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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인 양승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18)

    ◎죽파의 가야금산조 득음 “외길 인생”/혹독한 수련 견디며 「명인」 향한 일념 불태워/뉴욕 독주회땐 “동양의 신의 경지” 격찬받아/세계 명대학에 한국학과설치 위한 모금연주 등 활동 활발 가볍게 튕기고 힘차게 엮는 줄은 가락마다 깊은 시름,희비가 엇갈려 가슴속에 묻어둔 사연을 한없이 풀어낸다.길어도 길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옥수 어느 때는 성긴 빗방울에 오동잎 스치듯,일렁이는 파도에 하늘이 소스라치듯 성난 폭우에 수면이 갈라지고 뇌성이 번뜩인다.활짝 핀 꽃송이가 삽시에 저버리는 아픔을 안으로 삭이는 절제미,청정과 청쾌가 선명한 양승희의 가야금 산조를 듣고있노라면 문득 연전에 돌아간 죽파의 운율이 되살아난다. 명인의 길에 오르기엔 젊고 눈부신 나이,화사하고 여린 용모,그러나 무대에서의 능란하고 당당한 연주솜씨는 당대 명인을 계승한 후계자다운 풍모다. 경건함 중에도 정한의 기개가 감돌고 줄을 타는 손끝에서 처절과 애련이 여울져 스승을 잃고 홀로서기까지의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절감케 한다. 양승희는 스승인 죽파 가야금산조 하나에 그의 전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산조 일인자를 꿈꾸며 오로지 이 한길을 위해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초를 스스로 감내해왔다.자신이 걸어온 가시밭길을 새삼 돌이켜볼 여유는 없다.다만 그것이 지금보다 더 험난하고 가파르다해도 미동도 지체도 할 수 없는 위치다.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길 이전에 「죽파 가야금 산조의 가문」을 이어갈 공인이며 예인의 사명감이 있을 뿐이다. 죽파 김란초는 가야금 산조 창시자의 한사람인 김창조(1865∼1920)의 친손녀로 그는 조부의 산조에다 단몰이(세산조시)를 창작해넣어 독자적인 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성립,국내외에 1백여명이 넘는 제자를 두고있었으나 양승희를 후계자로 삼아 바로 이 산조를 계승시키고 있었다. 양승희는 스승으로서의 죽파의 삶을 전적으로 맡아 극진히 모셨을 뿐만 아니라 죽파의 모든것,예술혼과 예술성,인간의 도리와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분신과도 같은 인연이다. ○곡해석·연주력 출중또 「뛰어난 곡해석과 연주력,끈질긴 노력과 집념,죽파가야금산조를 잇는데 최선을 다하는 지속적인 마음가짐은 누구에게도 비견될 수 없는 비범등이 후계자로 지목된 이유의 하나라는 것이 국립국악원 이승렬원장의 지적이다. 스승댁에 머물면서도 새벽에 눈뜨자 연습,장고에 맞춰 다시 한번,그리고 스승과 맞춰보고 학교에 다녀와서 한바탕 연습,단 한번도 스승을 거스르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교수」보다는 「연주가」이기를 원하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국악의 세계무대 진출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황병기 나인용 백병동등 국내작곡가들의 창작곡을 받아 초연으로 기량을 확대시켜 나가기도 했다.국악인으로서는 드물게 시립국악관현악단·시향·KBS교향악단과의 대연주회 협연,1년에 수십차례의 해외연주 활동등은 죽파로 하여금 어느 자리에서나 제자를 마음껏 자랑삼을 수 있게 해주었다.특히 85년 뉴욕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가진 독주회 평과 사진이 실린 워싱턴 포스트지를 보고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그때 미국의 저명 음악평론가인 마리온 자콥슨은 양승희의 가야금연주를 「볼쇼이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의 솔로를 보는 듯한 황홀감」에 비유,「55분동안의 연주는 꼼짝없이 청중을 사로잡아 마치 동양의 선의 경지를 경험케 했다」고 쓰고 있다. 89년 79세의 나이로 스승이 몸져 눕게되자 양승희는 고려병원에 모시고는 꼬박 3개월을 그의 곁을 지키면서 스승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려면 「몸이부어 손가락자국이 깊이 남는다」고 안타까워 했고 이를 지켜본 국악계의 김소희씨며 박귀희씨는 『형님은 훌륭한 제자를 두셔서 돌아가셔도 여한이 없겠다』고 부러워 했었다. 같은해 9월17일 임종하기 직전에 죽파는 양승희부부를 불러 유산정리와 함께 자신의 장례를 부탁했다.스승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양승희는 당연히 상주가 되어 장례기간의 상례지휘는 물론 삼우제와 사십구제,소상제와 대상제,91년에는 고인을 위한 추모음악회를 여는등 스승과 가까웠던 국악계의 원로들을 참여시킨 무대를 마련하여 「난죽같은 사제의 정」을 변함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양승희는 본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그러나 국민학교 3학년때 정치를 하는 부친을 따라 집안이 모두 강원도 원주로 이사.피아노와 무용을 배우다가 한 미국선교사의 권유로 원주여고 2학년 되던해 가야금을 시작했다. 서울을 오가며 서울대 김정자교수에게 가야금을 사사,처음부터 가야금의 가락이 마음속에 파고들어 타고난듯 악기에 밀착되는 감이었다. 대학교 2학년인 70년 4월 역시 김정자교수의 소개로 사직동에 있는 죽파문하에 입문,그때부터 만19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고2때 가야금 시작 유난히 청각이 예민한 스승은 한올의 음정차이도 족집게로 집어내듯 가혹하게 교육시켰다.하루 6시간에서 7시간,어느때는 10시간을 해내야만 비로소 만족하는 듯 했다.마음에 들지않으면 노안에 광채를 번뜩이며 가차없이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는 사이 오랫동안 교제해온 부군 노만균씨와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3년후인 76년에야 뒤늦게 결혼해야 했다. 「결혼하면 가야금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스승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으나 「결혼후에도 가야금 계속은 물론 예술가의 길을 걷는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시댁측의 다짐을 받고나서야 안심하는 빛이었다.혈육이 없던 그는 친딸같은 양승희에게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옥가락지를 물려주면서 「부디 가야금 가문의 대를 이어줄 것」을 두번 세번 당부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7년간의 혹독한 피나는 훈련과 수련에도 득음하지 못한 제자를 몹시 나무라는 눈빛에 양승희는 결혼 1년만에,낳은지 백일도 안된 아들을 시어머니(송재임여사)에게 맡기고 다시 스승의 문하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여자로서의 행복을 추구했다면 그는 그때 가야금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어린 자식을 떼어놔야 하는 마음은 문자 그대로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부군은 고대와 프랑스유학후 국립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시댁은 훌륭한 가문과 가풍으로 양승희는 얼마든지 풍족한 환경에서 아마도 안락을 누릴 수도 있었다.그러나 남편과 시어머니가 죽파와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오히려 「예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박사과정까지 서둘러주었다. ○지난의 수련과정 겪어가야금은 악기를 다루거나 기교를 가르치는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말과 마음으로 전하는 구전심수만이 참다운 예도였다.그해 6개월 다음해 다시 6개월,80년에는 9개월간이나 스승곁에서 성음을 얻기위한 피나는 훈련을 쌓아야 했다. 「학이 살포시 나무가지에 내려앉듯 햇빛 찬란한 해변에 잔물결 반짝이듯 용이 승천하는 힘찬 기운과 동시에 사방이 잠잠하여 침묵하듯 연주하라」는 것이 스승의 연주 지침이었다.차차 국악계의 원로들로부터 「죽파 전성기때의 소리가 난다」는 칭찬과 「매운 손끝에 만만찮은 도전적인 개척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그럴수록 그는 혼신의 힘으로 가야금에 매달렸다.이는 판소리에서의 폭포수같은 성음을 위한 폭포독공백일수련에 못지않은 지란의 과정이었다. 죽파의 총애와 편애로 동료들의 질시와 따돌림이 따랐으나 스승은 그때마다 「높이 나는 새는 눈에 띄는 법,어중간히 날면 백발백중 돌에 맞기 쉽지만 힘찬 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된다」고 감싸주었다.그리고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 그의 나이가 다했음을 애석하게 여겼다.커다란 회오리가 지나간듯 어쨌든 지난 세월속의 시련은 그에게 인간적인 성숙을 주었다. 그는 세계 각 유명대학에 한국학과 설치를 위한 기금모금 연주등 91년에 10여차례,지난해 20여차례,올해도 연초와 2월까지 유럽지역 순회와 터키연주등 연말까지 해외연주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있다.물론 그에게 남겨진 가장 큰 과제는 죽파기념관을 세우는 일,전수생들을 위한 연주무대 마련,이에 앞서 스승의 이야기를 창극으로만들기 위해 극본과 음악을 작가와 작곡가에게 의뢰해놓고 있다.그리고 이 모든 진행은 시댁과 남편의 따뜻한 보살핌이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다. 진양조에서 중몰이 중중몰이에서 자진몰이 휘몰이 단몰이 장단배열을 갖는 죽파산조를 한바탕 타고나면 인생살이 희로애락이 한낱 물거품이라던 스승의 말이 불현듯 새삼스럽다.원형리정,이제 사계의 순리처럼 자연스러운 산조가락의 하나하나가 그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그 자신이 바로 가야금이 되어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마음으로 음조를 울리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산조미의 극치에 이르고 싶은 것이 오직 절실한 그의 기원이다. □연보 ▲1948년 6월 서울출생,양주창씨(92년작고)와 박정옥여사의 2남4녀중 장녀 ▲58년 집안이 원주로 이사 ▲73년 서울대 음대 국락과졸업 ▲75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86년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예술철학박사학위) ▲75년∼93년2월 서울대 국악과강사 ▲76∼80년 동덕여대·목원대·성심여사대강사,이대·중앙대출강,한국가야금연주단단장,중요무형문화재23호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이수자,준인간문화재 죽파 김란초를 비롯,이창규 황병기 이재숙 김정자 사사 ▲71년 서울대 음대 정기연주회 「죽파류 가야금 산조」독주 데뷔 ▲75년 서울국립국악원주최 신인음악회협연(이성천지휘) ▲77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극장소극장) ▲79년 가야금 독주회(세종문화회관)·제1회 유네스코주최 2인음악회(가야금 양승희,거문고 김선한) ▲80년 가야금 독주회(공간사랑)죽파류 55분 가야금 산조 ▲82년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지휘 발터 길레센) ▲83년 무형문화재 예술단 창단 1주년기념 특별연주 ▲85년 대한민국음악제 KBS교향악단 협연(지휘 홍연택) ▲85년 미뉴욕 카네기 리사이틀홀 독주,자유중국·일본 독주회 ▲86년 자유중국 NewAspect 초청 국제예술제 국제 고쟁 명가대회참가 ▲88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국악원 국악당) ▲89년 서울시향 범세대연주회(세종문화회관) ▲89년 KBS국악대상 축하공연외 해외연주8회 ▲90년 백두산 제천대회,가야금독주회(예음홀)해외연주 7회 ▲91년 KBS 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 해외연주 10여회 ▲91년 고 죽파 김난초선생 추모음악회주관(국립영화제작소 영화제작)등 해외연주 20여회 ▲92년 미 조지워싱턴대 초청연주 ▲92년 대한민국음악제 연변 김진교수와 남북한 가야금 비교연주등 해외연주 20여회 ▲93년 우즈베크스탄 공화국대 한국학과 설립기금모금외 유럽지역 연주 황병기 작곡 「비단길」「영목」 「밤의소리」「남도소리」 관현악곡 「7현을 위한 새봄」편곡 「Amaging Grace」나인용작곡「가야금 협주곡 도약」「용」「영상」이강덕작곡 「가야금 협주곡Ⅴ」정윤주작곡 「황병기주제에 의한 가야금 콘체르토」백병동작곡 「환명」 제1회 KBS 국락대상,중요무형문화재 예술상 공로상,KBS FM 명인 CD 출반
  • 3월 주가/경기부양책 강도가 변수/주요증권사 전망을 들어보면

    ◎실명제 발표땐 일시적 증시위축 초래/외국자금 지속유입 등 투자환경 유리 김영삼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떨어지기 시작한 주가가 3월에는 어떻게 될까. 김영삼대통령의 취임식날 주가는 6공1기의 마지막날보다 17.2포인트나 떨어졌다.그러나 대통령취임식날의 주가가 떨어진 것은 놀랄만한 사건은 아니었다.노태우전대통령의 취임식 다음날인 지난 88년2월26일의 주가는 5공 마지막날보다 무려 21.69포인트나 폭락하는등 대통령 취임직후의 주가가 떨어진 「전통」은 이미 지난 73년의 8대대통령 취임이후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8대이후 계속 하락 지난달 25일이후 주가는 연3일째 내림세를 보이며 29.9포인트나 떨어졌다.새정부 출범이후 주가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금융실명제를 비롯한 개혁조치를 할 것으로 알려져 투자심리가 위축됐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적지않다.새정부의 금융실명제 조기추진설로 큰 손들이 주식시장을 빠져나가고 있으며 부정부패 추방을 위한 개혁조치와 사정한파로 큰 손들의 거금을 비롯한 구린돈이 빠져나가고 있어 주가가 떨어지고 있다는 의견이다. 물론 최근 주가가 약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새정부의 개혁조치에 지레 겁 먹은 투자자들의 심리가 위축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그러나 최근 주식시장이 약세를 보이고 있는 주요인은 지난해의 8·24증시안정화조치후 주가가 급등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8·24조치직전인 지난해 8월21일의 주가는 4백59.07로 6공 최저였으나 지난 1월9일의 주가는 7백9.77로 4개월여만에 54.7%나 폭등했었다. 새정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강세로 출발한 올해의 주가가 경기회복도 눈에 띄지 않는데다 새로운 재료가 없는 가운데 미국의 통상압력까지 겹쳐 조정을 받을 시점에서 금융실명제라는 악재를 만나 조정이 길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보다 설득력을 갖고 있다. ○예탁금 투신사 이동 고객예탁금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도 금융실명제추진설때문보다는 지난 1·26공금리인하조치로 수익률이 높은 투신사사의 공사채형 상품쪽으로 몰리고 있다는 분석이다.고객예탁금은 지난 1월26일에는 2조6천2백83억원이었으나 지난달 25일에는 2조2천6백36억원으로 줄었으나 이 기간동안 3대투신의 공사채형상품의 저축고는 2조1천1백44억원이나 늘었다. 따라서 이달의 주가는 이번주에 발표될 예정인 정부의 경기활성화대책의 강도와 금융실명제의 구체적인 계획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정부가 금리인하,행정규제완화를 비롯한 기업의 투자를 끌어들일 정책,특히 중소기업의 활성화에 초점을 둔 정책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때문에 내용에 따라서는 주식시장이 활기를 보일 가능성도 있다. 대우 럭키 쌍용 고려 동양증권등 주요증권사들은 금융실명제의 악영향이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80년대초의 장영자사건이후 그동안 2∼3차례 금융실명제의 실시가 검토된 적이 있어 국민들사이에는 금융실명제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있기때문에 충격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지난 82년7월3일 금융실명제를 83년7월1일부터 실시한다는 발표에따라 주가는 이틀간 6%가 폭락했었다. 또 과거와는 달리 토지공개념등 부동산투기에 대한 제도적 억제장치가 있고 토지거래자체가 실명이어서 자금이 부동산투기로 몰릴 가능성은 적다.시중금리도 하향안정세를 보이는등 마땅한 투자대상이 없어 지하로 들어갈 가능성도 적다는 분석이며 다만 만기가 5년이상인 무기명의 채권쪽으로 갈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 일정기간 주식시장은 거액자금의 이탈에다 위장분산된 대주주의 물량이 쏟아질 가능성도 있다.그러나 고려종합경제연구소는 외국인의 자금이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거액자금 이탈은 외국인 자금으로 보충할 수 있어 장기적으로는 자금흐름의 정상화에 따른 경제효율성의 향상으로 이어져 오히려 투자환경이 유리해질 수도 있다는 전망을 했다. 또 한진투자증권은 금융실명제가 3단계로 나누어 1단계에서는 은행및 제2금융권의 예금에 대해 실시하고 2단계에서 주식에 대한 금융실명제가 이루어지면 오히려 1단계실시후 사채자금이 차,가명의 계좌로 주식시장에 유입될 가능성도 큰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결산매물 쏟아질듯 그렇다고 해서 이달의 주가전망이 낙관적인 것만은아니다.주식투자자의 심리가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금융실명제는 최대의 악재임에 틀림없다.또 지난달부터 경기가 다소 호전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회복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없는것도 부담스럽다.3월 결산법인인 투신 증권등 기관투자자들이 결산을 앞두고 매물을 쏟아낼 가능성이 많은것도 주가에는 부정적인 요인이다. 그동안 새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위해 물가안정과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었다는 사실에 국민들과 증권관계자들은 3월의 주가를 기대하고 있다.
  • 미/“탈세 없는 세리 없다” 실증(특파원코너)

    ◎작년 1천2백억불… 20년간 42배 증가/소규모 기업체 인정과세 악용/개인수표 결제수법으로 세포탈 세무당국의 철저한 사찰에도 불구하고 세제상의 허점을 이용,세금을 포탈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어 미국의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미국국세청(IRS)이 추산하는 연간 탈세액은 약 1천2백70억달러로,20년전인 73년의 세금포탈액 30억달러에 비하면 무려 42배나 증가한 액수다.그러나 경제연구소들이 최근 집계한 미국의 지하경제규모는 연간 약6천억달러로 이는 미전국기업활동의 약10%에 달한다.미국세청이 추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규모이다. 이중 약 3분의2가량은 매춘이나 마약거래등 불법경제활동에 의한 것이지만 3분의2가량은 정상기업활동을 하는 각 기업체들이 세무당국에 보고하는 세금액수를 줄이는 방법으로 포탈하는 세금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법무장관으로 지명한 두 여성후보들의 클린턴대통령에 의한 지명 철회나 자진사퇴의 경우도 따지고 보면 탈세와 관련된 것이었다.지하경제활동연구의 권위자인 위스콘신대의 블루스 위건교수는 『불법체류자를 가정부로 채용,그에 따른 사회보장세를 내지 않았음이 밝혀져 법무장관이 되지 못한 두 여성후보의 경우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금포탈이 공공연히 이뤄지는 대표적 업종은 식당의 웨이트리스를 비롯,농장의 인부들,건축공사장의 건설노동자들 등이며 최근엔 일부 의사들까지 이에 가세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사우스 캘리포니아주 일원에서는 봉제업 종사자들이나 업주들이 세금포탈의 대표적 케이스로 꼽히고 있는데 봉제업은 유태인들로부터 그 상권을 거의 빼앗아 로스앤젤레스 교민사회의 주종업종으로 돼있기도 하다. 식당의 웨이트리스들이나 건축공사장의 인부들에게 지급되는 팁이나 현금 급료의 상당 부분이 세무당국에 수입으로 보고되지 않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로 인정되다시피 하고 있다. 기업체들이 세금을 포탈하는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매출·입액수를 줄이거나 임금이나 물건구입 결제대금을 현금이나 회사수표가 아닌 개인수표로 지불함으로써 기업활동의 규모를 줄이는 방법들이다. 특히 급료의 현금지급은 고용주와 피고용자간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쉽사리 이뤄지고 있다.불법체류자가 피고용자의 대부분인 농장인부나 봉제업종사자의 경우 자신들의 신분노출이 두려워 아예 현금지불을 요청하는게 관례화 되다시피해 있는가 하면 불법체류자의 고용금지나 미국의 까다로운 각종 법규를 준수해가면서 기업의 채산을 맞추기란 어렵다는 고용주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세금포탈은 미국정부예산의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주고 정상기업활동을 하는 업체들에는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약화시켜 결국은 미국 전체 경제발전의 큰 저해요소가 되고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탈세행위는 대부분 소규모 업체들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인정과세를 근간으로 하는 현행 미국의 세금제도의 허점이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 “경기 단기부양책 수립 계획”/이경식부총리의 「경제정책」 제1성

    ◎불필요한 규제 철폐… 기업애로 해소/실명제 부작용적은 방법·시기 선택 이경식 신임경제기획원장관겸 부총리는 26일 『경제활력 회복에 초점을 맞춰 경제정책을 운용해 나가겠다』고 밝혔다.이부총리는 또 현재의 경기가 지나치게 침체됐다고 지적,단기부양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경기상황을 어떻게 보나. ▲잠재성장력을 7∼8%로 볼때 현재의 2%대는 너무 낮다.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적정성장률까지 끌어 올리겠다. ­경제활성화를 위해 제일먼저 할일은 무엇인가.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고 기업애로를 해소해가겠다.경제활성화라고 해서 돈을 마구 찍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금융실명제와 금융자율화에 대한 계획은. ▲금융실명제는 해야한다는 분위기인 것으로 알고 있다.그러나 국민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큰 일인만큼 부작용이 가장 적은 방법과 시기를 공부해서 실시할 계획이다.금융자율화도 국민경제에 그것이 필요한가 하지 않은가 차원에서 접근할 생각이다. ­제조업의 경쟁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어떤 처방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일하지 않는 분위기가 문제다.지금도 기업인과 근로자들이 마음먹고 일해준다면 현재보다 모든면에서 30%정도 더 향상시킬 수 있다.기술개발투자등은 그다음의 문제다.일하지 않는 상태에서 돈만 부어넣는다면 돈만 없어진다. ­재벌정책과 중소기업육성을 위한 대책은. ▲중소기업의 육성과 대기업의 발전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은 확대하겠지만 재벌도 재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첨단산업에 더많은 투자를 하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해 나가도록 하겠다. ­어려운 경제여건에서 대통령이 이부총리를 경제팀의 팀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잘모르겠다.다만 대통령은 정치논리에 얽매이지 말고 경제논리에 충실할 것과 경제활성화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다. ­국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우리경제가 쉬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71년,73년,79년,80년대 초 모두 대단한 불황이었다.대통령이 강조하고있는 고통의 분담노력이 필요하다.
  • 신대옥씨 주택은 목동지점장(맹렬여성)

    ◎“아파트가구 절반 고객으로 모실 계획” 『예상보다 5년이나 빨리 지점장에 올라 기쁘기도 하지만 저를 지켜보는 4천여명의 후배 여행원들을 생각하면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섭니다』 지난달 주택은행 목동지점에 부임한 신대옥지점장(42)의 소감이다. 국내 30여개 은행의 여행원이 18만명이나 되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영광을 짐작할 만하다.주택은행에는 3명의 여지점장이 있는데 신지점장은 그 중 한명이다. 『어릴때 꿈이었던 은행원이 된지 꼭20년만에 지점장에 오른 것은 여성권익의 신장과 함께 은행측의 배려가 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지난 73년 입행 이후 본점 외에도 도곡동·서초동·과천등지의 지점에서 10년간 실무경험을 쌓았고 장충동과 평창동출장소장을 거치며 관리능력을 인정받았다. 『출장소장 시절 남루한 차림의 70이 넘은 할머니가 복대에서 5천만원을 선뜻 맡길때 평소 고객을 편견없이 성실히 대해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고 밝히고 『과거 거래하던 분 중 지금도 3백명과 거래를 유지하며 가정일까지 상의하고 있다』며 고객관리 비결을 털어놓았다. 목동지점은 아파트단지 속에 있는데 1,2단지 1만여 가구중 차세대 주택종합통장의 가입률이 20%에 그친다며 앞으로 부녀회와 반상회에 참여하는등 호별방문을 통해 이를 5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사업계획을 밝혔다. 서민이 주택부금에 가입하면 다른 은행보다 쉽고 싸게 전세자금을 빌려주고,내집마련때 대출과 상담등 일체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점을 고객에게 뚜렷이 인식시키겠다며 의욕을 내보인다. 1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신씨는 일할 때 남녀 구별을 하지 않는다.『회식자리에서 소주를 함께 기울이면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다』며 오히려 남자행원들이 잘 따라준다고 자랑했다. 서울대 사대부고와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일을 좋아하다 보니 아직껏 미혼』이라며 활짝 웃는다.
  • 신·구대통령 임무교대하던날 주민 마음

    ◎“보내는 정­맞는 기쁨” 교차하는 아침/상도동 “꼬마동지” 이규희양/“국민과 가까이서 함께 호흡/용기 가지고 대통령직 수행해줬으면” 『국민과 언제나 가까이 있는 대통령이 돼 주세요』 상도동 「꼬마동지」 이규희양(23·동덕여대 산업디자인학과3년). 대통령 취임식을 하루 앞둔 24일 지난 20여년동안 때로는 친구로서 때로는 아저씨로서 김영삼차기대통령과 「우정」을 나눈 이양은 누구보다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73년 김차기대통령 집앞으로 이사올 당시 생후 20개월이었던 이양은 어엿한 대학생이 됐으며 「앞집아저씨」는 한 나라를 짊어질 대통령이 돼 한동안 헤어질 처지지만 두사람의 우정에는 변함이 없다. 두사람이 처음 만난 건 이양이 국민학교 3년때인 80년.당시 「서울의 봄」이후 가택연금생활로 집안 정원에서만 뜀박질을 하던 김차기대통령에게 집옥상에서 아버지와 함께 화초손질을 하던 이양이 『아저씬 왜 안에서만 뛰세요.더 넓은 밖에 나와서 뛰세요』라고 말을 건넨 게 인연이 됐다. 『언제나 편안하고 웃는 모습이 멋있는 아저씨로 제 기억에 남아있을 겁니다.부모님께 말씀드리기 쑥스러운 남자친구 얘기나 학교에서 혼난 얘기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정도로 저에겐 친한 친구이기도 했어요』 이양은 지난 20여년동안 「아저씨」와 나눴던 비밀얘기와 국교5년때부터 보낸 편지 5백여통을 묶어 지난 18일 「꼬마동지 대장동지」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친구보다 더 신의있는 사이를 「동지」라고 한다며 「아저씨」가 제게 붙인 별명이 「꼬마동지」였어요』 대통령보다는 「아저씨」라는 호칭에 익숙한 이양은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 개표완료직후 『5년뒤 대통령의 임기를 훌륭히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축하인사를 아껴두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철들면서 알게된 「아저씨」의 단식투쟁등 어려웠던 정치역정보다 어쩌면 앞으로의 5년이 더 힘들 것같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연금생활때 장남인 은철이 오빠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아저씨를 보고 무척 마음이 아팠어요』 이양은 그러나 20여년동안 한번도 김차기대통령의 약한 모습을 본 적이없다며 『많은 용기와 끈기,국민에 대한 믿음으로 대통령직을 훌륭히 수행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며 마음속으로 「아저씨,파이팅」을 외쳤다. ◎연희동 2통8반장 김동임씨/“반상회때 얼굴 보게돼 기뻐/소탈한 「보통이웃」 환영행사도 조촐” 25일 임기를 마치고 「보통사람」으로 되돌아오는 노태우대통령을 맞이할 서울 서대문구 연희1동 주민들의 마음은 사뭇 들떠있다. 정들었던 옛이웃을 5년만에 다시 만나는 주민들의 설레는 마음은 모두 같겠지만 유난히 마음이 들뜨고 일손이 바쁜 사람이 있다. 연희1동 108의17 노대통령의 사저 맞은편에 사는 2통8반 반장 김동▦씨(45·여). 『이곳으로 이사온 10여년전부터 청와대로 옮기기 전까지 한번도 반상회에 빠진 적이 없으셨는데 25일이 마침 이삿날과 반상회날이 겹쳐 이번 반상회에는 참석하기가 어려울 것같군요』 김씨는 25일 2통8반 19가구가 한달에 한번 한 집에서 돌아가며 모이기로 한 반상회가 자신의 집 차례인데다 혹시나 노대통령 내외가 모임에 나오실지도 몰라 여느때보다 신경을 쓰며 집안팎을 청소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노대통령 내외가 이곳으로 이사오기 8년전부터 반장을 맡아온 김씨는 노대통령이 장관을 거쳐 집권당 총재를 역임하면서도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던 소박한 인상을 떠올렸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주민들과 저녁식사나 축하모임을 가질때면 사소한 집안일이나 아이들 이야기로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나가셨지요』 김씨는 특히 『김옥숙여사는 청와대로 옮겨간 이후에도 주민들 자녀의 고·대입시에 꼬박꼬박 찹쌀떡을 보내준 꼼꼼하고 자상한 분』이라며 이웃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전두환전대통령을 포함,전직 대통령 2명을 이웃으로 두고 있어 자부심이 강하다는 김씨와 이곳 주민들은 연희동으로 돌아오는 노대통령 내외에게 꽃다발을 한아름 안겨주는 것과 집안팎·골목 등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으로 환영행사를 대신하기로 했다. 김씨는 『주민들과 함께 조촐한 환영잔치라도 벌일 계획이었는데 대통령측에서 간소하게 해달라고 요구,떠나실때와 돌아오실때 번번이 대접할 기회를 놓쳤다』며 아쉬워하면서도 『앞으로는 적어도 한달에 한번쯤은 얼굴을 보게 돼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 김일성 권력이양 마무리 단계/사로청 서한 등서 징후 관측

    ◎새달 방중아들에 「수반」예우 요청/김정일,통일문제마저 장악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초읽기」에 들어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김일성은 22일 사로청폐막식에 보낸 서한을 통해 『김정일을 중심으로 일심단결,당의 영도를 충성으로 받들어 나갈 것』을 촉구했다.김일성은 또 김정일두리로 뭉치는 것은 『혁명의 요구이며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사회주의 위업의 고수·완성과 통일위업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이같은 김일성의 언급은 정권기관의 채널을 통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한 것이란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간의 권력세습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는 시사가 나온 것은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북한에서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상한 시점은 그가 비서국의 조직및 선전선동담당 비서로 선출된 73년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그뒤 김정일은 74년2월 당중앙위 제5기8차 전원회의서 당중앙위 정치위원선출을 통해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실하게 굳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김정일은 전설속의 인물인양 대중 앞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김정일이 공개석상에 정체를 드러낸건 80년10월 제6차당대회서 정치국상무위원,비서국 비서,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였다. 관측통들은 북한이 지난 16일 김정일 51회생일행사의 초점을 그를 중심으로 한 일심단결에 맞춘 것도 「권력세습의 시간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특히 북한이 김정일의 생일을 전후해 그동안 김일성의 전유물처럼 인식돼왔던 통일문제도 김정일이 주도하고 있다고 밝히고 나선 것은 그의 권력승계가 완료됐음을 분명히 밝히는 대목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정일의 권력세습과 관련,과연 김일성이 갖고 있는 당총비서·당군사위원회위원장·국가주석의 지위중 어느 것부터 넘겨 받을 것인가도 관심사다.최근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일본경제)신문은 이와 관련지어 세가지 경우를 제시,관심을 끈 바 있다.이 신문은 그 가운데 김정일이 주석자리를 물려받지 않고 실질적으로 권력을 이양받아 행사하는 시나리오에 70%의 가능성을 부여했다. 북한전문가들은 김정일이 현재 95%정도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보고 있다.이같은 정황으로 미뤄 김정일이 주석취임등 정상적인 자리교체를 통하지 않고 현재의 위치에서 권력을 이양받아 실질적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볼수 있다. 특히 이같은 관측은 3월초 방중을 앞둔 김정일에 대해 『정부수반에 준하는』선으로 예우해줄 것을 중국정부에 요청한 북한측의 움직임에 의해 그 실현 가능성이 더욱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중국정부의 한 관리는 22일 북한측이 김정일비서가 아직 공식적으로는 권력을 승계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정부수반에 준하는 의전행사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해왔다고 밝혔다. 김일성부자의 권력세습작업이 20여년에 걸쳐 추진돼왔음에 비춰볼 때 지금 그 「시점」이 갖는 의미는 대단한게 못된다.오히려 관심은 김정일의 권력세습이 과연 성공할 것이냐에 모아지고 있다.김정일이 김일성에 비해 카리스마적 영도력이 크게 뒤져 권력유지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최근들어 심각한 경제난 등으로 북한주민들의 반발이 극에 달해 있는데다 김정일에 대한 군부및 당정 엘리트 집단들의 반발 역시 만만찮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북한문제 전문가인 나타샤 바자노프박사의 분석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즉 『많은 북한관리들이 개인숭배를 시대착오적인 구태로 간주,사회적 변혁을 원하고 있는데다 또다시 김정일이 신격화되는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 소신 굽히지 않는 “대쪽판사”/이회창 감사원장 내정자의 면모

    ◎재판 10여건서 소수의견 낸 “강직파”/선관위장때 불법선거에 사임 결단 『비공식적으로 감사원장직 요청은 받았지만 앞으로 국회동의 임명절차가 남아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소감이나 감사원운영계획등에 대해 밝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삼차기대통령에 의해 새정부의 감사원장으로 내정된 이회창대법관이 22일 대법원 청사 3층 사무실로 찾은 기자들에게 밝힌 첫마디이다. 그는 그러나 『김영삼차기대통령과는 면식이 없던 사이』라면서 『최근 새정부에 동참해 달라는 의사타진을 받고 고심끝에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당수의 공무원들은 다 청렴한 것 아닌가요』라며 자신의 성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겸손해하며 『감사원장직에 내정된 이유는 잘 알지 못하며 그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 같다』며 소감피력조차 극구 사양했다. 투철한 사명감과 대쪽같은 성품으로 법조계에 정평이 나있는 그의 첫마디 역시 「그 다운」일성이었다. 81년 법관출신으로는 최연소 대법관으로 임명돼 86년까지 대법원 판사를 지내면서 대법원전원합의체 판결 46건 가운데 16건의 주심을 맡아온 그는 이중 10여건에서 「소수의견」을 통해 판결과 관련된 소신을 피력,법이론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현 김덕주대법원장과 함께 진작부터 대법원장감으로 지목돼 주로 소장 법관들의 지지도가 높은 이감사원장 내정자는 대법관시절 이같은 대쪽소신이 「걸림돌」이 돼 대법관 재임명에서 탈락되기도 했다. 그는 이어 88년에 중앙선거관리위원장직을 맡았으나 재임1년3개월때인 89년10월 동해시및 서울 영등포을구 국회의원 재선거과정에서 불법선거운동을 규제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임했다. 53년 경기고를 졸업,서울법대에 진학한뒤 4학년때인 56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그는 58년 공군 법무감실 법무관을 거쳐 60년 인천지법 판사로 발령돼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뒤 73년까지 주로 서울에서 민·형사·고법판사등을 지냈고 73년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77년 서울고법판사를 거쳐 서울남부지원장,서울민사지법 수석부장판사를 역임했다. 이어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을 거쳐 대법관이 된 그는 80년 5월 비상계엄령하에서 김대중씨집에서 불법집회를 가진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세경변호사에 대한 고등군법회의에서 『81년 계엄령이 해제된 시기에서 박변호사에 대한 군법회의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소수의견을 냈었다. 당시 이일령·이정우·오성환대법관과 함께 낸 이 소수의견은 당시 시국상황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88년 다시 대법관에 임명된 그는 92년 3월 국가보안법 제7조 고무찬양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상명씨 사건선고에서 이재성·배만운대법관과 함께 『고무찬양죄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적행위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라며 반대소수의견을 내기도 했다. 판결이외에 그가 고법판사로 있을 당시 모재벌이 연루된 사건에서 사건을 재벌쪽의 패소로 판결을 내린 그에게 재벌측이 보내온 양복티켓을 변호사를 통해 반납토록 한 일화도 법조계에서 잔잔한 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차기대통령으로서는 차기 정부에서 명실상부한 감사원의 기능을 위해 그의 이같은 성품과 해박한 법이론이크게 평가됐으리란 분석이다. 이감사원장 내정자의 부친은 대검검사를 지낸 이홍규변호사(87)이며 부인 한인옥씨의 부친 한성수씨 역시 대법관을 지냈고 사위 최명석씨(31)도 현재 서산지청검사여서 전형적인 법조인가족이기도 하다. 가끔 갖는 법조인들과의 술자리에서 한번 「발동」이 걸리면 두주불사한다는 것이 주위의 말.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 “엔 폭발” 배후에 G7 입김/일 엔화 사상최고 급등 안팎

    ◎미 대일적자 조정·수출촉진책도 원인 일본의 엔(원)화가치가 사상최고치를 경신하며 급등하고 있다.엔화는 22일 도쿄외환시장에서 1백16.85엔까지 올라 지난73년 변동환율제가 도입된이후 최고가격을 기록했다. 『엔화는 뉴욕시장에서의 급등장세를 이어받아 이날 크게 올랐다.엔화가 크게 오르기 시작한 것은 약 2주전.지난해 9월 한때 급등했던 엔화는 올해들어 1백24엔전후에서 큰 변동없이 거래가 이루어졌다.그러나 지난 9일쯤 런던에서 27일부터 열리는 선진7개국(G7)재무장관및 중앙은행총재회의에서 일본의 무역흑자를 줄이기위해 엔고가 유도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며 오르기 시작했다. 엔화의 급등은 지난19일 벤슨 미재무장관이 『미국의 수출촉진을 위해 엔고를 희망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더욱 촉진되었다.미·일무역불균형시정을 위해 엔고을 기대하고 있다는 벤슨장관의 발언직후 뉴욕시장에서 엔화는 최고가격을 경신했다. 전문가들은 엔고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거대한 무역흑자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일본의 92년 무역흑자는 1천3백26억달러로 사상최고를 기록했으며 올해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일본의 무역흑자 때문에 미국·유럽등은 엔고를 선호하고 있다. 『일본의 무역흑자와 함께 미국경제에 대한 불안도 엔고의 원인이 되고 있다.많은 전문가들은 클린턴정권의 세금증가및 세출삭감의 새 경제정책이 미국경제를 냉각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이번 엔고의 특징은 달러에 대해서는 강세를 보이고 있으나 마르크등 유럽통화에 대해서는 비교적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다시 말해 전면적인 달러의 약세라기 보다는 「엔만의 상승」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엔고라는 분석이다. 엔고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이며 1달러당 1백15엔대까지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경제평론가도 많다.지난 85년의 「플라자합의」와 같은 정책적 엔고유도는 없더라도 런던에서 열리는 이번 G7회담에서 엔고유도가 확정될 경우 엔고는 더욱 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정부는 급격한 엔고는 수출업계의 수익악화를 가져와 경기회복에 나쁜 영향을 가져올 것으로 우려하고있다.일본중앙은행과 대장성은 투기현상이 나타나거나 지나치게 엔이 오를 경우 시장개입을 시사하고 있다.
  • 황 총리내정자의 정치역정/군·관·정·재계 두루 섭렵… 경력 화려

    ◎조용한 성품·대인관리 능력 탁월 김영삼문민정부의 초대 재상으로 내정된 황인성민자당정책위의장.한달전부터 서울 시내호텔에 방을 얻어두고 원서를 구입,틈틈히 경제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내 경제통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이런 행적을 놓고 오래전 언질이 있었던게 아니냐하는 추측도 있다. 이것은 그가 가진 장점중 하나인데,매사를 철저히 준비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어떤 자리든 구애받지않고 최선을 다한다.지난 68년 소장으로 예편한뒤 70년 경제무임소장관 보좌관으로 관계와 인연을 맺을 때의 일이 그 좋은 예이다.당시 무임소장관인 이병옥씨는 군에서 황총리내정자의 부하였으나 그는 내색도 않고 이장관을 보좌했다.그의 무서운 일면이기도 하다.그뒤 그는 73년 당시 김종필국무총리 비서실장,전북지사,교통부·농림수산부장관,국회교체위원장등 요직을 두루 거친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와 듣는 사람이 오히려 답답할 정도인 차분한 언변으로도 정평이 나있다.황총리내정자보좌관은 『무슨 일을 해놓고서도 앞에 나서지 않는다.내세우길 싫어하는 성격때문에 정치인으로서 손해볼 때가 많았다』고 설명했다.그의 이러한 성격,조용한 가운데 빈틈없이 업무를 추진하는 스타일을 김차기대통령이 높이 샀으며,군·관·정·재계를 두루 거치며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같은 기본적 바탕때문이라는게 그를 잘아는 사람들의 일관된 평이다. 그는 스스로 『정치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대선기간 동안 정책위의장인데도 당사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이것 저것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지역구 득표활동에만 전념한 것이다.대선이 끝난뒤에는 김차기대통령에게 『집권기간 동안 역사적 업적을 지역감정 해소에 두라』는 직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3선의원인데도 불구,그만큼 정치적 계산에는 거의 문외한에 가깝다. 그러나 탁월한 대인관리 능력을 갖고있다.「사람만나는 것이 취미」라고 말할 정도로 항상 만나고 얘기를 듣는다.최근 아무도 모르게 야당정책위의장을 초청,오찬을 함께 했고 현 국무위원들과도 수시 접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문민정부의 취약지라 할 수 있는 군과의 지면도 넓다. 그가 갖고있는 73년 10월부터 무려 5년3개월간의 전북지사 재직도 아직까지 깨지지않은 「최장수 도백」 기록이다.이때 그가 추진한 전주∼군산간 산업화도로는 지금도 「인성도로」라는 별칭이 붙을만큼 전북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이리 역전 폭발사고의 원만한 수습으로 78년 전격 교통부장관에 발탁됐고 12·12 사태후 장관직에서 물러나 국제관광공사 사장으로 재임하다 6공정권이 출범하자 11·12대 의원,국회교체위원장,농림수산부장관을 지냈다.소장출신에 재선의원,그리고 두번째 장관을 지냈다고 하여 「투투투」라는 애칭을 갖기도 했다. 88년4월 그는 제2 민항인 아시아나항공사장으로 재계에 발을 디딘다.이때 그는 창설 3년이 채 안된 상태에서 국내선과 한·일노선에 이어 동남아취항까지 이루는 추진력을 과시했다. 경력으로 보면 아주 순탄한 행로를 밟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그렇지않다는 것이 부인 이애섭여사(63)의 설명이다.『사이 사이 실업자생활을 많이 했어요.그럴때면 배낭을 메고 산사를 찾거나 그렇지않으면 도시락을 들고 출가한 아이들 집으로 출근을 했지요.저녁 6시쯤이면 돌아오고…』 올해 67세인 그는 담배는 입에 대지않으며,술도 소주 한잔 정도.가끔 새벽 골프를 즐긴다.구한말 전북 덕유산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한 황대연의병장이 친조부이지만 결코 자랑하지 않아 아는 이가 드물다. 그는 한강맨션에서 26년째 살고있다.
  • 최정호씨 대우자동차판매(새사장)

    ◎“판매장 재정비… 올매출 56% 늘리겠다” 종업원 지주회사로 출범한 대우자동차판매의 첫 사령탑을 맡은 최정호사장(53)은 취임 후 2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합작선인 미 GM사와 결별해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다 그룹의 3만여 임직원들이 출자한 1천억원으로 회사를 설립했기 때문에 책임이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니다. 『전 종업원들이 바로 회사의 주인이기 때문에 회사의 이익은 결국 모두 종업원들의 몫으로 돌아갑니다.애사심 역시 남다르기 때문에 노사간에도 큰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멀지 않아 아주 단단한 회사가 될 것입니다』 최근 자동차의 내수가 주춤해져 판매경쟁이 더욱 치열해짐에도 올 매출액을 지난해보다 56%나 많은 2조4천억원으로 정했다.그만큼 의욕에 넘쳐 있는 셈이다.수출시장 역시 지난해 3천여대를 판매한 구소련의 우즈베크지역을 비롯,판매 잠재력이 큰 동유럽과 중국 등으로 점차 넓힐 계획이다. 『전국의 직영 영업소 2백여곳과 대리점 6백여곳의 전열을 재정비했습니다.뛰어난 품질과 애프터 서비스에 힘을 쏟으면 올해 목표인 35만대 판매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메이커인 대우자동차에서 10년간 일한 경력이 판매에도 자신감을 갖게 하는 듯하다.합리적이고 조직적인 팀워크를 중시하는 성격을 지녀,GM과의 결별로 다소 흐뜨러진 조직력을 다시 다지며 생산 및 판매망을 매끄럽게 연결할 적임자라는 평이다. 『고객만족을 최우선 경영목표로 삼아 2∼3년안에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회사로 만들겠습니다.96년에는 기업을 공개해 명실공히 국민기업으로 태어나도록 하겠습니다. 65년 서울대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산업은행에서 8년 동안 근무했다.71년 독일 괴테 인스티튜트를 수료했고 78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연수했다.73년 대우실업 상무로 입사해 대우자동차 전무(78년) 대우캐리어 대표이사(87년) 대우인력개발원장(90년)을 지냈다.소설가 최인호씨의 친형이다.부인 명화자씨(50)와의 사이에 1남2녀가 있다.
  • 미 NBC,조작보도로 치명타/“GM트럭에 결함” 폭발장면 뉴스로

    ◎테이트라인 반영 사과방송… 신뢰 추락 미국 3대 방송의 하나인 NBC방송이 미국 최대자동차회사 제너럴 모터스(GM)가 만든 픽업트럭의 기름탱크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가 사실이 아님을 뒤늦게 확인,GM과 시청자들에게 사과방송을 하는등 커다란 낭패를 당하고 있다. NBC방송은 지난해 11월 데이트라인시간에 GM이 지난 73년 처음시판한 픽업트럭의 기름탱크에 결함이 있어 60㎞미만의 속도로 달리다 충돌해도 기름탱크가 폭발할 위험이 있다고 보도하면서 한 연구소를 동원하여 이 픽업 트럭이 불타는 모습까지 방영,GM의 공신력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었다. GM은 그동안 관계전문가들을 동원해 자체조사를 해본 결과,NBC보도가 사실이 아님을 확인,지난 8일 NBC방송을 명예훼손으로 법원에 고소했다. NBC방송은 이 지경에 이르자 다음날 황급히 사과방송을 내보내고 GM의 어떤 요구도 수용할 것임을 약속하여 GM으로 하여금 고소를 취하하도록 해 일단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NBC방송은 이 일로 시청자들 사이에서 공신력이 떨어지고 GM측에베풀어야할 손해배상등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문제의 보도는 GM 픽업 트럭이 60㎞미만의 속도에서 부딪쳐도 폭발한다는 내용으로 GM 픽업 트럭의 기름탱크 폭발장면을 조작해 실감나게 방영함으로써 시청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었다.
  • 최일선서 대민봉사… 6명에 「참일꾼상」

    ◎전직각료 친목모임 「육중회」서 상패·상금 수여 전직 각료들의 친목모임인 육중회(회장 강영훈전총리)는 근무여건이 열악한 벽지등 최일선에서 성실하게 대민봉사를 해온 등대장·교사등 6명의 공무원을 제3회 「참일꾼상」수상자도 선정표창했다.군산 말도등대장 김영길씨(56)등 6명의 참일꾼상수상자에게는 상패와 50만원씩의 상금이 수여됐다.영예의 수상자들은 다음과 같다. ◎환경정화부문 최정일씨/고지대 쓰레기 매일 마대로 수거 동작구청 청소과에 근무하는 최정일씨는 1973년 10월6일 환경미화원으로 임용된뒤 고지대·가로청소 등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오면서 동료간 협동과 인화단결에 앞장서오고 있는 모범공무원이다.특히 최근에는 수거에 가장 큰 어려움이 있는 사당동 고지대의 쓰레기 3.8t일을 매일 마음대로 수거하면서 주민들의 불편과 민원을 일체 발생시키지 않고 있으며 차량출입이 안되는 지역임을 감안하여 본인이 손수 소형리어카를 제작하여 매일 1∼2회씩 관할지역을 순회하고 있다. ◎사도부문 이훈교씨/과학교육 발전에 선도적 역할 서울 매봉국민학교에 근무하는 이훈교씨는 40여년간 초등교육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온 모범교사이다.73년부터 80년까지 서부과학 주임회 회장직 재임시에는 과학회보 발간,자연과 탐구학습 노트모형 개발,과학주임 연수회 실시,모범적인 과학실 설치모형 개발·보급등 과학교육 발전을 위한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박봉에도 불구하고 장학회를 설립하여 불우한 우수 어린이 연 1백20여명에게 장학금을 마련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등 사도 실천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횃불부문 김영길씨/27년동안 무인도에서 등대 밝혀 군산지방해운항만청에 근무하는 김영 길씨는 66년 1월 등대직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만 27년동안 오로지 격렬비도·말도·옹도 등 근무여건이 열악한 무인도에서 선박의 안전항해를 위하여 차질없이 등대를 관리함으로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해상교통안전에 이바지한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을 지닌 공무원이다. 80년 7월 격렬비도 인근에 간첩선이 나타나자 즉시 인근 해양경찰서 군부대 등에 신속히 비상여락을 취하여 간첩선을 격침시키도록 했다. ◎친절봉사부문 연동언씨/동사무소 민원인에 늘 친절봉사 성동구 중곡제1동에 근무하는 지방행정주사보 연동언씨(38·여)는 지난 1973년 공무원에 임용된 이후 주로 구청의 시민봉사실과 동사무소등 일선 민원실에 근무하면서 민원인들에게 항상 친절하게 봉사함으로써 주민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연씨는 매일아침 민원인들이 쾌적한 분위기 속에서 일을 볼 수 있도록 민원실의 필기대·의자·화분 등 집기정리와 청소등 깨끗이 하고 업무의 내용이나 절차를 잘 모르는 민원인에게는 소파에 안내하여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민중의 지팡이 윤덕종씨/양로원 위문 등 사회봉사에 앞장 제주경찰서 경무과에 근무하는 윤덕종경장은 1980년 5월15일 경찰에 투신한 미래 주민과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경찰상을 확립하기 위하여 장애자복지시설·양로원 등에 수시로 위문하고 있다.특히 지난해 9월에는 화재사고로 입원하여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을 못하고 있던 한동현(당10세·제주시 삼양1동)어린이에게 수술비 일부를 지원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윤경장은 민생치안확립을 위한 경찰수사력 강화를 위하여 무선통신망체제를 완비함으로써 제주지역을 난청없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우편봉사부문 손일식씨/우편용 문패 9백개 직접 달아 부산우체국에 근무하는 손일식씨는 62년부터 체신부에 발을 들여놓은 뒤 31년간 집배원으로 근무하면서 우편물을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히 배달했다. 1986년도에는 고지대 다세대 밀집지역의 문패없는 집에 우편물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배달하기 위하여 플라스틱문패 9백여개를 달아주는 등 집배환경 개선에 솔선 기여하였으며 69명의 동료집배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수많은 경조사에 적극 참여하고 직장내에 친목회를 조직하는 등 돈독한 동료애의 함양과 화목한 직장분위기 조성에 기여했다.
  • 미주신대륙 발견/“덴마크가 20년 앞섰다”

    ◎사학자,15세기 벽화·지도 근거로 주장 「아메리카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최초의 유럽인은 스페인탐험대의 콜럼버스가 아니라 덴마크 사람이다」. 지난해의 콜럼버스 신대륙발견 5백주년 기념 축제와 이에 대한 논란으로 아메리카대륙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고있는 요즘 덴마크에서는 그동안의 정설을 완전히 뒤엎는 주장이 나와 화제가 되고있다. 덴마크의 역사학자인 에릭 키에르가르는 최근 한 문헌학자의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콜럼버스보다 20년가량 앞서 덴마크인·포르투갈인·독일인등으로 구성된 탐험대가 신대륙에 첫발을 내딛는 과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발표했다. 근착 덴마크 리뷰지가 소개한 그 내용을 보면 15세기의 포르투갈은 신세계개척의 라이벌인 스페인과는 경쟁관계였지만 덴마크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덴마크의 세력권이었던 북극개척을 통해 동방항로를 열어보려는 야심을 품고있었다.포르투갈의 아폰소왕은 이같은 야심을 실현하고자 크리스티엔 덴마크왕에게 해양탐험을 권유하고 이를 돕기위해 신하인 요아 바스 코르테 레알을파견했다. 이에따라 크리스티엔왕은 한스 포토르스트와 독일출신의 디트리크 피닝이라는 두 제독에게 탐험임무를 맡겼다.이들은 코르테 레알과 함께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그린란드 동안을 향해 탐험선을 몰아갔다.그러나 그린란드해적인 에스키모인들의 공격을 받았다.난리를 치르는 사이 배는 거센 해풍에 밀려 엉뚱한 곳에 닿았으며 이들은 이곳에서 일정기간 머무른뒤 덴마크로 귀항했다.이때 탐험선이 도달한 곳은 캐나다 동북부의 래브라도이며 그 시기는 1472년이나 1473년이다. 키에르가르의 신대륙발견사는 이렇게 요약되며 그 뼈대는 문헌학자이자 코펜하겐대학 사서과장이었던 소푸스 라르센이 지난 24년 제21차 국제미국학회에 제출한 연구서에서 따왔다.이 연구서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코르테 레알은 1474년 탐험항해에 대한 보상으로 아폰소왕으로부터 한 섬의 총독지위를 수여받았으며 덴마크의 두 제독은 1480년대 초반 영국해적 소탕전에 나가 전사했다. 키에르가르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16세기의 포르투갈 지도와 당시 건립된 코펜하겐 북부 헬싱고르의 교회벽화를 새로운 역사적 사실로 제시했다. 1534년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한 지도에는 래브라도라는 지명 근처에 탐험에 나섰던 요아 바스의 이름을 딴 마을이 두곳이나 표기돼있다.그리고 탐험을 주도한 크리스티엔왕 재위시에 건립된 덴마크의 한 교회벽화에는 탐험가 포토르스트의 모습이 그의 이름과 함께 기록으로 남아있다. 덴마크 역사학자들은 키에르가르의 주장이 제기된뒤 이의 뒷받침자료가 부실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당시의 탐험이 비밀리에 행해질 수밖에 없었던 점을 들어 사실쪽으로 굳혀가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쩌면 아메리카 발견사에 관한 새로운 발견은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 행조실/기능·권한 갈수록 중시/창설 20돌 계기로 본 발자취

    ◎남북회담보좌 등 굵직한 업무 수행/출범때 직원 32명서 이젠 1백54명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이 1일로 창설 20주년을 맞았다. 행조실은 정책입안 및 집행기관은 아니지만 각 부처에 대한 지휘·조정·감독업무를 담당,각부처의 기능을 통합하는 임무를 맡아오며 그동안 서울올림픽 준비지원총괄·14대 대선관리등 굵직한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국무총리를 보좌해 왔다. 행조실이 수행한 대표적 업무는 남북고위급회담보좌·새질서새생활실천국민운동지원·정부주요정책평가·대통령지시 및 공약사항관리·한글타자기 표준자판확정등이 꼽힌다. 행정조정실장은 차관급이지만 이같은 행조실의 기능과 위상으로 인해 재임기간중 국정전반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게되고 국정실무에 대한 영향력·재량등을 발휘할수 있다. 과거 행조실장을 거친 인사들중 장관으로 승진하거나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진출했던 전례가 많았던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행조실은 지난 73년 2월1일 김종필 국무총리 재임 당시 행정전문성확보 및 정책의 일관성유지등을 위해 총리 비서실에서 분리독립,발족된이래 윤성태현실장을 포함,모두 10명의 실장을 배출하면서 기능과 권한이 계속 확대 강화돼왔다. 출범당시 5개행정조정관실을 합해 32명이던 직원규모가 지금은 소속직원 1백22명과 파견인원32명등 총1백54명의 방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행조실은 현재 외교안보 및 일반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제1행정조정관,경제담당의 제2,지방 및 사회복지담당의 제3,사정담당의 제4 및 교육문화담당의 제5조정관을 두고있다. 행조실은 행정의 전문화에 따른 부처할거주의 경향과 교통·환경등 새로운 행정수요의 증대,최근 남북관계의 진전에 발맞춘 남북고위회담지원등 날로 기능이 증대돼왔다. 창설당시 행조실의 직무는 내각에 대한 지휘·조정·감독외에 서울시 조례의 제정·예산·기채승인등 지방의회기능을 대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서실 및 기획조정실과 함께 총리보좌관인 3실체제의 하나로 운영되었으며 이런 상태는 5공출범초기인 81년말까지 큰 변화없이 그대로 지속됐다. 5공출범이후 범정부적인 대규모 정부조직 개편단행으로 같은해에 기획조정실과 제5조정담당관이 폐지됐다. 이와함께 기획조정실의 기능중 청소년대책·대통령지시사항관리·국민정신교육·정책자문위원회운영등의 업무가 행조실로 이관,흡수됨으로써 총리보좌기관은 비서실·행조실 양실체제로 운영하게됐다. 그후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준비를 위한 범정부적 지원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지난 83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및 서울올림픽대회 지원업무가 명시적으로 행조실 기능에 추가되었다가 88년 체육부로 이관됐다. 또 국민정신교육업무가 당시 문교부로 이관되고 사회정화위원회의 창설로 제4행정조정관이 폐지되는등 5공출범이후 88년까지는 행조실의 기능조정 및 지휘·감독기능이 점차 내실화되어가는 과정이었다. 89년 사회정화위원회가 폐지되면서 내각 사정업무가 추가됐고 민주이념의 교육홍보에 관한 지원업무를 신설하게 됨으로써 행조실은 다시 5개행정조정관체제로 복원됐다. 역대 행조실장은 초대 박승복씨(71·샘표식품회장)에 이어 이명춘씨(70·10대의원) 최창락(62·전경련부회장) 서석준(아웅산에서 순국) 이선기(64·코리아 테크노벤처회장) 손수익(60·국토개발연구위원) 이규성(54·금융통화운영위원) 안치순(작고) 심대평씨(52·청와대 행정수석비서관)등이다. 윤현실장은 지난해 4월 보사부차관에서 부임해왔다.
  • “에너지시장 규제완화를”/국제에너지기구/유가자율화 가속화 권고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7일 발표한 「한국의 에너지정책」이라는 보고서에서 정부의 강력한 통제 및 에너지 관련산업의 정부소유를 통한 저가정책은 정부의 목표인 에너지안보와 절약,환경보호등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선진국의 경험에서처럼 한국도 에너지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IEA는 지난 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선진 24개국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소비국의 처지에서 산유국의 모임인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대항하기 위해 74년에 설립한 기구로 비회원국의 관한 보고서를 낸 것은 처음이다. 보고서는 ▲석유부문의 경우 유가자율화를 가속화하고 석유산업 부문의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정유사들로 하여금 고도설비에 대한 투자를 촉진해야 하며 ▲전력부문에서는 수요관리 프로그램을 적극 개발하는 한편 민간기업의 발전소 건설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 첫 장편소설「서울에는 바다가 없다」출간 중견시인 정호승씨(인터뷰)

    ◎“10·26사건의 역사적 의미 소설로 재구성” 중견시인 정호승씨(43)가 3권짜리 첫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를 내놓았다.지난 82년 중앙일간지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면서부터 언젠가는 소설을 발표하리라 예상되었던 터라 시가 아닌 「10·26사건」을 다룬 그의 첫 소설에 주위의 관심이 쏠려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1년반동안 이 소설에만 매달려 있었어요.「10·26사건」의 구체적인 사실들은 다 드러나있는 상태여서 이 소설속에서 새롭게 밝혀지는 것은 없습니다.이보다는 「어버이를 죽인 패륜아」라는식으로 평가돼온 김재규라는 한 개인을 다른 각도에서 그려냈습니다.그의 인간적인 면들을 부각시킨 것이지요』 「논픽션의 픽션화」로 자신의 첫 장편소설을 소개한 그는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 이 역사적 사실을 소설적인 방법으로 재현시키고자 했다.그는 최근들어 박정희 전대통령을 그리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는 것을 우려한다.『이 사건의 역사적 의의가 5공세력에 의해 폄하돼 국민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유신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당시 암울했던 사회현실을 정확히 전달하고 싶습니다.이를 과거속에 묻어버린 기성세대에게는 그 시절의 뼈아픈 기억들을 되돌이켜보게하겠다는 의도도 담았구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는 김재규와 함께 아내와 이혼하려는 사진기자 김현국의 이야기를 양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김재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하는 것도 작가의 욕심이다.그는 「10·26사건」을 다른 방법으로도 조만간 천착해볼 계획을 갖고 있다. 조선천주교회사를 소설로 쓰고 싶다는 그는 이제 막 시작한만큼 앞으로 한동안은 소설만 쓸 생각이다.지난 73년 시단에 나와 20년동안 줄곧 시만 써왔다.이 작품의 제목도 지난 82년 출간된 자신의 시집 「서울의 예수」에 수록돼있는 시에서 따왔다고 살짝 일러준다.
  • 서양화가 도문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13)

    ◎신선한 감각으로 원색의 미 묘사/변화에의 열정으로 새 조형방법창출 온힘/「정적질서」 보다 동적 유동세계 표출 돋보여/부친 도상봉화백 그늘벗어나 독자적 예술세계 추구 그림속의 꽃들은 모든 꽃이 활짝 피어 꽃바다를 이룬다.캔바스의 한정된 공간이 아닌 드넓은 벌판에 얼마든지 펼쳐진 채 꽃들은 꽃이 파리 바람에 흩날리듯 꽃향기 퍼뜨릴 듯 꽃마다 싱싱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화가 도문희의 회화세계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유랑의 필치로 원근법과 사실적기법을 적절하게 원용하면서 큐비즘과 포비즘의 요소를 포함시킨 새로운 조형방법에 능란하게 반응하고 있다」는게 원로미술평론가 이경성씨의 말이다. 「언제나 신선한 속도감과 힘을 머금고 있는 그의 화면은 정적인 질서의 세계가 아닌 동적인 유동의 세계를 절제와 생략으로 탐구하면서 격동속에서 미의 원형을 찾아내고 있다고. 도문희씨는 과연 몸속으로부터의 열망과 열정이 끓어 넘치는 힘의 화가다. 그의 작품에서는 물론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잠시도 한군데 오래 머물지 않는다.서울에 있는가하면 뉴욕에 샌프란시스코에 콜로라도나 산타모니카 라구나 비치에서 또는 괌도나 하와이의 빅아일랜드에서 화사하고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곳이 어디든지간에 그가 머물고 있는 곳에는 음악이 있고 음악의 흐름에 따른 경쾌하고 격렬한 사색적인 붓놀림이 그치지 않는다.자신의 예술의지와 방법을 위해 그는 자극적인 체험을 얻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한줄기 빛이 물체에 닿는 순간,그 빛은 물체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라고 말한 르노아르의 방법처럼 도문희는 꽃이면 꽃이라는 대상을 공간이동시키 듯이 생명감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화면속에 옮겨놓고 있다.그래서 그의 꽃은 어느때는 무복을 입고 회전동작을 하는 발레리너처럼 생기발랄한 율동적터치로 음악에서의 비오렌토와 알레그리시모의 리듬감을 팔팔하게 되살리기도 한다. ○생명감 화면에 담아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일상생활에서의 그는 될수록 그림과 연관시킨 일들 속에 참여하고 있다.그래서 공식적이거나 형식적인 행사자리보다연극이나 영화 한편 아르튀르 랭보의 「갈증의 희극」을 읽는 것이 그림에 대한 감동을 유발시켜준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없는 도문희란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다.클래식뮤직에서 디스코나 록뮤직,흘러간 닐다이아몬드나 젤리리에 이르기까지 그는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신들린 감흥에 물들여지기를 원한다. 아니면 그는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그랜드캐니언의 장엄한 황혼,달빛아래 사슴과 노루들이 뛰어노는 멕시코국경,크라이드강변의 성곽과 끝없이 불어오는 북풍 속에서 어디선가 「히드크리프!」를 부르는 캐서린의 목소리… 경탄과 감탄의 탄성이 절로 질러지는 눈부신 풍광을 찾아 또하나 새로운 여행계획을 세워야 한다. 초기에는 동양화에서의 삼원법과 같은 느낌으로 색채와 형태를 극대화시키면서 인물이나 꽃의 표현에서 몰골법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극도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를 승화시켜 감각화된 화면효과를 과시해 보이고 있다. 이런 심적충만을 위해 그는 시간과 정열을 아낌없이 투자해 왔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캔버스와의 오랜 대결끝에 빛이 공간속에 흐르듯 몸속에 정제돼 있던 예술에너지를 이끌어 조형언어를 구축해 나갔다. 도문희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최상의 환경에서 자랐다.나혜석의 불우하고 외로웠던 말년의 생애를 뺀다면 그의 화려함과 정열과 적극적이고도 진취적인 창조의식은 초기의 나혜석을 연상시키는 구석을 많이 지니고 있다. ○초기의 나혜석 연상 그의 부친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서 선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바로 도상봉화백이다. 부친의 권유로 그림을 시작했으나 화가로서의 열망·야망이 꿈틀거리는 순간 그는 그림으로 향하는 두껍고 높은 벽을 스스로 힘차게 꿰뚫었다.물론 한사람의 여성으로서의 행복이 아닌 화가로서의 대성을 목표로 정하자 시련과 고통을 감수하는데 그는 주저가 없었던 것같다.고통없는 성취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상봉화백의 그늘은 예상외로 넓고 컸다.동경미술학교 출신인 부친은 국전창설멤버에다 대한미협위원장 한국미협이사장 예총회장 문총최고위원 예술문화윤리위원 위원장 등등 화단의 중책을 두루거친 거봉으로 도문희는 언제나 「도상봉씨의 딸」로 불리워야했다.그는 부친의 이 후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화격도 특성도 다른 작품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 역시 쉽지 않았다. 혜화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발레리너를 꿈꾸면서 송범무용연구소에 넘나들다가 엄격한 부친의 반대에 부딪쳐 경기여고 때 그림을 시작했다.대학에 들어가기전에는 부친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김인승씨에게 그림을 사사,「화가지망」을 굳게 결심하고 정확한 데생,탄탄한 기본실력을 닦아 나갔다. 그때는 동아음악궁전이며 종로의 쎄시봉·르네상스음악실에서 하루종일 살다시피 했고 클래식판 수집광에다 블라맹크와 칸딘스키 루오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본래부터 화려하고 솔직한 성격이어서 그는 무슨일에든 쉽게 좌절하거나 좌절해도 실망하지않았다.결과가 안좋을땐 「좋은 경험」으로 돌릴만큼 낙천적인 편이다. 그에게 그림그리기를 권유한 부친은 막상 그에게 붓한번 바로잡아준적이 없었다.오히려 대학재학중 국전에 출품하기위해 열심히 그려논 그림위에다 가위표를 해논적이 있을 뿐이다.도문희는 국전에 출품하고 싶었다.자신의 작가적 재능과 자질을 인정받을수 있는 미술관문이었으나 부친이 심사위원·운영위원·고문등으로 연루되어있어 작품을 자유롭게 낼수없는것이 불편했다.3학년과 4학년때 부친몰래 가명으로 출품해서 연2회 입선했을때도 주변에서 「부친의 후광」으로 아는 것이 억울해서 아예 국전출품은 포기하고 말았다. 부친에게 영향을 받았다면 어릴때부터 아틀리에가 있는 분위기에서 아버니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는 것뿐.오히려 동경여자미술학교 출신인 어머니 나상윤씨가 『나는 아버지때문에 그림을 포기했지만 너만이라도 나대신 열심히 하라』는 배려의 힘이 더 컸다고 할수있다. ○예술적 분이기서 성장 대학졸업후 대한미협과 이대출신그룹의 녹미회를 중심으로 그룹활동을 펼치면서 환상과 기억속의 사물들을 거칠고 대담한 야수파적인 축제분위기로 이끌어 화단의 주목을 한데 모았다. 그러나 기왕에 주어진 화가로서의 과정을 답습하는 형식에서 벗어난다는 차원에서 69년 첫번째 개인전을 연후 그는 미련없이 모든것을 떨쳐버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영국과 독일을 거쳐 스코틀랜드에 정착하여 그는 북구의 바다와 하늘의 변화표현에 현혹된 시기를 보냈다. 남청·담청·군청·감청·선록 보라와 옥색에 이르기까지 서로다른 수백가지 청색으로 출렁이는 바다와 천사의 날개 같은 구름의 흐름에 홀려 그는 마치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연상케하는 청색조 시기를 이곳에서 거쳤다. 「시간따라 바람따라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단 한장면도 같은 색조,같은 표정을 보인적이 없었다」는 것과 「줄이엣의 푸른얼굴,로미오의 푸른눈매」머리카락과 머리에 장식한 액세사리까지도 굵고 짙은 푸른 선묘로 보여준것이 그시기의 작품들이다. 터질듯한 원색이 분방하게 펼쳐진 그 아름다움이 독특하여 독일의 벰버그 스코틀랜드 그린옥등 지방신문들은 「푸른 잎에 매달린 빗망울처럼 투명한 기쁨이 깃든 경관등으로 크게 취급한바 있다. 그의 부친이 딸의 그림을 칭찬한것은 77년 조선화랑 초대전때다. 그때 전시오프닝에 왔던 여러 화가 평론가들이 도문희 그림의 「축제분위기」를 호평하자 단지 한마디 『마치 이 세상이 천국임을 아는것같다』고 했었다.같은해 도상봉씨는 타계했고 도문희로서는 그때 그 말이 부친에게 들은 유일한 「촌평」이 된셈이다.서울에서는 지난 30년동안 끊임없는 우정의 교분을 갖고있던 선화랑의 김창실씨(화랑협이사장)와 진화랑의 유진씨의 초대전에 응하고 있다. 누구보다 도문희의 신선한 감각과 번뜩이는 젊음의 화면을 아끼는 김창실씨는 도문희의 「장미를 곧잘 「살아있는 보석」에 비유하고 「하탄과 하화가없는 그러나 화치의 극치」의 작가라고 말한다.화단의 대선배인 천경자씨는 「그의 식을줄 모르는 정열」도 정열이지만 무엇보다 「화가의 얼굴을 하고있는 화가」라는데 호감을 갖기도한다. 그는 여전히 무엇에 구애되지도 소속되지도 않는다.자신이 한일을 후회하지않는다.서울에 오면 이제는 다자란 딸과 아들과 친구처럼 어울려다닌다. 그는 화려한 치장을 즐기고 여러층의 사람들과 다양한 교분을 트고있지만 의외로 보수적이어서 안하는것 가리는것 투성이다.자유분망과는 상관없이 「맥주 한모금」등에는 남의 눈치를 보는 면이 있다. 뉴욕에서는 소호를 중심으로 일릭 드라곤루드 그레고리비치 조각가 스티븐 래등과 작품활동을 펼치고 그중 일릭 드라곤은 오는 5월 조선화랑 초대전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그는 지금 비로소 「화가의 길」을 걷게해준 부친께 감사하고 있다. 언제나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어보이는 그에게 누군가 『무엇이 그리 행복하냐』고 물었을때 그는 오히려 『슬픔과 아픔은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축복받은듯 활짝 핀 그의 꽃들은 아마도 남이 모를 아픔과 시련을 딛고 피어난 것이기에 보는이에게 보는것만으로도 진한 감동의 빛을 전달해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이 빛의 힘은 조금도 퇴색하는 기색없이 더욱 영롱하고 선명하게 그가 좋아하는 음악과 바람의 흐름에 실려 그의 화면속에서 기쁨의 빛으로 용해되고 있는것 같다. □연보 ▲193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출생.서양화가 도상봉씨(77년 타계)와나상윤여사(87)의 1남 2녀중 막내 ▲57년 경기녀고졸업 ▲59·60년 국전입선 ▲61년 이화녀대 미대 서양화과졸업(김인승·이준·유경채·심형구사사) ▲80년 뉴욕 그래픽 버딘스 아카데미 ▲69∼72년 유럽체류(영국·옥일·스코틀랜드) 그린옥 아트갤러리·스코틀랜드 글래스코우 아트랠러리·렌프레쉬어 아트갤러리 등 개인전시 ▲73년 서울개인전(미술회관) ▲74년 아시아 련대작가전(일본 도쿄) ▲76년 세계여류미술전(인도네시아) ▲77년 서울 조선호텔 갤러리 초대개인전 ▲79년 진화랑초대 제4회 서울개인전 ▲80∼81년 미국체류(뉴욕맨해턴·버지니아 우드빌리지) 80년 비스비(Bisbe)전참가 ▲81∼8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벰버그(Bemberg)풀다(Fulda)빌트프릭켄(Wildfricken)개인전 ▲87년 서울선화랑 초대「장미」개인전 ▲89년 〃 진화랑 초대 개인전 ▲91년 〃선화랑 초대 개인전 ▲91년 〃정화랑〃 〃 ▲92년 MBC후원 부산호텔 미술관·아천미술관초대전 ▲93년1월 LA 앤드루 셔(Andrew Shire)갤러리 초대전 ▲한국미협·녹미회 회원 ▲작업실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국립현대미술관 간 한국서양화대관(작품수록)
  • 해본 행정실장 황영건씨(봉사하는 삶:1)

    ◎소외된 빈민 치료사업 앞장 20여년/환자 무료치료 행정뒷받침 자원/그들 가슴아픈사연 상담역 함께/“고귀한 인명살리는 일은 당연”… 사회의 관심 절실 세상 인심이 각박한듯 싶지만 우리 주위엔 조건없이 남을 돕는 사랑의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자신이 가진 시간과 돈과 정성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는 그들의 삶은 이 사회의 따뜻한 등불이 되고 있다.조용히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삶을 소개하는 「봉사하는 삶」을 시작한다. 밤이면 달빛이 가장 먼저 찾아든다는 서울 봉천5동 산동네 새세대어린이집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화기애애한 만남의 장이 열린다. 카톨릭의대 카톨릭학생회 진료팀과 가난한 환자들이 만나는 이곳에는 아픈 사람들이 모인곳같지 않게 웃음과 희망이 가득찬다.바로 이곳에서 자원봉사하는 해군본부 인사참모부 행정실장 황영건씨(54) 때문이다.일명 「빈민가의 대부」로서 20여년간 빈민치료를 돕고있는 황씨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환자들의 마음을 가벼운 대화와 농담으로 쉽게 풀어준다.기자가 탐방한 날에도 그는치료중 아픈체하는 할머니에게 『지난주에 온 손자도 안하는 엄살을 피운다』고 말해 진료받으러 온 사람들의 팍팍한 가슴에 웃음꽃을 피워올렸다. 『육신의 치료 못지않게 마음의 치료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무엇보다 환자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을 나가는게 저로서는 가장 기쁜 일입니다』 이같은 마음가짐으로 환자들과 같은 입장이 돼서 일일이 그들의 가슴아픈 사연을 들어주는 상담역까지 황씨는 마다하지 않는다.환자들을 접수하고 진료카드를 관리하는 일도 맡아보고 있는 그에게선 군공무원의 딱딱한 인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황씨가 매주 토요일 퇴근후 하는 일은 무료 빈민치료사업을 행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일로서 구체적으로 빈민치료를 위한 장소와 관의 허가 확보,그리고 환자와 의사가 만나게 주선하는일 등이다.이밖에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병원을 소개해주고 때에 따라 치료비를 마련하는데 힘을 써주기도 한다.20여년간 그의 따뜻한 손길을 거쳐간 사람은 신생아부터 아흔 넘은 할머니·할아버지까지 수천명에 이른다. 『고귀한생명을 살리는 일은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 선행의 대상이라고 할수는 없지요.실제로 생명을 살리는일은 의사선생님들이 하시고 저는 심부름만 할뿐인데…』 그는 자신을 내세우기 싫어하지만 빈민치료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그가 우리나라 초기 빈민치료사업을 정착시키는데 큰역할을 한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황씨가 소외된 이웃에 대한 20여년간의 사랑실천의 길로 접어든 것은 73년 서울 신월동 철거민단지에서였다.당시 천막생활을 하며 아파도 돈이 없어 치료를 못받는 빈민들을 보다 못한 그는 독실한 카톨릭신자로서 한강성심병원과 진료팀을 조직해서 구제에 나섰다.이와함께 새마을학교를 설립해서 가난한 아이들과 넝마주이를 대상으로 중학과정을 가르치기도 했다.이어 고려병원및 카톨릭의대팀과 함께 신림동·영등포역전·안양천변·봉천동 등으로 옮겨 다니며 빈민뿐만 아니라 알코올중독자 마약중독자 윤락여성에게까지 사랑의 인술을 펼쳤다.무리해서 코피를 쏟을때도 여러번 있었다. 『그동안 가장 안타까웠던 때는 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가 보호자가 없어 수술 받지 못하고 죽어 가거나 고통을 당하는것을 지켜 볼 때였습니다』 그는 『빈민들도 세상이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기있게 살아가도록 각계의 조그만 도움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 자동차공업협 새 회장/김태구 대우사장 선임

    한국자동차공업협회는 18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93년도 정기총회를 열고 임기만료된 전성원회장 후임에 김태구 대우자동차사장(사진)을 선임했다. 제3대회장에 선임된 김회장(53)은 산업은행 조사부 출신으로 지난 73년 대우에 영입돼 그간 그룹 기획조정실장,대우조선 사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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