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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10일 남북노동자 축구대회

    정부는 우리측 민주노총과 북한간에 열릴 남북노동자축구대회가 순수 체육행사로 열리도록 해 북측의 정치선전장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정부는 6일 민주노총 대표단의 8월10일 평양 남북노동자축구대회 개최 계획 합의에 대해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편 앞으로 양측간 실무협의 과정에서 순수한 노동자 체육교류 행사로 정착되는지를 주시하기로 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와 관련,“민간차원 교류 증대라는 측면에서 남북한 노동단체간에 축구대회를 열기로 합의한 것은 좋은 일”이라며 “민주노총으로부터 축구대회 승인신청이 들어오면 북한의 전략적 의도 등 여러가지 사항을 고려해 가면서 승인 여부를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북한측이 8·15 범민족대회와 연계해 우리 내부를 이간시키려는 등 정치적인 기도 가능성만 배제된다면 민주노총 방북단이 북한측과 맺은 합의사항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구본영기자
  • 民和協 “남북공동행사 함께 갖자”

    남측 민화협이 4일 북측의 민화협에 대화의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측 민간 통일운동상설협의체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북한의 대남 전위기구인 민족화해협의회측에 7·4 남북공동성명 채택 27주년 공동행사를 갖자는 메시지였다. 남측 민화협은 이를 위한 예비회담을 공식 제의했다. 이날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였다.내달 초 서울,평양 또는 제3의 장소에서 행사 시기,내용을 논의하자는 요청이었다. 한광옥(韓光玉)상임의장은 이날 “20세기 마지막해인 올해에 남북공동행사를 성사시켜 민족 단합과 화해의 기운을 드높여 나가야 한다”고 제안 취지를 밝혔다. 물론 남측 민화협의 이번 이니셔티브는 정부와의 사전 교감 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굳이 선(先)당국간 대화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정부’의지가 배어 있는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관심의 초점은 제안 시점이다.북한 민화협측이 우리측 일부민간단체를 대상으로 파상적 ‘통일전선전술’을 펼치려는 조짐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북한 민화협은 최근 우리측 민화협 미가입 단체 인사들에게 일련의 편지공세를 펴왔다.고(故) 문익환(文益煥)목사 추모,김구(金九)선생 회고 모임 등을 공동으로 갖자는 제의였다. 북측은 이들 행사를 범민족대회의 전초전으로 삼을 기미를 보이고 있다.북한은 8·15 때마다 범민족대회를 우리측 당국과 민간을 ‘분리’시키는 무대로 활용해 왔다. 때문에 우리측은 북측이 이번 제의에 호응,8·15행사 등 여타 행사도 공동으로 갖는 방향으로 진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난해는 남측 민화협이 임진각에서 8·15대축전 행사를,북측이 판문점에서범민족대회를 따로 열었다. 문제는 북측이 손뼉을 마주쳐 오느냐 여부다.북측은 그동안 우리 민화협과의 대화를 기피하려는 자세였다. 북한당국이 낡은 ‘통일전선’카드를 버릴 지는 미지수다. 다만 남측 민화협측이 그 동안 베이징 등에서 간접 타진한 결과 북측 민화협도 태도변화 가능성을 보였다는 전문이다. 구본영기자 kby7@
  • 록 뮤지컬 ‘99모스키토’일그러진 교육실태 코믹 풍자

    “젝스 키스가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에 올랐대”“우리 당은 강타(HOT의 멤버)와 SES도 받았다”“이상민도 뽑혔다는데” 이 황당한 얘기는 연출가 김민기가 오는 5월1일 무대에 올리는 록 뮤지컬‘99모스키토’에 나오는 대사. 선거보조금이 탐난 정당(새머리탁상회의,자기만족연합당,각나라당)이 중학생까지 선거권을 준뒤 청소년 표를 얻으려 아이돌스타와 운동선수를 전국구의원 후보로 모신다.청소년들이 결성한 ‘모스키토’당이 날카로운 공약으로기세를 올리자 정치판이 ‘모스키토’당 와해공작에 나선다는 게 줄거리다. 지난 97년 박광정 연출 이상범 번안으로 초연해 폭발적 반응을 얻었지만 예술감독으로 참가했던 김민기가 “뭔가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는 구석”을 느껴 중학생까지 선거권이 허용된다는 틀만 남기고 전부 뜯어 고쳤다. 청소년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기 위해 제작진은 ‘발품’도 많이팔았다.청소년을 직접 만나고 모니터팀의 자문을 계속 받았다.HOT 음반도 모두 분석했고 PC게임방에 가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익혔다.평일 공연시간을 오후 6시로 정한 것도 중·고·대학생을 배려한 것이다. 기획을 맡은 이양희씨는 “전문가의 의견도 구하고 다양한 노력을 했지만애들 만나는게 제일 큰 도움이었다”고 전한다.김민기는 “정치 풍자보다는일그러진 교육실태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고 밝힌다.드디어 지난 3월 연습에 돌입한 ‘99모스키토’가 ‘웽 웽’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22일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무대 앞에는 5인조 라이브밴드 ‘노 코멘트’의 경쾌한 연주가 흐르고 있다.반투명막을 처음으로 제거해 드러머(박진완)의 다리 흔드는 모습마저 볼 수 있어 친근하게 다가온다. 김민기는 차분한 미성으로 ‘섬세한 수정’에 열중이다.정태영(조연출)은계속 초시계로 연주시간과 브리지(장과 장 사이)간격을 잰다.2시간 40분이었던 공연시간을 1시간40분으로 줄이려는 작업이다. 풍자무대이다 보니 간간이 폭소도 터져나온다.무대미술을 맡은 남궁호는 갑자기 “밥 시켰어요?”라며 엉뚱한 질문을 해 연습중인 배우와 스태프의 배꼽을 앗아갔다. 황정민(싸이코 교감)은 “수석으로 1학년을 다니다가”를 “1학년으로 수석을 다니다가”로 바꿔 웃음판에 합류했다.김민기도 사이사이 설운도 스텝을보여주거나 ‘감자 먹이는’연기 시범으로 거들었다. 공개 오디션으로 뽑은 방은주(폭탄)는 교실 패싸움을 ‘조직 폭력배’못지않게 실감나게 옮겨 선배들의 탄성을 자아냈다.서영희(날라리)의 연기 흡입력도 돋보였다.여기에 ‘지하철 1호선’‘개똥이’‘의형제’ 등에서 호흡을 맞춰온 권형준(사오정) 장현성(786) 이미옥(차민주)의 탄탄한 연기력이 어울리면서 ‘모기 소리’가 밤11시 15분까지 이어졌다. 웃음이 넘치는 무대지만 ‘모스키토의 침’은 매섭다. “안돼!돈 먹고 이권이나 따주는 건 안돼!학연 지연이나 밝히는 것도 절대안돼!돈으로 권력이나 사려는 짓만은 그따위 더러운 정치 놀음만은”이라는노래는 송곳을 품고 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턴 꿈같은 건 다시 꿀수 없게 됐죠”라는 탄식이나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되는 건 단하나 오직 공부뿐…대체 영어,수학이 공부의 전분가?…못 참겠어,인생을 이렇게 허비해?”라는 절규는‘죽은 학교’를 생생하게 고발한다. 마침내 그들은 “…저리 비켜,이젠 우리가 할래”라며 ‘당’을 만들었고‘그들만의 노래’로 도전을 감행한다.8월15일까지.(02)763-8233이종수기자 vielee@
  • [정직한 역사 되찾기](33)재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

    일제강점기 친일파는 조선내는 물론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수립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나 일본 본토도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이들은 대개 군부나 행정기관 등 일제의 권력기관에서 일제통치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를 나와 고급장교로 활동한 친일 군인들이 이에 속하며 또 일본이나 만주국의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고급엘리트 관료로 활동한 자들을 들 수 있다.한 단계 낮은 직급에서는 밀정이나 행동대원 등 앞잡이로 활동한 자들을 거론할수 있겠다. 일본 본토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친일파로 박춘금(朴春琴·1891∼1973)을 들수 있다.그는 조선인으로서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두 번씩이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그의 친일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극력 친일파 가운데 일제말기 일제가 임명한 귀족원 의원을 제외하면 일제통치 전 기간을 통해 일본 국회에 진출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박춘금은 여러 형태의 친일파 가운데서상당히 드문 유형에 속한다.친일파 가운데는 지식을 팔아 일제에 아부한 집단이 있는가하면,경제적 기반을 일제통치에 제공한 대가로 기득권을 보전하고 일제와 유착관계를 형성해온 부류도 있다.그러나 박춘금은 그도저도 없는 자였다.그는 오직 몸뚱이 하나로친일대열에서 성공한 자였다.그는 수하에 폭력조직을 거느린 소위 ‘정치깡패’ 집단의 우두머리였다.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하수인으로 폭력집단이 존재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식민지시절에도 이같은 집단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주먹으로 친일배의 정상에 오른 그의인생역정을 더듬어 보자. 박춘금은 1891년 경남 밀양 태생으로 본관도 밀양이다.부 박금득(朴今得)과 모 박차연(朴且連)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자세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년시절 그는 일본인 술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판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일본으로건너간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자세하지가 않다.다만 그가 한 연설에서 토로한 말에 따르면,일본에 도착할 당시 수중에 가진 돈은 1원 49전뿐이었으며 당시 일본에는 관비유학생 50명인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했다. 1920년경 그가 이기동(李起東)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상구회(相救會)’라는 단체를 조직한 사실은 확인된다.이기동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 활동한 대표적인 재일 친일파다.상구회는 1921년말 ‘상애회(相愛會)’라는 사회사업단체로 개편되는데 23년 요코하마·나고야·오사카 등에 지부를 조직,조직을 확대하였다.그럴듯한 이름의 간판을 내건 이 ‘상애회’가 바로 박춘금 일당의 일본내 친일활동의 모태가 된다. 막노동판의 주먹패 박춘금이 일제로부터 인정을 받아 재일 조선인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923년 9월 1일 도쿄 인근 지역을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었다.수 십만 명의 인명피해는 물론 재산피해도 엄청났던 이 천재(天災)를 맞아 일제는 동요한 민심을 수습하고 조선인을탄압할 목적으로 당국의 개입하에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거나 방화를 일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여기에는 미즈노(水野鍊太郞) 당시 내무상의 조선인에 대한 개인감정이 개입됐다는 지적도 있다.미즈노는 1919년 9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따라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부임하기 위해 서울역에 첫 발을 디뎠다가 강우규(姜宇奎)의사의폭탄세례를 받은 인물). 이에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관헌과 함께 조선인에 대한 무자비한 체포와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최소 6,000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바로 이때 박춘금은 상애회 회원 300여명을 동원,‘노동봉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인 희생자 시체처리와 복구작업을 자청하였다.이 무렵 박춘금 일당은이미 일제당국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상호 자연스레 교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춘금은 일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상애회 본부 사무실을 마련하는 등 입지를 넓혀갔다.28년 박춘금은 상애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는 이사장에 총독부 경무총감 출신의 마루야마(丸山鶴吉)를 영입했다.회장에는 이기동을 앉히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실권을 행사하였다.이 무렵 상애회는 일본내 주요도시에 지방본부를 설치하였고 회원수도 2만명을 헤아렸다.이듬해 29년 상애회관을 지어 사무실도 독립하였고 마루야마 취임 1주년때는 사이토를 기념식 행사장에 초청하는 등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세력가로 부상한 그는 상애회 조직을 바탕으로 정계진출을 추진하였다.32년 2월 실시된 제18회 총선때 그는 도쿄 5구(區)에 출마,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놀라운 것은 조선인 유권자가 1,236명뿐인 이곳에서 6,966표를 얻었다는 점이다.그의 열렬한 친일성이 일본인 유권자들을 설득시킨 점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정계 실력자들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거직후인 2월 23일자로 그가 사이토 전 조선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불초 이번에 중의원 의원에 당선의 영관(榮冠)을 얻게 된 것은 모름지기 귀대(貴台,손위사람의 높임말)의 두터운 정과 성원을 입은 것이라 여기며 깊이 감사드립니다…”라고 한데서 이같은 점을 엿볼 수 있다.이후 그는 한 차례 낙선했다가 40년 제20회 총선에서 재선하였으나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렸다.이후 그는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겨 친일대열의 선봉장을자처했는데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친일활동이 절정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학도병 징집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 주최 학병격려대연설회에 참석하여 “고이소(小磯)총독이 (조선)군사령관 시절 군사령부를 방문,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도인에 대한 병역의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밝히고는 “(학도병)4천이나 5천이 죽어 2천5백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고 외쳤다(매일신보 1943.11.19). 당시 일제가 학도병을 전선으로 내몬 것은 그 이면에는 조선의 미래의 지식분자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것이었다.그가 이같은 일제의 의도를 대변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에게는 그런 혐의를 둘만한 사건이 하나 있다. 8·15 해방을 불과 50일 앞둔 1945년 6월 25일.그는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당대의 내로라하는 친일파들을 동원,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그 자신이 당수에 취임하였다.당시 전세는 이미 기울어 일본은 패퇴를거듭하였고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이 임박한 시기였다.대의당은 바로 이 때‘최후결전’의 자세로 결성된 것이다. 대의당은 ‘강령’에서 “모든 비(非)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해서는 단연이를 분쇄한다”고 밝혔는데 여기서 ‘비결전적 사상’이란 ‘반전·반일’의 총칭이다.해방후 친일파들의 죄상을 조사,폭로한 ‘민족정기의 심판’에따르면 대의당은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명을 학살하려 했던 ‘살인단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는 당시 총독부 경무국이 세운 ‘요시찰인에 대한조치계획’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해방후 그는 살길을 찾기 위해 수하를 시켜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돈봉투를보내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이 때문에 그는 반민특위의 체포,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특위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를 송환하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모두 3번 결혼했는데 첫째,둘째 부인은일본여자였고 66년 75세때 세번째로 결혼한 여자는 당시 60세의 한국여자(82년 사망)였다.두번째 일본인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장남 박춘남(朴春男·89년 일본에서 사망)은일본 릿교(立敎)대학 3학년 재학중 자진하여 학도병에 출진했었다. 일제당시 일본에서 박춘금과 교류한 적이 있다는 한 일본군 장교출신 제보자의 증언에 따르면,그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은 마약중독으로 거의 폐인이돼버렸다고 한다.73년 3월 31일 박춘금은 일본 게이오대학 병원에서 사망,현지에 묻혔다.친일 반민족자 박춘금의 일생은 그제서야 막을 내렸다.죽어서도 그는 고국보다 일본을 택한 것인가,아니면 죽어서도 고국으로 올 수가 없었던 탓일까. 정운현기자 jwh59@
  • [우홍제 칼럼]재벌, 報國자세로 개혁하라

    비록 일년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하나 지금 이순간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고통의 큰 원인은 재벌기업들의 무리한 빚 경영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분석에서 거듭 공인(公認)된 결론이다.그래서 이제는 재벌그룹들이 그동안 문어발식으로 이것저것 빠짐없이 거느리던 각 업종 계열사들을 하루 빨리 매각해서 빚을 없애고 기업체질을 강화하는 것이나라경제를 살리는 길임을 우리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또 국민 각 계층은 지난 일년 동안 구조조정을 위한 실직·소득격감의 고통분담이 앞으로 밝은 앞날을 맞이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양 묵묵히받아들였다.이처럼 범(汎)국민적 희생과 인내와 노력으로 이뤄진 구조조정은 국제사회로부터 적잖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음으로써 국내외환시장은 비교적 안정을 되찾고 경기도 회복세를 보이는 것이 요즘의 우리 경제 모습이다. 그럼에도 최근 보도는 지난 한햇동안 5대그룹을 중심으로 한 재벌 부채의 절대금액이 크게 늘어나고 시장지배력의 확충으로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된 것으로 전한다.일반서민이나 중소기업들이 구조조정의 고통을 겪는 동안재벌들은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자산재평가 차액을 자본에 전입시키는 장부상의 부채축소방법으로 구조조정의 시늉을 하는 데 그쳤고 내면적으로는전체 자산을 늘려 오히려 몸집을 키웠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전경련 중심의 재계에서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부채축소에 저항하고 있다.이와 관련,정부는 자산재평가분을 제외한 부채비율 200% 연내 축소를 거듭 강조하고 있고 얼마전 金大中대통령도 이를 직접 언급했을 정도로재무구조개선을 핵심으로 한 재벌개혁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재벌기업들은 정부압력 때문에 마지 못해 재무구조개선약정 수정안을 내놓고있지만 실행여부는 미지수라는 게 업계 견해다.그러나 재벌기업들은 만사 제쳐 놓고 국민과 국가가 지금까지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하는 보국(報國)의마음가짐으로 개혁에 앞장서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또 그럴 만한 까닭은너무 많다. 우리나라 재벌그룹들은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는 특혜조치에 힘입어손쉽게 복합기업군(複合企業群)을 이뤄냈다.멀게는 8·15해방 이후 적산(敵産)불하·달러 경매·자유당 정권과의 결탁 등으로 생존의 자양분을 얻은 뒤 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과정에서는 정부보호에 의해 땅짚고 헤엄치기식의 기업성장전략도 추진할 수 있었다. 종류를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정책금융형태의 금융지원과 조세감면혜택을 누렸고 생산제품의 이윤보장을 위한 가격지지(支持)보호도 받아왔다. 값싸고 질좋은 외국상품의 수입이 철저히 금지됐고 그대신 기업이윤을 위해질은 나쁘더라도 값비싼 국산품을 써야 했던 게 소비자인 국민의 입장이었다. 바꿔 말하면 재벌기업 성장의 대가로 국민들은 은행돈 잘 못얻어 쓰고 세금 부담 많아지는 식으로 금융·세제·소비상품 가격면에서 상대적인 불이익과 희생을 감수할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정책의 보호막과 국민들의 헌신적 희생 속에서 급성장한 재벌들은,그러나 정부·국민의 보호정책에 대한 보상을 외면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독과점의 횡포와 무리한 외연적(外延的) 확장,과다 차입경영으로 국가경제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오늘의 경제위기를 부른 근인(根因)이 된 것 아닌가. 재벌기업들로부터는 구조조정 등의 개혁조치에 대해 더이상 불평이나 변명이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다.오로지 보국하는 자세로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재벌개혁이 안되면 지금까지의 금융개혁도 무위가된다.재벌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막중한 비중을 고려할 때 재벌개혁 없이 근본적인 경제회생이 불가능함은 재벌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어떤 압력 때문이 아니라 정부·국민에 보답하고 자신의 활로를 마련하기 위해서도 재벌개혁은 중단될 수 없다.
  • 부 음

    ▒劉成淵 삼천리그룹 명예회장삼천리그룹 劉成淵 명예회장(83)이 지난달 31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삼천리그룹 창업자인 고 劉명예회장은 함경남도 함주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단신으로 월남,55년 서울에서 동향 출신인 고 李壯均 삼천리 명예회장(97년작고)과 함께 삼천리연탄공업사를 창업했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고 장지는 충남 천안 광덕면 천안공원으로 정해졌다.발인은 4월 3일 오전 9시.(02)527-6121∼4▒李炳和씨(전 서울신문 수송부 주임) 별세 3월31일 오전 3시45분 강남성모병원,발인 2일 오전 8시 (02)590-2579▒金起漢(대한상공회의소)弘元(MBC제작기술국 TV중계부)부친상 3월30일 오후 8시,발인 1일 오전 7시 대전 국립묘지(02)471-9299▒姜成仁씨(국민체육진흥공단 자금관리부 직원) 부친상 3월31일 오전 10시,발인 2일 오전 9시 경기도 포천군 소훌면 무봉리 선산 (0357)542-0649▒金圭澤(유엔한국협회부회장) 聖澤씨(파라다이스(주) 대표이사) 모친상 3월 31일 오전 8시15분 삼성병원영안실,발인 2일 오전 10시 용인공원묘역 (02)3410-0901▒金成勳씨(동국대 교육학과 교수) 부친상 3월 30일 오전 11시 경북 포항 성모병원영안실,발인 1일 오전 9시 경북 포항 북구 신광면 상업동 (0562)274-1895▒朴鎭奎씨(전 조흥은행 효자동지점장) 모친상 3월 31일 오전 4시 충북 제천시 동현동 35-105,발인 2일 오전 8시 단양군 매포읍 선영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17)

    한국판 ‘주홍글씨’라 평가받는 ‘순애보(殉愛譜)’의 작가 박계주는 기독교적 휴머니즘과 민족주체성의 추구자세를 바탕삼아 대중소설을 계몽의 도구로 활용했다.만주의 간도 용정 출생답게 그는 독립운동과 광복 이후 분단현실을 어느 대중소설가보다 더 많이 다뤘으며,6.25 때는 박영준,김용호,김수영 등과 같은 문인처럼 납북 도중 탈출한 경력이 있다. 장편 ‘여수’는 1961년 6월 11일부터 같은 해 11월 28일 게재 중단 당할때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정치 이데올로기가 문제되어 신문 연재소설이 중단되기는 아마 이 작품이 처음일 것이다.시기적으로는 5·16군사쿠데타 직후의 다소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이 소설이 정면으로 주장했던 남북한 교류와 반공정책의 허울 아래 빚어진 독재권력의 부패상,여기에다 치명적인 쟁점이 된 8·15직후의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정안(세칭 신탁통치안)에 대한 비판은 당시 정치·역사학계에서도 미처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민감한 이데올로기적인 금지구역이었다.문제의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은 11월 28일자에대학교수이자 작가로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는 소설을 써서 반정부 작가로알려진 이춘우가 유럽 여행 중 오스트리아에 들렸을 때의 착잡한 사념들을서술한데서 발단되었다.오스트리아는 제2차대전 후 미·영·불·소 4강국의분할통치라는 비운을 맞았으나,한국과는 달리 이를 수용하여 1955년 7월 분단이 아닌 통일 독립국가로,11월엔 영세중립국이 된 나라이다.이런 나라를여행하면서 작가 이춘우는 분단 조국을 떠올리며 아래와 같은 상념에 빠져든다. “춘우는 문득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를 생각했다.그는 신탁통치를 찬성했기 때문에 암살당했던 것이다.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당시 송진우의 의견대로 오년간의 국제신탁통치를 받았던들 오년 뒤엔 국제기구인 유엔에 의해 오스트리아처럼 통일되었을 것이다.국제신탁통치를 하게되면 북한남한으로 양단되지 않은채 몇 개 통치국가들이 남북을 공동감시하며 공동통치하게 되기 때문에 양립된 불가침의 군정은 없었을 것이다.그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신탁통치를 반대한 이승만 김구 이시영 등의 인사들은독립투쟁을한 애국자이기는 하지만 앞을 내다보거나 앞을 저울질할 줄 아는 정치가가못되는 반면 송진우는 독립투쟁은 하지 못하였을망정 앞을 내다보는 구안(具眼)의 정치가라 할 수 있다.대체 해방직후 아무런 경제적 지반도 없고 경찰력도 군대력도 없고 행정적 정치적 훈련도 없고 산업도 마비상태였는데 ‘돈립국가’라는 문패만 붙잡고 어쩌자는 것이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아닐수 없다” 마지막 부분의 ‘돈립국가’란 ‘독립’의 오자인지 ‘돈으로 나라를 세우려 한다’는 풍자인지는 모르겠으나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이었다.물론 이 서술이 역사적인 진실과 일치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나 그 당시구전되어오던 금기사항을 이렇게 문자화 해 버리자 반격은 의외로 빨랐다.‘동아일보’ 29일자 1쪽에는 아래와 같은 2단 상자 사고(社告)가 실렸다. “ 사고.그간 본지 조간 4면에 연재해 오던 박계주씨 집필인 소설 ‘여수’는 비록 소설이라할지라도 지난 27일자 조간 게재 내용이 본사의 견해와 현저히 상이하므로 본사는 해 소설을금후 게재 중지하기로 결정하였음을 독자 제현에게 알리오며 아울러 사전에 발견하여 시정치 못하였음을 송구히 여깁니다.이 점 독자제현의 양찰을 바라마지않습니다.동아일보사” 이 소설은 비판적인 작가 이춘우의 유럽일대(프랑스·영국·독일·오스트리아 등) 여행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북한에서 모스크바까지 다녀와 최승희 무용단에서 활약 중 6·25 때 서울로 위문공연차 왔다가 도주한 김미전은 고모네 마루 밑에서 몇 달 동안 피신할 때 만났던 이춘우를 사모하게 된다.그녀는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갔으나 간첩으로 몰리는 등 갖은 수모와 고생을 하면서도 무용가로 활동 중 춘우의 도움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김미전을 비롯한 주변 여인들과 남편의 관계를 의심하던 춘우의 아내 의숙은 홧김에 춤바람으로 놀아나면서 남편의 불륜을 기사화시켜 교수직에서 쫓겨나도록 만드나 후회코 자살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된다.국내 망명자 신세가 된 춘우는 먼저 프랑스에 들러 미전을 만나야 하지만 미적대다가 6·25때 백마고지에서 전사한 아버지를 둔 파리의 창녀 이본느를 만나게 된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밀입북 한총련 대표 北망명 표명

    지난해 8월 평양 8·15 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밀입북했던 한총련 대표 金大元씨(29·건국대 축산경영학과 4)가 현재 네팔 주재 북한대사관에 머물면서 ‘북한으로의 망명’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져 관계 당국이 외교경로를 통해 진의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대사관이 金씨에 대한 네팔 외무부의 면담 요청을 3개월간이나 거부,‘망명 강요를 위한 억류’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외교통상부 당국자는 29일 “金씨는 지난해 8월부터 북한에 체류하다 1월네팔로 건너간 뒤 잠적한 상태”라면서 “이후 북한대사관이 네팔 외무부에‘金씨가 북한으로의 망명의사를 표명했다’고 통보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북한대사관이 최근 태도를 바꿔 ‘이번주 안으로 金씨의 자유의사를 확인하게 해주겠다’고 네팔 외무부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 [대한광장]우리나라는 半島가 아니다

    헌법까지도 왜색에 물들어 있다고 말한다면 아마 놀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지만,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영토로 한다’가 바로 그것이니,이것이 무슨 말인가?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두만강으로 되어 있다.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다.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규인 헌법 전문에까지 명토박아 나와 있으니,여기에 이의를 다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이른바 ‘국가관’이라는 것을 의심받게 될지도 모른다. 진실로 그러한가? 아니다.그렇지 않다.그것은 다만 우리의 주권이 배제된채로 청국과 일본 간에 맺어진 불법적 협정일 뿐이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이자의적으로 만들어 놓은 경계선일 뿐인 것이다.우리의 강토였던 지금의 중국 동북 삼성 일대를 청국에 떼어주는 대가로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따낸 일제였다.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토문강∼송화강∼흑룡강이다.숙종 38년 조청(朝淸) 양국의 대표가 합의하여 백두산(白頭山)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운 것이 1712년 5월 15일이었다.두 나라의 국경선을 서쪽으로는 압록강으로 하고동쪽으로는 토문강(土門江)으로 한다고 되어 있으니,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의 작은 지류가 토문강이다.두만강(豆滿江)이니 석을수(石乙水)니 하는 따위의 이름은 거론조차 된 바 없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행악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처럼 국경선을 멋대로 잘라버린 일보다 더 큰 죄업은 없을 것이다.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거지반의 사람들이 우리의 국경선이 처음부터 압록강∼두만강인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 송화강∼흑룡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으니,헌법 전문에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나와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국토개념이 ‘한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여 주는 한 장의 지도가 있다.1942년 파리에서 발행된 ‘조선의 천주교’라는 책에 실린 지도로서,로마 가톨릭이 조선 선교교구를 표시한 것이다.조선의 교구가 세 개로 나뉘어 있는데,대구교구와 경성교구 그리고 원산교구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원산교구로,함경남북도와 간도성과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부가 관할로 되어 있다.토문강∼송화강∼흑룡강을 조선의 국경선으로 잡고 있으니,과연 백두산 정계비대로인 것이다. 생각하면 기막힌 일이다.우리가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한반도’라는말 자체가 왜색용어인 것이다.해마다 8·15 해방일이면 울려퍼지는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노랫말 또한 일제가 남겨놓고 간 ‘반도사관’이니,나라 전체가 왜색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반도 안에서 살고 있다.그나마 반으로 동강나버린 채 분단의 질곡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가고 있지만,중요한 것은 자아(自我)의 확인일 것이다.반도인이 아니라 대륙인이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야말로민족사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갈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세계는 지금 크게 요동치고 있다.일제가 박아두고 간 뿌리깊은 철주(鐵柱)인 ‘반도사관’에 주박(呪縛)되어 있는 한 민족의 앞날은 없다.갈수록 이땅의 사람들이 여유가 없고 심성이 강퍅해져 가는 것 또한 이‘반도사관’의 왜독(倭毒)과 무관하지 않다.민족의 기상이 활달하냐 협량하냐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의 넓이와 비례한다. 우리는 반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말자. 김성동 작가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16)김광주 폭행사건의 교훈(3)

    ◇문총, 회원 보호보다 권력에 굴종 공보처장 부인 이씨는 이런 사태의 추이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자료에 따르면 이씨는 공보처장실에서 처장과 공보국장 및 보도과장이 동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어 아래와 같이 사건 경위를 밝혔다고 전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인 우리나라 ‘선전부장관 부인’이 음란한 행동을 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선전부장관이 즉 공보처장이므로 이는 나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밖에 없다.그래서 나는 분개한 나머지 소설가 김광주씨를 만나서 재판소 앞에 있는 모다방에서 최소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결말을 얻지 못하여 조용한 장소를 택하느라고 나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말을 계속하던 중 웃방에서 엿듣고 있던 집안 젊은이가 달려들어 머리칼을 휘어잡고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하므로 나는 당황하여 그러지 말도록 고함을 지르며 떼어 놓았다” 이에 대하여 작가 김광주는 “나는 공보처장의 부인이 성이 무엇인지 조차모르며 일면식도 없었다.매맞은 그 날 처음 대면하였을 뿐이다.그리고 소설‘나는너를 싫어한다’는 모델이 없고 내가 가공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구상한 창작임을 분명히 말해 둔다”고 해명했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필화가 아닌 권력과 예술가의 정면대립이란 점에서 이사건은 향후 한국 문화예술계의 추이를 유추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작품은 분명히 허구였고,작가는 위기에 처한 조국의 현실 앞에서 부패와 타락이난무하는 특권층의 비리를 고발함과 동시에 이들과 한 통속이 되어 돌아가는 어용 문화예술인에 대한 혐오감을 겨냥하고 있다.작중 인물 중 Y는 예술인이면서도 권력지향 성향이 배어 있는 부정적인 인간상으로 부각되는데,이것은 그 반대로 긍정적인 인간상인 ‘나’와 대칭된다.이미 8.15직후부터 정치지향성 문화예술인이 판을 치는 판국으로 변해버린데다 전쟁까지 겹치고 보니 한국의 문화계는 ‘권력의 눈치꾼’으로 전락했대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그 까닭은 이 사건에 대응하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문총)의 성명(2.23)으로 입증된다. 문총은 6개조로 된 성명에서 예술창작의 자유 원칙과 현실적인 간섭 배제를강조한 뒤,“작자에 대한 폭행은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비신사적인 행동이라고 규정지을 수밖에 없다”면서 이런 행동이 재발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그러나 문제는 이 성명서의 끝부분 2개조항이다. 1.그러나 전기 작품이 특정된 개인의 인신에 불미한 곡해와 오해를 야기시킬 수 있는 요소를 가졌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 여하를 불구하고 작자의 과오라고 아니할 수 없다.이 점에 대한 작자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1.전기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문화인의 인권과 창작활동의 자유가 엄격히보장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현 전시하에 있어서 불건전한 호기심에 영합하는 저속한 작품의 출현을 경계하는 바이다.(서울신문 1952.2.25) 이 두 조항은 문총이 회원의 권익 옹호나 예술창작의 자유 보장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 권력의 시녀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대놓고 뻔뻔스럽게 반증해 준 대목이다.바로 이런 문총의 단체적인 생리구조가 이후 어떤 부당한 권력과도 손을 맞잡고 비판의식적인 예술의 숨통을 막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전망을 가능케 한다.사실 그랬다.리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쳐 5∼6공에 이르는 기간 중 일부 문화예술단체가 보여준 기본 자세는 이 성명서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이 성명서는 곰곰이 따져보면 사실은 앞의 예술 창작의 자유보다는 정작 뒤의 두 조항 때문에 만들어진 것을 눈치챌 수 있다.결국 예술인자신이 조심해야 한다는 관변측 경고를 대신 해준 셈이다. 공보처로서야 얼마나 통쾌했겠는가.기다렸다는 듯이 이튿날 이철원처장은“어떠한 저속한 작가가 아무리 문필의 자유라 하더라도 남의 명예를 오손할 우려가 있는 것을 써서 천하에 공포하여 대한민국 장관의 가정이 이와같이부패하였다는 것을 암시하였다는 것은 용서할 수없는 것이다.작가라 해서 문화인이라 해서 아무 글이라도 아무 것이라도 써서 낼 수 있다는 것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니다”(2.24)고 문총의 성명을 원용해 가며 당당하게 천명했다. 폭행 직후의 해명성 저자세에서 날이 갈수록 고자세로 변해 감을 볼 수있다. 그러면서 “법정에서 해결할 문제”라는 위하력까지 동원했다. 예술단체가 권력에 굴종해버린 이 사건은 향후 한국에서의 현실참여 예술이 걸어가야할 가시밭길의 예언이기도 하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 백범 추모공연 졸속 우려

    오는 6월21일부터 7일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를 ‘백범 김구주석 서거 50주기 추모 민족대가극’이 비틀거리고 있다.관련단체의 주도권 다툼이 법정으로까지 이어질 조짐을 보이면서 정작 공연에 필요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이에 따라 김구선생의 일대기를 그린다는 취지를 살릴 수 있는 공연이 될지 우려된다. 이 가극은 지난 해 8월15일 추모공연준비위원회(위원장 신창균)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당시 박인배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기획실장이연출을 맡고 고은 시인이 극본을 쓰기로 계획됐다.그러나 준비위와 민예총의 극한 대립이 가속화되면서 이같은 구도가 백지화되는등 파열음이 증폭되고있다. 준비위는 공연이 석달 앞으로 다가와 한창 연습에 몰두해야 할 요즘 극본(차범석)과 연출(임영웅),음악(원일)등을 새로 섭외했다. 공연준비위의 김인수 집행위원장은 “민예총이 지난해 11월 국회 예결위를상대로 국고지원 신청 로비를 펼쳐 3억원의 예산을 책정받는 등 준비위의 주최권을 침해했다”면서 “준비위의 공연추진을방해하고 일정에 큰 차질을가져온 데 따라 지난 8일 박실장 등 민예총 관련 인사들을 ‘사기미수’혐의로 고소했다”고 밝혔다.그는 또 “새로운 인물이 어느정도 섭외된 만큼 민예총을 배제하고 공연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실장은 “일일이 맞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서 “공연 과정을 잘 모르면서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와 관련,이승진 문화관광부 지역문화예술과장은 “양 단체가 서로 탓만하고 있다”면서 “준비위가 사업계획서를 내면 민예총 계획서와 비교하여결정할 계획이지만 끝까지 이들이 싸우면 제3의 단체를 물색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공연계는 이같은 ‘이전투구’에 안타까움을 털어놓고 있다.뮤지컬 연출가 M씨는 “100여명의 출연진이 2시간30분가량 공연할 경우 적어도 6개월이상 준비해야 한다”면서 “현재 상태가 이어지면 공연 수준은 뻔하다”라고 개탄했다.다른 연극 연출가는 “백범 선생의 추모공연을 둘러싸고 잡음이 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9월이나 내년으로미뤄 졸속 공연을 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사설]의혹사건 진상 규명해야

    국민회의는 48년 8월15일 정부수립 이후 현정부 출범 이전(98년 2월24일)까지의 모든 의문사와 정치적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앞으로 설치되는 국민인권위에 조사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라고 한다.인권위가 조사하는일반 인권침해의 경우(진정 원인이 발생한 날로부터 1년 이내에 진정해야 한다)와 별도로,정치적 동기로 공권력에 의해 국민의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가심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은 진정이 있으면 소급해서 조사할 수 있도록 인권위설치법 부칙에 명기하겠다는 것이다.남북이 분단된 가운데 정부가 수립된 이후 권위주의적인 제1공화국과 군사정권의 3·4·5·6공을 거치는 동안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곧잘 용공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으며,역대 군사정권이추진한 개발독재는 노동운동분야에서도 많은 희생자를 냈다.그런 희생들이쌓이고 쌓인 끝에 우리는 건국 50년만에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부를 갖게 됐다. 집권당인 국민회의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다 돼서야 그동안의 의문사와 정치적 의혹사건의 진상규명에 눈길을 돌린 것은오히려 때늦은 느낌이다. 뒤늦게나마 49년 백범 金九선생 시해사건의 진상이 밝혀져야 하고 ‘사법살인’의 혐의가 짙은 59년 진보당 사건의 죽산 曺奉岩씨 사건과 61년 민족일보 조용수씨 사건의 진상도 규명돼야 한다.또한 73년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한 서울법대 崔鍾吉교수 사건과 75년 張俊河씨 의문사도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88년 전남대 이철규씨와 89년 조선대 이내창씨 의문사의 진상과 80년 全斗煥 신군부의 정권 찬탈과정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징집해서 강행한 ‘녹화사업’희생자 6명의 의문사 진상도 규명돼야 한다.당시 군당국은 이들의 죽음을 자살로 발표한 바 있다.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약칭범추위)는 무려 42건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마당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오늘날 이정도나마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희생된 많은 민족·민주열사들의 덕이다.우리는 의문사와 정치적의혹사건의 진상규명과 함께 ‘민족·민주유공자 명예회복과예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도록 촉구한다.진상규명만으로는 열사들의 넋을 달랠 수 없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족·민주유공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예우를 해주는 것이야말로 살아남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 [사설]3·1 정신으로 제2국난 극복

    기미년 3·1독립항쟁 80주년을 맞는다.남북분단 상태와 우리의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북한의 모라토리엄(대외채무지불정지)상태에서 맞는 3·1항쟁은 과거 어느때보다 의미가 각별하다고 하겠다. 3·1항쟁은 개항을 전후하여 외세에 대항하면서 전개된 일련의 민족운동의결과로 민족내부에 축적된 독립운동 역량이 자발적으로 발산된 항일구국투쟁이다. 3·1항쟁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상황을 보면, 집회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피검자 5만 2,770명, 불탄교회 47개, 불탄민가가 715채나 되었다.이러한 수치는 일제의 은폐에도 불구하고 밝혀진 것에 불과하고 실제는 더 많은 희생을 가져왔을 것이다. 비록 3·1항쟁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엄청난 희생을 낸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드러냈으며,중국 인도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 등 피압박 민족의 해방투쟁의 봉화가 되었다.이런 의미에서 3·1항쟁은 세계피압박민족해방투쟁의 선구적 혁명이라 하겠다. 3·1항쟁은 갑오농민운동·애국계몽운동·의병운동을 비롯하여 모든 민족운동이 집약되고,그 이후의 항일구국운동도 여기서 발원하는 민족운동의 요람이다.계층 노소 지역 성별 신분을 초월한 거족적인 항일투쟁이었다.봉건왕조에서 식민지로 전락한지 9년만에 전민족이 대동단결하여 통일역량을 보여주고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일깨웠던 구국항쟁이었다. 대한민국 존립의 준거 3·1정신은 바로 오늘 우리가 존립하는 대한민국의 준거이기도 하다.그것은 3·1운동을 계기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정은 26년 동안이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카이로선언을 계기로 민족해방을 쟁취하게 되었다. 임정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에 놓여있음을 유의하여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라는 카이로선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3·1항쟁은 순수한 민족역량의 자발적인 결집이고 발산이었다.흔히 학계 일각에서는 3·1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받아 일어난 독립운동으로 평가하지만,당시 일제의 철저한언론통제로 파리평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됐을 때 유일한 국내 한글신문이었던 총독부기관지는 한줄도 보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한국민중은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 학계일각에서 주장해온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설도 비슷한 상황으로서 한국 민중이 이를 알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다.당시 러시아 한인사회에서는 국내의 3·1항쟁 소식을 접하고 3월 17일에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축하회를 개최한데서도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국민화합의 가치관 3·1항쟁으로 시작된 민족의 저항은 마침내 8·15해방으로 귀결되었지만 통일조국을 이루는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내부분열과 외세개입 때문이었다. 그리고 분단과 동족상쟁과 대결의 시대가 50년 이상 지속되면서 남한의 IMF사태,북한의 모라토리엄상태로 민족적 시련을 겪고 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은 일제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면서도 겨레가 하나되어 독립항쟁에 나섰던 선열들에게 부끄럽고 죄스런 모습이다.분단 남쪽은다시 동서로 갈리고 지역별로 토막쳐서 대립과 갈등을 겪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야간의 비생산적인 정파싸움,제 밥그릇 챙기기에 개혁을 거부하며 거리투쟁에 나선 일부 세력,부패와 복지부동의 관료집단,탈세와 외화도피를 일삼는 반사회적 기업가 등 반 3·1정신적인 행태가 도처에서 국난극복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80년전 선대들의 애국정신을 회복하는 역사적 결기(結起)가 있어야겠다.망국의 백성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일제의 폭압에 맞섰듯이 3·1정신으로 다시하나되어 IMF국난을 극복하고 분단조국 통일의 구심점으로 삼아야겠다. 우리 건국이념이고 민족통합의 원형질인 3·1정신을 화합과 통일이념으로승화시켜야 한다.그리하여 작은 이해와 갈등 따위는 80년전 선대들의 구국정신으로 용해하면서 10개월 후 열리는 2000년대에 한민족이 세계무대에서 우뚝서는 이념적 지표를 세워 나가자. 3·1항쟁과 항일구국투쟁으로 희생된 순국선열과 그 후손들이 대접받고, 양심적이고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정직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이것은 50년 만에처음으로 여야 정권교체를 통해 집권한 金大中정부의 책무이면서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국민이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민의 정부’를 선택한 것은 바로 3·1정신을 잇는 ‘정직한 역사’를 만들자는 소망의 결집이었다.3·1정신은바로 정직한 사회·정직한 국가를 만들자는 겨레의 소망이며 실천운동의 거대한 축(軸)이다.
  • 「3·1운동-臨政수립 80돌」기념탑의 상징성

    3·1독립운동 80주년을 맞아 3·1독립정신을 기리고 국민화합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 건립된 ‘3·1독립운동기념탑’은 탑 곳곳에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서울 중구 장충단 공원에 세워진 기념탑의 높이는 19.19m로 1919년 3월1일을 상징한다.탑의 맨 아래쪽 3단의 원형계단은 우주를 상징한다.탑신 기단부 정면에는 원문으로,좌·우측에는 각각 한글과 영문으로 ‘3·1독립선언서’가 오판석 위에 새겨져 있다. 탑의 근간을 이루는 세 기둥은 천·지·인과 독립운동의 핵심세력인 민족지도자·민간인·학생을 나타내며 기와집과 저고리선을 살린 곡선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기둥 위에는 3태극의 원구를 놓아 우주의 중심을 상징한다.원구 위에 놓인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4괘의 조형물은 우주를 향해 힘차게 비상하는 민족웅비의 모습을 나타낸다. 탑의 뒷면에는 비폭력 투쟁으로 일제침략에 항거해 민족의 응집된 힘을 보였던 3·1독립운동 당시의 모습을 화강암 부조로 설치했다.우측으로는 민족의 수난과 비폭력 투쟁의 상,좌측에는 평화와 민족 영광의상을 세워 고난을 극복하고 영광의 미래로 도약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탑의 정면앞쪽에는 헌화대가 놓여 있어 누구나 쉽게 헌화하도록 했다.탑과 뒷면 조형물의 재료로는 흰색의 황등석 화강암을 사용해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장충동 국립극장 옆 1,500평의 부지에 착공돼 7개월만에 완공된 기념탑은 홍익대 미대 金永元 교수가설계와 조각을 맡았다.사업비는 각계의 성금 21억2천만원으로 충당했다.
  • 사면·복권 주요인물

    22일 발표된 특별사면 대상에는 39년째 복역중인 미전향 장기수 禹용각씨(71)를 포함,많은 공안·시국 사범들이 포함돼 있다. ◆禹용각씨=평북 영변출신으로 지난 58년 동해안으로 침투하던 중 울릉도 서북 해상에서 검거됐다.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9세의 나이에 수감돼 지금까지 대전교도소 특별사동 독방에서 보냈다.뉴욕타임스는지난해 3월 ‘40년 동안 단 한번의 면회도 없이 독방에 수감돼 있는 양심수’라고 禹씨를 소개,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高永復 전 서울대 명예교수(71)=이화여대 강사로 재직하던 지난 61년 9월북한에 있는 삼촌의 소식을 전하며 접근한 북한공작원에게 포섭됐다.96년까지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 등 북한공작원 6명과 수차례 접촉,은신처를 제공하는 한편 국내정세를 보고해온 혐의로 97년 11월 구속돼 징역 2년을선고받았다.1년3개월 복역했다. ◆趙相綠씨(53)=재일 조총련 간첩단 사건으로 지난 78년 2월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20년 동안 교도소에서 보냈다.남파간첩이 아닌 공안사범 가운데 최장기수다.76년 일본 명치대로 유학간 뒤,조총련계 친지들로부터 북한의 주체사상 등을 교육받고 귀국,가족에게 북한식 통일론 등을 가르친 혐의를받았다. ◆任鍾晳씨(32)=지난 89년 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에 선출돼학생운동을 주도했다.林秀卿씨 밀입북과 관련,같은해 12월 체포돼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3년5개월 동안의 수감끝에 92년 12월 가석방됐다.현재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으로 시민단체와 연대해 활발한 사회운동을펼치고 있다. ◆林秀卿씨(30)=한국외국어대 4학년에 재학중이던 지난 89년 7월 북한에 밀입북,평양에서 열린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이로 인해 구속돼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은 뒤 수감생활을 하다 92년 12월 석방됐다. 현재 미국에 유학중이다. ◆徐敬元 전 국회의원(61)=평민당 국회의원 시절인 88년 8월 북한에 3일 동안 밀입북한 혐의로 구속돼 8년6개월 동안 복역했다.지난해 3월 가석방으로풀려났다.徐 전 의원은 이번에 잔형면제 및 복권 조치됐다. ◆黃秀英씨(54·필명 黃晳暎)=지난89년 밀입북한 뒤 미국과 독일 등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밀입북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뒤 지난해 3월 가석방됐다. ◆崔虎敬씨(41)=지난 92년 중부지역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崔씨는 지난해 8월 8·15특사에서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면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번 사면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朴志晩씨(40)=고 朴正熙 대통령의 외아들이다.지난 89년 코카인 흡입 혐의로 처음 입건된 이래 10년 동안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 혐의로 적발돼적발-선처-재적발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면서 4차례나 구속됐다.지난해 4월 히로뽕 흡입 혐의로 4번째로 구속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뒤현재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치료감호를 받고 있다. ◆朴基平씨(40·필명 박노해)=‘노동자 시인 박노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난 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사건과 관련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지난해 8·15사면 때 준법서약서를 쓰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지난해11월 노동부 공무원을상대로 특강을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白泰雄씨(36)=사노맹 상임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 92년 4월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지난해 8·15사면 때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金載千 patr
  • 파키스탄-인도 51년만의 ‘화해 악수’

    지난 50년간 적대관계를 가져왔던 인도와 파키스탄이 마침내 화해의 손을잡았다.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 총리와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20일과 21일 이틀간 파키스탄의 펀잡주 주도(州都) 라호르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관계 개선을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특히 두 총리는 20일 주지사 관저에서 양국 고위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45분간 진행된 회담에서 양국간 분쟁의 씨앗이 돼온 카슈미르 영토문제와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서명문제 등 현안을 집중 논의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지난 47년 8월15일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힌두교 중심의인도와 이슬람교 위주의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 이후 카슈미르 주권을 둘러싸고 2차례나 전면전을 벌이는 등 51년간 대치상태를 유지해왔다. 특히 지난 74년 인도의 핵실험 실시 이후 파키스탄도 80년대부터 자체 핵무기 개발을 시작,양국관계는 핵경쟁으로 변질됐고 지난해 4월 파키스탄에 이어 5월 인도가 지하핵실험을 실시함으로써 양국간 핵긴장 관계는 수위를 높여갔다. 양국은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실무진들의 접촉을 통해 긴장완화의 방안을협의했으며 그중 하나로 양국간 버스편 개통과 총리 방문이 협의됐다. 89년 라지브 간디 이래 인도 총리로서는 10년만에 파키스칸을 방문한 바지파이 총리는 양국간 화해의 상징으로 20일 개통한 역사적인 버스편의 첫손님으로 파키스탄에 입국했다. 그는 인도측의 와가 국경초소에서 “버스편은 관계개선과 공존에 대한 양국민의 염원의 상징”이라고 언급했다.이어 라호르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양국은 영토 크기에 걸맞지 않게 악의에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며 화해를 촉구했다.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도 “양국이 미국과 캐나다처럼 살날도그리 멀지 않았다”고 화답했다.
  • 아리랑TV 아·태지역 8월15일 첫 해외위성방송

    아리랑TV가 오는 8월15일부터 아시아·태평양지역을 대상으로 해외위성방송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국내 방송사의 해외위성방송은 이번이 처음이다.방송은 영어로 이루어진다. 아리랑TV는 19일 “아시아 호주 동부유럽 북동부아프리카를 가시청권으로하는 채널 1개를 임차해 6월1일부터 시험방송을 시작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아리랑TV는 이를 위해 최근 한국통신과 위성체 및 전송망 서비스 이용계약을 맺었다. 한국에 연고가 있거나,관심이 있는 현지인 및 재외 동포를 주시청층으로 삼아 종일방송한다. 뉴스 및 시사·다큐,교양·정보,드라마,오락 등을 다루는 종합채널이다.초기에는 한국 경제 및 사회 흐름을 소재로 한 시사·정보물을 특화하고 가족시청 프로그램편성으로 공영성을 유지할 계획이다. 아리랑TV 측은 “국내 방송 및 영상산업을 국제화시키는 역할 뿐 아니라 국가홍보의 효과도 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특별기고-민주·통일·인권에 대하여

    요즈음 정가가 지역감정 문제로 다툼을 하여 IMF 극복을 위해 애쓰는 국민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주고 있다. 8·15 이후 지금까지 이승만 정권을 제외하고는 이 나라 역대 정권이 지역감정과 남침위협 주장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연장해왔다는 것은 국민 거의가아는 사실이다.그런데도 우리 국민들은 동서 지역감정의 볼모가 되어 정권이 바뀌고 연장될 때마다,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상모리배와 군정 패거리들에이용당해 왔다. 누구도 이 땅의 사람들은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지역감정이라는 귀신에 들씌워 있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이다.그 풍토가 새 정권이 들어선 후 사라졌는가 싶었는데 누가 선창만 하면 또 드라큘라처럼 살아나곤 한다.요즈음 또다시 이 나라 일부 국민이 이 유행병에 걸린 것 같다.그것으로살고 나라를 망친 지금 야당의 선창으로 전국을 시끄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망국병은 남침위협설(대북정책)이다.이 점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 심화되었다.그것으로 민족을 분열시키고 권력을 누리는 이데올로기로 사용해 왔다.말하자면지역감정과 대북정책은 역대 정권을 유지시켜온 두 수레바퀴였다.걸핏하면 북한이 어쩌고 저쩌고 하여 민중들의 주의 주장을 묵살하고 탄압하는 도구가 되었다.민주화 요구가 있을 때마다,지배자들이 궁지에 몰릴때마다,백성들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어김없이 그들은 이 전가의 보도를 사용해 왔다. 이와같이 이 땅 정상배들의 두 가지 이데올로기가 살아있는 한 완전 민주화도,조국통일도,전 국민의 안정과 번영과 행복도 힘들기만 한 일이다.왜냐하면 민주화와 인권·통일은 하나이기 때문이다.완전 민주화가 됐다는 말은 통일이 되었다는 얘기고 통일이 되었다는 얘기는 완전 민주화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선 민주 후 통일,선 통일 후 민주’의 논리는 그래서 힘을 잃은 지 오래다.분단상황에서 민주화나 통일은 하나다.하나가 되지 못할 때 이익을 보는나라와 사람들은 누구이겠는가.그런데도 강대국들의 본질처럼 이 두 가지 지배철학 ‘분열하라 지배할 것이다.상하 동서 좌우로…’를 정치인들이 계속사용한다면 우리 사회 전반적인 발전의 장애가 될 것이다. 조계사에서 농성중인 청년학생 정치수배자들을 만났다.그들을 보면서 이 나라는 지금도 예나 다름없이 본질적 개혁은 한 치도 나가지 못하고 왜곡되고뒤틀린 현상적인 개혁,그것도 말로만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정부에서는 북한에 대해 햇볕정책을 펼치고 있다.그와같은 대북정책은 매우 잘한 일이고 참고 기다리며 계속되어 갈 때 성과가 있을 것이다.이 정책이 남한 내부에도 적용되어 우리사회 곳곳에 펼쳐졌으면 한다. 새로 들어선 정권마다 대물림하는 민주·통일·민생·인권 때문에 생긴 그늘진 곳,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햇볕이 좀 들어서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한번 약속했으면 또다시 잘못을 범할 때 잡아갈지언정 한번쯤 확풀어주고 확실히 규명(의문사)했으면 한다.다행히도 3·1절 대특사가 있다고 해서 기대해 보지만 또 기대로 끝나선 안될 것이다.김대중 정부도 역대 정권처럼 또 거짓말을 하고 양심수를 계속 양산해낼 것인가.얘기가 진행중인보안법 개정,양심수 석방을 보다 전향적으로 검토했으면 한다. 저와같은청년 학생들 때문에 이 땅의 민주화가 진전되고 민간 민선정권이들어서는 데 큰 역할을 했는데 왜 수배해제에 인색하단 말인가.아직 준비가안됐다는 말인가.그래서 3·1절을 기다려 볼 것이다.한 순간이라도 양심수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 ‘신의 아그네스’ 80년대 신화 재현한다

    지난 83년 8월15일 첫 공연에 나선 ‘신의 아그네스’.불볕더위를 단숨에날려보낼 만큼 돌풍을 일으켰다.6개월동안 초만원.두달전 예매하지 않으면표를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바로 이 ‘사건’으로 연극에 예매제가 도입됐다.국내 연극사상 최장기 공연(300여회)의 기록도 수립했다.‘연극 르네상스인가 일시적 거품인가’ 등의 수많은 화제와 논란을 일으킨 진앙지(震央地)였다. 그 때의 주역 윤소정(55),이정희(52),윤석화(44) 등 3명이 다시 뭉쳤다.‘아그네스’의 신화를 재현하려는 것이다. 지난 3일 대학로 들꽃컴퍼니 연습장 공기엔 설렘과 부담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앞선 의욕으로 대사가 잘 외워지지 않는 듯 막간마다 담배를 피워대거나 벽에 기대 머리를 감싸쥐곤 했다.흥분을 삭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16년만에 호흡을 맞춰서인지 해프닝도 벌어졌다.윤소정은 자신의 담배 피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이정희가 우스웠는지 “왜 너도 담배피는 장면을 넣어줄까”라며 폭소를 터뜨렸다. 연출을 겸한 윤석화는 가상 세트와 비교하며 윤소정 등 두 선배의 자리를일일이 고쳐나갔다.때론 선배들에게 애교섞인 따금한 지적도 곁들인다. 이들은 ‘아그네스’를 창고에서 꺼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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