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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5 대축전」 성사/전노협에 투쟁 촉구

    【내외】 북한 직업총동맹(위원장 주성일)은 17일 전국노동조합 협의회에 편지를 보내 「8·15 통일대축전」 성사를 위한 투쟁을 촉구했다.
  • 비난여론 높자 정면돌파 작전/신당 창당가속화 안팎

    ◎“어차피 맞을 매라면 하루라도 빨리”/양비론 구당파에 “확실한 선택” 압박 당내외의 비판적여론의 역풍에도 불구하고 신당창당방침을 굳힌 김대중아태재단이사장측은 휴일인 16일 창당실무작업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이날 아침 김이사장의 핵심측근들로 구성된 11인실무위원회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모임을 가졌다.이들은 17일부터는 내외문제연구회 회장단과 고문단,기획위원들이 포함되는 「창당기획단」으로 확대개편,실무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실무팀회의로서는 마지막이었던 이날 11인회의에서는 전날 여의도 63빌딩에서 김이사장주재로 열린 「17인중진회의」의 신당창당 최종결정에 따라 실질적인 창당준비작업을 깊이있게 논의했다고 박지원의원이 밝혔다. 관심을 모으고 있는 김이사장의 기자회견내용은 정계은퇴선언번복에 대한 대국민사과와 신당창당의 불가피성,그리고 21세기에 대한 비전제시등 대략 세부분으로 하고 회견문안은 가급적 짧게 하기로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이종찬고문은 이와 관련,『김이사장은 회견에서 정계은퇴선언을번복하게 된 솔직한 심경을 토로,대국민사과를 하고 신당창당을 강행하게 된 배경과 향후 당운영방침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권노갑 부총재등 김이사장 핵심측근 의원들은 이날도 몇명씩 조를 짜 아직까지 신당동참을 주저하고 있는 관망파및 중도파를 대상으로 설득작업을 벌였다. 이처럼 신당파가 잰걸음으로 창당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우선은 김이사장의 정계복귀에 따른 빗발치는 비난여론과 구당모임등 당내의 거센 반발등에 대한 맞불작전으로 풀이된다.정면돌파작전인 셈이다.비난여론의 경우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는 반응으로 어차피 직면할 따가운 눈총은 한번은 거쳐야 할 「통과의례」고 그것도 빨리 거치는게 낫다는 생각이다.무엇보다 창당후 정기국회 의정활동등에서 소속의원들이 「빛나는」 활약을 하면 충분히 만회될 것으로 믿고 있다. 또 아직까지 양비론 입장에서 신당에 부정적인 구당파들에게 확실한 선택을 강요하는 측면도 내포돼 있다.「몸값 올리기」를 그만하고 빨리 들어오라는 「수신호」인 셈이다.오월동주격인 구당파의 결속력이 약하다는 판단에 따른 전략이다. 거기다 구당파중 일부가 민주당에 남을 경우 이총재와 구당파들간에 치열한 당권투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 민주당은 재기불능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있다.바로 그 점도 노린 것같다. 나아가 신당추진세력의 내부결속강화용으로도 비쳐진다.아직 신당파중에는 구당파의 명분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따라서 여러 부정적인 견해들을 잠재우고 일사분란한 김대중체제를 착근시키기 위해서는 신당호의 조기발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당파는 18일 창당선언직후 곧바로 창당주비위를 발족시킨다.다음주에는 창당준비위로 확대개편,지구당창당작업에 박차를 가한뒤 8월15일 창당한다는 목표다.창당주비위원장에는 이종찬고문이 거명되고 있다.호남당이미지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계산이다. 하지만 신당파는 어느정도 가시적 골격이 짜여지고 나면 완급을 조절할 것같다.민주당의 내분상황을 지켜보기 위해서다.구당파가 이기택총재를 몰아내고 당권을 장악하면 이들과의 합당을 모색하기 위해서다.내년 4월 총선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될지 미지수지만 일단 「김대중신당」은 창당작업은 순탄하게 진행될 전망이다.
  • 오늘 남북 2차 쌀회담 북경서/이석채 단장 어제 출국

    정부는 15일부터 북경에서 열리는 2차 남북당국간 회담을 위해 이석채재경원차관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 7명을 14일 북경현지로 파견했다. 우리측 회담대표단은 이에 따라 15일부터 전금철 대외경제협력추진위고문을 수석대표로 한 북측대표단과 대북 쌀지원문제를 비롯,남북간 경제협력문제를 중점 논의한다. 정부는 이와함께 이번 회담에서 ▲경제공동위 개최문제 ▲피랍된 우성호선원의 송환을 포함해 4백40여명에 이르는 북한억류자의 조기송환 ▲이산가족문제 해결 ▲8·15를 계기로 남북문화예술단 교환방문및 상호 친선체육경기 개최사업등을 거론,북한측의 호응여부를 타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 문화재급 서화·도자 170점 귀국전

    ◎일·중등서 수집… 20일부터 부산 진화랑서/정선 「귀거래도」·김홍도 「만폭동 명경대도」 포함/남리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엔 영조 친필 화제 해외로 유출되었다 돌아온 고미술 명품 중심의 특별전인 「서화 도자 명품전」이 오는 20일부터 8월15일까지 부산 진화랑(대표 진이근)에서 열린다.이 전시회는 문화재급 명품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서화의 경우 조선왕조의 르네상스시대로 통칭되는 영·정조 연간(1725∼1800년)에 집중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전시될 서화 도자 1백70점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영조의 친필 화제가 들어있는 남리 김두량(1696∼1763년)의 그림 「삽살개」.일본인 소장자로부터 입수해 들여온 「삽살개」는 이번 전시에 함께 선보일 「제가명품화첩」중 하나로 당시 이 화첩을 꾸몄던 소장자가 「삽살개」만을 따로떼내 표구한 것으로 보인다.「삽살개」그림 상단부에는 영조가 친필로 쓴 「사립문에서 밤을 지킴이 네 소임이거늘/너는 어찌하여 길에서/대낮에도 짖어대느냐」는 내용의 화제가 적혀있다. 동주 이용희는 「한국회화소사」(1972년 서문당간)에서 이 「삽살개」가 대영박물관에 소장돼있다고 밝힌바 있는데 어떤 경로를 통해 일본인 소장자가 입수했는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남리가 활약했던 영조연간은 연행사 등을 통해 들어온 서양화 기법의 원근·명암법이 화원사회에 전파된 시기였다. 이와함께 영·정조 연간 작품중 일본에서 들여온 겸재 정선의 「송음납량도」,「백악취미대」,현재 심사정의 「하경산수도」,표암 강세황의 「약즙도」,단원 김홍도의 「만폭동·명경대도」 「비선검무도」,가 이번 전시회에 나온다.중국에서 입수한 겸재의 「귀거래사」도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귀중품이다.이 작품들은 산수를 주로 그린 것들로 특히 겸재 정선의 「백악취미대」나 「송음납량도」,단원 김홍도의 「만폭동·명경대도」는 당시 진경산수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것들이다.또 춘의짙은 속화로 널리 알려진 혜원 신윤복의 작품 「어촌낙조」도 처음으로 선보인다.
  • 북한 공산정권 수립(새로쓰는 한국 현대사:26)

    ◎대의원 선거 흑백함 놓고 전형적 공개 투표/북노당 출신 당권장악 하자 남노당측 불만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38이북의 공산주의자들도 자체 정권 수립을 서두른다.단독정부 반대,통일정부 수립이란 명분을 내세워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입북과 5·10총선거를 거부했던 그들로서는 자체 정부 수립을 더이상 늦출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정권수립을 일찍부터 준비해온 만큼 막상 그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7월달 초에 이미 결정 1948년 8월25일 북한 전역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이 날짜는 7월9·10일 열린 북조선 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이미 결정난 것이었다.8·25선거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먼저 「친일분자 제외」라는 명목아래 반대세력의 선거권·피선거권을 빼앗아버렸다.또 인구 5만명에 하나꼴인 2백12개 선거구의 출마자를 미리 지정하고 이에 대해 찬반을 묻는 흑백함선거를 실시했다.흑백함선거란 투표장에 흑백 2개의 투표함을 설치해 찬성자는 흰 함에,반대는 검은 함에용지를 넣는 전형적인 공개투표 방식이다.더욱이 주민들을 직장·마을별로 집단 동원한데다 병자·노약자에게는 투표함을 들고 찾아가 투표를 시켰다.말하자면 투표를 하지 않을 자유마저도 박탈한 비민주적인 선거였다.따라서 유권자 4백52만6천65명 가운데 99.97%인 4백52만4천9백42명이 참가해,98.49%가 찬성표를 던진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나왔다. 어쨌든 2백12명의 대의원이 선출됐고 여기에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에서 미리 뽑은 남쪽의 대의원 3백60명을 합쳐 제1기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됐다.「해주회의」는 북한정권이 남한 주민의 의사까지 모두 수렴했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마련한 행사였다.48년 7월 남한 각지에서는 인민 대표를 뽑는다는 지하선거가 남로당 주도로 실시됐다.여기서 선정된 대표들은 해주에서 8월21일 대회를 열어 최고인민회의 남쪽 대의원을 선출했던 것이다. 9월2일 최고인민회의가 개막돼 의장에 허헌 남로당 위원장,부의장에 김달현(천도교청우당 위원장)과 이영(근로인민당 부위원장)을 각각 선출했다.둘째날에는 대의원 5백72명에 대한 자격심사 결과를 발표했다.대의원 가운데 여자는 69명으로 12.1%이고,연령은 30∼40대가 2백32명으로 가장 많았다.성분별로는 농민(34%),사무원(26.7%),노동자(20.9%)순이었으며 특이하게도 전지주가 1명 있었다. ○각본대로 선거 연출 한편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와 8.25선거를 각본대로 연출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북한정권 수립 작업은 그러나 곧 암초에 부딪힌다.내각 구성을 놓고 북로당과 남로당 사이에 권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남쪽에서도 내각이 구성된 뒤 불만을 품은 한민당이 야당으로 돌아선 일이 있지만 북쪽 사정은 훨씬 심각했다.내각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바로 정권장악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연일 회의를 열어 내각 구성을 논의했다.먼저 각 성의 상(장관)을 어떤 비율로 나누느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남로당은 대의원 숫자를 감안,남북이 6대 4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결국 남북이 절반인 10명씩 맡기로 결정했다.그러나 실제 남로당과 북로당이 차지한 자릿수는 크게 차이가 났다.북쪽을 완전 장악한 북로당은 지분 가운데 9석을 가졌지만 남로당은 남쪽지분 중 5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나머지 5석은 기타 정당들이 나눠가졌다.내각 구성에서 북로당은 남로당을 압도한 셈이다. 비율이 정해진 뒤 구체적인 인선에 들어가자 갈등은 증폭됐다.내각 수상은 소련에서 점지한 김일성으로 이미 정해졌고 부수상 3명도 남의 박헌영과 홍명희,북의 김책 등으로 쉽게 결정됐다. 정작 문제가 된 자리는 사법상이었다.남로당은 최용달을 사법상으로 추천했다 북로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다시 이승엽을 내세웠다.이에 대해 북로당은 『이승엽이 남쪽에서 할 일이 많으므로 무임소상이 알맞다』고 주장했고 남로당은 『그가 남로당 현지 지도부를 맡았던 지도자이므로 권위있는 자리를 줘야 한다』고 맞섰다. 외무상 자리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북로당은 주영하를,남로당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 지낸 남한출신 이강국을 각각 추천했다.양쪽은 외무상이 남쪽 지분임을 인정,부수상 박헌영이 겸직한다는 선에서 타협했다.주영하는 교통상으로 자리를 바꿨고 신진당 출신 이용이 도시경영상으로 결정됐다.내각 구성 논의는 「인민공화국」선포 하루전까지 계속됐고 몇몇 자리는 김일성에게 인선을 위임했다.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는 김두봉이 내정됐다. ○주로 연안파가 득세 북한 공산정권의 첫 내각과 주요 직책 명단은 다음과 같다.(★표는 남쪽 출신)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 홍명희(★) 김책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민족보위상 최용건▲국가검열상 김원봉(★) ▲내무상 박일우 ▲외무상 박헌영(★) ▲산업상 김책 ▲농림상 박문규(★) ▲상업상 장시우 ▲교통상 주영하 ▲재정상 최창익 ▲교육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이승엽(★) ▲문화선전상 허정숙 ▲노동상 허성택(★) ▲보건상 이병남(★) ▲도시경영상 이용(★) ▲무임소상 이극로(★) ▲최고재판소장 김익선 ▲최고검찰소장 장해우 ▲법제위원회 위원장 허헌(★). 내각이 구성되자 남로당은 큰 불만을 품게 된다.숫적으로도 열세인데다 비교적 힘있는 자리들을 대부분 빼앗겼기 때문이다.특히 연안파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내무·재정·문화선전상 등을 거머쥔 것에도 못미친다고 판단했다.이같은 불만은 정권 수립후 여러 형태로 노출됐고 드디어는 김일성과 박헌영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돼 남로당파의 몰락을 불러오게 된다. 9월8일 최고인민회의 5일째 회의에서는 「인민공화국」헌법을 승인하고 즉시 「전조선 지역에서 인공헌법을 실시한다」고 공표했다.이어 ▲그동안 북한을 통치해온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정권이양 선언 ▲최고인민위원회의를 이끌 상임위원회 위원장 및 위원 선출 ▲새 수상에 김일성 선출 및 조각 위임등 각종 요식절차를 끝냈다. 1948년 9월9일 상오 10시.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최고인민회의 6일째 회의가 열렸다.김일성이 등단해 조각 결과를 발표하자 대의원들은 박수로 승인했다.김일성은 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을 정식 선포했으며 그 자리에 모인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열렬히 환호했다.일제로부터 벗어난지 3년,남쪽에서 대한민국이 출범한지 25일만에 북쪽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별도의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노동당중앙위 출당 결정서/반대세력은 현 일·반동지주로 몰아 숙청/당 추천 국비생 부친 경력까지 면밀 분석/「반공」 혐의 드러나면 “파렴치범” 추가시켜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광복과 함께 38이북 지역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친일분자니 반동지주니 갖은 구실을 붙여 무자비하게 숙청했다.따라서 1948년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할 당시 이렇다 할 반대파는 북한에 존재할 수 없었다.설사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국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찾아낸 한장의 출당 결정서는 당시 실정을 실감나게 보여준다.「19 47년 10월29일 북조선노동당 중앙검열위원회 상무위원회」명의로 작성되고 「절대비밀」 도장이 찍힌 이 결정서는 한재련(당시 25세)이라는 청년당원을 쫓아내는 이유를 밝혔다. 한재련은 당시 25세로 김일성대학 역사문학부 철학과 1학년이었다.당의 추천을 받은 국비생이었고 민청 중앙위원,당세포책임자를 맡은 촉망받는 공산주의자였다.그런 그가 쫓겨난 이유는 간단하다.출신성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결정서는 먼저 한경련이 ▲해방후 한달동안 신민당에 몸담은 적이 있으며 ▲부친이 일제 때 10년동안 형사로 활동했음을 지적했다.결국 공산주의에 반대한 신민당 입당 경력이나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성분을 뒤늦게 알게 돼 쫓아낸다는 뜻이다. 결정서는 이와 함께 「학습에 태만하고 음주 방탕하였으며」,「학교 공금 1천5백원을 횡령했다」는 등의 이유도 덧붙였지만 이는 한경련을 파렴치범으로 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출신성분이 좋지 않으면서도 국비생에 당의 중책까지 맡은 사람이라면 개인적인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경련은 유명한 인물이 아니어서 출당후 그가 어떻게 살아갔는지 알 길은 없다.다만 해방이후 6·25전쟁 때까지 수백만의 북한 동포가 공산정권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듯이 그도 어느땐가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넘어 대한민국 땅에 정착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 민자 「개혁후퇴론」에 경고/김 대통령 “개혁불변” 강조의 함축

    ◎인사권 용훼한 여권을 겨냥/당정개편·시국수습 가늠자 김영삼 대통령이 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변화와 개혁 불변」을 강조한 것은 크게 두가지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하나는 개혁추진의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다.또 하나는 대통령이 국정을 이끄는 핵심 권한인 인사권을 중구난방 용훼하지 말라는 여권 내부를 향한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김대통령은 지방선거이후 여권 일각에서 『대통령의 개혁때문에 선거에 졌다』는 소리가 나온 것을 크게 불쾌해하고 있다고 한 관계자가 전했다.개혁의 추진방법,절차는 바꿀 수 있어도 개혁의 당위성 자체가 훼손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 또다시 공무원 부정이 연루되어 있는 것에도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역시 지속적 부정부패 척결만이 「신한국」을 보장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다짐케 하는 대목인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에 따라 광복50주년의 8·15 광복절에 단행될 것으로 예상되던 대사면·복권의 방향이 바뀔 가능성도 비쳐지고 있다.정치적 이유로 원칙없이 사면복권을 단행한다면 과거의 비리로 사정 대상이 됐던 인사들이 마치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것처럼 비쳐질 소지도 있다고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지적했다.아직 시간이 남았으므로 충분한 토의와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청와대측은 또 민자당의 일부 의원들이 당직개편을 넘어 내각,심지어 청와대참모진의 진퇴까지 거론하는데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이미 민자당 의원들을 포함,각계 인사들을 광범하게 접촉하면서 시국수습방안에 관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당정개편도 그 방안의 성격에 따라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각에서 『대통령만 빼고 모두 바꿔야 한다』,『누구는 반드시 바꿔야 한다』,『당대표를 경선하고 부총재직을 신설한다』는등 인사권자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 나오는 것은 누가 봐도 심각한 상황이다.심지어 당정개편의 시기와 폭,인선기준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되는데 어이가 없다는게 청와대쪽의 반응이다. 지방선거 결과를 겸허하게 수용한다는 김대통령의 자세에는 변함이 없다고 청와대의 고위관계자는 밝혔다.당정개편을 포함,일련의 시국수습책이 검토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서릿발 개혁」보다 「따뜻한 개혁」이 우선 순위에 올 수도 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만간 최종결심을 하게될 김대통령이 변화와 개혁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 여권의 시국수습책(「6·27」이후 정국:6)

    ◎8·15 대사면·남북관계 전환책 강구/「민심 되돌릴 카드」 찾기 여론수렴 부산/당정 새진용 구축… 분위기 쇄신 도모 여권은 뼈아픈 결단을 내렸다.중앙정치와는 무관하다고만 주장해온 입장에서 벗어나 지방선거 패배를 과감히 인정하고 거기에 담긴 채찍의 메시지를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그러나 막상 마땅한 후속조치가 찾아지지 않는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지방선거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권의 당면목표를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대형사고의 재발을 막고 돌아선 민심을 다독거려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압축해 설명했다. 『말이 쉽지 실천은 어렵다』고 고위관계자 스스로도 실토했다.방법론이 중구난방으로 제기되고 있다. 정부·여당이 곤혹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분위기를 바꾸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당정개편이다.여권의 핵심진용을 정비하자는 주장이 민자당을 중심으로 거세게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청와대의 기류는 다르다.사람을 바꾼다고 문제가 풀린다면 이론이 있을 수 없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비서관은 『당장 민자당 당직자,그리고 총리 이하 장관 전원을 교체한다 해서 민심이 수습되겠느냐.또 내년 총선 승리가 보장되겠느냐』고 반문했다.큰 틀에서 본질적 문제 해법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여진이 언제까지 갈지 예측하기 힘든 것도 『서두르지 말자』는 신중론에 힘을 더해주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은 이미 정국수습을 위한 여론수렴작업에 착수했다.외빈접견 외의 일정은 대부분 취소하거나 보류시켰다.대신 민자당 중진의원을 비롯,각계 인사와의 비공식만남을 늘리면서 폭넓게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 지난 3일 김윤환 민자당총장과 오찬을 한 것을 시작으로 4일 이한동 국회부의장을 청와대로 불렀다.5일에는 황낙주 국회의장과 장시간 전화통화를 했다. 김대통령의 정국수습구상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8월15일 전후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임시국회회기,삼풍사고 마무리,그리고 김대통령의 7월말 방미일정을 감안한 것이다. 8월 들어 여름집무실 청남대에서의 「구상」이 예년과 달리 범상치 않을 전망이다. 김대통령이 구상이 펼쳐질 날로는 금년이 광복50주년을 맞는 해라는 점에서 8월15일이 주목된다.또 8월25일은 김대통령의 임기가 꼭 절반에 이르는 날이어서 중요한 조치의 날이 될 가능성이 있다. 8·15에 사상 최대규모의 사면복권이 계획되고 있다는 것은 정부당국자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새정부 들어 숙정된 5·6공 인사 다수가 정치적·사법적 사면복권이 되리라는 전망이다.만델라 남아공대통령의 「흑백대화합정책」이 상기되기도 한다. 8·15에는 또 남북한관계에 획기적 제안이 나오거나 회담이 이뤄질 수도 있다.남북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을 주목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7월15일부터 북경에서 열리는 2차 남북쌀회담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법개혁·교육개혁을 마무리짓는 일도 있다.이제까지는 법조인을,또 공무원 나아가 국민을 개혁의 대상처럼 느끼게 만든 것에서 탈피,모두가 주체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모종의 흔쾌한 조치의 구상도 가다듬고 있다. 정가의 관심이집중되고 있는 당정개편의 시기와 폭은 김대통령의 의중에 달렸을 뿐 그 누구도 쉽사리 점치기 힘들다. 상식선에서는 김대통령의 집권 2기가 시작되는 8월말이 당정의 면모일신의 시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집권 후반기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정부와 청와대인사중 총선출마희망자를 당으로 빼주는 시점도 8월말∼9월초가 적절하다. 현재 거론되는 개편론은 주로 민자당측 희망의 성격이 짙다.특히 김윤환총장은 나름대로 개편안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그 내용과 김대통령의 수용여부가 주목된다. 민자당의 몇몇 인사는 김대중·김종필씨의 지역득표력을 인정하고 현실적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힌다.화해를 겨냥하는 견해다.지역별로 5인정도의 부총재를 임명해 총선의 지휘책임자로 맡기는 방안도 거론된다. 지역할거 배제를 위해 일각에서 제기되는 국회의원 중·대선거구제 도입도 하나의 검토대상이 될 전망이다.
  • 개혁,의료·복지 등 사회분야 중점/한승수 비서실장 일문일답

    ◎남북관계 발전속도 주의깊게 보길 한승수 청와대비서실장은 6일 출입기자들과 기자간담회를 가졌다.청와대 참모진이 익명을 전제로 하지 않고 기자들을 만난 것은 이례적이다. 다음은 한실장과의 일문일답. ­청와대비서실 개편은. ▲김영삼 대통령께서 지방선거 결과와 관련,「부덕의 소치」라고까지 말씀하신데 대해 수석비서관 모두는 전적으로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느끼고 대통령에게 글로 사표를 쓰기보다는 사의를 표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김대통령은 이를 전해듣고 『심기일전해 열심히 일하라』고 말씀하셨다. ­민자당에서는 당정개편과 관련된 여러 얘기가 있던데. ▲당은 사무총장이 새로 임명돼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잡히지 않았느냐.임시국회가 15일 끝나면 22일부터는 대통령의 미국방문 일정이 있다.당정개편문제에 있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전에는 힘든 것 아니냐. ­8월이후로 당정개편이 늦어지면 폭이 커지는 것 아니냐. ▲늦거나 빨라진다고 폭이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적절 시점에 적절 규모로 할 것으로 본다.그러나 (8월에) 있을지 없을지조차 나는 모른다. ­앞으로의 개혁방향은. ▲사회정책 분야의 개혁이 중점 추진될 것이다.아프기만한 개혁이 아니라 의료·복지 등 생활의 질을 높여 일반 서민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는 개혁이 이루질 것이다. ­대통령 미국방문 혹은 8·15때 화합조치 등 정국수습방안이 나오나. ▲남북문제 관련 얘기,그리고 사면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남북관계는 그 발전속도를 주의깊게 봐야 할 것이다.그러나 미국 가서는 남북문제 등을 거론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 「5·18 내란」 무혐의/검찰,불기소 결정/권력찬탈 의도 없어

    ◎공소시효 기산점 8월16일로 「5·18」고소·고발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 부장검사)는 6일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을 비롯한 이 사건 관련자들의 내란혐의에 대해 「혐의없음」등 불기소처분 결정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같은 내용의 수사결과를 빠르면 다음주 안에 발표할 예정이다. 검찰관계자는 이날 『내란죄의 범죄구성 요건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의 폭동이 있고 무엇보다 권력찬탈 의도가 입증돼야 한다』면서 『고소·고발된 사안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때 내란죄를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와 관련,『보안사의 「집권계획서」라는 문건 자체의 존재여부도 확인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화평·허삼수·권정달씨 등 당시 보안사 핵심간부들에 대한 조사결과 「5·18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군투입은 시국수습을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계엄법 등 실정법에 근거한 조치였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뤄 당시 신군부측의 권력찬탈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또 이 사건 공소시효의 기산점은 80년 5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로 결국 최전대통령이 하야한 같은 해 8월16일로 잡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했다.이에 따라 이 사건은 오는 8월15일 내란죄의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된다. 고소·고발인들은 검찰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불복할 경우 항고·재항고를 거쳐 헌법소원을 낼 수 있으나 남은 기간은 1달에 불과한 실정이다. 검찰은 지난해 12월부터 피고소·고발인 58명에 대한 소환 또는 서면조사를 모두 끝냈지만 핵심 참고인인 최전대통령에 대해서는 최전대통령의 조사거부로 조사하지 못했다.
  • 국민 공감대바탕 국정 이끌듯/김 대통령 6·27민의 수용의 함축

    ◎개혁추진과정 공개… 여론 적극 수렴/구여권 등용 확대… 「정치적 복권」 검토 5일의 청와대비서실은 매우 침울했다.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민자당 의원들을 불러 조찬을 하면서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내 부덕의 소치』라고 말했다.언제나 당당했던 김대통령에게는 하기 힘든,그리고 잘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참모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김대통령이 그 정도까지 얘기를 했다면 무언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무엇인가 「중요한 조치」가 있을것으로 점쳤다.이날 조찬에서도 김대통령은 『위기일 때 기회 역시 있는 것』이라고 말해 정국 타개를 위한 복안이 검토되고 있음을 시사했다.한 수석비서관은 『김대통령의 오늘 말씀에 모든 것이 언급되어 있다.거기에 사족을 붙이지 말고 그대로의 뜻을 새겨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김대통령의 조찬발언은 앞으로의 정국 전개와 관련,중요한 시사를 하고있다.김대통령은 이날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했음을 처음으로 인정했다.지방선거전이나선거직후 『지방선거는 중앙정치 차원에서 승패를 따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온 것과는 차이가 있다.논리적으로는 타당한 언급인데도 다수 국민,특히 정치권이 선거결과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을 무시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대통령은 또 선거결과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자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특정집단이나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모두가 책임을 공유하고 큰 틀에서 난국을 헤쳐나갈 의지를 보인 것이다. 김대통령은 「민심이 상당부분 여권에 등을 돌렸다」「책임은 공유해야 한다」는 상황인식에 따라 정국수습책을 강구할 것으로 예상된다.이날 조찬 대화에서 그 방향도 제시되었다.『변화와 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국민과 함께하는 개혁을 하겠다』는 게 요지다. 김대통령의 언급은 『국정기조는 유지하되 운영방법은 다소 바꿀 수 있다』는 쪽으로 풀이된다.많은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개혁추진 과정을 지금보다 공개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론을 수렴하는 방안이 있을수 있다.5·6공 인사의 등용폭 확대,혹은 정치적 사면복권 조치등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서는 8·15를 전후해 정국분위기를 바꾸는 조치를 취하는 방법도 있다. 김대통령은 이날 「세대교체」「지역할거주의 타파」는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그러나 세대교체를 통해 지역할거주의를 극복한다는 김대통령의 결심은 확고한 것으로 전해진다.한 관계자는 『세대교체는 김대통령이 이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단계』라고 예고했다.세대교체문제가 향후 김대통령의 정국타개책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민자의원·당직자 청와대 조찬 대화록/민심이반 심각 인식… 새출발 각오필요­당직자들/내 부덕의 소치… 선거결과 겸허히 수용­김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은 5일 상오 청와대에서 민자당 소속 의원 및 당무위원들과 함께 조찬을 하면서 정국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다음은 이날 대화록 요지. ▲이세기 서울시지부장=지방선거에서 민심이 이반된 현상이 있었고 그 틈사이로 지역감정이 스며들었다고 생각한다.호남에서는 DJ바람,충청에서는 JP바람이 불었고 서울에서는 두바람이 맞바람이 돼 돌풍을 일으켰다.우리는 이 바람을 너무 과소평가했다.통합선거법을 지키다보니 조직을 충분히 가동하기 어려웠다.결과에 대해 겸허히 수용하고 새로 시작하는 입장에서 출발해야 한다.당에 힘을 실어줄 것을 건의한다. ▲서정화 인천시지부장=인천시장선거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그 이유는 민심의 이반이고 지지기반인 중산층의 지지를 잃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어려울 때일수록 결속해야 한다.당의 의견을 들어달라. ▲정시채 전남도지부장=당정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야 한다.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김대통령=삼풍백화점사고에 대해 처참한 심정이다.돈이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악덕배가 있어서는 안되겠다.처음부터 모래,골재 할 것 없이 부실한 공사였다.정부는 이들을 살인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의 심정을 이해한다.정부가 이러한 사건과 관련,중형을 내리는 법개정안을 곧 제출할 예정이다.이번 국회에서 통과시켜주기 바란다.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삼풍사고를 잊지 말자.부정·부실공사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당초 이번 지방선거에서 너무 이겨도 안되고 너무 져도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졌다.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이것은 국민의 뜻이고 하늘의 뜻이다.민심이 천심이라고 하지 않는가.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그래야만 당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다.국민이 민자당에 무서운 채찍을 보냈다고 생각한다.나는 대통령이자 당총재로서 내 부덕의 소치다. 나는 평소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편이고 듣기 싫은 소리도 듣고 있다.청와대 참모진 중에 듣기싫은 소리,직언하는 사람이 있다.당만 하더라도 이춘구 대표로부터 듣기싫은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이다.내게 바른 말이 안들어간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휴일이면 많은 사람에게 전화해 그들의 얘기를 듣기도 한다.때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도 얘기한다.앞으로 국민의 소리를 더 귀담아 듣도록 하겠다. 나자신 과거에 절망적인 상황을 많이 겪었다.어떤 때는 사람들이 『김영삼이 다 죽었다』고 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나는 한번도 좌절하거나 절망한 적이 없다.반드시 쟁취하겠다는 투지만 있으면 전화위복을 만들 수 있다. 앞으로 변화와 개혁은 계속 추진할 것이다.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변화없이 국민에게 꿈을 줄 수 있겠는가.잘못된 것을 고치는 개혁없이 진보가 있을 수 없다.다만 앞으로 개혁은 국민과함께 하는 개혁을 하겠다.어느 누가 뭐래도 단호하게 이 방향으로 나가겠다. 8월25일이면 임기가 절반이 지나는데 이제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내가 한 일에 대해 국민이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남북문제만 하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한반도의 평화 이상 중요한 것이 없다.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고 국민들이 다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민자당이 단합해서 집권당으로서 책임있는 행동을 해주기 바란다.이대표를 중심으로 당이 단합하기 바란다.위기는 기회로 통한다는 말을 믿고 모두 용기와 자신감을 갖기 바란다.
  • 미군정의 공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4)

    ◎자국입장 살리며 한국군정 수립에 큰 기여/기득권층 흡수… 일제잔재 청산의 걸림돌로 미군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공식출범하는 것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1945년 9월9일 미군정이 시작된지 3년여만에 군정이 종식된 것이다.미군정은 이보다 앞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으로부터 경찰과 해안경비대,국경수비대의 지휘권을 포함한 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하고 있는 모든 직무에 대한 이양요청을 받았다.주한미군사령관은 8월11일 이에 동의하고 이양절차를 신속히 밟기 시작했다. ○좌우익대립 평정 공헌 그러나 미군의 완전철수는 다음해인 1949년 6월29일에 이루어졌다.5백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겼으나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이렇듯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미군정 3년여는 이 땅에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그렇다면 해방공간에서의 미군정의 공과는 무엇일까.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한국현대사,이른바 해방정국사를 푸는 중요한 키 노트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평가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다만 자국의 입장을 최대한 살리는 범위에서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을 추진한 미군정은 결국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를 수립시켰다는 잠정적 결론을 도출해내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미군정은 이승만을 전면에 부상시킬 의도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래서 5·10선거 직전까지도 김규식에 기대를 걸었다.그리고 실제 국회의원 선거(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이승만을 낙선시키려는 공작도 했다. 어떻든 미군정은 이승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규식이 정계은퇴 의사를 분명히 하는 바람에 싫든 좋든 간에 이승만의 등장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이승만과 경선하기 위해 밀었던 전 미군정 경무국장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을 취소시켰다.이에따라 5·10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한 이승만은 확고한 정치적 발판을 굳히고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이 등장한 마당에서 미국이 그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동서대립의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그만한 인물을 찾기도 실상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미군정이 좌우익 대립을 어느 정도 평정한 것은 군정의 공헌쪽에다 비중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이렇듯 혼미한 해방공간에서 45년 12월 경찰이 창설된데 이어 46년 1월에는 국방경비대가 창군되었다.미군정의 병력과 경찰력의 확보는 정치세력,특히 좌익의 극단적 움직임과 연관성을 갖는다. ○한민당계 인사 큰 혜택 군에는 광복군 출신을 비롯,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이 포진했다.이 가운데 일본군 출신들이 두각을 드러내 군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해버렸다.경찰의 경우도 조선총독부 시절의 인물들이 그대로 끼어들었다.이는 미군정이 일제치하의 경찰을 좌익색출에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실제로 경찰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폭동,3·1절 좌우충돌,3월 총파업,4·3사태를 진압하는데 공헌했다.또 일본군 출신을 주축으로 한 군 역시 46∼50년까지 발생한 반란사건 진압과 토벌의 주력이 되었다. 미군정은 정부수립까지 가는 험난한 길을 걷는데 일제시대 기득권층을 그대로 흡수한 측면이 없지 않다.이는 정부수립 후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했다.해방 원년 일본인 관리들이 물러난 자리에 7만5천여명의 한국인을 앉혔다.그 과정에 미군정의 인사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어 영어에 능통한 한국인과 일제하의 관료를 우대했는데,한민당계의 인사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원할 무렵에는 안재홍과 같은 인물이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한민당계에 밀렸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일본이 침략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모든 악법을 19 45년 10월9일 법령11호에 따라 폐기해버렸다.여기에는 정치범처벌법,예방검속법,치안유지법,출판법,정치범보호관찰령,경찰의 사법권 등이 포함되었다.미군정은 이 악법들의 폐지 이유를 「한국인들에게 정의의 정치와 법률상의 균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미군정은 소련의 한반도 적화정책의 징후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자유를 안겨주었다.초기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용인한 것은 물론 출판언론의 자유도 열어주었다. 패전국 일본이 남겨놓은 재산은 기업의 경우 전체의 90%,토지는 전 국토의 12·5%나 되었다.이 재산은 일제가 36년 동안 착취한 것이어서 국민들의 관심도 컸다.이른바 적산으로 분류한 이들 재산을 법령 제33호에 따라 우선 군정청 소유로 했다.적산을 한국인들에게 매각하지 않겠다는 조항도 명문화했는데,이는 뒷날 한국에 세워질 정부에 맡긴다는 방침이었다.특히 토지의 경우는 여론조사에 붙였다.그러나 대다수의 의견이 정부수립 이후의 처리를 희망했다. 토지(농지)문제는 특히 북한으로부터 공격적 선전자료가 되었다.북한은 소련의 조정에 의해 1946년 초 토지개혁을 단행한 터여서 미군정을 호되게 비판했다.하지만 미군정은 적산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재정재산협정에 따라 한국에 넘겨주었다.미군정은 다만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지 소작인이 수확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규정하는 법령 제9호를 해방 원년에 제정했을 뿐이다.특히 미국의 입장은 재산처분에 관한 한 무리수는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행정권의 민정이양을 위해 남조선과도정부를잠정적으로 만들었다.1946년 3월 법령 제64호를 적용하여 군정청기구의 국을 부로 바꾸고 군정체계를 확립했다.각 부처장으로 한국인을 채용하여 한미 양부처장제를 실시한 것도 이무렵이다.이해 9월 군정장관 A L 러치는 특별발표에서 행정권 이양의사를 밝혔다.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고문자격으로 부결권만 행사하는 가운데 두 나라 국어를 사용한 종래의 모든 문서가 한국어로 단일화되었다. ○적산 한국정부에 이양 남조선과도정부가 한국의 정부수립을 대처한 미군정의 조치였다면 1946년 12월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주주의 예행이라 할 수 있다.입법의원은 김규식을 의장으로 한 관선 45명,민선 45명으로 구성되었다.민선의원의 경우 인구비례에 따라 각 도에 정원을 배정했다.이 민선의원들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그래서 입법의원은 국민대표기구이자 입법기구로서 초보적이나마 현대적 의회였다. 이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을 수용한 측면이 있다.다시 말하면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초기부터 지원하는 대신 이를 과도입법의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어떻든 입법의원은 입법기구로서 남조선과도정부 및 그로부터 분리 독립한 법원과 더불어 3권분립 관계를 이루어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웨드마이어중장 연설」 벽보/트루먼의 특사 “공가주의 투쟁 자제” 역설/“권리쟁탈의 욕망 제일 큰 문제” 지적/「조선의 인권·재산권 보장」 방침 천명 1947년8월 미군정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미 대통령(H S 트루먼)의 특사 A C 웨드마이어 중장(1897∼1990년)의 연설요지를 실은 벽보가 발견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서울 중랑구 중화2동 김보영씨(67)로부터 제공받은 이 벽보는 한국에 대한 당시 미국 정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벽보는 서두에 「현 세계의 여러가지 문제중에 권리쟁탈의 욕망이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이는 아마도 동서냉전체제 아래서의 갈등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된다.그가 1947년 8월26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10여일 한국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이 벽보는 9월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그가 한국에 머물 무렵은 제2차 미소공동위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선동하는 군중대회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욕망을 없애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밝히면서 「이 욕망을 군사적이 아니고 화가나 문학가의 붓으로,또 바이올리니스트의 활로 없애면 얼마나 아름답겠느냐」고 아주 낭만적인 표현을 썼다.그리고 「욕망을 없애거나 줄이면 더 좋은 목적을 쉽게 실현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말로 공산주의 투쟁의 자제를 당부했다. 이 벽보에는 「조선이 완전 자유독립국가를 만들도록 인권과 재산권 보장,자유기업을 장려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의 재산권보장 발언은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장차 수립될 한국정부에 넘겨주겠다는 확고한 방침으로 나타났다.패전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적산도 처분하지 않고 뒷날 한국정부에 이양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웨드마이어 장군의 조선여행중의 연설」요지를 전제로 한 이 벽보의 크기는 가로 28.5㎝,세로 50.5㎝.그는 한국을 방문한뒤 냉혹한 판단으로 일관한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썼다.오하마 태생의 육군중장이었던 그의 보고서는 미국 대한정책의 골격이 되었다.
  • 다부동 전투(외언내언)

    『한시간,아니 1분후의 운명을 모르는 나날이 한달이나 계속되었다.결국 이곳에서 죽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는 생각뿐이었다.체력도,인내도,기력도 한계에 이른 고통의 나날이었다.이렇게 희생을 치르며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가.그러나 적은 우리보다 더 고통스러웠다.적의 유기된 시체는 피골이 상접했고 포로는 배가 고파 말조차 못했다』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은 다부동 격전에서 살아남은 한 노병의 회고다. 대구에서 서북쪽으로 가다보면 보현산에서 발원해 대구∼영천 회랑을 적셔주는 폭 2백m가량의 금호강이 나오고 계속 칠곡쪽으로 향하면 분지안에 20여가구가 사는 다부동이 자리잡고 있다.국군은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인민군과 50년 8월 14일 이곳에서 조우했다. 당시 전황은 38선을 기습남침한 북한군이 한달만에 국토의 90%이상을 점령하고 8·15 광복절까지 부산을 포함한 남한 전체를 해방시킨다는 목표로 총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국군은 왜관∼의성∼청송∼영덕을 잇는 1백40㎞의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구축하고 부산으로 통하는 전략적 길목인 다부원고개 유학산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여 반격의 기틀을 잡았다.다부동전투는 국군 제 1·6사단이 북한군 13사단을 맞아 한국전쟁 최초의 본격적인 백병전까지 벌이며 북진의 교두보를 마련한 전투였다.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구하러 나선 국군을 비롯한 학도병·민간인 2천3백명이 희생당하고 인민군도 1만여명이 사망했다. 한국전쟁 발발 45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김영삼대통령도 참석한 가운데 조국을 지키고 산화한 젊은 용사들의 유해를 수습해 이곳 양지바른 곳에 봉안하고 「국군용사 충혼비」도 제막했다. 때늦은 감은 있으나 군사정부도 아닌 문민정부가 6·25 최대 격전지에 충혼비를 세웠다는 것은 특별한 감회를 느끼게 한다.호국의 영령들이여,고이 잠드소서….
  • 피서열차 새달 15일부터 운행/승차권 예매는 26일부터

    철도청은 7월15일부터 8월15일까지 한달동안을 여름철 피서객 특별 수송기간으로 정하고 이 기간에 모두 67편,7백48회의 임시열차를 운행한다고 23일 발표했다. 철도청은 기존 정기열차에도 총 1천3백90량의 객차를 추가로 연결해 운행키로 했다. 특별 수송기간중 증편되는 임시열차는 경부선 24편,호남선 12편,전라선 11편,영동·태백선 8편이며 장항선과 중앙선·충북선·경춘선도 2편씩 증편된다.또 7월28일부터 8월6일까지는 대전∼제천간 무궁화호 열차가 강릉까지 연장 운행된다. 이번 하계 수송기간중 임시열차의 승차권은 26일부터 발매된다.
  • 나 부총리 문답/“남­북 쌀 대화창구 계속 유지”(쌀 대북 지원)

    ◎무공­삼천리사 세부절차 협의·집행/동포애 담긴쌀… 북 골고루배부 기대/2차회담선 쌀이외 남북관계도 논의 나웅배 통일부총리는 21일 저녁 기자회견에서 남북한 쌀협상 합의 발표문을 낭독한 뒤 기자들의 물음에 답했다.다음은 나부총리와의 일문일답 요지. ­서명때 북한 전금철은 직책을 어떻게 적었나. ▲정무원 산하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 자격으로 서명했다. ­합의문이 늦어진 배경은. ▲남북한이 오랜만에 회담을 열어 여러 문제를 논의하다 보니 늦어졌다. ­여러 문제란. ▲(쌀 지원에 따르는) 절차·수량·인도방법등이다.쌀 문제 하나만을 가지고도 인도등 부수적인 문제들을 논의하느라 시간이 길어졌다. ­쌀을 매년 제공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앞으로의 회담과 남북 대화에 달려있다. ­2차회담은. ▲정부당국자간 회담이 될 것이다. ­이번 회담이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일본 쌀은 언제 제공되는가. ▲먼저 한국쌀이 들어가면 일본쌀이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다.우리쌀 제공 일정과 맞추어 진행될 것이다. ­2차회담에서 쌀 추가제공이 논의되는가. ▲그때 가서 상황이나 의제를 정하게 될 것이다. ­남북간 비밀 쌀회담은 누가 제의했는가. ▲우리측에서 지난달 26일 쌀제공문제와 관련된 절차를 협의하기 위한 접촉을 제의했다.그리고 지난 13일부터 대한무역진흥공사와 북한의 조선삼천리총회사간 접촉에서 당국자간 대화를 우리가 제의했고 북한이 수용했다. ­2차회담에서는 남북관계 현안이 다루어지는가. ▲쌀 문제와 그밖의 현안이 논의될 것이다. ­2차회담 장소는.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정부로서는 한반도안에서 회담이 열렸으면 한다.회담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만큼 협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이번 쌀협상에서 납북된 우성호 선원 귀환문제가 논의됐는가. ▲그렇지 않다.쌀문제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회담을 진행했다. ­2차 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이 있는가. ▲대한무역진흥공사와 북한의 조선삼천리총회사간에 1차분 쌀 선적과 관련한 접촉을 갖는다.2개 채널을 통해 2차 회담의날짜나 장소등이 논의될 것이다.즉 정부당국자간 만남을 중간에서 추진하는 것이다.이번 회담의 정부대표들은 계속적인 연락창구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당초 북한이 요구한 쌀의 양은. ▲합의된 15만t보다 훨씬 많다.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다. ­예산은 어떻게 조달할 생각인가. ▲일단 남북협력기금과 예비비등에서 충당할 계획이다. ◎「대북곡물제공 합의」 나 부총리 발표문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그동안 동포애적 차원에서 북한의 식량난을 덜어주기 위해 작년 8·15 광복절 경축사,금년 3월7일 베를린선언,5월15일 IPI총회연설 등을 통해 대북 곡물지원을 수차 제의한 바 있습니다. 이어 정부는 지난 5월26일 부총리겸 통일원장관 명의로 아무런 전제조건없이 북한이 필요로 하는 곡물을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절차문제 협의를 위한 쌍방 당국간 접촉을 제의하였습니다. 그후 북한측의 제의로 우리측의 대한무역진흥공사와 북한 대외경제위원회산하 삼천리총회사간에 6월13일부터 6월16일까지 북경에서 접촉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측은 쌀 제공문제는 남북당국간 접촉을 통해 협의해야 한다는 점을 통보하였으며 북한측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6월17일부터 21일까지 남북당국간 북경접촉이 진행되었습니다. 쌍방당국은 이번 접촉에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습니다. ▷합의요지◁ ⓛ우리측은 북한측에 1차로 쌀 15만t을 인도하며 이 1차분은 전량 무상으로 제공한다. ②우리측은 본 합의서를 서명한 날로부터 10일이내에 첫 선박을 출항시킨다. 우리측은 상기 1차분을 해상을 통해 우리측 선박으로 청진·나진항 등에 인도한다. ③북한측에 1차분으로 인도되는 쌀은 정미 40㎏단위 PP포대로 포장하며 일체 표기를 하지 않는다. ④본 합의서에 명시된 합의사항을 실행에 옮기는 쌍방 상사는 우리측에서는 대한무역진흥공사와 북한측에서는 조선삼천리총회사로 한다. ⑤남과 북은 쌀 인도·인수가 원만하게 이행되도록 필요한 모든 협조를 보장한다. ⑥남과 북은 1995년 7월 중순에 제2차 회담을 개최한다. ⑦이 합의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본 대표단이협의하여 해결한다. 였다. 지난 84년9월 우리측 수재시 북측으로부터 쌀과 시멘트 등을 지원받은후 11년만에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이번 쌀제공은 남북간에 화해협력의 정신을 바탕으로 책임있는 당국간의 협의를 거쳐 동족간에 서로 돕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이번 합의는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북한의 어려운 식량사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순수한 동포애 차원의 조치였습니다. 정부는 이번에 북한당국과 합의한 사항들이 차질없이 이행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해 나아갈 것입니다. 정부는 이 민족적인 사업에 전국민이 참여한다는 뜻에서 도정 및 포장재공장과 선적항구 등을 전국적으로 고르게 배정할 것입니다. 도정공장은 전국의 정부미도정공장 1백90개소가 동시 가동하게 되며 포장재제작 역시 전국의 30개 공장이 참여하게 됩니다. 지원미를 선적할 전국의 주요항구는 동해·포항·울산·부산·진해·마산·광양·목포·군산·인천 등이며 지원미 2천t을 실은 첫번째 수송선은 금주 내에 강원도 동해항을 출발할 예정입니다. 지원미의 첫 선적지를 동해항으로 결정한 것은 동해항이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항구로서 북한의 요구대로 최단 시일내에 쌀을 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정부는 이번 쌀지원을 원활히 하기 위해 금명간 통일원차관주재의 대북 곡물실무대책회의에 이어 통일관계장관회의를 개최하여 범정부차원의 후속지원책을 마련,시행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995년 6월 21일
  • 남·북·일 새 3각관계(한·일수교 30년)

    ◎일의 「남·북 줄타기 외교」 대비해야/대북 수교협상 자세따라 한·일갈등 소지/끊이지않는 「망언」… 선린의 앞날 불투명 국교가 정상화된지 30년,한일양국관계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지난 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에 서명한 이후 양국 관계는 발전과 퇴보를 되풀이하고 있다.지난 30년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등 모든 측면에서 양국 관계는 양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65년 2억 달러에 불과하던 양국간 무역액은 그동안 2백배 가까이 늘어 지난해에는 3백89억 달러를 기록했다.양국간 인적 교류도 65년 1만명에서 지난해 2백70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양국이 이웃국가로서 결속력있는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한국쪽에선 「동반자」보다는 「반일감정」이나 「망언」이,일본쪽에선 「혐한」「추한 한국인」이란 단어가 언론에 더 많이 등장한다. 지난 연말 한국 외무부와 일본 외무성 당국자들이 여느해 보다 강하게 새해를 맞는 흥분을 느낀다고 털어 놓는 것을 본 일이 있다.광복 50년(일본에는 종전 50년이다),국교정상화 30년이라는 1995년의 역사성이 양국관계를 다루는 당국자들에게는 팔을 걷어붙일만한 의욕을 촉발하는 계기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몇차례 천명했듯 95년을 과거를 극복,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하는 원년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당국자들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양국 정부의 의욕은 국민감정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일본과의 수교 30년을 기념하는 것 같은 공식행사를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아직도 엄연한 우리 국민의 평균적 정서이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는 기념행사를 아예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이를 반민간 단체로 볼 수 있는 한일의원연맹(회장 김윤환/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으로 넘겼다.그러나 연맹측이 계획했던 행사조차 제대로 추진되지는 못했다.경북 예천 출신으로 「일본의 이미자」로 불리는 재일동포 가수 미야코 하루미의 서울,부산 공연은 문화체육부의 불허로 무산됐으며,한일청소년회관의 건립계획도 변경됐다.이달 일본에서,오는 12월 우리나라에서 기념우표가 발행되는 것 정도가 확실히결정됐을 뿐이다. 의원연맹측이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사내정의)가 한반도에서 수집해간 문화재를 반환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것 정도가 계속 기대를 걸만한 사업이다. 양국 관계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차원에서 시각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분석한다. 우선 한일 관계를 양자관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다자간 관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국제사회 내에서라면 한일 양국의 이익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양국은 자유무역체제를 지향하고 그 안에서 국가발전 전략을 꾀하고 있으며,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의 기본 이념도 같다. 일본 관계를 다루는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일본이 세계무역기구(WTO)사무총장 선출과정에서 김철수후보를 적극 지원하거나,우리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양국의 이해가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처럼 국익이 일치하는 구조 속에서도 양국 국민들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 지적이다.일본인들 스스로의 지적처럼 『괴롭지만 과거를 바로 보지 않으면,미래는 없다』는 것이 한일관계의 현실이다. 한반도 및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사죄,군대 위안부문제,사할린동포 문제등은 양국이 해결해야 할 오랜 현안이지만,일본측은 어느것 하나 진심으로 반성하며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일의원연맹의 지철민 사무총장은 올해 사회당,자민당,신당 사키가케등 여당연합과 신진당이 추진하던 일본 국회의 과거사죄와 부전결의가 결국 신진당이 불참한 채 반성과 평화추구라는 용두사미로 끝나고,때를 맞춰 터져나온 와타나베(도변미지웅) 전외무장관의 한일합방과 관련한 망언이 아직 한일관계의 미래를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일본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의 대북 쌀 제공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일본 정부의 미묘한 자세는 우리 국민과 정부 당국자들이 안고 있는 일본에 대한 원초적 우려감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한반도 전략은 무엇인가.일본은 과연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는가.한국민은 일본이 북한과의 수교를 이끌어낸뒤 한반도의 남북 양쪽을 저울질하는 줄타기 외교를 전개하며 이문을 챙기려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연스레 갖게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올해가 광복 50년,국교정상화 30년이라서가 아니라,북한과 일본의 수교가 본격화되는 시점이기 때문에,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일본 태도에 따라 한일 관계는 또 한차례 갈등하며 후퇴의 시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한국측 외교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지난 1월 고베 대지진 때 한국 국민들은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며,구호물자를 보낸 바 있다.전문가들은 광복후 50년이 지나고 양국을 움직이는 세력이 전전세대에서 전후세대로 교체되면서 보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양국관계가 전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신세대들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청산한다는 인식을 전세대보다는 어렵지 않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또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낮에는 반일,밤에는 친일」이라는 식의 일본에 대한 이중적 잣대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논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가 된 「일본은 있다」의 저자 서현섭씨(외무부 외교정보관리관)는 『한일관계의 지난 50년은 두나라 국민이 무시(DISREGARD)→불신(DISTRUST)→혐오(DISLIKE)라는 3D를 만들어온 세월』이라고 말했다.그는 『앞으로의 50년은 세 단어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DIS」 세글자를 떼어버리고 상호인정(REGARD)→신뢰(TRUST)→선린(LIKE)의 관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일관계 30년 일지 ▲1965년 6·22=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서명 ▲8·28=한일협정 반대 학생 데모 및 위수령 발동 ▲12·18=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발효 및 주한·주일대사관 상호개설 ▲1966년 1·17=한일간의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발효 ▲5·27=일본 문화재 2천3백28점 반환 ▲19 67년 6·30=사토 에이사쿠 일본총리 방한,박정희대통령 취임식 참석 ▲1970년 6·16=한일 정기여객선(부관페리호) 취항 ▲1971년 2·5=일·북 재일교포 북송합의서 조인 ▲1973년 8·8=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1974년 8·15=조총련계 문세광,육영수 여사 저격 ▲1975년 9·15=조총련계 동포 성묘단 모국 방문 ▲1982년 7·26=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외교 문제 비화 ▲1983년 1·11=나카소네 일총리 첫 공식 방한 ▲1984년 9·6=전두환 대통령 첫 공식 방일 ▲1986년 5·18=일,대한 2백해리 어업수역 선포 ▲7·24=후지오 문부상 교과서 왜곡관련 망언 ▲1990년 5·24=노태우대통령 방일 ▲9·24=가네마루 자민당부총재 등 3당 대표 방북,일북수교 원칙 합의 ▲1991년 1·9=가이후 총리 방한,한일 우호협력 3원칙 발표 ▲1992년 7·6=일본정부 종군위안부 조사결과 발표,정부관여 인정 ▲11·8=노태우 대통령 실무 방일 ▲1993년 10·4=사할린 동포 관련,한일 실무협의회 ▲11·6=호소카와총리 실무 방한 ▲1994년 3·24=김영삼대통령 방일 ▲7·23=무라야마 총리 방한 ▲1995년 1·19=한국정부,고베지진에 구호품 전달 ▲6·5=와타나베 전외상 한일합방 관련 망언 ▲6·14=일본의회 과거 반성,평화 추구 결의 ◎지표로 본 양국관계/교역규모 급속 증가… 1백85배 늘어/경기둔화·국민감정 악화… 90년초 주춤/대일 누적적자 1천억불 시정 과제로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간 경제교류는 빠른 속도로 진행돼 왔다. 80년대 말까지 교역과 투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다가 90년대 초 국내 경기둔화와 노사분규 여파로 잠시 주춤했다.그러다 엔고에 힘입어 지난 해부터 기계류와 부품을 중심으로 산업협력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그러나 30년간 누적돼 온 대일 무역적자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65년 국교정상화 당시 대일 수출은 4천4백만달러였다.이것이 지난 해에는 1백35억2천만달러로 늘었고,대일 수입도 1억6천만달러에서 2백53억9천만달러로 커졌다.교역규모만 1백85배 신장한 셈이다. 반면 교역확대속에 65년 1억2천만달러였던 대일 무역적자가 86년 50억달러를 넘은 데 이어 지난 해에는 1백억달러 돌파(1백18억6천만달러)라는 반갑지 않은 기록까지 남겼다.그간의 누적적자만 이미 1천억달러를 넘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국교정상화 이후 계속 늘던 대일 수출은 89년 1백35억달러를 고비로 줄기 시작,92년 1백16억달러로 떨어졌다.수입도 91년 2백11억달러에서 92년 1백95억달러로 감소했다. 일본의 대한투자가 전체 외국인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92년 건수기준 30.5%,금액기준 17.3%로 82∼86년 평균(건수 47.7%,금액 49.6%)에 못미쳤다.고임금으로 한국의 투자매력이 떨어진 탓도 있지만 과거사 문제로 국민감정이 악화돼 소원한 상태가 지속됐기 때문이다. 93년 초 양국 모두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양국 경제관계에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됐다.국민감정과 정치논리보다 경제논리로 문제를 풀기로 양국 정상이 합의한 뒤 우리 정부가 먼저 수입선다변화 품목을 해제하는 등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교역액이 92년 3백11억달러에서 지난 해 3백89억달러로,일본의 한국투자는 92년 72건,1억5천달러에서 지난 해 1백32건,4억2천만달러로 각각 늘었다. 교역형태도 기계류와 부품·소재를 일본에서 들여다 경공업제품을 생산,제3국에 파는 「산업간 교역형태」에서 반도체와 철강 등 중화학제품을 서로 주고받는 「산업내 교역」으로 바뀌었다.일본으로서도 가격과 품질경쟁력이 있는 한국산 부품과 소재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일본기업들의 투자도 저임금을 겨냥한 해외 생산기지화 전략에서 전략적 제휴형태로,기술협력도 한국의 일방적 기술이전 요구가 아닌 경제논리에 기초한 교류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다. 엔고 지속과 세계경제의 지역주의화,미국과의 협상실패에 따른 무역마찰로 일본은 우리와 산업협력의 끈을 단단히 할 가능성이 높다.따라서 일본기업을 적극 유치,대일역조를 개선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그렇게 되면 기술이전도 자연스럽게 이뤄져 양국관계가 호혜와 동반의 관계로 성숙돼 갈 것이다.
  • 대한민국의 출범(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3)

    ◎첫 행정부 11부·4처로 구성… 총리에 이범석/국호·헌법전문에 상해임정 법통 승계 명확히 1948년 8월15일 상오10시쯤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앞 광장에 마련된 정부수립 선포식장.7월2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이 모습을 나타내자 세종로와 태평로를 꽉 메운 독립국가의 백성들은 손에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단상에는 이대통령 부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신익희 국회의장,김병로 대법원장이,왼쪽엔 맥아더 태평양지구연합군사령관,하지 주한미군사령관,외국사절들이 나란히 자리잡았다. ○「한」·「태한」 등도 거론 이대통령은 『이 정부가 변함없이 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하겠다』는 말로 경축사를 끝맺었다.일제의 강점으로 끊겼던 민족국가의 맥이 되살아나는 한편 이땅에 민주주의 정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새로 출발하는 대한민국의 성격을 제헌국회 의원들이 어떻게 규정하고 있었을까.이는 국호를 제정한 과정에서 잘 나타나 있다.헌법 기초위원회는 6월7일 나라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잠정 결정하고 이를 본회의에 넘겼다.본회의 토론에서 몇몇 의원들이 그 의의와 근거를 물었고 일부는 「한」,또는 「태한」으로 하자거나 국민 총의를 모아 참신한 새이름을 짓자는 의견들을 냈다. 이에 대해 헌법기초위원회 서상일 위원장등은 『「대한」이란 국호는 청일전쟁 당시 이미 사용했으며 일제에 의해 빼앗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켰다.이와 함께 「3·1운동」을 계기로 상해에서 수립한 임시정부에서도 그 이름을 썼다는 점을 강조했다.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최종 결정했다.상해임정에서 쓴 「대한민국」을 국호로 인정하고,헌법 전문에도 상해임정을 이어받는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새 국가는 그 법통을 명확히 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또 행정·입법·사법의 3권분립을 확실히 해 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웠다.첫 행정부는 11부,4처,66국으로 짜여졌다.이대통령은 국무총리에 처음 이윤영을 내정하고 국회에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자 이범석으로 교체해 인준을 받는다.이어 8월 1∼7일에 걸쳐 장관과 처장들을 임명했다.입법부에서는 이승만의 뒤를 이어 신익희가 국회의장이 됐으며,부의장은 김동원과 김약수가 선출됐다.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은 김병로가 맡았다. 11부의 장관과,4처의 처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내무 윤치영 ▲외무 장택상 ▲국방 이범석 ▲재무 김도연 ▲법무 이인 ▲문교 안호상 ▲농림 조봉암 ▲상공 임영신 ▲사회 전진한 ▲교통 민희식 ▲체신 윤석구 ▲총무 김병연 ▲공보 김동성 ▲법제 유진오 ▲기획 이교선 그러나 조각 결과는 제헌국회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한민당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조각 과정에서 소외된 한민당은 8월8일 『본당은 시시비비주의로 임할 것이며 정부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야당 세력임을 자처했다.따라서 한국 정치에 여·야 개념이 이때 비로소 발생했으며 한민당 계열은 이후 야당의 뿌리로 자리잡는다. 대한민국 수립에 앞서 미 군정의 정권이양도 순조롭게 진행됐다.먼저 「5·10 선거」실시 열흘만에 군정은 입법기구 노릇을 하던「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문닫았다.이어 6월1일에는 군정재판을 폐지함으로써 입법·사법 두 기능을 마감했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다른 나라들로부터 정통·합법국가임을 인정받는 것이었다.아직 출범하지 않은 정부에 대해 필리핀이 7월4일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사실상」승인한다.8월13일에는 미국과 자유중국도 정부를 「사실상」승인했고 특히 미국은 무초를 외교대표로 임명했다. ○유엔총회 압도적 지지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유엔의 승인이었다.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5·10 선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데다 유엔에서 주도권을 쥔 미국이 새 정부를 강력히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엔에서의 승인」이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그럼에도 새 정부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위해 외교적 총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그해의 유엔총회는 9월21일 파리에서 막을 올렸다.이 자리에는 한국임시위원단의 보고서가 제출됐다.위원단은 「5·10선거」를 『전체 한국민의 3분의2를점하는 선거민들이 자유롭고 정당하게 의사표시를 했다』고 밝혔다.선거결과 구성된 제헌국회의 입법활동과 정부형성 과정도 자세히 소개했다.보고서는 『미군사령부가 한국정부에 이미 정권을 이양했으며 한국정부는 정상적인 정부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총회의 끝 무렵인 12월7일부터 한국문제가 정식의제로 다뤄졌다.12일 총회는 투표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에 있어 유일한 그러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찬성 41,반대 6,기권 1이라는 압도적인 지지였다.이 결의문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역에 걸친 전국적 정부라는 선언을 조심스럽게 피하긴 했으나,대한민국 정부가 실질상 한반도에 있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함축한 것이었다.더욱이 국제적 뒷받침이 거의 없었던 북한정권에 비해 대한민국 정부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확실하고 충분한 국제정치적 근거가 됐다. 유엔총회의 승인으로 자유우방 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잇따라 수립됐다.1949년 1월1일 미국이 대한민국 정부를 정식 승인한 것을 시작으로 4일에는 자유중국이,18일 영국,2월5일 프랑스,3월3일 필리핀이 뒤를 따랐다.1950년 「6·25」가 일어날 때까지 수교국가는 30개국 가까이로 늘어났다.이에 견줘 북한정권을 인정한 나라는 소련권에 한정됐다.더욱이 「6·25」가 발발하자 유엔군 참전의 명문을 제공하는등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은 한국의 국제관계에 초석이 되었다. ◎영 소장 「미 한국승인 성명서」/미 “대한민국은 유엔결의로 세운 합법정부”/“카이로선언 연장선상서 탄생” 천명/이 대통령,즉각 “무쵸파견 환영” 답신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대한민국 출범을 3일 앞둔 1948년 8월12일(한국시간 13일)미국 국무부가 새 한국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이를 승인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영국 런던의 공기록보존소에서 찾아냈다.이 성명서는 비록 장문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당시의 미국측 입장이 잘 요약돼 있다. 이 성명서에서 미국은 먼저 한국정부 수립이 1943년 12월 미국·영국·중국등 3국이 합의한 카이로선언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했다.또카이로선언의 원칙은 포츠담선언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재확인됐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소련과의 협상 끝에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미 정부는 1947년 11월14일 유엔총회 결정에 의해,정당한 과정을 통해 수립된 새 정부를 한국의 합법정부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이와 함께 대한민국 정부 및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 협상할 대통령 특사로서 로드 아일랜드 출신인 존 무초(John J Muccio)를 파견하겠다는 내용을 공표한 이 성명은 무초가 초대 주한 미대사를 맡게 될 것임을 일찍 명시해 놓았다. 그리고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 성명에 대한 답신을 통해 미국이 대통령 특사로 무초를 파견하겠다는 계획에 대해 즉각 찬성한 답신 내용도 런던에서 발굴했다.8월17일 미국에 보낸 답신에서 이승만대통령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한·미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조치』라고 치하했다.
  • 「순수문학」 외길 걸은 문단거인/타계한 김동리 선생의 문학과 생애

    ◎생명·인간성 탐구 중시… 문학의 도구화 반대/한국적 샤머니즘 담은 「무녀도」·「황토기」 남겨 17일 타계한 김동리(본명 김시종)씨는 한국 현대문학사에 길이 남을 소설들을 남긴 우리 문단의 거목이었다. 작가로서의 그는 60여년의 작품활동을 통해 1백여편에 이르는 중·단편소설을 남긴 빼어난 글쟁이였다.이른바 「순수주의」를 지향한 그의 소설들은 해방이후 우리 문학의 큰 줄기로 이어져 내렸다.뿐만 아니라 그는 참여주의 논객들과의 지속적인 논쟁을 통해 이같은 자신의 문학관을 적극 옹호한 이론가이기도 했다. 1913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김동리씨가 처음 문단에 나온 것은 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시 「백로」를 통해서였다.그러나 35년 중앙일보에 「화랑의 후예」,36년 동아일보에 「산화」 등 두편의 소설이 잇따라 당선되면서 그의 재능은 산문쪽으로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문학적 지향은 30년대말 발표된 「무녀도」와 「황토기」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기독교신자인 아들과 갈등을 빚는 무당,가공할 힘을 지닌 장사의 사연을 다룬 이 단편들엔 한국적 샤머니즘과 신화의 세계에 대한 지은이의 본능적인 이끌림이 나타나 있다. 이무렵 그는 자신의 창작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평론작업을 병행하기 시작했다.문학의 사회·역사의식 회복을 촉구한 임화·유진오의 글에 맞서 「순수이의」(39년)「신세대의 정신」(40년) 등의 평론을 발표한것.이런 글에서 그는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개성적인 삶의 탐구여야 한다』며 정치나 이념에 종속되지 않는 순수문학이야말로 문학의 본령이라는 주장을 폈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이같은 순수문학 옹호는 그후 그의 창작에 일관되게 깔리는 철학적 기조가 된다.해방공간의 좌­우 논쟁,70년대말 순수­참여 논쟁 등을 거치면서 그는 문학의 도구화에 반대하고 생명과 인간성 탐구를 문학 고유의 역할로 여기는 입장을 일관되게 밝혔다.이때문에 리얼리즘 문학이 성했던 80년대엔 삶의 현실이나 인간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는 문단 한켠의 거센 비난에 맞닥뜨리기도 했다.그러나 그와 이념적으로 대척되는 지점에 놓인 시인 고은씨조차도『동리문학은 한국소설의 원점』이라고 평할 정도로 그의 탁월한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었다. 그는 한국문인협회장·예술원회장·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학장등을 거치면서 이념과 사상을 떠난 특유의 포용력으로 이른바 「김동리 사단」을 거느리는 문화예술계의 대부로 군림하기도 했다.장용학·손창섭·박경리·이범선·최일남·한말숙·정을병·이문구·서영은·문순태씨등이 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고 천승세·김원일·송상옥·유현종·오정희씨등이 서라벌예대 제자들이다. 문학과 삶의 동반자였던 부인 손소희씨가 작고한지 얼마 안된 지난 87년 30세 연하의 문단 제자 서영은씨(52)와 결혼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나 90년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념의 시대가 지나가고 90년대에 접어들어 동리문학의 짙은 문학성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그의 단편 대표선집이 나오고 연구논문들이 책으로 묶이는 가운데 민음사에서는 「김동리 문학전집」을 7월부터 2∼3차에 걸쳐 펴낼 예정이다.여기에는 장편「사반의 십자가」「을화」를 포함한 그의 모든 소설들과 문학평론,에세이들이 수록된다.한국 토속정서에서 인간의 보편적 구원문제로 확대돼온 그의 문학적 지평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이 책이 유작이 되는 셈이다. □연보 ▲1934년 조선일보 시 「백로」,35년 중앙일보 단편 「화랑의 후예」,36년 동아일보 단편 「산화」 각각 신춘문예당선. ▲36년 「무녀도」,39년 「황토기」,41년 「소년」발표후 8·15까지 침묵. ▲1946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초대회장,「윤회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소설분과위원장,장편 「해방」. ▲1950년 문교부 예술위원,서울시 문화위원,「인간동의」 ▲1954년 예술원회원,「마리아의 회태」. ▲1955년 「흥남철수」「밀다원시대」「실존무」. ▲1957년 장편 「사반의 십자가」 ▲1961년 문인협회 부이사장 「등신불」. ▲1966년 「까치소리」「송추에서」「백설가」. ▲1967년 3·1문화상 수상,대표작선집 전 5권 간행. ▲1968년 국민훈장 동백장,중편「극락조」. ▲1971년 장편 「아도」. ▲1973년 중앙대 예술대학장 장편「삼국기」 수필집「사색과 인생」 ▲1974년 장편 「이곳에 던져지다」. ▲1978년 장편 「을화」 수필집 「취미와 인생」. ▲1981년 예술원회장. ▲1983년 5·16민족 문화상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예술원 원로 회원.시집 「패랭이꽃」. ▲1987년 장편 「자유의 역사」(59년 신문 연재작). ▲1990년 소설가 협회장.7월 30일 뇌졸증으로 쓰러짐. ◎한국문학의 영원한 큰별이시여…/고 김동리 선생 영전에/한승원 작가 이세상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고 선생님 혼자서만 아시는 그 깸없는 무상한 오랜 잠 주무시더니,그 잠 깨시기 바쁘게 선생님 어디로 떠나가시려 합니까.간밤 검은 구름장들 지붕머리 짓누른채 궂은비 흩뿌리고,그 습한 어둠속에서 허리 꼬며 강물 슬프게 앓아대고,북한산 지빠귀 한 마리 제 잠 설치게 하더니,신새벽의 푸른 빛살 속에서 선생님 떠나셨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고무줄처럼 잡아당기기도 하고 보석처럼 단단하게 앙금지게 해놓기도 하고,몇 천억겁을 찰나로 오그라들게 하기도 하고 그 찰나를 다시그 몇 만억겁으로 늘어나게 하기도 하는 혼자서만 아는 시간을 주무르고 노시다가 그 시간을 서리서리 호주머니에 넣으시고 가시는 거기가 어디입니까. 영화도 많았고 욕됨도 많았던 이 땅,이곳에서의 머무름은 얼마만한 잠시였습니까.이제 가시는 그곳은 「달」속의 달이와 「무녀도」의 을화가 있는 곳입니까.「황토기」와 「등신불」속의 그들이 살고 있는 그곳입니까. 30년 저쪽의 어느 늦은 가을날,저희들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뚝섬으로 소풍을 갔을 적에,저는 폭음을 하고 취한 척하고는 선생님께 건주정을 하였고,호래자식인 저를 유도하는 한 친구가 못됐다면서 모래밭에 내리 꽂았었습니다.이튿날 얼굴에 반창고 붙이고 찾아간 저에게 싱긋 웃으시며 어깨를 두들겨주시던 선생님의 그 인자스러운 동안을 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속된 저로서는 지루하게만 느껴진 그 깸없는 신비한 잠을 주섬주섬 사려담고 문득 떠나가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이 제 가슴을 쓰라리게 하지만,저는 결코 슬퍼 울지 않습니다.이 밤,저는 북한산 위의 별들을 보고 있습니다.지금 선생님께서 이르게 되는 그곳은 선생님께서 신비롭게 형성해놓은 세계일터입니다.제가 쳐다보는 별처럼 떠있는 비가시적인 커다란 시공. 우리들의 우주안에서는 가는 것은 없고 오는 것만 있습니다.헤어지는 것은 헤어지는 것처럼 보일 뿐,사실은 긴긴 강의 하구에 잇닿은 바다에서 다시 만나 어우러지게 됩니다.그것을 굳게 믿는 저는 별로 오래지 않은 시간안의 즐거운 회후가 예정되어 있음도 믿습니다.선생님 그곳에 먼저 가셔서 큰 예술학과 하나 마련해놓고 계십시오. 저 선생님의 그 학교에 또 입학하겠습니다.선생님,명명한 그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 한통 노조 농성 북서 조종/박홍 총장 주장

    ◎지방선거 목표 총파업 계획” 【춘천=조한종 기자】 서강대 박홍 총장은 14일 한림대 수요세미나에 참석해 「세계화 대비 인성 및 사상교육」이란 주제강연에서 『이번에 한국통신 노조원들이 성당과 사찰에 들어간 것은 북한이 조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는 북한의 정보를 구하는 루트를 가지고 있다』며 『북한의 공산세력이 이미 남한내 학생,노동,재야,언론에 깊숙이 침투해 각종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북한이 정치를 잡기위해 6·27선거를 기점으로 본격화되는 지자제를 목표로 27일전에 남한내 동조세력을 규합해 연대 총파업을 주도하고 오는 8월15일에는 요인암살 및 중요 기물파괴 등을 계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총장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사상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대학내 주사파들이 지난 해에 비해 양적으로는 줄었지만 질적으로는 각계각층에 더 깊숙이 침투해 각종 파업을 주도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전국대학 학생회장의 90%가 주사파』라고 주장했다.
  • 김일성 시신/금수산 의사당에 영구 보존

    ◎4백만불 투입… 사후 11개월만에 매듭/새달 8일 1주기 맞아 탈상행사 치를듯 북한은 13일 중앙방송을 통해 김일성시신을 생전 모습 그대로 평양 금수산 의사당에 안치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12일자 노동당중앙위·당중앙군사위·국방위·정무원 연합명의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영생의 모습으로 모실데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발표,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이름을 바꿔 최고성지로 삼고 김일성시신을 그곳 안 유리관에 안치할 것이라고 전했다.이로써 김일성시신은 지난해 7월8일 숨진지 11개월여만에 처리문제가 매듭지어졌다. 김일성시신은 공산권 지도자 가운데 레닌과 스탈린,모택동 등에 이어 8번째로 미이라화된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시신 보존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당초 계획된 처리기간을 1개월여 연장했고 비용도 처음의 50만달러에 비해 훨씬 늘어난 4백만달러 가량을 투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이 이처럼 많은 시일과 돈을 들여 김일성시신을 처리,그의 생전 집무실에 안치키로 한 것은 주체사상 특유의 영생론에 따른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북한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뇌수」인 김일성의 시신보존을 통해 김일성의 영생과 부활을 과시하는 동시에 주체사상의 철저한 고수를 선언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은 이번에 김일성시신처리문제가 완결됨에 따라 다음달 8일 김일성 사망 1주기를 기해 성대한 행사를 펼치고 이를 김정일 탈상식으로 삼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최근 북한이 쌀외교에 치중하고 경수로 공급협상의 타결을 서두르는 것 등을 볼 때 북한에 무엇인가 급한 일이 있으며 그 일은 김일성 1주기 행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김일성 탈상행사를 거친 다음 김정일의 당총비서 및 국가주석 공식취임식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날짜는 8·15나 9·9북한정권 창건일,10·10노동당 창건일 가운데 하나를 고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김일성이 94년부터 3년을 기한으로 설정한 농·경공업과 무역제일주의 방침을 완수,유훈을 모두 지킨 뒤에야 김정일체제가 공식출범할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않아 앞으로 북한사정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
  • 종교계 대북접촉 과열경쟁/북의 통일전선전술에 말려들 우려

    ◎정치집회장 뻔한 8·15공동예배 합의/단군릉 기념제 참석… 선전에 이용당해 최근 우리측 종교단체들에 대한 북한의 연대공세가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종교계 내부에서도 대북접촉 과열경쟁양상을 보여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북한은 최근 정부의 8·15 판문점집회 불허방침에 맞서 한국내 각종 종교 및 재야단체들에 대한 편지공세를 재개했다.기독교연맹·천주교인협회·불교도연맹등 북한단체들 명의로 우리측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천주교중앙협의회 및 정의구현사제단·평화통일추진 불교인협의회·전국불교운동연합등에 편지를 보내 반정부 「통일투쟁」을 선동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개신교·천주교·불교등 우리 주요종교단체 인사들의 남북종교교류를 위한 방북신청과 제3국에서의 북한 관계자 접촉신청도 경쟁적 양상을 띠고 있다.이를테면 지난 5월중순 김수환 추기경 방북을 협의하기 위한 북경회동이 북한 천주교인협회 장재철 위원장의 회피로 불발됐음에도 불구,일부 신부가 올 6월 미국을 방문할 예정인 장을 현지에서 만날 계획을세우고 있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이에 따라 이 종교인들이 남측 기업들처럼 상호경쟁을 벌이느라 결과적으로 북측의 통일전선전술에 말려드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북측이 책임있는 당국간 대화채널은 차단하면서 종교등 민간차원의 접촉확대를 기도하는 것 자체가 우리 정부와 민간을 이간시키려는 전형적 통일전선전술인 탓이다. 예컨대 지난 4월 정부의 허가 없이 입북한 대종교 안호상 총전교일행이 어천절기념제를 당초예정대로 대종교의 성지인 구월산에서 치르지 못하고 북측의 「유도」에 따라 단군릉에서 거행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북한의 정치선전에 이용당한 꼴이 됐다는 얘기다.북한당국이 93년 이후 민족사의 정통성이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으로 이어진다고 선전하기 위해 대대적 단군릉 성지화작업을 벌여왔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지난 4월 KNCC측이 일본에서 북측과 「8·15 판문점 남북공동예배」에 합의하면서 ▲국가보안법등 통일의 법적 장애제거 ▲미전향출소자 송환등 5개항의 「정치성이 가미된」 공동선언문을 채택한 것도 마찬가지다.이 공동선언문은 강제납북자문제등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어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점은 순수종교교류목적이 아닌 정치성 집회로 변질될 게 불을 보듯 뻔한 판문점집회를 합의한 사실이다.이 때문에 정부로선 이 집회를 허용치 않을 방침이다. 뿐만 아니라 북측은 우리 불교계와의 접촉과정에서도 공동법요식등 순수종교행사보다는 「8·15 통일대축전」등 정치적 행사의 성사에 집요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측 종교계 일각에서 남북종교행사 공동개최의 성사에만 집착,상당한 후유증이 예견되고 있다.이를테면 북한의 정치적 의도가 담긴 제의에 분명한 선을 긋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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