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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영의 쿠이 보노] 에하라와 에키타이

    [이해영의 쿠이 보노] 에하라와 에키타이

    도쿄생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ㆍ1896~1969)와 평양생 에키타이 안(한국명 안익태ㆍ1906~1965).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근대 이후 한일 관계사의 가장 괴이하고, 희비극적인 한 대목일지 모른다. 꽤 오랫동안 에키타이의 행적을 추적해 온 나는 최근 3건의 원본 문서들과 한 건의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미 CIA 문서고에서 기밀 해제된 것들이다. 문서 중 하나는 전쟁 중인 1944년 4월 18일자 ‘터키에서의 일본 첩보·선전활동’에 관한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1945년 1월 30일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일본 첩보활동’에 대한 보고서다. 전자는 미 전략첩보국(OSS) 이스탄불지부가, 후자는 영국 정보원이 생산한 것이다. 세 번째 문서는 종전 이후인 1949년 11월 18일자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이 미 합참 정보국장에게 보낸 ‘전시 독일의 외교·군사 정보활동’이라는 보고서다. 그리 보면 마지막 보고서가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셈이다. 전시 일본의 재유럽 첩보활동의 본부는 베를린에 있었다. 2차 대전 직후 일본은 처음에는 ‘간첩활동의 수도’라 불리던 포르투갈 리스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태평양전쟁이 확전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위협하게 되자 마찬가지 중립국인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한다. 하지만 터키마저 연합국으로 기울자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미·영 첩보전의 기지로 활용했다. 일본 첩보활동의 동선을 미국은 매우 촘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나라의 첩보 라인이 이렇게 ‘탈탈 털리는’ 경우는 드물다. 오직 패전이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에하라의 회고에 따르면 에키타이안은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까지 자신의 베를린 사저에 기거했다고 했다. 안익태가 나치 독일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에 기재한 주소지가 바로 이 사저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 나와는 다른 시기에 또 다른 이유로 에하라 고이치를 추적한 학자가 있다. 북텍사스대학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학 교수 팀 잭슨이다. 잭슨 교수는 에하라가 하얼빈 소재 731부대의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와 연루돼 있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1938년 에하라가 독일로 건너간 뒤 731부대의 생체실험 정보를 독일과 공유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우슈비츠 등에서의 생체실험과 731부대의 그것은 에하라를 고리로 해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말이다. 잭슨 교수와 서로 자료를 공유해 온 내 쪽에서도 확인해 본 결과 에하라는 1935~1937년 하얼빈의 총무처장으로 있다가 1937년 7월 1일자로 하얼빈 부시장으로 승진한 뒤 1년 뒤 베를린 주재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파견됐다. 731부대가 일왕 히로히토의 칙령에 의해 본격적으로 하얼빈으로 확장 이전된 때가 1936년이다. 만주국의 직제는 이른바 일만정위(日滿定位) 원칙 곧 일계(日係)와 만계의 직위가 정해져 있었다. 일본의 괴뢰국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장, 시장이나 공사 등은 만계에 할당하고 그 아래에 일계를 배치했는데 실세는 당연히 일계였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총무청(처) 중심주의를 기본으로 해서 인사ㆍ재정, 특히 모든 기밀업무를 총무(청)처장이 관장했고, 그 배후에는 관동군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에하라가 하얼빈 시절 직간접적으로 731부대와 연관됐을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다. 위에서 말한 1949년 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는 “재독 일본 첩보망의 총책”이었다. 이 진술은 페터 바이라우흐 나치 독일의 SS 해외첩보부(SD) 소련·일본국장에게서 나온 것이다. 독일과 소련은 군사동맹이었지만, 1943년 8월 이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상호 첩보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에하라는 1945년 1월의 영국 첩보부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당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핀란드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등록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1949년 보고서만큼 정확한 정보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 첩보원은 그가 일본과 러시아 간 협상을 담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OSS 이스탄불지부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베를린에서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약 300명의 정보망을 운용하고 있었다. 에하라 고이치는 외교관이라는 합법적 신분으로 위장한 ‘화이트’였다. 그의 집에 주소지를 둔 에키타이 안은 추축국과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나치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음악으로 응원했다. 에키타이 안이 안익태다.
  • 김포 청소년들 하얼빈서 “코레아우라”(대한독립만세) 외쳤다

    김포 청소년들 하얼빈서 “코레아우라”(대한독립만세) 외쳤다

    경기도김포교육지원청 김포 청소년 역사문화 탐구단의 동북3성팀이 30~31일 하얼빈역에 재개관한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방문했다. 기념관 자리는 안중근의사 의거 110주년을 맞이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장소다. 지난 27일부터 3박4일 여정을 시작해 김포학생대표 32명과 인솔자 8명이 함께 방문 중이다. 학생들은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거사과정 등 안 의사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전시물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일제강점기 일본에 항거한 안중근 의사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살펴봤다. 또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를 직접 확인하고, 안 의사가 남긴 유묵들을 관람할 때는 눈시울을 붉히거나 일제의 만행에 분노하기도 했다. 특히, 고촌중학교 학생들은 사전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체험활동으로 인근 초등학교 학생 30명을 초대해 체험부스를 운영했다. 당시 만들었던 안 의사 손도장이 찍힌 가방과 안중근 의사 유묵인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탁본한 작품을 모두 갖고 와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코레아우라”(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기념관을 방문한 양곡초의 한 학생은 “통유리 너머로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1번 플랫폼 장소를 보니 안 의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감회를 밝혔다. 지난 30일 4일차 탐방을 마친 3개 학교 모든 참가자들은 하얼빈 곤륜호텔 만찬장에서 나흘간 여정을 정리하고 조사한 내용과 감상을 나누는 나눔의 자리를 마련했다. 참가자들은 탐구단 활동을 통해 가장 힘들었던 것으로 음식과 중국 화장실 문화를,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731부대 기념관, 백두산, 윤동주 생가를 꼽았다. 고촌중 임상혁 학생은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넘게 날아온 땅에서 한국 문화를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라웠고, 옌볜에서 살아가는 중국 동포도 우리와 같은 민족임을 느꼈다”며, “독립투사들이 어렵게 지켜낸 이 나라에서 언젠가 옌볜 사람과 북녘 사람들과 함께 통일 한국에서 다함께 살아가기를 소망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학생들은 ‘독립군가’를 함께 부르며 탐구단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날 함께 부른 독립군가는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투사들이 부르던 ‘독립군가’를 고촌중 학생들이 직접 개사했다.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 손에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10월 26일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들려 있었다. 백경녀 교수학습지원과장은 “안중근 의사의 조국 독립을 향한 열망과 희생정신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 국민들 가슴 속에 살아있다”며, “안 의사를 비롯한 애국선열들의 뜻을 잘 받들어 나가자”고 강조했다. 또 “이번 여정을 통해 김포 청소년 역사문화탐방단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갖고 사유하는 김포시민들로 자라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아베씨, 대체 왜?

    아베씨, 대체 왜?

    왜 일본 아베 정권은 침략주의 과거사를 미화하려 할까. 그리고 ‘역사 객관성’을 추구하는 자국 역사학자들을 ‘국적’(國賊)으로 몰고 있는 걸까. ‘알수록 이상한 나라 일본’(범우사)은 서울신문 기자 출신의 재야사학자인 정일성씨가 지난 30여년간 천착해 온 근현대 한·일관계사 연구를 바탕으로 내놓은 여덟 번째 일본 보고서다. 저자가 처음 일본에 발을 디뎠을 때의 체험담, 일본의 성씨 유래, 아베 신조 총리의 가계 등 비교적 가벼운 내용을 시작으로 731부대의 생체 실험과 일본군 성 노예처럼 현재와도 맞닿아 있는 과거사를 파헤친다. 책의 핵심은 일본은 왜 과거사에 대한 사죄·사과에 인색한지를 다룬 제3장이다. 여기서 저자는 일본은 식민지 국민의 독립운동으로 처참한 싸움 끝에 식민지를 잃은 것이 아니라 패전에 따른 비군사화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식민지를 상실했으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일본 측 전쟁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언술한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중일전쟁의 시발점’ 루거우차오를 가다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중일전쟁의 시발점’ 루거우차오를 가다

    7월은 중국에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특별한 달이다. 81년 전인 1937년 7월 7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10여㎞ 떨어진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당시 일본군의 갑작스런 군사훈련으로 7.7사변이 발발했고 이후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보다 먼저 시작된 중일전쟁. 그 피해는 막대했다. 3500만 명의 중국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고 전쟁으로 인해 중국 전역은 초토화 되었다. 마르코폴로의 다리로도 불리는 루거우차오 7월초 베이징은 30도가 넘는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베이징 시내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루거우차오가 위치한 완핑청(宛平城)으로 향했다. 여름의 베이징은 다른 계절과 달리 관광객들로 붐빈다. 여름방학을 맞아 중국 각지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찾기 때문이다.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완핑청은 명나라 시기에 축조된 성으로 옛날에는 베이징과 중국 동북지역을 잊는 교통요충지였다. 택시에서 내려 성 가운데 난 길을 따라 루거우차오로 걸었다. 성 안의 옛 건물을 따라 걸으니 어느새 성밖으로 나가게 되었고 루거우차오에 이르렀다. 루거우차오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소개된 바 있다. 동방견문록에서 마르코폴로는 루거우차오에 대해 '온 세상 어디를 찾아도 필적하는 것이 없을 만큼 훌륭하다'라고 적었다. 이 때문에 외국인들에게는 루거우차오라는 이름보다는 마르코폴로의 다리로 잘 알려져 있다. 7.7사변의 주범 무다구치 렌야 석조의 아치교인 루거우차오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표를 끓고 다리로 올라서니 다리 양 옆으로 사자의 조상이 수없이 장식되어 있었다. 81년 전 이 다리를 두고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통지도 없이 군사훈련을 하다가, 일본 사병이 실종되었다는 이유로 완핑청에 들어가 수색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중국군은 반대했고 일본군은 이에 맞서 완평성을 포위하고 포격을 가했다. 나중에 일본의 자작극으로 밝혀졌지만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당시 일본군 연대장이었던 무다구치 렌야였다. 무다구치 렌야는 상부의 보고도 없이 독단으로 중국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무다구치 렌야는 이 사건 이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임팔작전에서 세계 전쟁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희대의 '팀킬'을 선보이며 5만 여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루거우차오 인근에 자리잡은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루거우차오가 위치한 완핑청안에는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1987년 항일전쟁 50주년을 맞아 건립된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은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부터 1945년까지 항일전쟁에 대한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주제 전시관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은 일본군의 학살, 일본군과 중국군의 전투 장면, 전쟁 영웅들의 모습, 당시 쓰이던 각종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화학전과 관련된 자료들이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731부대를 통해 중국에서 비밀리에 생물무기를 실험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반면 화학무기 사용과 관련된 부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군은 중일전쟁당시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불리해지면 화학무기를 사용했고, 이 때문에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기념관 로비에 적힌 '牢记历史 珍爱和平'(역사를 깊이 새기고 평화를 아끼고 사랑하자)가 가슴 한편에 깊이 새겨졌다 베이징=김대영 군사평론가 kodefkim@naver.com
  • [씨줄날줄] 인체 실험/이순녀 논설위원

    [씨줄날줄] 인체 실험/이순녀 논설위원

    19세기 미국의 치과의사 호레이스 웰스는 ‘웃음가스’로 불리는 이산화질소가 고통을 못 느끼게 하는 환각 효과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자 이산화질소를 들이마신 뒤 조수에게 치아를 뽑게 했다. 고통 없이 발치에 성공했지만 이후 공개 실험은 이산화질소의 정확한 양을 알지 못해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이어 갔고, 사후에 마취에 관한 의학적 성과를 인정받았다.호흡생리학의 권위자인 영국의 존 스콧 홀데인(1860~1936)은 광부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탄광으로 달려가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직접 일산화탄소를 흡입했다. 그의 연구는 당시 심각한 문제였던 광부와 잠수부들의 사망률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은 과학자들을 다룬 책 ‘기니피그 사이언티스트’(레슬리 댄디·멜 보링 지음)에 등장하는 사례들이다. 인류의 삶이 나아지길 바라며 ‘셀프 인체 실험’을 마다하지 않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생명과 의료윤리가 정립되지 않은 시대여서 가능했던 일들이다. 그러나 보통 인체 실험이라고 하면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과 일제 731부대가 자행한 악명 높은 생체실험이 떠오른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상대로 독가스 실험, 전염병 실험, 쌍둥이 실험 등 온갖 해괴한 인체 실험을 일삼았다. 731부대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하얼빈에 주둔하며 생체해부 실험과 냉동 실험 등을 저질렀다. 천인공노할 반인간적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는 1947년 전범 재판인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일명 ‘뉘른베르크 강령’을 제정했다. 어떠한 인체 실험도 피실험자들이 충분히 정보를 제공받고,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동의할 때에만 허용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이어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의사회 총회에서 뉘른베르크 강령을 수정·보완한 ‘헬싱키 선언’이 나왔다. 의학적 목적의 임상시험도 엄격한 생명윤리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폭스바겐, 다임러, BMW 등 독일 자동차 업계가 디젤 차량 배출가스의 유해성 연구를 위해 인체 실험을 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젊은 남녀 25명에게 4주간 주 1회, 3시간씩 다양한 농도로 질소산화물을 흡입하게 했다고 한다. 최소한의 윤리 의식조차 의심스럽게 만드는 반인륜적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다른 나라도 아니고, 독일에서 인간 가스 실험이라니 더 끔찍하고 소름 끼친다. coral@seoul.co.kr
  • [김진수의 바이오 에세이] 유전자 에디팅, 교정인가 편집인가?

    [김진수의 바이오 에세이] 유전자 에디팅, 교정인가 편집인가?

    “중국 과학자들이 인간의 배아를 편집했다”, “유전자 편집 과일, 슈퍼마켓 덮치다”와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이용해 인간 및 동식물의 유전자를 쉽게 고쳐 쓸 수 있게 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관련 연구 성과가 소개되고 있다. 유전자 에디팅은 이 기술을 일컫는 학술용어로서 국내 언론은 ‘유전자 교정’, ‘유전자 편집’, ‘유전자가위 기술’ 등 다양하게 번역해 소개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중 ‘유전자 편집’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유전자 편집’은 유전자 에디팅을 오역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 사전을 찾아 보면 에디팅은 ‘1. 편집’, ‘2. 교정’으로 번역돼 있다. 문제는 편집과 교정의 의미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편집은 ‘일정한 계획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엮어서 책이나 신문, 잡지 따위를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명백히 유전자 에디팅에 해당하지 않는다. 유전자를 이것저것 모아 취합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면 에디팅이 아니라 합성생물학에 해당한다. 유전자 에디팅은 32억개 염기쌍으로 구성된 인간 ‘유전자 전체’(유전체)에서 불과 백만분의일 내지는 십억분의일에 해당하는 극히 작은 부분을 바꾸는 것이다. 이를 두고 유전체를 편집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자 오류다. 반면 에디팅의 또 다른 번역어인 ‘교정’은 주어진 텍스트에서 일부를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 에디팅은 유전체라고 하는 100만쪽 이상 되는 방대한 책에서 한 글자 내지는 기껏해야 한 문장을 바꾸는 것이다. 이는 교정이지 편집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유전자 편집’이라는 표현은 연구자들의 의도를 왜곡한다. 국내외 의생명과학자들이 혈우병 같은 유전질환의 치료법으로 유전자 교정을 연구하고 있다. 유전병의 원인이 되는 돌연변이를 원상복구하자는 것이다. 이는 유전자의 교정이지 편집이 아니다. 셋째, ‘유전자 편집’이라는 용어는 일반인들에게 불필요한 오해와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의 유전자를 편집하겠다’라고 한다면 환자는 일제강점기 731부대의 비인도적인 생체실험을 연상할 수도 있다. 반면 의사가 유전자를 ‘교정하겠다’, ‘수술하겠다’고 한다면 환자는 보다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유전자 편집된 가축, 과일’이라는 표현도 소비자의 거부감을 초래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이를 해소하기 위해 드는 사회적 비용은 막대할 것이다. GMO, MRI는 과학 용어를 사려 깊게 번역해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 GMO는 현재 ‘유전자변형작물’로 번역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유전자조작작물’로 번역돼 한동안 사용됐다. 한자어는 다르지만 조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느낌이 GMO에 대한 일반인의 거부감에 일조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반면 MRI는 원래 ‘핵자기공명’에서 유래했지만 ‘핵’이라는 용어가 일반인에게 오해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핵’을 삭제하고 ‘자기공명영상’으로 개명돼 현재 진단 기법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과학 기술은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지만 실험실에서 개발된 연구 성과가 사회에서 널리 활용되기 위해서는 일반인들의 이해와 지지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전자가위 기술이 우리 사회에서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순조롭게 수용되기 위해서는 용어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기술의 개발자 중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국내 기자들과 과학 저술가들에게 ‘유전자 편집’이라는 부정확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을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한다. 대신 문맥에 따라 유전자가위 기술, 유전자 교정, 유전자 수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 ‘日 과학노벨상 22명’ 뒤엔 사제협력 있었다

    ‘日 과학노벨상 22명’ 뒤엔 사제협력 있었다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고토 히데키 지음/허태성 옮김/부키/432쪽/1만 8000원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이때쯤이면 한국인들은 자괴와 열등감에 빠진다. 특히 이웃 일본과의 비교에서 느끼는 격차는 따라잡지 못할 수준의 괴리감으로 다가온다. 올해도 일본은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업대 명예교수의 생리의학상 쾌거를 즐기고 있다. 과학 부문에서만 22번째 수상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일본의 과학 저술가가 쓴 이 책은 그 차이의 배경과 함께 우리가 노력할 점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1854년 개국(開國) 이후 약 160년간 일본의 근현대 과학을 노벨상 수상을 중심으로 정리한 흐름이 독특하다. 조선보다 20년 앞서 문호를 개방해 필사적으로 ‘서양 따라잡기’에 나섰고, 침략 전쟁이 과학 발전과 직결됐다는 주장이 눈에 띈다. 일본이 노벨상을 처음 받은 건 메이지유신 이후 만 81년이 되는 1949년의 일이었다. 그 쾌거에는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서양의 과학지식을 적극 흡수했던 노력이 도사리고 있다. 일본은 이미 1860년대부터 서양 각국에 유학생을 파견했다고 한다. 1871년 파견한 이와쿠라 견구사절단에는 40명의 뛰어난 유학생이 들어 있었고 이들은 귀국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900년 무렵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가 아드레날린을 발견하고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1회 노벨상 수상자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등 20세기 초반부터 서양과 경쟁할 수준에 서 있었다고 한다. 1917년에 이화학연구소 설립 이후에는 물리학 분야도 급격한 발전을 이뤄 1950년 무렵 세계를 선도할 만큼 성장했다. 책의 특징은 물리학, 화학, 생리 의학, 원자력 공학 등 각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 업적과 뒷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낸 점이다. 그 과정에서 메이지 유신,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패전과 전후, 그리고 최근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의 사회상이 펼쳐진다. “동양에 없는 것은 두 가지다. 유형으로는 수리학, 무형으로는 독립심이다.” 이렇게 간파했던 개화기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기틀을 닦아 놓은 자연과학은 일본의 전쟁에 무기를 공급하는 데 쓰이면서 힘을 키워 갔다. 왁스를 섞어 폭발력을 크게 높인 이른바 ‘시모세 화약’은 러일전쟁 때 큰 공을 세운 것으로 기록된다. 중국 하얼빈에 설치된 731부대와 관련해선 일본 전역에서 모집한 연구자 1000여명이 세균전과 인체실험에 투입됐다고 전한다.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바로 과학자의 의식이며 과학 발전과 관련한 사회 시스템의 가동이다. 과학자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기초 연구의 산실을 일궈 낸 것을 비롯해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없앤 사례, 끈끈한 사제 관계, 각자가 잘하는 일의 집중 같은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일본인의 폐단은 성공을 너무 서둘러 금방 응용 쪽을 개척해 결과를 얻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화학 연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순수 이화학의 연구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이렇게 외쳤던 응용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가 1917년 설립한 이화학연구소(리켄)는 이후 100여년 동안 일본의 기초과학 발전을 이끌었다. 강의에 나오는 방정식조차 이해하지 못할 만큼 수학이 약했지만 실험에선 탁월했던 고시바 마사토시가 2002년 노벨상을 받게 된 과정도 눈에 띈다. 일본 과학의 발전사에선 배울 점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개척이며 잇따른 전쟁이 자연과학 발전에 상승효과를 냈다는 사실은 조금 불편하게 다가온다. 그 불편한 진실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저자는 후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본인이 서양의 사상과 철학, 도덕, 종교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물리학에 비해 지극히 어려웠다. 일본인이 이제부터 배워야 할 서양의 지혜는 사회의 민주제도라든가 개인의 독립, 자존 등 무형 문화라고 생각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해외여행 | 역사가 흐르는 동방의 파리 하얼빈

    해외여행 | 역사가 흐르는 동방의 파리 하얼빈

    정교한 바로크풍 건물 사이로 웅장한 러시아 음악이 흐른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하얼빈. 겨울이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화려한 빙등제가 펼쳐진다. 그뿐인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역사의 현장도 이곳에 있다. 그래서인지 하얼빈은 다른 중국 도시에 비해 더 가깝게 느껴진다. 하얼빈에서 가장 번화한 중앙대가. 유럽스타일의 건물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하얼빈합이빈, 哈爾濱은 추울수록 더욱 빛나는 도시다. 일 년의 반 이상이 겨울. 1월 평균기온은 대략 영하 20℃에 이른다.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상에는 아이스박스가 필요 없다. 상온에 놓아도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기 때문이다. ‘얼음의 도시’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매년 1월5일이 되면 세계 3대 겨울축제 중 하나로 꼽히는 하얼빈 빙등제가 열린다. 눈과 얼음의 축제인 하얼빈 빙등제에 전시할 거대한 얼음조각을 위해 매년 5,000여 명 이상의 조각가가 동원된다. 축제가 시작되면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얼음 조각가들도 바빠진다. 낮에 녹은 얼음조각을 밤새 보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송화강 북쪽 태양도공원에서는 빙설제도 함께 열린다. 하얼빈은 높은 강설량 덕분에 스키장도 발달해 있다. 일 년 중 스키를 탈 수 있는 날이 네 달이 넘는다. 눈의 질이 좋고 슬로프 경사도 적당해 스키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96년 동계아시안게임을 치른 야부리스키장은 풍부한 자연설로 유명한 헤이룽장성의 대표적인 스키장이다. 하얼빈에서 200km 떨어져 있다. 하얼빈은 중국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헤이룽장성흑룡강성, 黑龍江省의 성도다. 도시 자체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얼빈은 만주어로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뜻으로 과거에는 한가한 어촌이었다. 여유로웠던 어촌마을이 동북지역 중심도시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19세기 초 러시아의 철도 기지가 건설되면서부터다. 러시아 사람들이 철로를 건설하면서 30여 개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개국의 영사관이 들어서고 하얼빈은 국제적인 도시로 재탄생했다. 하얼빈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다. 1946년 4월28일 중국에서 가장 먼저 해방되어, 다른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4년에는 국가급 역사문화도시로 지정되기도 했다. 예술면에서도 중국 최초로 서양음악을 받아들였으며, 지난 2010년에는 UN 음악도시로 선정되었다. 중국 10대 도시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얼빈역에 마련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안중근 의사의 뜨거운 행적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강교항전기념관의 마점석 장군상항일투쟁 역사가 살아 있는 헤이룽장성 하얼빈 하면 빙등제가 떠오르지만, 하얼빈이 속한 헤이룽장성 곳곳에 우리 역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김좌진 장군, 이범석 총리가 활약한 항일투쟁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하얼빈은 항일애국운동의 상징적인 장소로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다. 하얼빈역 플랫폼에는 역사의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2014년 하얼빈 역사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문을 열어,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많이 찾고 있다. 기념관은 하얼빈역 앞에 있던 VIP 대합실 일부를 개조해 만든 것으로, 입구는 하얼빈역의 옛 모습을 축소해 만들었다. 기념관 안에는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록들과 안중근 의사의 흉상, 손가락을 잘라 조국 독립을 결의했던 그의 손을 형상화한 브론즈 조각품 ‘거룩한 손’, 의거 당시 사진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자료들 중 가슴이 뜨거워지게 한 것은 안의사가 하얼빈에서 보낸 11일간의 행적이었다. 얼마나 두려웠을지, 어떻게 마음을 다졌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기념관 한 쪽 벽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는 장면을 그린 대형 벽화가 걸려 있다. 국가 1급 화가 권오송이 그린 작품으로, 인상적이다. 기념관에서 빠트리면 안 되는 것이 통유리 너머로 의거 현장을 보는 것이다. 안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현장은 하얼빈역 1번 플랫폼으로, ‘안중근 이등박문 격살 사건 발생지’라는 문구가 천장에 붙어 있다. 역 안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기념관 안에서 볼 수 있다. 헤이룽장성 제2의 도시인 치치하얼제제합이, 齊齊哈爾에서도 우리의 항일투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치치하얼 태래에 가면 강교항전기념관이 있는데, 그곳에서 대한민국 초대 총리를 지낸 이범석 전 총리의 활약을 만날 수 있다. 강교항일 투쟁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지 두 달 만에 중국군이 태래현에서 일본군과 벌인 첫 번째 전투로, 중국의 항일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전투다. 이범석 전 총리는 마점석 장군이 지휘하던 중국항일군에 합류해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중국 사람들이 731부대가 생체실험에 사용한 도구들을 보고 있다아직 발굴 중인 731부대의 잔해들 731부대 죄증진열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 현재의 731부대 죄증진열관은 이 건물 앞에 2015년 8월15일 3층 규모로 새로 지어진 것이다 731부대에 참여한 조직을 비롯해 고문방법과 과정 등 731부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마루타의 아픔이 느껴지는731부대 죄증진열관 하얼빈에서 꼭 가 봐야 할 곳 중 하나는 731부대 죄증진열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만행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중국인들의 역사적인 상처가 아로새겨진 곳이다. 731부대는 일본 관동군의 세균전 부대로 1945년까지 3,850명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던 부대다. 일본의 비인도적 잔악행위를 보여 주는 곳으로 6개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731부대를 조직하는 과정들이 소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생생한 기록들이 숨을 턱 막히게 한다. 손과 발을 묶는 족쇄와 수술용 칼, 생체 실험에 사용된 도구와 문서들은 그때의 시간을 보여 준다.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해부실 앞에서는 현기증이 날 정도다. 731부대는 이곳에서 100가지가 넘는 실험을 실시했다. 페스트 벼룩을 연구하기 위해 쥐를 사육해 쥐부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731부대는 전쟁이 끝나고 그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건물을 폭파했다. 그러나 보일러실과 지하실험실 등 잔해가 지금도 남아 있다. 중국정부는 2015년 8월15일 731부대 죄증진열관을 재개관했다. 기존 벽돌건물 앞 부대 터에 검은색 3층 규모의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입구에는 한국어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도구가 마련되어 있어, 생생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러시아풍 건물의 내부 러시아 문화를 테마로 한 볼가장원. 여름철 휴양지로 인기가 높다 러시아풍의 이국적인 거리 중앙대가 하얼빈은 역사적인 도시면서 국제적인 도시다. 특히 러시아 문화가 일찍 들어왔다. 제정 러시아 때는 국제 상업도시로 ‘동양의 파리’로 불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곳곳에 남아 있는 러시아풍의 건물들 때문에 ‘동방의 모스크바’라는 별명도 얻었다. 1913년에는 하얼빈의 인구중 반 이상이 러시아인이었다. 지금도 하얼빈은 러시아와 3,000km가 넘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하얼빈은 중국의 다른 도시와 달리, 도시 곳곳에서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하얼빈에서 러시아 문화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 중앙대가中央大街. 중앙대가는 바로크풍, 르네상스풍 등 여러 유럽스타일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거리로 하얼빈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1898년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이름은 중국대가였는데 1925년 중앙대가로 이름을 바꿨다. 송화강 홍수예방승리기념탑까지 이어져 있다. 유럽 중세거리를 생각나게 만드는 돌로 바닥을 장식한 1.4km의 대로에도 눈길을 줘야 한다. 대로의 보도블록은 당시 1개에 1달러를 투자해 만든 것으로, 100년이 흐른 지금도 단단함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와 젊은이들로 활기를 띠는 중앙대가에는 70개 이상의 유럽풍 건축물과 13개의 시급 보호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건축물을 보면 이곳이 중국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상점에서도 눈이 큰 러시아 인형을 팔고 있고 길거리 곳곳에서 쉽게 러시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하얼빈의 상징인 소피아 성당. 밤에 보면 더 아름답다하얼빈 맥주는 러시아를 통해 전파된 유럽식 맥주 문화를 담고 있다 비잔틴 양식의 소피아 성당 중앙대가 근처에 있는 소피아 성당은 하얼빈의 대표적인 심벌 중 하나다. 비잔틴 양식의 전형적인 러시아 성당으로, 앞에 서면 러시아의 대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소피아 성당은 하얼빈 근대사의 중요한 유적으로 문화혁명 기간에는 성당의 벽화와 십자가가 훼손되거나 분실되기도 했다. 낮에 보는 것도 좋지만 밤에 찾아가 보자. 은은한 조명 덕에 더 고풍스럽게 다가온다. 지금은 ‘하얼빈 건축 예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하얼빈 시민들의 여름 휴가지로 인기 있는 볼가장원Volga Manor, 伏爾加莊園도 러시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볼가장원은 러시아 문화를 테마로 한 공원으로 호수를 가운데 두고 러시아 정교회와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으며 숲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아름다워 가족 단위로 많이 찾는다. 볼가장원 안에는 러시아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갤러리와 러시아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도 있어, 다양하게 러시아 문화체험을 할 수 있다.중국에서도 유명한 하얼빈 맥주도 러시아 영향을 받은 것 중 하나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하얼빈 맥주는 1900년 당시 러시아가 밀려들어오면서 유럽식 맥주문화가 함께 하얼빈에 자리 잡게 됐다. 하얼빈 맥주는 역사만 깊은 것이 아니다. 하얼빈 사람들은 중국에서 1인당 평균 맥주 소비량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맥주를 사랑한다. 매년 여름에는 하얼빈 국제맥주축제도 열린다. 자롱자연보호구에서 단정학이 비상하고 있다치치하얼의 자롱자연보호구는 끝없는 갈대밭으로도 유명하다 두루미의 비상을 볼 수 있는 자룽자연보호구 헤이룽장성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것 중 하나가 단정학丹頂鶴이다. 치치하얼은 학의 도시로, 전 세계 2,000마리 중 400마리의 단정학이 살고 있는 자룽찰용, 擦龍자연보호구가 유명하다. 자룽자연보호구는 국제 람사르습지에 등록된 중요 습지로 2,100km2에 1,000여 종의 야생 동식물이 살고 있다. 자룽자연보호구의 주인공인 단정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새로 알려져 있으며 천년을 장수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신성시되는 새다. 머리에 붉은 점이 있어 단정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가롭게 물가에서 노니는 단정학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운이 좋으면 단정학이 떼를 이뤄 날아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자룽자연보호구의 또 다른 장관은 끝도 없이 펼쳐진 갈대밭. 갈대밭 사이로 나무데크가 가지런히 놓여 있어 산책하기에도 좋다. ▶travel info 하얼빈Airline인천에서 하얼빈까지 아시아나항공과 중국남방항공이 직항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VISA귀국 항공권을 제시하면 72시간 동안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다. Place동북호림원 | 세계 최대의 호랑이 인공 번식장인 동북호림원東北虎林園. 백두산호랑이 80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넓은 들판에서 어슬렁거리는 호랑이들을 볼 수 있다. FOOD안중근 식단 |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 하얼빈을 찾는 한국 여행자를 위한 ‘안중근 식단’이 있다. 안중근 식단은 안의사가 하얼빈에 11일간 머물면서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음식들로, 100년 전 하얼빈에서 주로 먹던 음식들이다. 동북지역 탕수육인 꿔바로우鍋包肉를 비롯해, 돼지고기와 조로 만든 궁미완쯔貢米丸子, 아이스크림에 밀가루 옷을 입혀 튀긴 여우자빙군油炸氷棍 등 다양한 서민음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안중근 식단을 개발한 음식점은 125년 전통의 식당인 노주가老廚家. 청 말기인 1890년 문을 열어 4대째 이어가고 있는 식당으로 꿔바로우를 만든 원조집이자 인기 음식점이다. 붉은 소시지 | 하얼빈에서 꼭 맛볼 것 중 하나는 붉은 소시지. 헤이룽장성 고기에 마늘과 후추 등 조미료를 넣어 유럽식으로 만든 소시지다. 씹는 맛이 좋다. 아이스크림 | 중앙대가의 마디얼 아이스크림은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아이스크림으로 진한 바닐라맛이 특징이다.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채지형
  • [현장 블로그] 우경화 목매는 일본에 국정교과서 있었다면…

    청년 역사 연구 모임 ‘홀로그램’<2015년 7월 27일자 25면>이 주말인 12일 서울 중구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일본 답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홀로그램은 지난달 19~27일 후쿠오카, 나가사키, 교토, 오사카 등을 돌며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박물관, 기념관, 묘지 등을 하나하나 방문했습니다. 최근 한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돼 화제가 됐던 우토로 마을도 다녀왔다고 합니다. 홀로그램은 답사를 통해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경화 흐름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오사카에 있는 리버티박물관, 피스박물관에는 원래 식민지 시대 때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전시관, 전시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군 위안부는 필요한 제도였다”는 망언을 한 극우 성향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시장이 과거 부지사 재임 시절부터 시 보조금을 무기로 해당 전시 내용을 없애거나 바꾸도록 했습니다. 또 그는 우익 출판사인 이쿠호샤가 만든 역사, 공민(사회) 교과서를 오사카시 중학교 교과서로 채택했습니다. 이 교과서는 일본의 러·일 전쟁 승리가 “유색 인종도 백인종에게 지지 않는다는 희망을 아시아인들에게 심어 줬다”고 서술하는 등 일본의 식민 지배를 미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검정 교과서 체제 아래 일본 중학교 전체의 6% 정도만이 이쿠호샤 교과서를 채택했다고 합니다. 또 비록 일본 정부가 우경화를 주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은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던 일본의 과거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시도하는 평화헌법 해석 변경에 국민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고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사설 박물관·연구소 운영 등을 통해 전범 국가로서의 과오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만일 일본이 국정 교과서 체제였다면 어땠을까요. 조선을 수탈하고 일본군 위안소를 운영하고 731부대를 만들어 생체 실험을 일삼은 인권 유린의 역사가 ‘근대화의 상징’으로 왜곡된 채 일선 학교 현장에서 가르쳐지지 않았을까요. 현재 우리나라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국사의 국정 교과서 체제 전환을 우려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국정 교과서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현재의 검정 국사 교과서들의 상당수가 ‘좌편향’이라고 공격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야 한다거나 개발 독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지금보다 한층 더 부각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경제 성장의 희망 못지않게 견디기 힘든 독재와 인권 탄압의 절망도 동시에 겪어 온 우리 국민입니다. 하나의 역사를 부각하면 다른 역사는 묻히기 쉽습니다. 역사 교육의 목적을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정부는 ‘하나의 역사’를 계속 강조하지만 하나의 역사로는 모두가 바라는 진실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광복70주년] A급 전범·독도 망언 등 일본인 15명 서훈 유지 왜

     우리 정부가 훈장을 잘못 추서한 일본인들의 서훈이 각계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A급 전범과 조선인 등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한 731부대 관련자, 야스쿠니신사 및 독도와 관련해 망언을 한 인사들이다.  2013년 국정감사에서 이들 부적격 서훈자들의 자격 논란이 제기된 이후에도 상훈법상 서훈 취소와 관련된 정부의 유권해석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3일 행정자치부와 외교부 등에 따르면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 등 총 15명의 일본인에 대해 현재 우리 정부 훈장이 유지되고 있다. 이들은 인재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2013년 공개한, 잘못된 서훈 대상자로 A급 전범 3명과 731부대 관련자 2명, 독도 망언 인사 5명,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주장한 4명, 인종차별 발언자 1명 등 모두 15명이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는 현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로 고다마 요시오, 사사카와 료이치 등과 함께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용의자 명단에 오른 사람이다.  독도 영유권과 관련한 망언이나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한 인사 중에서는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기시 전 총리의 동생), 시나 에쓰사부로(기시 전 총리의 핵심 참모),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아베 총리의 부친) 등이 훈장을 받았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거나 일본 총리의 참배 정례화를 주장한 인물로는 스즈키 젠코 전 총리 등이 있고, 훈장 수여자 중 다케 미다로와 가토 가쓰야 등은 731부대 관련자다.  정부 훈장 포상을 담당하는 행자부 측은 “서훈 수여나 취소의 경우 추천 기관 요청에 따라 가능하다”며 “외교부와 보건복지부가 관할한다”고 말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우호 증진 기여 등의 공적이 인정돼 적법 절차에 따라 결정된 서훈인 만큼 취소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 의원은 2013년 국가 이익을 해치는 행위와 사회윤리에 반하는 행위 등 서훈의 존엄과 가치를 손상시키는 경우 서훈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한 ‘상훈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2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광복70주년] A급 전범·독도 망언 등 일본인 15명 서훈 유지 왜

    우리 정부가 훈장을 잘못 추서한 일본인들의 서훈이 각계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A급 전범과 조선인 등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한 731부대 관련자, 야스쿠니신사 및 독도와 관련해 망언을 한 인사들이다. 2013년 국정감사에서 이들 부적격 서훈자들의 자격 논란이 제기된 이후에도 상훈법상 서훈 취소와 관련된 정부의 유권해석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3일 행정자치부와 외교부 등에 따르면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 등 총 15명의 일본인에 대해 현재 우리 정부 훈장이 유지되고 있다. 이들은 인재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2013년 공개한, 잘못된 서훈 대상자로 A급 전범 3명과 731부대 관련자 2명, 독도 망언 인사 5명,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주장한 4명, 인종차별 발언자 1명 등 모두 15명이다. 정부 훈장 포상을 담당하는 행자부 측은 “서훈 수여나 취소의 경우 추천 기관 요청에 따라 가능하다”며 “외교부와 보건복지부가 관할한다”고 말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우호 증진 기여 등의 공적이 인정돼 적법 절차에 따라 결정된 서훈인 만큼 취소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 의원은 2013년 국가 이익을 해치는 행위와 사회윤리에 반하는 행위 등 서훈의 존엄과 가치를 손상시키는 경우 서훈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한 ‘상훈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2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인천상륙작전 성공 하고도…맥아더 해임된 결정적 이유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하고도…맥아더 해임된 결정적 이유는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 한다. 16개국에서 전투부대를 파견한 국제전이었던 이 전쟁은 결코 잊지 못할 전쟁임에도 정치, 이념적 시선에 따라 판이하게 평가된다. 우리 민족에겐 여전히 상흔이 씻기지 않는 최대의 비극이다. 6·25전쟁 발발일을 즈음해 관련 서적들이 봇물을 이룬다. 논란이 분분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아 주목된다. 이 가운데 ‘맥아더’(플래닛 미디어), ‘6·25전쟁과 미국’(청미디어)은 한국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와 미국 수뇌부 동향을 집중 분석했다. 미국의 전쟁전문가 리처드 B 프랭크가 쓴 맥아더 평전 ‘맥아더’는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진짜 얼굴이 도드라진다. 책 속의 맥아더는 ‘최고의 업적과 최악의 실패가 공존하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다. 한국전쟁은 특히 그에겐 ‘최고 영광과 최악 수모를 함께 안겨 준 사건’이다. ‘5000대1 확률’의 도박 같은 인천상륙을 감행, 전세를 역전시키고도 중공군 개입을 불렀다. 합동참모본부 명령과 반대로 국경 근처까지 돌진해 중국을 자극한 것이다.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 확산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을 공개 비난하고 맞서 해임됐다. 책에서 그 해임 사건은 “너무나 분명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국가 정책에서 벗어나 해임당한 것이며 적절한 조치였다”고 평가된다. 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군 731부대장이 전후 전범재판서 무죄받는 조건으로 미국에 실험자료를 건넨 거래에 맥아더가 개입됐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언론인 출신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의 ‘6·25전쟁과 미국’도 맥아더 행적을 촘촘하게 추적하고 있다. 트루먼 대통령, 애치슨 국무장관과 비교한 맥아더의 전쟁 수행 과정이 도드라진다. 트루먼 행정부가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군사력으로 방어할 대상 국가에서 제외한 한국에 지상군까지 파병하기로 결정한 과정이 명쾌하다. 당초 38선 이북으로의 북한군 격퇴를 목적으로 했던 유엔군 작전 목표를 북진통일로 바꾼 과정, 북한 완전 점령을 눈앞에 둔 크리스마스 공세가 중공군 개입으로 참패한 원인도 흥미롭다. 맥아더 해임을 놓고는 “맥아더의 아시아 중시주의에 대한 트루먼과 애치슨의 유럽 중시주의의 승리”라고 잘라 말한다. 트루먼, 애치슨이 전략적으로 유럽을 중시하고 한반도에 깊게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고 한 반면 맥아더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한반도를 굳게 지켜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 차이가 6·25전쟁 당시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책에 혼선을 불렀다고 본다. 전쟁 전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국을 빼는 애치슨 발언이나 트루먼이 1951년 4월 맥아더를 해임하고 휴전으로 나아간 것도 유럽 중심주의 때문이다. 반면 맥아더는 공산주의 척결을 위해 북진 당시 평양∼원산 라인에서 방어선을 치고 중국 참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무시한 채 압록강까지 진격해 패했다는 주장이다. 트루먼, 애치슨, 맥아더의 긴밀한 협력이 있었다면 맥아더 해임 사태가 없었을 것이며 6·25전쟁도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6·25전쟁 당시 외국 군대의 개입 배경과 전쟁 실상을 추적한 책들도 눈길을 끈다. ‘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책미래 펴냄)은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 지상군을 조명하고 있다. 영국인 저널리스트 앤드루 새먼이 50여명의 생존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책에서 저자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은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치른 전쟁 중 가장 인명 피해가 크고 잔인했다. 그럼에도 당시는 물론 지금도 영국인들은 그 전쟁을 모르고 있다.” 전쟁에서 영국군은 포클랜드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전사자를 모두 합친 수(783명)보다도 더 많은 1087명이 전사했다. 영국 제27여단과 41코만도 부대, 그리고 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의 참전기를 통해 전황이 가장 격렬했던 1950년 마지막 몇 개월의 최전선 상황이 생생하다. 특히 불과 1주일 전에 출발 명령을 받아 무기나 보급품도 제대로 없는 상태로 파병된 영국군의 부산 방어선 전투와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작전 수행 등 극적인 순간들이 소개된다. 박실 전 의원이 쓴 ‘6·25전쟁과 중공군’(청미디어 펴냄)은 1990년대 이후 풀리기 시작한 공산권 공문서·자료를 통해 전쟁 시기 중공군의 움직임을 집중 추적했다. 북한 인민군의 주력이 된 팔로군의 조선인들, 전쟁을 앞두고 김일성이 40여 차례나 스탈린을 조른 이야기, 마오쩌둥의 아들까지 참전한 배경, 마오쩌둥의 지구전 방침, 38선 경계를 둘러싼 줄다리기 과정이 실감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미·일 新밀월] 위안부 사진 든 김종훈 백악관 앞서 1인 시위

    [미·일 新밀월] 위안부 사진 든 김종훈 백악관 앞서 1인 시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4시간 동안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공식 방문에 준하는 환영식을 시작으로 1시간 30분에 걸친 정상회담, 1시간가량 진행된 공동 기자회견까지 시종 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신(新)밀월 관계를 과시했다. 환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 바이든 부통령과 존 케리 국무장관 주재로 국무부에서 오찬회가 열렸으며, 저녁에는 백악관에서 국빈 방문에 준하는 만찬회가 열려 미·일 고위급들이 총출동했다. 아베 총리가 백악관에 머무르는 동안 백악관과 의회 건물 인근에서는 아베 총리의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새누리당 김종훈 의원은 백악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여 눈길을 끌었다. 새누리당 국제위원장인 김 의원은 위안부 피해자 및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사진이 붙은 플래카드와 아베 총리가 2013년 5월 일본의 생체실험 부대인 731부대를 연상케 하는 731 편명의 전투기 조종석에 앉아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찍은 기념사진이 담긴 플래카드 2개를 내걸고 아베 총리의 왜곡된 역사관을 비판했다. 의사당 앞에서는 “아베 총리는 사과하라”는 푯말을 든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87) 할머니와 한인단체 관계자 수백 명이 시위를 벌였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성난 中… 다시 대일 비난전 열 올려

    중국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간 만남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제의 침략 역사를 공격하는 대일 비난전에 다시 열을 올리고 있다. 17일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201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앞두고 일제가 포로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 유적을 4A급 관광지로 격상했다. 중국의 국가공인 관광지는 가장 낮은 ‘A급’부터 최고 등급인 ‘AAAAA급’까지 5단계로 나뉜다. 중국은 지난 14일 난징(南京)시 일대 중학교를 시작으로 일제가 30만 중국인을 사살한 난징대학살의 참상을 담은 교재를 배포하고 관련 수업을 본격화한 사실도 공개했다. 중국은 이 같은 대일 공세를 일본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관영 언론들은 지난 13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양국 정상회담에 앞서 두 나라가 합의한 ‘관계 개선 4대 원칙’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없다며 “센카쿠열도에 영유권 분쟁이 없다”는 기존 입장을 확인한 것을 연일 비판하고 있다. 인민일보 해외판은 전날 일본이 ‘4대 원칙’을 정상회담에 이용했다며 말을 바꾼 것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한편 신화통신 등이 아베 총리 방중(10일) 직후인 지난 14∼15일 네티즌 20만명을 대상으로 일본에 대한 국민 감정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3%가 “매우 싫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731부대 A급 전범에 서훈…물검증 정부 포상

    우리 정부가 과거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 관련자와 A급 전범에게도 포상을 수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인재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15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970년 이후 복지부가 추천해 정부 포상을 받은 일본인 15명 가운데 3명이 A급 전범 또는 731부대 관련자였고, 2명은 전쟁범죄를 미화하는 등 수훈 이후 행적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포상 업무지침에는 ‘평판과 주변 여론을 철저히 검증해 부적격자가 추천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1973년 한센병 환자 치료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목련장(4등급)을 받은 가토 가쓰야, 1976년 수교훈장 광화장(1등급)을 받은 사사가와 료이치는 A급 전범 용의자이자 731부대 관련자로 밝혀졌다. 197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을 받은 다케미 다로 역시 731부대 관련자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가 극비리에 진행한 원자폭탄 개발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밖에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지낸 나카지마 히로시는 1981년 수교훈장 흥인장(2등급)을 받은 이후 러시아에서 고가의 문화재 6점을 밀반출하려다 적발되는가 하면, WHO 사무총장 재선 과정에서 금권선거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198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하라다 겐은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촉구한 인물이다. 인 의원은 “이들에 대한 서훈을 당장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서울광장]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진경호 논설위원

    역사는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임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모든 전쟁이 그렇고, 피를 보든 안 보든 대개의 범죄 또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고 말한다. 28사단 포병연대의 어느 꿈 많은 청년과 마음 둘 곳 잃은 김해의 한 소녀에게 가해진 잔혹극은 그래서, 아우슈비츠 형무소와 일본 관동군 731부대에서 벌어진 참상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충격과 별개로 인간에게 늑대인 인간들의 세상에 어제도 살았고 내일도 살도록 주어진 현실을 새삼 일깨워 주기에 더 끔찍하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학살범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건 악의 평범함이었다. 유대인 학살의 중심에 섰던 그는 악마가 아니었다. 저주스러울 만큼 평범했다. 체제에 순응했을 뿐이고, 그걸 충성이라 여겼을 뿐이다. 링거주사를 맞혀 가며 윤 일병을 때리고 또 때린 이 병장과 그 무리들도 빈도와 강도만 더 했을 뿐 여느 내무반의 고참들과 다를 바 없음을 지금 봇물 터진 듯 구타와 학대의 온갖 양태를 쏟아내는 곳곳의 증언들이 말해준다. 선임들에게 이유 없이 당했기에 후임들에게 이유 없이 갚았을 뿐이다. 그 가학의 대물림에 일말의 망설임은 설 땅이 없다. 조금만 허점이 보여도 떼로 달려들어 굴종을 강요하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들과, 그와 잠시 맞서다가도 시나브로 곁에 서고 마는 ‘한병태’들이 있을 뿐이다. 군 입대 전 이미 수년 동안 학교 교실에서 ‘빵셔틀’과 같은 지배와 굴종의 권력게임을 몸에 익히고 인터넷 게임을 통해 폭력에 무뎌진 그들, 우리의 아이들이다. 고립된 병영 막사, 그 밀폐된 공간에서 선임과 후임은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치환되고, 가학과 피학의 살 떨리는 장면들을 연출해 냈다. 불과 엿새 만에 성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극도의 학대극으로 끝난 1971년 미국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을 물로 희석해 전국으로 흩어놓은 것이 지금 우리의 병영이라 한다면 지나친 과장임은 분명할지언정 그 속에 담긴 일방적 위계질서가 만들어내는 평범한 악의 본질만큼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돌아보면 윤 일병의 맞아죽음은 세월호 참사와도 뿌리가 닿아 있다. 이유 없는 죽음들 뒤에 악다구니 세상이 펼쳐져 있다. 아렌트는 악의 뿌리로 ‘사유의 결핍’을 꼽았다. 인간이 악해서 악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생각하고 반성하길 거부하기에 악한 행동을 한다고 봤다. 분명 반성하지 않는 우리, 싸울 만큼 싸워 그 어떤 고통과 비극에도 무뎌진 무감각한 이 시대 우리가 이 잔혹사 뒤에 서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며 치를 떠는 과장과, 윤 일병이 맞아 죽은 부대를 찾아 미소 띤 얼굴로 찍은 단체사진에 담긴 위선과,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이며 희생자 가족들의 울부짖음은 시체장사라는 몰인간성이 뒤섞인 공감 불능의 정치가 그 바탕일 수도 있다. 이념과 진영 논리에 갇힌 채 정치 갈등의 선봉에 서서 적의(敵意)와 증오의 기운을 퍼뜨리기 바쁜 언론도 빠뜨릴 수 없다. 오직 부의 축적만이 유일 가치인 탐욕의 자본시장과, 그에 빌붙어 알량한 권력을 편법과 비리로 바꿔치기하는 썩은 관료집단과, 깊이 있는 성찰과 학자적 양심은 제쳐둔 채 대중 입맛에 맞는 몇 마디 교언만 늘어놓고 뒤로 빠지는 비겁한 지식인 집단도 사회적 각성을 마비시킨 기제로 손색이 없다. 윤 일병의 주검 앞에서 펼쳐지는 새삼스러운 호들갑으로 이제 병사들은 휴대전화를 손에 쥘 수도 있겠다. 군 인권법이 만들어지고, 병영 감시의 눈도 늘어날 모양이다. 눈치 없는 야당 의원 말처럼 한동안 군부모들이 발 뻗고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잠시뿐이란 걸 우린 지난 시절로 안다. 답을 구한다면 더 멀리 가야 한다. 증오와 저주, 그리고 그 위로 자란 폭력에 대한 집단적 불감을 털어내지 않는 한 제아무리 아이들 인성교육을 강화한들 데자뷔는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것이다. 어느 해보다 많은 눈물이 뿌려진 이 낮은 땅에 교황이 온다. 더 많이, 더 뜨겁게 울어야 할 시간이 온다. jade@seoul.co.kr
  • [열린세상] 백척간두에 선 한국의 운명/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열린세상] 백척간두에 선 한국의 운명/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한국의 운명에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마침내 일본 아베 정부는 지난 1일 총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전쟁에 뛰어들 수 있다는 헌법 해석 변경을 의결했다.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만 하는 안보원칙을 폐기하고, 총리의 뜻에 따라 무력행사를 하겠다는 군국주의의 명백한 부활이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전쟁할 수 없는 나라였다. 지난 69년간 일본 지배계급은 절대주의 천황제국가를 염원하며 전쟁금지를 규정한 평화헌법 개정을 노려왔다. 사실상 일본은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추구하는 천황제국가다. 팔굉일우는 팔방의 넓은 세계를 일본이라는 하나의 집 아래 천황이 지배하겠다고 하는 침략이데올로기다. 밀접한 타국이 공격을 받아 일본의 존립에 위협이 된다고 총리가 판단하면 전쟁을 하겠다는데 그 1순위는 당연히 남북한이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굳이 들출 필요도 없다. 만약 남북한에서 유사사태(전시상황)가 발생하면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의 요구로 일본군은 한반도에 출격할 것이다. 미국 국무부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오바마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고자 일본이 동북아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해주길 바라고 있다. 일본극우파들은 오랜 경기침체와 중산층 붕괴, 지진과 원전사고 등으로 야기된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을 쇼비니즘으로 결집해 왔다. 이런 극우적 사고가 일본 시민사회 저변에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갑자기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위력적인 사건 전에는 반드시 전조가 있다. “당신네들은 우리 할머니들이 불쌍하다고 하지만 강간범, 범죄자로 몰린 우리 할아버지들이 불쌍하다.” 일본군 성노예에 대해 한 시민단체 대표가 한 말이다. 더 무서운 전조는 우리 내부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인정에 대해 별다른 대책이 없다. 오히려 그 의미를 축소하려고만 한다. 19세기 말 한·중·일의 역사가 지금 우리 앞에 다시 서 있는 셈이다. 역사의 복수를 피하려면 누구를 위한 한국인가를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사 연구의 권위자인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는 역작 ‘역경의 행운’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개인으로서의 일본인은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고 공중도덕을 잘 지킨다. 가정교육의 모토는 남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이 국가를 의식할 때는 이와 판이한 행동을 한다. 기습공격을 잘하는 것이 그 일례일 것이다.” 최재석 교수는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노일전쟁, 1910년 한국 강제 점령, 1937년 중국 침략, 1941년 태평양전쟁, 일본군의 소위 ‘위안부’, 731부대 등을 그 예로 들었다. 2012년 9월 일본의 양심세력이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한 바 있다. “현재 영토 갈등은 근대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했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기억하자는 호소다. 역사는 한 공동체가 경험한 집단기억이다. 기억에서 지워진 역사는 수레바퀴의 축처럼 다시 돌아온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칙을 넘어서서 지극한 충성의 대상인 천황을 정점으로 한 신분적 상하관계를 절대시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일본을 얽어매는 치명적인 족쇄다.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겪은 일본인들은 두려움에 떨며 아직도 무거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역사의 질곡은 민초들이 온전히 떠안게 마련이다. 한·중·일 모두 백척간두에 서 있다. 누구를 위한 일본인가, 누구를 위한 중국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한국의 운명은 중국과 일본의 운명과 따로 있지 않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자는 그 바퀴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 결국 세계 각국 민초들의 몫이다. 특히 한국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한국인 그 누구도 한국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세상 만물이 변하듯이 운명도 변한다. 주어진 명이 움직이기에 운명이다. 역사에 감춰진 운명의 비밀이 있다.
  • “日帝, 9년간 6500여명을 산 채로 해부”

    지난 달 29일 독일 베를린의 쾨르버 재단본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30만명 이상을 학살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지난달 초 중국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에선 중국 헤이룽장성에 남아 있는 일제 ‘731부대’의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다. 일제의 만행과 731부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731부대가 생산한 살상용 세균 탓에 중국인 20만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는 게 중국 정부의 주장이다. 정일성 전 서울신문 편집부국장은 ‘책과 인생’ 4월호에 기고한 ‘731부대의 인체실험 면죄 내막’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적시했다. 저자는 쓰네이시 게이치의 ‘사라진 세균전부대 관동군 제731부대’ 등 저작물과 그간 공표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731부대가 히로히토 일본왕의 칙령으로 1932년 창설됐으며, 반인륜적 생체실험이 종전 이후 도쿄전범재판소에 기소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소련과의 군비경쟁에 나선 미국이 세균전 자료 등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은밀한 뒷거래를 벌인 탓이라는 것이다. 헤이룽장성 하얼빈 동남쪽 베이인허에 ‘관동군방역반’이란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연 부대는 패전 직전 1000개가 넘는 사람의 머리·팔·내장 표본을 인근 송화강에 갖다버리고 50명가량의 살아있는 인체실험자를 파묻는 방법으로 교묘히 은폐에 나섰다. 애초 연구소가 아닌 제재소를 짓는다는 소문을 내 인체실험자는 통나무를 뜻하는 ‘마루타’로 불렸다. 교토제국대 의학부를 수석 졸업한 세균전문의 이시이 시로가 총책임자로 히로히토의 막내동생도 이 부대의 장교로 복무했다고 한다. 부대 규모는 군인 1200여명 등 한때 3560명까지 늘었고, 300~4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실험실을 갖췄다. “날마다 2~3명, 많게는 5명을 산 채로 해부했다”는 증언에 따라 9년간 희생자는 6500명으로 추정된다. 희생자 명단에는 이청천, 심득룡, 이기수, 고창률 등 독립운동가로 보이는 조선인 희생자의 이름도 담겨 있다. 저자는 “인체실험 기록을 미국에 넘겨주고 면죄부를 받은 가해자들은 의대와 국립연구소, 병원, 제약회사에서 전후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우뚝 섰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열린세상] 국제 사회는 일본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열린세상] 국제 사회는 일본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나보다 연배가 한참이나 높은 유명한 일본 교수와 이야기하던 중 그 교수가 한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일본이 조금 더 잘해야겠지만, 한국이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아서 일본에 대해 좀 열등감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을 대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해서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일본 교수가 최근 일본 아베 정부가 내놓은 발언들을 본다면 어떻게 말할지 아주 궁금하기 이를 데 없다. 오랜 경제 침체와 부상하는 한국과 중국의 기세에 눌린 일본 정부와 국민들이 열등감을 느껴서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을 내놓고 있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일본 경제는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0~50대 이상은 1980년대까지 고도성장을 하면서 심지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일본의 위세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20년도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일본 경제는 심각한 불황을 겪었고 한국과 중국의 기업들 중에는 일본을 뛰어넘는 기업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어찌 보면 일본인들로서는 너무도 답답하고 한탄스러운 기분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이런 사회 불만 세력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의 극우 세력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일본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된다. 미국은 현재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방비 지출을 감축하자는 미국 내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경제적·군사적으로 성장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이를 견제할 필요성은 반대로 커지고 있다. 이렇게 동아시아의 군사력 배치를 늘리고 싶지만, 그 비용을 충당하기가 어려운 미국으로서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이용하자는 생각이 당연히 들 것이다. 일본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며 기술적으로도 첨단 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능력을 당연히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은 자신의 군사력이 아닌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하여 방어를 하고 있는데, 만일 일본이 군사력을 키워 미국과 힘을 합쳐 중국의 팽창에 대응하게 된다면 미국으로서는 비용의 증가 없이 중국을 아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을 얻게 된다. 따라서 일본의 군사력 증대는 미국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매력적인 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미국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명백히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일본이 군사력을 갖게 되면 미국의 생각대로 동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하는 행동을 할지에 대해 주변국들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군사력을 늘린다면 당연히 중국은 이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더욱 증강할 것이다. 더 문제는 일본을 신뢰할 수 없는 한국의 입장에서도 일본의 군사력 증가에 상응하는 수준의 군사력 증가를 국민들이 요구할 수밖에 없으며 이런 현상은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감만 높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문제들의 한가운데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이에 대해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위안부, 731부대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인권 유린을 자행한 일본이 이에 대해 사과는커녕 현재의 아베 정부에서는 이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정당화하고 있으니 이런 일본에 군사력을 허용해 동아시아의 평화 유지에 일익을 담당케 한다는 생각은 아주 심각하게 잘못된 판단일 수 있다. 야스쿠니 참배에서부터 시작된 아베 정부의 비상식적 행동을 통해 국제사회, 특히 미국 정부와 국민들이 이런 일본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정말로 다행한 일이다. 우리 정부와 국민들도 국제사회에 일본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는 한편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씨줄날줄] 생체실험 박사 논문/최광숙 논설위원

    나치의 의사 요제프 멩겔레는 ‘죽음의 천사’로 불린다. 독일 친위대 대위이자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 내과 의사이던 그는 끔찍한 인간 생체실험들을 자행했다. 쌍둥이를 하나로 꿰매 샴쌍둥이로 만들고, 푸른 눈을 만든다며 어린 아이의 눈에 화학약품을 넣었다. 아이의 생식기 교체와 마취 없이 간 꺼내기 등 그의 생체실험은 엽기 그 자체였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도 멩겔레 못지않은 ‘냉혈 의사’가 있었다.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731부대’ 책임자 이시이 시로다. 교토제국대 의과를 졸업한 의사인 그가 지휘한 731부대에서는 포로로 잡힌 중국군, 우리 독립투사, 여성과 어린이 등 모두 1만여명을 생체실험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균전에 대비해 페스트균과 탄저균 등을 주입한 음식과 물을 포로수용소의 사람들에게 먹였다. 거리의 아이들에게도 콜레라균이 묻은 사탕을 나눠주기도 했다. 산 채로 사람의 피부를 벗겨 내기도 했고, 성병 연구를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강제로 매독·임질균을 감염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동상실험을 한다며 중국인을 발가벗겨 물벼락을 내린 뒤 추위에 저녁 내내 방치하기도 했다. 최근 일본 교토대와 규슈제국대, 심지어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 의학부에서 731부대 관계자 수십여명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이 생체실험을 바탕으로 쓴 논문은 일본 국회도서관에 극비 문서로 대량 보관돼 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된 23명의 전범 중 20명이 의사였다. 하지만 마루타 실험에 나섰던 일본 의사들은 오히려 전후 의학계, 학계에서 유명인사로 출세했다. 독일과 달리 일본은 전쟁의학 범죄에 대한 단죄는커녕 오히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역사의 역주행을 일삼고 있다. 731부대원들이 생체실험도 모자라 이를 바탕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실은 일본의 니시야마 가쓰오 시가대 의대 명예교수에 의해 이번에 처음 드러났다. 그가 용기 있게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은 영원히 묻혔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몰역사인식을 비난하기에 앞서 과연 일제 강점기를 비롯한 과거사 연구에 우리는 얼마나 매달리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일본과의 ‘역사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일제 강점기 전문가를 비롯한 일본 전문가들을 긴 안목을 갖고 길러내야 한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면 일본 내의 양식 있는 지식인들과 연대해서라도 과거의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해야 일본의 억지 논리에 실증적으로 반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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