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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회 아산사회복지상 시상식

    아산사회복지재단(이사장 鄭夢準)은 17일 서울 힐튼호텔컨벤션센터에서 제13회 아산사회복지상 시상식을 가졌다. 복지부문과 효행부문으로 나뉘어 열린 시상식에서 영세민에게 무료 진료사업을 펴온 서울 노원구 은명내과 김경희(金庚熙·남 81) 원장이 ‘복지부문 대상’을 받았다.또 106세 노모와 몸이 불편한 83세 아내를 부양해 온 전남 나주시 홍독우(洪篤羽·82)씨가 ‘효행부문 대상’을 차지하는등 모두 29명 4개 단체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김성곤기자 sunggone@
  • ‘장래인구 추계’주요 내용/ 2026년 ‘초고령사회’ 진입

    통계청이 23일 발표한 ‘장래인구 추계’는 우리나라의 인구구성이 선진국형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러나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줄고 노령인구(65세 이상)는 늘어나는 고령화 추세가 다른 나라보다 빨라 대책마련이 시급한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고령사회 임박] 지난해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령인구가전 인구의 7%를 넘겨 유엔기준 ‘고령화사회’에 들어섰다.2019년에는 노령인구가 14% 이상인 ‘고령사회’,2026년에는20% 이상인 ‘초고령사회’로 접어들게 된다.때문에 지난해생산가능인구 10명이 노령인구 1명을 부양하던 것이 2030년에는 3명이 1명을 부양해야 할 만큼 다음 세대의 부담이 커지게 된다.고령화는 남녀구성비에도 영향을 준다.지금은 전체인구중 남자가 50.3%로 여자보다 많지만 2024년에는 평균수명이 긴 여성쪽 인구가 더 많아져 남녀 비율이 0.999대 1로 역전된다.통계청은 “우리나라가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각각 19년,7년에 불과해 일본 24년,12년 등 선진국보다매우 빠르다”고 설명했다. [50년 뒤 수명 7세 연장] 의료기술 발달 등으로 평균수명은지난해 75.9세에서 2050년 83세로 늘어난다.남자는 72.1세에서 80세로,여자는 79.5세에서 86.2세가 될 전망.남녀별 평균수명 차이는 지난해 7.4세였으나 2020년 6.6세,2050년엔 6.3세로 줄어든다.지난해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은 유엔이 분류한 선진국수준(75.3세)을 웃돌고 있으나 미국(77.1세) 일본(80.2세) 이탈리아(78.5세)보다는 낮다.그러나 2030년에는 일본(82.5세) 이탈리아(81.3세)에 근접할 것으로 보인다. [인구 순위 하락] 지난해 우리나라 인구는 전세계의 0.78%로 26위였다.그러나 2025년에는 28위,2050년에는 37위로 떨어지게 된다.인구밀도는 1㎢당 지난해 473명에서 2030년에는 506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방글라데시(897명)나 타이완(615명)의 지난해 인구밀도보다는 낮지만 세계 3위의 조밀국가는 유지한다. [성비 불균형 완화] 남녀성비 불균형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고조되고 성감별에 대한 법적 대응이 강화되면서 성비 불균형은 점차 해소될 전망이다.93년 남녀 115.3대 100이었던출생성비는 2020년 106대 100으로 떨어진다.그러나 주 결혼연령(남자 26∼30세,여자 24∼28세)층은 현재 남녀 110.5대100에서 2011년 122.3대 100으로 최고점에 이르게 된다. [대학 가기는 쉬워져] 지난해에는 대학입학 대상인 18세 인구가 82만7,000명으로 대학정원(65만5,000명)보다 많았지만2004년에는 63만명으로 입학정원(2000년 기준)의 96% 수준으로 줄어든다.이런 추세는 2008년까지 이어진다.2009∼2015년에는 다시 입학 정원을 웃돌지만 2016년부터 18세 인구가 본격적으로 감소,2030년에는 47만6,000명까지 줄어든다. 김태균기자 windsea@
  • 우리나라 인구2023년 5,068만 최고점 이를듯

    우리나라 인구는 2023년 5,068만명으로 최고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이때쯤 평균수명은 81세 안팎으로 지금보다 5세가량 높아진다.또 ‘남아(男兒)선호’로 인해 2011년에는 결혼적령기 남성 5∼6명 가운데 1명은 제짝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통계청은 23일 미래 국내 인구구조를 예측한 ‘장래(將來)인구추계’를 발표했다.이에 따르면 지난해 7월1일 현재 4,700여만명인 인구는 자연증가율(출생률에서 사망률를 뺀 수치)이 0이 되는 2023년에 5,068만3,000명으로 정점에 오른 뒤차차 줄어 2050년에는 지금보다도 적은 4,433만명선으로 내려갈 것으로 추산됐다. 평균수명은 2000년 75.9세(남자 72.1,여자 79.5)에서 2030년에는 81.5세(남자 78.4,여자 84.8),2050년에는 83세(남자80,여자 86.2)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때문에 지난해 65세 이상 인구 7.2%로 ‘고령화사회’(65세 이상 7% 이상)에접어든 우리나라는 2019년에 ‘고령사회’(14% 이상),2026년에 ‘초고령사회’(20% 이상)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기준 1,138만명인 학령인구(6∼21세)는 2030년 708만명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김태균기자 windsea@
  • 4차 이산상봉 후보 명단 교환

    남북 적십자사는 26일 판문점 연락관 접촉을 통해 다음달16∼18일로 예정된 제4차 이산가족 상봉 방문단 교환에 앞서 상봉 후보자 200명의 명단을 교환했다. 남측 가족의 생사와 주소 확인을 위해 통보된 북측 후보자200명은 지난 2, 3차 방문단에 참가하지 못한 북측 이산가족 250명 가운데 선정됐다.북측 방문단 후보자 가운데 최고령자는 83세의 한인기씨(충남 당진군 석문면 통정리 출신)이며,유명 인사로는 배재인(65)평양 제1고등중학교 교장 등이 포함돼 있다. 또 민주평통 김민하(金珉河)수석부의장의 맏형 김성하씨(74)도 어머니 박명란씨(100)와 김 부의장 등 가족 10명을 찾는 내용으로 후보 명단에 포함됐다.북측이 통보해온 후보자명단을 확인하려면 대한적십자사(02-3705-3656∼9)로 문의하면 된다. 진경호기자 jade@
  • 팔순 노인 안중근 기금 1억 기탁

    83세의 노인이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청소년들에게 알리는데 써달라며 1억원의 장학기금을 내놓았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사는 안승우(安承祐)옹은 13일 “안중근 의사와 같은 순흥 안씨라는 점을 평생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아왔다”면서 “안 의사의 정신을 후세에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모은 재산의 일부를 장학기금으로내놓게 됐다”고 말했다. 1918년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한 안 옹은 연안농고를 졸업한뒤 영등포구 농정계장으로 근무했으며 강원도 안악,경기 용인·평택 농장 등에서 농장장으로 일해왔다. 장학금은 14일 오전 10시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탁된다. 노주석기자 joo@
  • 부음/황용주 前 MBC사장 별세

    황용주(黃龍珠) 전 MBC사장이 25일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숙환으로 별세했다.83세. 고인은 대구사범학교, 일본 와세다대 불문과를 졸업하고부산대 교수,국제신문 논설위원,부산일보 사장,MBC 사장등을 지냈다. 64년 ‘세대’지에 남북공동 UN가입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했다가 반공법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유족은 부인 이창희씨(79)와 1녀.빈소는 일산병원 장례식장.발인은 27일 오전8시.(031)901-4799
  • 부음/ 동양화가 이진섭씨

    동양화가 이진섭(李鎭燮)씨가 22일 0시 5분 숙환으로 별세했다.향년 83세.고인은 일본대학 예술학부를 나온 뒤 독창적인 화풍으로 전통 한국화의 맥을 이어오면서 84년에 열린 ‘LA국제미술 공모전’에서 동양인으론 유일하게 특선을 받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왔다.유족은 부인 柳忠姬(83)여사와 3남2녀.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발인은24일 오전 8시.(02)362-5699
  • ‘義牛의 눈물’을 아시나요

    경북 상주시가 정의(情誼)있고 의리있는 행동으로 잔잔한감동을 주고 있는 소의 의행(義行)알리기에 나섰다. 상주시는 9일 사벌면 묵상리 임봉선할머니(67)의 13년생 한우가 자연사하면 적당한 장소를 선정해 의우총(義牛塚)을 만들고 유적지화하는 등 민속사료로 보존될 수 있도록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이 암소는 주인이 아니면서도 오랫동안 날마다 먹이를 주고 쓰다듬어 주는 등 자신을 정성스레 보살펴준 이웃집 김보배 할머니(당시 83세)가 94년 5월 23일 숨지자 그 정을 못잊어 망자의 삼우제날 외양간을 뛰쳐 나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6㎞가량 떨어진 김 할머니의 묘지를 찾아가 눈물을 글썽였다.주민들은 이를 목격하고 감동해 마지 않았다. 더구나 이 소는 주인과 함께 김 할머니의 산소에서 집으로돌아오면서 곧바로 자기 외양간으로 가지 않고 이웃의 김 할머니 빈소를 찾은 뒤에야 외양간으로 돌아왔다.김 할머니의유족들도 감동해 이 소에게 조문객들과 똑같이 장례식 음식을 대접했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마을회관 앞에 이같은 한우의 의행을기리기 위해 ‘의로운 소’ 비석을 건립하는 등 각별하게 보살펴 왔다. 특히 최근에는 김 할머니의 손자 서동영씨(47)와 동물 관련 민속사료 연구가인 우영부씨(55) 등이 이 소의 도축 거래를 막기 위해 소값 200만원을 소유주인 임 할머니에게 주고 아예 소유권을 공동화했다. 상주 한찬규기자 cghan@
  • “세계언어 90% 금세기말 소멸”

    세계 6,800여개 언어중 절반 내지는 90% 가량이 금세기말쯤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으로 밝혀졌다.19일 AP통신에 따르면 민간연구기관인 월드워치가 발행하는 ‘월드워치’6월호는 이같은 사실과 함께 “언어의 소멸위기는 생물의 멸종위협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언어가 여러 세대에 걸쳐 계승되려면 적어도 사용자 10만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의계산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언어 중 절반 이상이 사용자가 2,500명을밑도는 것으로 집계됐다. 시베리아에서 사용되는 언어인 우다헤는 600명,아마존 정글의 아리카푸는 6명만이 쓰고 있다.특히 알래스카 지방의 에약을 쓰는 사람은 83세의 마리 스미스라는 여성 한 명뿐이다. 월드워치는 많은 언어의 소멸은 언어적 다양성이 줄어드는것 외에도 그 언어를 쓴 공동체의 역사를 기록하거나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을 잃게 되기 때문에 인류사회에 큰 손실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전경하기자 lark3@
  • 조직신학자 박봉랑 교수 별세

    국내 신학계의 원로인 조직신학자 박봉랑(朴鳳琅) 한신대명예교수가 25일 낮 12시30분쯤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서소천했다.83세.일본 도쿄신학대와 한국신학대를 졸업한 뒤미국 하버드대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58년 한신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84년 정년 퇴임 때까지 조직신학중 칼 바르트 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한편 현대신학사조와 한국교회의 신학적 실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기독교의 비종교화’‘신의 세속화’‘종말론적 신학’ 등의 저서를 남겼다.빈소는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 마련됐고 장례식은 27일 오전 9시 서울 한신대 교정에서 한신대학장으로 치러진다.(02)902-3181
  • 애국지사 김용씨 별세

    애국지사 김용(金龍)씨가 23일 오전 5시30분 인천시 중구항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83세. 황해 해주 출신인 고인은 중국 난징(南京) 중앙대 농학원에 재학중 광복군에 입대한 뒤 공작원으로 첩보활동을 한공로가 인정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종전씨와 2남1녀를 두고 있으며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제2묘역에 안장된다.발인은 26일 오전9시 서울 삼성서울병원.(02)3410-6914.
  • 타계한 경제거목 왕회장 정주영씨/ 주요 어록

    ■바닷가에 소나무만 서있는 백사장의 사진을 찍어 가지고다니며 이곳서 배를 만들 테니 사주시오 하고 다녔다(71년 12월 현대중공업 초창기 일화에서)■모든 것은 나에게 맡겨라.겁이 나거든 집에 가서 누워기다려라(74년 6월 현대중공업 26만t급 대형 유조선의 도크 이동을 지휘하며)■기업가는 자신이 일으킨 사업이 자기가 존재하지 않을때에도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란다(77년 4월 전경련 회장취임을 앞두고)■돈 벌기는 소비재 장사가 쉽지만 그건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78년 12월 국세청 고액 소득자 랭킹 1위에 오르며)■기업 스스로가 책임경영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 곧 자유기업주의다(78년 10월 전경련 ‘한국 경제의 과제’강연록에서)■새벽 5시반이면 일어나 30분씩 운동을 한다.운동은 보약이 필요없는 건강 비결이다(80년 ‘주간한국’인터뷰에서)■기업이 정부정책에 협조 안하면 경제가 클 수 없다.기업은 영원한 여당이다(80년 7월 언론 인터뷰에서)■호주머니 지갑에 든 것만 내돈이다.나머지는 모두 사회의 것이요,나라의 것이다. (80년 12월 언론 인터뷰에서)■종교는 기적이 있을지 몰라도 경제에는 기적이 있을 수없다(81년 5월 동국대 강연에서)■현대의 재산은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는다.사회가 바라는 사회사업에 기증하겠다(81년 9월 KBS방송 출연에서)■가난한 사람이 잘사는 방법은 씀씀이를 줄이면서 돈 안쓰는 것이다(81년 9월 KBS방송에서)■이기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반대한다. 스포츠란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84년 바덴바덴IOC총회에서 서울올림픽 유치를 성사시키며)■독점으로 상품의 품질이 국제 수준보다 떨어지고 값이비싸다면 이는 소비자를 수탈하는 것이다(88년 12월 언론특별대담에서)■몽헌 회장이 취임해도 중요한 일은 모두 저와 의논할 것이니 여러분은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2000년 3월 몽구·몽헌 형제의 ‘왕자의 난’때)■본인은 오늘부터 모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납니다.아들인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도 함께 모든 경영 일선에서물러나겠습니다(2000년 5월 ‘3부자 동반 퇴진’을 선언하면서). ●정주영 생애. ■1915년 11월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출생■1930년(15세) 송전소학교 졸업■1940년(25세) 합자회사 아도서비스공장 설립■1946년(31세) 현대자동차공업 설립■1947년(32세) 현대건설주식회사 설립■1965년(50세) 한국 최초로 해외 건설공사 진출■1967년(52세) 현대자동차주식회사 설립■1969년(54세) 현대그룹회장 취임■1976년(61세) 한국 최초의 자동차 고유 모델 포니 생산■1977년(62세) 전국경제인연합회 제13대 회장 취임(1987년 17대까지 연임) 및 아산사회복지재단 설립■1981년(66세) 88서울올림픽 추진위원장으로 올림픽 유치에 성공■1982년(67세) 대한체육회 회장■1987년(72세) 현대그룹 명예회장 취임■1989년1월(74세) 북한을 첫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남. 금강산 공동개발 의정서 체결■1990년(75세) 소련 방문,시베리아 개발 착수■1991년(76세) 중국 방문,중국과의 경제 협력 착수■1998년(83세) 북한 세번째 방문.금강산관광 성사,김정일국방위원장과 첫 면담.IOC 올림픽훈장 받음■1999년(84세) 9월28일 7차 방북■1999년 10월1일 김정일국방위원장과 두번째 만남■1999년 11월18일 금강산관광 시작■2000년(85세) 5월25일 건설 상선 중공업 등 계열사 지분정리하고 현대차 지분만 소유■2000년 5월31일 ‘3부자 동반 퇴진’ 선언■2000년 6월28일 8차 방북■2000년 6월2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세번째),금강산종합관광개발과 서해안공단 부지 조성 사실상 마무리. ■2001년 3월21일 사망
  • 북측 방문단 후보자 분석

    북측의 3차 이산가족 교환방문단 후보 200명 명단은 1·2차 명단에비해 ‘보통사람’의 비중이 늘었다.물론 곳곳에 엘리트 출신을 배치,이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성별로도 남자 167명(83.5%),여자가 33명(16.5%)으로 1·2차(10% 정도)에 비해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도 늘어났다. 후보자 명단 200명의 이산 당시 직업은 농어업 60명(30%),학생 59명(29.5%),노동 52명(26%),교수 및 교원 7명,공무원 4명,문화예술인 2명 등이다. 문화예술인 출신으로는 지난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평양 5·1경기장에서 관람한 대규모 집단체조(매스게임) ‘백전백승 조선로동당’을 연출한 김수조씨(69)가 포함돼 있다.북한에서 최고 영예로 통하는 ‘공화국 영웅’·‘인민예술인’ 칭호를 받은 김씨는 현재 북한의 유명 공연단체인 피바다가극단 총장(책임자)이다.그동안 여러 혁명가극과 무용극을 깔끔하게 연출해왔다.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은 유명화가 황영준씨(82)도 포함됐다.월북 당시 교통부 총무과 철도박물관 미술가였던 황씨는 ‘산수화’ 부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권위자며 현재 ‘송화미술원’ 고문으로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이산 당시 학생이었으나 현재 유명인이 된 인물도 있다.북한의 대표적 영재학교인 평양제1고등중학교 배재인 교장(65)도 후보명단에 포함됐다.50년 9월 월북한 배 교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고북한 당국은 후진양성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그에게 ‘노력영웅’·‘인민교원’ 칭호를 수여했다. 이들을 포함,북측 이산가족이 찾는 남측 가족은 모두 1,390명이다. 이중 최고령자는 올해 83세의 한인기씨다.북측 후보의 연령별 분포는60대가 106명, 70대 89명,80대 이상 5명으로 60,70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북측 후보들을 출신지별로 보면 서울 21명,경기 39명,인천 3명,강원11명, 경북 33명,경남 9명,충북 25명,충남 29명,전북 14명,전남 12명,제주 4명 등이다. 한편 남측이 북측에 통보한 후보자 200명 명단은 70세 이상의 고령자로만 구성돼 있다.출생지 별로는 황해도(54명) 평안남도(38명) 함경남도(33명) 등 순이다. 전경하기자 lark3@
  • 트레일러 살던 美기업인 “다시 돌려줘야죠”

    “사회가 나에게 준 것이니 다시 돌려주고 떠나렵니다.” 한 미국 기업인이 한평생 검소하게 살면서 모은 4억달러 상당의 부동산을 자선단체에 기증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섬유생산 기계 제작업체를 운영하는 존 D 홀링스워드 2세는 유럽과남미에도 자회사를 가진 엄청난 자산가임에도 불구,정작 자신은 공장 뒤편의 트레일러 속에서 생활해 왔다는 것. 그는 지난 연말 침대에서 떨어져 83세의 일기로 사망했는데 “부동산을 퍼맨 대학과 그린빌 YMCA,그리고 여러 자선단체에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자신의 유일한 딸 메리 제인 크롤리에게는 한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홀딩스워드 회사의 직원들에 따르면 그는 평소 딸과 전처가 회사의 재산을 횡령했다고 비난해왔다는 것.그는 단지 자신의손자인 크롤리의 아이들에게만 대학교육을 위해 쓰라며 각각 25만달러의 장학기금을 남겼다. 자선단체 기부를 포함해 각종 선행사례만을 전문적으로 보도하는 한 잡지에 따르면 미국내에서 지난해 1억달러 이상을 기부한 사례는 모두 8건에 불과했다. 이동미기자 eyes@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1)西安-延安

    *광복군-조선 의용군 마지막 활동지 西安-延安. 서안은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1천여년 동안 중국 역사에서 서주(西周) 서한(西漢) 당(唐)등 12개 나라의 왕도로 영광을 누렸던 도시다.따라서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적이 많다.우리의 항일유적지도 상당히 많다.조선청년전지공작대 주둔지,한청반 훈련장,광복군 전선사령부,그리고 미국 OSS(전략첩보국)과 합작해 국내진공을 준비했던 광복군의 흔적도 있다. 취재팀이 아시아나항공 직항편을 이용해 바로 서울에서 서안으로 날아간 것은 서안 교외에 있는 광복군 OSS훈련장을 먼저 찾아보기 위해서 였다.공항에서 차를 대절해 서안시 남쪽 25㎞ 지점에 위치한 광복군 제2지대 기지와 OSS 훈련장이 있던 두곡진(杜曲鎭)으로 향하는 길은 끝이 없어 보이는 짙푸른 옥수수밭이 이어진다.산이라곤 거의없는 황토고원지대인 이 지역의 주 생산물이다.안내인은 몇년전 한국에서 상영된 중국영화 ‘붉은 수수밭’도 이 지역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그동안 기자는 실크로드 답사를 위해 몇차례 서안을 지나간 적이 있다.그때마다 서안의 변화모습에 놀랐는데 이번에는 정말 몰라볼만큼달라져 있었다.새로 뚫린 서안시내 우회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창옆으로 무궁화꽃이 활짝 피어있다.이따금 거대한 왕릉이 보였다.서안 외곽의 작은 시가지를 스쳐가고,참외·수박을 파는 저자거리를 지나고다시 평원이 나타난다.그렇게 한 시간여를 달리자 멀리 제법 높아 보이는 산이 나타났다.광복군 대원들이 OSS훈련을 받은 종남산(宗南山)이었다. 1945년 3월 15일 한국 광복군과 미군은 한미 군사합작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공동작전을 전개한다는 것.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필요한 전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해 연합군작전에 필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한다는 것 등이었다.그리하여 서안 근교에 주둔한,‘청산리 전투’의 영웅 이범석이 이끄는 제2지대가,안휘성 부양(阜陽)에서는 조선혁명군 참모장 출신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가 낙하산 강하 폭파,암호 무전통신 등 특수전훈련을 받았다.그리고 8월 11일을 국내진공일로잡고 작전계획을 세웠다.그러나 8월 9일,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은 연합국측에 무조건 항복을 통고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 잠입작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취재진은 당시 제2지대 본부 겸 훈련소가 있던 곳을 찾았다.그곳은지금은 두곡 양참(糧站)이라 불리는 곳으로 서안시 양식국의 창고로변해 있었다.당시의 자취는 없고 창고건물에 둘러싸인 1,000여평의마당이 옛 모습을 암시할 뿐이었다.사무실로 들어가서 책임자인 진강정(陳康正) 참장(43세)을 만났다. “한국손님들이 더러 찾아옵니다.지난해에는 원로 몇 분을 모시고온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구보도 했지요” 문화혁명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노예묘’라는 상당히 큰 규모의도교사원이 있었는데 문화혁명때 완전히 없어지고 양참이 들어섰다고 한다.그는 측백나무 소나무 등 나무들이 우거져 거주지로 삼았던 것같다며 멀리 건너다보이는 종남산 아래에도 절이 있었다고 말한다.광복군 OSS 훈련대원들은 이곳에 본부를 두고 종남산 아래 종남사라는불교 사찰에서 훈련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두곡 양참을 둘러본 취재팀은 그곳에서 2㎞ 떨어진 인근의 흥교사(興敎寺)를 찾아갔다.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떠났던 고승 현장법사(玄裝法師)의 사리를 모신곳인데 신라유학승 원측(圓側)탑이 현장법사의 탑 옆에 천년의 세월은 안은 채 서있다. 그곳에서 차를 돌려 시내로 들어가는데 진 참장이 두곡에 있던 옛날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들려준 가슴아픈 얘기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예전에 한 한국인이 아이를 데리고 와 훈련받다가 그곳을 떠날 때 남겨두고 갔는데 아이는 그후에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는 것이다.광복군 아버지가 남겨둔 그 어린 아이는 그 후 어찌 됐을까.지금 살았으면 아마 50살도 넘었을 텐데….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취재진은 서안 시내로 들어갔다.전지공작대와 광복군 전선사령부가 있었던 자리를 찾기 위해서 였다. 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 중경에서 나월한·김동수·김인 등 청년투사들이 조직한 아나키스트성격이 강한 단체였다.그들은 일본군 점령지 교란작전을 위해 전선에서 가까운 서안으로 이동,중국군 전시간부훈련단 안에 한국청년특별반(약칭 한청반)을 만들었다.수료생들은소위로 임관되고 뒷날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에서 큰 역할을 했다. 서안 성내 이부가(二府街)29호,전지공작대가 주둔했던 자리는 중급인민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같은 골목의 4호,옛 광복군 전선사령부가 있던 장소는 유명한 당대(唐代)의 유물인 종루(鐘樓)로 향하는 길을 넓히면서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전지공작대원들이 장교교육을 받은 ‘한청반’ 자리는 지금의 서북대학 안에 있었다.백양나무 그늘이 시원한 현장을 찾으니 연병장은 잔디가 깔려 있고 일부는 도서관 건물이 들어서 있고 당시의 사열대는 국기게양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서안시내의 유적을 찾아본 뒤 취재팀은 한밤중에 침대열차를 타고중국 공산당 혁명성지인 연안으로 떠났다.연안은 서안 정북 방향,깊숙한 분지에 있다.중국 공산당의 장정(長征)과 관련깊은 곳이다.1934년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홍군 30만명은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화남(華南)의 비옥한 근거지를 버리고 행군을 거듭,최후의 근거지인 연안에 도착했다.남은 병력은 3만.그러나 모택동은 이를 기반으로 국민당 군대에 저항하고 항일전을 전개하면서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1930년대 후반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발전적으로 해체,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우리동포들이 많이 이주한 화북에 진출해서 투쟁한 대원들을 화북지대라 불렀다.그들은 김원봉이 이끄는 대본부가 광복군으로 통합되자 화북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 공산군인 팔로군의 지원을 받으며 인근의 태항산에서 싸우다가 연안으로 들어가서 해방을 맞았다.독립동맹의 대표는 유명한 국학자인김두봉,조선의용군 사령관은 김무정이었다. 침대열차는 에어컨이 잘 들어왔고 시설도 좋은 편이었다.이따금 터널을 달리는 듯 소리가 커져 잠을 깨곤 했는데 둔중한 느낌을 주며용을 쓰듯 달리는 것으로 보아 끊임없이 경사진 고원을 오르는 듯 했다.차창으로 새벽빛이 스며들어 창문을 여니 보이는 것이라곤 황토뿐이었다.벼랑에 뚫린 구멍이 있어 눈여겨 보니 그게 유명한 토굴집인 요동(寮洞)이었다.연안역 앞에서 만두로 아침을 때운우리는 조선의용대와 독립동맹이 있던 라가평(羅家坪)마을을 찾아갔다. 라가평 마을은 연하(延河) 위에 놓인 다리 건너에 있었다.마을어구비탈에 기념표시판이 있어 다가가 보니 조선혁명군정학교 자리 표지석이었다.먼지가 일어나는 비탈길을 올라 노인을 찾아 물었다.83세의 고영유(高零有)노인은 벼랑에서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켰다.모두 8개의 요동이 보였다.그곳에는 8개의 요동을 포함 모두 20여개의 요동이 있었는데 군정학교와 독립동맹,조선의용군사령부가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요동은 아무 보존조치를 취하지 않아 무너질듯 위태해 보였다. 다시 연하를 건너 동북쪽으로 달려가면 교얼구로 갔다.길가 버스정거장 장려한 천주교회당이 보였다.그것이 유명한 노신기념관으로 옛날에 노신예술학원으로 사용한 건물이었다.최근 다시 예술학원이 개교해 교사로 사용되고 있는데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가 김산(金山)을 처음 만난 도서관은 여학생들의 기숙사가 돼 있었다. 취재팀은 밤 기차를 탈 때까지 시간이 넉넉해 연안 서북쪽에 위치한 중국공산당의 여러 근거지중 모택동이 교시한 ‘문예강화(文藝講話)’ 현장이 그대로 보존돼있는 양가령(楊家嶺)을 돌아봤다.이밖에 연안시내 중심가에는 항일군정대학의 옛터가 보존돼있는데 이곳은 김산이 일본의 첩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숙청될 때까지 ‘일본경제사’를 강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안(중국) 박찬기자 parkchan@
  • “송시열의 꿈은 사대부만의 국가”

    “송시열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黨益)을 지키는 데목숨을 걸었다.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다.그러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하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한국사의 최대금기’로 꼽히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신화 벗기기에 나섰다. 최근 출간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에서 그는 송시열을두고 북벌론자니 소중화론자니 하는 것은 “편벽한 소인에게 주어진공허한 찬사”일 뿐이라고 혹평한다. 송시열은 한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란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신돈이나 정도전,정여립 등을 들기도 하지만 생전에 혹은 죽은 뒤에 송시열에 집중됐던 논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3,000번 이상 등장한다. 송시열은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숙종 때를 제외하고는 역모가아닌 경우 대신을 사형시킨 예가 없고 국문(鞠問)도 하지 않을 만큼대신을 우대한 조선에서 그는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사사당했다.여기서 죄인들이란 서인,좁혀 말하면 노론에 속한 당인들을 가리키는 말.그러나 송시열은 죽은 뒤 노론이 다시 집권하면서 유학자로서 최대의 영광인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됐다. 공자 맹자 주자처럼 송자로 불리는 영광도 누리고 있다.하나의 신화가 된 것이다.저자는 이 ‘조선 최대의 당쟁가’를 한 시대의 파탄을초래한 일개 정치가의 자리로 끌어내린다. 저자의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현행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교과서에서는 송시열을 송준길,이완과 더불어효종을 도와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청을 무너뜨려 삼전도 치욕을 갚자는 북벌정책의 중추 인물로 그리고 있다.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한마디로 역사에 대한 오도다.이 책은 송시열이 겉으로는 북벌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북벌에 반대한 인물임을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낱낱이 밝힌다. 송시열이 살았던 당시 조선은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됐다.조선의 신분질서로는 더이상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다.양반의 특권은폐지돼야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자학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주자학은 주희가 남송시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송시열이 활동할 무렵 주자학은 조선에서 그 기능을 다한 학문이었다.저자는 이 주자학을 정치에잘못 적용한 데에 송시열의 비극이 있다고 강조한다. 송시열은 주자학의 의리론을 조선으로 가져오는 것, 즉 소중화(小中華)사상을 주자학의 조선화로 생각했지만 이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명분론이라는 것이다.유학의 진정한 조선화를 위해서는 사대부 중심의 중세유학을 일반 양인 중심의 근세유학으로 바꾸고,왕가와 사대부가의 예가 같다는 의미의 천하동례(天下同禮)가 아니라 사대부가와일반백성이 같다는 의미의 천하동례를 내세워야 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논어’ 위정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송시열에 대한 평을 대신한다.“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김종면기자 jmkim@
  • 최초 원자탄 개발 참여 심슨박사 사망

    [시카고 AP 연합]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을 이끈 뒤 핵의 평화적 이용에 앞장을 서온 존 심슨 박사가 31일 시카고대학 버나드 미첼 의료원에서 심장수술 합병증으로 숨졌다.향년 83세. 심슨 박사는 1943년 시카고대학에 부임한 뒤 미국의 극비 원자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심슨 박사는 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이 엄청난인명피해를 일으킨 것을 본 뒤로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운동에 매진했다.심슨 박사는 46년 핵 에너지의 민간부문 관리를 규정하는 법률 제정도 적극 후원했다. 심슨 박사는 또 우주선(線) 연구의 선구자로 ‘우주선 중성자 농도감시장치’를 개발해 56년 사상 처음으로 태양 자기장의 영향을 받는 행성 너머의 지역을 의미하는 태양권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심슨 박사와 그 연구팀은 이 연구를 바탕으로 65년 화성을 필두로 목성,수성과 토성까지 우주선(線) 탐사기구를 보내는 성과를 거뒀다.
  • 93세 노모·北送아들 애끊는 이별

    “꾹 참고 안 울어.내가 눈물 보이면 아들이 맘 편히 못가잖아.아들하고 훈련했어” 먹장구름이 낮게 드리워진 1일 낮 서울 종로구 계동의 한 음식점 앞.북송을 하루 앞둔 신인영(辛仁永·71)씨의 노모 고봉희(高鳳喜·93)씨는 주름진 손으로 연방 눈자위를 부비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집을 나오기 전 “골수암으로 투병 중인 아들에게 내 손으로 지은따뜻한 밥을 먹이며 함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복했다”면서 “한번도 못본 며느리와 손주들 얼굴을 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하며 정갈하게 다린 와이셔츠를 챙기던 고씨였지만 막상 헤어질 때가되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며느리에게 보내는 한복과 40년 동안 간직한 금브로치 등 선물, 아들의 짐꾸러미를 챙기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없었다.지난 밤에는 아들과 마지막으로 한 잠자리에 들어 손을 잡고밤을 새다시피 했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신씨는 서울대 상대 재학 중 6·25때 인민군에징집돼 월북,김일성대를 졸업한 뒤 지난 67년 공작원으로 남파,검거됐다.3남5녀의 장남인신씨가 98년 3월까지 30여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 동안 노모는 옥바라지를 하면서 아들과 함께 살 날만을 기다려 왔다.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식사를 마친 뒤 통일부가 지정한 장소로 떠날 때가 되자 신씨는 “어머니,이렇게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예요”라면서 “내년 봄 북으로 초대할 때까지 건강하세요”라고어머니를 위로했다. 고씨는 “그래,그래 나는 서운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니 나는 괜찮아” 하면서도 아들 신씨가 얼마 전 선물한 금반지를 낀 손으로 계속 눈자위를 훔쳤다.신씨가 “제 생각이 나시면 이 반지를 보세요”라면서 ‘만수무강 신인영’이라는 글자를 새겨 선물한 두 돈짜리 금반지다. 신씨는 배웅나온 형제와 친지들에게 “다시 만날 때까지 어머니를잘 모셔달라”고 신신당부한 뒤 뒤돌아섰다.아들의 뒷모습을 힘 없이바라보는 구순 노모의 눈가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안동환 홍원상기자 sunstory@. *비전향장기수 北送 의미. 북송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2일 송환되는 것은 반세기동안 우리 민족을 옥죄고 있던 냉전구조의 해체를 본격 촉진한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전망이다. 북송자 63명은 해방 전후 빨치산으로 활동했거나 60년대 남파된 간첩들이 대부분이다.이러한 인물들을 기꺼이 보내주기로 한 것은 우리사회의 자신감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반증으로 여겨진다. 정부는 체제 선전에 집착하는 북측의 오랜 숙원을 ‘화끈하게’ 풀어줌으로써 앞으로 국군포로,납북자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환영행사 할까 93년 3월 이인모(李仁模·현재 83세)씨 송환때 북측은 판문점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벌여 우리를 당혹스럽게 했다.정부는 최근의 남북 화해 분위기를 감안,이번엔 자극적인 행사를 자제토록 북측에 당부했다는 후문이다.그러나 평양으로 향하는 연도변이나 평양 시내에서는 대대적인 행사가 상당 기간 잇따를 전망이다.63명이 무더기로 ‘이념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북측으로서는주민들을 사상적으로 결속시킬 최대의 호재랄 수 있다. ■어떤 대우 받을까이인모씨의 전례에 비춰 보면 63명은 북한에서최상의 대우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북한은 이씨에게 ‘김일성훈장’과 ‘국가훈장 1급’을 주고 ‘공화국 영웅’ 칭호를 부여했다.그가다녔던 양강도 파발인민학교를 ‘이인모학교’로 개칭했으며,이 학교에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친필 비석과 이씨의 반신상을 세우기도 했다.병 치료를 위해 96년 그를 미국에 보내기도 했다. 이씨는 현재 부총리급 간부들에게 제공되는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김상연기자 carlos@
  • [푸틴의 러시아](3)’러시아병’ 치료

    푸틴의 러시아가 비상(飛翔)하기 위한 필수 조건의 하나는 극심한 범죄와테러,각종 병리에 휩싸인 러시아 사회를 건강하게 되돌려 놓는 일이다. 소 연방 해체 이후,특히 옐친 시대 러시아 사회는 혼돈 그 자체였다.외국언론들은 오늘의 러시아가 마치 즉흥적인 정치쇼와 병치레에 급급,불안한 행보를 계속해온 옐친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고 빈정대왔다. 러시아 범죄는 지난 10년간 폭증해 살인사건 발생률이 세계 최고다.10만명당 20명으로 6.3명인 미국의 3배.납치,위폐 제조,마약거래 등 조직범죄는 국경을 넘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이탈리아 등 인근 유럽국은 러시아 마피아대책 전담반을 운영할 정도다.교도소 수용시설도 한계에 부딪히면서 국제 인권단체들이 교도소내 인권유린 문제를 집중 공격하고 있다. 공공보건 시스템도 붕괴상태다.지난해 남성 평균수명은 58.83세.94년엔 57. 6세였다.결핵,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등은 가속도로 늘고 있다.군대내 사망사고의 4분의 1이 자살로 인한 것이다.92년 이래 출생률이 점차 낮아져 신생아수가 300만명이나 줄었다. 새로운 사회 적응에서 낙오돼 갈피를 못잡는 러시아 국민들의 정신건강도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타티아나 드미트리예바 전 보건장관은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인들의 90%이상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고백했다.알콜 소비량도 1인당 4.6ℓ로 세계 1위다.미국의 2ℓ,독일 2.2ℓ의 두배를 넘어서는 수치. 사회불안을 가중시키는 또 다른 요소는 체첸 등 북부 코카서스 지역과의 갈등.체첸전의 경우 6개월 이상 계속되면서 체첸인 4분의 1이 인근 공화국인잉구셰티야 등지로 유입돼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지난 1월 여론조사기관인 ‘모든' 러시아 센터가 러시아인 1,6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 대통령 당선자가 해결해야할 첫 과제로 ‘체첸전 종식’을 꼽았다. 28일에도 그로즈니에서 밀려났던 체첸군은 남부 산악지대를 비롯한 곳곳에서 사흘째 대대적 반격에 나서 러시아 연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장기전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사우스 오데사,잉구셰티야 등은 최근은 잠잠한 상태지만언제 타오를지 모르는 불씨다. ‘미스터 질서’로 불리는 푸틴은 당선 전후 ‘법 질서 확립’을 강조하면서 거대자본가 집단과 부패한 관료의 유착,극심한 빈부격차 등 이른바 ‘러시아 병’을 고쳐놓겠다고 공언했다.그러나 러시아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는추락한 경제와 맞물린 현상.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싸움에서 푸틴의칼이 어느쪽으로 먼저 향할지 주목된다. 김수정기자 crystal@. *러시아 - 새내각 누가 기용될까. 향후 4년간 거함 러시아호를 이끌 푸틴 내각의 첫 참모진에는 누가 기용될까. 푸틴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예정일인 5월5일 이후로 개각을 유예한채 입을굳게 다물었음에도 러시아 정가에는 인사 하마평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미하일 카시야노프 제1부총리의 강력한 차기 총리 후보설이 그 하나다.28일면담직후 “취임일 이전에 개각일정은 없을 것이며 각료들은 동요없이 직무에 충실해달라”는 푸틴 대통령 당선자의 당부를 전하며 다시 한번 푸틴과의친분관계를 과시한 그는 7년 재무부 근무 경력에 대서방 외채협상 교섭으로신뢰를 얻은 경제통.경제재건이 시급한 현안인데다 대통령에 충실할 테크노크라트라는 점이 푸틴을 크게 매료시킨 것으로 알려졌다.이밖에 알렉산더 주코프 두마 예산위원장,알렉산더 쿠드린 재무차관,게르만 그래프 전략발전연구소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푸틴은 카시야노프와의 면담 직후 이고르 세르게예프 국방장관 임기를 1년연장한다고 발표,국방장관을 사실상 유임했다.노령인데다 옐친 핵심측근인세르게예프는 그간 교체가 확실시돼왔으나 체첸전 수행중이라는 점이 고려된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경제담당이기도 한 제1부총리 후보로 레오니드 레이만 현 통신장관과 일리야 클레바노프 부총리,내무장관직에 니콜라이 파투르 FSB국장,블라디미르 콜레스니코프 전 내무부 제1차관 등의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무성한 하마평에도 불구,뚜껑이 열리기 전까지 푸틴 내각의 윤곽을감잡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그의 인맥이라야 ‘상트 페테르부르크 마피아’라 불리는 동향출신 관료들,KGB동료들이 대부분이며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비록 현재는 거부하고 있지만 그가 옐친 측근 영향권에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산당에 일정지분을 할애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손정숙기자 jssohn@
  • [의열 독립투쟁] (9)장진홍 의사

    1927년 10월18일 11시20분경 대구시 중앙통에 위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허름한 옷차림의 한 청년이 나타났다.청년은 곧바로 창구 앞으로 다가가 들고온 보자기를 풀어 네개의 상자 가운데 한 개를 창구로 내밀면서 창구의 직원에게 “이것은 벌꿀인데 우리 여관에 든 손님이 지점장님께 전해달라고 한선물입니다”고 디밀었다. 군대에서 포병대 근무경력이 있는 창구직원 요시무라(吉村)는 상자에서 화약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급히 상자를 열었다.아니나 다를까!상자 안에는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들어있었다.깜짝놀란 요시무라는 도화선을 끊고청년으로부터 보자기를 빼앗아 다급하게 나머지 상자를 열었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10여명의 순사들이 도화선을 끊으려고 하였으나이미 때는 늦었다. 곧이어 폭탄 하나가 터짐과 동시에 뒤이어 두개의 폭탄이 연속적으로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며 천지를 뒤흔들었다.이것이 저 유명한장진홍(張鎭弘)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이다.폭탄을 전한 청년은장의사가 심부름을 보낸 덕흥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으로 이 사건과 별다른 관련은 없다. 장의사는 1895년 6월6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문림리에서 아버지 장성욱(張聖旭)과 어머니 순천(順天) 김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인동(仁同),호는 창려(滄旅).장의사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크고 의협심이 강했다.칠곡소재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졸업하고 1914년 조선보병대에 입대해군사지식을 배운 장의사는 1916년 고향에서 대한광복회에 가입했으나 일경의감시가 심해 1918년 만주로 망명했다. 동지인 이국필(李國弼)과 함께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조선인 청년 100여명을 규합해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나 1917년 러시아혁명의 여파와 일본군의 시베리아출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귀국하였다.1919년 3·1 의거가 일어나자 장의사는 일제의 만행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하여 동생 진환(鎭煥)으로부터 600원을 받아 전국 각지를 돌며 일제의 만행사실들을 조사,수집하였다.이 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자 장의사는 경북출신조선인 하사관 김상철(金相哲)에게 이를 영문으로 번역,세계 각국에 배포해줄 것을 부탁했다. 한편 장의사는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일제의 만행을 응징키로 결심하고 대한광복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 이내성에게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이자 폭탄제조 전문가인 호리키리 시게미쯔로(堀切茂三郞)를 소개받아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1927년 8월에 직접 제조한 폭탄의 성능실험을 마친 장의사는 동지들과 경북도청·경북 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식산은행 등에 폭탄을 투척하기로하고 10월16일 폭탄 여섯개를 제조했다.이튿날 6개의 폭탄 가운데 5개를 가지고 대구로 향한 장의사는 조선은행에서 가까운 덕흥여관에 숙소를 정하였다.18일 오전 10시40분 장의사는 여관의 사환을 불러 “이것은 조선꿀인데조선은행·도청·식산은행·경찰부 순서로 배달해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어 11시40분경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져 일본인순사 4명과 은행원 1명,행인 1명 등 모두 6명이 부상을 입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유리창 60여장이 깨졌다.그 순간 두루마기 차림에 파나마모자를쓰고네 대의 금니를 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던 장의사는 말쑥한 양복 차림에 흰 운동화로 갈아신고 상주에서 안동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다부원고개를 넘고 있었다. 사건 직후 일본경찰은 철저한 보도통제 속에 범인색출에 나섰으나 단서조차 잡지 못하였다.일본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장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막내동생 의환(義煥)에게 몸을 의탁하고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히로시마(廣島)등을 왕래하며 1년반 동안을 지냈다. 한편 이 사건의 수사가 미궁으로 빠져들 무렵 엿장수로 변장,장의사 고향집 부근에서 탐문수사를 벌이던 한 형사가 장의사가 오사카에서 안경공장을 경영하는 동생집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일본경찰은 조선인 여자첩자를 오사카로 파견,장의사 동생부부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장의사가 2층에 숨어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29년 2월14일 밤 동생 장의환의 안경공장에서는 술자리가 벌어졌다.일본경찰에 매수된 한 조선인 첩자가 안경 1만5,000개를 산다며 계약금조로 30원을 내놓은 것이었다.오랜만에 목돈이 생긴 장의환이 벌인 술자리에는 조선인첩자를 포함해 김해중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던 장의사도 참석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면서 취기가 무르익자 갑자기 일본경찰이 들이닥쳤다.장의사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면서 전등을 손으로 쳐서 깨뜨리고 창문으로 뛰어내렸으나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현장에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장의사는 단독범행을 주장하며 심문하는 일경에게 “일본이 조선을 해방시켜주지 않으면,너희 일본도 망할 날이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취조하던 조선인경찰에게는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가 확정된 장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인 1930년 7월31일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장의사의 순국소식이 옥중에 퍼지자재소자들은 ‘조선독립만세’,‘장진홍만세’를 외쳤고 이에 당황한 교도소측은 서둘러 장 의사의 사인이 뇌일혈이라고 발표하였다. [김순석 독립기념관 전시부 연구원] *장진홍 의사 후손들 근황 장진홍 의사는 후손으로아들,딸 각각 3형제를 두었는데 아들은 모두 어려운 형편 속에 살고 있다.세아들 가운데 장남만 보통학교 4년 중퇴를 했을 뿐나머지 두 아들은 모두 무학자이다. 96년 83세로 작고한 장남 형옥(衡玉)씨는 생전에 부친 장의사의 기념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경제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별다른 성과는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차남 형술(衡述·81)씨는 구미시 옥계동에 살고 있는데 연로해서 현재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다.또 대구에 살고 있는 3남 형태(衡泰·73)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행상 이발소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장남 형옥씨는 7남3녀를 두었는데 현재 8명이 생존해 있다.장손 상규(相圭·63)씨는 칠곡에서 전자제품 하청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IMF 사태 후 모기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연쇄부도를 맞아서 살고 있는 집마저 근저당이 설정된 상태. 장의사의 후손 가운데 그나마 그럭저럭 살고 있는 사람은 세 딸이 고작이다.세 딸 가운데 위로 두 딸은 모두 작고하였고 현재 막내딸 형필(衡必·70)씨만 구미에서 살고 있다. 현재 장의사 추모단체나 기념사업회는 특별히 구성된 것이 없고 낙동강 기슭에 서있는 추모비 하나가 고작이다.장의사는 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았으며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128번)에 마련돼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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