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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총련 1만5천명 격렬시위/판문점진출 무산

    ◎경찰과 공방… 하오 늦게 하산 「한국 대학 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장 정태흥) 소속 대학생 1만5천여명은 15일 낮 12시쯤 경기도 고양시 동산동 삼송리 검문소 앞에서 범청학련이 판문점에서 개최키로 한 「8·15 민족공동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판문점 진출을 시도하다 이를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2시간 동안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에 앞서 이날 상오 10시40분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연신내역에서 내려 집결한 뒤 구파발쪽으로 가려다 경찰의 저지를 받자 왕복6차선 도로를 점거한 채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시위를 벌였으며 경찰들은 최루탄을 쏘며 이에 맞섰다. 이어 학생들은 삼송리 검문소 부근까지 진출,이곳에서 경찰과 다시 대치해 가로수 철제 받침대를 뽑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시위를 계속했으나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막혀 해산했다. 이날 시위로 연신내역에서 구파발,삼송리에 이르는 6차선도로가 2시간30분 동안 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또 시위과정에서 조선대생 나철원군(22·경영학과3년)이 머리가 찢어지는 등 학생 2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연신내와 구파발역,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 등 시내 곳곳에 경찰 1백48개 중대 1만7천여명을 배치,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민족공동행사」 폐막 「8·15 50주년 민족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공동대표 이창복)는 15일 하오 서울대에서 8·15 민족공동행사 폐막 기자회견을 갖고 『민족공동행사가 추진됨에 따라 남북간 대결구도와는 무관하게 남북대중들은 화해와 통일을 바라고 있는것이 증명됐다』고 주장했다. 남측준비위원회는 지난 4월22일 민족공동행사 발족 이후 4개월 동안 통일기행,통일자전거대회,거북이마라톤,통일음악회 등의 행사를 가진데 이어 이날 「남북해외의 7천만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북측준비위원회,해외준비위원회와 공동명의로 발표했다.
  • 돌아오는 배… 떠나는 학생들/김성수 사회부 기자(현장)

    ◎남북문제 인식의 괴리 극명히 표출 「돌아오는 배와 떠나는 학생들…」 광복 50주년을 하루 앞둔 14일 나온 두 뉴스는 우리 정부 당국과 북한측,우리 대학생들의 남북문제에 대한 인식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두 뉴스는 북한측에 억류됐던 우리측 쌀 수송선 삼선비너스호가 이날 하오 3시 포항항에 입항한다는 것과 「한총련」소속 여대생 2명등 대학생 3명이 판문점에서 열리는 「8·15 민족공동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베를린을 경유,이날 평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8일 동안이나 북한에 강제 억류됐던 삼선비너스호가 청진항을 출발,포항으로 항해하고 있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진 것은 13일 아침이었다. 휴일 아침 국민들은 선원들이 풀려나 무사히 귀환하고 있다는 소식에 늦게 나마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8·15 이전에는 돌아오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던 가족들의 기쁨은 더욱 컸다. 그러나 14일 상오 서울대 총학생회 사무실에서는 「한총련」 학생들이 또다른 뉴스를 준비하고 있었다.「8·15 민족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범청학련남측본부」 대표자격으로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이날 낮 12시 평양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북한측과 쌀수송선 귀환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지만 쌀수송선 억류 문제로 대북감정이 가뜩이나 격앙되어 있는 상태에서 불거져 나온 돌발사건이라 파장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대다수 국민들은 도와 주러 간 사람들을 트집잡아 일주일이 넘게 붙잡아 두었다가 생색이라도 내듯 풀어 주는 북측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날 서울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총련」 대변인 김민욱(단국대 총학생회장)군은 『95년을 조국통일의 원년으로 앞당기기 위해 남·북한과 해외에 있는 젊은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려고…』라고 파북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북쪽의 태도에 비추어 그같은 충격 요법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까 의문이 드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이들의 몸짓이 아무리 순수하다해도 북한 당국에 이용될 것은 뻔할 것이라는게 많은 국민들의 걱정이다.
  • 한총련 3명 어제 입북/검찰,입북 관련자 구속 방침

    ◎베를린서 평양으로/범청학련 회의 참가 「한국대학 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장 정태흥)소속 대학생 2명이 15일 판문점에서 열리는 제1차 조국통일 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 중앙위원회와 8·15 민족공동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총련은 14일 상오 서울대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범청학련 남측본부 대표로 정민주(22·인천대 건축학과 3년 제적)양과 이혜정(20·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회계학과 2학년)양등 2명이 최정남(26·서울대 원예학과 88학번)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장과 함께 14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정양등은 지난 10일 상오 출국,파리를 거쳐 12일 하오 베를린 범청학련 사무국에 도착한 뒤 최사무국장과 함께 베를린을 떠나 14일 새벽 북경에 도착했으며 이날 특별기편으로 북경공항을 출발해 낮 12시 평양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양과 이양은 8·15 민족공동행사에 참석한 뒤 오는 10월3일 범청학련이 개최하는 단군릉답사등 각종 행사에 참석한 이후 판문점을 통해귀국할 예정이다. 93년 7월부터 범청학령에서 일하고 있는 최사무국장은 10월3일 이후에도 북한에 체류할 예정이나 정확한 향후 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보안법 위반혐의 대검 공안부(안강민 검사장)는 14일 밀입북한 정민주양 등 3명이 귀국하는 대로 국가보안법 위반등 혐의로 구속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또 이들의 밀입북을 배후조종한 한총련 의장 정태흥(23·고려대 법학4년)씨등 한총련 간부들에 대해서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법처리키로 했다.검찰은 이를 위해 금명간 이들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할 예정이다. 검찰관계자는 『정양등이 당국의 허가없이 방북한 것만으로도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및 국가보안법상의 탈출행위에 해당된다』며 『앞으로 북한에서의 발언 및 구체적인 행적이 수집되는 대로 이적동조 또는 회합통신 혐의를 추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2

    ◎전화폐허서 교역 13위 경제강국 건설/부·마사태­10·26사건… 박정권 18년 마감­1979년/「민추협」 발족… 민주화운동 본격 점화­1948년/금융실명제·재산공개 등 대대적 개혁조치­1993년 ▷1971년◁ 2월17일 남한의 한필성,북한의 필화 남매가 국제통화로 서로 생사를 확인했다.4월27일 제7대 대통령선거,5월25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7월28일 서울형사지법 판사 39명이 정부의 압력에 반발해 집단으로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이 일어났다.8월23일에는 실미도 특수부대원이 서울로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10월1일 전국에서 장발족 단속이 시작됐다.12월25일 대연각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다. ▷19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8월3일 모든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는 이른바 「8·3 조치」가 발표돼 기업들이 자금숨통을 트게 됐다.10월17일 유신이 선포,박정희의 장기집권 계획이 모습을 드러냈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씨가 동경에서 괴한 5명에게 납치돼 강제송환됐다.10월6일 이화여대생들은 쌍쌍파티 중단을 결의했다.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생산량 25% 감축을 결정함으로써 석유파동이 발생,국내경제가 심한 몸살을 앓았다. ▷1974년◁ 4월17일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이 일어나 금융시장이 크게 교란됐다.7월13일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이철 유인태 김지하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8월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박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육영수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아 숨졌다.같은 날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가 실시돼 가결됐다.3월17일 서울 면목동 YH무역 여공 2백여명이 신민당사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976년◁ 8월1일 양정모가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해방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10월24일 박동선이 로비활동을 펼친 것이 미국에서 문제화됐다. ▷1977년◁ 8월20일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시험송전을 시작했다.9월15일 고상돈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11월11일 이리역에서 한국화약의 화약수송열차가 폭발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78년◁ 1월14일 여배우 최은희가 홍콩에서 납북됐다.4월24일 전남 함평에서 고구마 수매부정에 항의하는 농민대회가 열렸다.6월30일 현대아파트 부정분양사건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79년◁ 10월7일 박정희를 비난하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파리에서 실종됐다.10월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10월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됐다(부마사태).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부 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12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12·12사태). ▷1980년◁ 4월21일 사북광업소 광부 7백여명이 어용노조에 반발해 광산촌을 점거하고 경찰과 충돌하는 유혈사태가 일어났다.5월18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5월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전두환)가 신설됐으며 8월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10월13일 삼청교육 실시가 발표됐다. ▷1981년◁ 1월13일 대학졸업 정원제가 도입됐다.15일 민주정의당이 창당,전두환이 초대 총재로 선출됐으며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23일 대법원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관련 피고인 12명의 형량을 확정했으나 김대중은 나중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전두환은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에서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2년◁ 3월18일 고신대생 문부식등이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했다.3월27일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했다.5월7일 대검은 대화산업회장 이철희·장영자부부를 외국환 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18일에는 이 사건과 관련,대통령 처삼촌인 이규광등이 구속됐다. ▷1983년◁ 1월11일 나카소네 일본총리가 방한,한일정상회담을 갖고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3월17일 일본에서 활약중이던 프로기사 조치훈이 기성을 획득,일본 바둑계의 주요 타이틀을 석권했다.5월18일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민주화와 정치활동 피규제자 해금을 주장하며,자택에서 단식에 들어갔다.6월12일 청소년축구대표팀이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다.9월1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했다.10월9일에는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이 발생,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등 17명이 사망했다.11월17일 동아건설은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 규모인 리비아 1단계 대수로 공사를 32억9천만 달러에 수주했다. ▷1984년◁ 5월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화 추진협의회가 발족됐다.22일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이 완전개통됐다.9월6일 전대통령은 일본을 공식방문했다.일본의 히로히토 왕은 만찬에서 과거의 한일관계에 유감을 표명했다.9월 북한 적십자가 보내준 수재구호물자를 남한측이 인수했다.미국방송이 의정부에 핵배낭 특수부대가 배치돼 있다고 보도했다. ▷1985년◁ 5월23일 대학생 73명이 미 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사과 요구 및 반미구호를 외쳐 충격을 주었다.9월20일 남북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각 1백51명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했다. ▷1986년◁4월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분신등 시위가 본격화됐다.7월2일 부천에서 시위중 체포된 여대생 권인숙양을 경찰관이 성고문한 사건이 처음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다가 고문사했다.4월8일 김대중·김영삼씨는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신당창당을 선언했다.13일 전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를 발표하고 직선제 요구를 거부했다.24일에는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용팔이 사건이 발생했다.6월10일 민정당은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대표를 차기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그러나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및 호헌철폐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29일 노대표가 직선제개헌 수용을 밝혔다.12월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1988년◁ 1월14일 문교부는 새로운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을 확정 발표했다.2월25일 노태우대통령이 취임했다.4월26일 1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그 결과 처음으로 여소야대의 현상이 나타났다.9월17일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개막돼 10월2일까지 계속됐다.11월부터는 5공비리 청문회가 시작됐다.11월23일 전두환전대통령은 백담사로 은둔했다. ▷1989년◁ 3월25일 문익환목사가 방북,김일성과 면담했다.6월30일에는 외국어대 임수경양이 북한에 들어가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다.9월11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1990∼1년◁ 90년2월9일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이 합당,민자당이 창당됐다.10월1일 한소양국이 수교했다.91년2월 수서지구 택지특별분양 사건이 발생,이원배등 의원5명과 청와대비서관,정태수 한보그룹 회장등 8명이 구속됐다.12월18일 노대통령은 한반도 핵부재를 선언했으며 같은달 31일 남북한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가서명했다. ▷1992년◁ 3월24일 14대 총선이 실시돼 2번째 여소야대가 실현됐다.정부는 6월30일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95년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8월22일 중국과 수교,주변 4강과 모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12월19일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의 김영삼후보가 당선됐다. ▷1993년◁ 김영삼대통령은 2월25일 취임후 공직자 재산공개,군 하나회 숙정,금융실명제 실시등 굵직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이회창원장이 이끄는 감사원은 6월 율곡사업감사,7월 평화의 댐 감사등 과거비리를 사정했다. ▷1994년◁ 정부의 외교가 북한핵문제 해결에 집중됐다.그 결과 10월21일 제네바에서 미북기본합의서가 타결됐다.국내적으로는 구포 열차전복사건,위도 여객선 침몰사건,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아현동 가스폭발사건,성수대교 붕괴등 대형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1995년◁ 6월27일 역사적인 4대 지방자치선거가 일제히 실시된 결과 수도 서울의 시장에 민주당의 조순후보가 당선되는등 시도지사에 대거 야당 후보들이 당선됐다.4월28일 대구가스폭발에 이어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등 대형사고가 계속됐다.
  • 대만·말련 등 축하행사…일에 사과 촉구/종전50주년…아태국 표정

    ◎학살고발 영화전·폭죽 터뜨리며 행진­중·대만/“경제대국 일 눈치”… 조용하게 보내 대조­동남아 2차대전 종전기념일인 8월15일은 일본에게는 패배의 날이지만 많은 아시아국가에게는 일본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된 환희의 날이다.종전 50주년를 맞아 한국·대만·호주 등은 이날 일본의 패전을 기념하는 축하행사를 벌이거나 일본의 군국주의적인 과거에 대해 사과할 것을 촉구하는등 일본의 패전의 의미와 잔학상을 부각시켰다.하지만 말레이시아를 제외한 동남아국가는 의도적으로 행사를 개최하지 않는등 대조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북에서는 수리눙 장군(74)을 필두로 20여만의 대만인이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고 폭죽을 터뜨리며 시가를 행진,일본통치 종식 50주년을 기념. 이등휘 총통의 보좌관인 하우페이춘씨는 『50년전 오늘이야말로 중국인에게 가장 영광스런 날이었다』고 회고. 행진자중에는 「나는 중국인이다」란 표어를 내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중부와 남부대만으로부터 올라온 이들도 끼어 있었다. ○…중국은 잔혹한 학살을 고발하는 영화상영과 우표전시회,신문사설등으로 일본항복 50주년을 맞이하고 있으나 주요우방의 비위를 건드리는 않기 위해 신중한 반응. 특히 강택민 국가주석은 13일 발간된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회견에서 일본군에 의해 3천5백만명의 인명손실을 입은 나라의 수뇌치고는 용의주도한 발언을 해 주목.『나는 모든 일본인과 정치인이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접근하고 있으며 또한 역사에 책임을 지는 자세로 중·일관계의 정치적 기조를 지켜나갈 것으로 믿는다』 한 중국관리는 사적으로 『일본 항복 50주년을 맞아 중국이 공식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 있는 마당이므로 일본과의 관계를 공고히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폴 키팅 호주총리는 14일 일본에 대해 2차대전중의 군국주의와 일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하고 어린이에게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교육시키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촉구. 키팅총리는 이날 호주의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일본총리가 태평양전쟁 종전기념일인 15일을 맞아 『일본이 군국주의정책으로 이웃국들에게 커다란 희생과 손해를 입혔다는 점을 인정하고 국가를 대표해 이에 대한 유감표명을 해주길 바란다』고 언급. 그는 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투하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였는데도 전쟁의 희생자였다는 메시지를 일본인에게 남겼다』면서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 만큼 전쟁은 일본의 사과로 끝나야 한다』고 강조. ○…2차대전중 일본의 침략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은 동남아국가들이 말레이시아의 국지적인 행사개최를 제외하고는 종전 또는 해방 5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지 않고 있다.동남아국가들의 이같은 반응은 이 지역 최대의 경제협력 파트너이자 원조제공국으로 등장한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 경제협력(21세기 한­일 새 지평:3)

    ◎수평 분업으로 공생체제 구축을/바람직한 한·일의 경제관계/경제블록화 대응,보완관계 필요/무역장벽 제거… 기술 등 공유해야 8·15광복 50주년을 맞는 지금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경제전쟁시대에 진입해있다.공산체제 붕괴이후 이념 전쟁대신 경제전쟁이 각국의 운명을 거는 싸움이 되었다.유럽국가들은 EU통합을 통해 국제경쟁의 우위확보에 초국가적인 대응체제를 구축했다.미국은 범미주의를 회복하고 세계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으로 북미자유무역연합(NAFTA)을 출범시켰다.NAFTA는 미국의 기술과 자본,캐나다의 풍부한 자원 그리고 멕시코의 저렴한 노동력을 결합시키는 강력한 경제블록으로 경제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동맹군의 성격을 띤다.이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 대형공업국가들의 희생이 따르고 있다. ○충격흡수력 잃어 실제로 일본과 한국은 통화절상과 시장개방 압력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일본의 경우 80년대 후반 미국과 유럽의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플라자 협약에 의거,달러에 대한 엔화의 가치가 두배로 절상됐다.일본은고도의 기술축적에 힘입어 당시 통화절상의 충격을 힘겹게 이겨냈다.그러나 최근 들어 엔화절상압력이 다시 가해졌다.금년초 엔화는 달러에 비해 15%이상 절상됐다.여기에 미국이 슈퍼301조라는 초법적 무기를 통해 자동차등 주요 일본상품에 무자비한 무역보복조치를 취하고 있다.그러자 일본경제는 더 이상의 충격흡수 능력을 잃고 구조적 침체현상을 겪고 있다.그리고 엔화는 무력증에 빠지기 시작했다. 일본경제가 퇴조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경제는 일단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자동차·철강·조선·반도체 등 주력 상품들이 일본수출시장을 잠식하면서 경제에 활력을 주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단기적 과도 현상일뿐 내면적으로 심각한 구조적 위기를 맞고 있다.우선 이미 고개를 들기 시작한 원고가 수출증가를 반전시키고 있다.외세에 의한 이득을 외세에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산업기반의 대일 의존도가 커서 일본경제의 위기가 이전되고 있는 것이다.우리나라 수출산업의 근간인 자본재와 원료·중간부품의 일본의존도가 30%나 된다.이러한 구조하에서 일본 엔화절상으로 인해 국내 물가가 오르고 산업전반에 걸쳐 고비용구조화하고 있다.결국 일본과 한국 두나라 경제가 함께 위기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단기적 반사이익 그러면 광복 50주년을 맞아 향후 바람직한 한·일 경제관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양국 경제는 근본적으로 적대적 경쟁관계가 아니라 우호적 보완관계를 가져야 한다.국제 시장을 지배하는 유일한 논리는 힘의 논리이다.따라서 양국이 공동 대응능력을 기르는데 국경을 초월하여 힘을 모아야 한다.이런 견지에서 한·일간의 수평분업을 통해 공생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양국 경제가 수직적으로 연결될 때 한 나라가 위험을 맞으면 다른 나라도 같이 위험을 맞는다.그러나 수평적으로 연결될 때 한 나라 경제가 위험을 맞으면 다른 나라가 이를 상당부분 상쇄하면서 위험제거효과를 가져온다.양국경제는 역사적으로도 대륙으로부터의 문물을 전수해가며 협조한 경험이 있다. ○시너지효과 기대 일본경제는 무역흑자때문에화를 입고 있다.일본의 연간 무역흑자는 1천3백억달러나 된다.지나친 흑자유입은 내부적으로 경제를 고물가체제로 만든다.또한 외부적으로 외국으로부터 통상압력을 거세게 받는다.무역흑자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난관을 자초한 것이다. 반면에 한국 경제는 만성적인 무역적자구조를 면치못하고 있다.경제발전이 기술개발에 의한 부가가치 창출보다는 단순조립을 통한 수출실적증대 위주였다.따라서 경제가 외형은 크나 내실이 없다. 이런 구조하에서 한·일 양국은 무역장벽을 제거하여 기술·자본·인력등 모든 생산요소에 대해서 공유체제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금세기초 식민지배 관계라는 앙금을 씻고 다가오는 2000년대의 한일 신시대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양국경제의 협조는 필수적이다.그러면 양국경제는 수출과 수입에 있어 불균형구조를 개선하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데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 경우 양국 경제는 국제시장에서 어떠한 위협도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것이다. 이박에 한·일 양국은 상호보완 차원에서 북한 경제를 함계 도와 궁극적오로 북한도 공동번영체의 한 구성원으로 만드는 노력도 해야 한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47세) ▲서울대 공대졸 ▲미 컬럼비아대 경영학 박사 ◎기업제휴 늘려 경제국경 낮춰야/한·일경제의 새로운 전개/한국 규모 커져 파트너로 재인식/반도체 교역급증… 역조개선 징후 올해는 제2차대전 종료 50주년이다.또 동시에 한일국교 정상화 30주년이기도 하다.전자는 「광복 50주년」으로서 한국인에게 선뜻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후자는 한국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국내에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 것이다.필자는 이것을 「개발 30주년」이라고 정의하고 싶다.한일국교정상화가 한국의 경제발전의 커다란 실마리가 됐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 실마리 한일국교정상화 추진이 미국의 대소련 포위망정책의 일환,즉 냉전의 산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권력기반이 아직 다져지지 않았던 60년대 초반에 박정희정권이 국교정상화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해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교섭의 타결을추진한 점이다.『조국을 근대화하는데 최초로 필요한 재원과 기술을 얻기 위해 한일관계는 타결되지 않으면 안됐기 때문이다』(김종필).이 선택이 올발랐던 것은 국민이 경제발전을 추진한 박대통령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 등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30년동안 한일경제관계를 간단히 돌이켜 보자.우선 먼저 지적해야 할 점은 양국의 무역관계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크게 변화했다는 점이다.한국의 대일무역은 65년 2억1천60만달러 규모에서 94년 3백89억1천3백만달러로 1백84배나 늘었다.연평균 19.7%의 신장률을 보였다.이러한 급격한 양적 변화는 당연히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그것은 일본의 한국으로부터의 수입품목의 구성변화에 명확히 나타난다.65년에 16.9%밖에 안되던 공업제품비율은 93년에는 80%에 달하고 있다.이 사실은 같은 해 일본의 수입전체에서 공업제품의 비율이 52%였던 점을 생각한다면 한일관계가 일본과 제3국과의 관계보다 경제적으로 긴밀화(수평분업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미·일 의존 낮아져 두번째로는 한국의 무역에서 점하는 일본의 셰어의 저하다.미국의 셰어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저하하고 있어 이것은 한국에 있어서의 시장의 다각화,특히 미일경제에의 의존의 저하로서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한국경제는 미일의 바운더리를 넘어서 세계에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양국인의 왕래의 활발화이다.한국을 찾는 일본인 여행자수와 일본을 찾는 한국인 여행자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94년에는 각각 1백64만4천명,1백5만2천명에 달했다.한국인의 일본 방문자수가 엔고하에서도 급증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상 세가지 점은 한일경제관계의 긍정적 측면으로 말할 수 있다.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역시 짙어진다.한일간에는 만성적인 무역불균형이 존재하고 있다.이 원인은 기본적으로는 한국이 수출촉진을 통해 고도성장을 꾀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는 자본재산업의 육성을 뒤로 돌렸다는 점에 있다.자본재 공급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 왔다.이것은 한국경제의 상황에서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그렇지만 이러한 정책은 결과로서 수입유발적인 산업구조를 형성시켜 거액의 대일적자를 한국에 초래시켰다. ○역조 성장정책 탓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양국경제관계를 생각해보고 싶다.지난해이후 엔고는 다시 한국의 대일무역적자를 급증시키고 있다.그러나 지금까지 없던 현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양국간에 가져오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다.먼저 반도체등 부가가치가 높은 공업제품의 대일수출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이것은 획기적이다.반도체 수출의 급증은 대일무역 적자축소의 돌파구역을 맡을 가능성이 있다.두번째로는 한국기업에 의한 일본기업의 매수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한국기업은 대일시장공략의 거점만이 아니고 기술 및 인재 등을 확보해 국제화 추진상 유리한 발판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셋째 삼성그룹과 닛산과의 승용차생산 제휴다.승용차생산은 전후방 연계가 넓다.그 승용차산업의 공장이 부산에 설치된다는 사실은 한국남부와 규슈지방의 경제적 교류를 한층 활발하게 만들어 한일경제의 보더리스(borderless)화를 진전시켜 나갈 가능성이 있다. ○일 기업 매수 늘어 이상 세가지 측면에서 양국경제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한국경제의 실력향상은 양국간의 경쟁을 심화시킬 뿐만이 아니라 상호 파트너로서 재인식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10년후 한일국교 정상화 40주년은 한국에 있어 보다 긍정적으로 맞이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노조에 신이치 ▲일 아세아대 교수(53세) ▲와세다대 경제학과졸 ▲아 경제연 국제교류 실장
  • “권력형 부패사범/8·15 특사 유감”/대한 변협

    대한변협은 14일 정부의 8·15특별사면조치와 관련,성명을 내고 『국민 대화합이라는 명분아래 수서·포철·상무대·슬롯머신비리사건을 비롯 원전건설수뢰·국회돈봉투사건 등 권력형 부패사범을 사면·복권 대상에 포함시킨데 대해 경악과 허탈감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 1945년 「그날」도 무더웠다/대구 35도의 불볕… 오늘과 흡사

    「1945년 8월 15일.전국이 가끔 구름 많이 끼었고 기온은 대부분 지방이 30도를 넘는 무더운 날씨를 보였음.최고기온은 서울 33.9도,부산 31.7도,대구 35.0도,광주 32.9도… 강수량 기록 없음」 온 나라가 광복의 환희에 들떠 있던 50년전 날씨 관련 자료의 요약내용이다. 기상청이 14일 예보한 1995년 8월 15일의 전국 날씨 개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기상청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날의 기상을 「전국이 가끔 구름 많고 소나기 오는 곳도 있겠음.최고기온은 서울 32도,부산 32도,대구 37도,광주 34도…」라고 예보했다. 단지 그때 기록에는 소나기 오는 곳도 있었다는 내용은 남아있지 않지만 기상관측술이 허술했던 점을 감안하면 그때와 지금의 날씨는 꼭 닮은 꼴이다. 기상청은 광복 50주년을 앞두고 당시의 기상자료를 뒤진 결과 이같은 내용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8·15 당시의 기상관측 조직은 조선총독부 산하의 기상본부가 인천에 있었으며 전국에 24개 측후소와 17개 항공기상출장소가 있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1

    ◎분단대결 구도속 민주주의 꽃피우다/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전국토 초토화­1950년/5·16 쿠데타… 본격 개발독재시대 돌입­1961년/유신 선포… 장기집권의 「정치암흑기」로­1972년 95년 8월15일.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지 쉰번째 맞는 광복절이다.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민족상잔의 비극과 국토의 허리가 꺾이는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분단을 원죄 삼아 정치·사회등 각부문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최근들어서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으로 붕괴·폭발등 인재가 속출,광복 반세기사에 깊은 골이 패이게 했다.그러나 한민족은 이같은 역사의 도전을 끈질김과 슬기를 갖고 성공적으로 극복,전쟁의 폐허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눈부신 꽃봉오리를 피워냈다.광복 및 분단 반세기동안 빚어진 영욕의 역사를 연도별로 간단히 정리해본다. ▷1945년◁ 8월15일 한민족은 36년간의 일제강점에서 벗어났다.그러나 얼마뒤 9월2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발표돼 분단의 씨앗이 심어졌다.김일성은 9월19일 원산항을 통해 북한에 들어왔다.이 가운데 10월25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을 중심으로 2백여 정당대표가 회합해 조선독립 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김구등 임정요인들은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환국했다.연합국은 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 신탁통치를 결정,12월31일 반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1946년◁ 조선공산당은 1월2일 입장을 급선회,신탁통치 지지에 나섰다.5월23일에는 군정장관의 허락없이 38선을 무단 월경하는 것이 금지돼 분단이 사실화됐다.이에 따라 이승만은 6월3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했으며 소련은 7월2일 서울영사관을 철수했다.대구에서 쌀배급요구를 내세운 10·1폭동이 일어나 3천7백명이 체포돼고 16명이 숨졌다. ▷1948년◁ 2월26일 유엔은 남한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김구등 한독당 대표들은 이에 반발해 4월19일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갖고 통일방안을 논의했다.또한 제주도에서 4월3일 남한단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그러나 결국 5월10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 아래 남한단독 첫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총선 이후 첫 소집된 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했으며 원내 선거로 초대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했다. ▷1949년◁ 5월20일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나 국회의원들이 체포됐다.미국은 같은날 미군철수를 발표했으며 6월29일 철수를 완료했다.이에 앞서 6월26일 민족지도자 김구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피살,국민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1950년◁ 미 애치슨 국무장관은 1월12일 미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된다고 말했다.반면 1월26일에는 외침시 미군의 개입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됐다.마침내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여간 전국토가 전화에 휘말려 폐허화됐다.3일만인 6월28일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됐으며 같은날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됐다.미국은 6월27일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에 연합군 결성을 제안,7월7일 안보리에서 유엔군 최고사령부 설치를 채택됐다.부산까지 계속 밀리던유엔군은 9월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감행,9월26일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에 들어갔다. ▷1951년◁ 중국군은 1월1일 6개군단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했고 정부는 다시 1월4일 부산으로 후퇴했다.이 가운데 공비토벌을 이유로 거창양민 6백63명을 국군이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1953년◁ 이승만은 미측의 조기 휴전 추진에 반발해 6월18일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석방하는등 미측에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7월27일 유엔과 북한·중국이 당사자로 서명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조인됐다.북한에서는 8월7일 박헌영등 남로당 계열을 간첩혐의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1960년◁ 전년의 사라호 태풍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을 간신히 수습하고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4대 대통령에 이승만대통령이 당선됐다.그러나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져 거센 항의시위가 빚어졌다.4월11일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렬군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4월19일 서울에서 2만명의 학생들이 대대적인 도심시위를 벌여 4·19혁명의 불길이 당겨졌다.4월26일 이승만대통령은 마침내 하야성명을 발표했다.이에 따라 4월28일 과도내각이 구성됐으며 이승만은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소장의 주도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전두환대위가 이끄는 육사생도들은 18일 쿠테타지지 시위를 벌였다.박정희는 20일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했다.이어 용공분자와 깡패 6천2백여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7월27일 미측은 한국군사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1962년◁ 한일양국은 3월12일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했다.또 3월19일 최고회의는 63년 민정이양을 발표했으며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이에 따라 윤보선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하자 박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또 6월10일에는 10환을 1원으로 평가절하하는 화폐개혁이 단행됐다.10월15일에는 한미행정 협정실무자회담이 학생들의 반대속에 18개월만에 재개됐으며 11월12일 김종필은 일본 오오히라와의 비밀메모를 작성했다. ▷1963년◁ 1월18일 민주공화당이 발기선언을 가졌으며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발표했다.25일 김종필은 순회대사 자격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올랐다.11월26일 실시된 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압승을 거두고 이어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64년◁ 4월1일 국회에서 김종필과 오히라간의 비밀메모가 공개되면서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는 6월3일 각급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1965년◁ 국회는 1월26일 베트남에 대한 국군공병단의 파견동의안을 통과시켰다.또 2월20일에는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군은 한일조약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날로 거세지자 4월19일 위수령을 발동했으며 정부는 6월22일 한일협정을 정식조인했다. ▷1966년◁ 6월18일 장창선이 세계아마레슬링 플라이급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다.1주일 뒤인 6월25일에는 김기수가 국내 처음으로 주니어미들급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1967년◁ 3월22일 북한 중앙통신부사장 이수근이 위장 귀순했다.5월3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박정희후보가 당선됐다.7월8일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관련자1백94명 가운데 1백4명을 구속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31명이 청와대기습을 위해 서울에 잡입했다.1월23일에는 푸에블로호가 납북됐다.4월 파라과이와의 이민협정에 체결됨으로써 남미 이민의 막이 올랐다. ▷1969년◁ 2월5일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전형이 실시됐다.3월22일에는 3·1고가도로가 개통됐다.3월28일 김수환대주교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에 선임됐다.10월17일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가결됐다. ▷1970년◁ 3월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로에서 정인숙이 피살,배후를 놓고 전국이 들끓었다.4월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사망했다.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해 노동운동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했다.
  • 광복 50돌 경축행사 “풍성”/시·도별 학술토론회·예술제 등 다채

    광복절 50주년을 경축하는 행사가 시·도별로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대토론회,예술제,창무극,오페라 등 학술,문화행사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13일 상오 7시 올림픽공원에서는 5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민생활체육 협의회(회장 최일홍)주최로 「95 세계 한민족 축전행사」의 하나로 한민족 달리기행사가 개최돼 모처럼 고국을 찾은 1백여개국 1천여명의 해외동포를 비롯해 일반 시민 등이 참가했다. 14일에는 8·15 민족 공동행사(한양대)와 범청학련 통일 대축전(한양대),광복 50주년 기념 멀티미디어 영상쇼(여의도 고수부지),전국 돛단배 한강종주대회 등 기념행사가 이어질 예정이다. 부산에서는 13일 하오 6시부터 1시간 30분동안 부산시청앞에서 「광복 50년,통일로 미래로」란 주제의 광복길놀이 가장행렬이 열렸다.
  • 8·15 쉰돌… 이젠 오십보백보 안되게(박갑천 칼럼)

    셈(수)의 이름은 세는 현상과 많이 관련된다고 보아야겠다.하나·둘·셋…하고 세다가 두자리수인 열에 이르면 손바닥이 펴지면서 열린다.그것은 열다(개)는 뜻과 같아서 흥미롭다. 그다음 두자리수는 스물·서른·마흔·쉰·예순·일흔·여든·아흔이다.주목되는 사실은 「스물」만 빼고는 모두 「흔」을 항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소리가 변화를 거쳤고 맞춤법따라 표기함으로 해서 달라보인다는 것뿐이다.서른은 셋, 예순은 여섯, 여든은 여덟과 관계되지 않은가.「쉰」도 「쉬흔」이 줄어진 형태.「다섯」과는 떨어진 소리지만 『마흔아홉,쉬흔…』하면서 온(백)의 가운데 까지 왔으니 일단 숨돌려 쉰다(휴)는 뜻을 담았다고 해석해 봄직하다. 하지만 여기서 「쉰다」는 것을 멈춘다는 뜻으로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쉰하나,쉰둘…』을 세어나가기 위해 숨을 한번 새롭게 「쉬어」본다는 뜻이 더 짙었던 것 아닐지.가령 공자가 『쉰살에 이르러 천명을 알았다』(오십이지천명:「논어」위정편)고 했던 뜻도 그것이다.세상이치에 대해 그때 비로소 어섯눈을 뜨게되었으므로 참다운 내것으로 만드는데는 그다음이 더 중요하다는 고백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논어」의 술이편에 보이는 말도 그렇다.『(내나이 몇해를 더하여) 쉰에 역경을 배우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면서 한뉘로도 모자랄 깨달음의 어려움을 밝히고 있지않은가.잠깐 숨을 내쉬면서 원숙을 기약하는 나이가 쉰이라고 말해볼수 있을 법하다. 「회남자」(원도훈)에 쓰인 바 위나라 대부 거백옥의 성찰하는 자세도 쉰을 표준삼고 있다.거백옥은 공자도 군자라면서 존숭했던 사람.그는 『쉰살에 이르러 마흔아홉살까지의 잘못을 알았다』(오십이지사십구년비).나이 쉰이란 그렇게 반백년의 삶을 거울삼아 굳세고도 옹골찬 삶에의 숨을 쉬는 연륜이라고 해야겠다. 올해의 8.15광복절은 그 쉰돌맞이라는 점에서 한결 뜻이 깊어진다.그게 어디 짧은 세월인가.일제강점의 굴레아래 살았던 35년보다도 15년이나 더 긴 햇수가 아닌가.변하고 발전하고 한것이 엄청나다.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49년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두동진 경우 또한 한두가지가 아니다.영욕 엇섞인 49년.수렁속을 헤맨 발자취에 대한 성찰을 뼈아프게 해야한다.쉰살부터서의 걸음걸이가 더넘에 겨워 오십보백보로 될수는 없다.빛나는 내일을 여는 대열에 발맞춰나가는 기점으로 삼을수 있어야겠다.
  • 광복 50년/“조선 정궁” 경복궁 위엄 되찾는다

    ◎강녕전 등 8개동 완공… 10월 일반에 공개 광복50주년이 되는 올해 8월15일부터 조선의 정궁 경복궁도 그 위엄과 긍지를 되찾게 된다.경복궁을 가로막고 흉물스럽게 버티고 섰던 일제의 상징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중앙돔 첨탑이 이날 해체되면서 총독부건물의 철거작업이 본격화되기 때문이다.총독부 건물철거는 정부가 추진중인 경복궁 복원의 중추적인 작업으로 일제잔재 청산 뿐만 아니라 경복궁 복원 차원에서도 큰 의미를 담고있다. 문화체육부의 경복궁 복원 계획에 의하면 96년말까지 총독부 건물이 완전 철거되고 오는 20 09년까지 경복궁내에 모두 84개의 전각이 들어선다.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도 본래의 자리에 본디 모습에 따라 목조문으로 서게 된다.또 현재의 조선총독부 자리에는 회랑이 설치되며 조선총독부 미술관(구 민속박물관)도 98년까지는 모두 철거된다. 지난 91년 기공식을 갖고 시작된 경복궁 복원작업에 따라 지금까지 복원된 전각은 8개동 4백22평.강녕전·교태전·연생전·연길당·경성전·흠경각·응지당·함원전 등이다.왕과 왕비의 처소인 이 전각들에 이어 현재는 교태전 주변 행각들에 대한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당초 침전 복원계획의 85%에 달하는 공정이 마무리 된 셈인데 복원된 전각들은 오는 10월쯤 일반관람객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총 1천7백89억원의 예산이 드는 경복궁 복원공사에는 목재 약 4백50만재,기와 1백50만장이 소요되며 우리 전통건축술의 정수인 궁궐기축기법을 전승한 인간문화재 대목장·소목장·단청장 등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복원작업이 시작되기전 경복궁안의 전각은 일제의 훼손과 화재로 파손돼 36동에 불과했다.그러나 조선조 고종때만 해도 경복궁은 3백30여동의 전각에 7천여칸에 이르는 웅장한 궁궐이었다.13 95년 태조에 의해 창건될 당시엔 4백여칸 규모였으나 고종에 의해 18 67년 중건되면서 9천9백99칸에 이른다는 중국의 자금성 못지 않은 규모를 갖춘 것이다.오는 20 09년까지의 복원작업이 그 모두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해도 잊혀진 조선 정궁의 당당한 모습은 재현해 내게 된다.
  • 독립기념관(외언내언)

    충남 천안시 목천동 흑성산기슭 1백20만평의 부지에 독립기념관이 웅장한 모습으로 완공된 것은 87년 8월15일.광복42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그전해인 86년 8월15일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완공을 불과 열흘남겨 놓고 불이 나는 바람에 1년 늦추어졌다. 독립기념관은 처음부터 민족혼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일본역사교과서가 지난날의 한일관계를 왜곡,기술한데 분노한 전국민이 한푼 두푼 내놓은 정성어린 성금으로 이룩된 「민족의 대성전」.코흘리개 꼬마에서부터 8순노인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동포 모두가 벽돌 한장씩을 쌓아올린 민족정기의 요람이기도 하다. 독립기념관은 「겨레의 집」 「민족전통관」 「근대민족운동관」 「3·1운동관」 「독립전쟁관」 「임시정부관」 「대한민국관」등 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집된 자료는 4만3천2백90여점.우리선조들의 웅건했던 기개를 화폭에 담은 그림과 유물,일제때 선혈을 뿌렸던 독립운동가들의 살아 숨쉬는 유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문제는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완공 다음해인 88년 4백14만명이 다녀갔으나 지난해엔 1백60만명에 그쳤다.독립기념관을 찾은 관람객을 연도별로 보면 89년 2백67만명,90년 1백95만명,91년 1백79만명,92년 1백64만명,93년 1백62만명등.광복50주년을 맞은 올해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한다.안타까운 일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손이 모자라 전시유물들이 제때 제대로 교체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고 주변에 연계 관광지가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그래서 독립기념관측은 일손을 대폭 늘려 입체적인 전시가 되도록 하고 주위의 동·서계곡에 「청소년수련장」 「민속박물관」 「첨단과학관」등을 세우는 방안을 마련했으나 예산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거의 포기한 상태. 독립기념관이 단조로운 유물전시관에서 종합역사공원으로 탈바꿈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김 대통령 「8·15경축사」 뭘 담나

    ◎대북 「새 제안」보다 통일 좌표에 무게/“남북문제 당사자 해결” 기본입장 천명/내부 대단합­지속적 개혁추진도 강조 청와대측은 8·15를 이틀 앞둔 13일까지 김영삼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 경축사 내용을 다듬었다.광복 50주년의 의미를 살린다는 차원에서 신중을 기하는 측면도 있다.북한의 태도가 너무 예측불허로 왔다갔다 하니까 고심하는 대목도 있을 것이다. 청와대측은 김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획기적 대북 제안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북한이 수용태세가 안돼 있는데 어떤 제안을 해봐도 실효가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새 제안보다는 광복 50주년을 정리하고 통일로 나아가는 큰 테두리를 정리할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 관계자들이 전하는 광복절 경축사의 방향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해방이후 50년 역사에 대한 평가다. 여러 어려움은 있었지만 결국 문민정부를 탄생시켜 민주화를 달성한 것은 국민 전체의 승리라는 점을 지적할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는 관심을 모았던 남북문제에 대한 언급이다. 정부는 당초 김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한반도 정전체제를 남북 당사자간의 평화체제로 바꾸고 미국 중국이 그 내용을 보장하는 이른바 「2+2」방식을 제안하는 것을 검토했었다.그러나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대신 김대통령은 향후 남북관계의 기조와 관련,현 정전체제를 유지해 나가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모색해 나가야 하며 남북간 모든 문제는 남북 당사자간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을 천명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또 남북 기본합의서를 포함,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등 남북간 모든 합의사항도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고 밝힐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북한이 우리의 쌀 수송선을 송환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런 하나하나 사건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북한 문제를 풀어간다는 생각이다. 셋째,김대통령은 광복50주년의 의미가 결국 통일로 이어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남북화해와 함께 우리 내부의 대화합 필요성도 천명할 계획이다.「8·11 대사면」의 정신을 살려 새출발을 강조할 것 같다. 부정부패 척결,개혁과 변화의 지속적 추진도 경축사에서 다시 천명될 것이다. 또한 한일 관계가 진정한 이웃으로 성숙한 동반자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일본측이 과거를 진정 속죄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점을 지적할 것으로 전망된다.
  • 피서 막바지 휴일 고속도 “몸살”/“탈서울” 차량 19만대 몰려

    ◎귀경길 소사∼만종 분기점은 “주차장”/강릉∼서울 7시간 30분 걸려 막바지 휴가철에 접어든 8월 둘째주 일요일인 13일 전국의 고속도로와 주요 도로는 휴가를 떠나거나 귀경하는 차량들로 곳에 따라 심한 정체현상을 보였다. 경부 및 영동 고속도로는 휴가를 다녀오는 귀경차량들과 하루 건너뛴 8·15 광복절 공휴일을 앞두고 서울을 떠나 피서지로 향하는 차량들로 상·하행선 모두 붐볐다. 특히 영동고속도로 상행선은 피서를 떠났던 차량들이 하오부터 몰리기 시작,평소 4시간30분 걸리던 강릉∼서울구간이 7시간30분 가량 소요돼 귀경객들이 곤욕을 치렀다. 경부선의 부산∼서울구간은 평소보다 1시간쯤 더 걸려 6시간30분정도 소요됐다. 정체구간은 상행선의 경우 영동고속도로 소사휴게소∼만종분기점 구간에서 거북이운행이 계속됐으며 경부고속도로는 청주IC∼천안IC,안성∼죽전구간이 시속30∼40㎞로 서행을 거듭했다.또 중부선 호법∼하남구간은 한때 극심한 정체현상으로 주차장을 방불케했다. 경부고속도로 하행선도 이날 아침부터 한남대교∼서초IC,잠원∼서초IC까지 거북이운행이 계속되다 밤늦게야 겨우 정체가 풀렸다.그러나 중부고속도로는 소통이 대체로 원활한 편이었다. 한국도로공사측은 이날 하루동안 19만3천여대의 차량이 서울을 빠져나갔다고 밝혔다.이는 평소 주말에 비해 2만여대가 늘어난 것이다.
  • 일 총리/“과거 전쟁은 침략” 인정/일 언론 보도

    ◎8·15회견 때/“아 국민에 많은 고통 줬다” 【도쿄=강석진 특파원】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일본 총리는 오는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할 「전후 50주년에 즈음한 총리담화」에서 과거 전쟁이 침략이었음을 명백하게 인정할 것이라고 일본언론들이 12일 보도했다. 총리 담화문 초안은 과거 전쟁에 대해 『국책을 그르치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국민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의심의 여지도 없는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명기하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표명하는 것으로 돼있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초안은 또 과거의 교훈을 살려 「독선적인 내셔널리즘(국수주의)을 배척」함으로써 일본이 국제협조와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하고 잘못을 두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도록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젊은 세대에게 강조해야 하며 일본과 아시아 국가의 근현대사 역사연구를 지원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무라야마 총리는 15일 열리는 각료회의에서 이 담화를 확정한뒤직접 발표할 예정이며,자민당 일각의 보수·우익세력이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론들은 덧붙였다. ◎“망언 문부상 파면”/일 공산당 촉구 【도쿄 연합】 일본 공산당은 12일 과거 전쟁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망언을 늘어놓은 시마무라 요시노부(도촌의신)문부상을 즉각 파면하라고 촉구했다.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지위화부)서기국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건성으로 발언을 철회함으로써 속임수가 통하는 문제가 아니다』고 지적하고 시마무라 문부상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노골적으로 합리화했고 문부상이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파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과거 청산(21세기 한­일 새 지평:1)

    ◎바람직한 이웃관계를 위한 제언 광복 50년은 한국과 일본간에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여러가지 문제들을 매듭짓고 바람직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계기가 돼야 할것이다.과거청산,외교·안보,경제협력,문화교류등 주요 분야별로 두나라 전문가들로부터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미래상을 연재로 들어본다. ◎“일은 수억 아시아인 고통 외면 말아야”/일의 과거사 인식 자세의 문제점/아직도 침략전쟁 책임 회피 급급/굴절된 역사 직시… 참된 자성 필요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인 85년5월 당시 서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독일 연방의회에서 『과거에 눈을 닫는 자는 현재도 볼 수 없게 된다.비인간적인 행위를 마음에 새겨두지 않는 자는 또다시 그러한 위험에 빠지기 쉽다』며 나치즘과 제2차대전의 교훈을 상기시켰다.같은해 8월 일본의 당시 나카소네총리는 A급 전범 7인의 위패가 모셔진 정국신사에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참배를 감행하였다. ○독일과 인식 큰 차 일본 각료들의 참배는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금년 일본 각 지방자치단체 의회에서는제2차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죽은 일본군의 넋을 추모하는 결의가 무성하였다.과연 오늘의 독일에서 현직 각료가 나치 수뇌의 묘소를 참배하는 사태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똑같은 제2차대전의 추축국이었지만 일본과 독일의 이같은 차이는 과거사에 대한 양국 인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일제의 침략주의에 대한 책임추궁제도로는 인적책임에 대한 전범재판과 물적책임에 대한 샌프란시스코조약체제로 요약될 수 있다.그러나 제2차대전 후의 냉전구도 속에서 일제의 과거사에 관하여는 인적 책임과 물적 책임 그 어느편도 철저히 규명되거나 추궁되지 못하였다.전후 국제질서를 주도한 미국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일본의 과거사 책임을 단죄하기보다는 아시아에서의 대공방벽 구축에만 심혈을 기울였다.아시아 피해국에 대한 일본의 배상보다도 일본의 경제부흥과 재군비를 더욱 강조하였다.그 결과 일본에서는 침략전쟁의 책임자들이 전후의 집권세력으로 재등장하였으며 죄의식이 없는 이들에게 전후처리가 맡겨졌다. ○가해자 인식 부재 이러한과정속에서 진행된 일본의 전후처리 태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부각되었다.첫째,일본의 가해자 의식의 부재이다.수억의 아시아인이 일본의 침략주의로 인하여 장기간 막대한 고통을 당한 사실은 외면되었고,오히려 일본은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국이라는 점만이 강조되었다.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한 것이다. 둘째,가해자 의식의 부재는 전쟁책임의식의 부재로 연결되었다.일본인 스스로가 피해자의 대열에 섬으로써 과거 침략행위의 진상이나 피해 파악을 외면하였고 역사에 대하여 특별히 책임질 일이 없다고 강변하였다.패전 50주년을 맞아 일본 국회차원에서 추진하던 사죄결의가 속빈 강정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배상의무도 회피 셋째,전쟁책임의식의 부재는 자연히 대외적 배상의무 회피를 조장하였다.전후 일본이 구군인 등 자국민 피해자에게 지불한 보상액의 누적합계가 근 40조엔에 육박하고 현재도 연간 2조엔에 상당하는 지불이 계속되고 있는데 반하여 일본이 25개국과 체결한 29개 전후처리조약을 통하여 대외적으로 지불한 금액의 합계는 1조엔을 약간 넘을 뿐이다.제2차대전의 희생자란 그릇된 나치즘의 피해자라는 성격 규명을 분명히 하고 있는 독일과 달리 일본에서의 전쟁희생자란 군국주의 정책수행에 앞장서다가 피해를 당한 자국민이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현재 일본 각지의 법원에서는 한국인을 비롯하여 필리핀인·중국인·네덜란드인·홍콩인 등 각국 외국인이 일본을 상대로 과거사 책임을 추궁하는 소송이 무려 30건 가까이 진행중이다.대부분이 70을 넘은 고령의 피해당사자가 그들 살아 생전에 끝나기나 할지조차 전망이 불투명한 소송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심정을 일본은 되새겨야 할 것이다. ○대일 소송 잇따라 금년 5월 유럽에서는 제2차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런던에서 모스크바까지 성대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파리에서는 독일군의 시가행진도 있었다.금년의 독일군이 50년전과 다른 점은 더 이상 침략자가 아닌 유럽 번영의 동반자로서 행진하였다는 점이다.일본은 현재 자신을 구적국으로 규정하고 출범한 유엔체제 내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그러나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기념하여 서울이나 남경 아니면 마닐라에서 일본자위대가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을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그에 합당한 지도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과거사에 대한 인식 전환­이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일본 자신이 될 것이다. ▲정인섭 방송통신대 교수(41세) ▲서울 법대졸 ▲법학박사 ◎“왜곡된 역사 교과서 바로잡는 일부터”/과거청산과 한­일 미래를 위하여/위안부 보상문제 등 적극 나설때/「불전결의 불발」 같은 추태 없어야 지난 6월9일 채택된 전후50주년 결의를 둘러싸고 일본 국회(중의원)가 보인 추태는 「50년 결의」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이웃나라에의 국제공약이었던 만큼 대외적으로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일 국민 기대 배신 그것은 또 전후50년 결의가 아시아 여러나라와 진실로 화해하고 미래지향의 관계 수립을 향해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을 마음으로부터 바란 많은 일본인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하타 쓰토무(우전자) 전총리(신진당 부당수)는 『전후50년이라는 고비를 살리지 못하고 결의를 끝내게 되면 세계 여러나라로부터 대단히 엄한 반발을 받을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그 신진당은 「50년결의」 채택의 본회의를 보이콧했다.여당 3당으로부터도 다수의 결석자가 있어서 5백2명의 중의원중 채택에 참가한 것은 겨우 과반수인 2백52명으로 이례적인 사태였다. 가이후,미야자와,호소카와,무라야마등 역대 일본총리가 방한시 행한 불행한 과거에 대한 반성발언을 알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나라를 대표하는 역대 총리의 발언을 없었던 일과 마찬가지로 만들고 만 일본국회의 어처구니없는 전후결의의 결과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찬물 끼얹는 행위 그런 가운데 일본인을 구해 준 것은 『일본의 국회결의는 대단히 유감스럽다.새로운 불신으로 연결되는 것을 우려한다』면서도 『좋은 내용의 결의를 향하여 노력해온 사람들의 노력을 평가하고 싶다.그 사람들은 이 결의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앞으로의 노력에 주목하고 싶다』라고 말한 김태지주일대사의 적절한 발언이었다.(아시히신문·통일일보 인터뷰) 한일기본조약 체결 30주년에 즈음하여 일본의 유력지들은 나름대로 특별기사를 게재하였으나 국교30년의 양국의 현재위치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깊어가는 상호의존」,「아직 두꺼운 마음의 벽」이라는 제목을 붙인 닛케이신문 6월 20일자였다.앞서 언급한 추태의 극을 보인 일본국회의 전후결의가 마음의 벽을 없애기 위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은 더 말이 필요없다. 하지만 소걸음과 같지만 역사교과서 기술의 개선,종군위안부 문제의 구체적 해결등 불행한 과거의 청산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한 사실을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다. 일본의 문부성이 6월28일 발표한 국민학교 6년생의 사회과 교과서에는 일본어의 강제,창씨개명,토지의 몰수,손기정선수의 일장기 사건등 식민지 지배에 관한 기술이 대폭 늘어나 국민학생도 잘 알수 있도록 됐다. 90년 5월 방일한 노태우전대통령은 일본 국회연설과 일본 기자클럽 회견을 통해 역사의 진실에 대한 인식의 공유를 호소했다.일본 문부성이 한일 신시대의 개막을 향해 양국간의 역사에 대해 국교·중학교의 수업중 꼭 다루도록 지도를 거듭 내린 것도 이 때부터였다. 미야자와총리의 방한 이래 3년 넘어 보상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보상사업을 추진하는 임의단체로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설립돼 7월27일에는 전참의원의장 하라 분베에(원문병위)씨가 이사장으로 취임,한국 중국 필리핀등 1천명을 넘는 것으로 보이는 전 위안부에게 일시금을 보상함과 아울러 복지와 의료면의 지원사업에는 일본정부로서도 일부 책임을 지는 형태로 됐다. ○청산 움직임 일어 관계의 긴밀도를 재는 사람의 왕래는 30년전의 1백20배.지난해는 2백69만명을 헤아렸다.필요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사람의 왕래의 확대다. 미래지향의 관계도 따지고 보면 한일 쌍방이 필요로 하는 관계의 심화와 발전인 것이다.앞에서 말한 닛케이신문은 「깊어지는 상호의존」의 관계를 묶는 키워드를 「공통의 이익」이라고 하고 있다. 최근 현실화하려 하고 있는 한일간 수평분업체제는 또한 공통의 이익을 위해 상호 필요로 하는 관계 자체다.엔고현상으로 생산거점을 대폭 해외이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일본기업의 움직임은 98년 생산개시를 목표로 하고 있는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에의 닛산자동차의 전면적인 참가에서도 나타난다. ○협력관계 불가피 관련부품 메이커 1백15개사의 부산유치와 함께 삼성자동차를 중심으로 기타큐슈를 한국 남부와 결부,국경을 넘는 경제권의 성립이 예상되는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한일 양국이 이인삼각으로 보여지는 것은 양국민의 뿌리깊은 감정마찰과는 별도로 세계의 외교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기존사실로 돼 있다」라는 닛케이신문의 지적은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를 앞서 짚어보는 것으로서 매우 시사적인 것이다. ▲하야시 다케히코 일본 동해대 교수 61세 ▲나고야대 졸
  • 10월 건국이후 최대 사면/구류·벌금처분자 등 1천만명/정부

    ◎향군법·교통법 위반자도 포함 정부가 오는 10월 단행할 「일반사면」의 대상자는 거국이래 가장 많은 최고 1천만명에 이를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 관계자는 12일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국민생활과 직결되는 경미한 범죄에 대해 일반사면의 대상과 구체적인 법령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지난해 10월 이후 구류및 벌금처분(형의 실효기간1년)을 받은 경범죄처벌법 위반자 9백50만명뿐만 아니라 죄질이 비교적 가벼운 향군법·도로교통법·주민등록법·민방위법 위반사범 등 50만명도 사면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우만 법무부 장관도 지난 11일 「8·15대사면」을 발표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반사면의 대상자는 수백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다. 법무부는 앞으로 내무부 등 각 부처의 의견을 수렴하고 국회의 동의절차를 밟아 오는 10월 「일반사면령」을 공포할 방침이다.일반사면이 단행되면 해당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형선고의 효력이 상실되고 형을 선고받지 않은 사람은 공소권이 없어진다.
  • 쌀 수송선 조속 송환해야(사설)

    대한적십자사가 12일 북한에 억류돼 있는 쌀수송선 삼선비너스호 선원의 조기귀환을 촉구한 것은 이번 사건의 성격이 정치적인 것이 아닌 인도적인 차원의 것임을 재확인하는 메시지다.북한당국은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조속히 억류를 풀어야 할 것이다.한적의 이 메시지는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정탐행위」운운하며 선원과 선박을 억류하고 있는 북한당국의 비인도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에 대한 경고의 뜻도 담겨 있다. 북한당국은 우리정부의 공개사과와 재발방지약속 그리고 중단된 쌀지원 속개를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지만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하는 것은 북한이지 우리가 아니다.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삼선비너스호 선원 이양천씨는 정탐을 한적이 없다.이씨가 청진항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 「용인할수 없는 행위」로 간주됐다고 하더라도 이를 중단시키고 필름을 압수하는 정도의 대응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항구의 풍경을 몇장 찍었다고 해서 「정탐」이란 올가미를 씌워 억류하고 있는 것은 언어도단도 이만저만 아니다. 지난 6월 제1차 남북쌀회담때 북한당국은 남쪽 선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각서를 건네준바 있다.삼선비너스호 선원의 억류는 이 각서를 스스로 짓밟는 행위이며 이같은 행위는 국제사회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러시아의 모스크바 방송은 지난 11일 북한의 쌀수송선과 선원억류를 비난했다. 북한당국은 제2차 쌀회담에서 납북된 우성호 선원의 귀환을 약속해 놓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북한당국이 이처럼 도발행위를 자행한다면 추가 쌀제공은 물론 아직 북한으로 가지않은 7만5천t의 쌀수송도 중단될 수밖에 없다.지금 중국 북경에서는 삼선비너스호 선원의 송환을 위한 남북실무접촉이 열리고 있다.북한은 이 접촉에서 떼만 쓸것이 아니라 삼선비너스호 선원을 8·15 광복절 전에 돌려보내고 이에 더해 우성호선원도 빠른 시일안에 송환하는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주기 바란다.
  • 한국어·한겨레에 긍지… 공동체 의식 양호

    ◎국내외 동포 「한민족 공동체」 의식 조사­공보처/통일에 대다수 낙관… 「10년내」 가장 많아/재미동포 92% “모국어 구사 불편없다”/가정서 쇠고 있는 명절은 설날이 으뜸/한국은 「중진권」… 경제발전에 크게 만족/삶의 목표로 「하고 싶은 일 하는것」 꼽아 공보처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한민족 공동체 의식 형성을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지난 6월과 7월 한국갤럽조사 연구소에 의뢰,한민족 공동체 의식 전반에 관한 조사를 실시했다.이 조사는 「인간 가치관」「역사관」「광복 50년간 한국에 대한 평가」「통일·북한관」「한민족 공동체 의식」「해외동포에 대한 인식및 견해」「해외동포들의 생활상」등 7개 부문으로 나뉘어 실시됐다.국내 성인 1천명과 미국·일본·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동포 각각 4백명씩 모두 2천2백명이 조사에 참여했으며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현지 사정으로 조사대상에서 제외됐다. ▷인간 가치관◁ 삶의 목표에 있어 한국 성인과 가장 비슷한 의견을 보인 집단은 일본동포다.일본동포는한국 성인보다 10.7%가 낮기는 하지만 62.0%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을 제일의 가치관으로 꼽았다.미국동포도 48.7%가 같은 견해를 나타냈다.그러나 독립국가연합동포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것」(42.1%)을 가장 많이 지적했다.전반적으로 해외동포는 삶의 목표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것」을 꼽는 응답이 한국 성인보다 많았으며 미국동포는 상대적으로 「사회봉사」를 많이 꼽았다. ○7부문 설문조사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한국 81.7%,미국 73.0%,일본 83.5%,독립국가연합 85.0%가 「가족」을 들었다.미국동포들은 상대적으로 「종교」(14.5%)를 많이 거론했다. 후손을 위한 희생에 관해서는 한국 87.8%,미국 80.3%,일본 74.5%,독립국가연합 73.8% 등 대부분이 찬성했다.그러나 일본과 독립국가연합 동포들에서는 이같은 견해에 반대하는 응답이 각각 23.1%와 20.4%로 한국과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 자녀의 배우자에 대해서는 한국(72.7%)미국(69.2%)만 한민족이어야 한다고 응답했다.일본과 독립국가연합은 각각 33.8%와 48.9%만이 한민족을 고집했다.특히 일본에서는 한민족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동포가 60.2%로 집계됐다. ○가장 큰 사건 「6·25」 ▷역사관◁ 한국 성인만을 조사대상으로 했다.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대체로 자랑스럽다」 49.2%,「별로 자랑스럽지 못하다」 40.6%,「매우 자랑스럽다」 7.4%,「전혀 자랑스럽지 못하다」 1.7%로 조사됐다.비판적 시각이 43.2%로 한국 성인의 한민족 역사에 대한 자긍심이 그렇게 높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 해방 이후 가장 큰 사건을 묻는 질문에는 「6·25 전쟁」(55.3%)「광주 민주화운동」(19.3%)「8·15 해방」(12.4%)「박정희 전대통령 서거」(4.9%)「4·19 혁명」(2.8%)「5·16 쿠데타」(2.7%)「12·12 사건」(1.5%)「6·29 선언」(0.7%)「백범 김구선생 암살」(0·1%)의 순으로 답했다.「6·25 전쟁」이 해방 이후 가장 큰 사건이라는 인식은 50대 이상에서 특히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광복 50년간 한국에 대한 평가◁ 역사관과 마찬가지로 한국 성인만을 대상으로 했다.분야별로 조사한 결과 「경제발전」에 대해서는 대다수인 77.4%가 만족을 표시했다.「교육·문화발전」에 대해서도 절반이 넘는 55.5%가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그러나 「정치발전」(38.5%)「국민의식 성숙」(45.5%)「사회질서 안정」에서는 비판적 시각이 다소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사회에서의 우리나라의 위치를 묻는 질문에서는 「중진국」이라는 인식이 56.3%로 가장 많았고 「중상위권」이 21.6%,「중하위권」 16.1%,「선진국」 3.9%,「후진국」 1.0%의 순이었다.북한에 대해서는 절대 다수인 94.4%가 「중하위권」 또는 「후진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향후 국가발전의 방향으로는 「국민의 삶이 풍요롭고 편안한 나라」(63.9%)「정치적 민주주의가 성숙된 나라」(12.8%)「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11.6%)「국제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나라」(8.4%)「군사적으로 강한 나라」(2.6%)를 지적했다.○북 이미지 부정적 ▷통일·북한관◁ 한민족의 통일염원을 알아본 결과 한국 57.7%,미국 65.6%,일본 48.0%,독립국가연합 31.5% 등 절대 다수가 통일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미국동포의 통일염원은 한국 성인보다 강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독립국가연합동포들의 통일을 원하는 정도는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집계됐다. 통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낙관했다.그러나 한국 11.8%,미국 1.2%,일본 20.7%,독립국가연합 7.7%는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시기를 묻는 질문에는 「10년 이내」라고 응답한 사람이 한국 35.0%,미국 46.0%,일본 28.2%,독립국가연합 27.0%로 가장 많았다. 통일의 장애요인으로는 「북한정부의 태도」 49.1%,「한반도 주변 4강의 태도」 37.4%,「모름 또는 무응답」 9.0%,「남한정부의 태도」 4.6%로 조사됐다.71.8%는 통일이 되더라도 지역감정은 개선되지 않거나 더 악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 성인의 북한 또는 북한주민에 대한 관심도는 「매우 많다」 12.3%,「어느 정도 있다」 50.3%로 생각보다는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북한실상에 대한 이해도도 「별로 잘 알지 못하고 있다」 50.3%,「전혀 모르고 있다」 10.4%로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또 89.4%는 남북한 주민들의 사고방식의 차이가 크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85.6%가 이런 사고방식의 차이가 통일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해외동포들을 상대로 한 북한에 관한 이미지 조사에서는 「부정적」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일본 74.7%,독립국가연합 52.1%가 「부정적」이라고 답했다.미국에서는 「부정적」이라는 답변이 27.9%로 가장 많았으나 「긍정적」(15.2%)과 「중립적」(22.8%)을 합친 것보다는 적었다.반면 남한에 대한 이미지에서는 미국 51.2%,일본 62.6%,독립국가연합 77.8%등 「긍정적」이라는 의견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한민족 공동체의식◁ 「커다란 긍지를 갖고 있다」 4점,「어느 정도 긍지를 갖고 있다」 3점,「별로 긍지를 갖고 있지 않다」 2점,「전혀 긍지를 갖고 있지 않다」 1점으로 환산했다. ▲심리적 동일성 ▲독자성 ▲지속성 ▲동포애 ▲혈연의식 ▲소속감 ▲언어 등 7개 부문에 대한 조사결과 전체평균이 한국 3.01점,미국 3.05점,일본 2.87점,독립국가연합 2.87점으로 나타나 전체적으로 한국 성인및 해외동포들의 한민족 공동체 의식은 다소 괜찮은 것으로 밝혀졌다. ▷해외동포에 대한 인식및 견해◁ 한국 성인은 「매우 관심이 많다」 14.4%,「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63.6% 등 5명 가운데 4명이 해외동포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그들은 또 해외동포들도 조국에 관심을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한국 또는 해외에서 동포를 직접 만난 경험이 있는 한국 성인은 34.0%로 조사됐다.26.0%는 8촌 이내 친척 가운데 해외동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민을 가는 것에 관해서는 「좋다」 38.6%,「나쁘다」 32.3%로 비슷한 분포를 보였고 평가를 유보한 응답자도 29.0%나 됐다.반대로 해외동포의 한국 거주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서는 「선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가 59.7%로 가장 많았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33.5%,「무조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5.5%로 조사됐다.58.2%는 남한정부가 해외동포를 지원하지 않는 편이라고 응답했고 북한정부 역시 해외동포에 무관심한 편이라는 응답은 이보다 14.0%가 많은 72.2%로 집계됐다. ○미 동포 친밀감 커 ▷해외동포들의 생활상◁ 미국동포들은 92.1%가 한국어를 「말하고 읽고 쓰는데 전혀 불편이 없다」고 답했다.그러나 일본동포는 13.9%,독립국가연합동포는 10.0%만이 한국어 구사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가정에서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는 동포 역시 미국이 89.1%로 가장 높았고 일본과 독립국가연합은 각각 3.5%와 9.7%에 불과했다. 가정에서 쇠고 있는 고국의 명절로는 설(구정)이 미국 68.0%,일본 61.3%,독립국가연합 84.5%로 단연 으뜸을 차지했다.다음은 추석으로 미국 53.8%,일본 37.6%,독립국가연합 31.2%였다. 한국인들간의 친밀도는 미국이 74.4%,일본 77.2%,독립국가연합 56.3%로 비교적 높았다.그러나 「가깝게 지내지 않는다」는 응답도 미국 22.4%,일본 22.2%,독립국가연합 34.9%로 적지 않았다. 고국에 대한 관심도는 일본이 90.3%로 가장 높았고 미국 84.0%,독립국가연합 81.6%로 조사됐다.그러나 「매우 관심이 있다」는 응답자는 미국(52.0%)이 일본(50.2%)보다 많았다. 고국의 관심 있는 분야로 미국동포들은 「정치」(37.5%)「경제」(26.6%)「남북관계」(10.7%)를 꼽았다.일본동포 역시 「정치」(37.9%)에 가장 높은 관심을 표명했으나 「경제」(17.2%)에 앞서 「남북관계」(36.2%)를 관심사로 꼽았다.독립국가연합동포는 「경제」(26.0%)「남북관계」(23.0%)「문화예술」(17.7%)「역사전통」(16.4%)「정치」(10.4%)의 순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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