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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대 총선 與 분당에도 승리… ‘분열=패배’ 항상 통한 건 아니다

    15대 총선 與 분당에도 승리… ‘분열=패배’ 항상 통한 건 아니다

    안철수 의원의 탈당에 이은 연쇄 탈당으로 야권이 분열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4·13 총선은 ‘일여다야’(一與多野) 구도가 불가피해졌다. 새누리당에는 ‘어부지리’의 기회가, 제1 야당의 위세가 무너지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에는 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하지만 과거 정치사를 되짚어 보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명제가 항상 통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통합과 분열’을 통해 흥망성쇠를 되풀이해 온 여야의 ‘총선사(史)’를 반추하며 이번 총선을 전망해 본다. 1996년 15대 총선은 다자구도로 치러졌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총재인 집권 신한국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자유민주연합, 이기택 전 총재의 통합민주당이 진검 승부를 펼쳤다. 이 다자구도는 분열의 산물이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DJ를 비롯한 동교동계가 이 전 총재와의 공천권 갈등으로 민주당에서 분열돼 나온 정당이었고, 자민련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내에서 계파 갈등을 겪었던 공화당 인사들이 탈당해 만든 정당이었다. 현재 분화 중인 정당 구도와 흡사한 점이 있다. 분열의 결과는 냉혹했다. 신한국당이 299석 가운데 139석(46.5%)을 가져가면서 승리를 거뒀지만,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여소야대’ 국면을 극복하지 못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26.4%), 자민련은 50석(16.7%), 통합민주당은 15석(5.0%)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특히 야권은 수도권에서 참패했다. 하지만 분열의 여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7년 대선에서 DJ는 자민련과 손을 잡으면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이후 총선은 모두 양자구도로 치러졌다. 하지만 양당 체제 속에서도 분열과 통합은 계속됐다. 2000년 16대 총선 직전 다수당인 한나라당과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인사들이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다. 공천 탈락으로 인한 분열이었다. 김윤환, 이수성, 조순, 이기택, 박찬종 전 의원 등이 합류했지만 선거에서 총 3석(지역구 1석, 비례대표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반면, 2003년 11월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들이 주축이 돼 창당한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에서 1987년 체제 출범 이후 처음으로 과반 의석(152석)을 확보했다. 이때부터 의회가 여대야소(與大野小)로 전환됐다. 분열을 통해 ‘대박’을 터트린 셈이다. 한나라당은 121석(40.5%)에 그치며 처음으로 1당 자리를 내줬다. 탄핵 역풍과 한나라당의 ‘차떼기 악몽’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는 열린우리당과 손학규 전 의원을 비롯한 민주 세력들이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했지만, 그해 12월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2008년 4월 ‘통합민주당’으로 재통합해 총선에 나섰지만 81석(27.1%)를 얻는 데 그쳤다. 한나라당은 친이(친이명박)계가 휘두른 공천학살로 인한 ‘친박연대’ 분열 사태에도 불구하고 153석(51.2%)을 확보하며 4년 만에 1당 자리를 되찾았다. 이후 친박연대가 한나라당과 합당을 하면서 한나라당은 170석에 육박하는 거대 정당이 됐다. 분열이 곧 여권 세력의 확장으로 이어진 결과다. 2011년 ‘디도스 사태’로 인한지도부 붕괴와 당명까지 바꾸는 위기 속에서 새누리당이 2012년 19대 총선에서 152석(50.7%) 과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과거 분열로 인한 세력 확장이 동력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통합이 성공만을, 분열이 실패만을 안겨 주진 않는다는 게 실증된 셈이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탄생할 ‘안철수 신당’의 파괴력에 따라 국회는 2004년 이후 12년 만에 여소야대 국면으로 전환될 수도, 16년 동안 여대야소 국면을 지속할 수도 있다. 단기적으로는 야권의 분열이 새누리당의 총선 승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분열의 양상이 중도층 흡수를 통한 야권 세력의 확장으로 이어진다면 2017년 대선에서 새누리당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YS·DJ 유훈 받들자” 상도·동교동계 화합 송년회

    “YS·DJ 유훈 받들자” 상도·동교동계 화합 송년회

    30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송년 모임에서 참석자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공동회장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공동 이사장인 김덕룡 전 의원과 권노갑 전 의원. 군사 독재 시절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주도해 결성한 민추협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로 나뉘어 1987년과 1992년 대선 등에서 경쟁했으나 이날은 “YS와 DJ의 유훈을 받들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서울광장] 양김 정치의 종언과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양김 정치의 종언과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오일만 논설위원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87년 대선 당시 ‘군정 종식’을 외쳤던 그의 울림은 크고도 깊었다. 그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은 30년간 이어진 군부 독재를 끝장내고 문민정부 시대를 여는 밑거름이 됐다. YS는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시킨 일등공신임이 틀림없다. 역사에는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 양김(김영삼·김대중) 시대가 한국 정치에 민주화를 꽃피게 했지만 지역주의와 계파정치라는 그늘도 드리웠다. 정치라는 것이 현실의 상황을 토대로 이뤄지는 것이지만 양김 정치는 지역주의와 계파정치를 잉태시키고 웃자라게 한 토양인 것도 사실이다. YS의 마지막 메시지가 ‘통합과 화합’이라는 점 역시 자신들의 시대에 뿌리가 내린 분열과 대립을 치유해야 한다는 반성에서 출발한 측면이 있다. 1960~70년대 군부 독재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결속력이 강한 계파정치 등장을 필연적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군부 정권이 뿌려놓은 지역감정은 영호남을 양분했던 양김 시대 더욱 활개를 쳤던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대목은 이른바 ‘87년 체제’다. 양김의 험난한 민주화 투쟁이 ‘87년 개헌’으로 결실을 보았고 여기서 규정된 구조적 틀이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5년 단임 직선제(대통령)와 소선구제(국회의원)로 요약되는 87년 체제는 엄밀히 말하면 양김과 군부의 타협물이다. 군부의 장기 집권 종식과 민주화란 양대 축으로 1987년 10월 9차 헌법 개정이 이뤄진 것이다. 헌법의 내용을 결정한 8인 정치회담은 군부 측에서 민정당 4인과 YS·DJ계가 각각 2인으로 구성됐다. 당시 여야 권력이 균형과 견제 속에서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며 ‘절충점’을 택한 것이란 의미다. 87년 체제는 나름대로 시대적 사명을 적절하게 수행한 것도 사실이다. 5년 단임제 도입으로 더이상 장기 집권을 걱정하지 않게 됐고 여야 간 정권교체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민주화 열기 속에서 정치권력 간의 절묘한 황금분할적 성격은 과거 극단적인 권력투쟁을 예방했던 측면도 컸다. 그러나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다원화된 시대적 흐름을 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모든 국가 권력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시킨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도 심각하다. 군대와 경찰, 검찰, 국세청, 감사원, 국가정보원 등 모든 권력의 칼자루를 대통령 한 사람이 쥐고 있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근간이 흔들릴 지경이다. 현 정부 들어 개헌론 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국무총리를 분리하는 분권형 개헌론도 등장하고 있지만 권력을 향한 정치공학적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 5년 단임 대통령제는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와 함께 정책의 단절이란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문재인 여야 대통령 후보가 소리 높여 대통령 4년 중임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동안 우리의 경제 규모는 10배 이상 성장했고 다원화된 사회의 흐름은 너무도 급박하게 이뤄지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21세기 변화의 사고를 담기에는 너무도 낡은 그릇이 됐다는 의미다. 국정이 5년 단위로 바뀌면서 국가의 장기 전략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김대중 정부의 지식정보화 육성 정책이나 노무현 정부의 국토 균형발전 정책,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동반성장 등 심혈을 기울였던 대표적 정책들은 뿌리도 내리기 전에 다음 정권에서 철퇴를 맞았다. 정권마다 명운이 걸고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했지만 정책의 생명인 연속성을 상실했다. 혼란과 갈등만 증폭시킨 꼴이다. YS가 남긴 과제는 어찌 보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일이다. 87년 체제를 이룩한 주인공들이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진 상황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시대정신을 담을 필요가 있다. 가중되는 서민들의 생활고, 무너지는 중산층, 고질적인 지역주의, 첨예한 이념 대립 등 지금 당면한 과제는 어느 하나 만만치 않다. ‘유통기간’이 지난 87년 체제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하루빨리 시작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oilman@seoul.co.kr
  • 국회엔 검은색 대형 애도 현수막… 지방 200여곳 6만여명 조문

    국회엔 검은색 대형 애도 현수막… 지방 200여곳 6만여명 조문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24일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정·재계 주요 인사와 일반 시민의 추모 행렬이 사흘째 계속되며 ‘문전성시’를 이뤘다. 저마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그의 정신을 받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까지 사흘간 서울대병원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총 2만여명을 훌쩍 넘겼다. 홍준표 경남지사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국가 개혁을 하신 분인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많은 국민이 비난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며 “새롭게 다시 한번 재조명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과거 검사로 활약하며 ‘모래시계 검사’라는 별칭까지 붙었던 홍 지사는 1996년 김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한 ‘YS키즈’다. 1990년 3당 합당 당시 김 전 대통령과 결별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홍사덕·이철 의원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창당했던 이기택 전 의원도 빈소를 찾아 유족을 위로했다. 이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오늘의 이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 데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는 가장 탁월한 공을 세운 분”이라며 “이분의 민주주의 정신을 따라서 이 나라가 더욱 성숙한 국가로 발전돼 나가길 빈다”고 말했다. ●김기춘 “민주화 과업 이룩한 역사적인 국가원수” 안희정 충남지사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를 잃어 매우 애통하게 생각한다”며 “우리에게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야 할 책무가 맡겨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조문록에 ‘고인께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두에 계실 때, 저는 이제 막 민주화 운동에 합류한 꼬마 대학생이었습니다. 고인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고 삽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1992년 14대 대선을 이틀 앞두고 부산 초원복집에서 지역 기관장들과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지원방안을 논의하며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사를 외쳤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유족을 위로하면서 한동안 빈소에 머물렀다. 김 전 비서실장은 “김 대통령께서는 산업화 토양 위해서 민주화의 역사적 과업을 이룩하신 역사적인 국가원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 손학규 전 새정치연합 상임고문 그리고 ’상도동계’ 김수한 전 국회의장,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도 사흘째 빈소를 지켰다. 재계에서는 손경식 CJ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이 발걸음을 했다. 손 회장은 “고인은 우리나라 민주화와 금융실명제 등 선진 제도를 도입한 훌륭한 지도자”라며 애도를 표했다. 벳쇼 고로 주한 일본대사는 ‘일본 국민과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 깊이 조의를 표한다’라고 조문록에 쓴 뒤 “큰 위인을 잃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애써 슬픔을 참아가며 문상객을 맞이했다. 차남인 현철씨는 아침 일찍 나와 빈소를 지키며 문상객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가며 예를 표했다. 이어 오전 11시쯤 휠체어를 탄 채 빈소에 등장한 손명순 여사는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슬퍼했다. 손 여사는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4시간가량 빈소를 지켰다. 김 전 대통령의 처남 손성환(82)씨는 빈소를 찾아 “새해마다 상도동에서 세배를 해서 이번에도 가게 될 줄 알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 전 대통령과 크고 작은 인연을 가진 시민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정수선(61·여)씨는 태극기에 싼 액자를 소중히 안은 채 장례식장을 찾아 “1970년 부산의 한 선거 유세장에서 김 전 대통령을 만나 사진에 사인을 받았는데 그것을 액자에 넣고 태극기에 싸서 여태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정씨가 “꼭 대통령이 되세요”라고 소리치니 김 전 대통령이 “꼬맹이가 귀엽다”며 사인을 해줬다는 것이다. 정씨는 “살아 계셨을 때 다시 한번 직접 뵙고 싶었는데, 돌아가시고 나서야 이렇게 찾아왔다”며 눈물을 보였다.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주범 김용남씨도 빈소 찾아 일명 ‘용팔이 사건’으로 알려진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의 주범인 김용남(64)씨도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았다.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은 김씨를 만난 뒤 “(김씨가) 목사가 됐다더라. 조문을 길게 하진 않았으나 기도하고 묵념을 오래 했다”고 전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에 마련된 정부 대표 분향소에는 이종걸 원내대표를 비롯한 새정치연합 의원 30여명은 국회 분향소를 찾아 단체로 헌화와 분향을 했다. 정부 분향소가 위치한 국회 본관 전면에는 ‘근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삼가 애도합니다’라고 적힌 검은색 대형 현수막도 새로 내걸려 한층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추모가 이뤄졌다. 전국 자치단체에 설치된 200여곳의 분향소에도 이날 오후 6시 현재 6만명이 넘는 조문객이 방문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애도를 표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거제시 대계마을 생가 옆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사흘 동안 3000여명이 방문했다. 이곳 분향소에는 김 전 대통령이 졸업한 장목초등학교 재학생 67명 전원이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거제가 지역구인 김한표 새누리당 의원도 “1990년대부터 김 전 대통령의 경호 담당으로 인연을 맺어 왔다”며 하루 종일 분향소를 지켜 눈길을 끌었다.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설치된 분향소에서는 동교동계(김대중 전 대통령 가신 그룹) 권노갑·김옥두·이훈평 전 의원과 상도동계 정병국 의원, 김덕룡·박희부 전 의원 등이 상주를 자처하며 조문객을 맞았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도 상도동계가 함께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조문을 받으며 품앗이한 전례가 있다. ●반기문 “국제사회 존경받는 나라 노력” 해외 주요 도시에 마련된 분향소에서도 추모 행렬은 계속됐다. 주한 미국대사 출신인 성 김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겸 부차관보는 23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소재 주미대사관에 마련된 분향소에 미국 정부 대표 자격으로 찾아 조문을 했다. 김 부차관보는 헌화와 묵념을 한 뒤 “우리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한 김 전 대통령을 매우 존경한다”며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이 민주주의로 기적적인 변모를 하는 데 가장 중심적 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뉴욕 대한민국 유엔대표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고인의 뜻을 따라 대한민국이 잘 살고 국제사회의 존경을 받는 나라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정부는 해외 주재 우리 공관에 분향소를 마련해 공관원들과 교민들이 찾을 수 있도록 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지방정부, 중앙의 출장소 전락 … 시대 맞는 자치분권 개헌 필요”

    “지방정부, 중앙의 출장소 전락 … 시대 맞는 자치분권 개헌 필요”

    올해로 ‘지방자치’가 성년이 된 가운데 지난 8월에 출범한 ‘자치분권민주지도자회의’(이하 자치분권회의)가 24일 백일상을 받았다. 자치분권회의는 지방정부와 지방의회가 함께 자치권의 제도적 미비 등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출범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지자체장과 지방의회 의원 총수의 3분의1인 5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한다. 자치분권회의 상임대표인 이해식 강동구청장은 “그동안 새정치민주연합 내 혁신위원회와 수차례 간담회를 통해 당의 혁신안에 자치분권 사항을 어떻게 반영할지 논의해 왔다”면서 “지난 9일 문재인 당 대표가 자치분권국가 비전을 총선과 대선공약에까지 반영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자치분권회의가 이뤄낸 소중한 성과”라고 말했다. 지자체 재정자율성 확보, 자치경찰제 조기 도입, 교육자치 실현 등이 핵심 내용이다. 이 구청장은 “핵심 내용의 실천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 자치분권회의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자치분권회의는 ‘자치분권 개헌’을 궁극적 목표로 한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130개 조항 중 지방자치 조항이 단 두 개뿐이다. 이 구청장은 “사회가 복잡해지고 시민들의 복리요구도 증대했는데 현행 헌법이 변화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를 두고 운영한다는 조항만 있어 구체적인 내용을 법령에 위임해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의 ‘출장소’처럼 됐다”고 꼬집었다. 그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대등한 파트너십 관계로 가야 시민의 다양한 복리요구를 수용할 수 있다”면서 자치분권형 개헌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치분권회의는 내년 1월 전체 워크숍을 개최한다. 지방자치의 장기적인 발전 방향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이 구청장은 “올해 자치분권회의가 주축이 돼 치러낸 ‘지방자치 정책박람회’와 ‘지방자치 정책전당대회’ 같은 행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할 것”이라면서 “자치분권운동은 초당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협력을 부탁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민주화 이끌어 온 ‘숙명의 맞수’… ‘兩金 시대’ 역사 속으로 지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 때로는 동지로, 때론 맞수로 ‘숙명적 관계’를 이어 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민주화 시대를 연 두 전직 대통령은 정치사에서 양김(兩金)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에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합치면 3김(三金)이 된다. 한국 현대 정치사는 세 사람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양김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김 가운데는 김 전 총리만 남아 3김 시대의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DJ는) 나하고 가장 오랜 경쟁 관계이자 협력 관계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다.”(2009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면서) 22일 타계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일생을 되돌아볼 때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숙명의 맞수’이자 ‘동지’인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둘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과 맞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는 든든한 ‘동지’였지만 권력 앞에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경쟁자’였다. ‘양김’은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야당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매김하며 고비마다 협력과 경쟁을 이어 갔다.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을 시작으로 70년 대선 후보 경선, 87년 대선, 92년 대선까지 정치적 명운을 건 승부를 벌였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국회 등원은 훨씬 빨랐던 YS가 첫 승부였던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맞붙었던 1970년 대선 경선에서는 1차 투표에서 승리하고도 결선투표에서 DJ에게 역전패했다. YS는 1971년 대선에서 DJ를 도와 “김대중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라면서 지원 유세에 나섰지만 95만표 차로 패배했다.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는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고 1985년 2월 총선에서 신민당의 극적 승리를 일궈 냈다. 양김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며 6월 민주항쟁을 이끌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 냈다. 하지만 협력은 여기까지였다. YS와 DJ는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실패한 뒤 DJ는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양김은 국민적 여망을 저버리고 대선에 뛰어들었고, 결국 정권 창출에 실패했다. 훗날 DJ는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YS도 DJ 서거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회고했다. 이후 대립 구도는 가속화했다. YS는 1990년 1월 당시 여당인 민정당 및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행했다.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했다.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1992년 대선에서 DJ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 끝에 먼저 청와대에 입성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DJ는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제1야당 대표로 정계에 복귀했다. 1997년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돼 YS에게 권좌를 넘겨받았다. 양김은 1987년 단일화 실패 이후 2009년 DJ가 서거할 때까지 22년간 반목을 이어 갔다. DJ는 3당 합당 이후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YS를 비난했고 YS도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렸다. 두 사람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조우’했지만 서로 외면한 채 다른 곳을 응시했다.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독재’라는 표현을 써 가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자 YS는 “이제 그 입을 닫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YS가 사경을 헤매던 DJ를 문병한 뒤 취재진에게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한국 현대사의 두 거목은 극적으로 화해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사설] ‘민주화의 별’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며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이 어제 새벽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 88세의 일기로 영면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의 아호인 거산(巨山)처럼 현대사의 굽이마다 뚜렷한 족적과 공과를 남겼다. 우리는 헌정사의 거목(巨木)을 잃은 상실감이 적지 않을 온 국민과 함께 그의 서거를 애도한다. 아울러 부인 손명순 여사 등 유족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마음을 표한다. 이제 고인이 생전에 열망했던 민주화의 완성이나 신(新)한국의 건설은 남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정치 일생에는 우리 현대사의 부침과 영욕이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유일무이한 나라다. 이 같은 기적을 거론하면서 그 눈부신 성취의 양대 축인 민주화에 앞장섰던 김 전 대통령을 빼놓고 말하긴 어렵다. 엄혹했던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의원직 제명과 가택 연금, 그리고 목숨을 건 23일간 단식 등 고인에게 가해졌던 혹독한 탄압과 그의 응전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로 가는 가시밭길 같은 역사 그 자체였다. ‘정치인 YS’에 대해서는 호오(好惡)와 포폄(褒貶)이 엇갈릴 수 있겠지만,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그의 신념처럼 이 땅에 ‘민주 헌정’을 뿌리내리게 한 공적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 걸어온 역정(歷程)을 되돌아보자. 그를 슬픔 속에서 떠나보내는 이 순간 고인의 과보다 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고인은 평생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협력과 경쟁을 통해 이 나라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 않은가. 대한민국이 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 중 가장 짧은 기간에 민주화를 일궈 냈다는, 세계적 평가는 많은 부분 고인과 DJ의 영전에 받쳐야 할 헌사일 수 있다. ●민주화, 군정 종식의 기수 YS 양김(兩金)이 펼친 유신 반대나 대통령 직선제 관철 투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원동력이었다. 이들의 4반세기에 걸친 민주화 대장정이 대통령직선제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결합해 1987년 5년 단임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적 헌정질서를 이끌어 내면서다. 그래서 YS의 14대 대통령 당선은 고인의 민주화 노력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겠지만, 헌정사에서 군 출신 대통령의 집권을 끝내고 문민 시대를 다시 열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1992년 대선에서 이겨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고인의 대통령으로서의 치적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군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척결 등으로 군부에 힘이 실린, 32년간의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 시대를 연 공적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가 솔선한 공직자 재산공개, 그리고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부패 척결을 제도화한 공적도 빼놓을 수 없다. 고인이 광주 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승화시키고 5공 신군부에 유혈 진압의 죄를 묻는 등 우리의 불행했던 과거사를 정리하려 했던 시도도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뇌리에는 뚜렷하게 각인돼 있다. 물론 고인의 이런 정치 역정에 대해 여전히 명암과 긍정·부정적 평가가 교차한다. 어찌 보면 그가 이끈 문민정부의 공과는 훗날 사가(史家)들로부터 엄정한 재평가를 받아야 할 대목도 없지 않을 게다. 특히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명분으로 단행한 ‘3당 합당’이나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행보가 그렇다. 전자는 집권을 위해 비판의 대상이었던 노태우 정권과 손잡았다는 점에서, 후자는 몇몇 악재와 비리로 문민정부가 흔들리는 국면에서 이를 덮으려 자의적으로 단행한 것처럼 비치면서 벌써 국민적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다. 더구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기까지 김 전 대통령에게 지워진 정치적 책임과 흠결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어받아야 할 신(新)한국 건설의 꿈 DJ에 이어 YS의 서거로 소위 ‘3김(金) 정치’ 시대도 저물어 가고 있다. 다만 3김 정치의 한 꼭짓점이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아직 생존해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빛이 바래기 시작한 3김 정치식(式) 정치 행태와 강고한 지역주의로부터 우리 정치가 일정 부분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도 없지 않을 게다. 당장 아직도 우리 정치권에 유령처럼 배회하는 지역주의의 망령부터 배격해야 한다. YS의 상도동계니 DJ의 동교동계니 하는, 소위 가신 정치의 폐해를 상기해 보라. 차제에 정치권이 지역감정의 피해자이면서도 지역 갈등을 등에 업고 정치 생명을 연장했던 3김의 정치 행태와는 영원히 절연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양김의 퇴장은 3김 정치가 드리운 부정적 그늘을 확실히 걷어 낼 적기다. 더욱이 1987년 5년 직선제 개헌 이래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아 가는 시점이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로 국리민복을 추구하는 국가 정책에마저 흑백 논리로 접근해 발목을 잡던 것을 당연시하던 양김 시대의 이분법과도 결별할 때다.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직 선진 복지국가의 문턱에서 맴돌고 있다. 무릇 시민의 자유와 공공성의 조화로운 추구가 민주공화정 운영의 핵심 원리다. 그런데도 작금의 우리 사회에선 제 몫을 찾으려는 목소리는 높지만, 공동체에 헌신하는 움직임은 미약하다. 공공·노동·교육·금융 등 이른바 4대 개혁은 여전히 난항이다. 이는 어쩌면 김 전 대통령의 생전에 치유하려 했던 신(新)한국병이 더 위중하다는 증좌인지도 모르겠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그가 이루려 했던 신한국 건설은 남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 됐다. 다만 그나 그가 속했던 3김 정치의 긍정적 유산은 물려받되 부정적 측면은 소거하는 일은 여야 정치권에 주어진 엄숙한 소명이다. 그중에서도 합리적 토론과 소통으로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완성해 정치가 더는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 안 되게 하는 게 으뜸가는 시대적 과제일 것이다.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며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 노무현·이명박·김무성·손학규… ‘정치적 자손’ 숱하게 발탁

    노무현·이명박·김무성·손학규… ‘정치적 자손’ 숱하게 발탁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인맥은 상도동계가 핵심이다. YS는 특유의 ‘인물 발탁’으로 한국 정치사에 수많은 ‘정치적 자손’을 남겼다. 이 중엔 YS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사람도 있고, 아직까지 여의도를 호령하는 인물들도 있다. ●‘정치인 양성 사관학교’ 상도동계 1세대인 ‘좌(左)동영 우(右)형우’를 비롯해 서석재·김덕룡 전 의원, 김수한·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4선 정병국·이병석 의원 등은 모두 YS와 민주화 운동을 함께했거나 YS가 발탁한 인사들이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도 그가 발탁했다. 진보 진영의 야권 인사들도 YS가 제도권 정치로 흡수했다. ●김무성 1987년 막내로 입문 김 대표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거쳐 1987년 상도동계 막내로 입문한 뒤 김영삼 정권 초대 민정수석비서관, 최연소 내무부 차관을 지냈다. 서 최고위원은 YS의 야당 총재 시절 비서실장, 문민정부 정무장관을 역임했다. 최형우 전 의원은 고 김동영 의원과 함께 민주화 운동 시절 YS를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정치적 동지다. 문민정부 2인자로 내무부 장관을 지냈지만 1997년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고문과 여당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다 중풍으로 쓰러진 뒤 정계에서 물러났다. 민주당 원내총무를 역임한 4선 김동영 전 의원은 1991년 55세로 일찍 세상을 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북고 동기로 민정당 출신인 ‘허주’(虛舟) 김윤환 전 의원은 당시 대구·경북 의원들을 결집시켜 김영삼 정권 탄생에 공을 세운 한국 정치사의 대표적 킹메이커다. 2009년 별세한 서석재 전 의원은 김동영·최형우·김덕룡과 함께 민주계 ‘실세 4인방’으로 불렸다. 164㎝ 단신으로 별명이 ‘작은 거인’이었던 그는 조직의 귀재로,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설을 제기한 뒤 총무처 장관직에서 8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YS는 이를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2012년 대선후보 놓고 갈려 상도동계는 2012년 대선 때 지지 후보를 놓고 갈렸다. 전북 익산 출신으로 상도동계의 드문 호남 인맥인 김덕룡 전 의원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지지하며 다른 길을 걸었다.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 당시 YS에게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하며 YS와 갈라서게 된다. 이 전 대통령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깜짝 발탁됐다. 세 차례 대권에 도전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YS 정부 최연소 노동부 장관 출신인 이인제 최고위원도 YS가 발굴했다. 특히 이 전 총재는 김영삼 정권에서 감사원장·총리로 중용되는 등 YS가 직접 대권 가도를 놓아줬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서강대 교수 시절 광명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 1996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민중당 소속 운동권 정치가였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이재오 의원은 1996년 15대 총선 때 신한국당 총재였던 YS가 영입했다. 15대 총선 때는 ‘YS 키즈’가 대거 배출됐다. 정의화 국회의장,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경남도지사, ‘박종철 검사’ 안상수 창원시장, 이완구 전 국무총리 모두 신한국당 초선 동기다. ‘YS의 영원한 입’ 박종웅 전 의원, 홍인길 전 총무수석도 YS 직계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대도무문’의 반세기… 군부 통치 끝내고 문민 시대 열었다

    ‘대도무문’의 반세기… 군부 통치 끝내고 문민 시대 열었다

    88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DJ·1926~2009)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쌍두마차’였다. 바른길로만 가겠다며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정치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로 ‘정치 9단’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아호인 거산(巨山)은 자신의 고향인 거제의 ‘거’와 정치적 고향인 부산의 ‘산’을 따 지은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통영중 재학 시절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했고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였다. 이어 경남고를 거쳐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으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과 손 여사는 장녀 혜영(63), 차녀 혜정(61), 장남 은철(59), 차남 현철(56), 삼녀 혜숙(54)씨 등 2남 3녀를 뒀다. 이 중 현철씨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의 활동상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거제에서 출마해 최연소 의원(27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9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7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을 쏟아냈다. 그의 정치 행보는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고, 이는 야당 정치 인생의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지만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되고 이듬해에는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됐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며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고,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자택 앞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도 당했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줬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헌정 사상 최초로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 맞섰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다.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한 것이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선 후보로 탈바꿈했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퇴임 후에도 부산·경남(PK)을 기반으로 한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리더로서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속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속보]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양김 시대’ 역사의 뒤안길로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金永三)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서울대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올해 88세로 고령에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 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9일 몸에서 열이 나 서울대병원에서 입원했고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겼다. 지난 10일 검진차 병원을 찾았다가 17일까지 입원했다 퇴원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대중·김영삼’의 ‘양김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金洪祚)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5·6·7·8·9·10·13·14대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한국 헌정사에서도 최연소(만 26세) 국회의원과 최다선(9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도 함께 갖고 있다.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를 다섯 차례나 지냈다.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1979년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됐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에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고 1987년 ‘6월 항쟁’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평생의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 관계를 이어갔다. ‘상도동’과 ‘동교동’으로 상징됐던 양김의 민주화 세력은 민주화 운동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역사를 이끌었다.김 전 대통령은 1987년 12월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뒤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한 바 있다.그러나 이후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에 합류하면서 박철언 전 의원과의 대결 끝에 대선 후보가 되었다. 1992년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그는 ‘군정 종식’을 선언했고 ‘문민시대’를 열었다. 특히 ‘칼국수’를 즐겨먹는 것으로 검소함과 청렴함을 표방하면서 하나회 청산과 금융·부동산 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실시, 전방위적 부패 척결 등을 통해 군사정권 시절에 비해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외환 위기에 따른 국가 부도 사태를 초래했고 친인척 비리가 불거지는 등 임기 초반에 누렸던 절대적인 지지를 대부분 상실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상도동계’의 영원한 리더이자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의 ‘대부’로 자리하며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아들 현철 씨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영삼 전 대통령 오늘 새벽 서거

    김영삼 전 대통령 오늘 새벽 서거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88세.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고 오병희 서울대병원장이 긴급 브리핑에서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정오쯤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했으며, 상태가 악화돼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하면서 사망에 이르렀다고 오 원장은 설명했다. 서거 당시 김 전 대통령 옆에는 차남 현철씨 등 가족이 자리해 임종했으나 부인 손명순 여사는 곁에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 전 대통령은 고령인 데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종종 서울대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왔으며, 그때마다 며칠씩 입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앞서 지난 10일 검진 차 병원을 찾아 17일까지 입원한 뒤 퇴원했다.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김홍조와 박부연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장목소학교, 통영중, 경남고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된 이후 9선(5·6·7·8·9·10·13·14) 의원을 지냈다.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채 통일민주당 후보로 독자출마한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패해 2위로 낙선했다. 하지만 민정당·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합류했고, 박철언 전 의원과 사활을 건 대결 끝에 대선후보를 쟁취했다. 1992년 대선에서 필생의 라이벌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문민시대를 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 당수 세 차례, 야당 원내총무 다섯 차례를 역임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섰다. 양김의 ‘상도동·동교동’은 민주화 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둘은 1970년대 후반에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야당 당수로서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다 1979년 총재 직무를 강제로 정지당하고 의원직에서도 제명되는 고초를 겪었다. 신군부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들어서는 23일간의 단식 투쟁,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의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해 87년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직선제 개헌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PK(부산·경남)를 지역 기반으로 삼은 민주화 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리더로서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평생 거르지 않다시피한 새벽 조깅과 영문이니셜 애칭 ‘YS’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가장으로 거행하고 장지는 현충원으로 하기로 유족 측과 행정자치부가 합의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딸 혜영(63), 혜정(61), 혜숙(54)씨, 아들 은철(59), 현철(56) 씨 등 2남 3녀가 있다. 정부는 22일 낮 12시 30분 김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이를 공식 결정할 예정이다. 임시 국무회의에서는 국가장 진행, 장례위원회 구성, 장지, 영결식과 안장식 등 장례 절차 전반을 심의한다. 국가장 절차는 정부와 유족의 협의 후 행정자치부 장관이 제청하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현직 대통령이 결정한다. 5일간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면 김 전 대통령은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주도 ‘정치9단’

     86세로 생을 마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의 산증인이다. YS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1926~2009)과 함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쌍두마차’였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 고비마다 보여준 승부사 기질은 그가 ‘정치 9단’이라는 별칭을 얻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년기-거제도서 출생, 한인학생 차별 일본인 교장 골탕먹이다 정학 처분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도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2008년 작고)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작고)씨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초등학교를 나온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경남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던 동래중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으며, 1년 뒤 통영중에 진학했다. 통영중 재학 시절에는 한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장의 이삿짐을 훼손하는 등 골탕을 먹인 일화가 유명하다. 이로 인해 경찰 조사를 받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 전 대통령 스스로 모교로 꼽는 경남중으로 전학한 것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이다. 대통령의 꿈은 이 때부터 비롯됐다. 당시 부산 하숙방 책상머리에 붓글씨로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붙이고 뜻을 키운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만 20세인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고, 우익 학생단체인 ‘순학회’를 결성하는 등 정치 입문을 위한 사전 준비에도 힘을 쏟았다.    ●청년기-한국전때 학도의용대 가담, 동갑내기 손명순 여사와 맞선 한달만에 결혼  정계 진출의 기회는 대학 2학년 때 찾아왔다.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 장관상(2등)을 수상, 당시 장택상 외무부 장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0년 5·30 총선에서 경북 칠곡에 무소속 출마한 장택상 후보의 당선을 돕기도 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학도의용대에 가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손명순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1년 2월 ‘할아버지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그가 만난 사람이 바로 동갑내기 손 여사였고, 선을 본 지 한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하기로 했던 목사가 날짜를 착각해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주례를 즉석에서 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혼 당시 이화여대 약학과 3학년생이었던 손 여사는 당시 교칙에 따라 결혼하면 퇴학을 당할 처지였지만, 결혼 사실을 비밀에 부쳐 무사히 졸업했다. 손 여사는 결혼 초기 시댁이 있는 거제로 내려가 멸치 말리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익힌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이후 손 여사의 ‘대표 메뉴’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2011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에서 “내 인생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민주화를 이뤄낸 일이고, 다른 하나는 손 여사를 아내로 맞이한 일”이라고 했고, 이에 손 여사는 “좋아서 살았지예”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치적 성장기-26세때 최연소의원에, 최연소 원내총무 최다선 의원등 숱한 기록  김 전 대통령은 1952년 5월 장택상 당시 국회 부의장이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총리실 인사담당비서관에 기용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장 총리가 ‘고시진 사건’으로 물러나자 1954년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낙향했다.  그는 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 공천을 받아 최연소 의원(26세)이 됐다.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6세), 최다선 의원(9선) 등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이 같은 화려한 꼬리표와 달리 고난의 연속이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표를 던지고 자유당 입당 7개월여 만에 탈당했으며, 이는 야당 정치인으로서 30여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됐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고향인 거제를 떠나 부산에서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뒤 치러진 5대 총선에서 원내에 복귀했으나, 같은 해 9월 어머니가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로 정치 활동이 전면 금지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1963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군정 연장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수감되는 등 굵직굵직한 정치 현안에 저돌적으로 맞서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민주화 투쟁기-3선개헌 반대하다 초산테러, 10·26 신군부시절 가택연금 단식투쟁  1965년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에 올랐으며,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상도동 자택 앞 골목길에서 괴한에 의해 ‘초산 테러’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당시 김대중 후보에 밀렸다.  김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은 유신 체제에 대한 정면 돌파로 이어졌다. 1974년 5월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 유신 체제에 맞서다 결국 2년 뒤 ‘각목 전당대회’를 계기로 당권을 내주기도 했다.  특히 1979년 5월 총재직에 재당선되고 2개월 만에 ‘YH무역 사건’이 터졌다. YH 여성 근로자들이 신민당사에서 폐업 반대 농성을 벌이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국내 정당 사상 처음으로 법원에 의해 총재 직무가 정지되고 의원직마저 박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979년 10·26 사태를 계기로 신군부가 등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23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한 그의 결단은 정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1985년 2·12 총선 직전 신민당을 창당해 돌풍을 일으키는 등 전두환 정권에 대한 끈질긴 압박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대권 도전과 성공-1990년 3당합당, 1992년 대선 당선 ‘문민정부’ 시대로  민주화 이후 처음 치러진 1987년 대선에 김 전 대통령 역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른바 ‘1노·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맞붙은 선거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4월 13대 총선에서는 제1야당의 자리마저 DJ의 평민당에 내줬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은 대권을 향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제2·제3 야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을 합쳐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키는 ‘3당 합당’을 결행했다. 35년 야당 생활을 접고 여당의 대권 주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결국 1992년 대선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며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 도입,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하나회 해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와 처벌 등 굵직굵직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임기 말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비판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서민적인 청와대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국수가 대표적이다. 칼국수가 당시 청와대 대표 메뉴가 되면서 대통령의 영양 관리라는 뜻밖의 고민거리도 생겼다. 청와대 방문객들이 한번쯤 맛보는 별미지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내내 칼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다.    ●뚝심과 감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키는 ‘뚝심의 정치’를 보여줬다. 정치적 고비마다 국민 여론을 읽고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탁월해 ‘감(感)의 정치인’으로도 불렸다.  김 전 대통령의 화법은 단순 명료했다.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직설적인 화법 탓에 ‘말실수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표현을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결식 아동’ 문제를 언급하려다 ‘걸식 아동’이라고 발음하는 식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발언한 사례도 유명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말실수에 핑계나 변명을 하지 않았기에 친근감과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DJ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민주화 동지에서 1987년 대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며 불편한 관계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DJ의 서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병원을 전격 방문, 22년간의 반복과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화해로 이해해도 되느냐는 기자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면서 “제6대 국회 때부터 동지적 관계이자, 경쟁 관계로 애증이 교차한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YS 서거]한국정치 ‘양대 산맥’ 상도동·동교동계도 역사속으로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한국 현대 정치의 ‘양대 산맥’을 이뤘던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YS는 1969년 상도동으로 이사온 뒤, 영욕의 세월을 상도동과 함께 겪어왔다. 집권때 까지는 군부독재에 항거해온 민주화의 성지로 상징됐지만, 집권 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면서 무능과 파벌 정치의 본산으로 치부됐다.  동교동 역시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1961년 이사온 뒤, 1995년까지 35년여 동안 DJ의 정치적 요새와 마찬가지였다. DJ는 1995년 일산으로 이사했다가, 대통령 퇴임 후 다시 동교동으로 돌아왔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과 마포구 동교동은 각각 ‘양김(金)’의 권력과 인맥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80년 신군부가 언론을 검열하던 당시 신문에서는 두 야당 거물의 이름 조차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신문들은 DJ와 YS를 각각 ‘동교동 인사’와 ‘상도동 인사’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두 거물의 집을 드나들던 인사들도 각각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로 불렸다.  1984년 YS와 DJ가 전두환 정권에 맞서기 위해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중심이 돼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심 축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영남을 상징해온 상도동계와 호남을 상징해온 동교동계는 1987년 YS와 DJ의 후보 단일화가 무산된 뒤, 서로 치열한 경쟁 속에 갈등과 반목을 거듭했다.  DJ가 서거한 2009년 이후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해묵은 갈등을 씻고 화해했다. DJ 서거 직전 YS와 DJ간의 극적인 화해가 이뤄졌다. 2009년 11월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YS 주재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인사가 만찬을 갖기도 했다. 이듬해 새해 첫날에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22년 만에 ‘교차세배’를 하기도 했다. 이후 간간이 갈등이 재연되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의 교류는 이어졌다.  최근들어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인사들이 각자 제갈길을 택하면서 사분오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상도동계인 김덕룡 전 의원이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반면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상도동계 인사 중심의 민주동지회 소속 회원 100여명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공식선언했다. 동교동계에서는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 김경재 전 민주당 최고위원에 이어 ‘리틀 DJ’로 불렸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도 박 후보를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과 상도동계 김 전 의원 등 양측 인사 상당수는 최근 시민사회 원로들과 함께 ‘민주와 평화를 위한 국민동행’ 모임에 참여하는 등 새롭게 ‘결합’하는 양상이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박희태의 맞수’ 박상천 잠들다

    ‘박희태의 맞수’ 박상천 잠들다

    김대중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박상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4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암 투병을 해 온 고인은 지난 4월부터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 왔다. 77세. 고인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 재학 중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2년간의 판사 생활 이후 20년을 검사로 봉직했다. 19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던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고흥·보성에서 5선(13~16·18대)을 했고, 대변인과 당 대표 등 요직을 섭렵했다. 원내총무(원내대표)를 세 번이나 역임할 만큼 탁월한 협상가였다. 특히 국민회의 원내총무 시절인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대학 동기로 ‘절친’이자 맞수였던 박희태 당시 신한국당 원내총무와 담판을 벌여 이회창·김대중 대선 후보 간 TV토론을 성사시킨 일화는 여전히 회자된다. ‘60년 지기’의 비보를 접하고 황급하게 빈소를 찾은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아직 70대밖에 안 됐는데 뭘 그리 빨리 갔나. 나는 한 마리 짝 잃은 거위”라며 안타까워했다. 여야로 엇갈렸지만 둘은 각별했다. 1961년 고등고시 13회 합격, 1988년 13대 총선 당선, 당 대변인, 법무부 장관, 당 대표까지 인생 역정이 겹쳤다. 은퇴도 같은 날이었다. 2012년 2월 9일 박 전 의장은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고인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날 빈소에는 여야 정치인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가 떠나는 길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빈소를 찾으면서 두 여야 대표 간 짧은 만남이 이뤄졌다.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황우여 사회부총리, 박지원 새정치연합 의원, 이부영 전 의원 등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유족으로 부인 김금자씨와 아들 박유선(SBS), 딸 민선(제일모직), 태희(SK텔레콤)씨 등 1남 2녀가 있다.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는 고인의 5촌 조카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2호실, 발인은 6일 오전 6시 40분. (02)2258-5940.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부고] 박상천 전 민주당 대표 별세

    [부고] 박상천 전 민주당 대표 별세

    민주당 대표를 지낸 새정치민주연합 박상천 상임고문이 4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암 투병을 해온 고인은 지난 4월부터 서울대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전남 고흥 출신인 고인은 13대, 14대, 15대, 16대, 18대 등 5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대변인, 원내대표, 당 대표, 법무장관 등 정치권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의정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서울법대 재학 중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2년 간 판사 생활을 한 뒤 1966년 광주지검에서 출발해 순천지청장을 끝으로 퇴임할 때까지 20년 간 검사로 봉직했다. 그는 1987년 민주당 비민주법률개폐특별위원장을 맡아 정계에 입문한 뒤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던 평민당 내 재야 출신 모임인 ‘평민연(平民硏)’ 몫으로 공천을 받았다. 이후 16대까지 고향에서 내리 4선에 성공했다. 국민회의 원내총무 시절인 97년 대선을 앞두고 박희태 당시 신한국당 원내총무와 담판을 벌여 여당 후보였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TV토론을 성사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을 자르고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로 꼽힐 만큼 소신이 분명하고 주관이 강했고,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 후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길 만큼 신뢰를 받았다. 고인은 물리적 충돌보다 대화와 타협을 추구하는 철저한 의회주의자로도 통했다. 고인은 동갑내기 법조인 출신으로 정당은 다르지만 비슷한 시기 당 대변인, 원내총무를 맡은 박희태 전 국회의장과 ‘영원한 맞수’로 불렸다. 박 전 의장은 자신의 책에서 고인을 “공격적 맞수가 아닌 협력적 맞수”라고 회고했다. 하루 흡연량이 2갑을 넘는 애연가로 유명했다. 유족으로 부인 김금자(65)씨와 딸 유선(SBS)·민선(제일모직), 아들 태희(SK텔레콤)씨 등 1남2녀를 두고 있다. 사위로는 김욱준(검사), 김용철(의사)씨가 있다. 가수 출신인 박진영 JYP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고인의 5촌 조카이기도 하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12호실(02-2258-5940)이며, 발인은 6일, 장지는 경기도 광주 시안 가족추모공원이다. 연합뉴스
  • [이슈&이슈] ‘30년 희망고문’ 춘천~속초 철도 이번엔 뚫릴까

    [이슈&이슈] ‘30년 희망고문’ 춘천~속초 철도 이번엔 뚫릴까

    “30년 기다려 온 춘천~속초 간 동서고속화철도, 이번에는 꼭 뚫어 주세요.” 속초·화천·양구·인제 등 설악권과 접경지역을 낀 강원 영북지역 주민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일 강원 영북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동서고속화철도 건설을 놓고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실천을 약속하지만 30년 가까이 착공조차 못 해 주민들이 집단 시위에 들어가는 등 반발하고 있다. 춘천~속초 간 철길은 19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처음 나온 뒤 단골 공약이 됐다. 이후 한국개발연구원(KDI) 주관으로 2001년, 2010년, 2012년 등 3차례 예비타당성 조사를 했지만 번번이 비용편익(BC)이 기준치를 밑돌아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업이 무산됐다. 박근혜 대통령도 강원도 1호 공약사업으로 내세웠지만 여전히 예비타당성 조사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 4차 예비타당성 조사에 들어갔지만 1년이 넘도록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4차 조사는 지난 3차례와 달리 조사 방법을 사업비 축소와 대안 노선, 관광 수요 등을 반영하며 한국교통연구원 등에 의뢰했다. 이는 주민들이 “접경지를 가까이에 두고 있어 당장은 경제성이 떨어지지만 설악권 등 유명 관광지 등이 있어 철길이 놓이면 경제성은 어느 곳보다 뛰어날 것”이라며 다른 지역과 잣대를 달리해 평가해 줄 것을 요구해 이뤄졌다. 30년 가까이 기다려 온 주민들은 용역 결과 발표를 앞두고 또다시 경제성만 따지며 기회를 놓칠까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철길이 지나는 4개 지역 주민 1000여명은 지난 6월 28일 정부세종청사로 달려가 동서고속화철도 조기 착공을 촉구하는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 도의회 의장단과 설악·접경지역 기초의회 등 강원도 내 정치권도 지난달 14일부터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앞에서 사업 조기 이행 촉구 1인 시위에 나섰다. 1인 시위는 오는 7일까지 계속된다. 주민들은 이번에도 정부가 챙겨주지 않으면 또다시 대규모 상경 집회를 이어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윤광훈 속초시번영회장은 “기재부는 국가균형발전이란 전제 속에서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를 발표해야 한다”면서 “통일 시대 이후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추진돼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덕후 화천군번영회장과 김현창 양구군사회단체협의회장, 박응삼 인제군번영회장도 이구동성으로 “후손들에게 발전된 강원도를 물려 주고 싶은 주민들의 염원을 더이상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병선 속초시장은 “30년 동안 이어 온 희망 고문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면서 “선거 때만 되면 해 준다고 했는데 약속을 믿고 기다려 온 설악권의 비애와 설움을 정부는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동서고속화철도는 강원도의 미래와 20만 설악·접경지역 주민의 생계가 달린 현안이란 것을 정부는 알아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선거 때는 정치적으로, 선거 후에는 경제논리로 접근해 무산되면서 도민의 불신이 극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이 시장은 “동서고속화철도는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조기 실현의 대안으로 수도권에서 최단거리, 최소 시간, 최소 비용으로 북방 물류루트에 접근할 지정학적 비교우위의 경쟁력이 있다”면서 “통일 대비 핵심 철도망이자 국가 미래전략 노선, 낙후한 설악·접경지역 주민을 살리는 노선”이라고 덧붙였다. 김시성 도의회 의장도 “도민들이 이번 대통령선거 때도 60% 넘게 지지했는데 임기 3년차에 접어들었음에도 공약사업이 제자리걸음”이라고 지적했다.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은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세 번이나 낙방하면서 부족했던 점을 보완했다”면서 “대통령이 공약을 이행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재부 관계자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겹치면서 예비타당성 검토 결과는 9월 이후에나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예비타당성 결과가 좋게 나오면 곧바로 타당성 조사와 기본 계획 용역에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동서고속화철도 사업은 인천공항∼서울 용산∼춘천∼속초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신설 철길은 춘천~속초 간 93.95㎞ 구간이다. 사업비는 철길용량이 포화상태인 용산과 청량리, 망우지역 선로 용량을 늘리는 비용을 포함해 속초 구간까지 모두 2조 2114억원이 소요될 전망이다. 속초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86그룹 대표주자’ 우상호 의원 “나부터 새롭게 신발끈 묶는 계기 만들 것”

    ‘86그룹 대표주자’ 우상호 의원 “나부터 새롭게 신발끈 묶는 계기 만들 것”

    야당 안팎에서 불거지고 있는 ‘86책임론’과 관련해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나 자신을 시작으로 새롭게 ‘신발끈’을 묶는 계기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86세대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만 ‘적진 차출론’이나 ‘용퇴론’ 등의 요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 의원은 1987년 전대협 1기 부의장 출신으로 이인영 의원 등과 함께 ‘운동권 86그룹’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우 의원은 26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이동학, 임미애 혁신위원의 86세대 비판에 대해 “구성원을 돌아보는 마음가짐에서도 혁신은 출발한다”면서 “반성의 계기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86그룹만이 ‘타깃’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우 의원은 2012년 대선 패배 이후 당내 86의원 모임인 진보행동을 해체했던 것을 언급하며 “집단화, 계파화, 권력화되지 않기 위한 문제 제기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 그룹, 우리 세대 정치인에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당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문재인의 문제, 호남의 문제도 아닌 우리 공동의 책임”이라고 덧붙였다. 우 의원은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하방론’에 대해서는 정치공학적 처방이라는 이유로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는 “‘지방으로 가라’는 말만 아니었다면 (86 비판의) 진정성을 받아들였겠지만 특정한 방법론(하방론)을 제기하는 바람에 진정성보다는 방법론이 더 눈에 들어오게 됐다”고 반박했다. 당 일각에서는 우 의원이 현 지역구인 서울 서대문갑 대신 고향인 강원 철원에 도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철도·삭도로 경제 살려야” 들끓는 강원 민심

    “꺼져 가는 강원 경제 정부가 도와주오.” 설악산 케이블카와 춘천~속초 간 고속철도 사업 등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잇따라 상경 집회를 여는 등 강원 민심이 들끓고 있다. 15일 강원도에 따르면 여주~원주 간 철도 조기 건설 등 지역 최대 사회간접자본 확충사업들이 줄줄이 진척을 보이지 않으면서 주민들의 상경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사업 승인 결정을 앞둔 양양군 등 설악권 주민 300여명은 지난 14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정부의 빠른 승인 결단을 촉구했다. 주민들은 머리띠 등을 두르고 대형 현수막을 앞세워 즉각적인 오색케이블카 설치를 요구했다. 군의원 등 주민 16명은 집회현장에서 삭발식을 갖고 오색케이블카 설치를 염원하는 지역주민의 의지를 당국에 전달했다. 오색케이블카는 침체된 설악권 관광 활성화를 위해 2002년부터 논의가 시작됐지만 번번이 물거품이 됐다. 환경부가 2012년 불허 결정을 내린 데 이어 지난해 9월에도 경제성 검증과 환경 문제를 들어 또다시 부결했다. 설악산 케이블카사업은 다음달 환경부가 국립공원위원회를 열어 세 번째 결론을 낼 예정이다. 춘천~속초 간 고속철도와 여주~원주 간 철도 조기 건설을 바라는 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김시성 도의회 의장은 14일 정부세종청사를 찾아 ‘박근혜 대통령 공약 춘천~속초 동서고속화 철도 약속대로 이행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 춘천~속초 간 고속철도는 1987년 대선 이후 선거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지만 경제성을 이유로 30년 가까이 실천되지 않고 있다. 여주∼원주 전철 사업 역시 예비타당성 검토를 이유로 예산 확보 등이 미뤄져 연내 해결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정부를 상대로 한 1인 시위는 김 의장에 이어 도의회와 강원지역 5개 시·군 의원 28명이 다음달 7일까지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릴레이로 이어갈 예정이다. 김 의장은 “획일적인 경제 논리가 적용돼 인구가 적고 산악지대가 많은 강원도가 항상 피해를 보고 있다”면서 “그동안 쌓인 ‘무대접’을 참을 수 없어 상경집회를 갖는 강원 민심을 읽고 정부에서 적극 해결해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춘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씨줄날줄] 불공대천지수/문소영 논설위원

    사서삼경과 함께 유가의 기본적 경전인 ‘예기’ 곡례편에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讐)가 나온다. “아비의 원수와 함께 하늘을 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함께 하늘을 이지 않는다’는 것은 함께 세상에 공존할 수 없으니 상대를 죽이든가 아니면 내가 죽든가 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현대사회에서는 큰 원한을 품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나 불공대천, 불구대천이 다 같은 표현으로, 젊은 시절 무협지깨나 본 사람들은 특히 익숙하다. 불공대천지수는 ‘춘추전’에도 나온다. 기원전 487년 기나라 제후가 주나라 이왕에게 제나라의 애공(哀公)을 악한 말로 헐뜯고 고소하는 등 참소(讒訴)해 팽살(烹殺)형에 처하자 제나라 후손들이 기나라는 결코 함께 살 수 없는 흉악한 원수로 반드시 복수하리라고 벼를 때 이 말을 사용했다. 팽살형이란 끓는 물에 처박거나, 불타는 기름 가마에 던져서 죽이는 끔찍한 고대 중국의 형벌이다. 불공대천지수는 따라서 효와 충을 강조하는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아시아적 가치를 표현한 것이다. 6주기를 맞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서 그의 아들 건호씨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한 발언으로 언론은 물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큰 논란이다. 노씨를 ‘친노’라고 낙인찍고, ‘상주가 손님에게 무례했다’고 호통친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던 노 전 대통령의 유언도 들이댔다. 이날 노씨는 “‘전직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며 내리는 빗속에서 정상회의록 일부를 피 토하듯 줄줄 읽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어려운 발걸음을 해 주셨다”고 김 대표를 비꼬는 발언을 해 빌미를 제공했다. 광주에 이어 물병 세례를 받은 김 대표는 현재 대선 후보 여론조사 1위에 올라 있다. 문성근씨의 트위터에 따르면 김 대표는 추도식 참석을 언론에는 알렸으나 추도식을 준비하는 측에는 알리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예의를 갖추는 게 맞다. 그러나 김 대표나 그의 소속 정당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훌륭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노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한 검찰의 강압수사 등에 수치심을 씻지 못해 2009년 5월 자살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고인인 노 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을 북한에 포기했다는 등의 종북 이미지를 씌웠고, 정권을 잡은 2013년에는 국가정보원장이 국가 기밀인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해 논란을 키웠다. ‘사초실종’ 논란으로 확대했지만 법원에서 무죄가 됐다. 전직 대통령을 근거 없이 비방·비난하는 등 큰 무례를 범하고 국가 기밀을 노출해 국익을 훼손했으며, 허위 사실로 국론 분열을 조장했지만 진정성 있는 사과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을 비난할 수 있는가. ‘예기’의 정신으로 묻고 싶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직격 인터뷰] “막강한 대통령 아래 총리는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직격 인터뷰] “막강한 대통령 아래 총리는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국무총리는 어떤 자리일까. 박근혜 정부 출범 2년 3개월 만에 여섯 번째 총리 인선을 앞두고 있다. 세간에서는 ‘총리 잔혹사’라는 말도 회자된다. 국정 2인자로 대통령 유고 시 계승 서열 1위인 총리 위상은 ‘가속도가 붙은 채’ 추락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 ‘책임 총리’ 구현이었지만 현실 정치 속의 총리는 ‘하루살이보다 못한 생명’으로 비친다. 이명박(MB) 정부에서 2년 5개월간 재임하며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운 김황식 전 총리를 만나 그의 생각을 듣게 된 이유다. 지난 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인근의 개인 사무실. 인터뷰 5분 전이어서일까. 막 넥타이를 매고 있던 김 전 총리는 시선이 마주치자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지난해 5월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고배를 든 후 언론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다. 표정은 밝고 환했다. 김 전 총리는 여느 정치인 인터뷰와 달리 사전 질문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70분간 ‘즉문즉답’이 이어졌다. 먼저 ‘장수 총리의 비결이 궁금하다’고 묻자 “운이 좋았다”는 싱거운 답이 나왔다. 스스로 답변이 부족했다고 느꼈는지 “나 자신의 노력보다는 대통령과 주변에서의 지원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얼핏 대통령에게 가린 ‘국정 2인자’의 현실이 느껴졌다. 그는 총리 재임 때 스스로를 “조용히 내리지만 땅속에 스며드는” ‘이슬비 총리’라고 불렀다. 김 전 총리에게 ‘국민들 눈에 총리는 없어도 그만인 자리처럼 보인다’고 하자 “총리직은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라면서도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정치 현실에서 대통령이 권한과 책임을 총리에게 부여하지 않으면 굉장히 왜소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고 말했다. ‘다시 총리직 제안이 오면 뜻이 있느냐’고 묻자 “이미 했던 사람이 다시 하는 건 맞지 않는다. 국민들은 새 사람이 새롭게 잘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답했다. 김 전 총리는 총리 제도를 넘어 우리 권력 구조의 전반적인 변화를 해법으로 봤다. 그는 “현행 헌법에 간단하게 규정된 것만으로는 총리 역할과 지위가 불안정하다”며 “대통령을 보좌하고 협조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견제도 할 수 있는 그런 총리제가 되지 않으면 하나의 장식에 불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왕적 대통령제의 여러 폐단이 현실적으로 보이고 있다. 그걸 시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직설적으로 개헌 필요성을 제기했다. →총리 후보들의 잦은 낙마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나. -누구나 장점과 약점이 다 있다. 그동안 보면 괜찮은 분도 많았는데 본격적인 검증이 이뤄지기도 전에 흠결부터 부각되면서 동력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네거티브 쪽에 초점이 많이 맞춰지다 보니 능력이나 자질은 제대로 검증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아울러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인선 문제도 있었다. →어떤 총리가 필요하다고 보는지.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해 각 행정부처와 중앙, 지방정부 간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이 많기 때문에 경륜이나 업무 능력은 기본이다. 무엇보다 국민, 언론, 정치와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 →정치권에서 호남 총리론 얘기도 나오는데. -총리를 어느 시점에 호남에서 해야 한다, 충청에서 해야 한다는 건 맞지 않는다. 전체 인사에서는 지역 균형과 탕평이 필요하지만 이 국면에서 특정 지역 출신을 총리 후보자로 물색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 시점에서 가장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되는 분을 뽑는 게 중요하다.(전남 장성이 고향인 김 전 총리는 정부 수립 후 첫 전남 출신 총리다.) →류길재 전 통일부 장관의 “(장관직에 대해) 아무나 와도 되는 자리 같다”는 말이 도마 위에 올랐다. 국민 눈에 총리가 그런 자리로 비치는 측면이 있다. -대통령 권한이 아주 막강한 우리 정치 현실에 비춰 대통령이 소정의 권한과 책임을 총리에게 부여하지 않으면 총리 제도는 굉장히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정치권이 현행 총리제를 어떻게 활용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될지 같이 고민해야 한다. 운영상의 문제도 있지만 헌법의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총리제의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보나.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국가와 달리 우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관으로 총리를 두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권력 구조가 있는데 국가 운영과 관련해 총리가 대통령과 분업하고 협조하며 필요하다면 견제까지도 할 수 있는 제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헌법에서는 간단하게 총리 역할을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총리 역할과 지위가 불안정하다. 막강한 대통령중심제에서 총리가 하나의 장식에 불과할 여지가 분명히 있다. →개헌을 전제로 하는 말로 들린다. -1987년 헌법은 장기 독재를 막는다는 시대적 사명을 담았고, 충실히 이행했다. 지금 시대와 사회에 맞는 권력 구조를 생각해 볼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제왕적 대통령중심제의 여러 폐단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를 시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의 장기 계획을 갖고 있는 비전 있는 지도자라면 10년이라도 할 수 있고 잘못하면 중간에 바꿀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보다는 분산된 권력이 타협하고 절충하는 과정에서 국민을 통합하는 힘도 생긴다고 본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꼽자면. -대통령의 생각이 국가 운영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스템 자체를 지적하고 싶다.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국가와 사회의 방향이 설정되는데 그런 역할은 필요하지만 권한이 너무 집중돼 있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수렴하고 걸러내는 그런 부분보다 한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건 지금 시대에 배치된다. →정치권 내부에서 개헌 논의 요구는 많지만 잘 발화되지 않는다. -특정 시점을 정해 두고 개헌 논의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 평시에 정치권에서 자유롭게 논의돼야 한다. 공감을 얻으면 개헌할 수 있고 아니면 늦어질 수도 있다. 일도양단의 문제는 아니다. 국가 장래와 직결된 만큼 후다닥 해치우기보다는 항상 논의가 돼야 한다. →여야, 보수, 진보를 떠나 박 대통령의 소통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여전히 나온다. -박 대통령 나름대로 소통 통로가 있을 수 있지만, 본인이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소통이 된다고 평가하는 게 더 중요하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은 해외 자원외교 수사가 결정적이었다. MB 정부 총리로서 해외 자원개발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정부 안에 있었지만 해외 자원외교는 관여하지 않아 잘 모른다. 국가 장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투자를 하다 보면 실패할 수 있고, 그런 걸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투자를 하는 데 비리가 있다거나 부당한 투자가 이뤄진 건 엄중히 밝혀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검찰 조사가 나올 때까지 자원외교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지난해 7·30재보선부터 차출설이 나오곤 했다. 출마 고려한 적이 있나. -출마 생각을 해 본 적 없고 공식적으로 요청받은 바도 없다.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최근 “김 전 총리는 정치적으로 할 일이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김 전 수석이 어떤 취지로 한 말씀인지는…. 선의로 해석한다면 내가 정치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뭐라도 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인지…(웃음). 지금은 한마디로 정치에 뜻을 두고 있지 않다. →공무원연금 개혁과 국민연금 문제는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까. -(이 인터뷰는 6일 밤 국회에서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가 무산되기 전 이뤄졌다.)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나름대로 진전 있는 합의를 이뤘다고 평가한다. 정치권이 합의를 통해 개혁안을 제시한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 국민연금 문제는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논의의 장을 열어 국민 전체의 의사와 사회적 합의를 이뤄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여야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결정한 것인지, 정치적 이해나 포퓰리즘적 접근은 없었는지 자문해야 한다. 나로서는 최근 노사정 대타협 논의가 결렬된 게 가장 아쉽게 느껴진다. →7월에 열리는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의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남북 단일팀 가능성은. -이미 시간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북한도 단독으로 팀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남북 교류 차원에서 백두산에서 채화한 성화를 육로를 통해 남쪽으로 가져오고 무등산에서 채화한 성화와 합화하는 방안을 정부와 협의하고 있다. 북한 선수단뿐 아니라 응원단 방문 문제도 협의할 생각이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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