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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 동교동계 거목 ‘사무라이’ 김영배 전 국회부의장

    동교동계 원로로 6선 의원을 지낸 김영배 전 국회 부의장이 2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81세. 고인은 군사정부와 여당에 대한 의연한 태도와 짙은 눈썹 등으로 ‘사무라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1987년 당시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무렵 신민당에서 당론에 반대하는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이철승·이택희 두 사람의 제명을 앞장서 끌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고인은 1932년 충남 논산 출생으로 영등포공고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연합신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1979년 10대 국회에 당선된 뒤 11대를 제외하고 서울에서만 6선을 기록하면서 입지전적인 정치인으로 불렸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김대중 후보 진영에 합류하면서부터 동교동계 거목으로 성장했다. 15대 국회에서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고, 2002년에는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후보 확정 이후 탄탄대로였던 그의 정치인생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대선 과정에서 후보단일화협회 소속으로 탈당했으며, 국민경선을 사기극이라고 폄하하면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2003년 1월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그해 3월 의원직을 사퇴했다. 고인은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는 일석장학재단 이사장으로서 장학사업에 힘써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창례 씨와 장남 종수(재현인텍스 소장), 장녀 혜경(주식회사 설악 대표이사), 사위 팽헌수(한국마리나협회 수석자문위원) 씨 등이 있다. 빈소는 이대 목동병원 3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30일 오전 6시30분. 6·25전쟁 참전용사이기도 한 고인은 국립이천호국원에 안장된다. (02)2650-2743.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명사가 걸어온 길] 평생을 민중의 아이콘으로 살다 백기완(상)

    백기완(80)은 거리에 있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투쟁 때도,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도 그는 늘 대오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지금도 거리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서울 중구청이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를 철거할 때도 백발의 백기완은 새벽같이 나와 천막을 지켰다.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있는 곳이 나의 삶터”라고 말하는 백기완. 스스로 “늙었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에 호통치고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 그는 여전히 젊다. 백기완의 삶과 예술을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백기완을 거리로 이끈 것은 가난과 분단이었다. 1933년 황해도 은율 산자락에서 태어났다. 땅 한 뼘 갖지 못한 아버지는 돈이 없었다. 배가 고팠다. “돼지기름 덩어리 한 조박(조각의 황해도 사투리)을 날로 먹는 것이 어릴 적 꿈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일제의 잔학한 수탈이 계속되던 때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왜놈들이 집에 와서 놋그릇을 뺏어갔어요. 쌀도 뺏고 밥그릇도 뺏고,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그런데 엄마가 그만 울래요. ‘사내 새끼가 자꾸 울면 키가 안 큰다. 어서 커서 엄마 원수를 꼭 갚아 달라’고. 그때부터 민족의식이 싹 텄던 것 같아요.” 1946년 백기완은 아버지를 따라 맨발로 서울에 왔다. 도시는 냉정했다. 설렁탕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식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에게 서울은 “주먹으로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는 곳”이었다. 가진 게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저항심리가 그에게 민중 의식을 심어줬다고 했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학교는 꿈도 못 꿨다. 충무로 책방에서 주인 몰래 영어 사전을 외우다 쫓겨나기를 거듭했다. 그의 할아버지(백태주)에게서 항일투쟁 때 도움을 받았던 백범 김구(1876~1949)와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1887~1958) 선생이 학교에 보내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마다했다. 아버지는 “백범에게 밥을 얻어먹으면 백범 같은 사람밖에 안 된다. 깡패가 되든 거지가 되든 혁명가가 되든 혼자서 크라”고 했다. 1950년 전쟁으로 나라가 찢어졌다. 어머니는 여전히 은율에 있었다. 남쪽에서 참전한 작은형은 “북쪽에 계시는 어머니를 겨냥해서는 단 한 방도 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늘에 대고만 빵빵 쏜다”는 편지를 남기고 전장에서 숨졌다. 형의 유해를 찾으러 강원도에 갔다가 사격을 당해 죽기 살기로 뛰었다. 뛰면서 다짐했다. 언젠가 나라의 허리를 내 손으로 잇겠다고. 전쟁이 끝났다. 국토는 폐허였다. 백기완은 ‘나라가 온통 퇴폐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고 여겼다. “우리 생명을 심자”며 젊은 날을 나무심기와 농민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1953년부터 꼬박 7년. 그때는 불덩어리 같았다고 했다. 젊은이들의 주머니를 털어 1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 뜨거운 청춘이 되살아나는 듯 백기완은 인터뷰를 멈추고 거친 목소리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불렀다. “바라보라 붉은 산 햇빛에 탄다/ 저 산을 푸르게 마음도 푸르게/ 저 산을 푸르게 조국도 푸르게/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치기 영차차 영치기 영차차 우리는 선봉이다 자진녹화대” 100만 그루의 나무는 이 땅에 생명이 되었을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은 반 세기 넘게 이어졌다. 그는 ‘가대기 형(兄)’ 이야기를 했다. “가대기 형은 서울역에서 막일하던 지게꾼이었어요.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그냥 가대기 형이라고 불렀어요. 싸움을 잘했지만 주먹쟁이는 아니었어요. 내가 가난한 친구들이랑 주먹다짐을 하고 나면 이렇게 얘기했죠. ‘싸움은 있는 놈, 나쁜 놈들이랑 하는 거야. 없는 놈들끼리 싸워봤자 서로 코만 터져’ 그 말이 내 인생의 길라잡이가 됐어요.” 이승만 전 대통령은 백기완에게 ‘나라를 반으로 가른 미국의 앞잡이’였다. 정권을 바꿔가며 30년 넘게 이어진 독재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는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가고 그래도 길이 없으면 새 길을 내자”며 4·19 혁명에 참여했다.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 반란이 터졌다. 그가 “독재자의 야욕과 자본주의의 폭악이 결합된 극악한 체제”라고 부르는 ‘박정희 18년’의 시작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나왔다. 1974년 1월에는 긴급조치 1호가 나왔다. 1973년부터 ‘유신헌법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을 벌이던 백기완과 고 장준하(1918~1975) 선생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2년 뒤 풀려났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그때를 꼽았다. 유신은 그에게 ‘반통일, 반평화, 반균등, 반자유, 반문화, 반예술, 반역사, 반진보’였다. “유신 타파 운동을 하다 집에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어요. 탕탕탕, 누가 현관문을 부수고 구둣발로 들어와 이불을 확 베끼더라고. ‘너희 집 안방에 강도가 구두를 신고 들어와서 이불을 벗기면 좋겠어. 빗자루로 쓸어 이 새끼야’ 그랬더니 나를 짓이기며 질질 끌고 가요. 기가 막혔습니다. 내 생각대로 목숨을 걸고 떳떳하게 살았는데 그렇게 끌고 가면 되겠어요. 온몸이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는 끌려가면서 아내에게 “여보, 나 기다리지 마. 훗날 내 무덤에 이름 모를 꽃이 피면 그게 해방 통일의 꽃일 거야”라고 외쳤다. “지금 들으면 어쭙잖은 얘기처럼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때는 죽기 살기로 싸울 때였으니 진지했어요. 거의 반 죽어서 감옥에 있는데 아내에게 편지가 왔어요. 새벽녘 추위가 더 매서운 법이니 견디어 내시라고.” 그러나 1975년 기다리던 아침이 오는 대신 믿고 따르던 장준하가 죽었다. 장준하는 그에게 “모든 통일은 좋다.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의 틀을 뒤집는 첫 걸음이 통일이다”고 알려준 스승이었다. 그는 “야비한 학살”이라고 했다. 여섯 달을 내리 울었다. 지난달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가 “머리에 둔기를 맞고 숨졌다”는 사인을 발표할 때 백기완은 다시 울었다. 1979년 유신 체제가 끝난 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또 다른 군사 정권이었다. ‘반동분자’ 백기완은 다시 끌려갔다. 모질게 맞았다. 손톱이 뽑혔다. 정신을 잃으면 물바가지가 날아왔다. 독재는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죽기 살기로 시를 쓰며 버텼다. 그때 쓴 ‘묏비나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작곡돼 대표적인 민중가요가 됐다.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중략)/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백기완은 민중후보로 대통령 후보에 추대됐다. 야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백기완이 단일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민주화는 눈앞의 신기루였다. 백기완이 선거 이틀 전 단일화를 외치며 후보를 포기했지만 ‘양김’은 끝내 각자의 길을 갔다.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민중을 위해 싸운 100여년을 승리로 매듭지을 기회를 날렸다. 피눈물이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1992년 말 다시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문민’(文民)의 간판을 내걸고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총칼을 앞세운 독재는 사라졌지만 백기완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를 거치는 사이 독재의 폭력은 신자유주의로 횡포로 바뀌고 있었다. 노동 현장을 찾아다녔다. 자본의 낯은 겉으로만 번지르르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는 가장 극악하게 노동을 탄압한 정권”이라고 했다. 정도는 달랐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 돈으로 환산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근본적으로 없애야 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민중이 해방되는 것이 역사적 과제”라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비바람과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여름 한때 없이 떨어지는 가랑잎을 ‘개죽’이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뜨릴 생각은 않고 그 속에서 출세, 돈벌이, 명예, 행복만 좇다가 개죽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여, 개죽이 되지는 마시오. 개죽으로 사느니 마음껏 자라다가 거름이라도 되는 게 나아요.” 그가 이번 정부에 가장 우선해 요구하는 것이 노동 문제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노조에서 최강서라는 젊은이가 서른넷에 목숨을 끊었어요. 유서에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5년을 더 기다릴 수 없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고 적었어요. 사실상 학살이나 다름없었어요. 장례식에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들이 ‘아빠 왜 안 오냐’면서 사탕을 먹고 있어요. 울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데 앞이 안 보입디다. 하지만 나는 앞이 안 보인다고 주저앉지는 않아요. 그대로 주저앉는 건 자본주의에 져서 인간성을 포기하는 겁니다.” 백기완은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유신 잔재’라는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유신에 대한 거부와 비판이 한마디도 없다”고도 했다. 그는 다시 ‘장산곶매’ 이야기를 했다. “장산곶매는 일찍이 애미 애비를 잃고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올빼미와 까마귀를 찾아가 밥 한 술을 빌다가 부리와 발톱을 빼앗겼죠. 땅 속으로 가면 쥐들이 쫓아오고, 바깥으로 가면 사람들이 보약이라며 달려들고. 그렇게 벼랑까지 쫓기다 보니 앞에는 끝도 없는 바다, 뒤에는 사람과 쥐새끼예요. 장산곶매는 벼랑 끝에서 넓은 바다와 하늘을 보며 깨친 바가 있어 힘이 약한 짐승은 잡아먹지 않고 일년에 두 번 나쁜 놈 하고만 싸우기로 합니다. 장산곶매가 싸움을 떠나는 날 밤이면 숲에서 ‘딱, 딱’ 하는 소리가 나요. 부리질로 제 둥지를 ‘딱, 딱’ 까부수는 소리. 집에 집착하면 온몸으로 싸울 수가 없어요. 싸움을 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돼요.” 2009년 백기완은 “한평생 하는 일들이 죄다 실패였다. 다시 실패의 어두움 속으로 반딧불이를 찾아 뛰어드는 느낌”이라고 했다. 어둠 속에 뛰어드는 그는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다. 백기완은 둥지가 없다. 백기완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하편에 계속).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백기완은 ▲1933년 황해도 은율 출생 ▲1953년 농민운동 시작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징역형, 1981년 3·1절 특사로 석방 ▲1987년 민중후보로 대선 출마 뒤 단일화 주장하며 사퇴 ▲1988년 통일문제연구소 개소 ▲1992년 민중후보로 다시 대선 출마, 낙선 ▲1999년 계간 ‘노나메기’ 창간 ▲2002년 대한축구협회 요청으로 월드컵대표팀에게 강연, 히딩크 감독과 인연 ■주요 저서 항일 민족론(1986) 장산곶매 이야기(1994)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이름도 명예도 남김없이(2009) 시집 이제 때는 왔다(1985), 젊은 날(1990) 극본 대륙(1998)
  • 26년 만에… 개헌, 시동

    26년 만에… 개헌, 시동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국회 차원의 개헌 논의 기구를 구성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여야 합의로 국회 개헌 논의 기구가 구성되는 것은 처음이다. 이를 계기로 정치권의 개헌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박기춘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는 12일 국회에서 열린 ‘여야 6인협의체’ 비공개회의에서 개헌을 논의하는 기구를 꾸리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통치·권력 구조 등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산발적인 논의에 따른 부작용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상호 협의를 통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날 합의는 이 원내대표가 먼저 제안하고, 박 원내대표가 흔쾌히 수용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향후 국회 차원의 개헌 특별위원회도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변재일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양당 내부에서 몇몇 의원들이 개헌 논의를 하고 있는데 국회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면 각 당에서도 부담스러워 국회 차원의 공통된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하다”면서 “될 수 있으면 이른 시일 안에 신속하게 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단 개헌 문제를 논의하고 국회 특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을 땐 개헌특위 구성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의 헌법은 군부 장기독재를 종식하고 5년 임기의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룬 ‘87년 체제’의 산물이다. 이를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화했지만 87년 이후 제왕적 대통령 등 한계와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학계와 정치권, 시민사회에서 개헌 논의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말인 2007년 권력구조만을 바꾸는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지만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반대로 좌절됐다. 이명박 정부 때도 개헌이 추진됐지만 유력한 차기 후보였던 당시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려는 시도로 해석돼 결국 실패했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도 여야 후보를 비롯해 정치권 내에서 권력구조 변경 등을 중심으로 한 개헌론이 제기됐다. 박근혜 대통령도 후보와 당선인 시절 “대통령 4년 중임제와 국민의 기본권 강화를 골자로 하는 개헌 과제를 국민의 공감대를 얻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새 정권이 출범하고 총선이나 지방선거 등 큰 선거가 없는 올해를 개헌을 추진할 수 있는 최적기로 판단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서는 각 당의 유불리로 인해 개헌 논의가 쉽게 좌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국회에는 이재오 새누리당, 유인태 민주당 의원 등의 주도로 여야 국회의원 70여명이 참여한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이 가동되고 있어 개헌 논의는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이들은 현재의 5년 대통령 단임제를 현재의 시대상황에 맞게 손질한 개헌안을 국회에 발의한다는 방침이다. 이 의원이 주도하는 ‘분권형 개헌추진 국민연합’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지난 18대 국회 때 국회의장 산하에 구성된 헌법연구 자문위원회처럼 지루하게 시간 끌기식 논의만 하고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면서 “개헌안을 국민 다수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여야가 합의해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효섭 기자 newworld@seoul.co.kr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관련기사 6면
  •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하)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하) 함세웅

    우리 나이로 일흔둘. 오랜 삶의 길을 걸어온 함세웅 신부지만 지난 일보다 지금의 일에 대해 더 들려주고 싶어 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많다.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숨 고를 틈조차 없이 활동하는 이유다. 함 신부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핍박받는 이들이 널려 있다는 증거다. 그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 사망 사건(1987년)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 정치 민주화를 이끈 지 올해로 26년이 됐지만, 경제민주화, 남북 화해·통일, 역사 바로 세우기 등 그가 나서야 할 일들은 수북이 쌓여 있다. 이 때문에 노(老) 신부의 마음은 바빠 보였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함 신부를 다시 만나 민주화 이후의 삶에 대해 인터뷰를 이어 갔다. 민주화 이후 함 신부와 사제단에 전국민적 시선이 다시 쏠린 건 2007년 10월 김용철(55)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 때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 민주화의 물꼬가 터진 지 꼬박 20년째 되던 해다. 삼성그룹 구조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 변호사가 “내 이름의 계좌에 삼성 비자금 50억원이 관리되고 있다”고 말문을 열며 시작된 사건은 17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한국 사회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10월 29일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열린 기자회견 때 사제단은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경제정의민주화 운동을 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사제단의 고문인 함 신부도 회견 자리를 지켰다. 그는 김 변호사를 처음 만난 그해 10월 18일 당시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김 변호사가 가까운 친구 등과 저를 찾아왔어요. 그는 자신이 삼성 탓에 당했던 고통을 쏟아냈어요. 예컨대 삼성에서 나온 뒤 검사 출신 선배와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했는데 삼성이 압력을 가한 까닭에 사건을 못 맡고 있다는 등의 얘기였습니다. 그러면서 비자금 조성 등 삼성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 털어놨어요. 얘기를 다 듣고는 저와 동료 사제들이 김 변호사를 나무랐어요. ‘삼성에서 간부를 지낸 당신도 결국 공범자인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왜 왔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저도 반성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요. 삼성을 위해 일하면서 잘못한 일은 인정하지만 삼성이라는 기업과 그 책임자가 저지른 범죄가 워낙 크니까 자기고백을 통해 삼성의 범죄도 고발하고 싶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모두 알아채고 정화시켰으면 좋겠다는 취지였어요. 김 변호사는 당시 삼성이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제가 물었죠. ‘김 변호사, 당신 감옥 갈 각오 돼 있소?’라고요. 그랬더니 ‘돼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럼 같이 하자’고 했죠.” 이후 사제단은 김 변호사를 보호하며 삼성의 비자금 조성과 사회 전방위로 진행된 불법 로비의 수법, 검찰·언론계·관계와의 유착 의혹 등 파괴력 있는 폭로를 이어 갔다. 함 신부와 사제단은 이 사건이 단순히 거대 재벌의 비리를 폭로하는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경제민주화의 신호탄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우군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검찰과 언론은 물론 믿었던 노무현 정부까지도 사건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삼성 돈의 힘이 컸어요. 부끄럽게도 노무현 정부는 삼성에 이미 예속돼 있었어요. 노 대통령은 물론 그 아래 참모진도 몇 명 빼고는 모두 삼성 편에 서 있었습니다. 어렵게 특검까지 끌고 갔지만 특별검사가 삼성에 종속된 사람이었어요. 특검은 의혹 대부분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일부 조세포탈 및 배임 등의 혐의에 대해서만 기소했어요. 결국 우리가 폭로한 삼성의 불법 행위는 대부분 무죄 판결이 나고 삼성 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에 대해서 이건희 회장의 배임 혐의를 인정해 유죄판결을 내리는 등 법의 심판이 일부 있었지만 이마저도 넉달 만에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해 줬습니다. 삼성이 우리 사회 전반을 다 돈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체감했어요. 그때가 기업민주화와 경제민주화를 할 절호의 시기였는데…. 몇몇 기자들이 비아냥대며 ‘신부님이 이건희 회장 비자금을 오히려 찾아준 셈이에요. 이건희씨에게 감사받아야 해요’라고도 했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계나 법조계, 언론계와 달리 자본권력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천주교단은 사제단에 큰 힘이 돼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함 신부의 설명은 달랐다.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자 가운데 삼성에 다니는 간부들이 많고 대기업으로부터 사회복지 후원금을 많이 받으니까 기업의 불법성을 고발하지 못해요. 어찌 보면 교회는 기업이 흘리는 떡 부스러기를 집어먹고 사는 거죠. 정진석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이었을 당시 김 변호사를 도왔던 전종훈(57) 신부에게 안식년을 명분으로 3년이나 성당을 맡기지 않았어요. 권한을 남용한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죠. 신부들이 삼성비리 폭로에 앞장서니까 거북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함 신부와 사제단은 정계 등의 인사들로부터 ‘왜 삼성 같은 기업을 몰아세우느냐’는 원성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함 신부는 “우리도 국제적 기업인 삼성이 잘되길 바랐다. 다만 건강한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희망한 것이다. 불의한 오너 일가가 적은 자본으로 기업을 사유화하면 안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 결과는 사제단의 애초 계획과는 엇나갔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자신의 회고록에 “열병같은 진실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만나면 나는 말한다. ‘사제단이 있다’고…”라고 적을 만큼 함 신부와 동료 사제들에 게 깊은 경의와 신뢰를 표했다. 함 신부가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공식 은퇴한 뒤 가장 공을 들이는 프로젝트 중 하나는 ‘김근태 기념 치유 센터’ 건립이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인권의학연구소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사업인데 고문 등 잘못된 공권력 탓에 정신적 상흔을 껴안고 사는 이들을 위한 치유 시설을 만들려는 계획이다. 함 신부와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의 노력 속에 건립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고문 피해자이자 ‘민주화의 대부’인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이름을 내걸었다. 함 신부가 고문 피해자 문제에 다시 관심을 가진 것도 김 전 의원 때문이다. “1970~1980년대에는 정부기관으로부터 고문당한 분들 이야기를 듣고 마음 아파 밤잠을 설친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수십년을 들으니까 저도 고문 피해의 무서움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거예요. 김 전 의원한테도 마찬가지였어요. 김 전 의원과는 1980년대 만나 30년을 가깝게 지냈거든요. 우리들은 그에게 ‘민주화 선봉가로 앞장서라, 더 뛰어라’, ‘왜 그렇게 행동에 신중하냐’라고 채근하고 등을 떠밀었어요. 그런데 2011년 12월 30일 김 전 의원이 돌아가신 뒤 그가 서울 남영동의 경찰 대공분실에서 전기 고문 등을 받아 평생 후유증을 앓은 사실이 재조명됐잖아요. 그제서야 ‘아, 우리가 김 전 의원이 고문당한 사실을 잊고 지냈구나. 사선을 넘나든 분께 위로와 치유를 주기보다는 너무 가혹하고 모진 주문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문을 견뎌 냈던 김 전 의원같은 분들 덕에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열매를 맛보고 있잖아요.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이 김 전 의원 같은 분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공권력 피해자와 그 자녀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센터 건립을 위해 힘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는 또 지난 1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함 신부는 진보정치 진영의 원로다. 지난해 18대 대선 때도 재야원로회의에 참석해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 측에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대선 결과는 그가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대통합을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대(大)자가 들어가면 항상 거짓이 있어요. 통합은 진실과 정의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해요.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구원론을 통합원리와 해체원리로 설명하거든요. 통합원리는 사랑, 용서, 자비, 은혜, 상생 같은 것이고 해체원리는 회개, 갈등, 뉘우침, 고발 같은 것이에요. 둘 다 예수님의 가르침이지요. 큰 집을 지으려면 잘못 지어진 집을 허물고 땅을 파야 해요. 이것이 해체 기능이에요. 그런데 아무런 기초작업 없이 큰 집만 짓겠다는 것은 거짓이죠. 다시 말해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된 과거를 뉘우치고 청산해야 화합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거예요. 구호는 구호일 뿐 정치가 될 수는 없어요.” 함 신부는 야권에도 애정 어린, 그러나 따끔한 질책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열린우리당 의원의 절반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과 똑갚습니다’라고요. 성향과 관계없이 정치꾼인 거예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야권 내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정신 못 차리는 것이 가슴 아프죠. 정치인 본연의 소명대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야당 정치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정권교체는 저절로 이뤄지겠죠. 한 시민으로서 저도 야당 의원들을 달래고 채찍질하며 끌어가야겠죠.” 함 신부에게 “세간의 평가처럼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진보, 보수로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모순된 답변인 듯 들려 재차 물었다. “보수와 진보를 지금처럼 나누는 언론의 인식이 잘못됐어요. 원래 보수라는 단어는 뜻이 좋아요. 한자로 ‘보전하고 지킨다’는 것이니까요. 즉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하느님의 진리를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 가치를 지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돼 있어요. 결국 참된 진리를 지키고 보전하면 진보주의자가 되는 거죠. 언론이 말하는 보수는 수구라고 생각해요. 역사를 왜곡하고 친일·반민족 행위를 칭송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수겠어요.” 사회 약자의 편에 서서 한평생을 산 함 신부에게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행복해질 수 있는 비책이 없느냐”고 물었다. “우선 ‘어려움아, 놀자’라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해요. 요즘 신학에서는 하느님을 근엄하고 초월적인 존재로만 인식하지 않고 인간과 함께 뛰어 노시는 하느님,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신으로 인식하거든요. 두 번째로는 우리보다 어렵고 억울한 사람을 생각해 보는 거예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이 사회에 주신 메시지는 아마 ‘그래, 나 억울한 사형수다. 네가 힘들고 억울해도 나보다 억울하냐. 난 죽었잖아. 넌 그래도 살아 있잖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청년들 가운데 피자를 10분 빨리 배달하려다 사고로 숨진 이도 있고 제철소에서 일하다가 용광로에 빠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잖아요.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찾아나서야 할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뒤 젊은 기자는 “종교·사회의 원로에게 살아가면서 힘이 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곧바로 함 신부의 답이 돌아왔다. “원로? 나 원로 아녜요. 아직 청춘이지(웃음).”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사설] 박근혜號 5년 뒤 국민행복港에 닻 내리려면

    박근혜 정부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 0시 군 통수권을 넘겨받으며 임기를 시작한 박근혜 대통령은 오전 11시 취임식과 함께 2018년 2월 24일까지 대한민국의 5년을 끌고 갈 첫발을 내딛는다. 65년 헌정사의 11번째 대통령이며, 첫 여성 군 통수권자인 그에게 국민이 부여한 소명은 실로 크고 무겁다. 무엇보다 온 국민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해야 한다. 일자리를 더 만들어 활력을 잃은 경제를 되살리고, 미래 성장동력을 키워야 한다. 계층과 지역, 이념, 세대의 간극을 좁혀야 한다. 핵을 앞세운 북한의 안보 위협으로부터 5000만 국민의 안녕을 지켜내는 것은 물론 한반도 평화 통일의 기반을 닦아야 한다. 법과 원칙을 바로 세워 사회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가진 자와 힘 있는 자의 횡포로 인해 돈 없고 힘 없는 이들이 눈물 짓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저마다 꿈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이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한다. 이를 위해 국민이 정부를 신뢰할 수 있도록 쌍방향 소통에 힘써야 한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을 하나하나 모아 국민 모두가 함께 웃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박 대통령은 이를 ‘국민 모두가 행복한 나라’ ‘국민 행복, 희망의 새 시대’라 축약했고, 이를 실현하겠다고 다짐했다. 쌍방향 소통으로 국민동참 확대를 역대 대통령 가운데 국민 행복을 도외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파나 시대상황에 따라 성장과 분배의 무게에 차이를 두긴 했으나, ‘국민 행복’은 모든 정부의 존재가치였다. 그럼에도 적어도 1987년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5개 정부를 거치는 동안 국민들의 행복 체감도는 진작되지 못했다. 국민총생산 세계 10위권인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지난해 148개국 중 97위라는 미국 갤럽의 여론조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 국민 가운데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은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외형적 경제성장이 국민 개개인의 행복 증진으로 이어지지 못한 결과다. 바깥에서는 식민 지배와 6·25전쟁의 폐허 위에서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산업화로 일군 ‘한강의 기적’에 찬사를 보내고 있으나, 정작 국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 있고 저마다 적잖은 업적을 남긴 전임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국민의 박수를 받지 못한 채 청와대를 떠났다. 출발선에 선 박 대통령은 전임들이 왜 쓸쓸하게 퇴장해야 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새 정부 출범에 가슴 부풀었던 국민들이 왜 5년 뒤면 예외 없이 고개를 떨구고 탄식해야 했는지 숙고해야 한다. 출범을 앞두고 마련된 박근혜 정부의 5대 국정목표와 140개 국정과제는 큰 틀에서 앞머리에 열거한 시대적 요구를 두루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대선 때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경제 민주화가 명시되지 않았고, 막대한 복지 재원 계획이 여전히 구체화되지 않은 점 등 아쉬운 대목이 있지만 이는 향후 정책운영 과정을 통해 풀어나갈 과제일 것이다. 관건은 박근혜 정부가 국민행복이란 고지에 어떻게, 어떤 수단과 경로로 오를 것인가의 문제, 즉 박근혜 리더십이다. 지난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오늘 취임하기까지 67일간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보여준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유감스럽게도 썩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대탕평을 약속했던 새 정부 인사는 보안과 전문성을 강조한 나머지 사전검증의 부실 속에 지역과 계층의 안배가 이뤄지지 못했다. 야권과의 관계도 정부조직 개편 지연과 이에 따른 반쪽 출범이 말해주듯 결코 원만하지 않다. 전임들의 불통과 독주의 리더십이 어른거린다. 어머니 리더십으로 통합 힘써야 박근혜 1인에게 집중되는 집권세력 내 의사결정 구조부터 스스로 깨야 한다. 박 대통령이 다짐한 책임장관제만 해도 결코 말로 될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노(No)!’라 말할 수 있는 소통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으로서 국정과제와 정책방향을 제시한 만큼 실질적인 인사권 부여 등을 통해 장관들 각자가 알아서 뛰도록 한 발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청와대 비서실이 대통령의 이름으로 개입하고 딴죽을 거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권력 내부의 쌍방향 의사소통과 실천 구조가 사회 각 부문으로 퍼져 경제·사회·문화 각 영역이 스스로 자율과 창의를 발휘해 매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살고, 화해와 통합의 기운이 싹튼다. 박 대통령 앞에는 숱한 도전이 놓여 있다. 이 중 핵을 부둥켜안은 북한을 여하히 개혁·개방으로 견인하고, 대선 때 그를 거부한 48%의 국민을 잘 포용하느냐가 새 정부 성패의 열쇠일 것이다. 안으론 뜨거운 가슴이, 밖으론 차가운 머리가 요구된다. 산업화·민주화 세력의 진정한 화해와 지역·계층의 따뜻한 통합을 임기 초부터 열정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런 ‘어머니 리더십’으로 국가 에너지를 끌어올리고, 이를 통해 한민족의 공멸을 부를 북한의 ‘핵 불장난’을 포기시키고 한반도에 항구적 신뢰체제를 구축하는 길로 그들을 끌어내야 한다. 5년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이 안에 그 숱한 과제들 중 얼마만이라도 이뤄내 나라를 바꾸려면 그 출발점은 대통령 자신부터 바꿔 나가는 일일 것이다. 5년 뒤 국민 다수가 그래도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부가 되기를 기원한다.
  • [박근혜 대통령 오늘 취임] 국민이 국정운영의 축으로… 北 핵실험 따른 안보위기 첫 과제

    박근혜 정부가 25일 임기 5년의 출발선에 섰다.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 1987년 대통령직선제 도입 이후 첫 과반 득표율 대통령이라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 출범했다. 그러나 경제 위기와 안보 위기 등 국내외 환경은 녹록지 않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이유다. 우선 박근혜 정부는 상생과 통합을 통한 ‘국민 행복’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국가와 사회를 중시하던 기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국민을 국정 운영의 중심축으로 삼은 것이다. 박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이 ‘원칙과 신뢰’라는 점에서 실천 의지 역시 후한 평가를 받는 편이다. 다만 박근혜 정부 앞에 놓인 당면 과제들이 녹록지 않다는 점에서 실천 가능성에는 의문부호가 찍힌다. 우선 글로벌 경제 위기가 현재진행형이고, 사회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다. 경제성장률이 3%를 밑도는 저성장 국면에서는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게 어렵고, 성장이 한계에 부딪히면 복지 재원 마련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하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게 박근혜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사회 통합도 풀어야 할 숙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영·호남으로 대표되는 지역 갈등의 골이 여전히 깊다는 점을 확인했고, 보수와 진보 간 이념 갈등은 첨예화되는 양상이다. 사회 통합은 탕평 인사에서 시작된다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새 정부의 첫 내각과 청와대 참모진 인선 과정에서 ‘밀실·불통 인사’ 논란을 자초했고, 통합보다 전문성에 방점이 찍혔으며, 이 과정에서 ‘성시경’(성균관대, 고시, 경기고) , ‘위성미’(미국 위스콘신대학교, 성균관대, 국가미래연구원) 인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도 얻었다. 지역과 여성 등에 대한 ‘대통합 배려’가 부족했다는 지적은 향후 국정 운영 과정에서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대표되는 안보 변수도 박근혜 정부에 시련으로 다가올 수 있다. 결국 새 정부 초반 성패의 상당 부분이 미국과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 강화를 바탕으로 대북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러한 당면 과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국민 행복 역시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이 당선 이후 보여 준 행보를 볼 때 이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적지 않다. 당장 국회에서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총리 임명동의안 등의 처리가 지연되면서 새 정부의 조직과 내각 어느 것 하나 확정하지 못한 상황이다. 취임식까지 자신이 지명한 국무총리와 각료 한 명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첫 사례가 됐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일방통행’식 리더십이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일부 여론조사 지지율 역시 대선 득표율에도 못 미치는 40%대까지 떨어졌다. 박 대통령이 향후 국정 운영을 통해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절반 이상의 국민을 끌어안는 상생의 정치를 펼치지 못한다면 과거 정부의 실패를 답습할 수밖에 없다. 결국 성공한 대통령, 실패하지 않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박 대통령이 어떤 해법을 내놓느냐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전망된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사설] 靑 비서실장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금명간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임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총리와 각 부처 장관 후보자 지명에 앞서 보다 철저하고 공식화된 인사 검증이 이뤄지도록 청와대 비서실장부터 뽑아야 한다는 여권 안팎의 건의를 수용한 결과인 듯하다. 비선 조직에 의존한 ‘나홀로 검증’으로 김용준 총리 지명자의 낙마를 부른 상황임을 감안하면 뒤늦게나마 순리를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어느 정부에선들 그렇지 않았겠는가마는 새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의 역할과 책무는 실로 크고 무겁다. 우선 대통령의 지배력이 1987년 민주화 이후 전임 5명과 비교해 가장 막강하다. 대선에서 과반 득표율을 기록한 데다 국회에는 과반의석의 새누리당이 버티고 있다. 과거와 달리 반대세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높은 순도(純度)를 지닌 집권여당이 뒤를 받치고 있는 것이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고 푸념할 여소야대 정국도 아니고 친노-반노, 친이-친박으로 나뉘어 집안싸움 하느라 세월을 허송할 지형도 아니다. 유일한 견제세력이라 할 민주통합당도 대선 패배 후 제 몸 추스르기에도 벅찬 터라 당분간은 힘을 쓰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내년 6월 지방선거까지는 이런저런 눈치를 봐야 할 전국 규모의 선거도 없다. 대통령으로서 제 뜻을 마음껏 펼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건이다. 그러나 이처럼 좋은 여건은 그만큼 대통령이 독선과 독단으로 흐르기 쉬운 환경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박 당선인은 누구보다 강한 리더십을 자랑한다. 2인자로 불린다 싶은 인물이 등장하면 가차없이 내치고, 핵심으로 불리는 측근일수록 박심(朴心)을 거스르지 않으려 납작 엎드리게 만드는 인물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면전에서 ‘NO!’라고 외치기가 쉽지 않은 리더십이다. 청와대 보좌진, 특히 비서실장의 역할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대통령의 의중을 잘 헤아리고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대통령과 정부, 국회, 국민을 잇는 소통의 다리가 돼야 한다. 박 당선인이 총리의 내각 통할기능을 강화하고, 각 부처 장관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한 만큼 청와대 비서실에는 정부 각 부처가 대통령의 지시를 잘 이행하는지 점검하고 보고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부여할 것이라고 한다. 정부 위에 군림하던 지난 시절 청와대를 생각하면 진일보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감시자의 역할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고 본다. 대통령에게 가감없이 민심을 전달하고, 때에 따라서는 과감하게 시정을 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사간(司諫)이 돼야 하는 것이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5년간 보좌한 앤드루 카드 전 백악관 비서실장은 “비서실장은 두꺼운 낯, 단호한 결의, 부드러운 태도, 경청하는 귀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이 새겨볼 만한 경구로 여겨진다.
  • [서울광장] 이러다 ‘경조(慶弔) 소득세’ 징수할라/육철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이러다 ‘경조(慶弔) 소득세’ 징수할라/육철수 논설위원

    어딜 가나 지하경제가 화두다. 얼마 전 대기업 중역 J씨와 나눈 대화도 그랬다. 그와 나는 지하경제가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1이나 되는데도 나라가 멀쩡하게 굴러가는 게 신통하다고 공감했다. 얘기 끝에 J씨는 “우리 집사람도 지하경제의 공범”이라고 했다. 웬 돈다발이라도 땅에 묻어뒀나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얘기인즉, 그의 아내가 백화점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골랐는데 너무 비싸더란다. 그래서 망설였더니 현금을 주면 20% 깎아준다고 해서 덜컥 샀단다. 듣고 보니 지하경제에 일조한 ‘공범’임에 틀림없었다. 지하경제란 세금을 피해 숨어다니는 돈이다. 그렇다고 범죄 수익금처럼 검고 구린 돈만 지하경제는 아니다. 2011년 4월 전북 김제의 마늘밭에서 나온 5만원권 뭉칫돈 110억원은 똑 떨어지는 지하경제다. 불법 도박 수익금으로 밝혀진 데다 땅 속에 묻혀 있었으니…. 지난해엔 서울 강남의 어느 병원장 집에서 현금 24억원이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적발돼 주위를 놀라게 했다. 지하경제 ‘활성화’엔 정치인들도 적잖이 기여한다.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재벌로부터 받은 ‘차떼기 현금’은 지하경제의 역사를 새로 쓴 사건이다. 1987년 대선 때 어느 재벌이 김대중 후보에게 준 돈 상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당시 이 돈을 며칠 보관했던 K씨는 “퀴퀴한 돈 냄새에 골치가 너무 아팠다”고 털어놓았다. 지하경제를 키우는 사람들이 어디 범죄자와 정치인들뿐이랴. J씨의 부인처럼 대부분 국민은 이익에 솔깃하거나, 불가피한 사회적 관행 탓에 ‘공범’이 되는 게 현실이다. 살다 보면 ‘영수증 없는 현금’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 좀 많은가. 지하경제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경조사(慶弔事) 비용이 대표적이다. 업무상 갑을 관계는 경조금으로 수백만~수천만원을 건넨다고 한다. 힘깨나 있거나 잘나가는 사람은 부조금 수입이 수억원은 될 것이다. 일반 가정의 경조금도 국가적으로 보면 만만치 않다. 한 해에 32만쌍이 결혼하고 25만명이 사망하니까 집집마다 경조비가 수십만~수백만원은 들 테고, 이를 다 합치면 수십조원은 족히 될 게다. 투명한 거래를 한답시고 혼주(婚主)·상주(喪主)한테 부조금 영수증을 달라 했다간 ‘미친 놈’ 소리 듣기 딱 알맞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복지공약에 들어갈 재원이 임기 5년 동안 135조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장률이 2%대로 주저앉아 세수(稅收)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새 정부는 연간 6조원을 지하경제를 파헤쳐 조달할 것이며 국세청이 총대를 멜 모양이다. 조사 인력을 몇 백명 늘려 현금거래로 탈루하는 자영업자들을 족치고 유사 휘발유 판매자, 불법사채업자를 샅샅이 뒤진다지만 세수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세금 나올 구멍이 더 이상 없으면 국세청이 ‘경조(慶弔)소득세’를 신설할지도 모른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데 독한 마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지상경제’에서는 1년에 고작 수천원 예금이자에도 몇백원 소득세를 칼같이 떼가는 국세청이 아닌가. 혼주·상주에게 부조금 장부와 필요경비 공제용 영수증 등을 첨부하게 해서 세무신고 의무사항으로 정하고, 의심 나면 현장 입회조사나 세무조사를 벌이면 간단한 일이다. 더구나 경조금은 결혼식장·장례식장 같은 길목만 잘 지켜도 비교적 접근이 용이한 세원(稅源)일 테니까. 하지만 이는 헌법보다 무서운 ‘국민정서법’을 거스르는 일이다. 국민적 공감대가 없으면 정권이 위태로울 수 있다. 성직자의 소득에 과세를 추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하경제에는 세금을 매길 수 있는 돈과 없는 돈이 섞여 있다. 그걸 엄정하게 가려내는 게 국세청의 능력이다. ‘조자룡의 헌 칼’ 쓰듯 징세권을 휘두를 생각 말고, 지하경제 양성화에 큰 공을 세운 ‘카드·현금 사용액 소득공제’라도 현실에 맞게 잘 다듬는 게 아무래도 최선일 듯하다. ycs@seoul.co.kr
  • ‘레미제라블’ 흥행 키워드는 ‘3S 1H’

    ‘레미제라블’ 흥행 키워드는 ‘3S 1H’

    영화 ‘레미제라블’이 17일 관객 500만명을 돌파하며 올겨울 극장가의 최대 흥행작으로 떠올랐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고전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두 시간을 훌쩍 넘는 긴 상영 시간에다 대사 없이 노래로만 연결되는 송스루(Song Through) 방식의 뮤지컬 영화라는 한계에도 예상 밖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레미제라블’ 흥행의 원인을 ‘3S 1H’(Star·Synergy·Song·Healing) 법칙으로 분석해봤다. 개봉 5주차를 맞는 ‘레미제라블’은 여전히 평일 5만명, 주말 13만~15만명의 관객이 꾸준히 들고 있다. 이 영화의 수입·배급사인 UPI코리아 측은 당초 뮤지컬 영화인 ‘맘마미아’의 관객 수인 455만명을 잠정적인 목표치로 잡았으나 이 기록을 넘어서자 17일부터 IMAX로 개봉을 하고 2월까지 상영을 계획하는 등 ‘레미제라블’ 열풍을 장기화할 계획이다. 이대로라면 관객 600만명까지 순항해 ‘레미제라블’은 역대 국내 외화 흥행 순위 10위 안에도 들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10위권 내에 ‘트랜스포머’, ‘어벤져스’ 등 볼거리 위주의 액션 블록버스터가 인기를 끌었던 것을 감안할 때 고전을 바탕으로 서사성이 강한 외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영화 관계자들은 개봉 초기 스타 마케팅으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을 1차적인 흥행 요인으로 꼽고 있다. 대표적인 친한파 배우 휴 잭맨을 비롯해 앤 해서웨이, 러셀 크로, 아만다 사이프리드 등 국내 관객들에게 익숙한 할리우드 스타들을 내세워 대작 마케팅을 펼쳤다. UPI코리아의 염현정 마케팅부장은 “처음 영화에 대한 출구 조사를 했을 때 20~30대 관객들의 캐스팅 파워에 대한 호감도가 높게 나타났고 연말 이벤트성 영화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작품성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4050까지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배우들의 스타성뿐만 아니라 사랑과 용서, 헌신 등 영화의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몰입도를 높였다. 이 영화의 홍보 대행사인 레몬트리 박주석 실장은 “뮤지컬 영화는 다소 협소하고 대중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개봉 초반에는 화려한 스타 캐스팅의 대작 영화임을 강조했다”면서 “알 만한 스타들이 실제로 노래를 부르면서 연기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간 것 같다”고 말했다. 초반 바람몰이에 성공한 ‘레미제라블’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은 영화와 뮤지컬의 시너지 효과다. 특히 4대 뮤지컬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27년 만에 처음 한국어로 정식 공연된 ‘레미제라블’에 대한 희소성은 유독 한국 관객들이 이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로 꼽히고 있다. 영화의 흥행으로 ‘레미제라블’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면서 현재 서울에 앞서 지방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객석 점유율 90%를 넘기며 매진 사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뮤지컬이 고전의 무게감을 상징과 압축을 통해 잘 표현했다면 영화는 리얼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물과 배경 등을 자세히 표현함으로써 뮤지컬의 단점을 보완했다. 전문가들은 영화 ‘레미제라블’이 배우의 예술인 뮤지컬과 감독의 예술인 영화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는 “뮤지컬에서는 생략되거나 압축된 스토리가 영화에서는 논리적으로 충실하게 설명됐고 수록곡의 위치나 디테일에도 변형을 줬다”면서 “음악적인 완성도를 중시하는 뮤지컬에 비해 영화는 음악적인 욕심을 포기했지만, 영화에서는 감정의 포장을 하지 않고 리얼리즘에 가깝게 표현해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해석했다”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클로즈업이나 화면 분할이 없는 롱테이크 촬영 기법 등을 통해 노래로 연기하는 배우들의 표정이나 상태를 자세히 보여 줌으로써 감정이입을 높였다”고 말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여운이 더 깊게 남았던 것은 배우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 때문이다. 대사가 일절 등장하지 않는 송스루 방식은 자칫 전개가 느려지고 다소 관객들에게 낯설게 다가갈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영화에서 감정의 진폭을 더 크게 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UPI코리아 측은 “자칫 노래 가사 번역이 잘못되면 전달이 풍부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영화의 20~30배 이상 번역과 감수에 공을 들였다”면서 “번역에 한국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하고 캐릭터의 이입을 높이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물론 여전히 송스루 방식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고 있지만 서사 위주의 원작을 대사보다 노래로 표현한 것이 감정 전달이나 몰입에 더 수월하게 했다는 평가도 많다. ‘레미제라블’의 OST는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했고 더욱 유명해졌다. 강유정 평론가는 “말은 이성적인 수단이지만 노래는 감성적이기 때문에 정서적인 감염력이 높고 감정 상태의 극대화를 가져오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원종원 교수는 “주요한 멜로디를 여러 상황에 맞게 변형해 반복적으로 등장시키고 각각의 등장인물에 맞는 ‘캐릭터송’이 적절히 사용됐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레미제라블’의 흥행에 불을 지핀 것은 정치·사회적인 치유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후반부 실패한 혁명에 대한 메시지가 대선 결과와 맞물리며 일명 ‘48%를 위한 힐링무비’라는 정치적인 해석을 낳기도 했다. 영화 마지막에 거대한 바리케이드가 펼쳐지며 합창곡으로 울려 퍼지는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한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왕정복고에 의한 반동과 1830년 7월 혁명의 실패, 1848년 2월 혁명을 통해 1875년 프랑스가 끝내 공화정으로 가는 지난한 과정의 한 부분을 담은 영화의 시대적 배경도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연상시켰다는 평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나 1987년 민주화운동 과정의 대규모 시위 등을 떠올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경제적인 양극화와 정치적인 무력감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와 오버랩됐다는 분석도 있다. 영화 관계자들은 영화가 야당 지지자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관객들에게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강조했다. 염현정 부장은 “레미제라블은 고전인 만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과 용서라는 보편적인 인간애를 다루고 있다. 용서하고 헌신하는 장발장과 타협하지 못하는 법치주의자 자베르, 비참한 판틴의 애끓는 모성애와 에포닌의 절절한 짝사랑 등 각자의 처지에 맞게 위로와 위안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주석 실장은 “초반에는 개인적인 힐링에 초점을 맞췄지만 대선을 지나면서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힐링 무비로 각광받으면서 흥행에 탄력을 받았다”고 말했다. 영화 평론가 정지욱씨는 “레미제라블은 각박해진 사회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고난과 역경 뒤에 희망이 찾아온다는 메시지가 정치·사회적으로 관객들에게 힐링을 준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한국 철도역사 첫 여성 서울역장 김양숙 씨

    [김문이 만난 사람] 한국 철도역사 첫 여성 서울역장 김양숙 씨

    새하얀 눈이 펄펄 내린다. 무작정 산골의 조용한 곳을 향해 기차를 타고 떠나 본다. 기다리는 이 없어도 그곳에 가면 누군가 꼭 반갑게 마중 나올 것만 같다.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기대와 설렘은 내리는 함박눈과 함께 더욱 쌓여만 간다. 그곳에는 예쁜 눈사람이 있을 것 같고, 앙증맞은 인형을 든 귀여운 소녀가 있을 것만 같다. 이런 날 영화 한 편을 떠올린다. ‘철도원’(후루하타 야스오 감독, 오토마쓰 주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2월 설연휴를 앞두고 개봉됐다. 철도원 오토마쓰는 아무리 눈이 내려도, 아무리 이용객이 없어도 오로지 성실 하나로 살아간다. 여느 때처럼 새해 아침이다. 역에 쌓인 눈을 치우던 오토마쓰, 그 앞에 인형을 든 낯선 여자아이가 찾아오면서 고독하고 외로운 철도원의 인생은 놀랍게 전환된다. 누구나 철도 여행에 대한 추억이 있을 터. 그렇다면 철도원을 얘기할 때 어떤 생각을 먼저 하게 될까. 여러 가지 이미지로 다가오겠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늘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는 고마운 사람으로 여겨진다. 설날 연휴에는 더욱 그러하겠다. 우리는 그리운 고향으로 가지만 철도원들은 그러지 못하니 말이다. 철도인 인생 25년 김양숙(45) 서울역장. 그는 철도가 생긴 이후 113년 만에 첫 여성 서울역장으로 화제가 된 인물이다. 여성으로서 최초라는 수식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최대의 중앙역인 서울역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역은 하루 이용객이 30만명이 넘는다. 외국인만 해도 하루 3000여명이다. 이쯤 되면 국제적인 기차역인 셈이다.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만 100여명인 데다 연간 코레일 수입의 16%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서울역장은 전국 역장 중 가장 중요한 자리로 여긴다. 9급 철도공무원에서 출발해 25년 만에 1급 서울역장이 되기까지 그의 철도인 인생은 어떠했을까. 또 그가 부임한 이후 서울역은 어떻게 변모해 가고 있을까. 지난 10일 오후 서울역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수더분한 모습에 인터뷰할 것까지 뭐 있겠느냐며 웃는다. 자리에 앉으면서 서울역장으로 부임한 지 두 달쯤 됐다고 인사를 건넸더니 “벌써 그렇게 됐네요”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요즘 어떤 일로 바쁜지 먼저 물었다. “알다시피 서울역은 한국의 대표 역입니다. 외국인도 많아 국경의 역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때문에 그 위상을 활기차게 업그레이드시켜야 합니다. 편안하면서도 따뜻한, 그리고 한국적인 역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지요” 물론 그동안 많은 서울역장들이 거쳐가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겠지만 신임 김 역장은 여성으로서의 다부진 의욕이 간단치 않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하여 서울역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물었다. “디자인이 한국적으로 달라집니다. 현대적 세련미와 한국적 전통의 모습이 함께 잘 조화된 모습을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서울역은 외국인들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한국적인 느낌을 주려고 합니다.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서 서울역이 참 인상적이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 주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문화와 예술이 함께 펼쳐지는 상설공연 무대, 고객들을 위한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김 역장은 외부 디자인 전문가에게 의뢰해 구체적인 그림을 완성했으며 올 상반기에 달라진 서울역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서울역 재창조 작업에 역점을 두는 것은 공항철도와 연계되면서 서울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관문이 됐고 이에 따라 서비스의 품격도 성숙해져야 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문화와 디자인이 있는 서울역을 표방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져서인지 벌써 재즈협회 등 몇몇 예술단체에서 공연을 하겠다는 문의가 온다고 귀띔했다. 그는 2011년 5월 문화홍보처장을 맡았을 때부터 춘천역 재건설 계획에 합류해 디자인 공모 등을 통해 새로운 춘천역 탄생에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다. 역 매장과 주변 광고물을 재정비하고 천편일률적인 역사 대합실에 색다른 변화를 주어 이용객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이끌어 냈다. 또한 ‘제1회 철도문화체험전’을 성황리에 개최한 것도 김 역장의 작품이었다. 이어 서울역장 부임 두 달 동안의 소감을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외부 귀빈(VIP)들이 이곳을 많이 이용하더군요. 때마침 대선 기간이어서 대선 후보들도 여러 번 왔습니다. 직원들은 물론 서울역을 이용하는 고객들과 자주 만나 대화도 했고 많이 바빴습니다. 지난 1일에는 직원들과 함께 서울역 2층 대합실에서 고객들에게 무료로 커피, 녹차, 생강차 등을 대접했습니다. 평창 스페셜올림픽 홍보 전단지도 나눠 드렸지요. 감동 있는 서비스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누구나 서울역장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오로지 열심히 할 뿐”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서울역장이 됐을까. 이 질문에 “누구나 자기 조직을 사랑하고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 뒤 굳이 말한다면 성실과 열심으로 일해 온 것이 쌓여 인정을 받은 것 같다고 대답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혜택받을 일도 없고 또한 어떤 거창한 능력이 있어서 서울역장이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철도공무원으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87년 10월이었다. 전남 고흥의 바닷가에서 태어난 그는 순천여고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던 중 아버지의 권유로 9급 공무원 시험을 보고 합격한다. 발령지는 철도청 소속 순천기관차 사무소였다. 당시 김 역장을 제외하곤 직원 300명이 전부 남자였다. 또한 기차를 움직이는 기관사나 철도를 관리하는 현장직 업무여서 노동강도 또한 셌다. 김 역장은 그들과 함께 성실하게 일을 해 나가면서 차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여자라서 근무여건이 달랐던 점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남자들보다 더 꼼꼼하게 일을 챙겼다. 좀 힘들긴 했지만 그렇게 부지런히 11년 동안 기관차 사무소에서 일했다. 1998년 9월 순천지방철도청 재산과 직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평소 몸에 밴 ‘성실철학’으로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여러번 위기를 맞은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기회로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역할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 나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나섰던 것. ‘여자라서’ 또는 ‘직급이 낮아서’라는 생각은 떠올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일을 해 나갔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나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일해 본 적은 별로 없어요.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불평 없이 일을 했습니다. 제가 인정받았다면 아마 그런 근무 열정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2001년 지방청에서 본사로 자리를 옮겼다. 본사로 근무지를 이전한다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주변의 좋은 평가가 한몫했다. 2007년 서대전역장이 된 것도 그의 성실성 덕분이었다. 서대전역장 시절 전단지를 직접 들고 열차 관광지 홍보에 앞장선 일화는 지금도 코레일 내부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때 여행상품을 3개나 기획해 판매에 성공했다. 당시를 떠올린 그는 “힘들었지만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인사노무실 노경지원처장, 홍보문화실 문화홍보처장 등 본사 발령 당시 6급에서 1급으로 승승장구했다. 서울역장에 발탁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웃는다. 그러면서 서울역장은 책임이 막중한 자리인 만큼 수익 증대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 여행상품 얘기를 꺼낸다.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에 KTX처럼 빨리 가는 열차를 좋아하지만 요즘 주말에는 느림을 즐기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와인시네마 열차, 숙식이 가능한 관광열차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요. 얼마 후 선보일 중부내륙권, 남도해양권 순환 관광열차는 철도여행에 새로운 문화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많이 홍보해 주세요(웃음).” 그는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남편도 공무원이다. 그가 회사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전폭적인 지원과 도움에서 비롯됐다. 아무런 불평 없이 성장해 준 아이들, 또 집안일을 거들어 준 고마운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쁜 와중에도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영화 ‘철도원’을 봤느냐고 물었더니 “주인공이 무척 성실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대답한다. “자랑스럽고 성실한 철도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며 웃는 그를 보니 전국의 철도역 대부분을 다녀왔다는 기찻길 인생의 발자취가 잠시 그려진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김양숙 서울역장은 1968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순천여고를 졸업한 뒤 재수 준비 도중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철도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철도청 순천기관차사무소 사무원(1987년), 순천지방철도청 재산과 과원(1998), 순천지방철도청 재산과 매각계장(1999), 조달본부 물자관리과 과원(2001), 전략기획실 평가2팀장(2004), 철도공사 경영혁신실 경영혁신부장(2005), 대전충남본부 서대전역장(2007), 인사노무실 노경지원처장(2010), 홍보문화실 문화홍보처장(2012) 등을 거쳐 지난해 11월 서울본부 서울역장에 부임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으며 남편도 공무원이다.
  • 텃밭 광주, 野 민생투어에서 제대로 ‘회초리’ 들었다는데…

    텃밭 광주, 野 민생투어에서 제대로 ‘회초리’ 들었다는데…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가 15일 ‘회초리 민생현장 방문’의 첫 일정으로 호남 지역을 찾았다. 민주당을 지지해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데 대해 회초리를 맞는 심정으로 쓴소리를 듣고 당을 ‘재건축’하는 자양분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예상대로 혼쭐이 났다. 민주당 비대위원들과 지역 의원 50여명은 5·18 민주묘지를 먼저 찾아 헌화, 참배했다. 이어 ´광주전남 시도민께 드리는 삼배’를 올렸다. 문희상 비대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를 지고 말았다. 열화와 같은 광주시민들의 뜻을 받들지 못했다”며 “살려달라, 도와달라”고 읍소했다. 하지만 민주당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텃밭’으로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냉담한 기운이 느껴졌다. 비대위원들의 첫 방문지였던 광주 YMCA 간담회에는 당의 원로들과 당원들 외에 시민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마저도 전체 100석 자리 가운데 30여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민주당에 대한 쓴소리를 ‘봇물’ 터진 듯 쏟아냈다. 송희성 한국여성지도자연합 광주전남회장은 “태어나서 두번 울었는데, 한번은 1987년 DJ가 떨어졌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이번이다”면서 “전부 나서서 똘똘 뭉쳐도 이길까 말까 하는데, 대통령 경선에서 떨어진 분들이 똘똘 뭉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안성래 전 5월 어린이집 원장은 “(울먹거리며) 우리가 논밭 다 팔아서 민주당 만들었다”면서 “역사를 바로 세우려면 나날이 자살하는 분들, 크레인 위의 그 분들을 위해 뭘 하겠다는 성명서라도 내라”고 지적했다. 이창 유네스코 협회장은 “문재인 후보가 대선 패배 후 감사와 참회의 민생투어를 하기를 기대했다”면서 “정치쇼로 보일지언정 봉사하고 독거노인 찾아가는 등 민생을 살펴야 민주당에 대한 연민이라도 생긴다”고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는 문 비대위원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계파 정치의 폐해도 지적됐다. 대선 광주 지역 선대위 공동선대위원장이었던 무진 스님은 “매번 위급한 상황이 올 때마다 계파정치 안 한다고 하더니, 꼭 선거 때마다 계파정치 되더라”면서 “민주당은 친노, 친손 세력이니 하는 계파를 우선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천 과정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송 회장은 “왜 꼭 새누리당보다 공천을 늦게 해 선거운동 출발이 늦어지나”라고 꼬집었다. 박종택 상임고문은 “권리당원을 등한시하는데, 내년 6월 지방선거 때는 납득할 수 있는 공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생현장 첫 방문지는 광주 양동시장이었다. 상인들과의 간담회에서도 ‘매질’은 계속됐다. 한 상인은 “민주당에서 정책다운 정책을 내놓은 게 없었다. 정말 한심스럽다”면서 “선거 때만 되면 호남, 광주를 볼모로 삼아서 광주 시민들에게 해준 게 뭐 있나. 상처만 많이 받았다”고 질타했다. 일반 시민들도 민주당을 호되게 비판했다. 광주 서구에 사는 나병수(56)씨는 “왜 선거만 지면 5·18 묘지에 오나. 정치인들은 하루만 인사하고 당선되면 끝이다”면서 “민주당은 호남 사람들을 그만 좀 이용해라”고 다그쳤다. 또 다른 시민인 정익주(72)씨도 “선거 때 친노니 비노니 하는 얘기는 정말 듣기 싫다”면서 “제발 줄 잘 서서 공천 얻고 이런 것 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비대위는 함평의 한 노인정을 방문해 어르신과의 간담회를 끝으로 이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16일에는 경남 창원에서 비대위 2차 회의를 연 뒤 봉하마을을 찾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 참배, 부산 민주공원 참배 등의 일정을 이어간다. 광주·함평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MBC ‘김현희 특별대담’ 편성에 노조 반발

    MBC ‘김현희 특별대담’ 편성에 노조 반발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범인 북한 공작원 출신의 김현희(51)씨가 15일 밤 MBC 특집 대담 ‘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에 출연해 70분간 자신을 둘러싼 논란을 해명했다. 밤 11시 15분 정규 방송으로 편성된 ‘100분 토론’을 돌연 취소하고 특별 대담을 방영키로 한 것을 놓고 MBC 노조는 외압에 의한 편성권 침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MBC는 이날 갑작스럽게 내놓은 방송 교체 보도자료에서 “대한항공 폭파 사건의 진실과 ‘가짜 공작원설’ 등 김현희와 관련된 숱한 논란들을 들어본다”며 “유가족을 향한 참회의 메시지와 그동안 북한 공작원 마유미가 아닌 한 여인이자 어머니인 김현희로서 살아온 25년 세월의 소회도 들어본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기를 공중 폭파해 115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1990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날 방송에선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루머에 대해 해명했다. MBC 노조는 성명서를 내 “MBC는 프로그램 방영과 관련해 방송 하루 전인 14일에야 편성 실무진에게 통보했다. 특별 대담 녹화도 방송 당일 오후 4시쯤 시작했다”면서 “방송 7시간 전 녹화를 하고 부랴부랴 편집해 방송을 내보냈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배경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이 특집 대담 긴급 편성에 대해 김철진 시사제작국장이 ‘방송문화진흥회의 결의에 따른 후속 조치’라고 말했다”며 “다시 말해 방문진의 요구에 의해 편성했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지난해 9월 방문진의 일부 이사들은 2003년 11월 방송된 MBC ‘PD수첩’ 김현희 편의 제작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경위 조사를 요구했었다. 당시 ‘PD수첩’은 ‘16년간의 의혹, KAL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 편을 통해 김씨가 가짜 공작원이라는 주장을 다뤘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MBC 관계자는 “김씨를 섭외하기가 쉽지 않았고 섭외 결정이 난 뒤 급하게 방송 날짜가 잡혀 긴급 편성할 수밖에 없었다”며 “마침 858기 폭발 이후 김씨가 첫 기자회견을 한 날이 1월 15일이기도 해서 이를 계기로 삼았다. 노조가 주장하는 방문진의 외압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MBC는 명예 훼손과 품위 유지 위반을 이유로 이상호 기자를 해고했다. 이 기자는 대선 하루 전인 지난해 12월 18일 자신의 트위터에 MBC가 김정남을 단독 인터뷰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고 사측은 이를 부인해 왔다. 이 기자는 2005년 ‘삼성 X파일’ 보도를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서울광장] 박 당선인, 국민과의 허니문이 가기 전에/구본영 논설실장

    [서울광장] 박 당선인, 국민과의 허니문이 가기 전에/구본영 논설실장

    독일의 역사학자 위테크는 “신은 누군가를 멸망시키기에 앞서 뜨거운 권력을 누리게 한다”는 ‘섬뜩한’ 명언을 남겼다. 부디 당선인이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초심만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허니문.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시절이다. 하지만 그 꿈같은 밀월은 아쉽게도 금세 가 버린다. 신혼 여행지의 해변에 부서지는 물보라처럼 말이다. 평생 혼자 살았던 엘리자베스 1세가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고 했던가. 지난 대선에서 독신 박근혜 후보도 나이 육십에 대한민국에 청혼했다. 국민은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며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그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 박 당선인에게는 앞으로 짧으면 6개월, 길어야 취임 후 1년이 가장 행복하면서도 중요한 시간일 듯싶다. 미국에서도 6개월∼1년이란 허니문 기간엔 야당과 언론이 백악관에 대한 거친 비난을 자제한다지 않는가. 안타깝게도 박 당선인은 야당과의 긴 허니문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는 1987년 직선제 재도입 이후 처음 과반 득표, 최다 득표로 당선되긴 했지만, 상대 후보에 표를 던진 48% 역시 역대 최대 비율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민 다수는 문재인 후보의 ‘급격한 변화’보다 당선인의 ‘책임감 있는 변화’에 손을 들어 줬기에 ‘안티세력’의 발목 잡기를 지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게다. 다만 금쪽같은 허니문을 스스로 허비하는 자충수는 없어야 한다. 인수위 출범 과정에서 ‘밀봉 인사’등 온갖 잡음이 나왔기에 하는 얘기다. 당선인이 허니문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뭔가. 무엇보다 집권 5년의 국정 기조를 명료하게 제시하는 일이 아닐까. 당선인은 선거 기간 내내 핵심 국정 모토로 ‘국민행복’을 내세우긴 했다. “무너진 중산층을 70%까지 복원해 다시 한번 ‘잘 살아보세’의 신화를 이루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한 바 있다. 한데 당선인이 선거 막판 내건 ‘잘 살아보세’란 낯익은 구호의 원조는 그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이 이 간명한 메시지를 18년 집권 중 일관되게 밀어붙여 절대 빈곤을 추방하고 산업화의 기반을 성공적으로 닦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그의 독백에서 보듯 장기 독재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측면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당선인의 국정 철학이 아버지 때와 달라져야 할 이유다. 5년 단임 정부가 단숨에 물질적 풍요를 국민에게 선물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음을 이명박 정부의 부도난 747공약(7% 성장, 4만 달러 소득, 세계 7위 경제)이 입증했다. 더 큰 문제는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 높아진 이후엔 더는 소득과 정비례해 국민의 행복지수가 상승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하기야 인기 없는 이명박 정부도 올 들어 1인당 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명을 일컫는 20-50클럽에 가입하고 국가신용등급이 일본을 추월했다. 하지만 미국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149개국을 대상으로 국민행복 체감도를 조사한 결과 한국인은 놀랍게도 96위였다. 박근혜 정부가 담대하게 국정 운영의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 할 까닭이다. ‘국민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총량적 소득 증대에서 국민 ‘삶의 질’의 고양이라는 목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레게 리듬에 실려 오는 ‘굼베이 댄스 밴드’의 올드팝 ‘엘도라도’를 듣다가 무릎을 쳤다. “진정한 엘도라도는 다이아몬드와 황금이 아니라 평화와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라는 대목에서였다. 당선인은 국민의 평균적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임을 인식하고 소외계층을 보듬는 데 진력해야 한다. 물론 지속가능한 복지는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박근혜식 ‘잘 살아보세’는 복지와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기에 아버지 시절보다 훨씬 지난한 과제일 게다. 하지만 어쩌랴. 시대의 소명이라면. 독일의 역사학자 위테크는 “신은 누군가를 멸망시키기에 앞서 뜨거운 권력을 누리게 한다”는 ‘섬뜩한’ 명언을 남겼다. 부디 당선인이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초심만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kby7@seoul.co.kr
  • [데스크 시각] 박근혜 인사, 전리품이 안되려면/오일만 정치부 차장

    [데스크 시각] 박근혜 인사, 전리품이 안되려면/오일만 정치부 차장

    지금 국민들의 눈은 온통 ‘박근혜 인사’에 쏠려 있다. 박근혜 시대를 여는 첫 단추이자 국정 운영의 초석이란 의미다. 적어도 1987년 체제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인사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렸던 기억이 새롭다. 김영삼 대통령 당시는 PK(부산·경남) 인사, 김대중 대통령은 호남 인사,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친노(親) 인사가 늘 논란의 핵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사를 대선 승리의 전리품으로 인식하는 발상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업무 능력이 떨어지고 도덕성에 흠집이 나 있는 인물들이 요직을 선점했다. 마치 조선시대 정치적 격변기마다 등장했던 일등공신 책봉식을 보는 느낌이다. 물론 역대 정권 때마다 논란을 일으켰던 ‘코드인사’를 마냥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공유하는 가치와 정서가 같은 사람끼리 일을 해야 추진력과 업무 효율성도 높아지고 공동책임이라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코드 인사는 대체로 실패작이란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분법적 진영논리에 익숙한 우리 정치문화는 상대방 진영을 적으로 돌리고 ‘우리가 남이가’로 통하는 일종의 폐쇄적 조폭식 문화로 전락하곤 했다. 코드 인사의 장점은 사라지고 최악의 ‘동종교배 문화’로 귀결됐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당시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친 재경원 모피아들이 한국 경제를 어떻게 결딴냈는지 우리는 똑똑하게 기억한다. 대통령을 둘러싼 예스맨들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은 왜곡까지 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IMF 사태 직전에야 우리 경제의 실상을 파악한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다. 이명박(MB) 대통령은 집권 내내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권) 인사’라는 멍에를 짊어졌다. 역대 대선에서 최대 표 차이(531만표)로 이긴 여세를 몰아 집권세력들이 마치 점령군처럼 특정 지역과 코드인사로 농단한 사례다. 첫 조각 당시 청문회에서 3명의 장관 내정자가 낙마할 정도로 국민들의 불신이 컸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펼칠 탕평인사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크지만 탕평책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역사를 돌아봐도 탕평책에 성공한 집권자들의 특징은 유능한 인사를 중용했다는 점이다. 구색 맞추기용 탕평책이 아니라 인선 이후까지 내다본 혜안 때문이다. 특히 조선조 정조의 탕평을 ‘준론탕평’(峻論蕩平)이라 부르는데 핵심은 능력 있는 인사의 발탁이다.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대를 누르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의 서얼을 등용했고 하급 관리들 가운데도 유능하면 과감하게 승진시켰다. 탕평책의 백미는 단연 당 태종이다. 그는 목숨을 걸고 싸웠던 반대파도 등용했다. 물론 능력 때문이다. 이세민(태종)은 당시 황태자인 형 건성을 죽이고 등극하는데, 건성의 최측근 위징(魏徵)을 전격 발탁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위징은 예스맨이 되는 대신 사사건건 태종의 비위를 건드리는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위징에 대해 태종 역시 인간인지라 “조회 때마다 나를 욕보이는 위징이란 촌놈을 죽여 버려야겠다”고 노발대발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위징이 죽을 때까지 중용했다. 중국 역사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정관의 치’는 이런 태종과 위징이란 콤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oilman@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박근혜 대통령 시대와 강한 야당/이춘규 정치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박근혜 대통령 시대와 강한 야당/이춘규 정치부 선임기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1987년 체제 이후 처음으로 과반이 넘는 지지율로 승리했다. 첫 여성 대통령, 첫 부녀 대통령 등 화려한 수식어가 뒤를 잇고 있다. 국민의 기대도 크다. 박 당선인은 일부 인선에서 잡음을 낳기도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대통합을 향한 큰걸음을 뚜벅뚜벅 걷고 있다. 국민들은 새해 벽두부터 치열해진 강대국발(發) 세계무역전쟁과 외교안보전에 잘 임해 줄 것이라며 응원한다. 박근혜 대통령 시대가 빛나기 위해서는 대안을 제시하는 강력한 야당이 절실하지만 127석의 제1야당 민주통합당은 지난 5년, 10년간 지리멸렬했다. 대선 때마저 후보 지원에 뒷짐을 지고 있었다고 친노(친노무현)는 비주류를 비난한다. 비주류는 후보가 약했고, 친노 패권주의가 문제였다고 공박한다. 대선 패배 2주가 지났는데도 뼈저린 반성 주체도 없이 은근슬쩍 얼버무린다. 문제의 근원은 뭔가. 첫째, 열린우리당 이후 의존해 온 정치공학을 또 만지작거린다. 큰 기술 한 방에 넘어질 잔꾀와 꼼수의 작은 정치다. 국민을 잠시 홀릴 수 있을 뿐이다. 결코 속일 수 없다. 툭하면 의원직을 버리는 척하고, 단식도 하지만 국민은 저만큼 앞서본다. 뼛속까지 변해 신뢰받는 대안세력이 돼야 한다. 둘째, 야권후보 단일화 만능론을 버려야 한다.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야권후보 단일화에 매달리다 번번이 패하지 않았는가. 1948년 미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극단적인 진보세력을 버리고 중도를 택해 성공했듯이 노선 정비를 하라. 극단주의를 버리고 승부의 열쇠를 쥔 중도를 강화해야 한다. 종편 출연 거부 등 치기 어린 편가르기를 하면 스스로 갇히게 된다. 셋째, 안철수 전 무소속 대선후보에 대한 의존 체질도 재검토해야 한다. 쇄신해 안 전 후보를 받아들이자고 하지만 민주당이 대선 후에도 안 전 후보만 바라보는 현상은 한심하게 비친다. 누구 맘대로 되나. 그를 중심으로 한 신당이 출범하면 민주당은 금방 와해되어 버릴 수 있다는 지적을 허투루 들어 넘겨선 안 된다. 비주류의 뒷짐지기, 뒷다리잡기도 버려야 한다. 넷째, 정부여당과 자신있게 타협하고 협조하라. 박근혜 당선인도 “국회를 존중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대선 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정부여당의 발목만 잡지 말고 대안을 제시하라고 야당에 요구한다. 지나친 투쟁 의존성은 위험하다. 비겁한 ‘사쿠라’ 논쟁, 선명성 경쟁에 매달려 있을 정도로 세상은 한가하지 않다. 민주당은 두 번 집권한 ‘강인함’의 유전자가 있다. 떼밀려 쇄신하지 말고 힘차게 정면승부하라. 강한 야당이 강한 대통령을 만들어 낸다. 강한 야당만이 정권 재창출도 할 수 있다. 5년은 결코 길지 않다. 멈칫거리다가는 영국 노동당처럼 18년 암흑기를 가질 수도 있다. 미·중·일·러 주변 4강이 새로운 체제를 갖춰 국익외교 각축전이 뜨거울 한 해다. 박근혜 정부는 성공해야 한다. 강력한 야당이 견제하고 비판하며, 협력해야 가능하다. taein@seoul.co.kr
  • [사설] 北, 공동선언 이행 요구보다 대화가 먼저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어제 신년사에서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남측에 주문했다. 대규모 경제지원을 뜻하는 것이겠으나, 북측은 이를 위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무력도발의 허튼 미몽을 접고 남북협력 분위기 조성을 위한 대화 채비를 서두르란 뜻이다. 올해로 6·25 정전 체제가 60년을 맞았다. 강산이 여섯 차례나 바뀌었을 긴 세월이다. 이 기간 남북은 첨예한 무력 대치 속에 각자 제 길을 걸었고, 그 결과는 수치상 비교할 수 없는 국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2011년 기준으로 북한의 명목 국민총소득(GNI) 32조 4380억원은 남한 1240조 5000억원의 38분의1에 불과하다. 무역액은 무려 171배나 차이가 난다. 22만㎢의 좁은 땅덩어리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지닌 2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명 이상) 국가와, 인구의 3분의1인 800만명이 일상적 굶주림에 신음하는 지구촌 최빈국 중 하나가 적대적 공존을 이어가며 180여만명의 병력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게 분단 65년, 종전 60년이 만들어낸 한반도의 초상이다. 물론 남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시작으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대치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노력을 힘겹게 펼쳐왔다. 통일을 목표로 상호 불가침을 약속했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발전시키기로 다짐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대규모 경제협력에도 합의했다. 그러나 1968년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기습을 비롯해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이르기까지 헤아리기 힘들 만큼 북한의 무력도발은 끊임이 없었고, 그때마다 애써 쌓아올린 남북 간 합의와 신뢰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금도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 담판을 염두에 둔 채 위성 발사를 가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자행한 데 이어 3차 핵실험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우리 새 정부를 시험하고 있다. 1953년 계사년에 시작돼 어느덧 60갑자를 일순한 정전체제, 남북 대치의 분단사도 이제 변할 때가 됐다. 무엇보다 북한은 박근혜 정부 출범을, 자신들의 잇단 도발로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굳게 닫힌 대화의 문을 다시 활짝 열 기회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 각종 남북공동선언의 구체적 이행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진정성 있는 대화가 선행돼야 한다. 박 당선인은 대선 기간 수차 남북대화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북측은 대화 재개, 교류 및 협력 확대, 남북 간 신뢰 구축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평화 정착의 선순환 구조가 자신들에게 달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사설] 새 정부, 현 정부의 허물에서 교훈 찾아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어제 회동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6차례의 대선 가운데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당적을 유지한 채 정권을 재창출한 터라 회동 분위기는 전에 없이 화기가 감돌았다고 한다. 국내외 경제상황과 외교안보 현안, 일자리·복지 문제 등 국정 전반에 대해서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원활한 정부 인수인계와 국정 마무리에 적극 협력하기로 한 점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청와대 내부 온라인 업무시스템인 ‘이지원’의 자료 상당수를 후임 정부에 넘겨주지 않아 논란을 빚었던 5년 전의 볼썽사나운 모습이 재연돼선 안 될 일이다. 비공개로 진행된 만큼 새해 민생예산 편성에 적극 협력키로 했다는 발표내용 말고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이 무엇을 더 논의했는지는 당장 알 길이 없다. 다만 새 정부의 성공 조건과 관련해 이 대통령이 국정 5년의 경험을 진솔하게 얘기하고, 박 당선인이 이를 경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으로서의 국정 경험과 상황인식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라의 자산이다. 우리도 전임 대통령이 수시로 조언하며 협력하는 미국의 정치문화를 본받아 정착시킬 때가 됐다. 전임 정부의 공과 과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성공과 실패의 요인을 철저히 따져 국정 운영의 지식을 축적하고, 이 누적된 지식을 지혜로 발전시켜 후대로 전수하는 것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국가 지도자들의 책무인 것이다. 과거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 역시 적지 않은 공과 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발 재정위기 속에서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국가 신용등급을 끌어올렸고, 주요20개국(G20)의 당당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등 한국의 글로벌 위상을 드높인 점은 분명 평가받을 업적이라고 본다. 반면 대기업 친화 정책이 사회 전반을 따뜻하게 덥히질 못했고, 인사 난맥과 측근 비리가 여전했다. 비싼 대학등록금과 사교육비 문제도 미완의 과제로 남겨 놓았다. 4대강 사업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둘러싼 소통 부재 논란 역시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업적과 허물 모두 정부 자산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넘어 왜 문제가 됐는지를 두 정상은 따져보기 바란다. 서류뭉치 말고 국정운영의 산지식을 인수인계하도록 머리를 맞대야 한다.
  • MB-朴 회동… 무슨 얘기 나눌까

    MB-朴 회동… 무슨 얘기 나눌까

    이명박(왼쪽) 대통령과 박근혜(오른쪽) 대통령 당선인이 28일 청와대 단독 회동에서 어떤 얘기를 나눌지 관심이 모인다. 특히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된 이후 대선 때마다 반복됐던 현직 대통령 탈당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번 대선에서 처음으로 끊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회동은 주목받고 있다. 박선규 당선인 대변인은 27일 브리핑에서 “이번 대선은 현직 대통령이 탈당하지 않고 치른 첫 선거”라면서 “25년 만에 탈당하지 않은 대통령과 당선인이 만나는 역사적인 장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징적 의미 못지않게 정권의 순조로운 인수인계를 위한 실리적 측면도 크다. 각종 국정 현안에 대한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당선인이 현 정부 정책 기조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낼 경우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 수도 있다. 우선 이 대통령은 남은 임기 2개월 동안 ‘일하는 대통령’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새해 예산안에 대한 원만한 국회 처리를 요청할 것으로 예상된다. 5년 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비롯한 자신의 5년 임기 동안 국정 운영 과정에서 생긴 시행착오 등에 대해서도 박 당선인에게 조언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임기 중 추진해 온 주요 정책에 대해 박 당선인의 국정 운영 철학과 상충되지 않는다면 새 정부에서 기조를 유지해 달라는 바람을 피력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박 당선인의 경우 이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당선 이후 ‘요란하지 않은 행보’를 보여 왔다는 점에서 이번 회동에서도 목소리를 크게 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박 당선인은 원활한 정권 인수인계를 위해 정부 각 부처가 인수위 활동에 최대한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사회적 논란이 있는 정책이나 사업에 대해 이 대통령의 명확한 입장 정리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지난 25일 박 당선인이 최근 정부의 ‘낙하산 인사’를 정면으로 비판했던 것처럼 직설 화법을 쓰는 것은 최대한 자제할 것으로 보인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역대 인수위원장 5명… 정치인 3명, 학자 2명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1987년 13대 대선 이후 역대 인수위원장 5명 중 정치인 출신은 3명, 학자 출신은 2명이었다. 이명박 정부 인수위원장이었던 이경숙 당시 숙명여대 총장은 대학 경영능력에서 보여준 ‘실용’의 가치와 첫 여성 위원장이란 상징성이 낙점 배경이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인수위 시절 영어 몰입 교육을 강조하면서 ‘아륀지’(오렌지) 발언 논란 등으로 요직에 진출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임채정 전 국회의장이 인수위를 맡았다. 민주당 재야 출신 좌장격으로 조율 능력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대중 정부 출범 때는 4선의 이종찬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당무위원이 위원장직을 맡았다. ‘DJP(김대중+김종필)연합’의 후폭풍으로 논공행상 갈등이 일던 가운데 정치적으로 중량감 있는 이 위원장이 역할을 무난히 수행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때는 대학교수 출신인 정원식 전 총리가 발탁됐다. 학자 특유의 전문성을 내세워 새 정부의 개혁 비전을 실현하는 데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노태우 정권 때는 고(故) 이춘구 전 의원이 취임준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헌정 사상 첫 인수위원장인 이 전 의원은 신군부 출신 실세로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당선인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新지역주의’ 조짐?

    지역주의의 부활일까.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과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승리하면서 신지역주의가 만들어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번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인물론으로 고질적인 지역주의가 약화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왔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다. 영남과 호남으로 갈라진 지역주의 투표 성향은 올 대선에서도 여전했다. 오히려 더 강해진 측면도 있었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는 “문 전 후보가 부산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지지를 덜 받은 것”이라며 “특히 대구·경북 지역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도 “지역주의는 상수로 존재하는 것으로 올 대선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면서 “이른바 인물론으로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했지만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지역주의가 만들어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김형준 명지대 정외과 교수는 “박 당선인이 서울과 호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승리함으로써 신지역주의 형태가 만들어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른바 ‘영남+충청’의 지역구도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충청 지역 정당인 선진통일당과 합당을 하고 박 당선인도 충청에 연고를 둔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와 이인제 전 선진통일당 대표의 지지선언을 이끌어내면서 이른바 ‘영남+충청’의 지역구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또 한광옥 전 민주당 상임고문, 김경재 전 의원 등을 영입하는 등 호남에도 공을 들여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보수 후보 가운데 처음으로 호남에서 두 자릿수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반면 지역주의보다는 세대별, 연령별 투표가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2030세대와 5060세대가 각각 진보와 보수로 갈라졌다는 것이다. 세대별로 지지후보가 나뉜 가운데 2030세대에 비해 투표적극성이 높은 5060세대가 당락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 비해 2030세대의 투표율이 5~8% 포인트 올랐지만 5060세대도 이전보다 많게는 6% 포인트까지 투표율이 올라간 데다 인구수도 많아지면서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윤희웅 한국사회조사연구소(KSOI) 조사분석실장은 “이번 대선은 세대별, 연령별 투표가 지역주의를 넘어 제1의 사회적 균열 구도로 부각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2030세대는 진보, 5060세대는 보수로 구분하는 것은 세대별 성향을 너무 단순화했다는 것이다. 개혁에 대한 욕구가 높았던 386세대가 40대와 50대 초반을 차지하고 있어 50대를 단순히 보수로 분류하기에는 무리라는 것이다. 반대로 20대도 보수표가 적지 않다는 분석이 있다. 박 교수는 “20대, 특히 남성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성향이 30대에 비해 더 강한 측면도 있다.”면서 “북한에 대한 태도에서는 60대에 비해 20대가 더 강경할 정도로 꼭 세대별로 보수 진보가 구분됐다고 보기 힘든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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