몸싸움, 장내에선 말싸움’ 28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한나라당 정책비전대회 4차 토론회에서는 앞선 3차례의 토론회보다 훨씬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특정 주제를 정하지 않고 종합토론회 형식으로 진행돼 후보간 공방전은 전방위로 펼쳐졌다. 특히 이명박 후보는 지난 3차례 토론과는 달리 작심한 듯 박근혜 후보를 몰아붙이는 등 공격적인 자세로 돌변했다. 행사 시작 전 두 후보의 지지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져 화합을 강조하는 당 지도부의 의지를 무색케 했다. 행사시작 2시간 전인 낮 12시30분쯤 이 후보와 박 후보 지지자들은 후보가 입장할 위치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다 멱살잡이까지 벌였다. 현수막으로 서로 경계를 정하는 것으로 몸싸움은 일단락됐다. 장내에서는 후보간 신경전이 뜨거웠다. 박 후보가 이 후보의 핵심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를 겨냥해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들도 전문가들이 다 연구한 결과이지 그냥 소설이 아니다.”라고 공격하자 이 후보는 “남의 공약에 대해 소설 같은 얘기라고 하면 되겠느냐. 만약 내가 박 후보의 공약을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하면 좋겠나.”라고 날을 세웠다. 그러자 박 후보는 “제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다.”면서 “대운하 공약을 소설 같은 얘기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인터넷 등에서 비판하는 내용이 소설 같은 얘기가 아니라고 한 것”이라고 되받아쳤다. 이날 행사장 주변에서는 이전 토론회에 비해 연호나 구호가 크게 줄어든 대신 트로트 응원가와 화려한 율동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MB 연대·명사랑 등 이 후보 지지자 500여명은 노래방 기계와 탬버린을 동원해 ‘트로트 응원’을 펼쳤다. 반면 박 후보 지지자들은 젊은 분위기의 응원을 선보였다. 한상우기자 cacao@seoul.co.kr
  • “李 ‘다스’해명 부실하다”vs“또 허위폭로냐”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경선 후보측의 ‘검증 무대응 전략’을 둘러싼 이 후보와 박근혜 후보측 신경전이 팽팽하다. 이 후보측은 박 후보측을 ‘허위폭로’로 비판하며 ‘NO 네거티브 선언 동참’을 촉구했고 박 후보측은 “허위폭로 운운하며 무대응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이 후보를 향한 검증공세를 계속했다. 이 후보측 박형준 공동대변인은 27일 논평을 내고 “한 주간지 보도를 빌미로 박근혜 캠프가 또다시 허위 폭로를 했다. 누차 말했지만 이 후보와 다스는 인척이라는 것 말고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박 대변인은 “양측간 검증 공방은 결국 말꼬리 잡기 싸움이 된다. 당의 화합을 위해 원칙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그는 또 “‘NO 네거티브’ 선언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1위의 딜레마” “성실 해명을” 캠프에서는 이 후보측의 이같은 ‘무대응’과 ‘화해 제스처’를 “지지율 1위 후보의 딜레마”라고 설명했다. 박 후보측과의 결전은 피했지만, 이 후보측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다스 관련 해명을 했다. 박 대변인은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다스측이 건축허가를 받은 게 2004년 12월이고, 강동구가 균형발전촉진지구 지정을 신청한 게 2005년이다. 개발정보를 미리 알았다는 주장은 틀리다.”라고 지적했다. 박 후보 캠프의 이혜훈 대변인은 ‘잘 알고 해명하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이 후보측 해명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다스 의혹에 대한 집중 공세였다. 다스가 홍은프레닝으로부터 약속어음 154억원을 받지 않았다는 박 대변인의 반론은 2005년 홍은프레닝 감사보고서에 적시한 내용과 일치하지 않고, 건물을 지어 회사가 어려워졌다는 해명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 후보측은 또 이 후보 처남인 김재정(58)씨의 재산을 둘러싼 의혹을 열거하며 김씨의 재산 관련 자료를 당 검증위에 내라고 촉구했다. 현대건설에 근무하기도 했던 김씨는 1987년 다스의 전신인 대부기공을 설립했다.▲이 후보가 충북 옥천 땅을 김씨 이름으로 명의신탁했다는 의혹 ▲황제테니스 사건 당시 등장한 가평 빌라의 소유자가 김씨였다는 의혹 ▲이 후보가 양재동 소재 건물을 다스에 매각한 과정에서의 의혹 ▲BBK 사기사건에 다스가 연루된 의혹 등이 김씨를 둘러싸고 제기된다. ●朴측 “李전과14범”… 李측 “명예훼손” 양측의 신경전은 이 후보의 ‘전과 14범’논란으로까지 번졌다. 박 후보측의 한 관계자가 사석에서 일부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전제로 한 얘기가 보도됐고, 이 후보측은 “명예훼손”이라며 발끈했다. 이 후보측 관계자는 “이 후보의 공식 전과 기록은 없다. 현대건설 재직 당시 회사 문제 때문에 법인대표로서 벌금형을 10여차례 받은 경우 있었지만 개인문제로 인한 전과는 한 건도 없다.”면서 “15대 총선 당시 선거법 위반은 사면됐다.”고 해명했다. 홍희경 김지훈기자 saloo@seoul.co.kr
  • [열린세상] 문화국가를 위하여/김형태 변호사

    [열린세상] 문화국가를 위하여/김형태 변호사

    한나라당 경선이 뜨겁다. 한쪽에서 ‘위장전입’이라고 몰아대면 다른 편에서는 ‘명박삼천지교’라고 받아친다.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가져가니 저처럼 사생결단의 싸움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웬 ‘대선’은 이리도 자주 돌아오는지. 대통령선거 몇 번 치르다 보니 청춘이 다 지나갔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온 나라가 편이 갈려 한바탕 홍역 치르기를 20년.1987년에 비하면 선거풍토는 많이 점잖아졌다. 산업화·민주화가 그간 대선의 화두였다면 오는 12월 선거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사회 전체가 점잖아지고 성숙해지는 ‘문화국가’를 상정해 본다.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권리 주장을 넘어서 이웃과 더 나아가 지구생태계까지 생각하는 넉넉함과 품격.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동네에서 간장공장 사장님이 제일 부자이던 60년대에 비하면 너무 많이 바뀌었다. 삼성, 현대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국가 전체 생산의 절반을 훨씬 넘는 고도자본주의에 접어든 우리 사회에서 경쟁과 효율은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세계 최강의 미국 자본이 이 땅에서 자유롭게 경쟁을 하게 되니 문화국가를 향한 꿈은 멀어만 보인다. 최근 문제가 된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대학들의 입시요강만 해도 그렇다. 내신 1등급과 2등급, 심지어 4등급까지 모두 같은 점수를 주게 되면 학교성적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서울 강남 학군이나 특목고 출신들에게 유리한 제도다. 서울 변두리나 지방학생들이 상류계급에 편입될 기회를 줄이는 일이다. 사회적 강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나누지 않고 천년 만년 자기들만 독식하려 하는 한 문화국가의 꿈은 멀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제일 힘이 센 나라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2002년 국제사면위 자료에 따르면 중국이 최소 1060명, 이란 113명, 미국 71명 순이다. 미국은 1930년부터 1967년까지 3829명을 사형시켰다.2005년까지는 미성년자도 사형을 집행했다. 철저한 경쟁논리의 미국식 자본주의에 맞서 분배와 평등을 강조하는 유럽 사회민주주의 전통 아래서 사형제도는 없어진 지 오래다.‘유럽을 사형 없는 대륙으로’, 유럽연합(EU)의 목표다. 그래서 가입의 전제조건으로 사형폐지를 내걸었다. 터키가 EU에 가입하려고 사형제를 폐지했다. 하지만 미국은 전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의 목에 밧줄을 거는 사진을 새해 벽두부터 전 세계에 돌렸다. 그 사진을 보는 세계인들은 무섭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터다.EU 국가들이나 로마 교황청은 후세인이 수십만 쿠르드족을 죽였다 해도 사형집행은 안된다고 반대했다.2007년 대선을 앞둔 우리의 수준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다.‘후세인의 잘못이 크다. 사형제도는 각 나라의 입장에 맡길 일이다.’라고 했다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로부터 호된 곤욕을 치렀다.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한국출신 반 총장이 지닌 한계라는 비판까지 들었다. 반 총장이 한국민 전체를 대표하여 받은 문화국가 성적표다. 이번 대선에 나오는 후보들은 우리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이는 비전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각 시대는 그 시대가 감당해야 할 소명이 있기 마련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온 힘을 쏟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모든 이의 의견이 존중되는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절도 있었다. 이긴 자, 강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져가지 않고 이익과 권력이 사회 구석구석 골고루 퍼져 나가는 사회. 수십만 명을 학살한 전범이라도 사형은 안 된다고 못 박은 유엔 인권위의 정신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나라. 문화국가의 꿈을 꾸는 후보들을 보고 싶다. 김형태 변호사
  • 김근태 “87년 DJ·YS 분열 때보다 더 고통”

    김근태 “87년 DJ·YS 분열 때보다 더 고통”

    “정말 결론내리기 힘들었다. 실천에 옮기기가 더 힘들었다.”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김근태 열린우리당 전 의장은 13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같이 말문을 열었다. 김 전 의장은 “1987년 김대중·김영삼씨의 분열로 민주개혁세력이 양분됐던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은 본인이 직접 관여된 상황이라 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는 “그동안 대통합 성사를 위해 5·18 공동참배와 대선주자 연석회의 등 두 가지를 제안하지 않았냐.”며 ‘무산’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불출마 선언으로 대통합 의지를 밝히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격려해줬다.”면서 “사람들이 결국 이런 것을 원했다는 걸 깨달았다.”며 스스로의 선택을 자랑스러워했다. ●“87년 DJ·YS 분열 때보다 더 고통” 김 전 의장은 이날 우상호·우원식·이인영·이목희·임종석 의원과 오찬을 나눈 뒤였다. 편하지만 어려운 자리였다고 한다. 김 전 의장은 이 자리에서 “대통합하려고 그만뒀는데 쉴 수 없다. 바쁘게 움직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우원식 의원이 주관하고 있는 ‘국민경선추진 의원모임’에서 인사말을 했다. 당분간 그의 행보는 후보자 연석회의를 중심으로 대통합 정국을 만드는 데 집중될 전망이다. 한 핵심 측근은 “우선순위는 없다. 민주당 통합파가 제안한 대통합 연석회의와 국민경선 추진모임을 독려하면서 대통합 불씨를 살리겠다.”고 말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그동안 대통합에 부정적이던 손학규 전 지사가 “냉전지향적인 정치세력의 집권을 막고, 평화지향적인 세력이 집권할 수 있도록 커다란 의미의 대통합과 대단결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며 밝혀 눈길을 끌었다. 김 전 의장은 14일 손 전 지사와 서울 여의도 모처에서 조찬회동을 갖는다. 손 전 지사는 이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초청 강연에서 “대통합, 대단결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핵심 측근은 “손 전 지사가 대통합이란 말을 쓴 것은 처음”이라고 말해 ‘대통합 합류’ 가능성을 시사했다. 김 전 의장은 “김한길·박상천 대표를 만나 대통합 의지를 거듭 밝히겠다.”고 말했다. 이번 주 중에 민주당 내 통합파와 동교동계 인사들, 그리고 일부 대선 주자와도 만나기로 했다.12일 기자회견 이후, 당 소속 의원 100여명에게 일일이 전화해 어려웠던 결정을 잘 이해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번주내 민주통합파·동교동계 만날 것” 그러나 범여권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비록 일정은 연기됐지만 소통합 세력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는 세력을 설득하는 일도 지난한 과제다. 당장 만날 일은 없다고 하지만 연말 대선의 상수로 존재하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대립도 피할 수 없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면서 참여정부에 몸담았지만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등을 놓고 “계급장을 떼고 얘기하자.”고 할 정도로 노 대통령과는 여전히 불편한 관계다. 김 전 의장이 불출마 선언을 한 뒤에도 청와대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과 전화 통화한 것이 전부였다는 후문이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범여권 ‘김근태 불출마’ 파장] 대선주자 연석회의 무산이후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통탄

    [범여권 ‘김근태 불출마’ 파장] 대선주자 연석회의 무산이후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통탄

    “나 결심했으니까 준비해라.” 12일 대선 불출마를 전격 선언한 김근태 전 의장이 전날 최측근에게 ‘통보’한 첫마디다. 이미 대선 불출마 선언문 초안을 직접 작성한 뒤였다. 부인 인재근 여사와 지지자들의 만류에도 결심은 돌이킬 수 없었다.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이 열린 국회 기자실 주변에는 측근을 비롯, 지지모임인 김근태의 친구들과 한반도재단 회원들의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고 있었다. 김 전 의장은 “마음이 무겁다.”며 말끝을 흐렸다. 오는 20일이면 ‘한반도포럼 전국 대표자모임’이 출범할 예정이었다. 다음달 초에는 전국 지지자대회도 열기로 했다. 한달 전 캠프 회의에서 “대통령이 되면 뭘 잘할 수 있냐.”는 질문에 “복지와 통일만큼은 자신 있다.”고 답했던 그였다. 비록 낮은 지지율에 머물렀지만 중도에 대선 레이스를 벗어날 이유가 없다고 측근들은 입을 모았다. 지난 2002년 중도하차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탄탄하게 조직을 구축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김 전 의장의 불출마 선언은 느닷없는 결정이 아니었다. 측근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지난달 광주에서 열린 5·18 기념행사 직후 포럼관계자들과 가진 회동에서부터 불출마 징조가 보였다는 후문이다. 의욕을 보였던 대선 주자 연석회의가 무산됐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중대 결단’,‘밀알’,“버릴 수 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 5일 원주에서 열린 미래구상 초청강연회에서 민주개혁세력의 분열을 통탄하며 “이대로라면 다 죽는다.”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난 10일 종교지도자들이 주선한 범여권 대선주자 연석회의가 또 무산됐다. 한 핵심 측근은 “김 전 의장은 무산 소식이 알려진 전날 모든 기득권을 버리기로 결심한 것 같다.”고 전했다. 낮은 지지율도 김 전 의장의 발목을 잡아왔다. 일부 측근들은 그에게 백의종군을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의장의 불출마 선언은 범여권 개혁세력들의 분열을 좌시할 수 없다는 압박으로 읽힌다. 이날 회견에서도 “이번 대선이 1987년의 재판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서 “대통합을 통해 지난 20년간 민주개혁 세력이 밀고 온 모든 것을 되돌리려는 한나라당과 대격돌을 시작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한명숙 정동영 천정배 김혁규 이해찬 손학규 문국현 등 범여권 대선 주자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후보단일화, 소통합, 제3지대 통합신당으로 분열된 범여권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며 오픈프라이머리를 통한 단일후보 선출을 거듭 요청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김형준 정치비평] ‘잃어버린 10년’ 논쟁의 허와 실

    [김형준 정치비평] ‘잃어버린 10년’ 논쟁의 허와 실

    노무현 대통령은 6·10항쟁 20주년 기념사를 통해 ‘민주세력 무능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지나간 기득권 세력들이 수구 언론과 결탁해 끊임없이 개혁을 반대하고, 민주세력 무능론까지 들고 나와 개발독재의 후광을 빌려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민주세력이 무능한 게 아니라 집권세력이 무능한 게 문제’라는 논리로 ‘집권세력 무능론’을 제기했다. 한국정치학회가 최근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한 국민정치의식조사에서는 ‘집권세력 무능론’이 대세라는 민심이 확인되었다.87년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4명의 전·현직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에서 10점 만점 기준으로 김대중 대통령(DJ)이 평균 5.36점으로 가장 높았다. 그 다음으로 김영삼 대통령(4.10점), 노무현 대통령(3.97점), 노태우 대통령(3.82점) 순이었다. 국민설득, 외교능력, 위기관리 등 9개 평가분야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단 한 분야에서도 1등을 차지하지 못한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전 분야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특히 ‘경제발전’ 분야에서 노무현 대통령(3.66점)은 외환위기로 온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던 김영삼 대통령(3.87점)보다 낮은 평가를 받으며 꼴찌였다. 이는 노무현 정부 4년간 우리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한 해도 빠짐없이 세계 평균 GDP 성장률을 밑돌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추론된다. 민주세력을 대변한다는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이 국민들로부터 이처럼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통치 능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하튼 민심에 투영된 결과로만 보면,DJ 지도력에 대한 높은 평가로 ‘진보 세력이 집권했던 10년은 경기침체와 사회갈등 심화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는 한나라당 주장은 틀렸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한 민심의 부정적인 평가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되찾은 10년’이었다.”는 DJ의 주장도 역시 틀렸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노 대통령은 ‘민주세력 무능론’을 반박하면서 대선에 개입할 정당성을 찾는 데 골몰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과는 달리 자신의 지역 기반이 없고, 대선과 총선이 맞물려 있는 구조 속에서 퇴임 이후에도 정치를 계속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할 세력을 확대·강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것이 친위세력으로 ‘참여정치평가포럼’을 만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노대통령의 납득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행보는 DJ의 훈수정치에 대항해 친노 세력을 결집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깔려 있다. 의도야 어쨌든 대통령이 대선에 개입해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은 본인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오로지 선거를 통해서만 창출된다. 그런데, 선거가 공정하지 못하면 창출된 권력은 정통성(legitimacy)을 잃게 된다. 따라서 공정한 선거를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리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해도 결국 민주주의 파괴세력으로 낙인찍혀 국민들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더구나 ‘반칙 없는 사회 건설’은 참여정부의 핵심 국정 철학이다. 그런데 임기 말 대통령이 느닷없이 “선거법의 중립 조항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위선적 제도”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선거에서 반칙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지금 노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세력 무능론’을 반박하고 소모적인 ‘선거법 위헌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국정 철학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반칙 없는 공정한 선거’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만 ‘집권세력 무능론’을 잠재우고 퇴임 후에 국가 원로로서 당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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