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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찬호‘몬트리올 악연’털고 자신감‘훨훨’

    박찬호(LA다저스)가 8경기째만에 ‘몬트리올’과의 악연을 청산했다. 박찬호는 4일 메이저리그 진출이후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몬트리올 엑스포스전에서 처음으로 승리의 기쁨을 맛보며 마침내 내셔널리그 모든 팀을 상대로 승리를 따냈다.이날 경기는 박찬호가 ‘몬트리올 컴플렉스’를 벗고 자신감을 북돋운 ‘완벽한 복수극’이었다. 박찬호는 애틀랜타 샌프란시스코 세인트루이스 등 강팀들과 맞서 승리를 챙기면서도 유독 몬트리올만 만나면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해 결국 지난 3년동안 징크스로 이어졌었다. 96년 메이저리거가 된 뒤 몬트리올과 맞붙은 경기는 모두 7차례.5경기에서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2패만을 기록했다.특히 몬트리올은 박찬호의 연승 길목에서 급제동을 걸기 일쑤였고 앞선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주면 후속 투수들의 갑작스런 난조로 승리를 도둑맞는 질긴 악연을 이어왔다. 선발과 중간계투,마무리를 오가며 ‘전천후 출격’했던 96년 박찬호는 몬트리올과의 3차례 경기에 구원 등판,1패를 당했다.8월30일 원정경기에서 5-5로 맞서던 9회 구원 등판한 박찬호는 2사에서 끝내기 안타를 맞아 패전의 수모를 겪은 것.14승을 달성한 97년에도 2경기에서 역시 1패를 안았다.8월7일 홈경기에서 5이닝동안 장단 9안타의 뭇매를 맞고 무려 6실점했다.당시 파죽의5연승을 질주하던 박찬호는 몬트리올에 발목이 잡힌 셈이다. 박찬호는 ‘와신상담’하며 지난해 두차례 경기에서 혼신을 다했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해 안타까움을 더했다.8월5일 첫 경기 이전까지 5연승을 달렸다가 역시 몬트리올전이 걸림돌이 돼 이후 2연패했다.또 8월27일 경기에서는 8과 3분의 1이닝동안 3실점으로 호투했으나 마무리로 나선 제프 쇼의 난조로승리를 날려보냈었다.몬트리올과는 악연의 연속이었기에 박찬호의 이날 승리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김민수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19)-요동치는 軍(上)

    1960년 8월27일 민의원에서 총리 취임후 첫 시정연설에 나선 장면(張勉)은긴급과제 6가지에 관한 정부 방침을 역설했다.마지막 항목에서 장총리는 “경제건설과의 균형상 과중한 국방비를 줄이고자 감군(減軍)을 하겠으며 이에 대비해 중장비를 도입하는 계획을 이미 수립했다”고 밝혔다.이어 “국군의 군기를 확립하고 일부에서 있었던 부패를 숙청하는 동시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고 군내 파벌 조성을 방지하기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다짐했다. 장총리가 제시한 군 관련 정책의 큰 줄기는 ‘감군’과 ‘개혁’이었다.또그가 지적한 군의 문제점들은 국민도 충분히 공감하는 것들이었다.이승만(李承晩)정권 아래서 군은 정치에 심하게 오염된 상태였다[별도기사 참조].4월혁명이 일어난 뒤 군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다른 어느 분야에 관한 것 못잖게 높았다. 4월혁명 공간에서 국민과 군의 만남은 충돌 없이 이루어졌다.4월19일 이승만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해 군이 서울 등 대도시에 진주했지만,경찰과는 달리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송요찬(宋堯讚)계엄사령관은 계엄군에게 “민가에 들어가지 말고 절대 음식을 얻어먹지 말 것,어떤 일이 있어도 총을 쏘지 말며 발포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렸다.계엄군인 15사단의 조재미(趙在美)사단장은 19일 고려대를 찾아가 강당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절대 연행하지 않겠다”는약속을 해 해산시키기도 했다. 60년 4월 중립을 지킨 군의 엄정한 자세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다행스러운일이었다.가령 군이 유혈진압에 나섰다면 그 비극적 결말은 상상하기에도 두려울 정도였을 테고,계엄사태를 빙자해 직접 권력 장악에 나섰더라도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타격이 됐을 것이다. 4월혁명 과정에서 군은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초연한 듯이 보였다.다만 장총리의 연설에서 지적받은 자체 문제점들을 처리하려는 움직임이 내부에서일어났다.그것이 바로 정군(整軍)운동이다. 허정(許政)과도정부 시절인 5월2일 군수기지사령관인 박정희(朴正熙)소장은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편지를 보낸다.“군의 최고 명령자로서 ‘3·15부정선거’에책임을 지고 용퇴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5월8일에는 김종필(金鍾泌)중령 등 육사 8기생인 중령 8명이 김중령 집에서모였다.이들은 정군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으고 ▲3·15 부정선거를 방조한 군 장성들의 책임 추궁 ▲부정축재한 장성 처단 ▲무능·파렴치한 지휘관제거 ▲파벌 요인 제거와 군의 정치적 중립 보장 ▲군 처우개선 등을 목표로 정했다. 이들은 연판장을 돌려 군내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했지만 즉시 발각돼 김종필 최준명(崔俊明) 김형욱(金炯旭) 옥창호(玉昌鎬) 석창희(石昌熙)등 5명이구속됐다.그러나 여론 악화를 우려한 송요찬은 이들을 바로 석방하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송요찬의 후임으로는 역시 정군대상으로 꼽히는 최영희(崔榮喜)중장이 임명됐다. 장면내각이 구성되면서 국방장관은 현석호(玄錫虎),정무차관은 박병배(朴炳培)의원(무소속)이 각각 맡았다.장·차관 모두 군이나 국방에 관해서는 백지나 다름없었다.다만 현석호에게 육사 2기생인 현석주(玄錫朱)라는 동생이 있어 그를 통해 군 내부사정을 알아보는 정도였다.장면은 국방부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듯하다.공보비서관인 고 송원영(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장총리는 나이가 지긋한 민간인을 국방장관에 앉힌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그러나 국방부의 모든 일은 한계가 있다고 본 것 같다.미군에서 작전권을 가진 이상 국방장관 자리는 한계가있다고 보았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는 최경록(崔慶祿)중장을 앉혔다.최중장은 이승만정권에서 정치에 물들지 않은,몇 안되는 고위장성 가운데 하나였다.최영희는 합참의장으로 승진했다. 장면정부 출범후 영관급 장교들의 정군운동이 다시 떠올랐다.9월10일 김종필 김형욱 등 중령 11명이 현석호 국방장관을 방문해 전군을 상대로 정군을 단행할 것을 청원했다.현장관도 필요한 정화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이틀뒤 국방장관이 현석호에서 민주당 구파인 권중돈(權仲敦)으로 바뀐 뒤 권장관은 정화조치의 첫 단계로 3·15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를 조사하는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한다. 9월20일 엉뚱한 곳에서 정군운동에 불똥이 튀었다.최영희 합참의장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 국방부 군원국장인 윌리스턴 파머 대장이 한국을 떠나면서 정군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한국군 고위장성들이 최근의 사태에큰 불안과 초조를 느끼니 더 이상 조직을 흔들어 군사력을 약화시키지 말라”는 요지였다. 파머의 성명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최경록 육참총장이 즉각 “명백한 주권침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9월24일에는 육사 7·9·10기 대표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파머를 불러들여 자리를 보존하려고 했다”면서 사임을 요구했다.‘하극상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태의 결과로 김종필·석정선(石正善) 두 중령이 61년 2월 예편당한다.배후로 지목된 박정희는 육군본부작전국장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된다. 이후 정군운동은 사라지지만 주동자들은 결국 쿠데타 음모로 돌아선다. 이용원기자ywyi@李承晩정권하의 軍실태 이승만(李承晩)정권 12년동안 군은 외형상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대한민국 출범 당시 국군은 육군·해군을 합해 5만 병력 규모였다.‘6·25’발발직전에 10만명을 넘어섰고 1954년에는 65만명에 이른다.이후 다소 줄어 50년대 중반부터는 통칭 ‘60만 대군’으로 자리잡는다. 반면 이 시대는 군이 정치적인 사건에 자주 동원되고 그 영향으로 분파(分派)가 극심해지는 등 정치에 오염된 기간이기도 했다. 창군(創軍)이후 60년대 초까지 한국군 상층부를 이룬 장성과 고급장교들은출신에 따라 네 부류로 나뉜다.광복군 또는 중국 정규군 출신을 비롯해 ▲일본군 장교·하사관 ▲일본이 창설한 만주군 ▲공산통치를 피해 내려온 이북피난민 출신 들이다. 육군의 전신으로 46년 창설된 조선경비대에서는 광복군의 유동열(柳東悅)송호성(宋虎聲)장군이 초대,2대 사령관을 맡는다.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김구(金九)를 지지하는 광복군·중국군 출신들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이승만은 초대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참모총장(49년 폐지됨)에 일본군 출신 이응준(李應俊) 채병덕(蔡秉德)을 각각 임명한다.일군 출신들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해 초기 국군이 기틀을 잡는 데 나름대로기여한다. 그러나 일군 출신들도 52년이면 ‘실권’에서 멀어진다.‘발췌 개헌’때 이승만이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2개 전투사단을 부산으로 보내라고 명령하지만 거부당한 일이 계기가 됐다.일본 육사를 나온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개입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만만치 않은’일군 출신들을 배제한 이승만은 후임에 ‘젊고 경험이 부족한’만주군 출신들을 선택한다.대표적인 인물이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정일권(丁一權)과 백선엽(白善燁)이다.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공하려고 관동군 보조병력으로 창설한 만군은 그 위상이 독특했다.정규전 훈련보다는 독립군이나 마적들을 소탕하는 데 필요한 반란진압 전술을 주로 배웠다.독립운동가·공산주의자를 상대하는 바람에 그업무도 상당히 정치적이었다.그래서 흔히 “만군 출신의 많은 장교들은 군내(軍內) 분파주의와 음모의 원천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승만은 정일권과 백선엽을 교대로 중용하며 충성경쟁을 부추긴다.정일권이 51년 34살에 국군 최초로 중장에 오르지만 대장 계급장은 그보다 3살 아래인 백선엽이 53년 먼저 단다.육군참모총장도 정일권(50년)-백선엽(52년)-정일권(54년)-백선엽(57년)으로 왔다갔다한다.두 사람의 선두다툼은 군부 내에 함경도파(정일권)와 평안도파(백선엽)라는 두 파벌이 형성되는 원인이 된다. 군부내 파벌을 조장해 충성경쟁을 시킨 것 말고도 이승만은 여러 면에서 군을 정치에 악용한다.대통령·국회의원 선거 때 부정투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헌병총사령부(사령관 元容德)와 특무대(대장 金昌龍)를 시켜 군 내부를 감시하는 한편 이들을 정적 제거에도 동원했다.‘서민호(徐珉濠)의원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자금도 군비에서 조달했다.군은 당시 국가예산의 40%이상을 썼고 매년미국으로부터 4억달러 상당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받고 있었다.군에서 정치자금을 끌어쓰는 행태는 필연적으로 군 내부에 부패를 불러왔다.군수물자를 빼돌려 사복(私腹)을 채우고 위로는 상납하는 구조가 심해졌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군은 자유당·관료층에 버금가는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라 정군(整軍)운동을 불러왔다. 이용원기자ywyi@
  • 주가 폭등 720선 돌파

    종합주가지수가 35포인트 가까이 폭등하며 심리적 저항선인 700선을 가볍게돌파했다. 15일 주식시장에서는 개장한지 10분만에 지수 700선을 돌파하는 강세로 출발했다.7조원이 넘는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전날보다 34.62포인트가 오른 722.01으로 마감,연중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는 97년 8월27일(730.28) 이후 1년 6개월만에 최고치이다.거래대금도 4조447억원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전날 대거 팔자에 나섰던 기관투자가들이 2,135억원 이상의 순(純)매수를보였고 외국인도 191억원의 순매수를 기록하는 등 시간이 흐를수록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이어지면서 지수 상승 폭이 커졌다.반면 개인은 1,829억원의 순매도를 기록했다. 장 중내내 치열한 매매공방 끝에 거래량도 급증,3억7,069만주로 연중 1위,사상 2위를 기록했다. 전 업종이 상승한 가운데 증권·건설·도소매 등 대중주들의 오름세가 두드러졌다.특히 증권업종은 삼성증권 우선주를 제외한 전 종목이 상한가까지 올랐다.주식 값이 오른 종목은 상한가 70개 등 632개,내린 종목은 하한가 8개등 173개였다. 김균미기자 kmkim@
  • [제2공화국 張勉](1) 국토건설사업(上)

    1961년 2월27일 오후 2시.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앞 광장은 꽃샘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열기로 가득찼다.국토건설에 앞장설 이 땅의 젊은이 2,000여명이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을 갖는 자리였다.녹회색 모자와 작업복 차림의 건장한 청년들이 도열한 주위를 가족·친지 그리고 ‘형들이 가는 길 우리도 따르리’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남녀 중고생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단상에 앉은 尹潽善대통령 張勉총리 등 3부요인도 기대와 흥분에 찬 모습들이었다.尹대통령이 “국토건설사업은 모든 산업건설의 기간이 되는 것인 만큼 여러분이 이 사업의 중심인물이 되리라고 크게 기대한다”고 치하한 데이어 張총리도 “이 사업에 여러분이 가진 젊은 의기와 예지를 송두리째 투입한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굳게 믿는다”고 격려했다. 수료식을 마친 국토건설사업 요원들은 삽 한자루씩을 멘 채 서울시가를 행진했다.咸錫憲·張俊河 등 당대의 지성인들과 장면내각의 金永善재무장관 鄭憲柱국무원사무처장 등 각료들이 대열을 이끌었고 국회의원도 여러명 가담했다.장면정부에 사사건건 트집을 일삼던 민주당과 신민당의 소장파 의원들이합세한 것은 이변이었다. 이날의 시가행진은 장면정부가 내건 ‘경제제일주의’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또 그 대열에 지식인들과 여야 정치인들이 한마음으로 참여함으로써국토건설사업에 거는 국민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쌀 한가마에 1만4,000∼1만7,000환(현시세 17만4,400원) 하던 시절에 장면정부는 61년 한해에만 400억환을 투입하고 연인원 4,500만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국토개발 사업을 벌이겠다고 공표했다.‘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군사혁명을 스스로 불러들였다’고 알려진 제2공화국의 장면정부,그 나약하고정쟁만 일삼았다는 정부가 정말 이처럼 원대한 포부를 가졌을까.계획을 세웠더라도 실제로 집행할 능력은 있었을까. 그러나 국토건설사업은 민주당이 추진한 경제정책 가운데 한 부분일 뿐이었다.1960년 4월혁명의 결과로 그해 8월 출범한 장면정부는 국정의 중점을 경제발전에 두었다.장면은 60년 8월27일 총리 취임후 민의원(民議院)에 나가취임인사 겸 시정연설을 하면서 “당면한 민족적 과제인 경제적 건설을 수행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마지 않는다”고 말했다.그가 훗날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경제 안정을 기한 후에야 정국안정을 바랄 수 있고 참된 민주주의 실현이 가능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면정부는 경제발전 방안으로 두 가지 큰 틀을 구상했다.하나는 장기목표인 ‘경제개발5개년계획’이고 다른 하나가 국내경기를 단시일에 활성화하는 국토건설사업이었다. 국토건설사업이 국민 앞에 실체를 드러낸 때는 60년 11월28일이었다.정부는 이날 ‘국토건설사업’이라 이름붙인 대규모 공공사업계획을 발표하고 계획서를 국회에 제출했다.그 규모는 단군이래 첫 국토종합개발답게 가히 ‘혁명적’이었다.소양강댐·춘천댐·남강댐 건설을 비롯해 발전소 및 도로 건설,농지개간,수자원개발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다목적인 계획이었다.장면정부는 60년 12월 경제4부장관회의를 열어 61년분 제1차 추가경정예산에 사업비 280억환을 계상하기로 결정했고 이어 61년 1월에는 국토개발특별회계법을 제정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6·25가 휴전으로 끝맺은 지 10년이 채 안돼 전쟁의 상흔이 국토 곳곳에 남았고,이승만정권 말기의 폭정(暴政)탓에 국력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에서장면정부는 무슨 힘이 있어 이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었을까. 그 무렵 국가재정은 절반 가까이를 미국 원조에 의존했다.장면정부는 국토개발을 꼭 이루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와 함께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았기에 자신있게 청사진을 마련할 수 있었다.미국 정부가 국토건설사업을장면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꼽고 이를 적극 지원하였음은,대한매일이 이번에처음 공개하는 일련의 미 국무부 문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면정부는 출범후 곧바로 국토건설사업 준비에 들어갔다.먼저 국토건설사업본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책임자를 물색했다.장면정부가 지목한 적임자는‘사상계’ 사장인 장준하였다.올곧은 지식인의 표상이자 반독재 민주투쟁의 상징인 그가 한때 국토개발에 앞장선 사실을 지금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4월혁명후 장준하는 사상계의 편집위원과 필진을 주축으로 학계·언론계·문화계·경제계의 주요인사 30여명을 모아 ‘국제연구소’를 운영했다.‘국제연구’를 내걸었지만 새 시대에 걸맞은 국정운영을 연구하는 데 주력했다. 이렇다 할 정책연구기관이 없던 시절이라 국제연구소는 정책의 산실로 떠올랐고,연구위원들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국토개발이었다.정책 수립에 골몰하던 장면정부가 장준하와 그를 뒷받침하는 국제연구소 멤버들에게‘구애’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사상계에서 일하다 장준하를 따라 국토건설사업에 참여한 朴敬洙씨(69·작가)는 “장면정부가 출범 직후인 60년 8월말 장준하선생에게 국토건설사업을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고 기억했다.장준하는 거듭 사양하다가 결국 ‘국토개발은 시대적 의무’라는 명분에 져 수락하게 된다. 국토건설사업본부는 총리 직속이었지만 실제로는 관민이 함께 운영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성격의 독립기구였다.본부장은 장면총리가 겸임했고 장준하는 수석부장으로서 본부장 대리 구실을하는 기획부장을 맡았다.또 사상계편집위원인 申應均과 李萬甲이 관리부장·조사연구부장으로,일제때 한강철교를 설계한 崔景烈이 기술부장으로 들어왔다.박경수씨는 간사로 임명됐다. 장준하를 비롯한 사상계 팀이 사업본부 지휘부를 형성함으로써 장면정부는국토개발에 필요한 두뇌와 함께 지식인층의 지지를 얻었고 그 기반 위에서자신있게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국무부문서에 나타난 ‘국토건설’ 펑가 ‘제2공화국과 張勉’연재에 정치학 박사 전상숙 씨(이화여대 강사)가 동참합니다.田박사는 지난 97년 8월부터 1년동안 미국에 머무르면서 1960∼63년에작성된 미 국무부 한국관련 문서 1만여점을 조사·연구했습니다.그 축적을토대로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새 사료를 통해 당시 미국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를 어떻게 평가했는지,이에 따른 대한(對韓)정책은 무엇이었는지를깊이 있게 분석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장면정부가 물려받은 경제상태는 매우 불안한 것이었다.빈약한 자원에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대량파괴,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방비,그리고 부패하고 허약한 관료집단이 주원인이었다.장면정부는 뉴딜정책과 같은공공사업을 통해 이같은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곧 1960년 11월발표된 ‘국토건설사업’이다. 장면정부는 이 사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미국에 요청했고,미국도경제원조가 장면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하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나섰다.이같은 사실은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이 소장한 미 국무부문서(RG59)중 여러건에서 확인된다. 매카나기 주한미대사가 61년 3월11일 미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A)에는 국토건설사업에 대한 미국측 평가가 명확하게 표현돼 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장면정부하의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식량부족과춘궁기(보릿고개)·대졸실업문제를 해결하는 데 국토건설사업이 큰 도움이될 것이라고 평가했다.아울러 경제발전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머지않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시위를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이 때문에 미국은 장면정부의 시책 가운데 국토건설사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이보다 열흘 앞선 보고서(B)에서는 매카나기와 한국 金永善재무장관의 대담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다.김장관은 국토건설사업이 시작됐음을 알린 뒤 미국이 이미 제공한 지원금 2,000만달러를 유용하게 사용할 것임을 약속했다.이어 경제개발을 위해서도 한·일간의 전면적인 외교관계 수립은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미국측도 양국의 국교정상화가 민감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빨리 이루어지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이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이뤄 일본이한국에 경제원조를 하도록 함으로써 동북아 안보이익을 공고히 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보여준 것이다. 국토건설사업에 대한 미국측 지원이 변함 없음은 매카나기의 후임인 마셜그린 대리대사가 4월18일 장면총리와 대화한 내용을 담은 전문(C)에도 그대로 나타난다.그린은 국토건설사업에 1,500만달러를 추가 원조하기로 결정했음을 통보하면서 지원금의 구체적인 사용처도 명시하고 있다. 이같은 한·미간의 국토개발 노력은 그러나 5·16으로 중단돼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됐다.
  • 고종의 자금 지원(다시 태어난 ‘대한매일’:9)

    ◎창간부터 각별한 후원… 항일 필봉 독려/배설에 특허장 하사 등 감시속 유일하게 지원/통감부 보고서 등 기록/자금지급 사실 뒷받침/이토 ‘궁금령’으로 훼방/돈끊겨 힘겨운 싸움 대한제국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각별한 것이었다. 고종 황제는 대한매일 창간 때부터 裵說 등 그 주역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은밀한 후원을 통해 독려,신문 논조가 지속적으로 강한 항일 색채를 갖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일제 강점기 거센 언론탄압 속에서 유독 대한매일이 황실 지원을 받았음은 당시 그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고종은 발간 지원의 방편으로 배설에게 특허장을 써주기도 했으며,일제가 이같은 지원을 막고자 궁금령(宮禁令)까지 내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황실이 창간 때부터 대한매일을 지원했음은 여러 기록에서 추측할 수 있다.토마스 코웬은 배설이 러일전쟁을 취재하려고 입국했을 때 동행한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동료기자였다.그와 배설이 함께 해임된 뒤 두 사람은 영자신문을 공동창간하려고 했다. 코웬이 대한매일 창간 며칠 전인 1904년 7월10일 일본 저팬타임스 사장인 즈모에게 보낸 편지는 고종의 지원의사를 보여주는 자료다.“코리아타임스라는 신문을 창간해달라는 중요한 주문을 받고 있다.이 신문은 한국 궁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을 것이고,반일적인 것이 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 대한매일 창간 후인 그해 10월3일 주한 영국공사 조단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는 “이 신문이 孫澤이라는 독일 여인을 통해서 황제의 지원금을 쓰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쇄시설조차 갖추지 못해 인쇄소에서 신문을 찍고,불과 200여호를 발행한 뒤 휴간한 사정을 보면 창간부터 1905년 초까지는 고종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배설이 외부 도움 없이 신문을 계속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특히 1905년 8월11일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각각 4면으로 별도 발행했는데,이같은 확장과 인쇄시설 마련이 고종에게서 보조금을 받았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다. 1905년 10월11일 주한 일본군 헌병대가 한국 주둔군 참모장에게 보낸 보고서는 “白時鏞이 고종과 배설 사이에 중개를 주선한다는 사실을 확실한 소식통에게서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백시용은 당시 예식원의 회계과장으로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다.또 1907년 1월18일 경무고문 마루야마가 통감대리인 하세가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대한매일이 한국 황실로부터 매월 500원을 지급받고 있다”고 액수까지 밝혔다. 1907년 8월27일 통감부의 경무 와타나베가 마루야마에게 보낸,궁내부 전무과 기사 沈雨澤에 대한 심문조서는 고종의 보조금지급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작년 손탁은 폐하에게 ‘대한매일은 유독 한국 및 황실에게 이익되는 것을 기재해 왔으나 유지곤란으로 이번에 일본에 매도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폐하의 일고를 바란다’고 주상했다.폐하는 출판을 계속할 것을 희망하여 어느 정도의 금액을 지출하고 또 매월 1,000원 정도를 하사해왔다.” 대한매일 한글판이 재창간된 것은 이해 음력 4월이므로 고종은 대한매일 한글판 창간에 특별자금을 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또 신문발간에 편의를제공받도록 고종이 배설에게 특허장을 준 것이 1906년 2월10일자였으므로 고종이 재정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준 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고종이 끝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기는 어려웠다.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7월2일 고종을 만나 ‘궁중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특별병력이 궁중에 주둔해야 한다’고 강요했고 7월6일자로 궁금령을 공포했다.당시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들이 고종에게서 내밀하게 고무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토가 고종을 고립시켜 두려는 속셈이었다.특히 반일적인 배설이 고종과 내통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결국 궁금령 공포와 엄격한 출입통제로 고종은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1년 후 고종이 퇴위하고는 재량껏 쓸 수 있는 내탕금도 제한됐고,일본측 감시도 철저해졌다.이때부터 지원이 끊겨 대한매일은 더욱 힘겨운 싸움에 나서야 했다. ◎황실과 대한매일신보/극도보안속 재정지원 타언론 비해 자금난 덜해/헤이그·을사조약생생한 보도/강경한 항일노조 유지 큰 힘 고종 황제의 경제적 지원은 대한매일이 일관된 논조를 유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당시 대부분의 민족지들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 탓에 경영난에 허덕였고 논조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이에 비해 대한매일은 황실 지원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재정 곤란을 덜 겪었다. 대한매일의 굽히지 않는 필봉의 원천은 물론 배설이라는 영국 발행인에게 있다.그가 치외법권을 인정받아 직접적인 탄압을 비켜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대한매일도 어려운 경영상태에 빠져 대중적인 지원을 호소하는 사태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황실의 지원이 큰 힘이 됐음을 부인키 어렵다.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철저하게 베일에 쌓여 있었다.당시 일제가 정부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장악한 사실을 볼 때 황실의 지원은 사적으로,극도의 비밀을 유지한 채 이루어졌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한매일의 고종 관련기사는 항상 강경하고 직접적인 상황을 여과없이 부각하는 생생한 것들이다.1905년 을사늑약(勒約)체결과이에 대한 고종의 완강한 거부를 공개한 1905년 11월18일자의 ‘칙어엄정(勅語嚴正)’,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만국에 알린 고종 친서를 전문게재하고 이와 관련해 쓴 1907년 1월23·24일자 논설,그해 6월 헤이그밀사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 등 끝이 없다. 이는 고종의 대한매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다른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와는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칙어엄정’만 하더라도 을사조약 체결 과정을 일반에게 알린 최초 보도였다.또 고종친서사건과 헤이그밀사사건은 각각 고종의 입지를 좁히고 결국 폐위로 연결된 직접적 사건이었다.초기부터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일제 입장에선 양쪽 관계를 더 이상 유지케 할 수 없다고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단초로 작용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 방송개혁 방향·각계 여론/방송개혁 어떻게

    ◎‘공룡조직’ 축소·기술혁신 등 초점/방개위 ‘21세기 선진형 방송’ 밑그림 제시/새 방송이념 정립·첨단구조 구축 서둘러야 조만간 출범할 방송개혁위원회는 ▲공중파 유선방송 등을 둘러싼 방송구조 ▲프로그램 내용 ▲기술적 혁신 등 세가지에 초점을 맞춰 ‘방송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방송이 21세기 선진국형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방송과 관련한 모든 것을 이처럼 원점에서 다루기는 우리나라 방송 70년사에서 이번이 처음이다.그만큼 방송의 지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방송개혁의 필요성은 재야를 중심으로 그동안 꾸준히 제기돼 왔다.그러나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던 중 최근 급진전하고 있다.금융계·재계 등 경제개혁이 가속화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방송개혁의 조기추진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방송이 제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여망은 여러가지 형태로 표출돼 왔다.지난 8월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련)와 KBS개혁리포트팀이 국민 1,01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것도 이같은 여망을 대변한 것이며 결과도 마찬가지로 나왔다.응답자의 60.4%가 “방송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돼 있지 않다”고 답변,방송의 독립성을 간접적으로 요청했다. 또 지난달 KBS는 ‘개혁리포트’ 프로그램에서 5공화국시절 민정당 연수행사를 중계하면서 여당을 찬양한 것이나 ‘땡전뉴스’로 비하됐던 사실을 자체비판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는 방송개혁과 관련된 논의가 두갈래로 진행돼 왔다.하나는 과거정권에서 추진된 방송정책과 사업의 해부인 방송청문회 개최이고,다른 하나는 방송개혁위원회를 통한 방송계 전반의 손질이다. 방송청문회는 지금 여권 내부에서조차 회의론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언개련 등과 일부 학자들은 이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이들은 방송청문회가 지역민방과 케이블TV의 실정을 짚는 차원을 넘어 방송정책에 대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재평가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이에 따라 언개련은 지난달 27일부터 방송청문회 개최 등 11개 개혁과제에 대한 범국민 서명작업을 벌이는 중이다.이에 비해 방송개혁위원회는 현실성 때문에 더욱 광범위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8월27일 辛基南 의원(국민회의·국회 문화관광위 여당 간사)이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대통령자문기구로 방송개혁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하면서 공론화되었다.辛의원은 “진정한 방송개혁을 완수하려면 통합방송법 제정뿐만 아니라 시대적 조류에 걸맞게 새로운 방송이념을 정립하고 첨단을 가는 방송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면서 “방송 종사자와 노조 대표,전문가,시청자·시민단체 등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방송개혁위원회를 구성,대통령자문기구로 두자”고 제안했다. 李協 국회 문화관광위원장 등 여권 일부에서 당위성에 공감하면서 방송개혁위 추진은 박차가 가해졌다.그러나 정치권 사정에 이은 여야간 맞대결로 국회가 표류하면서 논의가 미루어졌다. 방송개혁위원회 설치와 관련,전국방송노조연합(방노련)측은 “아직 공식입장은 정하지 못했지만 방송현안이 산적해 있고 통합방송위도 내년 초나 돼야 출범이 가능한 상황에서 한시적이나마 방송의 좌표를 모색할 기구가필요하다”고 전제하고 “하지만 현행 방송위의 역할과 위상을 침해할 가능성이 염려된다”고 강조했다. 방노련 朴起完 정책실장은 “통합방송위원회가 정치논리에 얽매이지 않도록 해야 하며 재벌·족벌신문의 방송진입을 제한함으로써 방송의 독립성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방송개발원의 한 선임연구원은 “방송개혁위의 필요성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면서 “방송 구조조정을 하려면 관련단체의 이기주의가 걸림돌인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모여서 현안을 터놓고 공개토론할 수 있는 특별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흐름과는 별개로 일부에서는 통신과 방송정책의 일원화를 주장하기도 한다.金한길 의원은 “급변하는 방송환경에 걸맞은 방송계의 자기 혁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경영합리화 등의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면서 “뉴미디어시대를 맞아 정보통신부와 문화관광부로 이원화된 통신·방송정책을 통합하자”고 말했다.
  • 金仁浩 수석에 대출 부탁/朴健培 해태회장 시인/換亂관련 8차공판

    외환위기와 관련,姜慶植 전 경제부총리와 金仁浩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한 8차 공판이 14일 서울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李鎬元 부장판사) 심리로 열려 尹鎭植 전 청와대 조세금융비서관(현 재경부 기획관리실장) 등 3명의 증인신문이 진행됐다. 尹 전비서관은 신문에서 “지난해 11월7일 청와대 회의에서 IMF행에 대한 최초의 공식논의가 있었고 이틀 뒤인 9일 회의에서 IMF행을 제안했으나 姜부총리와 金수석이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길래 고민 끝에 金光一 정치특보를 통해 주선된 12일 대통령 독대 자리에서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해태그룹 朴健培 회장은 “지난해 8월27일 金 전수석에게 찾아가 추가여신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하자 金 전수석이 그 자리에서 尹增鉉 재경원 금융정책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해태상황을 챙겨보라’고 지시했다”며 청탁사실을 시인했다.
  • 미군정 폐지와 행정권 인수(대한민국 50년:7)

    ◎정부수립후 3개월 지나서야 ‘정권’ 확보/한·미대표단,군­경찰 지휘권 놓고 첨예 대립/하지­이승만 직접담판 통해 ‘점진 이양’ 합의 1948년 9월4일 열린 제헌국회 제57차 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정 사이에서 진행되는 행정권이양 회담에 관해 중간보고를 했다.이총리의 보고는,국회가 9일전 긴급결의해 국회의장 명의로 서한을 보낸데 따라 갖게 됐다.이총리는 회담에서 한국측 수석대표였다. 이총리는 먼저 “한미 양국간에 이견이 있어 회담에 매달리다 보니 경과보고가 늦어졌다”고 사과한 뒤 “행정권을 완전히 이양받은 다음에야 인적·물적 토대에 근거하여 시정방침(국정지표)을 마련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이날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20일째인데도 정부가 아직 행정권을 인수하지 못해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사실을 국무총리가 공개시인하고 양해를 구한 것이다. ○재산권처리 협상도 난제 2년 11개월에 걸친 미군정은 형식상 48년 8월16일 0시를 기해 폐지됐다.16일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령 제1호를 발표,미군정청 과도정부로부터 이관되는 행정업무를 11부4처별로 정리했다.이에 따라 17일부터 신생정부 각부처의 장은 과도정부의 미국인 고문들과 구체적인 인수절차 협의에 들어갔다.19일에는 대통령 담화를 통해 과도정부에 소속된 한국인 관리의 직책을 새정부에서도 보장했다. 이처럼 한국정부가 발빠르게 인수절차를 밟았다고 해서 행정권이 쉽게 넘어온 것은 아니었다.양쪽은 인계인수할 행정권의 범주를 결정하는 큰 테두리에서 상당한 견해차를 보였다. 한국정부와 미군정 간의 행정권이양 회담은 16일 하오2시 중앙청내 미군정 민사처 사무실 200호실에서 처음 열렸다.양쪽 대표는 한국에서 이총리와 윤치영 내무부장관·장택상 외무부장관,미군정측의 무초 주한미국대사·헬믹미군정 민사처장(소장)·드럼라이트 미군정 정치고문 참사관 등 6명이었다.무초대사는 그달 23일에야 부임하는 바람에 첫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회의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첨예하게 대립한 부분은 ▲군(당시의 조선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과경찰에 대한 지휘권 문제 ▲한미간 재정 및 재산권처리에 관한 협정 등이었다.군정측은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는 한 군과 경찰에 대한 지휘권을 미군사령부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한국정부로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재정문제에 관해서는 한국측이 미군정이 보유한 물적 재산을 최대한 넘겨받기를 원했고,더불어 미국의 지속적인 지원도 요구했다.회의에 진전이 없자 양쪽은 하루에 상하오 두차례로 회동을 늘리기로 합의,이를 한국정부 김동성 공보처장이 정식 공표하기도 했다. 당시 회담에 임한 미군정측은 “이범석 총리를 비롯한 한국측 대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손아귀에 쥐어 있기 때문에 논의과정에서 권위를 갖지 못한다”는 시각을 가져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가 출국을 사흘 앞둔 8월24일 이대통령을 방문,직접 담판을 짓고서야 ‘군경에 관한 통수권’문제가 해결됐다.26일 조인한 ‘군사통수권 이양에 관한 협정’내용은 ▲군경에의 통수권은 가급적 점진적으로 이양하되 ▲미국이 국방경비대·해안경비대 장비를 원조하며 ▲미군이 주둔하는 한 이 문제를 계속 협의한다는 것이었다. ○9월30일에 시정연설 이 합의에 따라 경찰지휘권이 대한민국의 내무부장관에게 정식으로 넘어간 것은 9월3일 정오를 기해서였다.내무부는 곧바로 경찰조직 9국실 가운데 감찰실·총감부·수사국·교육국·공보실 등 5개국을 없애고 공안국·통신국·총무국·여자경찰국 등 4국실만 남기는 개혁을 단행했다.지방경찰 직제는 그대로 유지했는데 막상 지방 경찰력을 인수할 때는 미군정청과 가까운 일부인사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물자 현금 인사 및 정부직권의 이양’협정은 9월11일 타결됐다.이승만 대통령은 9월30일 국정지표를 제시하는 시정방침 연설을 할 수 있었다.미군정 과도정부의 중앙 각부처가 인원·재산 등을 한국정부에 이관하는 작업이끝난 날은 11월 18일이었고 지방 행정기구까지 완전히 신생정부가 인수한 때는 11월 20일이었다.정부수립 석달여가 지나서야 대한민국의 행정권이 비로소 확립된 것이다. 미군정청(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은 1945년 9월9일 서울 중앙청(옛 총독부)에 설치됐다.행정실무를 책임질 첫 군정장관으로는 아놀드 소장이 임명됐다.미군정은 초기부터 ‘영어를 알고 행정겸험이 있는’한국인을 활용한 고문제도를 시행했다.45년 12월에는 한 직위에 미군과 한국인을 한사람씩 두는 ‘한인·미인 양국장’제도로 바꾸었다.이때 참여한 인사가 광공국장 대리 오정수,학무국장 유억겸,농상국장 이훈구,경무국장 조병옥 등이다. ○행정훈련서 친미 양성 해방된지 1년쯤 지났을 때는 모든 부처의 장에 한국인이 진출,한인관료 체계가 자리잡았다.47년 2월12일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했고,그해 6월3일에는 미군정청 한국인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라 개칭했다.이어 47년 9월12일에는 행정권을 남조선과도정부에 넘겨 새정부에의 이양에 대비했다. 이같은 미군정청의 정책에 대해서는 두가지 엇갈린 평가가 존재한다.하나는 미군정이 나름대로 일정표를 갖고 한국인들에게 행정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며,다른 하나는 신생국가에 친미파를 조직적으로 양성했다는 시각이다. 미군정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토대를 마련한 공이 적지 않은 반면에,일제의 한인 관료군대부분에게 재생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일제청산에 큰 걸림돌을 남기기도 했다. 미군정이 이땅에 시행한 법령은 태평양 미육군 총사령부 포고 4건,남조선과도정부법령 14건,미군정법령 219건,행정명령 24건,부령 및 지령 115건,조선과도정부입법결의안 4건,미군정청포고 7건,기타 11건 등 모두 398건에 이른다. ◎미,한국협상대표단 불신/본사 특별취재반,‘제이콥스 보고서’ 입수 확인/“이범석 권한 없고 이승만이 모두 결정” 미국이 한미 행정권 이양회담에 임하면서 이범석총리를 비롯한 한국측 대표단에 불신을 가진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최근 입수한 ‘제이콥스 보고서’는 당시 회담 분위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J K 제이콥스는 주한 미24군 정치고문으로 회담경과를 정기적으로 미 국무부에 보고했다.이번 자료는 1948년 8월22일 작성했으며 그가 보낸 5번째 보고서이다. 제이콥스는 8월20일 상오10시와 하오2시 7∼8차 회의가 잇따라 열렸으며,7차 회의에서 이총리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고 결정권은 아직도 이승만 대통령 수중에 있다”고 실토했음을 보고했다.이어 미군정측의 헬믹소장이 구체적인 항목들을 나열하며 의견을 물었지만 이총리는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고 전했다. 이같은 한국측 태도에 자극받았음인지 하지사령관은 8월24일 이승만을 만나 ‘군사통수권 이양 협정’을 직접 협상했다.미 본국 정부도 우회전술로 한국정부를 압박했다. 트루만 미국대통령은 8월27일 ‘한국경제원조 계획’을 미군정에서 다루지 말고 국무부 경제협력국에서 수립할 것을 지시했고,마샬 국무장관은 9월1일 기자회견 석상에서 “미국은 국제연합 한국위원단(UNTCOK)의 보고가 있을때까지 행정권 이양에 관한 최종 결정을 미룰 수밖에 없다”고 공언했다. 이후 한미행정권 이양에는 가속도가 붙었다.이승만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했다기 보다는,회담에서 상대가 내민 카드를 서로 탐색하다가 결국 수뇌부에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특별취재반 ▲이경위 부국장겸 정치부장 ▲이용원 문화부 차장 ▲김경웅 정치부기자 ▲최병렬 문화부 기자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정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정부수립부터 오늘까지/연표로 본 대한민국 50년

    ◎36년만의 주권 회복… 6·25 상흔 딛고 산업화 대장정/시련속에 꽃피운 민주화운동… ‘문민시대’ 열며 개혁의 길로 ▷48년 정부수립 과정◁ ◇정치 ▲1월8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방한 ▲5월10일 남한 총선거 실시 ▲5월31일 제헌국회 개원 ▲6월10일 국회의장에 이승만 박사 선출 ▲7월17일 제헌절 제정 ▲7월20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통령 이시영 선출 ◇사회·문화 ▲1월7일 의무교육제 실시 ▲4월3일 제주도 무장폭동 ▷제1공화국◁ ◆정치 ▲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미군정폐지 ▲ 〃 9월13일 행정권의 한국 정부 완전이양 ▲ 〃 11월30일 국군조직법 공포 ▲ 〃 12월9일 유엔총회에서 한국 승인 ▲50년 6월25일 6·25동란 발발 ◇경제 ▲50년 12월10일 한·미 경제원조협정 조인 ▲55년 8월8월 증권시장 개장 ◇사회·문화 ▲48년 10월20일 여수·순천 반란사건 ▲50년 6월1일 6년제 의무교육 실시 ◇체육 ▲50년 4월12일 한국,보스톤 마라톤대회 제패 ▷제2공화국◁ ◇정치 ▲60년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실시 ▲ 〃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성명 ▲ 〃 4월28일 과도정부 구성 ▲ 〃 8월12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 의원 선출 ▲ 〃 8월19일 초대 총리에 장면 의원 ▷제3공화국◁ ◇정치 ▲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 설치 ▲ 〃 5월20일 장도영 중장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 출범 ▲62년 4월24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대통령권한대행 ▲62년 12월26일 헌법개정(대통령책임제) ▲63년 12월7일 제3공화국 출범(박정희 대통령 취임) ▲70년 12월23일 정부종합청사 준공 ▲72년 10월17일 박대통령,국회해산 및 계엄선포 ▲ 〃 12월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첫 대의원 선거 ▲ 〃 12월27일 유신헌법 공포 ▲74년 1월8일 긴급조치 1·2·3호 선포 ▲ 〃 1월15일 고위공직자 숙정 ▲ 〃 8월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경제 ▲62년 1월5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66년 1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회·문화 ▲68년 11월29일 서울시내 전차철거 ▲ 〃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72년 4월10일 문교부,지명의 로마식 표기공표 ◇통일·외교 ▲65년 1월8일 월남파병 결정 ▲68년 1월23일 미 푸에블로호 북한에 피납 ▲68년 11월2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출현 ▲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71년 3월27일 첫 미군 철수 ▲ 〃 9월20일 남북적십자사 이산가족찾기 첫 예비회담 개최(판문점) ▲ 〃 12월27일 국가보안법 국회 통과 ▲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 〃 8월30일 남북적,본회담 평양서 개막 ▲74년 1월30일 한·일 대륙붕협정 체결 ▲ 〃 8월15일 서울지하철 개통 ▷제4공화국◁ ◇정치·행정 ▲75년 2월1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찬성률 73.11%) ▲79년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 ▲ 〃 1월6일 최규하 대통령 취임 ◇사회·문화 ▲75년 6월30일 예비군 창설 ▲ 〃 9월2일 학도호국단 발단식 ▲ 〃 9월22일 민방위대 발대식 ▲76년 4월30일 매월 말일을 반상회로 지정 ▲ 〃 8월1일 양정모 몬트리올 올림픽 첫 금메달 획득 ▲77년 9월15일 한국등반대 에베레스트 정복 ▲78년 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 〃 4월21일 대한항공기 소련 무르만스크강제착륙 ▲ 〃 10월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경제 ▲76년 6월18일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77년 6월19일 국내 최초 고리원자력1호 발전기 점화 ▲ 〃 7월1일 부가가치세 실시 ◇통일 외교 ▲75년 4월29일 주월 한국대사관 철수 ▲76년 8월18일 북한군 판문점에서 집단도끼만행 사건 ▲77년 11월7일 한미연합사 사령부 발족 ▷제5공화국◁ ◇정치·행정 ▲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 〃 7월9일 2급이상 고위공무원 232명 숙정 ▲ 〃 7월15일 3급이하 공무원 4천760명 숙정 ▲ 〃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 하야 ▲ 〃 8월27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대통령당선 ▲83년 1월1일 공직자 윤리법 발효 ▲ 〃 7월13일 입법예고제 첫 실시 ▲ 〃 10월8일 아웅산 테러 서석준 부총리 등 고위공직자 17명 사망 ▲87년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대표,대통령직선제 선언 ◇경제 ▲80년 11월8일 경제활성화대책 발표 ▲81년 8월21일 제5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85년 7월4일 제6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사회·문화 ▲80년 7월30일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발표 ▲ 〃 8월2일 컬러TV 시판 ▲ 〃 11월1일 사회정화위원회 발족 ▲81년 9월30일 서울올림픽 개최확정 ▲82년 1월5일 야간통금 해제 ▲83년 3월2일 중고생 복장자율화 ▲ 〃 6월30일 KBS 이산가족찾기운동 ▲ 〃 9월1일 KAL기 격추 ▲86년 1월13일 대입논술고사 첫 실시 ▲88년 2월15일 예술의 전당 개관 ◇통일·외교 ▲84년 2월1일 팀스피리트 훈련개시 ▲85년 7월23일 남북 국회회담 첫 예비접촉 ▲ 〃 9월20일 남북고향방문단 서울·평양에 도착 ▲86년 1월20일 북한,남북회담 일방연기 ▲87년 11월29일 북한,KAL기 추락 ▷제6공화국◁ ◇정치·행정 ▲88년 9월17일 제24회 서울하계 올림픽 개최 ▲ 〃 11월23일 전두환 대통령 재산헌납 발표 ◇경제 ▲91년 11월12일 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 발표 ◇사회·문화 ▲89년 1월1일 해외여행제한연령 완전철폐 ◇통일·외교 ▲90년 6월5일 한소 정상회담(샌프란시스코) ▲ 〃 9월4일 남북 첫 총리회담 개최(서울) ▲ 〃 10월16일 2차 남북총리회담(평양)▲ 〃 9월18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91년 12월18일 노태우 대통령 한반도 비핵화선언 ▲ 〃 12월31일 남북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92년 한중 수교합의 발표 ▷문민정부◁ ◇정치·행정 ▲93년 2월27일 김영삼 대통령 재산공개,국무위원 등의 재산공개 당부 ▲ 〃 8월9일 정부 공직자윤리위 가동 ▲95년 12월3일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5일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97년 12월18일 15대 대통령선거,김대중 후보 당선 ◇경제 ▲93년 5월26일 신경제 5개년 계획발표 ▲ 〃 8월20일 경부고속도로 차종 TGV 확정 ▲ 〃 12월13일 쌀시장개방 합의 ▲94년 5월16일 금융실명제 실시 ▲96년 12월1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 ▲97년 12월3일 IMF자금 요청으로 ‘IMF시대’ 도래 ◇사회·문화 ▲93년 4월6일 종합유선방송 허가 발표 ▲ 〃 8월20일 제1차 대학수학 능력시험 실시 ▲94년 1월6일 대입 본고사 14년만에 부활 ▲ 〃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 ▲96년 5월31일 한·일 2002년 월드컵공동개최 결정 ◇통일·외교 ▲94년 7월2일 남북정상회담실무절차 합의 ▲95년 6월29일 대북 경수로지원 합의 ▲97년 8월19일 대북경수로 부지공사 착공
  • 경선불과서 대선후보 되기까지·이인제씨 정치역정

    ◎3월24일­신한국내 첫 경선출마 선언/5월∼7월­TV토론회뒤 지지도 급상승/9월13일­경선결과 불복 독자출마 선언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는 지난 3월24일 신한국당에서 처음으로 경선출마를 선언했다.당시 이인제 후보는 일간지 여론조사 대상에서 제외될 정도로 푸대접을 받았다.하지만 출마선언 직후 지지도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탔다.출마선언전 2∼3%에서 4월초 8.9%로 올랐다.언론사들의 앞다툰 TV토론회는 지지도를 급상승시켰다.5월 중순 MBC토론회 직후 13%,KBS토론회 직후인 6월 20일 조사에는 22%대로 껑충 뛰어 올랐다.7월초에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제외시킨 조사에서 당내 경선후보 6명 가운데 최고인 36%를 기록했다. 7월21일 실시된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2차투표에 올랐으나 6천920표 대 4천622표로 고배를 마셨다.경선직후 이후보는 “경기도정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그러나 두 아들의 병역면제시비에 휘말린 이회창 후보의 지지도가 급락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최측근을 중심으로 독자출마가 준비됐다.신한국당 비주류 일각에서 제기된 후보교체론도 독자출마를 부추켰다.9월 8일 도지사직 사퇴의사를 밝힌 이후보는 출마와 출마포기 사이를 오갔다.김영삼 대통령 등 여권 수뇌부의 집요한 만류와 경선불복의 비난여론이 거셌기 때문이다. 고심끝에 9월 13일 독자출마를 선언한다.그러나 여론의 반응은 냉담했고 지지도도 떨어졌다.세력화도 미흡해 신한국당 원외위원장 13명만이 그를 따랐다.10월 13일 장을병의원이 가세,원내의석이 확보되면서 창당준비를 가속화시켰다.10월 14일 창당준비위원회 결성대회를 거쳐 31개 지구당 창당을 마치고 대선의 대장정에 올랐다. □이인제씨 정치역정 ▲48년=충남 논산 출생 ▲68년=경복고 졸업 ▲72년=서울 법대 졸업 ▲81∼83년=대전지법 판사(사시 21회) ▲88년=13대 국회의원 당선(통일민주당 안양갑) ▲92년=14대 국회의원 당선(민자당) ▲93년=노동부 장관 ▲95∼97년=경기도지사 ▲97년 3월24일=신한국당 경선출마 선언 ▲7월21일=경선 결선투표서 이회창 후보에 6천920표 대 4천622표로 낙선. ▲8월27일=김영삼 대통령 청와대 오찬회동서 독자출마 만류 ▲9월8일=경기도지사직 사퇴의사 표명 ▲9월13일=대선 독자출마선언 및 신한국당 탈당 ▲9월18일=경기도지사직 사퇴 ▲10월7일=신당 창당발기인대회(부산) ▲10월13일=무소속 장을병 의원 입당 ▲10월14일=가칭 국민신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대회(대구) ▲10월28일=신한국당 이만섭 고문 탈당 ▲10월30일=신한국당 김운환 한이헌 의원 입당 ▲11월3일=신한국당 박범진 이용삼 김학원 원유철 의원 입당 ▲11월4일=중앙당 창당 및 전당대회서 대선후보로 선출
  • “우리시대의 큰별 잃었다”/테레사 수녀 영면 지구촌표정

    ◎세계지도자들 잇달아 추모 메시지/모국 알바니아 ‘국가 애도의날’ 선포/인 ‘사랑의 선교회’엔 빗속 추도행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동의어가 돼버린 테레사 수녀,‘영원한 빈민들의 어머니’의 죽음은 순식간에 전세계를 비탄에 빠뜨렸다.그러나 비탄에 빠진 한편으로는 그녀가 보여준 ‘지칠줄 모르는 인류에의 봉사’라는 숭고한 정신을 잇자는 추모행렬이 세계 곳곳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테레사 수녀에 대한 찬사를 보내면서 애도와 경의를 표하는데 입을 모았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은 그녀의 죽음으로 “세계가 사랑과 열정,빛을 잃었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당대에 가장 위대한 사람 가운데 한명을 잃었다”고 아쉬워했다.클린턴 대통령은 휴가지에서 낸 성명을 통해 “그녀는 가난하고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줬고 우리 모두에게 영감과 자극이 됐다”고 애도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도 그녀의 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영감으로 작용할 것이라며경의를 표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의 사망소식을 듣는 즉시 그녀를 위해 기도를 올렸으며 6일 로마 외곽 교황의 하계 별장지인 카스텔 곤돌포에서 그녀를 추모하는 미사를 올릴 계획이라고 교황청 대변인이 밝혔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사랑의 선교회 활동을 편 인도에서는 6일 동이 트기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궂은 비를 무릅쓰고 ‘사랑의 선교회’ 본부 앞에 모여들어 눈물을 흘렸다.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으로 앞으로의 삶은 이제까지와 달라질 것이다.우리는 그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그녀와 같은 도움을 주는 사람을 다시는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데르 쿠마르 구즈랄 인도총리는 “그녀의 죽음으로 세계는 가장 큰 것을 잃었다”고 말하고 “그녀의 일생은 세계가 기피했던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기쁨을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애도했다. ▲인도 국민회의당의 시타람 케스리 당수는 “인도뿐 아니라 전세계가 돌이킬수 없는 손실을 입었다”고 말했다.인도의 바라티야 자나타당도 그녀의 죽음으로 위대한정신을 잃었으며 반세기 동안 그녀가 선교사로 활동했던 인도는 특히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렉스헤프 메이다니 알바니아대통령은 “테레사 수녀는 위대한 알바니아인으로 그녀의 죽음은 전국민을 슬프게 했다”고 말했으며 파토스 나노 총리도 “국민들은 위대한 어머니를 잃었다”면서 “그녀의 이름과 숭고한 사랑이 이 나라를 화합으로 이끌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티라나·캘커타 외신 종합〉 □테레사 수녀 연보 ▲1910년:본명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8월27일 마케도니아의 스코폐에서 알바니아 출신 건축업자의 세자녀중 막내로 출생. ▲28년:로레토 수도회의 수련수녀가 돼 테레사로 명명됨. ▲37년:수녀로 최종서원(서원). ▲46년:“가난한 사람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섬기라”는 계시 받음. ▲50년:‘사랑의 선교회’ 설립. ▲52년:죽어가는 사람들이 머물 안식처 니르말 히리데이(순수한 마음) 설립.다음해 고아원 설립. ▲62년:파드마 슈리상 수상.상금으로 수십개의 새 안식처 건립. ▲79년:노벨평화상수상. ▲83년:교황 알현중 심장발작. ▲97년3월:‘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 교과서 미술품 한자리에/25일∼새달 27일 예술의 전당서

    ◎초·중·고 교과에 실린 한국 근현대 작품 80점 전시/각학교 학생 대표작 100점·교과서 역사전도 열려 학생들이 교과서에서만 보던 그림들을 직접 찾아가 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가 열린다. 예술의전당은 방학을 맞아 오는 25일부터 8월27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미술관 제1전시실에서 ‘교과서미술전’을 개최한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한국 근현대 미술품중 교육적 효과가 높은 80여점을 골라 한 자리에서 보여주는 기획전으로 학생들이 그동안 책에서만 대해오던 작품들을 전시장에서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가 된다. 예술의전당측은 “최근 미술감상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시장을 찾는 학생들이 늘고 있지만 평소 미술감상 훈련이 되지않은 학생들이 그림에 대한 낯섬과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 전시를 마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미술감상의 교육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미술품 감상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의 차이를 구분,‘사실적인 눈으로 표현한 미술’‘마음의 눈으로 표현한 미술’‘지적인 눈으로 표현한 미술’ 등 3개 공간으로 나누어 꾸며진다.즉 교과서에서 단지 암기식으로 알게된 사실주의 추상주의 등의 용어를 전시현장에서 작품을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꾸민다는게 전당측의 설명이다. 현재 초·중·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미술교과서는 모두 47권.이들 교과서에 실린 한국작가의 작품수는 1천여점에 달한다.이번 전시에는 그중 유화 28명,판화 11명,수채화 2명,한국화 21명,조각 18명 기타 1명 등 81명의 작품이 나온다.인상파를 한국적 자연으로 승화시킨 오지호,한국 추상미술을 개척한 유영국,채색화의 새로운 경지를 연 천경자,한국 문자추상을 구축한 남관,하모니즘의 김흥수,어린아이 눈을 통해 소박한 미술세계를 구축한 장욱진,분방한 필치로 한국적 삶을 그려낸 김기창,물방울 작가 김창렬,우주적 신비를 색채추상으로 표현한 하인두 등 우리 근현대 미술사를 장식해온 대표적인 원로에서부터 중견·신진 작가들이 포함돼 있다. 전시기간중 전국 초등학교에서 추천된 학생 작품 100여점을 전시하는 ‘미술교사가 추천하는 각 학교 대표학생 작품전’과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미술교과서의 변천을 집약한 ‘교과서 역사전’이 함께 열리고 매일 낮12시에는 특별강연회가 마련되며 전시장에서는 미술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한 ‘갤러리 토크’도 펼쳐진다.
  • 교개위 「괴외 및 사교육비 경감방안 공청회」 지상중계

    ◎“학교교육 정상화 전제 전면허용 바람직”/대입제도 다양화·대학 특성화 지속 추진/「자율」 「경쟁」의 논리 도입… 공교육 활성화를/초등생엔 과외허용·현체제 유지 주장도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회(위원장 김종서)가 26일 하오 교개위 대강의실에서 개최한 「과외 및 사교육비 경감 방안 공청회」에서 학교교육 정상화 및 대입제도 개선이라는 전제가 달성된다면 과외를 전면 허용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윤건영 연세대교수=과외금지는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과외교육시장의 특성에 비춰볼 때 실효성이 낮다.현행 체제보다는 현실적으로 과외를 자율화하는 방안이 더 설득력이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학교가 교육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학교교육이 교육수요를 적절하게 충족시켜 주지못한 채 부실화됨에 따라 과외문제가 심화됐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과외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학교교육을 내실화하는 한편 과외시장이 맡고 있는 교육영역을 학교가 저비용·고효율로 대신 담당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학입학제도를 다양화하고 대학을 특성화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오성숙 참교육학부모회 회장=일단 전면금지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너무 많은 폐단을 재현할 것으로 보인다.현행 제도유지도 현재 초등학생의 영어과외 문제 등 법과 현실사이에 괴리를 보이는 부분을 과감히 고쳐면 된다. 따라서 과외 전면허용이 최선의 대안으로 생각되지만 아직 시기상조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과외허용은 「값싼 과외」를 보장하기 보다 과외확산에 불을 지피는 꼴이 된다. 더욱이 「학력 지상주의」 풍토와 학부모의 왜곡된 교육의식은 사교육비를 더욱 부풀릴 위험이 크다.교육부는 오히려 학부모를 위한 전담부서와 교육강좌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과외허용에 앞서 교육환경개선 등 학교교육의 신뢰회복을 위한 청사진이 「예산지원」과 함께 제시돼야 한다. ▲송태회 한국소비자보호원 조사연구국장=과외공급자인 학원 및 개인은 모두 등록,교외교습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물론 과외교습의 질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이 보완되어야 한다. 초등학생의 과외금지는 현실적으로 단속의 실효성도 거두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율화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 다만 과외 자율화를 위해서는 학교교육의 정상화와 대입전형방식의 올바른 정착방안이 선행돼야 한다.학교교육의 정상화는 학급당 정원축소,교사의 처우개선,교육투자 증대는 물론 각종 규제를 과감히 제거하고 교육계의 관료화 성향도 타파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또 학교의 특성을 살리고 학교내 및 학교간의 경쟁체제,학교수업및 교사 질의 평가 등 같은 제도도 도입해야 한다. 대학별 특성화를 위해 다양한 대입전형방법 개선도 계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과외시장만 완전 자율화되면 가계부담은 더 커지고 나아가 학교교육의 정상화도 더 지연될 수 밖에 없다. ▲이주호 한국개발연구원 부연구위원=과외 전면금지는 엄청난 수요를 흡수하는 「블랙마켓」이 형성돼 비밀·고액과외가 성행,소비자의 피해와 부작용만 가중될 것이다.과외를 허용하고 정당한 과세를 하겠다는 교개위안이 바람직하다고생각된다. 전면허용될 경우,과외가격은 떨어지나 공급이 늘면서 과외를 받지않던 학생까지 과외시장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크다.때문에 공교육이 설 땅이 없어지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지만 공교육에 「자율」과 「경쟁」의 논리를 도입하면 풀어나갈수 있다. 현재 공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의 질과 상관없이 학교는 평등한 재정지원을 받고 있으며 교사도 능력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같은 월급을 받는다는 점이다. 정부는 학생에게 평준화 정책을 유지하는 범위내에서 학교 선택권을 부여하고,학교와 교사에게는 자율권을 주는 동시에 경쟁원리를 도입해 잘하고 열심히 하는 학교와 교사에게 재정적인 차등지원이나 승진기회 등을 부여하면 자연히 공교육이 활성화될 것이다. ▲윤동균 경복고교사=과외 전면금지는 자유민주사회에서 헌법상 보장된 교육받을 권리를 제한해 정당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또 초등학생 정규 교과의 과외를 금지한 현행 체제의 경우 단속의 손길 뒤에서 초등학생 대부분이 과외를 하는 등 범법자만 양성하는 상황을 야기했다.물론 과외가 전면 허용되면 학원간의 치열한 경쟁과 일반인들까지 대거 과외시장에 가세,공교육의 입지를 전면 흔들수 있다.하지만 공교육 기관의 질을 높이고 입시제도도 정상적으로 학교교육을 받은 학생에게 유리하도록 방향을 잡는 정책이 병행된다면 학생들을 과외보다는 학교로 끌어들일수 있다고 본다. 방과후에 남는 교실을 활용,교사자격이 있는 학부형이나 외부강사를 초빙해 학생들이 싼값에 과외를 받을수 있도록 교내과외를 허용하는 것도 한 보안책이다. ▲김제완 한국학원총연합회 정책실장=전면 허용,자율성을 확대한다는 안에 공감한다.그러나 개인 과외까지 전면 허용할 경우,과외교사가 우후죽순처럼 불어나 학원시장이 크게 잠식당할 위험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현행체제를 유지하되 현재 불법과외를 조장하고 있는 초등학생의 정규교과 과목에 대한 과외금지를 풀어주는게 바람직하다. □과외교습 관련 조치 경과 ▲80년 7월29일 이전=방임기. ▲80년 7월30일=「교육 개혁조치」 단행해 과외 전면금지,보충수업 폐지. ▲80년 8월7일=과외 단속지침 시행해 일체의 과외수업 금지,졸업생에 한해 사설학원 수강 허용. ▲80년 8월27일=학교내 예·체능 집단 실기지도 허용. ▲81년 4월13일=과외교습의 제한.학습지·고사지·녹화테이프 판매금지. ▲81년 7월14일=예·체능계,기술,기능계,웅변,꽃꽂이에 한해 재학생 학원수강 허용.어학계,고시계 인가학원 대학생 수강 허용. ▲83년 8월12일=학습부진 학생(하위 5%) 보충수업 허용. ▲84년 1월6일=고교 3년 겨울방학중 사설 외국어학원 수강 허용. ▲84년 4월10일=초·중·고교생에 대해 일정 기간 학원 수강 허용. ▲89년 6월16일=대학생의 초·중등 학생에 대한 과외 교습 허용. ▲89년 6월22일=초·중·고교생의 여름 방학기간중 학원수강 허용. ▲89년 11월9일=초·중·고교생의 겨울방학중 학원수강 허용. ▲91년 7월22일=초·중·고교생의 학기중 학원수강 허용. ▲95년 8월4일=대학원생의 초·중등 학생에 대한 과외교습 허용.
  • 평양방송 등 북 매체 「한총련 선동」 실태

    ◎북 “한총련 조직·간부 보호” 시달/연대시위 진압 「제2 동족살육」 호도/「김부자 교육」보다 대남혁명 부추겨 최근 북한은 노동신문과 평양방송 등 매체를 통해 「한총련」의 연세대 점거농성 진압을 「제2의 동족 살육전」으로 비난하면서 「한총련」 조직사수와 간부보호 등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12일 공안당국이 밝힌 북한의 대남 선전선동 내용을 간추린다. ◇선전선동 양태=「한총련」 사태 이후 대남 비난방송의 비중이 23%에서 36%로 늘었고 규탄집회·성명·담화·공개서한 등 다양한 형태로 선전선동을 하고 있다. 김일성종합대·김책공대·김형직사대 등 4개 대학과 평양·사리원·개성 등 시·도별로 규탄집회를 열었고 「인권연구협회」 서기장 명의로 유엔인권고등판무관 앞으로 공개서한을 보냈다. ◇행동지침 하달=「민민전」방송은 『백만학도는 「한총련」을 끝까지 사수하고 간부들을 보호하며 간고하고 전투적인 조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8월21일자)는 등 행동지침을 하달했다.8월27일자 방송에서는 『특수조직 성원들은 적 기관에 잠복,비노출·비밀활동 보장,적들의 신임획득 등 합법적 지위를 공고히 하면서 투쟁을 승리적으로 전개하라』고 촉구했다. ◇군·노동계 연대투쟁 선동=각계각층을 대상으로 「한총련」의 투쟁을 「의로운 투쟁」「애국적 장거」 등으로 옹호했다. 군인·노동자들에게 청년학생의 투쟁에 동참하고 수배학생에게 편의를 제공하도록 촉구하는가 하면 언론·법조·정계 인사들도 당국의 학생탄압을 규탄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대남혁명이론 방송증가=평양방송의 「김일성 방송대학」과 「민민전」 방송의 「김일성 혁명사상·주체사상 강좌」 교육내용이 대남 혁명전술 위주로 바뀌고 있다. 종전에는 김부자의 우상화에 치중(83%)했으나 최근 「한국사회 변혁운동」 등의 내용이 13%에서 40%로 늘었다. ◇국제사회에 왜곡보도=대외용인 중앙통신을 이용,당국의 「한총련」 시위 진압과정 등을 집중 보도하면서 우리의 인권실상을 왜곡하고 있다. 유엔인권고등판무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남조선의 인권유린 사태를 국제적으로 규탄하며 구속학생 즉시 석방과 학생탄압 무조건 중지를 위해 노력해줄 것』을 요구했다. 해외 친북단체 및 해외공관에 「한총련 탄압진상 조사위」의 파견을 요청하고 국제적인 압력 행사를 호소하고 있다.
  • 도로 장애물로 윤화 지자체에 50% 손배/서울고법 판결

    서울고법 민사1부(재판장 김동건 부장판사)는 13일 올림픽대로 한 가운데에 방치된 타이어를 피하려다 사고를 당한 최모씨 가족이 서울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서울시에 50%의 책임이 있는만큼 최씨측에 2천5백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관리인원이 부족해 완벽한 순찰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고속으로 차량이 달리는 도로는 도로상황을 점검하는 정기 순찰이 필요함에 비추어 순찰체제를 허술히 한 서울시의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하지만 최씨도 제대로 전방을 주시했더라면 쉽게 타이어를 발견,사고를 피할 수 있었던만큼 50%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지난 93년 8월27일 자정 쯤 서울 올림픽대로 동작대교 부근에서 화물차 타이어를 미처 발견치 못해 도로변의 가드레일과 충돌,부상당하자 서울시를 상대로 소송을 냈었다.〈박상렬 기자〉
  • 「12·12」이후 정권찬탈행위 규명/4차 공판 쟁점

    ◎국보위 설치 “내란의 과정”­“합법” 공방/최 대통령 하야 신군부 강압여부 초점 5·17 및 5·18 사건이 내란인지 여부를 가리는 4차 공판도 검찰과 피고인간의 뜨거운 공방 속에서 진행됐다. 검찰은 12·12사건 이후 「시국수습방안」 작성에서부터 81년 1월24일의 비상계엄 해제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 신군부측의 정권찬탈을 위한 내란 행위라는 점을 추궁했다. 피고인들은 『불안한 정국과 안보 상황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행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일관되게 부인했다.변호인들도 『당시 조치는 최규하대통령이 행한 국정행위로,내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추궁에는 『모른다』 『아니다』라는 답변으로 일관했다.검찰의 추궁 내용을 간추린다. ▷K공작계획◁ 80년 2월 보안사 정보처에 설치된 언론대책반에서 언론계를 통제,집권기반을 다지기 위해 마련한 안.이를 통해 기성 정치인들의 경쟁을 왜곡하고 최대통령 정부의 허약성을 강조했다. ▷시국수습◁ 방안 전두환·노태우 피고인 등 신군부측의 내란 혐의를 입증하는데가장 핵심적인 쟁점이다.80년 5월 전피고인의 지시로 이른바 「보안사 3인방」인 허화평·허삼수·이학봉 피고인 등 3명이 ▲계엄확대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비상기구 설치 ▲국회해산 등을 골자로 작성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신군부가 취한 첫 조치.검찰은 이를 내란의 시발점으로 본다.비상계엄 전국확대는 80년 5월17일 상오 11시 국방부에서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이 주재한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일부 참석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의됐다. ▷국무회의장에 병력배치◁ 비상계엄 전국 확대안의 의결을 위해 열린 임시 국무회의장 주변에 수경사령관인 노피고인이 30경비단 병력 3백42명과 장갑차 4대를 배치,출입자를 통제했다.회의장 계단과 복도에도 무장한 병력을 1∼2m 간격으로 세워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주요인사연행◁ 새로운 정치판을 짜기 위한 조치였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수경사의 헌병단 병력을 동원해 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 김대중씨와 공화당 총재 김종필씨 등 정계인사를 체포,정치활동을중지시켰다. ▷국보위 설치◁ 80년 5월19일 전피고인이 최대통령에게 비상기구 설치를 건의해 5월27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설치한 기구이다.행정부를 통제하며 국정을 수행하는 혁명평의회 성격의 비상 권력기구로,대통령을 무력화시킨 내란의 주요 과정이라는 것이 검찰의 해석이다.피고인측은 대통령의 재가 등 합법적인 절차를 거친 기구라고 반박한다. ▷최대통령 하야◁ 80년 8월16일 최대통령의 하야과정에서 신군부측의 강압이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이다.그해 7월 전피고인이 『최대통령이 나에게 대통령직을 맡아달라고 했다』고 노피고인에게 말한 것을 계기로 최대통령의 하야가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졌다.전피고인은 8월27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9월1일 취임했다. ▷언론 통폐합◁ 80년 10월 초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씨 등에 의해 작성된 통폐합안에 따라 언론사 사주들을 보안사로 불러 강제로 포기각서를 받았다. 이밖에 국회해산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신당창당 추진 등도 내란 혐의를 따지는 쟁점이다.〈박홍기 기자〉
  • 광주사태 당시 미 국무부­주한 대사관 통화내용

    ◎글라이스틴 대사 “군부 합법계통 무시… 곧 결정적 사태/몬조 부대사 “위컴사령관 서울귀환 늦추는게 좋겠다”/카터,전씨에 “최근 사태 우려… 정치일정 준수” 친서 80년 당시 주한미대사관과 국무부 한국대책반사이에 오간 비밀전문 요약.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보고〉 ▷80년 3월12일◁ ▲가까운 장래에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최근 들어 한층 적어지고 있다.한국경제의 복잡성,한국외교의 미묘함,군부 직접통치에 대한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 등을 군장교들도 깨닫기에 이르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치 불참여에 대한 본인의 강한 언질에도 불구하고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그러나 그가 중앙정보부까지 장악하거나 다음 선거를 조종하려고 시도할 경우엔 일반대중 뿐아니라 12·12때의 동지들로부터 반대에 직면할 수 있다.군부는 견제력없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고 그 군부에서 전두환은 분명히 지켜봐야 할 인물이다.그러나 군부가 「나라를 이끌고 가고 있지」는 않다.전두환은 선거에서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막후의 실력자로 만족할 수도 있다. ▲현 정부는 예전의 능률,규율,활력 등을 상실했지만 상당히 잘 움직이고 있다.최규하 대통령은 불행히도 무기력하고 조심성이 너무 지나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하지만 최규하 정부는 생각보다 훨씬 단호하다. ▲내년초 선거를 앞두고 연말에 큰 정국혼란이 예상되는 가운데 최대통령은 아닐지라도 신현확 총리는 자신이 초당적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그 타개책의 하나로 고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5월17일◁ 제1신:▲17일 오전 청와대의 최광수 비서실장을 방문,최대통령은 다음 며칠을 이용해 아주 명확하게 정부가 할 수 있는 계엄 및 정치일정에 대한 양보를 해야한다고 강력 요청했다. ▲경찰이 이화여대에 들어와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있다는 나쁜 소식이 막 들어왔다.곧 결정적인 사태에 봉착할 것으로 우려된다. 제2신:▲군부 지도부는 한국정부의 합법적 계통을 무시하고 학생 및 정계전반에 대한 참혹한 탄압에 들어갔다. ▲청와대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대화를 나눈 1시간뒤 폭동진압경찰의 이화여대 진입을 미국인 목격자를 통해 알았으며 청와대,경찰,중앙정보부 등에 1시간동안 수소문한 끝에 캠퍼스난입건과 함께 전국비상계엄 확대조치도 알게 됐다. ▲우리는 이같은 결정에 대해 전혀 사전통고를 받지「않았다」.우리의 정보을 엉성하나마 종합하건대 이 결정은 이날 오전의 전군지휘관회의에서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 사태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인 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부정적이다.그리고 좌절감을 느낀다.우리에겐 기정사실만이 내던져진 것이며 이로 보아 군부지도자들은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할 경우의 결과에 대해 전혀 무지하거나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 이 단계에선 우리의 영향력이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과 관련한 존 몬조 주한미부대사 보고〉 ▷8월14일◁ ▲다양한 채널의 보고에 따르면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전두환이 21일쯤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는 정보가 확실하다.(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절차가 기술적으로 헌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미국이 한국문제에 대한 대응을 하는데 있어 고려해야할 사항은 첫째는 앞으로 상당기간 전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이고 다음은 미국이 전의 집권에 있어서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전이 「합법적」으로 선출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그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최소한의 정상적 예우」(minimum normal courtesies)로 대하여야 할 것이다. ▲위컴 장군의 서울 귀환을 늦추도록 요청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생각한다.만일 최대통령의 사임발표 이전에 그가 돌아온다면 마치 그가 (전의) 취임에 대한 미국의 최종적 축복과 승인을 갖고 오는 것으로 해석될수 있을 것이다. 〈카터 미대통령의 전 대통령당선자에 대한 첫친서〉 ▷8월27일◁ ▲본인은 한국에서의 최근 사태들이 우리를 대단히 어렵게 했다는 사실을 귀하가 알기를 바란다.우리는 최 전 대통령에 의해 약속됐던 빠른 시일내 신헌법의 국민투표 회부와 그 헌법에 따른 내년초까지의 대선 실시에 대한 귀하의 재확인에 주목한다. ▲본인은 귀하가 직면한 문제들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귀하가 국민적 지지를 받는 정치제도의 개발과 국민들에게 보다 큰 개인적 자유 부여를 통하여 정부의 안정을 지킬수 있는 신속하고도 가능한 행동을 취해줄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워싱턴=라윤도·김재영 특파원〉
  • 「5·18」 3의원 구속영장 요지

    ▷정호용◁ 피의자는 전두환·노태우·유학성·황영시·차규헌·주영복·이희성·허삼수·허화평·이학봉 등과 순차 공모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해 계엄해제 요구권 행사를 봉쇄한 상태에서 입법·사법·행정을 통제하는 초 헌법적 비상기구를 설치,국정을 장악해 집권하고 나아가 그 기반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80년 5월초 전두환 등과 함께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한 다음 5월17일 하오 9시 42분쯤 무장병력이 배치된 가운데 비상국무회의에서 계엄법상의 요건에 위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의결시켜 이날 자정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음.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시위가 발생하자 피의자 등의 정국장악에 상당한 장애요소로 판단,언론보도를 통제하면서 공수부대를 광주로 투입,강력히 진압하고 광주 시위대를 무장폭도로 규정,계엄군으로 하여금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자위권발동이라는 명목으로 실탄을 분배해 발포케 하고 광주 재진입작전인 상무 충정작전을 실시해 광주 시민인 이정연 등을 살해했음.5월27일 국보위를 발족시켜 31일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취임한 다음,공직자 숙정,언론통폐합,언론인 해직 등 각종 정책을 수립·시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국보위 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각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해 헌법기관인 행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그 권능행사를 불능케 했음. 계엄하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돼 81년 1월23일 김대중의 사형이 확정되자 동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그 다음날인 24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등 피의자는 중요임무 종사자로서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내란함과 동시에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고,광주 시민들을 살해한 자로서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음. ▷허삼수·허화평◁ 피의자는 전두환·노태우·유학성·황영시·차규헌·주영복·이희성·이학봉 등과 순차 공모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해 계엄해제 요구권 행사를 봉쇄한 상태에서 입법·사법·행정을 통제하는 초헌법적 비상기구를 설치,국정을 장악해 집권하고 나아가 그 기반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80년 5월 초 전두환 등과 함께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한 다음 5월17일 하오 9시42분쯤 무장병력이 배치된 가운데 비상국무회의에서 계엄법상의 요건에 위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의결시켜 이날 자정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음. 5월17일 하오 11시쯤 사회혼란 조성 및 학생·노동계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로 김대중 등을,권력형 부정축재라는 불분명한 혐의로 김종필 등을 각각 체포하고 18일 무장병력으로 하여금 국회의사당을 점거,8월30일까지 국회의원 등의 출입을 통제하게 해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했음. 5월27일 국보위를 발족시켜 31일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취임한 다음,공직자 숙정,언론통폐합,언론인 해직 등 각종 정책을 수립·시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국보위 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해 헌법기관인 행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그 권능행사를 불능케하고 7월 중순 국보위 법사분과위원들을 동원해 개헌안 시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전두환·노태우·이학봉 등과 함께 간선제 대통령 선출안 등을 결정하고 피의자 등이 운영하는 국보위 상임위원회가 국정을 장악하고 대통령과 행정 각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대통령으로서의 권한 행사에 한계를 느낀 최규하전대통령이 8월16일 하야하자 18일 서울과 제주를 필두로 잇달아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 안보보고회의에서 새 대통령 후보로 전두환장군을 추대토록 하는 한편 8월21일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서도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의하고 8월27일 전두환이 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9월1일 취임했음. 집권에 이르는 과정에서 취한 조치들을 헌법에 반영하거나 완결하고 언론을 순화시키며 신당을 창당해 정계를 개편하는 등 향후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계엄상황을 계속 유지하면서 9월 20일 피의자 등의 의견이 반영된 제 5공화국 헌법개정안을 마련,29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고,10월22일 국민투표로확정된 헌법개정안을 27일 공포하고,제10대 국회를 해산시키면서 국가보위 입법회의로 하여금 81년 4월10일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게 하고 80년 6월20일부터 신당 창당을 추진하여 특정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한편 정보·수사기관 관계자들의 주도하에 민주정의당을 창당했음. 계엄하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돼 81년 1월23일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김대중의 사형이 확정되자 동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그 다음날인 24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등으로 피의자는 중요임무 종사자로서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내란함과 동시에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자로서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음.
  • 6·25와 단동시(압록강 2천리:22)

    ◎폭격에 끊긴 신의주행 철교는 관광명소로/전쟁발발 2개월 뒤부터 미군기 공습피해/중국지원군으로 참전… 눌러앉은 한인 많아/저목장에 화재잦아 일명 “화도”… 한국전으로 “이름값” 압록강 우안에 자리한 요령성 단동시는 중국에서 제일 큰 인구 70만의 변경도시다.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장장 7백90㎞를 흘러 내려온 압록강을 바라보면서 금강산을 등지고 있다.단동시는 이름 그대로 「붉은 동방」이라는 뜻을 지녔거니와 중국 변경의 사회주의 혁명화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당나라 때 안동도호부관할지역이었다는 점과 연관시켜 1965년까지는 안동으로 불렀다. 단동에서 압록강 건너를 바라보면 북한땅 신의주다.「모진 사람 곁에 있다 벼락 맞는다」는 속담처럼 신의주를 가까이 한 탓에 한국전쟁 당시 피해도 꽤 입었다. 예부터 저목장에 불이 자주 나 「불의 도시」(화도)라고도 했는데 특히 한국전쟁 때 그 이름이 적중한 셈이다.그리고 19 50년이 저물면서 한국전쟁에 참가한 중국의 입장에서는 최전방도시여서 「영웅도시」라는 칭호도 가지고있다. ○30년전 지명은 안동 단동은 어떻든 간에 한국전쟁에 피해를 입어 그 전쟁의 흔적이 아직도 멀리 보였다.당시의 안동∼신의주를 잇는 철교가 신의주쪽으로 절반은 교각만 앙상하게 남게 된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다.단동시에서 펴낸 「단동시정」을 보면 한국전쟁에서 입은 피해기록이 나온다.「1950년 9월22일 미군 비행기 1백여대가 신의주를 폭격,압록강대교를 끊었으나 안동철도분국에서 그날 밤 10시에 복구했다.그러나 1951년 2월 폭격에 너무 심한 손상을 입어 운수가 중단되었다」는 내용이다. 한국전쟁 때 미군기의 단동시 첫 폭격은 전쟁발발 2개월 뒤인 1950년 8월27일에 있었던 것으로 「단동시정」은 기록했다.이날 하오 4시40분 B­52폭격기 두대가 시내 랑두비행장 상공에 날아와 약 2분여 동안 기총소사 하는 것으로 시작된 첫 공습의 피해는 노동자 3명 사망과 19명 부상,자동차 2대 파손으로 집계되었다.또 같은해 9월22일 두번째 공습에는 B­29 중폭경기 한대가 떠서 12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이 공습으로 2명이 죽고 28채의 집이 무너졌으며 폭음으로 파손된 집도 3백여채를 헤아렸다는 것이다. 오늘 날의 단동은 평화도시다.북한의 국경도시 신의주와는 사뭇 다른 도시인 것이다.그래서 전쟁으로 끊어지고 기관포탄이 무수히 박힌 단동쪽 압록강철교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광명소가 되었다.특히 몰골사납게 교각만 앙상한 신의주쪽의 전흔은 전쟁이 남긴 교훈을 보여준다.10원씩을 주고 절반쯤 건너간 철교 위에서 한국전쟁 당시 중국 지원군 번역관으로 일했다는 김인형(69)선생을 우연히 만났다. ○요양원서 만나 화촉 그는 경북 의성 태생이었는데 전쟁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전쟁이 나면서 인차 남한 전체를 점령하는 줄 알았지.그런데 시월 잡아서 부터 조선 피란민과 군인들이 중국으로 물밀듯 들어오는기라.그해 5월 성간부학교에 들어가 다섯 달을 공부한 나는 지원군 번역관으로 일했지.통화에서 겨우내내 조선인민군과 피란민속에 묻혀 살다 보이 눈코 뜰새가 없데. 중국 변경이 전쟁에 시달리는 판이었으니 강 건너 북한땅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장백·임강·집안·관전·안동(단동)지역 맞은편 북한땅 혜산·중강·만포·삭주는 미군기폭격에 불바다를 면할 날이 없었다.임진왜란 때 의주에 통곡동이라는 동네가 하나 생겼다고 하지만 한국전쟁에서는 압록강유역 북한땅 모두가 통곡동이 되었다. 단동에 살고 있는 윤옥순(65)씨는 전쟁이 나던 해 겨울 안동의 중국지원군병원에 근무했다.함북 무순 태생으로 16살부터 동북해방군에 참전한바도 있는 그녀는 당시의 참상을 몸서리치듯 털어놓았다. 『부상병들이 들것에 실려 매일 쏟아져 들어왔지비.팔다리가 끊어지고 코가 떨어진 사람,사지가 다 날라가 덩그러니 몸뚱이만 남은 부상자들도 있었구마.몸뚱아리나마 남은 부상자들은 애기 눕히듯 보자기에 싸서 한 침대에 넷씩을 눕히기도 했슴매.새파란 나이에 죽기가 원통해 발악하는 걸 보면 불쌍해서 같이 울기도 했지비.공습경보가 울리면 부상병을 업고 방공호로 뛰어가는 일을 얼마나 했는지….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원망스럽더구마』 안동은 한국전쟁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얼떨결에 북으로 올라온 남쪽의 사람들이안동에 들어왔다가 주저앉기도 했다.북으로 가기도 싫고,그렇다고 남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이방인들이었다.단동에 머무는 동안 그런 처지의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경북 영천군 고경면이 고향인 최정순(64)씨도 그런 사람이다.지원군병원 간호원이었던 그녀는 한국군과 미군포로 부상자에게 까지 남다른 애정을 쏟은 것 같았다. 『인민군과 중국지원군 뿐 아니라 국군과 미군 부상병까지 들이닥쳤지예.인민군 부상자들은 포로들을 보면 때려 죽인다고 날뛰어 병동을 구분했십니더.미군에게는 빵과 같은 음식을 주었는데,처음에는 독이 들었는 가봐 안먹데예.그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가 먹어야 그제사 입을 댔십니더.어떤 한국군은 우리 병원에서 다리 절단수술을 했는데 수혈할데가 없다 아닙니꺼.그래서 내가 두 번이나 피를 주고 대소변도 받아내고….업고 다니며 영화도 구경시키곤 했십니더.상처가 아물어 포로수용소로 가는 날 그렇게 울더니…』 단동시 오룡배 영예군인 요양소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박명심(66)씨도 남한 출신이다.전쟁전까지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살았다.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군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2학년 때 6·25를 맞았어요.전쟁전에 이미 지하혁명조직에 가담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요.인민군에 있다가 후에 중국지원군 20병퇀 67군 정치부로 전속되어 전선으로 갔어요.선전방송 임무를 맡고 일하는데 참호에 포탄이 날아들어 그만 허리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지 뭡니까.53년 7월21일 안동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 지금까지 요양원에 살고 있습니다』 ○44년째 이산의 아픔 박씨의 남편도 두 다리를 잃은 불구자다.남편 위덕렴(65)은 한족으로 중국지원군 116사 346퇀 통신병으로 전쟁에 참가해서 큰 부상을 입었다.그가 1954년 안동요양원에 들어와서 서로 만난 이들은 이듬해 10월 결혼했다.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다.박씨는 지난 94년 서울에 편지를 해서 조카들이 다녀갔다고 무척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한국이 놀랍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이야기로 들었다면서 날보고 서울에 가보았느냐고 물었다. 단동에서 만난 또 다른 여인 전명옥(67)씨는44년째 가족소식을 모르는 이산의 아픔을 갖고 있었다.당시 북한땅이었던 강원도 화천 태생인 그녀는 집 근처 임시 인민군병원에서 간호일을 돕다가 후퇴명령이 급히 내려 2백m 밖에 안되는 집에도 못 들르고 떠나왔다.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화천이 남한땅이 되고,가족소식을 모르는 채 살고 있는 것이다.
  • 전두환 전대통령 구속영장 전문

    피의자는 55년 9월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육군 제1공수특전단장,제1사단장을 거쳐 79년 3월5일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재직중 같은 해 10월26일 소위 「10·26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계엄사령부 소속 「고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80년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80년 9월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80년 10월27일 제8차 개헌에 의해 실시된 81년 2월25일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81년 3월3일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88년 2월24일 임기 만료로 대통령직에서 퇴임하여 현재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자인 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중인 79년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유신헌법을 개정해 민주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국회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새로운 헌법질서 창출이 모색되는등 유신체제의 폐지가 기정사실화되고 군 내부에서도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에 즈음, 합수부 본부장인 피의자의 권한 남용으로 인해 정승화 계엄사령관겸 육군참모총장과 잦은 갈등을 빚는 한편 군장성 진급심사에서 피의자를 중심으로 한 소위 「하나회」 소속 군인들의 진급이 여의치 않게 될 뿐 아니라 피의자의 여러 가지 월권 등이 문제가 되어 정승화총장이 이를 이유로 인사조치할 기미를 보이자 정승화총장을 김재규내란사건 관련 혐의로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불법 연행해 제거함으로써 군의 실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육군 소장으로 제9사단장인 노태우,육군 중장으로 국방부 군수차관보인 유학성,육군 소장으로 제20사단장인 박준병,육군 준장으로 제71방위사단장인 백운택,육군 준장으로 특전사령부 제1공수여단장인 박희도,육군 준장으로 특전사 제3공수여단장인 최세창,육군 준장으로 특전사 제5공수여단장인 장기오,육군 대령으로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인 장세동,육군 대령으로 수경사 제33경비단장인 김진영,육군 대령으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인 허화평,육군 중령으로 보안사 대공처 대공2과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인 이학봉,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인사처장겸 합수부 조정통제국장인 허삼수,육군 대령으로 육본 헌병감실 범죄수사단장겸 합수부 수사2국장인 우경윤,육군 중령으로 수경사 제33헌병대장인 최석립,육군 중령으로 육본 헌병대장인 이종민,육군 준장으로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인 정동호,육군 대령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인 고명승,육군 대령으로 수경사 헌병단장인 조홍,육군 중령으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보안처장인 정도영,육군 소장으로 제30사단장인 박희모,육군 대령으로 제30사단 제90연대장인 송응섭,육군 준장으로 제1군단 제2기갑여단장인 이상규,육군 대령으로 제9사단 참모장인 구창회,육군 대령으로 제9사단 제29연대장인 이필섭,육군 중령으로 제9사단 작전참모인 안병호,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제2대대장인 서수열,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제5대대장인 박덕화,육군 중령으로 특전사 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인 박종규,육군 대령으로 보안사 정보처장인 권정달등과 공모하여, 1979년 11월 중순경부터 피의자는 상피의자 노태우및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김진영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등과 수차례 회합하여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 문제등을 논의한 끝에 같은해 12월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먼저 정승화 총장 연행에 반발하여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거사 당일 18시30분 만찬 초청 명목으로 유인하여 부대 지휘를 사전 차단하고,피의자를 비롯한 위 15명은 거사 당일 같은 시각에 보안사와 인근 수경사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정승화 총장 추종세력이 무력으로 대응할 경우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하기로 모의하고, 이에따라 피의자는 위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우경윤 등에게 지시,정승화 총장 연행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연행에 필요한 인원의 차출과 차량,권총,M16소총및 실탄을 준비하게 한후, 같은해 12월12일 18시30분경 위 계획에 따라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박준병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김진영 등은 수경사 제30경비단실에 집결,보안사에 있는 피의자및 위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과 함께 지휘부를 구성하고 위 조홍 등은 피의자 등의 지시에 따라 같은 시각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김진기 육본 헌병감 등을 연희동 요정으로 유인하여 놓은뒤, 같은날 19시경 위 허삼수 우경윤 성환옥 최석립 이종민 등은 무장한 보안사 수사관 7명과 수경사 제33헌병대 병력 60여명을 동원하여 한남동 육군 참모총장 공관을 무력으로 점거하고,정승화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 등에게 권총을 난사하여 이들을 제압한 다음 같은날 19시30분경 정승화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고, 피의자와 위 이학봉은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정승화 총장이 10·26사건에 연루된 새로운 혐의사실이 발견되었으므로 연행·조사하겠다』면서 그 재가를 요구하였으나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한 상황에서 정승화 총장 강제연행 사실을 인지한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정병주 특전사령관등이 정승화총장을 원상복귀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같은날 21시30분경 위 정동호 고명승 등이 대통령 경호실 병력을 무단 동원하여 대통령 관저인 총리공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피의자및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희도 백운택 등이 집단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 재차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를 재가해 줄것을 다시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지휘계통을 제압하기로 결의하고, 같은날 23시경 피의자는 위 박희도에게는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해 올 것을,위 최세창에게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와 휘하 병력의 경복궁 출동을,위 장기오에게는 휘하 병력의 육본 출동을 각 지시하고,상피의자 노태우는 위 구창회에게 휘하 병력의 중앙청 출동을 지시하고,위 황영시는 위 박희도에게 휘하 병력의 고려대학교 진주를 지시하고,위 황영시 백운택은 위 이상규에게 전차부대의 중앙청 출동을 지시하고 위 정도영 등은 위 김정룡 신우식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작전 지원을 지시하고 위정도영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등은 피의자를 비롯한 지휘부에 각 지휘관의 전화도청및 각 부대 보안부대장의 보고를 통한 각 부대 이동상황을 수시로 보고토록 하는 한편,제26사단 제30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의 지휘관·참모 및 보안부대장에게 합수부측의 위와 같은 조치에 동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이에따라 같은날 23시30분경 위 최세창 박종규는 특전사령관실에 제3공수여단 병력을 투입,총격을 가하여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에게 부상을 가한 후 그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하는 한편 같은달 13일 2시경 제3공수여단 병력을 경복궁에 진주시키고, 위 박희도 서수열 박덕화 등은 같은 날 0시30분경 제1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국방부 근무 초병인 정선엽 병장에게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위 장기오는 같은 날 3시경 제5공수여단 병력을 효창운동장으로 진주시키고 위 구창회 이필섭 안병호 등은 같은 날 1시30분경 제9사단 제29연대 병력을 출동시켜 같은 날 3시30분경 중앙청을 점령하고 위 박희모 송응섭은 같은 날 3시30분경 제30사단 제90연대 병력을 고려대학교에 진주시키고 위 이상규는 같은 날 1시30분경 제2기갑여단 제16 전차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같은 날 3시30분경 중앙청을 점령하고, 위 조홍 신윤희는 같은 날 3시40분경 위 김진선의 지원을 받아 수경사 사령관실에 진입,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총격을 가하고 부상을 입게 한 후 육본 수뇌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문흥주 합참 대간첩대책본부장 등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함으로써 피의자는 수괴로서,상 피의자 노태우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탈취,휴대하고 반란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중요지점을 점령하는 등 부대를 진퇴함과 아울러 수소를 이탈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위 정병주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이재천 김인선을 각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친 자로서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염려가 있는 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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