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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리의 「토지」(외언내언)

    『한국 대하소설의 뿌리이자 봉우리』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힌 작품』 『거대한 모성의 발현』….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대한 헌사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20명에 가까운 평론가가 본격적인 작품론을 썼고 지금도 여러 평론가가 「토지」의 작품론을 집필중이다. 이 소설이 광복절인 지난 8월15일 드디어 완성됐다.지난 69년 「현대문학」에 작품이 연재되기 시작하여 여러매체를 통해 발표돼 온지 26년만의 일이다. 책으로는 전5부 16권으로 8월말 완간될 「토지」의 시간적 배경은 1897년 동학혁명의 실패와 좌절에서 부터 1945년 8·15 민족해방에 이르기까지.기울어 가는 가문을 당차게 지켜내는 서희를 비롯하여 눈물겹도록 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월선과 용이 길상등 수백명의 인물과 수많은 사건들이 그물망처럼 얽히고 설키는 이 작품을 작가는 작가노트도 없이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창조해냈다.『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핍박속에서 견뎌낸 우리민족의 딱한 사정과 생명력을 담았다』고 작가는 말한다.한 작가가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총체를 이처럼 방대한 부피로 탐사해낸 유례는 세계문학사에서도 찾기 힘든일.1·2부의 시대적 배경과 맞물리는 운명론적 갈등구조 때문에 『역사의 병풍을 두른 연애소설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초기에 나오기도 했지만 서구적 서사개념을 뛰어 넘는 독특한 구조와 특유의 생명사상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으로 평가(문학평론가 임우기)받는 이 작품이 한국문학의 커다란 결실이라는 것은 의심할수 없을 듯싶다. 중년에서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도록 작품을 집필하면서 암과의 투병,6·25때 남편을 형무소에서 잃은데 이어 외동딸의 지아비인 사위(시인 김지하)마저 형무소에 보내야 했던 시대와의 맞섬을 이겨내고 책읽기의 즐거움을 안겨준 작가의 위대한 정신의 승리에 경의를 표한다.
  • 세율은 낮추고 세원은 늘린다/전면개편된 세제안 의미와 배경

    ◎「고세율­탈세」 악순환 뿌리뽑기/실명제로 드러난 불로소득자 세부담 늘어/종합과세 기준액등 국회심의때 논란클듯 「다수가 탈세한다」는 전제로 고세율로 짜인 현행 세제의 골격이,「모두 법대로 세금을 꼬박꼬박 낸다」는 전제의 저세율 체계로 바뀐다.18일 재무부가 발표한 「94 세제개혁안」에서는 세제의 틀을 짜는 기본 전제가 과거와는 1백80도 달라졌다.이런 의미에서 단순한 개편이라기 보다는 개혁의 성격이 강하다. 과거의 세제는 세원의 상당 부분이 빠져나간다는 것이 전제였다.이 경우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사람에게 탈루 세액을 덮어 씌우지 않으면 나라살림을 꾸려가는 조세수입이 그만큼 모자라게 된다. 따라서 세수목표를 채우려면 불가피하게 세율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세율은 턱없이 높아지고 그 결과는 보다 많은 다수의 탈세로 이어진다.「고세율과 탈세의 악순환」은 우리 세제와 세정의 해묵은 과제였다. 이번의 세제개혁은 바로 이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시도이다.법대로 세금을 내고도 사업이나 생활에 지장이없도록 세율을 내리는 대신 과표의 양성화를 유도하겠다는 시도이다. 이런 시도가 가능해진 것은 바로 금융실명제 덕분이다.지난 해 8월부터 실시한 실명제에 따라 과세자료는 대폭 양성화되고,세무당국은 개별 과세자료를 파악하기가 쉬워졌다.과세자료의 양성화는 세원 포착률을 높여 세수증가로 연결된다. 96년부터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가 실시되면 금융 고소득자에 대한 누진과세로 세수는 더욱 늘 전망이다.이런 배경에서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 및 주요 세목의 세율 인하에 역점을 두고 세제개혁안을 마련했다.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는 실명제의 실시로 얼굴이 드러난 금융고소득자를 가려내 지금까지 이들에게 적용한 원천징수 세율 20% 보다 훨씬 높은 세율로 누진과세하기 위한 것이다.지금까지 가·차명 계좌 뒤에 숨어,소득이 훨씬 적은 근로소득자들 보다 낮은 세율의 혜택을 누려온 이들 불로소득 계층의 세부담을 늘림으로써 조세의 형평이 크게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4천만원으로 정한 종합과세의 기준금액이 적정한 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재무부는 종합과세가 실효성을 지니려면 과표 구간에 따라 누진세율이 적용되는 종합과세의 세액이 현재의 분리과세 세액보다 많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원천징수 세율이 20%,누진세율이 5∼45%인 현행 세제에서는 누진과세의 평균세율이 20% 이상이 되려면 금융소득이 3천8백만원은 넘어야 한다.또 원천징수 세율이 15%,누진세율이 10∼40%인 개정 세제에서는 누진과세의 평균세율이 15% 이상 되려면 금융소득이 3천6백만원 이상이어야 한다.이를 감안해 종합과세 첫 해인 오는 96년에는 부부합산으로 연간 4천만원 이상인 금융소득자에 적용하고,그 성과를 보아 기준금액을 점차 낮춰가겠다는 것이다. 반면 재정 및 조세학자들은 대체로 재무부안 보다 훨씬 낮은 8백∼1천5백만원 선을 주장한다.반면 은행연합회를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재무부안 보다 훨씬 높은 8천만원 선을 제시한다. 기준금액을 너무 높게 정하면 종합과세 대상이 지나치게 좁아져 조세의 형평성 제고에 걸림돌이 된다.반면 너무 낮게 하면 종합과세 대상은 넓어지지만 금융저축을 위축시키고 세무당국의 행정수요 폭증,납세자의 신고불편과 조세저항 등을 야기할 우려가 크다.따라서 기준금액에 대해서는 국회심의 과정에서 논란이 벌어질 전망이다.재무부가 정한 4천만원 보다 다소 낮아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세율인하는 이번 세제개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부가가치세를 제외하고 소득·법인·양도·상속·증여·특별소비세 등 6대 주요 세목의 세율이 낮아진다.부가세도 세율은 그대로이지만 면세점이 현재 연간 매출액 6백만원에서 두배인 1천2백만원으로 높아져 영세 상인들의 세부담이 가벼워진다.특히 소득세의 경우는 세율도 낮아지고 면세점도 크게 높아진다. 광범위한 세율인하로 세수부족 사태가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근로소득세의 경우만 하더라도 세율 인하와 면세점 인상으로 오는 96년에 1조5백억원의 세수 감소가 예상된다.여타 세목의 세율인하 및 각종 공제의 확대,면세점 인상 등의 영향을 모두 감안하면 이번 세제개혁에 따른 세수감소는 최소 2조∼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세제개혁을 주도한 강만수 세제실장은 『금융소득에 대해 종합과세가 실시되고,금융실명제와 세율인하 등으로 과표가 양성화될 것으로 기대되는 등 세수증대 요인도 적지 않으므로 세수부족 사태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개혁안 주요내용 요약/소득공제/기본 1백만원… 교육비등은 60만원/양도 소득세/장기보유때 차익 특별공제폭 확대 「94 세제개혁안」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소득세◁ ◇금융소득 종합과세=세금우대 저축을 포함,원칙적으로 모든 금융소득을 과세 대상으로 한다.세금우대 저축의 우대세율은 현행 비과세 또는 5%에서,96년에는 분리과세시(금융소득 4천만원 이하) 10%,종합과세시(금융소득 4천만원 초과) 15%(일반저축의 원천징수 세율)로 바뀐다.97년에는 일반저축의 원천징수 세율이 10%로 낮아져 세금우대 저축 19종 중 17종이 폐지된다(개인연금 저축과 장기주택마련 저축만 비과세 유지). 상장 주식과 채권 등 유가증권의 매매차익에 대한 과세는 98년 이후 검토한다.3년 이상의 장기 보험차익과 사업자가 공제회,또는 공제조합 등에서 얻는 소득도 종합과세한다.종업원 공제는 분리과세한다.채권이자는 계좌거래인 경우 원천징수(96년 15%,97년 10%)한 뒤 종합과세하고,실물보유인 경우 최고세율(40%)로 분리과세한다.금융기관은 금융소득 자료를 2월 말과 8월 말 연 2회 개인과 국세청에 통보한다.납세자가 스스로 과세표준과 세액을 신고·납부토록 한다. ◇소득공제 제도 △인적공제=현재 기초 72만원,배우자 54만원,부양가족 1인당 48만원씩 2명까지 공제하는 것을 가족(본인포함) 1인당 무조건 1백만원으로 통일(기본 공제)한다.장애자·경로우대·부녀자 특별공제는 사유당 50만원씩 추가 공제한다.부녀자 특별공제를 받으려면 부녀자가 세대주이거나 가족 중 장애자,노인,10세 미만인 어린이가 있는 맞벌이 부부여야 한다. △특별공제=보험료·의료비·교육비 등을 특별공제로 통합,항목별 사유의 증빙 없이 일률적으로 연 60만원을 공제해주는 표준공제 제도를 도입한다.공제 대상에 근로자 이외에 사업자도 포함시킨다.근로자는 항목별 공제(주택자금공제를 포함해연 2백40만원)를 선택할 수 있으나 사업자는 표준공제만 가능하다. △근로소득 공제=연 6백20만원인 한도를 8백만원으로 올리는 대신 연월차·정근수당 1백만원과 월 3만원의 식사대 등 복지후생적 급여에 대한 비과세는 없앤다.벽지수당,임시 재해급여에는 계속 비과세한다.국외 근로자의 경우 현재 국외 근로소득 공제(월 50만원)와 국외 근로소득 세액공제(산출세액의 50%)로 나뉜 것을 통합,국외 근로소득 공제한도를 월 1백만원으로 늘린다. ▷재산세◁ ◇양도소득세=소득공제 한도가 연 1백50만원에서 2백50만원으로 늘어난다.장기 보유시 양도차익의 일정 비율을 공제해주는 장기보유 특별공제 폭이 현행 5년 이상 보유 10%,10년 이상 보유 30%에서 ▲3년 이상 보유 10% ▲5년 이상 보유 15% ▲10년 이상 보유 30%로 커진다.보유기간 중 생산자 물가상승률(연 5% 한도) 상당액을 양도차익에서 공제하는 특별공제는 폐지한다. △상속·증여세=현재는 배우자가 실제 상속받은 금액에 관계 없이 무조건 1억원+(결혼연수×1천2백만원)을 공제받지만 앞으로는 현행 방식과 실제 상속액을 기준으로 8억원 한도에서 배우자의 법정상속분(공동상속인의 1.5배)을 공제받는 방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배우자 증여공제액은 3천만원+(결혼연수×3백만원)에서 5천만원+(결혼연수×5백만원)으로 커진다.부모 양쪽으로부터 각각 증여받은 경우 지금은 각각 과세하나 앞으로는 합산해 누진과세한다.영농 상속인은 현재 주택·농지·초지·산림지 등을 모두 합해 1억원까지 공제받지만 앞으로는 2억원까지 받을 수 있다. ▷기업세제◁ ◇감가상각 제도=현재 5백91개 품목 별로 2∼60년인 법정 내용년수를 8∼15개 품목군 별로 기준 내용년수만 정하고 각 기업이 상하 25%에서 실정에 맞게 내용년수를 결정하도록 한다.취득가액의 10%는 감가상각을 금지하는 잔존가액 제도와,일반 상각보다 최고 두 배까지 빠른 속도로 상각하는 특별상각 제도는 폐지한다. ◇외국 납부세액 공제제도=기업이 외국에서 낸 세금을 국내에서 공제할 때 소득발생지 국별 공제한도를 없애고 기업별 일괄 한도만 둔다.한도를 초과해 외국에서 낸 세금은5년간 이월공제한다. ▷주세◁ 내년부터 집에서 술을 제조하는 경우,팔지만 않으면 면허가 없어도 처벌(현재는 3년이하 징역 또는 3백만원이하 벌금)하지 않는다.
  • 도쿄 전몰자묘역서 일 총리에 보상 직소/한국유족대표

    【도쿄 연합】 광복절인 15일 낮 1시40분쯤 한국 유족대표인 양순임씨(49·서울거주)가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한뒤 도쿄 치도리가부치(천조연) 전몰자 묘역에 참배하고 나오던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총리에게 달려가 전후보상을 해달라고 직접 호소했다. 전후보상 국제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온 양씨는 이날 사회당이 같은 곳에서 주최한 「전쟁희생자 추도및 평화를 서약하는 8·15집회」에 해외대표로 참석했다가 약 1시간정도 무라야마 총리가 오기를 기다린뒤 통역을 통해 『우리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 정부,「대북지원 대책반」 곧 구성

    ◎경수로 건설등 경협 상설기구로 운영 정부는 북한의 경수로전환 지원에 사실상 한국형원자로가 선택되고 대체에너지 지원에서도 우리의 참여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다음주초 청와대 통일원 외무부 재무부 상공자원부등 관계부처 회의를 갖고 범정부 차원의 「북한 지원 대책반」(가칭)을 구성할 방침인 것으로 16일 알려졌다. 정부의 이같은 신속한 대응은 김영삼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및 경수로 지원방침을 천명한데 따른 것이다. 정부는 이 기구를 핵문제와 연계된 대북 경협의 상설기구로 운영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기구는 특히 북한이 전력난을 겪고 있는 겨울철에 북한에 대한 직접 전력공급방안과 경수로 원전및 화력발전소등 대체에너지원을 비무장지대에 건설하는 방안등을 심도있게 검토해나갈 예정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조만간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른 남북교류협력추진위를 열어 상설기구 구성 문제등을 검토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와함께 미국·일본등 관계국들과 조만간 경수로및 대체에너지등 구체적인 지원방안에 관한 협의에 착수할 방침이다. 정부는 이번 회의에서 우리가 북한과 직접 협의를 할수있는 원자로 건설의 주계약자 자격으로 참여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정부는 또 경수로 자금지원과 관련,한·미·일 세나라가 하나의 법인으로 국제컨소시엄을 구성하되,유상원조와 무상원조를 거의 반반씩으로 하며 형식적으로 미국이 대표주주가 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관련,정부의 한 당국자는 『현재로선 한국형원자로 말고는 대안이 없다』면서 『이에따라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관계부처를 중심으로 상설기구를 구성하자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빠르면 북구 3국을 방문하고 있는 한승주 외무부장관이 귀국하는 다음주 초 회의를 열어 구체적인 틀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특별사찰­경수로 연계 “3국3색”/한·미·일 입장 어떻게 다른가

    ◎핵과거 규명 전제로 주도적 지원/한/현재·미래 동결 보장되면 도와야/미/특별사찰뒤 전후배상 차원 협조/일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회담 합의발표문 가운데 양측이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부분이 「특별사찰」과 「평화협정」이다. 휴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문제는 북한이 줄곧 주장해온 정치적 현안이다.특별사찰 문제는 우리와 일본,미국이 북한 핵문제의 본질로 인식하고 기필코 관철하고자 하는 사안이다. 그런 만큼 조그마한 결실이라도 있었다면 양쪽 모두 이 부분을 합의문에 넣고 싶어했을 게 분명하다. 합의문에 두리뭉실한 표현 말고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던 것은 이 부분에 대한 미국과 북한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뒤집어 말한다면 미국이 회담에서 북한핵의 과거 투명성 보다는 현재와 미래의 투명성 확보에 훨씬 역점을 두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정부관계자들이 드러내놓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관계개선,경수로 지원,대체에너지 제공등 약속할 것은 다 해줬으면서 북한핵의 과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발표가 없었던 점에 강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전문가들도 이 문제가 앞으로 회담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인지 발표가 나온 뒤 북한핵의 과거에 대해 우리와 미국·일본의 반응이 조금씩 다르다.미국 국무부 매커리대변인은 합의내용이 특별사찰을 포함한 전면적인 핵안전조항의 이행을 약속하는 것으로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합의문에 명기된 「핵안전협정 준수」라는 포괄적인 문구에는 당연히 특별사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핵안전협정 제13항에 특별사찰 규정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우리도 미국과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 특별사찰로 북한핵의 과거가 규명되지 않으면 경수로 전환 지원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강력히 내세우고 있다. 일본도 비슷하다.사이토 구니히코(재등방언)외무차관은 『북한의 과거 핵의혹이 완전히 해명되면 경수로 지원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말해 북한핵의 과거해명이 경수로 지원의 전제조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와 일본은특별사찰이 경수로지원의 전제조건임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미국은 합의문에 보다 무게를 싣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의 경수로 전환 지원을 「새로운 교섭카드」로 활용할 복안을 검토하게 된다.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유지를 협상의 기초로 하는 미국의 처지에서 보면 이는 그리 달가운 전략일 수 없다. 물론 우리와 일본 사이에도 차이는 있다.김영삼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도 밝혔듯 우리는 경수로 전환 지원에 적극적이다.그러나 일본은 전후 배상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고 있다.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분명히 드러날 일이다. 또 이런 상황으로 가면 「경수로와 특별사찰,누가 어느 것을 먼저 보장하느냐」하는 문제가 이견으로 대두될 가능성도 크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제 북한 핵문제의 논의를 기존의 한·미공조 틀에서만 보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미국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약속한 마당에 미국이 한국 일변의 외교적 노선을 따르는 데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때문에 이번일을 계기로 정부의핵정책도 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북 전문가회의 무얼 다루나/연료봉 처리문제 가장 예민한 쟁점/경수로형·대체전력·지원액도 난제 미국과 북한의 3단계회담 1차회의가 한창이던 지난 12일 제네바에서는 갑자기 회담대표들은 뒤로 물러서고 이른바 전문가 회의라는 것이 열렸었다.관계자들은 고위급회담의 합의발표문이 나오기 직전 기술적인 문제를 최종 협의하기 위한 회의라고 설명했다.누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논의했고,내린 결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했다. 이같은 전문가회의는 이제껏 미국과 북한의 대화에 있어 첫선을 보인 새로운 대화의 형태임에 분명하다.그동안 미국과 북한 사이에는 고위급회담을 비롯,뉴욕 실무접촉·북경 주재 참사관 채널등 3개의 대화창구가 있었다. 새로 등장한 전문가회의의 주 임무는 비록 고위급회담에 종속돼 있긴 하지만 역시 주요 현안의 미세한 부분을 짜맞추는 일이다.미국과 북한의 논의가 실행 시간표의 작성이나 지원액수의 조정등 갈수록 구체적이고 전문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역할 또한 증대 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앞으로 예정된 전문가회의는 빠르면 8월말,늦어도 9월초에는 열릴 전망이다.그래야만 다음달 23일로 예정된 3단계 고위급회담 2차회의의 테이블에 주요 현안의 윤곽을 내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회담은 제네바,아니면 워싱턴에서 먼저 열릴 것으로 보인다.북한이 정치적 상징성을 고려,워싱턴을 고집할 가능성이 현재로선 제일 높다.북한은 또 내부사정 때문에 평양 개최를 뒤로 미루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문가회의는 ▲폐연료봉의 처리문제 ▲경수로의 지원 방안 ▲대체에너지의 제공 방안 ▲상호 연락사무소의 개설준비등 4개 분야로 나눠 진행될 예정이다.고위급회담 북측 대표인 강석주외교부부부장도 기자회견을 통해 4개 분야에 대한 전문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4개 분야 가운데 가장 신경이 쓰일 부분은 폐연료봉의 처리라고 할 수 있다.일단 처리기한 연장엔 합의했지만 냉각 저수조의 수질 개선방법 선정및 건식보관의 타당성등 실무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다.2차회의 이전에 이에 대한 기술적인 검토를 끝내야만 한다.그래야 2차회의에서 미국과 북한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경수로 전환 지원 부분이다.구체적인 지원 액수의 산정과 국제컨소시엄의 구성및 자금조달 방안,원자로형의 결정등에 이르기까지 이 분야의 논의가 특히 어려울 전망이다.더구나 지원의 조건을 놓고 우리와 미국,북한의 주장이 아직은 조금씩 다른 상태이다. 대체에너지의 제공및 상호연락사무소의 설치등도 그리 쉬운 분야가 아니다.구체적인 방안과 절차등이 중점 논의 될 것으로 여겨진다.그러나 전문가회의는 양측에서 2∼3명의 해당 전문가가 나와 머리를 맞대고 이견을 조정할 뿐 뭔가 합의를 도출하는 회의는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 심하게 삐걱 거릴 것 같지는 않다.
  • 북·미합의 이후의 남북관계/길정우(기고)

    8월 12일 제네바에서 발표된 북·미 3단계회담의 합의문은 지난 1년반 이상 북한 핵문제와 씨름해 온 우리에게 잔잔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충격이 북·미협상 과정에서 한국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든가,북한 핵개발의 과거규명이 소홀히 되었다는 일부 부정적 평가속에 파묻혀 합의의 긍정적 의미가 퇴색되는 결과로 표출 될 가능성이 우려된다. 금번 북·미회담은 김일성사후 김정일정권의 대외정책방향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아울러 지난 오뉴월 대북제재 논의 과정에서 북·미 양국 모두가 제재모면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후 회담에 임한만큼,가시적인 합의가 도출 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시작되었다.따라서 회담결과는 합의 자체보다는 합의 내용의 포괄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 해야 한다.즉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의 일괄타결 주장과 미국의 포괄협상 접근방식이 접점을 찾아 이루어 낸 금번 합의는 실질적 의미에서 북·미간 포괄적 정치협상의 시발로서 기록될 것이다.아울러 향후 북·미관계개선 역시 금번 합의의 이행과정에서 북한과 미국 자체내의 문제로 인하여 우여곡절을 겪게는 되겠지만 관계개선의 방향은 일단 정해져 있다고 하겠다. 북·미간의 이같은 합의가 남북관계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북한 핵문제가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대두되기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북·미 국교정상화를 전제로 한 양국관계의 개선은 한·미 동맹관계의 틀 속에서 북한을 인식해 오던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김일성사후 대북정책을 불가피하게 재점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북한 핵문제 논의의 새로운 국면도래를 예고 하는 북·미회담은 남북관계의 미래와 관련,몇가지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첫째,경수로와 대체에너지 지원을 담보로 한 북한 핵개발의 동결은 과거 핵개발에 대한 규명문제를 여전히 남겨놓고 있다.이 문제와 관련,한·미간의 미묘한 입장차이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남북간 「비핵화공동선언」의 이행문제는 상호사찰 논의 및 실시와 관련,남북관계의 주요 쟁점으로 상당기간 남게 될 것이다. 둘째,대북 경수로 및 대체에너지 지원과 관련,한국의 상당한 참여가 예상되는 바,기왕에 한국 정부가 추진해온 핵­경협 연계정책이 다소 완화될 것으로 기대해 볼 수 있다.이는 미국이 제네바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무역 및 투자규제완화를 약속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셋째,경수로 지원이 핵문제로 인해 출발된 것이지만 성격자체는 다분히 경제적 차원의 문제인바,계획의 구체화 과정에서 남북한 전문가 집단의 인적교류가 확대 될 것이다.아울러 재정지원 논의를 위한 다자간 협의에서의 남북간 접촉 또한 잦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넷째,그러나 북한은 미국과의 포괄적 합의를 통해 정치·안보 및 경제적 분야에서 부분적 실익을 확보하는 한편 향후 합의사항을 구체화 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지속적 대화를 보장받음으로써 한국과의 실질적 대화에는 여전히 성의를 보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그러나 북·미간 합의사항을 구체화 하고 나아가 9월말 후속회담에서 논의 될 가능성이 있는 평화체제 전환,팀스피리트훈련 중단 등의 사안과 관련,한국의 입장을무시하고는 북한이 바라는 성과를 얻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 될 것을 감안할 때,북한의 의도와 상관없이 남북간 대화의 계기는 마련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일성사후 대북정책을 재조정하고 있는 한국 정부는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서도 강조된바,북한이 안정속에서 개방과 개혁의 길로 나온다면 협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대북 경수로 지원도 민족의 복리를 위한 「민족발전공동계획」의 일환으로 인식 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북·미간 제네바 합의사항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할 근거는 많다. 핵문제가 대두된 이후 정부와 국민을 당혹시키고,여론을 분열시켜온 지난날의 논란이 결국은 핵위협 자체가 갖고있는 안보적 심각성 때문만이 아니라,우리의 북한에 대한 인식과 대북정책 방향의 미정립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북·미간 합의와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혼란과 혼돈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차분히 방향성 있는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북한이 내부혼란을 피하고 개방과 개혁의 길로 나오도록 유도하며,또 이를 지원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평화적 통일달성을 위한 합리적 선택임에 회의를 갖지 않도록 하자.
  • “외국인희생 깊이 반성”/무라야마/전쟁책임 일총리론 첫 언급

    【도쿄 연합】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일본 총리는 15일 일본의 49주년 패전일과 관련,『제2차 대전은 아시아인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비참한 희생을 가져 왔다』고 밝히고 『스스로의 역사를 반성하고 전쟁의 비참함과 수많은 존엄한 희생을 젊은 세대에 계속 말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이날 도쿄(동경)시내 무도관에서 열린 정부 주최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이같이 밝히고 특히 아시아 등의 전쟁 희생자에 대해 『깊은 반성과 함께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반성」이라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일본 총리 식사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가해 책임」에 관해 언급을 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제2차 대전 발언과 관련,사임한 사쿠라이 신(앵정신) 전 환경청 장관 문제를 염두에 두고 당초 후생성이 마련한 원고에는 없었던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의 많은 사람에 비참한 희생을 가져온 것을 깊이 반성한다는 부분과 ▲스스로의 역사 반성이라는 부분을 첨가한 것으로알려졌다.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전 일본 총리는 지난 해 전몰자 추도식에서 『아시아 여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의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추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해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외국의 희생자 부분에 관해 약간의 동정적 입장을 밝혔었으나 무라야마 총리는 이 보다 한단계 앞선 일본의 반성하는 자세를 강조하게 된것이다. 한편 도이 다카고 중의원 의장은 식사를 통해 『우리들의 잘못으로 비참한 희생을 강요당한 아시아의 이웃들과 진정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 지난 해와 같은 표현으로 일본의 전후 보상 필요성을 지적했다. ◎김정일중심 통일/북 노동신문 주장 【내외】 북한은 15일 8·15해방 49주를 맞아 김정일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체제 고수와 조국통일 실현을 위한 투쟁을 더욱 과감하게 벌여나갈 것을 강조했다. 노동신문은 이날 기념사설을 통해 『항일투쟁으로 조국해방을 이룩한 김일성의 뜻을 이어 김정일을 중심으로 주체혁명위업을 완수하는 것이 당면한 주요과제』라고 지적하고 『북과 남,해외의 동포들은 단결해 남조선의 책동을 물리치고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과감히 벌여나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 「전후청산 계획」에 불신만 키운다/되풀이 되는 일지도층 「망언」

    ◎53년부터 계속… 진정한 반성 “회의적”/도처에 군국주의 망령… 현정권에 부담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는 일본의 8월.많은 각료와 일본인들은 매년 8월15일을 전후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정국)신사를 참배한다.사쿠라이 신(앵정신) 전환경청장관의 「침략전쟁 부인」발언은 일본의 이러한 군국주의가 사회저변에 뿌리깊게 남아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사쿠라이 전장관(자민당)은 지난 12일 『일본은 침략전쟁이라는 생각으로 전쟁을 하지않았다.태평양전쟁으로 오히려 아시아는 식민지지배에서 벗어났고 경제부흥과 민족 활성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이러한 망언은 침략전쟁과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일본보수세력의 전형적인 왜곡된 역사관이다.그는 자신의 발언이 한국·중국 등 아시아국가들과 연립정부내의 사회당으로부터 강력한 비판과 반발을 불러일으키자 결국 14일 사임했다.후임에는 자민당의 미야시타 소헤이(궁하창평) 전방위청장관이 취임했다. 자민당 지도부는 연립정권의 유지를 위해 우선 사회당의 요구대로 환경청장관을 교체한 것으로 분석된다.일본언론들은 사쿠라이 전환경청장관의 발언과 사임파동이 연립정권내의 사회당과 자민당의 역사인식의 차이를 드러낸 것이며 전후청산과 「비둘기파 정권」임을 강조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총리 정권에 중대한 타격으로 정권운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권차원의 문제가 아니다.정권이 바뀌어도 일본의 침략전쟁과 군국주의·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은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불과 3개월전인 지난 5월에도 하타정권때의 나가노 시게토(영야무문) 법상이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다.남경대학살은 날조된 것이다』라는 망언으로 국내외의 강력한 비판과 반발이 있자 사임한바 있다. 일본 각료 및 지도자들의 망언의 역사는 길다.그 첫번째는 지난 53년 한·일회담때의 구보다 간이치로 일본측 수석대표의 망언.그는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한국에 유익했다』고 말했다.그후 다카스기 신이치 제7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나카소네 내각때의 후지오 마사오 문부상(84년),다케시타내각때의 오쿠노 세이스케 국토청장관(88년)등의 망언이 계속됐다. 자민당을 중심으로한 일본의 보수·우익세력은 이같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식민지지배의 「은혜론」을 강조할뿐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단절시키려 했던 식민지지배의 고통과 비참함에는 눈을 감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일본은 또 문제의 발언으로 주변국가가 반발을 보이면 사후해명·유감표시와 각료의 사임이라는 편리한 「이중행동」을 반복해오고 있다. 무라야마내각은 전후 50주년을 맞아 전후청산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그러나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올바른 역사인식이 없는 전후 청산은 일본이 과거사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져 다시 군사·정치대국화를 지향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주변국가들의 불신감만 증폭시킬 우려가 있다.
  • 「민족발전 공동계획」 어떤 것인가

    ◎통일 「입씨름」 탈피… 실질협력 전환/「경수로」 첫사업… 공동어로 모색/북 개방공포증 극복이 선결요건 김영삼대통령이 8·15경축사를 통해 밝힌 「민족발전공동계획」구상은 현단계에서 남북간의 첨예한 통일논쟁 보다는 민족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실천가능한 일부터 우선적으로 협력해 나가자는 대북 제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통해 상호 신뢰를 쌓아야만 궁극적으로 통일의 길을 앞당길 수 있다는 현실적 판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김대통령이 이날 천명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구체화하는 수순인 셈이다.말하자면 구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체제경쟁의 승패가 이미 결론이 난 만큼 무익한 이념논쟁에서 일단 벗어나 실질적인 민족복리를 추구하는 게 당장의 냉각된 남북관계를 푸는 데도 좋고,앞으로의 통일에 대비한다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인 것이다. 김대통령은 민족발전공동계획에 따른 첫사업으로 대북 경수로 건설지원 방안을 제시했다.제네바의 미­북 3단계회담에서 합의한 북한에 대한 경수로 건설 지원시 한국형원자로 건설을 전제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경수로 건설로 상호신뢰가 깊어질 경우 92년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른 남북교류협력공동위와 경제공동위 등을 본격 가동해 더욱 전향적인 공동사업이 추진될 수 있다.이를테면 지금까지 남북경제회담이나 민간 업체간 접촉에서 이익의 「공통분모」를 확인한 ▲지하자원 공동개발 ▲공동어로구역 합동조업 ▲관광자원 공동개발 ▲경공업 합작공장 건설 ▲건설프로젝트 등 대외공동진출 ▲「2002년 월드컵공동유치」사업 등을 상정할 수 있다. 이외에도 우리측으로선 북한당국이 마음먹기에 따라 금강산 공동개발을 비롯한 관광사업과 남북교통망 잇기 등 교통·통신분야의 공동프로젝트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이같은 사업들은 북한의 핵투명성 확보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 아직 구체화되기에는 많은 장애요인이 남아 있다.특히 이들 사업들은 북한측이 개방공포증,다시 말해 자본주의 바람과 외부정보가 유입될 경우 체재유지가 어렵다는 인식을 고치지 않는 한 요원한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의 핵문제 해결이 계속 순조롭게 이뤄질 경우 북한이 참여를 바라고 있는 나진·선봉특구를 포함한 두만강개발계획에도 민족공동이익 확보 차원에서 적극 참여한다는 방침이다.다만 이 경우에도 북한주민의 실질적인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생활필수품을 비롯한 경공업 분야부터 참여해 중공업과 사회간접자본 분야로 투자를 확대해 나간다는 입장이다. ◎분단이후 정부통일 방안 변천사/“신뢰 다진후 평화통일” 기조/71년부터 본격 논의… 「공동체안」까지 발전 우리정부의 통일방안은 통일논의 형성기(45∼53년)­통일논의 공백기(53∼70년)­통일논의 해빙기(71∼87년)를 거쳐 통일논의 개화기(87년∼현재)를 맞기까지 여러차례 수정·보완되는 과정을 밟아왔다. 이에따라 정부의 통일방안도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82년),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89년),3단계3기조통일방안(93년),민족공동체 통일방안(94년)등으로 바뀌었다. 김영삼대통령이 15일 광복절경축사에서 천명한 「한민족공동체 형성을위한 3단계 통일방안」은 「화해·협력」,「남북연합」을 거쳐 1민족1국가라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통일 과정과 목표에 대한 원칙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같은 명칭은 문민 1기 내각에서 한완상전통일부총리의 주도로 마련된 「3단계3기조」통일방안을 수정한 것이다.김대통령은 지난해 7월 평통자문회의를 통해 이를 선언한 바 있다. 이 3단계3기조 통일방안은 따지고 보면 6공정부에서 당시 통일원장관이었던 현리홍구부총리의 주도로 만든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내용상 다를 바 없었다.「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자주·평화·민주의 3원칙을 바탕으로 「남북연합」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 1민족1국가로 가자는 게 골자였으며 3단계통일방안은 「화해·협력」이라는 한 단계를 추가한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3단계에다 「민주적 국민합의」,「공존공영」,「민족복리」 등 통일정책 3대추진기조를 덧붙인 3단계3기조 통일방안은 통일과정을 설명하는데만 집착해 설득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즉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가운데 한민족이 더불어 살아가는 통일국가의 미래상에 대한 상징성이 결여됐다는 약점이 지적된 것이다. 이 때문에 김대통령도 지난 7월 무산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고려연방제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의 통일방안을 간명하게 다듬도록 지시했다는 후문이다.그래서 통일방안의 명칭을 새로 손질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번에 통일방안의 이름,특히 약칭이 「민족공동체 통일방안」(더 줄일 경우 공동체방안)으로 정착됨으로써 이에 대한 논란은 일단락 됐다. 그동안의 통일방안을 보면 자유당정권이 다분히 선전적 차원에서 거론한 「북진통일론」을 제외하고는 벽돌을 쌓듯 해결가능한 것부터 실천해 상호신뢰를 축적한 바탕 위에서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 「김 대통령 8·15경축사」에 담긴 뜻

    ◎「한민족 공동체」 적극적 통일정책 전환/체제경쟁 종식 판단… 수세서 공세로/「흡수통일 대비」는 주변정세 급변에 대응의지/분단해소 중심이념 “자유·민주” 천명 김영삼대통령의 8·15경축사를 일관하고 있는 흐름은 적극적인 분단해소 노력과 이를 위한 한국국민의 고통분담 요구이다.바꾸어 말하면 「적극적인 통일전략」의 제시이다.이승만정권의 북진통일론이후 일관되게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것에 머물렀던 통일전략이 문민정부의 출범과 김일성사망이란 한반도정세의 변화에 맞춰 적극적인 통일전략의 채택으로 전환된 것이다. 김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두가지 소재를 다루고 있다.하나는 정부의 통일방안에 관한 설명이고,또하나는 변화된 한반도정세에 대한 인식과 이에 따른 대북정책의 설명이다. 통일방안에 관해 김대통령은 기존의 3단계 3기조 통일방안에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란 이름을 새로 붙였다.이 이름도 아주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어서 충격적인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화해와 협력의 단계와 남북연합의 단계를 거쳐 1민족 1국가를만든다는 기존의 골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3단계 통일방안이 통일의 모습이나 방안을 그리기보다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비판을 감안,이를 보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경축사의 의미는 역시 김일성사망에 따른 김대통령의 대북인식변화와 이에 따른 대북정책의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김대통령은 분명한 어조로 『남북한 사이의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선언했다.김일성의 사망이 김대통령에게 이같은 선언을 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나아가 이같은 상황인식의 변화가 대북정책의 일대전환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적극 거론했다.그는 『북한당국은 인권을 개선하는 과감한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고 못박았다.인권문제는 북한당국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그동안 되도록 피해 온 소재다.그러나 김일성의 사망은 김대통령으로 하여금 스스로 남북한 7천만 민족 전체의 안전과 복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심어주었고,이것이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과 체제개혁을의미하는 개혁 요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통일구상과 관련해 취임초기 민족을 우위에 두었던 통일정책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이는 체제경쟁이 끝난데 대한 자신감의 발로이면서 통일에 대한 조건을 하나 더 첨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통일문제 사령탑이 한완상체제에서 이홍구체제로 바뀐 것이 의미하는 보수우경화의 한 흔적이랄 수도 있다. 김대통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통일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닥쳐올 수도 있다』고 밝혔다.이홍구통일원장관이 『북한이 붕괴되면 흡수통일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발언을 하고 여기에 북한의 「조평통」이 반발,남북정상회담을 남한이 깨고 있다는 비난성명을 발표한 직후임에도 김대통령이 흡수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은 그 의미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통일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일 뿐이라는 대통령의 생각이 처음으로 공개화된 것이다. 이런 대북정책의 전환은 결국 통일정책의 대전환,적극적 통일정책의 선택으로 귀결나고 있다.통일방안은 기존의 3단계 통일방안을 유지하고 있지만,이를 수행하는 정책들은 우리의 통일에 대한 의지와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북정책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은 결코 우리가 흡수통일을 바라지 않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우리의 기본원칙은 공존공영의 단계를 거쳐 남북한 전체가 합의하는 통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그러나 경축사의 행간들에서는 이러한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당국의 개혁과 적화노선 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면 우리측은 민족발전 공동계획에 따라 공존공영을 위한 지원을 할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김대통령은 민족발전 공동계획의 하나로 경수로지원을 들었다.수조원의 재원이 필요한 경수로 지원을 명시함으로써 공존공영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확인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대북·통일정책은 북한의 변화를 통한 평화적 통일추구를 원칙으로 하되 흡수통일에도 대비하는 2중구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 광복절 49돌 기념행사/“재미있고 다채롭게”/범국민 축제로 유도

    ◎인기 체육·연예인 경축식 초청/특별 문화행사 다양하게 준비/글짓기·그림그리기·웅변대회도 열기로 올해 제49주년 광복절 행사는 되도록 많은 국민이 참여하고 관심을 갖도록 하자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정부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한해 내내 국가적 행사를 벌일 계획을 짜고 있다.올해는 그에 앞서 국민들의 관심을 고조시킬 필요가 있어 광복절 행사를 다채롭게 가지기로 한 것이다. 가장 특색있는 것은 15일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거행되는 경축식이다.경축식이라면 흔히 딱딱하고 의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올해는 거기에서 탈피,재미있게 행사를 꾸며 되도록 많은 시민이 TV를 통해서도 시청하게끔 유도한다는 방침이다.예년과 달리 일반인 5백명에게도 초청장을 발송,전체 참석규모를 1천6백명으로 늘렸다. 경축식이 재미있으려면 역시 참석인사가 일반의 눈길을 끌어야 된다.이번에는 인기 체육인·연예인이 대거 경축식에 초청되었다.마라톤 영웅인 손기정옹과 황영조선수를 비롯,현정화(탁구)전병관(역도)김수령(양궁)선동렬 장종훈(야구)홍명보(축구)씨 등이 체육계 대표로 참석한다.연예계 인사로는 안성기 이덕화 강수연(영화배우)박인수 오현명(성악가)이미자 최희준(가수)박동진 성창순(국악인)김을동 박규채(탤런트)구봉서(희극인)씨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경축식장 분위기도 전통을 살려 새로 꾸미기로 했다.전통복식의 의장대(62명)와 취타대(37명)를 식장 주변에 배치해 경축분위기를 북돋울 계획이다.의장기도 황룡 백호 현무 주작 청룡을 나타내는 5방기와 12간지 가운데 상서로운 6가지 동물을 상징화한 6정기를 식장 좌우에 도열시키기로 했다. 광복절 경축식말고도 갖가지 문화행사를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KBS의 「열린 음악회」 프로그램을 광복절 특집으로 꾸며 8·15전야에 방영한다.또 광복절을 전후해 전국에서 태극기와 무궁화 및 애국가를 소재로한 글짓기와 그림그리기·웅변대회를 연다.덕수궁 청소년음악제(20일)국립 중앙극장광장 판소리마당(20일)도 계획되고 있다.전국 주요 시·도청 앞에 홍보탑도 세웠다. 창덕궁을 제외한 고궁및 능원이 14∼16일 국민에게 무료로개방된다.광복회원들에게는 철도 버스의 무임승차와 국립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의 무료입장 혜택이 주어진다.
  • 미·북 「핵동결­관계개선」 주고받기/제네바회담 결산(북핵 타결)

    ◎이행까진 난제 산적 “이제부터 시작”/평양측의 성실한 실행의지가 열쇠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에서 열린 3단계 고위급회담에서 13일 합의문을 채택함으로써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강온 양면의 게임은 일단 끝난 것같다. ○대립관계 일단락 북한 핵문제 해결의 기본틀에 해당되는 합의문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협상과 행동계획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따라서 북핵문제 해결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수 있다. 앞으로 협상이 계속된다는 측면에서 볼때 이번 합의문에 대한 대차대조표는 실질적인 면과 선언적인 면으로 구분된다.북한측으로서는 외교대표부 설치,투자장벽 완화,보상과 대체 에너지보장등 실질적인 보따리를 챙겼다. ○「실리보따리」 챙겨 반면 미국으로서는 북한핵의 과거·현재·미래를 동결할수 있는 선언적 약속을 얻어냈다고 할수 있다.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협정 이행수락과 원자로 건설중지,사용후 연료봉의 재처리 금지의 약속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북한측의 실질적인 이익과 미국측이 받아낸 선언적 약속은 상호 유기적으로연계돼 있어 하나의 약속이 어긋나면 실질적인 문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약속 어길땐 원점 합의문은 핵문제 해결과 정치·경제·안보문제에 대한 양측의 입장과 원칙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예상보다 핵문제 해결에 대한 접근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핵문제 해결에 접근함으로써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외교대표부」의 설치에 원칙적으로 합의한 점이다.외교대표부(외교창구)라는 생소한 용어는 수교단계를 향한 중간단계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표현이라고 외교소식통들은 전한다. 외교대표부에는 이익대표부,통상대표부,연락사무소등 여러 형태가 있다.한국이 90년 구소련과 수교의 전단계로 설정한 것이 영사처이다.또 미국이 79년 중국과 국교정상화하기에 앞서 74년 택한 방식이 연락사무소였다.얼마전 미국은 베트남과 연락사무소를 교환개설함으로써 관계를 개선시킨 바있다.이처럼 외교대표부의 형태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돼 왔다. ○2차회담서 윤곽 형태보다는 오히려 양측이합의를 하면서 어떤 기능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성격은 달라진다고 외교소식통들은 설명한다.외교대표부의 성격과 형태는 다음달 열릴 3단계 고위급회담 2차회담에서 대체적인 윤곽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북 관계 개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과정에서 정작 핵문제가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져 갈수도 있다는 점은 경계해야할 부분이다.완전 국교정상화까지는 북한의 인권문제,미사일수출,생화학무기,테러국 등 넘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경수로 지원을 한국형으로 한다는데 북한도 묵시적 동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북한의 강석주수석대표는 남북한에는 불신이 있다면서도 『어느나라가 협조하는지는 미국이 결정할 것』이라고 말해 미국의 결정에 따를 것임을 밝혔다. ○「한국형」 묵시동의 한국형 경수로는 남북간 경제협력과 인적교류를 활발히 하는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게다가 남북간의 최초의 대형 사업이라는 점에서 통일비용을 줄이는 긍정적 측면이 많다. 흑연 원자로 건설을 중단하는데 따른 대체 에너지공급은 북한이 원하는 원유공급방식이 될 가능성도 있다.하지만 인접국의 전기공급이 된다면 한국과 일본보다는 중국과 러시아가 참여할 것 같다는 게 소식통들의 예측이다. 합의문 내용 가운데 핵확산금지조약의 복귀문제는 미·북의 해석이 달라 약간의 논란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특별사찰을 겨냥한 핵안전협정의 이행은 북한이 반발하고 있어 핵문제 해결의 복병으로 작용할 소지가 없지 않다. ○특별사찰이 복병 핵안전협정의 전면적인 이행이라는 당초의 합의문 문안이 안전협정의 이행으로 완화된 것도 북한이 강한 반발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러나 북한은 특별사찰없이는 경수로의 지원이 있을수 없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어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우리 정부 관계자들은 기대한다. 미·북이 이번에 합의하지 못한 사용후 연료봉의 궁극적인 처리와 5Mw원자로 연료봉의 재장착문제등은 2차회담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정부의 평가/“남북대화 차질” 청와대,「침묵 항변」/상호사찰·핵 과거투명성 관철 총력 박관용청와대비서실장은 13일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 회담 결과에 대한 논평을 요구받고 「노코멘트」를 발했다.이틀 일정의 여름휴가를 떠나기에 앞서 기자들을 만난 박실장은 『아직 정확한 보고를 받지 못해 뭐라 이야기하기가 어렵다』면서 비행기탈 시간을 이유로 자리를 떠났다.그러나 그시간 회담결과를 「커다란 진전」으로 평가하는 외무부의 공식논평이 발표되고 있었다. ○“커다란 진전” 논평 외무부의 환영논평과 박관용실장의 「침묵」이 우리정부의 이번 회담결과에 대한 2중인식을 상징하고 있다.회담결과가 현실적으로 북한핵 문제의 종국적 해결을 위한 커다란 진전이란 점에 우리당국자들은 동의한다.그러나 회담의 진행과 문제의 해결방식등에서 볼 때 청와대의 시각은 장기적인 남북한 관계를 고려,그다지 유쾌하지 않다.다소간은 감정적인 측면과 남북관계에 대한 장기적인 고려가 청와대의 침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1차적으로 미국정부는 남북관계의 개선과 미북관계의 개선을 연계시키도록 한 우리정부의 「희망」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자주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이를 바탕으로 한반도문제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김영삼대통령의 구상은 실질문제의 진전과는 상관없이 상처를 입은 것으로 여겨진다.북한이 남북당사자간의 대화를 거부하면서 미국과의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려는 것에 대한 우리측의 우려는 이번 회담결과로 현실화된 셈이다. 지난해 11월 워싱턴에서의 한미정상회담에서 우리측이 요구했던 것은 일괄타결의 반대와 남북한 상호사찰에 의한 핵투명성의 확보 등 두가지이다.이번 회담에서 일괄타결 반대의 우리측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비록 이날의 발표가 완전한 합의가 아니라 다음달 23일 재개될 3단계회담 2차회의에서 정식합의될 원칙들이라고는 하지만 그형식은 일괄타결로 진행되고 있다. 청와대의 침묵이유가 공개적인 방법으로 제기되지는 않을 것이다.다분히 감정적인 부분이 있고,미국과 한국지도자간의 자존심싸움의 성격도 지니는 탓이다.그러나 청와대는 8·15경축사에서도 미·북회담에 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을 예정이어서「침묵의 항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침묵은 이번 회담 합의의 구체적 실천과정에서 「강도높은 요구」의 형태로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돈으로 흥정” 이를테면 합의문 제4항인 「NPT잔류와 안전조치협정의 이행」과 관련해 우리측은 이 부분에 남북한의 핵상호사찰이 포함되고,핵과거의 투명성까지 보장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할 것이다.청와대의 한 당국자는 이와 관련해 『기술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충분히 우리의 입지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이는 객관적 상황의 평가라기보다는 우리의 의지와 희망을 밝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경수로지원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청와대의 당국자는 『합의문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경수로지원은 한국형원자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원칙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이 당국자는 경수로지원 과정에서 우리가 바라는 북한의 개방과 개혁의 효과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현실적으로 경수로지원에 드는 막대한 재원의 상당부분을 우리측이 담당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이 과정에서 우리의 뜻을 반영시킬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한국과 미국의 새로운 줄다리기가 다시 시작된다고도 볼 수 있다. 미국과 북한의 일방적인 협상결과와 경수로지원 문제를 연계시켜 한국지갑으로 미국과 북한이 흥정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정부가 진전으로 평가하면서도 떨떠름한 이유가 잘 드러나는 말이다.
  • 8·15의 망언(외언내언)

    일본의 일부각료와 지식인들은 걸핏하면 태평양전쟁과 관련,망언을 늘어 놓는다.74년 구보다(구보전)망언을 시작으로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그렇게 해서 우리국민의 심기를 뒤틀리게 해놓는다.그들은 이러한 망언을 통해 복고적인 군국주의와 우익적인 국수주의를 지향하는 일본국민의 정서에 영합하고 또 그것을 고취한다. 얼마전의 하타정권때 나가노(중야)법상은 「종군위안부를 공창」이라고 망발하는가 하면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대동아공영권의 해방을 위한」것이라고 강변했다.아직도 관련 피해자들이 통한의 아픔을 되씹고 있는 터에 이 무슨 적반하장의 궤변인가.이 망언으로 나가노법상이 해임된 것은 지난 5월.그러나 제2의 나가노는 얼마든지 있다.식민지통치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지역국가에 시혜를 주었다는 망언은 역사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한일정상회담에서나 일국왕의 사과발언에서는 「유감」 「사과」「통석의 염」이란 모호한 수사를 동원하고는 있다.그러나 그것은 극우성향의 각료나 지식인들에 의해 얼마안가 훼손당하고 만다. 이번에는 무라야마(촌산)내각의 사쿠라이(앵정)환경청장관이 또 예의 망언을 터뜨렸다.『전쟁결과 아시아국가들이 독립을 얻었으며 문자해독률도 높아졌고 경제부흥도 이루었다』고. 36년이란 오랜 기간동안의 폭압과 무단정치,비참한 경제적 수탈과 착취,이땅의 젊은이들을 징병과 징용으로 사지에 몰아갔으며 나이어린 소녀들까지 정신대란 이름의 군위안부로 끌어갔던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을 무슨 입으로 변명할 것인가. 또 광복절을 맞는다.49주년.반세기가 흘렀지만 징병·징용·위안부등 당사자에 대한 보상은 여전히 미결의 장으로 남아 있고 강제이주된 사할린동포들의 송환문제도 외면되고 있다.당연히 떠맡아야할 책임은 회피하고 망언이나 쏟아놓는 일본의 지도자들때문에 한국인의 혐일감정은 더욱 심화되는 것같다.
  • 광복 49돌/해묵은 이념갈등 종식을 모색한다/정담

    ◎“「자유민주」 건국이념 통일로 승화돼야”/미군정·독재정권 친일파 수용이 갈등의 불씨/자유민주=보수·민족주의=진보 「기형적 틀」 형성/남북 이념적인 통합기회 없이 분단/6·25 겪으며 반공·반미로 첨예 대립/탈냉전시대 사상논쟁 재연은 역사의 아이러니 올해로 광복 49주년을 맞았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이념을 다시 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김일성사후 주사파문제가 예년에 없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며 해묵은 사상논쟁이 재연되고 있다.새로운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수립을 앞두고 진덕규(이화여대),이택휘(서울교대·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이현희교수(성신여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재조명해보고 현재에 갖는 의미,구현방법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택휘교수=광복 당시 남북한은 모두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국민적 합의도 얻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광복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북한은 구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해 이념적으로 통합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분단이 고착됐습니다.광복전부터 내재해 있던 이념갈등은 그후 심화됐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현희교수=건국이념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내부적으로는 민족광복세력의 왕조체제청산과 미국과 소련등 외세에 의한 영향등을 우선 꼽을 수 있습니다.임시정부가 중심이 됐던 군주제청산은 민주체제로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임시헌장에 절대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나아가 전통사상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삼균주의정신을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광복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건국이념은 올바로 설정되지 못했습니다. ▲진덕규교수=국민적 열망이었던 자주독립정신을 문서에 담은 것이 건국 초기의 헌법입니다.여기에는 의회정치와 개혁적인 경제정책,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선진문화 도입등을 분야별로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같은 헌법정신,즉 건국이념은 이데올로기와 남북갈등으로 인해 반공으로 치우치게 됐고 결국 이데올로기의 경화는 삼균주의와 같은 임시정부의 이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항일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눠 진행됐지만 군주정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이념적인 틀에는 모두 합의하고 있었죠.그러나 45년이후 남북간에 타율적으로 생겨난 이념갈등은 6·25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의 제1 요소로 반공을 부각시켰고 북한은 반미를 들고 나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이같은 갈등은 60년대 국제적인 해빙무드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다 80년대 들면서 서서히 해소됐습니다.45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역학변화가 이번에도 남북에 영향을 줘 급기야 남한에 사상논쟁을 재연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현=광복직후 서구의 특정 이념을 초월해 통합된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졌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하나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국민들의 열망은 그러나 좌우대립으로 멀어져갔고 그 과정에서 남한이 48년 먼저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사회 일각에는 이같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분단고착과 연결지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북한의 주장처럼 단정의 책임이 전적으로 남한에 있는지,또 단정수립이 정말 불가피했는지 등을 짚어봤으면 합니다. ▲진=단독정부수립을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혼자서 주도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역사인식이 아니라고 봅니다.왜냐하면 북한에는 이미 46년 실질적으로 정부가 세워진 것과 다름없을만큼 조직이 정비돼 있었고 남쪽마저 공산정권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진행중이었습니다.그래서 남쪽에서는 북쪽에 대응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했습니다. 게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 미국은 결국 유엔에 남북한 정부수립문제를 위임했고 총선이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선거가 치러진 겁니다.다시말해 처음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획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상황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이어지게 한 거지요.때문에 이승만정권이 단정수립으로 분단을 노렸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역사에 대한 몰이해·반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무정부상태 계속 ▲이현=저 역시 단정수립에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45년부터 48년까지 남로당은 대구폭동,여순반란사건,4·3제주사건등 전국적인 교란작전으로 정국을 무정부상태로 만들었습니다.당시 이승만박사는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이 불가피 하다고 봤고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독당과 접촉을 합니다.한독당은 그러나 남한단독정부수립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가져온다며 반대하며 좌우연립정권 수립을 주장합니다.이박사는 공산세력을 절대로 끌여들여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독당이 불참한 가운데 불가피하게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단정수립 불가피 ▲이택=단정수립이 과연 불가피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대 정치사의 주요 논쟁의 대상입니다.앞에서도 언급됐지만 북한은 46년에 이미 정부조직을 거의 완료해 놓고 남쪽에도 공산정권수립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입니다.사료들을 종합해보면 단정수립의 책임은 상당 부분 북한 특히 소련에 있다고 봐야합니다.그러나 남한도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이박사와 민족세력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설득하고 단정수립을 지연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현=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치안상태와 내외의 역작용을 고려할 때 단정수립은 불가피했다고 정리를 해도 무리는 없겠군요.그렇다면 화제를 최근의 사상논쟁으로 돌려 그 원인과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건국이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진=건국이념의 현재의 의미를 논하기전에 먼저 현실인식과 당위성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단정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까에 대한 가정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겁니다.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합법적인 정부였지만 상해 임정세력들이 제헌의회에 불참하는 등 불완전한 부분도 있습니다.그러나 그후 5·30선거에는 임정세력들도 참여했고 특히 조소앙선생이 최다득표를 얻어 국민적합의가 생겨납니다.강조하고 싶은 것은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을 변하게 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즉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건국이념으로 서의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으로 몰아가는 냉전적 대결성을 가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이쯤에서 왜 이념적 갈등 또는 논쟁이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이 군정의 편의를 위해 친일인사를 수용한 겁니다.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막상 항일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이런 모순된 상황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싹틔웠고 「자유민주주의=보수,민족주의=진보」라는 기형적인 이념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이념적 왜곡은 7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커졌고 지금에 이릅니다.최근의 사상논쟁의 중요배경 역시 미군정과 그후 독재정권이 친일파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친일파처리문제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통성시비를 일으키는 면이 있습니다.대한민국에는 48년부터 50년대 초까지 정부·경찰·학교·법조계등 국가의 중간관료급에 친일파가 다소 남아있었지만 각료의 차관급이상에는 친일파가 비교적 적지않았습니다.그러나 50년대 중반기 이후 중요정책의 결정에 참여했던 고위직에도 친일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이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국가의 1차적인 대결세력를 공산주의자들로,이들과 대립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힘의 응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김일성 집권수단 ▲이현=최근 주사파 학생들은 남북한의 친일파숙청과정을 비교하면서 남한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북한이 광복이후 인민위원회의 주요간부급에 친일파 또는 친일한 혐의가 있는 사람을 모두 배제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북한은 친일파의 숙청을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반대세력을 제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행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택=친일세력들은 6·25전쟁과 5·16혁명을 거쳐 80년대까지 모든 분야에서 충원됐고 이는 이념의 혼란을 가져온 주요 원인입니다.과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30∼40년씩 방치해둬 어렵게 사는 반면 친일세력은 득세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이를 비판했습니다.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일세력이 대부분 일치하자 「이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자연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고 봅니다.대안마련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북쪽의 이념은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된 것처럼 비친 것이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진=한국전쟁이후 3·15부정선거까지만 돌이켜 보아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속성이 얼마나 유린되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로 되돌아가서 이를 확립해 보려는 열망의 표출입니다.그러나 곧 박정희정권의 조국근대화 기치에 눌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빗나갔지만 6월 항쟁을 계기로 다시 국민과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정의실현 ▲진=먼저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민족국가의 개념을 짚어봐야 합니다.민족국가수립의 적시성과 국민적 욕구와 합의가 확보되어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원래 민족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개념입니다.그러나 사회주이는 이를 전략적·수단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택=민주주의는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민주주의의 운영원리는 구성원들 사이에 도덕성과 사회적 정의를 과감하게 실현하기 위해 개혁을 지향하는 겁니다.정부가 먼저 주사파등을 수용,보다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현=반대세력은 용인하되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불순한 사상 제거를 전제로 한 건국이념을 정립해야 합니다.광복이전의 공산활동은 항일운동의 방편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8·15이후와는 구분돼야 합니다.따라서 대단합 차원에서 8·15이전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활동을 한 사람도 독립운동자로포상하는 방안은 검토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단군의 후손으로 「하나였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45년 또는 48년이 아닌 임정의 임시헌법이 만들어진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건국이념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 김계수 광복50주년 기념사업 위원장(인터뷰)

    ◎“왜곡된 역사 재평가에 역점”/민족정신 되살리고 향후 비전 제시/내년 8·15전 총독부건물 철거 노력/남북관계 진전되면 기념사업 공동개최 가능 『내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하에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국민들이 통합의식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정지작업에 최선을 다할 작정입니다』 김계수광복50주년기념사업위원장은 서울신문과의 단독 회견을 갖고 『지난 50년간을 재정리하고 앞으로 50년간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위원회의 할 일』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김위원장과의 일문일답. ­우선 광복 50주년의 의의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우리의 광복 50주년은 미국의 독립 2백주년과 프랑스의 혁명 2백주년과 다릅니다.우리는 광복뒤 지금까지 분단과 6·25를 경험했습니다.또 정치적 사건으로 따지자면 4·19 5·16 12·12 5·17등 기구하고 참을 수 없는 시련이 많았습니다.다시 말해 해방의 벅찬 감격이 곧 사라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광복 50주년이 다른 나라의 기념일과 다른것은 이 때문입니다.특히 미국의 독립 2백주년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미국은 그동안 전통을 잘 확립해온 반면 우리는 분단등 우여곡절로 인해 전통을 확립하지 못하고 국민의식의 형성과 통합에도 실패했습니다.우리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역사를 재조명하고 재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일제하에서 왜곡된 역사를 재평가하고 재확립해야 합니다.그리고 그런 다음에 국민들이 통합의식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정지작업에 착수해야 합니다. ­친일인사들이 독립운동가로 둔갑돼 민족사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민족정신 왜곡의 결과입니다.그런 주장은 지난 50년간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 국민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의식할 수 있는 역사를 재정립한다면 그런 주장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거듭 강조하지만 해방후 50년간의 역사를 바로잡고 비판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우리사회 여러 분야의 공통분모를 추출해 지금의 상황을 종합분석하고 모든 국민이 공통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유대감을 형성해야 합니다.또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서 국민들이 한 덩어리가 돼야 합니다.그런 다음에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광복 50주년은 남북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광복을 기리는 것은 남과 북이 마찬가지입니다.남북관계가 진전돼 판문점이나 개성에서 공동으로 행사를 개최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남북이 함께 기념사업을 거행하는 몇가지 안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공동 개최를 제의할 생각은 없습니다.설사 공동으로 사업을 개최하더라도 현안이 해결되지 않고 화해무드가 조성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원회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무엇입니까. ▲위원회가 직접 관여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광복 50주년에 맞춰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돼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절대로 안된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위원회에서는 내년 8월15일에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더라도 광화문 앞에서 수백만명의 국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를 가질 작정입니다.그런데 총독부 건물이 그대로 옛 모습 그대로 서있어서야 말이 되지 않습니다.총독부 건물이 해체되지 않으면 광복 50주년의 의의가 퇴색할 뿐아니라 행사 자체가 어려워집니다. ­위원회의 활동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지난 3월28일 발족한 이래 25명의 위원 전원이 참석하는 본회의를 5차례 열었고 10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도 11차례나 가졌습니다.분과위 회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하지만 기념사업 성공의 관건은 정부에서 파견된 기획추진반원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사업을 수행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봅니다.위원회는 범국민적 조직이기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국무총리자문기구로 돼있어 정부의 도움없이는 제대로 운영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올해 49주년 행사와 달라지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지난 50년간을 평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나름대로 정리한 「민족선언」의 발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또 책자와 논문의 발간도 고려중입니다.마음이 든든한 것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까닭에 과거를 재평가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데 큰 힘이 된다는 점입니다.정권의 합리화에 몰두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정신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도덕적으로 긍지를 갖고 일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 이승만과 김일성 비교론/김학준교수,남북한단정 두주역을 말한다

    ◎끝까지 항일깃발… 사상적 뿌리 민주주의에/이승만/기독교신자서 마지막 스탈린주의자로 종말/김일성 대한민국 건국 46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삼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 가운데 한 분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국회의장과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박사를 생각하게 된다.동시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는데 앞장서 북한 공산정권의 초대 내각수상으로 북한 권력구조의 정상에 오른 뒤 무려 46년동안 1인장기집권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죽은 김일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똑같은 이북 사람으로 이승만은 황해도에서,김일성은 평안남도에서 각각 태어났다.두 사람은 37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났는데 그러나 차이는 연령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많은 부분들에 걸쳐 있다. 이승만은 조선왕조의 황혼기에 태어나 고전적인 한문교육을 받다가 서울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며 미국 교육을 받았다.이렇게 볼때 그는 미국 교육 또는 서양 교육을 일찍받은 당대의 선진적 소수 지식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은 서양 민주주의와 기독교에 관한 것이었다.그는 상당히 자극됐으며 그리하여 독립협회 운동과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해 싸우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방된 뒤 그는 기독교 청년운동에 종사하다가 도미하여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 학사를,하버드대에서 정치학및 역사학 분야의 석사를,그리고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및 국제법 분야에서의 박사를 각각 받았다.그의 학문적 배경만을 놓고 볼때 당시의 조선사람으로는 단연 정상급의 학자였다고 할 것이다. 이승만은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에서 벌어진 심각한 노선투쟁은,특히 무장투쟁노선을 옹호하는 세력은 외교선전노선을 앞세우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국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수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만들고 이 기구를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운동에 매달리게 했다. 그의 독립운동 방식이 무장투쟁 방식의 시각에서 보면 의미가 줄어들 것이다.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단 한차례도 일제와 타협한 일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항일독립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조선왕조가 무너진 뒤 망국민의 신분으로 태어났다.이승만이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듯 김일성 역시 기독교 집안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그러나 이승만이 평생 기독교 신앙을 지켰음에 반해 김일성은 곧 기독교를 버리고 반기독교적 입장에 섰다는 점이 대조된다. 이승만의 교육적 배경과 활동의 무대가 미국이었음에 비해 김일성의 그것들은 만주였다.이승만이 영어를 모국어나 다름없이 썼음에 비해 김일성이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썼다는 대조도 흥미롭다. 김일성의 교육은 그러나 중학교 퇴학으로 끝났다.그는 곧 중국공산당 당원이 됐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고 그 종착역은 소련극동군의 정보특무 대위였다.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이승만은 만70세의 노인으로 미국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왔다.한편 김일성은 만33세의 청년으로 소련으로부터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승만의 사상적 뿌리는 미국식 민주주의였다.그래서 그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국가 이데올로기,곧 공산주의를 증오하고 소련의 영토적 팽창주의를 경계하면서 소련이 북한을 발판으로 남한까지 공산화시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각심을 가졌다. 여기서 그는 일찍부터 단정론을 들고 나왔다.되지도 않을 남북통일에 연연하다가는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위험성이 크므로.게다가 북한에서는 「소련 점령군의 앞잡이」김일성을 중심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창출되고 있으므로 남한에서도 서둘러 정부를 수립해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김일성은 소련점령군의 북한 소비에트화 전략을 떠받들고 북한에 공산주의 단독정권을 세워나갔다.그는 이 단독적 공산정권이 서고나면 그것을 발판삼아 남한까지 공산화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48년8월15일에는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세워졌고,같은해 9월9일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두 국가는 각각 상대방의 존재를 부인했다.부인할 뿐만아니라 상대방을자신에게 흡수통합시키기위해 무력의 사용도 주저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면적인 선제공격을 가해 온 쪽은 김일성이었다.그는 소련및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50년6월25일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동족상잔을 촉발시킨 것이다. 이승만은 다행히 미국의,그리고 국제연합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진격해 북진통일을 기대할 수 있었다.이 시점에서 김일성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 공산정권의 궤멸을 막을 수 있었다.여기서 전전 원상의 회복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휴전이 성립됐고 이 휴전체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이승만은 권위주의 체제의 길을 걸었다.부산 정치파동과 3선개헌을 거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낳았던 그의 통치는 결국 60년의 3·15부정선거로 귀결됐으며 4·19학생의거에 따른 4월혁명을 만나게 됐다. 대한민국의 조지워싱턴이 될 수 있었던 그는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고,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5년 뒤 그는 유명을 달리한 채 귀국했다. 김일성은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스탈린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고자 했다.그것은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그리고 피치자에 대한 억압과 세뇌였다. 이승만이 하야한 뒤 대한민국에서는 정권이 여러차례 바뀌었다.헌정사에는 굴곡이 적지 않았으며 어두웠던 시절들이 때때로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쌓아올린 건국의 울타리 안에서 대한민국은 결국 민주주의와 번영의 길에 들어섰다.다행스러운 일이다. 김일성의 북한은 한때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앞선 때가 있었다.그러나 1인 장기집권의 억압체제가 반세기 가깝게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활력을 잃게 됐으며 자연히 경제적 침체라는 늪속에 깊숙하게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북한 공산체제의 붕괴론마저 나오는 시점에서 김일성은 마침내 죽었다.이승만의 별세 이후 29년만의 일이다. 48년 이후 남쪽에서는 공화정이 여섯차례나 바뀌었고 최고권력자도 일곱사람이나 나왔다.그래서 대한민국은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교체를 통한 국민적 활력이 살아도 나고 지탱도 되어 선진국을 바라볼 수 있는 민주적 신흥공업국가로 커졌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최고집권자가 전혀 바뀌지 않은채 지내오다보니 세포가 죽어버려 결과적으로 빈곤의 땅이 됐다.이것은 김일성이 역사적으로 너무 오래 살았음을 의미한다.역사와 민족을 위해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권력에서 떠났어야 했다. 이제 미래가 대한민국의 편임이 확실해졌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라는 시대적 흐름을 탄 대한민국으로서 자신감을 갖되 신중하게 남북의 평화통일을 향해 착실하게 전진할 때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두를 필요는 없다.김정일체제의 성격과 방향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우선은 기본적인 교류와 협력의 부문에 돌파구가 열리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년의 8·15는 해방 50주년이면서 분단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역사적 시점이다.남과 북을 통틀어 우리 겨레의 형편이 훨씬 더 개선되기를 바란다.
  • 국내외학자연구로 본 남북단정수립 과정

    ◎“평양 45년말 실질적 공산정권 수립”/「5도인민위」 조직 등 남측보다 3년 더 빨라/“「서울단정」 출발로 분단고착 ” 주장 허구 입증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과 국토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난지 만 3년째 되는 날인 1948년 8월15일 출범했다.비록 해방된 민족의 염원인 「통일 조국」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대한민국의 수립은 민주사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심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일각에는 「대한민국이 38선 이남에 세워진 단독정부」라는 이유로 그 의의를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남아 있는데다 급진세력은 『남한에서 단정이 출범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됐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의 출범에 떠넘기는 이같은 주장이 어느정도 타당성을 갖는지 학계의 연구성과를 통해 알아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남한지역을 통치하던 미 군정과 정치주도 세력이 통일정부를 이룩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단정을 강행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신용하·김학준·진덕규교수등 국내 학자와 미국의 스칼라피노(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이정식씨(펜실베이니아대 교수)등 국내외 학자 대부분이 한반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 학자의 입장은 ▲광복이후의 정국이 남쪽과 북쪽간에 크게 달랐고 ▲남쪽에서는 새로 탄생할 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좌·우의 정파가 극한대립하고 있었던 반면 ▲이북에서는 소련주둔군의 지원아래 공산세력이 「실질적인」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특히 북한지역에서의 공산통치는 현실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남한지역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나름대로의 일정표에 따라 민의를 수렴한 정치단체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으로 남북을 통괄할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가신청한 정당·단체가 4백25개에 이른 예에서 보듯 당시의 남한 정국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이에는 46년 9월의 「9월총파업」,10월의 「대구폭동」등 광복이후 잇따라 발생한 좌익의 준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이북에서는 45년 8월16일 「함경남도 인민위원회」결성을 시작으로 연내에 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등 5개 도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료했다.또 46년 2월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는등 급속히 통치조직을 확립해 나갔다.이 과정에서 소련식 소비에트정권 수립에 반대하는 기독교·지주·지식계층등의 반대파를 일사불란하게 숙청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저서로 유명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마저도 자신의 책에서 『북한에서는 45년 말에 이미 실질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정하는 정도이다.그는 「단정 수립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학파의 대표격 학자이다. 따라서 당시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의 논의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유엔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유엔총회는 「남북한 전지역에서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지만 당초 한반도문제의 유엔상정 자체를 거부했던 소련은 유엔감시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결국 남한의 단독선거를 가져왔다. 대한민국은 48년 5월10일의 총선거,7월17일의 헌법 공포를 거쳐 8월15일 출범했다. 이에 북한은 기다렸다는듯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치르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45년 미·소 양군의 진주로 시작된 영토분단은 48년 체제분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앞서 ▲47년 2월의 「조선인민군 창설」 ▲48년 4월의 「헌법 채택」등 발빠르게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를 다져왔다.막상 정부수립 일자만 한달여 늦었을 뿐 단독정부를 준비하고 이룩한 과정은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빨랐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단정의 분단책임론」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대목이다.
  • 정부 “원천봉쇄”­범추본 “강행”/오늘 범민족대회… 긴장 고조

    ◎경찰 대학주변 2만명 배치/쇠막대·화염병 무장 한총련등 집결 당국의 원천봉쇄 경고에도 불구하고 13일부터 15일까지 「범민족대회 추진본부」측이 범민족대회를 강행할 움직임이어서 경찰과 대회참가자들간의 충돌이 예상되고 있다. 경찰은 12일 『범민족대회는 북한의 「대민족회의 소집」과 같은 맥락의 집회로 남한에 있는 반체제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평화적인 집회를 앞세워 불법 폭력사태로 발전,사회혼란을 일으키려는 불법집회』로 규정,이 대회를 원천봉쇄하기로 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는 이날 상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이와관련,『당국의 불허방침과 관계없이 이 대회를 예정대로 진행하되 남·북한과 해외에서 분산 개최키로 했다』고 밝혔다. 「범추본」은 특히 서울 대회가 원천봉쇄될 경우,3만여명이 13일부터 서울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대회를 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따라 경찰은 범민족대회가 열릴 것으로 보이는 건국대·한양대·연세대·대학로·뚝섬등을 비롯,서울 시내 주요시설과 역,대학주변에 1백70개 중대 2만여명의 경찰력을 배치,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경찰은 특히 이 대회 참가자들이 대학등 대회 개최장소에서 북한의 인공기게양이나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를 내거는등의 이적행위를 할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진압에 나서키로 했다. 이에반해 대학생과 근로자등은 이미 각 대학에서 출정식을 개최하면서 대회 예정지인 건국대·한양대등에 집결하고 있어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경찰은 이들이 화염병 2백여개와 쇠파이프등으로 무장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경찰의 봉쇄를 뚫고 건국대로 갈 것에 대비,홍익대 정문과 주변에 전경 1천5백여명을 배치,이들의 교문밖 진출을 막고 있으며 범민족대회가 홍익대에서 열릴 경우에 대비해 타교생들의 출입도 통제하고 있다. ◎“범민련,북팩스 6회 수신”/경찰 경찰청 보안국은 12일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범추본)에 참여하고 있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결성 준비위원회」가 제5차 범민족대회 추진과정에서 범민련 북측본부,해외본부로부터 모두 6차례에걸쳐 팩시밀리 전송문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민련 남측본부가 지난 4월13일 북측본부로부터 「8월15일 서울 또는 평양에서 범민족대회를 갖자」는 내용의 팩시밀리 전송문을 받은 것을 비롯해 지난 1월 2회,2월 1회,5월 2회등 6차례 걸쳐 팩시밀리 전송문을 수신했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90년부터 매년 불법으로 열려온 1∼4차 범민족대회와 관련,모두 11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으며 연인원 3만8천여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고 말했다.
  • “1조원어치 금괴를 찾아라”/제주 산천단일대 넉달째 박굴작업

    ◎“일군 지하2m 매장설”… 4명이 1년간 계획/21m서 금속성 탐지… 80t행방 밝힐지 주목 「1조원짜리 금괴」 제주시 산천단 곰솔나무(천연기념물 1백60호)인근 지역에서는 「1조원짜리 금괴」를 찾기위한 집념의 지하굴착작업이 연 4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산천단 금괴 발굴작업이 처음 시작된 것은 지난 3월.경기도 부천시에서 소방설비 사업을 해온 이종민씨(50·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등 4명이 제주시로부터 제주시 아라동 392의1과 392의5의 경계지역 6.48㎡에 대한 천연동굴 탐사및 매장물 발굴조사를 위한 토지변경 허가를 얻으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씨등이 1조원짜리 보물을 찾겠다는 야심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은 1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이들은 발굴지역이 2차세계대전 말기 일본군 주둔지로 당시 이곳에서 주방요원과 잡역부로 일했던 사람으로부터 「일본군이 중국,동남아일대에서 강탈한 80여t의 금괴를 일본으로 가져가기에 앞서 곰솔지역에 몰래 숨겨놓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은 발굴허가를 받기위해 제출한 지하매장물 전자탐사시행 심사보고서를 통해 지난해 9월 전자파자장으로 지하 광속물체를 찾아내는 스웨덴제 전자탐사장비인 「와디」(WADI)를 통해 지하 24m지점에 금속체로 추정되는 매장물이 있다는 사실을 탐지해냈다고 밝혔다. 사실 제주지역에서는 그간 이지역에 금괴가 매장돼있다는 풍문이 이어졌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다만 일본군이 주둔했던 사실만이 제주도가 발간한 제주도지(제주도지)등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제주도지에 따르면 일본은 제주도를 본토사수의 최후보루로 설정하고 45년 4월부터 5월까지 관동군 관동군 제111사단(사단장 유천)과 제121사단(사단장 정정)등 중국,북만주등지에서 철수한 7만5천여 병력을 제주에 상륙,주둔시켰다. 이씨등은 산천단에 금괴가 이때 매장됐고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일본군이 10월초부터 11월13일까지 미군 LST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 귀환되면서 그 금괴를 미처 일본으로 옮기지 못한게 틀림없다고 이씨등은 믿고 있다. 이때문은 이씨등은 실제로 지금까지 금괴발굴작업에 5백여명의 인력을 투입했고 1억원 이상의 돈을 장비구입및 인건비등에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등의 굴착방법은 「철재가공 수직굴착 방법」으로,지하 24m까지의 굴착목표중 지금까지 21m를 파내려갔다.특히 지하 21m를 파내려가면서 부터는 굴착지점에서 찬바람이 나오는등 인공동굴이 있는듯한 징후가 나타나 발굴팀들을 설레이게 하고있다. 그러나 이씨등의 이같은 야심이 현실로 실현될지는 미지수.이들도 목표지점에 도달하면 금괴는 안나온다 하더라도 철모나 병기,공공문서등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나 병기등의 발굴로는 투자한 본전을 뽑기에는 역부족. 이씨등은 『금괴가 나온다면 더할 나위없이 기쁜일이겠지만 그렇지않을 경우에는 발굴지를 원상회복 시킨뒤 미련없이 손을 털 생각』이라고 속마을을 감추지 않고 있다. 매장물발굴법에 따라 40%는 국고에 귀속되고 나머지 60%는 발굴자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1조원짜리 금괴는 세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 서울 16개대학/외부집회 금지/학생처장회의

    서울시내 16개 대학들은 10일 재야단체의 8·15범민족대회와 관련,외부단체의 학내집회를 철저히 차단키로 했다. 서울대·연세대등 16개 대학 학생처장들은 이날 간담회를 갖고 외부단체와 연계한 학내집회가 이뤄지지 않도록 외곽을 차단하거나 원천봉쇄하는 등 대학별로 대책을 시행해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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